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 제4호
제4호
www.laborparty.kr
특집 ■ 부동산 정책 잔혹사
그 많던 집은 누가 다 가졌나 기획 ■ 예술과 밥 이재영을 추모하며 ■ 정책이 살아야 진보정당이 산다
12월의 당원
“몸이 먼저 밀양에 와 있었어요” 반핵부산시민대책위 공동집행위원장 노태민
(사진 : 이인우 부산 남수영구 당원협의회)
노태민 당원이 2012년 해운대구에서 시의원으로 출마하던 당시 선거공 약이 반핵이다. 지금은 핵발전소로부터 이어진 송전탑을 따라 밀양까 지 오게 됐다. “원래 결정이 더딘 편이거든요. 그런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어요, 몸이 먼저 움직였고 이미 밀양에 와 있었어요.” 내년 선거 준 비도 해야 하는데 밀양에서 출마할지도 모르겠다며 농을 던진다. 지난 10월 초부터 송전탑 공사가 강행되면서 노태민 당원은 밀양에서 살다시피 한다. 상황실과 현장을 오가면서 주민들을 지원하는 일을 하 고 있다. 밥벌이로 논술 강의를 나가는 날에만 부산에 들르는데, 늦은 밤 집에 들러 양말과 침낭을 싸서 나설 때는 ‘ 빨치산이 이랬겠구나’ 싶 다. “한 번은 산 위에서 경찰과 몸싸움을 하는데, 뒤에서 할매 한 분이 한전 직원인 줄 알고 제 다리를 붙잡고 당기더라고요. 할매는 기를 쓰고 늘 어지는데 정작 나는 밀리지도, 아프지도 않은 거예요. 서러움이 울컥 올라왔어요. 이렇게 힘없는 사람들이 한전과, 국가와 맞서고 있구나.” 밀양은 매일매일 전쟁이다. 공사는 계속되고 할매들의 투쟁도 계속된 다. 전국에서 연대와 지원의 손길은 꾸준히 이어진다. 현장을 한 번 와 본 사람들은 계속해서 찾아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앞으로의 전망은 단언하기 힘들다. 지난 5월에 전문가협의체가 만들어지고 잠시 공사가 중단된 것처럼, 뭔가 전환점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바심에 매일 속이 바 짝 탄다. 밀양투쟁이 어떻게 될 것인지 묻는 사람들이 많다. "이기려고 싸우는 거죠. 전망하긴 어려워요. 그런데 이기든 지든, 할매 들과 함께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미래에서 온 편지 제4호 발행인 이용길 편집인 장석준 편집팀 김민하 김성현 노정 박권일 이상엽 정철수 조윤호 최백순 홍원표 교 열 김성현 노정 양솔규 정정은 디자인 고미숙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 마포-라00403) 발행일 2013년 11월 26일 주 소 서울 마포구 서교동 371-12 비금빌딩 7층 노동당 전 화 02) 6004-2006, 2007 팩 스 02) 6004-2001 이메일 laborzine@gmail.com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인 쇄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973-15 원일컴 가격 10,000원
미래에서 온 편지
‘ 미래에서 온 편지’ 는 영국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작가, 미술가인 윌리엄 모리스가 1891년에 낸 소설 제목
News 『News from Nowhere』 을 우리말로 의역한 것입니다. from Nowhere
nowhere는 ‘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는 뜻입니다. ‘ 유토피아’ 라는 말의 원래 의미도 ‘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고 하지요. 이제 노동당의 기관지에 ‘ 미래에서 온 편지’ 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한국 사회의 답답한 현재에 햇살을 들이는 미래의 틈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고 보니 nowhere는 now+here(지금 여기)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미래가 되기 위해, 이 편지를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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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4
편지를 띄우며 12월의 기억|<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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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노동당 이가 없으면 이북(e-book)으로
알북(R-book)의 정체, 그것이 알고 싶다|<미래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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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부동산 정책 잔혹사
12
그 많던 집은 누가 다 가졌나|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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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살아요?”“사글세 살아요”|아요
18
‘ 용역’ 의 얼굴을 한 제도의 역습|나경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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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을 바라는 철거민들|김종철
25
대한민국 토지정의를 위하여|성승현
33
노동당 주택 정책, 소유 구조에 주목한다|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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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예술과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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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노조가 있었더라면|조아라
45
인디 음악과 최저임금의 함수 관계|정문식
50
예술인소셜유니온 공동위원장 3인 좌담회 예술인소셜유니온 2년을 돌아보다|장수정
55
예술인복지법, 무엇이 문제인가|나도원
59
이재영을 추모하며 정책이 살아야 진보정당이 산다|장상환
67
노동르포 교사가 가진 유일한 힘은 양심|서분숙
75
노동리포트 강성노조 불안하다고? 울산 동구는 ‘ 날씨 맑음’ |김용화
2013년 12월 제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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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현장에서 잠깐만요, 외부세력이 무릎담요 좀 들고 가실께요~|김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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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단일기 못 배워도 알아들어야 평등이다|화덕헌
89
세계의 진보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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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좌파 이웃 좌파 ⑤ 칠레 좌파의 오디세이|장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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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파 통신 프랑수아 올랑드 정부, 일요일 쉴 권리를 노동할 권리로 바꾸나|서수민
101
기고/노동당에 바란다 새 ‘ 노동당’ 낡은 진보정치를 청산하라|김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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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토론
104
민중의 집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강상구
· 목차
삶과 문화 108
불온한 서재 ‘ 기차의 눈물’ 닦아줄 ‘ 행복한 실패’ 를 위하여|양솔규
112
노래의 꿈 민들레 씨앗은 우리 가슴에|민정연
116
미디어 비평 서울대병원 파업 언론보도,‘ 환자불편’ 만 나부꼈다|조윤호
120
만화 평범한 사람|공기
122
노영수의 DIY 공작소 목재 현판 만들기
124
소리다운 당원들의 유쾌한 청각생활을 지지하는 이달의 음원 다운로딩 가이드
루 리드를 기억해|장석원 126
제주에서 버스학개론 |조성일
128
편지를 접으며 최종범의 꿈|홍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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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띄우며
12월의 기억 가을이 실종됐습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이젠 벌써부터 창문 틈으로 외풍이 새어 들기 시작합니다. 기후변화는 이렇게 성큼성큼 우리의 삶 속으로 치고 들어옵니다.
겨울이 가장 두려운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두 번 생각할 겨를 없이 ‘ 집 없는 사람들’ 이 떠 오릅니다. 길에서 한잠을 자는 노숙자들뿐만 아닙니다. 대한민국에서 ‘ 집’ 은 내 몸 하나 누일 땅 한 뙤기의 의미를 이미 뛰어넘었습니다. 철마다 전세 보증금 때문에 변두리로 밀려나고, “돌아서면 한 달 돌아서면 또 한 달” 월세 내느라 허리가 휘어집니다. 주택 보급률이 100퍼센 트를 넘어섰다는데 도대체 그 많은 집은 누가 다 가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소득이 낮을수록 ‘ 집’ 은 더욱 큰 고통을 낳습니다. 12월호 특집은 대한민국 부동산을 집중 조명합니다.
올해부터 12월은 또 하나의 아픈 기억과 함께 다가옵니다. 오는 12월 12일이면 故 이재영 의장이 짧은 생을 마감한 지 1주년이 됩니다. 이재영 전 의장은 한국 진보정당의 정책 골간을 세웠으며 평생을 진보정당 운동에 헌신했습니다. 그의 삶을 추모하면서 장상환 교수가 오늘 날 우리의 실천과 정책을 돌아보는 추모 칼럼을 보내왔습니다.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홀로 생을 마감한 작가 최고은 씨 또한 우리에게 아픈 기억 중 한 자 락입니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비로소 문화예술인의 ‘ 밥’ 즉 생존권이 사회적 의제로 떠 올랐습니다. 12월호 기획 코너 <예술과 밥>은 노동당 문화예술위원회에서 도맡아 진행하였습 니다. 앞으로도 <미래에서 온 편지> 지면을 통해 노동당 안팎에서 활약하는 여러 부문위원회 의 숨은 저력을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기대 바랍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 독자 여러분도 월동 준비 잘 하시고 건강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심마 니 칼럼>은 내년 2월까지 연재를 쉽니다. 겨울 산에 캘 나물이 없어서랍니다. 가히, 시련의 계 절입니다. 2013년 11월 26일 <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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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모집 오늘 우리의 한 걸음이 길을 엽니다. 미래가 됩니다. 우리는 길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 사람과 자연이 공존 가능한 지구생태계, 차별과 소외 넘어 모두가 평등한 세상, …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밑그림을 그려나가면서 없는 길을 만들고, 스스로 길이 됩니다. 그래서 노동당의 꿈은 곧 <미래에서 온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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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노동당
이가 없으면 이북(e-book)으로
R-book의 정체, 그것이 알고 싶다
알북
지난 10월 초부터 인터넷에 ‘ 사랑과 혁명의 알북(R-book)’ 이라는 정체불 명의 문서가 돌기 시작했다. 노동당 매체 홈페이지 <사랑과 혁명의 정치신문 R>은 알겠는데, <사랑과 혁명의 알북>은 도대체 뭐지? 알북 창간호 <이건희 회장님! 당황하셨어요?>를 펼치면 지난 8~9월 노동당이 진행한 삼성전자서비스 지회 노조 연대투쟁 이야기가 가득하다. 밤새 시내를 돌며 당원들이 직접 매달아놓은 현수막이 찢겨진 현 장, 공무원들로부터 제발 현수막 좀 떼어가라는 전화가 빗발친다는 제보들, 1인 시위 하러 삼성전자서비 스센터에 들어갔다가 쫓겨난 에피소드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노동당 당원들이 보내온 글과 사진뿐만 아 니라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위영일 지회장 인터뷰가 담긴 팟캐스트도 들어있다. 11월에는 <법무부를 위한 단기속성 논술강좌>라는 기발한 타이틀을 달고 알북 3호가 나왔다. 법무부가 발표한 “통합진보당 정당해산 심판청구” 보도자료를 ‘ 뻘건펜’ 들고 첨삭지도한 이른바 ‘ 특별판 알북’이 다. 법무부의 초헌법적 파행에 국민적 비판 여론이 온라인을 뒤흔들던 당시 ‘ 뻘건펜’ 논술강좌는 SNS를 타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11월 말 현재까지 알북은 ‘ 인물편’에 해당되는 <유용현> <김재수> 편까지 도합 네 편이 제작돼 무료로 공개된 상태다. ‘ 노동당 지하신문’을 내걸고 온라인 상에서 활약 중인 ‘ 알북 편집 부’를 만났다. 6
술렁술렁… ‘ 알북이 도대체 뭐야? 누가 만드 는 거야?’ 재창당 후 노동당에서는 기존의 온라인 매체 <사랑과 혁명의 정치신문 R> 뿐만 아니라 종이 기 관지,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연대 사업과 ‘ 빨간날’ 캠페인 등 각종 컨텐츠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각 지역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지역 거점사업도 마찬가지. 더군다나 진즉에 알려졌어야 할 수많은 열혈 활동가들의 삶 또한 제대로 소개된 적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종이 책으로 발간하기엔 돈도 인력 도 없다. 기관지는 온라인 전파력이 너무 더디다. 이 당에서 쏟아져 나오는 컨텐츠들이 아까워도 너 무 아까웠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나갈까? 술 자리에서 한탄만 하던 사람들이 작심하고 뭉쳤다. 노동당 정책위원회 윤현식 의장, 홍보실 박성훈 실 장과 유검우 부장, 그리고 서울시당 황종섭 부장까 지 네 사람이 뭉쳐 ‘ 알북 편집부’를 만들었다. 알 오(R-book Operators)라는 수상쩍은 별칭까지 만 들었다. “원고를 청탁할 때 알북이 뭔지를 설명하기가 참 힘들어요. ‘ 기관지예요?’ 아니 기관지는 아니 고 저희끼리 하는 건데… ‘ 그럼 당에서 하는 거예
각 지역의 거점사업, 수많은 열혈 활동가들의 삶,
요?’ 당에서 하는 건 맞는데 우리끼리 재밌자고 만 드는 건데… ‘ 그래서 당에서 하는 거 아니예요?’ 아니 당에서 하는 건 맞는데… (좌중폭소)”
전당적 캠페인에 이르기까지.
당 공식 사업이 아니다. ‘ 일’이라 여겼으면 아마
노동당이 쏟아내는 컨텐츠들이
만들지 못했을 거라며 네 사람 모두 입 모아 말한
제대로 소개되지 않는다.
다. 자칫 잘못해서(폭소) 대박을 치게 되면 진짜 ‘ 업
아까워도 너무 아까웠다.
무’가 되지 않을까 그게 가장 겁이 난다. 정당법으
그래서 ‘ 알북 편집부’ 가 만들어졌다.
로부터 자유롭지 않은지라 ‘ 무상 배포’가 선거법 위반으로 걸리면 어떡하냐고 물으니, 오히려 내심 기다리고 있단다. 규제 일변도의 한국 선거법 제도 지금+여기 노동당 7
자체를 걸고 넘어지는 기회로 삼겠다는 것이다. “알북의 중대한 기조 중 하나가 ‘ 최대한 거저먹자’ 예요. (웃 음) 최-대한 품을 덜 들이면서 주제 별, 인물 별로 기존 컨텐츠
를 취합하고 엮어내자는 거죠. 그래도 아주 거저먹지는 않아 요. 편집하는 사람이건 글쓰는 사람이건 인터뷰 녹취 푸는 사 람이건, 한 호를 낼 때마다 한 사람 당 꼬박 하루 정도를 알북 에 쏟아 붓습니다. 특히 인터뷰 녹취를 풀 때면 언제나 다시 곱씹어봅니다, ‘ 품을 안 들인다’는 것의 의미를. (폭소) 알북 편 집을 담당한 박성훈 실장은 인디자인 프로그램을 완전히 섭렵 하게 됐죠. 이제 영상부터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못 다루는 프
정책위원회 윤현식 의장
로그램이 없어요.” 우스갯소리로 ‘ 거저먹기’ 고 좀더 품위있게 표현하자면 ‘ 품앗이’ 다. 다들 정책위원회, 홍보실, 서울시 당 소속 당직자들인지라 업무 시간에 알북 실무를 소화하기 어려운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 당직자들만의 작품’ 이 아니라 당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폭넓게 담아내자는 게 핵심이다. 실제로 알북에 담기는 모든 글과 사진은 모두 전국에서 노동당 당원들이 보내준 것들이다. (고백하건대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10월호 [지금+여기 노동당]에 실린 글과 사진은 모두 알북 1호를 위해 RO에서 모은 것들이다. 알북 편집부는 “죽쒀서 기관지 줬다”며 통탄했다.)
표류 중인 모바일-웹 전략 기획안, 그러나 좌절도 잠시 지난 8월, 노동당 정책위원회와 홍보실이 공동작업하여 1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모바일-웹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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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안을 냈다. 당시 그 보고서에 참여한 사람들 중 대부분이 알북 편집부다. 이 대형 프로젝트는 당내의 모든 컨텐츠를 모 바일 기반으로 엮어내기 위한 어플리케이션 개발부터 홈페이 지 개편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구조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 다. 뿐만 아니다. 변화된 온라인 환경 속에서 당이 수행할 온라 인 정치활동 방안을 놀랍도록 기발하게 담아냈다. 하지만 수 천만 원의 예산이 필요한 이 프로젝트는 열악한 당 재정 문제 로 인해 아직 집행이 결정되지 못한 채 표류 중이다. 박성훈 홍 보실장은 알북 또한 이 모바일-웹 전략의 실현을 위한 하나의 실험이라고 말한다.
홍보실 박성훈 실장
“돈 없이 일을 하려다 보니 한계가 많아요. 비록 모바일 앱 개발은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못하고 있지만, 알북 발간은 이에 앞서 시도하는 하나의 ‘ 실험’이예요. 당원 의 삶, 전당적 사업, 정책 의제, 당에서 만들어내는 모든 것이 컨텐츠입니다. 무엇이든 컨텐츠로 다듬어서 축적해야 나중에 제대로 된 토대가 만들어졌을 때 곧장 활용할 수 있으니까요.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시 작하자, 그 중 하나가 알북과 같은 e-book 형태의 컨텐츠 개발이예요.” 문서로만 존재해도 의미가 없다. 2차 가공을 하는 데 또 시간과 품이 많이 들뿐더러 수많은 문서들 사 이에 파묻혀 존재조차 파악이 안되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온라인 상에 거점 공간(플랫폼)이 만들어졌을 때 이 모든 결과물을 집결시키는 것, 특히 대중이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직관적인 그래픽 형식으로 가공해 축적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그래도 물적· 인적 한계로 당장 앱 개발에 들어가지 못하는 아쉬움은 크 다. 유검우 부장의 말이다. “홍보실에 전산적 기반은 이미 다 갖춰져 있어요. 돈과 시간만 있다면 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알북을 iOS(애플사가 개발한 컴퓨터 운영체제) 식의 뉴스가판대 앱 형식 으로 만드는 거예요. 국내에서 뉴스가판대를 활용하는 무료 잡지는 두 개밖에 없어요. 무료가 흔치 않으니 서버가 다운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죠. 노동당에서 팟캐스트부터 이 북, 기관지, 동영상까지 계속해서 컨텐츠를 만들어내고 있는 데 이 모든 것을 다 연계시켜서 잡지를 만들어 무료로 올리면 그 전파력은 정말 ‘ 대박’이죠. 문제는 앱을 직접 만들어야 한 다는 거예요. 한국 시장은 안드로이드 점유율이 훨씬 높은데 안드로이드는 이런 뉴스가판대를 제공하지 않거든요. 결국 독 자적으로 모바일 앱을 개발해야 한다는 건데, 돈 없이 하려다 홍보실 유검우 부장
보니 한계가 많죠.” 지금+여기 노동당 9
현실이 열악하고 한계가 있더라도 지금 현 상황에
언제든지 온라인 상에 거점 공간이
서 할 수 있는 것들부터 치밀하게 기획하고 집행하기
만들어졌을 때 이 모든 결과물을
로 했다. 그리하여 8월 말에 곧장 논의에 들어간 것이 바로 이북(e-book) 제작이다. 추석연휴를 꼬박 투자
집결시키는 것, 특히 대중이 한눈에
하여 10월 1일, 알북 창간호가 나왔다. 그리고 11월 말
볼 수 있도록 그래픽 형식으로 가공
4호까지 연거푸 쏟아냈다. ‘ 작은 조직’ 의 약점을 기
해 축적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동성과 유연함이라는 강점으로 승화시켰다고 자평하 기도 한다. 이른바 ‘ 소수정예’ 의 힘이라는 것이다. 그 말이 다만 자기위안으로만 들리지 않는 까닭은, 이 모든 결과물을 집결시켜 노동당의 풍부한 컨텐츠로 널리 알리겠다는 그들의 목표가 확고한 덕분이다.
사람 귀한 줄 아는 기술자들 알북 편집부가 야심차게 준비 중인 차기작도 인물 편부터 지역 거점공간에 이르기까지 끝이 없다. 그 들이 내어놓는 톡톡 튀는 발상은 다만 ‘ 아이디어’에서 그치지 않는다. 실로 무서운 집행력으로 밀어붙인 다. 이날 기관지 인터뷰를 하다 말고 윤현식 의장이 ‘ 법무부 아동들을 위한 교양자료나 하나 만들어볼까’ 운을 떼더니 일주일 뒤에 진짜로 <법무부를 위한 단기속성 논술강좌> 편이 나왔다. 동시 진행 중이라고 밝힌 다섯 편 중에 <김재수> 편도 11월 중순에 발간됐다. 만화가 김재수 당원이 이제까지 그렸던 모든 웹 툰과 만평, 인터뷰, 그리고 전진섭 작가의 글 ‘ 만화의 힘’까지 알차게 실렸다. 8월 말에 초동 논의를 하고 추석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했으니 벌써 두 달이 넘었다. 지 난 두 달 동안 알북을 만들면서 가장 의미있었던 게 뭐냐고 물었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온다. 황종섭 부장의 말이다. “알북을 만들면서 가장 의미있었던 게 뭐냐고요? 알북이 나왔다는 사실이요. 우리가 맨날 술처먹고 노 는 건 아니었구나, 실제로 알북 편집부가 만나서 술먹은 다음 날이면 ‘ 회의결과’가 올라와요.(좌중폭소) 술먹고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얘기하고 다음날 다 까먹고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우리가 생각한 걸 구현할 수가 있구나. 그런 자신감이 생긴 게 가장 의미있어요.” 참으로 유쾌한 사람들, 그리고 이 시대의 웹-온라인 기술 을 집약시키는 노동당의 유능한 인재들이다. 무엇보다도 사람 귀한 줄 아는 기술자들이다. 노동당 알북 편집부의 재기발랄 한 오늘을 응원한다.
서울시당 황종섭 조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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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당 <알북> 바로 보기 : http://issuu.com/28495
특집
부동산 정책 잔혹사 사람들은 ‘ 내 집’을 사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합니 다. 뼈 빠지게 돈을 벌어도 집값은 너무 비쌉니다. 영세 자영업자들은 높은 월세를 감당해야 하고, 권리금도 없이 쫓겨나기 일쑤입니다. 개발 환상과 토건주의가 만나 용산참사와 같은 끔찍한 일도 일 어납니다. 우리의 삶 속 깊숙이 들어온 토지정의 의 왜곡, 대한민국 부동산을 집중 조명합니다.
특집 / 부동산 정책 잔혹사
그 많던 집은 누가 다 가졌나 주택보급률이 100퍼센트를 넘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열 집 중 네 집은 전셋집을 전전하거나 월세 내느라 허리가 휘어진다. 뉴타운, 재개 발 바람이 불어닥치는 곳마다 풍경이, 그리고 삶이 통째로 철거 당한다.
민선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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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살고 있는 집과 인연을 맺은 지 어느새 4년째다. 11월 계약 만료를 앞두고 얼마 전 집주인한테서 연락이 왔다. ‘ 올 것이 왔구나.’ 2년 전 자동으로 계약연장이 됐는데, 더 살 생각이면 보증금을 좀 올려달 라고 했다. 머릿속으로 셈을 해보았다. 지난 해 사무실이 이사 오면서 걸어 15분 정도면 오갈 수 있고, 4년 전하고 비교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짐을 정리하는 것도 무척 큰일인데다, 전세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 기라는 뉴스를 계속 접하는 상황에서 이사가 더 고되겠다 싶어 보증금을 올리고 살기로 했다. 부모님이라 는 비빌 언덕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독립을 꿈꿨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아주 먼 이야기라는 사실을, 또 는 진정 성취하고 싶다면 포기해야 하는 일이 매우 많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이만한 곳 구하기 어려워!” 처음 집을 구하던 기억을 끄집어내며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트렁크 하나 달랑 들고 부모님 집을 나 온 나에게 선택지는 몇 개 없었다. 고시원이나 누군가의 집에 얹혀 지내는 것. 몸 하나 겨우 누일 고시원 방값이 아까워 친구가 방치한 지하방에서 반 년을 살았다. 곰팡이 냄새가 꽉 찬 지하방은 생활할 곳이 아 니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눅눅한 ‘ 암굴’에 있다 보면 내 몸에서 곰팡이가 피는 듯했다. 비가 오거나 날 이 추워지면 바깥 계단을 올라가야 있는 화장실을 가기가 싫어 되도록 물을 마시지 않고 잤다. 피곤해도 집에 늦게 들어가는 게 더 좋았다. 그때 비슷한 이유로 고시원에서 지내던 친구하고 늦은 저녁 시간을 같 이 때웠는데, 그 친구하고 의기투합해 집을 구해 살아보기로 했다. 각자 일하는 곳의 중간 지역의 부동산을 이른 아침부터 돌았다. 그러나 둘이 합쳐 마련한 보증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집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저렴한 다가구 주택들도 아파트를 짓느라 거의 헐렸기 때문에 다른 지역을 알아보는 게 낫다는 말을 들었다. 좌절을 거듭하던 중 둘이 살기 괜찮은 집 하나가 있다는 소 식을 접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은 이내 실망 으로 바뀌었다. 자신만만하게 보여준 그 집 은 이미 어떤 남자가 살고 있는 어두컴컴한 반지하였다. “방은 따로 쓰니 상관없잖아. 이만한 곳 구하기 어려워!” 어느덧 해가 지 면서 집집마다 하나둘 켜지는 수많은 불빛
부동산에서 자신만만하게 보여준 그 집은 이 미 어떤 남자가 살고 있는 어두컴컴한 반지 하였다. 집집마다 하나둘 켜지는 수많은 불 빛을 보며 든 설움은 쉽게 달래지지 않았다.
을 보며 든 설움은 쉽게 달래지지 않았다. 우연히 들른,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지역에서 첫 집을 구해 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다가구 주택들 이 많이 남아있는 그 지역에서 여전히 반지하를 벗어날 수는 없지만 알아볼 곳이 그래도 꽤 있다는 사실 에 안도했다. 월세 등 생활비 부담이 만만치 않으리란 걱정을 뒤로 하고, 처음 마련한 내 집 그 자체가 벅 차 이사 첫 날 우리의 자축 파티는 늦도록 계속 됐다.
특집 부동산 정책 잔혹사 13
집 없는 그대, 유죄? 주택보급률이 100퍼센트를 넘은 지 이미 오래라고 하지만, 통계는 10가구 중 6가구 정 도만 자가 주택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 여준다. 이 통계에 담기지 않는 4인 정상가족 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나는 사람도 많다. 집이 없는 대다수 사람들의 허덕이는 삶은 각종 정 책에서 배제된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는 광 고 문구는 결국 당신이 살던 곳을 빼앗겠다는 뜻을 품고 있었음이 뉴타운 재개발 바람이 불 어 닥친 곳마다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집과 집,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고 연결 짓는 골목들을 쓸어버리고 거대한 요새마냥 아파 그나마 반지하와 옥탑방이 도시 빈민들이 몸을 누일 만한 유일 한 선택지다.(사진: 정정은)
트가 들어서지만, 경기 침체로 미분양 물량이 급증한다는 뉴스가 끊이질 않고 있다. 아이러니한 상황에서도 집을 소유하지 못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는 광
한 ‘ 죄’ 때문에 감수해야 할 몫이 너무도 많 다. 오래 묵어도 소유 딱지를 붙이지 않았으면
고 문구는 결국 당신이 살던 곳을 빼앗겠다
내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참으로 다양한 상황
는 뜻을 품고 있었음이 뉴타운 재개발 바람
에서 마주한다. 각종 개발계획이 삶의 기반을
이 불어 닥친 곳마다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흔드는 일인데도 세입자라는 이유로 모든 정 보와 결정 과정에서 배제된 채 일방적으로 퇴
거를 통보 받고, 언제 집주인이 집세를 올려달라고 할지 몰라 맘 졸여야 하고, 얼마나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고, 안정적인 삶을 기대하며 받은 대출은 원금은커녕 이자 갚기도 빠듯하다. 직접 적이든 간접적이든 집 때문에 허덕이고 서럽고 슬프던 수많은 경험들은 “집은 사는 것이 아닌 사는 곳”이 란 말을 아득히 멀어지게 한다. 그리고 내 집 마련의 꿈이 더 절박해지는 이유가 된다. 제대로 소유하지 못한 ‘ 죄’도 있다. 주거 환경 개선은 명분일 뿐 재정착의 벽은 두텁기만 하다. 동네마 다 품고 있는 오래된 풍경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쓸어버린다. 획일적으로 진행되는 기존 개발 방식이 아 닌 다른 접근은 불가능할까 고민하며 2008년부터 들락거린 한 마을이 있다. 주택 대부분이 40~50년 됐고 가파르고 좁은 계단이 골목인 그 마을 주민들이 가장 열렬히 꿈꾼 변화는 변상금 문제 해결과 도시가스 인 14
입이었다. 토지의 70퍼센트 가까이 국공유지였는데, 대다 수가 저소득층인 이곳 주민들 은 체납된 변상금에 시달리고 있었다. 재개발 예정 구역으 로 지정된 2004년 전후로 부 동산 딱지를 바라보며 투기꾼 이 몰렸지만, 인근 문화재 때 문에 여러 제한이 걸려 수익 성이 나지 않을 거라고 결론 이 나면서 건설사들은 더 이
뉴타운 재개발 바람이 불어 닥치는 곳마다 ‘ 삶’이 쓸려나갔다. 서울 송월동의 철거된 주택가 (사진 : 정정은)
상 기웃거리지 않았다. 빠듯하게 아껴 쓰며 모은 돈이 난방비로 다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겨울마다 고역이었지만, 바로 인 근까지 들어와 있는 도시가스가 이 마을에는 제공되지 않았다. 기반 시설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자부담률 이 높은 도시가스는 기본적으로 소유자들의 동의가 전제되어야만 들여올 수 있는데, 반쪽자리 소유라는 이유로 치러야 할 비용은 너무 컸다.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이 답답해 차라리 재개발이 되어 떠나고 싶은 맘이 굴뚝같다는 주민들도 있었다. 그러나 보상금을 받아도 변상금을 갚고 나면 남는 돈이 별로 없을 게 뻔하고, 아주 외곽으로 가지 않는 이상 지금의 주거 수준을 유지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뉴타운 재개발이 아니라 마을재생으로 정책기조가 달라졌다고 한다. 이런 변화를 증명하듯 많은 지역 들이 마을재생 사례로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지만, 성과를 내기 급급한 방식으로 비슷하게 추진되는 것 같 아 안타까운 맘이 들기도 한다. 먹고 사는 게 팍팍한 현실에서 마을의 변화를 함께 이야기하는 자리는 부 담이 되기도 한다. 사실 여전히 과정과 결과에서 세입자의 자리는 별로 없다. 다양한 층위를 고려하여 임대주택 공급을 확대한다는 발표가 반갑고, 언젠가 자력갱생을 꿈꾸며 열심 히 주택청약을 붓고 있지만, 가까운 현실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지금 조건에서 부모님에게 더는 뒷바라지를 요청하지 않게 부디 착한 집주인을 만나 오래도록 살면 좋겠다. 어떻게 하루를 시작하고 맺을지, 앞으로 어떤 미래를 꿈꾸고 만들어갈지도 어떤 집에 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렇듯 집은 삶을 구성하는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는 곳보다 사는 것이 압도적인 시대, 집 때문에 허덕일 날은 계속될 것 같지만 사람들 모두 집과 맺은 인연이 설움이 아니라 소중한 기억 으로 남기를 여전히 꿈꾼다. 특집 부동산 정책 잔혹사 15
그 시절 대부분이 그렇듯, 우리 부모님은 단칸방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하셨다. 매일 공장에서 야근하 시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근면함과 방 안 한구석에서 하루 종일 자잘한 부업거리들을 손에서 놓지 않으시 는 어머니의 알뜰함으로, 결혼하고 10년이 조금 넘어서 우리 가족은 드 디어 ‘ 우리’ 집을 가질 수 있게 되었 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부 모님은 마치 상을 받은 아이처럼 팔 짝팔짝 뛰며 좋아했지만, 집값이 싼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면서 친구들 과 헤어지게 된 나는 슬펐다. 그래도 대전 대동 달동네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 멀리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특집 / 부동산 정책 잔혹사
“어디에 살아요?” “사글세 살아요”
‘ 집’을 가졌다는 것의 의미를 수없 이 강조한 부모님의 영향 때문인지 새로운 친구들에게 ‘ 우리’ 집을 자 랑스럽게 소개했다. 20년이 지난 지 금, 부모님의 재산은 여전히 ‘ 집 한 채’ 가 전부다. 부모님의 근면함과 알뜰함은 변함없지만 자식을 셋이
아요 <빈곤과 차별에 저항하는 인권운동연대> 활동가
나 낳았고 세 명이 모두 대학에 가려 고 했기 때문이다.
허름한 한옥집 한켠 ‘사글셋방’ 나는 지금 혼자 살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인권단체라는 듣보잡 직장에 들어가는 내 선택 을 부모님에게 이해시키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자랑스러운 우리 집은 더 이상 ‘ 우리’ 집 이 아닌 ‘ 부모님’ 의 집이었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곳은 ‘ 화려한’ 대구 도심 근처 ‘ 허름한’ 한 옥 집구석 방 한 칸이다. 열 달치 월세를 한꺼번에 내는 한국의 독특한 주거 임대 형태인 사글 세로 살고 있다. 내 활동 반경인 사무실과 시내 중심에서 가까워서 이곳을 선택했다. 걸어 다 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교통비 지출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방세가 쌌다. 16
그런데 이 방세가 객관적으로는 싼데 주관적으로는 비싸다. 재정이 열악한 단체에서 일하는 내 활동비 는 월급이라고 밝히기 민망한 수준이고, 그 월급에서 혼자 온전히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생계비를 우선순위 항목부터 빼고 나면 통장 잔고를 구경하기 쉽지 않다. 더 싼 곳은 없을까 늘 두리번거리지만 마땅치 않다. “돌아서면 한 달이고, 돌아서면 한 달이야.” 예전에 쪽방에 사시는 아저씨와 이야기 나누다가 들은 말 이다. 방세 내야 하는 날짜가 얼마나 빨리 돌아오는지 돈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고 하셨다. 하루하루를 빠 듯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하는 말일 것이다. 열 달이라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돌아서면 열 달이고, 돌아서면 열 달이다. 방세를 내야 하는 달이 다가오면 마음 한 구석이 묵직하다. 일 마치고 집으 로 돌아가는 골목길 어귀부터 방세 걱정이다. 열쇠로 대문을 따고 도둑고양이처럼 살그머니 들어가면서 날짜가 얼마나 남았는지 속으로 세어본다. 주변 친구들에게 전화해서 급하게 알바 자리를 구해본다.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다 잠이 든다.
‘ 전세 입주’ 가 로망이 된 시대 “어디에 살아요?”라는 질문에 “사글세 살아요”라고 답한 적이 있다. 강박관념일까? 자격지심일까? 난 언제쯤 전세에 살 수 있을까? 10년 정도면 될까? 부모님이 10년 만에 ‘ 우리’ 집을 가지고 기뻐했듯이, 내 가 10년 뒤 전셋집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벽에 못 질하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음악 소 리도 조금 크게 해서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가끔씩 그런 날을 상상해 본다. 부질없이. 작년부터 지금 살고 있는 집 옆으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한참 공사가 진행 중이다. 높은 아 파트는 내가 살고 있는 한옥 앞마당을 훤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공사가 마무리되면 아파트에 들어가 사는 사람들은 베란다 밖을 내려다볼 것이다. 옹기종기 붙어있는 한옥 집들과 구불구불 연결된 골목길들은 ‘ 좋은 전망’이라고 불
작년부터 지금 살고 있는 집 옆으로 고층
리며 평화로운 풍경이 될 것이다.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그러나 지친 몸을 끌고 그 골목길을 통 과해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가로등 등
내려다보는 옹기종기 한옥집과 골목길은 제법 평화로운 풍경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불보다 밝은 아파트 브랜드 불빛을 바라보 며 무슨 생각을 할까? 어쩌면 그 불빛을 올 려다볼 여유조차 없이 종종걸음으로 지나칠 것이다. 세상의 풍경이 되어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가난한 동네이니까. 그렇지만 이따금씩 잠시 가던 길을 멈춰 서서 가슴을 펴고 숨을 들이킬 때가 있 을 것이다. 씁쓸함과 고단함이 한숨에 섞여 나오겠지. 부동산 공화국에서 살아가는, 아니 살아내는 삶이 란 이런 것이다.
