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서 온 편지 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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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

제5호

제5호

www.laborparty.kr

특집

값 10,000원

박근혜의 뇌구조 이용길 대표 인터뷰 ■ “분열이 아니라 재구성이다” 기획서평 ■ 일베,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표지 이야기

세상을 바꾸는 뇌구조? 집권 2년째 접어든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

(사진 : 이치열 <미디어오늘> 기자)

17~18대 국회의원으로 8년을 국회 본회의장을 드나들면서 딱 네 번 입을 열었다. 상임위 활동을 다 통틀어도 스물여덟 번이 다. 워낙 말을 삼가시다 보니 어쩌다 한 마디 할 때마다 ‘ 대박’ 이 났다. 2006년에는 박근혜의 “대전은요?” 한마디에 대전 시장 선거에 판세가 뒤집혔다. 여야의 합의로 해결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박근혜가 “여야의 합의로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하나마나한 말 한 마디 던져도 세상이 술렁거렸다. “박근혜 묘 수 내놓아” “여야 합의 可 결재 떨어져” “MB한테 맞서는 거 아 냐?” 그랬던 그가 국회에서 청와대로 옮겨간 지 이제 2년째를 맞이한 다. 여전히 박근혜는 기품있게 침묵한다. 그리고 인사부터 정책 방향, 예산까지 대통령의 ‘ 의중’ 을 읽어 소수의 측근들이 국정 을 좌지우지한다. 그 ‘ 의중’ 이 노동계를 겨냥하면 느닷없이 전 교조는 노조가 아니게 된다. 상품이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상품 이 된다. 경제민주화 공약이 후퇴한 자리에는 재벌을 위한 정책 이 들어선다. 지난 12월 14일, 노동당은 전국위원회에서 박근혜 정권 퇴진 투 쟁을 결의했다. 종교계와 시민사회, 정치권의 박근혜 대통령 사 퇴 주장에 이어, 정당으로서는 처음으로 정권 퇴진 투쟁을 천명 한 셈이다. 박근혜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청사진을 현실로 옮 겨놓도록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미래에서 온 편지 제5호 발행인 이용길 편집인 장석준 편집팀 김민하 김성현 노정 박권일 이상엽 정정은 정철수 조윤호 최백순 홍원표 교 열 김성현 노정 양솔규 정정은 디자인 고미숙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 마포-라00403) 발행일 2013년 12월 26일 주 소 서울 마포구 서교동 371-12 비금빌딩 7층 노동당 전 화 02) 6004-2006, 2007 팩 스 02) 6004-2001 이메일 laborzine@gmail.com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인 쇄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973-15 원일컴 가격 10,000원


미래에서 온 편지

‘ 미래에서 온 편지’ 는 영국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작가, 미술가인 윌리엄 모리스가 1891년에 낸 소설 제목

News 『News from Nowhere』 을 우리말로 의역한 것입니다. from Nowhere

nowhere는 ‘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는 뜻입니다. ‘ 유토피아’ 라는 말의 원래 의미도 ‘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고 하지요. 이제 노동당의 기관지에 ‘ 미래에서 온 편지’ 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한국 사회의 답답한 현재에 햇살을 들이는 미래의 틈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고 보니 nowhere는 now+here(지금 여기)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미래가 되기 위해, 이 편지를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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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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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띄우며 박근혜의 뇌구조가 궁금한 까닭|<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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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노동당 3인3색 인터뷰 : 청년 논객부터 예비후보까지 이용길 대표에게 묻는다 “분열이 아니라 재구성이다”|<미래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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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박근혜의 뇌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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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 환갑이 넘어도 ‘ 박정희의 딸’ 인 까닭|장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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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기본권 : 노조탄압의 정치경제학|한지원

24

민영화 : 철도부터 가스, 물, 의료까지? |김 철

31

공안 : 박정희의 ‘ 긴급조치 정치’ 로 회귀하나|최백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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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들) : 대통령의 유별난 ‘ 노익장’ 신뢰, 왜?|김민하

기획서평 ■ 박가분 신간 『일베의 사상』 일베,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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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진보정치 열전 3|한 많은 내 인생, 진짜 노동자 김순희(1부) “노동해방이 유일한 꿈이었다”|심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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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어둠 속 미포만에 다시 동이 트는가 :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에 바란다|서분숙

63

쟁점토론 노동이 중심이 되는 계급적 지역운동, 그리고 <민중의 집>의 역할은|강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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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포럼 탈핵 에너지 전환의 지역화와 사회화 그 대안을 모색한다|이정필


2014년 1월 제 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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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왼쪽에서 본 농업이야기 배추 값이 오르면 놀부보쌈이 화를 낸다|연승우

지역에서 현장에서 78

의원단일기 공중전화 부스와 우체통, ‘ 메아리 도서관’으로 변신하다|화덕헌

83

청년이 진보다 청년, 다시 정치를 기다린다 : 2030 플레이포럼|유검우

86

무지개기금 스스로 참여하는 부문위원회, 함께 조성하는 무지개기금|나도원

89

세계의 진보정당

90

먼 좌파 이웃 좌파 ⑥ 미국에도 좌파정당이 있냐고?(1)|장석준

96

구라파 통신 독일 공산당(KPD) 금지, 한국의 ‘ 지나간 미래’ 인가|최동민

삶과 문화 100

숨은 문화예술 당원찾기 “시간을 들여야 나올 수 있는 음악이 있다”|나도원

106

우리동네 현대사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철을 기억하다|김학규

110

불온한 서재 사회주의-역사 속 가능성의 퍼즐 맞추기|양솔규

114

노래의 꿈 바위처럼|민정연

118

미디어 비평 멈춰선 철도, 변함없는 언론 “문제는 민영화야!”|조윤호

122

만화 새해 외|공기

124

소리다운 당원들의 유쾌한 청각생활을 지지하는 이달의 음원 다운로딩 가이드|장석원

126

불온한 입맛 좋은 게 좋은 건 아니다|박성경

128

편지를 접으며 파도의 예감|박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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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띄우며

박근혜의 뇌구조가 궁금한 까닭 2014년, 박근혜 정권이 2년째에 접어듭니다.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2014년 1 월호는 특집 코너를 통해 박근혜 정권의 지난 1년을 돌아보고 몇 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박 근혜 정권의 본질을 분석하고자 합니다.

각 정당들은 연초마다 정권 평가를 내놓곤 합니다. 정권평가라 함은 응당 해당 정권에서 기획-집행한 정책의 성과를 논해야 맞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정권은 공적인 시스템이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체계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인사부터 정책방향, 예산까지 박근혜 1인의 ‘ 의중’을 읽어 소수의 측근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합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앞으로 이 정권 의 비전 또한 박근혜가 무슨 생각을 할지에 따라 결정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 의중 정치’의 본질을 이야기하려면 박근혜의 뇌구조를 들여다보아야 하는 셈입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 2014년 신년호 특집이 생뚱맞게도 ‘ 박근혜의 뇌구조’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특집 주제로 ‘ 박근혜의 뇌구조’를 내세웠지만, 박근혜의 뇌구조와 쌍을 이루는 것은 박근 혜 정권 이후의 한국사회, 즉 우리의 미래입니다. MB정권의 토건개발이 생태계에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남기고 지나갔듯, 박근혜 정권 또한 한국사회에 불가역적인 족적을 남길 불길한 조짐이 여기저기서 드러납니다. 갈수록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민영화의 움직임이 그러하고, 공무원노조와 전교조 등 노동조합의 근간을 뒤흔드는 노동탄압이 그러합니다. 신자유주의는 박근혜의 얼굴을 하고 우리 삶 속으로 점점 깊숙이 침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특집은 미래에서 온 ‘ 징그러운’ 편지, 즉 경고장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미래에서 온 편지》 소식도 하나 더 전합니다. 작년 말 5차 전국위원회에서 기 관지위원회가 새로이 출범했습니다. 기관지준비팀은 이제 ‘ 준비팀’ 꼬리표를 떼고 당헌상의 상설 사업위원회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늘 다짐하듯, 이 잡지를 만들기 위해 잘려나갈 나무들 에게 미안하지 않은 잡지를 만들겠습니다.

2013년 12월 26일 <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드림 4


구독자 모집 오늘 우리의 한 걸음이 길을 엽니다. 미래가 됩니다. 우리는 길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 사람과 자연이 공존 가능한 지구생태계, 차별과 소외 넘어 모두가 평등한 세상, …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밑그림을 그려나가면서 없는 길을 만들고, 스스로 길이 됩니다. 그래서 노동당의 꿈은 곧 <미래에서 온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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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노동당

이용길 대표에게 묻는다

“분열이 아니라 재구성이다” 3인3색 인터뷰 : 청년 논객부터 예비후보까지

2014년은 2008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분당 이후 두 번째 지방선거를 치르는 해다. 불과 2~3년 사이 진보진영 안에서 숨가쁘게 분열과 통합을 거듭하면서 맞이하는 새해, 그리고 또 다시 한국 정치지형의 격변과 진보정치 재편의 가능성을 곳곳에서 확 인하는 새해기도 하다. <미래에서 온 편지> 신년호에서 이용길 당대표 인터뷰를 기획했다. 한국사회와 정 치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통찰하는 20대 논객, 지방선거에 출마했고 지금도 2014 지방 선거를 준비 중인 광역시당 활동가, 그리고 노조에서 진보정치에 냉소적인 조합원들을 언제나 마주하고 있을 노동운동 활동가까지. 세 명의 당원이 두 시간에 걸쳐 이용길 대 표에게 쉼없이 질문을 던졌다. <미래에서 온 편지> 팀은 점잖은 질문에 뻔한 답변이 오가는 인터뷰는 사절한다고 사전에 엄포를 놨다. 가난한 살림으로 만드는 기관지라서 낭비, 이 책을 위해 잘려나갈 나무들에게 미안하니 그 ■ 사회 : 장석준 부대표, 기관지위원

또한 낭비라고. 아니나 다

■ 인터뷰어 :

를까, 청문회장을 방불케

서영아 부산시당 부위원장, 2010 지방선거 부산 남구 시의원 출마

하는 날카로운 질문들이

이원재 서울 서대문 당원, 민주노총 금속노조 미조직사내하청조직부장

쏟아져 나왔다.

한윤형 서울 용산 당원, <미디어스> 기자

지금+여기 노동당 7


1% 정당의 현주소 “존재감을 찾습니다” 한윤형 : 아픈 질문부터 시작하겠다. 뉴스에서 노동당을 찾아볼 수 없다. 더불어 당 대표의 존재감도 없다. 홍세화 전(前) 대표 당시에는 당과 별개로 당 대표 기사는 드문드문 나왔는데, 이용길 대표 취임 이 후 “대표가 누구냐” 물으면 제대로 답이 나올까 싶기도 하다. 당을 우선시한 홍보 전략의 결과인가? 이용길 : 현재 노동당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만 분명히 말하고 싶다, 현재 의 노동당은 뉴스와 세간의 입방아 속에 있지 않고 지역과 현장에 있다. 노동당 당원들이 밀양뿐만 아니 라 투쟁 현장을 지키고 있거나 늘 그들과 함께 연대하고 있다. 아직 언론의 조명을 받는 제도권 정당으로 진입하지는 못했지만 현장과 지역에서 치열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당 대표가 존재감이 없다는 것도 대표가 유명 정치인이 아니라는 현실을 방증한다. 세간에 잘 알려져 싸인을 받는 당 대표면 더 좋았겠지만, 작년에 대표단 선거 출마 당시 얘기했듯 우리한테 필요한 당 대표 는 ‘ 신뢰받는 당 대표’였다. 그리고 지금 시기에 대표로서 나의 사명은 나 스스로가 유명 정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유명 정치인을 만들고 키우는 대표가 되는 것이다. 그간의 대표들에 대해 평가하자는 건 아 니지만, 이용길 대표는 당원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배반하지 않겠구나 하는 믿음을 지난 1년간 당원 들에게 심어주었다고 자부한다. 아쉬운 면이 없지 않지만 우리가 위치한 현재의 주소를 확인하면서 앞으 로 나아가야 할 과제를 주는 거라고 본다. 한윤형 : 민주노동당 초기 ‘ 2% 정당’이란 비아냥을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 듣곤 했다. 그뒤 점점 역량 을 쌓아나가는가 싶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 1% 정당’이다. 1% 정당이 지금 이 순간 존속하는 게 한 국 사회에 기여하는 바는 뭘까? 이용길 : 정치집단으로서 정당은 현재의 존재가치와 더불어 미래가치를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일단 현재의 가치로 보자면, 신 (新)유신 정권이라 불리는 이 시기에 사회주의를 지향 하는 강령을 갖고 정치를 하 겠다는 세력이 있다는 것 자 체가 역사적인 사실이다. 동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게 참 다행이라고 여긴다. 10년 이후의 사회, 그 변혁 의 지향을 노동당이 구체적 으로 지금 당장 구현하지 못 하는 데 대해 질타를 받는 8

이용길 대표

한윤형 기자


것이지 노동당의 존재 자체가 회의적이라고는 여 기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노동당을 중심으로 향

“오늘날 진보는 외적 형태로 보면

후 진보정치를 재건하고 제대로 된 진보정당의 비

분열이 맞다. 하지만 내용으로 보면

전을 새로 만들 수 있는 미래 가치를 갖고 있다고 본다. 이 기관지의 제호 <미래에서 온 편지>도 그

분열이 아니라 재구성 중이다.”

런 의미다. 진보정치가 복원되기 어려울 것이다. 대표의 의견

“노동 현장의 냉소와 실망,

을 듣고 싶다.

내용적 재구성으로 극복하겠다”

이용길 : 민주노총을 함께 창립했고 민주노총 의 정치방침에 따라 진보정당운동을 시작해 평생

이원재 : 요즘 현장에서는 진보정당에 대해 말

을 살아온 민주노총 조합원으로서 가감없이 말하

도 꺼내지 말라는 분위기다. 예전 조합원들이 볼

겠다. 민주노총은 수년 동안 현장이 어렵다, 정치

때는 예전엔 다 ‘ 같은 당’ 당원들이었는데 이제는

사업이 어렵다, 대중사업이 어렵다고 얘기하면서

제각각 ‘ 다른 당’ 당원들이 돼서 세액공제로 현장

늘 진보정당 분열을 그 원인으로 지적했는데, 거꾸

을 쑤시고 있다. 조합 간부가 노동당원이더라도 주

로 보자면 이는 ‘ 노동자정치세력화’라고 하는 민

변에 얘기를 잘 못한다. 노동당이 자랑스럽지 않아

주노총 정치사업이 실패했다는 현주소이기도 하

서가 아니라 말을 하면 할수록 불신이 일어나는 것

다. 자기 사업의 실패에 대한 분명한 진단과 평가

이다. 진보정당이 이렇게 찢어져 있어서는 노동운

없이 진보정당이 통일만 되면 민주노총도 정치사

동이 지도력을 발휘할 수가 없고 권위도 서지 않는

업을 잘할 수 있다고 책임을 전가하는 데 동의하지

다. 진보정당을 재편하고 분열을 극복하지 않으면

않는다. 2011년에 실제로 한 번 통 합을 해봤고, 아주 적나라한 실패로 드러났지 않나. 노선 과 지향에 대해서 치열하게 토론하고 합의하면서 이뤄 진 재구성이 아니었다. 동교 동계 상도동계 떼어서 모으 는 식으로 모이다 보니 살림 이 돌아갈 수가 없었고 그러 니 다시 셋으로 갈라진 것 아닌가. 당시 민주노총이 진

서영아 부위원장

이원재 조직부장

보정당들에게 ‘ 묻지마 통 지금+여기 노동당 9


합’을 요구할 때 정말 답답했다. 오늘날 진보정치의 상황은 외적 형태로 보면 분열이 맞다. 하지만 내용으 로 보면 분열이 아니라 재구성 중이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정당의 정체성에 걸맞는 정당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각각 계속 검증받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비정규직· 미조직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정당이려면 이원재 : 현장에 노동당 깃발이 많이 보이는 건 사실이다. 뿌듯하긴 한데 그렇다고 당이 성장하는 건 아니다. 그건 기본적인 활동의 영역이다. 노동자 당원들, 민주노총 조합원들을 어떻게 발동해서 움직이게 할까. 예컨대 빨간날 캠페인의 경우 당에서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자세로서는 긍정적으 로 보지만 조직적 전략은 안 보인다. 당의 정체성과 이미지를 홍보하는 수준인 것 같다. 미조직노동자들 을 조직화하려는 단위들이 분명히 전국 곳곳에 있는데, (이미 당과 조합에 가입돼있는) 조합원들과 결합하는 게 필요하다. 이용길 : 상당한 수준의 대안까지를 함께 얘기해주셨다. 노동정치 프로그램이나 노동위원회, 노동정 치전략사업 등을 구상해보자는 얘기는 있으나 아직 구체화가 안되어 미흡하다. 빨간날 캠페인의 경우, 민 주노동당 시절 정책 사업을 열심히 해서 성사될 만하면 차용당하고 또 차용당하고 했던 경험 탓에 노동당 도 대표적인 사업 하나를 키우고자 하는 마음이 크다. ‘ 빨간날’ 하면 노동당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노동 당의 브랜드로 만들면 민주노총뿐만 아니라 한국노총에도 함께 하자고 제안할 생각이다. 한윤형 : 덧붙여서 얘기하자면 미조직노동을 대변하고 조직하는 것이 노동당의 포지션에 주어진 책무 중 큰 부분일 것이다. 노동당이 대변하는 미조직노동자는 공장에 생산직 비정규직, 파견직에 한정된 듯한 느낌이 있다. 다른 대처법이나 전략 필요하지 않을까? 이용길 : 당보다는 당원들의 노력과 힘에 아주 큰 신뢰와 기대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노년유니온이 만들어지고 알바노동자가 의제화되고 있는 것도 우리 당원들이 노력한 결과다. 당의 사업으로 구체화되 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렇게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당원들의 노력을 당이 어떻게 밑받침하 고 정치화할 것인지 고민이 더 필요하다. 당원들이 열심히 활동한 성과가 당으로 수렴되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열정적인 노무사와 현장 활동가들 중에도 우리 당원들이 상당수다. 이 역량들을 모으면 노동당 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시스템과 인적 인프라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러한 전당적인 지원과 정치사업화를 고민하는 노동정치사업단 논의를 촉발시키려 한다.

지방선거, 왜 이렇게 분위기 안 뜨나 한윤형 : 지방선거 전략이란 걸 세울 수 있을까? 노동당은 진보신당 시절부터 야권연대에 대해 이견이 많았다. 노동당의 대처전략이나 우선순위에 놓는 가치는 무엇인가? 신야권연대가 생길 경우 조건부로 선 10


거연대에 합류할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나? 이용길 : 상반기 전국위원회를 통해 결정된 진

“그렇게 해서 지속가능하겠냐고

보정치 재편에 대한 4대 방침이 있다. 노동당의 정

묻는다면 우리의 목표는 ‘ 지속’이 아니라

체성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제대로 된 진보정당을

제대로 된 진보정당으로의 ‘ 성장’이라고

세워나가는 계기로서의 지방선거에 가치를 둔다.

답하겠다.”

노동당의 강령과 당명으로 진보정치 재구성의 실 체를 검증 받는 것이다. 선거연대도 마찬가지다. 진보정치 재편에 대해

성취하는 것이다. 술먹고 고단해 죽을 것 같을 때,

당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4대 가치에 따라 선거를

하루종일 자고 싶을 때 나는 산으로 가서 지칠 때

함께 돌파하자고 한다면 당은 함께할 준비가 돼있

까지 움직여야 술독도 빠지고 피로가 확 풀린다.

다. 다만 신야권연대가 민주당, 안철수 등을 모두

(웅성웅성 “그건 체질에 따라 다릅니다!”) 제대로 된, 그

포함한 특검연대로 흘러가는데 이에 대해 노동당

리고 유효한 진보 정치세력으로서 성장하는 것이

이 어떤 판단을 갖고 있느냐하면 그건 또 다른 문

우리의 목표 아니겠나. 우리 당원들의 피로도는 단

제다.

순히 물리적 휴식으로는 극복될 수 있는 게 아니

이원재 : 다수 출마를 통한 정당득표율 제고,

다. 현재 설정하고 있는 목표치, 즉 노동당의 강령

2000년 민노당 창당 이후 매 선거마다 한 번도 기

과 노선으로 검증받고 현실정치 속에서 최소한의

각되지 않고 매번 올라왔던 방침이다. 진보신당 출

정치적 물적 토대를 확보하는 것, 그 고개를 넘는

마자들 중에는 그때부터 지금껏 15년째 그러고 있

것으로 피로도는 보상받고 극복될 것이다. 올해 지

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자기 희생하면서 발전하는

방선거를 치르고 2016년부터 18년까지 총선, 대선,

게 아니라 그냥 버텨온 것이다. 노동당이 미래적

지방선거가 연이어진다. 이번 지방선거는 그때를

가치를 중시하는 정당이라면 현실적으로 준비된

위한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본다.

후보들을 중심으로 선거를 치르고, 장기적으로 어

더군다나 ‘ 내 한 몸 출세하겠다’ 마음먹은 보수

떻게 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 되는 거 아닌가. 활동

정치인들이야 사람들 모아 밥먹고 상갓집 가고 결

가들의 자기희생에 기초한 이런 진보정당 구조가

혼식 챙기는 걸 직업적으로 하지만, 우리는 활동가

지속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로서 다만 선거준비에만 몰입하고 사는 사람들이

이용길 : 그렇게 해서 지속가능하겠느냐고 묻

아니다. 이번 선거에 노동당 후보 150명 출마하자

는다면, 원래 지속가능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성장

고 얘기하면 ‘ 또 선거 나가냐’ 이러지만, 실제로

가능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답하겠다. 당원들의 피

보면 선거에 대한 피로도와 달리 이미 그 150명 중

로감이 누적된 상태임을 모르지 않는다. 실제로 이

대부분이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일

번 선거는 쉬고 다음 총선을 준비하자는 의견도 없

상적 활동을 쌓아나가면서 그 위에서 선거를 계기

지 않다. 그러나 피로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

로 지역에서 노동당의 정치를 구현하는 게 우리의

은 잠시 쉬고 피하는 게 아니라 목표를 달성하고

궁극적인 지향 아니겠나. 지금+여기 노동당 11


“사실 나도 고단해 죽겠다” 서영아 : 사실 2% 전략의 핵심은 광역· 기초의원 70명 이상 출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이 목표를 달성 하려면 부산· 울산· 경남이 30만 표를 책임져야 한다. 그 책임감을 부산시당의 집행부는 무겁게 느낀다. 그런데 당원들도 그렇게 느끼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다. 전과 달리 선거 분위기가 뜨지 않고 당원들이 움직 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 이후의 전망’이다. 활동당원들 사이에 설왕설래가 계속되고 불안한 상태다. 지 방선거 이후 당의 전망을 어떻게 보고 있나? 많은 당원들이 궁금해하고 있는데 노동정치연대 등의 통합논 의 속에서 당의 방향은? 이용길 : 진보정치 재편의 내용과 시기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조율이 되고 있다. 지금은 단순히 연합정 당의 재편이 아니라 현안 공동 투쟁, 지방선거 공동 대응, 그리고 향후 진보정치 재편을 포함해서 논의하 는 중이다. 당 대표단에서도 여러 번의 토론회에 참여하여 꾸준히 판단과 주문을 내어놓았다. 크게 우려 할 일이 아니다. 지난해 대통령선거는 진보정당 운동 역사상 대선후보전략이 완전히 망한 해였다. 그렇게 실패한 상태 에서는 사실상 주도력을 행사할 수가 없다. 지방선거에서 목표를 달성한다면 지방선거 이후의 구도에서 노동당의 실질적인 주도력도 강화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 대선, 2017년의 과제가 내년 지방선거로부터 역 순으로 구성될 것이다. 당원들의 고단함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니나, 사실 나도 고단해 죽겠다. 하지만 이 목표를 포기하거나 낮출 생각이 없다. 좀 고단하더라도 함께 해보자. 한윤형 : 제 스스로 열심히 활동하는 당원이 아니다 보니 당에서 전망을 보기보다는 ‘ 내가 더 갈 곳이 없다’ 는 생각에 남아있다. 남한사회에서 여기 노동당 말고는 딱히 돈 낼 좌파정당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수준에서 당비 내고 기관지 구독 하다 보면 당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다. 당원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정예화되려면 당원들의 자긍심을 북돋울 수 있 는 장치들이 필요하다. 서영아 : 오프라인에서 활동하지 않는 당원들의 경우, 그야말로 손에 떨어지는 게 단 하나도 없다. 출 력 인쇄물이 돈이 많이 들기는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신문이라도 왔으면 좋겠다. 당의 컨텐츠를 당원들에 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 그 통로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이용길 : 인터뷰가 아니라 청문회였던 것 같다. 말씀해주신 제안과 지적을 잘 새겨듣고 가능한 구체화 할 수 있는 것들부터 마련하겠다. 지난 2013년 한해는 제대로 된 진보정당을 ‘ 노동당’ 이라는 이름으로 만 들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었다고 여긴다. 부족하고 미흡하지만 그간 여러 모로 애를 쓴 결과들이 당내에 움직이고 있다고 확신한다. 내년에는 그간 준비한 우리의 무기와 실력을 갖고 한걸음 더 나아가는 한해가 될 것이다. 특히 올해 6월 지방선거라는 공간에서 노동자와 민중을 적극적으로 만나고 당의 장기적 성장 전략에 따른 계획을 세우고 다져나가는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 12


특집

박근혜의 뇌구조 인사부터 정책방향, 예산까지 박근혜 1인의 ‘ 의중’ 을 읽어 소수의 측근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합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앞으로 이 정권의 비전 또한 박근혜가 무슨 생각을 할지에 따라 결정될 것 같 습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 2014년 신년호 특집이 생뚱맞게도 ‘ 박 근혜의 뇌구조’ 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특집 / 박근혜의 뇌구조 1. 아빠

환갑이 넘어도 ‘ 박정희의 딸’ 로 불리는 까닭 이미 환갑이 넘은 사람을 자꾸 누군가의 딸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참 실례되는 일이다. 하지만 요즘 박근혜 정부의 행태를 보면 ‘ 박정희의 딸’이라는 사실이 새삼 절실하게 와 닿는다.

장석준 부대표, 기관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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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의 두 얼굴? 올해 초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에 한국노동운동연구소의 요청으로 차기 정부의 성격을 전망하 는 글을 쓴 적이 있다. 한국노동운동연구소가 펴낸 책 『한국의 신자유주의와 노동 체제: 노동운동의 고민 과 길 찾기』 (노동의지평, 2013)에 “정치체제: 2013년 이후 정치체제의 변화 전망과 노동정치”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이다. 이 글에서 나는 박근혜 정부를 내다보며 “위기 관리 정부의 모순된 두 얼굴”이라는 표현을 썼다. 당시만 해도 박근혜 정권의 성격을 짐작하는 데 참고할 만한 자료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하나는 대 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 박근혜 후보와 그 캠프가 보여준 모습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선 이후 대통령직인 수위원회를 통해 드러난 면모였다. 둘은 너무도 상반됐다. 우선 후보 시절 박근혜 및 그 주변은 야당이 ‘ 복지’를 말하면 ‘ 복지’를 더 강력히 주창하고 ‘ 경제 민주 화’를 꺼낼 듯하면 ‘ 경제 민주화’를 먼저 치고 나가는 순발력과 포용력을 보여주었다. 나는 이를 “집권 과 정의 대중적 포용력”이라 정리했다. 반면 인수위 시절 박근혜 세력은 행정부, 사법부 고위 관료 출신의 노회하고 부패한 인사들에 의존하 고 집착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 경우는 “집권 이후의 관료적 제한성”이라 규정했다. 둘 다 박근혜 세력의 얼굴들이었다. 그래서 “모순된 두 얼굴”이라 이름 붙였다.

확신에 가득찬 외길 “역시 박정희의 딸” 집권 2년째를 맞이하는 지금에 와서는 “두 얼굴”이라는 이 표현이 쓸데없이 번잡하게 느껴지기만 한 다. 출범 이후 박근혜 정부는 오직 한 가지 얼굴만을 우직하게 고집해왔다. 그것은 내가 “집권 이후의 관 료적 제한성”이라 정리하고 넘어갔던 얼굴의 확대판이다. 후보로 내뱉었던 공약 중 진보적으로 들렸던 것들(‘ 경제 민주화’ 부터 철도 민영화 중단, 기초연금 도입까지) 은 모두 폐기 처분됐다. 노령의 구시대 인사들(대표적으로 김기춘)이 권력 핵심으로 부상했다. 국가정보원 의 대선 개입 의혹이 일파만파로 커지자 사과는커녕 검찰 등 국가기구 내부의 동요를 철저히 단속하고 나 섰다. 또한 통합진보당 내 일부 인사들의 이른바 ‘ 내란 음모’라는 것을 끌고 나와 역공을 퍼부었다. 하나 같이, 후보 시절 보인 순발력이나 포용력과는 정반대되는 행보다. 이 정부는 확신에 가득차서 자신이 걸 어갈 외길을 이미 선택해버린 것 같다. 이 대목에서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다. 물론, ‘ 박정희’다. 이미 환갑이 넘은 사람을 자꾸 누군가의 딸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참 실례되는 일이다. 아무리 심각한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이라도 그만 한 연배가 되면 부모의 그림자란 성장기의 아련한 기억 이상이 되기 힘들다. 그런데 그렇게 상식적인 경우로 봐줄 수가 없다. 요즘 박근혜 정부의 행태를 보면 ‘ 박정희의 딸’이라는 사실이 새삼 절실하게 와 닿는다. 40여 년 전 박정희 정권의 역사적 사실들이 반복 상연되는 것만 같다. 특집 박근혜의 뇌구조 15


그래서 이제는 열성 야당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냉철한 사회과학자들 사이에서도 ‘ 유신 회귀’니 ‘ 파시즘 조짐’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지경이다.

박근혜 정부는 박정희 노선을 따르고 있는가? 박근혜 대통령은 정말 아버지의 길을 교과서 삼아 따르고 있는 것일까? 단지 박정희의 장녀이기만 한 게 아니라 철저한 ‘ 박정희주의자’인 것일까? 박근혜 정부가 집권 이전에 내놓은 공약은 모두 속임수이고 실은 유신 시대를 추억하는 노령의 옛 고위 관료들과 함께 ‘ 박정희주의’ 프로그램을 실행할 속셈이었던 것일까? 지난 몇 달간 우리의 고통과 당혹스러움은 ‘ 박정희주의’의 재림에서 비롯된 것인가? ‘ 박정희주의’라는 게 실체로서 존재하는지는 논쟁거리다. 조갑제 같은 숭배자들의 머릿속에 그런 게 있을 수는 있겠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 세력에게 드골주의나 대처주의처럼 내용을 갖춘 ‘ 박정희주의’의 전통이나 프로그램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박정희 시대와 우리 시대 사이에 심대한 골이 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두 개가 말이다. 첫 번째는 1987년을 분수령으로 한 민주화다. 87년 민주 항쟁의 유산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 경계경보’ 수준이다. 한국 사회과학계의 가장 중요한 가설 중 하나인 “87년 이후의 민주 화는 역전 불가능”이라는 명제는 아직 부정되지 않은 상태다. 심지어 박근혜 세력도 이 민주화가 만들어놓은 정치 지형에 철저히 적응하며 성장했다. 역설적으로 이 들이 ‘ 경제 민주화’ 공약을 내걸고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쉽지 않은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재벌 은 더 이상 박정희 시대처럼 국가권력의 명에 따르는 봉신(封臣)들이 아니다. 그들은 민중들이 피로써 쟁 취한 민주화의 성과를 가로채 철저히 자신들의 권력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 유명한 고전 의 표현처럼 국가라는 집행이사회의 당당한 이사들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런 현실을 쉽게 돌이킬 수 없 다. 이 점에서 ‘ 박정희주의’는, 만약 그런 게 존재한다면, 참으로 연약하기만 하다. 또 다른 골은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 한국 자본주의의 변형이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97년 이후 한국 자본주의는 국가 주도 산업화 과정의 잔재를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맞춰 바꿔나갔다. 물론 박정 희 시대의 유산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전제 조건이 이들을 강력히 규제한다. 과거의 흔 적들조차 이제는 신자유주의 질서를 이루는 그 내부 구성 요소로서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재벌도 그 일부가 된 초국적 자본의 권력 구조에 복무해야만 한다. 박근혜 정부가 아무리 박정희 시대의 기억을 되살리려 애써도(‘ 제2의 새마을 운동’ 등등) 이것은 더 이상 옛날의 국가 자본주의와는 상관없다. 프랑스 자본가들 앞에서 한국 철도 사유화를 선전하는 대통령의 모 습은 확실히 그렇다. 이 장면은 대통령의 아버지보다는 외환 위기 이후의 김대중, 고집스레 한미 FTA를 추진하던 노무현을 더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 박정희주의’라 부를만한 근거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아마 권위주의적 16


국가를 중심으로 한 지배 전략일 것이다. 유신 체제는 권위주의적 국가주의와 군부 파시즘 사이에서 요동 쳤다. 이제까지 박근혜 정부의 내부 배치와 통치 양태를 보면, 파시즘까지는 아니어도 확실히 권위주의적 국가주의에 대한 강렬한 향수를 느낄 수 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대통령도 억압적이고 관료적 인 국가기구를 지배 질서의 최고 정점으로 삼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주의할 게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국가주의가 모아내려 한 1970년대의 지배 질서와, 박근혜의 그 재판(再版)이 응집하려는 2010년대의 지배 질서는 전혀 다르다. 따라서 둘의 권위주의적 국가주의 전략은 그 양태만 비슷할 뿐 역시 서로 같은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 박정희의 딸’ 을 바라보는 세 시각과 박근혜 정권의 지지 기반 지금까지 박근혜 대통령을 ‘ 박정희의 딸’로만 바라보는 데 따르는 위험을 짚어본 셈이다. 그렇다면 ‘ 박정희’가 박근혜 정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쇳말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다만 박근혜 대통령 본인이 아버지를 어찌 생각하는지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별로 중 요한 사안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청와대에 사당을 차려놓고 아침저녁으로 절을 하는지 안 하는지는 우리 가 알 바 아니다. ‘ 박정희’라는 열쇳말에 주목하더라도 이것과 현 정권의 관련성을 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박근혜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그를 ‘ 박정희의 딸’로 바라보는 대중의 시각 쪽으로 초점을 옮겨와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 뭐라 하든 정치 평론가들이 뭐라 토를 달든 유권자들이 박근혜를 바라보며 떠올 리는 첫 번째 인상은 어쩔 수 없이 ‘ 박정희의 딸’이다. 박근혜 역시 자신을 이렇게 ‘ 박정희의 딸’로 보는 세간의 시각을 염두에 두며 그에 화답해 자신의 정치를 만들어왔다. 그리고 ‘ 박정희의 딸’에 대한 대중의 시각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와 둘째는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들이다. 박정희의 독재를 그리워하며 ‘ 지도자의 딸’을 열 렬히 지지하는 게 첫 번째 시각이고, 이와 정반대로 독재의 기억에 진저리를 치며 ‘ 독재자의 딸’에 격렬히 반대하는 게 두 번째 시각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 두 시각은 어림잡아 비슷한 양적 분포를 보인다. 거리에 나와 ‘ 박근혜 퇴진’을 외치 는 이들이 있고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이들이 있지만, 꼭 그만큼 어떠한 논란에도 상관없이 현 정권을 열렬히 지지하는 이들이 있다. 두 진영은 서로 팽팽한 균형을 이룬다. 이것은 박근혜를 바라보는 이 두 시 각의 존재만으로는 그가 대통령이 되기 쉽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박근혜 세력이 ‘ 박정희의 딸’ 에 대한 첫 번째 시각에만 의존했다면, 박근혜 정권은 없었을 것이다. 제3의 시각이 있다. ‘ 박정희’를 무엇보다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 신화와 겹쳐 이해하고 정확히 그 연장 선에서 ‘ 박정희의 딸’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 박정희’ 를 이렇게 경제 성장의 상징으로 여기는 데는 지금 껏 지속되는 그 시대의 유산들이 한 몫 한다. 대표적인 것이 부동산을 중심으로 한 자산 가격의 지속 상승 특집 박근혜의 뇌구조 17


을 통한 중산층 지위의 확보와 유지다. 97년의 단절과 상관없이 한국 사회에서는, 그 이전의 국가 자본주의 시기에도 그리고 그 이후의 신자 유주의 시기에도 부동산 보유와 투기를 통한 중산층 진입 메커니즘이 의연하게 작동했다. 그 덕을 보았거 나 여기에 기대를 걸고 있는 상당수 대중에게 ‘ 박정희의 딸’이란 이러한 메커니즘의 연속성을 상징한다. ‘ 박정희의 딸’ 을 이런 각도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위의 첫째 시각과 결합함으로써 마침내 박근혜 정부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최소한 절반 수준을 유지하는 정부 지지율의 기본 토대는 다름 아닌 이 동 맹이다. 박근혜 정권 스스로 이러한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 박정희의 딸’에 대한 첫째, 둘째 시각이야 어 차피 상수(常數)다. 세 번째 시각이 지속되는 데 정권의 사활이 걸렸다. 그래서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대 도시 아파트 가격 유지에 명운을 걸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 결과로 집권 초기에 줄곧 높은 지지율을 맛보았고 이러한 자신감 덕분에 국정원 선거 개입 논란 등에도 강공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집권 과정에서 보여준 ‘ 다양한’ 얼굴들 은 한 색깔로 간단히 정리됐다. 권위주의적 국가주의의 얼굴. 역설적으로 이 모두는 민주화 이후의 대중 의 힘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2차 오일 쇼크와 박정희, 그리고 주택 가격 붕괴와 현 정부 ‘ 정치’는 ‘ 사회’를 응집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정치적 격변은 항상 사회의 심대한 변화로 확대되곤 한다. 그러나 ‘ 정치’는 또한 ‘ 사회’의 반영이다. 사회적 토대의 균열과 변화가 없고서는 정치의 격동도 없다. 지금 반(反)박근혜 진영에서는 이 복잡한 상관관계의 한 쪽 면만을 주목하는 게 당연시되고 있다. 정권 에 맞서려는 결기는 드높되 어찌 해야 승리하는 싸움을 시작할 수 있을지는 충분히 성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싸움의 첫 번째 조건은 이명박 정부에 이어 현 정부가 어떻게든 지탱하려 하는 주택 가격 거품 이 빠지는 것이다. 이것이 ‘ 박정희의 딸’을 둘러싼 다수자 동맹이 결정적으로 와해되는 신호탄이 될 것이 다. 그러니까 아파트 가격이 폭락할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거품 붕괴 이후 의 구조 개혁 대안을 제시하며 중간층을 설득하자는 것이다. ‘ 복지’나 ‘ 경제 민주화’로 포괄되었던 여러 요구들을 이러한 새로운 포격 방향 아래 재배열하자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박정희 정권의 황혼은 1970년대 말 경제 위기와 함께 왔다. 전 세계적인 스태그플레이션 이 남한에서 뒤늦게 기승을 부리자 마침내 유신 체제의 철옹성도 더 이상 버텨내지 못했다. 21세기에도 황혼은 다시 한 번, 한국 자본주의의 현실과 대중의 기대 사이의 어긋남에서 시작될 것이다. ‘ 박정희’는 이 점에서도 이 정권 아니 우리의 미래를 전망하는 데에 역시 중요한 열쇳말이 아닐 수 없다. 18


특집 / 박근혜의 뇌구조 2. “…응? 노동기본권?”

