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2 제6호
제 6호
www.laborparty.kr
안녕들 하십니까, 그 후
특집 값 10,000원
쟁점토론 ■ 노동· 정치· 연대의 원탁회의 제안, 노동당의 대응은? 기획/교과서2 ■ 경기도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 톺아보기
표지 이야기
“안녕들 다음은? 당신과 나의 정치”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박혜림 사진가 정정은 편집부장
“청년의 정치를 말하려면 상당한 뻔뻔함이 필요하다. 왜냐고? 이놈 의 사회에선 좌우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이 주는 것 없이 청년들을 막 굴려 먹었기 때문이다” (1월호 <2030 플레이포럼을 소개합니다> 중에서) 어느 당직자는 ‘ 청년’ 세대를 이야기하기가 지겹거나 죄스러운 지경 에 이르렀다고 고백했다. 청년에게 학자금 대출로 빚이나 지우고 비 정규직으로 착취하는 이 가혹한 사회의 모습을 정치권이 그대로 반 영한 꼴이라고도 말했다. ‘ 그러나 청년들은 여전히 삶을 견디며 다시 정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위 기사는 이렇게 끝맺었지만, 아니다. 그들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목소리로 정치를 말하기 시작했다. 2013년 12월 서 울 모 대학에서 “안녕들하십니까”라는 일성으로 시작하는 한 장의 대자보가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수많은 대자보들이 교문을 넘어 거리로 퍼져 나갔고 이내 전국을 뒤덮었다. 2월호 특집 <안녕들하십 니까, 그후>에서 청년 당원들은 ‘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의 정치가 무 엇인지를 이야기하자’고 제안한다. 2030 플레이포럼 강연과 밀양 희망버스에 참여한 노동당 청년 당원 들, 그리고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열풍에 함께 했던 수많은 청년 들의 모습을 담았다. 당신과 나의 정치는 앞으로 어디서, 어떤 방식 으로 조우하게 될까?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듯 그 인연이 짜맞추어지 면서 ‘ 미래에서 온 편지’는 완성될 것이다.
미래에서 온 편지 제6호 발행인 이용길 편집인 이장규 위원회 김건담 김성현 노정 박권일 장석준 정정은 정철수
조윤호 최백순 홍원표 교 열 강남규 김규백 김성현 노정 정정은 디자인 고미숙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 마포-라00403) 발행일 2013년 12월 26일 주 소 서울 마포구 서교동 371-12 비금빌딩 7층 노동당 전 화 02) 6004-2006, 2007 팩 스 02) 6004-2001 이메일 laborzine@gmail.com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인 쇄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973-15 원일컴 가격 10,000원
미래에서 온 편지
‘ 미래에서 온 편지’ 는 영국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작가, 미술가인 윌리엄 모리스가 1891년에 낸 소설 제목
News 『News from Nowhere』 을 우리말로 의역한 것입니다. from Nowhere
nowhere는 ‘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는 뜻입니다. ‘ 유토피아’ 라는 말의 원래 의미도 ‘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고 하지요. 이제 노동당의 기관지에 ‘ 미래에서 온 편지’ 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한국 사회의 답답한 현재에 햇살을 들이는 미래의 틈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고 보니 nowhere는 now+here(지금 여기)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미래가 되기 위해, 이 편지를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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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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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띄우며 물음표의 귀환|<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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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노동당 ■ 우리동네 진보정치 ① 대구 서구 장태수 의원, 어린이 도서관 <햇빛따라>
불온한 도서관, 정치를 초대하다|노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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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안녕들 하십니까,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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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강은하, 박하루, 주현우 당원을 만나다
“안녕들 대자보, 그 다음은? 당신과 나의 정치”|노 정 20
촛불, 안녕을 기다리다|임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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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교과서2 ■ 경기도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 톺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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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민주주의는 ‘ 교육’ 되어야 하는가?|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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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교과서를 꿈꾸게 하는 조심스런 첫 걸음|정상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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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시민’ 의 탄생에 교과서보다 더 필요한 건|김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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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눈으로 본 <민주시민> 교과서|박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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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서평 이재영, 압살당한 한 리얼리스트를 기리며|임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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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진보정치 열전 3|진짜 노동자 김순희(2부) “정치를 할 것이니 나 좀 도와주시오”|심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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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콜트콜텍을 읽는 열두 개의 시선 ①|이선옥
2014년 2월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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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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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는 연애처럼 : <놀란곱창> 사장님, 새해 첫 신입당원 되다|서울 서대문당원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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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앞에서 이러시면 안됩니다”:구로 당원들, 교학사 역사교과서 반대 1인 시위|양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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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기금 부문활동, 궁금해요? 궁금하면 5분만!!|김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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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토론 ■ 노동· 정치· 연대의 원탁회의 제안, 노동당의 대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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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 재편 임박했나 2011년을 반복하지 않으려면?|권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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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 재건하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미래로 보낼 편지|나경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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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구 아닌 ‘ 혁신’이 필요하다 현실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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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포럼 생활임금 연동 임금상한제를 도입하자|홍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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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좌파 이웃 좌파 ⑦ 미국에도 좌파정당이 있냐고?(2)|장석준
· 목차
삶과 문화 99
미디어 비평 청와대 진돗개와 다를 바 없는 청와대 기자들|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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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문화예술 당원찾기 “예술은, 삶은, 그리고 정치는 과정과 믿음”|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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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서재 승리를 위한 불온한 조직화를 시작하자|양솔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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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현대사 우리 동네 사립명문 성남고, 그 자랑과 치욕의 역사|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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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꿈 혼자 울지 말고|민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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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수의 DIY 공작소 ‘ 댓통령’ 풍자 알알이 담았다|강남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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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월급날이 싫은 이유|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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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다운 당원들의 유쾌한 청각생활을 지지하는 이달의 음원 다운로딩 가이드|장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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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입맛 소비자는 모른다, 요리사의 슬픈 얼굴|박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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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접으며 당파성과 태도|박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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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띄우며
물음표의 귀환 ‘ 안녕하냐’는 말은 사람이 사람을 만나 가장 먼저 건네는 물음입니다. 딱히 상대의 답을 듣 고자 묻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한국말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의문문에 대한 답이 의문문입니 다. 그 물음 아닌 물음에 다시 물음표가 붙었습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 2월호에서 “안녕들하 십니까” 대자보 열풍에 불씨를 당긴 노동당 청년 당원들의 목소리를 전합니다.
흔히 농반진반, ‘ 고담 대구’라 부릅니다. 보수정치의 산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동 네에서 진보정치는 싹을 틔울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던질 때 이곳에서 20년간 진보정치로 묵묵히 화답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구 서구의회 장태수 의원, 그리고 어린이 도서관 <햇빛따라>를 운영하는 김은자 당원입니다. 지방선거가 열리는 6월까지 <지금+여기 노동당>에서 지역정치를 바꾸어가는 사람들을 만나러 갑니다.
“왜 교과서는 노동을, 청소년 인권을 가르치지 않지?” 작년 11월 《미래에서 온 편지》 특집 < 대한민국 교과서 다시 읽기>에서 던진 물음입니다. 최근 경기도교육청에서 펴낸 <더불어 사 는 민주시민> 교과서는 그 합리적 물음에 대해 현장의 선생님들이 직접 답하면서 만든 놀라운 결과물입니다. 2월호 기획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학부모부터 노동과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 활동가에 이르기까지 여러 개의 시선으로 이 교과서를 집중조명합니다.
마지막으로 편집실에서 알립니다. 지난 12월호 <의원단일기> 기사 중 1970년대 주차금지 표지판 사진은 고(故) 전몽각 선생님의 사진책 『윤미네 집』에 수록된 사진입니다. 필자가 <한 글 바르게쓰기 조례> 준비 과정에서 참고한 사진을 보내주셨고, 편집실에서는 출처 확인 없이 사진을 수정하여 실었습니다. 허락 없이 사진을 무단 게재한 데 대해 작가 고(故) 전몽각 선생 님과 저작권자 이문강 선생님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당의 공식 기관지를 펴내면서 중대 한 편집 사고를 낸 데 대해 독자 여러분께도 송구합니다.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스스 로 묻고 또 의심하며 신중을 기하겠습니다. 2014년 1월 26일 <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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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모집 오늘 우리의 한 걸음이 길을 엽니다. 미래가 됩니다. 우리는 길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 사람과 자연이 공존 가능한 지구생태계, 차별과 소외 넘어 모두가 평등한 세상, …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밑그림을 그려나가면서 없는 길을 만들고, 스스로 길이 됩니다. 그래서 노동당의 꿈은 곧 <미래에서 온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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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노동당
우리동네 진보정치 ①
불온한 도서관, 정치를 초대하다 대구서구 장태수 의원, 어린이도서관 <햇빛따라> 노 정 편집실장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동네 “박근혜 지지율이요? 80%를 훌쩍 넘겼죠. 지난 대선 때 전국 광역시· 군· 구 가운데 대구 서구가 1등 먹었어요. 지역구 국회의원이 박근혜한테 직접 전화까지 받았대요, 고생 많았다고. 기초노령연금 공약을 어겨도, 전기세가 오른다고 해도 이곳 어르신들은 ‘ 나라에 돈이 없다 카는데 우짜겠노’ 그러고 말아요.”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의 전국 득표율은 51.55%. 널리 알려졌듯 대구· 경북에서의 압승이 박근혜의 당 6
어린이도서관 <햇빛따라>
선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특히 84.24%로 전국 최고 득표율을 기록한 곳이 바로 이곳, 서구다. 그 중에서 비산동은 18대 총선 당시에도 보수정당 득표율 89.3%로 전국 읍· 면· 동 가운데 최고기록을 세웠다. 대구 서구 비산동, 여기에서 20년간 진보정치를 묵묵히 일구어온 사람들이 있다. 대구 서구의회 장태 수 의원, 그리고 어린이도서관 <햇빛따라>를 운영하는 김은자 당원이다.
‘ 주민 서비스’에서 시작, 공동체 운동으로 진화하기까지… 20년 동네정치의 힘 당협 규모도, 동네 당원도 얼마 되지 않는다. 선거 때마다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당원은 늘 일곱, 여덟 명이었다. 그곳에서 장태수 당원은 2002년 서른 살의 나이에 대구· 경북 최연소 구의원으로 당선됐다. ‘ 과격한 학생운동 출신’, ‘ 선거 끝나면 떠날 외지 사람’, 심지어 ‘ 알고 보면 땅부잣집 아들’이라 는 악의적인 선전과 싸워야 했다. 주객관적인 조건 중 어느 하나 호락호락한 상황이 아니었건만, 당시 장 태수 당원은 두 배 가까이 압도적인 표차로 한나라당 후보를 꺾었다. 1992년 지방선거가 부활한 이래 대 구에서 진보정당 소속 후보가 당선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8년 뒤인 2010년, 진보신당 당적으로 다시 당선됐을 때는 ‘ 첫 야권 재선 의원’이라는 타이틀이 하나 더 붙었다. 재선 후 장태수 의원은 서구의회에서 사회도시위원회 상임위원장으로 첫 2년을 숨가쁘게 뛰어다 녔다. 나머지 임기 2년은 구의회 부의장으로 임명돼 더욱 바쁜 시간을 보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동네에서 최초의, 유일한 진보정당 기초의원은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을 까? ‘ 장태수’를 이야기하면서 <서구문화복지센터>, 그리고 <햇빛따라>를 따로 떼어놓을 수는 없다. 장태 지금+여기 노동당 7
수 의원과 <햇빛따라> 도서관장 김은자 당원은 지금도 깎듯이 존대하는 20년 지기 선후배 사이다. 아직 이 땅에 진보정당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던 1990년대 중반, 노동운동의 중심지였던 비산동에서 지역정치를 하려고 뭉친 게 시작이다. “당이 없던 시절 주민들을 만나고 정치란 걸 하기 위해서 매개체 삼아 만든 게 <서구문화복지센터>였 어요. 실직가정 지원사업에 <서구문화복지센터>가 결합하면서 주민들한테 쌀을 갖다주기도 했고, 전세 확정일자 안 받아놨다가 전세금 못 받고 쫓겨난 사람들에게 무료 법률상담도 했어요. 지금의 <햇빛따라> 와 달리 ‘ 서비스’의 성격이 강했죠. 그때 도움 받은 분들이 2002년 선거 때 ‘ 어려울 때 쌀 팔아준 사람’ ‘ 전세금 찾아다준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다녀주신 덕을 많이 봤어요(웃음).” 장태수 의원의 말대로 <서구문화복지센터>는 주민 서비스 센터의 성격이 강했다. IMF 당시 실직가정 생계비지원 사업의 서구지역 창구 역할을 맡았는가 하면, 전세확정일자 도장을 받은 세입자가 5%도 안되 던 시절 전세상담을 7천 건 가까이 진행하기도 했다. 국가기관이 했어야 할 주민 복지 사업, 대주민 업무 를 집행한 셈이다. 그때 동네에서 7~8년을 꾸준히 활동하고 주민들을 만났던 지난 시간이 첫 당선의 실질 적 발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어린이도서관 <햇빛따라>는 성격이 다르다. 주민과 진보정당 정치가 만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겹치고, 주민이 참여하고 함께 만드는 ‘ 지역 공동체 운동’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점에서 갈라진다.
주유소 지하 셋방살이에서 시작, 3년 만에 재정 자립 이뤄내 <서구문화복지센터>의 기반은 2008년 민주노동당-진보신당 분당 이후 <마을공동체 좋은 이웃>으로
웃음이 터진 김은자, 장태수 당원 (사진 : 공태윤 조직실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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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옮겨왔다. 그들이 직접 만들고 가꾸었던 지구당 사무실을 떠나 주유소 지하에 방을 얻어서 <놀토 마 을학교>를 꾸렸다. “분당되고 나서 <서구문화복지센터> 몫의 보증금 500만원 달랑 들고 나왔어요. 민주노동당 때 책읽기 모임 꾸렸던 엄마들을 모아놓고 ‘ 도서관 프로그램을 만들자, 이제는 돈도 만 원씩 내야 하고 회원도 모아 야 한다’고 제안했더니 그러자고 하더라고요. 근데 무슨 5층짜리 번듯한 ‘ 복지센터’로 알고 왔다가 주유 소 지하로 끌고 들어가니까(웃음) 뭔가 팔아먹는 줄 알고 ‘ 피라미드 조직이냐’ 묻는 사람들도 있었어요(좌 중 폭소).”
주유소 지하 셋방살이에서 시작한 <놀토 마을학교>는 2009년 어린이도서관 <햇빛따라>로 이어진다. 아이들과 엄마들이 끊임없이 오간다. 인터뷰를 하러 간 날에도 아이들이 뒹굴뒹굴 책을 보는 한켠에서는 엄마들이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책만 읽는 공간이 아니다. 베트남문화 배우기, 염색놀이, 도심 지 역사체험/골목탐방, 1박2일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김은자 당원과 주민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프로그 램을 기획하고 만들어낸다. 일단 ‘ 재미’가 있으니 아이들과 주민들의 발길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좋은 이웃> 회원까지 도합 300명 가까이 되는 회원들이 회비를 낸다. 부채 청산을 위해 2년간 일일호 프도 열었다. 처음 공간을 만들 때 얻은 빚은 2년만에 다 갚았다. 이전 기금까지 마련한 상태다. 독자적인 성장의 기반을 확보한 셈이다. 그보다 더 든든한 자산은 ‘ 사람’이다. 동네 미장원에서는 앞머리 자른 돈을 후원금으로 따로 모아 보내준다. 크리스마스에 맞추어 책 선물을 들고 나타나는 ‘ 도서산타’ 프로그램 1주 일을 남겨놓고 70만 원의 후원금이 갑자기 들어오기도 했다. 품이 많이 드는 일감이 있을 때 작정하고 팔 걷어부치고 나서는 사람들이 20~30명쯤 된다. “사람을 잘 알아야 해요. 영업하는 사람들은 돈으로 챙겨주지만, 진보운동 하는 우리는 마음으로 챙겨 주는 거죠. 앞머리 자른 돈 모아서 후원해주는 미장원 엄마도 우리 회원이 데려와 주신 거예요. 후원하는 돈이 아무리 작더라도, 그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궁금해 해요, 드러내지는 않지만. 저희는 문자 메시지로 사진까지 보내줘요, 이렇게 저렇게 썼다고. 고맙다고. 소식지도 보내주고, 지역 언론에 기사로 보도되면 꼬박꼬박 알려주곤 해요.”
“도서관 운동 하려고 시작한 게 아니예요” 정치하려고 만든 도서관 김은자 당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궁금한 게 하나 있다. 정당, 그것도 그냥 진보정당에서 만든 거점공간이다. ‘ 정치색’에 거부감을 갖는 주민은 없냐고 물었더니, 김은자 당원은 어리둥절하다는 얼굴 로 이렇게 대답했다. “2008년에 도서관 만들자고 ‘ 지하조직’할 때 장의원이랑 얘기했어요. 정치를 안할 거면 여기서 접고, 할 거면 새로 시작해야 된다고. (당을) 숨기려면 아예 시작도 안했을 거예요. 회원들 중에 불편해하는 사 람들도 있죠. 별로 신경 안 써요. 저엉 마음에 안 들면 떠나야죠. 오히려, 가끔 ‘ 장태수 의원이 하는 도서 관 맞냐’고 물으며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어요. 저는 기분 나쁘죠, 제가 운영하는데(좌중 웃음). 민주노동당 지금+여기 노동당 9
때 이 엄마들은 대선후보 지지선언도 했었어요. 2010년에 장태수 의원 선거 때는 마지막 날 밤 열두 시까 지 우리 엄마들이 골목골목에 서서 선거운동 했고요.” ‘ 관’과의 관계에서 ‘ 노동당’이라는 정당과의 연관 때문에 당하는 불이익 같은 건 없냐는 물음에도, 김 은자 당원은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도움을 받죠, 의원이 있으니까. 장태수 의원이 당선되기 전에는 현수막 하나 달아도 금방 떼니 까 힘들었어요. 지금은 도서관 확장하는 데도, 후원자 늘리는 데도 도움이 돼요.” 뿐만 아니다. 구의회에서 도서관 지원비 삭감에 대한 안건이 상정되던 날엔 아이들과 주민들을 데리고 의회 방청을 하러 갔다. 어떤 사람이 의원이 되어야 하는지 주민들의 눈으로 직접 보고 듣고 온 것이다. 장 태수 의원이 조례를 발의하고 제안 설명회가 열렸을 때 회원들은 주변에 관심있어 하는 사람들까지 함께 데리고 왔다. 주민들의 입에서 ‘ 우리 조례’라는 표현이 나오는 걸 보며 그들은 놀라웠다고 했다. “작년부터 도서관에서 정치를 주제로 강좌도 열기 시작했어요. 인권 문제, 생활에 왜 정치가 필요한지, 조례가 왜 중요한지, 이런 걸 일상 속에 녹여 내려고 해요. 구 예산 중에 노인회에 지원되는 경비가 얼마라 고 설명해주면 대뜸 ‘ 우리 도서관은 왜 안 줘요?’ 물어요. 노인들은 표가 되니까요, 그래서 투표 꼭 하셔 야 돼요, 그렇게 얘기해요. 기초의회가 왜 필요하고 지방선거에서 왜 투표에 참여해야 되는지, 어떤 사람 이 의원이 되어야 우리의 삶이 나아지는지 아주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거죠.”
“우리 활동의 처음도 끝도 이곳, 비산동이어야 해요” <햇빛따라>의 오늘은, 유능한 기획자인 동시에 열정적인 조직가들이 모여서 동네를 어떻게 바꿀 수 있 는지 보여준다. 그렇게 꾸준히 갈고 닦은 실력을 발판 삼아 진보정당이 지역 의회에 입성하면 그 파급력 은 배가 된다. 저소득층과 맞벌이 부부가 밀집한 낙후된 동네에 육아종합지원센터가 세워졌다. 타 지역에만 편중돼 있던 예방접종 의료기관이 서구에도 늘어났다. 청소노동자를 비정규직으로 채용하려던 구청의 계획을 막아냈고, 전통시장 상인들과 함께 대형마트 횡포를 규제하는 조례를 만들었다. 원칙없는 인사도 크고 작 은 비리와 부실행정도 장태수 의원의 날카로운 지적을 비켜가지 못했다. 다른 곳도 아닌 대구에서, 거대 야당도 아닌 군소 진보정당이 20년에 걸쳐 묵묵히 씨앗을 뿌려 일구어낸 소중한 결실이다. 대구 서구 비산동은 한때 공단이 있었고 노동운동의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노동자도 노동운동가들도 떠나가고 급격히 빈곤화가 진행되고 있다. 열두 명 구의원 중에 비(非)새누리당 의원은 장태수 의원 딱 하 나뿐이다. 현 정권을 비판하는 피켓팅을 하고 있으면 지나가는 어르신들한테 욕을 실컷 들어먹어야 한다. 그곳에서 장태수 의원과 김은자 당원은 ‘ 우리 활동의 처음도 끝도 이곳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노동당마저 여기를 떠나면 우리가, 노동당의 존재 이유가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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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안녕들 하십니까, 그 후 “안녕들하십니까?” 물음이 2013년 말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다. "저도 안녕하지 못합니 다!" 수많은 사람들의 화답이 이어졌다. 한 장의 대자보로 시작됐지만 대자보라는 형식을 넘 어 1인시위로, 집회로, 각종 세미나와 공부모임으로 다양하게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첫 번째 대자보를 붙여 ‘ 안녕들’ 에 불씨를 당긴 주현우 당원뿐만이 아니다. 노동당의 많은 청년 당원들이 ‘ 안녕들’ 의 후속기획에 동참하거나 주도하고 있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 린다. <미래에서 온 편지>에서 ‘ 안녕들’ 에 참여한 청년 당원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사진 : 박혜림
사진 : 박혜림
특집 / 안녕들하십니까, 그 후
“안녕들 대자보, 그 다음은? 당신과 나의 정치” 인터뷰 : 강은하, 박하루, 주현우 당원을 만나다 “자기 정치, 자기 이야기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좌초한다고 봐요.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요. 전지만 많이 팔려나 갔을 따름이죠. 이제 각자 무엇을 할 것인지 얘기하자고요.” ■사회 : 윤현식 정책위원회 의장 ■대담 : 강은하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1
박하루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2 주현우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3 (대담자들은 자신의 소속이나 인적 사항을 이름 옆에 쓰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난감하다.)
■인터뷰 촬영 : 정정은 편집부장 ■정리 : 노 정 편집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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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보니 20일이 지났다고 했다. 정신차려 보니 새해가 밝았다고도 했다. 지난 연말 ‘ 안녕들하십니까’ 대 자보 열풍에 불씨를 당긴 노동당 당원들의 이야기다. 보신각 타종 행사를 처음 가봤다고도 한다. “단결된 민 중은 패배하지 않는다”라고 쓴 손팻말을 들고서 그들은 새해를 맞이했다. 조선일보는 노동당이 무슨 ‘ 지령’을 내려서 청년 당원들이 ‘ 공작’을 펼친 양 악의적인 보도를 내보냈지만, 억울하다. 우리도 당신들처럼 SNS를 보고서야 처음 알았단 말이다. 강은하 당원도 조선일보 기사를 보고서 야 처음 대자보 쓴 주모씨라는 양반이 같은 당원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조선일보의 과잉 친절은, 그 러나 노동당에게는 가혹했다. 언론사에서 당으로 문의 전화가 쇄도했다. 기자들이 ‘ 주현우 당원의 연락처 를 가르쳐 달라’고 애원을 해도, 우리는 한 번도 본인의 허락 없이 당원정보를 유출한 적이 없다. 언론의 보도 경쟁이 한풀 사그라들기를 기다려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에서 대담 자리를 마련했 다. 세 사람의 당원을 초청했다. 강은하 당원은 대자보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안녕하지 못합니다>를 썼다. 박하루 당원은 청소년들과 함께 <청소년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스북을 운영하고 있다. 주현우 당원은 <안녕 들하십니까> 첫 대자보를 게시해 전국에 대자보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세 사람과 함께 한 대담은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사회는 윤현식 정책위원회 의장이 맡았다.
주현우 “대자보 한 장을 썼으면, 그 다음에 집회를 나가는 건 일도 아니에요” 윤현식 : 처음에 대자보가 처음 SNS에 돌기 시작했을 때엔 이렇게까지 파급이 커질 줄은 미처 예상을
못했어요. 주현우 : 제가 제일 그랬죠. (좌중 웃음) 윤현식 : 주현우 씨도 유명해졌지만 늘 쓰던 ‘ 안녕하냐’는 인사말도 하루아침에 유명해졌어요. 그렇게
만든 장본인인데요. 주현우 : 늘상 알지만 아는 게 아니었던 것들, 그것을 뒤집는 방식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제 방에
커다란 아스테이지(두꺼운 접착식 비닐)를 붙이고 여러 문구를 쓰고 지우고 쓰고 다시 지우길 계속했어 요. 그러다 ‘ 안녕들하십니까’ 가 뽑혔죠. 의도는 충분히 전달된 것 같아요. 윤현식 : 항간에는 술 한 잔 하고 일필휘지로 갈겨쓴 거 아닌가 하는 얘기가 있어요(웃음). 주현우 : 원고를 쓰고 나서, 한 잔 했죠(웃음). 종이에 옮겨 적을 때 옆에 시체 두 구가 있었어요(좌중웃음).
자기들이 술먹고 쓰러져 있는 동안에 이런 글이 나올 줄은 몰랐다고 하더라구요. 전날 술 먹으면서 ‘ 대자 보라도 써 붙여야 되는 거 아니냐’고 얘기는 했었지만. 윤현식 : 사실, SNS에서 시작할 수도 있었고 홈페이지를 만들 수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원시적이고 단
순하면서도 노동집약적인(!) 대자보라는 매체를 선택한 이유는 뭔가요? 주현우 : 연속적으로 번져나갈 거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자기 공간이 없는 사람에게는 대자보를 쓰는
특집 안녕들하십니까, 그 후 13
행위 자체가 이미 정치예요. 가족과 같이 사는 사람 들은 자기 방에 문 잠가 놓고 써야 되는데(좌중 웃음) 쓰면서 자괴감이 들 거예요. 내가 왜 이러고 써야 되 지? 거기서부터 느끼는 게 있을 거예요. 종이를 사 서, 글을 쓰고-꼭 손으로 써야 해요- 그걸 들고 나 가서 붙이는 과정 그 자체가 실천이에요. 그 과정이 자기 자신을 바꾸는 시발점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요. 대자보 한 장을 썼으면, 그 다음에 집회를 나가는 건 일도 아니에요. 박하루 : 대자보를 붙이는 것도 문제예요. 버스 정
류장 같은 곳에서는 사람들이 엄청 많이 보거든요. ‘ 으악!’ 재빨리 붙이고 후다닥 가요. 자릴 뜨자마자 사람들이 핸드폰으로 사진 엄청 찍어대고.
“손으로 직접 대자보를 쓰고, 그걸 들고 나가서 붙이는 과정 그 자체가
윤현식 : ‘ 안녕들’은 매체 자체가 메시지라는 말
이 가장 어울리는 현상이었어요. 주현우 : 저랑 함께 한 친구가 그런 얘길 했어요,
실천이죠. 자기 자신을 바꾸는 시발
대자보는 세균전이라고. 말하는 건 허락받아야 되는
점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게 아니라는 것만 퍼뜨리면 우리가 이긴다. 신경쓰 지 말고 가자고 하더라고요. 윤현식 : 이 현상을 보면서 상당히 흥미로웠던 점
이 ‘ 공감’이에요.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관계의 단절이잖아요. 모든 걸 개인이 알아서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를 끊어놓는 신자유주의의 속성이 아주 현실화된 곳이 한국사회라 여겼는데, 대자보 한 장으로 ‘ 공감’이 생겨났어요. 주현우 : ‘ 안녕들하냐’는 물음은 다수를 향하지만, 안녕한지 아닌지는 스스로 고민하게 되는 거죠. 사
실 알고 봤더니 나만 안녕하지 못한 게 아니라 모두가 안녕하지 못하구나, 공감하게 된 거죠. 심지어 아이 돌까지!