특집 부동산 정책 잔혹사 17
특집 / 부동산 정책 잔혹사
‘ 용역’의 얼굴을 한 제도의 역습 서민 울리는 임대아파트 제도 임대아파트에 살던 신씨 아저씨는 어느 날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았다. 16년 동안 생사도 모르고 지낸 배우자가 강원도 원주에서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 실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글을 읽고 쓸 줄 몰라 이혼 소송 절차를 밟을 만한 여건도 아니었다.
나경채 서울 관악구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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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씨 아저씨(61세)는 신원동(구 신림1동) 동부아파트의 임대아파트에 산다. 아저씨가 살던 판잣집이 재개 발 되면서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받아 1993년부터 들어와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지금 살고 있는 임대아 파트에서 나가라고 SH공사가 통보해왔다. 16년 전에 집을 나가 연락도 되지 않는 서류상의 배우자가 강 원도 원주에서 집을 소유하고 있는 사실이 SH공사 재산조회에서 밝혀졌다는 것이 이유였다. 신씨 아저씨 는 우리 나이로 61세였고, 정신지체가 있는 딸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 그는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비문해 자다. 나는 아저씨와 함께 SH공사를 방문해서 몇 가지 소명을 하려고 했다. 법적인 혼인관계를 맺고 있는 것 이 사실이긴 하지만 16년 동안 생사도 모르고 지냈던 사람이어서 혼인의 실질이 없다는 점, 그 껍데기라 도 문제가 된다면 당장 이혼소송을 하겠다는 점, 공사에서는 왜 진작에 이혼하지 않았냐고 하지만 신씨 아저씨는 한글을 모르는 분이시고 법원에 찾아가서 이혼소송 절차를 밟을 만한 여건이 그동안 되지 않았 다는 점, 신씨 아저씨는 기초생활수급자이기도 한데 이 경우에도 법률상 부양의무자인 처가 존재하지만 사실상 가족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것을 소명하여 이미 기초생활수급을 유지하고 있으니 임대아파트 입주 자격에도 그와 같은 심사가 필요하다는 점 등을 설명했다.
16년째 생사도 모르던 부인이 주택소유자므로 나가라니 공사의 담당 직원도 우리의 소명이 일리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법상 요건이 예외를 허용하고 있 지 않기 때문에 실무자로서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며 안타깝지만 공사는 명도소송을 곧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즉 임대주택법과 그 하위 법령에는 ‘ 주민등록을 함께 하는 자가 모두 무주택자일 것’ 이 라는 간단명료한 요건만 정하고 있지, 신씨 아저씨와 같은 사정을 감안할 수 있는 조항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은 제도의 미비에 해당하는 일이고 신씨 아저씨와 같은 사례가 희귀한 것도 아닐 것이기에 제도개선을 해서라도 쫓아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말단 직원인 그에게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였 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양해해 달라고만 했다. SH공사 관악센터를 나오면서 그 직원에게 이렇게 얘기했 다. “선생님이 같이 안타까워 해 주시고 이것저것 친절하게 말씀하시니 오늘은 이만 물러나지만 구의원인 제 입장에서 이것은 제도의 탓이지 사람의 탓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을 찾아서 저 는 최대한 떠들어 보겠습니다. 그것 때문에 선생님이 좀 곤란해질 수도 있지만 저도 선생님에게 양해를 부탁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공사 담당 직원을 만나고 와서 가장 먼저 법률구조공단을 통해서 이혼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도와드 렸다. 만약 이혼이 빨리 성립되면 다시 새로운 임대아파트 입주 요건을 완성하게 되지만 그렇더라도 새로 순번을 기다려야 하고, 무주택 상태인 기간이 매우 짧아서 순위가 밀릴 테고 무엇보다 지금 살고 있는 동 네를 떠나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 여러모로 도움을 받고 있는 이웃을 떠난다는 건 이분에게는 상상 특집 부동산 정책 잔혹사 19
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필요한 일이니 도와드리긴 했지만 그다지 실효성이 있는 일은 아니었다. 또 신씨 아저씨의 연세가 61세인데 한글을 모르니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글을 배우도록 주선했다. 남부야학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 남부교육센터’로 개명한 한글교실을 운영하는 사회 단체가 도움을 주었다. 여기 센터장이신 배지용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고 흔쾌히 함께 공부하겠다고 해 주 셨다. 기초생활수급자이니 강의료는 따로 받지 않겠다고도 하셨다.
‘ 허술한 임대아파트 제도’ 의제화 해 신씨 아저씨와 같은 사례가 또 있는지 자료를 찾았다. 공사측에서는 유사 사례가 없다고 했지만 기사 검색을 해보니 2011년 11월 경 MBN에서 비슷한 사정의 아주머니 한 분이 소개된 것을 알게 됐다. 해당 기 자의 연락처를 당시 박은지 대변인을 통해서 알아냈고 장문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유사한 일이 또 발생 했으니 후속취재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기자가 집에 찾아 왔고 이 사연을 MBN에서 후속 보도 형태로 내보내게 되었다. 이렇게 했더니 신씨 아저씨에게 전화가 와서, SH공사 직원이 전화를 해서 역정을 내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곤란해졌다는 내용이었다. 일단 공사를 시끄럽게 하는 데에는 성공한 것이다. 그 후 경향신문 관악 출입기자에게 연락을 했다. 비중있게 기사로 다루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기자가 이야기를 들어보고는 신씨 아저씨의 연락처를 받아가더니 집에까지 찾아가서 취재를 했고, 이 기사가 경 향신문 사회면에 큰 사진과 함께 실렸다. 일간지에까지 기사가 나가자 SH공사에서 전화가 왔다. 신씨 아저씨가 계속 그 임대아파트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일단 공사가 명도소송을 하고 나서 판사에게 공동으로 조정안을 내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판사의 조정권고를 받아들이는
취재가 이어지고 일간지에까지 기사가 나가자 SH공사에서 전화 가 왔다. 계속 임대아파트에서 살 방도를 찾아보자는 것이다.
형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공사 의 의견으로 국토부에 이 문제와 관련한 제도개선 요 청을 제출해 달라고 했다. 신씨 아저씨는 딸과 함께 그 집에 계속 살 수 있게 되었다. 한글교실에도 일주일에 두 번씩 8개월째 수 강을 하고 계시고 이제 읽고 쓰는 데 익숙해지는 중이
다. 애초에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문제로 만든 못된 제도가 사람을 이렇게 애 를 태우고 괴롭혔던 것이다. 이런 융통성 없는 처사는 사실 정부나 지자체의 공공임대주택 비율이 충분하 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은 투자재가 아니라 삶의 터전이다. 법과 제도는 이렇게 ‘ 용역’의 얼굴로 우리를 역습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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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부동산 정책 잔혹사
재개발을 바라는 철거민들 최근 몇 년 동안 주택가격이 하락하면서 뉴타운· 재개발의 수익성은 크게 악화됐다. 이미 많은 사업비를 소진한 조합과 시공사 측은 당장이라도 재개발이 가능한 여건을 만들려고 한다. 대책없는 강제철거가 자행되는 것이다.
김종철 서울 동작당협 위원장
특집 부동산 정책 잔혹사 21
벽을 뚫고 창문을 부수고… 제 발로 나가게 만들어 동작구에는 재개발을 바라는 철거민들이 있다. 재개발을 바라는 철거민이라니 무슨 말일까. 지금으로 부터 5년 전인 2008년 동작구 상도4동 재개발 11구역에서는 새벽 한밤중에 용역이 들이닥쳐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을 닥치는 대로 철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집에서 끌려나오면서 수없는 집이 철거가 되었고 철거를 막아낸 집 몇 채에만 세입자와 영세 가옥주만이 살게 되었다. 하지만 재개발 조합과 시공사, 철거 용역들은 가까스로 철거를 막아낸 이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1차 철거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또 다시 철거용역들이 들이닥쳤다. 용역들은 갈 곳이 없는 세입자 들과 원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자 당일 내에 철거가 쉽지 않다고 판단하고,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 사 람이 살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주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집의 담벼락 곳곳, 특히 방과 연결된 담벼락에 큰 구멍을 내고 기습적으로 집으로 쳐들어가 문과 창문을 모두 깨부수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살 수 없는 공간을 만듦으로써 스스로 떠나게 하자는 것이었다. 나와 우리 당원들도 현장에서 주민들과 함께 싸웠는데 워낙 역부족이었다. 혼자 사는 어느 할머니는 용역들에게 “가재도구만 좀 꺼내게 해달라”고 했지만 그들은 할머니를 끌어내고 닥치는 대로 건물과 가 재도구를 부수기 시작했다. 뒤늦게 할머니로부터 연락을 받고 온 일산에 사는 딸은 망연자실하게 집을 바 라보고 있다가 할머니를 모시고 일산 집으로 갔다. 결혼한 딸 역시 생활이 넉넉지 않아 할머니를 모시고 살 처지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모시고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재개발을 추진하던 업체들의 부도… 방치된 폐허 이렇게 많은 가옥들이 사람들이 살 수 없 을 정도로 파손됐지만 주민들은 갈 곳이 없 었다. 철거가 자행된 지 며칠 후 거의 반파된 어느 할아버지 집에 가보았는데 할아버지는 구멍이 난 담벼락과 부서진 문, 창문에 비닐 을 치고 냉방에서 잠을 자고 계셨다. 집이 부 서져도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흉가에 70이 훨씬 넘은 할아버지와 강아지 한 마리 가 덩그러니 폐허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렇게 또 수십 명의 주민이 마을을 떠났 주민들의 저항이 거세니 철거 용역들은 담벼락과 창문을 깨부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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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노동당(당시 진보신당)의 당원이었던 몇몇
세입자들만이 필사적으로 저항하여 그나마 피해를 덜 받고 집을 지킬 수 있었다. 이들은 아직도 그곳에서 거주하고 있다. 그런데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더 큰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재개발을 추진하던 땅 소유주, 즉 00종중 재단과 시공사인 **건설 등이 비리와 갈등으로 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수백억 원의 자금을 날 려버리고 관계자 수십 명이 구속되면서 사업이 공중 분해돼 버린 것이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서 해당 지역은 재개발이 중지된 상태다. 재개발이 중단되다 보니 더 큰 문제가 생겼다. 이미 마을이 5년 전에 사실상 폐허가 되었는데 그 상태 로 몇 년을 방치되다 보니 마을 골목길에는 무성한 잡초와 깨진 유리창, 연탄재, 쓰레기, 용변과 오물들이 널렸다. 인근 주민들은 이곳이 범죄의 온상이 된다며 발길을 멀리함으로써 더욱 무서운 동네가 되었다. 유명한 ‘ 깨진 유리창의 법칙’처럼 무너진 마을은 더 심각한 폐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세입자 대책위원회 고정득 위원장님은 몇 년의 투쟁을 거치면서 “신경쇠약에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 라고 하소연을 한다. 그러면서, “결과가 어찌 되든 이제는 누구든지 차라리 재개발을 진행했으면 좋겠다” 고 말한다. 사업이 진행돼야 시행사나 시공사를 대상으로 협상이라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다시 그 지긋 지긋한 철거싸움을 하더라도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이다.
무허가 영세 가옥주들 쫓겨난 상도 제10구역 최근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또 발생했다. 장승배기역 5번출구옆 상도 제10구역은 얼마 전 주민들에 대 한 이주대책도 없이 막무가내 철거가 자행되었다. 이곳은 국가소유의 땅에 수십년째 무허가 가옥주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었는데, 세입자보다는 가난한 영세 가옥주들이 문제가 되었다. 법률과 행정에 무지했 던 영세 가옥주들은 조합이 얘기하는 대로 끌려가다가 자신들이 아파트 분양권을 받아도 높은 추가분담 금 때문에 결국 입주하지도 못하고 쫓겨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게 된 때에 는 이미 철거가 임박한 때였다. 영세 가옥주들은 조합측에 항의도 하고, 관리감독을 소홀히 하며 재개발 허가를 내준 구청에 항의도 하였지만 아무 성과가 없었다. 결국 이들은 허름하나마 갖고 있던 가옥조차 모두 헐려버리고 거리로 나앉 게 된 것이다. 쫓겨난 가옥주 중 몇명은 동작구청 현관 앞에서 한달여를 노숙하면서 투쟁을 시작했다. 그 중에는 암투병 중인 할머니도 있었다. 그러나 구청은 자신들이 해줄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며 답변 을 회피했다. 대부분 60대 이상인 이들 가난한 주민들은 결국 자포자기해 한 두 사람씩 떠나게 되었고, 마지막 남은 주민 중 한 사람이 박원순 시장의 동작구 방문길에 하루종일 따라다니며 1인 시위를 하였다. 그러자 박원 순 시장은 잠시 시간을 내어 이 분의 사정을 들어주었고, 잘 해결되도록 노력하겠다는 답변도 했다. 그러 나 박원순 시장에게 정성껏 쓴 편지가 나중에 동작구청 관계자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것을 확인하고 이 특집 부동산 정책 잔혹사 23
주민은 “아무리 내가 노력을 하고 높은 사람을 만나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나 보다” 하며 전의를 상실해 투 쟁을 접고 말았다. 구청이 중재해서 조합측이 전세보증금을 빌려줄 수 있다는 식의 구두약속을 받고 결국 모두가 농성을 접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 약속이라는 것이 구두약속에 불과해 언제든 없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설사 그 약속이 이행되어 전세를 얻더라도 2년 후 전세기간이 만료되어 조합측이 전세금을 회수하 면 꼼짝없이 다시 거리로 나앉아야 할 처지에 이들은 놓여 있다. 그렇다면 이곳은 사업성이 있어서 빨리 개발이 진행되고 그 와중에 이들 약자들의 권리가 조금이나마 실현이 될까. 그리 되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다. 어떤 시공사가 들어올지 모르지만 사업타당성이 아직도 불투명하기 때문에 사업이 표류하게 될 것이다. 이 경우, 상도4동 11구역의 주민과 똑같은 처지에 처하게 될 것이다. 아니 아예 살 곳도 없이 완전히 철거됐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최악이다.
뉴타운· 재개발의 수익성 악화… 대책 없는 철거는 더 큰 재앙을 부를 것 이러한 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몇 년 동안 주택가격이 하락하면서 뉴타운, 재개발의 수 익성이 크게 악화되었다. 분양도 잘 되지 않는데 대책 없이 아파트를 지었다가는 큰 건설회사라 하더라도 치명적인 타격을 피할 수 없어 사업을 무효화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 출생자 수는 1970~71년 100만여 명을 정점으로 해마다 줄어들어 지금은 40만 명이 조금 넘는 인구가 태어나고 있다. 인구감소가 심각한 것이다. 또한 주택을 분양받기 위해서는 일정한 소득이 있어야 하는데 양극화가 더 심 해지면서 그마저도 녹록치 않은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당분간 극복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많은 사업비를 소진한 조합과 시공사 측은 오히려 사람이 살건 말건 건물부터 몽 땅 철거함으로써 당장이라도 재개발이 가능한 여건을 만들려고 한다. 대책없는 강제철거가 자행되는 것 이다. 실제로 동작구 사당동에서는 이미 6-7년 전에 재개발 사업이 확정되어 모든 건물이 철거되고 아파 트가 올라가는 와중인데, 추가분담금이 수억 원을 넘어가면서 주민들이 난리가 났다. 설상가상으로 건설 사까지 부도가 나서 모든 주민들이 하루아침에 빈털터리로 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세입자도 영세 가옥주 도 아닌 일반 가옥주 조합원인데도 그런 상태에 몰려 있다. 그럼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까. 이제부터라도 주민들에게 솔직하게 재개발의 상황을 알리고 대책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 예전처럼 무조건 철거하고 쫓아내는 식이라면 제2의 용산사태가 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특히 사업의 인허가권을 쥐고 있는 지자체가 조합의 말만 듣고 무책임하게 사업의 인허가를 내줄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자기 책임을 다해야 한다. 구청이 꼼꼼하게 주민들 의견을 수렴하고 찬성-반대의 중재만 제대로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동작구에서 벌어졌고, 또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이 사안을 통해 무조건적인 재개발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두 깨달았으면 한다. 노동당도 주민들을 거리로 내모는 이러한 무책임한 재개발이 반복되지 않도록 각 지역에서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으면 한다. 24
특집 / 부동산 정책 잔혹사
대한민국 토지정의를 위하여 지금은 부동산 시장을 둘러싼 환경이 변해 부동산 시장이 쉽게 활성화되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부동산 시장이 투기 시장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부동 산 투기를 유발할 수 있는 어떤 요인이 작용하면 부동산 시장은 언제든지 투기 시장으로 다 시 변할 수가 있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책은 매매가격이 적정 한 수준으로 떨어지도록 놔둔 뒤 부동산에서 불로소득이 발생하지 않는 장치를 도입하여 매매시장과 전월세시장이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성승현 <토지자유연구소> 연구원
특집 부동산 정책 잔혹사 25
부동산은 언제나 문제였다. 사람들은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 가격을 잡아달라고 아우성치고,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면 가격을 떠받쳐달라고 난리를 피운다. 정부는 장단을 맞추듯 부동산 규제 정책을 내놓았 다가, 어느 순간 돌변하여 부동산 활성화 정책을 내놓기를 반복한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부동산이 문제가 되지 않은 시기는 별로 없다. 그렇다면 부동산은 왜 문제이며, 그 해결이 쉽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래 <그림 1>에서 볼 수 있듯 이 부동산 문제는 주택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의 모든 부문에 영향을 주어 발전을 저해하는 모 순의 집약체다. 그렇기 때문에 부동산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매우 복잡한데, 정책을 펴는 정치인 들이 이런 이해관계를 둘러싼 여론에 영합하여 부동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대중 영합적 인 정책을 펴면서 문제를 계속 키워온 것이다.
<그림 1> 부동산의 영향력
부동산 문제의 근본 원인은 ‘ 불로소득’ 이렇게 복잡한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려고 사람들이 내놓는 해결책은 가지각색이다. 그렇지만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하려면 먼저 문제의 근본 원인과 핵심 해결책을 분명히 인식하고, 부동산 정책의 역사를 정 확히 이해해야 한다. 부동산은 인간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재 중의 필수재다. 또한 부동산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 요한 자산의 한 형태인데, 부동산 문제는 자산의 성격을 갖는 부동산에서 발생하여 필수재의 부동산에서 그 문제가 드러나게 된다. 자산인 부동산을 통해 정상적인 수익 이상의 투기적 이익, 다시 말해 불로소득을 얻을 가능성이 있을 때 사람들은 ‘ 부동산 투기’ 에 몰두한다. 부동산 투기가 만연해지면 필연적으로 부동산 소유가 일부 계층 에게 편중되고, 필수재인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한 계층은 경제적 어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부 26
동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부동산 투기 행위를 막아야 하는데, 그 핵심이 바로 부동산에
부동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일
부동산 투기 행위를 막아야 하는데,
이다. 지금까지 부동산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계
그 핵심이 바로 부동산에서 발생하는
속 발생하는 이유는 결국 역대 정부들이 불로소
불로소득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득을 차단하는 정책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기 때
일이다.
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정부, 오늘날 토건 국가 시스템을 만든 원조 이정우(2007)는 역대 정권별 경제 성장률과 지가상승률을 비교한 연구를 통해 박정희 정부의 ‘ 경제 성 장 신화’가 부동산 투기를 통한 과도한 지가(地價) 상승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박정희 정부 기간의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9.1퍼센트였는데, 평균 지가상승률은 무려 33.1퍼센트였다. 박정희 정 부는 경제 운용에 있어 단기 실적주의, 인기 영합주의, 개발 지상주의에 집착하다보니 지가 상승에 기반 한 경제 성장이라는 손쉬운 방식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방법을 통해 높은 경제 성장률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방식은 미래 세대가 사용해야 할 토지 가치라고 하는 자양분을 미리 당겨 쓴 일 종의 ‘ 외상 경제운용’으로 볼 수 있는데, 이것 때문에 이후 한국의 국가경쟁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뒤에 오는 정권에 ‘ 부동산 불패 신화’라고 하는 큰 짐을 지우게 되었다. 따라서 박정희 정부의 경제 성장 신화 는 ‘ 자기 패배적 성장’에 불과하며, 지금의 ‘ 토건 국가’ 시스템을 만든 원조라고 보는 것이 옳다. 전강수(2012a)는 박정희 정부의 강남 개발 과정을 분석한 연구를 통해 1970년대 강남 개발이 현재 한국 부동산 문제의 시초라는 점을 논증하였다. 한국 부동산 문제의 원조가 박정희 정부라는 이정우(2007)의 주장을 실제 강남 개발 과정을 분석해 밝혀낸 것이다. 1960년대, 서울로 인구 집중이 빠르게 심화되면서 서울은 강북 지역의 기존 주택과 도시 기반 시설로 는 밀려드는 인구를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는 한계 지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따라서 1963년에 서울에 편입 됐지만 미개발 상태인 강남 지역을 개발하는 일이 시대적 과제로 떠오르는 상황이었다. 어느 나라든 또는 어느 특정 지역에서든 개발이 진행되면 지가는 필연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개발 과정에서 지가 대책과 투기 대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으면 부동산 투기 열풍으로 인해 온 나라가 부동산 문제의 홍역을 치를 수밖에 없다. 박정희 정부는 1960년대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강남 개발을 시작하면서 투기를 막고 불로소득을 차단 하고 환수하는 사전 조치나 제도 도입에 소홀했다. 도리어 정부 담당자들이 정치 자금 조달하려고 개발 자체를 활용하고 또한 직접 투기에 가담하기까지 했다.
특집 부동산 정책 잔혹사 27
정부가 앞장서서 개발 밀어붙이고 투기에도 가담해 박정희 정부는 강남 개발의 중요한 계기가 된 경부 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부족한 재원을 확충하려고 영동지구 구획정리사업을 실시했는데,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의 대규모 사업이었다(영동1지구 면적이 1562만m2(472만 평), 영동2지구의 면적이 1207만m2(365만 평), 합해서 2768만m2(837만 평)이었는데, 그때 일반적 인 구획 정리 면적 15~30만 평하고 비교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그런데 이렇게 대규모의 개발 사업을
추진하면서 지가 대책과 투기 대책 마련은 전무했으며, 오히려 박정희 정부가 직접 나서 투기 행각을 벌 이기까지 했다. 자세한 내용은 손정목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 잘 나와 있는데, 당시 서울시 도시계 획국장이던 윤진우가 청와대 정치 자금으로 구입해둔 땅의 가격을 하루 빨리 올려서 조기에 처분하려는 목적으로 새로운 대규모의 구획정리사업을 실시했으며, 이런 노력을 통해 당시 금액으로 약 20억 원의 정 치 자금을 조성했다는 내용이다. 비슷한 예로 지금의 대표적 아파트 단지들이 위치해 있는 한강 연안의 공유 수면 매립 사업이 있다. 공 유 수면 매립 사업은 매립 면허를 따내기만 하면 엄청난 이익이 보장되는 사업이었기 때문에 매립 면허를 따기 위한 건설사와 정부의 유착관계가 만연하였고, 박정희 정부는 이것을 이용하여 정치 자금을 거둬들 였다는 내용이다. 이 밖에 개발촉진지구 지정, 아파트지구 제도 도입, 공공기관 및 학교 이전, 강북 지역 개발 억제책 등은 박정희 정부가 강남 개발을 촉진하려고 시행한 대표적 정책들이었다. 이런 강남 개발 과정을 통해 소위 토건족과 정부가 결탁하여 국토 곳곳에서 부동산 개발을 추진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 는 막대한 불로소득을 함께 나눠 갖는 토건국가 시스템이 탄생했다. 부동산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을 차단할 제도적 장치가 미비한 상황에서, 정부가 앞장서서 개발을 밀 어붙이고 직접 투기에 가담하기까지 했으니 당연히 지가가 폭등하고 부동산 투기가 일어났다. 그리고 박 정희 정부는 이런 과정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땀 흘려 일하기보다는 불로소득을 좇아야지만 더 좋은 삶 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10년
“도덕이나 근면 따위는 ‘ 웃기는 짜장’ 으로
전 MBC TV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
만들어버리고, 불로소득, 일확천금을 꿈꾸
다>에서 ‘ 투기의 뿌리 강남공화국’ 편을 연
게 만드는 사회 구조를 만든 것이 박정희, 전두환에게 더 준엄하게 따져 물어야 할 죄 악이 아닐까요?”
출한 유현 피디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 불법으로 사람 잡아다가 고문하고 때리고 한 거 용서 할 수 없는 짓입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만들고 보니까 그것보다 더 나쁜 것은 모든
사람들이 투기를 꿈꾸게 만드는 사회 구조, 도덕이나 근면 따위는 ‘ 웃기는 짜장’ 으로 만들어버리고 불로 소득, 일확천금을 꿈꾸게 만드는 사회 구조, 또 그 사람들이 더 높은 아파트를 쌓고 타워팰리스를 쌓아 그 사람들만의 세계를 만들고 호의호식하는 사회 구조를 만들어버린 것이 오히려 박정희, 전두환에게 더 준 28
엄하게 따져 물어야 할 죄악이 아닐까요?” 아마도 박정희 정부의 강남 개발의 성격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 한 말이 아닐까 생각된다.
역대 정부의 부동산 정책 막전막후 참여정부 국정홍보처 산하 국정브리핑에서 2007년에 발간한 《대한민국 부동산 40년》에는 역대 정부 의 부동산 정책이 잘 정리되어 있다. <그림 2>에 그 내용이 잘 요약되어 있는데, 1967년 이후 2007년까지 40년 동안 모두 네 차례의 부동산 경기 순환 주기가 있었으며, 59건의 주요한 부동산 대책이 발표되었다. 이 중 투기 억제 및 가격안정을 위한 정책이 31건이었으며, 부동산 규제완화 등을 통한 경기활성화대책이 17건, 임대주택 확대 등 서민 주거복지 정책이 11건이었다. 이렇게 수많은 부동산 정책들이 발표되었다는 점은 그만큼 한국에서 부동산 투기가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긍정적으로 평가하 면 부동산 투기에 대처하려는 정부의 정책적 노력이 상당했고, 이런 정책적 노력들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2> 연도별 부동산 가격 변동 및 주요 정책
출처 : 국정브리핑 특별기획팀, 2007, 《대한민국 부동산 40년》
그렇지만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발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부동산 가격 폭등이 재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는 역대 정부들이 부동산 정책을 경기 조절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부동산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제도가 부재했 다는 것이다. 특집 부동산 정책 잔혹사 29
전두환 정부는 부동산 정책을 경기조절 수단으로 삼은 대표적 정부다. 1978년 ‘ 8.8조치’ 이후 부동산 시장이 안정되고 제2차 오일쇼크 때문에 경기침체가 진행되자 전두환 정부는 집권한 뒤 3년 동안 부동산 경기 부양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1983년 경기가 호황세를 보이면서 부동산 시장이 과열되자 정책 방향을 투기 억제로 선회했고, 1985년 하반기에는 또다시 부동산 경기 부양 기조로 선회했다. 김대중 정부는 1998 년부터 2001년까지 외환위기를 극복한다는 명분 아래 토지 공개념 제도, 분양가 원가 연동제, 분양권 전 매제한 등 그나마 남아있던 주요 규제마저 모조리 폐지하고 전방위적인 부동산 경기 부양 정책을 추진했 다. 역대 어느 정부하고 비교 할 수 없는 전면적인 부동산 경기 부양책이었다는 점에서 최악의 평가를 받 아 마땅한데, 실제로 김대중 정부의 전면적인 부동산 경기 부양책의 영향으로 1990년대 내내 지속된 부동 산 가격 안정세는 종언을 고하고 2001년부터 또다시 부동산 투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부동산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가장 좋은 수단은 바로 ‘ 토지보유세’ 다. 토지 보유세는 모든 세금 중에서 가장 좋은 세금이며, 부동산 투기를 잡는 데도 가장 좋은 수단이라는 사실은 이론적으로 이미 널리 인정되고 있다. 한국
한국 부동산 세제의 오랜 숙원은 높은 거 래세 부담은 낮추고, 낮은 보유세 부담은 높이는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 개혁을 최 초로 추진한 정부가 노무현 정부다.
부동산 세제의 오랜 숙원은 높은 거래세 부 담은 낮추고, 낮은 보유세 부담은 높이는 것 이다. 이런 방향으로 개혁을 최초로 추진한 정부가 바로 노무현 정부다. 노태우 정부가 토지공개념 3법을 내세우며 부동산 투기문 제 해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토지보유
세를 높이는 데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노무현 정부는 이상적인 토지보유세의 모델과는 약간 차이가 있 지만 한국적 상황의 토지보유세 모델이라 할 수 있는 ‘ 종합부동산세(종부세)’를 도입해 평균적인 보유세 부담을 두 배 이상으로 늘렸다. 그렇지만 보유세 실효세율은 아직도 0.2퍼센트 수준에 머무르고 있고(대다 수 선진국의 보유세 실효세율은 1퍼센트 이상이다), 보유세와 거래세 비중도 여전히 3:7 수준이라는 사실을 감
안하면(대다수 선진국의 보유세와 거래세 비중은 9:1 이상이다) 가야할 길이 여전히 멀다고 할 수 있다.
아무도 이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부동산 ‘ 투기화’ 정책 이명박 정부는 김대중 정부에 버금가는, 때로는 김대중 정부를 넘어서는 부동산 경기 부양 정책을 펼 쳤다. 부동산 경기 부양을 향한 맹목성과 토건국가 이데올로기를 향한 헌신성에 있어서는 역대 어느 정부 하고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부동산 분야의 수많은 규제 장치들이 무차별적이고 급 진적으로 완화되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잘못은 종부세를 형해화 했다는 점 이다. 2008년 11월 31일 헌법재판소가 종부세법 일부 조항에 위헌 및 헌법 불합치 판정을 내린 일을 계기 로 종부세는 유명무실화되었다. 과세 대상자는 절반으로 감소했고, 세 부담은 대폭 완화되었으며, 공시지 30
부동산 규제가 풀리고 마구잡이 개발이 자행되면서 도시 빈민들의 삶 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대전시 대동 판자촌에서 바라본 시가지.
가의 100퍼센트까지 올리기로 예정된 과표 현실화율 인상계획은 80퍼센트에서 중단됐다. 박근혜 정부도 이명박 정부의 기조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4.1대책과 8.28 대책의 세부 내용을 살펴 보면 이명박 정부에 비해 주거복지와 관련된 정책들이 일부 강화되기는 했지만, 부동산 경기 부양을 통해 지금의 전월세난을 해결해보겠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부동산 시장 ‘ 정상 화’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부동산 투기 심리를 조장하여 전월세 수요를 매매 수요로 돌리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표현하면 부동산 시장 ‘ 활성화’를 넘어선 ‘ 투기화’라고 해야 옳다. 다만 두 정부와 이전 정부들의 차이점은 부동산 시장을 둘러싼 시장 상황이 급변하여 꾸준히 부동산 경기부양책 을 내놓아도 부동산시장이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부동산 정책에 없는 것-“토지정의를 찾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부동산 정책사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요약하면 한국은 부동산에서 발생하는 투기적 이익의 실체인 토지 불로소득을 차단하는 근본적 방안이 부재한 상황에서 정부가 단기 실적주의에 빠져 부동산 투기를 직간접적으로 조장해왔고, 그 결과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이제는 부동산을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 흐르게 되었다. 해방한 지 60년이 넘도록 토지 불로소득을 완전히 환수하는 토지정의가 제대로 확립되지 못해 돈 없는 서민은 열심히 일해도 힘겹게 살 특집 부동산 정책 잔혹사 31
수밖에 없는 사회가 됐다. 1967년부터 2007년까지 40년 동안, 주요 부동산 정책만 59번이 나왔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토지 정의 없는 한국의 부동산 시장은 언제든지 급변할 수 있다는 결함을 안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 이후 꽤 오랜 시간 부동산 시장이 침체했다고 해서 토지 불로소득 환수라고 하는 부동산 시장의 근본적인 정책 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지금은 부
1967년부터 2007년까지 40년 동안, 주요 부 동산 정책만 59번이 나왔다. 토지정의 없는 한국의 부동산 시장은 언제든지 급변할 수 있다는 결함을 안고 있다.
동산 시장을 둘러싼 환경이 변해 부동산 시 장이 쉽게 활성화되기는 어렵겠지만, 그렇 다고 부동산 시장이 투기 시장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부동 산 투기를 유발할 수 있는 어떤 요인이 작 용하면 부동산 시장은 언제든지 투기 시장
으로 다시 변할 수가 있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책은 토지 불로소득을 보장하 여 전월세 수요를 매매수요로 전환하려는 정책이 아닌 매매가격이 적정한 수준으로 떨어지도록 놔둔 뒤 부동산에서 불로소득이 발생하지 않는 장치를 도입하여 매매시장과 전월세시장이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국정브리핑 특별기획팀, 2007, 《대한민국 부동산 40년》, 한스미디어 손정목, 2007,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 한울아카데미 손정목, 2009,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3》, 한울아카데미 이정우, 2007, “한국 부동산 문제의 진단 — 토지공개념 접근방법”, <응용경제> 제9권 제2호 pp. 5~38 전강수, 2007, “부동산 정책의 역사와 시장친화적 토지공개념”, <사회경제평론> 제29(1)호 pp. 373~421 전강수, 2012a,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강남개발”, <역사문제연구> 제28호 pp. 9~38 전강수, 2012b, 《토지의 경제학》, 돌베개 한홍구, 2013년 2월 16일, “강남은 박정희 덕분에, 박근혜는 강남 덕분에…”,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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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부동산 정책 잔혹사
노동당 주택 정책, 소유 구조에 주목한다 진보적 주택 정책의 기원과 현재 소유하지 않는 거주의 권리는, 삶의 공간에 시장의 저울추를 들이대기보다는 공유와 공동 관리라는 연대성을 요구한다. 우리의 주택 정책은 2007년 ‘ 소유에서 권리로 전 환’에서 최근 8.28 부동산 대책에 대한 ‘ 민간 채권의 공공 매입’이라는 사회화 전략에 이르기까지, 켜켜이 쌓여 성장하는 나무하고 같다. 그리고 그 핵심은 ‘ 사적 소유권’을 해체하는 데 있다. 김상철 서울시당 사무처장
특집 부동산 정책 잔혹사 33
한국 사회에서 주택 정책이 갖는 위상은 독특하다. 과거 소위 민주 정부라 불리던 노무현 정부는 재임 기 동안 아홉 차례의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는데, 단일 정권이 단일 의제에 이토록 많은 대책을 쏟아낸 분 야를 찾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정권은 사실상 부동산 정책 때문에 정권 재창출을 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듣 기도 했다. 그만큼 주택과 토지를 둘러싼, 특히 주택 정책은 한국 사회의 모순을 집약한 최우선의 갈등적 의제이면서 한 정권의 신뢰를 좌우하는 중대 이슈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진보정당의 부동산 정책, 좀 더 특수하게 주택 정책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시기는 매우 짧다. 이를테면 과거 민주노동당 시기에 부동산 정책이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힌 것은 2005년 8월에 발 표된 종합 정책에 이르러서다. 그리고 2007
진보정당의 부동산 정책, 좀 더 특수하게 주 택 정책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시기는 매우 짧다. 여기에는 한국에서 주택이 가지고 있 는 복합적인 특징이 자리잡고 있다.