노조탄압의 정치경제학 한국은 정권의 기호에 따라 헌법상의 기본권인 노동기본권이 쉽게 무시될 수 있는 나라다. 박근혜 시대에 들어와서도 이러한 양상은 그대로다. 자신이 사 용자이기도 한 공무원노조와 전교조에 대한 탄압은 공안정국의 연속선상에 서 이뤄졌다.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경기 성남 당원

특집 박근혜의 뇌구조 19


헌법적 권리로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기본권 한국에서 헌법상의 권리 중 가장 쉽게 무시당하는 것은 노동기본권일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느닷없이 지난 10월 전교조에 대해 ‘ 노조 아님’을 통보했던 것이 단적인 예다. 해고자의 조합원 자격 문제를 명분 으로 했지만, 그냥 전교조가 싫었던 것이다. 전교조에 앞서 공무원노조도 정부는 온갖 트집을 잡아 노조 설립 신고를 반려했었다. 심지어 공무원노조는 노동부 요구 사항 상당수를 받아들였음에도 정부가 관계 기관 대책회의를 통해 신고를 반려시켰다. 한국은 정권의 기호에 따라 헌법상의 기본권인 노동기본권이 쉽게 무시될 수 있는 나라다. 그렇다면 이렇게 쉽게 노동기본권이 무시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한국의 노동관계법이 노동기본권을 심각하게 제약하고 있는 문제를 들 수 있다. 당장 앞의 두 노조는 노조법 상의 노조가 아니 라 특별법 상의 노조다. 단결권, 단체교섭권도 제한적으로만 허용되고 단체행동권은 보장받지 못한다. 정 치활동 금지 조항으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정부가 활동을 제약할 수도 있고, 조합 원 가입범위 역시 대통령령으로 규정되어 있어 정부 임의로 결정할 수 있다. 시민들의 헌법적 권리에 대 한 제약을 국무회의 의결만 거치면 되는

한국은 정권의 기호에 따라 헌법상의 기본권

시행령으로 규제할 수 있고, 세상에 정 치적이지 않은 일이 거의 없는 만큼 정

인 노동기본권이 쉽게 무시될 수 있는 나라다.

부가 마음만 먹으면 노조의 아무 활동이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노조의 아무 활동이나

나 트집을 잡아 노조를 탄압할 수 있다

트집을 잡아 노조를 탄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는 것이다. 공무원과 교원에 관한 특별법보다는 낫지만 노조법 역시 노동기본권을 제대

로 보장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노조법 2조는 노동자와 사용자, 그리고 노동조합에 대해 아주 좁게 규정을 함으로써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조 결성과 가입을 원천봉쇄하고 있으며, 간접고용 노동 자들이 실제 사용자(원청의 사용자)를 대상으로 교섭을 요구하는 것도 가로막고 있다. 노동기본권은 시민 모두가 누릴 수 있는 헌법적 권리임에도 노조법은 해고자나 구직자의 노조가입을 제약하고, 복수노조 창 구단일화를 강제함으로써 기업 단위 다수 노조에게만 교섭권을 허용하고 있다. 가장 황당한 건 노동기본권을 누더기로 규정하고 있음에도 이 권리마저도 사용자가 마음대로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조법 위반에 대한 처벌은 3년 이하 징역에 3천만 원 벌금이 최고형이다. 그나마도 부 당노동행위로 구속된 사용자는 지난 10년간 없다. 예를 들면 청문회와 관련 문건의 공개로 그 실체가 정 확하게 밝혀진 ‘ 창조 컨설팅’의 노조파괴 공작에도 불구하고 처벌된 사용자는 지금까지 한 명도 없다. 법 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사용자가 노조를 와해할 목적이면 마음대로 부당노동행위를 저지르다 걸려도 그다지 부담이 없다는 것이다. 20


이렇다보니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구호 중 가장 많이 외쳐지는 것은 “민주노조 사수(死守)”다. 결의와 비장함이 느껴지면서도,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상한 구호가 아닐수 없다. 노동자 단결권은 헌법적 권리인 데, 민주화 이후를 이야기하는 시점에서도 이 헌법적 권리들을 목숨을 내걸면서 인정받아야 하니 말이다.

산업적이고, 정치적인 전략적 노조탄압 한편 지난 몇 년간 발생한 노조탄압의 특징은 개별 기업의 판단이 아니라 산업적, 정치적 전략이 우선 되어 노조탄압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금속노조의 예를 보자. 2009년 쌍용차지부의 점거파업에 대한 군 사작전 식 탄압 이후 금속노조는 3년 간 매우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금속노조에서 발 생한 노조탄압은 개별 사용자들의 의지보다도 청와대와 현대차의 전략이 핵심이었다. 청와대와 현대차 는 금속노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금속노조를 실질적으로 지탱하는 지역지부의 골간 지회들을 타깃으로 삼아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미리 진행하고, 직장폐쇄와 용역깡패를 통해 속전속결로 노조를 무너뜨렸다. 첫 번째 타깃은 파업 시 현대차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부품사들이 밀집되어 있던 경주였고, 그 경주지 부의 핵심 노조였던 발레오만도지회였다. 2009년 말부터 현대차와 발레오만도 사측은 직장폐쇄 시 중국 을 통한 역수입 공급계획을 짰고, 검찰, 경찰, 노동청은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통해 노조를 빠르게 제압할 작전을 수립했다. 2010년 2월에 직장폐쇄가 이뤄졌고, 용역깡패가 투입되었으며, 노조 핵심 간부들에 대 한 해고와 구속이 이뤄졌다. 이 패턴은 2010년 5월 구미지부의 가장 큰 노조였던 KEC지회, 2010년 8월 대

2009년 쌍용차 사태 이후 발레오만도지회(왼쪽), SJM지회(오른쪽) 등에 이르기까지 금속노조는 3년간 매우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사진 : 참세상)

특집 박근혜의 뇌구조 21


구지부의 가장 활동적 노조였던 상신브레이크, 2011년 5월 충남지부와 대전· 충북지부의 핵심이었던 유 성기업지회, 2012년 7월 경기지부에서 가장 조직력이 쎈 노조 중 하나였던 SJM지회와 금속노조 기업지부 의 상징 중 하나인 만도지부로 이어졌다. 이 사업장에서는 모두 현대차의 사전계획이 있었고, 청와대의 지원이 있었다. 현대차의 목적은 분명했다. 현대차는 2천 년대 초반 이후 경쟁력의 핵심 중 하나로 부품 공급 관리를 설정하고, 현대모비스를 세우는가 하면 동시에 국내 주요 부품사들이 적시에 현대차가 생산하는 차량 종 류대로 부품을 납품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한 마디로 이른바 도요타 적시공급체계(JIT)를 넘어서는 비용 절약을 달성해 보겠다는 야심이었다. 적시직서열공급(JIS)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 시스템은 실제 현대차가 기술 열위에도 불구하고 세계 탑 메이커들과 비슷한 수준의 수익률을 내는 핵심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 는 금속노조였다. 현대차가 자랑하는 이 공급사슬관리(SCM)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부품사에서 파업이 통 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제고가 최소화된 상태에서 금속노조가 파업을 하게 되면 현대차가 직접 타격을 입는다. 현대차노조가 파업을 하지 않더라도 생산이 중단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차는 부품구매부에 노 무팀 핵심을 두고 금속노조 사업장 전체를 관리하기 시작했고,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 이를 그대로 실행해 옮겼다. 금속노조의 핵심 골간 노조들을 골라 집요하게 파괴공작을 벌였다. 모두가 알다시피 청와대의 목적 역시 분명했다. 더 이상 긴 언급이 불필요할 정도다. 촛불시위 이후 반 대세력에 대한 사전 조치를 분명히 한 청와대는 민간인 사찰팀을 운영했고, 노사관계 부문에서 전문가였 던 이영호는 민주노총의 중심이었던 금속노조를 꽤 꼼꼼하게 무력화시킬 계획이었다. 현대차와 이해관 계가 맞아떨어졌고, 2009년부터 2012년까지 그대로 실행이 이뤄졌다. 박근혜 시대에 들어와서도 이러한 양상은 그대로다. 자신이 사용자이기도 한 공무원노조와 전교조에 대 한 탄압은 공안정국의 연속선상에서 이뤄졌고, 보수세력의 말초신경을 자극할 두 노조가 타깃이 되었다.

이건희 회장의 무노조 철학으로 1백만 노동자가 노동기본권을 박탈당하는 나라 삼성의 반노조 정책은 한국에서는 상식에 가깝다. 고용노동부도 알고 시민들도 안다. 얼마 전 폭로된 『2012년 “S그룹” 노사전략』 문건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랬으리라 생각했었던 것들을 글자로 적어놨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건희 회장의 신념 하나로 어떻게 국민들의 기본권이 광범위하게 박탈당하는지 한번 살펴보자. 먼저, 삼성그룹의 정규직 비정규직 노동자가 가장 직접적으로 노동기본권을 박탈당한다. 공정거래위 원회 기준에 따르면 삼성그룹은 국내 76개 회사로 이뤄져있다. 2012년 말 이 76개 사의 종사자 수는 약 26 만 명이다. S그룹 노사전략 문건에 따르면 그룹 사 내 간접고용 노동자가 정규직의 30% 규모다. 대략 8만 명에 달한다. 삼성에 의해 직접적으로 무노조 상태를 강요받는 노동자가 자그마치 34만 명에 달한다는 것 이다. 22


형식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지만 삼성과 전략적인 관계에 있는 범삼성가로 범위를 넓히면 이 숫자는 더 커진다. CJ그룹 82개사 5만여 명, 신세계그룹 27개사 3만 여명에 두 그룹의 간접고용 노동자 약 2만여 명 이 이병철 회장 때부터 무노조 경영철학으로 인해 노동기본권을 제대로 누리고 있지 못하고 있다. 다음으로 삼성의 하청(협력사) 역시 삼성과 장기적으로 거래하기 위해서는 삼성의 무노조 철학을 따라 야 한다. 가장 큰 삼성전자를 보면, 현재 삼성전자가 관리하는 협력업체는 1차 8백여 개, 2차 3천4백여 개 기업이다. 삼성과 LG 계열사를 제외한 전자, 전기 산업 종사자 50만명 중 절반 이상, 약 25만 명 정도가 포 괄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식으로 화학(삼성정밀), 군수(삼성테크윈), 선박(삼성중공업), 도매(삼성물산), 시스 템통합(삼성SDI), 숙박(신라), 수리(삼성전자서비스), 소매(이마트), 운수(CJ GLS) 등을 모두 계산해보면 약 60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가 삼성 무노조 정책에 포괄된다, 요컨대 삼성그룹, 구 삼성그룹, 범삼성가의 간접고용 노동자와 1~2차 하청 등을 전체적으로 보면 약 1 백만 명 가까이가 삼성의 무노조 정책에 따라 노동기본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전체 임금노동자 의 6%에 해당한다. 기업 규모 상 노조 설립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10인 미만 업체들을 제외하면 한국의 10%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이 삼성의 무노조 철학 탓에 노동기본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시민의 노조 할 권리를 위해 이상에서 노조탄압이 발생하는 이유를 법적 측면, 산업적 정치적 측면, 그리고 재벌들의 철학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봤다. 정말 이유도 가지가지다. 그렇다면, 노조탄압의 역사를 끝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필자 생각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 은 ‘ 노조 할 권리’ 가 시민 모두의 당연한 상식이 되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한다.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공식적으로는 10%, 실제 어용노조들을 제외하면 5% 내외다. 종사자 1,000명 이상의 대공장에서는 조직률 이 50%에 육박하지만 100인 미만 중소영세사업장에서는 1%도 되지 않는다. 공공부문에서는 대부분 노조 를 경험해보지만 민간부문에서는 노조 경험해 보기가 하늘에 별 따기보다 힘들다. 노조는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낯설거나, 또는 특권에 가까운 조직이다. 이렇다보니 노조 탄압 역시 시민의 기본권에 대한 공격 이 아니라 특수한 소수에 대한 탄압으로 인식되어 버린다. 법 제도적 정비가 필요할 것이고, 민주노총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기본권을 경험하도록 조직화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노동당을 비롯한 정당 시민사회단체들은 ‘ 노조 할 권리’가 시민의 당연한 권리임을, 어쩌면 가장 중요한 헌법적 권리임을 좀 더 널리 알려나가야 한다. 모든 사용자는 노조를 좋아하지 않는 다. 노조가 보호받고, 시민들의 노동기본권이 지켜질 수 있는 힘은 오직 이 권리가 보편성을, 당위성을 획 득할 때만 나올 수 있다.

특집 박근혜의 뇌구조 23


특집 / 박근혜의 뇌구조 3. 민영화

철도부터 가스, 물, 의료까지? 상품이어선 안되는 것들 정부가 내놓는 정책들을 보면 민영화 정책을 포기하기는커녕 좀더 은밀하고 교묘하게 추진하는 양상이다. 민영화는 일단 시작되면 되돌리기 어렵다. 공공기관 정책의 본질을 직시하고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한 때다.

김 철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 서울 관악구 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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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민영화를 문제 삼는가?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선 시기 국민적 합의 없는 민영화를 추진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을 했고, 박 근혜 정부의 국정과제나 각 부처의 주요 업무보고에서도 민영화라는 용어는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것은 민영화를 추진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 초반 공공기관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강력한 민영화 드라이브를 걸다가 촛불에 제동이 걸렸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소산이다. 실제 박 근혜 정부는 민영화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의식해서 민영화라는 이름을 뺀 채 경쟁체제 도입, 공공부문의 비효율성 제거, 규제완화, 자회사 설립, 서비스의 질 제고 등의 명목으로 단계적인 우회적 민영화를 추진 하고 있다. 철도노조의 파업을 촉발한 수서발 KTX 자회사 설립 결정만 보더라도 국토교통부와 철도공사는 민영 화가 아니라 경쟁체제 도입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발전 사업에 민간기업의 참여를 보장하는 조치를 꾸준 히 진행하고 도시가스사업법을 개정하여 민간사업자의 천연가스 직수입을 확대하는 것도 산업통상자원 부는 규제완화, 독점의 비효율성 개선일 뿐이라고 파악한다. 물 민영화 또한 공기업인 수자원공사에 위탁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얘기한다. 영리법인을 허용하고 의료민영화 포석을 깐 4차 투자활성화대책을 발표 하면서도 기획재정부 차관은 “이번 조치는 의료민영화와 무관하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사실 상 우회적인 민영화 조치이다. 일반적으로 민영화는 비가역적 조치라고 알려져 있다. 일단 민영화가 되면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는 것 이다. 민영화 정책을 우려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민영화 조치의 비가역성 때문이다. 정권이 출범한 지난 1년 동안의 준 비 끝에 박근혜 정부는 2013년 끝 무렵 부터 민영화 행보를 가시화하고 있다.

민영화는 일단 시작되면 다시 되돌리기 어렵 다. 그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대처하지 못하 면 이미 조금씩 무너진 공공서비스의 기반 자 체가 완전히 붕괴될 것이다.

그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대처하지 못한다면 이미 조금씩 무너진 공공서비스의 기반 자체가 완전히 붕괴될 것이다. 이에 민영화 폭주는 어떻 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 얘기하면서 지난 1년간 박근혜 정부의 공공부문 정책을 평가해보고자 한다.

철도 민영화의 우회로, 철도 경쟁체제 도입 철도의 경우 노무현 정부가 2004년 4단계 민영화를 결정했다. 1단계로 2004년에 철도의 시설부문과 운영부문을 분리하고, 2단계로 2005년에 철도청을 철도공사로 전환하며, 3단계로 철도공사의 경영을 개 선하고, 4단계로 철도운영에 민간을 참여시키고 경쟁을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국토교통부가 밝힌 「철도 특집 박근혜의 뇌구조 25


산업 발전방안」은 이러한 계획을 이어받아 3단계에서 4단계로의 전환을 추진하는 것이다. 2013년 6월 국토교통부는 「철도산업 발전방안」을 확정했다. 2015년 개통 예정인 수서발 KTX의 운영권 을 민간 사업자에게 넘기는 것을 시작으로, 2017년까지 완공되는 원주~강릉 노선 등 4개 노선을 민간에 개방하는 방식 등으로 철도의 분할 민영화를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코레일은 국토교통부와 협의 끝에 최종안을 확정하고, 지난 2013년 12월 10일 임시이사회를 개최하여 통과시켰다. 이에 따르면, 민간자 본 참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공공자금 참여가 부족할 경우 정부 운영기금을 투입하는 한편, 출자 회사의 주식 양도· 매도 대상을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간, 지방공기업에 한정하고 이를 정관에 명시 하도록 하였다. 코레일 출자지분도 확대하여 30%에서 41%로 늘리고 공공자금 비율을 59%로 확정했다. 국토교통부와 코레일은 코레일 계열사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민영화 논란은 종식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코레일의 이러한 민영화 차단 장치는 껍데기나 다름없다. 우선 수서발 KTX는 주식회사이기 때 문에 상법의 적용을 받는데, 대법원은 상법

코레일이 주장하는 민영화 차단 장치는 껍데기나 다름없다. 자회사가 일단 설립 만 되면 정부 정책에 따라 언제든지 민간 자본에게 주식이 매각될 수 있다.

이 보장한 주식의 자유로운 양도원칙을 전면 금지할 수 없다고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더욱 이 코레일의 출자지분을 늘리고 흑자경영 달 성시 매년 10%씩 출자비율을 확대하여 향후 출자지분 100%까지 확보할 수 있다지만, 이 는 거꾸로 코레일 경영진이 동의하면 정관

변경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반증이다. 결국 처음이 어렵지 자회사가 일단 설립만 되면 정부 정책에 따라 서 언제든지 민간자본에게 주식이 매각되면서 민영화될 수 있다. 정부는 민간자본이 참여하지 않으니 민영화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소유권 이전뿐만 아니라 공공적 운영을 포기하고 시장원리에 따라 수익성을 목적으로 운영될 경우, 즉 운영권 민영화 또한 넓은 의미에서 민영화에 해당한다. 더욱이 철도산업은 경쟁이 성립하기 매우 어려운 특성을 지닌다. 특정 시간, 특정 지 역에 가는 노선은 독점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요금이나 서비스에 일정 정도 차이가 나더라도, 철도 를 이용하는 시민들은 자신이 가까운 역에서 제 시간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는 소비 패턴을 유지할 것이 다. 수서발 KTX 역시 강남이나 수도권 동남부 지역의 고속철 수요를 흡수하면서 지역 독점체제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수서발 KTX 자회사가 설립되면 운행노선의 80%가 겹치는 코레일은 KTX 이용객이 급감하게 된다. 코 레일이 신규업체 설립을 의결하기 위해 이사회를 소집하는 과정에서 비상임이사들에게 안건 설명용으로 직접 작성한 문건에 따르면, 수서발 KTX의 이용 예상 수요 가운데 65%인 3만 5천명 정도가 기존 서울· 용 산발 KTX에서 이전하는 수요층으로 추산되었으며, 이에 따른 매출감소액이 5,120억원, 순손실이 1,417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예측되었다. 이처럼 수입이 급감한 코레일은 고속선 이외의 노선에 교차보조를 제대 로 하지 못하므로 적자노선을 폐선하든지 요금을 대폭 인상할 수밖에 없다. 이는 교통공공성 내지 교통복 26


지를 심각하게 훼손할 것이다. 이미 국토부는 다른 지방선도 민간 개방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 데, 수서발 KTX 분할로 코레일의 경영이 악화되면 전반적으로 분할 민영화가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전력 민영화 : 재벌을 위한 에너지 산업 재편 우리나라의 만성적인 전력난, 전력공급 불안정의 주요한 원인은 바로 지난 10여 년 동안 추진되어 온 전력산업 민영화 정책이다. 전력산업 민영화 정책은 김대중 정부가 1999년 한국전력을 3단계로 민영화시 키는 방안을 확정하고 한국 전력의 발전부문을 6개의 자회사로 나눠 경쟁시키는 1단계를 진행했으나 사 회적 반발로 그 이후 단계의 추진은 중단되었다. 이에 대해 민영화론자들은 전력 민영화가 중단된 결과 전력난이 발생했다고 주장하지만, 발전 사업에 민간 기업의 참여를 보장하는 ‘ 우회적 민영화’는 그간 꾸 준히 진행되었다. 그 결과, 민간발전의 비율은 2012년 총 발전설비 용량의 10.2%에 달한다. 민간 발전회사 들은 사회 전체의 전력 수급에 별다른 책임이 없기 때문에 이윤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판단할 때는 마음대 로 사업을 중단한다. 그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한전은 아등바등해야 한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전력난 속 에서 민간 발전회사가 평소보다 훨 씬 더 높은 수익을 보장받게 된다 는 것이다. 한전이 각 발전사들로 부터 구매하는 전기의 가격은 ‘ 계 통한계가격(SMP)’ 에 따라 결정된 다. 이는 같은 시간대에 공급되는 전력 가운데 가장 비싼 원료로 생 산된 전력의 가격이다. 전력이 가 장 많이 사용되는 피크 시간대에 생산원가가 높은 벙커C유 발전소 를 가동해 전력을 생산하면, 같은 시간대에 가동된 LNG발전소 역시 동일한 가격을 적용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발전 공기업의 경우 보정계수를 적용하여 이윤을 한전으로 회수하는 제도가 존재하 특집 박근혜의 뇌구조 27


지만, 민간 기업들은 SMP와 연료비의 차액을 고스란히 이익으로 가져가게 된다. 전력난이 민간 발전회사 들에게는 수익 창출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전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민자발전소를 대규모로 증설하는 방향의 대책을 내놓고 있 다. 올해 2월 7일에 발표된 제6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르면, 건설 예정인 발전소 18개 중 12개가 SK건 설, 삼성물산 등의 재벌 소유 발전소이다. 2027년에 민자 발전소의 설비용량은 5개 화력발전 공기업 설비 용량의 40%에 달하게 된다. 발전 산업에 민간 기업들의 비중이 늘어나게 되면, 자연히 공적 에너지 정책 의 수립과 실행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한전은 2012년 기준으로 부채가 95조 886억원에 달하고, 3조 780억원의 당기순손실을 보았으며, 연간 이자가 2조 3,443억원 발생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대책이 바로 전기요 금 인상이다. 하지만 2011년 8월부터 2013년 1월까지 4회에 걸쳐 전기요금이 약 20% 인상되었는데, 2012년 한국전력 계열사들은 3조 7백억 원의 적자를 기록한 반면, 민간 발전회사들은 9천 4백억 원의 이익을 챙 겼다. 이처럼 현재의 전력거래구조 하에서는 전기요금 인상이 한전의 적자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고스 란히 민간 발전회사의 이익으로 가게 된다. 물론 산업용 전기요금의 현실화는 검토해볼 만하다. 전체 전기 사용량의 55.3%를 차지하는 산업용 전 기요금은 생산원가의 90%에도 미치지 않는다. 대량소비자에게 전기를 낮은 가격으로 공급하는 것은 에 너지 낭비를 권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30대 대기업들이 2006년부터 2012년해까지 할인받은 전기요금 이 약 3조 8천억원으로, 같은 기간 동안 누적된 한전의 적자 3조 1천억원을 웃돌고 있다.

민간기업의 가스 직수입 허용 = 가스 민영화 2000년대 초반 한국가스공사의 분할 매각이 중단되자 정부는 가스산업에 민간사업자의 비중을 슬며 시 늘려왔다. 천연가스를 100% 수입에 의존하여 조달하는 한국에서 한국가스공사의 역할은 가스를 수입 하여 각 지역 도시가스사 및 대량 수요자(발전소, 민간기업)에게 공급하는 일이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부 터는 천연가스 대량수요자의 경우에 한해 자가소비용 천연가스를 직수입하는 것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국제시장에서의 천연가스 구매 가격은 협상 시점, 물량, 계약기간, 도입 패턴 등 다양한 요인에 따라 다르게 결정된다. 따라서 한국에서 사용할 천연가스를 가스공사와 민간 직수입자들이 경쟁하여 도입할 경우 오히려 도입 가격이 인상되는 효과를 낳는다.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장기계약보다 단기계약에 의존 해야 하고, 구매 물량이 줄어들면서 협상력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철저히 수익의 논리에 맞추어 움직이는 민간기업은 가스 가격이 싸면 구입 양을 늘리고, 비싸면 대폭 줄여 리스크를 모면한다. 반면 가스공사는 부족한 물량을 채워주고, 남는 물량을 처리해주며 국내 천연가 스 시장 전반의 수급안정 역할을 담당해야만 한다. 가스공사가 천연가스 수급 불안을 관리하는 역할을 떠 맡으면서 들어가는 추가 비용은 지금도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28


그런데 민간사업자들에게 천연가스 직수입의 길을 열어준 것에 더해 물량 의 교환, 판매까지를 보장해주어 ‘ 가스 민영화법안’으로 불리는 ‘ 도시가스사

민간기업은 철저히 수익 논리에 따라 움직인 다. 반면 가스공사는 국내 천연가스 시장 전반 의 수급 안정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업법 개정안’이 지난 2013년 4월 ‘ 청부 입법’ 형식으로 새누리당 김한표 의원에 의해 발의되었다가 통과되지 못했고, 다시 12월 국회 산업통상자 원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 상정되었다가 심의하는 과정에서 일부 민영화 관련 조항들을 빼고 통과되었 다. 개정안 원안의 핵심은 민간 사업자의 가스 직수입· 판매를 허용하여 한국가스공사의 시장독점을 깨 고 소비자에 가스를 싸게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외국물품 면세구역 내 가스 저장시설에서 해외 재 판매를 목적으로 천연가스를 반출입하는 것도 허용하도록 했다. SK나 포스코 등 에너지 대기업의 시장참 여와 이윤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회 심의 결과 이번 도시가스사업법 개정안의 쟁점사항인 천연가스 직수입자 간 국내 판매 조 항이 삭제되었다. 민간 직수입자의 잉여 물량에 대한 처리는 현행과 마찬가지로 대통령령으로 위임하는 것으로 하였으나, 산업부는 시행령에서 민간직수입자 간 국내 판매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 였다. 또한 천연가스반출입업과 자가소비용직도입자 겸업을 허용하여 반출입물량의 국내 판매를 보장해 주는 조항도 삭제되었다. 이는 공공운수노조 한국가스공사지부와 민영화반대국민행동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 등이 개정안 원 안대로 대기업에 가스사업권을 넘겨주면 가정용 도시가스 요금이 오르고 가스 수급체계가 변질되어 가스 민영화로 나아가게 된다며 강하게 반발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에 더해, 최근 철도· 의료 민영화 논란 속 에서 전기요금 인상과 핵발전소 고장 등으로 정부의 에너지정책에 대한 국민적 반감과 불안이 높다는 점, 그리고 김한표 의원이 자신의 지역구인 거제에 있는 지방지를 포함 총 11개 신문에 가스공사 명의로 도시 가스사업법 개정안을 지지하는 광고가 나가도록 요청했다는 것을 스스로 밝히면서 그 적절성 논란이 일었 던 것 등이 작용하였다. 이미 가스 민영화가 완료된 일본의 도시가스 요금은 평방미터당 2,199원으로 847원인 한국 도시가스 요금보다 두 배 이상 비싸다. 치솟는 가스비에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것은 난방비 부담에 떨어야 하는 저 소득층일 것이다. 이번 가스 민영화 법안은 저지되었지만, 이미 민간 대기업들의 가스 수입은 허용되어 있기 때문에 여전히 가스 민영화 법안은 살아있다고 봐야 한다. 직수입 자체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다른 법안을 통해 가스 민영화를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물 민영화, 의료 민영화

특집 박근혜의 뇌구조 29


철도, 전력, 가스를 중심으로 진행되

보편적 권리로서의 물이 상품화· 민영화되

는 민영화의 양상을 얘기했지만, 보편적

고, 건강을 담보로 의료가 민영화되는 현실 또

권리로서의 물이 상품화· 민영화되고,

한 심각하다. 한마디로 전방위적으로 민영화 가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건강을 담보로 의료가 민영화되는 현실 또한 심각하다. 정부는 지자체별로 관리하고 있는 상 수도를 수자원공사 위탁운영으로 전환

하고, 나중에는 통째로 민간재벌에게 운영권과 소유권을 넘기겠다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의료 민영화도 진주의료원의 해산과 공공병원의 구조조정, 영리병원 추진, 민간의료보험 활성화 등으로 모습을 드러냈 다. 2013년 11월 26일에는 고부가가치 관광산업 육성을 위해 호텔업 내 세부업종으로 의료관광호텔업(이 른바 메디텔)을 신설하는 내용의 「관광진흥법 시행령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였고, 12월 13일에는 국

내 의료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명목으로 병원들도 관광· 숙박업, 목욕업 등 다양한 부대사업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고, 경제자유구역 내 영리병원 설립요건을 완화하는 내용의 제4차 투자활성화대책이 발표되었 다. 또한 이미 폐기된 원격의료 허용법안까지 다시 입법예고되어 보건의료체계를 왜곡하고 의료의 시장 적 성격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한마디로 전방위적으로 민영화가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민영화를 막기 위한 노력 2013년 3월 민주노총, 참여연대 등 109개 시민단체들이 모여 민영화 반대 공동행동을 출범시켰다. 공 공부문 민영화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공공요금 인상과 서비스 질 저하를 초래하기 때문에 이에 반 대하고, 경제민주화의 첫걸음으로서 공공서비스의 공공성 강화를 일구어 가겠다는 것이다. 민영화 반대 공동행동은 각 지역단위로도 속속 구성되어 시민들의 힘을 모아나가고 있다. 이러한 흐름들이 2013년 시 도되었던 가스, 전력 민영화를 저지해냈다. 물론 민영화를 저지하기 위한 노력들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 민영화 저지를 위한 시민저항운동(가 칭)’을 본격화하고 있으며, 민영화 반대 다큐영화가 제작 중에 있다. 민영화 저지를 위한 서명운동이나 파

업· 집회도 예정되어 있다. 이미 철도 민영화 반대 서명은 100만명을 돌파하였다. 또한 민영화를 저지하 기 위해 기존 제도적 틀을 활용한 다양한 압박도 조직 중이다. 하지만 정부가 내놓는 정책들을 보면 민영화 정책을 포기하기는커녕 좀더 은밀하고 교묘하게 추진하 는 양상이다. 그러하기에 기만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공기업 민영화 정책에 브레이크를 거는 한편, 공적 통제의 영역 및 대상을 축소하고 공공기관을 통한 공적 역할을 위축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박근 혜 정부의 공공기관 정책의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라도 시민들의 깨어있는 의식과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한 때다. 30


사진출처 : 청와대홈페이지

특집 / 박근혜의 뇌구조 4. 공안

박정희의 ‘ 긴급조치 정치’ 로 회귀하나 이석기 의원의 어설픈 선착순 놀이에 박근혜 정권은 곧바로 공안정국이라는 카드를 꺼 내들었다. 현재의 한국 정세는 매카시 시절과 상당히 닮아있다. 이석기 사건으로 공안 정국을 조성한 박근혜 정권은 정치를 완전히 실종시켰다.

최백순 비서실장, 기관지위원

특집 박근혜의 뇌구조 31


선동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면 그것은 좌파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되곤 한다. 우파들은 좌파들의 정책을 비판하지 않는다. 그냥 “인민들을 선동”한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이 오래된 수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효과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다보니 일부 좌파들은 스스로의 역할이 인 민들을 선동하는 것이라는 사고를 갖기까지 한다. 그러나 원래 좌파의 임무는 선전과 조직에서 그 미래를 찾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 물론 정당을 하는 이상 선전이라는 것은 당연히 정책으로부터 나와야하는 것이 과거와의 차이일 것이다. 20세기에 가장 뛰어난 선동에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파시스트였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무솔리니가 20년간 집권하는 동안 이렇다 할 ‘ 정치’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통일운동 의 영웅인 가리발디의 검은 셔츠를 자신의 조직에 도입하고, 소설가인 단눈치오로부터 로마식 경례를 가 져온 것이 그가 한 일의 전부였다. 창작품도 없는 셈이다. 하지만 선동은 남의 것이라도 가져다가 잘 포장 한 후 단순하기만 하면 된다. 인민들이 정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검은 셔츠와 로마식 경례를 보 여주며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말하면 그뿐이다. 선동은 애초부터 정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설픈 정치를 시도한 선동가 1950년 2월,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의 끝자락에 위치한 자그마한 산골 휴양도시인 휠링(Wheeling)에는 난 데없이 매머드급 핵폭탄이 터졌다. 조셉 매카시 공화당 상원의원이 종이뭉치를 흔들면서 “이 안에 국무 부에서 일하는 205명의 공산당원 명단이 들어있다”고 주장했다. 2차 대전의 상흔이 남아있던 상황에서 매카시의 주장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평소 술꾼이던 매카시가 휴양지에서 술김에 한 이야기일 가능 성도 높았다. 실제로 이 명단은 FBI가 전쟁기간에 갖고 있던 참고자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시 간 거리에 떨어진 피츠버그의 언론들이 대서특필을 하면서 이 사건은 에피소드로 끝나지 않았다. 이날 이후로 매카시가 지목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공산주의자로 의심을 받았다. 사실관계나 구체적인 증거는 중요하지 않았다. 예컨대 맥아더를 해임한 아이젠하워는 “중국의 공산주의 강화를 도와준 행위” 라는 식이다. 국무부에서 암약하고 있는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누구인지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정 치가 완전히 실종되었지만 공화당은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다. 공화당조차 매카시의 리스트가 어느 정도 는 블랙코미디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매카시가 정치(?)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호언장담이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민주당 소속인 트루먼 대통령이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며 승승장구하던 때였다. 전쟁영웅과 민주당이라는 조합은 공화당으로서는 무너뜨리기 힘든 벽이었다. 하지만 매카시에 의해 공안정국이 조 성되자 민주당과 트루먼의 정치는 곧바로 무력화되기 시작했다.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상원과 하원을 모두 장악하는 압승을 올리자 매카시의 선동이 정치를 대신했다. 하지만 선동이 정치를 완전히 대신할 수 있는 나라에서나 이런 시도는 장기적으로 먹혀들 수 있다. 매카시의 선동은 불과 몇 년 만에 외면을 받기 32


시작하며 이내 몰락했다.

