청소년 영화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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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영화 글 / 김그저 고아라 님의 다음 웹툰 ‘청소년 영화’를 원작으로 한 소설입니다. 무단 복제/배포/상업적 이용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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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또 학교에 가야 한다. 교복은 준비해 놓았니? 멀찌감치 들려오는 어머니의 말씀에 옷장을 열었다. 퀴퀴한 냄새와 함께 2년을 함께한 교복은 언제나 그래왔듯 옷걸이에 단정하게 걸려 있었다. 벌써 교복을 바꾸어 입을 계절이다. 이 지긋지긋한 교복은 언제까지 입어야 하는 걸까. 이른 아침의 등 굣길은 언제쯤 걷지 않아도 되는 걸까. 언제긴. 길어봐야 앞으로 일 년이야.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창문을 열었다. 우연하게도 너는 나의 집 앞을 걸어 가고 있었다.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창틀에 기대어 너를 지켜보았다. 어쩌면 너도 한번쯤 이 곳을 올려다보았을까. 네가 점점 멀어져 시야에서 사 라지고 나서야, 나는 입을 열 수 있었다. “넌 언제쯤 다시 웃을 거야?” 당연하게도 너는 듣지 못했다. 멀어지는 네 뒷모습까지 닿지 못한 나의 말 언저리는 허공을 맴돌다 찬찬히 흩어졌다. 대답 대신 서늘해진 바람이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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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은 창문을 스치고 들어왔다. 나는 창문을 닫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 었다.

한 여자 아이의 죽음과, 내 10대 시절의 마지막 1년과, 오해와, 다툼과, 바보 같은 나의 이야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이불 속에서, 나는 이 어리석은 이야기의 시 작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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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전부 너 때문이야.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그 날 날씨는 꽤 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한참이나 같은 곳에 서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우리를 지나치고, 또 몇 번이나 신호등이 제 빛깔을 바꾸고 나서야 나는 힘겹게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느릿하게 말을 마치고 나서야 나는 가까스로 그녀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 었다.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녀를 수년간 알고 지낸 나였지만, 그녀의 그 표정은 내게 있어 처음 마주하는 것이었다. “싫어.”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않은 채, 냉담하게 그렇게 대꾸했다. 오늘 날씨가 춥다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차가운 어투였다. ‘네 도움 받고 싶지 않아.’ 그녀는 그렇게 덧붙이고는 다시 입을 닫았다. “주원아. 말 좀 해봐. 왜 그러는 건데?” 무언가가 속을 꽉 막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그녀를 어르고 달래도, 그 녀의 입술은 꾹 닫힌 채 바르르 떨리기만 할 뿐 도무지 열릴 생각을 하지 않 았다. “주원아.”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조금이라도 그녀가 내게 의지했으면 해서, 내가 그녀를 도울 수 있었으면 해서,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그녀가 알려주었으면 해서. 그리고 그녀는 간단하게 그녀의 팔을 붙잡은 내 손을 떼어냈다. “주원…” - 3 -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이 얘긴 그만하자.” 그녀가 몸을 돌려 돌아섰다. 그리고 반대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나갔 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그녀가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붙잡아야 한다고, 그렇게 느꼈다. 지금 이렇게 그녀를 떠나보내면,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주원아!” 나는 멀어져가는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붙잡아야 한다. 붙잡아야 한 다. 그 생각만으로 인파를 헤치고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녀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뒤돌았다. “따라오지 마.” 수많은 사람의 소리에 그녀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싫어. 따라오지 마. 발목이 무언 가에 걸린 듯 더는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나를 보고는 다시 뒤 돌아 걸었다. 나는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내가 그녀의 이름 을 부르는 것도, 달려가 그녀를 붙잡는 것도, 그 어느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멍하게 그 자리에 덩그러니 홀로 남았다. 그녀는 내 시야에서 사 라질 때까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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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에 아무렇게나 놓인 커피 믹스는 너무나도 손쉽게 뜯어졌다. 연성 은 종이컵에 믹스를 담고, 뜨거운 물을 섞어 빈 커피 믹스 봉지로 인스턴트 커피를 휘휘 저었다. 그렇게 쉽게 가버리는구나. 아무 말도 없이, 원래 없었 던 것처럼. 종이컵을 휘젓던 연성의 손이 허공에 우뚝 멈추었다. 주원이 죽었 다는 것은커녕, 연성은 자신이 서 있는 이곳이 장례식장의 정수기 앞이라는 것조차 실감하지 못했다. “연성 학생, 안 피곤해?” 주원의 어머니가 정수기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연성을 불렀다. 연성은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듯 아, 하고 짧은소리를 내고는 주원의 어머니에게 꾸 벅 눈인사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시계는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괜찮아요.” 연성은 짧게 대답하고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주원의 어머니 역시 발갛게 부어오른 눈꼬리를 힘겹게 휘어 웃었다. “늦은 시간까지 이러지 않아도 괜찮은데. 영화는 어디 있니?” “밖에서 바람 쐬고 있어요,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그래, 그렇구나. 주원의 어머니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연성을 보았다. 연성은 그 시선을 받아내지 못하고 아래로 흘려보냈다. 한순 간의 적막이 흘렀다. “발인까지는 시간이 좀 있으니까, 둘이 좀 쉬고 오렴. 아줌마 마음이 안 좋아서 그래. 어디 가서 눈이라도 잠깐 붙이고 와.” 괜찮아요. 연성은 그렇게 말하려고 힘겹게 다시 주원의 어머니와 눈을 마주 했다. 그 순간, 무언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욕설이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지 는 술을 마시던 주원의 아버지였다. “미친년 같으니라고! 뭐 잘한 게 있다고 죽어 죽기는?!” - 5 -