년 대선을 앞두고 한 차례 정리되는 기회를 갖지만 사실상 대선 정국에서는 사장되고 만다. 이후 진보신당의 부동산 정책은, 2004년부터 시작된 뉴타운 정책에 효과적 인 출구 전략을 수립하는 데로 집중된다. 이것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때는 2010 지방
선거 당시 서울시장 후보가 ‘ 현행 뉴타운 사업의 전면 재검토 및 사업 중단’이라는 공약을 제시한 뒤 ‘ 특 별법’ 형태로 제안한 2010년 말 정도다. 그 뒤 주택금융공사 등 공공 자원을 매개로 하는 기존 주택 매입 방식 등 신규 공급 방식의 사회 주택 전략을 넘어서기 위한 모색이 지속되었다.
한국에서 ‘ 집’ 이란? 일생을 걸고 획득하는 유일무이한 자산 주택 정책이 진보정당에서조차 체계적으로 정리되기 힘든 맥락에는 한국에서 주택이 가지고 있는 복 합적인 특징이 자리잡고 있다. 다른 나라의 정책에서 주택은 그야말로 주거지, 곧 일상생활의 공간이다. 영국만 놓고 보더라도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먼저 시작된 사회 보장 정책이 사회 주택 공급이다. 병사에 서 노동자로 돌아온 민중들의 불만을 달랜 것이다. 그리고 소위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도심 재개발은 상 업 지역에 특징적인 유형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집은 중산층 이상의 국민들에게는 전 일생을 걸고서 획득하는 유일무이한 자산이라 는 특징을 지닌다. 다시 말해 일차적인 거주지라는 의미와 함께, 때로는 그것을 상회하는 자산으로서 가 치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자가 주택을 임대로 내놓고 정작 본인은 민간임대주택에서 거주하는 비상식적인 사태가 외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례는 아니다. 과거 민주노동당 때부터 진보신당을 거쳐 노동당의 주택 정책을 살펴보면서 특히 주목한 부분은, 주택 을 둘러싼 한국적 특수성이라는 관점이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동안 내놓은 주택 정책들을 살펴보고 좀더 고민해야 될 과제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34
‘ 1가구 1주택’이라는 하나의 기준 적어도 2000년대 초반까지 진보진영의 주택 정책은 단 하나 ‘ 1가구 1주택’의 실현을 위한 정책이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정책을 실현하려고 다주택보유자를 제한하고 주택을 무상으로 분배하는 방식 은 1800년대 <주택 문제에 관해서>를 쓴 엥겔스가 반박하고자 애쓴 진보진영의 주류적 관점에 가까웠다. 다시 말해 주택을 노동자 개인의 소유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 전체의 소유로 만들 것인가라는 논쟁 은 주택과 더 나아가 토지를 포함한 부동산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관점의 차이를 내포한다. 더구나 2008년부터 실질적인 주택 보급률이 100퍼센트를 넘어선 시점에 서는 ‘ 1가구 1주택’의 물리적 한계도 극복된 터라 분배 정책의 변화를 통 해서 충분히 달성될 수 있는 목표로 서 제시된다. 그렇지만 이런 관점은
2000년대 초반까지 진보진영의 주택 정책은 단 하나 ‘ 1가구 1주택’의 실현을 위한 정책이었다. 이러한 시각은 재화의 소유권 인정에 관한 중대 한 관점을 놓친다.
기본적으로 주택에 관한 중대한 관점 을 놓친다. 그것은 소유의 문제로, 주택처럼 기본적으로 공급에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소유권의 인정 역시 모호한 법적 인증에 기대고 있는 재화가 가질 수밖에 없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에서 나온 <진보적 주택 정책>은 이런 관점의 전환을 가 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단서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더 이상 서민 주거 안정을 위한 주택 정책이라는 것이 진보진영의 독자적인 의제가 될 수 없는 환경이 구축되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서구의 국가 공공 주택은 좌파뿐만 아니라 우파에서도 논의되는 정책이며,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주택 공공성 확 보는 임금의 상대적 안정성을 보장하고 자본의 확대 재생산에도 기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의 부동산 정책과 우파의 건전한 주택 정책은 꽤 많은 공통분모를 가진다.”
민주노동당 “주거권은 인권이다” “주택은 공공재다” 이런 반성을 바탕으로 제시된 주택 정책의 대원칙은 ‘ 주거권은 인권이다’와 ‘ 주택은 사회 공공재다’라 는 두 가지다. 실제로 과거 민주노동당의 정책은 다주택자 규제, 종합부동산세 강화, 무주택자에게 저렴 한 주택을 공급하는 일 등이 핵심이었는데 이런 주장은 기타 보수 정당과 차별점을 찾기 어려웠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권으로서 주거권을 구성하고 주택에 사적 소유권 대신 사회적 소유권을 제시한 2007년의 주택 정책은 현재까지 이르는 우리 주택 정책의 가장 중요한 전환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1980 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각종 혁신 정당의 공약으로 등장한 ‘ 1가구 1주택’이라는 관념적인 장애물을 넘어서 면서 물리적 한계도 극복됨으로써, 분배 정책의 변화를 통해서 충분히 달성될 수 있는 목표로 ‘ 1가구 1주 특집 부동산 정책 잔혹사 35
택’이 제시된다. 2007년 제출된 <진보적 주택 정책>의 골자를 살펴보면, 주거권 보장이라는 측면에 대규모 공공개발 사 업시 주거환경영향가 등을 실시하도록 하는 ‘ 사회영향평가제도’ , 임대계약 체결시 이것을 신고하도록 하 는 ‘ 주택임대계약등록제’ , 현행 주거 바우처와 유사한 ‘ 주거복지급여’ , 세입자들에게 거주 주택의 우선 적 매입을 보장하는 ‘ 세입자선매권’ , 공급 주택의 1퍼센트를 노숙인, 쪽방 주민 등 주거취약계층에게 공 급하도록 하는 ‘ 사회긴급주택’이 포함된다.
인권으로서 주거권을 구성하고 주택에 사적 소유권 대신 사회적 소유권을 제시 한 2007년 민주노동당의 주택 정책은 현 재까지 이르는 우리 주택 정책의 가장 중 요한 전환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주택의 사회화라는 맥락에서는 개발 이익을 의무적으로 산정해 불로소득을 100% 환수하는 일을 모색하는 ‘ 개발이익환수추정 의무화’ , 다가구 소유자의 주택은 매도할 때 국가가 우선적으로 매입하도록 하는 ‘ 국가 선매권제도’ , 각 지역별로 사회 주택을 공급 하는 비율을 설정하여 점차적인 사회주택 비
율을 높이려는 ‘ 사회주택쿼터제’ , 주택 공급에서 뿐만 아니라 관리 기능도 주민이 자체적으로 할 수 있도 록 하는 ‘ 지역주거연합’ 제도가 포함되었다.
주거권 보장
사회영향평가제도
개발이익환수추정의무화
주택임대계약등록제
국가선매권제도
주거복지급여
주택의 사회화
주택의 사회환원
세입자선매권
사회주택쿼터제
사회긴급주택
지역주거연합
* 2007년 민주노동당이 발표한 <진보적 주택 정책>의 주요 내용
뉴타운이라는 괴물, ‘ 복합적으로’ 넘어서야 그렇지만 당시에는 눈에 띄지 않던 뉴타운 재개발의 후폭풍이 2008년 세계적 경제 위기 때문에 전면화 되자, 원칙에서 도출된 의제보다는 현황에 맞는 본질적인 처방을 고려해야 되는 상황이 된다. 이런 요구 에 조응하여 제출된 것이 2010년 서울시장 공약과 ‘ 뉴타운 해제 특별법’이다. 뉴타운 해제 특별법은 기존의 뉴타운 사업을 추진하는데 근거가 된 ‘ 도시재정비 촉진을 위한 특별법’ 을 폐지하고 대신 ‘ 주거안정을 위한 도시재개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자는 내용이 중요한 골자다. 제안 법률에는 당시 수도권을 중심으로 실시된 뉴타운 재개발 사업에 ‘ 6개월 동안 사업 추진을 중단시키는 동 결 조치’를 실시하고 계속 활용할 수 있는 주택 여부를 판단하는 물리적 실태 조사와 세입자를 포함해 지 역 주민들에게 사업의 추진 여부를 묻는 전수 조사를 하도록 했다. 이 과정을 통해서 무리하게 지정된 구 36
역은 직권으로 해제하는 한편, 주민들에게 다른 정비사업으로 전환을 유도한다. 또한 일시적인 구역 해제 때문에 일어난 난개발을 방지하기 위해 기반 시설을 위한 공공투자 및 지원 을 골자로 하는 ‘ 주거복지관리지구’를 신설하여 기존의 사업구역을 순차적으로 해제 및 전환하도록 했 다. 마지막으로 다주택자의 투기 목적 분양권을 적극적으로 매입하여 사실상 공공이 주도하는 재개발 사 업이 되도록 유도했다.
2012년, 투기주택 수용제도와 하우스푸어 방지법 내놓아 그 뒤 2012년 총선을 맞이하여 내놓은 주택 정책은 그동안 진보진영에서 내놓은 주택 정책에서 벗어나 새로운 차원의 사회 주택 공약을 자임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상투적인 ‘ 공공주택 몇 퍼센트 달성’이라는 주장에서 탈출한 점이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수치로 표현되는 공공주택 비율은 모두다 ‘ 공급 중심’ 의 주택 정책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런 정책은 막대한 건설비용을 수반하게 되며, 불가피하게 기존 주거지나 그린벨트를 훼손하게 되는 방법이었다. 이런 신규 공급 방식의 사회 주택 정책에 벗어나 기존에 공급된 민간 주택들을 공공 주택으로 전환할 수 있는 대안을 고민했는데, 그것이 ‘ 투기 주택 수용 제도’다. 현행 법체계에서 공익의 목적으로 토지나 주택이 수용되는 근거가 있지만, 법 체계는 언제나 개발을 위해 사용되었지 서민들의 주거 안정을 위해 사용되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토지와 주택처럼 국민 생활에 필수적인 재화는 국가가 가지고 있는 수용권 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실거주 목적이 아닌 주택을 대상으로 유상 수용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다음으로 민간 은행에 맡긴 주택대출을 주택금융공사 등 공공기관에서 인수하는, 주택대출 국가인수 제도 역시 ‘ 하우스 푸어 방지법’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다. 높은 이율과 변동금리로 가계 부담이 가중되 는 가운데, 기존처럼 이자 차액을 정부가 지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아예 정책 금리를 통해 주택 대출을 안 정화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진보신당은 그밖에 강제퇴거 금지법을 골자로 하는 ‘ 용산참사 방 지 3법’과 서민 가구의 가처분소득과 연동되는 ‘ 전월세 상한제’, 주거 관리와 재생을 골자로 하는 ‘ 주거관 리형 주택개선사업 확대’를 제안하고 있 다. 주택금융공사를 활용한 기존 주택의 사 회화 전략은, 전통적인 사회 주택을 확보
주택금융공사를 활용한 기존 주택의 사회화 전략은, 전통적인 사회 주택을 확보하는 방
하는 방법이던 신규 공급 중심의 전략에서
법이던 신규 공급 중심의 전략에서 근본적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한다. 사실 뉴타운
인 변화를 추구한다.
재개발 사업이 잘 될수록 임대 주택 등 사 회 주택의 공급이 늘어나는 역설을 근본적으로 벗어나려면 신규 공급보다는 이미 공급된 주택의 급진적 인 재분배를 꾀해야 한다는 고민에서 시작됐다. 실제로 2013년 박근혜 정부가 내놓은 828 부동산 대책이 특집 부동산 정책 잔혹사 37
감세를 통한 경기 부양 방식이 아니라, 민간 주택 채권을 인수해서 주택 시장에 공공의 개입력을 높이는 방안을 제시한 것도 이런 맥락 때문이다. 지난 11월 5일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 전국 토지 소유 현황’에 따르면, 세대별 토지 소유자의 비율이 갈 수록 고령화되고 있는데 60대 이상 비율이 50.5퍼센트에 달한 다. 그리고 인구 5000만 명 중 30.1퍼센트만 전국의 개인 토지 를 소유하고 있다. 향후 10~20 년 사이에 토지와 주택의 광범 위한 세대 이전이 일어날 것이 고, 이 과정은 이후 토지와 주택 의 사회화 전략에 중요한 전환 점이 될 것이다.
삶에는 가격이 없다 집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가 장 평범한 경험적 진리에 속하
*국토교통부 발표 자료(2013.11.5.)
고 별도의 증명이 불가능할 만 큼 자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당의 주택 정책은 ‘ 고르디아스의 매듭’ 을 푸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가장 단순하고 자명한 사실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에게 주거는 선택사항이 아니며 주거의 불안정은 어떤 것으로도 해소할 수 없는 삶의 불안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동안 시세 차익과 개발 욕망에 기대어 난마처럼 얽힌 부동산 정책을 내부에서 ‘ 정리’하듯이 해결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노동당이 내놓은 주택의 사회화 전략은, 민간주택금융 중심의 시장주도-자산추구형 정책을 공공주 도-거주중심형 정책으로 전환하는 목적에 충실하다. 여기서 핵심은 토지 및 주택에 대한 개인적 소유권 을 해체하고, 점유를 중심으로 하는 ‘ 주거권’으로 대체하는 데 있다. 소유하지 않는 거주의 권리는, 삶의 공간에 시장의 저울추를 들이대기보다는 공유와 공동 관리라는 연대성을 요구한다. 우리의 주택 정책은 2007년 ‘ 소유에서 권리로 전환’이라는 시작부터 최근 828 부동산 대책에 대한 ‘ 민간 채권의 공공 매입’ 이 라는 사회화 전략에 이르기까지, 켜켜이 쌓여 성장하는 나무하고 같다. 그리고 그 핵심은 ‘ 사적 소유권’ 을 해체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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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예술과 밥
부당해고를 당하고 홀로 회사와 맞서야 했던 그래픽 디자이너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나에게도 노조 가 있었더라면.” 숱한 투쟁 현장에서 ‘ 재능기부’ 를 해 야 했던 예술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더 이상 기부 할 재능이 없어요” 2011년 ‘ 예술인소셜유니온’ 이 첫발 을 내딛게 된 이유는 하나입니다. “밥먹고 예술하자!”
기획 / 예술과 밥
우리도 노조가 있었더라면 그래픽디자인 해고노동자의 절규
저는 그래픽디자인생산노동자입니다. 부당해고를 당해 홀로 싸움을 해야만 했던 노동자이기도 하고, 예술 영역의 일을 하고 있음에도 대부 분의 사람들이 예술인으로 여기지 않는 노동자이기도 합니다. 기고 글을 써달라는 전화를 받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하고 싶은 이야기 가 너무 많아서 해야 할 이야기를 찾아내기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고민 고백합니다. “이 싸움을 왜 시작 해 이 고생인가!” 매일매일 후회 하고 또 후회했습니다. 경제적
하고 고민하다 노동자로서도 예술인으로서도 힘들었던 제 복직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 그런 문제들이 힘들었겠 구나’ 하는 마음으로 읽어주신다면, 그래서 다음에 누군가가 저처럼 싸
인 어려움부터 사측의 계속되
워야 할 때 저보다는 덜 힘들 수 있게 힘이 되어 주실 수 있다면 참 좋겠
는 인신공격까지. 예상보다 더
다는 마음으로 조곤조곤 이야기를 해 나갈 테니 가볍게, 그러나 가볍지
아프고 힘들었습니다.
만은 않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인수인계도 하지 말고 그만두라” 저는 2년 조금 넘게 디자이너로 열심히 다니던 회사에서 2013년 4월 30일 아침에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인수인계도 하지 말고 그만두라”는 대표의 통보로 그 자리에서 해고를 당했습니다. 그가 저의 동아리 선배 였고, 제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고, 그 해고가 얼마나 부당하고 등등의 조아라 그래픽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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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여기서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처
음엔 싸우지 않고 조용히 해결하려고 하던 제가 싸워야만 했고, 결과는 서글프게도 이긴 것도 진 것도 아 니었으니까요. 네. 조금 부끄럽지만, 처음엔 대표와 싸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IT 업계나 디자인 업계에 서 이런 종류의 부당해고는 널리고 널렸고, 잔 다르크처럼 앞장서서 싸우기엔 제 그릇도 역량도 따라주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당장 ‘ 생계’가 발등에 떨어진 엄청나게 큰 불이었으니까요. 다만 워낙 초창기부터 애 정을 담뿍 담아 일하던 회사라 오지랖도 넓게 ‘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안 되지 않나’ 염려되는 마음에 중재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여긴 제3자에게 중재를 요청했습니다. “법적인 절차를 몰라서 밟지 않는 것이 아니 라 남아 있는 동료들을 위해 조용히 해결하고 싶다, 단돈 만 원도 좋으니 미안함을 표현한다면 그냥 덮고 넘어가겠다”고요. 예상하신 대로 돌아온 반응은 “모욕적인 해고통지서와 퇴직금 일부의 미지급, 고용노 동부에 징계해고로 신고”였습니다. 미지급한 퇴직금과 실업수당이라도 받으려면 싸워야만 했고, 그래서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 노무사를 소개받아 복직투 쟁을 시작했습니다.
나와 함께 싸워줄 노조가 있었더라면 고백합니다. “이 싸움을 왜 시작해 이 고생인 가!” 매일매일 후회하고 또 후회했습니다. 첫 번째 로 나를 괴롭힌 것은 뭐니뭐니 해도 경제적인 어 려움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다달이 들어 가야만 하는 금액을 끌어안고 살고 있고, 아무리 아껴도 생활비를 지출해야 하고, 그 외에도 자료 수집비를 포함해서 지출해야 할 금액들을 해결해 가며 싸우기가 너무 벅찼습니다. 두 번째로는 역시 사측의 계속되는 인신공격과 남아 있는 동료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간질이었습 니다. 각오할 만큼 각오했다고 생각했으나 상상은 상상일 뿐, 닥쳐서 당해보니 예상보다 더 아프고 힘들었습니다. 바로 전날까지 내 손을 잡고 안타 까워하던 이가 회사의 요구로 쓴 진술서가 첨부된 답변서를 받아보는 기분을 다시 느껴야 한다면 차 라리 법망을 통하지 않고 회사 가서 대표 앞에 드 러누워 돈 내놓으라고 매일 농성하는 게 더 속 편
예술인소셜유니온에서 주관한 지난 7월 간담회 <그림쟁이 들, 할 말 많다!> 웹자보
기획 예술과 밥 41
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요. 참담하다는 말로도 그 기분을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세 번째로 힘들었던 것은 ‘ 사측의 말대로 내가 잘못한 것일까?’라는 스스로를 향한 질책과의 싸움이었 습니다. 저들이 하는 이야기가 옳지 않음도 알고, 내가 설령 잘못한 부분이 있다 해도 이런 식으로 해고당 할 만큼의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음에도 늘 고개를 쳐들고 형형하게 나를 노려 보는 저 물음표는 물리칠 도리가 없었습니다. 네 번째로는 주변의 반응이었습니다. 도처에 크고 중요한 투쟁들이 넘쳐난다고 해서 저 혼자 벌인 작 은 투쟁이 중요하지 않은 것도, 제가 힘들지 않은 것도 아닌데, 제 딴엔 온 힘을 다하는 이 싸움을 너무 아 무것도 아닌 듯 말하는 이들이 참 많았습니다. 일부러 상처 주려던 것도, 의식하고 행동한 것도 아닐 거라 고 믿지만 그런 말이나 행동들을 반복해서 겪다보니 나중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졌었습니다. 그밖에도 소소하게 힘든 일들은 글로 다 적을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런저런 일들로 힘들 때마다 만병 통치약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같은 생각을 반복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 함께 싸워주는 노조가 있었더 라면…’
복직통고서 날아와 갔더니 당일 날짜의 해고통고서 돌아와 모월 모일 복직하라는 복직통고서가 날아오고, 그 날 회사에 갔더니 그 날자 해고통고서를 들고 기다 렸던 회사. 마지막까지 지저분하게 굴며 번복에 번복을 반복하던 회사. 정석대로라면 “당신들이 복직통 고서를 보냈으니 그 날짜까지 임금상당액을 정산해서 내놓아라, 합의는 하지 않겠다”라고 쿨하게 외치고 다시 받은 해고통지서를 들고 다시 싸워야 함을 알면서도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정신적으로 힘든 것 도 힘든 것이었지만 경제적으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으니까요. 복직통고서를 받았으니 이번 싸움은 이 긴 것이나 다름없다는 위로를 받고 집으로 돌아와 밤새 속상해 울고 또 울었습니다. 이긴 싸움이 아니라 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제게는 ‘ 부당해고 당하고 복직투쟁 했 던 그래픽디자인생산노동자’ 라는 역할
예술인소셜유니온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말고 다른 역할이 하나 더 있습니다. ‘ 예
듣고 앞뒤 잴 것도 없이 “저요!” 손들 만큼
술인소셜유니온(준)’의 준비위원이고, 어
오래 전부터 늘 해왔던 생각이었습니다.
쩌다 보니 유니온 내부 연대위의 운영위 원이기도 합니다. ASU(Artists Social Union/예 술인소셜유니온)을 발족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처음 듣고 앞뒤 잴 것도 없이 “저요!” 손들고 나도
좀 끼워달라고 했을 만큼 오래전부터 늘 해왔던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도 노조가 있었더라면….” ASU가 정식으로 발족하고 조합원들의 복직투쟁을 지원하는 기준이 정해져 함께 싸워줄 수 있었더라 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내가 자책할 때마다 누군가 옆에서 “네가 옳아”라고 이야기해주지 않았 42
을까? 힘들 때 이러이러해서 힘들다 고 하소연이라도 실컷 할 수 있지 않 았을까? 추후에 싸움이 끝나고 되갚 더라도 재정적으로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최소한 개인이 아 닌 노조랑 싸워야 하는 부담을 회사 에 지울 수 있지 않았을까? 싸움을 하는 내내, 싸움이 끝나고 난 이후에도 줄곧 노조가 있었다면 적어도 ‘ 혼자’ 라는 뼈 시린 외로움은 면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개인이 회사를 상대로 법적인 싸움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정확한 수치는 모릅니다. 다 만 노조와 같은 집단에 비해 상대적 으로 훨씬 적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직종들은 특히나 더 모르겠지 만, 주변의 디자이너들을 보면 아무 리 억울해도 대체로 “그냥 다른 직장 얼른 구하고 말지”하고 넘어가는 경
지난 11월 초 열린 조아라 씨의 전시전. 복직투쟁 과정에서 겪었던 고통과 상 처를 그림으로 담아냈다.(사진 : 백연주)
우가 태반이니까요. 임금체불은 노동 부에 신고해 받아내려고 노력은 해보지만 그래도 못 받으면 그냥 포기하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왜 디자이너들이 지레 싸움을 포기하냐구요? 일단 이렇게 혼자 싸우는 게 엄두가 안 나는 게 첫 번째 이유입니다. 소개를 받고 찾아갔음에도, 노무 사가 저를 잡아먹을 것도 아닌데도, 그저 노무사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 가 제 귀에 들려 무안할 만큼 떨렸습니다. 그러니 소개조차 받지 않고 무작정 노무사 사무실을 찾아가 일 을 진행하려면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또 디자이너들의 업무 특성상 “네가 못해서 해고한다”는 이유를 대면 대부분 할 말을 잃습니다. 저는 이런 구조에 굉장히 분개합니다. 디자인은 예술의 영역입니다. 디자인을 시작한 것도 화가들이고, 당연히 화가 개개인에 따라 스타일이라는 게 존재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가요? 디자이너의 스타일을 보 기획 예술과 밥 43
고, 그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서 고용하고, 그 스타일을 존중해주고 있나요? 전혀 아니지요. 대부분 관련 그래픽 툴을 얼마나 능숙하게 사용하는지가 채용조건이 됩니다. 일단 뽑아 놓고는 디자이 너의 스타일이나 성향 따윈 아랑곳없이 원하는 스타일로 원하는 대로 만들어 내놓으라고 합니다. 그 디자 이너가 그런 스타일의 작업을 소화하지 못하면 “너는 능력 없어!”라고 합니다. 이런 일이 너무 만연하니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부당한지도 모르는 디자이너들도 많고, 부당함을 알아도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디자이너도 극히 드물지요. 끊임없이 모든 스타일을 다 소화해 내려고 기를 쓰고 노력하고 또 노력합니 다. “아니, 대체 왜?”라는 질문이 아무리 머릿속을 괴롭혀도 그래야만 해고되지 않고 버틸 수 있으니 노력 하고 또 노력하다가 지쳐갑니다. 경력이 는다고 좋은 것도 아니지요. 고경력 디자이너들은 오히려 이직이 어렵습니다. 연봉을 올려주기 도 싫고, 고분고분 말 듣지 않는 디자이너는 피곤하다는 생각을 하니까요. 그것이 영역을 존중해주지 않 는 본인들의 실수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이 디자이너의 잘못이 되고 맙니다. 개인이 싸울 때는, 그것이 사측의 잘못인 것을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 사측을 이기기가 너무 힘듭니다.
혼자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함께 싸우고 싶었습니다 노조는 만병통치약도, 모든 문제의 해결도, 정답도 아닙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 모든 것을 시작할 출발 점은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저처럼 철저히 혼자라는 외로움과 공포에 몸서리치며 싸워야만 하 는 이들에게 정신적인 보호막은 되어줄 수 있을 테니까요. 혼자는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습니다. 함께 싸 우고 싶었습니다. 단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함께 싸워줄 누군가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습니다. 저는 소망합니다. 함께 싸워줄 노조가 어서 발족하고 자리를 잡아 손을 잡아주는 것부터, 등을 쓸어주 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술영역에 있다고 노동자가 아닌 것이 아니며, 산업영역에 있다고 예술인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모두가 ‘ 예술분야에 종사하는 노동자’니까요.
눈 맞추고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라고 말해 줄 수 있는 누군가가 되어 곁에 있어주면 좋 겠습니다. ‘ 세상의 논리’ , ‘ 기업의 논리’ 말 고 각 분야별 특성의 고충과 아픔을 알고 고 개 끄덕여주며 올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는 노조가 있어 힘이 되듯이 예술분야에도 그
런 노조가 어서어서 무럭무럭 자라나 예술인의 눈으로, 예술인의 고충을 공감하며, 그에 맞는 길을 찾아 나가 함께 어깨 걸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술영역에 있다고 노동자가 아닌 것이 아니며, 산업영 역에 있다고 예술인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모두가 ‘ 예술분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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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예술과 밥
인디 음악과 최저임금의 함수 관계 비(非)주류라서 인디? 스스로 선택했으므로 인디!
과연 인디(Indie) 음악이란 무엇일까? 우리나라에 인디 음악이란 개념이 생겨난지도 거의 20년이다. 1996년 크라잉 넛과 옐로우 키친의 옴니버스 앨범 ‘ 아워 네이션 1’ 이 라는 한국 최초의 인디 내지 독립 음반이 발매되면서 음악계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80년대 헤비메탈과 하드록 중심의 국내 록 음악 사회 전체가 즐기고 있는 ‘ 음악’ 과 그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는
씬이 펑크록의 영향권 아래에서 출발한 90년대 영미권의 얼터너티브 그런지 록의 영향으로 인해 펑크 밴드와 그런지 밴드라는 새로운 씬
‘ 음악인’ 들에 대한 ‘ 존중’ 을 통
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또한 인디 레이블(독립 음반사)들이 생겨나면
해, 그저 주류 음악계에 진출하
서 음반을 녹음하고 발매하는 데 있어 예전보다 진입 장벽이 낮아진
지 못해 인디 음악이 되는 것이
것 또한 새로운 현상이었다. 이후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시피 한국 대
아니라, 진정 스스로의 주체적
중음악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인디 음악들이 만들어졌고, 현
선택에 의해 인디 음악인으로 당
재는 몇몇의 인디 뮤지션들이 대중적, 상업적인 성과를 거두는 현상
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도 벌어지고 있다.
되었으면 한다.
하지만 20년 가까운 물리적 역사와 음악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한 국에서 ‘ 인디’ 란 단어는 매우 명확하지 않은 의미로 불리우고 있는 게 사실이다. 과연 인디 음악이란? 인디 뮤지션· 인디 레이블은 어떤 의미인가? 고전적이고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보면 주류의 상업 음반
정문식 뮤지션 유니온 위원장
사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원칙에 따라 음반을 제작하고 발매하 는 음악이라 한다. 한국에선 ‘ 자립’ , ‘ 독립’ 등등의 단어로 해석되기 기획 예술과 밥 45
도 한다. 그냥 단순히 받아들이면 이해가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무엇으로부터의 자립, 독립이냐는 문제 로 건너가게 되면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메이저로부터의 독립? 자주적인 제작? 어차피 한국 음악 시장에서 아이돌 댄스 음악이 아닌 다른 음악을 하려면 SM, YG, JYP등의 대형 기획사로부터 독립하여 음 반을 발매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럼 아이돌 댄스 음악을 제작하는 기획사가 아니면 모두 인디 레이블 이고, 모두 인디 뮤지션인가? 결국 별로 유명하지 않으면 다 인디라 부르게 되는 단순한 결론에 이르게 된 다.
어둡고 지저분하며 담배연기 자욱한 지하에서 연주하는 록 음악? 그렇다고 인디라는 용어가 록, 팝, 댄스, 재즈, 리듬 앤 블루스 같은 음악적 장르구분에 쓰이는가? 홍대 인디 씬 음악들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야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테지만, 아직 거의 대부분 의 사람들은 어둡고 지저분하며 담배연기 자욱한 지하 공간에서, 마냥 시끄럽게 연주되는 록 음악이 인디 음악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럼, 결론은? ‘ 별로 유명하지 않고 없어 보이면서, 시끄러운 록 음 악을 연주하는 것’이 인디 음악인 게다. 누군가는 매우 심각하고 진지한 반론을 펼칠지도 모른다. 그렇다. 내가 앞에서 내린 인디 음악에 대한 결론은 결코 정당한 개념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앞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정의를 내세운 것은 한국에서 ‘ 인디 음악’이란 개념이 가끔은 너무나도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현실에서 많이 할 수
인디란 개념은 ‘ 태도와 방식’ 의 문제다.
밖에 없기 때문이다. 먼저, 인디 음악은 음
뮤지션이나 밴드의 인지도와도 아무런 관
악 장르적인 개념이 아니다. 인디 록, 인디
계가 없다. 예술성 혹은 창작자로서의 태
팝, 인디 힙합, 인디 댄스, 심지어 인디 트로
도에 좀더 높은 비중을 갖게 되는 것이다.
트도 있다. 즉, 인디란 개념은 ‘ 태도와 방식’의 문제 다. 뮤지션이나 밴드의 인지도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유명하지 않으면 인디가 아니라 유명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게 인디다. 또한, 인디 음악 내지 인디 뮤지션이라고 해서 상업적 성공에 무조건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주류 음악계로의 진출을 무조건 마 다하는 것도 아니다. 상업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는 대중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음악이 널리 알려지고 많이 팔려나가는 것을 무조건 거부하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게 싫다면 음반도 팔지 말고 공연도 하지 않아야 하는 게 맞다. 단, 앞에서 언급한 태도와 방식 중 ‘ 태도’의 관점에서 인디 음악을 바라본다면 대중음악이 가지는 ‘ 예 술성과 상업성’ 내지 ‘ 창작자와 소비자’라는 양면성에서 ‘ 예술성 혹은 창작자’ 쪽으로 좀 더 높은 비중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뮤지션 내지 제작자가 ‘ 듣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혹은 좋아할 만한 음악’ 46
지난 8월 24일 쌍용차 범국민대회 당시 밴드 <허클베리핀>의 공연 모습 (사진 : 박성훈)
보다는 ‘ 내가 만들고 연주하고픈 음악’을 만들겠다는 지향이 인디 음악의 속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 방식’의 관점에서는 음반을 만들고 홍보하고 판매하는 방식에 있어 기존의 대규모 제작사 내지 기 획사가 취하고 있는 방식을 따르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방송 출연보다는 공연 중심의 활 동 방식, 거액의 제작비를 들여 음반을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소액의 제작비를 들여 음반을 제작 하는 방식, 음반의 유통 또한 기존 거대 유통망을 통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인 유통망을 이용하는 방식 등이다.
한국 인디 음악의 일기는 ‘ 흐림’ 이렇게 ‘ 태도와 방식’의 관점에서 내가 바라보는 한국 인디 음악의 상황은 사실 부정적이다. 2012년부 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 음원 시장’의 구조적 모순에 관한 논란들은 단지 가격과 수익 분배율의 문제가 아 닌 음악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문제의 출발점이다. 즉, 음악의 가치에 대한 공식적인 잣대라 할 수 있으므 로, 단순히 음악계 내에서만 논의되고 풀어나갈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넓은 논의의 장에서 사회적 가치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인디 음악에 있어 ‘ 음악의 다양성’은 필수적인 환경적 요소다. 주류 음악계와 달리 상대적으로 ‘ 소수 기획 예술과 밥 47
의 취향’을 가진 이들이 중요한 소비자층이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 창작자 중심의 성향’이라는 인디 음악의 속성 상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음악이 시장에서 넓게 소개되고 소비될 수 있는, 단순한 음악 시장 이 아닌 음악 생태계적인 환경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2013년 현재 한국의 음악 시장은 아이돌 댄스 음 악의 시장 점유율이 80%를 넘어서는 초유의 쏠림 현상을 보여준다. 음악 산업 내지 문화 산업에 대한 이 사회의 관점이 예전 공산품 수출 드라이브 를 추진하던 소위 ‘ 잘나가는 쪽 밀어주기’
음원 시장의 정상화는 음악 시장의 다양화
같은 7~80년대의 그것과 별 다르지 않음을
에도 필수적이다. 더군다나 인디 음악에
확인하게 된다.
서 ‘ 음악의 다양성’ 은 필수적인 환경적 요
사실 내가 보기에 이 땅의 사람들은 10대
소다. 10대부터 70대까지 아이돌만 좋아한
부터 70대까지 모두가 아이돌 그룹만 좋아
다면 뭔가 끔찍하지 않은가?
하는 것 같다. 뭔가 끔찍하지 않은가? 대체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과연 취향이란 게 존 재하긴 하는 건가?(라는 의문을 늘 갖고 산
다.) ‘ 장기하와 얼굴들’ , ‘ 십센치’ , ‘ 옥상달빛’ 등등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인디 음악도 있지 않냐고 반 문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들은 성공을 거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 그들만의 성 공’이다. 그들의 성공이 인디 음악계의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심히 비판적으로 얘기하자면 그들의 음악팬이 늘었다기보다는 ‘ 연예인으로서 그들의 팬’이 늘어났다 고 보아야 한다. 더구나 최근 <무한도전 가요제>에서 보듯이 이젠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의 음악 소비가 주류 아이돌에서 인디 음악에까지 범위가 넓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한 인디 밴드가 프로그램 말미에 기회 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멘트와 함께 보여주었던 울먹임은 한국에서 ‘ 인디 음악을 한다는 것’에 대한 회의 감이 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주류 매체의 포식자인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에서 소비되지 않으면 성공은 커녕 존재감조차 갖기 힘들어지는 것이 21세기 한국 인디 음악의, 음악 시장의 현실이다.