강은하 “성소수자의 이름으로 쓴 두 번째 대자보, 붙일 곳이 없었어요” 윤현식 : 아이돌 그룹 샤이니의 종현이 SNS 프로필 사진에 강은하 씨 대자보를 올려서 더 화제가 됐죠?
저는 강은하 씨의 대자보를 읽다가 ‘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에도 안녕하지 못하다’라는 첫 대목에서 부터 턱 하고 막혔어요. 안녕함을 유보하며 살아선 안된다고 하셨는데요, 본인이 생각할 때 유보되지 말 14
아야 할 안녕함이란 어떤 걸까요? 강은하 : 내가 갖고 있는 정체성들에 대해서 부정당하지 않고, 혐오나 비난을 맞닥뜨리지 않는 거예요.
가령 노동자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배타감이나 혐오감 가진 사람들 참 많잖아요, 국민의 90% 이상이 노동 자임에도 불구하고. 성소수자라는 이름도 굉장히 힘들었어요. 내가 왜 이렇게 날 숨기고 살아야 되지? 억 울했어요. 학교를 다니는 12년 내내 제가 가진 이름을 계속 부정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이젠 도 망치고 싶을 때 도망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힘이 됐 을 정도예요. 자기가 가진 이름에 대해 부당한 질문 을 받거나 혐오와 비난을 맞닥뜨리는 것,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안녕함을 유보하지 말고 싸워야 한다고 생 각해요. 윤현식 : 안녕하지 못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음을
드러내고, 또 대자보를 붙이는 과정도 안녕하지 못 했을 것 같아요. 강은하 : 저도 원고 쓰고 나서 진로와인 먹었어요 (좌중 웃음). 며칠 전에 두 번째 대자보를 쓰고 나서 참
난감했어요. 어디다 붙이지? 성소수자는 대학생과 동류어가 아니잖아요. 대학교 안에 붙이고 싶지 않 았어요. 그런데, 붙일 데가 없는 거예요. 종로에 붙 이면 떼일 것 같고, 이태원은 상업화된 공간이고, 대 학은 피하고 싶고, 집 담벼락에 붙이려면 집주인과 싸워야 되고(웃음). 많은 걸 느끼게 됐죠.
“종로에 붙이면 떼일 것 같고, 이태원
“성소수자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스북 페이지를
은 상업화된 공간이고, 대학은 피하
만들고 그 대자보를 찍어서 올렸더니, 악플이 엄청
고 싶고,집 담벼락에 붙이려면 집주
나게 달렸어요. 학교 담벼락에 붙인 첫 번째 자보와
인과 싸워야 되고.”
다른 점은 ‘ 어느 대학 어느 학과를 다니는 사람’이라 는 타이틀을 뺀 것 밖에 없어요. 그리고 성소수자의 다양성을 좀 더 포괄적으로 언급했다는 정도? 그런데 대뜸 “개나소나 안녕하지 못하냐”, “안녕들의 핵심 은 철도민영화다” 이런 댓글들이 달리더라고요. (헉!) 주현우 : 은하 씨의 대자보가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스북에 올라오자마자 댓글이 주루룩 달리면서 ‘ 시
궁창’이 됐어요. 그러다 ‘ 지원사격’을 해주시는 분들이 하나 둘 들어와서 초토화시켜버렸죠. 댓글을 달 의지를 아예 없어버렸어요. 강은하 : 역시 세상은 살 만한 곳이었어요(웃음). 자칫 사람들로부터 ‘ 얘는 왜 이렇게 나대지?’ 하는 소 특집 안녕들하십니까, 그 후 15
리를 들을까봐 걱정했었는데,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었어요.
박하루 “선동이 나쁜 걸까요?” 주현우 : 대학생들도 많이 썼고 직장인들, 청소년들도 많이 썼는데 저는 이제까지 나온 대자보들 중에
제일 잘 쓴 건 청소년들의 자보라고 생각해요. 가장 덜 걸러지고, 가장 날것 그대로였기 때문이에요. 그게 터져 나올 수 있게 된 게 가장 잘된 일이었다고 봐요. 윤현식 : 주현우 씨의 대자보가 붙었을 땐 그리 큰 사건처럼 느껴지지 않았는데, 고등학교에 대자보가
번지기 시작하면서 ‘ 사건’이 됐어요. 한국사회에서 학교, 특히 고등학교는 ‘ 그림자’만 모여있는 곳이죠. 침묵과 무관심을 강요받는 세대구요. 그런데 그 세대가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거예요, 그것도 자기 들을 가두고 있는 ‘ 학교’라는 공간에서. 깜짝 놀랐어요. 박하루 : 자기의 정치적 의견을 내지 못하도록 거세당하는 곳이죠. 대학교와 다르게 고등학교 안에 있
는 게시판은 대자보 같은 걸 붙일 수 있는 공간이 아 니에요. 그런 대자보들을 학교에 붙임으로써, 일종 의 ‘ 선동’인 거잖아요,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거죠. 윤현식 : ‘ 선동’이라는 표현을 쓰셔서요, 고등학
생들이 붙인 대자보에 대해 ‘ 선동’의 측면에서 바라 보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한테 한 마디 한다면? 박하루 : 선동이 나쁜 걸까요? 지금 우리가 굉장
히 불공평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거기에 사 람들이 동의하고, 또 다른 사람이 대자보를 붙이고, 이야기하고… 그런 게 ‘ 선동’이죠. 그렇게 나쁜 의미 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요. 어리다고 해서, 청소년이 라고 해서 못할 건 없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그걸 막
“청소년이 어떤 말을 하고 있다는 데 주목하는 게 아니라 ‘ 아이고, 기특하 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게 굉장히 싫 었어요.”
고, 대자보 붙인 학생을 CCTV로 찾아서 징계를 내리 겠다고 협박하고, 교장실에 불려가고 부모님 소환되 고… 그런 게 더 나쁜 거죠. 윤현식 : 일부 ‘ 진보적인’ 기성세대들은 ‘ 우리 아
이들이 아직 죽지 않았다’ ‘ 기특하다’ 이렇게 반응 하기도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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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루 : 청소년들의 ‘ 안녕들하십니까’를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에 너무 화가 났어요. 청소년이 어떤 말
을 하고 있다는 데 주목하는 게 아니라 ‘ 아이고, 기특하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게 굉장히 싫었어요. 대학 생과 청소년과 직장인을 각각 구분하면 또 따로 청소년만 빼놓고 얼마나 기특한지 얘기할 것 같아서, 청 소년을 고립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대학생, 청소년,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수없이 많이 터져나온 목소리들 중의 하나라고 말해야겠다 싶어서, 집회도 갈 수 있는 데는 다 나갔어요. 윤현식 : ‘ 기특하다’고 말하는 건 결국, ‘ 사람’이 아니라 ‘ 애들’로 본다는 거죠. 사실은 기특해 할 일이
아니라 미안하고 부끄러워 할 일인데 말이죠. 주현우 : ‘ 안녕들’ 대자보를 쓰고 나서 엄청나게 많은 메시지를 받았어요. 기성세대가 보내는 메시지는
고해성사가 굉장히 많아요. 그때는 모든 걸 다 이룬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고, 오히려 최 악의 상황임을 알았다고. 그렇게들 부채감을 표현해요. 그 부채감으로 앞으로 뭘 어떻게 할 것인가는 별 개의 문제겠지만. 적어도 하나는 분명한 게, 더 이상 꼰대질을 할 수 없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확실히 많아 진 것 같아요. 강은하 : 아버지가 옛날에 노동운동 하셨던 분인데 아직도 향수를 갖고 계세요. 제가 대자보를 쓰고 나
서 인터뷰한 기사를 보내드렸더니 놀랍게도 ‘ 투쟁하는 진짜 노동자 같다’는 답장이 왔어요. 아빠가 그 말 을 20년 동안 못 하고 살아오셨는데, 그런 이야기를 카톡으로 주고받을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윤현식 : 젊었을 때 민주화 운동을 했던 세대가 결국 자본주의 시스템에 안주하고 후배 세대에게 경쟁
을 강요하는 시대인데요. 우리 세대는 이런 걸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강은하 : ‘ 기성세대’라고 낙인을 찍으면 아무 얘기도 할 수 없을 거예요. 한 가지 확실히 지적하고 싶은
데, 자기가 가진 권위를 성찰하지 못하면 상대방에게 이중적이고 부당한 요구를 할 수 있어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공부만 해야 하고 ‘ 미래의 일꾼’ 이런 소리 들으며 20년을 살아온 청년 세대에게 ‘ 개념이 없다’ ‘ 정치를 모른다’ ‘ 무관심하다’ 말하는 건 굉장히 무책임한 소리죠. 상징적 권위에 대해 성찰을 해야 제대 로 된 이야기가 통할 수 있어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전지만 많이 팔렸을 뿐 윤현식 : 대자보들을 찬찬히 보면 각자 자기 이름에 맞는 ‘ 안녕’을 말하고 있거든요. 조선일보뿐만 아
니라 소위 ‘ 운동권’ 이라는 사람들까지도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헷갈리고 있어요. 촛불이 가진 효과와 의미에 상당한 차이가 있을 거라고 보는데요. 주현우 : 촛불이 확 타오르는 불길이라면, ‘ 안녕들’은 젖어있는 장작을 말리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각
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안녕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들이 ‘ 안녕들’이라는 커다란 보자기에 씌워져 있는 것 같아요. 이게 터져 나오려면 추진력이 필요해요. 촛불은 촛불로 끝장을 보겠다는 생각이었다면, 안녕들은 대자보로 끝장을 보려는 게 아니에요. 모두가 자신의 의제로 다음을 준비하고 있을 거예요. 특집 안녕들하십니까, 그 후 17
강은하 : 첫 자보에서 성소수자와 여성 문제를 얘기하고 싶었는데 본의 아니게 제가 다니는 학교에서
최초의 자보가 돼버렸어요. 이후 어떻게 할지 토론을 해야 하겠지만, 각 대학교 이름으로 만들어진 <○○ 대 안녕들>은 해소돼야 된다고 봐요. 그렇지 않으면 자기 한계를 넘지 못해요. 진짜 자기 정치가 무엇인지 얘길 했으면 좋겠어요. 주현우 : 철도 파업, 밀양 송전탑, 테트리스처럼 수백 개의 의제가 마구 떨어져요. 물론 모두 다 중요하
죠.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는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그 많은 대자보 중에 자기 정 치, 자기 이야기를 한 사람은 몇이나 됐을
“‘ ○○지역 안녕들’ ‘ ○○대 안녕들’ 의 형식 이 아니라, 각자 쪼개어져서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정치가 무엇인지를 얘기하지 않으면 ‘ 안녕들하냐’ 는 질문조차 진부해질 거예요.”
까. 자기가 가진 다양한 정체성을 이야기 한 사람들이 너무 적었어요. 안타까웠어 요. 처음에 ‘ 안녕들’의 불씨를 당겼던 사람 들은 해소의 방향으로 갈 거예요. ‘ ○○지 역 안녕들하십니까’ ‘ ○○대 안녕들하십 니까’의 형식이 아니라, 각자 쪼개어져서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정치가 무엇인지를 얘기하지 않으면 ‘ 안녕들하냐’ 는 질문조차 진부해질 거예요. 박하루 : 12월 28일에 열렸던 <뜨거운 안녕>은 실험적인 집회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통적인 구호 안
외치고,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내려는 흔적들이 역력하게 드러났던 것 같아요. 새로운 청년운동의 시발점
12월28일 민주노총 총파업 집회 (사진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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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됐으면 하는 욕심이 있어요. 주현우 : 집회를 준비하면서 마당극 스타일로 가보자고 논의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무대 설치상 불가
능하다고 하더라고요(웃음). 8박자 구호를 전혀 다른 내용으로 시도해본다든지, 다음 발언자를 사회자가 받아 적는 게 아니라 발언한 사람이 지목한다든지, 여러 가지 시도를 했죠. 시간과 돈이 부족하다는 이유 로 항상 고민을 미뤄왔던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많이 참여할 수 있을지 그 방식을 고민하지 않으면 일반인들이 끼어들 틈이 없어요. 저나 처음에 저랑 같이 시작한 친구들이나, 시작을 했으니 책임 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끌어가고는 있지만, 집행위원장도 안 뽑았어요. 연락망 정도를 갖는 느슨한 네 트워크의 형식이 되지 않을까요? 네트워크는 유지되겠지만, 결국은 해소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 해요. 계속 ‘ 안녕들하냐’ 고 묻기만 하면 다 망해요, 자기 사상이 명확하게 만들어지지 않으면. 학습을 할 단위가 만들어져야 할 거예요.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좌초한다고 봐요.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 어요. 전지만 많이 팔려나갔을 따름이죠. 이제 각자 무엇을 할 것인지 얘기하자고요.
1월 초 서울의 한 대학에서는 교내 청소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며 ‘ 대자보 백일장’이 열렸다. 며칠 전 페이스북에는 한국 사회의 여성 혐오에 일침을 가하는 “댁의 김치는 안녕들하십니까”라는 그룹이 생 겼다. 정말 ‘ 안녕들’은 지역과 학교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적 의제를 중심으로 다시 구성되는 것일까? 그런가 하면 ‘ 학습하지 않으면 이 흐름은 그냥 그대로 사그러들 것’이라는 주현우 당원의 우려에 화답 이라도 하듯, 곳곳에서 토론회가 열리 고 각종 세미나 모임들이 만들어졌다. 어딘가에선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 고, 또 누군가들은 얼마 전 발간된 <이 재영 유고집> 읽기 모임을 시작했다. 전국에서 수많은 ‘ 이름’ 을 걸고 만들
‘ 안녕들하십니까, 그 후’를 물으며 이들을 만난 대담 자리에서 필자는 ‘ 헉’ 말문이 막히고 말았 다. “그래서, 당신은 그 다음에 뭘 할 거냐는 거 죠” 라는 질문이 나에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어진 대자보들을 한데 모아 단행본을 낸다고도 한다. 노동당 당원임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지만 많은 청년 당원들이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거 나 주도하고 있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 안녕들하십니까’ 열풍에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이후가 무엇으로 이어질지 약간은 회의적이었 음을 고백한다. 과도하게 기대했다가 과도하게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자기방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래서다. ‘ 안녕들하십니까, 그 후’ 를 물으며 이들을 만난 대담 자리에서 편집자는 ‘ 헉’ 말문이 막히고 말았 다. “그래서, 당신은 그 다음에 뭘 할 거냐는 거죠”라는 질문이 나에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특집 안녕들하십니까, 그 후 19
사진 : 박혜림
특집 / 안녕들하십니까, 그 후
촛불, 안녕을 기다리다 무계획적인 대중의 자발성에서 출발해 빠르게 확산되었다는 점에서 ‘ 안녕들’은 촛불과 겹치지만 그보다 더 큰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 정치’다.
임민경 청년학생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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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알다시피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물음은 2013년 겨울을 뜨겁게 달구었다. ‘ 안녕들하십니까’ (이하 ‘ 안녕들’ ) 현상이 학교를 중심으로 확산된 만큼, 방학을 맞이하면서 분위기가 한풀 꺾인 듯도 보인다.
누군가는 “역시 이것도 얼마 못 가는구나” 아쉬움과 자조를 뱉고 있을 수도 있겠다. 이 글은 그런 당원들 을 대상으로 하는 글이다. ‘ 안녕들’ 현상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2008년의 대규모 촛불집회를 떠올린다. 촛불집회 전후로도 대학 생이 주축이 된 정치적 행동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지금의 현상에서 촛불집회를 떠올리 는 까닭은, 무계획적인 대중의 자발성에서 출발해 빠르게 확산되었다는 점에서 둘 간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발견하는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 안녕들’은 2008년 촛불 집회와는 여러 차이점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차이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발굴해야 한다.
스스로의 행위가 ‘ 정치적 행위’ 임을 인지하다 촛불집회와 ‘ 안녕들’ 현상을 비교하면서 사람들은 주체의 자발성이 공통점이라 여긴다. 그러나 이러 한 관점은 둘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간과하고 있다. 촛불집회에 나왔던 대중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 정치’ 라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민영화를 비롯한 여러 의제들이 나왔지만, 결국 촛불집회를 처음 만들었 던 의제는 ‘ 광우병’이었다. 촛불집회에 나온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광우병이라는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 싫어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이명박 아웃”이라는 명백한 정치적 구호에도 불구하고, 한 편으로는 촛불집회가 정치와는 큰 관련이 없는 문제라고 여겼다. 따라서 이들은 촛불집회가 정치적인 집 회로 분류되는 것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고 ‘ 우리에게 정치색을 입히지 말라’고 수차 강조 했다. 촛불집회를 부정적으로 보도하는 보수 언론뿐만 아니라 촛불집회에 참여 하는 정치집단에게도 그리 요구했다. 이와 달리 ‘ 안녕들’ 자보를 쓴 사람 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정치적인 행위임 을 이해하고 있다. 이들은 자보를 훼손
자보를 훼손하는 사람들에게 ‘ 안녕들’ 은 “불만 이 있다면 너도 여기(공론장)에서 자보를 쓰라, 그것이 민주주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일 베’ 가 붙인 자보에 반박 자보를 게재한다.
하는 사람들에게 “불만이 있다면 너도 여기(공론장)에서 자보를 쓰라, 그것이 민주주의다”라고 말한다. 이들에게 자보를 떼는 행위란 정치적인 목소리에 대한 억압과도 같다. 그래서 이들은 소위 ‘ 일베’로 대표되는 이들이 붙여놓은 테러적인 자보에 도 “룰을 지켜줘서 고맙다”며 반박 자보를 게재한다. 지난 22일은 민주노총 침탈 저지 집회였다. 예전에는 집회에 한 번도 나와 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민주 노총을 지켜야 한다는 대의를 가지고 ‘ 안녕들’의 이름으로 그날 거리에 나왔다. 물론 그들에게 민주노총 이 갑자기 친근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침탈 당일에는 이들도 민주노총의 의미와 그를 지켜야 특집 안녕들하십니까, 그 후 21
한다는 목적의식을 공감하고 있었다. 명백한 ‘ 정치’ 에 동참한 것이다. 뒤에 이어진 총파업에 대한 여론도 과거와는 달랐다. “한 번쯤 불편해도 괜찮으니 민주노총이 잘 해보라”는 격려가 이어졌다. 이는 과거 이 랜드와 화물연대의 투쟁이 촛불집회와 괴리되어 큰 호응을 받지 못했던 점과 명백히 구분된다. ‘ 민영화’에 대한 반대나 반(反)박근혜 정서 탓이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이들의 호응을 단지 그런 식으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 오히려 박근혜 퇴진을 확실하게 지향하는 시국대회의 집회에는 ‘ 안녕들’이 큰 호응을 보내지 않았다. 이들은 박근혜가 퇴진한다고 해서 모든 게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 박근혜 퇴진은 중요한 구호이지만, 대안 없는 외침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 노동’이라 는 보편의제에 호응하게 된 것이다. 철도 파업 상황이 종료되면서 갈 곳 잃은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 의혈 안녕들’ 로 모인 사람들은 이제 학내 청소노조 투쟁에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있다. 이는 단지 민영화 반대 나 반박근혜 정서가 ‘ 안녕들’로 모인 이들이 공유하는 정서의 전부가 아님을 증명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것이 정치적인 행위라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촛불집회에 비하 여 지금 현상의 주체들 중 상당수는 실제 매번 거리로 나오지 않는다. 촛불집회의 대중들이 가지는 감정 이 정치적인 것에 대한 특수화와 혐오였다면, 지금 현상에서 대중들이 가지는 감정은 “그래도 결국 아무 것도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는 회의감이며, 이로 인해 정치적인 집회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은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 자기서사’ 를 통해 정치를 말하다 ‘ 안녕들’ 현상의 시작이 되었던 자보는 총 두 장이다. 한 장은 철도 파업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이슈들
2013년 마지막 날 보신각 에 모인 ‘ 안녕들’ (사진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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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다른 한 장은 처해있는 조건으로 인해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소위 ‘ 88만원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다 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자보는 “안녕들하시냐”고 사람들에게 묻는다. 이후 확산된 자보들은 이에 답 하듯 비슷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다양한 사회 문제들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은 그걸 쓴 이의 ‘ 자기 서사’다. 20대가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여러 사회 조건과 그에서 자유롭지 않은 자신의 이야기 가 대학 내 ‘ 안녕들’ 자보의 주축을 이룬다. 여기서 2008년 촛불과의 큰 차이가 드러난다. 촛불집회에서 주체는 광범위한 대중 가운데 한 개인이었 다. 하나의 이름 없는 촛불이 되어 광범위한 대중들 사이에 섞이는 것이 바람직한 참여의 방식이었다. 그 러나 지금 ‘ 안녕들’은 자기 서사를 밝히며 자 신의 이름을 걸고 직접 쓴 글을 자신들이 만 든 공론장에 전시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공론장이 곧 그들
촛불은 광범위한 대중 가운데 한 개인이 었다. 그러나 지금 ‘ 안녕들’ 은 자기 서사
의 생활공간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촛불집회
를 밝히며 자신의 이름을 걸고 직접 쓴 글
에서 사람들은 광장에 나와 익명으로 집회를
을 자신의 생활공간에 전시한다.
한 뒤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지금 자보를 쓰 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지금 자신의 생활공간 내에서 자기 서사와 정치를 풀어내고, 생활공간의 동료들로부터 지지받는 경험을 하고 있다. 익명의 대중 중 한 명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걸고 생활공간에 서 정치를 하는 방식. 이러한 방식에 호응하는 이들의 정서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기존의 운동을 넘어선 상상력을 통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촛불집회에서 이어지는 ‘ 안녕들’ 지금까지 촛불집회와 ‘ 안녕들’ 현상을 비교했지만, 사실 가장 주목해야 할 지점은 ‘ 촛불집회의 주체가 바로 ‘ 안녕들’ 의 주체’ 라는 점이다. 지금 ‘ 안녕들’ 자보를 쓰고 있는 이들은 과거 촛불집회를 경험한 이 들이다.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촛불집회를 통해 광범위한 대중이 참여하는 집회를 경험했으며, 지금 ‘ 안 녕들’ 자보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광범위한 대중 집회로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을 경험했고, 이는 오랜 기간 동안 그들이 움직이는 것을 주저하게 했다. 그러나 촛불집회 당시에 그것이 정치적인 것임을 인지하지 못했던 주체들은 지금 그것이 정치적인 행위였음을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정치적 인 열망을 기존과 같은, 실패한 촛불집회의 방식으로 다시 재현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 안녕들’ 현상은 곧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다. 자신의 공간에서 정치를 발화하는 방식, 광장에 있는 익 명의 시민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건 자기서사를 통해 정치를 이해하고 설득하는 방식, 스스로 공론장을 만들며 그 곳에 참여하는 방식. 따라서 ‘ 안녕들’ 현상이 미치는 영향이란 20대가 그렇게 보수적이지는 않음을 드러냈다거나, 20대의 특집 안녕들하십니까, 그 후 23
절망적인 상황에 다시금 주목하게 하는 점 따위에 있지 않다. 또한 ‘ 안녕들’ 현상의 효과를 판단하는 것 도 단지 얼마나 많은 시민이 참여했느냐, 이 운동이 얼마나 지속되었느냐와 같은 수치 중심의 기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 안녕들’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이들이 과거 촛불집회를 통해 무언가를 배웠 고, 그에 따라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회의감에도 불구하고 기존과 다른 방식의 정치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번 ‘ 안녕들’ 현상에서 가장 빠르고 현명하게 실천에 나선 이들은 다름 아닌 노동당의 청년· 청소년 당원들이었다. 이들은 정말이지 ‘ 직감적으로’ 이 상황을 기존의 운동방식처럼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을 느 끼고 실천에 나섰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노동당의 청년· 청소년 당원들이 깃발 아래로 사람을 집어넣 는 데에 집착하는 기존의 운동권과는 다른 방 식의 운동을 고민하고 있는 주체들이기 때문 이다. 농담을 하자면 여기엔 ‘ 깃발’도 없는 노 동당 청년 당원들의 상황도 한몫 했을지 모른 다. 운동의 경험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 는 것, 그리고 그 사람들이 각자의 생활공간에 서 정치를 실현하기를 기대하는 것, 운동과 대 중을 잇는 가교의 역할을 하는 것. 그것이 이 집회에 참석한 고등학생 (사진 : 박혜림)
번 ‘ 안녕들’ 현상에 뛰어든 많은 청년· 청소 년 당원들이 이해하는 자신의 역할인 듯하다.
‘ 안녕들’ 자보에 공감한 대중을 그냥 기존에 비해 한 단계 낮은 행동쯤으로 평가하고, 그들을 기존의 운동방식으로 끌어가려는 식으로만 설득하는 것은 이제 유효하지 않다. 대중들은 촛불집회에 대해 나름 대로의 평가를 하고 있으며, 다른 정치 방식을 찾고 있다. 여기에 대해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기껏해야 촛불집회 정도에 갇힌 상상력으로 그들을 대해서는 단지 이번 ‘ 안녕들’ 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대중들로부 터 아무런 힘을 이끌어낼 수 없다. ‘ 안녕들’ 현상에 의해 조금 고양되면서도, “이게 얼마나 가겠어?”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행동에 나 선 사람의 수를 세어 이번 현상을 비관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하지만 이번 현상에 대한 분석이 그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얼마나 이어질 것인지와 무관하게 이 현상은 그보다 훨씬 긴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짧은 시각으로 일희일비하기보다, 대중들이 정치를 표출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긴 흐름을 두고 이해하고 그에 맞는 방식을 발굴하는 것이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의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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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교과서2
경기도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 톺아보기
기획-교과서2 / 경기도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 톺아보기
왜 민주주의는 ‘ 교육’ 되어야 하는가? 우리 아이를 일게이1)로 키우지 않는 법
‘ 껍데기’ 민주주의가 불편한 까닭 사무엘 헌팅턴은 전 세계의 국가유형을 비교하면서 민주주의 체제 가 무엇인지, 또는 어떤 민주주의를 단단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지 연구 했다. 그는 정치질서의 안정화에 초점을 맞추어, 신생국가의 경우 ‘ 두 번의 선거’를 통해 정치권력이 바뀌면 그 나라의 민주주의가 단단해졌 다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1987년 이후 무려 여섯 번의 대통령 선거를 치 진정한 사람됨보다 학벌이 중 요한 교육 체제, 노동은 더럽고
룬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그런데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의 절반은 그리 부르기 주저할 듯싶다.
힘든 것이며 회사는 ‘ 사장님’
‘ 골키퍼 이외의 모든 선수가 공에 손을 대면 안 되는 스포츠’라고 축
것이라고 가르치는 경제 체제,
구를 정의해보자. 그리하여 선수들 모두 가만히 선 채로 90분을 보내고
자신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승부차기로만 승패를 가른다면 이런 경기를 축구라고 부를 수 있을까.
것은 나쁘지만 이해할 수 있는
헌팅턴이 말한 민주주의나 우리가 제도로서만 민주주의를 정의한다면
짓이라 믿는 관계 체제가 우리
위와 같은 상황도 축구라고 부를 수 있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아이들을 다가올 미래의 ‘ 일게 이’ 로 키우고 있다.
과연 그럴까. 이것을 축구라고 할 수 있을까? 왜 제도적으로 안정되었다고 볼 수 있는 지금-여기의 민주주의를 ‘ 민주주의’라고 칭하는 것이 불편한가.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으 로, 어떤 행태와 제도의 반복으로 민주주의를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체제 속에서 시민은 관객이 아니다.