박근혜 정권의 ‘ 보이지 않는 긴급조치’ 한국은 지금 전쟁 중이다. 이석기 의원의 어설픈 선착순 놀이에 박근혜 정권은 곧바로 공안정국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매카시가 근거도 없는 이야기들을 청문회장으로 끌어들일 때 미국 민주당은 침묵으 로 일관했다. 사실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드는 순간 그것은 곧바로 빨간색 물감세례 를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한국 정세는 매카시 시절과 상당히 닮아있다. 이석기 사건으로 공 안정국을 조성한 박근혜 정권은 정치를 완전히 실종시켰다. 민주당은 정치가 실종된 상태에서 제1야당은 커녕, 군소정당 같은 정치력을 보여주고 있다. 민주당 일각의 저항은 물론 존재했다. 그 방법이 옳았는지 여부는 차치하고 민주당으로서는 무언가라 도 했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민주당 지도부는 총구를 당내로 돌려 박근혜 정권의 역할을 대신 수행하는 촌극을 벌이고 있다. 양승조 최고위원이 박근혜정권에게 직격탄을 날리자 새누리당은 장외투 쟁을 선언하는 것으로 치받았다. 그런데 매카시와 박근혜 정권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한다. 매카시는 정치를 완전히 실종시 켰지만 박근혜 정권은 ‘ 자신들만의 정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기춘 비서실장을 정점으로 청와대가 하고 싶은 정치만 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의회정치가 어떻게 되든 말든 청와대 정치만이 필요한 것이 다. 정권 1년 만에 정치가 실종되고 벌써부터 위기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뒤집어보면 박근혜는 나머지 4년도 청와대 정치만 있는 것을 스스로가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박근혜가 하고 싶은 것 은 정치가 아니라 ‘ 대통령놀이’ 그것뿐일지도 모른다.

유신의 추억 “긴급조치야말로 가장 안정적인 정치” 추론에 불과하지만 학습효과라는 것은 때로 강력한 각인을 심어주기도 한다. 박정희가 꿈꾼 가장 완벽 한 정치는 유신체제였다. 하지만 영구집권으로 가는 이 체제에 맞서 민주화세력은 죽음과 구속을 불사하 고 저항했다. 박정희는 ‘ 긴급조치’라는 아주 간단한 선택으로 이 저항을 영원히 막으려고 시도했다. 민청 학련이라는 대규모 사건을 터뜨려 긴급조치에 반대하는 세력을 모두 종북세력으로 몰아버렸다. 그리고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사람은 ‘ 재판 없이 구속’ 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정리해버린 것이다. 이석기의 선착순놀이는 박근혜와 김기춘에게 민청학련을 떠올리게 했을지 모른다. 그들이 보기에는 박정희의 긴급조치 정치가 가장 안정적인 정치로 보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의회정치가 사라진 상황에 서 민주당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장외투쟁뿐이다. 하지만 거리는 민주당에게 더 위험한 공간이다. 통합 진보당은 언제 어디서나 거리에 나타나며 “이석기 석방”을 외친다. 보수언론들이 적당히 양념만 뿌리면 특집 박근혜의 뇌구조 33


민주당은 종복세력과 함께 거리에서 싸우는 것으로 그려진다. 민주당으로서는 미칠 노릇이지만 의회로 돌아와 봐도 정치는 없다. 그러다보니 당내에서 서로에게 총질하는 것으로 하루일과를 마감할 뿐이다. 물론, 길거리 투쟁능력도 공간도 없는 민주당이 의회정치를 풀어나가지 못하는 1차적인 무능력은 민 주당 스스로에게 있다. 하지만 어쩌면 더 큰 문제는 새누리당 원내지도부에게 있다. 민주당이 의회로 기 어들어오면 정국을 풀어나가기 위해 여당으로서 무언가 카드를 열어 보이거나 작은 선물보따리라도 꺼 내 보이는 제스처가 필요하다. 선물보따리가 오고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음날 민주당 의원들을 윤리위 원회에 제명요청을 해버린다. 의회정치의 작은 해빙기가 오는가 했던 민주당으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 지만 새누리당의 이런 엇박자는 원내지도부의 책임이 아니다. 새누리당은 이미 청와대 청운동 파출소로 전락해버린 상태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놀이의 종착역 공안정국을 조성해 정치를 실종시키고 자신만의 정치를 하려고 한다고 해도 박근혜가 하고 싶은 정치 의 실체는 존재할 것이다. 그 단초는 최근 의료산업과 관련해서 박근혜가 한 발언을 중심으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박근혜는 의료산업이 자회사를 설립해 영리산업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벤처기업의 투자를 허용해 영리산업을 허용하는 것이 공공성을 해친다는 주장에 대해 박근혜는 “공공성을 해치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특유의 오래된 화법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이명박정권이 의료산업의 영리법인을 지속적으로 추진한 것과 박근혜의 주장은 큰 틀에서 다르지 않 다. 하지만 결정적인 점에서 두 사람은 차이가 있다. 박근혜는 공공성을 해치지 않는다는 구체적인 근거 들을 내놓고 자회사설립 허용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명박은 말도 안되는 근거들을 들이밀며 의료민영화 를 추진했지만 박근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답은 평소 박근혜가 잘 쓰지 않는 말에 있다. 일 자리 창출의 기회를 놓치면 “가슴을 치고 통

박근혜 자신은 지금 노동탄압과 민영화를 추진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지금 일자 리 창출과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탄할 일”이라고 강조한 대목이다. 박근혜만의 정치의 끝은 일자리 창출이 다. 아버지 박정희가 국민들의 배고픔을 해 결한 것이 누구보다 위대한 업적이라고 확신 하고 있는 이 ‘ 확신범’ 에게 공공성이나 민영 화는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그게 구체적으

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도 아예 모를 수도 있다. 박근혜 자신은 지금 노동탄압과 민영화를 추진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지금 일자리 창출과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어쩌면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배운 잘못된 학습효과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향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청와대 주인과의 싸움이 쉽지 않은 이유다. 34


특집 / 박근혜의 뇌구조 5. 아저씨

대통령의 유별난 ‘ 노익장’ 신뢰, 왜? 대통령의 ‘ 노인 사랑’ 은 자기편에 대한 불안과 불신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자기편한테도 이럴진대, 대통령이 우리를 어떤 존재로 보고 있을 것이냐에 대해선 굳이 논 하지 않기로 하겠다. 그것은 너무나도 무서운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민하 정책위원

특집 박근혜의 뇌구조 35


명색이 진보정당의 당원이지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말을 듣고도 거기에 맞장구를 쳐야 하는 때 가 있다. 특히 정치에 별 관심이 없는 친구들을 만날 때에는 더 그렇다. 언젠가 맥주를 마시다 “대통령은 왜 이렇게 나이 든 남자들을 좋아하는 거지?”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 다. ‘ 미혼의 여성 대통령’과 ‘ 나이 든 남자’를 굳이 연결 짓고야 마는 발상은 괘씸하다. 다만 대통령의 그 러한 인사가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기에 나름대로의 설명을 내놓는 선에서 적당히 넘어가야 했다.

인생은 70부터? 박근혜 주변의 ‘ 노익장’ 인사들 대통령의 노인에 대한 신뢰는 좀 유별난 데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1939년생인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 장을 필두로 대통령의 주위에는 유난히 나이가 많은 인사들이 포진해있다. 특히 대통령의 멘토 그룹이라 는 7인회의 면면을 보면 이런 사실은 더욱 두

대통령의 노인에 대한 신뢰는 좀 유별난 게 사실이다. 1939년생인 비서실장을 필두로 유난히 나이가 많은 인사들이 포진해 있다.

드러지게 강조된다. 7인회의 수장은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으 로 알려져 있다. 김용환 전 장관은 1932년생 이다. 7인회의 막내는 1944년생의 강창희 국 회의장이다. 재미있는 것은 7인회만 놓고 보

면 김기춘 비서실장이 강창희 국회의장 다음으로 나이가 젊다는 것이다. 인생은 70부터라고 해야 할까? 꼭 7인회를 보지 않더라도 박근혜 정권에서의 ‘ 노익장’들은 요직마다 발견된다. 대통령직인수위원장 으로 박근혜 정부 초대 국무총리가 될 뻔했던 김용준 전 법관은 1938년생이다. 이경재 방송통신위원장, 이원종 지역발전위원장, 김동호 문화융성위원장,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 등은 모두 70을 넘긴 고령이 다. 남재준 국정원장의 경우도 내년에 70을 넘긴 나이가 된다. 대통령이 1952년생이니 좀 고약하게 말하 자면 그야말로 ‘ 오빠들의 전성시대’인 셈이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얼마 전 만난 한 당원은 ‘ 노인 취향’을 운운하는 대신 좀더 품위 있는 해석을 내놓았다. 대통령이 능력이 없어서 원로들에게 국가 운영의 주요한 포인트를 사실상 아웃소싱하고 오로 지 외국 순방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것이다. 즉, 청와대는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국회는 강창희 국회의 장에게, 여당은 서청원 의원(1943년생이다)에게 맡긴 채 대통령 자신은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외교와 국 방에만 치중한다는 것이다. 말인즉슨 사실상의 ‘ 이원집정부제’가 아니냐는 것. 물론 그런 부분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규명돼야 하는 것은 그렇다고 해도 왜 하필 노인이냐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줘도 되는 것 아닌가? 이 문제를 깊이 통찰해보기 위해서는 잠시 노인이 아닌 실 세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봐야 할 필요가 있다.

비교적 젊은(?) 실세들은 충성심의 ‘ 격’ 이 다르다 36


노인이 아님에도 잘 나가는 인사로는 윤상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국정원 선거개입 의혹에 대한 검찰수사 내용을 그 누구보다도 빨리 입수해 검찰이 중간수사 발표를 하기도 전에 자청해서 브리핑을 하시는 분이다. 여간 재간둥이가 아니다. 민주당은 이 분을 두고 ‘ 차기 대통령’이라며 비꼬기도 했다. 그만큼 기고만장하다는 뜻이다. 본인은 부정했지만 사석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 누나’로 호칭하는 등 개인적 충성파라는 뒷말까지 있다. 특이사항으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전 사위(전전전?)라 는 점이 있다. 이 분, 1962년생이다. 노인도 아닌데 실세의 반열에 든 인사가 또 있다. 바로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다. 이정현 수석은 ‘ 박근혜 전 대표’ 시절부터 ‘ 박근혜의 입’으로 불리며 대활약을 해왔다. 그의 활약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민주당 양승조 최고위원의 “대통령은 선친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국민의 우려를 되새겨야 한다”는 말 에 발끈해 청와대 춘추관에서 장장 20분에 걸친 분노의 브리핑을 쏟아내는 진풍경으로 귀결됐다. 진보연 하는 한 지방대 교수가 이를 두고 “무슨 조선시대 내시냐”며 비아냥대자 이정현 수석이 짐짓 “오늘도 아 들의 엉덩이를 툭 치고 나왔는데, 나는 내시가 아니다”라며 시치미를 뗀 것은 이 기이한 사건의 화룡점정 이었다. 이런 이정현 수석의 생년은 1958년이다. 이정현 수석과 쌍벽을 이루며 박근혜 전 대표 시절부터 활약해온 인사가 또 있다. 바로 유정복 안전행 정부 장관이다. 이들은 그야말로 박근혜 대통령의 ‘ 충신 중의 충신’으로 꼽힌다. 같은 친박 출신이어도 대통령의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든 진영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결국 자기 정치의 일환으로 생각해 친박 그룹에서 쫓겨난 김무성 의원 등과는 충성심의 정도에서 격을 달리 하 는 인사들이라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내각의 면면을 보면 또 다른 면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극소수를 제외하면 현재 각 부 처 장관들은 해당 부처에서 잔뼈가 굵은 공무원 또는 연구원 출신이거나 학계 출신이다. 최문기 미래창조 과학부 장관, 류길재 통일부 장관, 서승환 국토교통부 장관을 학계 출신으로 분류할 수 있고 유정복 안전 행정부 장관과 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 정도가 정치인 출신이며 나머지는 유관 부처 공무원 출신이다.

정치적 욕심과 내각 구성의 함수 관계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전문성을 가진 인사들로 내각을 꾸리려고 했다는 점이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정치권에 별로 빚을 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장관 경력을 활용해서 자기 정치 를 할 수 있는 사람들도 극소수다. 이런 점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통령이 중용하는 인사들이 공유하고 있 는 어떤 키워드가 발견된다. 노인, 충성파, 전문가에서 공통적으로 도출해낼 수 있는 핵심은 이들이 ‘ 정치 적 욕심’ 을 가질 확률이 적거나 그럴 처지가 못 되는 인사들이라는 점이다. 7인회가 여론의 도마에 오르던 무렵,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은 한 언론사 기자에게 “정치 그만둔 사람 들이 일선에서 물러나 커피나 마시는 모임인데 그게 뭐라고 이 난리인지 모르겠다”며 고충을 토로한 바 특집 박근혜의 뇌구조 37


있다. 일종의 넉살에 가까운 발언이지만 이 발언에 일말의 진실이 있다. 칠십 노인들이 이제 와서 무슨 ‘ 큰 꿈’ 을 꾸겠는가? 욕심을 가져봐야 나라가 잘 되고 대통령이 잘 되고 후배들이 잘 됐으면 하는 바람뿐 이지, 이제 와서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대통령의 주위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보

칠십 노인들이 이제 와서 무슨 ‘ 큰 꿈’을 꾸겠 는가? 대통령의 주위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보 면 하나같이 자기 정치를 하려던 사람들뿐이 다. 이렇게 ‘ 박근혜 리더십’의 요체가 드러난 다.

면 하나같이 자기 정치를 하려던 사람들뿐 이다. 진영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경우 ‘ 기 초연금’ 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 것으로 자기 살 길을 마련한 케이스이며 김무성 의 원의 경우 박근혜 당시 의원에게 통제받으 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남들을 통제하 려 하는 습성이 문제가 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태열 전 비서실장의 경우 공공기관 인사 등에서 지나치게 자기 사람을 챙기려 했던 것이 문제였 다는 추론이 제기된다. 이 모든 사례에 결국 정권에 충성하기보다는 자신의 정치를 위한 수단으로서 대통령을 활용하려고 했 던 공통점이 나타나 있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 박근혜 리더십’의 요체가 드러난다. 권력을 위임해줄 수는 있어도 소유권 자체는 넘겨줄 수 없다는 일종의 군왕주의다. 2인자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딴 마음 품지 않는다는 보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권력의 배분을 보장하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런 리 더십을 고집하는 것은 아버지에게서 배운 바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불안과 불신에서 비롯된 ‘ 노인 사랑’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 박근혜 스타일’은 본인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측면이 더 클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전 정부의 2인자로 당시 대통령과 대립해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세종시 수정안을 무력화시킨 장본인이다. 예를 들면 ‘ 박근혜 정부의 김무성’ 이 ‘ 이명박 정부의 박근혜’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이 박근혜 정부의 무엇일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은 더욱 불안한 요소다. 하지만 언젠가는 박근혜 대통령도 정권 재창출을 고민해야 될 것이고 임기가 소모되면 여당의 정치인 들은 ‘ 차기’ 에 줄을 서는 것이 순리이다. 물론 대통령으로서는 우리가 레임덕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오는 순간을 늦추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대통령의 ‘ 노인 사랑’은 자기편에 대한 이러한 불안과 불신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자기편한테도 이럴진대, 대통령이 우리를 어떤 존재로 보고 있을 것이냐에 대해선 굳이 논하지 않기로 하 겠다. 그것은 너무나도 무서운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38


기획서평

일베,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기획서평

일베,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일베의 사상』 박가분 씀, 오월의 봄 펴냄

내가 『일베의 사상』 서평을 쓰는 이유는 나 자신이 『일베의 사상』의 탄생에 일조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2013년 3월 말 박가분이 한창 재미 삼아 혹은 관찰 삼아 일베를 ‘ 눈팅’ 하고 있을 때, 술자리에서 그를 만났 다. 박가분이 일베에 관한 책을 써보고 싶다고 말하길래 나는 괜찮은 출 판사를 알고 있다고 대답했고 둘을 연결시켜 주었다. 2010년부터 박가분과 알고 지낸 내가 보기에 그에게는 한 가지 탁월 일베가 그들의 세계에 빠져있 기 때문에 그들이 현실로 나올 수 없다면, 그가 대안으로 제시

한 재능이 있다. 바로 술자리에서의 ‘ 개드립’ 을 자신만의 철학과 사상 으로 풀어내는 데 능숙하다는 것이다. 그와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며칠 이 지나면 그의 블로그에는 술자리에서 농담 삼아 주고받았던 개드립

한, 국가도 인터넷도 아닌 사회

들이 하나의 완성된 글로 변모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를 만드는 것 역시 매우 난망할

‘ 술자리’ 에서 ‘ 개드립’처럼 일베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수밖에 없다.

책으로 써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박가분이 ‘ 일베’ 에 늪에 빠지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도 ‘ 개드립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일베’ 와 ‘ 사상’ 은 마치 형용모순처럼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이 인간들, 온갖 배설물과 즉자적인 정념들을 쏟아놓은 쓰레기통에 무슨 이념이 있다는 말인가. 조윤호 <미디어오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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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진보커뮤니티에 올라온 『일베의 사상』에 대한 반응이 그러했다.


진보 누리꾼들은 박가분의 이 책이 일베를 정당화해주고, 일베를 옹호한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무엇인가 의 사상을 연구하는 것이 곧 그것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해 연구한다고 식민지근 대화론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을 정확하게 격파하기 위해 연구하는 경우가 다반사 다. 『일베의 사상』은 일베를 옹호하는 책이 아니라 일베를 제대로 연구하는, 그래서 일베를 어떻게 넘어 설 것인가를 고민하는, 즉 일베와 제대로 싸우기 위한 길라잡이다. 하지만 연구대상과 자신이 ‘ 거리두기’를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박가분이 일베를 들락날락 거리는 것을 보며 박가분이 어느새 일게이 (일베 유저를 뜻하는 일베 은어)가 되어버리지 않을까 우려했다. 하지만 나는 곧 박가분이 일베의 늪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 이유는 우선 박가분은 어떤 면에서 일베보다 더한 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베의, 모든 것을 ‘ 절 멸’ 하고자 하는 파괴본능에 놀라곤 한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박가분은 그에 못지않은 파괴자다. 그는 일 베보다 더 급진적이다. 따라서 나는 박가분이 일베의 파괴 충동에 물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박가분은 절대 일게이가 될 수 없다. 그는 유게이이기 때문이다. 유게이란 덕후들의 커뮤니티인 루리웹 유머게시판 유저를 뜻한다. 박가분은 일베를 탄생시킨 인터넷 고유의 문화에 이미 물들대로 물들 어 있어서 일베에 의해 더 이상 물들 게 없다. 그는 일베와는 조금 다른 원리를 가진 ‘ 완벽한 세계’ 루리웹 에서 살고 있다.

‘ 일베’ 라 불리는 인터넷 커뮤니티 ‘ 일간베스트저장소’ (왼쪽)를 분석한 박가분의 신간 『일베의 사상』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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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의 정언 명령, ‘ 세계를 동물화하라’ 그렇다면 박가분은 일베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일베에 접속하면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일베의 특징은 ‘ 파괴 충동’이다. 하지만 ‘ 파괴 충동’은 일베 만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 오늘날의 정치가 처한 현 실이다. 적어도 인터넷 공간만 보면, 한국의 세 정치세력인 수꼴-깨시민(노빠)-좌빨들은 공존할 수 없는 세력처럼 보인다. 수꼴과 깨시민, 좌빨들은 서로를 증오하며 서로의 ‘ 절멸’ 을 꿈꾼다. 인터넷 공간에는 구체적인 정책들이 논의되기보다 서로 가 서로를 절멸하고 싶어 하는 증오의

인터넷 공간에서 수꼴-깨시민(노빠)-좌빨들은

언어들이 떠돌아다닌다. 우리는 상대

공존할 수 없는 세력처럼 보인다. 서로를 증오

의 정책을 가지고 ‘ 공론장’에서 논쟁을

하며 서로의 ‘ 절멸’ 을 꿈꾼다. 이런 ‘ 절멸’ 을 가

벌이기보다, 어떻게 하면 반대파의 정

장 잘 구현하는 주체가 바로 일베다.

치적 모순을 폭로할 수 있을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센스 있는 문구로 반대파 를 공격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이런 ‘ 절멸’을 가장 잘 구현하는 주체가 바로 일베다. 박가분이 『일베의 사상』에서 밝혔듯이, 일베 유 저들이 하루 종일 하는 일이란 진보인사들의 위선과 모순을 비꼬는 것이다. 진보인사들이 과거에 했던 발 언을 찾아내 그들이 이중적이라고 비난하는 게 일베의 ‘ 정치’다. 하지만 이것이 일베‘ 만’의 정치는 아니 다. 촛불집회 당시 촛불시민들과 누리꾼들은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거짓말과 위선을 폭로하는 영상을 만 들어 인터넷에 뿌리곤 했다. 한나라당을 가장 잘 비꼬는 댓글이 ‘ 베플’로 추천을 받고, 이명박을 가장 우 습게 만드는 피켓은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촛불시민들의 ‘ 인정’ 을 받는다. 박가분은 이러한 ‘ 인정투쟁’이 인터넷 특유의 ‘ 평등· 호혜 문화’의 기반이며, 이 원리를 가장 끝까지 밀어붙인 집단이 ‘ 일베’라고 말한다. 진보 누리꾼들의 인정투쟁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 가상’을 가지고 있 다. 지금 내가 하는 행위가 국가와 민족 혹은 공동체를 위해 좋은 일이라는 ‘ 가상’이다. 즉 현실의 국가라 는 가상 속에서만 인터넷 상의 인정투쟁이 성립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일베는 이런 진보 누리꾼들을 ‘ 씹썬비’라고 부른다. 일베에는 이러한 가상이 없다. 그들은 가상 을 만드는 대신 인터넷을 하나의 ‘ 완벽한 세계’로 만든다. 즉 일베는 국가나 사회에 기대지 않은 채, 인터 넷이라는 완벽한 세계 안에서 인정투쟁을 벌인다. 따라서 그들은 국가나 사회가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진보세력의 주장을 비웃는다. 박가분이 밝혔듯이, 일베의 정언명령은 ‘ 세계를 동물화하라’ 는 것이다. 일베 유저들은 국가나 시민사회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인정받는 대신 인터넷 안에서 자족적인 인정투쟁을 벌이는, ‘ 동물화 된’ 삶을 지향하고 이를 하나의 강령처럼 밀어붙인다. 이 점이 바로 일베가 진보 누리꾼과 다른 점이자, 국가주의를 내세우는 기존 ‘ 우파’와도 다른 점이다. ‘ 일밍아웃’이라는 용어가 가진 함의도 비슷하다. 일베 유저들은 현실에서 자신이 일베 유저라는 점을 42


드러내는 것을 ‘ 커밍아웃’에 비견할 만 한 모험으로 여긴다. 또한 다른 일베 유

일베 유저들은 국가나 시민사회의 역사적 현실

저가 그런 일을 벌였을 경우 쌍욕을 하

속에서 인정받는 대신 인터넷 안에서 자족적인

며 비난한다. 그것은‘ '완벽한 세계’인 일

인정투쟁을 벌이는, ‘ 동물화 된’ 삶을 지향하고

베를 깨고 현실로 나아가려는 이들에 대

이를 하나의 강령처럼 밀어붙인다.

한 반발이 아닐까? 박가분이 최근 『일베의 사상』 출간기

념 강연회를 진행했을 때, 한 참석자가 박가분에게 이렇게 물었다. “국가에 기대하지 않는 일베가 왜 전두 환이나 박정희를 좋아할까?” 일베가 동경하는 전두환이나 박정희의 모습은 반대파를 가감 없이 때려잡는 ‘ 절멸’ 의 힘이다. 전두환을 ‘ 전땅크’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일베에서 전두환은 반대파를 탱크 로 밀어버린 ‘ 영웅’으로 묘사된다. 박근혜가 북한과 대화를 한다고 했을 때 일베에 박근혜에 대한 쌍욕이 올라온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박정희나 전두환, 박근혜의 정책과 이념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 들의 철퇴를 사랑한다.

5.18 당시 희생자들의 관 앞에서 유족들이 오열하는 사진을 두고 ‘ 택배’ ‘ 홍어’ 에 비유한 게시물이 올라오면서 일베가 세간의 화제 가 됐다.(사진 : 일간베스트저장소 화면 캡쳐)

기획서평 43


나는 너를 혐오할 권리가 있다! 일베의 또 다른 사상은 ‘ 나는 너를 혐오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박가분에 따르면 일베는 ‘ 우리 모두 병X, 너도 병X 나도 병X’이라는 논리를 통해 한국의 집단주의적 문화 속에 숨겨져 있던 적대와 혐오를 표 면 위로 드러낸다. ‘ 우리 모두 병X’이라는 논리가 전제하는 것은 평등주의와 자기혐오다. 우리는 다 같이 병X들이며, 따라서 서로를 혐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일베에서 가장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혐오 문화다. 일베는 한국여성을 ‘ 김치년’이라 비하하 고, 전라도 사람들을 ‘ 홍어’ ‘ 7시방향’ 등으로 부른다. 박가분의 태생이 ‘ 전라도와 경상도 집안이 만난 동 서화합의 가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일베는 박가분을 ‘ 하프홍어’라고 불렀다. 십 분만 눈팅을 해도 정 신이 아득해지는 곳이 일베다. 박가분은 일베의 5.18 비난을 일베 유저들의 혐오 문화로 해석한다. 일베는 5.18의 역사적 ‘ 의미’를 부 정한다. 일베가 혐오하는 것은 5.18에 성스러운 의미를 부여하는 한국사회 그 자체다. 5.18이 민주화 운동 이라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이뤄진 최소한의 합의다. 일베는 그러한 성스러운 의미 부여에 오글거림을 참 을 수 없고, 그것을 파괴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일베는 5.18이라는 사회적 합의 속에 가려졌던 대립 과 갈등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무엇인가에 의해 은폐되어 있던 진실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일베는 ‘ 계 급투쟁’을 하고 있다.

청년들은 왜 일베에 빠져드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탈출해야할까 사람들이 일베를 ‘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일베 유저들 중에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 당시 “우리도 오유나 다른 진보 커뮤니티처럼 투표 인증샷”하자는 한 일베 유저의 제안은 성사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일베 유저의 대다수가 청소년들이었기 때문이다. 박가분은 “제대 로 활동하는 이들 중에는 20대 청년들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진보적인 어른들이 보기엔 혀를 찰 일이다. 미래의 주역들이 촛불집회에는 안 나오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일베나 하고 있으니! 청소년과 청년들이 일베에 빠져드는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재밌기 때문이다. 일베는 ‘ 참을 수 없는 존 재의 가벼움’ 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물론 5· 18 유족들을 홍어라고 비하하는 말에는 ‘ 분노를’ 참을 수 없 지만, 진보 정치인에 대한 센스 있는 비난에는 ‘ 웃음을’ 참을 수 없다. 기사 거리를 찾으러 일베를 들락날 락 거리면 나도 모르게 입에 일베 용어가 붙어있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청소년들과 청년들은 온갖 금 기를 깨면서도 상대방을 가장 모욕적인 방식으로 비꼬아 부르는 언어에서 재미를 느끼고, 그 언어를 공유 하면서 묘한 동류의식까지 느낄 지도 모른다. ‘ 나도 병X 너도 병X’이라는 동류의식 말이다. 그에 비해 진보 어른들은 너무나 꼰대스럽고, 권위주의적이다. 심지어 재미도 없으며, 온갖 진보적인 척은 다하면서 자기 자식한테는 권위란 권위는 다 부린다. 그들에게는 ‘ 486 때문에 청년실업이 심하다’ 44


는 ‘ 세대적 관점’이 먹혀든다. 박가분이 분석하듯 일베 안에서 기성 세대에 대한 적개심과 일종의 ‘ 세대 문제’가 드러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박가분이 제안하는 해법은 매우 고전적이다. 박가분이 ‘ 루리웹’이라는 세계에 살면서 일베 에 동화되지 않았듯이, 청년들이 자신의 삶을 살아갈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는 ‘ 국가’도 인터넷도 아닌 현실세계에 만들어져야 한다. 촛불집회가 끝난 이후

박가분이 제안하는 해법은 매우 고전적이다. 청년들이

에도, 촛불시민들이 자신의

자신의 삶을 살아갈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야 한다

삶을 함께 공유하며 무엇인가

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는 ‘ 국가’도 인터넷도 아닌

함께할 수 있는 현실의 공동

현실세계에 만들어져야 한다.

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응답하라 일베 일베가 그러한 ‘ 사회’나 현실의 공동체를 만들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박가분은 그 가능성을 낮게 본 다. 그들이 ‘ 일베라는 완벽한 세계’에 빠져 있으며, 정치세력화 할 만한 이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 다. 물론 나도 그들이 정치세력화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한국사회의 극우세력은 기독교만으로도 족 하다. 하지만 나는 일베가 그들의 세계에 빠져있기 때문에 그들이 현실로 나올 수 없다고 본다면, 그가 대안 으로 제시한, 국가도 인터넷도 아닌 사회를 만드는 것 역시 매우 난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촛불시 민들이 국가라는 ‘ 가상’을 가지고 있다면, 일베라는 공간 역시 ‘ 현실로부터 독립된 세계’라는 또 다른 ‘ 가 상’이 아닌가. 그들이 국가로부터 독립된 사회를 만들어내려면 각자의 가상을 깨야하는 것은 피차 마찬가 지가 아닐까. 박가분은 쓰레기통이라 불리던 일베에게 ‘ 사상’을 부여했다. 이제 일베가 응답할 때다. 일베 앞에 파란 약과 빨간 약이 있다. 일베라는 가상을 깨고 나올 것인가, 아니면 국가라는 새로운 가상에 몸을 맡길 것인 가? 어느 경우든 둘 다 더 나쁘다. 응답하라, 일베!

기획서평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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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진보정치 열전 3

한 많은 내 인생, 진짜 노동자 김순희 (1부)

노동해방이 유일한 꿈이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의 삶이 꼭 그랬다. 가난한 농민의 자식들, 딸이었기에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살아남았고, 중학교 졸업하면 공장가서 돈 벌어 오빠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낮에는 일하랴 밤에는 공부하랴, 어린 꿈과 청춘조차 공장 담벼락에 갇혀야 했던 우리 여성들의 슬픈 역사가 김순희에게도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터뷰 : 심재옥· 최혜영· 김윤희 여성위원회 사진 : 정정은 홍보실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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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8대 국회의원 선거 와중에 도의원 보궐선거에 나선 이가 있었다. 경남 창원의 김순희 후보. “이노무 당이 나한테 뭘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하는 건, 욕심내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뛰었던 선거에서 김 순희 후보는 22.06%의 지지율로 낙선했다. 국회의원도 아닌 경남도의원 보궐선거, 국회의원에 출마하려 고 사퇴했던 통진당 손석형 도의원의 선거구였다. 여성위원회는 그녀가 경남이라는 지역, 그것도 대기업 금속 정규직 남성노동자들이 득시글거리는 경 상도 창원에서 어떻게 정치인으로 입문하게 되었는지 자못 궁금했다. 경남지역 여성단체들이 이견없이 한 사람의 후보를 지지한 첫 여성후보이기도 하다. 여성단체 지지후보, 그리고 민주노총이 지지한 노동자 후보라는 두 개의 타이틀을 걸고 당선에 근접한 선거를 치룬 배경도 궁금했다. 김순희와 약속을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카톡방에서 수차례 약속시간을 조정했다. 직장에 발이 묶인 여성들이 아이들을 이 집 저 집에 던져가며 월차휴가를 내고 근무를 조정하고, 서울과 창원의 거리까지 가늠하며 약속을 잡는 일은 수학 방정식 풀기보다 어려웠다. ‘ 아이 키우고 직장 다니면서 당 활동과 과외 업무까지 하는 것 자체가 전쟁이다’는 푸념이 스마트폰에서 카톡 카톡 튀어 나왔다. 11월 27일, 드디어 김 순희를 만났다. 때마침 함박눈이 펄펄 날리던 날, 홍대 앞 작은 카페에서 여자들의 수다가 시작되었다.

“딸이라서” 죽다 살아난 목숨 “태몽을 꿨는데 아들이었대요. 근데 낳아보니 딸이잖아. 그래서 엄마가 나를 이불에 돌돌돌 말아가지 고 벽이랑 옷장 사이에 집어넣어 뒀어요, 죽으라고. 근데 일하고 온 아버지가 들어와서 보고 살려낸거야. 우리 엄마는 내가 너무 미워가지고, 딸이 너무 많은 게 미워가지고 입을 한 명 덜어야 하니까 농약을 떠먹 일려고 하는데 내가 방긋방긋 웃더래요. 죽다 살아난 인생이예요” 1남 7녀의 막내딸. 자칫하면 없었을 목숨, 살려고 그랬는지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맹랑하고 애교가 많 았다. 아들 하나 더 낳아보자고 낳은 게 딸이었으니, 엄마도 그렇게 억울하고 한스러울 수 없었을 것이다. 드라마 <아들과 딸>도 아니고, 생명조차 차별 당해야 했던 ‘ 실화’를 21세기 홍대 앞 까페에 앉아서 듣자 니 비현실적인 느낌이 든다. 경상도의 남녀차별은 징하고 징하다. 합천군 용주면 장전리, 가난한 시골마 을 여자애들은 중학교 졸업하면 ‘ 굉장히 많이 졸업한 거’고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다 공장에 들어갔다. 그 래도 김순희는 ‘ 끝물’ 이기도 했고 언니 오빠가 ‘ 막내라도 읍에 나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반대해서 중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다. 부산에 있는 야간고등학교의 홍보책자를 보고 동네 애들 7~8명하 고 같이 보따리를 싸가지고 부산엘 갔다. 신발 만드는 공장에서 2교대를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생 활이었다. “순희, 읍에 있는 학교 안 보내면 돈 안 줄끼다.” 부산에 있는 언니가 엄마를 압박해서 두 달쯤 뒤 마산에 있는 마산방직에 들어갔다. 그 때가 87년, 열일곱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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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 소녀, 방직공장 노동자가 되다 실을 만드는 방직공장은 365일 물레가 돌아가고 먼지투성이에 종일 서서 일해야 하는 곳이었다. 3교대 를 하느라 1년은 학교도 가지 못했고, 그 이듬해 회사에서 정해주는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선택의 여지 없이 몇 명은 이 학교, 또 몇 명은 저 학교, 이런 식이었다. 어용이긴 했어도 마산방직에는 노조가 있었다. 그 때 처음 임금인상을 위한 부분파업을 해봤는데, 식 판 뒤엎기도 하고 공장을 돌면서 노래도 배웠다. 새파랗게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그때 배운 노래가 <딸들 아 일어나라>도 아니고 하필 <늙은 노동자의 노래>였다. 딸 같은 아이들이 공장을 돌며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부르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듯 흐려지듯, 가슴 이 뻐근하게 아프다. “아 씨, 새파랗게 어린 것들이 왜 하필 <늙은 노동자의 노래>야?” 나도 모르게 눈가 를 찍어내는데 김순희가 얼굴을 들었다. ‘ 울지 않을테다!’라고 말하듯 결연한 표정이다. 때마침 창밖으로 눈이 펄펄 날렸다. 우리는 인터뷰를 하다 말고 모두 거리로 뛰쳐나가 눈 속에서 사진을 찍었다. 날을 참 잘 골랐다고 좋아라 웃고 떠들다 보니 눈물 찔끔거리던 그 비애감은 눈발에 펄펄 날려 사라져 버렸다. 한 달 가량 파업을 한 뒤 월급은 조금 올랐지만 다른 변화는 전혀 없었다. 먼지 많은 공장에서 여전히 마스크도 안 쓰고 일했다. 학교를 못 다니는 것도 서러운데 학교 대신 오는 일터마저 이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원망이 컸던 김순희는 성에 안 차서 “와 이거 밖에 안하는데요?”라고 따지기도 했다.