최저임금과 인디 음악의 관계, 그리고 뮤지션 유니온 그렇다면 한국 인디 음악의 성장 내지 음악 시장의 정상화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여러 현실적 요소 들이 필요하겠지만 ‘ 최저임금’ 과 ‘ 노동시간’의 문제가 무척 중요하다. 음악을 위시한 문화 산업 내지 시 장의 문제는 정치, 사회, 노동의 문제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인디 음악의 창작 주체들과 소비 주체 모두에게 영향을 끼친다. 인디 음악의 창작자 들의 경우 인디 씬 진입 초기부터 음악만으로 생계를 영위할 수 없기에 다른 직업을 가지거나 활동을 할 수밖에 없다.(사실 아르바이트, 비정규직 노동이 거의 대부분이라 보면 된다.) 이럴 경우, 최저임금의 수 준과 평균 노동시간은 그들의 음악 활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소비 주체 내지 소위 대중 48
이라 할 수 있는 존재들에게는 최저임금으로 대표되는 임금,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음악, 혹은 문화상품 에 지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고, 노동시간이 단축될수록 음악 공연을 위시한 여러 문화 현장에서의 향유가 가능해진다. 마지막으로 올해 9월8일에 출범한 뮤지션 유니온에 관한 소개로 이 글을 맺을까 한다. 뮤지션 유니온 은 작년 2월에 준비를 시작해서 올해 9월8일에 창립총회를 갖고 활동을 시작한 ‘ 대한민국 음악인들의 노 동조합’이다. 앞으로 뮤지션 유니온은 음악인들이 음악인다운 정당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도록 음원 가격 문제를 비롯한 음악 시장의 정상화를 위해 여러 가지 정책 결정 과정에 개입하여 음악 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표준계약 기준 마련을 통해 음악인들의 안정적이고 합리 적인 음악 활동을 가능케 하도록 할 것이며, 조합원들의 복지 향상 및 경제적 부조 활동을 통한 자립 기반 마련을 위해서도 노력할 것이다. 마찬가지 로 최저임금, 기본소득, 노동시간 단축 등 의 의제에도 뜻을 함께 할 것이다.
한국에서 아직은 생소한 음악인들의 노동
우리가 한국에서 아직은 생소한 음악인
조합을 만든 이유는 하나다. 음악의 정당
들의 노동조합을 만들고 활동을 시작하는
한 가치, 음악인들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이유는 하나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음
가치를 얻고 싶기 때문이다.
악의 정당한 가치, 음악인들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얻고 싶기 때문이다. 꼭 경제 적이고 금전적인 가치만은 아니며, 음악인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 달라는 주장도 아니다. 그저, 이 사회 전 체가 즐기고 있는 ‘ 음악’ 과 그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는 ‘ 음악인’들에 대한 ‘ 존중’을 바란다. 이를 통해, 그 저 주류 음악계에 진출하지 못해 인디 음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스스로의 주체적 선택에 의해 인디 음악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당원 동지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한다.
기획 예술과 밥 49
기획 / 예술과 밥
예술인소셜유니온 공동위원장 3인 좌담회
예술인소셜유니온 2년을 돌아보다 ■ 글· 정리 장수정 서울 서대문당협 ■ 사진 박성훈 노동당 홍보실장
“밥 먹고 예술 합시다,” “예술가도 노동자다!” 예술인소셜유니온 하 면 생각나는 두 개의 문장이다. 예술인소셜유니온은 지난 2011년 12월 < 밥 먹고 예술 합시다> 좌담회를 통해 최고은 씨를 비롯한 예술인들의 죽음으로 시작해 밥과 노동이라는 주제를 예술가들의 중요한 문제로 끌어들였다. 예술인복지법, 저작권과 예술가의 관계, 예술노동의 문제 를 아우르며 ‘ 예술가는 어떻게 노동하는가, 예술가들에게 노동의 대가 “저만 해도 쫓겨난 노동자들하
는 어떻게 주어져야 하는가?’ 라는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던 예술
고 같이 연대하는 자리에서 허구
인소셜유니온. 2년여의 시간 동안 얼마만큼 그리고 어떻게 걸어왔을까.
헌 날 가서 노래를 했는데, 남의
나도원, 민정연, 이원재 세 명의 공동위원장과 함께 예술인소셜유니온
밥 이야기를 계속 하다 보니 내
의 지난 2년과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 밥 먹는 문제에 대해서는 제 대로 얘기하지 못했던 것 같아
예술인+소셜+유니온
요.”
나도원 : 예술인소셜유니온 출발의 계기가 된 것은 2011년 12월 <밥 먹고 예술합시다>였죠? 옛 진보신당 문화예술위원회, 문화연대, 칼라 티비가 주관한 행사였는데, 그날의 의미가 있었던 것은 많은 젊은 예술 가들의 죽음이 있었잖아요? 그 죽음의 이야기를 우리가 밥이라는 의미 로 풀었던 기억이 납니다. 민정연 : 사실… 그 날 <밥 먹고 예술합시다> 행사에서의 한마디만 50
없었어도 우리는 여기 없었을 거에요. 그 때 누군가 “유니온 같은 거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나도원 : ‘ 예술인소셜유니온’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처음 이름을 제 안했던 게 이원재 공동위원장님이셨는데, 어떤 의미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원재 : 예술이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행위로서 생각하는 것, 그게 시작이 아닐까 싶어요. 우 리가 예술가들에게 밥이 필요하고,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결국 그 ‘ 밥’과 ‘ 돈’도 그 사회적 관계 안에서 생기는 것들이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사회적 행위로서의 예술이라는 것에 더 관심을 가져보면 어 떨까 생각했죠. 특히 최근의 노동운동, 노동조합운동이 비판받는 것 중 하나가 사실은 노동이 구성되는 사회적 관계에 대해서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해서라고도 생각하거든요. 조합주의에 매몰된 모습이라거 나. 우리가 실험할 예술인들의 노조에서는 그런 예술의 사회적 관계와 사회적 노동자로서의 이야기를 강 조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요즘 ‘ 소셜’이라는 단어가 가장 트렌드 하기도 해요. 유니온도 마찬가지고(웃 음). 노동조합이라는 의미 보다는 예술인들의 사회적 행위를 진단하고,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
린 조직체로서 유니온입니다. 외래어를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고요. 조금 더 다의적인 의미를 품은 말을 만들고 싶다고 해야 할까요. 민정연 : 저만 해도 다른 노동자들이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일터에서 쫓겨나서 다시 밥을 먹고 살 수 있 게 일자리를 돌려달라는 자리에 허구헌 날 가서 노래를 했는데, 남 밥 먹자는 이야기를 계속 하다 보니 내 가 밥 먹는 문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야기 하지 못했던 거죠. 나 자신도 밥을 먹고 살아야 하고, 또 재생 산을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예술인소셜유니온을 통해서 내가 밥
2012년 10월 예술인소셜유니온 준비위원회 발족식날 풍경 (사진 : 박성훈)
기획 예술과 밥 51
먹고 사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 이전과 달라진 점이 아닐까 싶네요.
변화하는 예술, 예술가의 자리 나도원 : 그렇다면 또 달라진 것들은 무엇들이 있을까요? 예술인소셜유니온이 생기고 난 후 변화한 점 도 있겠지만, 최근의 정치· 사회· 문화적인 변화들이 예술가들의 자리도 변화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하 곤 하는데요. 이원재 : 저는 며칠 전에 한 강의를 들으면서 했던 생각인데, 몇 년 전의 ‘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와 같 은 시위를 비롯해 최근의 많은 운동 주체가 예술가이거나 예대생인 경우가 많죠. 그 이유는 자본주의의 외곽에서 가장 많은 노동착취가 이루어지는 것이 예술영역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나도원 : 그리고 한국은 선진국들에 비한다고 해도 예대 졸업생들이 월등히 많잖아요? 많은 예대 졸업 생으로 인한 과잉공급 같은 것들, 그리고 따라가다 보면 자본주의의 한 양태로서 가장 취약한 측면으로 예술인 문제가 드러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저도 하곤 합니다. 민정연 : 얼마 전에 한 작가가 인터뷰 한 얘기를 들었는데. 여행 가이드북을 만드는 작가였어요. 사실 가이드북을 써서 먹고 살 수는 없죠. 그럼에도 그 분은 정보전달자라는 포지션으로의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책을 계속 써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최근에 책을 내고 독자들에게 많은 항의를 받았다고 해 요. 독자들이 예전에는 정보전달자의 역할만으로도 고맙게 느끼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내가 돈 주고 산 이 책에 대해 온갖 평가를 한다는 거죠. 더 이상 예전의 정보전달 정도로만 만족하지 않는 거죠. 어떻게 보면 이 관계가 산업 생산물을 생산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입장으로 변화한 것 같아요. 이원재 : 이것은 ‘ 과연 누가 예술가인가?’ 라는 질문과도 가까이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죠. 일단 기술의 발달. 요즘 은 누구나 DSLR을 가지 고 있잖아요? 사실 누구 나 예술에 접근할 수 있 는 조건은 만들어져 있거 든요. 이렇게 되면서 예 술가의 정체성에 대한 문 제가 제기되는 것 같아 요. 예술가들에 대한 사 52
나도원
이원재
음악비평가로 활동하며
문화연대 사무처장으로 문
노동당 문화예술위원장을 맡고 있다
화운동의 일선에서 뛰고 있다
회적 수요나 요구는 많아졌는데 상대적인 안전망의 부재의 문제는 여전하다는 거죠. 사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예술가는 구원의 주체였거든요? 예술가들은 세상을 구원하고 뭐 이런 이 야기들 있잖아요? 하지만 지금 보면 예술가들은 오히려 구원해야 할 대상이 되었어요. 가장 취약한 곳에 있는 사람들. 그래서 박근혜 정부조차 예술가들의 안정망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시대죠. 민정연 : 최근에 한국에서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늘어난 탓도 있죠.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예술가들 이 노래를 얼마나 잘하고 글을 얼마나 잘 쓰고, 얼마나 잘 만드는지에 대해 평가하는 느낌이 들어요. 쉽게 누구나 예술작품을 생산할 수 있는 사회라고 부추기는 것도 있고, 그 안에서 평가를 하는 것에 익숙해지 고 있는 거죠. 그만큼 예술을 향유하는 향취가 줄어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하구요.
예술인소셜유니온, 당사자 운동의 촉발점이다 나도원 : 이런 예술의 변화, 예술가들의 자리가 변화하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예술인소셜유니온이지 요. 예술인소셜유니온의 의미는 당사자 운동의 촉발점으로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사실 이것이 가 장 중요한 의미이기도 하지요. 또 그동안의 활동을 보면 법제도 개선과 개입이 한 축이구요. 그리고 다른 한 부분이 예술인의 사회적 역할과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공론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구성원들은 지 난 2년 동안 이런 활동을 많이 해왔는데, 이 문제의식을 예술계 전체로 확대시켜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2년 동안 이 운동을 하면서 어려운 점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 하자면 저 같은 경우 법제도 개선 활동 을 하면서 가장 큰 벽은 한국사회의 노동에 대한 인식문제, 특히 예술인 복지법 개정과 관련해서 큰 장벽 이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좀 더 중요하게 민정연
어쩌면 우리가 제일 많이 싸워야 할 대상이 정부나 사회
‘ 꽃다지’ 의 대표이자
라기보다는 기성 예술계 내부가 아니냐는 생각이 많이 듭
노동당 문화예술위원회 운영위원이다
니다. 예술인복지법의 지원 대상의 범위 문제도 보면 기 존의 예술계 분들은 기존의 기준이 너무 높다고 하면서 그다음에는 자기 단체의 기준을 들이밀면서 이 정도의 기 준은 있어야 한다, 아무나 예술인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 를 하죠. 민정연 : 그래서 예술인소셜유니온에게도 예술인의 경 계를 어디까지 할 것인가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제일 어려 운 질문이 아닐까 싶어요. 사실 우리 내부에서도 사실 명 확하게 확인된 적은 없잖아요. 저 개인적으로는 스스로 어떤 장르를 불문하고, 예술창작 행위를 하겠다고 본인 스스로가 인지한 순간부터 그는 예술인이라고 정의할 수 기획 예술과 밥 53
있고, 우리도 조합원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가가 ‘ 밥’ 을 얘기해도… “됩니다!” 이원재 : 기존의 예술가들과 부딪히는 문제도 그렇지만 저는 우리 내부에서도 좀 깨나가야 할 부분들 이 많은 것 같아요. 일례로 예술 관련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 있잖아요? 몸에까지 베어져 있는 습 관들이요.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싶은데 예술가 코스프레에 갇혀 있는 분들 많은 것 같아요. 부지런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하시는 것 같고, 예술가
“우리 내부에서도 선입견을 깨나가야
는 밥을 이야기하면 안 될 것 같고, ‘ 예술가는
해요. 부지런하면 안 될 것 같고, 밥을
가난해야 해’ , ‘ 혼자 자기의 작품을 통해 자기
이야기하면 안 될 것 같고, ‘ 예술가는 가난해야 해’ ‘ 작품으로 재능을 보여주 면 되지 예술가들이 왜 모여?’ ”
재능을 보여주는 거지 예술가들이 왜 모여?’ 이 런 얘기에 여전히 묶여 있는 거잖아요? 돈 있으 면 안 될 것 같고. 우리 안에서도 예술가 코스프 레가 우리의 진화를 가로막는다는 느낌이 많이 들어요.
민정연 : 저도 가장 먼저 우리 스스로와의 싸움인 것 같아요. 제 주변은 특히 노동이라는 말을 항상 달 고 사는 문화예술인들만 있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주로 남의 노동을 지켜주는 거고, 노동이라는 의미에 서 스스로의 이름이나 자리는 없다는 거죠. 나도원 : 우리 유니온 회의 하다보면 가끔 자기 이야기하다가 울먹울먹 하시는 분들도 있잖아요? 그분 들이 사실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었던 분들이고, 그분들에게 이야기를 하게 했다는 것에도 의의 가 있기도 하구요. 민정연 : 사실 생각해보면 유니온이 행사할 때 많이 홍보하지도 않았는데, 너무 많은 사람이 오고 자신 의 이야기를 많이 하기도 하고, 그래서 발언할 곳이 없는 이들이 와서 처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한 것도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그동안에는 사실 얘기를 할 자리도 없고, 들을 자리도 없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도원 : 저는 우리 예술인소셜유니온이 한국사회에 어떤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 라고 보고, 실효성 있는 성과를 내면서 우리가 일정한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다 같이 우리가 밀알이 됩시다.
공동위원장 3인의 대담은 진지하고 엄숙했다. 대담에 이어진 술자리에서의 여흥과는 사뭇 달랐던 그 날의 대담을 다시 떠올리니, 기사를 쓰는 내내 ‘ 왜 그렇게 진지했던가!’ 소리 없는 탄식이 나왔다. 그러니 까 다음에는 조금 더 재미있는 대담을 해야겠다는 이야기. 그리고 나도원 위원장의 마지막에 던진 농담 같은 진담. 진담 같은 농담처럼 예술인소셜유니온이 지금까지 달려온 2년 남짓한 시간이 앞을 향한 밀알 이 될 수 있기를 빈다. 54
기획 / 예술과 밥
예술인복지법, 무엇이 문제인가
근래 발표된 자료들을 보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자신을 예술인으로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지 간에, 비슷한 처지라는 영예로운 지위를 누 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용불안과 불명확한 노동관계, 장시간 노동과 임금체불의 일상화다. 현 체제의 비정규노동과 자본 중심의 간 접고용· 특수고용직 문제와 연결되면서 문화예술인 특유의 문제까지 겹쳐져 있다. 불안정과 불안전을 드러내는 지표는 더욱 많다. 얼핏 달라 문화예술정책은 예술인을 위한 정책이다. 동시에 예술인만을 위한 정책이 아니다. 문화정책
보여도 시장독점의 결과와 생산구조의 왜곡 그리고 생존권 문제라는 지점에서 만나고 있다. 예술인복지법은 산업성장의 그늘 아래에서 희생을 강요당하는 1차
은 해당 분야 종사자와 종사 예
생산자의 문제를 보완하고자 만들어졌지만 범주의 완화 없이는 실효성
정자뿐만 아니라 관심 계층까
이 의문시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제 정당들의 문화예술정책공약은
지도 포섭한다.
한류산업· 문화강국과 같은 시장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예술인을 위한 정책은 뒷전으로 미루거나 과감하게 생략 해버렸다. 진보성향 그룹에서조차 ‘ 재능기부’가 유행했고 예술인들 사이에서 는 ‘ 재능기부를 거부하고 싶다’ 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활동가급 예술 인들은 재능기부를 하도 많이 해서 기부할 재능이 바닥날 지경이다. 문 예운동뿐만 아니라 진보정당에서조차 예술인들은 선전과 동원의 대상 으로 호출되곤 했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 강조되는 데 비해, 정작 예
나도원 노동당 문화예술위원장
술인의 절박하고 시급한 노동· 생존권은 원래 그런 것이려니 한 걸까? 기획 예술과 밥 55
예술인복지와는 거리 먼 예술인복지법 2012년, 예술인복지법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첫째, 복지재단 설립과 산재보험만 내용 으로 남긴 껍데기 예술인복지법의 후속조치였다. 고용보험 등을 포괄하는 실효적 복지는 ‘ 나중에 차차 …’ 가 되어버렸다. 즉, 취지와 실효성의 문제이다. 둘째, 혜택(과연 혜택이라 할 수 있다면)을 받을 수 있 는 예술인은 고작 5만 7천 명 정도였다. 한국고용정보원과 문화체육관광부의 조사에 잡힌 수만 54만 명 이상이고, 실제로는 그 몇 배에 달하는 예술인들 중 극소수에 불과했다. 즉, 수혜대상의 범위 문제이다. 셋째, ‘ 그러니까 차차…’ 개선하더라도 운영구조와 예산확보가 중요하건만 그 방법이 의아했다. 즉, 예산 의 안정성 문제이다. 이러한 상태 그리고 이러한 수준의 ‘ 예술과 복지에 대한 관점’으로는 다수 ‘ 예술인’ 의 ‘ 복지를 증진’ 시킬 수 없었다. 더구나 다른 직종과의 공평성 문제를 들어 고용노동부와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제동을 걸었다. 예술인 들 중 다수는 고용관계가 명확치 않거나 개인사업자 신분이어서 기존 법체계로는 근로자성을 인정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이렇다 보니 예술인복지법 역시 산재보험만 남기고 애초의 취지를 살릴 수 없을 정도 로 축소되었다. 다른 보장내용, 즉 고용보험이라든가 복지기금 활용이라든가 하는 내용은 모두 빠졌다. 산재보험마저도 근로계약이 아닌 출연· 도급계약을 체결한 예술인이 선택적으로 가입하는 임의가입 형 식이며, 산재보험법 124조의 중소사업주 특례조항을 적용하여 보험료의 100퍼센트가 본인부담이다. 특히 2013년에 출범한 예술인복지재단은 우려대로 기능과 예산 구조에 의한 문화부 종속성, 기성 단체 와 중견· 원로 예술인 편향성, 의사결정구조의 모호성, 사업의 성격과 방향의 부적합성(관성에 의한 창작 지원사업과 본질적 복지체계의 혼란), 피 지원자격의 비현실성이라는 한계를 드러
2012년, 예술인복지법이 시행되었지만 혜택
냈다. 유인요인이 약하여 예술인복지재
을 받을 수 있는 예술인은 고작 5만 7천 명에
단에 등록하는 예술인들의 수도 적었다.
그쳤다. 안정적으로 예산을 확보할 방도도
그나마 대부분은 지원금 신청과 수령을
분명치 않다. 그나마도 제동이 걸렸다.
목적으로 등록한 것으로 보였다. 예술인 복지재단의 입장에선 법률의 한계와 재 정 문제로 운신의 폭이 좁았으며, 유관
기관과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복지의 개념과 방향성에 대하여 합의를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예술 인복지재단이 출범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2013년 하반기에 대표(상임이사)를 포함하여 여러 명의 직원 들이 본의 아니게 사직하는 사태까지 불러왔다. 이 사태는 기관의 지원사업에 대한 후진적인 (민관의) 영 향력 행사, 기관의 인사에 대한 권력의 노골적인 개입, 산하기관의 구조적 종속성 문제를 드러냈다. 전환 과 재설정 그리고 행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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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인식의 전환 첫째, 예술인복지재단은 독립적 기관이어야 한다. 별도의 예산확보 방안이 중요한 이유이다. 문화부 에 종속된 집행기관의 성격보다는 이사회의 구성 방식 혹은 예술계 대표자들의 협의체 기능의 보완이 필 요한 것도 독립성을 위한 장치를 위해서이다. 후자의 경우 기득권에 의한 중립성 문제가 대두한다. 그러 므로 둘째, 기성 예술인과 단체는 기득권과 기존회원 이익 중심의 현실 안주와 현실 수긍의 관성을 벗어 던져야만 예술계 전체의 미래에 기여할 수 있다. 셋째, 기성 협회들의 기능과 예술인복지재단의 기능은 구분된다. 협회는 사적 영역을 담당하고 예술인복지재단은 공적 영역을 담당한다. 만약 두 영역을 혼동한 다면 예술인복지법은 중견예술인예우법에 그칠 소지가 크며, 이는 다수 예술인과 신진그룹의 냉소와 소 외로 귀결될 것이다. 넷째, 복지와 지원제도를 혼동해선 안 된다. 복지는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기본적으 로 제공하는 안전망이지 봉사와 기여에 대한 대가로 지급하는 것이 아니다. 다섯째, 그러므로 복지를 말 하면서 예술인을 ‘ 특수한 자’ 로 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면 해결할 수 없는 문답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문화산업구성원 즉 사회 혹은 문화산업과 유무형의 계약을 맺은 노동자 개념을 도입할 때에 비로소 복지 의 구성이 가능하다. 이래야만 예술인복지법과 예술인복지재단에 대한 대다수 예술인들의 냉소와 신진 그룹의 소외를 해소할 수 있으며, 1· 2차 생산자인 예술인을 사회안전망으로 포섭함으로써 문화산업의 정상화를 기할 수 있다.
2011년 10월 노동당(당시 진보신당) 문화예술위원회와 문화연대, 칼라TV가 주관한 문화예술인 집담회 “밥먹고 예술합시다”
기획 예술과 밥 57
② 예술인복지재단의 재설정 단체 중심이 아니라 장르· 영역별 대표와 전문가들을 모으는 테이블을 구성하고(기획과 설계에서는 문화예술단체의 수장들보다 예술인복지정책전문가들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의사결정과정은 투명하고 공개적이어야 한다. 관련 재정은 독자성을 확보해야 한다. 예술인 복지의 재원을 일정 규모 이상 혹은 일 정 수준 이상의 이윤율을 기록한 중대형 영화· 출판· 음악(서비스)회사 등 문화산업기업의 복지세나 출 연금 형태로 예술인복지기금을 조성하고, 문화산업계를 위해서도 실효성 있는 문화정책을 시행하는 것이 다.
③ 예술인복지법 개정운동 네덜란드의 WIK(최저생활보장제도)는 법정 최저선 이하 소득의 예술인을 위하여 보충소득을 지원한 제 도였다. 독일은 1981년에 예술가사회보험법을 제정하고 1983년에 KSK(예술인사회보장금고)를 만들어 자영 예술가들이 건강· 상해· 연금보험을 반값(예술인 50%, 연방정부 20%, 문화산업기업 30% 분담)을 내면서 혜택 받을 수 있게 했고, 프랑스 역시 자영업 예술인들을 위해 유사한 사회보험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이탈리 아에선 ENPALS(특별사회보장)의 인증을 통하여 공연영상예술 노동자의 현실에 맞게 실업급여뿐만 아니 라 사회보험제도를 포괄 제공한다. 프랑스의 앙떼르미땅은 비정규직 예술인들을 보호하는 실업수당 지 급제도이다. 캐나다는 예술가지위법으로 예술가들이 일반 노동자와 다른 지위를 인정해주면서 그에 따 라 복지제도 적용이 가능하도록 해놓았다. 룩셈부르크는 2004년부터 문화사회기금을 통하여 예술활동을 통한 소득이 최소기준에 미달하면 최저생활을 부조하며, 아일랜드 역시 공적연금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이 배제에 주력한다면 선진국은 포섭을 위하여 노력해왔다. 당사자들의 행동이 필요하다.
좌파정당의 역할 좌파정당은 진보성향 예술인들과 같은 편이 되어야 하고, 깨어있는 문화향유자들을 끌어당겨야 한다. 문화예술정책은 예술인을 위한 정책이다. 동시에 예술인만을 위한 정책이 아니다. 문화정책은 해당 분야 종사자와 종사 예정자뿐만 아니라 관심 계층까지도 포섭한다. 또한, 청년· 비정규직· 여성노동 문제와 강하게 결부되어 있다. 비정규 노동자의 권익과 제도 바깥의 노동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선례가 될 수 있 다. 그럼에도 갈수록 활발해지는 문화의 새로운 움직임과 소통하는 단위가 드물었다. 또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문화예술정책의 중요성과 관심도는 날로 커지고 있는데도 대응은 미진했고, 광범위한 예비지지자 들을 포섭하지도 못했다. 주체화한 당사자와 예비지지자들의 결집과 정책적 체계화는 좌파정당의 역량 과 직결된다. 예술노동의 현실 인식, 문화의 중요성과 예술의 영향력 주시, 배제되고 미조직된 주체의 가 능성이야말로 놓쳐선 안 될 지점들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정책으로 현실화하고, 구체화하는 활동을 지 원하며, 적극 가담해야 한다. “주목하라 예술노동, 응답하라 노동당!” 58
이재영을 추모하며
정책이 살아야 진보정당이 산다 장상환 경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원장
오는 12월 12일은 고(故) 이재영 의장이 짧은 생을 마감한 지 1주년이 되는 날이다. 고(故) 이재영 의장은 10여 년 넘는 시간을 진보정당 운동에 헌신하면서 오늘날 진보정당의 정책 골간을 다져 놓았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진보정당에게 정책 생산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현시기 진보정당의 정책은 10여 년 전 고(故) 이재영 의장이 만들어 놓은 틀을 크게 뛰어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실정이다. 진보정당의 실천활동이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요소는 첫째, 주어진 상황과 조건 에 맞는 설득력 있는 정책을
이념적 지향을 제시하는 데 그쳐서는 다른 보수· 자유주의 정당과의 차별성을 확보하 지 못한다. 정책이 질적으로 우수해야 한다.
적기에 생산하고 공급할 수 있는 능력, 둘째로 이를 실행 할 수 있는 실행능력이며, 셋 째, 이를 뒷받침하는 인적 요 소와 기초 활동자금이다. 첫
째 요소인 정책 생산 공급을 담당하는 진보정당 정책위원회가 하는 일을 보면, 강령 초안을 만들거나 강령을 개정하는 일, 각종 선거 때 정책공약을 작성하는 일, 일상적 정책을 생산 하여 당의 실천활동을 뒷받침하는 일 등이다. 강령은 현실에서 목표로 이르는 경로를 제시 한다. 정책은 현실에서 전략을 실현해가는 무기다. 이념적 지향을 제시하는 데 그쳐서는 다 른 보수· 자유주의 정당과의 차별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정책이 질적으로 우수해야 한다. 정책은 당의 지향과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현실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앙상한 관념에 그쳐 서는 안 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통계와 심층조사 등을 통해 현실을 파악하 고 외국의 유사 사례를 풍부하게 수집해야 한다. 또한, 정책생산의 과정은 민주적이어야 한 이재영을 추모하며 59
다. 정책위원회 안팎의 전문가들이 참가하여 정책초안을 작성하되 당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관련 단체 들의 정책을 참고하고 수용해야 한다.
오랜 정책활동이 쌓여 민주노동당 창당의 기반 이뤄 민주노동당은 지난 97년 대통령선거대책기구인 “국민승리21”을 모태로 해서 2000년 1월 30일 창당되 었다. 1997년 외환위기 후 노동자들이 실업의 공포에 대처하는 데서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면서 창당의 기반을 얻게 되었다. 창당 기반을 확보하는 데서도 정책활동의 역할이 결정적이었 다. 대선 직후 1998년 국민승리 회원이 3천여 명에 그치고 상근자가 10여 명인 상황에서 국민승리21은 노 동자들의 현실적인 고민을 풀어주기 위해 ‘ 실업대책본부’ 를 구성하여 활동했다. 실업대책본부 활동을 통 해 노숙문제, 청년실업문제, 실업통계문
1998년 대선 직후 국민승리21은 실업대책본부 를 구성했다. 당시의 정책활동은 노동 정치에 대한 회의적 분위기를 일소하고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나아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제, 고용보험문제, 노동시간 단축문제 등 김대중 정부의 실업대책의 허점을 부각 시키는 동시에 설득력 있는 정책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문제를 일정하게 개선하도 록 강제하는 성과를 낳았다. 이러한 실업 대책본부의 구성과 활동은 국민승리21의
조직적 기초인 민주노총 내에서 노동 정치에 대한 회의적 분위기를 일소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로 써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태동의 산파이자 동시에 성장의 조직적 기초가 된 것이다.1)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 간부와 활동가 조합원들이 조직의 근간을 이루고, 정당 활동 실무는 진보정치 단체 활동가들이 맡았다. 이재영 국장은 1992년 민중당, 1995년 진보정당추진위원회에서부터 정책을 담 당해왔다. 정책위원회는 강령 제정을 주관했다. 민주노동당은 강령의 내용에서 볼 때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향 하는 정당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강령에서 명시하지는 않지만, 민주노동당은 “자본주의의 질곡을 극복” 하고자 하며 동시에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되,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 칙을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해방공동체(노동자와 민중 중심의 민주적 사회경제체제)를 구현”하고자 했 기 때문이다. 당시 이재영 정책국장이 강령의 핵심 내용을 담은 전문 초안을 최종적으로 다듬었다. 민주노동당은 당원 수가 2000년 창당 당시의 13,068명에서 2001년 12월 20,300여 명, 2002년 7월 21,958명, 2002년 말 29,112명으로 늘었다. 민주노동당은 2000년 4.13 총선에 모두 21명을 출마시켜 지역구 평균 13.1%의 지지율을 기록한 데 이어 2002년 6· 13 지방선거에서는 8.1%를 득표(134만 표, 구청장 2명,
1) 송태경, “민주노동당 - 그 성장의 비결과 한계에 대해”, 제주지역 『한국사회에서의 진보정당 토론회』 발제문 2002.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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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의원 11명, 기초의원 32명 당선)하여 자민련을 제치고 3위를 차지했다. 민주노동당은 정책정당으로서 의 면모를 보였다. 2002년 초 중앙당 상근자 40여 명 중 정책위원회 상근자가 7명(이재영(국장), 송태경(국 장), 박창규(부장), 김정진(부장), 문성준(부장), 김윤철(상임정책위원), 곽주원(상임정책위원) 등)이었다. 정책위원회를 대단히 중요시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2004년까지 1석의 원내 의석도 없는 상황에서 정 치관계법 개정, 상가임대차보호법 제정(2000년 상가임대차보호법 청원운동, 2001년 12월 상가임대차보 호법 국회통과), 이자제한법 입법 청원, 노동자 경영참가법 입법 운동, 부패방지법 제정(2000년 부패방지 법 제정 100만인 서명운동 돌입),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사업, 재벌의 부정축재 재산의 국민환수운동, 용 산 미군기지 반환운동, SOFA 개정운동 등을 활발하게 벌였다. 민주노동당은 2000년 1인 1표제에 의한 비례대표선거 방식에 대해 위헌 제청하여 2001년에 위헌판결 을 받아냈다. 헌재는 공직선거법 위헌 판결(2000헌마91, 112, 134)을 통해 국회의원선거에 후보자에게만 표를 던지는 1인 1표제에 대해 이것이 직접선거 원칙 위배(비례대표 선출을 직접 하지 못함), 평등선거 원 칙 위배(무소속후보자에 대한 투표는 비례대표 선출에 전혀 이바지하지 못해 투표가치의 불평등을 가져 옴)로 판단하여 “1인 1투표 제도를 통한 비례대표 국회의원 의석 배분 방식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이에 따라 2002년 지방선거와 2004년 4.15 국회의원 선거에 ‘ 1인2표 정당명부 제도’ 를 도입하게 되었고 이것은 신생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지방의회와 국회 에서 의석을 얻어 원내로 진입하는 데 중요 한 제도적 기반이 된다. 2002년 12월 16대 대선에서는 95만 7천 148표(총 유효표의 3.9%)를 얻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부자에게 세금을, 민중에
2000년대 초반 의석 하나 없는 상황에서도 민주노동당은 정책 정당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뒤에는 늘 이재영 정 책국장이 있었다.
게 복지를”이라는 슬로건과 ‘ 부유세 도입’ , ‘ 무상교육, 무상의료 실현’ 등을 대표공약으로 제시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이재영 국장은 김정진 변호사 를 정책부장으로 영입하여 1년여 기간의 공을 들여 부유세 공약을 만들도록 했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4.15 총선에서 두 명의 지역구 의석(창원을 권영길, 울산북구 조승수)과 13.1%의 정당득표율로 여덟 명의 비례대표 의석을 확보했다. 총선 승리에는 2002년부터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 가 앞장선 ‘ 학교급식조례제정운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때도 이재영 국장이 박창규 부장을 영입 하여 급식조례제정운동을 정책으로 지원하도록 했다. 2002년 6· 15 지방선거를 통해 지방의회에 진출한 민주노동당 의원들과 민주노동당 지역위원회는 지역 시민사회와 함께 힘을 모아 대대적인 학교급식조례 제정 운동을 전개했다. 2002년 5월,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전라북도 23개 단체가 운동본부를 구성하고 조 례(안)을 만들어 도 교육위원회에 조례제정을 요구하면서 조례제정운동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이어서 2002년 10월, 전라남도 민주노동당 전종덕 도의원은 도의회에서 급식조례 제정을 요구했다. 그 결과 2003 년에는 전국적인 급식조례 제정 운동의 열풍을 몰고 오며 우리나라의 학교급식 역사에 신기원을 마련했 이재영을 추모하며 61
다. 2003년 학교급식운동본부에 민주노동당 중앙과 지역이 결합하여 급식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고, 2003년 9월, 전라남도에서 전국 처음으로 주민발의에 의한 학교급식조례가 제정되었다. 이후 전국 시도 광역시와 기초자치단체에서 경쟁적으로 학교급식조례를 제정하는데 민주노동당이 견인차 역할을 했다.
노동이 실종된 진보정당, 대중과 멀어진 정책들 2005년 이후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급락하고 결국 2008년 분당에 이르렀다. 2005년부터 격화된 정파 대립이 격화된 결과 민중민주파 세력들이 이탈하여 진보신당을 결성하면서 민주노동당은 민족해방파만 남게 된다. 2011년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탈당파의 3자가 통합하여 통합진보당을 결성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지역구 7석, 비례대표 6석(정당득표 10.5%)을 얻었지만 비례대표 후보 선출 부정선 거를 둘러싼 충돌의 결과 인천연합파, 국민참여당계. 진보신당 탈당파가 탈당하여 진보정의당을 결성했 다. 이로써 현재 진보정당은 통합진보당,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 등으로 분립되어 있다. 최근 통합진보당 은 ‘ 이석기 그룹의 내란음모 혐의 기소’ 와 ‘ 정당해산 심판 헌재 청구’ 로 위기에 처해 있다. 정의당과 노동 당은 한 자릿수를 넘지 못하는 지지율로 존재감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진보정당이 지리멸렬의 위기에 처 한 것이다. 이렇게 진보정당이 위기에 빠진 원인을 살펴보면 첫째, 당 조직 면에서 양극화체제에 포섭된 상층 노 동자세력, 대기업 정규직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 조직의 상층부를 기반으로 하게 되면서 ‘ 노동이 실종 된 진보정당’ 이 된 탓이다. 파견 하청 노동자까지 포함하는 하층 노동자에 대해 상층 노동자 중심의 민주 노총은 자본과 권력을 향해서는 ‘ 비정규직 철폐’ 를 외쳤지만, 비정규직의 노조 가입을 배제한 상태에서 활동은 구호에 그쳤고 힘이 실리지 않았다. 실망한 비정규직은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외면했다. 민주 노총 지도부가 민주노동당에서 추구한 것은 대기업 노조의 경제적 이해를 대변하는 ‘ 대리 정치기구’ 역 할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08년과 2012년 총선에서 진보신당이 참담한 패배를 겪은 것도 마찬가지다. 비 정규직 후보를 비례대표 후보의 앞자리
자본과 권력을 향해서는 ‘ 비정규직 철폐’ 를 외쳤지만 비정규직의 노조 가입을 배제한 상 태에서 활동은 구호에 그쳤고 힘이 실리지
에 배치한다고는 했지만, 비정규직을 주 체로 하는 진보정치의 실천이 채워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 당 운영 면에서 민족해방파가
않았다. 실망한 비정규직은 민주노총과 민주
득세하면서 분파주의가 만연하고 당내
노동당을 외면했다.