김상철 서울시당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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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극우보수 성향으로 논란이 된 인터넷 사이트 <일간베스트저장소> 이용자들을 가리키는 말
시민 스스로 그 민주주의를 구성하고, 또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생각은 두 아이를 키우면서 더욱 확실해졌다. 만에 하나 내 아이가 ‘ 일게이’로 커나갈 수도 있다 고 상상하면서부터다. 누구나 ‘ 충’이라고 폄하하고 조롱하는 바로 그 ‘ 일게이’들 또한 누군가의 연인이고 친구이자 동료이면서 누군가의 자녀들이다. 왜 박정희 독재정권을 거친 부모들은 ‘ 민주화 세대’가 되었 는데 민주화를 경험한 아이들은 ‘ 일게이’가 되는가.
반갑다, 일게이 막아 줄 ‘ 민주시민’ 교과서 일베의 등장은 우리가 ‘ 민주주의’라는 시민적 공통 감각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사 례다. 다시 말해 학습되지 않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와 전체주의를 구분하지 못하고 자유와 증오를 구분 하지 못하는 미성숙을 만들었다. 진정한 사람됨보다 값나가는 학벌이 중요한 교육 체제, 노동은 더럽고 힘든 것이며 회사는 ‘ 사장님’ 것이라고 가르치는 경제 체제, 언제나 진심은 따로 있을 것이며 자신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것은 나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짓이라 믿는 관계 체제가 우리 아이들을 다가올 미래의 ‘ 일게이’로 키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감히 단언컨대, 유일한 해법은 교육뿐이다. 민주주의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지는 것이고, 민주주의는 계발되어야 하는 능력이다. 작년 한 해 동안 우리의 아이들을 가르쳐온 교육 현 장의 선생님들이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이라는 교과서를 만들었다. 경기도교육청이 제작하고 최근 교 육부 검정을 거쳐 올 해부터 경기도의 초등학교에 공급될 이 교과서가 매우 반갑고 고맙다. 초등 3~4학년
초등학교 5~6학년용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 중 (사진 : 정정은)
기획 교과서2:경기도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 톺아보기 27
용과 5~6학년용, 그리고 중학생용, 고등학생용으로 총 네 권이 제작됐는데 그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초 등학생용 두 권이다. 이 교과서는 어떤 내용을 알려주기보다 구체적인 상황을 설정하고 스스로 고민하도록 이끈다. ‘ 축구 를 할지 술래잡기를 할지 결정하는 상황’ , ‘ 투표를 통해서 반장을 뽑는 상황’ , ‘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 으면서 함께 생활해야 하는 상황’ , ‘ 양들 사이에서 홀로 있는 염소가 되는 상황’ , ‘ 축구를 좋아하는 여자 아이를 바라보는 상황’ , ‘ 돈을 벌 려고 야근을 하는 아빠와 더 놀아 주기를 바라는 아이들이 대화하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너라면 어떻게 할 거니?”
는 상황’ , ‘ 텔레비전이나 스마트
를 묻는 교과서. 아이들의 관계에 주목하고 관계 속
폰 없이 생활하는 상황’ (초등학교 3~4학년용)에서 “너는 어떻게 생
에서 적절한 태도를 찾도록 한다.
각하니?” 또는 “너라면 어떻게 할 거니?”하고 묻는다. 5~6학년용도 조금 내용이 심화될 뿐 구성은 같 고 ‘ 참여, 투표, 평화, 권리, 차별 금지, 노동, 미디어, 공존’ 순으로 짜여 있다. 물론 예전에도 초등학교 교육 과정에 ‘ 바른 생활’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 도 덕’ 교과서의 범주를 넘지 못하는 한계가 분명 있었고, 교사들이 가 르치는 특정한 생활 태도가 학생 에게 주입된다는 사실은 달라지
초등학교 3~4학년용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 표지 (사진 : 정정은)
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학생과 학 생의 관계에 주목한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의 형식과 내용은 적절할뿐더러 민주주의를 체험하게 한다는 교과의 목적까지 잘 살렸 다. 제시한 상황에 ‘ 맞는 태도’를 평가하는 관점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친구와 맺는 관 계 속에서 ‘ 적절한 태도’를 찾도록 유도하는 구성은 교육 현장의 경험이 녹아든 중요한 관점이라고 생각 한다. 특히 ‘ 어린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보호받을 권리, 표현하고 존중받 을 권리, 차별받지 않을 권리, 치료받을 권리를 명시하고(초등학교 3~4학년용), ‘ 그런 건 여자들이 잘하잖 28
아’ 또는 ‘ 그런 건 연약한 여자들은 못해’라는 일상의 성차별적 관습을 되돌아보게 하는 대목,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이유를 다룬 점(초등학교 5~6학년용)은 기존의 교과서에서 살펴보기 힘든 이 교과서 의 장점이다.
민주주의, 국영수보다 중요하다 다만 지나치게 균형을 맞추려 노력하고, 토론 등 갈등 상황보다 규칙에 복종하거나 합의하도록 강조하 는 서술은 다소 거슬린다. 아마 검수 과정이 복잡해서 생긴 문제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보다 모든 장의 구성이 기본적으로 학생들이 참여하는 방식인 ‘ 참여 교과’로 구성돼 있다는 점이 더 신경 쓰인다. 이런 방 식을 실제로 교육 현장에 적용할 수 있을지 실효성이 의심스럽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고 교과서가 교육 현장에서 제대로 쓰이려면, 충분한 시간과 더불어 효과적으로 학생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교수법이 개발돼 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사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훈련에 익숙해져야 한다. 학부형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아이들이 이런 교과서로 공부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고마운 마음이 앞선 다. 교과서 하나가 아빠의 직업으로 서열이 매겨지고 엄마가 참관 수업에 참여하는지 여부로 교육에 관한 관심을 평가 당하는 현실을 곧장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왜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 갈 수밖에 없는지, 왜 그것이 존중돼야 하는지는 깨닫지 않을까. 또한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저래야 한다는 내면화된 성차별이 옳지 않다는 사 실을 희미하게라도 느낄 수 있다. 세상은
민주주의는 시험 성적을 위해 교수 연구실
꼭 필요한 여러 노동으로 채워져 있고, 사
을 터는 ‘ 엄친아’ 로스쿨 학생이 아닌 평범
람마다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
한 상식을 지키고 살아가는 많은 갑돌이와
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갑순이가 만드는 것.
‘ 우리 아이가 집에서는 얼마나 착한지 아느냐’고 반문하는, 수많은 학교폭력 가
해자 부모들의 말에도 일말의 진실은 있다. 집과 별개로 아이들의 성장에 중요한 또 하나의 공간이 또래 와 함께 생활하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나온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이라는 대안 교육 과목이 국영수를 제치고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란다. 민주주의는 시험 성적을 위해 교 수 연구실을 터는 ‘ 엄친아’ 로스쿨 학생이 아니라 평범한 상식을 지키고 살아가는 많은 갑돌이와 갑순이 가 만드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내 아이들이 배울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런 꿈을 꿀 수 있게 해준 <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집필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기획 교과서2:경기도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 톺아보기 29
기획-교과서2 / 경기도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 톺아보기
<노동>교과서를 꿈꾸게 하는 조심스런 첫 걸음
노동을 말하지 않는 사회 다사다난하던 2013년 12월 마지막 밤, 한 사건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다. 연말 연례행사 방송국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받은 어떤 남자 배우의 수상 소감 때문이었다. 자기가 출연한 작품의 제작진과 동 료, 지인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로 시작한 소감은 아주 평범했다. 그러 이 교과서를 시작으로 멀지 않은 미래에 <노동> 교과서가 나오기
나 소감을 마무리하며 파업 중인 철도 노동자를 응원하며 이런 말을 덧 붙였다. 노동자를 연기한 배우로서 지지하고 응원한다고. 배우가 자기
를 기대한다. 살면서 다시 보기
가 맡은 배역을 노동자라고 부른 것은 큰 울림을 줬다. 노동이란 인간이
힘든 영어 단어와 대부분 사용하
인간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사회를 형성하는 본질적인 활동이다. 그
지 않을 수학 공식을 외우는 일
런데 한국에서 노동은 불온한 말이다. 어떤 곳에서도 쉽게 입 밖으로 꺼
보다 노동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
내지 않는다. 이런 현실은 교육 기관인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고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는 게 민주주의 사회에 더 필요하고 가 치 있는 일이 아닐까?
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노동자가 된다. 그런데 학교 안에는 노동을 멸시하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 있다. 노동자가 된다는 것은 학교 안의 경 쟁에서 패배한 사람이 되었음을 뜻한다. 노동은 그 패배의 대가다. 그렇 기 때문에 학교는 열심히 공부해서 자본가의 삶을 살라고 가르친다. 현 실을 과장한 것일까? 그러나 한국에서 평범하게 공교육을 받은 사람들 은 대부분 과장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한국 교육은 노동이라는 단어를
정상협 비정규노동실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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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밖으로 뱉지 못하게 했고, 말할 때면 부정적인 느낌을 느끼게 했다. 이런 현실에서 ‘ 노동’이라는 단어를 쓰며 노동이 사회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배우는 교과서가 나온 게 매우 놀랍다. 이런 교과서를 통해 학생들이 노동을 다시 보게 된다면, 그 단어에 덧씌운 부정적 느낌을 씻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노동과 가치’ ‘ 노동 시장의 유연성’ ‘ 노동자와 책임’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의 특징은 기존의 교과서와 달리 관점 하나를 정답으로 보여주지 않는 점이다. 상반되는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한 뒤 어떤 관점으로 사회를 바라볼 것인지 고민하게 한다. 노동을 주제로 한 대단원 ‘ 노동과 경제’도 구성이 같다. ‘ 노동과 경제’는 경제사회를 구성하는 세 가지 주체인 노 동자, 기업, 국가가 경제사회 안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짚어본다. 또한 노동자와 기업, 기업과 국가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주요한 내용이다. 노동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는 소단원 ‘ 노동과 가 치’ , ‘ 노동 시장의 유연성’ , ‘ 노동자와 책임’ 장을 살펴봤다. 첫째 장인 ‘ 노동과 가치’를 보자. 노동의 가치는 어떻게 평가를 받을까? 노동의 가치가 단순히 임금으 로 환산되는 것인지, 사회 안에서 자기 삶을 실현하는 것인지 묻는다. 이런 질문을 던져 노동의 가치가 경 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끌어낸다. 둘째 장은 ‘ 노동 시장의 유연성’이다. 노동 시장의 유연성이 노동자와 기업에 미치는 영향이 나온다. 그 중 대표적인 영향은 비정규직 양산이다. 비정규직 비율이 OECD 국가의 평균을 훌쩍 넘는다는 사실과 비정규직과 정규직 임금이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상황이 이렇게 나쁜데 왜 노동시 장 유연화를 추진할까? 교과서는 바로 기업의 경쟁력 확보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유연성만 가지 고 있으면 비정규직 같은 고용불안과 저임금이 확산되기 때문에 안정성 또한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둘째 장을 마무리한다. 셋째 장은 ‘ 노동자와 책임’이다. 여기서는 노동 3권을 다룬다. 이 장의 쟁점은 단체행동권, 곧 노동자 의 파업 행위다. 2012년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을 예를 들면서 파업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을 보여준다. 사회 속 다른 구성원, 다시 말해 학생들을 고려하지 않는 파업이라는 시각과 고용 안정과 저임 금을 해소하려고 하는 파업이라는 다른 시각을 보여주며 우리 사회가 파업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생 각하게 한다.
불온한 <노동> 교과서를 꿈꾸며 이 교과서에서 노동을 다룬 분량은 짧지만 내용이 알차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게다가 기업 의 처지만 대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그러나 티 없는 옥이란 없다. 몇 가지 문제점 을 지적한다. 첫째, 교과서에 등장하는 노동자는 대부분 비정규직 노동자이거나 블루칼라 노동자다. 곧 학생들이 노 기획 교과서2:경기도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 톺아보기 31
동자의 개념을 협소하게 볼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아주 극소수를 빼면 인간은 누구나 노동을 하면서 살고 있음을, 임금을 많이 받거나 높은 수준의 기술이 필요한 노동을 하는 사람도 노동자라는 점을 좀더 명확 하게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노동자가 된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는 편견이 조금씩 바뀔 수 있다. 둘째, 노동 유연성의 개념을 비정규직 문제로 좁혔다. 비정규직 문제뿐만 아니라 정리해고도 노동 유 연성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다. 비정규직은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다고 위협하며 노동자를 적은 돈으로 고용하는 것이라면, 정리해고는 이 위협을 진짜 현실로 만드는 것이다. 또한 정리해고는 기업이 손쉽게 사용하는 해고 절차다. 쌍용차 정리 해고 사태처럼 가까운 예도 있다. 그런데도 기업은 정리해고를 통한 인력의 탄력적 운용이 한국에서 쉽지 않다고 말한다.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부분이 아쉽다. 마지막으로 노동 3권에 관한 시각, 그 중 특히 파업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쉽다. 파업은 단순히 당사자인 노동자의 이익 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추구해 야 한다고 교과서는 서술하고 있다. 그러 나 파업은 당사자의 이익, 다시 말해 노 동자의 노동 조건을 개선하려는 게 기본 적 목표다. 또한 파업을 포함한 쟁의 행 위를 하는 까닭은 다른 사회 구성원을 불 편하게 해야 불평등한 권력 관계인 노동 고등학교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 중 (사진 : 정정은)
파업은 단순히 당사자인 노동자의 이익이 아니 라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고 교 과서는 서술한다. 그러나 파업은 당사자의 이
자와 사용자가 그나마 비슷한 위치에서 협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3권을 노 동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내용이 더 많 았으면 한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학교에서
익, 다시 말해 노동 조건의 개선이 기본적 목표
이 교과서로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부족
다.
한 점을 채워나가는 게 더 중요하다. 또
한 빠르게 변하는 한국의 노동 현실을 볼 때, 현실을 반영한 개정판을 꾸준히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20페 이지 가량의 분량으로 노동 문제를 다루기란 쉽지 않다. 좀 더 많은 분량이 할애되었으면 한다. 이 교과서를 시작으로 멀지 않은 미래에 <노동> 교과서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물론 세계 최고의 학습 량을 자랑하는 한국 고등학생들에게 또 다른 학습의 부담이 될 위험은 있다. 그러나 모든 학생이 살면서 다시 보기 힘든 영어 단어와 대부분 사용하지 않을 수학 공식을 외우는 일보다 노동을 통해 세상을 바라 보고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는 게 민주주의 사회에 더 필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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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교과서2 / 경기도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 톺아보기
‘ 민주시민’ 의 탄생에 교과서보다 더 필요한 건
‘ 시험이 없는 과목’ 의 수업 풍경 중학교를 다닐 때 중간시험, 기말시험 같은 평가가 없는 과목이 있었 다. ‘ 창의적 재량활동’이라고 불리는 시간이었다. 한 미술 교사가 이 수 업을 맡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처럼 생소하 지만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고 학생들과 토론하곤 했다. 내가 학교를 다 ‘ 민주시민 되기’ 는 결코 좋은 교 과서만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닌 지역은 인문계 고등학교 입학을 위해 ‘ 연합고사’라는 시험을 봐야 했다. 미술 시간도 그 시험을 대비하는 주입식 수업이었다. 하지만 그
‘ 민주시민 되기’의 시도는 역설
교사의 창의적 재량활동 수업 덕분에 나는 중학교 교육에서 듣기 어려
적으로 ‘ 주어진 교과서’를 넘어
운 수업을 경험한 셈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다소 특별한 질문과 토론은
서면서, 즉 교육 공간에서의 몫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배제된 청소년의 몫을 주장하
고등학교 때에도 평가가 없는 과목이 있었다. 바로 종교 시간이었다.
고 이루어냄으로써 비로소 가능
그러나 이 시간은 앞의 미술 교사의 수업과 다르게 나를 비롯한 많은 학
할 것이다.
생들에게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흥미도 없는 종교의 설교 내용과 강 제 종교 행사 참석 강요는, 심지어 여러 학생들에게 종교에 대해 부정적 인 감정을 심어주기까지 했다. 학교에서 나눠주는 대체 과목 선택지에 는 철학이 쓰여 있었지만, 그 과목은 아예 개설할 생각조차 없는 그야말 로 핑계용 과목 이름이었다.
김 호 청소년위원회 운영위원
이처럼 학교에는 입시와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교과가 존재한다. 그 러나 학교가 어떤 교육방침을 세웠으며 어느 교사가 수업에 들어오는 기획 교과서2:경기도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 톺아보기 33
지에 따라 학생 개개인의 경험은
입시와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교과도 있긴 하다.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학교가 어떤 교육방침을 세웠으며 어느
경기도교육청에서 개발한 <더
교사가 수업에 들어오는지에 따라 학생 개개인
불어 사는 민주시민>도 ‘ 시험없는
의 경험은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인다.
과목’ 교과서다. 개발 목적도 입시 와는 멀어 보인다. 타 교과와 연계 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하지만 아
무리 살펴봐도 타 교과 입시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내용을 보면, 현재 공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 생들에게 전달되는 교육과정에 견주었을 때 꽤 혁신적이다. 학생 인권을 맨 앞의 한 부분으로 다루었고, 근로계약서 작성하기가 들어가 있으며, 나름 진지하게 평화와 연대를 논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아쉬 운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교과서를 비롯한 공교육에서 거의 다루지 않던 정치적인 부분, 인권과 노동 등 에 관한 부분을 다뤘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 민주시민’ 은 찍어내듯 ‘ 생산’ 되지 않는다 다만 실제로 학교현장에서 이 교과서들이 어떻게 활용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다지 긍정적 으로 말할 수 없는 조건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 교과서가 활용될 가능성이 높은 ‘ 창의적 체험활동’ 과 같은 시간은, 특히 높은 학년이 될수록 암묵적인 입시 자습 시간이 되어버리고 만다. 학생과 교사 모두 입 시라는 장벽 앞에 속수무책이 된다. 얼마나 많은 학교 및 교사가 이 과목을 진지하게 채택하고 수업할지 솔직히 긍정적으로 확신할 수 없는 이유다. 얼마 전 교학사 교과서 논쟁이 한창 사회를 뜨겁게 달궜다. 전교조를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 친일 및 독 재를 미화했다는 이유 등으로 교학사 교과서를 규탄했고, 한 학교의 학생들이 ‘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를 통해 강력히 반발하면서 교과서 선정을 철회시킨 사건도 있었다. <미래에서 온 편지> 3호도 교학사 역 사 교과서를 중점적으로 다룬 바 있다. 그러나 과연 교학사 교과서의 내용만이 중요한 것일까? 사실 교학사 교과서나, 기존의 다른 출판사 교 과서나,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까지도 학생들에게 그저 ‘ 주어진 것’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교학사 교과서 선정 철회 사건들을 보면서 느낀 것은 오히려 학생들이 무엇을 배울지를 정하는 데 결정권 도, 심지어 의사표현의 자유조차도 쉽게 가질 수 없다는 점에 대한 부당함이었다. 그 교과서가 정치를 논 하든 인권을 논하든 역사를 논하든, 학생은 이미 그 정치와 인권, 그리고 역사의 장에서 비켜 서 있다. 고등학교용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의 머리말에는 ‘ 시민 되기’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 민주시 민’ 은 결코 주어진 것을 통해 찍어내듯이 ‘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교과서든 대체로 지금이 아닌 훗 날 청소년이 ‘ 사회’라 불리는 곳에 나갔을 때 알고 있어야 하고 지켜야 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을 가르치려 34
고 한다. 청소년은 따라서 주어진 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 시민 되기’는 언제나 실패한다.
교육 공간에서 배제된 청소년의 몫부터 되찾아야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다소 아쉽 지만 나쁘지 않은, 새로운 교과서의 예시가 있다. <더불어 사는 민주시 민> 교과서를 통해 우리는 투표의
고등학교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 중 (사진 : 정정은)
문제를 단순히 ‘ 나중에 투표권을 갖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가 아
이 교과서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 학교에 뿌리내
니라 학생회장 선거에 적용시켜 볼
리게 하는 데 중요한 것은 청소년의 관점이다. 청
것이다. 또 노동의 문제를 멀리 떨
소년들이 정말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어진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가 받게 될 임금의 문제와 연관지어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감히 주장
하건대, 이 교과서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 학교에 뿌리내리게 하는 데 중요한 것은 청소년의 관점이다. 청소년들이 정말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청소년에게 목소리를 갖게 해주 는 것, 그것이 교육에 관한 것이든, 자신을 둘러싼 생활 환경에 관한 것이든, 정치에 관한 것이든 그것은 주어진 것을 거부하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게 할 힘을 갖게 한다. 그것이 결국 ‘ 민주시민’ 이며 ‘ 시민 되기’ 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고 또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문제가 도처에 있는 만큼 실마리도 도처에 있다. 교과서 결정 과정에서 학생의 확실한 참여를 보장하 는 것, 학생들의 자치 권한을 강화하는 것, 학교운영위원회에서 학생회의 위상을 크게 강화하는 것 등이 학교 현장에서의 일차적인 방법일 것이다. ‘ 민주시민 되기’는 결코 좋은 교과서만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 민주시민 되기’의 시도는 역설적으로 ‘ 주어진 교과서’를 넘어서면서, 즉 교육 공간에서의 몫이 배제된 청소년의 몫을 주장하고 이루어냄으로 써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기획 교과서2:경기도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 톺아보기 35
기획-교과서2 / 경기도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 톺아보기
인권의 눈으로 본 <민주시민> 교과서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교과서가 나왔다 민주당과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참여한 ‘ 한국교계 교과서· 동성애동 성혼특별대책위원회’가 에이즈와 동성애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내 용을 담은 교과서를 ‘ 동성애 미화 교과서’로 부르며 수정하라는 억지를 부렸다. 그런가 하면 내용도, 참고문헌도 수상한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성소수자나 청소년 참정권 등 오 늘날의 논쟁적 주제는 빼고 단지 구성만 토론을 중심으로 하는 교
논란이 되자 연말연초 이슈가 철도 사유화에서 교과서 문제로 옮겨가 고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교과서 논란 정국에 아직 숟가락도 얹 지 못한 이상한 교과서가 나왔다.
과서는 보수 세력마저도 인정하
경기도 교육청이 개발한 초중고교용 창의 지성 교과의 <더불어 사는
는 자연 보호나 사생활 보호 등
민주시민> 교과서는 여러 면에서 낯설다. 고등학교 졸업 10년 만에 교과
속편한 권리를 전파하는 정도에
서를 펼쳐봤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교육부가 아니라 시도교육청이
안주하게 될 것이다.
펴낸 교과서, 모든 단원이 논쟁적인 이 교과서는 교육감 직선제의 성과 다. 교과서는 시민권, 다양성, 공동체, 환경, 평화, 정치, 노동, 언론을 주 제로 하는 대단원과, 대단원을 더 자세하게 다룬 소단원으로 구성돼 있 다. 소단원은 주제를 던지는 ‘ 생각열기’ , 현황 자료를 제시하는 ‘ 지식& 정보탐색’ , 상반된 주장을 읽고 토론하는 ‘ 쟁점 토론하기’ , 역할 놀이와
박자민 성정치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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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활동으로 대단원을 직접 경험하고 느껴볼 수 있는 ‘ 대단원 마무리 활동’으로 짜여있다.
교과서, 학생들의 손에 닿을 수 있을까? 마치 노동당 강령에서 주제를 추려낸 듯한 대단원 주제는 교육인적자원부(문교부)가 펴낸 교과서를 배 운 10년 전의 사람들한테는 익숙하지 않을 듯싶다. 그렇지만 사실 10년 전에도 이런 주제들은 교육 과정에 포함돼 있었다. 다만 여러 주제들이 도덕, 시민윤리, 전통윤리 등 선택 과목으로 조금씩 분산됐고, 단지
교육부가 아니라 시도교육청이 펴낸 교과서,
‘ 부모, 조상 공경과 효친’ , ‘ 해외 원
모든 단원이 논쟁적인 이 교과서는
조와 인류애의 실현’ 같은 훈계식
교육감 직선제의 성과다.
교육 속에서 작은 쪽방 하나를 차지
목차는 마치 노동당 강령에서 추려낸 듯하다.
하고 있었을 뿐이다. 또한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 과서는 삼강오륜과 세속오계를 달 달 외우게 하는 기존의 도덕 교과서 에서 벗어난 것뿐만이 아니다. 이해 하기 쉬운 사례와 간명한 도표만 썼 고, 분량의 절반을 체험과 토론으로 채워 ‘ 이 부분은 밑줄 쫙!’이나 ‘ 이 용어는 시험에 나옵니다’ 같은 주 입식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이 교과서가 얼마나 채택될지는 미지수다. 보수
고등학교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 중 (사진 : 정정은)
세력이 ‘ 균형 잡힌’ 교육을 주창하 며 경기도 교육청을 향해 칼날을 벼 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지난 2012년 경기도 교육청은 산하의 학교에 광주민주항쟁을 담은 <자유민주 정의평화 5· 18 정신계승발전을 위한 교과서>를 배포했다가 극심한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 연이은 교학 사 역사 교과서 철회 사태로 독기가 오를 만큼 오른 보수 세력은 곧 다가올 6월 교육감 선거 때 이 교과서 에 분풀이를 할 수도 있다. 또한 지금까지 경기도 교육청이 만든 다른 교과의 창의지성 교과서도 채택율이 미미한 실정이다. 2013 년 1학기에 제작· 배포된 창의지성 음악 교과서와 철학 교과서는 각각 1만 부와 17만 부다. 대상 학생 46 만 명 중 최대 1/3에게만 사용된 셈이다. 수능 위주의 교육 현실에서 토론 수업이 제대로 운영될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30명이 넘는 학급에서 기획 교과서2:경기도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 톺아보기 37
수행평가를 위한 요식 행위로 그친다면 교과서에 수록된 여러 투쟁의 역사는 박제되고 말 것이다.
<민주시민> 교과서에도 투명인간은 있다 십대 시절 교과서는 경전이었다. 아니, EBS 교재와 교과서는 수능 시험에 나오기 때문에 경전이 됐다. 지난해 수능 무렵 서점의 참고서 코너를 둘러보며 지금 많은 청소년들이 모시는 경전도 예전에 내가 모시 던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 다. 교회도 성당도 절도 수능을 위한 예
성소수자나 청소년 참정권 등 논쟁적 주제
배당이 되는 한국의 유일신앙, ‘ 수능’은
는 빼고 단지 구성만 토론을 중심으로 하는
굳건하다.
교과서는 보수 세력마저도 인정하는 자연
이런 종교 국가에서 수능 위주 교육
보호나 사생활 보호 등 속편한 권리를 전파
을 벗어나는 이단적인 <민주시민> 교과
하는 데 그치고 만다.