연성은 차가운 시선으로 주원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더는 괜찮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연성은 주원의 어머니께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식장을 뒤로했다. 식장의 바로 앞 계단에는 영화가 앉아있었다. 얼굴 부분이 밝은 걸 보니 휴대전화기로 웹 서핑이라도 하는 거겠지. 장소가 식장에서 바 깥으로 바뀌었다는 것만으로, 눈앞에 영화가 있다는 것만으로 탁 숨이 트였 다. 그러고 보니 영화는 뒷덜미에 손을 넣는 것을 싫어했던가. 연성은 다 식 어버린 커피 두 잔을 하나는 손에, 하나는 입에 물고 남은 손으로 영화의 뒷 덜미에 손을 집어넣었다. “야, 주영화.” 장난스럽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빼먹지 않 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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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 따라오지 마. 분명 인파 속에 묻혀 제대로 듣지 못한 말인데도 주원 의 목소리는 여전히 내 귓가에 생생했다. 어째서 그녀는 내게 그런 말을 했 을까. 나는 영원히 듣지 못할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휴대전화를 켰다. 쓱쓱. 감정 없이 인터넷 기사를 넘겼다. 여고생이 자살했다는 기사는 하나도 올라 와 있지 않았다. 이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 그러게 왜 죽었냐. 바보. 멍 청이. 지금도 내 뒤에서 들리는 통곡 소리가 들리냐. 욕을 내뱉는 사람도 있 다. 봐라. 다 너 때문이다. 뒷덜미에 무언가 서늘한 것이 쑥 들어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으악, 차가워!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 6 -


나서야 이런 짓을 할 만한 녀석은 연성이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 었다. 나는 홱 연성을 노려보았다. “내가 목덜미 만지지 말랬지! 아오, 씨. 소름 돋아.” 연성은 그렇게까지 내가 큰 소리를 낼 줄은 몰랐다는 듯 어정쩡한 표정으 로 입에 커피를 물고 다른 손에 든 커피를 내게 건넸다. 다 식어 미적지근한 커피였다. “뭐 그런 거로 화를 내?” “싫다고, 싫으니까 하지 말라고!” “알았어, 알았어,” 늘 그래 왔듯 우리의 투닥거림은 연성의 사과로 끝났다. 나는 녀석이 옆자 리에 앉으며 건네준 미적지근한 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렸다. 인스턴트 특유의 달달하고 씁쓸한 맛이 입에 끈적하게 눌어붙었다. 연성이 녀석은 뭘 하려나. 연성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너, 울었냐?” “아니” 후루룩. 꾸깃꾸깃. 툭. 연성이 녀석이 내게 구겨진 종이컵을 던졌다. 내 대 답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아니면 단순한 장난인지 지금은 잘 구별이 되 지 않는다. “쓰레기를 버리면 되냐 안되냐?” 연성은 계단에 버려진 구겨진 종이컵을 주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야, 우리 잠깐 나가야겠다. 주원이 어머니가 좀 쉬고 오래. 이것저것 신경 쓰이시나 봐. 주원이 아버지도…. 폭발 직전이시고.” 나는 가만 이야기를 듣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래 앉아있어 몰랐는데 - 7 -