인터뷰 하다 말고 눈오는 거리로 뛰쳐나가다.

여성 진보정치 열전 49


“그때는 작업복 입고 모자를 써요. 항상 풀을 먹여 다려야 했는데 공장 밖에서 그걸 해주는 식당이 있었어. 그걸 찾으러 주르르 나갔는데, 어떤 대학생이 내를 보면서 ‘ 저렇게 어린 애가 공장엘 다니네?’ 그 얘기를 탁 들으면서 내 삶을 고민하기 시작한 거예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70년대 여 성 노동자들의 삶이 꼭 그랬다. 가난 한 농민의 자식들, 딸이었기에 우여 곡절을 겪으면서 살아남았고, 중학교 졸업하면 공장가서 돈 벌어 오빠 뒷 바라지를 해야 했다. 낮에는 일하랴

대명광학에서 일하던 그 시절이 공장생활의 ‘ 봄

밤에는 공부하랴, 어린 꿈과 청춘조

날’ 이었다. 평생의 동지 최영주 언니를 만났고 평

차 공장 담벼락에 갇혀야 했던 우리

생의 반려자인 남편 조태일도 만났다. 무엇보다도

여성들의 슬픈 역사가 김순희에게도

노동자로 살아갈 김순희가 ‘ 노동조합’이라는 꿈을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갖게 된 시기였다.

본격적으로 접어든 노동자의 길

인생이 본격적으로 이 길로 접어든 것은 차룡단지에 있는 대명광학에 들어간 뒤부터다. 대학 진학이라 는 꿈도 포기했다. 마산방직을 다니며 죽어라 일하고 죽어라 공부했지만 이미 ‘ 빨간물’ 이 든 김순희에게 학력은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새벽별 보고 출근해서 저녁별 보고 퇴근하는 하루 12시간의 고된 노동이었지만, 그 시절이 공장생활의 ‘ 봄날’이었다. 평생의 동지 최영주 언니를 만났고 평생의 반려자인 남편 조태일도 만났다. 무엇보다도 노동자로 살아갈 김순희가 ‘ 노동자’라는 이름의 의미를 알고 ‘ 노동조 합’이라는 꿈을 갖게 된 시기였다. 대명광학은 100명 정도가 일하는 카메라 조립공장이었다. 마산방직보다 환경도 나았고 무엇보다 엉덩 이 붙이고 앉아서 일을 하는 게 너무 좋았다. 첫날 일을 시켜보고 바로 라인에 투입시키더란다. 그리고 이 내 6개월 만에 검사로 투입됐고 ‘ 워낙에 노동에 단련된 몸이다 보니까’ 납땜이든 조립이든 뭐든 잘했다. 월급도 더 많고 대우가 좋았던 수출자유지역 공장들이 노조가 셌다는 이유로 마산방직 출신들을 뽑아주 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면 인생사 세옹지마다. 50


어느 날 잔업을 하고 있는데 옆에 앉은 언니가 노래를 부르는 거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 자 하네 꽃이...” <죽창가>다. 이 불온한 노래를 알고 있던 김순희가 살살 따라 부르다가 둘이 눈이 맞았 다. “어, 너 이 노래 아니?” 그렇게, 평생 동지가 되어줄 최영주 언니를 만나게 됐다. 영주 언니를 중심으 로 ‘ 역사탐방’ 모임이 만들어져 기타도 배우고 역사기행도 다녔다. 유홍준의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옆구리에 끼고 책에 나오는 곳은 거의 다 다녔다. 김순희는 그 시절을 공장시절의 ‘ 봄날’로 기억하고 있 다. 역사탐방 모임을 통해 언니들과 자매애를 키워가던 어느 날, 김순희는 자리를 오래 비웠다고 화를 내 는 과장과 대판 싸우고 그 길로 공장을 때려치우려고 짐을 쌌다. 그 때 영주언니가 술을 한잔 하자고 하더 니 자기 얘기를 털어놨다. 자기는 대학 출신이고 노조를 같이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서로를 믿고 의지했던 그녀들은 노사위원회부터 먼저 시작하면서 노조를 준비하기로 결의했다.

노동해방이 유일한 꿈이 되고… “노조를 준비하고 있는데 회사에서 그걸 알아 채렸어요. 우리가 교섭을 하러 가면 노동법 책을 하나씩 갖고 들어갔어요. 노동법을 들고 폈지. 그래서 ‘ 임금’ 하면 임금 규정을 찾아봐, 읽어봐. ‘ 잔업’ 하면, 또 읽 어봐. 노동법에 이렇게 되어 있는데요 사장님? 하니까 사장이 보기에 너무 얄미운 거야. 이 새파란 가시나 들이 노동법 들이대며 이야기하니까 너무너무 얄미웠나 봐. 교섭을 하면서 뒷조사를 해서 파악해본 거

대명광학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 김순희(왼쪽에서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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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사장은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대명공업이라는 계열사에 백골단을 투입해서 노조를 개박살 낸 사람이 었고 노조탄압 사례로 전국에 교육을 다니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노조를 준비하던 핵심 다섯 명이 해고됐 다. 해고사유는 엉뚱하게도 구조조정. 그 때 해고무효 소송을 변호사 없이 당사자들이 직접 했는데 당시 에 소장을 쓴 영주언니는 지금 노무사가 되어 금속노조에서 일하고 있다. “창원지방법원에 우리가 다 서는 거예요. 네 명이 쪼로록 서가지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 때 판사를 잘 만난 것 같아요. 그 때 다 20대잖아요. 화장기 없는 얼굴에 머리는 부스스, 잠바는 파란 잠바 입고. 어린 애 들이 안됐기도 했고 회사가 너무 준비를 안 한 것도 있지. 얘네들이 교차로에 계속 모집광고를 낸 걸 증거 로 다 모았지. 회사는 물량이 없어서 우리를 짜른 게 아니고, 그냥 짜른 거다. 판사가 ‘ 이렇게 부당하게 짜 르면 벌받아요!’ 하더라고. 창원지법에서 이겼어요.” 그렇지만 해고 싸움은 회사가 1심 판결에 불복해서 고등법원까지 가서야 끝났다. 회사는 어쩔 수 없이 복직을 시켰지만 한 명은 몸이 아파서, 또 한 명은 <마창노련>에서 일하기 시작해 세 명만 복직했다. 그러 나 영주언니는 복직 되자마자 위장취업 때문에 정식으로 다시 해고 됐고, 둘은 3교대로 갈라놓아 새벽 5 시에 택시타고 출근하고 밤 12시에 퇴근하는 일상이 시작됐다. 위험인물로 찍혀서 아무도 밥을 같이 먹으 려고 하거나 다가오지 않았다. 완전히 고립된 것이다. 해고싸움을 하면서 출근투쟁을 하고, 이 작은 공장의 해고자들과 연대하러 400명씩 모이는 큰 집회도 두 번을 열었다. 생계비를 벌려고 육수를 끓여 리어커를 40분씩 끌고 다니며 오뎅을 팔았다. 차룡단지에 서 잔업하는 노동자들에게 유인물도 돌렸다. 해고싸움 중이었지만 지역금속노조를 만드는 데 동참해 전 자회사에 들어가서 교섭을 요구했다가 또 해고를 당해 ‘ 이중 해고자’가 되기도 했다. 노동조합을 만들면 노동해방이 올 거라는 신념에 올인해 온갖 고생과 모멸감을 견디며 살았는데, 복직 했어도 노조결성의 전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신나에 맨손을 담그고 렌즈를 닦는 고난만이 이어졌다. 좌절과 절망의 시간, 김순희는 맨날 울면서 공장을 다녔다. 1년을 버티다 대명광학을 그만두었다. 결국 노 조결성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김순희는 해고싸움을 통해 ‘ 진짜 노동자’가 되었다.

해고싸움 때 만난 익살맞은 남편 ‘ 한 많은 내 인생’이라며 할머니 같은 말을 가끔 뱉고는 하지만 김순희는 참 편하고 따뜻한 웃음을 가 진 사람이다. 가난과 아픔을 버텨낸 팍팍한 삶도 어찌 저리 담담하고 편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게 다 ‘ 넉 넉하고 익살스러운 남편’ 을 만난 덕분이란다. 20대에 노동해방의 꿈으로 인생의 무게를 버텼다던 그녀의 연애와 결혼은 어땠을까 궁금했다. 해고싸움하면서 활동비를 벌려고 오뎅도 팔고 오징어도 팔던 시절이었다. 영주 언니 고향인 주문진에 서 오징어를 떼어다 단위 노조를 돌면서 팔았는데, 그때 두산기계 지회장으로 있던 남편을 만났다. 새끼 52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비며 얘기하는 불량스런 태도도 마음에 안 들었거니와, 오징어를 팔러 온 김순희 가 수금하러 오지 않아서 돈을 줄 수 없다고 강짜까지 놓길래 대판 싸웠단다. 이게 인연이 되었다. “내가 낸데, 이 말 한마디로 다 끝나. 여자들은 안 그렇잖아요. 그런 얘기 없이 결론만 나오는 거야. 나 랑은 안 맞는 갑다, 해서 수십 번을 헤어졌어요. 헤어지고 몇 개월 있다가 집회 장소에서 만났는데, 앉아 있는 뒤통수를 딱 보는 순간 마음이 너무 아픈 거야. 삭발도 하고 코 찔찔 흘리면서, 수배가 됐는데 갈 곳 이 없다 하니 자취방에 숨겨주면 안되것나. ‘ 당연히 위기 상황이니 우리 집에 살라 그래’ 그랬어. 오케이 했어.” 한두 달 다락방에 숨겨줬다. 사귀다 헤어진 청춘남녀가 한 자취방에서 살면서도 아무 일 없을 수도 있 는, 그런 시절이었다. 시절도 엄혹했고 노동자로서의 삶에만 치열했던 그들 또한 쿨했다. 결국 잡혀서 감 방에 간 남자를 ‘ 동지적 관점’에서 ‘ 위로차’ 면회를 갔는데, 그 남자는 김순희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함께 면회 간 동네 어머니가 ‘ 아이고 태일아’ 하면서 울고불고 하는데 그저 김순희만 쳐다보더란다. 그게 또 인연이 돼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했다.

“진보운동 한다고 다 진보주의자 아니더라” 어색하고 서툴던 연애. 변변한 데이트도 없이 결혼했다. 집회에서 만나 집까지 걸어가는 게 데이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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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였다. 아무리 경상도 남자들 무드 없어도 그렇지, 김순희도 그 남편도 참 쑥맥이었다. 처음 밀양으로 놀러갔을 때 영주언니가 싸준 2층짜리 김밥은 먹지도 않았다. 남자는 하필이면 김순희 의 콤플렉스인 손에만 관심이 있었다. “저, 순희씨 손 한 번 잡아봐도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뽀뽀 한 번 해도 되겠냐고 물었다가 또 거절당했다. 그럼 프로포즈는 좀 달랐을까? 남편이 해고돼 회사 기숙사에 서 쫓겨나 살 곳이 없을 때, 포장지 한 개를 툭 던지면서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삽시다”가 청혼 멘트였 단다. 포장지에는 18K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아, 진짜! 갱상도 남자들, 이러면 안돼! 삶은 전쟁터처럼 치열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집이 있어야 결혼하는 줄 알았던 남편은 빚을 내서 집 을 샀고 김순희는 2년 동안 경리일을 해서 그 빚을 고스란히 갚았다. 아들 둘을 낳고는 5년 동안 열심히 아 이만 키웠다. 그동안 김순희는 남편 ‘ 노동일’ 잘하라고 가사와 육아를 혼자 알아서 다 했다. 나중에 <마창 여성노동자회>에 들어가면서 가사는 남편과 아내가 공정하게 분담해야 한다고 인식하게 됐고, 곧바로 남 편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얄궂은 여성단체 들어가더니 그렇게 가르쳐 주더나?” 남편은 즉각 반발했다. 심지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니 월급이 많나 내 월급이 많나? 월급 내가 더 받으니 니가 일 더 많이 해라!” 이쯤 되면 도발 아닌가? 당연히 맞받아쳤다. “머시라고? 니 말 다했나? 인간아, 너 노동운동 와하노. 기본부터 다시 배워라. 바깥에서 차별 없앤다 고 말하지 말고 안에서부터 차별 없애라!” 그날 그렇게 엄청나게 싸웠다. 그 뒤로도 가사분담 문제로 셀 수 없이 싸웠다. 싸우다가 화가 나면 화 장실에 들어가서 크게 소리 나는 물건들을 다 때려 부쉈다. 엄청 화났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돈 안되는 물 건들 중심으로 싸그리 부수고 일부러 안 치우고 나왔다. 그리고 며칠 간 입을 닫았다. 그런 일이 몇 번, 남 편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집에 오면 집부터 치우는데, 남자들은 드러눕는 게 먼저다. 이것이 여자와 남자의 차이다. 여 자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집안일을 하지만 남자들은 시켜야 일을 하는, 그런 차이. 김순희, 조태일 부부도 수십 번을 부딪치고 싸우면서 가사 분담의 질서를 잡아갔다. 노사관계도 그렇듯이 부부관계도 싸워야 대등해진다. 김순희처럼 화장실 집기를 뚜드려 부시든 합리 적인 대화로 우아하게 풀어가든, 가사 분담에 있어 남성들의 편견은 싸워야 할 대상이다. 비단 ‘ 갱상도 남 자’들이나 보수적인 남자들만 남성과 여성의 일이 따로 있다고 믿거나, 집안일과 육아는 여자가 더 잘하니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보운동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다. 사랑의 힘으로 극복할 대상은 남편의 발 냄새나 코고는 소리이지 ‘ 성역할 편견’은 결코 아니다. “진보운동 한다고 다 진보주의자가 아니더라구요. 지금은 50%쯤 도와주고 있는데 이렇게 된 게 10년 은 된 거 같아요. 아 키우는 것보다 남편 가르치는 게 더 힘들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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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어둠 속 미포만에 다시 동이 트는가 현대중공업 노동운동에 바란다


노동르포

어둠 속 미포만에 다시 동이 트는가 현대중공업 노동운동에 바란다 서분숙 기록 노동자

조돈희 씨가 다시 현대중공업 작업복을 꺼내 입었다. 1995년에 해고된 후 복직 투쟁을 하던 긴 세월동안에도 늘 입고 있던 작업복이다. 그는 선박의 배관을 만들던 노동자였다. 배의 동력인 물과 기름은 그가 만든 배관을 통해 흘러갔다. 배의 핏줄과도 같은 배관을 만 드는 중요한 작업이었지만 정작 그 일을 하던 노동자들은 배관과 배관 사이에 끼어서 죽거 나 높은 곳에서 떨어진 자재에 맞아 죽는 일이 허다했다. 1987년에 노동조합에 가입한 이유 도 그동안 위험한 일을 하면서 누적된 불안과 불만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고 말한다. 현대중공업 공장 정문을 들어서면 맞은편에 주홍빛 크레인이 서 있다. 크레인 너머 바다 와 맞닿은 파란 하늘이 보인다. 2013년 12월 3일. 새로운 노동조합의 출범을 알리는 기수단 대열에 조돈희 씨가 서 있다. 1987년 민주노조를 세운 주역들이 다시 노동조합의 주인으로 돌아왔다. 12년 만이다. 그동안 공장 밖으로 유배되었던 해고노동자들도 다시 공장 마당을 밟고 들어섰다.

신념은 해고 사유가 될 수 없다 “난 연습도 했다니까, 출근 연습. 출근 투쟁이 아니라, 남들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밥 먹 고 보통 출근하는 사람들처럼 살아보는 연습. 아침에 일어나서 작업복 갈아입고 남들하고 같이 공장 앞까지 가는 것까지만…. 갔다가 정문 앞에서 돌아오고…. 참 오래 전 이야기네.” 조돈희 씨의 일터는 <울산 이주민 센터>이다. 내가 방문한 날은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이 · 취임식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귀향을 앞둔 사람처럼 그는 들떠 있었다. 공장 안으로 들 어가 보고 싶은 마음을 그는 ‘ 정’이라고 했다. 젊은 날이 배어 있는 공장 안, 그곳에서 겪었 던 숱한 희로애락의 삶은 옅은 바람처럼 그를 자주 흔들었다. 공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56


세월이 길어질수록 그리움은 향수병 처럼 마음 속에 내려 앉았다. 구속과 해고가 거듭되었고 세 번째 해고 이 후 그는 지금까지 해고자라는 이름 표를 떼어내지 못했다. 1995년의 일 이다.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었다가 세 번을 해고 당했고, 그 일이 명예회 복 되어 회사가 복직권고까지 받았 지만…. 노동운동을 열심히 했다는 이유로 해고했는데 회사가 직접 현 장 일로 날 해고할 수 없으니까, 국가 보안법으로 구속된 걸 갖고 회사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며 날 해고한 거 지. 이 일은 정치적으로도 포기할 일 은 아니야.” 정년을 눈앞에 둔 나이인 조돈희 씨가 바라는 건 현실적인 ‘ 복직’은

1990년 현대중공업 파업 당시 조합원 100여 명이 82미터 높이의 크레인에 올 라가 13일간 농성을 벌였다. 확성기를 들고 골리앗 위에 선 조돈희 씨 (사진 :

아니었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새롭

노동자문화예술노동연합 사회사진연구소)

게 눈뜬 사회주의 사상은 그에게 자 본주의를 극복하는 하나의 대안이었다. 그것은 그의 머리와 가슴을 채운 희망이었다. 끝없이 부를 재생산 하고, 가난한 자들은 더없이 빈곤의 나락으로 몰리는 자본주의를 극복할 신념으로써 사회주의를 받아들 였는데, 그 사상이 자신을 해고한 사유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는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신념은 여전히 그의 가슴에 살아 있다. 신념을 핑계 삼아 노동운동을 하던 그를 공장에서 내쫓은 일은 여전히 그에게는 풀어야 할 정치적 과제이다. 그의 사상과 신념을 인정받는 일. 그것이 복직이라면 투쟁을 계속해야 할 분 명한 이유가 그에게 있다.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건 ‘ 명예복직’ 이다.

스스로 조직을 정화할 수 있는 제도가 시급하다 2002년 11월 8일에 열렸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조합원 총회에 대해 말을 꺼내는 일은 조심스러웠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나 59%의 조합원들이 해고자 청산에 동의한 그 결정을 아무런 감정 없이 회 상할 수 있을까. 노동르포 57


2002년, 제 14대 노조 집행부는 ‘ 해고

2002년, 제 14대 노조 집행부는 ‘ 해고자 청산

자 청산안’이라고 불리는 안을 조합원

안’ 을 조합원 총회에 내밀었다. 조돈희 씨를

총회에 내밀었다. 조돈희 씨를 포함한

포함한 아홉 명의 해고자를 더 이상 노동조합

아홉 명의 해고자를 더 이상 노동조합이

이 책임지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책임지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노동조 합이 청산하겠다고 내민 것은 노동악법 과 자본가 권력이 아니라, 그 악법과 권

력에 맞서 싸운 해고자들이었다, 노동조합은 조합원들이 자신의 몫을 희생해서 해고자의 생계비를 마련 하고 있다고, 더 이상은 희생할 수 없다고 선전했다. 회사와 어용노조가 아무리 그렇게 떠들어대더라도 그래도 조합원들이 해고자들을 내치진 않을 거라고, 설마 해고자들을 노동조합에서 내쫓는 청산안에 찬 성표를 던지진 않을 거라고, 믿고 또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반전이었다. 59%의 조합원들은 해고자를 노 동조합에서 청산하는데 찬성표를 던졌다. 충격이었다. 조합원들이 해고자를 청산하는 데 찬성했다는 것보다 더 큰 충격은 해고자들을 내칠 만큼 노동운동이 힘을 잃었다는 사실이었다. 94년 이후 2002년까지 8년간 쟁의조차 벌이지 못한 ‘ 무쟁의 8년의 역사’가 그 증거였다. 2002년 당시 노동조합 사무장이 뇌물을 수수한 사건이 민주노조를 무너뜨린 결정적인 이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조합 간부가 공공연하게 뇌물을 받아먹는 일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그 노동조합 집 행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노동조합 집행부를 탄생시킨 현장 조직이 이미 원칙성과 도덕성을 잃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3대 노조 집행부의 뇌물 수수 비리, 그 뒤를 이은 14대 집행부의 해고자 청산 문제는 이미 예고된 것 이었어요. 그건 우리 민주노조운동이 끊임없이 자기 혁신을 시켜내지 못한 결과물이지. 물론 자본의 현장 통제에 밀린 측면도 있지만 그것보다 먼저 내적으로 보면 그건 이미 예고된 문제였어요.” 박근혜 정권의 전방위적인 노동탄압이 가해진 작년 가을, 전교조 조합원들은 법외노조로 내몰릴 위험 을 감수하면서 해직 교사들을 조합 밖으로 내치지 않았다. 전교조 교사들은 해고자들을 지킨 이유를 ‘ 해 직 교사들은 전교조 투쟁의 상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합원들의 이런 선택을 두고 한 해직 교사는 ‘ 조 합원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했다. 전교조 조합원들의 선택에 견줘 보았을 때 해고자들을 내친 현대중 공업 조합원들에 대해 아픔이나 원망이 남아있지 않을까. 내 궁금함에 대해 조돈희 씨는 한마디로 ‘ 그것 은 냉혹한 결과’라고 답했다. 그런 선택을 한 조합원들보다 그 정도로 무력하게 노동운동을 끌고 온 책임 이 현장의 활동가들에게 있다는 말이었다. 조돈희 씨는 2002년 해고자 청산 문제에 대해 스스로를 반성하는 평가를 통해서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경제적으로 힘들어지고, 앞으로 복직을 요구하기가 더 어렵게 되었지만 그 사건 자체는 개인적으로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무거운 일이었다. 해고자 중 누군가는 복직 여부보다 그 일 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만큼 해고자 청산 문제는 현대중 58


공업 노동운동과 현장 노동자들과의 거리를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노동조합의 곪아 온 문제들이 비 리 사건을 만나면서 터져 버린 것이지, 현장 노동자들과 밀접한 노동조합이 비리 사건만으로 외면 당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해고자들은 현장 노 동자들과 노동조합 양측 사이에 눌려 터져 버린 희생양들이다. 그러면 그동안 민주파라고 하는 활 동가들에겐 자기 혁신의 과정이 있었 을까 물었더니, 어느 정도의 성찰과 반 성의 시간은 있지 않았겠느냐는 대답 이 돌아왔다. 그러나 단죄와 처벌, 반 성만으로는 민주주의가 발전되지 않는 다는 그의 말이 이어졌다. “어떤 비리 사건이 일어나면 단죄하 고 처벌하고…. 계속 이렇게 반복되면

1988~89년, 현대중공업 공장점거 당시 서른 네 살의 조돈희 씨. 공장으로 향하는 플랜트 사업부 노동자들을 만류하려고 자동차 위로 뛰어올라갔다.

성찰은 있으나 운동은 없는 결과가 되 풀이돼요. 그동안 혁신을 끝없이 하려 는 노력이 사실 없었어요. 쉽게 포기해

“비리가 터지면 단죄하고 처벌하고…. 계속 이렇

버리고, 노동운동이, 비교하자면 보수

게 반복되면 성찰은 있으나 운동은 없는 결과가

정치라고 하는 부르조아 정치보다 못

되풀이돼요. 그동안 혁신을 끝없이 하려는 노력

해요. 민주당 비판하고 진보정당 만들

이 사실 없었어요.”

었지만 노동운동이 그것보다 나은 게 뭐가 있나. 한국의 민주주의 정치는 그 래도 주민 소환권, 참여 예산제 이런 걸 제도화 하고 실제로 아래로부터 위를 통제할 수 있는 제도도 있는 데, 노동운동에는 그런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요. 이것이 민주주의가 역행하는 아주 중요한 이유, 민 주주의가 살아나지 않는 아주 중요한 이유예요.” 인간은 늘 부족하고 결핍되기 마련이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높은 도덕성 이 요구되지만, 그것이 무너지면 단죄하고 처벌하고 또 다른 집행부를 세우는 반복된 과정만을 되풀이 할 뿐이다. 그것은 어쩌면 끝없이 머리위의 돌을 굴리고 가야하는 운명처럼 무모한 일일 수도 있다. 제도를 노동르포 59


통해 비리와 부패를 예방할 수 있고, 설령 발생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자생력을 가지고 정화할 수 있으리 라는 조돈희 씨의 말이 정말 현실이 된 적이 있다. 90년대 현대자동차 공동소위원회연합의 활동, 올해 치 러진 현대자동차 지부장 선거에서 하부영 후보의 공약 중 일반 조합원들에게 노조 활동가 징계권을 부여 한 것 등이 그렇다. 노동운동을 정화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고자 한 소중한 실험이었다.

노동운동을 가로 막는 트라우마 나의 인터뷰 요청에 그는 노동운동을 하지 않은 지 오래라 할 말이 없다며 머뭇거린다. 핸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를 통해서도 난감해 하는 마음이 느껴져 그와의 만남을 포기하려는 순간 다시 그의 목소 리가 이어졌다. “나도 이게 트라우마인지는 몰랐는데, 요즘 <와락>이나 이런데서 노동자 트라우마를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니 내 마음에 그 트라우마를 안고 살았던 것 같아요.” 트라우마가 ‘ 어떤 사건이 만들어 낸 정신적인 상처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면 오동석 씨에게 일어난 사건이란 어떤 일이었을까. 동석 씨는 해고 후 복직된 현대중공업 노동자이다. 복직 후 다시 이런저런 모 임에 나가고 연락을 나누고 하던 중에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뭔가 풀리지 않고 올라오는 감정들을 느꼈 다. 해고되기 전에는 현장 활동을 하면서 동료들과 많은 갈등이 있었고 이견도 있었으며 때론 신랄하게 서로 비판도 하고 싸우기도 했다. 다 털고 가버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복직 후 다시 만난 현장에서 그는 여전히 자신을 묶고 있는 상처들을 넘어서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그 사람들 있잖아. 그때 그 상황을 같이 겪어왔기에, 만나면 다시 옛 감정이 올라오는 거라. 해소가 안 되었구나…. 상처였구나 싶은 게.” 누군가는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역사를 집행부의 배신의 역사라고도 했다. 연대 투쟁보다는 노동조 합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 그리고 쟁의를 기피하고 합의를 우선시하는 노사 협조주의, 노동조합 선거에서 당선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관 료주의…. 해고되기 전 동석 씨는 노동조합

“잊혀지지 않는 것, 안 잊혀지는 것이죠.

의 행태와 그것을 감싸고 도는 동료들과 깊

그래도 열정은 남아 있어서 나도 이번 노조

은 갈등을 겪었다. 민주노조라고는 하지만

선거도 같이 하고 싶었지만 과거의 상처가

민주적이지 못했던 노동조합. 그 시간을 겪

먼저 치고 올라오는 거라.”

으며 그는 해고와 복직을 반복했다. 나는 그에게 트라우마의 증세 중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다.

“잊혀지지 않는 것, 안 잊혀지는 것이죠. 상처를 주고받은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잖아요. 그래도 열 정은 남아 있어서 나도 이번 노조 선거도 같이 하고 싶었지만, 과거의 상처가 먼저 치고 올라오는 거라. 안 60


고 갈려고 해도 술 한 잔 들어가면…. 나도 이런데, 아마 해고자들 중 다른 분들도 뭔가는 있을 겁니다. 대 공장 노조가 잘 안 되는 원인 중 하나가 이런 상처들 때문일 수도 있는데…. 이게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다고 해서 묻어 버리고 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큰 강일수록 범람의 폭도 넓을 것이다. 우리는 범람원에 묻힌 고통의 흔적들을 제대로 들여다 본 적이 없다. ‘ 철의 노동자’도 상처에 베이기 쉬운 심장을 가진 인간이다. 바닷속 깊이 침잠한 침몰선처럼 가라앉 은 상흔들은, 때로는 항해를 방해하는 암초처럼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 동석 씨는 이번 노조 집행부의 항해가 그리 쉽지만은 않을 거라고 한다. 이번 집행부를 지지할 대의원 이 아직 현장에 없다는 문제보다도, 노동자들의 마음과 마음에 놓인 벽들이 더 크고 위험한 방해물일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노동자의 말은 노조의 항해가 쉽지 않을 거라는 동석 씨의 말에 대한 해답처럼 들려왔 다.

이주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대기업 노동자, 모두 하나의 노동조합 안으로 얼마 전 방글라데시 섬유 공장에서 또 화재가 발생했다. 2000년대 들어 벌써 열 번도 넘는 화재가 방글 라데시의 섬유 공장에서 발생했다. 그 공장들 중 일부는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공장이며 화재 원인 중 일 부는 열악한 근무 환경으로 인한 불만 때문에 발생한 방화라고 한다. 이런 일들이 발생하면 한국에 와 있 는 이주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상담하고 실무적인 일을 처리하는 조돈희 씨의 마음도 편치가 않다. 이주 노동자 센터의 상담 업무는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겪고 있는 고통을 해결하는 일뿐만 아니라 낯선 타국에서 그들이 겪을 불안감과 외로움을 지탱할 버팀목 역할까지 감당하는 넓은 범위를 포괄한다. 해고자 생활 이십년이지만 정작 혼자서는 해고 무효 소송조차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다는 그는 요즘 제일 절실한 게 상담 능력과 실무 능력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주 노동자들에게 지금 무엇보다 아쉬운 건 이주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보호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사장이 때린다는 제보가 들어오면 그 공장으로 찾아가서 항의를 하고 공장을 옮기는 일까지는 할 수 있겠지만 이주 노동자가 맞지 않고 안 전하게 일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는 일이 더 우선인 것과 마찬가지다. 하청 노조에 가입하길 권 유해 보기도 하지만 신분이 불안한 이주 노동자들이 하청 노조에 가입해서 활동한다는 게 그리 만만한 일 은 아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처럼 단기간 일을 하는 하청 노동자들 또한 열악하기는 이주 노동자들 과 마찬가지이다. 2013년 12월 3일에 열린 노조의 이· 취임식에는 민주노총 중앙의 위원장과 울산 본부장이 참석했다. 2004년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 금속연맹에서 제명당한 뒤 첫 방문이다(중공업 하청노동자 박일수 열사를 살 아생전 탄압하고 그가 하청 노동자 차별철폐를 외치며 분신한 뒤, 열사의 죽음을 왜곡하고 모욕한 죄로 현대중공업은 금속연맹에서 제명된 바 있다).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정병모 위원장은 정년퇴직하는 노동자들보다 더 많은 수의 하청 노동자를 정규 노동르포 61


12년 만에 민주노조가 부활한 작년 12월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이취임식

직으로 채용하도록 회사와 협의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의지를 보인 약속인 것은 분명하지만 하루 동안에도 얼마나 많은 하청 노동자들이 낙엽처럼 쓸려 공장문 밖으로 사라져가는지 파악조차도 힘들다는 중공업의 현실을 생각한다면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좀 더 현실적인 방안이 절실한 것도 사실이다. 조돈희 씨는 중공업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이주노동자든 하청 노동자든 모두 중공업 노동조합으 로 가입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보다는, 그가 누구든 자신의 일터에서 당당하게 일하 는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우선시 될 일이 아니겠는가.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동트는 미포만 을 마주보며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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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토론

민중의 집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2)

노동이 중심이 되는 계급적 지역운동 그리고 <민중의 집>의 역할은? 강상구 민중의집운동본부 본부장

지역이 노동과 만나야 한다는 것은 노동운동을 사회운동적 으로 바꾸는 하나의 시도를 해보자는 의미이고,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각종 사회 운동을 다시 급진성, 체제를 변화시키는 그런 근본성과 만 나게 하자는 의미이다.

계급적이면서도 급진적인 지역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지역운동 안에 노동의 문제의식이 들어가야 한다. 너무 단순화시키는 감은 있지만, 대 체로 지역운동 안에는 노동이 없었고, 노동 안에는 지역이 없었다. 우 리가 보통 ‘ 지역운동’ 이라고 부르는 운동은 주로 환경, 복지, 여성, 교 육 등의 여러 영역에서 존재해 왔다. 지역운동은 삶의 필요를 스스로 해결하는 생협 같은 형태의 운동에서부터, 지역 권력 감시 및 참여 운 동까지 실로 다양했다. 하지만 교육운동에서 전교조의 역할 정도를 뺀 다면, 지역운동 안에 대체로 ‘ 노동’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는 지역운동 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노동운동의 잘못이다. 노동운동은 그동안 자기 사업장 안의 일을 해결하는 데 몰두해 왔 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 계급성’ 과 ‘ 전투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사 업장 이슈에 집중해서 투쟁하는 것만으로도 전국적인 싸움을 할 수 있 었고, 여론 형성에 의미 있는 한 주체로 설 수 있었으며 나름의 대중적 영향력도 갖출 수 있었다.

무관심하거나, 무능력하거나 사실 노동운동은 민주노총 내에 지역본부를 둠으로써 사업장을 뛰 어넘는 지역조직화를 추진해 왔고, 산별노조로의 전환 과정에서 산별 쟁점토론 63


지역본부를 만들어서 역시 개별 사업장에 매몰되지 않는 지역사업에 대한 관심을 보여 왔다.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을 만든 것 역시 노동운동이 지역에 개입하는 하나의 강력한 시도였던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은 지역에 대체로 무관심하거나 무능력했다. 노동운동이 이야기하는 ‘ 지 역’은 그 동안 당이 알아서 하기 때문에 직접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으며, ‘ 지역본부’에서의 지역 은 개별사업장 여러 곳을 포괄하는 조직편재상의 편의적 구분이었을 뿐, 새롭게 활동을 집중시켜야 할 ‘ 생활의 단위’로서의 지역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생활 그 자체를 이루는 환경, 복지, 여성, 교육 등 여러 문제는 노동운동 상층부의 관심 정도와는 무관하게, 그리고 관련 집회에 민주노총 사업장들이 얼 마나 열심히 참여했는가 하는 것과 관계없이 대체로 지역운동, 그러니까 지역을 기반으로 한 시민운동의 영역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런

노동운동은 지역에 대체로 무관심하거나 무능력 했다. 생활 그 자체를 이루는 환경, 복지, 여성, 교육 등의 문제는 노동운동 상층부의 관심 정도와 무관 하게 시민운동의 영역이었다.