서는, 그래서 좋다. 그러나 이 교과서도 훌륭하거나 완벽하지는 않다. 좋은 내신 등급을 받으려고 체육 시험에서 에이즈
의 감염 원인이 아닌 것으로 동성애를 선택하지 못한 어떤 동성애자 청소년에게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최저시급을 받지 못한 청소년 노동자에게 고용주를 고소하는 방법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교육은 적어도 보편적 지식과 제도화된 권리는 포털 사이트로 찾아보지 않고도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성소수자나 청소년 참정권 등 오늘날의 논쟁적 주제는 빼고 단지 구성만 토론을 중심으로 하는 교과서는 보수 세력마저도 인정하는 자연 보호나 사생활 보호 등 속편한 권리를 전파하는 정도에 안주하게 될 것이 다. 좋은 교과서가 나왔다. 이제는 논쟁적인 권리와 인권도 누락하지 않는 더 훌륭한 교과서, 만인의 권리 를 실현하는 데 기반이 될 더 완벽한 교과서가 나올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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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압살당한 한 리얼리스트를 기리며 기획서평
기획서평
이재영, 압살당한 한 리얼리스트를 기리며 임영일 한국노동운동연구소장, 서울 은평 당원
편집자가 이재영 유고집에 대한 서평을 부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보다 그를 잘 모르는 분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 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를 직접 만나 나눈 이 야기가 얼마나 될까?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에서 제3정조를 맡아 잠 깐 함께 일했지만, 그와 따로 긴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내가 학 교를 사직했던 2006년 여름, 그는 <레디앙>의 기자로서 나를 인터뷰 이 책에 실린 첫 글에서부터 마 지막 글에 이르기까지, 그는 대 중운동과 분립된 진보정당에
하러 왔고, 목동 어느 카페에서 처음으로 긴 대화를 나눴다. 물론 여기 저기서 그의 글을 읽기는 했다. 그러나 단편적으로 읽었을 뿐, 꼼꼼히 따져가며 읽은 기억은 없다.
강한 노동운동과 강한 정당운
북한산 아래에서 단병호 위원장 등과 술자리를 가지던 중, ‘ 이재영
동이라는 ‘ 양날개’ 를 달아야 한
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문자를 보낸 것이 언제였던가? 그는
다고 말하고 있다.
곧바로 답신을 보냈는데, 아프지만, 잘 버텨보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병세와 병증을 거의 절망적으로 받아들였다. 그가 겪은 그 병으로 나는 주위의 여럿을 이미 잃었기 때문이다. 이재영의 부고를 받은 것은 대선이 한창 진행 중이던 2012년 12월 어느 날로 기억한다. 문상 자리는 매우 붐볐다. 때가 때인지라 대선 이 야기가 많았는데, 이재영이 그렇게 싫어했던 ‘ 야권 단일후보’ 문재인 의 당선을 낙관하는 분위기였다. 낙관하지 말라고, 박근혜가 당선될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고 내가 말했고, 옆자리의 노중기 교수도 더 강 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었다. 의외라는 듯 뜨악해하는 분위기였지만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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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자린지라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다음날 아침, 발인 장소의 분위기는 매우 슬펐다. 이리저리 분주 하게 움직이던 당 활동가들은 모두 눈이 부어 있었다. 노제를 지내느라 당사로 갔는데, 그의 영정이 한 바 퀴 돌았던 당사 안의 그의 동지들도 눈시울이 붉었다. 그렇게 그를 보냈다.
진보정치운동에 대한 명료하고 일관된 믿음 두 권으로 된 유고집을 받아 읽었다. 자세히 읽었다. 1967년생이니 나보다 열 두 해 아래다. 내가 직장 을 얻어 창원으로 내려간 1986년부터 그는 노동운동을 시작했고, 곧 진보정치운동에 몸담았으며, 이후 그 의 남은 생애는 진보정치운동 그 자체가 되었다. 1996년에 쓴 첫 글에서부터 마지막 글에 이르기까지, 그 의 진보정치운동에 대한 생각은 명료하고 일관된 것이었다. 그는 대중운동과 분립된 진보정당의 건설을 통해 강한 노동운동과 강한 정당운동을 ‘ 양날개’로 구축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사회주의 가치를 추구하 며 자본주의를 극복해 나가는 ‘ 변혁’의 장기적 전망과 더불어, 그 과정에서 사민주의적 개혁정책의 현실 적 필요성을 강하게 긍정한다. 하지만 그가 사민주의자인가 아닌가 묻는 것은 실(實)없는 일이다. 그는 그의 글 도처에서 “사민주의조 차도 제대로 추진해본 적이 없는” 진보정치운동의 척박한 현실을 지적한다. 동시에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세력조차 ‘ 복지’를 강조하게 된 정세를 논하면서는 그 ‘ 복지’가 사민주의적 ‘ 재 분배’ 복지에 불과함을 지적하고, 진보
그가 사민주의자인가 아닌가 묻는 것은 실(實)
정당은 강한 노동운동과 더불어 ‘ 분배’
없는 일이다. 이재영은 현실과 이념 사이의 팽
의 문제를 먼저 주창해야 함을 강조하고
팽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그 모순을 ‘ 정당’ 을
있다. 게다가 2004년 무렵을 지나면서는
매개로 풀고자 했다.
진보정당(민주노동당)이 이제 ‘ 사회주의’ 를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양날개론, 공공정책을 위주로 한 국가주의적 사회· 경제정책과 복지정책이 사민주의의 핵심적 내 용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책 후반부에 가면, 그는 ‘ 국가주의’ 를 명시적으로 비판하고 거부한 다. 규제되는 기업경제, 공공부문과 더불어 협동조합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적 경제 부분의 확대 등, “국가 보다는 사회 중심적인” 시스템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의 책을 읽고 내가 내린 결론은 ‘ 현실주의적 사회주의자’다. 이를 형용모순으로 보고 ‘ 개량주의’의 혐의를 부여하는 급진 좌파들도 있겠지만, 그건 이재영에게는 별로 문제가 아니다. 그는 이미 “모든 개량 화의 가능성은 오직 혁명적 시도로부터 나온다. 나는 혁명주의를 애용하는 남한의 좌익평론가들이 결코 개량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어떠한 혁명적 시도도 하지 않 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일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실과 이념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유지했던 기획서평 41
활동가이고, 그 모순을 ‘ 정당’을 매개로 풀려 했던 셈이다. 그람시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그에게는 진보정 당이 현대의 군주(modern prince)였던 것일까.
진보정당 건설에 대한 시기상조론, 미안하다 그의 삶과 실천의 궤적을 따라 가면서, 나는 한 가지 크게 미안한 점과 또 한 가지 크게 섭섭하고 아쉬 운 점이 있었다. 미안한 점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가 정당운동에 몰두하기 시작했던 초반부 시절, 즉 민주 노동당 이전의 시기까지 그를 가장 힘들게 만들었던 ‘ 시기상조론’의 입장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입장 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중앙에 있었고 나는 지역에 있었는데 나는 지역에서 합법 선거정당운동의 확산을 막는 데 꽤 일조했고, ‘ 국승 21’ 대선 당시에도 시기상조론의 입장을 주장했었다. 그게 그(들)을 그 렇게 힘들게 했음을 그때 알았다면 그러지 말 것을, 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미안하다. 당시 나는 ‘ 양날개’ 중 하나인 대중조직(노동조합)이 ‘ 토대’라 생각했고 당은 ‘ 상부구조’라고 보았다. 전투적 경제주의가 지배하는 기업별노조 체제의 토대 위에 당이라고 하는 상부구조가 제대로 설 수 없다 고 보았고, 우리 운동의 선차적 과제는 그 토대를 바꾸는 것, 즉 기업별노조를 계급적 산업노조로 재편하 는 사업의 성과가 먼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교란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고, 세 조류가 그것을 방해하고 있는데, 좌편향과 우편향의 두 조류와 더불어 조급한 ‘ 정치주의’ 역시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적어도 이재영에게
곤란하다고 생각했었다. 이재영은 자기
있어서는 진보정당 건설이 관념적이 아니라
의 당건설 운동을 ‘ 선취’의 작업이라고
현실주의적, 실천적 선취의 의미였음을 인정
여러 곳에서 표현하고 있는데, 당시 나는
할 수 있었다.
선취(Aneignung)를 헤겔적인 의미에서의 ‘ 이론적’ 선취로 이해했다. 구체적으로는 지식인 출신 활동가들의 관념적 운동이
라고 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에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적어도 이재영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관념적이 아니라 현실주의적, 실천적 선취의 의미였음을 인정할 수 있었다. 내가 과도했었고, 그래서 그 에게 미안하다.
2008년 총선 코앞에 두고 이뤄진 분당, 섭섭하다 섭섭한 점도 이야기하자. 2006년 학교를 사직하고 2007년 일본에 몇 달 머물고 돌아왔는데, ‘ 분당’ 상 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 레디앙’ 과 전화 인터뷰에서 나는 분당을 ‘ 도깨비 짓’이라고 격하게 비판했었다. 심상정 비대위 비공식 대책모임에 참여했었는데, 이재영과 그 동지들은 소위 ‘ 선도탈당파’가 되어 분당 42
을 기정사실로 압박하고 있었다. 이재영 못지않게 나 역시 현실주의자다. 분당이 불가피함을 인정했고, 단지 총선을 코앞에 두고 분당 하는 것은 아니라 보았다. 심상정의 책사(였던) 정태인과 마주 앉아, 참고 양보해서 심비대위 깃발로 총선 을 치를 경우와 분당하고 치를 경우를 계산했다. 우리가 합의한 계산으로는 전자의 경우 원내 교섭단체 구성이 가능했고, 후자의 경우 민주노동당은 반 토막이 나고 탈당파는 제로 즉 원외였다. 도저히 찬성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내가 아는 노조 활동가 대부분은 이 사태를 현장의 노동자들에게 설명할 방법을 알 지 못하는 상태였다. 결과는 우리 모두 아는 바와 같다. 나는 이재영과 <전진>을 위시한 그 동료들에게 지 금도 섭섭하다. 이재영의 현실주의와 나의 그것이 어디에서 어긋난 것일까. 1921년 리보르노 당대회에서 그람시는 보르디가 등과 함께 이태리사회당을 탈당해서 이태리공산당을 결성했다. 이태리사회당은 무솔리니가 장악했고, 곧 그의 파시스트 정당이 득세했으며, 그는 끝내 동지였 던 그람시를 압살(壓殺)했다. 이건 너무 과도한 비교일까. 이후의 경로의 차이를 보면 그럴 수 있을 것이 다. 압살의 형틀에 묶이기 얼마 전, 그람시는 국경너머 프랑스 리용에서 열린 당대회에서 5만 당원의 ‘ 하 방’ 을 지시했다. 이 하방은 20여년을 이어져 종전(終戰)까지 갔으나, 목숨을 걸고 하방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한 당원들의 노력으로 재건 이태리공산당은 전후 50만의 당원 을 가진 대중정당으로, 스탈린에
<노동당>으로 이름을 바꾼 그들은 이재영이 말한
맞서 유로콤을 주도한 정당으로
바 ‘ 선취’ 의 재가동을 시도하는 중인가, 의지주의
거듭났다.
(voluntarism)의 발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인가.
‘ 풍찬노숙’을 다짐하며 분리한 진보신당은 ‘ 촛불’에 흔들려 중심 을 잃었고, 20년은커녕 4년을 버티지 못하고 이재영이 말한 바 ‘ 빈사의 상태’에 처했다. <노동당>으로 이 름을 바꾼 그들은 이재영이 말한바 ‘ 선취’의 재가동을 시도하는 중인가, 의지주의(voluntarism)의 발로를 표 현하고 있는 것인가.
이재영의 글, 남은 자들이 다시 시작해야 할 지점 많은 죽음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러나 하나의 죽음이 한 시대의 마감을 상징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미안함과 섭섭함을 뒤로 하고, 나는 그의 죽음과 더불어 이 척박한 남한 땅에서의 진보정당운동이 한 시대를 마감했음을 애도한다. 그는 서로 다른 세력의 통합운동으로 진보정당운동의 의의를 부여했고 거기에 진력했으며, 어느 시점 에 이르자 ‘ 분열을 통한 발전’을 주창했거나 적어도 긍정적으로 수용했다. 병고에 시달리던 마지막 시기 에 다시금 통합의 압박이 가해졌을 때,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듣기로는 그도 통합에 기획서평 43
이재영 유고집 출판기념회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다시 동의했다고도 하지만, 첫 권의 끝 글을 보면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나로서는 누차 그 파국을 경고하 고자 애썼지만, 그러나 이제 그걸 다시 되뇌는 것도 부질없는 일일 터이다. 궁지에 몰린 진보정당운동의 재구축을 모색하던 시기에 이재영이 쓴 글들을 보면, 중요한 대목마다 민 주노동당의 강령으로 회귀한다. 나도 그렇다. 우리의 진보정당운동은 오랫동안 그 강령에 다시 이르지 못 할 것이다. 당의 강령이란 이론 혹은 이
궁지에 몰린 진보정당운동의 재구축을 모색 하던 시기에 이재영이 쓴 글들을 보면, 중요 한 대목마다 민주노동당의 강령으로 회귀한 다. 나도 그렇다.
념과 현실 사이의 가교다. 간난과 신고 끝에 구축한 이 다리는 이제 무너졌고, 간신히 남은 잔교조차 잔인하게 불살라 졌다. 그는 거기까지 보고 갔고, 우리는 남았다. 남은 자들이 다시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그
다리의 분쇄에 가담했으면서도 자기가 한 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자들이 너무 많다. 잘못은 용서받을 수 있으되, 무지는 용서가 불가능한 죄악이라 했다. 비관할 수 있는 지성이 없으면 낙관할 수 있는 의지도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이재영의 두 번째 책을 편집한 이광호는 그의 글들이 그가 “아직 살아있는 자들에게 선물로 준 제주(祭 44
酒)”라고 말한다. 이제 같이 그의 글을 음복(飮福)하자고 이광호는 권유하는데, 그래, 그것이 시작일 수도 있겠다.
본연의 의미에서 리얼리스트였던 한 사내 현실주의자, 이 말이 별로 느낌이 좋지는 않은데, 차라리 영어를 빌어 ‘ 리얼리스트’ 라고 한다면 좀 나 을 듯도 하다. 그 본연의 의미에서 리얼리스트였던 한 사내가 시대와 장소를 멀리 격한 이태리의 한 리얼 리스트와 마찬가지로 압살당했다는 느낌을 벗어나기 힘들다. 두 번째 책의 짧은 평론의 글들을 읽노라면, 젊은 시절 그람시가 신질서(Ordino Nuovo)에 썼던 촌철살인의 글들이 연상된다. 이재영이 잘 벼려진 칼끝을 겨누었던 인물들과 거짓 의제들은 여전히 우리를 옥죄고 있다. 이광호가 좌우 안팎을 두루 겨냥한 그의 비판이 ‘ 아직 유효하다’고 말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거듭, 참으로 아깝다. 서평을 부탁받았지만, 독후감으로 썼다. 이 글들은 서평의 대상이 아니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연말연 시의 여러 날을 말 그대로 제사상의 짙은 향연(香煙)을 맡으며 길게 음복한 느낌이다. 그 느낌을 이렇게 풀 어도 되나 싶다. 잘 가시게, 이재영 동지.
기획서평 45
여성 진보정치 열전 3
진짜 노동자 김순희 (2부)
정치를 할 것이니 나 좀 도와주시오 김순희는 올해 6월 지방 선거에 출마할 결심을 굳히고 있다. 주변에서 ‘ 어차피 떨어질 텐데 왜 자꾸 나가냐’고 만류하는 사람도 있지만, 김 순희는 이기는 선거를 할 생각이다. ‘ 정치를 할 것이니 나 좀 도와주시 오. 돈도 좋고 연고도 좋으니 나 좀 도와줘, 지지해줘.’ 사람을 만날 때 마다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하고 다닌다. 정리 : 심재옥 서울 구로 당원 사진 : 정정은 편집실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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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 이어)
여성노동자회, 삶의 전환점 되다 인생은 때로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노동 해방의 꿈만 부여잡고 산 김순희가 마산창 원여성노동자회(마창여노회)의 상근직을 맡게 된 것이다. 결혼하고 5년 동안 ‘ 이 한 몸 바쳐 애를 키우리라’고 결심했다. 갑갑하지 않은지 묻는 주변의 성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열적으로 아이 둘을 키워냈다. 애 들쳐 업고 선거 운동을 하고, 아나바다 장터도 열면 서 동네 아줌마로 열심히 살았다. 그러면서 전산세무회계직 자격증을 따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한 1년 정도 일하고 있는데 마창여노회의 상근직을 제안받았다. “지금도 제가 여성주의적 시각은 약간 없는 것 같아요. 노동운동부터 배웠고요, 노동 현실, 그 자체에 관한 게 강했기 때문에 굳이 남성과 여성을 구분해야 할까? 모두 같은 노 동자로서 싸우면 되지 않을까? 이렇 게 생각했는데, 이경숙 선생님이 여 성 노동자들의 현실이 더 취약하다는 걸 몇 번 이야기 했죠.” 김순희가 대명광학에서 해고당했 을 때 도움을 받으면서 맺은 마창여 노회와의 인연은 2006년에 이렇게 다 시 이어졌다. 마창여노회는 여성 노 동자들의 권리를 회복하고 상담하는 사업을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지 난날 김순희가 도움을 받았듯 그녀도 고용평등상담실에서 일하며 여성 노 동자들을 도왔다. 당시는 IMF의 여파
“지금도 제가 여성주의적 시각은 약간 없는 것 같 아요. 노동운동부터 배웠기에, 굳이 남성과 여성을
로 실업 빈곤 여성과 한부모 가정의 가장이 된 여성들이 늘어난 때였다. 김순희는 가정관리사협회와 기초생
구분하지 않고 모두 같은 노동자로서 싸우면 되지
활수급자의 자활센터사업 등으로 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원하면서 여성의 삶을 깊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혼자서 아이를 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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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엄마들의 생활을 살펴보고 한부모 가정의 여성 300여 명의 실태를 조사하고 정책토론회를 열면서 여 성 정책에 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중장년층 일자리 문제를 접하면서 여성의 일자리가 더 불안정하고 저임금 구조에서 순환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또한 경력 단절 때문에 얼마나 더 수세적으로 몰리고 비정규직이나 파트타임이 될 수밖에 없는지도 알게 됐다. 김순희의 이런 문제의식이 여러 정책토론회로 연결되면서 마창 지역 여성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는 정책 활동으로 이어졌다. 마창여노회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경남여성단체연합(경남여연)에서 하는 정책토론회에도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경남 지역 여성의 처지도 잘 알고, 토론회에서 말도 잘 하고, 뭘 맡겨도 재깍재깍 일을 잘 했기 때문에 여성단체 대표들의 신 망을 두텁게 쌓을 수 있었다. “여성단체 대표들이 농담처럼 말했어요. ‘ 순희는 정치하면 잘하겠다. 성격도 좋고 일도 야무지게 잘 해. 뭘 맡기면 잘 몰라도 끝까지 해내는구나.’ 제가 경력이 짧은 편인데 어쨌든 일을 해내는 걸 보고 예전 부터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럴 때마다 ‘ 그렇게 할까요?’ 라고 받아쳤어요. 처음에는 농담하지 말라 고 했다가, 나중에는 ‘ 하라면 하지 뭐!’ 우스갯소리로 그랬죠. 그게 현실이 돼버렸네.”
창원에는 순희가 있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창원의 정치 구도는 큰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2011년 추진된 진보대통합이 실 패로 끝나자 창원 을지역의 2선 국회의원이던 권영길 의원이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어 통합진보당 의 손석형 의원이 국회의원에 출마하려고 경상남도 도의원을 사퇴했다. 4년 전, 한나라당 도의원이 국회 의원에 출마하려고 중도사퇴하자 기자 회견을 열어 ‘ 선거 비용을 부담하라’고 목소리 높인 사람이 똑같 은 일을 벌인 것이다. 창원의 선거 구도와 진보 진영은 혼란에 빠졌고, 노동자들은 등을 돌렸다. 진보정치 를 한다는 놈들도 모두 똑같다는 냉소에 지역은 얼어붙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2012년 총선에서 진보 진 영의 후보는 단 한 명도 당선하지 못 했다. 2004년부터 노동자 후보를 국 회의원과 도의원으로 배출한 지역의 자부심은 사라지고 정치 패권은 한 나라당에 넘어가버렸다. 진보 진영이 경상남도 도의원 자
진보정치를 한다는 놈들도 모두 똑같다는 냉소에 지역은 얼어붙었다. 2012년 총선에서 진보 진영의 후보는 단 한 명도 당선하지 못했다. 정치 패권은 한나라당에 넘어갔다.
리를 잃어버린 경험은 처음이 아니 다.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경상남도 도의원에 당선한 이경숙 여노회 전 회장이 2004년 가을에 과로로 사 망했다. 그때 첫 의석을 잃었다. 민주노동당은 기탁금을 마련하지 못해 비례대표 2번을 등록하지 못 했고, 의석을 승계할 사람이 없어 피 같은 의석 하나를 속절없이 잃고 말았다. 어떻게든 진보 정치를 뿌리내리 겠다고 낮밤으로 일하다 과로로 돌아가신 고 이경숙 의원을 생각하면 2012년 선거 때 상황은 참으로 면목 여성 진보정치 열전 49
경남지역의 여성단체들이 개최한 김순희 후보 지지 기자회견 (사진제공 : 김순희)
없고 부끄럽기만 하다. 솥발산에 묻힌 이경숙 의원은 지금의 진보정치를 보면서 뭐라 할 텐가. 어쨌든 느닷없이 도의원 보궐 선거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 김순희의 등을 떠밀었다. 진보신당에서 여노 회로 여성 후보를 발굴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여노회는 고 이경숙 선생의 활동과 정신을 계승하려면 여 성 노동자 세력을 정치적으로 키워야 한다는 내부 논의 끝에 총회를 열어 진보신당 당원인 김순희를 조직 후보로 추대했다. 민주노동당이 분당되면서 탈당하고 무당적 상태로 있던 여노회 이사들과 여연 소속 여 성단체 대표들도 자연스럽게 김순희의 후보 출마를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여노회 경력 5년으로 조직적 추대를 받고 이렇게 나가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에요. 여성단체가 이렇게 결집한 건 처음이었어요. 그 전에 선거에 출마한 여연 대표들은 무소속이거나 자기가 속한 단체에만 기반 을 뒀죠.”
인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 제일 나은 후보’ 의 낙선 그런 지지와 격려 속에서 김순희는 여성단체가 지지하는 여성 후보, 민주노총이 지지하는 노동자 후보 라는 타이틀 두 개를 쥐었다. 그러나 정작 선거 운동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2011년 통합 논쟁의 여파 때문에 어려워진 상황에서 치러진 첫 선거였다. 가뜩이나 돈도 없고 사람도 없었다. 국회의원 후보로 나선 김창근 후보는 더 어려운 조건 속에서 마음 아픈 선거 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의 지원은 애초부터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당에서 지원 나온 양솔규 국장이 ‘ 맨 땅에 헤딩’ 을 50
했고 남편이 선거 총괄을 맡았다. 언제나 든든한 후원자인 영주 언니, 해고시절 복직 투쟁을 함께 한 언니 들이 선거 운동을 도왔다. 여성단체들이 정책과 조직을 맡고 후원금도 모았다. 당선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진보신당을 살려야 한다는 심정이었다. 어려운 당 상황과 열악한 선거 조건 에 아랑곳없이 자신감을 가지고 매우 씩씩하게 선거 운동을 했다. 일단 ‘ 순희’라는 이름 덕도 엄청 봤다. 하루에도 또 다른 순희를 두세 명씩 만났다. 순희라는 이름이 이렇게 많은 줄 김순희도 새삼 처음 알았다. “나이도 어려보이고 못 보던 얼굴이니 사람들이 떨떠름하게 쳐다보면서 왜 정치를 하려고 하느냐 물 으면 이렇게 답했어요. ‘ 저 같은 사람이 정치해야 합니다. 왜? 제가 살아온 삶은 화려하지도 스펙 넘치는 이력이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현장에서 다양한 삶을 경험해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삶의 변화 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치를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아주 씩씩하게 대답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디서 이런 오만한 자신감이 나왔는지, 나도 잘 모르겠네요.” 선거 운동을 하면서 자기가 살아온 삶이 곧 정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권자들한테서 이런 저런 질문을 받으면 대답도 척척 잘 나왔다. 경험이 곧 정책인 셈이었다. 맞벌이 부부로 살면서 해결하기 어렵 던 보육 문제, 학부모로서 느끼는 공교육, 사교육, 방과후 프로그램 등 교육 문제와 아이들의 안전 문제, 한부모 상담을 하면서 알게 된 취약 계층을 위한 복지 문제, 경력 단절 여성이라 겪은 일자리 문제, 경상남 도 예산을 분석하면서 본 예산 편성의 허와 실, 적게 벌어도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대안, 지역 공동체 운 동 등등…. 그래서 당선하면 일 하나만큼은 잘 할 자신이 있다고 외치고 다닐 수 있었다. “가음정 시장에서 선거 운동을 할 때였어요.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니 한 분께 명함을 내미니 가만히 저
선거운동본부 개소식날 (사진 : 경남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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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운동 차량 위에서 연설하는 김순희 (사진 : 경남도당)
를 보더군요. ‘ 당신이 김순희 후보요?’ 이렇게 물어서 그렇다고 대답했어요. 그러니 ‘ 당신 같은 사람이 당선해야 한다고 내 딸이 그러더라….’ 꼭 당선하라고 손을 꼭 잡으시는데 순간 눈물이 핑 돌면서 여러 감 정이 교차했어요. 눈물을 참기 힘들더라고요.” 정치에 뛰어든다는 데 그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도의원 후보 중 인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자신이 가 장 괜찮은 후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22.06% 득표, 결코 적은 득표는 아니었지만 낙선이었 다. 선거가 끝난 뒤에도 마치 당선한 사람처럼 돌아다녔는데 6월쯤 되니까 제 정신이 돌아왔다. 정치가 내 길이라는 확신을 갖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선거가 끝나니 정치가 무엇인지 진짜 고민 이 시작됐다. 내 삶을 정치로 세워야 하나? 주민 사업을 해야 하나? 내부 규정 때문에 여노회에서는 공식 적으로 사퇴했지만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의 빚이 있었다. 그런데도 여노회에 정치적 부담을 줄까봐 돌아가지 않았다. 그해 7월쯤 경남햇빛발전협동조합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노동운동 과 여성단체 일만 해온 김순희는 이제 사회적 경제 모델과 지역 경제 모델을 만들면서 그동안 알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배우고 있다. 노동운동을 할 때는 생각이 다르면 말도 섞지 않았지만 이때부터 평범한 사 람들의 이야기도 귀담아 듣고 마음을 열고 주민들과 어울리는 법도 배우며 인생의 큰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다. 52
2014년 지방 선거, 이기는 선거 하겠다 다니는 곳곳 모두 선거 현장이라는 김순희, 올해 6월 지방 선거에 출마할 결심을 굳히고 있다. 주변에 서 ‘ 어차피 떨어질 텐데 왜 자꾸 나가냐’고 만류하는 사람도 있지만, 김순희는 이기는 선거를 할 생각이 다. ‘ 정치를 할 것이니 나 좀 도와주시오. 돈도 좋고 연고도 좋으니 나 좀 도와줘, 지지해줘.’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하고 다닌다. 그러나 내심 고민이 많다. 처음 출마했을 때는 여성단체와 민주노총의 조직 후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혼자다. 돈, 사람, 정책, 모든 게 막막하고 걱정될 수밖에 없다. 대공장 출신도 아니고, 여성단체 지도자 출 신도 아니고, 남자랑 비교해서 자원을 동원하는 능력도 떨어지는 여성 후보를 위해 당은 어떤 역할을 해 야 할까? “어떤 정치를 해야 할까요? 내가 하고 싶은 정치보다 어떤 정치가 우리가 해야 할 정치인지 처음부터 다시 되짚어 봐야 해요. 그동안 진보 정당 정치인들은 기성 정치인들하고 비교해서 대개 ‘ 일 하나는 잘 한 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대중들한테 신뢰와 능력은 인정받은 거죠. 그렇지만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측면에 서 생각해보면 과연 진보 정치인 또 는 정당은 무엇을 해냈을까요? 또 어 떻게 지역과 사회를 변화시켰을까 요? 그런 점이 뚜렷하게 다가오지 않 아요. 왜 그럴까요?” 출마 경험은 김순희를 훌쩍 성장
가난한 농민의 딸이자 노동해방을 꿈꾸는 어린 여성 노동자였던 김순희, 이제 진보정치인으로 거듭난다. 세상을 바꾸는 길을 당당히 걷는 사람 이 됐으면 좋겠다.