일어나니 엉덩이가 시렸다. “그럼, 우리 집에서 좀 쉬고 갈래?” “그럴까.” 연성이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시간은 새벽 4시. 차는 끊긴 것 같은데, 택시 타고 갈까. 가만히 시계를 내려다보는 내 어깨를 연성이가 툭툭 쳤다. “자전거 갖고 왔어. 같이 타고 가자. 그나저나, 네 자전거는 어쨌냐? 요즘 잘 안 타더라?” “귀찮아. 춥기도 하고.” “그래.” “출발한다.” “응.” 끼익. 페달이 힘겨운 소리를 내며 자전거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 저 보이는 것은 페달을 밟는 연성이의 등.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서 제법 매 서운 바람이 귓가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이상하네.” 연성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이렇게 달리니까, 모두 없었던 일처럼 느껴진다.” 연성이가 더욱 페달을 밟았다. 나보다 더한 바람을 받아내고 있을 그였다. 나는 조금이라도 바람을 더 피하려 몸을 숙였다. “무슨 말 하는 거야?” 하하. 연성이가 가볍게 웃었다. 이 정도 사귀었으면 알 수 있다. 저건 억지 웃음이다. “지금 주원이네 가볼까? 같이 놀자고?” 이 녀석 역시 주원이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는구나. 나와 같이. 이런 장난 - 8 -


엔 어울려주는 게 상책이다. “이 시간에 부르는 건 실례야.” 하하. 또 연성이가 가볍게 웃었다. 뚝. 연성이가 웃음을 멈추고는 목소리를 낮춰 내게 말했다. “영화야.” “응.” “뭐라고 했어?” “응?” “그 날.” 철렁. 순간 마음이 가라앉았다. 식은땀이 흐르면서 저도 모르게 연성이의 옷깃을 꽉 쥐었다. “주원이가 죽기 전 밤에, 무슨 얘기 했어?” 연성이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내게 물어왔다. 이번에는 장난이 아니 다. 대답해야 한다. 싫어, 따라오지 마. 주원이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내 머 릿속을 울렸다. 나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 도와주겠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 그런데도…. 죽은 거야?” 잠깐의 적막. 그리고 연성이는 울기 시작했다. 으흑흑. 소리를 내서 울기 시 작했다. 늦은 새벽이었기에, 보는 사람은 없었다. 흐윽. 흐으윽. 장례식장에서 터지지 못한 울음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새벽에 자전거를 타면서 통곡 이라니. 이런 일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보고 있냐. 전부 너 때문이다. 너 희 어머니의 눈이 발갛게 부은 것도, 아버지가 술에 취해 욕설을 내뱉는 것 도, 그리고 연성이가 눈물을 훔치다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차를 발견하지 못 한 것도. - 9 -


다 너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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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구멍 난 기억.