영역은 노동과 연대는 할지언정 융합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노동운동은 몇 몇 예외적 사례를 제외한다면, 큰 사 업장 노동자와는 별 관계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활동과 관련된 생협 활동에도,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

는 시민교육활동에도, 지역 사회의 문제를 일상적으로 모니터하고 감시하며 참여하는 행· 의정감시 활 동에도 혹은 각종 조례 개폐운동, 참여예산제 같은 제도자치영역에도 함께 하지 못했다. 노동이 지역에 함께 하지 못하니, 지역의 운동은 ‘ 노동’의 문제의식과 섞일 때에야 비로소 가질 수 있 는 ‘ 계급성’ 에 대한 상시적 긴장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계급성으로부터 벗어난 운동은 투쟁의 주체를 만들지 못했다. 다만 운동을 대중에게 ‘ 서비스’하거나, 중산층 운동과의 애매한 경계에서 표류하 거나, 단순 민주주의 의제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역이 노동과 만나야 한다는 것은 그래서, 노동운동을 사회운동적으로 바꾸는 하나의 시도를 해보자 는 의미이고,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각종의 사회운동을 다시 급진성, 그러니까 체제를 변화시키는 그 런 근본성과 만나게 하자는 의미이다.

어떤 지역전략이어야 하는가 이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은 민주노총이 ‘ 지역전략’을 갖는 것이다. 산별노조가 자기 역할을 명확히 하 고, 민주노총 지역본부와의 역할도 적절하게 정리해야 한다. 노동운동이 이야기하는 ‘ 지역’이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그 ‘ 규모’ 혹은 ‘ 범위’에 대해서도 전 략적 판단이 필요하다. 일반노조나 산별노조의 지역본부는 모두 ‘ 지역의 규모’가 너무 커서 일상적 활동 이 담보되지 못한다. 참고로, 서울시 마을만들기 사업에서 말하는 마을의 규모는 ‘ 걸어서 10-15분 거리’ 64


인천 서구 민중의 집은 KM&I 노조와 함께 주말농장을 일구고 김장 나눔 행사를 진행했다.(사진 : 조병하)

를 말한다. ‘ 생활공동체’를 만들려면 지역의 범위가 이 정도를 넘으면 곤란하다. 최근 많이 시도하는 ‘ 지역조직화’ 와 관련해서도 일정한 정리가 필요하다. ‘ OO공단지역 조직화’ , ‘ OO 지역조직화’ 등등에서 쓰이는 ‘ 지역’은 그냥 해당 지역의 지명을 붙였을 뿐 지역단위 조직화의 진짜 의미 를 담았는지는 의문이다. ‘ OO지역 조직화’가 지역 속에 존재하는 노동자들의 생활을 아우르는 입체적인 조직화라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행정구역이나 지명을 가리키는 사무적인 표현이라면, 실제 조직화 양상 은 사업장 내 조직화와 비슷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많다. 교섭 중심, 조합원 확대 중심, 실리 획득 중심의 조직화 말이다. 민주노총이 매년 사업 계획을 수립할 때 지역사회 운동단체들과 함께 계획을 논의하면 더 좋을 것이 다. 아예 ‘ 지역노동정치혁신위원회’ 같은 전국적이고 포괄적인 연대체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지역사업에 뛰어든다면 금상첨화다. 그렇게 되면 민주노총은 ‘ 지역’의 특징에 주목할 수 있고, 민주노총의 사업은 보 다 더 대중성을 갖게 될 것이며 보다 높은 자신감으로 투쟁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당이 이를 추동해 낼 역량을 갖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란 말은 사족이다.

노동자들이 모이고 공통의 문제를 고민하는 공간, 민중의 집 하지만 현재로서 이런 게 안 되더라도 할 일은 많다. 일단 <민중의 집>이 지역과 노동이 결합하는 사례 를 자꾸 만들어내고, 이를 끊임없이 촉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민중의 집>이 지금까지 해왔고 또 앞으로 쟁점토론 65


할 수 있는 역할들을 대강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민중의 집>은 민주노총과 함께 지역에 산재해 있는 영세한 노동자들을 직접 조직화할 수 있다. 그 동안 민중의 집은 민주노총의 산별노조들과 함께 요양보호사 조직화, 방문간호사 정규직화 투쟁 등을 벌여 왔다. ‘ 주민노동자’라는 개념을 만들고 지역 주민이자 노동자인 사람들의 ‘ (노동조합 조합원이자 지역 활동 참여자로서의) 이중조직화’에 대한 고민도 진척시켜 왔다. 공장이 없는 동네에도 노동자는 많다. 이런

노동자들은 대체로 같은 업종이나 직종이라 하더라도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아서, <민중의 집>처 럼 풀뿌리 조직이 이런 노동자들의 일상사업을 끌어줘야 온전한 조직화가 가능하다. 노동자들이 함께 모이고, 공통의 문제를 고민하는 정기적인 틀을 갖추는 것도 중요한데 이것도 <민중 의 집>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인천서구 민중의 집>의 이주노동자 한글 교실 같은 것이 그 사례다. 둘째, <민중의 집>은 노조의 지역 참여 및 기여 사업을 매개하는 역할을 해왔으며 이를 계속 확대해야 한다. <마포 민중의 집>에서는 가든호텔

노동조합의 지역 참여 사업은 ‘ 노동’ 이라고는 단 한글자도 찾아볼 수 없는 동네의 보수적 분 위기를 조금씩 바꾸는 가랑비 역할을 할 것이 다.

노동조합의 참여로 요리 강좌가 열렸고, <구로 민중의 집>은 구로지역 자영업자 들의 셔터벽화 작업에 국민카드 노조를 참여시켰다. 인천서구 민중의 집은 KM&I 노동조합과 함께 일군 주말농장 의 배추로 김장 나눔 행사를 진행했다. <

광주 민중의 집>은 농협노조와 함께 인문학교실을 진행하기도 했다. 최근에 한국가스공사노조는 구로와 마포 민중의 집에서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가스공사민영화의 문제점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를 가졌다. <희망연대노조>는 자체적으로 청소년노동인권교육팀을 구성하고 노조의 사회공헌기금을 제공받고 있는 구로지역의 지역아동센터 학생들을 대상으로 향후 청소년노동인권교육을 계획 중인데, 민중의 집 활동 가도 함께 할 계획이다. 노동조합의 지역 참여 사업은 ‘ 노동’이라고는 단 한글자도 찾아볼 수 없는 동네의 보수적 분위기를 조금씩 바꾸는 가랑비 역할을 할 것이다. 셋째, <민중의 집>은 중소규모 노동조합, 상근자 없는 노동조합, 사무실 없는 노동조합의 노조사무실 역할을 할 수 있다. 노동조합의 활동은 대개 교섭 중심으로 1년 사이클이 굴러가는데, 산별에 소속되어 있 는 지역의 작은 노조는 교섭을 대부분 지부 등에 위임한 상태다. 따라서 교섭 이외의 활동에 집중해야 노 동조합이 건강하게 유지· 운영될 수 있으나 중소규모 노동조합, 상근자 없는 노동조합, 사무실 없는 노동 조합은 일상적인 활동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민중의 집이 공간을 제공하고, 일상사업 진행에 있어서의 협력 관계를 만들어 내며, 지역의 다른 노조와의 연대를 매개할 수 있다면 이 역시 매우 의미가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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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책의 아이콘

이재영 유고집 발간

1권 이재영의 눈으로 본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 2권 비판으로 세상을 사랑하다 이재영 지음/이재영추모사업회 엮음/레디앙, 해피스토리 펴냄 가격 30,000원(총 2권)

진보정당운동에 평생을 바친 이재영 前 정책위원회 의장이 세상을 떠 난 지 1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재영 추모 사업회>에서 1주기를 맞 이하여 이재영 유고집을 발간하였습니다. <이재영 추모 사업회>는 이 재영의 유자녀 장학금 마련을 위해 후원 사업을 하고 있으며, 유고집 의 인세와 출판사가 기부하는 수익금도 추모 사업회의 유자녀 장학금 조성에 보태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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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포럼

탈핵 에너지 전환의 지역화와 사회화 그 대안을 모색한다 이정필 정책위원,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노동당은 진보신당 시절 ‘ 2030 탈핵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 후 녹색당과 함께 가장 선명하게 탈핵을 주장한 정당으로 자기 색깔을 나타냈다. 노동당은 국회 공간에서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 탈핵 희망버스’와 ‘ 밀양 희망버스’ 등 탈핵 흐름의 가장 밑바닥에서 제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이제 노동당의 탈핵 에 너지 전환 운동은 사회운동과 병행해 정책적· 제도적 대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이는 탈핵 에너지 전환을 구체화하는 것을 의미하고, 2014년 지방선거 국면에서 노동당의 핵심 정책으로 제기한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글은 전력 분야를 중심으로 에너지체제의 문제점을 살펴본 뒤 탈핵 에너지 전환 담론의 재구성의 원칙으로 ‘ 지역화’ 와 ‘ 공유화’ 의 통합적 관점을 제시하고, ‘ 지역에너지공사’와 ‘ 에너지 협동조합’이라는 조직적 형태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지역에너지체제의 문제점 ① 국가 중속성과 지역 불균형의 심화 현재 한국의 에너지체제는 전형적으로 중앙 정부 주도의 ‘ 경성에너지체제(hard energy system)’ 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광역 단위의 지역에너지체제는 경성에너지체제에 종속되

어 정부의 경제· 산업 정책을 뒷받침하는 배후지에 불과할 정도로 동원 대상으로 여겨졌 다. 이 때문에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정부 역시 에너지 정책과 에너지 문제는 중앙정부의 책 무로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수동적 역할· 권한과 재정 부족으로 인해 지방정부는 담당 인력과 부서 부족, 예산 부족과 같은 고질적인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이는 역대 정부가 설정했던 구도 즉 ‘ 강한 국가에너지’ 와 ‘ 약한 지역에너지’의 관계 속 68


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애초에 지역경제발전전략 차원에서 추진된 ‘ 지역에너지사업’은 지역별로 특화할 수 있는 에너지 사업을 중심으로 지역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는 성장 엔진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를 모았 으나, 기대와 달리 지역별 잠재력에 비해 미비한 수준이다. 무엇보다 지역에너지사업은 중앙정부 주도의 에너지 계획의 중앙 집중, 대량 생산, 대량 공급, 에너지 소비 강요로 요약되며, 지역별 특성을 제대로 반 영하지 못한 에너지 수급체계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지방자치의 전면실시에도

지방자치의 전면실시에도 불구하고 지방자치

불구하고, 지방자치단체의 에너지정책

단체의 에너지정책의 자율성과 재정기반이 매

의 자율성과 재정기반이 매우 취약한 상 황에서, 중앙정부가 교부· 보조하는 예 산을 확보하려다 보니 국가 종속성은 더 욱 심화되었다.

우 취약한 상황에서, 중앙정부가 교부· 보조하 는 예산을 확보하려다 보니 국가 종속성은 더 욱 심화되었다.

이렇게 지역에너지체제가 국가에너 지체제로 실질적으로 포섭되면서 특정 지역의 대형 핵발전소 벨트와 화력발전소 벨트를 통해 전력 생산 에서 자유로운 특정 지역에 전력을 공급하는 전력 네트워크를 낳았다. 이는 전력 생산의 비용과 편익을 공간적으로 분리하면서 극단적인 지역간 불균형을 초래했다. 이같은 중앙집중식 에너지 공급 방식은 에 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수요 관리에 실패하기 쉽고 전력을 생산하고 송전하는 과정에서 환경·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일으킨다. 에너지 생산과 소비의 이원화 및 불일치로 인 한 불평등은 에너지 소비 지역의 역외 에너지 의존도를 악화시킬 뿐 아니라, 입지 갈등과 전력 손실과 같 은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갈등을 유발한다.

지역에너지체제의 문제점 ② 전력 네트워크의 팽창 지역 불균형의 심화는 전력 네트워크의 팽창으로 새로운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전력 네트워크는 송전 탑과 송전망 시설을 통해 기능한다. 과거에는 에너지체제를 주로 발전소를 중심으로 이해했다면, 밀양 송 전탑 갈등이 발생하면서부터는 송변전 역시 에너지체제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인식된다. 전력계통계 획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발전소 입지와 지역별 수요 예측이다. 특히 대형 발전소는 전력계통의 인 프라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발전소 부지 선정과 전력계통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대전력을 생산하 기 때문에 고압송전망이 건설되어야 하고, 이는 기존 송변전망을 크게 변화시킨다. 생산 전력을 어디로 어떻게 공급할 것인지 전력계통 문제가 함께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에, 발전소 설비계획과 함께 송· 변전 계획도 수립된다. 그런데 발전설비가 증가함에 따라 송전설비가 증가할 수밖에 없고, 발전설비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에 이어 송전설비를 둘러싼 재산권, 건강권, 환경권 등의 문제들이 제기된다. 1990년대에도 수차례 송전탑 정책포럼 69


관련 분쟁이 나타났다. 당시에도 국익(안

발전설비가 증가함에 따라 송전설비가 증가할

정적인 전력공급)과 사익(지역 혹은 집단 이

수밖에 없고, 발전설비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

기주의)의 갈등 구도로 문제시되긴 했지

에 이어 송전설비를 둘러싼 재산권, 건강권, 환 경권 등의 문제들이 제기된다.

만, 본격적으로 ‘ 스케일의 정치’ 가 나타 날 정도로 사회적 관심을 받지는 못했 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송변전 설비 건설에 대해 크고 작은 민원이 급증하면

서 전력망에 대한 논란이 커졌다. 특히 2002년에 당진화력으로부터, 2004년에 울진 3,4호기로부터 수도 권으로 연결된 765kV 송전망이 만들어지면서 국내 전력 네트워크는 초고압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렇 게 전력계통은 주로 해안가의 핵발전 단지(고리, 월성, 영광, 울진)와 화력발전 단지(충남 당진, 인천)에서 수도 권과 공업단지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거미줄처럼 확대되었고, 발전소가 대형화· 단지화됨에 따라 154kV, 345kV, 765kV로 점점 고압으로 가압되었다.

탈핵 에너지 전환 담론의 재구성의 원칙 : 재지역화와 재공유화 국내에서 에너지 전환 담론은 서로 다른 두 맥락에서 구성되었다. 2000년대 초반 전력산업구조개편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흐름에서 전력산업의 사유화에 저항하는 공공성 담론이 형성되었다. 당시 쟁점 은 주로 경쟁(시장)-규제(국가)라는 대립축에 기댔다. 그러다 보니 공공성 진영은 에너지 전환에서의 ‘ 지역 화’ 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중앙 집중형 공기업 형태를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비슷한 시기에 환경 진영은 지역화에 바탕을 둔 에너지 전환을 주장했다. 핵· 화석연료를 주된 에너지 원으로 삼아 국가와 자본이 관장하는 공급중심의 경성에너지체제를 비판하면서, 지역 분산형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에너지원 전환과 함께 에너지 수요관리를 통한 ‘ 연성에너지체제(soft energy system)’로의 전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환경 진영의 에너지 전환 담론은 사회구성체의 ‘ 체제 전환(system transition)’에 관심을 두 지 않아 에너지 전환의 ‘ 공유화’ 혹은 ‘ 사회화’의 관점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전력산업구조개편 논란 속에서 환경 진영 일부는 ‘ 민영화’에 찬성하는 태도를 보이기까지 했다. 다른 한편 국가-광역-기초-마 을 단위로 형성되는 ‘ 다중 스케일’을 고려하지 않은 채, 지역을 강조하다 보니 마을 단위를 주된 실천 공 간으로 설정하는 한계를 보였다. 이렇게 국내의 에너지 전환 담론은 국가와 자본의 에너지체제에 불만을 표출하면서도, 전통적 좌파 진 영은 공공성 실현을 이유로 사유화 반대에 집중했고, 반면 환경 진영은 분산형 재생가능에너지를 확대해 야 한다며 중앙집중형 에너지체제 반대에 집중했다. 그러나 헤르만 셰어의 지역 사회의 ‘ 에너지 주권’ 개 념, 그리고 기왕의 국가 중심적이고 자본 중심적인 대문자 단수형 에너지 안보(Energy Security) 개념을 지역 중심적이고 사람 중심적인 소문자 복수형 에너지 안보(energies securities) 개념으로 대체해 ‘ 에너지 공유 레 70


짐’을 지향해야 한다는 코너 하우스(Corner House)의 제안은 에너지 전환의 지역화와 공유화를 통합하는 대 안적 프레임을 제공한다. 실제로 2002~2007년에 영국에서 실행된 ‘ 지역사회 재생가능에너지 이니셔티브’를 누가 관여하고 영 향을 미치는가에 따라 ‘ 개방· 참여적-폐쇄· 제도적 과정’ 으로, 누가 혜택을 보는가에 따라 ‘ 내생· 집합 적-외생· 사적 결과’ 로 구분해 평가해 보면, 이와 같은 프레임에 설득력이 있음을 알게 된다. 가장 성공 적인 유형은 개방· 참여적 과정을 통해 내생· 집합적 결과가 도출되는 형태인데, 지역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사업을 추진하고 지역 사회가 집합적인 편익을 얻는 유형이다. 이제 우리는 태양, 바람, 물 등 자연 자원이라는 공유자산(commons)에 대한 ‘ 공유권’은 ‘ 오래된 미래’라는 점에서 에너지 전환 담론의 재구성 에서 핵심적인 가치이자 권리로 이해해야 한다. 에너지 정의와 에너지 분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 다도 지역화와 공유화를 핵심 가치로 인정해야 한다.

‘ 에너지 반란’ 나라 안팎에서 이미 현재진행형 노동당의 탈핵 에너지 전환 프레임은 국내 논쟁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되, ‘ 지역화’와 ‘ 공유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는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기보다는 국내외에서 불고 있는 ‘ 에너지 반 란’ 에 주목하면 중요한 시사점들을 얻을 수 있다. 1980년 전후로 지배적 위치를 점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에너지 분야의 사유화와 자유화는 전 세 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 결과 많은 국가와 지역에서 익숙했던 에너지 공기업의 형태는 자취를 감 췄다. 에너지 사유화와 자유화로 인해 생태적인 전력 공급자 일부가 시장에 진입할 수 있게 되었지만, 불 공정한 조건하에서 재생가능에너지는 불리한 경쟁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었고, 사유화와 자유화가 심화 될수록 그 폐해는 커져갔다. 그런데 2005년 이후 독일에서는 자유화된 전력망을 ‘ 재지역화’ 혹은 ‘ 재공유화(recommunalization)’ 하려는 움직임이 전역에서 등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함부르크와 베를린에서도 관련 논쟁이 벌어지고 지역에너 지공사 설립을 묻는 주민 투표가 진행되었다. 녹색당이 강한 함부르크에서는 주민 투표가 성공했지만, 베 를린에서는 아깝게 실패했다. 이와 함께 ‘ 에너지 협동조합’도 후쿠시마 사고 이후 다시 관심을 받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에너지 협동조합은 낯설지 않다. 미국에서는 1930년에 거대 전력회사가 농촌지역 에 전기 공급을 회피하자, 농촌 주민들이 직접 전력 협동조합을 만들기 시작했고, 현재 12% 가구가 협동 조합을 통해 전력을 공급받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도 1920년대에 시작되어 현재 농촌 전력의 58%가 협 동조합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에는 덴마크와 영국, 독일에서 성장한 에너지 협동조 합의 성공 사례들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전력체제의 역사적 경로와 맥락이 상이한 상황에서 이러한 해외 담론과 경험을 그대로 수 용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러나 국내에서도 에너지의 ‘ 재지역화’ 와 ‘ 재공유화’ 담론을 재해석해 실 정책포럼 71


2005년 이래 전력 서비스를 재지역화한 독일 지방자치단체들(왼쪽), 지난 지난 5월 메이데이 축제에서 이루어진 에너지 원탁 회의 주 민 투표 청원 캠페인(오른쪽).(사진: 한재각)

정에 맞게 적용할 수 있다. 한국은 근대화· 산업화 과정을 통해 화석· 핵에너지를 기반으로 하는 근대적 에너지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공간적 의미에서는 지역화에서 전국화/국가화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이러 한 경로를 역전시키는 전환 논리에 따라 ‘ 재지역화’는 타당하다. 사회적· 경제적 의미에서는 국유화에서 (부분적) 사유방향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 재공유화’ 역시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국유화를 전 적으로 부정할 수 없더라도, 더 넓은 함의를 갖는 공유적· 공영적 관점에서 볼 때, 에너지체제, 특히 전력 체제의 공기업 형태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만족스럽지 못한 수준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 전환의 논리’ 로 적합한 제도적 형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탈핵 에너지 전환의 제도적 형태 : 지역에너지공사와 협동조합 연성에너지체제의 제도적 형태는 행위 주체에 따라 공적, 사적, 시민사회적 영역에서 다양하게 나타나 고, 공간적 범주에 따라 국가, 광역 지자체, 기초 지자체, 마을로 구분된다. 국내외적으로 관심을 받고 있 는 협동조합, 시민기업 방식의 잠재력을 인정하면서, 여기서는 지역에너지공사를 노동당이 주목해야 할 탈핵 에너지 전환의 제도적 형태로 상정한다. 무엇보다도 국가-광역-기초-마을이라는 다층 거버넌스 측면에서 국가와 마을 단위를 잇는 중범위에서의 광역과 기초 지자체의 지역에너지공사의 역할과 기능 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지역에너지공사는 아직은 마을 단위로 추진되고 있는 에너지 협동조 72


합 실험의 부족한 틈새를 채우면서 탈핵 에너지 전환의 제도적 틀로 자리매길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지속가능한 에너지 유틸리티(SEU), 베를린에너지청, 뮌헨에너지공사, 런던기후변화청 과 같은 해외 사례가 국내에 소개되었다. 이와 같은 지역에너지공사는 에너지 진단· 컨설팅, 건물에너지 효율화, 에너지 교육· 홍보, 재생가능에너지 보급, 관련 시설 유지관리 등 지역의 에너지 서비스 제공을 위한 전담기구이다. 특히 기왕의 지역개발공사의 폐쇄적 의사결정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시민과 노 동자의 참여가 실질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2000년대 초반 캘리포니아 주 정전사태에서 새크라멘토만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도 핵발 전소 폐쇄를 결정하고 에너지 전환을 추진하던 시영전력회사의 민주적 의사

2012년 7월 1일 우여곡절 끝에 ‘ 제주에너지공사’

결정 구조가 결정적이었다는 점을 상기

가 설립됐다. 지역에너지공사는 에너지 협동조

하자.

합 실험의 부족한 틈새를 채우면서 탈핵 에너지

2012년 7월 1일에 우여곡절 끝에 설 립된 ‘ 제주에너지공사’는 시행 초기 단

전환의 제도적 틀로 자리매길 수 있다.

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긴 하지만, 지 역에너지공사 도입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제주에너지공사는 위와 같은 사업을 하는 전담기구로 발 족됐으며, 특히 ‘ 풍력자원의 공공적 관리와 개발이익 환수’를 위해 설립· 운영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런 바람의 에너지 ‘ 자원화’와 ‘ 공풍화’ 는 지역의 에너지 전환과 자립을 구축할 수 있는 핵심적인 논리 가 된다. 그러나 지역에너지공사를 가로막는 법· 제도적 장벽이 많다. 에너지법, 전기사업법, 전원개발 촉진법, 에너지이용합리화법, 신재생에너지법 등의 법적 제약에서부터 한전 독점 구조를 비롯한 전력 시 스템, 불합리한 전기요금 체계와 에너지교통환경세 등 제도적 제약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지역에너지 공사를 설립· 운영할 재정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에너지 협동조합과 함께 지역에너지공사는 탈핵 에너지 전환으로 가는 전략적 모델이자, 지역의 에너 지 주권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지방자치 실현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노동당 색깔에 맞는 지역에너지공사의 모델을 그려보자.

정책포럼 73


왼쪽에서 본 농업 이야기

배추 값이 오르면 놀부보쌈이 화를 낸다 연승우 농업 전문 기자, 서울 구로당협 부위원장

한국에서 농업은 철저히 소외된 분야다. 위정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 농업이 가장 중요하다,’ ‘ 생명산업이다’ 말들 하지만 누구도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한다. 이는 진보정 당도 마찬가지다. 일부 진보 또는 좌파들은 농업을 환경, 생태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거나 귀농과 공동체의 대안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특히 농업에 대한 오해도 많다. 농약사용 이 가장 대표적이고 농산물 가격, 생산에 대해 상당수가 왜곡된 인식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좌파들은 에너지기본권을 주장하면서 식량에 대한 기본권은 주장하지 않는 다. 사실 식량도 에너지라고 할 수 있으니 그 안에 포함시킬 수 있겠지만 에너지보다 더 중 요한 식량에 대한 인식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동당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농업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제대로 된 대안을 제시할 수 없 다.1)

농업 정책의 ‘ 갑’ 은 소비자가 아니라 기업? 한국은 WTO 협정에 따라 매년 의무적으로 특정 농산물을 일정량 수입해야 한다. 이것 을 ‘ 의무수입물량’이라 부르며 매우 낮은 수입관세를 부과하고 그 외의 물량에 대해서는 높은 관세를 부과한다. 기획재정부에서는 매년 연말에 의무수입물량을 정해서 발표한다.

1)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11월호에서 ‘ 마트 없이 충분하다’ 는 특집과 관련해 페이스북에서 장발장 (Jean Valjean)님의 문제제기가 있었다. 기관지에 글을 쓴 이봉화 부대표도, 문제제기를 한 장발장 님도 모두 맞 다. 다만 서로 다른 해법을 내놓고 있을 뿐이다. 전체적인 큰 그림이 없는 상태에서 접근하면 입 대는 사람 수만 큼 다양한 해법이 나오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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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콩은 한국에서 매우 중요한 품목 중 하나이기에 수입 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487%의 높은 관세를 부과한다. 대신 의무적으로 저율관세 할당물량(TRQ) 18만5천 톤을 매년 5%의 관세를 부과해 수입 해야 한다. 문제는 기재부가 의무수입물량만을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추가로 들여온다는 데 있 다. 2006년 6만58톤, 2007년 5만9천577톤, 2008년 8만8천153톤을 의무수입물량 외에 추가로 저율관세로 들여왔다. 뿐만 아니라 매년 의무수입물량도 늘리고 있는데, 콩 이외에도 양파, 마늘, 참깨, 고추 등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기획재정부는 이에 대해 국내 콩 자급률이 낮아 콩 생산량이 부족해 가격이 비싸고 이로 인해 콩나물 공장과 각종 가공식품 공장에서 수입 물량을 늘려달라고 요구하기 때문이 라고 주장한다. 국내 콩 가격이 상승

국내 농업 기반이 무너져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

하면 콩나물공장에서 당장 기획재정

고 농업회생이 아닌 수입으로 국내 먹거리를 제

부에 민원을 제기한다. 소비자들이

공 하는 게 한국 정부의 현실이다.

민원을 제기해 의무수입물량이 늘어 나는 게 아니다. 가정에서 소비되는 양이 적으므로 가격이 오르더라도 소비자 부담은 그리 크게 증가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스갯소리로 배추 가격이 오르면 보쌈집에서 기획재정부에 민원을 넣어 농림축산식품부에 압력이 들어온다고 얘기하곤 한 다. 현재 한국에서 국내 농산물을 재료로 하는 가공식품은 거의 없다.2) 이런 상황에서 국내산 농산물을 사 용하라고 중소기업에 요구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앞서 말했듯 기획재정부는 국내 농산물 생산 안정을 통한 안정적인 공급보다는 가격이 싼 외국 농산물 수입에 더욱 열을 올리고 있다. 국내 농업 기반이 무너 져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업회생이 아닌 수입으로 국내 먹거리를 제공하는 게 한국 정부의 현실이다.

로컬푸드, 꾸러미… 틈새시장일 뿐, 농산물 유통 대안이라 보기 어려워 농산물 중 하나의 품목이 급등하면 유통에 대한 온갖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지난 5월 박근혜 정부는 농산물 유통구조 개선 대책을 발표했다. 여기서 획기적인 것은 바로 농민단체, 시민단체들이 주장한 로컬 푸드와 공동체지원농업(CSA: 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이 유통구조 개선 대책에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 다.

2) 예외적으로 김치는 국산을 사용한다. 수입김치를 제외한 김치는 국산 배추를 사용한다. 일부 김치공장에서는 배추 가격이 오를 때 수입배추를 사용하기도 한다. 배추파동이 일어났던 2010년과 2011년에는 배추 수입이 늘었지만 국 내로 수입이 거의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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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대형마트 농산물 매장 모습 (사진 : 정정은)

대부분의 좌파, 진보주의자들은 로컬푸드와 공동체지원농업(CSA)3)을 대안이라 여기지만 이는 정확하 게 말하면 틈새시장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공동체지원농업은 농산물 유통 구조의 대안이 될 수 없다. 대 농이 아니더라도 일정 규모 이상의 농사를 짓는 농가에서는 꾸러미만으로 생산한 농산물을 다 팔지 못하 기 때문이다. 로컬푸드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우리가 도입해야 할 대안이지만 이 역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 한다. 한국의 농산물 유통구조를 보면 채소와 과일의 60%가 도매시장을 거쳐 소비자에게 간다. 2천만 명 이 서울과 경기도에 거주하는 특성 때문에 전체 생산된 농산물 중 70%가 서울로 들어온다. 서울시 농수산 물 도매시장인 가락시장으로 집결됐다가 다시 지역으로 내려가는 이른바 역조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 이 현실이다. 즉 해남에서 재배된 배추가 서울 가락시장에서 경매를 거쳐 다시 전남 광주로 팔려나간다. 결국, 한국 인구의 50%가 서울 경기권에 몰려 있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로컬푸드가 실현되기 어렵 다. 농산물의 유통거리는 길고 유통단계도 복잡하다. 그렇다고 도매시장제도를 없앨 수는 없다. 직거래는 유통단계를 최소화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농가는 소비자를 찾아다녀야 하고 소비자는 농가를 찾아다녀야

3) 한국에서는 공동체지원농업(CSA)이 ‘ 꾸러미’ 형태로 정착되고 있다. 소비자와 농가의 교류, 가격협상 등은 아직 정 착되지 않았고 주 1회 소포장한 다품목 농산물을 배송하는 형태이다예외적으로 김치는 국산을 사용한다. 수입김치 를 제외한 김치는 국산 배추를 사용한다. 일부 김치공장에서는 배추가격이 오를 때 수입배추를 사용하기도 한다. 배추파동이 일어났던 2010년과 2011년에는 배추 수입이 늘었지만 국내로 수입이 거의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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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불편을 겪어야 한다. 대한민국 농가가 소농이 많다고 하지만 이미 규모화된 농가도 많다. 대규모 농 사를 짓는 사람에게는 도매시장이 농산물 판매에 적합한 구조이기도 하다. 한국 도매시장과 외국 도매시 장이 다른 점은 경매제도다. 경매제도는 최고가 입찰 방식이기 때문에 농민에게 이득이 간다고 하지만 가 격 변동 폭이 크고 생산비를 보장받지 못하는 가격에도 낙찰이 되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크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대안인가.

누구나 제대로 된 집밥을 먹는 게 ‘ 먹거리 평등’ 농업 정책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목적은 딱 하나다. 안전한 농산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 이상의 정 책은 없다. 안정적인 생산기반을 갖지 못한 채 계속 가격 안정을 요구하거나 국내산 농산물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허무할 수밖에 없다. 농산물 유통도 마찬가지다. 대농 중심의 정책만 펴서는 안 되겠지만 소농만을 전제로 한 대안 역시 궁극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한국 농업계에 좌파적 학자들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실효성 있는 대안을 만들어 내는 일은 너무나 어 렵다. 농업은 곧 먹거리와 직결되기 때문에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생산의 안정과 먹거리 불평등의 해소 다. 소득의 차이는 단순히 먹거리의 차이로만 귀결되는 게 아니다. 고소득층은 말 그대로 비싸고 좋은 먹 거리를 취하는 반면 저소득층은 질적으로 떨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인체에 해로운 먹거리에 심각하게 노 출된다. 저소득층일수록 당뇨병 등 식원성 질병의 유병률이 높고 비만율도 높다는 연구결과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먹거리 평등은 곧 누구나 다 안전한 농산물을 먹을 수 있고 패스트푸드가 아닌 제대로 된 집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슬로푸드다. 슬로푸드는 어렵고 복잡한 레시피에 한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하 지만 쉽게 말하면 집에서 밥을 해먹는 것이 슬로푸드다. 발효음식이 많은 한국은 슬로푸드 문화가 정착하 기 좋은 대표적인 나라이기도 하다. 슬로푸드는 국내산 농산물 소비를 늘릴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좋은 운동이다. 하지만 OECD 국가 중 최장시간 노동을 자랑하는 한국에서 집밥, 혹은 슬로푸드는 어려운 일이 다. 맞벌이 부부가 늘고 1인세대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슬로푸드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 노동시간 단축과 소득불평등이 해소된다면 우리는 한층 더 맛있는 집밥을 요리해 먹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국내산 농산물 소비도 늘어날 것이다. 이러한 소비 확대가 농산물의 안정적인 생산을 가능케 한 다. 나아가, 좀 더 관심있는 사람들이 공동체지원농업(CSA)를 통해 소농들과 연대하여 소농의 삶이 안정 된다면 무리하게 농가부채를 늘려가며 농사규모를 확대하지 않아도 된다. 한국농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세밀한 농업정책들이 만들어져야 하겠지만 우리의 삶 과 인식이 바뀌어야 농업도 바뀐다. 앞으로 이 지면을 통해 한국의 농업 문제와 정책에 대해 좀 더 심층적 으로 하나하나 접근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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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단 일기

공중전화 부스와 우체통, ‘ 메아리 도서관’으로 변신하다 화덕헌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의회 의원

폐 공중전화 부스를 활용해 도서관을 만들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지난 9월 어느 날 아침, 화장실에서 우연히 신문의 토막 기사 하나를 보고 나서다. 서울 송파구 어느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에 공유도서관이 만들어졌다는 기사를 보고 의회로 출근하자마자 사무국 직원을 통해 송파구청에 관련 자료를 요청했다. 송파구청으로부터 도착한 자료는 나의 상상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깔끔하게 철제책장 과 유리문으로 제작된 형태였는데 잠금장치가 있었다. 잠금장치가 있으면 관리 인력과 예 산이 지속적으로 수반되어야 할 것이고 이용률이 떨어질텐데 그렇게 해서 오래 갈 수 있을 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 자유로운 공유’라는 공유도서관의 취지가 무 색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잠금장치가 없으면 관리가 힘들겠지만 아파트 단지 안 이라면 서로 신뢰를 구축하는 일정한 과정을 통해 얼마든지 관리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 다.

잠금장치 없는 ‘ 열린 도서관’ 을 상상하다 어쨌든, 송파구로부터 배운 공유도서관이라는 아이디어를 써먹기 위해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내가 사는 동네는 인구 12만 정도의 아파트 신시가지다. 행정구역상 해운대구 좌동에 해당하는데, 해운대는 장산이라는 산을 기준으로 가운데 중동이 있고 좌우로 우동 과 좌동이 있다. 뭐 그렇다고 좌동에 좌파가 사는 것도 아니고 우동에 우파가 몰려 있는 것 도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중동에는 탈레반이 몰려들어야 할 터. 드디어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아파트 단지 사이사이마다 소공원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중학교와 초등학교 사이에 있는 부흥공원은 근린공원으로 지정될 만큼 웬만큼 규모도 있 고 이용객도 상시적으로 많은 편이다. 게다가 지하철 출퇴근길로 이용되며 우리 집과도 아 78


주 가깝다. 먼저, 놀이터 공유 도서관을 만드는 일에 동참할 주민들을 찾아야 했다. 사람들을 만 나 놀이터에 도서관이 설치되어야 하는 이 유를 일일이 설명했다. “아이들의 육체를 단 련시키는 놀이기구가 설치된 놀이터에 아이 들의 정신과 마음을 단련시킬 책이 같이 있 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책이 훼손되면 어떻 게 하냐고 걱정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내 생각은 달랐다. 아이들에게 책은 하나의 장 서라기보다는 놀이 기구처럼 소모품으로 볼 필요가 있다. 장난감처럼 서로 집어던지며 장난도 칠 수 있고, 찢어서 딱지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책과 친해질 수 있다. 더군다나 숱하게 버려지는 중고 책으로 얼 마든지 책장을 채울 수 있을 터, 도난이나 유

KT로부터 공중전화 부스를 다섯 개 무상제공 받았다. 공원에서 만 나는 열린 도서관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공중전화 부스.