하게 했다. 그때의 오만한 자신감은 이제 없다. 돈도 없고, 학벌도 별로이고, 인물에 대한 신선함도 ‘ 다 써먹은’ 마당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 노 동당이 살아남고,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실현하려면 유권자들에게 노동당과 김순희를 어떻게 어필해야 할 까? 김순희의 고민은 깊어간다. 이번 6월 지방선거에서 김순희가 꼭 ‘ 이기는 선거’를 했으면 좋겠다. 가난한 농민의 딸이자 노동해방을 꿈꾼 어린 여성 노동자에서 이제 진보 정치인으로 세상을 바꾸는 길을 당당히 걷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노동으로 단련된 김순희의 손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자랑할 노동의 자산이며 진보 정치의 힘이다. 이 경숙 의원이 못다 이룬 꿈을 이어가고, 경남 지역의 노동 정치와 여성 정치의 새로운 흐름을 다시 만들어 갈 수 있도록 김순희의 이번 도전이 꼭 성공하기를 바란다. 노동당의 김순희,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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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콜트콜텍을 읽는 열두 개의 시선 ① 연재를 시작하면서 이선옥 기록 노동자
노동 현장의 일을 기록할 때 흔히들 편하게 선택하는 방식이 ‘ 더 불쌍하게, 더 비참하게 보이도록 표현하는 것’이다. 당장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가장 안전한 장치이기 때 문이다. 장애인이나 아동, 노인들의 권리가 신장되어야 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고 해 서 노동자의 권리가 더 확대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하지는 않는다. 노동문제는 좀 더 어렵고 결이 다르다. 흔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은 구조적인 약자라고 하지만 현실에서 그걸 공식 처럼 주장하면 반론을 듣기 일쑤다. 특히 정규직, 고임금, 노조이기주의, 귀족노조 등등 최 근 들어 노동문제에 꼭 따라 붙는 비판들은 오히려 ‘ 공정하고 합리적인 의견’이 되었다. 더 구나 그런 비판의 상당 부분이 이른바 ‘ 진보’ 진영에서 나온다. 그것이 노동문제가 가진 특 수성이다. 진영 안에서조차 경계하는 이야기. 빈틈없이 비참하지 않으면 호의적인 반응을 끌어내기 어려운 논리와 현실의 거리.
‘ 철밥통’,‘ 귀족노조’ … 보수의 논리에 변명하기 급급했던 우리 최근 끝난 철도노조 총파업을 대하는 보수 언론들의 가장 큰 논리도 이것이었다. 연봉 6 천만 원 받는 귀족노조, 공기업 정규직들의 철밥통 지키기. 우리는 그런 비판에 변명하기 급급했다. 그게 아니라고, 연봉 6천은 19년 근속에 수당까지 합해야 받을 수 있는 금액이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철도 일이 알고 보면 너무 힘들다고, 20년을 한 직장에서 일한 노 동자의 연봉 6천이 그렇게 높은 거냐고. 악의적으로 같은 공격을 반복하는 보수 언론에게 는 맞불 작전으로 되받아쳤다. “당신들은 고액 연봉 아닌가?” 하지만 지면과 방송, 그 밖의 모든 면에서 보수 기득권층의 화력이 월등하게 우세한 상 54
황에서 우리의 항변과 공격은 여론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번 파업이 ‘ 민영 화 반대’라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투
노동이 시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으려면 빈틈없 이 비참해야 했다. 철도 파업은 ‘ 귀족노조’ ‘ 철
쟁이라는 면이 부각되고 나서야 여론
밥통 지키기’라는 보수 언론의 비난에 맞닥뜨렸
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공공서비스
고 우리는 변명하기 급급했다.
가 계속 후퇴하는 사회 분위기와 맞물 려 철도노조가 국민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대리전을 치르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불과 사나흘, 길어도 일 주일이면 끝날 것이라고 짐작했던 철도파업은 우호적인 여론을 타며 22일을 버텼다. 그동안 파업을 하는 노조에게 여론이 유리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성과 없이 끝났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지만, ‘ 국민총파업’을 성사시키자는 구호가 나올 만큼 뜨거운 호응을 얻은 축복 받은 파업이었다. 그것도 큰 성과라면 성과다. 하지만 여전히 두 가지 벽을 넘지는 못했다. 하나는 연봉 6천을 받는 먹고 살만 한 노동자들이라도 파 업할 수 있는 권리(단체행동권)를 당연히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 보편의 이익이 아닌 조합원들만의 이익을 위한 파업이라 해도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벽은 어지간해서는 넘기 어렵다. 제도권 교육 과정에 노동교육이 아예 없는 현실, 파업은 곧 시민 불편이라는 공식만을 되풀 이하는 언론, 그리고 노동운동에 씌워진 불온과 강성의 이미지 등 넘어야 할 산들이 너무 많다. 그 작은 산 하나라도 넘는 일에 보탬이 되는 글을 쓰는 것, 그게 내가 노동 현장을 기록하는 중요한 이유다.
불쌍하지 않은 노동자들의 파업도 용납되려면 노동 현장에는 언제나 보편적인 문제와 함께 그 현장만의 특수한 문제들이 있게 마련이다. 가령 월 80 만 원을 받는 청소 노동자나, 연봉 1억 원을 받는 비행기 조종사나 똑같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파업을 할 당연한 권리는 보편적인 문제다. 그 보편성을 깔고 저임금, 장시간 노동, 과도한 노동 강도, 구조조정, 장 기 투쟁 등 개별적인 문제에 관해 기록해야 이야기가 풍성해질 텐데 현실은 다르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정당한 일이라는 전제가 있으면 “이들은 이번에 무슨 이유로 파업을 시작했는지” 를 묻고 기록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청소 노동자가 파업하면 쓰레기는 누가 치우느냐, 왜 노조원의 이익을 위해 시민들이 교통 불편을 겪어야 하느냐” 하는 공격부터 터져 나온다. 파업 자체가 악이자 사회 에 해를 끼치는 일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들이 얼마나 힘들게 일해 왔는지, 현실이 얼마나 비참한지, 얼마나 말도 못하는 고통 속에 살고 있는지를 전시하고 때로는 과장한다. 그래야 당장 쏟아지 는 비난들을 조금이라도 비껴갈 수 있다. 사람들 눈에 띄지 말라는 반장의 명령에 화장실 청소도구 칸에 숨죽이고 있었다는 증언, 옆 칸에서 똥 누는 소리를 들으며 무릎을 맞댄 채 도시락을 먹었다는 증언, 일하다 다쳐도 쫓겨날까봐 치료도 못하고 앓았다는 증언, 한 달 내내 새벽 4시부터 나와 일해도 백만 원도 안 되는 월급으로 살아야 했다는 증언들. 노동르포 55
물론 이 증언들은 모두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도 참고 일했던 이들이 파 업까지 간 이유는 결국 집단으로 해고되었기 때문이다. 해고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들은 파업이 라는 어려운 선택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용역업체에서 파견된 노동자들의 해고를 통해 간접 고용이 라는 제도의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지만, 당장은 불쌍한 청소노동자라는 사실을 부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기존의 프레임 안에서 방어하거나 싸울 뿐, 프레임을 해체할 겨를이 없다. 특히 현장에 닥친 문제 를 기록하고 알려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서는 가장 쉬운 선택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선택은 우리에게 독이 되기도 한다. 철도 파업에서 보듯, 불쌍하지 않은 노동자들의 파업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도, 조종사 노동자들의 파업도 같은 이유로 비난 받는다.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
비참한 현실을 전시하고 과장하면 당장의 지지 는 받을 수 있지만 결국은 우리에게 독이 된다. 철도파업에서 보듯 불쌍하지 않은 노동자들의 파업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위험한 작업장, 악랄한 사용자 등 완 벽하게 비참하지 않으면 이 비난을 비껴갈 수 없다. 정규직 대공장 노조 는 심지어 대량 해고를 당해도 여론 이 싸늘하다. 그 고립을 견디다 못해 결국은 사람이 죽는다.
쌍용차와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에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바로 ‘ 죽음’ 때문이었다. 작은 사업장들은 그 박복함으로, 큰 사업장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여론이라는 기울어진 저울의 한 쪽에 위태롭게 서 있다.
비정규직보다 못한 정규직, 콜트콜텍의 사례 콜트콜텍도 마찬가지다. 콜트와 콜텍은 정규직 사업장이다. 하지만 자신들을 소개할 때 “비정규직보 다 못한 정규직”이라고 말할 정도로 정규직이 상징하는 혜택들과는 거리가 먼 대우를 받았다. 일하다가 밖을 쳐다보면 딴 생각을 한다고 창문조차 없애버린 공장, 이년 저년 소리는 예사로 들어가 며 일했던 공장, 일하다 다치고 유기용제에 노출돼 병이 생겨도 산재 처리는커녕 혼나기만 했던 공장, 한 국에서 120번째 부자인데도 직원들에게는 딱 최저임금만 주었던 사장. 그리고 결국 노동조합을 만들자 문을 닫고 하루아침에 해고해 버린 공장. 콜트콜텍은 이런 사연을 가지고 7년째 거리에서 싸우고 있다. 점 거했던 공장마저 포크레인이 쓸어버렸지만, 이들은 부평의 옛 콜트 공장 맞은 편 길가에 천막을 치고 여 전히 공장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싸우고 있다. 하지만 ‘ 여론’은 이들의 투쟁에 관심이 없다. 지난 1월 10일, 고등법원의 정리해고 판결이 있던 날, 콜텍 노동자들은 다시 깊은 절망에 빠졌다. 매번 법정에 설 때마다 혹시나 하는 기대와 역시나 하는 절망이 교차했는데 이번 판결은 절망의 정점이었다. 2012년 대법원은 콜트 악기의 정리해고는 무효라고 판결했지만, 콜텍 악기의 정리해고는 다시 심리하라 56
고 고등법원에 돌려보냈다. 항 소심에서 모두 부당 해고 판결 을 받아 이겼는데 콜텍만 판결 이 뒤집힌 것이다. 파기환송심 을 진행하는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재판부는 회사와 노조가 동의한 회계 법인에 감정을 맡 기도록 했다. 콜텍 공장이 정리 해고를 할 만큼 긴박한 경영상 의 위기가 있었는지 조사를 벌 이기 위해서다. 감정 결과 “대 전 공장에 일부 손실이 있다 해 도 회사 전체의 재무구조가 건 실하고 수익성도 좋아 경영상 긴박한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다”는 결론이 나왔다. 노동자들 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재판부 가 인정한 기관에서 한 조사 결 과이니 이제 정리해고는 무효 라는 선고만 남았다고 생각했 다. 이 감정서대로라면 0.1%만 불안하다고 했다. 99.9% 이길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농성장에 오랫동안 붙어있던 신문기사 (위) 공장 내부 (아래) (사진 : 콜트콜텍공동행동)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는 얘기 다. 그러나 불안은 희망을 잠식해 버렸다. 회계 법인의 감정보고서는 재판 결과에 반영되지 않았다. 서울 고법 민사1부(부장판사 정종관)는 장래에 올 수 있는 위기에 미리 대처하기 위한 해고는 정당하다고 했다. 수십 명 노동자들의 구체적 삶이 경영의 위기라는 추상의 문제에 대처하는 도구로 바쳐졌다. 근로기준법 의 해고 사유는 무기력해졌고 해고는 더 쉬워졌다. 경영상 긴박한 위기가 아니어도 노동자들을 집단 해고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죽는 거 빼고 다 해본 노동자들이 마지막 걸었던 기대, 그래도 이 땅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법이 보여줄 거라는 바람은 무참하게 깨졌다. “힘없고 빽없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억울함을 호소해야 하느냐”고 분통 을 터뜨리는 해고자들. 사법살인이란 말은 이런 경우에 써야 하겠구나 생각했다. 그 재판부의 이름을 기 노동르포 57
억하도록 기록하는 것, 그것이 노동문제를 기록하는 내 몫이라고 또 마음을 다잡는다.
이들의 행복을 쉽게 규정짓지 말자 해고된 후 7년 세월 동안 이들은 많은 일을 했다. 대전 콜텍 공장 조합원들은 생계비를 벌기 위해 농사 를 지어 고추장과 된장을 만들어 판다. 상경해서 싸우는 투쟁 전담 해고자들은 비누를 만들어 팔기도 하 고, 직접 기타를 연습해 해고자 밴드도 결성했다. 지난 연말에는 연극 무대에도 섰다. 밴드 공연도 연극 무대 출연도 그동안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어서 신선했다. 사람들의 반응도 좋다. 한 진보 지식인은 얼마 전 일간지 칼럼에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썼다. 콜텍 노동자들이 출연 한 연극 ‘ 구일만 햄릿’ 을 관람한 모양이다. 그는 가진 게 있어도 없는 티를 내는 자본가의 궁상을 비판하 며 노동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반대로 콜트콜텍 악기의 해고 노동자들은 궁상과는 반대로 아주 ‘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중략) 투 쟁의 시간을 허송하거나 초라한 형색을 과장하며 동정을 호소하는 게 아니라, 그 시간을 음악과 연극, 미술 등 의 예술과 삶이 만나는 적극적인 창조와 생성의 장으로 만들고 있다. 그들은 가진 게 없어도 풍요롭게 살 수 있 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중략) 거리에서의 7년의 방황은 햄릿의 미친 방황보다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렇게 주어진 운명을 한탄하기보다는 기꺼이 웃으며 받아들이려 한다는 점에서 햄릿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이진경. 한국일보 2013.12.20)
이 글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콜텍 조합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도 구일만 햄릿 공연을 재미있게 봤 지만 공연하는 그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들은 행복할까? 7년 동안 거 리에서 보내고 있는 삶을 풍요롭게 여기고 있을까? 이 짧은 글에는 경계의 바깥에 선 엘리트 지식인이 가진 노동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담겨 있다. ‘ 투 쟁의 시간을 허송하거나 초라한 형색을 과장하며 동정을 호소하는 이’ , 그가 생각한 투쟁하는 노동자들 의 상일 것이다. 음악, 연극, 미술 등 문화예술과 만나면 삶이 풍요로워진다고 믿는 편견, 그 또한 그가 규 정하는 풍요다. 그리고 그런 활동을 투쟁의 한 방법으로 사용하는 노동자들은 기꺼이 웃고 있을 것이라는 오해도. 투쟁의 시간을 허송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들에게 과연 허송할 수 있는 시간이란 게 존재할 까? 평범한 우리들이 상상하는 일상의 잣대로 그들의 시간을 평가할 수 있을까?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하지만 초라한 형색을 과장하며 동정을 호소하는 일은 나도 곧잘 써 온 방법이어서 부끄러웠다. 노동 자에 호의적인 지식인들마저 이들의 모습을 그렇게 바라보는 현실에 내가 써 온 글들도 한 몫 했을 것이 다. 엘리트 지식인이 가진 문화적인 우월감, 이런 게 더 나은 삶이라고 판정할 수 있는 권위, 노동자들에 게 행복하냐고 묻기에 앞서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규정하는 무의식의 강박은 불편했지만 그 편견 에 나도 한 조각 쯤 책임이 있기 때문에 불편함만으로는 넘어갈 수 없었다. 58
기타노동자들에게는 다시 공장으 로 돌아가 기타를 만드는 일상이 가장 행복한 삶일 수도 있다. 지긋지긋한 노동이었다 해도 지금 그들에게 절실 한 것은 일상의 복원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절실한 것은 일상의 복원이다. 연극이 나 연주 활동 같은 문화생활이 있으니 다른 장기 투쟁 사업장보다는 그래도 행복하지 않느냐 조 심스럽게 물었을 때 조합원들은 손사래를 쳤다.
투쟁이 끝날 날을 기다리며 무슨 일이 라도 하면서 버티는 것, 연주도, 연극도 내게는 그런 안간힘으로 보였다. 주어진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고 말하기엔 주저된다. 투쟁하는 나날 동안 기쁘고 행복한 순간도 있었겠지만 지금 이 상황이 예전보다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말 할 수 없다. 연극이나 연주 활동 같은 문화생활이 있으니 다른 장기 투쟁 사업장보다는 그래도 행복하지 않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조합원들은 손사래를 쳤다. 다시 또 하라고 하면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기 타 만드는 노동만 했던 사람들에게 낯선 일을 해야 하는 스트레스는 생각보다 컸다. 우선 연습 과정이 너 무 힘들고, 원해서 하기보다는 투쟁을 위해 선택한 일이니 의무감이 기본인데다, 완벽한 공연을 무대에
▶콜트콜텍 투쟁을 지지하는 내용의 기타 모양 조형물 ▼콜트콜텍 문화제 모습 (사진 : 콜트콜텍공동행동)
노동르포 59
올려야 한다는 스트레스까지 겹치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이다. 한 해고자는 차라리 투쟁만 하는 게 제일 속 편하다며 웃었다. 다른 해고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늦은 밤 얼기설기 추위를 막은 농성장에서 이런 저 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쉽게 이들의 행복을 규정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이런 규정은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내가 가진 행복과 불행의 상 안에 노동자들을 끼워 맞추는 일은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어떤 태도가 최선 일까 늘 고민하는 것, 그게 끝내 당사자가 될 수는 없지만 방관자로만 남을 수도 없는 어정쩡한 경계인인 나의 최선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콜트콜텍의 투쟁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까닭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투쟁은 한국 사회에 새로운 이야기와 가능성을 보여준다.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 과 기타를 치는 사람들의 연대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자신이 만든 생산물에서 소 외된 노동자들과 이들을 다시 생산물의 주인으로 설 수 있게 한 소비자의 아름다운 연대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싸움이다. 이른바 중심 운동으로 취급 받는 노동운동과 주변부 운동으로 인식되었던 문화운동이 동등하게 만났 고 아름답게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문화노동자들은 기타노동자들을 후원하는 것을 넘 어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연대한다. 몇
문화노동자들은 기타노동자들을 후원하는
년 동안 이렇게 깊게, 이토록 길게 문화운
것을 넘어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연대한
동과 노동운동이 만난 사례는 흔치 않다.
다. 몇 년 동안 이렇게 깊게, 이토록 길게 문 화운동과 노동운동이 만난 사례는 흔치 않
후지락페스티발 참여와 유명 해외 뮤지션 의 지지 퍼포먼스도 이들이 기타라는 악기 를 만드는 노동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
국제 연대 투쟁에서도 콜트콜텍의 사
례는 빛난다. 일본과 독일, 미국의 원정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은 진정한 국제 연대가 무엇인가를 깨달아 가고 있다. 가는 곳마다 현지 노동자들은 뜨겁게 연대했다. 제 일처럼 나서서 세계 노동자들의 모든 문제 는 바로 지금 여기의 내 문제라는 국제 연대의 정신을 실천했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이 지면에 어떻게 다 담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쉽고 편한 선택을 지양하고 경 계의 안팎을 넘나들며, 더 개입하고 싶은 유혹과 멀찍이 달아나고 싶은 갈등을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이 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담고 싶다. 콜트콜텍의 이야기이지만 그들만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 글. 보편의 이야기를 하면서 각자의 삶도 놓치지 않는 균형을 가진 글. 이념을 견결하게 지키면서 이를 대중에게 어떻게 설득할지 고민하는 것이 일상일 이 글의 독자들처럼, 노동자에게 편파적이되 설득력 있게 기울어진 글을 쓰는 것이 이 지면에 첫 발을 디디며 갖는 소박한 바 람이다. 60
지역에서 현장에서
지역에서 현장에서
연대는 연애처럼 <놀란곱창> 사장님, 새해 첫 신입당원 되다 서울 서대문당원협의회
2014년 1월 2일 서대문당협은 한 장의 입당원서를 받았습니다. 2014년 노동당 1호 신입 당원이었습니다. 그날, 몇몇 당원들은 오랫동안 기다렸던 편지를 받은 듯 눈시울이 붉어졌 습니다. 올해 첫 신입당원이 되신 이선형 님은 온 가족의 생계, 집안의 전 재산이 걸린 가게를 운 영하는 상가세입자입니다. 작고 소박한 행복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며 살고 싶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는 분입니다. 그랬던 이선형 님께 지난 2010년의 봄은 그 소박한 꿈이 무참히 깨 어지는, 잔인한 계절이었습니다.
쥐꼬리만큼 보상금 쥐어주며 나가라니 2010년 봄, 소문으로만 돌던 뉴타운· 재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1-3구역의 550 여 상가세입자들 중 상당수가 이사비용 수준의 보상금만 받고 쫓겨날 상황에 직면했습니 다. 결정권은커녕 이의를 제기할 기회도 없었습니 다. 다른 곳으로 이주해 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최소한의 배려도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조합에
소문으로만 돌던 뉴타운· 재개발이 본격적으 로 진행되면서 1-3구역의 550여 상가세입자들 중 상당수가 이사비용 수준의 보상금만 받고 쫓겨날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서 제시한 보상금은 다른 곳에서 다시 장사를 하기엔 너무나 턱없는 금액이었습니다. 감정평가세부내역을 공개해 줄 것을 이선형 님을 비롯한 많은 상가세입자들이 수차례 요구했으나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한창 무더웠던 8월, 급기야 20년간 한 자리에서 고깃집을 하신 세입자 한 분이 쫓겨나는 62
마지막 날 아침 가게에서 목을 매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맙니다. 남아있던 상가세입자들은 여기서 더 이상 사람이 죽게 할 순 없다며 최소한의 법적절차를 보장받기 위해 조합과 구청에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2010년 10월 서대문구청에서 구청장· 조합· 상가세입자대표들과의 면담이 이루어졌지만 보상협의회 (토 지보상법82조)를 구성하겠다던 구청이 약속을 어기면서 결국 조합으로부터 강제철거를 당하고 말았습니
다. 명도 소송 재판에서도 ‘ 감정평가 세부내역을 공개하지 않았고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적법한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2011.11.11 이어 조합은 시공사로부터 받은 돈으로 끊임없이 ‘ 묻지마 소송’을 걸어 남아있는 상가세입자들을 괴 롭힙니다. 적반하장 소송의 ‘ 끝판왕’은 2011년 10월 이선형 님에게 제기한 13억 8천만 원짜리 공사 지연 손 해배상 청구 소송입니다. 물론 패소합니다. 당연할 수밖에요. 북아현 1-3구역 재개발조합은 법을 어기며 용적률을 20%로 상향 신청했고 이로 인해 인근 중고등학교의 일조권을 침해해 서대문구청의 허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임대차보증금과 명도집행을 동시에 이행해야 하는 데(도정법44조2항) 임대차보증급은 지급하지도 않고 강 제철거를 밀어붙인 것은 불법이라고 판결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11월 11일 한낮, 큰길 한복판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선형 님이 법원 재판장이 마 련한 상가세입자들과 조합의 중재회의에 참석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발생한 일입니다. 중재회의에 조합
강제철거로 무너진 곱창집 건물 (왼쪽). 농성장에서의 이선형· 박선희 부부 (오른쪽) (사진 : 서대문당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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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오지도 않았습니다. 허탕을 치고 돌아온 이선형 님은 건물이 포크레인에 찍혀 있는 광경을 보게 됩니 다. 부인 박선희 님은 건물이 무너질 때 미처 피하지 못해 대못이 다리에 박혔습니다. 그제야 부부는 조합 이 일부러 사람을 불러낸 뒤 표적철거를 감행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용역깡패가 어떤 존재인지도 소름끼 치도록 생생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선형 님의 가슴을 가장 서늘하게 만든 것은 그 시각 많은 주민과 경찰들이 그냥, 보고만 있었다는 사 실이었습니다. 북아현은 박선희 님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도 합니다. 건물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고 있던 그 수많은 얼굴들 중 태반은 아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날 밤 온 가족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선형 님 은 두 해 가까이 쫓아다녔던 재개발조합원들, 공무원, 용역업체, 정치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절망하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혼자가 아닌 겨울 강제철거 직후 반파된 가게 건물 앞에서 부부가 천막 노숙농성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SNS를 타고 빠르 게 퍼져나갔습니다. 인근 지역의 활동가들과 주거권 활동가들이 천막을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일 뒤 2011년 11월 14일, 서대문구청에서 노동당, 통합진보당, 명동대책위 등이 모여 반인륜적 행동을 한 재개발조합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엽니다. 그 해 겨울은 길었지만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연대단위들이 기도, 촛불문화제, 음식 나눔 등을 하며 연이어 천막을 방문했습니다. 천막 안에는 불이 환하게 켜지고 웃음이 쏟아졌습니다. 부부를 찾아온 사람들은, 그들 역시 작고 소수이며 오해를 견디며 어려운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네, 노동당 서대문당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대문당협은 상근자도 사무실도 없었고 주요 활동가들 은 모두 일과가 끝난 뒤 제2의 직장처럼 당 활동에 매진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서울시장 선거 이후 악화된 당협 재정은 도무지 회복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고요. 그 와중에 북아현 일이 터진 겁니다. 주거권 문제를 의제 삼아 활동하던 당원들이 꾸준히 북아현 강제철거 소식을 공유했고, 이 상황을 어 떻게 더 많이 알릴 수 있을까 답답해 했습니다. 철거 투쟁, 특히 상가세입자의 문제는 답이 없는 긴 싸움이 될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서대문당협은 ‘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할 수 있는 자가 지구를 구하고, 하고 싶은 자가 먼저 한 발자국 떼는 거다!”
연애보다 재밌는 게 연대라고? 2012년 1월 연대단위들과 ‘ 북아현생존대책위’를 만들고 서대문당협은 기자회견 및 문화제, 1인 시위 등의 외부활동을 모두 대책위 이름으로 하게 됩니다. 북아현생존대책위 차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북아 현 문제를 알릴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을 고민하는 동시에, 당협 차원에서 당원들의 관심과 지지를 모을 방 64
북아현 문화제 (왼쪽). 북아현 농성장 희망순대 자전거 (오른쪽) (사진 : 서대문당협)
안을 궁리했습니다. 북아현생존대책위 이름으로 진행한 일들은 (믿지 않으실지 몰라도)늘 즐거웠습니다. 그 안에 모여 있 는 사람들이 하고 싶은 것들을 시도해 보았으니까요. 매주 수요일에는 문화제의 ‘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다 같이 모여 즐겁게 힘을 받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때로는 크게 판을 벌여 동네가 들썩이는 잔 치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북아현을 한 번이라도 온 사람들은 모두 마음을 거기에 두고 갔습니다. 큰 일이 생기거나 도움을 요청할 일이 있으면 기꺼이 함께 했습니다. 지속적인 SNS 관리와 토론회 및 공청회 참석, 시청과 구청 앞 1인 시위와 공문발송, 현수막 사업, 뱃지 제작과 판매, 여름용 천막과 겨울용 천막 설치 파티, 거리 영화제, 길 위에서의 시와 노래, 워크샵과 바자 회 등등. 철거민을 지지하는 글귀를 받아 직접 만든 엽서는 수백 장이 넘었습니다. 이선형 님이 그걸 상자 에 담아 시장실에 직접 전달했습니다. 농성천막은 늘 보이지 않는 지지와 연대의 공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당원 모임을 숫제 농성천막에 와서 열기도 하고, 장석준 부대표를 초대해 거리강연을 하고 같이 토마토수프를 끓여먹은 적도 있습니다. 지나고 보니 많은 당 활동가들을 초대해 추위 속에 떨면서 숟가락 들게 한 일이 당협 입장에서는 마음에 걸립니다.