연성이는 눈물로 흐려진 시야를 팔로 쓱 닦아가면서도 계속 페달을 밟았다. 늦은 새벽에 이 작은 도로를 지나는 차는 없을 거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러니 그렇게 자전거를 타며 흐느낄 수 있었겠지. 나는 있는 힘껏 연성이의 옷깃을 당기며 그를 불러세웠다. 연성아, 야! 앞을 봐! 연성아! 눈부시게 헤 드라이트를 켠 자동차가 귀가 찢어지도록 경적을 울리며 내 목소리를 골목 저편으로 날려버렸다. 끼익,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 그리고, 쾅. 세상 이 빙글빙글 돌았다. 자동차가 날려버린 것은 비단 내 목소리뿐만이 아닌 모 양이었다. 나도, 연성이도, 연성이의 자전거도 나와 함께 날아가 허공을 빙글 빙글 돌았을 것이다. 나는 있는 힘껏 눈을 감았다. 허공에 붕 뜬 몸은 한참이 나 내려오지 않았다. 두둑, 툭, 털썩. 박살 난 자전거 파편과 함께 찬찬히 몸 이 땅에 떨어지고 나서야, 싸한 고통이 몰려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할 정도로 지독한 고통이었다. 이상하게도, 이 상황에 나는 아프다는 생각보다 독하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흔히들 말하는 주마등이라는 것일까. 주원이의 그 쌀쌀맞 은 뒷모습이 눈앞에 보였다.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인데도, 그녀는 끝까지 뒤 를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주원아. 이렇게나 아픈데 용케 죽을 생각을 했네. 꼭 이렇게 해야 했어? 죽어야만 해결될 일이었어? ……나는 살고 싶어…. 웃기지? 네가 그렇게 버리고 싶어 한 세상이, 내겐 간 절한 세상이라는 게. “미안해.” 차마 전하지 못했던 말들이 목울대를 통해 나오지 못하고 속에 응어리져 있다가, 미안해, 라는 한 마디로 주르륵 터져 나왔다. 다른 말은 할 수 없었 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차가운 네 뒷모습을 추억하며 사죄하는 - 11 -


것뿐이었다. 장례식장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그제야 흘러나왔다. 미안 해, 미안해. 네가 그렇게 버리고 했던 세상인데도, 우습게도 나는... “살고 싶어.” 스윽. 뒷덜미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들어왔다. 으아악! 꾹 감았던 눈이 번 쩍 띄었다. 이 소름 끼치는 감각.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연성이 뿐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연성의 멱살을 확 잡아당겼다. “야! 내가 목덜미 만지지 말랬지!” “살고 싶다기에 살려 줬더니, 뭐냐.” 연성이는 못 말린다는 듯 나를 보고는 혀를 찼다. 아아, 평소와 똑같은 레 퍼토리다. 이렇게 서로 토닥대며 싸우다, 연성이가 또 먼저 사과함으로써 이 사건은 끝나겠지. 그래, 꿈이었구나.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리가 없잖아. 나는 슬픈 꿈을 꾼 거야. 나는 얼른 소매로 축축한 눈가를 쓱 훔쳤다. “…. 나 엄청나게 슬픈 꿈 꿨어. 너랑 자전거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난 거 야. 아주 큰 사고. 그런데…” “영화야.” 꿈이 아니야. 연성이는 그렇게 말했다. 응? 나는 연성이가 한 말의 의도를 한동안 파악할 수 없었다. 꿈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청한 표정을 하며 연성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우리 진짜 사고가 났었어.” 연성이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내 다리를 가리켰다. 내 다리는 무언가 에 붕대로 칭칭 두껍게 감겨 높게 들려 있었다. 눈물을 훔쳤던 소매도 내가 입던 옷이 아닌 환자복이었다. 어라? 나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병원이 다. 그것도, 6인실. “으악! 이게 뭐야!” - 12 -


나는 꽥 소리를 질렀다. 다리가 칭칭 감겨 있었기에 몸을 벌떡 일으킬 순 없었다. 연성이가 옆에서 피식 웃으며 장난투로 대꾸했다. “감사해라, 내가 베스트 드라이버였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음 죽었어.” 그러고 보니 왜 저 녀석은 멀쩡하지? 나는 녀석의 멱살을 다시 확 틀어쥐 었다. “이 자식! 넌 왜 멀쩡해?!” “옷 늘어나! 왜 이래? 나도 다쳤어.” 연성이는 억울하단 표정으로 내게 흔들리다가 조심스럽게 제 소매를 팔뚝 까지 걷어 올렸다. 연성이의 팔뚝에는 가벼운 찰과상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연성이는 호들갑스럽게 제 팔에 얼굴을 비비며 과장된 행동을 취했다. “흑흑. 내 소중한 피부. 흉지면 어쩌지?” 긴장이 확 풀리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푹, 나는 푹신한 병원 베개 에 몸을 기댔다. 정말로 사고가 났었구나. 나는 이렇게 크게 다쳤는데 저 녀 석은 저렇게나 멀쩡하고. 억울하긴 하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무사해서 다행 이다. “…곧 방학인데 이게 뭐야.” 나는 한숨을 쉬며 그렇게 말했다. 연성이는 자주 놀러 오겠다며 나를 도닥 였다. “…. 정신이 없다. 이게 무슨 난리냐. 에휴, 내 팔자야….” “…. 일단 푹 쉬고, 어서 나을 생각만 해.” 연성이는 그렇게 말하고 병실을 나섰다. 아마 내가 깨어날 때까지 옆을 지 켜준 것 같았다. 자주 놀러 오겠다는 말은 허투루 한 게 아닐 것이다. 나는 한동안 더 병원 신세를 져야겠지. 그렇게 쓸쓸히, 연말이 지나간다. 옆 침대 아주머니께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얻어먹고, 오른발에 깁스를 한 채 퇴원해 - 13 -