실사고에 대해서도 좀더 유연한 생각을 갖 자고 설득했다. 그러자 이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생기기 시작했다. 마침 해운대구 세계시민사회과에서는 사회적 자본 육성을 위한 아이디어 공모사업을 하고 있었다. 어 린이 놀이터에 세우는 공유도서관이야말로 공유와 신뢰를 지향하니 이 둘보다 사회적 자본을 더 잘 설명 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가 어디 있을까 싶었다. 공유도서관 만들기 모임 주민대표에게 공모신청을 권유했 다. 비와 볕을 피할 수 있도록 놀이터 옆 공원 파고라 아래 책장을 설치하고 기증받은 책을 꽂겠다는 내용 으로 사업 제안서가 만들어졌다. 책장 제작에 쓸 나무도 기계나 대형 상품을 운반할 때 깔판으로 쓰이는 팔레트 폐목을 재활용하겠다고 밝혔다.

튼튼한 공중전화 부스로 열린 도서관을 만든다면? 우수한 성적으로 공모에 선정이 되었고 무려 백 오십만 원의 사업비도 나왔다. 그렇게 사업이 시작될 즈음 문득, 공중전화 박스를 책장으로 활용하면 비를 더 효과적으로 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구동성으로 기발한 생각이라며 즐거워했는데, 사람 생각이 거기서 거긴지 몰라도 나중에 검색해 보니 영국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이미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해운대구 공유형 개방도서관인 메아리 도서관은 설립되었다. 한국통신(KT)과 공중전화 의원단일기 79


업무를 담당하는 KT링크스의 협조로 5개의 공중전화 부스를 무상제공 받았다. 요즘 공중전화가 워낙 인 기가 시들하다 보니 전국적으로 낡거나 매출이 적은 것부터 철거가 이루어지고 있는 형편이라 비교적 수 월하게 폐 부스를 얻어올 수 있었다. 전국의 공중전화기는 7만여 대이고, 1대당 하루 평균 이용시간은 5분 이 채 되지 않는다. 월 매출이 1만 원 이하인 경우는 부지기수이고, 월 매출 천 원 이하의 공중전화도 5천 대가 훨씬 넘는다. 매출이 전혀 없는 공중전화도 140여 대나 된다. 그래서 매년 1만 대 정도씩 철거되는 형 편이라고 한다.1) 막상 일을 시작하니 일손이 부족했다. 주민들과 친구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디자이너, 페인트공, 목수, 화물차 운전자… 다양한 일꾼들이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의논해서 색상을 정하고, 목재를 구입하 고, 페인트칠을 하고, 실사출력으로 글씨를 팠다. 주민들은 나무 도장과 스티커를 만들어 책에 찍고 붙이 는 작업을 거들었다. 11월 21일 드디어 개관식이 열렸다. 다섯 개의 공중전화 책장에 650여 권의 책이 구비 된 작은 도서관이었다. 커다란 소나무 사이 가로등 밑에 놓인 빨간색 부스는 주로 소설 등을 모아놓은 문 학도서관이다. 청소년들이 자주 모이는 공원 구석진 곳에 설치한 주황색 부스는 청소년도서관. 놀이터 옆 연두색은 어린이 그림책 도서관인데 장애인용 공중전화 부스를 활용해서 큰 그림책을 수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공원 입구 출근길 옆에는 두 칸짜리 공중전화 부스를 설치했는데 사회· 문화 등 시사성이 있는 책들이 구비된 성인도서관이다. 구분해서 배치하고 색칠을 하니 참 예쁘다.

빌려간 책들 메아리처럼 돌아오라고 ‘ 메아리 도서관’ 보도 자료를 보냈다. 예상대로 언론의 관심이 가히 폭발적이었다. 부산의 양대 일간지인 부산일보와 국제신문에서 취재를 나왔고, 다음날 각각 2면 톱, 5면 컬러로 비중 있게 다루어 주었다. 국제신문의 경우 논설위원의 칼럼에 공공미술의 사례로 언급되기도 했다. 방송의 경우 부산엠비씨와 헬로티비, 그리고 연 합뉴스에서 취재를 하고 인터뷰 내용이 보도되었다. 주민들의 관심도 뜨거웠는데, 처음 공중전화 부스를 공원 옮겨 놓자마자 호기심이 들끓기 시작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요즘 세상에 공중전화가 무슨 필요가 있냐며 다짜고짜 설치 반대 목소리를 높이 는 분도 있었다. 안내문이 붙고 서서히 도서관 사업에 대한 윤곽이 드러나자 이번엔 도서관의 앞날을 걱 정해주는 분들이 생겨났는데 우리보다 더 심각하게 걱정을 했다. 주로 책이 안 돌아오거나, 훔쳐가면 어 떻게 하냐는 걱정이었다. 정작 우리는 별로 걱정이 없었다. 오히려 걱정하는 마음에서 힌트를 얻어 ‘ 메아 리 도서관’ 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책이 갔다가 메아리처럼 돌아올 수 있도록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1) 공중전화 부스를 활용하여 이동식 갤러리를 만드는 전시회도 구상 중이다. 해운대역 광장에서 네 개의 부스를 설치 해 선보일 첫 전시는 동해남부선의 옛 사진을 모아서 열 생각이다. 이후에도 공준전화 부스가 이동 가능한 공간이 라면 어디든 찾아가는 이동 전시회로 진행하려 한다. 해운대 해수욕장과 송정해수욕장 그리고 동해남부선 폐선 철 로 위 등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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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곳곳에 공중전화 부스를 활용한 메아리 도서관이 설치됐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메아리 도서관이 문을 연 지 18일 째 되는 날이다. 중간에 820권을 추가로 배치 하여 넣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책은 300권 남짓이다. 하루에 보통 50여 권씩 책이 나갔는데 인기 있는 책이 다 빠져나가고 나서부터는 대출량이 좀 주춤한 상태 이다. 다행인 점은 책을 기증할 의사를 밝히거나 손수 들고 찾아오는 분들도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다. 도서관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려면 6개월이 걸릴지 1년이 걸릴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잠자는 책을 이웃과 나누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고, 함께 도서관 가꾸는 일에 동참하는 분들이 늘어날 것이라는 점이다. 내 꿈은 공원 전체에 공중전화 부스 100개 정도를 설치하는 것이다. 기증 받은 헌책으로 꾸며서,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 공원, 공원 도서관 을 만들고 싶다.

사라져 가는 우체통은 메아리 도서관 반납함으로 탈바꿈하고 일을 진행하면서 거리의 공공기물, 이른바 거리의 가구(street furniture)와 쓰레기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공중전화 부스 다음으로 눈에 들어 온 것은 우체통이었다. 우체통 역시 공중전화 부스만큼이나 튼튼하게 만들어진 물건으로 최근 쓸모를 급격하게 잃어가는 중이다. 우체통을 책 수거통이나 반납함으 의원단일기 81


버려진 우체통을 얻어와 수리하고 페인트칠을 새로 해서 도서 반납함으로 만 들었다.

로 재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어 우체국 쪽에 연락을 넣었다. 우선 두 개의 우체통을 받아 왔는데 거리에 세워져 있을 때의 후줄근한 모습과 달리 사무실에 들어온 우체통은 무척 예뻤다. 낡은 가구같은 품격이 수줍은 듯 살살 뿜어져 나왔다. 한데서도 비를 피할 수 있도록 튼튼하게 설계되어 있다. 투입구에 는 자동으로 닫히는 문까지 달려 있으니 반납함으로는 금상첨화이다. 주황색으로 예쁘게 페인트칠을 해 서 도서관 옆에 놓아 둘 생각이다. 최근 발간된 책 『발전소는 어떻게 미술관이 되었는가(김정후, 돌베개)』를 보면 유럽의 산업유산이 문화 시설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소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무척 흥미롭고 관심이 가는 주제이기도 하다. 파리의 폐선부지인 프롬나드 플랑테와 뉴욕의 폐선부지인 하이라인 프렌즈 사례는 해운대에도 최 근 폐선부지가 발생해 더욱 눈여겨 보았다. 파리와 뉴욕의 폐선부지 활용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제법 크 다. 그 중에서도 시민들이 나서서 공원화를 이루어 내었을 뿐만 아니라 공원화 이후에도 공원 관리의 주 체로 활약하고 있다는 대목에 이르면 우리 실정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유럽에서는 폐기되는 산업유산과 시설을 활용하여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기계 비평가 이영준 선생의 말을 빌자면 “낡아서 힘이 빠진 사물”에 다시 “힘을 불어넣는” 현상인데 우리의 형 편은 어떤지 모르겠다. 죄다 부수고 아파트를 짓거나 폐기처분하는 방식 말고 다른 대안을 상상해보자. 작 은 공공 공원 하나라도 시민들 스스로 가꾸어본 경험이 없다면 어떻게 국가 기간시설이나 산업시설물에 대한 보존이나 공원화를 힘 있게 주장할 수 있을까? 비록 우체통, 공중전화부스 등 시작은 미미하더라도 나중에 갠트리 크레인이나 방적공장, 양곡부두의 사일로, 오래된 철도역 등 더 큰 것들을 활용할 수 있어 야 할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친다. 메아리 도서관을 더욱 애정을 가지고 가꾸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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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진보다

청년, 다시 정치를 기다린다 2030 플레이포럼을 소개합니다 유검우 홍보부장, 서울 동작당협 당원

8월이 끝나갈 무렵이었던가, 여름 동안 한창 함께 당의 온라인 전략을 구상하던 불멸의 진보돌이, 박철균 경기도당 홍보국장(당시 성남용인 사무국장)이 경기권 청년당원 모임이 있 으니 꼭 나오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속으로 ‘ 아, 모두가 집에 갔어도 여전히 청년조직의 맹 아는 여기저기 퍼져 있구나’ 하는 생각에 기뻐하며 그러겠노라 약조를 했다. 그리고 9월 14 일, ‘ 2030 플레이포럼’이라는 이름으로 열린 다큐 상영회 및 강연회에 발을 들였다. 그게, 시작이었다.

지긋지긋한 그놈의 20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의 정치를 말하려면 상당한 뻔뻔함이 필요하다. 왜냐고? 이놈의 사회에선 좌우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이 청년들에게 주는 것 없이 막 굴려먹었기 때문이다. 지난 총선-대선 에서 야권에 맞선 청년기수였던 손수조 새누리당 미래세대위원장조차 바로 며칠 전 “청년 은 당 안에서 교육받고 길러져야 한다, 쓰고 버려지면 안된다”며 토사구팽 당하는 청년들 의 입장을 대변해 일갈했다. 진보정당이라고 다를까? 의원단이 모일 때면 언제나 제일 뒷 줄에 서 있는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을 보고 있자면 절로 쓴웃음이 난다. 이는 청년에게 아무런 기회를 주지 않고 학자금 대출로 빚이나 지우고 비정규직으로 착취하는 이 가혹한 사회의 모습을 정치권에서도 그대로 반영하는 꼴이다. 그럼 우리는 달랐던가? 글쎄, 11년 분당 이후를 보면 분명히 선거에 불러내서 춤이나 추 게하고 술이나 사주면 그만이던 때와는 사뭇 달랐다고 할 수 있다. ‘ 선배’ 활동가들은 청년 들을 불러내 굴리는 게 아니라 아예 손을 놓아버렸다. 당력의 소멸은 당내 재생산 구조의 실종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당내의 청년들은 방향과 동력을 잃은 조각배를 부여잡 청년이 진보다 83


고 자생을 위해 나름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결국엔 그 조각배마저도 빼앗기고 집으로 가게 되었다. 이유 는 다를지 모르지만 우리 당 조차도 ‘ 청년’의 정치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당의 절반을 차지하는 2030 세대가 갑자기 증발해버린 것은 아니다. 청년 활동가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주어진 활동에 주력했고, 청년 생활당원들은 답답한 마음으로 침몰하는 당을 바라보며 또 하루 하루 지치는 생활 전선으로 나가야만 했다. ‘ 청년’이란 세대를 말하는 것이 이제는 지겹기도 하고 죄스러 운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청년들은 삶을 견디며 다시 정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 까?

여의치 않음을 딛고 다시 9월의 그 상영회로 돌아가자면, 그 날 솔직히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 자리에 모인 청년은 나와 주 최자를 포함하여 모두 다섯. ‘ 이게 경기권에서 모을 수 있는 청년들의 숫자란 말인가?’ 상영회에 이어 초 청된 윤현식 정책위의장의 강연은 무척이나 유익하고 재미있었지만, 이런 좋은 자리를 마련해 놓고도 모 이는 사람이 한 손으로 꼽을 만한 정도라는 사실에서 엄청난 자괴감을 느끼게 됐다. 우리 당의 잠재력과 현재 실력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랄까. 한 달 뒤에 열린 후속 강연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색은 하지 않 았지만 심란했다. 분명히 당의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고 당원들도 많이 지쳐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행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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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하는 능력이나 참여자를 조직해 내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실적이 좋지 않다고 해 서 이 움직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작더라도 열의가 존재한다면 그 불씨를 최대한 살려내야겠 다는 모종의 의무감이 생겼다. 나와 박철균 홍보국장은 더 큰 사고를 쳐 보기로 했다. 아예 서울로 장소를 옮겨 가장 유명한 청년 당원을 초청하여 두 사람이 끌어모을 수 있는 최대한 청중을 모으기로. 그렇게 한 윤형 기자 초청 강연회가 기획되었다. 결과는 그럭저럭 적자였다. 강연회 준비 과정 전반이 예상보다 순탄치 않았다. 처음엔 대학 강의실을 빌리고자 했으나 ‘ 정당’의 행사라는 이유로 학생들과 학교의 협조를 얻을 수 없었다. 결국 소정의 임대료 를 내야 하는 서울 여성플라자를 예약하였으나 거기서도 재차 모임의 성격을 확인받아야 했다. 온갖 연락 수단을 동원하여 참여 조직을 하였으나 백여 명에게 연락을 돌려 긍정적 반응을 보인 사람은 서른 명 정 도에 불과했다. 난감했다. 서른 명이 딱 손익 분기점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여의치 않았고 결국 강행할 수 밖에 없었다.

부족함을 인정하되 일희일비하지 말 것! 한윤형 기자는 꽤 오랫동안 스스로의 이야기를 하면서 청년 세대에 대한 담론을 풀어낸 사람이다. 덕 분에 이 사회에서 청년 세대 담론의 유의미성과 한계를 넘나들며 청년의 현실에 대해 퍽 솔직하고 적나라 하게 진단해 주었다. 한국 사회의 굴곡에 따라 세대 간 갈등, 특히 베이비부머 세대와 현재 2030세대의 관 계에 대해 경험의 차이를 들어 흥미롭게 풀어내면서, 선후배들을 엮어내는 그 특유의 위트를 유감없이 발 휘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앞에 놓인 절망적인 사회 상황에 대해 건조하게 묘사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부분이 짠했다. 역량이 부족할 때는 그에 맞는 전략을 구사할 필요도 있다. 한윤형 기자 초청 강연회가 지난 두 번의 상 영회 보다는 많은 사람이 모였지만, 분명히 당초 목표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큰 성과를 내기 위해 활동가 한두 명을 발굴하고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당장 일상을 힘겹 게 이겨내고 있는 청년들에게 컨텐츠를 제공하고 이를 중심으로 고충을 나누고 위로할 수 있는 공간이 필 요한 건 아닐까? 장하나, 김재연의 존재를 통해 기존에 말해오던 청년 정치가 성과를 거두고 있는 건 아니 지 않은가. 우리의 부족한 실력을 인정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낙심한 청년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제공하 는 것을 목표로 2030 플레이포럼은 앞으로도 계속 청년들이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나가려 한다. 때 론 참담할 수도 있고, 혹 때로는 제법 그럴싸한 결과들을 만들어 낼지도 모르겠으나, 중요한 것은 일희일 비하기보다 꾸준히 서로를 격려하고 힘이 되는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일 게다. 앞으로도 많은 부족함이 있 을지 모르겠으나 이 작은 2030 플레이포럼에 모쪼록 많은 당원들의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

지역에서 현장에서 85


무지개기금

스스로 참여하는 부문위원회, 함께 조성하는 무지개기금 부문활동선택제와 무지개기금 시행 나도원 문화예술위원장

우리는 지역과 부문이 함께 성장하고 발전할 때에 비로소 역량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현재 10개의 부문위원회들이 공식 설치되어 활동하고 있는 노동당이 부문활동선택제와 무 지개기금을 시행합니다. 당원들 중 부문위원회 활동에 관심 있는 당원이 노동당 홈페이지 를 통하여 참여를 원하는 부문위원회를 선택하여 회원으로 가입하는 제도가 부문활동선택 제입니다. 무지개기금은 부문의 중요 성과 당의 재정 상황을 함께 고려하 여 부문위원회의 회원들이 자발적으 로 공동사업비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왜? 그리고 어떻게? 부문활동의 중요성이 꾸준히 제기 되어 왔고, 부문위원회의 활동과 역 량이 당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인식이 공유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속된 활 동을 위하여 부문위원회들에게도 재 정이 필요함에도 당의 재정은 풍족하 지 못했고, 책정된 사업비 역시 많지 않은 형편입니다. 각 부문위원회들도 2012년 부문위원회 공동기획한 무지개페스티벌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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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주체의 발굴과 핵심주체의 열의


2012년 말 문화예술위원회가 개최한 좌파예술 시상식 <레드 어워드>(위 왼쪽), 무지개페스티벌 당시 거리행진에 함께 한 청소년위원회 (위 오른쪽), 2013년 3.8 여성의 날 행진 (아래)

그리고 사업비의 부담과 같은 인적· 물적 조건에 따라 역량과 활동성에 편차를 보였습니다. 주체 형성과 안정된 활동을 위해선 당위적 지침과 의지에의 호소를 넘어 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절실했습니다. 사실 제안과 논의는 무려 1년 반 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머리를 맞댄 당원들은 지역의 역량과 자원 을 차출· 차감하는 방식이 아니라 새로이 창출하는 제도를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2012년 5월에 열린 부 문위원회합동회의(현 부문위원회합동운영회의의 전신)에서 부문활동선택제와 무지개기금제에 대한 최초 제 안이 이루어졌고, 이어 6월에 부문위원회합동회의에 참석한 전원이 찬성하는 초안이 만들어졌습니다. 이후에도 부문위원회들의 대표자들과 당직자들이 다양한 논의와 시스템 연구를 계속 진행했습니다. 부문위원회들 사이에 이미 확보한, 혹은 모집 가능한 회원 규모의 편차가 분명함에도 이른바 공동체 정신 을 발휘하여 함께 기금을 조성하고 함께 사용하기로 한 결정이 특별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7일에 제출된 최종안이 각급 단위의 논의를 거쳐 전국위원회에서 채택되었습니다. 2013년 임시당대회가 제정한 당규를 통하여 필요한 제도가 완비되었고, 오랜 시스템 준비 끝에 2013년 말부터 본격 시행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무지개기금 87


궁극적으로 노동당의 역량 강화를 위하여 부문활동선택제를 계기로 부문위원회들은 앞으로 회원들과 함께 열린 마당에서 보다 힘차게 활동하 고자 합니다. 무지개기금을 통하여 부문위원회들은 자발적으로 사업기금의 일부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이 제도가 자리를 잡으면 부문위원회마다 회원 현황과 사업비 규모를 파악할 수 있고, 안정된 조직과 적 정한 사업의 기획이 가능해집니다. 동시에 각 부문조직들은 체계화와 활동성 그리고 투명성이라는 책임 도 함께 져야 할 것입니다. 오래 걸렸습니다. 확정되기까지, 그리고 준비하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습니다. 아마 자리를 잡기까지 또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억합니다. 새로운 활동에 동참하고자 하는 당원들을 위하여, 부문과 지역의 조화로운 역할분담을 위하여, 나아가 정치주체의 발굴과 당의 활성화를 위하여, 궁극적으 로 노동당의 역량강화를 위하여! 이것이 부문활동선택제와 무지개기금의 출발점이자 목적지입니다.

Q&A

Q. 모든 당원이 부문위원회를 선택해야 하나요? A. 의무가 아니라 선택입니다. 관심과 책임을 함께 나눌 당원들을 위한 제 도입니다.

Q. 여러 개의 위원회를 동시에 선택해도 되나요? A. 현재 시스템으로 복수선택은 불가합니다. 다른 경로로 중복회원이 될 수 도 있겠지만 원칙상 당원의 권리는 1개의 위원회에서만 행사할 수 있습 니다. 여러 위원회들이 위원장, 전국위원· 대의원을 선거로 선출하고, 총회를 열어 주요안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거· 의결권 행사 의 중복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Q. 무지개기금을 얼마씩 내면 좋을까요? A. 납부액은 자유롭게 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관리비용 등을 고려해주시 면 좋겠습니다. 일단 5,000원 이상을 권장하기로 했습니다.

Q. 무지개기금은 어떻게 관리합니까? A. 새로운 당규에 의하여 비정규정치사업기금과 무지개사업기금을 함께 책임지는 기금운영위원회가 설치됩니다. 기금운영위원회가 무지개기 금을 정해진 원칙과 절차에 따라 투명하게 심의하고 배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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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진보정당


먼 좌파 이웃 좌파 ⑥

미국에도 좌파정당이 있냐고?(1) 장석준 부대표

지난 11월 15일 미국의 한 도시에서 벌어진 시의회 선거가 전 세계 외신 주요 기사로 떠 올랐다. 아무리 세계 최강국이라는 미국이지만 이 나라의 지방의회 선거까지 나라 밖의 이 목을 끈다는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이런 예외적 관심의 이유는 당선자가 ‘ 사회주의자’ 라는 데 있었다. 그것도 트로츠키주의 계열의 혁명적 사회주의자였다. 당선자의 이름은 크샤마 사완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인도 출신 이주민이고, 여성이 다. 사완트가 속한 정당은 ‘ 사회주의 대안’이라는 이름의 트로츠키주의 정파다. 과거 영국 노동당에서 <밀리턴트>(‘ 투사’ )라는 신문을 발간하며 활동하다 이후 탈당해 독자정당인 사 회주의당(SP)을 창당한 트로츠키주의 경향(한국의 ‘ 다함께’ 와 연결되어 있는 사회주의노동자당 [SWP] 혹은 ‘ 국제사회주의[IS]’ 경향과는 다르다)을 따르는 정치조직이다. 아무튼 이 ‘ 사회주의

대안’의 후보인 사완트가 북서부 해안의 주요 도시 시애틀의 시의원에 당선됐다. 독일 출신 사회주의자 A. W. 파이퍼가 1877년에 시의원에 당선된 이래 이 도시에서는 140여 년만에 처음으로 사회주의자가 시의회에 진출한 것이다.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에서도 작은 급진좌파 조직에 속한 후보가 선거에 당선되기는 쉽 지 않은 일인데, 다름 아닌 미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보는 눈에 따라서는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미국 사회의 저류가 변화하는 조짐이라 할 수도 있는 사건이다. 그래서 국제적인 관심사가 된 것이다. 물론 사

사완트의 당선을 계기로 한 가지 분명히 확인된 것은 있다. 미국에는 아예 싹조차

완트의 당선이 정말 이 나라 의 심원한 변화를 예고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 해프닝에

없을 것처럼 생각되던 좌파 정치가 나름대

불과한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로 분투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봐야 알 일이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한 가지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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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시의원에 당선된 사회주의자 크샤마 사 완트(오른쪽), 크샤마 스와트가 속한 정치조직 사회주의대안의 신문(왼쪽)

확인된 것은 미국에는 아예 싹조차 없을 것처럼 생각되던 좌파 정치가 나름대로 분투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참에 그간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던 미국 내의 여러 좌파 정치세력화 흐름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는가?” 한때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기도 했던 독일 사회과학자 베르너 좀바르트는 1906년에 “왜 미국에는 사 회주의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제목을 단 유명한 논문을 발표했다. 좀바르트가 던진 질문은 이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과학의 중요한 쟁점이다. 단순히 학자들의 소일거리만은 아니다. 이것은 인 류 전체의 운명과 직결된 근본 문제다. 미국 안에 강력한 대중적 사회주의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 는 단순한 사실이야말로 지구 자본주의의 수명이 지속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다. 적어도, 지 구 자본주의가 지난 수십 년간 신자유주의라는 노골적인 반동적 형태를 취할 수 있게 한 최대의 원인 중 하나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좀바르트가 위의 물음을 던질 무렵이 실은 미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가장 활발 히 벌어지던 시기였다는 점이다.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운동을 자랑하던 좀바르트 의 조국 독일에 견준다면 미국에 “사회주의가 없다”고 해도 ‘ 틀린’ 말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 의 맥락만 놓고 보면 상당히 편향되거나 야박한 평가였다. 바로 이 시기에 미국 곳곳에서 사회당이 공화 먼 좌파 이웃 좌파 91


당-민주당 양당 구도에 맞선 도전자로서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미국 사회당(SPA)은 1901년에 창당했다. 영국 노동당이 등장한 게 비슷한 시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 게 늦은 출발은 아니었다. 사회당은 절정기에 10만 당원을 확보했다. 유럽 각국에서 이주해온 노동자들을 위해 다양한 언어로 발간한 당 신문들은 그 독자 수가 100만 명에 이르렀다. 전국적으로 사회당 소속 시장 만 70여명이었다. 당 조직이 가장 강력했던 오클라호마 주에는 100명 이상의 사회당 소속 공직자들이 있 었다. 철도노동조합운동의 전설적 지도자 유진 뎁스는 1912년에 사회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89만7천 표 (6%)를 획득했다. ‘ 사회주의’를 내걸고 제3세력으로 우뚝 섰던 것이다. 1910년대에는 드디어 뉴욕과 밀워 키에서 연방하원의원을 당선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왕성했던 이 움직임이 어느 때부터인가 마치 사상누각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첫 번째 발단은 이른바 ‘ 빨갱이 탄압’이었다. 1913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주당 정부가 ‘ 개혁’을 내걸고 출범 했다. 어찌 보면 사회당 같은 세력이 성장하던 시대 배경을 발판 삼아 등장한 정권이었다. 그러나 다름

◀풀먼 철도 파업 지도자였으며 사회당을 이끌었던 유진 뎁스. ▼1904년 미국 대통령선거에 사회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유진 뎁스와 부 통령 후보 벤 핸포드의 선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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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산별노조운동의 분수령이 된 1936~37년 플린트의 GM 점거파업

아닌 이 윌슨 정부가 좌파 세력의 성장을 꺾는 첫 번째 장애물 역할을 했다. 당시 1차 세계대전 참전을 추 진하던 미국 정부에게는 반전 운동에 앞장선 사회당과 전투적 노동운동 세력이 눈엣가시였다. 정부는 이 때부터 간첩 행위 방지 등의 갖은 명분을 내세워 좌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대통령 후보였던 뎁스조차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반복된 이러한 좌파 탄압 말고 또 다른 중대한 장애물은 노동운동의 정치적 선택 이었다. 19세기 말 이후 미국 노동운동 주류(미국노동총동맹, AFL)는 항상 백인 숙련 노동자들만을 대변했 다. 정치적으로는 보수정당 중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민주당을 지지했다. 이 때문에 미국 사회당은 노동운 동의 조직적 지지를 바탕으로 급성장한 유럽의 좌파 정당과는 다른 운명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었던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 내부의 분열을 극복하려는 진 지한 시도들이 간헐적으로 나타났고, 그 중에는 거의 성공의 문턱에 이르렀던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노동운동 내의 보수적 흐름이 역사의 새로운 가능성을 억압하고 나섰다. 가령 대공황과 실업대란으로 시작된 1930년대는 기존 노동운동 판을 뒤집을 결정적 호기였다. 이때 새 로 등장한 산업별 노동조합들(산별조직회의 [CIO]라는 새로운 총연맹으로 뭉쳤다)은 다양한 인종의 반(半)숙련, 미숙련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도 독자적인 노동자정당 창당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사회당이나 공산당 활동가들이 산별 노조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한 덕분이기도 했다. 먼 좌파 이웃 좌파 93


그러나 모처럼의 기회는 오히려 최악의 위기로 돌변했다. CIO 내의 독자 정치세력화 흐름은 뉴딜을 추 진하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민주당 정부를 지지하자는 흐름에 압도되고 말았다. 게다가 CIO 우 파는 1950년대에 결국 AFL 노선에 다시 투항하고 말았다. 두 조직이 재통합해 현재의 미국 제1노총 AFLCIO가 등장했다. 이런 노동운동의 우경적 재편과 2차 대전 후의 반공 매카시즘 열풍이 서로 맞물려 미국 좌파는 또 한 번 도약의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미국 노동조합운동은 이후 줄곧 민주당의 하위 파트너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잘 정리한 책이 마이크 데이비스의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 미국 노동계급사 의 정치경제학』 (김영희, 한기욱 옮김, 창비, 1994)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책은 요즘 서점에서 구하기 힘들다. 대신 참고할만한 책은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 1, 2(유강은 옮김, 이후, 2008)다. 이 책은 1권의 뒷부분과 2 권의 앞부분에서 미국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의 우여곡절을 다루고 있다.

주(州) 차원의 진보 정당들 - 뉴욕 노동가족당의 사례 한데 좌파정당의 성장을 가로막는 또 다른 중대한 요인이 있다. 정치 제도다. 미국은 시의회부터 주 상 하원, 연방 상하원에 이르기까지 각급 대의기구 선거가 다 소선거구제로 실시된다. 우리도 잘 아는 사실 이지만,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지역사회에 뿌리내려온 양대 정당, 공화당과 민주당을 제치고 제3세력이 지 역구 1위 당선자를 배출하기란 너 무도 어려운 일이다.

전국 정치 수준에서는 좌파의 정치적 존재를 찾아

게다가 이것만이 아니다. 18세

보기 힘들지만 각 주(州)를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

기 엘리트주의의 전통을 고스란히

만도 않다. 예를 들어 노동가족당은 뉴욕 주에서

잇고 있는 연방 정치는 신생 정치

중요한 정치적 변수 역할을 한다.

세력에게는 발을 내딛기조차 힘든 늪이나 마찬가지다. 가장 중요한 선거가 대통령 선거인데, 이것은

직선도 아니고 1인 1표제도 아니다! 주에서 1위를 한 정당이 그 주의 대통령 선거인단을 다 차지하고 이 선 거인단이 전국적으로 모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요상한 방식이다. 공화당과 민주당이라는 두 선거 기계 말 고 새로운 세력이 의미 있는 성과를 얻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20세기 초의 사회당이나 2차 대전 직 후의 진보당처럼 가장 의욕에 넘쳤던 좌파 정당 건설 시도도 결국은 대선에서 현실의 벽을 절감한 후에는 성장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전국 정치 수준에서는 좌파의 정치적 존재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각 주(州)를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특정 주 안에서만 활동하는 좌파 정당들이 있다. 이들 중 일부는 해당 주 에서 중요한 정치적 변수 역할을 하기도 한다. 94


노동가족당의 주하원의원 후보 셰미아 페이건의 포스터(작은 박스 안은 노동가족당 로고)

예를 들어, 뉴욕 주에는 노동가족당(Working Families Party, WFP, 여기에서 ‘ 노동 가족’ 은 우리 말 ‘ 서민’ 과 비슷 한 어감이라 할 수 있다)이 있다. 1998년에 뉴욕 주의 노동조합, 지역 시민운동 단체, 좌파 정당 건설을 벌여

오던 활동가들이 함께 모여 만든 정당이다. 노동권 보장과 사회복지 확대를 주로 주장하면서 서비스노동 자국제조합(SEIU) 뉴욕 지부 등 노동조합운동과 긴밀히 연대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유독 뉴욕 주에서 이런 주 차원의 좌파 정당이 활동력을 갖게 된 것은 이 주의 독특한 정치 제도 때문이 다. 뉴욕 주는 공직 후보가 여러 정당들로부터 중복 공천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즉, 민주당과 노동가족당으로부터 동시에 공천을 받고 출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가족당은 독자정당으로 존재하면서도 자당 후보가 민주당으로부터도 공천을 받아 공화당 후보와 1 대 1로 겨루게 만들 수 있다. 때로는 민주당을 압박하기 위해 노동가족당이 공화당 후보를 자당 후보로 공천하는 일까지 있다고 한 다. 우리에게는 참으로 낯선 정치 행태이지만, 이런 제도적 가능성 덕분에 그나마 뉴욕 주에서 제3정당이 현실 정치 세력으로 존립할 수 있다. 좌파 정치 세력화의 성패에 제도 요인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실감 하게 만드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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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파 통신

독일 공산당(KPD) 금지, 한국의 ‘ 지나간 미래’ 인가 최동민 유럽 당원, 독일 거주

얼마 전 정홍원 국무총리가 국무회의에서 통합진보당의 해산여부를 헌법재판소에 심 사할 것을 요청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의아하던 와중에 ‘ 1956년의 독일공산당 해산과정을 참고했다’는 정 총리의 주장이 눈에 띈다. 필자는 곧장 아데나워 시대의 공산당 해산과정에 대한 연구에 들어갔다. 이 글에서는 아데나워 정권에서 진행된 “공산당 금지KPD-Verbot” 심판과정과 그 후속조치를 살펴보고, 이 ‘ 지나간 미래’를 통해 현 재 제기된 통진당 해산청구의 결과와 그 여파를 전망해보고자 한다.

냉전 시대의 서독 공산당, 전방위적으로 탄압 당해 공산당은 1919년 창당 이래 총 두 번의 해산을 경험했다. 첫 번째는 나치가 정권을 잡은 1933년 대통령령에 의해 반(半)불법적으로 강제해산 된 것이고, 두 번째는 1956년 아데나워 정부가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통해 해산시킨 것이다. 정홍원 총리가 ‘ 선진국’의 사례로 참 고했다는 게 바로 그 두 번째 해산이다. 서독 공산당은 1949년 첫 총선에서 5.7%의 지지율 을 기록하며 15석의 의석을 차지했다. 출발은 순조로웠지만, 이내 어렵고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독일 분단과 함께 냉전체제가 공고해지면서 유권자들에게 공산당 은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존재가 됐을 뿐만 아니라, 집권당인 기민/기사당이 노골적인 반 공주의 정책으로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다. 독일이 과거사 청산에 성공했다고 는 하나 이는 60년대 후반에야 시작됐고, 50년대에는 여전히 나치들이 곳곳에서 판치고 있 었다. 수상이 된 아데나워는 전직 나치당원은 아니었지만 보수적, 종교적, 권위주의적 성 격의 정치인으로서 공산주의를 증오했다. 자연스럽게도 아데나워는 1949년 총리 집권과 동시에 강력한 반공정책을 펼치며 공산당 금지를 위한 작업에 들어간다. 1951년 독일의 재무장 반대시위에서 공산당은 엄청난 조직력과 동원 능력을 선보이면 96


서 냉전체제를 강화하려던 아데나워 정부에 상당한 정치적 타격을 입힌다. 이에 정부는 서독의 재무장을 막는 시 위가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과 그 청 년조직인 동독자유독일청년회(FDJ)와 연계됐다는 사유로 37명의 관련자를 내란죄 등으로 형사 처벌한다. 연이어 아데나워 정부는 1951년에 공산당에 대한 금지를 신설된 헌법재판소에 청 구한다. 공산당만 금지하는 것이 영 꺼림칙했던지 이 과정에서 덤으로 네 오나치당인 사회주의제국당(SRP)에 대 한 금지도 청구된다. 금지를 청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주의제국당 은 이듬해에 금지· 해산되지만, 공산 당에 대한 금지 청구는 헌법재판소에 계류된다. 자민당(FDP) 소속으로 공산 당 금지에 완강히 반대했던 자유주의

1953년 기민당(CDU) 선거 팜플렛. “맑스주의의 모든 길은 모스크바로 향 한다. 그래서 기민당!”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적 성향의 초대 헌법재판소장 헤르만 회프케-아쉬호프가 정부의 노골적인 압박에도 불구하고 심사와 판결을 계속 미루었기 때문이었다.