민주주의가 실종되었다. 민족해방파가 득세한 과정을 보자.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슬로건은 ‘ 평등’과 ‘ 자주’ 두 개였다. 민주노동당의 애초 가치는 ‘ 민주, 평등, 해방의 새 세상을 위하 여’였으므로 평등이 중심 가치가 되어야 하는데 권영길 후보는 선거운동에서 자주파의 활동력을 활용하 62
고자 자주파를 끌어들이면서 민족해방파의 요구를 수용하여 ‘ 자주’라는 가치를 대선 슬로건으로 올린 것 이다. 그때부터 민족해방파의 득세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2004년 총선 이후 당직 선거에서 온갖 비정상 적인 방법으로 표를 동원하여 민족해방파가 승리하면서 정파 갈등이 첨예해졌다. 당의 의사결정에서 정 파적 이해관계가 앞서고 당원대중의 요구 가 반영되지 못했다. 셋째, 정책 측면에서 비정규직 등 기층
2004년 총선 이후 들어선 민주노동당 민족해
대중의 생활문제 해결에 주력하지 않은 것
방파 지도부는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에
이 문제였다. 2004년 12월 당원 총진군 대
모든 당력을 쏟아 부었고 이것은 민주노동당
회를 열어 국가보안법 투쟁에 전력투구한
의 정체성을 흔들어놓았다.
것과 2005년 1월 윤종훈 회계사가 정책위원 을 사임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참여정부가 4대입법 개혁에 나서자 민주노동당 민족해방파 지도부는 ‘ 열린우리당 2중대라는 비난을 들어도 좋다’라 고까지 하면서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에 모든 당력을 쏟아부었고 이것은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았다. 2005년 1월 14일 윤종훈 회계사가 사임했는데 그가 이야기하는 사임 이유는 다음과 같다. “부유세 문제는 단순한 법안 하나가 아니다. (중략) 엄청난 저항에 대응하려면 세수에 대한 과학적 분석은 물론, 설득할 수 있는 그림을 보여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소위 진짜 ‘ 선수’들을 모아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하 고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당력을 총집결시켜도 힘든 문제인데, 그간 당 지도부나 간부들 이 보여준 몰이해를 봤을 때, 이는 거의 ‘ 불가능’에 가깝다는 심증이 굳어졌다. (중략) 조세개혁 법안이 1 차로 최고위원회에서부터 부결됐다. (중략) 자영업자 소득파악과 간이과세 폐지에 대해 당의 간부가 일방 적으로 인터넷에 조세법안에 대한 반대글을 올려 당내 논란이 있기도 했다. 지금까지 ‘ 국보법 철폐’에 올 인하면서 부유세에 당력을 기울이는 게 낭비라는 분위기가 당내에 분명히 있었다.”2) 넷째, 실천에서 의회주의에 지나치게 기울었다. 진보정당의 지도적 인사나 민주노총 간부 등은 의회에 자리를 얻는 데에 주로 관심을 가졌다. 2004년 이후 계속된 자주파의 당권 장악 목적도 국회에서 자파의 의석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2007년 대선 후보 선출에서 권영길 의원이 노회찬 의원이나 심상정 의원에게 바통을 넘겨주지 않고 자주파의 힘을 업고 후보로 선출되는 무리를 강행한 것도 2008년 총선에서 국회의 원에 당선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분당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다. 2011년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 당, 진보신당 탈당파의 통합에 의한 통합진보당 결성도 유시민 등 지도적 인사들의 대통령 후보를 향한 정치적 욕망이 주된 배경이었다. 그 결과가 결국 폭력사태와 분당으로 나타났다.
이재영의 빈자리, 아쉬워하는 데 그치지 말았으면
2) “윤종훈 회계사가 민노당을 떠나는 이유”, 『프레시안』, 2005. 1. 15
이재영을 추모하며 63
민주노동당 창당 이전부터 (前)진보신당 정책위 의장에 이르기까지, 한국 진보정당 운동에 함께 해왔던 이재영이 오랜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장례식 모습 (사진 : 박성훈)
진보정당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과제는 무엇인가. 첫째, 당 지지기반의 측면에서 비정규직 을 확대하는 방법으로 노동자 계급 중심을 확립해야 한다. 계급문제로 환원되지 않는 여러 문제들이 있겠 지만 노동자계급이 중심이 되지 않는 진보좌파정당은 문제를 해결할 힘을 가지기 어렵다. 또 진보좌파정 당의 분열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노동자계급이 중심이 되는 당 기반이 어느 정도 확립되었을 때에만 자유 주의와 타협한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진보세력들을 통합한 진보좌파정당을 제대로 건설할 수 있을 것 이다. 둘째, 실천의 측면에서 의회주의에 경도되지 않고 사회운동적 정당의 모습을 강화해야 한다. 대중의 생활상의 요구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진보정치를 대의제 안에 가두고 대중운동 등을 배제하거나 부차적 으로 삼으면 일부 정치인들의 권력 추구 행위만 남을 것이다. 셋째, 급진적인 정책과 실천을 구체화해나가야 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양극화가 심화되고 2008년 세계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낮은 경제성장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에 따라 한국 사회도 청년실업 증가, 소 득분배 불평등 심화, 가계부채 급증, 부동산 거품 발생, 노령기 위험 증가 등 양극화와 불안정이 심화되었 다. 그것을 부추기는 힘은 외국 금융자본의 요구에 의한 재벌 대기업의 수익극대화를 위한 중소기업 경영 압박, 노동권 침해 등이다. 보수 새누리정당 박근혜 대통령까지도 재선과정에서 경제민주화를 내세우게 64
된 배경이다. 따라서 진보좌파진영의 당면 과제는 시대적 조건 변화에 맞추어 정책을 발전시키고 이를 위한 실천을 강화하는 것이다. 우선 경제민주화의 내용을 급진화할 필요가 있다.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이 내세우는 피 상적 수준의 재벌개혁이나 독과점 규제가 아니라 갖가지 행태를 부추기는 보다 근본적인 요소인 재벌총 수의 소유지배구조를 해체하여 민주적 참여기업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노동자 경영참가와 사회적 소유 확대를 추진해가야 한다. 또한 소득 재분배 확대를 위한 재원 확보를 위하여 부유세를 넘어서 전반적인 증세를 내용으로 하는 조세개혁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진보정당의 주된 목표세력을 위한 대중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예컨대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생 활임금을 보장하고 최저임금을 크게 인상해야 한다. 빈곤층을 위한 ‘ 주거보조금 지원’과 임대료 통제, ‘ 임대차갱신 거절권 제한’ (임차기간 연장 보장) 등의 요구를 내걸고 청년 빈곤층들이 임차가옥 퇴거거부 투쟁을 전개하도록 해야 한다. 빈곤노령자 들의 생활안정을 위한 기초연금 실질화 운
고(故) 이재영 의장의 1주기 추모가 단순히
동을 진보정당이 주도해야 한다.
그의 빈자리를 아쉬워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현재 노동당은 당원수가 1만 4천여 명 에 이른다. 그러나 상근자가 15명에 그치
바란다. 그가 열망했던 민중의 정당이 되기
고 그 중 정책위원회 상근자는 고작 2명뿐
위한 우리의 실천과 정책을 돌아보는 계기가
이다. 이것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중
되었으면 한다.
앙당 상근자를 30명 이상으로 늘려야 하고 정책위원회 상근자도 5명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전문가들, 시민사회단체들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하 면서 현실 타당한 힘 있는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다. 상근자 인건비를 위한 재정이 부족하다면 당비를 인 상하여서라도 예산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추진력 있는 사무총장과 정책위원회 의장을 기대한다 무엇보다도 고(故) 이재영 의장의 1주기 추모가 단순히 그의 빈자리를 아쉬워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 란다. 활동가들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보정당의 책무를 재확인하고, 그가 열망했던 민중의 정당이 되기 위 한 우리의 실천과 정책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재영을 추모하며 65
진보정책의 아이콘
이재영 유고집 발간
1권 이재영의 눈으로 본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 2권 비판으로 세상을 사랑하다 이재영 지음/이재영추모사업회 엮음/레디앙, 해피스토리 펴냄 가격 30,000원(총 2권)
진보정당운동에 평생을 바친 이재영 前 정책위원회 의장이 세상을 떠 난 지 1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재영 추모 사업회>에서 1주기를 맞 이하여 이재영 유고집을 발간하였습니다. <이재영 추모 사업회>는 이 재영의 유자녀 장학금 마련을 위해 후원 사업을 하고 있으며, 유고집 의 인세와 출판사가 기부하는 수익금도 추모 사업회의 유자녀 장학금 조성에 보태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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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교사가 가진 유일한 힘은 양심 울산 전교조 선생님들의 이야기 4대강 파괴를 중단하라는 시국 선언을 했다고 해직이 되고, 일제고사 대 신 아이들과 함께 체험학습을 갔다는 이유로 또 해직이 됐다. 이제 국가 는 그 해직교사들의 조합원 자격을 박탈하지 않으면 법외노조로 간주하 겠다고 협박한다.
노동르포
교사가 가진 유일한 힘은 양심 울산 전교조 선생님들의 이야기 서분숙 기록 노동자
개교한 지 이제 5년이 막 지난 학교여서인지 교정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무들은 모두 키가 작다. 어린 묘목일 때 막 옮겨 심은 듯한 나무들은 이제 제법 어른 다리 굵기만큼 튼실 해졌다. 가을이라고 단풍마저 물들어 있는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장인권 선생님은 이 교정에 옮겨져 온 나무들이 단단히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이 학교를 떠났다. 전교조 울산 지부장의 역할을 하기 위해 잠시 떠났던 학교로 다시 돌아오는 시간은 예상보다 길어졌다. 이 학교가 개교한 이듬해인 2009년에 학교를 떠난 선생님은 그해에 시 국선언을 이유로 다시 해직 교사가 되었다. 1989년에 이은 두 번째 해직이었다. 복직 판결 후 다시 학교로 돌아올 때 까지 그는 또다시 4년 6개월의 시간을 거리의 교사로 살아야 했다.
섬, 이어지지 않는 2013년 7월 1일, 장인권 선생님은 다시 울산 다운중학교로 돌아왔다. 떠날 때 중학교 일 학년이던 아이들은 모두 학교를 졸업했고 교무실의 선생님들도 새로운 얼굴들이었다. 여
4대강 파괴를 중단하라는 시국 선언을 했다가
전한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무들뿐이었다.
해직된 게 2009년. 그리고 올 여름, 거리에는
화려한 꽃들로 장식된
국정원의 선거 개입을 규탄하는 촛불이 타오
꽃다발을 받으며 돌아온 학
르고 있지만 학교 안은 전혀 달라진 게 없었
교였지만, 마치 잠시 시간
다.
여행을 다녀온 듯 원래의 위치로 돌아와 있을 뿐 해
직 기간 동안 학교는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으로 바깥세상은 뜨겁게 촛불이 타오르고 있을 때였다. 4대강 파괴를 중단하라는 시국 선언을 했다가 해직된 게 68
2009년. 그리고 올 여름, 그때보다 더 뜨겁게 국정원의 선거 개입을 규탄하는 촛불이 타 오르고 있지만 학교 안은 전혀 달라진 게 없 었다. “사대강 파괴든 국정원 선거 개입이든 시 대적 상황은 다르겠지만 그것은 모두 불합 리한 것에 대한 저항이죠. 내가 지난 4년간 해직되어 있는 동안 사회적으로 전혀 달라 진게 없었어요. 학교로 돌아 왔을 때 느낌은 꼭 섬 같았어요.” 전교조 결성과 관련해 첫 번째 해직 후 1994년에 학교로 돌아왔을 때는 승리감이 컸 다. 천 오백 여명의 해직 교사들이 다시 돌아 온 학교는 학부모로부터 ‘ 촌지 안 받기’와 같 MB정권 당시 시국선언을 했다가 해직됐던 장인권 선생님
이 일상 속에서 교육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 작했다. 학교 운영 비리를 고발하는 일도 다
반사였다. 해직 교사의 복직은 단순히 학교로 돌아가는 차원을 넘어 전교조가 반드시 이루고자 했던 참교 육의 이념을 학교에서 펼칠 수 있는 힘을 마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올해, 선생님은 섬과 같은 시간에 머물고 있다. 학교를 떠나 있었던 긴 시간들이 흐른 후 다시 학교로 돌아왔지만 지나온 시간들과 현실의 시간들은 이어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더 단단해질 수 있 는 시간들이라 하지만 개인적 의미로만 가둘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그동안 거리에서 어떤 날들을 보냈던 가. 노숙 농성을 하고 또 다른 교사들의 징계와 해직이 반복되는 교육청에서 구사대 같은 교육청 직원들 과 맞서 싸우고, 마침내는 교육감 선거에까지 출마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수많은 날들과 학교는 이어지지 않는다. 학교와 세상 사이, 그 사이 장인권 선생님은 섬처럼 떠 있다. 공허하다는 선생님의 마음을 채우는 것은 역시 아이들이다. 시간과 시간 사이의 섬같은 공허함을 메꾸 며 달려오는 것은 아이들이다. 열 네살 중학교 일학년 아이들이 아무리 이기적이고 철없이 굴어도 역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훈계나 외면이 아니라 진정성이다. 불합리한 세상의 한복판에서도 끄떡도 않고 굴러가는 학교. 비리에 맞서는 교사들을 내치고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도 냉혹하게 스스로의 살 길만 찾을 뿐인 학교안에서 그래도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불합리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아이들에게서 나온다. 아이들은 섬처 럼 막막한 학교 안에서 장인권 선생님이 웃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
노동르포 69
내 해직이 그 누구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았으면 지난 10월 19일, 해직 교사의 조합원 자격 유지 여부를 묻는 전교조 총투표가 열리는 동안 그 누구보다 도 마음이 무거웠던 사람들은 9명의 해직 교사들이었을 것이다. 6만여 명의 조합원이 있는 노동조합의 법 적 지위 여부를 9명을 버리고 갈 것인지 말
지난 10월 19일, 해직 교사의 조합원 자격
것인지의 여부로 결정하는 순간은 당사자인
유지 여부를 묻는 전교조 총투표가 열리는
해직 교사들에게는 얼마나 무겁고 잔인한
동안 그 누구보다도 마음이 무거웠던 사람 들은 9명의 해직 교사들이었을 것이다.
순간일 것인가. 해직 교사들을 안고 가겠다 는 68%의 선택이 눈물겹게 고맙지만 고용노 동부의 시정 명령을 수용하자는 의견도 이 해한다는 한 해직 교사의 말은 그만큼 자신
들이 그 어느 누구에게도 부담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해직은 그 자체만으로도 당사자에게는 고통이지만 자신의 해직이 동료들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기에 이르면 그 고통의 깊이는 가늠하기 어렵다. 9명의 해직 교사뿐만 아니라 많은 전교조 해직 교사들은 자신들의 해직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순간에 놓이게 될까봐 늘 가슴을 졸이 며 살아왔다. 해직 자체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건 자신들의 해직을 이용해 동료들의 목을 조이는 순간일 것이다. 2009년 3월 30일. 그 날은 전국의 초등학교에서 일제고사가 실시되던 날이었다. 일제고사에 반대한 교 사들이 줄줄이 파면이나 해임을 당하는 발단이 된 날이기도 했다. 조용식 선생님은 고등학교 교사이다. 일제고사가 치러지던 날, 전교조와 함께 하는 체험 학습에 참석하기 위해 그는 학교에 연가를 내었다. 그 가 인솔해간 아이들은 초등학생들이었다. 고등학생들조차 버거워하는 일제고사를 이제 겨우 열 살 안팎 의 초등학생들에게 치르게 하는 일은 막아야 했다. 3월 달이 되어서 새로 만난 선생님과 친구들을 사귈 틈도 없이 아이들은 일제고사를 준비한다는 명분 으로 나눠 주던 시험지만 기계처럼 반복해서 풀어야 했다. 신나게 뛰어 놀던 체육 시간은 일제고사를 대 비한 시험지 풀이 시간으로 채워졌고 미술이나 음악 시간에도 일제고사를 위한 시험지 풀이만 되풀이 했 다. 아이들의 가방에는 학교에서 풀다 만 시험지가 담겨서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졌고 밥 먹을 틈도 없이 학원으로, 집으로, 문제 풀이와 숙제에 시달렸다. ‘ 연막탄을 쳐서라도 초등학교 시험만은 막아야 한다’던 어느 교사의 절규처럼, 일제고사가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던 잔인한 봄이었다. 일제고사를 치르지 않은 초등학생들과 함께 체험학습을 가서 아이들을 안전하게 돌보고 돌아 온 게 조 용식 선생님이 해직된 이유였다. 고등학교 교사가 연가를 내고 초등학생들의 체험학습에 동행한 이유로 해직되었다는 게 황당하고 어이없었지만 해직 그 자체보다도 더 그의 마음을 누르는 게 있었다. 자신의 해직이 일제고사를 반대한 다른 교사들에게 미칠 영향력이었다. 70
조용식 선생님은 2009년 일제고사를 치르지 않은 초등학생들과 함께 체험학습을 다녀왔다는 이유로 해직됐다.
“나는 그래도 전교조 활동을 오래 해왔지만 다른 지역의 교사들은 이제 막 전교조에 가입한 상황이었 어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일제고사에 반대한 젊은 교사들이 많았는데, 내 해직이 그들의 해직을 합리 화하는 기준이 될까봐 그게 늘 맘에 간절하게 닿았어요.” 고등학교 교사가 연가를 내고 초등학생들과 체험학습을 함께 갔다는 이유로도 해직이 되었다는 게 기 준이 되어 버리면, 일제고사에 선택권을 준 담임 교사들이나 일제고사를 반대하는 편지를 보낸 교사들에 대한 징계는 훨씬 무거운 수준으로 이루어지는 게 합리화 된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면서도 자신의 해직으 로 행여 다른 교사들에게 더 큰 어려움이 미칠까봐 선생님은 해직 기간 내내 애가 탔다. 조용식 선생님은 해임 후 넉달 뒤 다시 학교로 돌아 왔다. 무리한 징계가 낳은 당연한 결과다. 4개월의 해직 기간을 합해서 오 년째 몸담은 이 학교에서 내년에는 다른 학교로 옮겨야 하지만 그가 전근 올 것이 예상되면 학교는 먼저 같은 과목의 다른 교사를 초빙해 버리곤 했다. 오라는 학교는 없지만 그가 늘 학교 에 머물고 싶은 이유는 그곳에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해직 교사가 되어 이 학교를 떠나던 날 교문 까지 따라 나와 그를 응원한 이들도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의 담임 자리조차 조용식 선생님에게는 늘 먼 자리였다. 새 학기면 매번 담임에서 제외될 땐 심장이 멎은 듯 마음이 아려왔다. 조용식 선생님을 만나고 나오는 길에 학교 인근에서 몇 명의 고3 학생들을 만났다. 사흘 뒤가 수능 시 험이지만 학생들의 표정은 편안해 보인다. 학생들은 학교생활이 재미있다고 했다. 그 이유는 학생들의 이 야기를 잘 들어 주고 존중해 주는 선생님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교조 선생님이냐 아니냐는 사실은 노동르포 71
아이들에게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단지 수업 시간 중 아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고 마음을 잘 알아 주는 선생님들은 거의 다 전교조 선생님들이라는 게 아이들의 분석이었다. 텔레비전에서 가끔 보도되는 전교조 관련 뉴스도 아이들에게는 별 영향력이 없다고도 했다. 전교조가 종북 교육을 했다는 뉴스가 나와 도 아이들은 그런 뉴스를 잘 믿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만나고 있는 선생님이 중요할 뿐, 전교조에 대해 아 무리 나쁜 보도를 해도 그걸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거라는 게 아이들의 판단이었다.
교사는 정치적인 인간이다 장인권 선생님은 2010년 울산 교육감 선거에 후보로 출마했다. 해직교사이면서 전교조 지부장이었던 신분을 벗고 그는 몇 달간을 예비 교육감 후보로 현장을 누볐다. 교사가 왜 정치적 인간이 되어서 안되는 가. 교육 현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교사들이다. 그것도 교장이나 장학사가 아니라 평교사들이다. 아이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겪으며 누구보다도 아이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그가 청소년들 에게 당부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앞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행복한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행복한 사람이 먼 미래에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장인권 선생님은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마련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그의 핵심
장인권 선생님은 2010년 울산 교육감 선거에
공약 중에는 일제고사 폐지와 무상급식 실현이 있다. 경쟁 교육을 없애고 무상
후보로 출마했다. 교육 현장을 누구보다 잘 아
급식을 통한 교육 복지를 실현하는 것이
는
아이들에게는 행복의 바탕이 된다. 그는
사람은 교사들이다. 장인권 선생님은 일제고사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를 현실 속에서 만
폐지와 무상급식을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다.
들고자 혁신학교 운영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불과 한두 해 전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교육감 선거라는 현실 정치의 한복 판으로 뛰어든 것이다. 처음 출마한 선거였지만 그는 26.8%라는 높은 지지를 받았다. 비록 낙선을 했지만 그의 출마는 현장의 교사가 정치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고자 한 소중한 기회였다. 교사는 왜 정치적인 행동을 할 수 없는가. 시국선언을 정치적인 행동으로 규정한 정부는 장인권 선생님을 교단에서 내몰았다. 교사가 정치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해직은 오히려 그를 현실 정치의 한복판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그는 다시 학교로 돌아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해직자에서 다시 교사로 돌아온 신분의 차이가 있 을 뿐, 여전히 그는 신념을 현실 속에서 이루고자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정치적이냐 아니냐하는 것은 신 념을 재단하는 것이다. 신념은 보거나 만질 수 있는 물질이 아니라서 애초 규정하거나 판단할 수도 없는 72
박근혜 정부의 전교조 탄압을 규탄하는 울산시민 결의대회에 모인 전교조 조합원들 (사진 : 울산저널)
것이다. 전교조 조합원 중 해직교사는 9명이 아니라 22명이다. 정부가 전교조에서 내쳐 버리라고 주문한 9명의 교사는 전교조의 활동가를 포함해서 대부분 서울시 교육감 선거와 관련해서 해직된 교사들이다. 문자 메 시지로 투표를 독려했다는 게 해직 사유였다. 정권은 왜 이렇게 교사들을 두려워하는가. 교사들이 가르칠 교과서조차 검열하고 수정 작업을 지시하는 진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반공 교육이 극에 달했던 칠십년대에는 북한 사람들을 뿔 달린 도깨비라고 가르치던 시절이 있었다. 초등학교의 교육 자료에는 인민복을 입은 늑대가 바지를 뚫고 긴 꼬리를 늘어뜨린 채 총을 들고 서있는 그림이 담겨 있는 것도 있었다. 강하게 세뇌된 의식은 좀체 진실이 들어앉을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아직 도 종북몰이 사냥을 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어린 시절에 물든 반공 의식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가 장 쉽게 사람들의 행동을 변하게 하는 건 세뇌화 작업이다. 교사를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 교과서 의 내용을 하나하나 뜯어고쳐서 교실로 보내는 것. 이 모든 작업들의 근본은 교육이 아니라 세뇌를 위한 것이다. 교사가 누구보다 정치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을 가르치기 때문이 다.
지금의 시련은 살아 있는 생먕을 불어 넣을 기회 스멀스멀 독가스처럼 서서히 번지던 고등학교 보충수업이 이제는 대놓고 초등학교로까지 번졌다. 여 름방학 겨울 방학은 사라진지 오래고 아이들은 방학식을 한 다음날부터 학교에 나가 보충수업이라는 명 노동르포 73
분 아래 또 다시 학교 수업을 이어 간다. 음악과 체육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서술형 평가라는 명분 아래 아 이들의 시험은 늘어났다. 교사가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건 바로 아이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경쟁으로 내몰고 줄 세우기에 급급한 현실은 제도 교육의 교사들 몇 명의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전교조가 학교 안에서 종 이 호랑이처럼 무력해진 것도 교사 개개인의 성향의 문제보다도 그것이 개개인의 노력으로 바꾸기에는 어려운 문제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전교조는 지리멸렬합니다. 틀은 있어도 내용은 없습니다. 세포가 다 죽었어요. 오히려 지금의 시 련들은 오히려 전교조에게 살아있는 생명을 불어 넣을 기회입니다. 안으로부터 피가 도는 전교조로 태어 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역사적으로 봐서도 지금의 시련이 썩 부정적이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장인권 선생님은 전교조의 창립부터 지금까지 전교조의 모든 세월의 한가운데 있었던 사람이다. 그 많 은 탄압도 돌파하며 지켜온 전교조가 법외노조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 선생님의 마음은 상실감을 넘어서 분노가 일었다. 한편으로는 서글픔이 밀려오기도 했다. 그것은 지난 세월을 거쳐 온 역사에 대한 서글픔 이었다. 어떻게 지켜온 전교조인데 이렇게 전교조를 우습게 보는가 싶은 회한이 밀려왔다. 하지만 전교조 에 대한 탄압은 전교조의 가치를 알려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교사들만의 조직이 아
“신뢰가 강요한다고 되나요. 내가 아는
니라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된 전교조라는
것과 가르치는 것과 사는 것이 같을 때
걸 깨달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도
신뢰가 생기지요.그렇게 되기 위해 항상
했다. 2009년, 장인권 선생님의 두 번째 해직
노력하는 모습이 교사의 힘입니다.”
사유가 되었던 교사 시국선언에는 ‘ 교사가 가진 유일한 힘은 양심’이라는 글귀가 있 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선생님께 물어 보았다. “교사는 결국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변화를 돕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은 만남을 통해 이 뤄집니다. 아이들과의 만남의 수단은 교재가 아니라 내 몸과 마음입니다. 입시에 끌려 다니는 교사가 아 니라 인간 자체의 변화를 함께 할 수 있으려면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신뢰가 강요한다고 되나요. 이것은 양심입니다. 내가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과 사는 것이 같을 때 신뢰는 생기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기 위해 항상 노력하는 모습이 교사의 힘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좌절할 시간을 가질 여유조차 없다. 전교조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시련을 기회 로 만들어 온 전교조의 힘. 그 힘은 곧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힘이다. 거칠고 낯선 길이지만 전교조가 다시 일어나서 걸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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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리포트
현대중공업, 12년 만에 민주노조 들어서
강성노조 불안하다고? 울산 동구는‘ 날씨 맑음’ 김용화 울산시당 부위원장, 금속기아지부 판매지회 교육위원
동토의 땅이라 불리던 울산 동구에 새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현대중공업에서 민주노조 가 부활한 것이다. 무려 12년 만에 소위 ‘ 민주파’ 가 노동조합 사무실을 탈환한 것이다. 이 를 두고 이 땅의 대부분의 방송과 신문들은 하나같이 재벌 편을 들어 ‘ 강성노조’의 위험성 을 경고하고 나섰다. 요즈음 공중파 중에 그나마 가장 진보적(?)이라는 SBS조차 “더 달라고 떼를 쓰면”, “드러누우면 돈을 더 주더라는 학습효과”, “노조의 무리한 요구와 장기 파업으 로 과거 기업 자체가 공중분해 될 뻔했던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자동차 등과 같은 사례를 우 려하는 시각” 등의 말로 재벌의 시각에서만 뉴스를 전하고 있다.1)
‘ 떼 쓸 권리’ 는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자의 기본권 대한민국 헌법 제33조 1항은 이렇다.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 결권·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그리고 노동3권에 대한 법리적 해석은 이렇 다. “1. 단결권: 근로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근로조건의 유지, 개선, 기타 근로자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위하여 근로자들이 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권리 2. 단체 교섭권: 근로자들이 노동단체를 통해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사용자와 자주적 으로 교섭할 수 있는 권리 3.단체 행동권: 근로자가 작업환경의 유지, 개선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집단적으로 시위행동을 함으로써 업부의 정상적인 운영을 저해할 수 있는 권리.” SBS 식으로 말하자면, 이처럼 대한민국 헌법은 노동자가 ‘ 돈을 더 받기’ 위해 ‘ 떼를 쓰 거나 드러누울’ 권리를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다. 언론기관이라는 데서 대한민국의 정체
1) 2013년 10월 28일자 SBS <이형진의 백브리핑 시시각각>
노동리포트 75
성을 부정하는 것도 모자라 사실왜곡마저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다니.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자동차가 노조의 무리한 요구와 장기 파업으로 공중분해 될 뻔 했나? 한진중공업 은 생산기지를 필리핀 수빅으로 옮기기 위 해 고의적으로 영도조선소를 위기로 몰아넣 었고, 쌍용자동차에서는 상하이자동차의 먹 튀를 위해 회계장부조작까지 해서 건실한 기업을 부실기업으로 만들어 정리해고를 자 행했다. 이것이 국책연구원도 인정하는 사 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정병모 현대중공업 노조 위원장 당선자와의 인터뷰 모습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복직돼
(사진 : 황보곤)
민주노조가 부활한 현대중공업이 위치한 울산 동구는 언론보도처럼 위기 속에 망연자실해 있을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그 옛날 현대엔진 노동자 들이 ‘ 일하는 기계가 아닌 인간’임을 선언하며 중장비와 오토바이를 앞세우고 넘었던 남목고개를 넘어 동구로 가 보았다. 지난 10월30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조합원 오세일 동지가 원직복직을 했다. 그는 산재를 당한 후 해고되었고, 대법원에서 복직 판결을 받고도 또 다시 해고되었다. 다시 소송을 걸어 거듭 대법원으로 부터 복직 판결이 나오는 와중에도 꿈적 않던 회사가 이번에 복직을 통보해온 것이다. 정병모 현대중공업 노조 위원장 당선자는 “그의 복직을 민주파 당선 덕분이라고 하면 오세일 동지의 투쟁을 욕되게 하는 일 이다. 그것은 현장의 힘이고, 오세일 동지와 사내하청지회의 끈질긴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 말한다. 하지만 주위에서는 그의 복직이 민주노조 복귀와 무관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당사자인 오세일 동지 또한 세 번째 해고에 대한 부담감 뿐만 아니라 민주노조의 복귀와 내년 지방선거에 대한 부 담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말한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민주노조 복귀를 현대중공업 조합원보다 더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는 소식을 여 기저기서 심심찮게 듣는다. 오세일 동지는 현대자동차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임금차별과는 비교 도 안 되는 임금차별이 존재하는 현대중공업 현실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민주노조에 거는 기대가 실 로 엄청나다고 한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자칫 민주노조가 현대자동차처럼 대리교섭을 할 경우 조직력이 전혀 없는 사내하청지회가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내놓고 있다고 한다. 사내하청지회가 자주적 76
인 노동조합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민주노조가 통로를 열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밝히는 그의 목소 리엔 실로 오랜만에 활기가 넘쳐났다. 얼어붙은 동토의 땅에 골리앗 투쟁의 뜨거운 기운이 맴돌고 있는 듯하다.
“현대차와의 임금 격차, 억압적인 노무관리… 불만이 쌓이고 쌓여 폭발했다” 현대중공업에 근무하는 고교 후배 이승근 (가명, 37)씨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현장 분위 기를 물었다. 회사 측의 어마어마한 부정선거
현대중공업에 근무하는 고교 후배가 전하는 현장 분위기도 무척 들떠 있다.
를 뚫고 민주파가 당선될 줄은 몰랐다며 들뜬
회사 측의 어마어마한 부정선거를 뚫고
분위기를 전한다. 그는 현대차와의 임금 격차
민주파가 당선될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와 생산과정에서의 억압적인 노무관리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쌓여서 폭발한 것 같다고 말한다. 정병모 위원장의 전언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조선소의 노동이 열악하고 힘들기 때문에 조선 업종의 기본급이 자동차에 비해서는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용노 조 12년의 결과는 기본급마저 자동차에 추월당하는 현실을 만들었다. 이승근 씨는 작업과정에서 현장 목 소리가 많이 강해질 것이라고 기대를 했다. 가면 갈수록 노무관리가 억압적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했다.
주름진 지역경제, 민주노조에 기대를 건다 저녁시간이다. 현대중공업 앞에서 28년 째 보양식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고객 집을 찾았다. 이 식당으 로 자녀 셋을 모두 대학에 보냈으며, 그 중 둘은 서울과 수도권에 있는 대학을 졸업했다. 동구의 대표적인 보양식 맛집 중 하나다. 조선소 노동자들은 노동이 고되기 때문에 먹는 것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그 래서 현대중공업 근처에는 고기와 보양식을 파는 식당이 유난히 많다. 올 때마다 손님이 만원이었는데 북 적거려야 할 저녁시간이 의외로 한산하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째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김성민(가명, 43)씨는 삼사년 전부터 여름 한 철 장사로 일 년을 빠듯하게 살 정도로 손님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한다. 그 전에는 가족 단위의 식사뿐만 아니라 부서 회식도 많았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는 부쩍 줄었다고 한다. 그는 조선 경기가 어려워져서 회식비가 줄어들어서 그럴 것이라고 말했지만, 현대중공업 노동자 이승근 씨의 말은 다르다. 회식비는 줄지 않았다고 한다. 동구의회 노동당 황보곤 의원의 분석은 이렇다. “현재 동구는 정규직들이 시내로 많이 빠져 나갔다. 실 재 동구 소비는 현대중공업 총고용의 6~70%인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담당하고 있다. 실질임금 저하로 인 해 이들의 구매력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바탕에는 원청의 하청에 대한 도급단가 후려치기가 있고 그런 요인들 때문에 협력업체의 회식마저 줄고 있다.” 노동리포트 77
정병모 위원장 “노조의 자주성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시급해” 마지막으로 정병모 위원장을 만났다. 2014년 현중 노조의 목표 한 가지만 말해달라는 질문에 정 위원 장은 단호한 어조로 “민주노조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노조의 자주성을 회복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3.15 부정선거에 버금가는 회사의 노골적인 부정선거 개입을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선거를 포함한 역대 노조 선거에서, 비밀 무기명 투표가 보장되지 않고, 회사가 미는 후보를 지지하지 않을 것 같은 조합원은 출근마저 못하게 하는 비열한 방법까지 다 동원되었다고 했다. 현장에서 조합원들이 당당하게 발언할 수 있는 기틀을 다시 세우겠다는 강한 의지도 밝혔다. 그 과정에서 대의원들이 발목을 잡을 수도 있지 않을 까? 이러한 우려에 대해서는 민주노조를 열망하는 조합원들의 강력한 뜻에 함부로 반하지 못할 것이라는 조심스런 진단을 했다. 설령 그런 일이 발생하더라도 조합원과 함께 심판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도 밝혔다. 사내하청 노동자와 관련해서는 우선 “정규직 노조가 도와준다는 접근은 옳지 않다”고 못박는다. 그러 면서도 사내하청지회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노조가) 일을 해야 한다는 요구도 거세다며 고민 이 많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내하청지회와
사내하청 현장 실태파악부터 시작하여 급여명세서 표준화, 협력사 임금지원에 이르기까지, 정병모 위원장 당선자는 사내하청지회와의 대화를 통해 함께 할 일을 모색하겠다고 답했다.