거실에서 귤을 까먹으며 보신각 종소리를 들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 요. 올해도 활기차고 즐거운 한 해 되시길 바라며…. 아나운서의 감정 없는 목소리가 종소리와 함께 거실을 울렸다. 19세. 내 마지막 10대. 마지막이라 고 해서 바뀐 것은 없었다. 용케 제 기능을 하는, 약정이 아직 끝나지 않은 액정이 부서진 휴대전화로 친구들과 영혼 없는 새해 인사를 나누고, 주원이 에게도 새해 인사를 보낸다. [넌 친구가 아픈데 병문안도 안 오냐?] [주원아, 새해 복 많이 받아.] 어느새 꺼내놓은 귤을 다 먹었다. 방송이 끝나고 쩔뚝이 며 귤껍질을 치울 때까지, 주원이에게 보낸 메신저엔 숫자 ‘1’이 사라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내가 입원해있을 때부터 퇴원하고 이렇게 새해 인사를 보냈는데도 메신저 한번 보지 않는다니. 용케 나는 이런 것도 친구라 고 두고 있구나. 나는 목발을 짚고 주원이의 집으로 향했다. 딩동, 딩동. 초인 종을 눌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주원아, 하고 불러 보아도 철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철문엔 이런저런 전단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마치 여기엔 이제는 사람이 살지 않습니다, 하고 표시라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전단을 전부 떼어내 버렸다. 어찌 되었든 주원이는 집에 없었다. 달칵, 달칵. 나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외지고 자그마한 도로가 온통 내가 목발을 짚는 소리로 채워졌다. 야옹.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전봇대 뒤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나는 목발을 잠시 내려두고 자세를 낮췄다. 깁스하고 있기에 상당히 어정쩡한 자세였지만, 나는 웃으며 고양이에게 말했다. 이리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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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어디 갔다가 이제 왔어?” 뜬금없게도 우리 집 현관에는 연성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주원이 에게 그랬던 것처럼 새해 인사를 하러 온 걸까. 길이 엇갈린 것일까. 연성이 는 퉁명스런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절뚝거리며 연성이에게 다가 갔다. “뭐냐? 약속도 없이.” “빨리 문 따. 얼어 죽는 줄 알았어.” “에휴. 정작 기다리는 사람은 안 오고.” 나는 녀석을 지나쳐 현관문의 도어락을 열었다. 기다리는 사람이라니, 누구 말하는 거야? 연성이가 뒤에서 물었다. 누구긴 누구야. 저 녀석, 멀쩡한 척하 지만 실은 머리를 심하게 다친 건 아닐까. 내가 기다릴 사람이라고 하면 뻔 하잖아. “주원이. 요즘 연락이 안 된다. 문자 보내도 답이 없고. 너하고는 연락해? 여행 갔나?” 목발을 벽에 세우고, 한쪽만 신은 신발을 벗어 잘 내려놓았다. “깁스 때문에 왼쪽 신만 신는데, 설마 그사이에 더 닳는 건 아니겠지? 설 마 높이가 달라진다거ㄴ…” 꾸욱. 몸이 무언가에 밀려 앞으로 고꾸라졌다. 연성이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어정쩡하게 신발을 보는 나를 발로 쭉 밀어버린 것이다. 꼴사납게 넘어지 기도 했고, 남의 집에 온 주제에 환자인 주인을 건방지게 대한다는 생각에 나는 녀석을 홱 노려보며 야! 하고 소리쳤다. 연성이의 표정은 이상하게도 차 가웠다. - 15 -