그 날 이후 ‘ 고백’ “서울시의 중재로 재개발조합과 최종 합의를 하면서 축하파티도 하고 재개업식도 하고, 참 많은 분들 께 고맙습니다. 700일 넘게 버틸 수 있게 한 힘이요? 당연히 연대해주신 분들입니다. 한 분 한 분 다 너무 지역에서 현장에서 65
농성장에 모인 북아현생존대책위 (사진 : 서대문당협)
소중해서 이걸 어떻게 갚아야 할까 생각하다가, 저 역시 다른 분들한테 도움이 되는 사람, 연대를 하러가 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지금도 삶터에서 쫓겨나고 있는 위기의 당사자들이 연대할 수 있도록, 그리고 법을 바꾸고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도우려고 합니다.” 북아현 승리 축하파티는 2013년 10월 26일, 농성장에서 열렸습니다. 여느 때처럼 전을 부치고 귤을 먹 고 노래를 들으며 농성천막을 다 같이 철거했습니다. 가뿐한 마음으로 말이죠. 그리고 12월26일 북아현곱 창은 노동당사 맞은 편 청기와예식장 뒤편 골목에 자리를 잡고 재개업식을 했습니다. 재개업식 날, 이선 형 님이 입당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을 때 처음엔 다들 잘못 들은 줄 알았습니다. 그동안 몇 년의 시간을 같 이 보내면서도 한 번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
“제가 원래 정치에 혐오감이 있었습니 다. 그런데 이번 일 겪으면서 생각이 달 라졌습니다. 저도 당원으로서 할 수 있는 몫만큼은 앞으로 하려고 합니다”
었거든요. 1월2일에 입당원서를 직접 건네면서 물었습니다. “왜요?” 우리는 정말 궁금했거든요. “제가 원래 정치에 혐오감이 있었습니다. 그 런데 이번 일 겪으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정 말 감명 받았고 이런 정당이 참 정당이고 사회에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꾸준히 했습니다. 재개업
하면 바로 입당하려고 했어요. 몸으로 부대끼면서 사회구조를 바꾸는 일을 저도 당원으로서 할 수 있는 몫만큼은 앞으로 하려고 합니다.” 다들 예상하시다시피, 이선형 당원님의 이 답변은 듣고 있던 또 다른 서대문 당원을 울렸습니다. 그렇 게 서대문당협의 2014년은 시작합니다. 서로에게 스며들고 서서히 번지는 한 해, 웃으면서 끝까지 가는 한 해를 지역에서 다 같이 만들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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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현장에서
“학교 앞에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구로 당원들, 교학사 역사교과서 반대 1인 시위 양동석 서울 구로당협 사무국장
위안부가 일본군을 따라다녔다고? 얼마 전부터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른바 ‘ 교학사 역사교과서 논란’이지요. 교학사에서 출판한 고등학교 역사교과서가 역사적 사실을 심각 하게 왜곡하거나 상당히 편향된 시각으로 역사를 서술한 것입니다. 위안부가 일본군을 따라다녔다고 표현하고 (조선의)생활습관이 개선되었다는 등 일제 강점기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것, 4.3제주항쟁에 대한 양비론적 서술, 이승만을 과도하게 부 각시키고 그 외 독립운동가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서술이 부족한 것 등이 그 예입니다. 사실 역사적 사실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지 만 역사적 사실을 아직 배워야 하는 학생들이, 더군다나 고등학교를 졸업 이후 역사를 접할 기회가 많이 없는 한국의 현실에서 마지막으로 배운 역사교과서의 내용이 이렇다고 한다 면 이를 배운 학생들은 평생 그것이 역사의 진실이라고 마음에 새겨 둘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교육의 범위를 이미 넘어선 일이지요. 교육 관련자, 교육 관련단체만이 아 닌 양심있는 모든 사람들의 일인 것입니다.
학교, 가장 정치적인 공간이다 구로지역에서도 전교조 뿐 아니라 지역의 진보정당, 시민사회단체들이 교학사 역사교 과서 채택 반대 활동에 함께 했습니다. 물론 노동당 구로당원협의회도 함께였습니다. 구로 구 내 각 고등학교 앞에서 교학사 역사교과서 채택 반대를 위한 1인 시위를 진행했습니다. 아침에 당원들과 함께, 공동대책위원회에서 노동당이 맡기로 한 ○○고등학교로 향했 지역에서 현장에서 67
습니다. 저와 당원들이 피켓을 펼치자 아니나 다를까 교문 앞에 서있던 선생님들이 “학교 앞에서 이러면 안 된다”, “학생들이 등교하는 길이니 방해하지 말라”며 제지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앞에서 이러면 안 된다는 선생님들의 인식이 안타까웠습니다. 거기에는 학교는 정치로부터 벗어난 공간이라는 생각이 담 겨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느낀 바로는, 학교는 어느 곳보다 (한 쪽에 편향적인)정치 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구로구는 아니지만, 얼마 전 ‘ 안녕들하십니까’ 열풍 때 몇몇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붙인 대자보를 강제로 떼고 징계논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학교가 정치로부터 벗어난 공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어느 곳보다 정치에 민감하고 또 편향된 공간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입니다. 선생님들의 제지에도 저와 당원들은 꿋꿋이 피켓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물론 등교하는 길을 막지 않 도록 길 한 쪽에서 조용히, 그러나 들고 있는 피켓은 잘 보이게. 제지하던 선생님들도 더는 어찌할 수 없는 걸 알았는지 우리가 들으라는 듯 자기네들끼리 얘기를 시작합니다. “균형 있고 공정하게 배워야지”, “한 쪽 말만 가르치면 그게 올바른 역사인가” 그런 말을 들으니 ‘ 학교니까 조용히…’라는 마음이 싹 달아납니 다. 결국 한마디 쏘아붙였습니다. “그러니까요. 균형 있고 공정하게 배워야 하는데 왜 한쪽 말만 가르치려 고 이렇게 기를 쓰는지 모르겠네요.” 균형 있고 공정한 교육. 올바른 역사 교육. 그게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입니다. 왜곡되고 편향된 시각 의 역사교과서가 아닌 역사적 진실과 상식적 역사관에 입각한 역사 교육을 하라는 최소한의 주장인데, 이 런 기본조차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교육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거의 모든 분야 에서 이런 기본이 지켜지고 있지 않습니다. 한마디 하고 나니 선생님들도 더는 뭐라 하지 않았습니다. 피켓을 들고, 준비한 유인물도 학생들에게 나눠줬습니다. 학생들에게 나눠준 유인물이 어떻게 될까 걱정도 있었지만 잠시라도 보게끔.
정말 큰 싸움은 시작도 안했다 이렇게 구로지역 곳곳에서 한 활동들이 효과가 있었는지 구로구 내에서는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 교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모 고등학교가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려다 진보정당, 시민사회진영의 움직임 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채택을 포기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 학교에게는 잘 된 일입니다. 우리가 정말 ‘ 큰 움직임’ 을 보여주려고 했으니 말입니다. 최근 언론기사를 보면 잘못된 교학사 역사교과서의 채택을 포기하는 학교가 속속 늘고 있는 것 같습니 다. 많은 사람들이 0%대 채택률을 예상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교육부가 국정교과서 제도를 부활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왜곡된 내용을 선택의 여지없이 모든 학생에게 가르치려는 의도겠지요. 그들 이 그토록 좋아하는 ‘ 공개경쟁’의 원칙을 자신들이 불리한 곳에서는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있습니다. 정말 큰 싸움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느낌입니다. 68
무지개 기금
글· 그림 김재수 경기 부천 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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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토론
노동· 정치· 연대의 원탁회의 제안,
노동당의 대응은? 2011년 말부터 지역과 현장의 노동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 새로운 노동 정치를 위한 제안자모임’이 최근 ‘ 노동· 정치· 연대’의 이름으로 출범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초 노동당, 녹색당, 정의당 등 진보정당과 민주노총, 진보교연을 비롯한 진보 · 민중단체에 ‘ 진보정치의 연대와 통일을 위한 원탁회의(이하 원탁회의)’ 를 함께 구성하 자고 제안했습니다. 제안서는 ‘ 박근혜 정권에 대한 공동대응과 현안 공동투쟁 방안 모 색’ , ‘ 2014년 지방선거에서의 진보진영의 공동대응 기조와 방안 마련’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현재 노동· 정치· 연대의 제안에 동의하는 민주노총, 노동당, 노동정치연대, 정의당, 진 보교연 등 다섯 개의 정당· 단체가 모여 세 차례에 걸쳐 사전 집행책임자 회의를 진행해 왔습니다. 사전집행책임자 회의를 통해 공동현안 대응, 지방선거 공동대응, 진보정치 혁 신과 재편을 주요 논의의제로 선정하고, 명칭을 ‘ 진보정치 혁신과 재편을 위한 새로운 길 (새길)’ 로 가확정하는 등 출범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제안자 모임’ 또는 ‘ 추진회의’ 라는 약칭으로 불려온 노동· 정치· 연대의 움직임은 노 동당 당원들 사이에서 자주 거론되었지만, 공식적으로 당 ■필자 (가나다 순) 권태훈 기획조정실장 나경채 서울 관악구의회 의원 나도원 문화예술위원장
에 제안을 보내온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노동당 기관 지 <미래에서 온 편지>는 쟁점토론 지면을 통해 노동· 정 치· 연대가 보내온 제안에 대해 당원들과 공유하고 토론 하는 장을 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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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토론
노동· 정치· 연대의 원탁회의 제안, 노동당의 대응은?
2011년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진보정치 재편 임박했나 권태훈 기획조정실장
현실에서 재편에 찬성하는 의 견은 노동당 독자 생존에 대한 부정적 판단에서, 반대하는 의 견은 외부 세력에 대한 반감에 서 주된 근거를 찾고 더 나아 가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런 태도와 프레임에 머문다 면 발전적 논의를 기대하기 어 렵고, 당의 능동적 대응도 기대 하기 어렵다.
먼저 이 글은 중앙당 기획조정실장이 아닌 당원 개인 자격으로 쓴 글 임을 밝힌다. 노동· 정치· 연대가 제안한 ‘ (가칭)진보정치 혁신과 재편 을 위한 새로운 길(약칭 ‘ 새로운 길’)’ 참여와 관련해 사전 집행책임자 회 의에는 참여하고 있으나 정식 참여 여부는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결정 된 바가 없다. 이는 추후 당내 논의 절차를 통해 결정할 것이다. 이 점을 전제로 간략히 의견을 말씀드린다.
진보분할구도 해소 위한 재편은 불가피 결론적으로 나는 노동· 정치· 연대가 제안한 ‘ 진보의 결집과 정치 적 동맹’ 논의에 노동당이 ‘ 주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현재의 네 개 당으로 분할된 진보정당의 구도는 노동당뿐만 아니라 진보정치 전반의 약화를 초래하고 있다. 역대 선거결과를 보면 반(反)새 누리당, 비(非)민주당 성향의 진보정당 지지표가 대략 10~13% 존재한 다. 이것이 진보정당 지지기반인데, 그나마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 정선출 사태와 이석기 의원 관련 사건, 안철수 신당의 출현 등으로 훨씬 줄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은 현재 0.몇%에서~2% 사이를 오가는 진보정 당들의 지지율을 봐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지지기반은 협소한데 네 개의 당이 경쟁을 하다 보니 모두 안팎으로 고만고만한 당이 되었다. ‘ 규모 의 경제’는 실현되지 않고, 내부 경쟁만 치열해진다. 그 결과, 진보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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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수 세력에 맞설 힘과 능력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노동자-민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이는 다시 진보정당들의 지지기반을 협소하게 만드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분할이 현재 진보정치 위기의 알파와 오 메가는 아닐지라도 상당한 악조건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협소한 지지기반에 비해 너무 많이 분할된 진보정당의 구도는 극복해야만 하고, 언젠가는 극복 할 것이다. 공격적 경쟁을 통해 패배한 세력이 도태되든, 정치적 논의를 통해 재편을 거치든, 또는 이 둘 이 결합된 방식이든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보정치 재편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를 인식한다면, 노동당은 지금 상황에서 당의 외연을 확대하고 당의 노선에 입각해 진보정치 재편이 진행될 수 있도록 ‘ 능동적’ 개입을 할 필요가 있다. 이를 회피하는 것은 현실도피일 뿐이다.
올바른 재편의 가능성 위의 판단에 동의한다면 ‘ (가칭)새로운 길’ 에 능동적 진보정치 재편 가능성이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개입할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노동당은 작년 초 전국위원회에서 당의 진보정치 재편의 원칙으로 ‘ ▷자 본주의 극복, 사회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계승하며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이념의 재정립, ▷보수야당과 구 별 정립되는 진보정당의 독자적 성장 발전 노선, ▷확고한 대중정당, 현실정당으로서의 활동상 정립, ▷ 패권주의 일소와 민주적 절차 확립’을 제시한 바 있다. 이후 과정에서는 이에 관한 ‘ (가칭)새로운 길’ 참여 단위들의 입장을 확인해야 한다. 진보교연, 노동· 정치· 연대는 전에 당의 진보좌파정당 추진 대상이었 고 위 원칙에 가까운 입장을 표명했다. 현 민주노총 집행부가 이전 집행부들에 비해 진보정치 혁신의 의 지가 강한 점 등을 고려하면 그 가능성이 적다고 볼 수는 없다. 정의당이 애매할 수 있지만, 이는 이후 공 동 실천과 논의 과정에서 서로 확인하고 판단할 문제다. 정의당 때문에 이런 논의 참여 자체를 피한다면 그나마 형성된 나은 조건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정의당 이외에 ‘ (가칭)새로운 길’에 참여하는 세력으로부터도 고립
정치에서 100%는 없다. 현실에 존재하는 변화의
될 가능성이 높다.
가능성을 조금씩 확대하고 변화를 이끌어 가는
정치에서 100%는 없다. 현실에 존재 하는 변화의 가능성을 조금씩 확대하고
것이 정치라고 한다면, ‘ (가칭)새로운 길’ 은 이 전에 비해 그 가능성이 조금 더 높은 구조다.
변화를 이끌어 가는 것이 정치라고 한 다면, ‘ (가칭)새로운 길’은 이전에 비해 그 가능성이 조금 더 높은 구조이다. 따라서 당의 발전과 진보정치운동의 발전을 위해 노동당은 이 논의 에 적극 참여하면서 상호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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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분위기가 충분히 성숙하기 전에 무리한 재편을 강행할 때의 부정적 후과에 대해서는 참가 단위들 모두 공감하고 있다. 이런 공감대 위에서 충분한 공동 활동을 통해 서로를 확인하고, 진보혁신과 단결의 과제 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며 장기적인 재편의 그림을 그려나가고 있다. 당장 통합을 할 것처럼 호들갑을 떠 는 분들도 계시지만 이는 아직 장기적인 연구과제일 뿐이다. 이 과정에서 언제든 당은 필요한 논의와 판 단을 할 수 있다. 당의 입장에서는 충분한 내부 논의와 외부 변화를 추동할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진보정치 재편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이렇듯 당의 입장에 기반을 둔 재편의 가능성이 상당히 열려있 고, 당 안팎으로의 충분한 논의를 전제로 한 기구라면 참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기왕에 참석할 거라면 적극적인 자기 계획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를 통해 당의 정치력을 확대하고 그 결과 진보정치의 혁신과 재편이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당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청산적 태도, 폐쇄적 태도에 모두 반대한다 앞서는 나는 ‘ 진보의 결집과 정치적 동맹’ 논의에 ‘ 주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굳이 ‘ 주체적 참여’라고 한 것은 당의 전망에 회의하면서 재편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는 청산적 태도에도, 당 의 정치적 전망을 능동적으로 개척하기보다 재편 논의에 알레르기 반응을 먼저 보이는 폐쇄적 태도에도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기 때문이다. 재편에 대한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노동당을 ‘ 운동’으로 보지 않고 노동당이라는 형식 자체 에 매몰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우리가 노동당을 만든 것은 노동당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노
당의 전망에 회의하면서 재편만이 살길이라고
동당을 통해 진보정치운동, 나아가 한 국 사회를 진보적으로 변화시키기 위
생각하는 청산적 태도에도, 당의 정치적 전망을
해서이다. 한마디로 노동당은 운동의
능동적으로 개척하기보다 재편 논의에 알레르
‘ 수단’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노동
기
당 자체가 아니라 노동당으로 결합된
반응을 먼저 보이는 폐쇄적 태도에도 반대한다.
사람들, 현재 노동당을 통해 드러나는 ‘ 운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볼 때, 진보정치 재편은 노동당 ‘ 운동’ 에 닥친 하나의 국면이다. 이런 새로운 국면에서 ‘ 운동’ 을 위해 노 동당이라는 형식은 유지할 수도, 반대로 과감히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노 동당으로 결집된 운동, 나아가 진보정치운동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가이다.
노동당, 형식이 아니라 ‘ 운동’ 이 중요 78
작년 9월 노동정치연석회의에서 주최한 공개토론회 모습 (사진 : 참세상)
이렇게 본다면 재편에 찬성하는 쪽은 노동당으로는 어렵다는 주장 이전에 재편 이후 노동당 ‘ 운동’의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재편에 반대하는 쪽은 특정 세력과는 못한다고 하기 전에 노동당 ‘ 운동’ 의 독자 생존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이렇게 운동 전망을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될 때 서로의 이해폭도 좁힐 수 있 고, 발전적 논의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재편에 찬성하는 의견은 노동당 독자 생존에 대한 부정적 판단에서, 반대하는 의견은 외부 세력에 대한 반감에서 주된 근거를 찾고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런 태도와 프레임에 머문다면 발전적 논의를 기대하기 어렵고, 당의 능동적 대응도 기 대하기 어렵다. 그 결과는 2011의 독자-통합 논쟁이 잘 보여주지 않았는가. ‘ (가칭)새로운 길’은 진보정치 혁신과 재편 의 요구가 객관적으로 존재함을 보여준다. 여기에 어떤 태도와 입장을 가질 것인가는 온전히 노동당의 몫이다. 2011년을 반복하고
‘ (가칭)새로운 길’ 에 대해 어떤 태도와 입장 을 가질 것인가는 온전히 노동당의 몫이다. 2011년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면 모두가 2011 년보다 조금 더 나아가면 된다.
싶지 않다면 모두가 2011년보다 조금 더 나아 가면 된다. 지도부는 좀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재편 찬성이든 반대든 당원을 설득하기 위한 적극적 전 망을 제시하고, 당원들은 좀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명하고 소통한다면 2011년을 반 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변화를 위한 노력 없이 단지 2011년에 힘들었다고 회피하는 것은 답이 아니라 후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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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토론
노동· 정치· 연대의 원탁회의 제안, 노동당의 대응은?
미래로 보낼 편지 진보정치 재건하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나경채 서울 관악구의회 의원
철도민영화와 의료민영화로부 터 시작해 멈추지 않고 질풍과 노도의 기세로 몰려올, 가스· 발전 등 공공 기간산업의 사유 화 공격’ 에 맞서 우리가 노동 자· 민중 세력에게 어떤 편지 를 쓸 것 인지에 대한 진지한 물 음이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당 원으로서, 노동· 정치· 연대가 우리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회 신을 넘어서는, 노동당이 미래 에 보낼 편지를 주문한다.
노동· 정치· 연대의 편지 작년 12월 3일, ‘ 노동· 정치· 연대’는 노동당을 포함한 진보정치 세 력들에게 공적인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 이 편지는 ‘ 지금 우리에게 필 요한 것은 정치적· 사회적 힘을 최대화 할 수 있는 진보의 결집과 정치 적 동맹’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 동맹이 우리끼리 의 논의로 머물지 않고 대중적인 실천과 행동이 함께 이어지도록 ‘ 지방 선거의 공동대응’과 ‘ 지역과 현장에서의 공동대응’을 과제로 하는 연석 회의를 제안한다. 이 제안은 몇 차례의 회의를 거쳐 ‘ 현안 공동대응, 지방선거 공동 대 응, 진보정치 재편을 위한 실현방안 마련’ 이라는 의제로, 조직의 명칭 은 ‘ 진보정치 혁신과 재편을 위한 새로운 길(약칭 새길)’로 구체화 되었 다. 1월 22일 경에는 노동당을 포함하여 이 논의를 지속하고자 하는 정 치세력의 대표들이 모여 출범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하기로 약속했다.
실망과 현실 진보정치의 재건과 이를 위한 재편의 필요성에 공감했던 사람들은 이 제안과 제안의 구체화 과정을 지켜보며 실망을 감출 수 없다. 수능 D-100인데 아직도 <집합과 원소> 문제풀이를 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80
11월 2일, 노동정치연대 출범식 모습 (사진 : 레디앙)
박근혜 정부의 노동탄압이 노골화되며 정부는 공무원노조를 비롯한 전교조 등 대형 노동조합의 실체 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노동조합의 특정 활동을 문제 삼는 걸 넘어 노동조합의 존재를 부정하는 반동의 정치에서 진보정치 세력의 역할은 거의 없었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연대했지만 그 사회적 존재감 과 발언권에서는 주변화 되었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노조는 거의 자력으로 이 상황을 이겨 나가야 했다. 이것을 확인한 정부는 철 도민영화 카드를 슬그머니 꺼내어 놓
박근혜 정부의 노동탄압이 노골적으로 진행되
았다. 결코 적지 않은 국민이 철도노동
고 있지만, 진보정치 세력이 할 수 있는 일은 거
자들의 파업투쟁을 지지했지만 정부는 수서발 KTX 법인에 대한 면허 발급을 강행했고, 철도지도부는 진보정치 세
의 아무것도 없었다. 노동운동은 거의 자력으로 이 상황을 싸워나가고 있다.
력이 아닌 민주당과의 협의를 통한 조 직적 철수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를 냉정하게 판단한다면 박근혜 정부의 다음 수가 무엇인지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의료영역의 공공성이 공격당할 것이다. 철도공공성의 벽은 이미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전 시기 신자유주의 정부가 감히 단행하지 못했던 수도, 가스, 발전 등 공공 기간산업의 사유화가 노도와 같이 밀려와 우리 사회를 바꿀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한마디로 지난 1년 동 안 충분히 간을 보았다. 진보정치 세력, 진보정치와 대중운동의 결합에서 오는 폭발력은 이제 과거가 되 었고 더 이상 변수가 되지 못한다는 잠정 결론이 내려진 상태 아니겠는가. 이러한 주제들을 둘러싼 투쟁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진보정치 세력이 고민하고 논의한 결과가 ‘ 현안투 쟁점토론 81
쟁 공동대응, 지방선거 공동대응, 진보정치 재편 실현방안 마련’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과정과 역사가 있다. 노동· 정치· 연대의 이 제안은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2011년 겨울 ‘ 노동정치 제안자모임’으로부터 출발해 ‘ 노동자정당 추진회의’를 거쳐 새로운 노동정치를 시도하는 데 머리를 맞댄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했다. 2년 동안 제안자 모임과 추 진회의는 노동정치연석회의를 통해 노동운동 정파의 갈등과 대립을 뛰어넘어 노동 및 진보정치의 위기 를 딛고 다시 세상을 바꾸는 노동· 정치운동의 주체들을 조직화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 과정에서 ‘ 진 보정치 통일과 재편’ 이라는 목표를 확인했고 그 구체적인 방안의 하나로 진보 연합정당을 제안하기도 했 다. 그리고 이를 위해 지방선거 이전에 본격적인 진보정치 추진체를 구성하고 그 단결된 힘으로 이번 지 방선거를 돌파하고,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구심이 되고자 했다. 또 이러한 사회적 전망이 단지 정치집단들의 이합집산이거나 상층 관료들에 의한 하향식 제안이 되지 않아야 했기에 지역과 현장의 일 상적 운동을 제안하며 ‘ 민중의 집’ 운동에 주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진보정치의 현실적 틀과 관성, 자기고민을 만나면서 제한되거나 축소되었다. ‘ 진보정치의 재편’이라는 전략적 목표는 현안 대응과 지방선거 공동대응이라는 전술적 목표와 병렬적으 로 다뤄지게 되었고, 선거를 위해서라도 지방선거 이전에 국민적으로 제시되어야 할 진보재편의 로드맵 은 현실적 이유로 지방선거 이후에 그 방안을 마련하는 것으로 완화되었다. 아니 완화라기보다는 소극적 으로 바뀌었다는 게 더 진실에 가깝다 현실을 인정하더라도 이 정도 수준의 ‘ 새길’ 출범선언을 접하는 사람은 여전히 갈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써야 할 편지는 무엇인가? 노동당 이용길 대표체제는 임기 초에 진보정치 재건을 내세우며 네 가지 기본 방향을 제시했다. 네 가 지 기본 방향을 강조하며 진보정치 재편 논의에 당이 참여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을 당 게시판을 보았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 모든 논의에 대해 회의론자가 되었다. 내가 회의론자가 된 첫 번째 이유는 당이 편지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적시한 이유로, 즉 그 제 안의 소극성과 수동성 때문에 나는 노동· 정치· 연대가 제안한 내용이 그다지 흔쾌하지 않다. 그것에 대 한 단순한 찬성과 반대의 진영 간 논쟁에
혹자는 2011년 독자-통합 논쟁을 무용하고
빠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당
무익했던 토론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대표가 약속했고 3기 제1차 전국위원회가
당시의 논쟁은 진보진영에 꼭 필요한 것이 었고, 이미 우리의 역사다. 82
결의했던 진보정치의 ‘ 결집’을 이루어 낼 노동당의 구체적 행보에 관한 현재에서 미 래로 보내는 우리의 편지가 없다면, 미래
에서 올 편지는 당연히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혹자는 2011년, 독자-통합 논쟁을 무용하고 무익했던 토론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노동· 정치· 연대의 제안이 그 무용· 무익한 논쟁을 재현하는 것인 양 경계한다. 그러나 당시의 그 논쟁은 진보진영에 꼭 필요한 것이었고, 이미 우리의 역사이다. 노동자 조직과 대중운동이 분열된 노동정치에 대한 평가를 요구한 것이었고, 진보정당을 바라보는 많은 유권자가 귀추를 주목했었던 토론이었다. 결국 한미 FTA가 타결되었다고 해서 2000년대 중후반의 FTA를 둘러싼 사회적 대논쟁이 무용한 것이었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지금 진보정치 세력에게 그때와 달라 보이지 않는 주제에 대한 입장을 묻고 있는 노동· 빈민을 비롯한 사회운동 진영 주장은 복고가 아니라 당시의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퇴진 투쟁을 결의한 노동당의 제안이 ‘ 새길’ 창립을 준비하는 모임에서 ‘ 정의당’에게 받 아들여지지 않은 문제를 그들의 진보성을 문제 삼는 증거로 이야기하는 입장도 있다. 박근혜 정부 퇴진 투쟁에 대한 결의를 논하는 우리 대표단의 회의에서조차 투쟁의 구체적 계획, 퇴진 투쟁의 정치적 의미를 둘러싼 이견이 적지 않았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한다면, 그런 판단은 섣부른 것일 수도 있다.
미래로 보낼 편지 미래가 보내는 편지 같은 것은 애초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당의 기관 지 이름이 ‘ 미래에서 온 편지’가 된 것은 답답한 우리 사회를 비추는 희망을 갖기 위해 ‘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미래가 되어 야 한다는 의미이지 당장은 어려우니 장
이 기관지의 이름이 <미래에서 온 편지>가 된 것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미래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 당장은 어려우니 장기적으로 보자는 의미가 아니다.
기적으로 보자는 의미는 아니다. ‘ 노동조합의 존재에 대한 공격, 철도민영화와 의료민영화로부터 시작해 멈추지 않고 질풍과 노도의 기세로 몰려올 수도, 가스, 발전 등 공공 기간산업의 사유화 공격’에 맞서 진보정치를 재건하고 그 세력을 결집시키겠다고 약속했던 우리가 노동자· 민중 세력에게 어떤 편지를 쓸 것 인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당원으로서, 노동· 정치· 연대가 우리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회신을 넘어서는, 노 동당이 미래에 보낼 편지를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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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토론
노동· 정치· 연대의 원탁회의 제안, 노동당의 대응은?