대화를 통해 함께 해야 할 일을 모색하겠다고 답했다. 2011년 노동당(당시 진보신당) 울산시 당의 실태조사에서 드러났듯이 사내하청 노 동자들은 같은 일을 하더라도 업체마다 제각 각 임금이 다르다며 현장 실태파악부터 시작 하겠다고 밝혔다. 아마도 업체의 횡령이 존 재하는 것 같다는 조심스런 추측도 내놓았
다. 또한 현재 사내하청노동자에겐 쪽지 수준의 초간단 급여명세표가 나가는데 이를 정규직과 똑같이 표 준화해서 노동자들 스스로가 자기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하여 업체가 중간 에서 편취를 할 수 없도록 제도를 바꾸겠다고 했다. 협력사 임금지원과 더불어, 지역 골목상권 활성화를 위해 우선적으로 기존의 복지카드 제도를 개선해서 지역의 자영업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는 얘기도 털어 놓았다. 그는 노동당 당원이다. “무늬만 당원”이라고 손 사레를 쳤지만, 당에 한 마디 해달라는 요구에 “진보정 당이 대단히 깨끗한 집단인데 대중들에게 타락한 집단으로 매도되어 있어서 대단히 안타깝다”며 도덕적 으로 깨끗하지 못한 집단에 대해서는 대중에게 과감하게 아니라고 말하면 좋겠다고 전했다. 그리고 힘들 게 일하는 노동자와 서민 그리고 대중을 위한 당으로 대중의 신뢰를 회복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더하여 고생하는 모든 당원동지들에게 존경과 경의를 드린다며 활짝 웃었다. 옆에 있던 울산동구 황보곤 의원은 후원당원 사업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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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현장에서
잠깐만요, 외부세력이 무릎담요 좀 들고 가실께요~ 밀양으로 간 마산당협 <희망노리터> 김숙진 경남 마산 당원
밀양에서 송전탑 공사가 재개되기로 결정되고 어르신들이 실려나갈 때, 김밥 싸서 밀양으 로 달려갔다. 전국에서 노동당 당원들의 후원이 이어졌다. '김밥 연대'를 하고도 남은 후원금 으로 이번에는 무릎담요를 만들어 보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즉시 실행에 들어가는 무서운 사람들, 경남 마산의 노동당 거점공간 <희망노리터>를 만나보자.
<희망노리터>는요 마산합포구 자산동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비롯한 도시빈민, 그리고 도심에서 밀려난 젊은 세대가 주로 분포된 지역입니다. 노동당 활동당원도 많이 삽니다. 자산동 당원들과 당원 소모임 깨뚱구리 등에서 민중의집을 만들자는 의견이 모아지고 올해 초 기획단이 꾸 려지면서 공간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상근활동가가 없는 상태라 매주 화요일 정기 모임을 가지면서 이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궁리 중입니다. 그 동안 당원모임도 활 발히 진행하지 못했던 터라 매주 모임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도 당원이 꾸준히 모이다 보니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나오게 되고 사업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하지만 몇 가지 프로그램을 진행 중입니다. 그동안 두 번의 영화상영회, 천연생 활용품 만들기, 기타교실, 밀양송전탑공대위 지원사업 등을 벌였습니다.
“남은 후원금을 어뜩하지?” 밀양과 <희망노리터>의 만남은 지난 여름에 모기퇴치제를 만들어 갖다드리면서 시작됐 지역에서 현장에서 79
<희망노리터>에서 만든 천연모기퇴치제(왼쪽), 송전탑반대 투쟁현장으로 보낼 김밥을 만드는 터민들(오른쪽)
습니다. 밀양 송전탑 공사를 막기 위해 어르신들이 매일같이 올라가시는 곳이 산속인지라 모기와 벌레에 많이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희망노리터>에서 그간 천연생활용품 만드는 법을 열심히 배우고 익힌 솜 씨를 발휘해 지난 여름 천연 모기퇴치제 100개를 만들어 전달했어요. 한전이 다시 송전탑 공사를 강행하면서 지역주민들이 힘들게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 <희망노리 터>에서 작은 힘이라도 보탤 것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공대위에서 핫팩을 요청하는 글을 보고 저거라도 보내자 해서 모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페이스북, 밴드, 카톡 여기저기 올렸더니 예상보다 많은 후원금이 걷혔어요. 1차로 <희망노리터>에서 핫팩 100개를 보냈는데 그 뒤로 당원뿐만 아니라 전국의 시민들이 수 천 개의 핫팩을 밀양으로 모아서 보냈대요. 당분간 핫팩은 넉넉할 듯 싶어서 남은 후원금을 어떻게 집행 할 것인가를 또 고민했죠. 그러다가 대책위 주민들과 활동가들이 식사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얘기를 듣고 자연스럽게 김밥 이라도 싸서 보내자는 의견이 모아졌어요. 노리터 회원과 창원당협 당원까지 합세해서 여섯 시간 꼬박 작 업하여 꼬마김밥 700개 정도를 만들어 전달했습니다. 김밥 700개를 싸던 날, 하필 그 전날 마산동부서로 연행됐던 부산지역 활동가 한 사람이 석방되었습니 다. 그래서… 연행됐다 풀려난 동지를 잡아다가 김밥노역을 시켰습니다.(^^;) 원래 목표는 150인분 750개 였어요. 빨리 만들어서 신선한 상태로 보내려다 보니 시간에 쫓기게 되어서, 점심은 터진 김밥으로 때우 자 하고 시작했어요. 그런데… 꼬마김밥이다 보니 이게 잘 터지지도 않는 겁니다. 결국 쫄쫄 굶으면서 김 밥을 만들었어요. (웃음) 80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김밥을 그만큼이나 쌌는데도 후원금이 또 남는 겁니다. 이번엔 또 무슨 사고를 칠까 궁리에 궁리를 하 는데 마침 날씨가 쌀쌀해지더라고요. 추우면 외로운 법이고 외로우면 더 추운 법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 아 날씨는 추워질테고 산골은 도시보다 먼저 추위가 찾아들지요. 그들에게 힘이 될 만한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고 폭풍검색하다보니 무릎담요가 딱이겠다 싶었습니다. 무릎담요를 만들겠다고 했더니 또, 또 후 원금이 쏟아져 들어오더라고요. 뿐만 아니라 재봉틀도 여기저기서 나타났어요, 하다 안 되면 손바느질이 라도 할 생각이었는데.(웃음) 1차로 무릎담요 50장을 꼬박 사흘동안 작업한 끝에 지난 10월 22일 밀양 바드리 현장에 갖다드렸습니 다. 사실 이쯤에서 밀양 지원사업은 다른 방식으로 하는 게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남도 당 위원장이 밀양에 갔더니 다른 현 장 주민들께서 무릎담요 얘기를 하 시더라는 겁니다.
“1차 작업이 너무 힘들었던 터라 ‘ 이번엔 사서 보 내는 게 어떠냐’ 고 물어봤어요. 그런데 이 이상
1차 작업이 너무 힘들었던 터라
한 사람들이 ‘ 사서 보내는 건 의미가 없다’ 는 거
<희망노리터> 회원들에게 미안한 마
예요. 어쩔 수 없이 또 신나게 미싱을 돌렸습니
음이 들어서 ‘ 이번엔 사서 보내는 게
다.”
어떠냐’ 고 물어봤어요. 만드는 거나 사는 거나 비용은 비슷하거든요. 그런데 이 이상한 사람들이 ‘ 사서 보내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어 쩔 수 없이 또 신나게 미싱을 돌렸습니다. 이번에도 또 넉넉하게 후원금이 걷혔고, 이제는 제법 숙련공이 되어 2차분 50장은 단 하루만에 완성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쌀을 기증해주신 분이 계셔서 떡국떡도 만들고, 안 입는 겨울점퍼도 모아서 다시 밀양에 다녀왔습니다.
밀양을 만난 이후 <희망노리터>는요 아무래도 친밀도가 부쩍 높아졌죠. 예전에는 많아야 한 달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했는데 매주 모임이 열 리고 밤새도록 둘러앉아 미싱을 돌려대는데 안 친해지면 그게 더 이상하죠. 김밥 싸고 무릎담요도 만들다 보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 공장놀이’가 시작돼요. 너는 사 장, 나는 작업반장, … 쉴 틈도 없이 ‘ 작업라인’ 돌린다며 농을 주고받다 보면 어깨가 빠질 듯 아픈데도 표 정들이 하나같이 밝습니다. 거기다 김밥 쌀 때 후원했으면서 담요 만든다니까 또 보탠다고 난리. <희망노 리터> 터민들끼리 ‘ 과잉오지랖증후군’이라고 놀리곤 합니다. 밀양 송전탑 반대투쟁에 전국에서 후원과 참여가 이어지면서 하나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지는 것도 우 리에겐 행복입니다. <희망노리터>에서 떡국떡을 만들어 간다고 하니 거제에서는 떡국에 넣을 다시멸치 지역에서 현장에서 81
▲한창 재봉틀을 돌리는 터민들. ◀밀양으로 간 <희망노리터>표 무릎담요. 움막의 외풍을 막는가 하면 할 매들은 치마처럼 허리에 두르기도.
를 보탭니다. 무릎담요를 만들어 이고 올라가 보면 부산 당원들이 장작을 패고 어르신들 농사에 일손을 거들고 있습니다. 때마침 울산의 연대단체와 당원 들이 절편을 만들어서 갖고 옵니다. 마산에서, 거제 에서, 울산에서, 그리고 전국에서 보내주는 이름 모 를 도움의 손길들에 이르기까지, 밀양은 고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희망노리터> 터민들 또한 무슨 거 창한 사업을 한 게 아닙니다. 생각해보니 그저 스스로 행복해지는 길을 찾은 것 같습니다. 언제나 큰언니 역할 톡톡히 하시는 홍기운 당원, 갓 백일 지난 아기 업고 미싱 돌린 최미희 당원, 손바 느질 재미에 흠뻑 빠진 송창우 당원, 주야 교대근무 하면서도 스텐실 작업해 준 이원희 당원… 모두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엔 또 어떤 일거리가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하세요. 후원금이 또 남아버렸거든요. 씨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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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단일기
못 배워도 알아들어야 평등이다 <한글 바르게 쓰기 조례> 발의· 통과시켜
의원단 일기
못 배워도 알아들어야 평등이다 <한글 바르게 쓰기 조례> 발의· 통과시켜 화덕헌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의회 의원
‘ Sun & Fun 해운대’의 시니어문화바우처사업? 2010년에 처음 구의원으로 당선되고 나서 내 앞에 펼쳐진 모든 게 낯설고 또 신기했다. 공무원들 이름은 고사하고 부서명이나 과장들 얼굴 익히기도 버거웠고, 직원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시작하는 구청 생활도 연일 어색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배운다고 다짐했지만 그 다짐은 이내 산산조각이 났다. 부서별로 업무보고를 받고 추경예산을 심의 하고 곧바로 결산으로 돌입했는데 뭐가 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제출받는 서류들은 하 나같이 딱딱한 관공서 용어 투성이에다 어려운 외국어가 섞여 있었다. 아무리 내가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안 했기로서니, 관공서 문서들은 어려워도 너무 어려 웠다. 복지 관련 부서들의 업무보고에서 생전 처음 보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 바우처 사업’ 이라니? ◇◇바우처? ○○바
아무리 내가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안했기로 서니, 관공서 문서들은 어려워도 너무 어려 웠다. ‘ 바우처 사업’이라니? 도대체 바우처 가 뭘까? “저기요” 하고 물어볼 수도 없었 다.
우처? △△바우처? 도대체 바우처가 뭘까? 다른 의원들 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보 고를 잘 받고 있는데, 나만 행정에서 쓰는 용어를 모른 다는 사실이 들통날까 봐 얼 굴이 화끈거렸다. “저기요!”
하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 바우처’는 식권과 같은 무료 이용권을 일컫는 말이었다. 예를 들어 여행 바우처는 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이용권을 말한다. 2010년 내가 바우처라는 말의 뜻을 몰라 부끄러웠다면, 이제는 이런 단어가 행정에서 버 젓이 쓰이고 있는 현실을 용인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왜 이리 어려운 영어를 사용할 84
1970년대 도로변에서는 ‘ 주차’ 도 ‘ PARK’ 도 아닌 ‘ 둠’ 이라는 표지판을 흔히 볼 수 있었다(왼쪽). 눈높이를 낮추어 본다면 이런 도로 표지가 누군가에겐 글자가 아닐 수도 있다(오른쪽).
까? 아니 꼭 어렵지 않더라도 공문서에 이런 생소한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 온당한가?
‘ 바우처’ 가 필요한 사람들은 ‘ 바우처’ 를 모른다 예컨대 동네 어르신들이 ‘ 목욕 바우처’를 지급한다는 공지를 보았다 하더라도 과연 이게 무슨 사업인 지 알 수 있을까? 이 사업의 수혜 대상자들은 경제적 수준이 열악하고 교육 수준 또한 낮은 저소득 계층이 다. ‘ 바우처’라는 단어를 알아들을 만한 사람들에겐 이미 ‘ 바우처’가 필요 없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의 무교육을 받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물어보아야 그 뜻을 알 수 있는 그런 단어를 관공서에서 쓴다는 건 심각한 문제다. 1979년 겨울, 영국에 한파가 몰아닥쳤을 때 정부는 저소득층에게 난방수당을 추가로 더 줄 테니 신청 하라는 통지서를 보냈다. 아마 모르긴 해도 그 통지서는 ‘ 한파 특보가 발령되어 신청가구에 한하여 난방 수당을 추가 지급하고자 하오니’ 로 시작했을 것이다. 그 쪽지에 쓰인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읽지 못한 어느 늙은 어머니와 딸이 난방유가 다 떨어졌는데도 추위에 버티다가 얼어 죽는 사건이 터졌다. 이 안타까운 사건에 항의하며 한 여성이 관청 앞에서 공문서를 찢으며 벌인 특이한 시위는 유명한 일 화다. 지나가던 경찰관이 난해한 법률 용어로 해산을 경고하면 그 경고마저도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 때부터 영국 사회에서는 공문서를 쉬운 말로 고쳐 쓰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처럼 공문서에서 한글을 쉽 의원단일기 85
고 바르게 쓰자는 것은 단순히 국수주의적인 태도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삶의 질 또는 생존이 걸린 문 제이기도 하다.
23년 만에 공휴일 된 한글날, <한글 바르게 쓰기 조례> 만들다 눈높이를 낮추어 보자. 지자체에서 새 주소에 따라 바꿔 달아놓은 도로 표지판도 누군가에게는 ‘ 읽어 도 무슨 말인지 모를’ 물건이 되었다. 해운대 달맞이고개 아래에 있는 오솔길은 갑자기 ‘ 문탠(moon-tan) 로드’가 됐다. 달빛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길이니 햇볕에 태우는 ‘ 선탠’이 아니라 ‘ 문탠’을 갖다 붙인, 웃 지 못할 작명 즉 ‘ 네이밍’인 셈이다. 2006년 제정된 새 주소법은 길 이름을 중심으로 주소를 짜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해운대의 APEC로처 럼 파주의 LG로, 테크노파크로, 엘씨디로, 메타폴리스로, 오투로, 오크밸리길, 테마타운길, 에코파크길 등등 희한한 도로명들이 마구 생겼다. 기존의 우리말 도로명 중에서 사라진 이름이 4,000개에 이른다고 한다. 또한, 이명박 정부시절에는 녹색성장이 화두였는데, 그러다 보니 적지 않은 행정용어나 사업이 ‘ 그 린’으로 분칠갑을 했다. 그린코디, 그린리더, 그린주차장, 그린시티, 그린로드 심지어 해운대에는 ‘ 그린 녹지 사업(!)’도 있다. 국어기본법의 존재를 알기 전에는 그
구청에서 제출되는 각종 서류는 해운대구의
저 영어를 사용하지 말자고 읍소하거나
발전상에 걸맞게 점점 더 ‘ 글로벌화(?)’ 된다.
주의를 주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한글문
‘ 어메니티한 해운대 건설,’ ‘ 그린녹지사업(!)’ 같은 황당한 사례에 이르기까지.
화연대 이건범 대표의 경향신문 칼럼을 읽으면서 국어기본법의 존재를 알게 되 었다. 구청에서 제출되는 각종 서류는 해운대구의 발전상에 걸맞게 점점 더
‘ 글로벌화(?)’ 되어간다. “어메니티한 해운대 건설”처럼 어려운 뜻이나 개념을 사용하는 것부터 공문서에 사소한 단어들을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괴상한 사례도 늘어갔다. contents, up-grade, MOU 등등. 조례제정을 앞두고 언론사에 보낼 보도 자료를 준비하면서 2013년 제출받은 해운대구의 각 부서별 업 무계획서도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10쪽 남짓한 서류인데, 거의 대부분의 부서에서 10회 이상 국어기본법 을 어기고 있었다. 많게는 30회 이상 어긴 부서도 있다. 흔히 각 부서에서 작성하여 의회로 제출되는 문서 는 회의를 마치고 나면 그냥 버려지는 게 다반사다. 하지만 그것이 비록 의원의 손에서 버려지더라도 한 부는 반드시 직원들이 따로 챙긴다. 그리고 그것은 속기록에 첩부되어 의회 기록물로 남는다. 매우 중요 한 기록물인 셈이다. 너무나 광범위하게 국어기본법이 지켜지지 않고 있어서 단순히 개별 문서를 작성한 부서별로 주의를 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조례 제정을 준비하게 되었다. 원래는 올해 초 2월에 이미 조례 준비 86
가 마무리되었지만 안건이 너무 많아 조례안을 상정할 수가 없었다. 의회운영위원장으로서 내가 준비한 조례를 먼저 올릴 수도 있었지만 양보하고 미루었다. 그 사이에도 구청의 문서들은 계속해서 국어기본법 을 습관적으로 어기고 있었다. 조바심도 났지만, 인간만사 새옹지마던가. 2013년부터 한글날이 다시 국가 공휴일로 지정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차라리 10월까지 미루었다가 조례를 통과시키면 더 주목받을 수 있 겠다는데 생각이 가닿았다.
한글조례, 공무원들이 가장 많이 반겨 아니나 다를까, 23년 만에 한글날이 국경일이 되면서 해운대구에서 공표한 한글 바르게 쓰기 조례가 언론에 두루 알려졌다. 다른 지자체에서도 인터뷰를 하러 오는 등 반향이 컸다. 한글날을 전후로 하여 방 송과 신문 보도를 접한 주민들로부터 모처럼 많은 칭찬을 받았다. 늘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분들도 기 껍게 손을 잡아 주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공무원들도 이 조례를 무척 반긴다는 사실이다.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일해온 많은 공무원들도 이 머리 아프게 하는 ‘ 트랜드’가 속으로는 굉장히 갑갑했나 보다.
23년 만에 한글날이 국경일이 되면서 해운
어려운 영어를 섞어 쓰면 더 유식해 보
대구에서 공포한 한글 바르게 쓰기 조례가
이고 세련되어 보인다는 허영심으로부터
언론에 두루 알려졌다. 다른 지자체에서도
우리 사회는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그리
인터뷰를 하러 오는 등 반향이 컸다.
고 이것은 비단 허영심만의 문제가 아니 다. 우리는 세종이 앞장서서 한글을 만든 이유를 애민정신이라고 배웠다. 한글 창제뿐만 아니라 세종은 관청의 노비들에게 주는 출산휴가를 7일에 서 107일로 대폭 늘리고 산달에도 1개월 휴가를 주었다. 뿐만 아니라 노비의 남편에게도 30일의 휴가를 주 어 산모를 돌보게 했다. 지금에 견주어도 시대를 한참 앞서간 세종의 인식을 엿보게 된다. 오늘날 한국의 관공서를 다시 돌아보자. 나라와 시민의 부름을 받아 나라의 일을 수행하는 분들 즉 정치인, 관료, 교육 자, 지식인, 언론인 등에게서 소외되고 약한 자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기꺼이 헌신하려는 의지를 찾아보기 가 어려운 것은 나만의 편견일까? 대한민국에서 의무교육을 마친 이라면 그 누구라도 대한민국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삶에 중요한 영향 을 미치는 ‘ 공무’ 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공무를 확인할 수 있는 첫 단추는 공문서인데 그 공문서가 외국어나 어려운 말로 만들어져 있다면 아무리 시책이 훌륭해도 무슨 말인지 몰라서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터, 이를 어찌할 것인가. 못 배워도 누구나 다 알아먹어야 그게 평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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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진보정당
먼 좌파 이웃 좌파 ⑤
칠레 좌파의 오디세이 장석준 부대표
올해는 칠레 인민연합 정부가 군부 쿠데타로 무너진 지 40년이 되는 해다. 1973년 9월 11 일 아침, 수도 산티아고의 대통령궁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이끄는 반란군에 포위되었 다.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끝내 투항을 거부한 채 반군에 맞서 싸우다가 사망했다. 미 국의 사주를 받은 군부 파시스트들이 선거로 집권한 합법 사회주의 정부를 짓밟은 것이다. 이후 피노체트 군부 정권은 세계 최초로 통화주의 교리에 따른 시장지상주의 실험에 나섰 다.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는 이렇게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비열한 반역과 피의 학살로 시 작되었다. 아옌데 대통령은 반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마지막 라디오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 는 칠레와 그 운명을 믿습니다. 반역자들이 우리에게 강요하려는 이 암울하고 가혹한 순간 을 딛고 일어서 또 다른 사람들이 전진할 것입니다. 이걸 잊지 마십시오. 자유로운 인간이 활보할, 더 나은 사회를 향한 크나큰 길을 열어젖힐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군부 독재를 딛고 또 다른 사람들이 전진하다 아옌데 대통령의 유언은 헛되지 않았다. 실제로 피노체트 정권의 폭압을 딛고 또 다른 사람들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한창 유신 체제와 신군부 정권에 맞서 싸우던 무렵, 지구 반대편 칠레에서도 박정희와 마거릿 대처를 존경한다는 군부 독재자에 맞서 민주화 운동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한때 ‘ 칠레의 기적’을 낳았다고 칭송받던 통화주의 정책이 1982년 경제 위기를 불러오자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마침내 1988년, 그러니까 한국에서 민 주화 항쟁이 벌어지고 1년 뒤에 칠레에서도 위기에 처한 독재 정권이 피노체트의 대통령직 유임 여부를 국민투표에 붙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투표자 중 ‘ 유임 반대’가 절반을 넘었고 (56%), 결국 민주화 이행이 시작되었다. 90
▲쿠데타군에게 폭격당하는 1973년 9월 11일의 칠레 대통령궁 ▶살바도르 아옌데 전 대통령
반독재 투쟁에 가장 앞장선 정치 세력은 인민연합에 참여했던 좌파 정당들, 즉 사회당, 공산당, 민중통 일행동운동(MAPU, 기독교민주당 좌파가 탈당해 만든 정당) 등이었다. 사회당/공산당에 대한 보통의 상식과는 달리 아옌데 집권 중에 온건파 역할을 한 것은 공산당이었고 강경파는 사회당 쪽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 면, 사회당 안에 클로도미로 알메이다 외무장관이 이끌던 우파와 카를로스 알타미라노 상원의원을 중심 으로 한 좌파가 있었다. 아옌데 대통령 자신은 전자를 지지했지만, 당권을 쥔 것은 후자였다. 그래서 전반 적으로는 “공산당=온건파, 사회당=강경파”의 구도가 됐고, 둘 사이에는 치열한 논쟁이 계속됐다. (인민연 합 정부 내의 논쟁에 대해서는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책세상, 2011]의 제3장 “칠레의 전투”를 참고할 수 있다.)
논쟁의 주된 쟁점 중 하나는 기독교민주당과의 관계였다. 당시 인민연합 정부의 개혁 정책을 사사건건 방해하던 야당은 국민당과 기독교민주당, 둘이었다. 국민당이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는 극우파였던 데 반 해 기독교민주당 쪽은 좀 복잡했다. 이 당에는 국민당만큼이나 아옌데 정부를 저주하던 전임 대통령 에두 아르도 프레이의 우파가 있는가 하면 인민연합 참여 정당들과 비슷한 급진 개혁 성향을 지닌 좌파도 있었 다. 결국에 가서는 우파가 당을 주도하게 되면서 급기야 피노체트의 쿠데타까지 지지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 인민연합 우파(사회당 알메이다파와 공산당, MAPU 소수파)는 기독교민주당을 어떻게든 구슬려 정치 위기를 피해보려 했다. 반면 인민연합 좌파(사회당 알타미라노파와 MAPU 다수파)는 대결 노선을 견지했다. 그런데 한 차례의 거대한 패배 뒤 십 수 년 간 계속된 지난한 민주화 투쟁은 모든 것을 뒤바꿔 놓았다. 지하 활동 과정에서 그리고 망명지의 논쟁 속에서 과거의 온건파는 강경파가 됐고 급진파는 현실파가 됐 다. 우선 사회당 안에서 알메이다파와 알타미라노파의 입장이 뒤바뀌었다. 기독교민주당과의 일체의 타 먼 좌파 이웃 좌파 91
협을 거부하던 알타미라노는 이제 반독재 투쟁의 가장 중요한 동맹 상대로 기독교민주당을 내세웠다. 이 에 반해 알메이다는 주로 공산당과 연대하며 인민연합의 전통을 이어가자고 주장했다. 급기야 두 세력은 분당으로까지 치닫게 된다. 한편 아옌데 정부에서 현실 노선을 대변하던 공산당은 민주화 운동에서는 가 장 전투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반독재 연합의 중심축을 놓고 과거 인민연합 내부의 좌우 구도가 정반대로 바뀐 격이었다. 피노체트 정권의 후퇴 이후 상황을 주도한 것은 사회당-알타미라노파의 ‘ 민주대연합’ 노선이었다. 한 때 쿠데타에 동조했던 기독교민주당 우파마저 군부 독재를 경험하고 나서는 반피노체트 입장으로 선회 했다. 그러자 군부 정권은 1982년 프레이 전 대통령을 독살하기까지 했다. 1988년 국민투표를 앞두고 사회 당의 여러 분파들을 비롯한 과거 인민연합 참여 정당들은 기독교민주당과 함께 ‘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연 합’ (흔히 ‘ 콘세르타시온’이라 불린다)을 결성했다. 다만 공산당만은 여기에서 빠졌다. 1989년 대통령선거에 서 콘세르타시온은 기독교민주당 우파인 파트리시오 아일윈을 후보로 내 당선시켰다. 이후 2009년 대선 에서 패할 때까지 20여 년 간 콘세르타시온은 쭉 여당의 지위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 대통령궁 앞에는 아 옌데의 동상이 세워졌다.
궁지에 몰린 민주화, 그 반격은 학생운동으로부터 칠레의 민주화는 군부 정권과 야당 사이의 타협에 따른 것이었다. 피노체트는 아무런 단죄도 받지 않 았다. 오히려 그 지지 세력은 헌법에 의해 특권을 보장받았다. 이 때문에 콘세르타시온은 대통령 자리를
메이데이 시위를 벌이는 칠레 공산당 청년 당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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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공산당을 지지하는 낙서
차지할 수는 있어도 의회에서 과반수를 넘을 수는 없었다. 어떤 정책이든 원내에 포진한 군부 잔당들의 승인을 받지 않으면 안 됐다. 결국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는 의연히 유지됐다. 사실은 콘세르타시온에 참 여한 중도 좌우파 정당들 스스로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탓도 있었다. 이런 점도 지구 반대편의 어느 나 라와 참 비슷한 데가 있다. 그러고 보니 한국이 자유무역협정을 처음 맺은 나라도 칠레다.(콘세르타시온이 배출한 대통령 중 사회당 소속으로는 첫 번째인 리카르도 라고스[2000-2005년 재임]의 회고록 <피노체트 넘어서기: 칠레 민주화 대장정>[정진상 옮김, 삼천리, 2012]은 이 상황을 주류 좌파 입장에서 회고한다.)
두 명의 기독교민주당 대통령(아일윈 그리고 프레이 전 대통령의 아들)과 두 명의 사회당 대통령(라고 스 그리고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미첼 바첼레트)을 배출한 뒤, 2009년 대통령선거에서 콘세르타시온은 처 음으로 피노체트 후계 세력에게 정권을 내주었다. 이 패배는 칠레 민주주의가 직면한 궁지를 잘 보여주었 다. 당시는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 ‘ 좌파 붐’이 최고조에 이를 무렵이었다. 한데 정작 아옌데의 나라 인 칠레에서는 역사의 시계가 오히려 민주화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사실 전임 대통령 바첼레트의 인기는 나쁘지 않았다. 만약 브라질처럼 대통령직 연임이 가능했다면 콘 세르타시온 정권이 이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콘세르타시온은 바첼레트라는 인물을 제외하면 내세울 게 없었다. 피노체트 정권 때부터 이어진 시장지상주의 기조를 뒤엎으려는 개혁을 추진한 바도 없었고, 그렇다고 우파 정당들과의 차이를 분명히 할 새로운 의제를 던지지도 못했다. 인물난도 심해서 기독교민 주당 소속 전임 대통령 프레이(아들)를 다시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기도 했다. 결과는 뼈아픈 패배였다. 대선 끝나고 한 동안은 칠레가 이렇게 과거로 퇴행하는 것처럼만 보였다. 그러나 얼마 안 돼 반격이 시 작됐다. 학생운동이 그 진원지였다. 칠레에서는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시장화된 교육 제도에 맞서 고등학 먼 좌파 이웃 좌파 93
◀‘ 새로운 다수’ 의 대통령 후보 미첼 바첼레트 전 대통령 ▶룰라와 함께 한 미첼 바첼레트
생, 대학생의 투쟁이 빈발했다. 바첼레트 정권 초기에도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칠레 사회를 뒤흔든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흐름이 2011년에 대학 교육의 무상 공공화를 요구하는 대학생 시위로 다시금 폭발했다. 마침 전 세계적으로 점거 운동(Occupy Movement)이 확산되고 있었고 영국, 미국 캘리포니아, 캐나다 퀘 벡 등지에서도 대학생들의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이 벌어지던 와중이었다. 칠레대학에서 이 투쟁을 주도 한 공산당 청년여성당원 카밀라 바예호는 일약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후 우파 정권의 인기는 곤두박질쳤다. 반면 좌파 쪽은 오랜만에 새로운 세대의 활력으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학생운동뿐만 아니라 노동운동도 공산당과 여타 급진 좌파의 영향 아래 다시 투지를 불태웠다. 덩달아 콘세르타시온 소속 정당들도 정권 탈환의 희망을 되찾았다. 오는 11~12월에 칠레에서는 대선-총 선 동시 선거가 있는데, 바첼레트 전 대통령을 다시 후보로 내세운 콘세르타시온이 승기를 굳힌 상태다. 결선까지 안 가고 1차 투표에서 승리하리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지금 바첼레트 후보가 가장 강조하는 공 약은 바로 “임기 내 고등 교육 무상 공공화 실현”이다.
자유로운 인간이 활보할, 더 나은 사회를 향한 크나큰 길로 물론 바첼레트의 재선은 드라마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막의 시작일 뿐이다. 차기 바첼레트 정부가 과 연 “대학 교육의 무상 공공화” 공약을 지킬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전망도 만만치 않다. 이 대목에서 주 목할 만한 것은 공산당이 바첼레트 진영에 합류했다는 사실이다. 민주화 이후 십 수 년 간 공산당은 일정 한 지지세에도 불구하고 원내에 진출하지 못했다. 거대 정당연합에 결합해야만 의석을 확보할 수 있게 만 든 선거법 때문에 콘세르타시온에 불참한 공산당은 원외 정당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94
지난 총선부터 공산당은 콘세르타시온과 선 거연합을 맺어 원내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아예 바첼레트 지지 정당연합에 결합했다. 이를 계기로 콘세르타시온은 ‘ 새 로운 다수’ 라는 이름의 새 정당연합으로 개 편했다. 그간 “바첼레트 후보를 지지할 일은 없을 것”이라던 학생운동 지도자 바예호도 공산당의 이러한 결정으로 이번 총선에 ‘ 새 로운 다수’ 의 후보로 출마했다. 이것이 새 정부와 대중운동 사이의 결합 을 강화해 민주화 이후의 분위기를 일신하 는 결과를 낳을 것인가, 아니면 공산당마저 중도연합의 무능과 동요에 휩쓸리게 만드는 것으로 귀결될 것인가? 여러 전망이 엇갈린 다. 심지어는 민주화 투쟁에서 나타났던 좌 우 반전이 다시 한 번 반복되는 모습도 보인 다. 아옌데 정부에서 장관을 역임한 호르헤 아라테는 반독재 투쟁에서는 사회당-알타 미라노파의 ‘ 민주대연합’ 노선에 앞장섰다. 하지만 2009년 대선에서는 콘세르타시온의 우경화를 비판하며 사회당을 탈당해 공산당 의 지지 아래 대선 후보로 출마했다. 그런 그 가 이번에는 공산당의 ‘ 새로운 다수’ 합류를 비판하고 나섰다. ‘ 민주대연합’이 노정한 역 사적 한계가 ‘ 새로운 다수’에서 반복될 수
칠레 학생운동 지도자이자 이번 총선의 공산당 후보 중 한 명인 카밀라 바예호(위) 사회당을 탈당한 사회당의 역사적 지도자 호르헤 아라테(아래)
있다는 우려가 그 이유였다. 하지만 결말은 누구도 알 수 없다. 더군다나 지금의 칠레는 지난 삼십여 년 동안의 그 칠레가 아니다. 피노체트의 그림자에 짓눌린 나라가 더 이상 아니다. 거리에, 그리고 공장에는 이제 “우리가 아옌데주의 자다!”라고 외치는 새로운 세대들이 있다. “자유로운 인간이 활보할, 더 나은 사회를 향한 크나큰 길”은 비록 우여곡절은 있을망정 결코 끊어질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또 다른 이들”이 전진하고 있다. 해답 의 열쇠를 쥔 것은 오직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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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파 통신
프랑수아 올랑드 정부,일요일 쉴 권리를 노동할 권리로 바꾸나 서수민 유럽당원협의회(준) 당원
‘ 얘네들 참 놀기 좋아하네…’ 프랑스에 온 지 이제 3년 하고도 1개월이 지났다. 여기 살면서 자주 느끼는 것 중 하나가 '얘네 참 놀기 좋아하네'였다. 툭 하면 휴일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어릴 적 10월 달력을 보는 것 마냥 신기했다. 10월 1일, 10월 3일, 10월 9일 잘하면 추석까지 겹쳐 빨간 날이 수두룩한 10월 달력처럼 말이다. 물론 그런 빨간 날이 없는 달도 많다. 내 경우 10월에 학기가 시작되 면 11월에 두 번의 축일이 있고 12월로 넘어가 2주 정도 지나면 노엘 바캉스다. 그러고 나면 1학기가 끝나고 시험주간, 다시 2주간의 방학, 2월에 2학기 시작. 1년이 금방이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여름 바캉스는, 대학생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6월 중순부 터 9월까지, 직장인들은 보통 7~8월에 연 5주 유급휴가를 쓴다. 프랑스에 처음 당도해 구 경했던 사르코지 정부의 연금법 개혁 반대 집회에서 남녀노소 너나 할 것 없이 거리로 나 와 ‘ 60세 넘어선 놀아야지 왜 일하냐’ 며 목청 높여 외치던 것도 기억난다. 또 한 가지, 동네 슈퍼(까르푸) 계산대에서 맞이한 문화적 충격 하나. 계산대 직원이 열 심히(?) 물건값을 찍어대고 있는데 빠진 게 있다며 손님이 다시 매장 안으로 향한다. 직원 은 그 손님이 올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린다. 그런데도 재촉하는 이 하나 없다. 처음엔 이게 뭔 일인가 싶다가 이젠 나도 이 느린 속도에 익숙해졌다. 게다가 저녁 8시 30분이 폐점시간 인데 한 10분 전부터 냉동식품 코너 칸막이를 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정확하게 30분까지 만 손님을 받는다. 일요일이면 이곳 슈퍼와 식당, 담배 가게 모두 문을 닫는다. 프랑스에 처 음 왔을 때 제일 답답했던 것이 평일 저녁 8시 이후와 일요일에 문 닫는 담배 가게였다. 24 시간 편의점이 온 동네를 불철주야로 밝히고 있는 한국의 24시간 라이프에 길들여진 나에 게 적지 않은 불편함을 주었으나 이제는 완벽 적응. 이게 사람 사는 동네구나 싶다. 남들보 다 열심히 성실하게 게으름 피우지 않고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곳 96
프랑스에서 일요일 노동에 관한 논쟁에 불이 붙었다. 프랑스 대형매장 모습 (사진 : SBS 보도자료)
사람들이 참 일하기 싫어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 일요일 노동’ 논쟁에 불붙었다 이렇게 서두를 길게 쓰는 이유는 최근 불거진 일요일 노동에 관한 논쟁 때문이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많 이 버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가족, 친구, 그리고 타인과 함께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식당에서 맛난 요 리를 즐기는 데 보내며 사는 것을, 휴식을 노동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기던 이들에게 지금 무슨 일이 벌 어지고 있는 것일까? 일요일 노동에 관한 논쟁은 지난 9월 23일 샹젤리제 세포라 매장에 대한 심야영업 금지 명령(저녁 9시까지만 영업 허용, 이전에는 월-목 자정, 금, 토는 새벽 1시까지 영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클 릭-P(프랑스 노조 6개 - CGT, CFDT, FO, SECI, SUD, CGC-의 상업부문 파리 노조들의 연합)가 샹젤리제 세포라 매 장을 노동법 위반으로 법원에 고발한 것이다(프랑스 노동법은 오후 9시부터 오전 6시까지의 야간근무를 ‘ 사회적 필요가 인정되는 경우’ 에만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이 같은 결정으로 세포라 샹젤리제 지점은 10월 9일부터 저녁 9시에 문을 닫게 되었다. 세포라측은 “오 후 9시 이후 매출의 20%가 발생하고 심야영업을 금지하면 대량 해고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으며 심야 에 근무하던 직원들도 일자리를 잃게 될까 봐 즉각 반박에 나섰다. 뒤이어 9월 26일, 대형 공구매장 카스 토라마와 르후아 메를랭의 일 드 프랑스 지점 15개 매장에 대해 법원은 일요일 영업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는 지난 7월, 일요일 영업을 예외적으로 허가받지 못한 대형 공구매장 중 하나인 브리코라마가 경쟁사 인 카스토라마와 르후아 메를랭에 고객과 매상을 뺏겨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되어 그 두 매장의 일요일 영 업금지 소송을 제기한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영업금지 명령을 받은 15개 해당 매장은 이에 불복하고 일 구라파통신 97
요일 영업을 강행했다. 일요일 및 심야 영업과 관련하여 2009년부터 노조의 노동법 위반 고발 사례가 배가되었다고 한다. 이 전에는 일요일에 문을 여는 가게가 거의 없었다(꽃가게 등 몇몇은 허용). 그러다가 2009년 니콜라 사르코지 정부 시절 노동법에 마이에법을 추가함으로 써 일요일에 문을 여는 상점들이 많아졌고,
2009년 니콜라 사르코지 정부 시절 노동법
동시에 노동법 위반 사례도 늘어났다.