“너 자꾸 이런 식으로 하면 화 낼 거야.” 뭘…. 나는 잔뜩 황당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밖에 좀 오래 세워두 었다고 삐친 건가? “알고 그러는 거야, 뭐야? 너 이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알아? 내 입으로 힘든 말 안 하게 할 순 없느냐고!” 꿀렁, 꿀렁. 가슴에서 무언가가 요동쳤다. 이내 그것은 내 목덜미로 빼꼼 고 개를 내밀었다. 야옹. 결국, 나는 그 고양이를 주워왔다. 목발을 짚느라 들어 올릴 손도 마땅치 않았고, 또 춥기도 추웠기에 나는 녀석을 옷 속에 넣었다. 돌연 연성이가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다. “…. 뭐하냐?” “나 고양이 알레르기 있단 말이야. 가까이 오지 마. 거기서 얘기해. 어디서 주워온거야?” “주원이네 다녀오는 길에 있길래.” 연성이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너답다, 와. 자기 앞가림도 못 하면서 고양이는 무슨 고양이야.” 사내 녀석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까칠해? 정말 밖에 오래 세워 두었다고 삐친 건가? 그렇다면 전화라도 한 통 했으면 되었을 텐데. 아니면 고양이를 데려와서? 자기 고양이 알레르기 있단 걸 몰라줘서? “야, 아까부터 왜 이렇게 까칠하게 구냐? 내가 줍고 싶어서 줍겠다는데 그 게 무슨 상관이야.” “주원이.” “주원이.” “따라 하지 말고. 내가 저번에 뭐랬어?” “뭐랬는데.” - 16 -


“내가 뭐랬냐고!” 연성이가 버럭 화를 냈다. 진심으로 화를 낸 것이다. 내게. 입때까지만 해도 나는 무엇이 잘못 된 지 모르고 있었다. “뭐라고 했긴….” 연성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주원이. 주원이는 죽었다고…. “ 있는 고양이를 더욱 꼭 안았다. 고양이의 따듯한 체온이 느껴짐에도 가 슴 한구석이 시렸다. 죽었다. 주원이는 자살했다. 우리가 사고가 났던 날은 주원이의 장례식이었다. 그런데 왜 난 주원이네 집에 간 거지? 왜 주원이를 찾은 거지? 연성이와 나는 한참이나 말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답을 찾지 못한 채 시간만 무심히 흘려보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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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 준비는 잘하고 있지?” “응?” 멍청하게 연성이와의 대화를 생각하던 중 날아온 어머니의 질문에 나는 제 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벌써 개학 준비를 해야 하는구나. 어머니는 설거지하 다 말고 뒤를 돌아 혀를 차며 나를 내려다보셨다. “‘응?’이 뭐야 ‘응?’이. 이제 고3이니까 정신 차려야지. 그래도 학교 에 가기 전에 깁스 풀어서 다행이다. 1년만 참는 거야.”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교복 위에 껴입을 것을 찾아볼 요량으로 열 - 17 -


어본 옷장에는 언제 산지도 모를 옷들이 걸려 있었다. “엄마, 나 나갔다 올게.” “늦은 시간에 어딜 가?” “편의점.” 나는 짧게 대답하고 집을 나섰다. 깁스를 풀었기에 더는 쩔뚝이지 않았다. 편의점은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금방 갈 수 있었다. 간단하게 따듯한 음료와 먹을 거 몇 개를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4,500원입니다.” 지갑을 열었다. 알지도 못하는 만 원짜리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는 개 중 하나를 내고 거스름돈을 챙긴 후 편의점을 나섰다. 왼쪽 신발이 더 닳긴 했지만, 특별히 티가 나진 않았다. 내 기억에 어딘가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기억에 듬성듬성 구멍이 나 있다. 하지만 아마 괜찮을 것이다.