현실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 복구 아닌‘ 혁신’이 필요하다 나도원 문화예술위원장
노동· 정치· 연대는 노동당, 녹색당, 노동자계급정당추진 위, 민주노총, 정의당, 진보교연 에게 ‘ 진보정치의 연대와 통일 을 위한 원탁회의’를 제안했다. ‘ 박근혜 정권에 대한 공동대응 과 현안 공동투쟁 방안 모색’ , ‘ 2014년 지방선거에서의 진보 진영의 공동대응 기조와 방안 마련’을 열거했으나, 사실상 무 게추는 ‘ 진보정치의 통일과 재 편’에 실려 있다.
한때 덩치를 키우며 힘차게 구르던 눈덩이가 여러 조각으로 나뉘었 다. 외부 장애물에 부딪쳐서라기보다는 내부 균열이 원인이었다. 얼마 후, 누가 보아도 뭉쳐지지 않을 것 같은 조각들이 합쳐지는가 싶더니 또 쪼개어졌다. 그럼에도 또 다시 얼음처럼 굳어버린 덩어리와 잘못된 선 택을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는 눈덩이를 섞어야 한다고 말하 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 방향은 이리저리 틀어지고, 속도는 늦춰지며, 언젠가 산산조각날 것이다. 그때에는 아무런 기회조차 남지 않을 것이 다.
모두가 결말을 알고 있는 재방송에 대하여 노동· 정치· 연대는 노동당, 녹색당,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 민주 노총, 정의당, 진보교연에게 ‘ 진보정치의 연대와 통일을 위한 원탁회 의’를 제안했다. ‘ 박근혜 정권에 대한 공동대응과 현안 공동투쟁 방안 모색’ , ‘ 2014년 지방선거에서의 진보진영의 공동대응 기조와 방안 마 련’ 을 열거했으나, 사실상 무게추는 ‘ 진보정치의 통일과 재편’에 실려 있다. 2014년 1월 6일에 열린 세 번째 책임집행자회의에서 명칭을 가합 의한 ‘ 진보정치 혁신과 재편을 위한 새로운 길’은 출범선언문(안)을 통 하여 “다시는 나뉘고 무너지지 않을 진보정치의 길을 모색”하고, “실패 한(!) 진보정치를 되살릴 작은 불씨”가 되자고 밝혔다. 또한 합의한 내용 에는 “지방선거를 앞둔 일회성 논의기구가 아님을 확인”하고, “현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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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에서의 공동대응이 진보정치의 재편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운영에 있어서 시기 제한을 두지 않 는다”고 적어두었다. 녹색당과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가 참여하지 않고 있는 이 기획은 노동당과 정의당 의 통합을 요구하는 프로젝트인 것이다. 이 제안의 ‘ 위상’과 ‘ 방식’부터 문제였다. 2013년 12월 3일에 발송된 제안서는 수신단위들에게 불과 5 일 후인 12월 8일까지, 공식제안 후 불과 5일 만에, 답을 요구했다. 관련 정당의 당원들 중 다수는 상세한 내용을 모르거나 풍문으로 접한 상태임에도 신속한 답을 요구한 것은 그만큼 일부 세력들이 교감을 나누 었다는 것, 그리고 당내 논쟁을 최소화하고 테이블부터 구성해놓은 방식을 선택했음을 의미한다.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노동당의 위상에 대한 인정 문제, 둘째는 노동당 당원들에 대한 인식 문제, 셋째는 미래에 대한 비전 문제이다. 가장 긴 역사와 정통성, 가장 많은 조직원(당원)을 지닌 노동당은 이 테이블의 구성과정에서 어떤 위상 을 가지고 있는가. 외부조직이 주도하고 민주노총이 거들며 소수 당원들이 동조하는 테이블에 앉아야 할 지 고민해야 했던 상황이다. 실체가 있는 노동당이 정작 스스로를 변수로 내놓았다. 현안 공동투쟁으로 제한하면 참여 가능할 수 있겠지만, 노동당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 박근혜 정권 퇴진투쟁’ 은 거부 당했 다. 다시 묻는다. 노동당은 무엇인가? 원칙의 문제가 있다. 노동당은 진보좌파정치의 재건을 위한 4대 원칙으로 ‘ 자본주의 극복, 사회주의의 이상과 원칙 계승’과 ‘ 진보정당의 독자적 성장발전노선’을 분명히 한 바 있다. 현재 거론되고 있는 대상들 이 이 원칙에 부합한 지향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 정권과 공동책임이 있거나 당의 민주적인 의사결정에 불복한 세력과 또 다시 통합을 논의하는 테이블에 동석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선 충 분한 설명과 설득이 필요하다. 혹자는 나머지 원칙들 중에서 ‘ 대중정당, 현실정당 재정립’과 ‘ 패권주의 일소와 민주적 절차 확립을 제시하고 그에 동의하는 모든 개인 및 세력의 결집’ , 특히 ‘ 모든 개인 및 세 력’을 강조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원칙이라 함은 다른 원칙을 위배하는 조건에서는 정당화되지 않는 다. 기존의 원칙을 무시하는 것은 당 론 위배다. 선택의 길이 복잡하게 얽 혀 판단이 서지 않을 때엔 원칙을 생 각하면 된다. 또한 정당들의 통합은 전제된 목표가 아니다. 지난한 공동 실천이라는 전제조건의 완수를 이룬
선택의 길이 복잡하게 얽혀 판단이 서지 않을 때는 원칙을 생각하면 된다. 또한 정당들의 통합은 전제 된 목표가 아니다. 지난한 공동실천이라는 전제조 건을 완수해야 논의는 시작될 수 있다.
결과로써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배운 바 있다. 현실적으로도 정의당은 미온적이고, 노동당 당원 상당수는 통합 프로젝트의 재가동에 거부감을 가지 고 있다. 당원수가 많으니 합당 후에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것은 오판이다. 합당 후 이합집산이 있을 테 고, 완전히 다른 구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우파 견인론 또한 현실성 없는 구호에 불과하다. 그 쟁점토론 85
럼에도 통합프로젝트가 추진된다면 또 다른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강력한 반발 이 있을 것이며, 동의하지 않는 상당한 세력은 이탈하거나 노동당을 사수할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알면서, 그리고 현실성을 의심하면서도 명분을 위하여, 혹은 고립을 피하기 위하여 일 단 참여하자는 의견이 있다. 다른 대상도 마지못해 참여하고 있으니 노동당도 일종의 알리바이를 만들자 는 것이다. 순진한 생각이다. 일단 테이블에 자리가 만들어지면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때에는 더 큰 명분이 필요할 것이다.
복원이 아니라 재구성으로 가능한 좌파정치 물론 나뉜 노동운동과 투쟁이라는 ‘ 현장문제’와 다른 조직과의 결합을 기획할 수밖에 없는 인적· 물 적 토대라는 현실문제가 있다. 그런데 또다른 현실이 있다. 민영화 저지를 위한 철도파업 중단과 민주노 총본부가 침탈당한 상황에서 이어진 민주노총의 ‘ 파업결의대회’ 의 현실을 지켜보았다. 이것 또한 현실이 다. 놀랍게도 “철도노조가 현장복귀를 하면서 보수정당과 협의를 할 수밖에 없었던 뼈아픈 장면을 되풀 이 할 수는 없습니다”라는 가칭 새길의 출
지금 말해지고 있는 것은 ‘ 혁신’ 이 아니라 ‘ 복구’ 이고 ‘ 새로운 길’ 이 아니라 ‘ 답습’ 일 뿐이다. 긴 호흡과 진정한 성찰 없이는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범선언문(안)은 문제의 원인을 어디에 돌 리고 있는지 보여준다. 단언컨대 이러한 인식 수준으로는 미래를 위한 좌파정치를 재구축할 수 없다. 과연 진보정치의 재편은 무엇인가? ‘ 진 보정치 혁신과 재편을 위한 새로운 길’이
라는 명칭과 달리 그 이후에 대한 새로운 대안 기획을 찾아볼 수 없다. 10년 앞을 내다보아야 할 때 10년 전을 뒤돌아보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만들어내야 할 새로운 노선의 가능성에는 의문을 표하면서 정작 통합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않은가? 그 다음에 대해선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좌파 정치는 당면 일정과 실익에 쫓기며 세력 재편을 논하는 양상에서 벗어나 실력으로 검증받고 경쟁하는 단 계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진짜 현실을 직시하고 진보좌파의 진정한 재편이 무엇인지 고민할 때이다. 혁신을 말하면서 자신들의 혁신은 주저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시대는 진보세력에게 처절한 자기비판과 자기혁신을 요구하고 있다. 세상의 혁명을 논한다면 자신의 사고와 방식의 혁명을 주저해선 안 된다. 그러나 지금 이야기되는 것은 ‘ 혁신’이 아니라 ‘ 복구’이고 ‘ 새로운 길’이 아니라 ‘ 답습’일 뿐이다. 긴 호흡과 진정한 성찰 없이는 아무것 도 변화시킬 수 없다. 이합집산을 염두에 둔 상태로는 당면한 지방선거를 위하여 힘을 모아낼 수 없다. 당의 구심력을 약화 될 것이다. 중요한 일전을 앞두고 이러한 논란에 당(과 당원들)을 매몰시킬 위험이 있다. 지방선거 환경은 86
좌파정당에게 매우 불리할 수밖에 없지만 좌파정치의 기지로서 노동당의 장기전망을 구축하지 않으면, 그 의지의 토대를 쌓아가지 않으면 좌파정치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힘의 결집과 장기전망 연구에 매 진할 때에 벌어지는 혼란과 비관은 ‘ 힘의 낭비’를 초래한다. 이미 시청한 바 있는 재방송은 접고, 지방선 거 돌파와 새로운 좌파정당의 지향에 대하여 연구하고 실천해야 한다. 한두 걸음 나아가려다 열 걸음 물 러섰던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노동당의 장기 플랜 공표와 안정성 확보가 진보좌파정치의 미래를 위하여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서 맡 아야 할 책무이다. 밖으로는 ‘ 박근혜정권 퇴진투쟁’을 위한 별도의 공동연대체를 제의하는 것이 ‘ 공당의 길’이며, 녹색당 등과 상호 존재를 인정하며 가치 중심의 공동투쟁을 구상하고 현실화하는 것이 ‘ 새로운 길’이다. 안으로는 21세기 대중적 좌파정당 노선의 출발은 주체의 발굴과 좌파정치의 재구성임을 인식하 고 ‘ 정치주체화를 위한 대중정당 기획’과 ‘ 녹색과 예술의 전면화’ 그리고 ‘ 지역과 부문의 연결· 조화· 균형’을 위한 프로젝트를 가동해야 한다. 노동계급정치와 사회진보운동 그리고 부문운동의 결합이 없다 면, 모두를 주체로 상정하는 혁신이 없다면 민 중의 독자정치세력화는 현실화되지 않는다. 손가락을 하나씩 차례로 펴들며 말하는 것 처럼 보일지 모른다. 누군가는 비현실적인 나 열이라 말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손가 락들이 하나의 손을 이루고 있다. 이것이 오늘
과거에는 엄지손가락 하나로 문을 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문은 보다 강고해졌고 문고리의 작동방식은 더욱 복잡해졌다.
날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이다. 여러 손 가락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손이 있어야 문을 열 수 있는 시대다. 오히려 반대의 입장이야말로 비현실적이 다. 그들은 가장 힘이 센 손가락인 엄지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에는 그 손가락 하나로 문을 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문은 보다 강고해졌고 문고리의 작동방식은 더욱 복잡해졌다. 이제 그 하나의, 가장 굵은 손가락 하나로는 문을 밀어젖히기는커녕 문고리를 잡아 돌릴 수조차 없다. 과거가 현재를 만든다. 미래를 만드는 것은 현재다. 그러나 이 글은 ‘ 미래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있 다’ 는 지당한 제목을 갖지 않았다. 사라진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지향만이 아니라 바로 현재와 미 래를 정확히 바라보려는 현실지향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현실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 스스로 물어야 할 시간이다. 지금 우리가 종이를 넘겨가며 <미래에서 온 편지>를 쓰고, 읽고 있는 이 유는 무엇인가.
쟁점토론 87
정책포럼
생활임금 연동 임금상한제를 도입하자 홍원표 노동당 정책위원회
살찐 고양이는 얼마나 먹을 수 있을까? 한 사람이 열 사람 몫을 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조금씩 다르니까. 한 사람이 백 사람 몫 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놀라운 곳이니까. 한 사람이 천 사람 몫을 하긴 아무래도 어렵다. 세상이 놀라워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한 사람이 열 사람 몫의 보상을 받을 수도 있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있으니까. 한 사 람이 백 사람 몫의 보상을 받
한 사람이 열 사람 몫의 보상을 받을 수도 있다. 한 사람이 백 사람 몫의 보상을 받는 일이 많기도 어렵다. 한 사람이 천 사람 몫 의 보상을 받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는 일이 많긴 어렵다. 그런 능 력이 있긴 쉽지 않으니까. 한 사람이 천 사람 몫의 보상을 받는 일은, 설령 타당한 이유 가 있더라도 바람직하지 않다. 스위스 국민들의 생각도 크
게 다르진 않았다. 지난해 스위스에서는 국민발안으로 최고경영자 임금제한과 관련해 두 번의 국민투표가 실시됐다.1) 그 중 하나가 기업 최고경영자(CEO)의 임금이 가장 적게 받는 노동자 임금의 12배를 넘지 못하도록 하자는 제안이었다.
1) 스위스는 ‘ 주민발안’과 ‘ 주민투표’라는 독특한 직접민주주의 제도를 갖고 있는데, 주민발안은 어떤 법률안에 대해 선거권자 10만명 이상의 서명을 받으면 국민투표를 통해 시행할 수 있는 제도이고, ‘ 주민투표’는 이미 국 회에서 통과된 법률에 반대하는 유권자 5만명 이상이 서명하는 경우, 국민투표를 거쳐 폐기할 수 있는 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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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에서 ‘ 1대 12 이니셔티브’ 국민투표에 찬성하는 시민들이 집집마다 내건 깃발
일명 ‘ 1대12 이니셔티브’라고 불리는 이번 국민투표는 스위스의 유명한 제약회사 노바티스의 다니엘 바젤라 회장이 7,800만 달러(약 800억)나 되는 고액의 퇴직금을 챙겨가면서 논란이 시작되었고, 스위스 사 회민주당 내 소장파 그룹이 주도한 국민발안을 통해 국민투표까지 오게 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제안 은 투표자의 65.3%가 반대해 통과되지 못했다. ‘ 1대12 이니셔티브’ 국민투표가 시행되기 8개월 전에 시행된 또 다른 국민투표는 상장사 CEO의 기본 급 및 상여금지급 계획을 주주들이 제한하도록 하는 ‘ 민더 이니셔티브’ (Minder Initiative)다. 민더 이니셔티브 의 주요 내용은 경영위원회, 이사회, 자문위원회 소속 전체 임원의 보수총액을 주주들이 표결을 통해 결 정하도록 하고, 퇴직금 및 기타 보수 청구를 제한하고, 회사의 인수 매각 시 실적수당을 받을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이 국민발안은 2008년 중견 기업가이자 무소속 정치인인 토마스 민더가 발의하였고, 3년이 넘는 캠페 인을 통해 결국 1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국민 투표에 붙여졌다. 투표 결과는 67.9%의 찬성이었다. ‘ 민더 이니셔티브’의 별칭은 ‘ 살찐 고양이’법이다. 스위스 국민은 살찐 고양이의 음식을 딱 12배로 한 정하진 않았지만, 너무 많은 음식을 갖지 못하도록 방울을 달자는 의견에는 찬성한 셈이다.
CEO 임금제한은 스위스만의 에피소드? 기업 경영진의 임금을 제한하자는 논의가 스위스에서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처음인 것도 아니다. 정책포럼 89
스위스 정부와 기업이 대대적으로 펼친 ‘ 민더 이니셔티브’ 반대 캠페인. 민더 이니셔티브가 중소기업과 노동자(고용) 모두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는 내용이다.
2009년 독일 총선에서 수상 후보로 나선 사민당의 프란츠 발터 슈타인마이어는 CEO 임금상한을 노동 자 평균임금의 20배로 제안했다. 경쟁자였고, 결국 수상이 된 기민/기사연합의 앙겔라 메르켈은 20배 이 상의 임금 차이는 능력에 따른 정상적 소득이라고 주장하고, 법으로 임금을 제한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 다. 슈타인마이어의 주장은 전적으로 수용되지는 않았지만, 같은 해 ‘ 임원보수의 적정화를 위한 법률’ (보 수적정법)이 의회를 통과했다. 법안의 주요 내용은 임원보수의 산정에 대한 감사위원회의 책임범위를 명
확히 하고, 급여 산정 시 임원의 능력 및 회사의 사정과 적정한 관계에 있어야 함을 명시해야 한다는 것이 다. 또한 임원보수 내역을 상세히 공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2012년 프랑스 대선에 출마해 11.11%의 득표를 올린 좌파당의 장 뤽 멜랑숑 역시 임금상한제를 자신의 주요 공약으로 제시했다. 그는 세금제도를 개선해 CEO 임금이 중간 소득의 20배가 넘지 못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중간 소득의 20배는 약 36만 유로(약 5억 3,000만원)에 해당한다. 그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고, 임 금제한은 법제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2012년 6월 공기업 CEO의 고정급, 변동급, 기타 급여 등 모든 임금을 해당 기업 최저임금의 20배 이하로 제한하는 규정을 발표했고, 이는 정부 주식소유지분이 큰 공기업과 그 주요 자회 사 CEO들까지 모두 적용된다. 적용 대상 공기업은 11곳이다. 중국도 이미 공기업 임금상한제를 도입, 시행 중이다. 2009년 중국 재정부는 금융공기업 및 국유기업 최고경영자(CEO)의 연봉을 280만 위안(약 5억6,000만원)으로 제한하는 ‘ 금융공기업 및 국유기업 책임자 연 봉관리방법’을 발표했다. 임금상한의 대상이 되는 임금 항목은 기본 연봉, 실적 보너스, 중장기 격려금 등 이고, 휴가비와 추가 근로수당은 제외된다. 90
신자유주의의 상징국인 미국도 기업 임원보수를 일부 제한하고 있다. 2007년
스위스뿐만이 아니다. 독일에서는 ‘ 임원보수
전세계적 금융위기를 불러왔음에도 불
의 적정화를 위한 법률’ 이 통과됐다. 프랑스와
구하고 정작 그 주범이었던 월스트리트
중국은 공기업 임금상한제를 도입, 시행 중이
의 금융기관 임원들이 거액의 보너스를 챙겨가자 오바마 미 대통령은 이들을 비 난하고 ‘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시위대
다. 미국도 기업 임원보수를 일부 제한하고 있 다.
를 옹호한 바 있다. 이후 미 의회는 ‘ 긴급경제안정법’ (2008), ‘ 미국 경제회복 및 재투자에 관한 법률’ (2009)을 제정하여 구제 금융 지원대상 기업에 대한 임원보수규제 조항을 마련하였다. ‘ 긴급경제안정법’의 핵심 내용은 구제금융 지원 대상 기업의 특정 임원보수에 대한 소득세 공제조항 적용을 50만 달러(약 5억)로 하향조정하고, 보너 스나 스톡옵션에 주어지던 예외조항 적용을 전면 금지하는 것이다. ‘ 미국 경제회복 및 재투자에 관한 법 률’ 의 주요 내용은 구제금융 지원대상 기업의 임원에 대한 성과형 보수 및 퇴직금 지급을 제한하는 것이 다. 아일랜드 정부 역시 공공 금융기관에 한해 CEO 임금상한을 도입하고 있다. 아일랜드 정부가 2009년에 제시한 정부 지원 금융기관 최고경영자의 연봉 상한은 50만 유로(약 7억 2,000만원)였고, 최고경영자 보너스 에 대해서도 기본연봉의 80% 이내에서 지급하고, 수익이 달성되지 않으면 보너스 지급을 금지하도록 권 고했다. 기업 CEO 임금제한에 대한 논의는 이처럼 스위스만의 에피소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전세계적 으로 다양하게 논의되고 있다. 물론 각국의 CEO 임금제한 논의가 모두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도 없다. 스 위스와 프랑스의 임금상한제 논의는 임금격차 축소와 소득양극화 해소 등 평등 지향성을 강하게 띄는 반 면, 미국의 CEO 임금상한제 논의는 구제금융 등 공적지원 대상 기업 임원의 ‘ 도덕적 헤이’ 제한과 정당한 대가라는 시장 정상화의 흐름에 더 가깝다.
한국의 임금불평등 현황과 임금상한제 도입 논의 한국의 노동시장은 높은 임금불평등으로 악명 높다. ILO 세계임금보고서(2010)는 한국의 저임금 노동 자 규모가 25.6%로 통계가 집계된 17개국 중 가장 심각한 수준이라고 보고했다. OECD에 따르면 2008년 한국의 임금불평등(상위 10%와 하위 10%의 시간당임금 격차)은 4.78배로 멕시코와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높 은 수준이다. 그런데, 전체노동자를 대상으로 ‘ 경제활동인구부가조사’를 기준으로 하면, 이 격차는 5.23 배로 더욱 벌어져 멕시코 다음으로 임금불평등이 심각하다. 이처럼 심각한 저임금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도 CEO 고액 연봉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정책포럼 91
2013년 11월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 성과보수현황 및 모범규준 이행실태 점검결과’에 따르면, 2012년 기준 금융기관 CEO의 연평균 보수 평균은 금융지주사 15억원, 은행 10억원, 금융투자사 11억원, 보험사 10억원 이었고, 각각의 최고 보수액 수준은 금융지주사가 21억원, 은행 18억원, 금융투자사 16억원, 보험사 20억 원에 달했다. 재벌 기업의 임원 보수는 물론 더 많다. 2012년 삼성전자 등기이사 3인의 연간 보수는 평균 52억에 달 하고, SK이노베이션은 평균 41억, 삼성중공업은 평균 36억 8천, CJ제일제당은 평균 31억 8천에 달했다. 이 건희 회장 같은 등기 외 이사의 보수는 공개조차 되지 않는다. 반면 2012년 최저임금은 시간당 4,580원이 었고, 이를 연봉으로 환산하면 1,148만원이다. 삼성전자 이사와 최저임금 노동자의 임금 차이는 무려 452 배가 넘는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국에서 임금상
한국도 CEO 고액 연봉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삼
한제는 여전히 낯선 논의다. 아주 일부
성전자 이사와 최저임금 노동자의 임금 차이는
노동경제학자만이 임금상한제 도입을
무려 452배가 넘는다. 한국에서 임금상한제는 진
주장하고, 정치적으로는 유일하게 진
보신당(현 노동당)만이 공약으로 제시했다.
보신당(현 노동당)만이 이를 주장했다. 진보신당은 2012년 총선에서 노동 시장 소득 격차 해소의 주요 정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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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저임금 현실화’ , ‘ 기업이익분배법 도입’ 과 더불어 ‘ CEO 최고임금제 도입’ 을 제시했다. 민간기업 임 원의 경우 최저임금의 100배(2012년 기준 약 11억 4,866만원) 이상, 공공기관의 경우 최저임금의 10배(약 1억 1,486만원) 이상 보수를 받을 수 없도록 법으로 제한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은 앞서 살펴본 해외 사례와
다소 차이가 나는데, 스위스나 프랑스, 독일은 해당 기업 내 최저(또는 중간) 급여의 12배(또는 20배) 수준의 급여를 임금상한으로 제한한 반면, 진보신당 안은 기업 규모에 따라 임금격차가 큰 한국 노동시장의 특성 을 고려하여 기업 내 임금격차가 아니라 전체 노동시장 내 임금격차 해소를 목적으로 법정 최저임금을 기 준으로 했기 때문이다.
생활임금 연동 임금상한제 도입 제안 임금상한을 도입하여 적용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상한을 초과하는 소득에 한해 100% 세 금을 부과하여 사회보장기금 등으로 환수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상한을 초과한 지급을 아예 금지하
2) 진보신당(현 노동당)이 제시했던 ‘ 기업이익분배법’ 은 통상적인 수준(최근 수년간 주주 배당률 또는 유사 업게 배 당률)보다 이례적으로 높은 주주 배당을 할 경우 인상분에 상응하여 사회보장기금 또는 해당 기업 노동자에게 분 배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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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방식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세법의 개정이 필요하고, 후자는 최저임금법처럼 노동시장 내 임금 책정을 강제할 수 있는 법률이 필요하다. 과세권한이나 법제정 권한이 없는 한국의 지방자치단체에서 수행하기 는 어렵다. 하지만 최근 몇몇 지방자 치단체에서 제정하고 있는 생활임금 조례의 방식과 연동한다면 임금상한 제를 부분적으로 도입할 수 있을 것이 다. 생활임금 조례는 법정 최저임금과
최근 몇몇 지방자치단체에서 제정하고 있는 생 활임금 조례와 연동해 공공기관부터 최고임금제 를 도입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고, 또 바람직하 다.
같이 모든 기업에 대해 강제력을 갖지 못하지만, 지방자치단체 또는 산하 공공기관에 직접 고용된 비정규직 또는 위탁· 용역 등 간접고용 노동 자에게 (즉, 지방자치단체가 임금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노동자에게) 최저임금 이상의 임금 지급 을 의무화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지방자치단체가 자율적으로 책정하는 생활임금을 임금상한제와 연동시 켜 지자체 산하 공공기관부터 최고임금제를 도입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고, 또 바람직하다. 그것이 생활 임금의 10배 정도면 좋고, 5배면 더욱 좋다. 소득과 건강 수준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소득 수준이 일정 수준(대략 GDP 5천 달러 수준) 이상이 되면 사회구성원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소득의 절대량이 아니라 상대적인 불평등이라고 주장하 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데이터들을 한도 끝도 없이 제시한다. 중요한 것은 국민소득 4만 달러 달성이 아 니라, 2만 달러든 3만 달러든 경제활동을 통해 얻은 과실을 적절히 나누려는 노력이다. 임금상한제는 그 러한 노력의 작은 한 축이 될 수 있다. 당장 이번 지방선거부터 우리 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할 사안이다.
정책포럼 93
먼 좌파 이웃 좌파 ⑦
미국에도 좌파정당이 있냐고?(2) 장석준 부대표
뉴욕 노동가족당 말고도 주 차원의 좌파 정당으로 주목할 만한 사례가 하나 더 있다. 캐 나다와 인접한 북동부 버몬트 주의 진보당(Vermont Progressive Party)이다. 버몬트 진보당은 2010년 주 하원 선거에서 2.96%를 득표해 5명의 주의원을 배출했다. 3% 언저리 득표가 대 단치 않게 보일 수도 있지만, 공화당도 민주당도 아닌 제3정당이 제도 정치에 진출했다는 것만으로도 미국 풍토에서는 예삿일은 아니다. 버몬트의 주요 도시인 벌링턴에서는 진보 당 소속인 밥 키스가 2006년부터 계속 시장을 역임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버몬트는 뉴욕처럼 다른 주에 없는 독특한 선거 제도를 실시하지는 않는다. 버몬 트 진보당이 성장한 것은 그런 제도의 도움 없이 순전히 지역 정치에 착실히 뿌리 내린 결 과다. 발단은 레이건 보수 혁명이 한창 시작될 무렵인 1981년에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 킨 무소속 버너드 샌더스(‘ 버니’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하다) 후보의 벌링턴 시장 당선이었다. 샌더스는 반전운동가 출신으로 ‘ 민주적 사회주의자’ 라 자처하는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이 이때부터 시장 선거에 연이어 당선돼 6년간 벌링턴 시정을 이끌었다. 보수 언론은 “벌링턴 인민공화국” 등의 표현을 쓰며 색깔 공세를 퍼부었지만, 샌더스 시장은 의연하게 진보적인 조세, 주택, 노동 정책을 펼쳤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샌더스는 1991년에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다. 2007년에는 버몬트 주 를 대표해 연방 상원에 진출했다. 비록 100석의 상원에서 단 한 명뿐인 좌파 의원이지만, 샌 더스의 활약은 눈부시다. 2011년도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야합한 감 세법안에 홀로 맞서기도 했다. 그가 택한 수단은 8시간 반에 걸친 필리버스터였다. 이때의 인상이 워낙 강렬해서 2012년 대선을 앞두고는 샌더스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자는 운동까 지 벌어졌다. 샌더스 자신이 상원에서 할 일이 더 많다며 고사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버몬트 진보당은 다름 아니라 벌링턴에서 샌더스와 함께 진보적 지역 정치를 개척하던 동지들이 1999년에 창당한 정당이다. 샌더스 자신은 당적을 갖지 않았지만, 버몬트 주민들 94
에게 둘 사이의 연관 관계는 당연한 상식이다. 샌더스와 함 께 일군 벌링턴 진보정치의 뿌리가 곧 버몬트 진보당의 튼 튼한 기반이 되었다. 그래서 아직은 소수이지만 자력으로 주의회에 진출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미국처럼 보수의 텃 세가 심한 사회일수록 지역 수준에서부터 좌파 정치의 토 대를 착실히 쌓아올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 례라 하겠다.