에 마이에법을 추가함으로써 일요일 문을
모노프리, 라파이에트 백화점, 애플, 유니
여는 상점들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동시에
클로, 세포라, 카스토라마, 르후아 메를랭에
노동법 위반 사례도 늘어났다.
이르기까지. 법원은 모두 노조 측의 손을 들 어 주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반전의 기미 를 보이고 있다. 세포라와 카스토라마, 르후
아 메를랭은 영업금지 명령에 불복하고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그 과정에서 해당 기업주들이 매장에 근무 하는 비정규직(심야 및 일요일 일자리 대부분이 비정규직임) 노동자의 일자리를 보호해야 한다며 직원들을 조 직해 시위를 벌이는 기현상까지 발생했다. 노조에 의해 고발된 기업들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 대형 다국적 기업 혹은 대기업들이다. 온 동네에 편 의점 체인과 대형 할인매장이 들어서면서 구멍가게들이 하나둘씩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우리처럼, 프 랑스도 대형 기업들에 의해 소상공인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대형 다국적 기업들이 노동유연화를 무기로 엄청난 매상고를 올리고 있다.
청년층 중심으로 일요일 영업 지지해 한편, 일요일 영업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생각 은 어떨까? 몇몇 설문조사를 통해, 법원의 금지 명 령에도 불구하고 문을 연다는 결정을 한 매장(카스 토라마, 르후아 메를랭)을 지지한다고 대답한 사람 이 66%, 반대한다고 대답한 사람이 33%로 나타났 다. 그리고 18~24세 청년층이 가장 많이 지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대선에서 니콜라 사르코지를 지지한 사람의 80%, 프랑스아 올랑드를 지지한 사 람의 53%가 이 두 매장의 결정에 찬성한 반면 좌파 전선의 지지자들은 45%만이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 다. 일요일 노동에 대한 또 다른 설문조사에 따르면 98
사르코지를 누르고 미테랑 이후 첫 사회당 후보로 대통령 에 당선된 프랑수아 올랑드 (사진 : SBS 보도자료)
프랑스인 다수(56%)가 일요일에 정기적으로 일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나타났다. 하지만 만약 일요일에 일 하는 대신 두 배의 수당을 줄 경우 일할 수 있다고 대답한 프랑스인은 63%였다. 이 설문조사 결과에 관한 해석의 몫은 여러분에게 돌린다. 2년 가까이 계속되는 실업률의 고공행진과 특히 25% 가까이 되는 청년 실업,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끊 임없이 하락하고 있는 올랑드의 지지율로 인해 어찌되었건 프랑스 정부는 작금의 사태를 맞아 심히 고민 중인 것으로 보인다. 하여 장 마크 애로 총리는 9월 말 4개 부처장관 회의를 통해 11월 말까지 현행 노동법 을 재검토할 것을 주문했다. 기업주들은 때는 이때다 싶어 일요일 영업이 프랑스인들의 소비를 촉진시킬 수 있으며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일요일에 가게 문을 열지 않아 물건을 못 산 다는 말인데 말인데, 나만 해도 일요일에 가게 문을 열지 않으니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가게를 이용한다. 돈이 없어 못 사지 시간이 없어 못 사냐고 되묻고 싶어진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도 쇼핑을 부추기는 이런 자본가들 같으니. 좀 쉬게 놔두세요. 자본은 일자리 창출 효과를 근거로 들어 일요일 영업의 필요성을 주장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일자 리 창출 효과가 별로 없다고 언론을 통해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요일 영업으로 일자리가 만들어져 봤자 주로 비정규직 일자리다. 도리어 소규모 상점들의 일자리를 없애는 역효과를 일으킬 따름이다.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가까스로 확보한 ‘ 쉴 권리’ 그 운명은? 10월 29일 파리고등법원은 이전 법원의 판결을 엎고 카스토라마와 르후아 메를랭의 영업 재개를 허가 한다고 결정했다. 이 판결에 대해 브리코라마의 대표는 대형 공구매장을 모두 열게 하든지 모두 닫게 하 든지 해야지 예외 적용이 부당하게 이루어진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앞선 판결을 뒤엎은 파리고등법원의 이러한 결정은 현재 프랑스 정부의 갈지자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1906년 7월, 노동자들의 일요일 쉴 권리가 법으로 제정되었다. 1936년에는 인민전선(Front Populaire)이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프랑스 전역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확보를 위한 공장점거와 파업을 벌인 결 과, 주당 40시간 노동제와 유급휴가제도라는 쾌거를 이뤄낸다. 유급휴가는 1936년 2주에서 1956년 3주, 1968년 4주, 그리고 1982년 현행의 5주로 늘어난다. 그리고 2000년에 주당 35시간 노동제가 자리잡는다. 현재의 5주 유급휴가와 35시간 노동제는 저절로 이뤄진 게 아니란 걸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일요일 쉴 권리, 유급휴가, 노동시간단축이 가져다준 프랑스적 삶은 일요일 노동의 확산으로 일거에 무너질 수 있 다. 프랑수아 올랑드 정부는 지금까지의 국정운영에서 몇 번의 우회전 깜박이를 켜는 우를 범했는데 이번 에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2009년 사르코지 시절 시작된 일요일 영업의 예외 확대가 올랑드 정부에 들어서 다시금 기업가들에게 더 유연한 방향으로 결정된다면 프랑스인들이 즐기던 여유 로운 삶은 쓰레기통 속으로 처박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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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노동당에 바란다
새 ‘ 노동당’ 낡은 진보정치를 청산하라 김승호 「전태일 노동대학」 대표
이 글의 제목을 쓰면서 따옴표를 쳐서 ‘ 노동당’이라고 했습니다. 따옴표를 치지 않으면 보통명사로서 의 노동당을 말하는 줄로 오해할 수도 있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노동당이란 명칭은 우리에게 친숙 하게 다가옵니다. 그렇지만 따옴표 친 이 ‘ 노동당’은 명칭만큼 친숙하지는 못합니다. 이 ‘ 노동당’에 그동 안 진보정치, 노동정치를 대표해 왔던 인물들의 얼굴이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의 얼굴도 보이지 않고, 대선 주자 물망에 올랐던 국회의원 얼굴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 노동당’에 기대를 걸게 됩니다. 그런 비중이 무거운 인물들이 적기 때문에 당이 그런 명망가들 중심으로 이끌어지지 않을 거라는 기대가 됩니다. 자기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명망가들의 행보에 따라 당 이 이합집산하는 그 일그러진 모습이 되풀이되지
자기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유지하기
않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이런 조건은 ‘ 노동당’ 이
위한 명망가들의 행보에 따라 당이 이
의회주의 정당으로 역할하는 데는 유리하지 못할
합집산하는 그 일그러진 모습이 되풀
지라도 사회운동적 정당으로 역할하는 데는 오히
이되지 않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려 유리하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당내 민주주의 문제입니다. 당명을 ‘ 노동당’으로 정하는 과정에서 당 대회를 두 번이나 열고 또 투표를 서른아홉 번이나 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 모습은 어쩌면 계급투쟁을 하는 정당으로서 매 우 비효율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게는 오히려 긍정적인 면이 돋보입니다. 그동안 상층 지도부 중심으로 당이 운영되어 온 데 대한 당원들의 비판의식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다소 과도하게 강조하는 쪽 으로, “활을 반대방향으로 심하게 휘게”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내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이 지점이 새 ‘ 노동당’의 단점이 아니라 큰 장점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런 당내민 주주의의 활성화가 ‘ 지도자’와 ‘ 핵심’을 강조하는 쪽보다 당이 대중화· 급진화되게 하는 데 훨씬 더 기여 하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기고 노동당에 바란다 101
기대와 더불어 촉구하고 싶은 지점에 대한 언급도 하겠습니다. 우리 진보정치와 노동운 동은 지금 큰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구소련이 붕괴되고 나서 전노협이 민주노총 으로 대체된 다음에 그 틀이 형성된 현재의 진보정치와 노동운동 패러다임이 그 수명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을 대신한 새로 운 패러다임이 아직 등장하고 자리 잡지 못하 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형적인 위기상황인 셈 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존의 생각과 행동 양식을 고수하는 것은 상황을 헤쳐나가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세상이 바뀌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가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그동안 이야기되어 왔던 ‘ 진보의 재
평화시장 앞에 서 있는 전태일 동상 (사진 : 박성훈)
구성’ 수준이 아니라 원점에서 새로 운동을 만 드는 수준에서 자기변화를 꾀해야 합니다. 그 변화는 이념의 수준에까지 폭이 넓어야 할 것이고 깊이에서 는 혁명적으로까지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진보라는 개념조차 버릴 각오를 해야 할 겁니다, 이런 도전에 새 ‘ 노동당’이 지금보다 훨씬 더 과감하게 응답해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은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전태일 동지의 사상과 정신 을 받드는 방향에서 노동교육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새천년에 접어들면서 자본주의가 ‘ 역사적 위기’ 국면으로 접어들고, 우리 노동운동 또한 위기의 징후를 보이고 있을 때, 이런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는 무엇보다 올바른 사상과 이론에 입각하여 노동운동이 이끌어질 때에만 운동에서나 세상에 대해서나 대안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전태일 동지의 인간해방 사상과 마르크스 의 과학적 사회주의를 비롯한 제 변혁이론을 통합하여 새로운 21세기 노동운동의 사상· 이론을 정립하 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상· 이론을 실천할 현장활동가를 대대적으로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취지로 수백 명의 지식인과 노동운동가들이 추진위원이 되어 2000년 12월에 이 대학을 설립하게 되 었습니다. 우리 「전태일 노동대학」에는 지난 13년 동안 6천여 명의 학생들이 입학하여 졸업하거나 재학하고 있습 니다. 아직 교육 내용의 면에서 요구되는 바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고, 특히 입학생 수와 졸업생 수가 기 대에 많이 못 미치고 있습니다. ‘ 노동당’ 당원 동지들, 전태일 노동대학과 함께 치열하게 학습하고 조직 하고 투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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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토론
민중의 집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쟁점 토론
민중의 집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강상구 민중의집운동본부 본부장
민중의 집의 독자적 성장의 핵심은 소시민적 지역공동체 운동이 아니라 계급적이면서 도 급진적인 지역운동을 지향 하는 데 있다. 민중의 집이 행 정기구의 말단조직처럼 움직 이지 않고 독자성을 키워나가 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당원의 집? 주민 센터? 행정 말단 조직? 구로 민중의 집을 하면서 최근에는 민중의 집이 빠질 수 있는 ‘ 잘못 된 방향’에 대한 고민이 깊다. 흔히 빠지기 쉬운 ‘ 오류’들은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우선, 민중의 집이 ‘ 당원들만의 공간이 되는 경향’이 다. 민중의 집을 열고 보니 너무 기쁘고, 공간도 번듯해서 기분이 좋아 진 당원들은 그전보다 더 자주 민중의 집에 모이게 된다. 당원 모임을 민중의 집에서 하는 건 기본이다. 낮에 시간되는 당원들이 들르는 횟수 가 늘어나고, 밤에 일이 없어도 괜히 민중의 집에 오는 당원들도 생긴 다. 주말에 함께 모이는 일도 많아지고, 당원들끼리 아예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한다. 사실 이런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민중의 집이 명확한 자기 전략이 없으면 몇 달이 흘러도 보이는 건 당원뿐이다. 새로운 사 람들을 만나기 위해 애써 만든 공간에 원래부터 아는 사람들만 넘쳐나 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민중의 집이 ‘ 주민 센터’ 같은 기능을 자처하는 경우도 잘못된 길 가운데 하나다. 주민들을 만나자는 열망으로 흔히 맨 처음 하는 일이 강좌 사업이다. 기타 강습, 어린이책 읽기, 뜨개질, 퀼트, 외 국어, 역사탐방, 노동법 해설 이런 것들이 자주 보이는 아이템이다. 노 력 여하에 따라 조금 더 참신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할 수도 있다. 하지 만 강좌 위주의 사업은 일하는 상근자에게 스트레스만 잔뜩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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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모으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다른 곳과 차별성이 없다. 세 번째, 행정기구의 말단 조직처럼 행동하는 경우도 있다. 요즘은 서울시뿐만 아니라 다른 광역기초 자치단체에서도 ‘ 마을 만들기’ 같은 사업을 많이 하는데, 이 사업을 통해 풀리는 돈이 많다 보니, 돈 없는 민중의 집 입장에서는 한 푼이라도 지원받아서 좀 그럴듯하게 사업을 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린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사실 매우 위험하다. 지역운동은 그동안 마땅히 국가기관이 해야 할 대주민업무의 상당 부분을 넘겨받아 대신 집행해 왔다. 시민운동, 혹은 노동운동단체나 노동조합이 구나 시로부터 각종 노동사업, 복지 사업을 위탁받아서 해왔 던 것이 그 사례다. 정색하고 원리원칙대로 말하면, 이는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흐름을 한쪽에서 지탱해주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지점이다.
‘ 아는 사람’ 만 많으면 정말 다 되나 민중의 집이 그냥 평범한 지역공동체 운동 단체가 되는 경우 또한 피해야 할 오류 중 하나다. 현재 한국 의 좌파운동의 한계, 더 구체적으로는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 그리고 사회운동의 한계를 지역에서부 터 돌파해 보자는 커다란 꿈은 사라지고 그냥 흔한 소시민적 활동에 매몰된다. ‘ 지역’ 에서 낮에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주부이거나 노 인이거나 청소년이다. 민중의 집을 열
어쨌거나 세월이 지나면서 ‘ 아는 사람’은 늘어난
게 되면 주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다
이들이고, 어쨌거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 사람들과 모임도 하게 되고, 때로는 놀러도
‘ 아는 사람’은 늘어난다. 이 사람들과
가고, ‘ 열심히 활동’하다 보면 그냥 정말 ‘ 한 데
모임도 하게 되고, 때로는 놀러도 가
어울려 잘 지내는’ 일에 몰두하게 되고 만다.
고, 또 가끔은 축제처럼 동네의 큰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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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하면서 ‘ 열심히 활동’ 하다 보면 노동의 문제의식, 급진적 민주주의의 문제의식은 온데간데없이 그 냥 정말 ‘ 한 데 어울려 잘 지내는’ 일에 몰두하게 되고 만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경향이 나오게 된 데에는 우리 머릿속에 두 가지 편향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 다. 우선 지역운동의 이유를 ‘ 유권자 관리’에 두는 편향이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지역 그 자체가 바뀌지 않 더라도 ‘ 아는 사람’만 많으면 된다. 정당이 보일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이고 편의적이며 몰상식한 관점이다. 또 하나의 편향은 고립주의이다. 어차피 운동이 망했으니 지역에서부터 열심히 하면서 한 명 두 명 만 나다 보면 언젠가 길이 열릴 것이라는 사고방식이다. 이런 태도는 오히려 현실적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요즘 같은 때에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인 건 맞지만 이건 일종의 현실도피이다. 우파는 자연을 낭만적으로 그리면서 현실 도피를 권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좌파는 대중 속으로 들어가 는 것을 일종의 현실 도피적 감수성으로 감행한다. 좌파에게는 ‘ 대중’이 여전히 낭만적인 대상에 머물고 쟁점토론 105
2012년 12월, 노동당(당시 진보신당)이 충북 괴산에서 지역거점 활동가 워크샵을 열었다.(사진 : 박성훈)
있기 때문이다.
지역재편 전략이 필요하다 이런 문제들에 맞닥뜨리면서 계속 들었던 고민이 지역재편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 시대, 금융 세계화의 영향이 민중들 삶의 곳곳을 어지럽히고 있는 때에 지역에서 운동을 한다는 것은 노 동과 생태, 평화의 관점으로 일상 속에서 연대를 실천하는 새로운 사람들이 끊임없이 생겨나도록 하는 체 계를 만들어 나가는 데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지역의 우파지배구조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우파지배구조의 강점과 약점 은 무엇인지, 이를 깨뜨리기 위해서 연대할 수 있는 지역의 진보적 자원들은 무엇이 있는지,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한 민중의 집의 태도와 자세, 그리고 계획은 무엇인지 이런 것들이 하나하나 점검되고 계획되어야 한다. 구로민중의 집에도 아직 반듯한 전략이 있는 건 아니다. 민중의 집이 뭐하는 곳인지 단 한마디로 설명 하는 것도 버거운데 하물며 ‘ 전략’을 말할 처지는 못 된다. 다만 그런 전략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고민하 는 정도인데, 그 가운데 앞서 말했던 민중의 집의 여러 ‘ 오류’들과 관련된 것들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우선, 당원들끼리만 어울리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열성적인 당원들이 역할을 좀 해주셔야 한다. 우 리 당원들은 민중의 집에 새로운 사람이 와도 인사를 하거나 사교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배려하는 분위기 를 만드는 데 인색하다. 민중의 집에 주민들이 아주 많이 오는 날에는 당원들의 어색함이 전체적인 분위 106
기를 망쳐 놓을 때도 있다. 최근에 깨달은 것은, 사실 정말 늦게도 깨달은 건데, 동네 사람들과 만날 때 가장 중요한 건 ‘ 신뢰 관 계’ 를 형성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만나 자마자 운동권 냄새 진하게 풍기면 접근 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인상만 풍기지 만, 신뢰 관계가 형성된 이후에 세상 이 야기를 하면 뭔가 고민이 깊은 사람, 중 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당원들은 민중의 집에 새로운 사람이 와도 인 사를 하거나 사교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배려하 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인색하다. 이러한 어색 함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망쳐놓을 때도 있다.
된다. 그래서 중요한 건 새로 만나는 사 람들과 신뢰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지난한 과정인데 이것의 기초는 일단 인사라도 잘하는 것이다. 이건 민중의 집이 문화센터처럼 되지 않는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사실 강좌를 열더라도 주민센터는 ‘ 기술전수’ 에 관심이 가 있다면 민중의 집은 ‘ 인간관계 형성’에 주목해야 한다. 뭐, 당연한 얘기다. 그리 고 그렇게 형성된 인간관계가 자신의 권리를 인식하고,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며, 그 권리의 실현을 위해 공동의 노력을 하고, 이를 방해하는 현실의 습속과 제도를 바꾸는 데까지 나가기 위해 어떤 과정이 뒤따 라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계획이 설계되어 있어야 한다. 단순히 ‘ 후속사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뛰어넘어, 주민들이 민중의 집과 인연을 맺고 나면 전혀 새로 운 가치관, 완전히 새로운 인간관계, 대단히 참신한 발상과 민주주의적인 분위기 속에 녹아나도록 하는 하나의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의 문제의식 없이 계급적 지역운동 할 수 없어 민중의 집이 행정기구의 말단조직처럼 움직이지 않고 독자성을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지원금을 받는 문제는 특히 그렇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민중의 집뿐만 아니라 도서관, 카페 등 각종 거점공간을 운영하는 당원들 가운데에서도 이렇다 할 합의가 없는 상태다. 이 문제의 해결에는 그런 데 답이 없다. 오직 최소한 민중의 집 운영비(건물임대료, 관리비 및 각종 공간 유지비, 상근비) 정도는 소 액다수의 후원금으로 충당할 수 있도록 하는 구조를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만들어야 한다. 절대 쉬운 일 은 아니지만, 이게 되어야 민중의 집의 독자적 성장을 꾀할 수 있다. 물론 민중의 집의 독자적 성장의 핵심은 소시민적 지역공동체 운동이 아니라 계급적이면서도 급진적 인 지역운동을 지향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것은 ‘ 노동’ 의 문제에 집중하자는 것 이다. 노동의 문제의식이 들어가지 않고 계급적 지역운동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 른 기회에 또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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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서재
‘ 기차의 눈물’ 닦아줄 ‘ 행복한 실패’ 를 위하여 철도의 눈물 박흥수 / 후마니타스 / 2013년10월 / 13,000원 탈선 앤드루 머리 / 이소출판사 / 2003년2월 / 12,000원 양솔규 기획조정실 국장
강촌역은 폐쇄되고 신촌역에는 민자 역사 들어서 1936년 베를린 올 림픽에서 마라톤 종목에서 금메달
tvN에서 방영하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4>가 화제다. 1화 “서울사람” 편을 보면, ‘ 삼천포’ 가 난생처음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겪게 되는 ‘ 촌놈’ 의 상경기가 그려진다. 기차까지 타고 온 ‘ 삼천포’는 당시 수도권에만 있는 지하철을 못 타서
을 딴 손기정은 어
헤맨다. 3화 “신인류의 사랑”편에서는 주인공 나정이 강촌으로 MT를 가는 장면
떻게 베를린에 갔
이 나온다. 4화 “거짓말”을 보면 나정이 친구들의 거짓말에 속아 신촌 기차역에
을까? 비행기를 탔
서 꿈에도 그리던 농구선수 이상민을 기다린다.
을까? 여객선을 타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의 이야기를 보면서 추억 돋는다. 시간은 세상을 많이
고 머나먼 유럽 땅
바꿔 놨다. 부산지하철 1호선이 완전개통된 해가 94년인데, 현재 부산에는 네 개
으로 갔을까? 손기 정은 기차를 탔다.
의 노선이 땅속을 누비고 있고, 다른 도시들에도 지하철과 경전철이 제법 많이 생 겼다. 수도권의 대학생들이 강촌이나 대성리로 MT를 갈 때 많이 이용하던 경춘 선에는 복선전철이 들어섰고, 강촌역은 폐쇄되었다. 나정이 기다리던 조그맣던 신촌역에는 거대한 민자역사가 들어섰고, 사랑스럽던 구 신촌역사(驛舍)는 헐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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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문화적 가치, 사회적 가치는 경제적 가치에 밀려 순식간에 내팽개쳐진다.
촛불이 막아낸 철도 민영화, 박근혜 정권이 완성하나 우리나라에는 ‘ 철도 오타쿠’가 많지 않다. 하지만 이웃나라 일본만 하더라도 철 도 오타쿠와 관련한 애니메이션이 등장할 정도로 많다. 그런데 여기 자칭 ‘ 철도 오타쿠’라고 말하는 한국의 박흥수 철도기관사가 귀중한 책을 하나 냈다. <철도 의 눈물>이 그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 역대 모든 정부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진행되던 민영화, 정확하 게 ‘ 사유화(Privatization)’ 정책을 박근혜 정부는 완성하려 하고 있다. 촛불이 막 아낸 사유화, 이명박이 결국 완수하지 못한 철도 사유화가 곧 결판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시절 “국민적 동의와 사회적 합의 없는 철도 민영화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국토부 장관이 임명되자마자 KTX 경쟁 체 문제는
수서발
KTX 노선을 코레 일의 자회사 형태
제 도입을 발표했고 철도사유화 추진은 재개되었다. 핵심은 이렇다. 한국 철도는 포화상태다. 철로는 모자란데, 수요는 많아 서비스의 질이 떨어졌다. 주로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 수요를 분산시키기 위해서 KTX 수
로 민영화하겠다
서-평택 고속연결선이 제시되었다. 그렇게 되면, 기존 서울-금천 간 병목현상
는 것이다. 알짜배
(고속선+일반선)이 완화되고, 평택에서는 일반선과 연결되며, KTX 열차 투입대
기 흑자노선을 재
수를 늘릴 수 있다. 또한 무궁화호와 새마을호의 속도 역시 지금보다 획기적으로
벌에게 넘겨주면
빨라질 수 있다.
네트워크 산업의
그런데 문제는 수서발 KTX노선을 코레일의 자회사 형태로 민영화하겠다는 것이
특성에 따라 문제 가 곳곳에서 발생 하게 된다.
다. 누가 보더라도 땅 짚고 헤엄치기인 알짜배기 흑자노선을 재벌에게 넘겨주면 네트워크 산업의 특성에 따라 문제가 곳곳에서 발생하게 된다. KTX에서의 영업 이익은 지방의 적자선들을 보조(교차보조)해주는 중요한 자원이다. 이를 통해 적 자를 보고 있음에도 지방선들이 운행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서발 KTX가 사 유화되면, 기존 서울역발 KTX 수익은 떨어지게 되고, 교차보조 비용은 줄어들게 되며, 지방선의 적자는 가중되고, 결국 지방선은 폐쇄되거나 민영화되고 마는 악 순환이 벌어지게 된다. “밀양· 마산· 진주· 창원으로 가시는 승객께서는 코레일 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고객을 생각하는 저희 수서발 KTX는 일반철 도 노선과 연계 운행되지 않습니다.” 2016년, 우리는 수서역에서 이런 안내방송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이 비극적 시나리오는 국토부가 가장 원하는 시나리오인지 도 모르겠다. 요컨대 수서발 KTX는 일부 노선으로 한정된 부분적 민영화가 아니 삶과 문화 109
라, 한국 철도 민영화 도미노의 가장 첫 번째 블록인 셈이다.
철도 민영화로 엄청난 대가 치른 영국, 그 전철을 그대로 밟겠다고? 이명박 정부는 철도 운영의 핵심중 하나인 관제권을 철도공사에서 철도시설공단 으로 넘기려 했다. 그러나 저항이 거세지자 박근혜 정부는 관제권 이관을 수서발 KTX 민영화 이후로 넘긴 상태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부는 2010년 WTO정부 조달협정을 통해 한국 철도의 모든 분야를 외국 자본에 개방 했다. 그런데 이미 한국의 사 회간접자본의 상당수가 외국 자본이 잠식한 상태이다. 또한 철도공사가 관할하는 역과 차 량기지 등을 환수해 재벌과 해 외자본에 개방하고 넘기려 하 고 있다. 얼마 전까지 맥쿼리 는 지하철9호선의 2대주주였 으며, 지금도 인천공항 고속도 로, 인천대교, 서울-춘천 고속 도로, 우면산 터널 등의 대주 주 또는 운영자이다.
민주노총 정책부장 시절 오건호 박사가 번역한 『탈 선』(앤드루 머리 / 이소출판사 / 2003년 2월)
한국의 철도는 전체 길이가 약 민영화가 경쟁을
3,500여 km로 규모의 경제와 네트워크의 유기적인 안정성을 이룰 수 있을 만큼
통해 효율을 높이
크지 않다. 독일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런데 정부는 이마저도 쪼개려고 하고
는지, 아니면 비효
있다. 한국 철도를 발전시키려면 오히려 네트워크 분리가 아니라 통합적으로 조
율과 무책임만 양 산하는지 영국의 사례가 생생하게 보여준다. 납세자
화롭게 운행하면서 수서발 KTX를 지렛대로 새롭게 도약해야 한다. 정부는 코레일이 비효율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경쟁을 시켜야 하고, 민영화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어디서 비롯된 생각일까? 정부의 정책은 실패한 민영화의
들의 부담은 오히
사례인 영국 철도의 민영화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려 늘었고 도로와
영국판 <철도의 눈물>이 있다. 영국 철도기관사 노조 공보 담당관 앤드루 머리가
의 경쟁에서 철도
쓴 <탈선>은 한국 철도가 맞이할지도 모르는 ‘ 파국의 묵시록’ 이다. 이 책은 당시
는 밀렸다.
민주노총 정책부장으로 있던 오건호 박사가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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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사유화의 폐해를 겪은 후 민간에 매각한 시설 부분을 다시 정부가 인수하 면서 재공영화되었다. 하지만 영국 국민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연이 은 열차사고가 벌어졌고, 자신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사용되어야 할 막대한 부 가 사유화의 혜택을 입은 소수의 자본가들에게 공적 보조금이라는 이름으로 흘 러들어가서 주식배당으로 귀결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영국 화물 철도는 세 개의 기업으로 분할되었고, 열차운행은 25개, 여객 차량은 3개, 선로유지는 3개 기업으로 분리되는 등 총 100여 개의 회사로 쪼개졌다. 하청까지 합치면 1,000여 개의 기업이 생긴 것이다. 납세자들의 부담은 오히려 늘었고, 도로와의 경쟁에서 철도는 밀렸다. 민영화가 경쟁을 통해 효율을 높이는지, 아니면 비효율과 무책임 만 양산하는지 영국의 사례는 생생하게 보여준다. 번역된 지 10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탈선>이 고발하는 영국 철도 민영화의 폐해는 참고할 만하다.
재벌과 정권의 ‘ 위험한 거래’ 막기 위한 철도노조의 싸움 2013년, 민영화를 저지하기 위한 철도노조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들의 싸움은 국민의 철도, 철도의 공공성을 위한 싸움이다. 또한 필수인력을 제외한 모든 철도 노동자를 2천만 원짜리 비정규직으로 만들 수 있는, 재벌과 정권의 ‘ 위험한 거래’ 를 막기 위한 비정규직 ‘ 예방투쟁’ 이기도 하다. 지난 10월 23일 노동당 강북당협 은 <철도의 눈물>의 저자 박흥수 기관사를 모시고 강연회를 열었다. 강북당협처 럼 저자의 풍부한 자료와 생생한 입담을 노동당 당원협의회가 쏙쏙 빼먹었으면 좋겠다. 당장 각 당협에서 ‘ 저자와의 대화’ 를 시작하면서 철도노조와의 연대에 나서보자! 지하철9호선 환수, 단일요금체계로의 전환, 지하철 운영기관 통합 등 지방선거 공약도 고민해보자! 시장맹신주의자들에게 2015년은 철도민영화 완수 의 원년이란다. 자본과 권력이 인간다운 삶을, 공동체적 사회를 ‘ 탈선’ 시킨다면 우리의 사명은 ‘ 탈선’ 된 열차를 제대로 돌려놓고, 부서진 선로를 복구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저들의 ‘ 성공’ 이 우리의 ‘ 불행’ 이며, 저들의 ‘ 실패’ 는 우리에 겐 ‘ 행복한 실패’ 이다. 2년 남았다.
<더 볼 만한 자료> 캔 로치 감독, 영화 네비게이터(the Navigators>(2001년 영국 철도민영화를 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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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에 다녀왔습니다. 꽃다지는 1996년부터 일본 노동조합과 노동자들과 교류를 가져왔습니다. 1995년, 민주노총 출범식에서 꽃다지 공연을 본 몇몇 일본 노동자들이 다음 해 메이데이에 초청하면서 시작된 인연입니다. 대개 도쿄에서 일본 노동자들과 만나곤 했 는데 이번에는 요코하마조선초급학교의 어버이회에서 꽃다지를 초청했습니다. 도쿄조선 학교를 잠시 방문한 적은 있지만 재일교포들로부터 꽃다지가 직접 초청을 받기는 처음이 었습니다. 요코하마조선초급학교 역시 남쪽 문화예술인을 초청한 것은 처음이라고 합니 다.
조선학교 출신 재일교포 청년이 울먹이며 불러주던 노래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노래 <민들레 씨앗은 우리 가슴에>는 요코하마조선초급학교와 가나가와조선중고급학교 출신인 재일교포 청년이 만든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00년 일본 방문 때 꽃다지 안내자 중의 한 명이었던 열아홉 살 재일교포 청년 박 성일을 통해서였습니다. 교류회 자리에서 울먹이며 불러주던 그의 노래는 어눌했지만 참 석했던 모든 이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기술이 아닌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가 무엇인지를 고 스란히 보여주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통일의 신심을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만 누군가가 간 절히 원하는 것을 존중하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의 노래를 들을 때 제 심정이 그랬습니다. 최소한 남과 북의 정권 의지나 정세에 따라 휘둘리지 않고 마음대 로 남과 북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 내가 살고픈 곳에 정착할 수 있는 권리 정도는 누려 도 되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제작비 를 건지지 못할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통일테마 EP 음반 [오라]를 냈는지도 모릅니다. 스무 살 청년들의 마음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꽃다지에 전해준 그 울림을 음악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이번 방문에서도 비슷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10대 청소년들과 그의 부모들인 30~40대 재일교포들은 참 열심히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른바 재일교포 3세대인 30~40대 교포들은 지금까지 만났던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나 50~60대 장년층과의 만남과는 달랐습니다.