…… 아마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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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김규태 / 전기철

몸은 기억력이 좋다. 대부분의 겨울 방학을 병원 신세를 졌음에도 불구하 고, 말끔해진 발은 익숙한 검은색 삼선 슬리퍼와 꼭 맞았고 자연히 계단을 올랐다. 아직 이른 아침인데도 교실 안에서는 벌써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 다. 첫날이라고 일찍 온 걸까. “안녕, 얘들아.” 나는 문을 열며 그렇게 말했다. 두런거리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잠깐의 적막. 얘들이 왜 이러지? 내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자 그제야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쥬뭅?” 쥬뭅. 이름이 영화라서 꽤 한참 전에 지어진 별명이다. 아이들은 서로를 쳐 다보고는 다시 나를 쳐다보더니, 그제야 봇물 터지듯 말을 쏟아내었다. “쥬뭅!” “쥬뭅! 다리는 이제 괜찮은 거야? 잘 지냈고? 몸은 이제 괜찮지?” “징그럽게 왜 이래.” 나는 녀석들을 뻥 차버리고는 냅다 자리에 앉았다. 3학년 첫날의 교실은 2 학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년의 반 친구들이 그대로 같은 반에 배정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 아이만 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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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교실에는 연성이가 없었다. 혼자 다른 반에 배정된 것이다. 나는 1반, 연성이는 7반으로 각자 복도의 끝과 끝이었다. 아 - 19 -


무래도 꾸준하게 병문안을 와 준 녀석이니만큼 혼자 떨어져 쓸쓸해 할 것이 걱정이 되어 나는 7반의 앞을 기웃거렸다. 저만치 멀리서 친구와 대화하던 녀석이 나를 발견하곤 와서 창문을 열었다. “뭐냐?” 규태라는 녀석이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연성이와 다퉜었지. 나와도 면 식이 있는 녀석이다. “연성이 있냐? 좀 불러줘.” “……뭐?” 녀석의 표정이 싸하게 굳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스타일이다. 나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녀석이 창문 을 쾅 닫았다. “재수 없게 그 새끼를 왜 찾아? 꺼져!” 녀석은 씩씩대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7반 아이들의 시선이 전부 내게로 쏠렸다. 아무래도 이번 시간에 만나기는 그른 것 같군. 점심시간을 노려볼 수 밖에 없겠어.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7반을 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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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아직도 규태랑 화해 안 했어?” 연성이를 만난 것은 급식소 앞 벤치였다. 나는 인스턴트커피를 하나 뽑아 연성이에게 건넸다. 연성이는 뚱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커피를 받아들었다. “응. 안 했어.” 역시나. 규태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게 얼추 맞아 돌아갔다. - 20 -


“얼른 화해해. 걔 아직도 화나 있던 것 같던데.” 연성이가 고개를 홱 돌렸다. “싫어. 내가 왜?” 하여간, 고집은. 나는 인스턴트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 보니 주원이 의 장례식 때에도 이런 커피를 마셨었지.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구나. “둘이 화해 안 한 지 얼마나 됐지?” “글쎄. 한 3~4개월 됐나?” 여자애들도 아니고 남자 놈 둘이 한 번 싸운 거로 4개월이라니. 거기가 또 같은 반이라니. “이야, 심하다. 너 앞으로 일 년 동안 어떻게 보내려고?” 음, 연성이가 인스턴트커피를 가만 내려다보다가 휙 마셔버렸다. 뜨거울 텐 데. 녀석은 빈 종이컵을 구기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 쪽에서 먼저 굽히고 가는 건 싫어. 그리고… 나한 테는 네가 있으니까!” 녀석이 나를 와락 안았다. 하여튼, 못 말리는 녀석이다. 때맞춰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연성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아, 그럼 또 무시당하러 가 보실까.” 내색은 안 했지만, 무시당하고 있구나, 저 녀석. 규태가 그 정도로 영향력이 큰 녀석이었던가. 나는 가만히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녀석이 던진 구 겨진 종이컵이 쓰레기통의 가장자리를 맡고 튕겨 나와 땅바닥을 굴렀다. 하 여간, 저 녀석은 혼자 제대로 하는 게 없다니까. 나는 녀석이 던진 종이컵을 도로 주워 쓰레기통에 넣었다. 어라. 다시 기억에 구멍이 생겼다. …… 그러고 보니 연성이랑 규태가 왜 싸웠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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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얼굴 좀 펴. 기철이가 자꾸 너 쳐다보잖아.” 짝꿍 녀석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나름 표정관리를 한다고 하는 거였는데, 싫어하는 티가 꽤 많이 나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새 담임이 전기철이라 니. 그것도 가장 중요한 3학년에. “왜 그렇게 싫어하는데?” “아 씨… 싫어… 그냥 싫어… 숨만 쉬어도 싫어… 공기 아까워…” 나는 들고 있던 교과서로 입을 가리곤 녀석에게 속삭였다. “주영화.” “네, 네?” 설마, 들은 걸까. 나는 깜짝 놀라 멍청하게 대답했다. 전기철이 나를 한심하 게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따가 수업 끝나고 교무실에 좀 들러라. 그럼, 다들 수업 준비해.” 전기철은 그 말만을 남기고 교실을 나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문을 열 고 고개를 내밀어 보았지만, 그는 매정하게 교무실로 향할 뿐이었다. 일진이 사납구나, 오늘은.