당사 압수수색, 헌법재판소 청구, … 낯설지 않은 풍경 공산당 금지 심판의 진행이 지지부진하자 아데나워정부는 여러 가지 행정력을 동원해 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이어갔다. 공산당 당사에 대한 주기적인 압수수색은 물론이고, 국회법 개정을 통해 교섭단체 구성 인수를 조정함으로써 공산당의 교섭단체 구성권과 법률 제정권을 박탈시킨다. 이로써 공산당은 사실상 식 물정당으로 전락했고, 이듬해인 1953년에는 집권당의 열광적인 반공주의 캠페인 하에 진행된 총선거에서 2.5%의 득표율로 연방의회에서 배제된다. 그러나 ‘ 언제든지 공산당이 공격해 올 수 있다’고 두려워했다던 아데나워는 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지 않았다. 1954년 1월에 헌법재판소장인 회프케-아쉬호프가 사 망하고 그의 후임으로 집권당 소속 요제프 빈트리히가 취임하자 정부는 재차 공산당 금지를 청구했고, 헌 법재판소에 직접적인 압박을 가했다. 보수적 인사인 빈트리히는 공산당 금지에 대한 1차 심사를 1954년 11 구라파통신 97


월 23일에 시작하여 2차 심사를 거친 후, 최종적으로 1956년 8월 17일 공산당 금지를 선고한다. 공산당이 금지되자 경찰은 즉각 공산당 당사를 폐쇄하고 공산당 금지에 반대하는 모든 시위를 불허했 다. 또한 전국의 공산당 사무실과 관련시설을 압수수색하고 공산당 출판사와 사무실 등 모든 자산을 몰수 했으며, 33명의 당 간부가 체포됐다. 공산당 금지조치는 단순히 향후 공산당의 활동을 중지시키는 데 그 치지 않았다. 수사당국은 모든 연방의회 의원과 지방의회의원들의 면책특권을 중지시키고 구속했으며, 공산당 관련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수사를 진행했다. 아데나워 정부의 전방위적 공산당 관련자 색출 및 처 벌과정에서 최소 125,000명에서 최대 200,000명이 기소되어 최소 7,000명에서 최대 10,000명에 이르는 관 련자들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종전 직후 서독지역 공산당원 수가 130,000명이고 해산 직전에 당원 수가 85,000명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당원뿐만 아니라 비당원들까지 무차별적으로 기소됐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황당하기까지 한 당시의 참상은 공산당 해산 50주년 기념 다큐필름 <국가가 빨갱이를 보 았을 때(Als der Staat rot sah)>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공산당 금지 이후 진행된 무차별적 수사과정 에서 당원들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수사 및 감시의 대상이 됐고, 이러한 사실은 관련자들의 직장에 통보되어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또한 나치에 의해 수년 간 탄압 받고 투옥됐던 공산당원들은 아데나워 정부에서 컴백한 나치판사들에 의해 다시금 유죄판결을 받고 처벌 받았으며, 나 치정권에게 저항하다 처벌받은 경력이 있는 경우에는 ‘ 가중처벌’ 을 받았다고 한다. 공산당 금지에 관련 하여 유죄판결을 받은 일만 여명의 시민들은 지금까지 복권되지 못했으며, 연금조차 수령하지 못하고 있 다.

그리고 한국-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와 그 미래 ‘ 선진국’ 독일의 공산당 금지와 그 후속조치들이 어떠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통진당을 금지하고자 하는 박근혜 정부가 이번 금지조치를 통해 어떠한 정치적 행위를 꾀하고 있을지 예측해 볼 수 있을 것 같 다. 정부가 단순히 헌법재판소를 통한 정당금지라는 형식만을 연구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에 연속적으로 진행된 전교조, 공무원노조 등에 대한 조직적인 탄압은 통진당 금지가 ‘ 종북세력’ 을 일망 타진할 종합적 기획 속에서 함께 움직이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저버릴 수 없게 한다. 그렇다면 헌법재판소를 통한 통진당 해산의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이는 공산당 해산 과정에서 독일 헌법재판소가 근거로 제시한 것과 현재 정부가 발표한 통진당 해산의 근거를 비교해보면 얼마간 명징해 질 것 같다. 독일헌재가 공산당을 금지시킨 근거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폭력적인 맑스-레닌주의에 입 각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국가 건설이라는 정당의 목표가 서독 헌법이 규정한 ‘ 자유민주주의사회’의 원 칙에 위배된다는 것, 둘째 이러한 사회의 건설이 필연적으로 헌법기관을 도구화하고 폭력을 동원할 것이 라는 점, 셋째로 정당의 전체조직이 반(反)정부적이라는 점. 여기서 반(反)정부적인 요소의 하나로 “국가 재통일 프로그램”이라는 공산당 통일정책과 “아데나워 정권의 혁명적 전복”이라는 공산당의 공식 투쟁 98


구호가 적시됐는데, 정 부는 이를 ‘ 정부 전복’ 을 위한 책동으로 보고 관련자들을 ‘ 내란죄’로 수사했다. 이쯤 살펴보 아도 어디서 많이 본 그 림이다. 한국 정부는 통진당 의 “진보적 민주주의” 가 김일성 사상이며, “일하는 사람이 주인 된 세상”이라는 통진당 의 목표가 국민주권주 의에 위배된다고 지적

1956년 당시 주간지 <Spiegel>에 실린 삽화. 공산당이 지하에서 아데나워 정권의 밑둥을 갉아 먹는다는 메시지가 담겼다.

했다. 이는 독일헌재가 독일 공산당을 금지한 첫 번째 사유인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사회 건설”에 조응한다. 그러나 공산당과 같 은 직접적인 목표에 대한 언급이 없으니 정부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원론적인 얘기기 때문이 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요건인 “폭력성”과 “조직성, 체계성”은 RO그룹의 내란음모 사건과 연결될 것으로 보인다. 대놓고 동독 공산당과 잦은 회합을 가졌고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선전을 통해 “아데나워 정권의 혁명적 전복”을 외쳤던 공산당과 통진당을 직접 비교하긴 어려워 보인다. 일단 RO그룹과 통진당 간의 체 계적 연관관계를 입증해야 하는데, 이것은 불가능해 보이며 통진당이 폭력적 수단을 통한 국가전복을 꾀 한다는 증거도 없다. 이쯤 되면 정부가 ‘ 선진국’ 독일의 사례를 본받아 크게 세 가지 요소를 해산의 근거 로 삼으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케 한다. 덤으로 심사과정 중에 ‘ 내란죄’ 양념을 뿌려주는 막장드라마같은 스토리라인도 유사하다. 만약 통진당 해산안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통과된다면, 선진국의 사례에서처럼 통진당 당사와 자산이 몰수되고, 의원들의 면책 특권이 중지되어 일괄 구속되며, 수만에서 수십만에 이르는 통진당 및 진보진영 관련자들이 ‘ 종북 세력 척결’이라는 구호 아래 수사를 받아 수천 명이 유죄 판결을 받는 일이 일어날까? 1956년의 독일은 2013년 한국의 “지나간 미래”가 되는 것일까? 시대도 다르고 법률체계도 다른 두 국가의 사례를 일대일로 비교하며 섣부른 예단을 하는 것은 물론 금물이다. 하지만 ‘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 을 보여주는 시대이기에 불안감이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는다. 통진당에 대한 정치적 호불호를 넘어 이번 통 진당 해산 청구를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구라파통신 99


숨은 문화예술 당원 찾기

국회에서 노래하고 홍대에서 음악인노조 만들다 정문식 “시간을 들여야 나올 수 있는 음악이 있다” 인터뷰· 정리 · 사진 : 나도원 문화예술위원장

뮤지션유니온 위원장 정문식과 열차를 타고 전광판의 빨간 글자들이 철도 노조가 파업에 돌입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어디에선가 와서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서울역 대합실을 가로지른 두 남자는 부산으로 향 하는 KTX 열차에 올랐다. 부산에 거점을 둔 대안문화행동 ‘ 재미난 복수’가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열차의 출발과 함께 인터뷰도 시작되었다. 민주통합당 최민희 의원, 예술인소셜유니온, 뮤지션유니온, 자립음악생산조합이 ‘ 저작권법 일부개정 100


법률안’ 발의를 알리는 공동기자회견을 할 때였다. 색다른 기자회견을 위해 음악인인 정문식에게 노래를 부탁했다. 그는 국회 정론관에서 기타 하나 달랑 들고 자신의 곡 <작은 방>을 부르기 시작했다. 예기치 못 한 광경이 펼쳐지자 기자들은 카메라를 들고 몰려나왔고, 당황한 국회 직원은 마이크를 꺼버렸으며, 기자 회견을 준비한 의원 보좌관은 달려 가 항의했다. 이 신선한 소동이 빚 어지는 와중에도 정문식은 표정 하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중, 기타 하나

나 바꾸지 않고 끝까지 노래했다.

달랑 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마이크가 꺼

정문식은 두 장의 음반을 발표한 프로 뮤지션이다. 노동당 문화예술

지고 항의가 빗발치는 와중에도 정문식은 표정 하 나 바꾸지 않고 끝까지 노래했다.

위원회 운영위원이며, 2013년 9월 8 일에 창립총회를 연 뮤지션유니온 의 위원장도 맡고 있다. 2011년에 월드DJ페스티벌 주최 측이 인디음악인들을 형편없이 대우하려는 사실 이 알려져 공분을 자아낸 일이 있다. 이때에 인디음악인들이 집단 반발했고, 이를 계기로 2년에 걸쳐 홍대 일대에서 음악인들에 의한 음악축제인 유데이페스티벌이 열렸다. 이 활동에서 출발한 뮤지션유니온은 음악인이 사회경제적으로 정당한 지위를 획득하고, 음악과 음악가의 사회적 가치와 권익이 보장될 수 있 도록 활동하는 단체이다. 음악인의 노동자성을 강조하는 노동조합으로 법과 제도의 개선과 상호부조 시 스템을 마련해 갈 계획이다. 이 활동을 주도한 음악인이 정문식이다.

보수의 성지에서 자란 소년, 음악의 길로 어쩌다보니 본업보다 이러저러한 외부활동으로 바빠진 문화예술인들 중 한 사람이 된 정문식, 그리고 역시 마찬가지 처지가 된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열차는 수도권을 벗어나, 그가 스물아홉 살까지 살았던 도시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먹을거리가 부족하면 세상을 오해하기 마련이다. 바나나 하나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먹던 시절, TV 코미디 프로에선 이런 설정을 자주 써먹었다. 누가 바나나를 먹고 껍질을 아무렇게나 휙 던져 놓는다. 다 른 출연자가 나오다가 그것에 미끄러져 발라당 넘어진다. 어린 나는 코미디언들이 바나나 공짜로 먹으려 고 저거 또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땠을지 궁금했다. 대구 태평로에서 태어나 대명동에서 산 꼬마 정문식은 아버지의 사업이 크게 번창하자 가족과 함께 수 성구에 있는 새 아파트로 이사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닐 무렵에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면서 달 서구로 이사해 그곳에서 자랐다. 그의 기억 속에는 비포장도로가 있고 골목이 많은 동네가 자리하고 있 다. ‘ 아주 어릴 때엔 집안이 흥했는데 어느 날 사업이 망해서…’라니, 참 많이 듣던 이야기다. 말 잘 듣고 노래와 운동을 좋아하는 평범한 중학생 문식 군이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싶어진 시기는 고 삶과 문화 101


등학생이 되면서이다. 이내 자주 공상에 빠지는 학생이 되었고, 석차를 표시하는 숫자가 7배로 불어났다. 간혹 학생들에게 강의할 일이 있으면 ‘ 공상의 힘’을 강조하는데, 정문식의 경우에는 석차급락이 일차적 인 효과로 발생한 셈이다. 하지만 ‘ MBC대학가요제’ 의 영향으로 대학에 진학하기로 마음먹고 삭발까지 하며 석차를 끌어올렸다. 대학가요제 때 문에 진학했다는 이야기, 역시 몇 번 들

‘ MBC대학가요제’ 영향으로 대학에 가기로

어본 이야기다.

마음먹은 뒤 삭발투혼으로 공부했다. 학생회

그가 다닌 고등학교의 분위기는 무척

장 선거에서는 ‘ 두발자유화’ 를 공약으로 내걸

강압적이었다. 노태우 정권기였던 고등

고 출마해 당선됐다.

학교 3학년 때에 학생회장 직선제가 시 행되고 출마자격(성적 요건)이 완화되자 주변에 있는 ‘ 저항세력’들이 반골기질

을 지닌 정문식을 꼬드겼다. 성적을 위하여 삭발투혼을 불살랐던 정문식이 ‘ 두발자유화’를 공약으로 내 걸고 출마해 당선됐다니, 이런 묘한 이야기는 처음이다. “그런데 공약을 이행할 수 없겠더라고. 좌절했지. 대신 음악을 시작했어. 어두컴컴한 아편굴 같은 합주 실에서 친구와 밴드 연습을 시작했어.” 이렇게 태동한 밴드 ‘ 하얀 날개’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 때에 첫 공연을 감행했다. 공연 중 에 흥분한 정문식은 록 정신을 발휘하여 무대에서 뛰어내렸다. 해외 공연영상과 달리 맨 바닥에 떨어지면 서 공연이 중단되었지만, 부상투혼을 발휘하여 본 조비(Bon Jovi)의 <I'll Be There For You>를 마지막까지 불 렀다. 그런데 공연을 마치고 병원에 가보니 이런 진단이 나왔다. 전치 12주! 경북지역의 유명 대학교에 진학했지만, 대구를 벗어나 서울로 갈 생각으로 재수를 했음에도 낙방한 정 문식은 별다른 기대 없이 복학하여 경제학과를 다녔다. 그런데 그 학교가 한강이남 PD의 본산이었던지라 정치경제학을 정규교과로 배울 수 있었고, ‘ 과’ 분위기의 영향으로 소위 학습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의 길은 다른 방향으로 나있었다. “학교 선배들을 만나보니 다들 정해진 코스대로 살고 있는 것 같았어.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더라고. 고민했지. 무엇을 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결국 음악이었지.” 1995년부터 준비해 1996년부터 활동한 밴드 ‘ 마키 브라운’은 1999년에 흩어지기 전까지 대구에서 잘 나가는 로컬밴드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록 밴드 ‘ 시나위’가 대구에서 공연할 때에 오프닝 공연을 맡았으 며, 서울 홍대 앞의 유명 라이브클럽들에서 음악마니아들을 상대로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더라 - 홍대 입성, 그리고 진보신당 입당 서울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있던 친구의 권유로 무작정 상경하여 작곡과 편곡을 공부할 때만 해도 다시 102


록 밴드를 할 생각은 없었다. 밴드의 경험이 있는 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 잘 안다. 간혹 상처 까지 남긴다는 것도. 그의 롤 모델은 록음악인 대신 주영훈처럼 성공한 가요작곡가였다. 이후 다양한 음 악작업을 했지만 어딘지 허전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컴퓨터로 찍어서 만드는 음악이 아니라 아날로그가 그리웠고, 결국 밴드 ‘ 더 문(The Mu:n)’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2003년부터 최근까지 장기간 활동한 ‘ 더 문’ 은 당시 유행과는 동떨어진 스타일을 고수했다. 근래 음악 계의 동향을 보면 오히려 시대를 앞선 노선이랄 수 있다. 2005년에 미니앨범 《Launchin’ To The Moon》을 발표했고, 2006년에는 정규앨범 《The Big Step On The Moon》을 내놓았다. 음악회사와 계약을 맺고, 해외 공연을 다녀왔으며, 2007 한국대중음악상에선 정규앨범이 ‘ 최우수 록 음반’ 부문 후보로, <Sail Away>가 ‘ 최우수 록 노래’ 부문 후보로 올랐다. 또한 음악인들에게 특별한 EBS ‘ 스페이스 공감’에도 출연했다. 방 송출연 이후 ‘ 더 문’에게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각종 방송에 출연해달라는 연락이 잦아지고 음반판매고가 수직상승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음악으로 살아가는 단계에 끝이 없으며 예술의 길은 역시 힘들다는 사실을 절감 해야 했다. 잠시 이야기를 쉬고 있을 때

장기간 투쟁한 KTX여승무원들의 이야기를 노래로

에 남성 승무원이 음식물이 담긴

만든 바 있는 정문식은 그간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

카트를 밀며 우리 곁을 지나고

들에 대한 생각들을 노랫말에 투영시켜왔다.

있었다. 우리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남쪽지방의 풍경을 바라 보았다. 장기간 투쟁한 KTX 여승무원 들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든 바 있는 정문식은 그간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생각들을 노 랫말에 투영시켜 왔다. 비정규직 노동에 대한 <다른 세상>도 그러 한 곡이고, 상암 홈에버 투쟁 지 지공연에도 나섰다. 그 역시 이 명박 정권 출범 직후에 일어난 ‘ 촛불시위’를 관심 있게 지켜보 았다. 하지만, 역시 아무것도 달 라진 것이 없었다. 개인적으로도 힘든 시기여서 무릎이 악화되어

정문식이 리더로 활동한 더 문의 정규앨범 [The Big Step On The Moon]

삶과 문화 103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대구역에 잠시 내렸다. 하지만 이곳이 대구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조그만 팻말뿐이다.

세 번째 수술을 받았고, 불면과 무기력 그리고 우울증에 빠졌다. 몸무게가 3개월 동안 7킬로그램이나 줄 어들 정도였다. 고민은 깊어만 갔다. 다른 음악인들과 대화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마포FM에서 프로그램을 맡아 진행하면서 다양한 사람들 을 만나게 되었고, 민주노동당 분당사태를 바라보며 역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민주노동당 주요 당원이 입당을 권유했을 때에 자신은 진보신당 지지자라고 밝히게 된 정문식은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 고 진보신당에 입당했다. 망원역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선거운동까지 했다. 오래 전에 인터넷으로 성격 테스트를 한 적 있는데 결과는 “논리적이고, 거짓을 싫어하고, 창조적인 것을 좋아하며, 무슨 척을 싫어하 는 성격”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자신은 지금 노동당 당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당원이 되고서 속상한 일도 많았다. “내부의 노선투쟁을 밖에서 어떻게 바라볼까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물론 진보정치 전체에게 하고 싶 은 말이지. 그리고 말만 잘하지 말자는 말을 일부 당원들에게도 하고 싶네.” 이렇게 할 말은 하는 정문식이지만 정작 고향에선 그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명절이나 집안모임에 서 정치 소신을 펼쳤다간 큰일 날 것이 뻔하다. 오래 전에 충격을 받은 적도 있다. 1997년 대통령 선거일이 할머니 발인이었고, 장지를 다녀오니 TV는 김대중 당선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집안 어르신들은 모두 진 심으로(!) ‘ 나라가 망했다’고 한탄했다. “거의 집단패닉이었어. 종교적인 뭔가가 느껴져서 쇼킹했어. 집안 어른들은 내가 노동당 당원이란 사 실을 몰라. 물론, 노동당이 뭐하는 데인지도 모르겠지만.” 104


동료와 함께, 동네와 함께 열차가 대구역에 정차하자 잠시 내려 기념사진을 찍기로 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이곳이 대구라 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조그마한 팻말뿐이었다. 사실 한국에서 새로 지어진 거의 모든 역사들은 이처럼 한결같다. 속도의 시대에 지역의 개성과 역사(歷史)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홍대 지역의 문화예술 생태계를 중시하는 정문식은 서교예술실험센터의 공동운영단에 참여하고 있 다. 현장에서 활동해 온 문화예술인들로 구성된 공동운영단은 홍대 지역의 공동체 문화 형성이라는 지향 을 공유한다. 최근에 서울시가 이 공간을 마포구에 조기 반환하려고 하여 운영주체와 공간성격이 갑자기 달라질 위기에 처했다. 공동대응에 나서 조기 반환을 1년 유예시켰지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 다. 홍대 음악인들이 자발적으로 기획하여 개최하는 잔다리페스티벌에도 관(官)의 지원은 사소한 행정편 의를 제공하는 정도이다. 정문식은 이러한 문화행정에 대하여 할 말이 많다. “문화행정은 과실을 따먹으려고만 해. 홍대 지역의 문화예술 생태계의 가치에 대한 인식은 없고 ‘ 관 광’에만 관심을 두는 것 같아. 관심도 없고 지원도 없고 예산도 없어. 3무(無)정책인가?”

그래도 그는 음악인이다. 2011년 내내 ‘ 더 문’의 새 앨범을 녹음했으나 기타리스트의 갑작스러운 탈퇴 로 앨범발매가 무산되어 버린 이후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음반도 녹음하여 발표할 생 각이다. “음악은 몸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훈련을 중시해. 그냥 아이디어로 승부하고 싶진 않거 든. 시간을 들여야 나올 수 있는 음 악이 있잖아.” 좋은 음악이 시간을 들여야 나올 수 있는 것처럼 좋은 좌파정당도 마 찬가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동 안 열차가 부산역에 도착했다. 함께

“음악은 몸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훈련을 중시해. 그냥 아이디어로 승부하고 싶진 않거든. 시간을 들여야 나올 수 있는 음악이 있잖 아.”

부산한 부산 도심을 뚫고 ‘ 인디스 페이스 아지트갤러리’로 향했다. 이날 세미나에 토론자, 사회자로 나선 사람들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 뮤 지션유니온 위원장 정문식, 예술인소셜유니온 공동위원장 나도원, 문화연대 이원재 사무처장, 대안문화 행동 ‘ 재미난 복수’ 김건우 대표, 부산의 흥겨운 좌파밴드 ‘ 스카 웨이커스’의 이광혁이 그들이다. 그런데 이 중 네다섯 명이 노동당 당원이었다. 당원 정문식은 지론을 펼쳤다. “예술인들도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흩어져 있지 말고 뭉쳐서 요구해야 합니다.”

삶과 문화 105


우리동네 현대사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철을 기억하다 김학규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서울 동작구 당원

나는 동작구에 산다. 시내에 볼 일이 있을 때는 주로 1호선 노량진역에서 전철을 탄다. 전철은 동에서 서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넘어 용산역을 거쳐 남영역을 지나 시내로 들어 서는데, 남영역에 잠시 멈출 때면 전철역 오른쪽에 있는 7층짜리 검은색 건물이 눈에 들어 온다. 70~80년대 악명을 떨치던 바로 그 ‘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지금은 대공분실 기능을 홍제동으로 이전하고 ‘ 경찰청 인권보호센터’가 들어서 있다. 이 곳 옛 남영동 대공분실은 바로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한 내 친구 박종철(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3년)이 파쇼경찰의 물고문에 맞서다 스러져간 곳이다. 박종철 열사의 ‘ 의로운 죽음’을 기억하고 선배와의 약속을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 긴 ‘ 박종철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박종철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졌다.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을 맡고 있다 보니 나는 이곳을 자주 찾곤 한다. 최근에는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이나 전두 환 군사독재 시절의 아픔과 그에 맞서 의로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배우고자 하 는 시민, 학생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럴 땐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안내하고 설명하는 역 할도 한다.

방향감각을 잃게 만드는 계단, 뛰어내릴 수 없도록 만든 창문 이 건물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 중 하나인 김수근의 작품이다. 김수근은 자신의 ‘ 공간’ 사옥과 같이 검은색 벽돌을 활용해서 이 남영동 대공분실을 지었다. 지금도 김수근의 제자 들은 “건물을 운영한 사람이 잘못이지 건물을 지은 사람이 무슨 잘못이냐” 항변한다지만 독재 정권에 협력해서 명성을 쌓은 스승에 대한 맹목적 감싸기에 불과하다. 이 건물을 직 접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은 처음부터 반독재민 106


▲남영역 플랫폼에서 바라본 옛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실 이 있던 5층의 창문은 사람이 뛰어내릴 수 없도록 아주 폭 이 좁다. ▶조사실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

주화운동에 참여하는 민주인사나 학생들 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다는 것을 알고 오 히려 그에 충실하게 설계하고 건설한 건 물이다. 입구에 들어설 때 탱크 소리를 내는 육 중한 문이 열리면서부터, 잡혀오는 민주인사나 학생들에게 공포감은 배가되었을 것이다. 건물을 올려다 보면 당시 조사실(고문실)이 있던 5층은 창문부터 구조가 다르다는 걸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고문을 받다 고통에 못 이겨 창문으로 뛰어내릴 가능성을 원천봉쇄했다. 밖을 내다보아도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도록 설계된 것이다. 연행된 민주인사나 학생은 직원들이 다니는 정문이 아니라 은밀 하게 설계된 뒷문을 통해 5층 조사실까지 올라간다. 밖에서는 문이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그 뒷문을 통해 들어가면, 중간에 쉬는 층 없이 한번에 조사실이 있는 5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그 옆 에 보이는 5층으로 직접 통하는 나선형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데, 특히 고개를 숙인 채 나선형 계단을 오르 면 방향감각조차 상실하게 된다. 열 다섯 개의 조사실은 서로 대각선으로 마주보게 설계되어 여러 명이 함께 잡혀온 경우에도 일절 서 로 소통할 수 없다. 이곳에 일단 잡혀오면 나갈 때까지 그 좁은 조사실을 벗어날 수 없는데, 그 곳에서 식 사도 하고 잠도 자고 대소변도 보면서 물고문, 전기고문을 비롯한 온갖 고문을 감내해야 한다. 지금은 박 삶과 문화 107


종철 열사가 스러져 간 509호실만이 물고문을 위한 욕조까지 갖춘 8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 을 뿐, 김근태 전 민청련 의장이 전기고문까지 당한 515호실을 비롯한 나머지 조사실은 2000년대 이후 완 전히 바뀌어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고문을 위한 건물을 설계했을 뿐만 아니라, 시종일관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자의 편에 서서 자신의 뛰 어난 재주를 펼치면서 출세한 건축가 김수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또 다른 건축가 한 사람을 떠올린다. 그는 1971년 서울시의 도시계획· 건축 등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가 박정희 정권과 서울시 에 밉보여 프랑스로 사실상 강제출국을 당한 후 1979년 박정희가 몰락한 이후에야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 던 건축가 김중업이다. 김중업은 우리가 잘 아는 삼일빌딩이나 주한프랑스대사관을 설계한 건축가인데, 박정희 정권 덕분에 프랑스정부로부터 국가공로훈장을 받기도 하고 미국에서도 더 큰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동시대를 함께 산 같은 건축가이지만 김중업은 김수근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것이다.

교과서 바깥에서 만나는 한국 현대사 옛 남영동 대공분실 4층에는 2008년부터 박종철 열사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는 ‘ 박종철기념관’이 들어 서 있다. 6월 민주항쟁을 전후한 80년대의 시대상을 한 눈에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박종철 열사가 감옥 에 있을 때 부모님이나 누님, 그리고 친구들에게 쓴 편지, 안경과 기타를 비롯해 박종철 열사가 사용했던 여러 유품도 전시되어 있다. 이번에 교과부에서 ‘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다니’라는 한국사 교과서 의 소제목을 지나치게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며 바꾸라고 수정명령을 내린 것이 알려지면서 많 은 이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이 곳 옛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과 4층 ‘ 박종철기념관’을 직접 와서 본다 면 박근혜 정부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을 했는지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 또 있다. 5층 조사 실과 4층 기념관을 관람한 이후 계단이나 엘리베이 터를 통해 정문으로 내려 오면 ‘ 정초’ 동판이 건물 벽 아래에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는데, 거기에는 1976 년 당시 이 건물을 지은 책 임자이자 당시 내무부장 관인 김치열의 이름이 새 박종철열사가 스러져간 509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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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져 있다. 김치열은 일제


2012년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방문한 재일교포들

시대에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서 검사를 지낸 친일파였지만,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하에서도 승승장구 하다 박정희의 5· 16쿠데타를 지지하면서 중앙정보부 설립과정에 참여한 인물이다. 중앙정보부 차장으 로 있던 1973년, 남산에 끌려가 고문을 받다 숨진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를 간첩으로 몰아 “사실을 자백한 후 죄책감에 자살한 것”이라고 거짓 발표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연행된 8명이 ‘ 사법살인’을 통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는 검찰총장으로 사건 수사와 재판을 총지휘했다. 그렇게 해 서 출세한 김치열은 내무부장관이 되어 바로 이 고문기관, 용공조작기관인 남영동 대공분실을 짓는 책임 자 역할까지 했다. 이곳 옛 남영동 대공분실은 노덕술로 대표되는 일제의 고문기술자가 이근안을 비롯한 고문기술자들로 이어지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증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김치열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도 친일과 독재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나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배울 수 있는 공간으로 이 곳 옛 남영동 대공분실만큼 생 생한 곳은 아마도 대한민국에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옛 중앙정보부, 안기부가 있던 남산 기슭의 건물에 는 이미 그런 고문의 현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이 곳 옛 남영동 대공분실은 잘 보존되어 일반 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그동안 주말에는 개방되지 않아 일반인들의 자유로운 관람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 으나 2014년부터는 주말 관람도 가능해질 전망이다. 더 많은 분들이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아와 민주열 사 박종철을 기억하면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배우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삶과 문화 109


불온한 서재

사회주의-역사 속 가능성의 퍼즐 맞추기 사회주의 장석준 / 책세상 / 2013년 11월 / 9,500원

양솔규 기획조정실 국장

퍼즐을 맞춰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행의 우여곡절을 경험해봤을 것이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선택과 실 수 속에서 끊임없이 과거로 회귀하고 마는 속수무책의 과정을 반복하다가도 어느 순간 실마리를 잡으면 순식간에 진도를 빼기도 한다. 이러한 우연한 발견의 쾌감, 그리고 잘못된 선택 속에서 어렴풋이 드러나 는 정합의 실루엣이 퍼즐의 매력일지도 모른다. 단순한 퍼즐조차도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할진대 우리가 마주하는 ‘ 역사’ 라는 저 도저한 흐름 안에는 얼 마나 많은 가능성이 응축되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가 가고자 하는 역사의 방향은 어떤 선택과정을 통해 채택되는가? 단지 우리에게 ‘ 경로의존성’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조건에 구속된(것으로 상정되는) 현재의 선택을 단순하게 ‘ 승인’하는 역할만 부여되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역사 속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 견하고, 채택하며, 실현해야만 할까?

강령 <노동당 선언> 이해의 실마리 노동당은 지난 6월23일 정기당대회를 통해 강령을 채택했다. 강령 <노동당 선언>에 따르면 노동당은 “생 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 소수자 운동과 결합된 사회주의”를 천명하고, “평등· 생태· 평화 공화국” 110


을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강령에서 말하는 사회주의가 어떤 역사적 경험 과 지적 반성을 거쳐서 도출된 개념인지, 80~90년대 수없이 외쳤던 슬로건으로 서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고 같은지 짧은 당 강령만으로는 알기 어렵다. 말하자면 강령 ‘ 형성’의 이해 수준은 울퉁불퉁하기에 복기 과정은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 는다. 우리는 노동당 강 령 작성 작업에 참

우리는 노동당 강령 작성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 중 하나인 장석준 노동당 부대표 의 지적 작업을 들여다봄으로써 당 강령 ‘ 형성’의 맥락에 한발 다가갈 수 있다. 장

여했던 사람 중 하

석준 부대표는 올해 여름 <적록서재>(뿌리와이파리)를 통해 자신의 지적 행보를

나인 장석준 노동

일별한 바 있다. 그리고 11월 마지막 날, 자신의 지적 자원을 <사회주의>라는 하나

당 부대표의 지적

의 개념을 통해 버무렸다.

작업을 들여다봄

그러나 개념을 정리하는 작업은 수많은 논쟁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이견(異見) 없

으로써 당 강령

는 개념이란 없다. 언어적 개념이 지칭하는 역사적 내용에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 형성’ 의 맥락에 한발 다가갈 수 있 다.

것은 아니다. 개념은 ‘ 정의’의 대상이기 이전에 무엇보다 ‘ 해석’의 대상이다. 해 석에는 왕도가 없으며, 정통도 없다. ‘ 정통’을 뒷받침하는 ‘ 권위’가 영원하지 않 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적 ‘ 개념’을 단단한 ‘ 실재’로 바라보기보다는 구 체적인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품은 언어적 구성물로 바라볼 필요 가 있다. ‘ 일베’ 가 받아들이는 ‘ 민주화’의 개념과, 이른바 386 세대가 받아들이는 ‘ 민주화’ 의 개념이 다르며, 19세기의 ‘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후반 ‘ 사회민주주 의’는 다른 파장과 깊이를 간직하고 있듯이 말이다.

사회주의 운동의 중간결산을 시도하다 장석준은 170여 쪽에 불과한 짤막한 ‘ 입문서’를 통해 ‘ 사회주의 운동의 중간결 산’을 시도한다. 프랑스 혁명과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문명을 대체할 수 있는 운동으로 ‘ 사회주의’를 발견(?)했다. 당시의 사회주의란 E.O.라이트의 표현 대로 하자면 ‘ 사회중심 사회주의’였다. 당시의 사회는 그러나 ‘ 자본주도’의 문명이 아직 만개한 사회는 아니었다. 따라 서 사회주의 문명 탐색은 자본주의 문명 ‘ 이후’에나 가능한 시계열적 연속선상에 있지 않았고, ‘ 자본주의 문명’ 대신에 선택 가능한 ‘ 근대 문명의 또 다른 길’이었 다. 그러나 이후 사회주의의 종합을 시도한 맑스와 엥겔스의 시대는 ‘ 자본주의 대승 리의 시대’였다. 증대하는 사회적 생산력은 불평등의 원천이 아니라 해방의 힘으 삶과 문화 111


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맑스, 엥겔스의 사상은 ‘ 정통 마르크스주의’로 정리되었 고, 역사유물론은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의 운명에 결박시켰다. 1917년 혁명을 통 해 등장한 국가사회주의에게 사회주의란 ‘ 자본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본주의 장석준은 사회주

의 궁극적 성취에 이르러야 하는 체제’가 되었다.

의가 자본주의의

물론 맑스에게 그러한 혐의를 과도하게 소급해 씌울 필요는 없다. 초기 사회주의

발전을 ‘ 계승’ 하

자들이 그러했듯이 맑스에게도 ‘ 사회주의’에서의 ‘ 사회’가 어떤 형식으로 드러

는 운동이 아니라

나야 하는지는 하나의 과제였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를 대체하는 협동조합적

자본주의 근대 문

생산을 코뮌주의의 구성요소로 제시하기도 했다. 맑스 뿐만이 아니다. 레닌도 말

명 전체의 ‘ 치유’

년에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과제는 주민을 협동조합 결사체로 조직하는 것

와 ‘ 전환’ 그리고 ‘ 새 출발’ 을 위한 프로젝트라고 정 식화한다.

뿐”이라고 일갈했다. 그람시의 평의회 운동 역시 ‘ 자본’을 대체할 ‘ 사회’적 실체 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당-국가 = 사회라는 공식은 도그마일 뿐이다. 장석준 은 전통적 맑스주의자들의 입을 빌러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발전을 ‘ 계승’ 하는 운동이 아니라 자본주의 근대 문명 전체의 ‘ 치유’와 ‘ 전환’ 그리고 ‘ 새 출발’을 위 한 프로젝트라고 정식화한다. 그런데 이러한 ‘ 사회적 실체’들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지구적 생태위기가 단지 자본주의만이 아니라 인류문명 자체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는 지금, ‘ 사회 (주의)’의 목표는 경제적 성장이 아니라 사회적, 생태적 합리성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멈퍼드와 일리치의 ‘ 역동적 균형’(멈퍼드)과 ‘ 다중 균형’(일리치)이 사회주의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목표에 풍부한 거름을 제공한다.