노 래 의
꿈
민들레 씨앗은 우리 가슴에 민정연 문화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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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로서의 모습보다는 이주민 3세대로서의 그들의 모습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일본인 친구들이 가끔 묻는다고 합니다. “언제 한국에 들어갈 거야?”라고. 일제강점기에 일본땅에 발 을 딛고 그 후로 100여 년 가까이 세월이 흘러 4세대까지 정착하여 살고 있음에도, 일본땅에서 태어나 한 번도 일본땅 밖으로 나가 본 적 없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일본땅에서 살 수 있는 권리를 인정 받지 못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그 한마디에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이방인인 가 봅니다”라는 말에서 이주민의 고단함이 묻어납니다. 제가 살고 있는 서울 구로에도 이주민들이 많이 삽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조선족입니다. 명절이면 대 낮부터 술에 취해 길거리에 쓰러져 뜻 모를 이야기를 중얼거리던 한 조선족 남자가 이국땅에서 느꼈을 서 러움 같은 것도 떠올랐습니다. 그렇다고 측은지심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들은 열심히 살고 있었고 당 당해 보였습니다. 조선학교를 지키겠다는 의지도 남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조선학교를 선택한 것이 한반 도의 어느 한쪽을 더 지지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한국에서 대안학교를 보내는 부모들의 심정과도 맞닿아 있을 것입니다. 운동과 예술교육에 힘쓰는 교육과정에서 그것을 느꼈다면 제 과장일까요?
전교생 대부분이 운동과 음악 활동을 하는 학교 그동안 재일교포와의 만남은 꽃다지 공연 중심이어서 교육과정에 대해 깊이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는 데 이번에 이틀동안 초급학교 어린이들과의 합동 공연 두 곡, 중고급학교 기악소조와의 연주 협연 한 곡을 진행하면서 그곳 학생들의 생활을 좀더 속깊게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전교생 대부분이 축구나 농구와 같은 운동부 활동을 하거나 기악 소조나 취주악부 등에서 음악 활동을 하던 모습이 유독 기억에 남습니다. 꽃다지 방문 이틀째가 일본 문화의 날이라 공휴일이었는데 이날 학부모들을 모시고 요코하마조선초 급학교에서는 무지개 페스타를, 무지개다리로 연결된 바로 옆 건물에 있으면서 한 운동장을 사용하는 가 나가와조선중고급학교에서는 음악 발표회를 진행하였습니다. 중고급학교 음악발표회는 매우 다양했습 니다. 국악기를 개량한 악기로 이루어진 기악 소조, 50여명으로 구성된 취주악부, 합창부 등 다양한 공연 이 이루어졌는데 그 실력이 대단했습니다. 대부분이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이 아니라 방과 후 연습을 통해 익힌 실력이라고 보기엔 매우 높은 실력이었습니다. 특히 남학생들만으로 구성된 합창부는 알고 보니 합 창부가 아니라 농구부와 축구부인데 틈틈이 합창연습을 하여 외부 대회에 나가서 수상도 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통일의 신심을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만 누군가 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존중하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 노래를 들을 때 제 심정이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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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일 년에 딱 한 번 행사를 위해 후다닥 준비한 수준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꾸준히 연습한 것이 고스 란히 드러나는 실력이었습니다. 참 부러웠습니다. 방과 후 학원 두 세 군데를돌며 공부에만 열중해야 하 는 한국학생들의 현실과 비교하니 더욱 부러웠습니다. 물론 조선학교 학생들도 고달픈 측면이 있을 겁니 다. 연습할 시간에 친구들과 더 놀고 싶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성장기에 다양한 음악을 접하고 노 래든 악기연주든 직접 일정한 연습을 해본 경험이 성장 후에 삶의 큰 자양분이 되리라 믿는 저로서는 부 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수학공부, 영어공부를 강제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자기 삶을 풍성하게 할 자산이 되리라 믿습니다. 초급학교 학생들도 방과 후 음악 활동을 비롯한 예술 활동이 꽤 활발했습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전교생 대부분이 무지개 페스타 무대에 선 것처럼 보였습니다. 누구 한 사람 배제되지 않은 발표회는 초 급학생 특유의 발랄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보는 이들을 매료시켰습니다.
북한 정세를 이유로 보조금 지급이 중단된 상태 조선학교는 지금 요코하마시의 보조금 중단 결정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 요코하마(橫浜)시는 북한의 핵 개발과 미사일 실험 등을 이유로 1980년대부터 조선학교 3곳에 지급하던 보조금을 중단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상태입니다. 하야시 후미코(林文子) 요코하마 시장은 “납치와 핵 개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지급할 예정은 없다”며 공공연히 말하고 다닙니다. 이에 앞서 요코하마 시는 ‘ 사립 외국인학교 보조금 교부요강’ 을 개정했습니다. '국제 정세에 비춰 취지에 반한다고 시장이 인 정하는 학교는 보조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추가하여 법적 근거까지 마련한 것입니다. 국제 정세 와 교육비 지원을 직접 연결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동의하기 힘든 대목입니다. 현재 조선학교 관계자는 “학교는 북한의 대변인이 아니다, 현의 보조금이 없어져 재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방침을 바꿀 것을 촉구하고 있으나 당국은 무응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다시 보조금을 받기 위한 투쟁의 길을 선택하고 그 결의와 각오를 다지고 있는 이들에게 노래로 위로 와 용기를 주었다면 이번 공연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부디 그랬기를 바랍니다. 자본과 권력은 국가라는 시스템 속에 참 많은 금을 쳐놓았습니다. 다수의 사람은 그 금을 넘지 않고 시 스템 속에 갇혀 사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그 금을 기어코 넘고자 하는 소수의 사람이 있 습니다. 제가 꽃다지를 통해 만나는 사람들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금을 넘고자 하는 소수의 사람입니다. 밥 먹고 살기 힘들다는 측면에서는 불행이고 권력과 자본에 갇히지 않는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참 다행입니다.
꽃다지의 <노래만큼 좋은 세상>을 조선학 교 6학년 학생들이 부르는 광경은 그 자체 로 감동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노래만큼만 좋았으면 좋겠습니다. 114
민들레 씨앗은 우리 가슴에 재일동포학생 글, 가락 어둠 속을 헤매이던 민들레 씨앗은 여기 찾았네 바람 타고 내 가슴 속을 밝게 비치네 갈라진 민족의 설움 헤어진 고통과 슬픔 씨앗은 겨레의 갈망을 내 가슴 속에서 부르네 내 가슴 찾아온 민들레 씨앗은 깊이 뿌리내려 희망의 고개 들어 통일의 한 송이 꽃이 되리니
민들레 씨앗은 내 가슴에 씨앗은 내 젊은 가슴 속에 민들레 씨앗은 우리 가슴에 통일은 우리 젊은 가슴 속에
학생들과 함께한 꽃다지. 서로 준비한 내용이 달랐지만 현장에서 협의하며 합동 공연 연 습을 하고 있다. 갑자기 바뀐 순서와 등장 방법에도 학생들은 매우 훌륭하게 적응하며 멋 진 공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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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비평
서울대병원 파업 언론보도, ‘ 환자불편’만 나부꼈다 조윤호 <미디어오늘> 기자
6년 만에 파업에 돌입했던 서울대병원 노동조합(민주노총 의료연대지부 서울대병원분회)이 지난 11월 5일 오전 5시부터 업무에 복귀했다. 10월 24일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고 12일 만에 노사가 합의에 도달한 것이다. 노조의 요구는 △의사성과급 폐지 및 적정의료시간 보장 △비정규직 정규화 및 병원 인력 충원 △임금 인상(20만 9천원 인상) △ 어린이환자 식사 직영 등이었다. 국공립병원인 서울대병원의 파업은 매우 큰 소식이었기에 대부분의 언론이 파업 소식을 주요하게 다뤘다. 하지만 언론은 파업의 본질을 전하기보다 현상 그 자체에만 주목하면서, ‘ 공공의 이익’ 을 근 거로 ‘ 사익을 위한 파업’ 을 비난하는 전형적인 편파보도를 또 다시 반복했다.
‘ 의료공공성’ 간 데 없고 ‘ 환자불편’ 만 나부껴 파업 첫 날인 24일 주요 아침신문과 방송뉴스를 보자. 대다수 언론은 노조의 파업으로 인해 발생한 ‘ 현상’ 을 스케치했다. 노조 조합원들이 서울대병원 1층 로비 한 편에서 파업 집회를 벌이면서 병원 로 비가 소란스럽고 북적거렸다는 소식과, 400여명의 조합원들이 일손을 놓게 돼 환자들이 불편을 겪었 다는 소식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파업으로 인해 환자들이 불안해한다는 소식도 전했다.
“서울대병원 노조 6년만에 총파업…진료 차질 환자 불편”(MBC) “서울대병원 노조 전면 파업…일부 환자 불편”(KBS) “서울대병원 노조 파업 이틀째…환자 불편 우려”(SBS) “'서울대병원 파업' 노사 입장차에 환자만 불편”(YTN) “서울대병원 진료파행 환자가 무슨 죄”(세계일보) “서울대병원 6년 만에 파업 환자들 “진료 못 받나” 발 동동”(동아일보) “‘ 의료공백 현실화’ 발 구르는 환자들”(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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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4일자 MBC 뉴 스 갈무리 (사진 : mbc보도자료)
“본관 로비 점거농성 또 환자만 골병”(서울신문) “병원인지 농성장인지 환자가 볼모인가”(한국경제) “서울대병원 노조 또 환자볼모 파업”(매일경제)
물론 병원 노동자들의 파업 때문에 환자들이 불편을 겪는 것은 사실이다. 다른 사업장과 달리 병원 은 사람의 생명이 결정되는 곳이다. 언론이라면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전해야 한다. 환자들의 불 만과 진료 지연은 일정 부분 불가피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론은 현상 그 자체를 넘어 현 상의 본질을 고민해야 한다. 병원이 파업을 하면 환자를 볼모로 삼는다는 엄청난 비난에 직면하게 된 다는 것을 병원 노동자들이 몰랐을까? 왜 그들은 그런 비난을 감수하면서 일손을 놓게 된 것일까. 이 지점에서 언론들이 말하지 않 는 것이 있다. 서울대병원 노조의 요 구는 임금인상이 다가 아니다. 이들
서울대병원 노조의 요구는 임금인상이 다가
은 국립대 병원인 서울대병원이 의
아니다. 의사성과급제를 폐지하고 환자들에게
료공공성을 강화해야 하며, 이를 위
적정 의료시간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 의사성과급제를 폐지하고 환자
하지만 대다수 언론은 주목하지 않았다.
들에게 적정 의료시간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대병원이 검 사건수에 따라 수당을 받는 의사성과급제를 도입한 이후 의사들이 환자 한 명 한 명을 제대로 진료하 기보다 검사 건수를 늘리는 데 주력해왔고, 이에 따라 ‘ 1분 진료’가 관행처럼 굳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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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들이 100% 부담하는 선택진료비로 의사들에게 진료수당을 지급하게 되어 의사성과급제로 인해 환자 부담이 늘어났다는 것이 노조의 주장이다. 동시에 의사성과급제로 인해 병원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이 늘어나고 노동 강도도 높아졌다. 병원 노동자들은 의사들이 검사 건수를 늘리기 위해 환자를 많이 받으면서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저녁 늦 게까지 일을 하게 됐다고 증언한다. 요약하면, 서울대병원이 ‘ 돈벌이 진료’ 를 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환자와 노동자 모두가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이다.
의료공공성 외치는데 “환자는 없는 그들만의 구호”라니 하지만 대다수 언론은 의료공공성에 주목하지 않았다. 노조의 요구 중에 환자들의 이해관계와 관 계된 부분이 있는데도 그 부분에 대해 다루기보단 노조의 요구와 환자들의 이해관계가 별개라는 태도 를 견지한 것이다. 파이낸셜뉴스는 “환자는 없는 그들만의 구호”라며 노조를 비판했는데, 의료공공성 을 외치는 것이 왜 환자와 관계없 는 요구란 말인가. 노동자와 환자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면은 또 있다. 노조는 ‘ 어린이병원 급식 직영’을 요구한 다. 급식이 직영이 되면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좀 더 안정적 으로 일을 할 수 있다. 나아가 어 린이환자 급식을 외부 위탁하면 병원의 일상적인 관리가 어렵고 문제가 발생해도 책임 소재가 불 분명해진다는 점에서 급식직영은 환자들 또한 환영할 만한 대목이 다. 하지만 이 사실은 주요 아침신 문과 방송뉴스를 통해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일보, 한국경제, 파이 낸셜뉴스, 동아일보, YTN 등은 파 서울대병원 1층 로비에 붙은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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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 때문에 환자들이 1회용 도구로
식사를 하는 불편함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물론 환자들이 불편함을 겪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환자 들을 그렇게나 끔찍이 아끼는 언론들은 왜 급식 직영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은 걸까? 실제로 지금 서울대병원에서 시행되는 2인실 병실료 인하 및 TV무료 시청, 보호자를 위한 장의자 설치, 다인실 병실 증대 및 의료급여환자에 대한 선택진료비 전액 감면, 야간주차비 천원으로 인하 등 은 노조의 요구로 인해 일어난 변화다. 2004년 파업 때 서울대병원 노조는 병실료 인하, 선택진료제 폐지, 입원환자의 무료 주차시설 이용 등을 요구했고 2007년 파업 때도 2인실 병실료 인하와 보험적 용 병실 확대 및 선택진료제 폐지 등을 요구했다.
공정방송, 참교육, 철도공공성… 노동자들이 싸워 얻어야 ‘ 공익’ 이다 서울대병원 파업을 바라보는 이러한 시각은 언론, 특히 보수언론이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투쟁소 식을 전할 때 관행처럼 들이대는 편향성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언론노동자들이 파업하면 ‘ 시청자 권 리’가 침해당한다고 말하고, 교사 들이 거리투쟁을 하면 ‘ 학생들의
교사들이 거리투쟁을 하면 ‘ 학생들의 학습권’
학습권’이 침해당한다고 말하고,
이
철도노동자들이 파업하면 ‘ 시민들 의 교통권’이 침해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이해관계와 ‘ 공공의 가치’는 결코 동떨어져 있
,
철도노동자들이 파업하면 ‘ 시민들의 교통권’ 이 침해된다고 비난하지만 노동자들의 이해관계와 공공의 가치는 동떨어져 있지 않다.
지 않다. 언론노동자들의 파업은 공정방송을, 교사들의 거리투쟁은 참교육을,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은 철도공공성을 주장한다. 언론의 역할이 사회의 공공성을 증진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부분에도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서울대병원 파업 첫째 날, 한 조합원이 파업 현장을 찍고 있는 카메라들을 보며 “잘 좀 보도해주세 요”라고 부탁하면서 “어제는 이상하게 나가서…”라고 말을 흘렸다. 그 말이 계속 머리를 맴돈다. 그 조합원은 서울대병원 파업을 둘러싼 언론보도를 보며 어떤 심정이었을까.
삶과 문화 119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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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121
노영수의 DIY 공작소
목재 현판 만들기 노영수 서울 동작당협 사무국장
‘ 현판’ 하면 세로로 길쭉한 나무 판에 궁서체로 음각된 고루한 글씨들을 떠올리게 된다. 최근에는 여러 시민단체들과 정당에서 공간과 조직을 상징하는 현판을 새롭게 만들어 보려는 시도들이 있다. 그래서 아 크릴 현판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기존의 목제 현판에 비해 깔끔하긴 하지만 개성이 부족하다. 노영수 사무 국장은 나무 현판과 아크릴을 함께 사용하는 방식을 구상해서 직접 제작해왔다. 옛 방식과 최근의 방식을 조합한 형태다. 손으로 직접 만든 현판은 보기에도 좋고 개성도 있다. 최근에는 노동당 초청으로 방문한 스웨덴 민중의 집 연합회를 위한 선물로 이 현판을 제작했다. 스웨덴어로 ‘ 민중의 집’ 글자를 새겼다. 의 미있고 기억에도 남는 선물이 되리라 생각해서다. 그 제작과정을 소개한다.
LED 깃발 제작 과정 준비물 : 목재, EVA폼, 본드, 커터칼, 실톱, 바이스, 도안, 먹지, 아크릴판, 다보(아크릴판을 고정하는데 사용하는 부품)
1. 목재 위에 먹지를 놓고 그 위에 도안을 얹어 볼펜이나 연필 등으로 외곽선을 따라 그으 면 목재에 밑그림이 그려진다.
2. 목재 위에 도안 밑그림이 그려진 모습
3. 탁자 등에 바이스로 목재를 고정시키고 실 톱을 준비한다.
4. 바이스로 목재가 단단히 고정된 상태에서 실톱을 이용해 도안 밑그림을 따라 톱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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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실톱이 진행하는 방향에 톱질이 편하도록 목재 방향을 바꾸어가며 글자 모양을 파낸 다. 이때 글자 크기가 작기 때문에 톱질을 수직으로 미세하게 해나가는 것이 포인트 다.
6. 실톱을 이용해 목재를 잘라 만든 글자의 모습.
7. 현판의 바탕이 될 목판 위에 글자를 순서대 로 잘 배치해 위치를 정한다. 잘라낸 글자 뒷면에 본드를 발라 현판 부착하면 된다.
8. 오른쪽 아래에는 노동당 로고를 제작해 부 착했다. 빨간색 EVA 폼(2mm)을 도안대로 커터칼로 잘라내 본드로 부착한 모습. 이 렇게 하면 부착된 글자가 양각 효과를 낸 다.
9. 나무를 파서 만든 양각과 달리 본드로 부착되어 있기 때문에 손상의 위험이 있다. 이를 막기 위해 다보(아 크릴판 고정을 위한 부품)를 이용해 아크릴판을 나무판 위에 고정해주면 완성이다.
삶과 문화 123
소리 다운
당원들의 유쾌한 청각생활을 지지하는
이 달의 음원 다운로딩 가이드
루 리드를 기억해 장석원 음악 블로그 soundz.egloos.com 주인장
10월 27일, 루 리드Lou Reed가 뉴욕의 자택에서 숨졌다. 지난 5월 간 이식 수술을 받았으나 반년도 넘기지 못했다. 많은 한국인들에게 루 리드는 익숙하기보다는 낯선 이름이다. 하지만 영화 “트래인 스포팅”에서 이완 맥그리거가 마약을 주사하고 마치 무덤처럼 바닥이 내려앉는 장면을 기억하는 지? 그때 흘러나오는 노래가 루 리드의 ‘ Perfect Day’ 이다. 이 글이 인쇄 될 즈음엔 그의 죽음도 철 지난 뉴스가 되겠으나, 시점이 안 맞더라도 지면을 빌려 루 리드의 음악을 기억하고자 한다.
첫 번째 기억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1967) 이 앨범을 들어보지 못한 이라도 앤디 워홀이 디자인한 바나나 커버는 한번쯤 본 기억이 있을 듯하다. 앤디 워홀Andy Warhol이라는 이름값을 보탰음에도 발매 당 시 음반은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그해 여름, 사람들은 도어즈나 지미 헨드 릭스나 롤링 스톤즈를 열심히 들었지 벨벳 언더그라운드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도 시장의 척도가 만물의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주역”의 두 영역처럼,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록큰롤 이라는 세계의 ‘ 양’ 이라면 벨벳의 데뷔앨범은 ‘ 음’ 을 대변한다. 벨벳 이전까지 록큰롤은 섹스를 단지 은유로서만, 그것도 아주 에둘러 표현했다. 하지만 벨벳은 금단의 영역인 사도마조히즘과 변태적 욕망을 직접 언급했다. “Sgt. Pepper's...”가 밝고 아름다운 색채의 향연과 잘 조화된 화성에 터 잡은 음악이었다면 벨벳은 거 울의 반대편이었다. 이들의 데뷔 앨범은 불협화음과 소음, 신경을 자극하는 불쾌 함과 은밀한 폭력으로 가득하다. 앞서 말했듯이 비틀즈는 시대정신으로 추앙받 고 벨벳은 창고로 직행했지만, 베트남과 닉슨, 윤리와 환경의 파괴 같은 이후의 세상사를 보면 오히려 벨벳 쪽이 시대의 흐름을 온전하게 읽어냈다. 불온하면서 위험한 상상, 모든 위대한 예술은 그렇게 시작한다. ● 기억해야 할 곡 :‘ I’m Waiting for the Man’ , ‘ Heroin’ , ‘ There She Goes Again’ , ‘ Venus in Fu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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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기억 『Transformer』 (1972) 그 어떤 거물 아티스트라 하더라도 기복이 있고, 어느 순간 본인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 로 창작력이 폭발하는 시기가 있다. 이를 전성기라고 부를 수도 있겠으나 이 단어는 상 업적인 맥락을 강조하는 것이기에 적절하지 않다. 누가 봐도 1972년은 루 리드의 상상력 과 표현이 폭발하는 시기지만 그의 인생에서 지갑이 가장 두툼하던 시기는 절대 아니었 다. “Transformer”는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팬이었던 데이빗 보위가 프로듀서를 맡았다. 그런 이유에 루 리드 본인의 취향까지 더해 앨범은 당시 기승을 부리던 글램록glam rock 의 분위기로 가득하다. 그러나 글램이라는 단어만으로 “Transformer”의 전체를 설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후에 발표한 “Coney Island Baby”나 “New York” 앨범이 종합적 인 면에서 완성도가 더 높을지 몰라도, 이 음반에는 루 리드의 작곡능력이 최고의 순간 에 이른 증거가 넘쳐난다. 루 리드의 노래 가운데 처음으로 히트곡이라는 수식이 붙은 ‘ Walk on the Wild Side’ 와 앞서 이야기한 ‘ Perfect Day’ , U2를 비롯 여러 아티스트들이 다시 불렀던 ‘ Satellite of Love’ , 그 외에 ‘ Vicious’ , ‘ Hangin' 'Round’ 등 그의 이름과 함께 연상되는 대표곡을 모두 이 앨범 안에서 찾을 수 있다. ● 기억해야 할 곡 :‘ Walk on the Wild Side’ , ‘ Perfect Day’ , ‘ Andy's Chest’ , ‘ Hangin' 'Round’
마지막 기억 『Songs for Drella』 (1990) 루 리드와 존 케일John Cale은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함께 만든 동지였지만 밴드의 노선 을 놓고 충돌했다. 그리고 1968년 존 케일이 밴드를 떠났고 이후 둘은 말 한마디 섞지 않 았다. 둘의 화해는 1987년 앤디 워홀이 죽고 나서야 이루어졌다. “Songs for Drella”는 친구 이자 스승이었던 앤디 워홀을 추모하는 두 사람의 공동작업이다. 드렐라는 드라큘라와 신데렐라의 합성으로 앤디 워홀의 별칭이었다. “Songs for Drella”의 매력은 이 앨범이 오페라나 뮤지컬이 아니라 무대 위의 모놀로그 같 은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에 있다. 3분 정도의 짧은 곡 15개는 마치 소극장에서 루 리드와 존 케일이 최소한의 악기만을 가지고 만드는 상황극과 독백처럼 들린다. 노래들은 워홀 의 삶, 워홀과 다른 예술가와의 관계, 리드와 케일의 개인적인 회고 등이 뒤섞여 있다. 말 하자면 ‘ 앤디 워홀을 주제로 한 변주곡 모음집’ 이다. 죽은 이를 기리는 음악인만큼 루 리드나 존 케일 음악 특유의 날선 긴장감은 자제하고 있으나 소품처럼 최소화한 구성 안에 담긴 팽팽한 긴장은 감출 수가 없다. 30년만의 공동작업이 30년 동안의 공동작업처 럼 들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 기억해야 할 곡 :‘ Smalltown’ , ‘ Slip Away (A Warning)’ , ‘ Nobody But You’ , ‘ Hello It's Me"’
소리다운 125
제주에서
버스학개론 올레 코스 주요지점을 거치는 동서교통, 학생들에게는 스쿨버스 올레길 5코스의 시작지점인 남원읍 위미3리에서 출발하는 동서 교통 버스는 위미항과 공천포를 지나 쇠소깍을 들른다. 그리고 올레길 6코스가 시작되는 보목동에서 서귀포 시내 를 거쳐 올레길 7코스의 시작인 외돌개를 지나간다. 다시 서귀포 여고를 지나 5분정도 가다 보면 올레길 7코스의 백미인 법환포구 그리고 강정포구로 갈 수 있는 월드컵 경기장 정류 장이 나온다. 여기서 다시 8분여 가다보면 내가 사는 하원마을이 나오고 좀 더 가게 되면 올 레길 8코스가 시작되는 중문마을과 중문 관광단지에 이른다. 이 버스는 올레길 8코스의 끝 지점이자 올레길 9코스의 시작 지점인 대평리에서 운행을 마친다. 처음엔 몰랐는데 이 버스가 올레꾼들이 가보고 싶은 남부의 주요 올레 코스를 거의 다 돌고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제주도 서귀포를 도보로 여행할 사람들이 알아두면 유익한 정보인 셈이다. 단 제주도 시내버스는 배차 시간이 좀 길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서귀포 남부의 동서를 잇는 주요 교통수단인 이 버스는 학생들을 등하교시키는 주요한 스쿨버스의 역할도 한다. 덕분에 8개월째 이 버스로 출퇴근하는 난 매일 미어터질 듯 가득 찬 학생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가야 한다. 같은 시간대에 버스를 타다 보니 승객들, 특히 학 생들의 얼굴이 눈에 익게 된다. 대한민국 여느 학생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는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편 짠한 마음까지 든다. 차창에 머릴 기대고 산발이 된 머리를 흔들며 모자란 잠에 취해 있는 여학생, 스마트폰에서 눈을 못 떼고 뭔가를 계속 찾고 있는 남학생… 아침 등교길 버스 안은 조용하다. 물론 저녁 버스 안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의 수다가 버스를 통 째로 들었다 놨다 하는 느낌이다.
사랑은 시내버스를 타고 버스로 출퇴근을 시작한 지 한 2주 정도 지난 어느날, 이날도
조성일 _싱어송라이터 조성일은 14년동안 <희망의 노래 꽃다지>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솔로로 데뷔했으며 최근 1집 음반 <시동을 걸었어>를 발매했다. 126
어김없이 버스 안은 학생들로 북적였다. 난 한숨을 한번 길게 내쉬고는 버스에 탔다. 버스 입구까지 들어 차 있는 학생들을 뚫고 조금 안으로 들어서는데 창가 쪽에 빈자리가 하나 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빈자리 에 앉으며 안도의 한숨을 한번 또 내쉬었다. 그렇게 편하게 앉아서 몇 정거장을 지나는데 문득 의문이 생 긴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이리저리 몸을 가누지 못하는 학생들이 왜 이 빈자리에 앉지 않았을까? 그러다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남학생에게 시선이 가닿았다. 뭐 그냥 평범해 보이는 고등학생이었다. 다음날 다시 그 시간에 버스를 탔는데 이 평범해 보이는 남학생 옆자리가 또 비어 있다. 무심코 난 또 한 번 그 자리에 앉았다. 헌데 월드컵 경기장 정류장에서 승객들이 우르르 몰려타는데 이 남학생이 머뭇머뭇 하더니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는 한 여학생에 내 옆자리, 다시 말해 자기 자리를 내주는 것이었다. 그냥 단순히 자리를 내주는 모습이 아니라 서로 뭔가 이미 알고 있는 듯 친밀한 사이처럼 보였다. 서로 수줍은 미소를 건네며 자리를 바꾸고는 남학생과 여학생 사이게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눈빛으로 서로 뭔가 대화 를 한다. 순간 직감적으로 얘들이 보통 사이가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내가 뭔가 실수를 한 건가 싶 어 가시방석에 앉은 듯 좌불안석이 되었다.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이들의 모습은 한결 같았다. 그 시 간에 그 자리. 남학생은 자리를 비워 두었고 그 자리는 여학생의 자리였다. 처음에는 왜 다른 학생들이 그 빈자리에 앉지 않는지 의혹이 쌓여가기도 했다. 혹시 서귀포에서 알아 주는 ‘ 주먹’인가? 아니면 이 남학생의 형이, 아버지가 서귀포를 주름잡는 ‘ 어깨’일까? 그래서 이 남학생 이 선점해 놓은 빈자리에 감히 그 누구도 앉지를 못하는 건가? 헌데 이 남학생은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올라오면 바로 빈자리를 내주는 거였다. 그리고는 자기 자리를 기다렸던 여학생에게 내주었고 어느 땐 둘 다 서서 가기도 했다.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아내와 함께 하는 ‘ 시내버스 로맨스’ 를 꿈꾸며 언제부턴가 나는 아예 이 시간대의 버스를 타지 않으려고 좀 더 일찍 집을 나선다. 처음엔 두 학생의 모 습이 참 이뻐보이다가 어느 순간부터 이상하게 얄미워졌는데 어느 날 깨닫게 됐다. 내가 시샘을 하고 있 다는 것을.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남학생들만이 우글거리는 학교를 다녔던 나로서는 한 번도 경험해 보 지 못한 저 학생들의 모습이 부러웠고 그만큼 나의 학창시절이 아쉬웠던 거였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십 대 학생들의 풋풋한 사랑에 시샘을 하고 있다니. 생각해보면 마흔의 나이일지라도 요런 풋풋한 버스 안 풍경을 만들지 말란 법 없다. 언제든 기회가 되 면 서귀포 동서를 잇는 이 버스를 타고 아내랑 풋풋한 사랑 여행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다. 물론 아내가 허락을 해줘야겠지. 아내도 내심 이런 사랑을 원하고 있을까? 세월이 흘러 그저 익숙해져버린 사 랑이 그때 그 시절의 가슴 설레는 ‘ 시내버스 로맨스’ 를 그리워한다.
제주에서 127
편지를 접으며
최종범의 꿈
열사의 유언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홍명교 삼성전자서비스지회 교육선전위원
민주노조 운동에서 삼성은 미지의 영역이다. 전체 조합원 구성으로 보나 노조의 전반적인 투쟁 역사로 보나 사실상 금속노조는 현대차 중심의 노조였다. 그런 금속노조에게 삼성은 재벌을 상대로 한 거대한 미 조직 사업의 대상이자 언제고 조직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괴물 같은 상대다. 가뜩이나 전체 민주노조 운 동이 위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시기에 막상 삼성을 정면으로 상대하려면 많은 결의와 준비, 두려움부터 극복해야 한다. 그러나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출범은 당장 그런 준비나 전 조직적인 합의, 비전을 갖고 이뤄진 것이 아니다. 삼성전자서비스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전국 각 센터의 베테랑 엔지니어들이 자 발적으로 조합원을 조직해 금속노조의 문을 두드린 것이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자신의 ‘ 삶’ 을 걸고 찾아온 노동자들을 어떻게 마주할까. 삼성전자서비스의 중 수리 기사였던 최종범 열사의 유서에서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열사의 죽음이 알려졌을 때 대다수 언론은 “배고파서 힘들었어요” 그 문구 하나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내내 조용했던 언론이었기에 그조차 고맙 기는 했다. 그러나 최종범 열사는 한 사람의 ‘ 불쌍한 노동자’ 가 아니다. “옆에서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있 는 것도 힘들었다”며 “전태일 님처럼 그러지는 못해도 부디 도움이 되길 바라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메신저다. 그는 모든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노동조합을 세우고 천안으로 돌아오던 7월 14일. 최종범 열사는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창립 총회 문건
삼성에서 민주노조를 세웠다는 것 자체가
을 인증샷으로 찍고 SNS에 이렇게 올렸다. “우리에게 생긴 힘!” 삼성에서 민주노조를
그에게는 삶을 바꿔낼 하나의 ‘ 힘’ 이었던
세웠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삶을 바꿔낼
것이다. 이제 삼성을 바꿔 ‘ 삶’ 을 바꾸자
하나의 ‘ 힘’ 이었던 것이다. 이제 삼성을 바
는 그의 메시지를 모든 삼성전자서비스
꿔 ‘ 삶’ 을 바꾸자는 그의 메시지를 모든 삼
노동자들에게 전해야 한다.
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에게 전해야 한다. 1500명 남짓의 조직력을 절대적으로 끌어
올려야 앞으로 다가올 삼성 자본이라는 괴물에 맞선 정면 승부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는 제 사회운동 진영과 함께 집중적인 조합원 조직화에 다시 뛰 어들고자 한다. 전국의 노동당 당원들 역시 당장 ‘ 노동당’ 을 알리는 것을 넘어 최종범의 유언, 서른셋 젊 은 노동자의 꿈을 전하기 위한 ‘ 꿈’ 의 전도사로 나서주기를 희망한다. 상대는 다름아닌 ‘ 삼성’ 이지 않은 가.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거대한 반격의 기회가 될 것이다. 128
12월의 당원
“몸이 먼저 밀양에 와 있었어요” 반핵부산시민대책위 공동집행위원장 노태민
(사진 : 이인우 부산 남수영구 당원협의회)
노태민 당원이 2012년 해운대구에서 시의원으로 출마하던 당시 선거공 약이 반핵이다. 지금은 핵발전소로부터 이어진 송전탑을 따라 밀양까 지 오게 됐다. “원래 결정이 더딘 편이거든요. 그런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어요, 몸이 먼저 움직였고 이미 밀양에 와 있었어요.” 내년 선거 준 비도 해야 하는데 밀양에서 출마할지도 모르겠다며 농을 던진다. 지난 10월 초부터 송전탑 공사가 강행되면서 노태민 당원은 밀양에서 살다시피 한다. 상황실과 현장을 오가면서 주민들을 지원하는 일을 하 고 있다. 밥벌이로 논술 강의를 나가는 날에만 부산에 들르는데, 늦은 밤 집에 들러 양말과 침낭을 싸서 나설 때는 ‘ 빨치산이 이랬겠구나’ 싶 다. “한 번은 산 위에서 경찰과 몸싸움을 하는데, 뒤에서 할매 한 분이 한전 직원인 줄 알고 제 다리를 붙잡고 당기더라고요. 할매는 기를 쓰고 늘 어지는데 정작 나는 밀리지도, 아프지도 않은 거예요. 서러움이 울컥 올라왔어요. 이렇게 힘없는 사람들이 한전과, 국가와 맞서고 있구나.” 밀양은 매일매일 전쟁이다. 공사는 계속되고 할매들의 투쟁도 계속된 다. 전국에서 연대와 지원의 손길은 꾸준히 이어진다. 현장을 한 번 와 본 사람들은 계속해서 찾아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앞으로의 전망은 단언하기 힘들다. 지난 5월에 전문가협의체가 만들어지고 잠시 공사가 중단된 것처럼, 뭔가 전환점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바심에 매일 속이 바 짝 탄다. 밀양투쟁이 어떻게 될 것인지 묻는 사람들이 많다. "이기려고 싸우는 거죠. 전망하긴 어려워요. 그런데 이기든 지든, 할매 들과 함께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미래에서 온 편지 제4호 발행인 이용길 편집인 장석준 편집팀 김민하 김성현 노정 박권일 이상엽 정철수 조윤호 최백순 홍원표 교 열 김성현 노정 양솔규 정정은 디자인 고미숙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 마포-라00403) 발행일 2013년 11월 26일 주 소 서울 마포구 서교동 371-12 비금빌딩 7층 노동당 전 화 02) 6004-2006, 2007 팩 스 02) 6004-2001 이메일 laborzine@gmail.com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인 쇄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973-15 원일컴 가격 10,000원
2013.12 제4호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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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부동산 정책 잔혹사
그 많던 집은 누가 다 가졌나 기획 ■ 예술과 밥 이재영을 추모하며 ■ 정책이 살아야 진보정당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