*

아무래도 전기철이 나를 부른 것은 내가 욕하는 것을 들은 것이 아닌 모양 이었다. 전기철은 작업하던 노트북을 덮고는 의자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래, 몸은 좀 괜찮니?” “네, 괜찮습니다.” - 22 -


감정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형식적인 질문. 그렇기에 나 역시 감정을 소모할 필요는 없다. 전기철은 어려서 그런지 회복이 빠르네, 하고 피식 웃더 니 제 손목시계를 살폈다. 시간이라도 재는 것처럼 한참 시계를 쳐다보고 있 던 전기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원이 일은… 정말 안타깝게 생각한다. 마음고생이 있었을 텐데, 잘 견 뎠어. 너도 좀 더 살아보면 알겠지만, 앞으로도 힘든 일은 계속 있을 거야. 몇 번 좌정도 할 테고. 네가 지금 이 상황에서 배울 수 있는 게 뭐 같아?” “……네? 뭐냐니요?” 친구의 자살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이 과연 있는가. 나는 도저히 그 해답을 찾지 못했다. 전기철은 두 손을 깍지끼고는 말했다. “나는, 너희가 한배를 탔다고 생각해. 지금 여기서 한 명이라도 무너지면 다 같이 쓰러지는 거야. 네 친구, 아닌 척하지만 네 눈치 많이 보고 있을 거 야. 그렇지? 그럼 넌 어떻게 해야 할까?” “…….” “이번 기회에, 견디는 연습을 해 봐. 경솔하게 분위기 흐리지 말라는 소리 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개자식. “……네, 알겠습니다.” 위로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지만, 뭐? 분위기 흐리지 마? 열혈교사 납셨다, 아주! 그래, 오냐, 좋은 분위기가 뭔지 보여주마. 나는 씩씩대며 학교를 나와 집으로 향했다. 어느덧 날씨는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날씨가 흐려지니 꽃샘추 위도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 같아, 나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길목에 누군가가 있었다. “…김규태?” - 23 -


“그래.” 녀석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내게 다가왔다. “뭐야? 나 기다린 거야?” 규태는 가만히 나를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 낮에, 뭐냐?” “뭐가?” 연성이 좀 불러줄 수 있냐고 물어본 것을 말하는 걸까? 내 반응을 본 규태 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왜 남의 반에 와서 깽판 치냐고.” “뭐가? 난 연성이 찾은 거 밖에 없는데.” 규태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주먹이 나가지 않은 것이 용했다. “너 일부러 그런 거잖아. 나랑 연성이 사이 안 좋은 거 알고. 나 엿 먹으 라고.” “야, 내가 너한테 물어봤냐? 네가 와서 말 걸어놓고 웬 생트집이야?” “너랑 연성이 주원이랑 각별한 건 알겠는데, 유치한 장난 치지 마라.” “장난? 내가 언제?” “네가 우리 반에 얼쩡대는 자체가 불쾌하다고!” 규태가 주머니에서 손을 빼냈다. 앞서 말했듯 규태는 욱하는 성질에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스타일이다. 거슬리는 말을 했다가는, 틀림없이 저 주먹에 맞 게 되겠지. “아까 주원이 얘기는 왜 나온 거야?” 에라, 모르겠다. “너랑 연성이, 왜 싸웠어?” 그냥, 한 대 맞고 말지 뭐. -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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