수많은 ‘ 가능성’ 의 조합에서 새 출발해야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중심) 사회주의를 실체화하고, 새로운 문명을 추구할 주체 는 누구인가? 저자는 현실의 노동자 계급을 ‘ 자동적으로’ 해방의 주체로 상정할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맑스가 프롤레타리아를 해방의 주체로 바라본 까닭은 “기 존 사회의 이해관계로부터 떨어져 있는 ‘ 거리’에서 비롯되는 ‘ 자유’ ” 때문이지, 생산력 증대를 담지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결박당한 노동자계급이 아니었다. 체 제에 결박당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중들 스스로 기존의 관성에서 벗어 나기로 결단하는 것”이 필요하며, 결단을 실천할 “주체가 없다면 발명이라도 해 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정치적 과제라는 것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쿠바혁명, 차베스를 비롯한 남미 사회주의의 새로운 모색 등 사회주의 운동 속에서 국가사회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운동들에 대한 검토, 자 112


노동자당 후보의 상파울루 시장 당선을 축하하는 브라질 노동자당 당원들

본주의 내에서의 급진적 변화를 추구한 스웨덴 임노동자기금 모델, 영국과 프랑 스 등의 구조개혁 노선에 대한 검토, 앙드레 고르, G.D.H.콜 등 수많은 현대 사회 사회주의 역사를 다시 반추하면서 실현되지 못한 ‘ 가

사상가들의 상상력 충만한 이론들에 대한 검토는 사회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재구성하기 위한 재료였다. 사회주의 역사를 다시 반추하면서 실현되지 못한 ‘ 가 능성’들을 환기하는 것, 그 ‘ 가능성’을 조각모음 해 새로운 퍼즐로 조합하는 것은

능성’들을 환기하

사회주의 운동의 새 출발에 필수적이다.

는 것, 그 ‘ 가능성’

개념은 무엇보다 해석의 대상이며, 언어적 구성물이라고 앞서 말한 바 있다. 말하

을 조각모음 해 새

자면 개개인들이 간직하고 있는 사회주의에 대한 다양한 사유들, 검토 가능한 모

로운 퍼즐로 조합

든 역사적 운동들을 가지고 우리는 더 많은 사회주의 퍼즐 조합을 얼마든지 만들

하는 것은 사회주

수 있다. 자본주의 문명을 극복하려는 사회주의 문명의 등장에는 더 많은 자양분

의 운동의 새 출발 에 필수적이다.

이 필요할 것이다. 노동당 강령도, 사회주의라는 역사적 개념도 더 많은 해석과 논의, 그리고 실천을 필요로 한다. 도약하자! 그리고 사유하자!

<더 읽을만한 책> 『거대한 전환』/ 칼 폴라니 / 길 / 2009년 / 38,000원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생각의나무 / 앙드레 고르 / 2011년 / 15,000원 『적록서재』/ 장석준 / 뿌리와이파리 / 2013년 / 18,000원

삶과 문화 113


꽃다지가 연예면 기사에? 얼마 전 꽃다지가 연예면 기사에 등장했습니다. 가수란 직종이 원래가 연예인으로 분류 되니 지금까지 근 22년을 활동한 꽃다지가 연예뉴스에 날 법도 합니다만, 여태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주로 문화면, 그보다는 사회면에서 더 자주 만나던 꽃다지 소식이 연예면에 등장한 이유는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 꽃다지의 ‘ 바위 처럼’ 에 맞추어 율동하는 장면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이날 <응답하라 1994>에 등장한 ‘ 바위처럼’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잠시나마 그 시절의 향수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꽃다지의 ‘ 바위처럼’은 94학번을 비롯한 그 시절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알 법한 민중가요입니다. 당시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나 M.T에서 가장 먼 저 들을 수 있었던 노래거니와, 그 율동 또한 오랫동안 한결같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오랜만에 ‘ 바위처럼’을 검색하다가 새로운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국방부 군종 실에서 편찬한 천주교 군인성가 2010년 개정판 250번에 ‘ 바위처럼’이 들어가 있다고 합니 다. ‘ 바위처럼’ 외에도 꽤 여러 곡의 민중가요가 천주교 생활성가에 들어가 있는데 대부분 은 투쟁, 해방, 동지 같은 단어가 다른 말로 대체되었지만, 이상하게도 ‘ 바위처럼’ 만은 원 곡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국군장병 아저씨들이 합창하는 모습을 상상하자니 격 세지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대로라는 것.

꽃다지의 위기 속에서 태어난 노래 ‘ 바위처럼’ 돌이켜보니 다른 민중가요에 비해 ‘ 바위처럼’은 의외의 곳에서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 니다. 어떤 대안학교에서는 교가보다 더 애창하는 교가 아닌 교가로 쓰이기도 하고 고등학 생들의 합창경연대회 경연곡으로 종종 선곡되기도 하고 심지어 일본의 조선학교에서는 하 굣길에 나오는 노래가 ‘ 바위처럼’이라고 하니 90년대를 대표하는 노래임이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계급과 계층을 막론하고 사랑받지만 꽃다지는 한동안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었습 니다. 너무 많이 불러서 지겹기도 했고 바위처럼 살자고 해맑게 노래하기엔 세상이 점점 더 험악해졌으니까요. 오죽하면 민중가요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 민들레처럼’ , ‘ 처

노 래 의

바위처럼 민정연 문화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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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처럼’과 더불어 3대 금지곡이라는 농담까지 주고받겠습니까. ‘ 바위처럼’은 1993년 3월 발매한 꽃다지 비합법2집에 수록된 노래입니다. 밝게 춤추며 부르는 노래이 지만, 이 노래가 만들어지던 당시 꽃다지는 와해될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1992년 대선 때, 꽃 다지는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두 군데로 뿔뿔이 흩어져서 선거운동을 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대선이 끝나고도 꽃다지 사람들 서른여 명 중에 십여 명이 떠나거나 잠적했고, 당시 대표였던 조민하(‘ 민들레처 럼’과 ‘ 전화 카드 한 장’의 작곡자)마저 이에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사임한 상황이었습니다. 그즈음 낙원상가

밑 선술집에서 조민하와 유인혁이 술잔을 기울이면서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말고 이 자리를 지키며 사는 게 중요하다, 떠나간 사람들이 돌아올 자리를 지키자”는 대화를 나누고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30여 분 만에 끄적거린 글이 지금의 ‘ 바위처럼’ 노랫말입니다.

CD 만드는 시절이었으면 ‘ 바위처럼’은 나오지 않았을 것 책상 깊숙이 숨겨져 있었던 글에 멜로디가 붙여져 노래로 태어난 사연은 좀 웃깁니다. 이듬해 초, 음악 단체의 위기는 음악으로 풀자며 남은 이들이 마음을 다잡고 2집 음반 작업을 했는데 최종적으로 작업한 결과 한 곡이 모자랐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테이프를 내던 시절이었고 테이프는 앞면과 뒷면의 시간을 똑같이 맞춰야 했는데, 최종 선곡을 하고 작업하고 보니 앞뒷면의 시간이 달랐던 겁니다. 이미 발표한 노 래를 리메이크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유인혁이 딱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하여 탄생한 노래가 바로 ‘ 바 위처럼’입니다. 만약에 테이프가 아니라 CD를 내는 요즘이었다면 ‘ 바위처럼’ 은 만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유인혁은 ‘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의 재기발랄함과 ‘ 희망의 노래’의 흥겨움을 모두 담은 노래를 만 들고 싶었답니다. 이 노래의 구조는 그간 만들었던 노래들과 많이 다릅니다. 노랫말에 맞추어 만들다 보 니 일반적인 ABC 구조가 아니게 되었나 봅니다. 음반 작업 막바지라 편곡에 공 들일 여유도 없었으나, 한 창 편곡 공부 중이던 유인혁이 열의를 갖고 직접 작업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 노래가 세상에 나오자 학 생들은 환호했고, 노동자들은 처음에는 어색해했으나 투쟁가와 더불어 흥겹게 부를 노래가 필요했던지 학생들만큼은 아니었어도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음반의 앞뒷면 시간을 맞추기 위해 하룻밤 만에 급하게 만들어진 노래가 이십여 년이 지나도록 사랑을 받으리라고는 당시엔 상상도 못 했겠지요. ‘ 바위

‘ 바위처럼’ 은 1993년 3월 발매한 꽃다지 비합법2집에 수록된 노 래입니다. 밝게 춤추며 부르는 노래이지만, 이 노래가 만들어지 던 당시 꽃다지는 와해될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삶과 문화 115


처럼’과 같은 시기에 나온 노래가 ‘ 전화카드 한 장’임을 상기해 보면, 위기는 몰락을 부르기도 하지만 동 시에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고 다시 도약할 기회이기도 한가 봅니다. 1992년 대선 이후 상처받은 많은 이들이 자기성찰하고 울먹이며 불렀던 위로의 노래가 ‘ 전화카드 한 장’이라면, 슬픔을 누르고 꿋꿋하게 지키겠다는 의지를 담은 ‘ 바위처럼’은 경쾌하게 의지를 북돋아 준 노 래가 아닌가 합니다. 듣기에는 쉽지만 맛깔나게 부르기 어려운 노래 중의 하나가 ‘ 바위처럼’입니다. 자주 부르는 노래이니 이번 기회에 제대로 한 번 배워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그래서 꽃다지 가수 정혜윤을 소환했습니다.

“수없이 불렀지만 가장 부르기 힘든 노래예요” “우선 리듬을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 바위처럼’은 못갖춘마디의 4박자 노래입니다. 바위처럼’은 1, 2, 3, 4박 중에 두 번째, 네 번째 박에 악센트를 주어서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멋을 부리는 것보다 소리를 깨끗이 내는 것이 좋습니다. 고음의 경우는, 예를 들어 ‘ 바람에~’ 부분을 부르기 전에 호흡을 충분히 한 뒤, 배로 호흡을 잡고 소리를 올리면 비교적 부드럽게 잘 올라갑니다. 그리고 여섯 박 또는 음을 길게 끄는 부분이 많은데, 힘들다고 소리를 놓아버리면 안 됩니다. 끝까지 버텨야 합니다. 또한 전형적인 ABC구조 가 아니어서 분위기가 바뀌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2박) 절망에(3박) 굴하지 않고(2박) 시련 속에(2박) 자신을(2박) 깨우쳐가며(2박) 이 부분들은 길게 끌지 말고, 스타카토를 낸다는 기분으로 짧게 끊어서 부릅 니다. 그리고, ‘ 바위처럼’에는 당김음, 엇박이라고도 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강박 부분의 음이 짧고 약박 부분의 음이 길 때 원래 약박 부분이던 음표가 힘이 세서 강박 부분의 소리를 잡아당겨 대신 강박으로 바 꿔 부르게 되는 것을 당김음이라고 하는데 이 부분을 확실히 잘 살려줘야 노래가 살아납니다. 그런데 노래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위와 같은 이론보다 어떤 느낌을 전달하고 싶은가, 무엇을 강조하 고 싶은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부분을 좀 더 짚어서 느낌을 불어 넣는 것이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합창할 때는 강조할 부분과 표현하고자 하는 느낌을 약속하고 부르면 좀 더 풍성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일단, 음원을 많이 들으시면, 가수들이 어떻게 어디를 강조했는지 들리실 겁니다. 원본을 참고하시되, 무조건 똑같이 부르려고 하지 말고 개성에 맞춰 다른 변화를 주면서 부르면 더 재밌지 않을까요? ‘ 바위처 럼’을 수없이 불러왔지만, 아직도 여전히 가장 부르기 힘든 노래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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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처럼 유인혁 작사, 작곡 꽃다지 노래

바위처럼 살아가 보자 모진 비바람이 몰아친대도 어떤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살자꾸나

바람에 흔들리는 건 뿌리가 얕은 갈대일 뿐 대지에 깊이 박힌 저 바위는 굳세게도 서 있으리 우리 모두 절망에 굴하지 않고 시련 속에 자신을 깨우쳐 가며 마침내 올 해방세상 주춧돌이 될 바위처럼 살자꾸나

1992년 대선 이후 상처받은 많은 이들이 자기성찰하고 울먹이며 불렀던 위로의 노래가 ‘ 전 화카드 한 장’이라면, 슬픔을 누르고 꿋꿋하게 지키겠다는 의지를 담은 ‘ 바위처럼’은 경쾌 하게 의지를 북돋아 준 노래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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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비평

멈춰선 철도, 변함없는 언론 “문제는 민영화야!” 조윤호 <미디어오늘> 기자

전국철도노동조합이 9일 오전 9시, 수서발KTX 분할과 철도민영화에 반대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이에 코레일은 철도노조 김명환 위원장을 비롯한 194명의 조합원을 업무 방해 혐의로 고소 고발했고, 파업참가자 4356명에 대한 직위를 해체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한 언론보도는 클리셰처럼 반복됐다. 대부분의 언론은 철도 파업을 전하며 파업으로 인한 ‘ 시민불편’ 과 경제적 피해를 강조하고 노사 양측의 대립된 입장을 나열하는 태도를 보였다.

언론의 파업 ‘ 보도지침’ 은 ‘ 시민불편’과 ‘ 경제적 피해’ 파업 때마다 등장하는 언론의 단골메뉴는 ‘ 시민불편’이다. 이번에도 철도노조의 파업으로 ‘ 시민 불편’이 야기된다는 기사가 많이 나왔다. “표 예매했던 시민들 바뀐 열차 시간표에 어리둥절”(YTN 12월 9일자) ““택시 타고 가라고?”…열차 이용 승객들 분통”(SBS 12월 9일자) “철도노조 오전 9시 총파업 돌

입…일부 열차 운행 차질”(KBS 12월 9일자) “철도노조 총파업 돌입…예약 열차 잇단 취소에 “또 시민이 볼모””(파이낸셜뉴스 12월 9일자) 몇몇 언론은 ‘ 물류대란’에 주목했다. 파업이 경제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논리다. 철도 파업으 로 화물열차의 운행비율이 낮아지고, 화물열차를 주로 이용하는 시멘트 업계가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보도가 쏟아졌다. “4년 만에 철도 파업…하루 만에 화물수송 반토막”(조선일보 10일자) “물동량 60~70% 철로 수송 시멘트업계 직격탄”(동아

노조는 임금인상을 요구했지만, 임금인상만이 이번 파업의 목적은 아니다. 임금 몇 푼 올리자 고 중징계를 감수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일보 12월 10일자) “오늘부터 철도파업

연말 물류대란 우려”(서울신문 12월 9 일자)

노동자들이 일을 멈추면 시민들 이 불편하고, 경제에 타격을 입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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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중요한 건 ‘ 왜’ 노동자들이 파업했느냐다. 노조는 임금인상을 요구했 지만, 임금인상만이 이번 파업의 목적은 아니다. 철도노조는 이전에 파업을 했다가 해고 등 중징계를 받은 적이 있고, 이번에도 노조 지도부에 대한 고소 고발과 파업 참가자에 대한 직위해제 조치가 이루 어졌다. 임금 몇 푼 올리자고 중징계를 감수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수서발KTX 둘러싼 노사대립, ‘ 중계보도’하는 언론들 이번 파업의 핵심 쟁점은 ‘ 민영화’다. 10일 코레일 이사회는 수서발KTX 분할, 즉 수서발KTX를 운 영할 코레일의 자회사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 자회사의 지분은 41%의 코레일 지분과 59%의 공공자 금 지분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하지만 노조는 공공자금 몫의 지분을 민간회사에 매각해 민영화가 이 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이에 대해 코레일은 공공자금 몫의 지분을 살 수 있는 주체를 지자체나 공공기관, 지방 공기업 등으로 한정했기 때문에 민영화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이에 노 조는 코레일이 정관을 바꿀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대다수 언론은 ‘ 수서발KTX’ 안을 전하며 중계식 보도를 반복하고 있다. 수서발KTX 안이 민영화 로 이어질 것이라 의심하는 철도노조의 주장을 전하고, 민영화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코레일 측의 반론을 전하며 이번 사안을 ‘ 공방’ 수준으로 처리하는 보도가 대부분이다. 이번 파업에 대해 정부가

철도노조의 파업을 보도한 언론들은 하나같이 경제적 악영향과 시민들의 불편에 초점을 맞추었다. 9일자 KBS 9시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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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8시 뉴스 보도자료

직위해제 등 강경책으로 맞서고 철도노조는 ‘ 무기한 파업’을 이어가겠다고 반발하는 모습을 전하면 서, 대다수 언론은 대립과 갈등을 보여주는 데 그치고 있다. 코레일은 지난 4월 “3584㎞에 불과한 철도시장을 분할하면 인력과 자원이 중복돼 산업 전체에 비 효율을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 이러한 입장은 6개월 만에 바뀌었을까. 또한 지난달 박근 혜 대통령이 재가한 세계무역기구(WTO) 정부조달협정(GPA) 개정안에 따르면 철도 사업에 초국적 자본 이 참여할 수 있게 됐고 이것이 이번 수서발KTX 분할과 관련 있다는 지적에 대해 코레일은 왜 묵묵부 답인 걸까. 대부분의 언론보도는 중계식 보도에 그치고,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언론은 찾기 힘들다. 또한 언론은 ‘ 민영화’ 를 두고 노사가 대립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줄 뿐 민영화가 국민들의 삶과 어 떤 연관이 있는지 짚어주지 않는다. 철도노조는 수서발KTX 자회사를 설립할 경우 인력과 비용 낭비 가 일어나고, 자회사와 모회사가 서로 출혈경쟁을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민간회사가 철 도를 운영할 경우 시설 등에 투자하기보다 비용을 아껴 최대한 수익을 남기려 할 것이기에 요금은 높 고 서비스의 질을 낮아질 것이라는

“철도노조의 파업으로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다 고 말하면서, 철도가 외국자본에 개방되거나

지적도 있다. 이처럼 민영화는 노사 간의 대립 의제로 그치지 않는 국민 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이슈인데

민영화되어 발생하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에

도, 대다수 언론은 이 점을 짚어주

대해서는 왜 이야기하지 않나”

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점에 대해 김영환 철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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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지도위원은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보수언론은 철도노조의 파업으로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다고 보도하는데, 철도가 외국자본에 개방되거나 민영화되어 발생하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에 대해서는 왜 이야기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시민 불편이 문제라면 철도의 주인은 시민이라는 뜻인데 몇몇 소수가 밀실에서 철도정책을 결정하는 현실에는 왜 문제제기하지 않는가?”

‘ 시민불편’ ‘ 노사대립’ 등 현상 중계 넘어 민영화에 대한 분석 필요해 KBS는 10일자 9시 뉴스 <데스크 분석>을 통해 철도 파업이 국민에게 손실을 끼친다고 비판했다. < 데스크 분석>은 “서울-부산 간 KTX의 경우 파업 불과 수 시간 후 이용객이 당장 1%이상 늘었다”며 “무궁화, 새마을호 타던 이들로 추산할 수 있는데 오늘 이들에게는 KTX 요금과 무궁화, 새마을 호 요 금 차이, 즉, 만 3천원에서 2만 6천원만큼 철도 요금이 오른 셈이다. 이처럼 철도 파업은 막연한 국민 불편 정도가 아니라, 가시적인 국민 손실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철도노조를 비롯해 민영화에 반대하는 이들은 철도민영화가 요금 인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 를 제기하고 있다. 파업으로 인해 국민들이 불편을 겪고 그것이 가시적인 국민 손실로 이어지는 것 못 지않게 민영화로 인해 국민 손실이 늘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언론이 철도파업을 전하며 ‘ 시민 불 편’ ‘ 물류대란’ ‘ 노사대립’ 등 눈에 보이는 현상을 넘어, 보다 심도 있는 분석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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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다운

당원들의 유쾌한 청각생활을 지지하는 이 달의 음원 다운로딩 가이드 장석원 음악 블로그 soundz.egloos.com 주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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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이드 파이어Arcade Fire, 『Reflektor』 아케이드 파이어가 새 앨범을 낸다는 소식만으로 이미 하반기 가장 주목할 앨범 의 자리를 꿰찰 정도로 이 밴드는 인디록계의 정점에 서 있다. 일단 짚고 넘어갈 것은 국내에서 사용하는 인디록의 의미와 해외에서 통용되는 인디록의 의미가 사뭇 다르다. 국내에서는 말 그대로 집도 절도 없는 독립군이라는 느낌이라면, 해외에서는 그냥 음악하는 태도를 지칭할 뿐이다. 비행기 타고 투어 다니는 ‘ 인 디펜던트’ 밴드들이 허다하니까. 아무튼 새 앨범 “Reflektor”를 처음 듣고 세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첫째, 1980년 토킹헤즈Talking Heads가 아프리칸 비트를 선보였 을 때 그 시도는 월드비트의 시대를 여는 서막이 되었다. 그런데 아케이드 파이 어가 차용한 아이티 전통음악 라라rara는 아이티 출신을 제외하면 이게 아이티에 서 빌려온 것임을 알아챈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둘째, 인디록이 발견한 미래 의 탈출구가 고작 디스코란 말인가. 앨범 전반에 흐르는 과도한 디스코의 영향에 불편했던 밴드 멤버가 한 명도 없단 말인가. 셋째, CD 한 장에 다 들어가고도 남 는 곡들을 굳이 두 장의 CD에 나눠 넣은 의도는 또 뭔지. 그러나 이런 당혹감에도 이 앨범이 2013년에 선보인 모든 음악들 중 가장 대범하고 당돌한 작품이라는 데 는 그 어떤 의문도 없다. ● 강력하게 밀어주고 싶은 트랙 : ‘ Reflektor’ , ‘ We Exist’ , ‘ Here Comes the Night Time’ , ‘ Joan of Arc’ , ‘ Afterlife’

보너스 트랙 다이앤 버치Diane Birch의 “Speak A Little Louder”, 글라스베가스Glasvegas의 “Later... When The TV Turns To Static”, 라일로 카일리 Rilo Kiley의 “Rkives”는 꼭 소개하고 싶은 앨범들이지만 발매 된지 반년이 넘도록 국내발매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미 망한 한국의 음반시장에서 CD로 소개되지 못하는 것이야 이해되지만 다운로딩 배급조차 안 되는 것은 국내 판권자의 의지박약이 라기보다는 법적인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다이앤 버치나 글라스베가스는 국내 공연까지 한 아티스트인데도 사정이 이 렇다. 늦더라도 2014년에는 국내에 소개되기를 기대하고 만약 기다릴 수 없는 리스너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구해서 들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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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이 미키今井美樹, 『Dialogue - Miki Imai Sings Yuming Classics』 유밍이라는 애칭으로 더 친숙한 아라이 유미荒井由實가 일본인들에게 얼마나 친숙한 아 티스트인지 실감나게 설명하기는 참 어렵다. ‘ 시대時代’를 부른 나카지마 미유키中島みゆ き와 함께 일본의 대중음악을 떠받치는 디바로 음악팬을 양분한다는 수사가 결코 과장이 아니다. 2013년 11월은 아라이 유미(결혼 후에는 마츠토야 유미)의 데뷔 40주년이었다. 물론 40주년 기념 베스트 앨범 등 관련 기획이 줄을 이었는데, 그렇고 그런 재활용 상품들 속에 서 정작 빛을 발한 것은 후배 이마이 미키가 선배의 대표곡을 새롭게 해석해 녹음한 앨범 이었다. 아라이 유미는 그의 노래를 주제가로 사용한 지브리 애니메이션 작품을 제외하면 한국에서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아티스트인데, 용케도 이 앨범이 국내배급됐다. 격동의 시 대가 가라앉고 70년대 안정과 안락의 시대로 진입한 일본인의 마음에 설탕을 뿌리듯 달콤 하게 스며들었던 유밍의 목소리도 세월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녹슬었다. 이 앨범은 그 기억 의 간극을 메우고 나아가 데뷔 무렵 유밍의 청아한 보컬을 되살려 내고 있다. 추억만큼 확 실한 상품성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러고 보니 이마이 미키가 누구인지 설명해야 하는데, 지 면이 허락하지 않으니 기타리스트 호테이 토모야스布袋寅泰의 아내라는 것만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그래도 국내에서는 남편 쪽이 조금 더 유명하니까. ● 강력하게 밀어주고 싶은 트랙 : ‘ 卒業寫眞’ , ‘ 中央フリ一ウェイ’ , ‘ 人魚になりたい’ , ‘ シンデレラエエクスプレ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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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빗 브라더스 The Avett Brothers, 『Magpie and the Dandelion』 에이빗 브라더스는 이름 그대로 세스Seth와 스코트Scott 에이빗 형제를 중심으로 한 밴드다. 조 권Joe Kwon이라는 한국계 미국인 멤버가 있다는 점이 우리의 눈길을 끌 수는 있는데 그 게 이 밴드를 주목해야 할 이유는 당연히 아니다. 2011년 53회 그래미 시상식에서는 밥 딜런 Bob Dylan과 에이빗 브라더스, 영국의 멈포드 앤 선즈Mumford & Sons가 함께 딜런의 ‘ Maggie’s Farm’ 을 연주했다. 포크록 매니아에게 이 무대는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포크 록 의 왕위와 정통성이 대서양 양편의 두 계승자에게 이양되는 감동적인 대관식이었다. 에이 빗 브라더스는 미국 포크록의 전승과 현대화 두 영역 모두에서 가장 성공적인 밴드이다. 새 앨범은 메이저 진출 후 세 번째 작품에 해당하는데 전작인 “The Carpenter”와 정확히 1년의 간격을 두고 있다. 하지만 사실 전작과 동시에 녹음된 것으로 전작의 쌍둥이 앨범에 해당한 다. 그렇다고 이게 그저 전작의 속편이나 2부리그 모음집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The Carpenter”가 대중에게 어필하기 쉬운 선명한 멜로디의 이목구비가 또렷한 곡들 위주라면 “Magpie and the Dandelion”은 묵직한 밴드 연주 중심의 선이 굵은 앨범이다. 첼로와 밴조라 는 록큰롤과 인연이 없어 보이는 악기가 기타와 공존하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도 이들의 음 악을 즐기는 방법이다. ● 강력하게 밀어주고 싶은 트랙 : ‘ Open Ended Life’ , ‘ Another Is Waiting’ , ‘ Good To You’ , ‘ Apart From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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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입맛

좋은 게 좋은 건 아니다 박성경_삶과 먹을거리 협동조합 <끼니> 조합원, 따비출판사 대표

사람은 누구나 살기 위해 먹는다. 그러나 일단 절대빈곤에서 벗어나면 맛을 추구한다. 대혁명 이후, 부르주아가 지배계급이 된 프랑스에서 레스토랑이 발달했고, 외환위기를 극 복하고 1인당 국민소득 삼만 달러 수준을 회복한 2000년대 한국에는 맛집 열풍이 불었다. 텔레비전은 맛집을 소개하기 시작했고, 신문은 문화면을 맛집 기사로 채워나갔다. 맛집을 소개하는 책들이 우후죽순 서점에 깔리기 시작했고, 이런 열풍 속에서 맛집 이야기를 다루 는 블로거의 인기는 높아졌다. 식당들은 이런 매체의 소개에 따라 대박집과 쪽박집으로 나 뉘었고 결국 대박집이 쪽박집에 자비를 베푸는 방송 프로그램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과연 그 많던 맛집은 아직도 존재하는 것일까? 2004년 <찾아라 맛있는 TV>에서 소개한 ‘ 스타맛집’ 꼭지에 초창기 소개된 열 곳을 찾아보니 절반은 사라졌고, 나머지는 대부분 프 랜차이즈 식당이었다. 이를 보면 소비자들이 보편적으로 즐기는 방식의 식당은 거짓일 수 도 있다. 소비자의 욕망은 맛을 기준으로 식당을 고 르는 것이 아니라 유명브랜드를 과시하듯, 유명 명품 을 소비하듯, 맛집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맛집 열풍에서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까지 이처럼 맛있는 음식을 찾던 한편에는 음식에 대한 걱정과 공포가 자리하고 있었다. 2001년 에릭 슐로서 의 『패스트푸드의 제국』이 출간되어 많은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패스트푸드에 대한 최초의 경고였다. 2008년에는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가 출 간되어 우리가 먹고 있는 쇠고기의 본질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같은 해 한국에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 개 협상 소식이 알려지면서 광우병 쇠고기에의 불안 이 거대한 촛불시위로 번졌다. 촛불시위의 열정은 안 그림 : 소복이 http://www.sobog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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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먹거리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졌다. 시민들은 친환경 유기농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비료를 주고 농 약을 친 농산물이 아닌 유기농산물을 찾기 시작했다. 이에 발 맞춰 시장도 바뀌었다. 대형마트는 유기농매장을 강화해 이제는 관행농산물보다 유기농산물 매 장의 규모가 더 크다. 풀무원, CJ 등도 유기농산물 제품의 홍보와 마케팅에 커다란 힘을 쏟기 시작했다. 가 공식품도 유기농산물을 재료로 만들었음을 강조한다. 대형제과회사는 유기농과자 브랜드를 만들어 시장 을 키우고, 건강보조식품 회사들도 유기농제품임을 강조한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의 발표에 의하면 2011년 유기농 시장의 규모는 1조 6000억이 넘었고, 매년 20% 내외의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유기농산물이 최선인가 그렇다면 유기농은 과연 착한(?) 먹거리인가? 그렇지 않다. 유기농 가공식품을 보면 재료로 쓰인 원산 지가 해외인 경우가 많다. 미국산 블루베리, 그리스산 올리브, 이태리산 밀, 중국산 콩 등이 재료로 쓰인 다. 이런 수입 농산물은 현지에선 유기농법으로 재배되었다 하더라도 많은 탄소를 배출시키며 우리 식탁 에 오른다. 친환경이라는 말을 꼭 붙여 판매하지만 실제로는 환경파괴 농산물이라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다면 백화점과 대형 할인마트에서 파는 국산 유기농산물은 착한 농산물일까? 이런 유기농산물은 유 통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대형 유통 업체는 농민들에게는 계약재배의 명목으로 매입가격 을 후려치고 있고, 간혹 계약재배 물량을 일방적으로 파기한다. 뿐만 아니라 영세상인들의 생존권도 빼앗 아간다. 우리는 좋은 것으로 여기고 사 먹는 농산물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한다. 친환경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우리 몸에만 좋다는 것이 아니다. 친환경은 자연의 건강을 해치지 않 는다는 의미다. 자연이 건강해야 좋은 먹거리를 지속적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 우리는 다르 지 않다. 우리가 생활하는 사회도 자연의 일부분이다. 우리 사회가 다치지 않고 건강한 것이 진정한 친환 경이다. 선정주의에 찌든 언론들이 제시하는 맛집이나 브랜드 유기농은 바람직한 먹거리가 아니다. 소비 자가 생산자와 유통과정을 확인한 식재료가 우리의 식탁에 올라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가 매달 삶과 먹을거리 협동조합 <끼니> 소식을 전합니다. 먹을거리 의 생산과 가공, 유통, 소비 등 각 분야의 전문가와 언론인, 인문학 연구자 등이 필진으로 참여합니다. 한국인의 끼니가 그 실체를 선명히 드러낼 수 있도록 왜곡된 정보와 조작된 전통을 고발하고, 궁극적 으로는 한국의 노동자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끼니를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모색합니다. 이 글은 <끼니> 공식 블로그에 동시게재됩니다.(http://blog.naver.com/gginico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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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접으며

파도의 예감 박권일 『88만원 세대』 공동저자, 기관지위원

얼마 전 혼인을 했다. ‘ 새신랑’이란 말이 무안한 나이지만 아무튼 남들 하는 건 해보겠다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신혼여행도 갔다. 거기 머무는 동안 서핑을 배웠다. 서핑? 맞다, 파도타기. 본 적은 많지만 해본 사람은 의외로 드문. 신혼여행지는 세계 서퍼의 ‘ 성지’ 중 한 곳이다. 우리는 서핑스쿨에 등록하고 생초보 과정부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서핑은 엄청나게 중독성 강한 운동이다. 보드에 엎드려 물결에 몸을 맡기고 적당한 파도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의 두근거림, 잔뜩 에너지를 머금은 놈을 만나 폭발적으로 앞으로 튀어나가는 감각, 귓가에서 부서지는 포말의 시원한 소리… 그야말로 ‘ 영혼에 각인되는 경험’ 이라 표현하고 싶다. 물론 생초보이기에 파도를 타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알다시피 파도, 조수간만은 달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하루 중에도 시각마다 파도의 높이가 다르다. 서핑스쿨의 강사는 시간대별 파도 높이가 적힌 캘린더를 나눠주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 분, 명심해야 하는 건 파도가 높다고 해서 파도를 타기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중요한 건 파 도가 얼마나 크고 높으냐가 아니라 얼마나 큰 에너지를 품고 있느냐죠.” 눈에 보이는 스케일에 연연하지 말라는 것. 자신이 진짜 올라타야 할, 빠르고 멋진 파도는 생각보다 보잘 것 없어 보일 수 있다는 것. 박근혜 정권에 대한 분노가 심상치 않다. 수서발 KTX 노선분할을 둘러싼 철도노조 파업이 결 정적 분기점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파업이 시작되자마자 7천 명이 넘는 노동자를 일거에 직위해제해 버리는 야만성에 시민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국정원 게이트와 복지공약 대부분을 포기하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권의 지지율은 고공행진 중이었다. 하지만 나날이 물가는 오르고 가계부채 상황은 악화되는 상황, 게다가 과거에 비해 훨씬 많은 사람들이 철도나 의료 등 공공부문 사영화(민영화)에 대해 비판적인 인식을 지니게 된 상황에서 철도노조 파업에 대한 정권 의 과잉대응은 반발을 불러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어떤 임계에 달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천 주교 사제들을 '종북'으로 몰아 기어코 다른 종교인들까지 집단적으로 정권퇴진을 요구하게 만들 고야 만 것은 이 정권이 얼마나 위기에 몰리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2008년 촛불 당시 진보신당은 가장 시민들과 가까이 있었던 정당이었고 새로운 당원들도 들 어왔다. 그러나 그 후에는? 대중의 움직임에 보조를 맞추는 것과 대중에 휩쓸려버리는 것은 전혀 다르지만 종이 한 장 차이이기도 하다. 노동당은 어떻게 ‘ 반박(反朴)의 파도’에 힘을, 그리고 몸 을 실을 것인가. 눈에 보이는 파도에 연연해선 안된다는 서퍼의 금언을 다시 되새겨본다. 128


표지 이야기

세상을 바꾸는 뇌구조? 집권 2년째 접어든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

(사진 : 이치열 <미디어오늘> 기자)

17~18대 국회의원으로 8년을 국회 본회의장을 드나들면서 딱 네 번 입을 열었다. 상임위 활동을 다 통틀어도 스물여덟 번이 다. 워낙 말을 삼가시다 보니 어쩌다 한 마디 할 때마다 ‘ 대박’ 이 났다. 2006년에는 박근혜의 “대전은요?” 한마디에 대전 시장 선거에 판세가 뒤집혔다. 여야의 합의로 해결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박근혜가 “여야의 합의로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하나마나한 말 한 마디 던져도 세상이 술렁거렸다. “박근혜 묘 수 내놓아” “여야 합의 可 결재 떨어져” “MB한테 맞서는 거 아 냐?” 그랬던 그가 국회에서 청와대로 옮겨간 지 이제 2년째를 맞이한 다. 여전히 박근혜는 기품있게 침묵한다. 그리고 인사부터 정책 방향, 예산까지 대통령의 ‘ 의중’ 을 읽어 소수의 측근들이 국정 을 좌지우지한다. 그 ‘ 의중’ 이 노동계를 겨냥하면 느닷없이 전 교조는 노조가 아니게 된다. 상품이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상품 이 된다. 경제민주화 공약이 후퇴한 자리에는 재벌을 위한 정책 이 들어선다. 지난 12월 14일, 노동당은 전국위원회에서 박근혜 정권 퇴진 투 쟁을 결의했다. 종교계와 시민사회, 정치권의 박근혜 대통령 사 퇴 주장에 이어, 정당으로서는 처음으로 정권 퇴진 투쟁을 천명 한 셈이다. 박근혜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청사진을 현실로 옮 겨놓도록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미래에서 온 편지 제5호 발행인 이용길 편집인 장석준 편집팀 김민하 김성현 노정 박권일 이상엽 정정은 정철수 조윤호 최백순 홍원표 교 열 김성현 노정 양솔규 정정은 디자인 고미숙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 마포-라00403) 발행일 2013년 12월 26일 주 소 서울 마포구 서교동 371-12 비금빌딩 7층 노동당 전 화 02) 6004-2006, 2007 팩 스 02) 6004-2001 이메일 laborzine@gmail.com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인 쇄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973-15 원일컴 가격 10,000원


2013.12 제4호

제4호

www.laborparty.kr

특집 ■ 부동산 정책 잔혹사

그 많던 집은 누가 다 가졌나 기획 ■ 예술과 밥 이재영을 추모하며 ■ 정책이 살아야 진보정당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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