사회당의 맥을 잇는 조직들 : 새 사회당(SPUSA)과 민주사회주의 그룹(DSA) 그렇다고 전국적인 좌파 정치 흐름이 없다는 것은 아니 다. 사실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웬만한 좌파 조류는 미 국에도 다 있다. 사회민주주의를 내건 조직도 있고, 사회당 도 있고, 공산당도 있으며, 이러저런 마오주의나 트로츠키 주의 조직들도 있다. 이들은 대통령선거에 독자 후보를 내 기도 한다. 2012년 대선만 해도 평화자유당, 사회주의노동 자당, 사회당, 사회주의평등당, 자유사회주의당 등 여러 좌 파 정당들이 출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후보를 냈다는 것뿐 어떤 조직도 유의미한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그나마 일정한 영향력을 갖춘 것은 과거 미국 사회당 (SPA)의 전통을 이어받은 조직들이다. 지난 호에서 이야기
미국 진보파의 구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무소속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위). 버니 샌더스와 버몬트 진보당의 정치 실험을 다룬 저작의 표지(아래)
한 것처럼, 사회당은 노동조합운동이 민주당 지지로 입장 을 정한 뒤부터는 당세가 계속 쇠락했다. 그럼에도 1970년대 초까지는 어떻게든 버텨나갔다. 그러다가 1972년 당대회에서 노선 전환을 단행했다. ‘ 사회주의’ 대신 ‘ 사회민주주의’를 내걸었고, 조직명에서 ‘ 정 당’을 뗐다. 그래서 ‘ 미합중국 사회민주주의자들(Social Democrats USA, SDUSA)’이라는 정치조직이 됐다. 스스 로 ‘ 정당’임을 부인한 것은 이후 민주당 안에서 분파로 활동할 것을 염두에 둔 선택이었다. 이로써 20세기 초 한때 미국에도 대중적인 사회주의운동이 등장하리라 기대하게 만들었던 미국 사회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SDUSA도 2005년 결국 해산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다수파의 결정에 반발한 당원들이 SDUSA에 합류하지 않고 새 조직 들을 건설했다. ‘ 사회당’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되살린 미합중국 사회당(Socialist Party USA, SPUSA, 이하 새 사회 당)도 그 중 하나다. 옛 사회당 소속으로 10년 넘게 밀워키(위스콘신 주) 시장을 역임한 프랭크 자이들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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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당 재건에 앞장섰다. 이렇게 다시 복원된 사회당은 미국 좌파 정당들 중 가장 유서 깊은 조직으로서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비록 당원 수는 전국적으로 1천명밖에 안 되지만, 옛 사회당의 기억이 남아 있는 지역(주로 5대호 주변 주들)에서는 선거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일례로, 작년 미네소타 주 플루드우드의 시장 선거에서 사회당 후보 트로이 톰슨은 27%의 득표를 기록했다. 새 사회당은 자본주의와 소련식 공산주의를 모두 반대하며, 그 대안으로 공공 소유와 노동자 자주 경 영의 결합을 추구한다. 당면 과제로는 무상 공공 의료, 누진 소득세, 주택 임대료 통제, 대학 무상 교육 등 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회주의의 목표를 복지국가 건설로 제한해선 안 된다는 입장이다. 새 사 회당이 가장 고집스럽게 견지하는 원칙은 선거에 항상 독자 후보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당의 당원 중에는 스웨덴 좌파당의 요나스 셰르스테트 대표도 있다. 그는 2000년대 후반에 미국에 체 류하면서 새 사회당에 입당해 활동한 바 있다. 그런데 옛 사회당의 분열로 등장한 조직들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새 사회당이 아니다. ‘ 미국 민주사회 주의자들’ (Democratic Socialists of America, DSA, 이하 민주사회주의 그룹)이다. 이 조직은 미국 좌파 전체를 통틀어 도 ‘ 최대’라고 할 만하다. 1982년 처음 출범할 때부터 회원 수가 6천 명이었고, 지금도 이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저명한 좌파 지식인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의 종합을 추구하는 흑인 철학자 코넬 웨스트와 베스트셀러 저자인 사회주의-
◀새 사회당의 로고 ▼민주사회주의 그룹의 시위 모습. 오바마가 아니라 우리가 사회주의자라는 펼 침막 내용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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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사회주의 그룹 청년 회원들이 만든 선전용 티셔츠. 학비 부담으로 인한 학 생들의 부채 탕감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 민주사회주의 그룹의 창립자이자 뛰어난 이론가였던 마이클 해링턴▶
여성주의자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있다. 국내에도 <노동의 배신>(최희봉 옮김, 부키), <긍정의 배신>(전미영 옮 김, 부키), <희망의 배신>(전미영 옮김, 부키) 등으로 널리 알려진 그 에런라이크 말이다.
민주사회주의 그룹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국제조직인 ‘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SI)에 가입해 있다. 새 사회당과는 달리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긴밀히 교류하려 한다. 그러면서도 유럽 사회민주주의 의 주류보다는 좀 더 급진적인 입장을 보인다. 이 조직의 창립자 마이클 해링턴(1989년에 작고)의 노선이 그 러했다. 해링턴은 미국을 복지국가로 만들려는 노력에 더해 자본 권력을 사회에 환수하려는 끊임없는 시 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에 유럽 좌파 사이에 확산된 탈자본주의 구조개혁 노선에 공명했던 것이다. 민주사회주의 그룹은 지금까지도 이러한 해링턴 노선을 이어받고 있다. 그래서 ‘ 제3의 길’류의 흐름 (미국에서는 민주당 내 클린턴주의로 나타났다)에는 한 번도 휩쓸린 적이 없다. 이것은 “스웨덴의 보편 복지,
캐나다의 국영 의료 체계, 프랑스의 아동 복지, 니카라과의 성인 교육” 등의 구체적인 교훈을 바탕으로 미 국식 사회(민주)주의 모델을 만들어가겠다는 언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데 이렇게 이념상으로는 좌파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견지하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그야말로 실용주 의다. 굳이 독자 후보 전술을 고집하지 않으며, 필요하면 민주당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한다는 입장이 다. 애초에 해링턴 등이 새 사회당에 함께 하지 않고 민주사회주의 그룹을 따로 만든 이유가 이러한 현실 정치 노선에 있었다. 실제로 민주사회주의 그룹은 버니 샌더스의 중앙정치 진출을 지원한 것 정도를 제외하면 선거 때마다 줄곧 민주당 후보를 지지해왔다. 그래서 민주당 안의 한 분파로 오해받기도 한다. 그러나 민주당 내 조직 은 분명 아니다. 민주당 안팎에 걸쳐 있는 독특한 정치조직이다. 이것은 미국 정치 환경에 대한 지혜로운 적응일 수도 있지만, 달리 보면 미국 좌파의 ‘ 슬픈’ 현실이기도 하다. 먼 좌파 이웃 좌파 97
녹색당의 가능성 그리고 2016년 대선 이런 점에서 녹색당이 주목된다. 미합중국 녹색당(Green Party United States, GPUS)은 1991년 창당했다. 서독 녹색당이 신좌파 정치세력화의 산물이었던 것처럼, 미국 녹색당도 신좌파 세대가 미국 풍토에 맞는 정치 세력화를 모색한 결과다. 그런데 미국 녹색당은 제도권 진출 이후 급속하게 중도화한 유럽 녹색당들과는 달리 여전히 좌파색이 강하다. 시민운 동가 랠프 네이더가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민주당의 앨 고어에 맞서 제3후보 로 나와 상당한 바람을 일으켰던 2000 년 대선을 기억해보자. 이때 네이더는 다름 아닌 녹색당 후보였다. 녹색당은 버몬트 진보당이 버몬트 주에서 펼치는 것과 같은 실험을 전국 적 차원에서 꾸준히 지속하고 있다. 즉, 지역 수준에서부터 선거에 적극 대응하 면서 공직자 수를 점차 확대해가고 있 다. 이런 활동 덕분에 현재 30만에 가까 운 당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공화당, 민 주당 외의 제3당 중에서는 가장 대표적 인 정당으로 부상했다. 사실 녹색당도 미국 정치 제도가 강 요하는 딜레마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2000년 대선에서 녹색당 대통령 후보였던 랠프 네이더 상자 안은 미국 녹색당 로고
녹색당 안에서도 민주당과 연대하자는 흐름과 독자 후보로 대응하자는 흐름이 매번 대선을 앞두고 논쟁을 벌여왔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에도 불 구하고 전국적 정당 조직을 유지하고 발전시켜왔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2016년 대선을 바라보면서 미국 진보좌파의 눈길은 온통 두 곳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하나는 독자 후보 운동의 거의 유일한 조직적 토대인 녹색당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로 버니 샌더스 상원의 원이다. 샌더스가 2016년 대선에 독자 후보로 출마한다면, 이 선택은 2000년의 네이더 선거운동 이상으로 좌파 정치세력화의 일대 계기가 될 것이다. 미국 좌파 정치가 비록 아직은 맹아 상태에 있다 해도 미래에 성장을 기대해볼 만한 역동성까지 없다 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미국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 체제가 흔들리는 요즘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98
미디어 비평
청와대 진돗개와 다를 바 없는 청와대 기자들 조윤호 <미디어오늘> 기자
‘ 불통’ 논란에 시달리던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월 6일 취임 첫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러나 ‘ 소통’ 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반대세력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불통의 의지를 다시 한 번 다지는 자리였다. 박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진정한 소통이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며 “소통의 의 미가 단순한 기계적 만남이라든지 국민 이익에 반하는 주장이라도 적당히 수용하거나 타협하는 것이 냐, 그것은 소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박 대통령은 “과거 불법으로 떼쓰면 적당히 받아들이곤 했는데, 이런 비정상적 관행에 적당히 대응하는 것을 소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 한다”고 말했다.
주연 박근혜, 조연 기자들, 연출 및 각본 청와대 이번 기자회견의 유일한 성과는 박근혜 대통령이 불통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명백해졌다는 것 이다. 청와대는 소통을 한답시고 기자회견 후 질의응답을 진행했지만, 질문은 사전에 기획돼 있었다. 질문자도 청와대 기자단 내에서 사전 에 조율됐다. 그래서 사전에 합의한 대로 연합 뉴스-MBC-동아일보-매일경제-대구일보뉴데일리-채널A-세계일보-중부일보-YTN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316일 만에 연 첫 기자회견의 유일한 성과는 불통을 위해 대통령이 얼마나 노력하는지 명백해졌다는 것이다.
기자들과 외신 로이터, CCTV가 박 대통령에게 질문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것으로 예상됐던 진보성향의 언론들은 없었 다. 질문이 미리 정해진 탓에 즉석에서 나오는 대통령의 진솔한 말은 들을 수 없었고, 추가질문이 없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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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박 대통령의 답변 이후 기자가 다시 반박할 기회조차 없었다. 교과서 논란에 대해 묻자 ‘ 좌편향 교 과서’ 에 대해 대답하며 본질을 흐렸는데도 기자는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국정원 사건과 특 검에 대해 묻자 ‘ 여야가 잘,’ 또는 ‘ 여기서 말하기 적절하지 않다’는 대답으로 질문을 뭉개버렸는데도 기자는 반박할 수 없었다. 한 청와대 출입기자는 “기자회견 전에 이정현 홍보수석이 따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질문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추가질문은 없는 걸로 알고 있었다”며 “추가질문은 애초에 가 능성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이정현 수석은 계속 ‘ 질문자는 손을 들라’ 고 요구했다. 한 청와대 출입기자는 “혹시나 해 서 매번 손을 들었지만 우릴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주연 박근혜 대통령, 조연 청와대 기자들, 연출 및 각본 청와대. 기자회견이 아니라 완벽한 ‘ 쇼’였다.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면 기자들과 설전 을 벌이는 다른 나라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퇴근 후 뭐 하냐"니 … 언론은 대통령의 ‘ 불통’ 탓할 자격 있나 이런 쇼의 가장 일차적인 책임은 연출 및 각본을 짠 청와대다. 하지만 몇몇 언론은 박근혜 대통령 이 불통이라고 말할 자격도 없다. 질문 기회가 왔는데도 홍보성 질문으로 기회를 날렸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거의 한 시간동안 취임 소회와 앞으로의 포부를 이야기했는데, 연합뉴스 기자는 첫 번째 질 문에서 “취임 1년 소회와 앞으로의 각오”에 대해 다시 질문했다. 제대로 못 들었으면 나중에 녹취록을 재생하든지. 이건 국민의 알 권리
더욱 가관은 채널A 기자가 던진 “퇴근 후 뭐 하시
침해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은 하
냐”는 질문이었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교학사
나마나한 소리를 다시 반복했다.
교과서, 철도파업 등 민감한 이슈들이 산적해 있 는데 국민들은 진돗개 이야기나 들어야 했다.
더욱 가관인 건 채널A 기자의 질문이었다. 채널A 기자는 박근 혜 대통령에게 “퇴근 후 뭐 하시 냐”는 질문을 던졌다. 본인이 기
자인지 <힐링캠프> 진행자인지 헷갈리는 모양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기르는 진돗개 이야 기를 꺼냈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교학사 교과서, 철도파업 등 민감한 이슈들이 산적해 있는데 국민 들은 진돗개 이야기나 들어야 했다. 채널A와 동아일보는 기자회견 후 논평과 사설을 통해 “이번 기자 회견으로 불통 논란이 사라졌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맞다, 그리고 당신들도 그에 일조했다.
기자가 제대로 된 질문 못하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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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활약한 기자는 역시 MBN 김은미 기자다. 박근혜 대통 령은 기자회견을 마치고 청와대 춘 추관 기자실에 들러 청와대 출입기 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이때 김은미 MBN 기자가 박 대통령에게 “너무 안고 싶었어요”라고 말하고, 박근 혜 대통령은 “남자 분들이 차별한 다고 그래요”라고 받아쳤다. 결국 김은미 기자는 소원대로 박근혜 대 통령과 포옹했다. 김은미 기자의 결 혼식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했을 정도로 둘은 친분이 깊다. 아무리 그래도 박근혜 대통령이 먼저 포옹 을 청한 것도 아닌데 먼저 가서 ‘ 너 무 안고 싶었어요’라고 말해야 했 을까. MBN과 같은 계열의 언론사 인 매일경제는 이걸 또 자랑이랍시
박 대통령과 MBN 김은미 기자의 포옹을 보도한 7일자 매일경제 온라인판
고 기사로 썼다가 양심에 찔렸는지 삭제했다. 이 사실을 미디어오늘이 보도한 이후 김은미 기자는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기도 했다. 김은미 기자와 박근혜 대통령의 관계는 현재 언론과 정권의 관계가 아닐까. 물론 청와대가 기획한 ‘ 쇼’ 였지만 청와대 출입기자들도 그에 동참했다. 언론이라면 질문이 사전 조율되는 것에 대해 집단적 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국민이 궁금해 하는 돌발질문이라도 던졌어야 하 는 것 아닐까. 기자회견은 생중계였다. 하다못해 이명박 정부 때 임명된 낙하산 사장에 반대하며 해직 당한 선배 후배 동료 기자들의 복직에 대해서라도 물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날의 기자회견은 언론이 장악당한 대한민국의 한 단면이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사측이나 데스 크가 보낸다. 사측이나 데스크가 대부분 친정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청와대 이야기를 받아쓰는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이 정권에 부담되는 이슈에 날카로운 질문을 할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박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퇴근 후에는 진돗개 새롬이, 희망이를 돌본다고 말 했다. 현재 주류언론이 박 대통령의 보살핌을 받는 새롬이, 희망이와 다른 게 무엇일까? 기자가 제대로 된 질문을 못하는 나라에서는 새로움도, 희망도 없다.
삶과 문화 101
숨은 문화예술 당원 찾기
“예술은, 삶은, 그리고 정치는 과정과 믿음” 노동자의 아들에서 어머니의 대변자로, <비념>의 임흥순 작가 인터뷰· 정리 · 사진 : 나도원 문화예술위원장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다. 높이 솟아오른 빌딩들 덕분인지 오히려 황량해 보이는 도시의 겨울을 가 로질러 DMC첨단산업센터로 들어섰다. 따뜻한 제주도에서 올라와 추위에 서툰 귤들이 테이블 사이에 마 주 앉은 남자들을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임흥순 작가는 사무실에서 촬영 막바지에 다다른 <위로공단> 을 다듬어가고 있었다. 2010년에 금촌예술공장에 입주했을 때부터 기획해온 <위로공단>은 구로공단의 시 간과 공간 그리고 여성노동자들에게 시선을 맞춘 다큐멘터리이다. 실제 공간과 여성노동자들에게 초점 을 두었다가 점차 현재의 여성노동 문제로까지 이어졌고, 노동을 둘러싼 인식과 감정 혹은 공포를 담아내 기에 이르렀다. 이 작품은 2014년에 영화제를 통하여 선보일 예정이다. 102
회화를 전공한 임흥순 작가는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예술 활동을 펼쳐왔다. 다양한 방식을 통하여 이 주노동자와 지역주민들의 삶을 기록하며 줄곧 민중 또는 대중의 이야기를 그렸다. <매기의 추억>(2006)과 <월남에서 온 편지>(2009) 그리고 <행복으로의 초대>(2009) 등의 개인전을 가졌고, 그중 <비는 마음_제주 4 · 3과 숭시>(2011)는 다큐멘터리 <비념 >(2013)을 잉태했다.
회화를 전공한 임흥순 작가는 장르에 얽매이지
주민 속으로 들어가는 프로젝트 활 동 또한 꾸준히 이어왔다. 성남의 공 간과 역사를 탐구한 ‘ 성남 프로젝트’ (1998~1999)를 비롯하여 ‘ 믹스라이스’ (2002~2005)와
않고 예술 활동을 펼쳐왔다. 다양한 방식을 통 하여 이주노동자와 지역주민들의 삶을 기록하 며 줄곧 민중 또는 대중의 이야기를 그렸다.
‘ 보통미술잇다’
(2007~2010) 등에선 공동체 문화예술 활동을 시도했다. 특히 금천예술공장 2기 작가로 입주하여 ‘ ○○수다
스러운’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금천구 주부들의 모임인 ‘ 금천미세스’의 산파 역할을 했고, 그 결과로 평범 한 기혼여성들을 예술 활동의 주체로 이끌어냈다. 이처럼 임흥순 작가는 역사와 개인, 사회와 계층, 도시 와 공간, 그리고 여성에 시선을 두면서 좀처럼 볕을 쐬지 못했던 그늘 아래를 들춰보고 있다.
가난한 답십리 아이, 세상의 그늘을 보다 1969년에 서울 답십리에서 가난한 노동자 부부의 아들로 태어난 임흥순 작가는 ‘ 세상의 주변부 감수 성’을 키우며 성장했다. 당시에 답십리는 달동네에 가까운 풍경을 지니고 있었다. 아파트라고 해봐야 4층 짜리가 전부였고, 도로보다는 개천과 밭이 많았으며, 아이들은 반딧불을 볼 수 있는 산과 들에서 놀면서 하루를 보냈다. 사정이 여의치 않은 가족의 거처는 점점 높은 곳으로, 그리고 점점 좁은 곳으로 옮겨졌다. 오랜 주민들이 하나둘 다른 동네로 떠나갔지만 떠날 데가 없는 가족은 다시 아래, 즉 지하로 이사했다. 서 울의 가난한 생활이란 차츰 높이 오르다가 어느 순간에 처음보다 훨씬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부터 서예와 미술에 재능이 있는 자신을 발견했으나, 미술은 예나 지금이나 돈이 많이 드는 진로였고 가정형편 때문에 과외 같은 것을 받아볼 기회는 좀처럼 얻을 수 없었다. 아예 중학교 와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친구들도 주변에 허다하던 시절이었다. “한번은 반에서 싸움 잘하는 아이가 여자아이한테 돌을 던지는 모습을 봤어요. 제가 대들었죠. 물론 두 들겨 맞았죠. 그런데 제가 끝까지 물고 늘어졌어요. 제 얼굴에서 흐르는 피가 그 녀석 얼굴에 떨어지니까 질렸는지 그만두더군요.” 성격은 내성적이었지만 임흥순 어린이의 마음속에는 불의를 참을 수 없는 ‘ 악다구니’ 같은 것이 자라 고 있었다. 가족과 답십리를 통하여 계급과 공간을 바라보게 된 그가 사회 시스템의 불평등 문제에 주목 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경로였다. 임흥순 작가가 임대아파트라는 공간에 관심을 두게 된 과정도 무관하 삶과 문화 103
임흥순 작가가 작업해온 기록물들
지 않을 것이다. 2009년에서 2010년까지 ‘ 보통미술잇다’의 이름으로 등촌주공아파트 주민들과 함께 한 < 만나요, 우리 프로젝트>는 이 시선의 걸음으로 만들어졌다. “과거에는 가난과 함께 나눔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난이 고립되어 있지요. 더욱 가난해지고 있는데도 가난이 가려지는 공간을 임대아파트가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파트의 공동체성에 대한 작업을 해보았는데, 사실 회의적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자신보다 더욱 어려운 사람들을 꺼려요.”
실패의 역사가 낳은 길, 평범한 이들의 예술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마음먹었지만 쉽지 않았다. 이런저런 부탁으로 학원을 저렴하게 다니면서, 그리 고 어떤 학교에 낙방한 끝에 예술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술고등학교 교육비는 만만치 않 았다. 어머니는 돈을 빌려서라도 아들을 도우려 했으나 아버지는 기술을 배우라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 하고 미술학도가 되고 싶은 꿈을 품었지만 이번에는 대학교 진학이 만만치 않았다. 심지어 해병대에 지원 했는데 그마저도 떨어졌다. 청년 임흥순은 그렇게 ‘ 실패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병역을 마치고 26세에 들어간 대학교의 생활 역시 여의치 않았다. 밤 8시부터 자정까지 김치를 배달하 고, 주말에는 TV경마장에서 일했다. 때론 자장면을 배달했다. 회화 작업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시간을 얻 기 힘든 생활이었다. 30대에는 이태원에서 ‘ 실수를 하면서’ 놀았다. 임흥순 작가는 그때의 ‘ 실수에 대한 미안함’도 자신의 작품 활동에 녹아있는 것처럼 생각된다고 말한다. 속죄의 마음이랄까. 104
이러한 과정에서 임흥순 작가의 두 가지 방식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 들여다보기’ 이고, 다른 하나는 ‘ 새로운 기준 만들기’이다. 첫 작업은 가족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아마 대학원을 졸업한 해에 연 첫 개인전 <답십리 우성연립 지 하101호>(2001)가 그것일 것이다. 그리고 한국 현대사의 곡절과 직결된 도시인 성남에 대한 공동 작업을 시 작했고, ‘ 성남프로젝트’ 와 ‘ 성남공공미술프로젝트’ (2006) 그리고 ‘ 성남도큐먼트’ (2007)로 계속되었다. 그 렇게 이주노동자들을 바라보았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사람들의 개인사를 들여다보며 우리의 ‘ 아버지 들’을 기록한 <월남에서 온 편지>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렇게 개인사에서 사회와 역사로 이야기를 확장해 나갔다. 한편, 실패의 역사를 적어온 임흥순 작가는 더 이상 심사와 시험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미술을 전공했지만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얼까 생각해본 결과는 주 민(사람)과 함께 하는 작업이었으며, ‘ 커뮤니티 아트’로 발길을 움직였다. “결과만 중시하는 사회에서 과정과 관계로서 의 예술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부분들을 찾고 싶었습니다. 눈에 당장 보이는 효과보다는 과정과 지향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결과만 중시하는 사회에서 과정과 관 계로서의 예술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눈 에 띄지 않는 부분들을 찾고 싶었습니 다. 이것이 나의 직업이기도 합니다.”
나의 직업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평범한 민중도 예술을 할 수 있습니다. 저마다 장점과 재능이 있는데도 발견할 기회를 얻을 수 없지요. 재능은 꼭 기술만 이 아닙니다. 감수성과 감정도 재능이고, 마음과 놀기도 재능이죠. 일상 자체가 큰 감동이지 않습니까!”
민중과 여성의 시선을 따라 금천예술공장에 입주한 임흥순 작가는 2010년 말부터 2011년 초까지 주부들을 대상으로 미술워크숍을 진행한다. 주부들이 자기표현을 시작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금천구에 사는 기혼여성이라는 뜻의 ‘ 금천미 세스’ 가 탄생했다. 이 워크숍에 참가한 열 아홉 명 가운데 아홉 명이 스스로 단편영화와 예술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예술가 그룹이 되어 2012년에 금천예술공장에 작가그룹으로 당당히 입주하는 사건이 벌어졌 다. 근래 임흥순 작가의 활동에서 두드러지는 관계가 여성이다. ‘ 금천미세스’ 뿐만 아니라 <비념>도 여성 이 계기이자 주인공이다. 물론 이전부터 주변의 여성들, 그러니까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여러 사람들에 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지켜보니 결혼한 여성들의 삶은 참 힘들지요. 하지만 그들은 지혜롭습니다. 제도권에 있는 남성에 비 하여 여성의 생각이나 화법에는 현명한 면이 있습니다.” 삶과 문화 105
그래선지 임흥순 작가의 작품들 은 선동하거나 과격하지 않다. 용산 참사가 벌어진 후에 흔적들을 찾아 전시한 <행복으로의 초대>는 흩어져 있던 이미지들과 재개발, 그리고 군 부대의 이미지들을 말없이 모아냈 다. 제주 4· 3항쟁을 다룬 <비념>조 차 관조하고 경청하는 분위기를 품 었다. 미술을 전공한 작가의 미학적 기법과 함께 여성의 화법을 끌어안 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안 으로 삭이는 여성들의 화법은 남녀 구분을 떠나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 못하는 상황과 어렵게 말하는 방법 을 닮았습니다. 여성만이 아니라 우 다큐멘터리 <비념>
리 민중의 현실과 방식이 아닐까 생 각했습니다. 그들이 말하지 못하는
임흥순 작가의 작품들은 선동하거나 과격하지
지점들을 어떻게 보여주고 전달할
않다. 제주 4· 3항쟁을 다룬 <비념>조차 관조하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물론 나를
고 경청하는 분위기를 품었다. 미학적 기법과 함 께 여성의 화법을 끌어안았기 때문일 것이다.
위한 작업이기도 합니다. 내가 소중 하기에 남도 소중하지요. 그렇게 각 자의 소중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소중하니 당신도 소중합니다 임흥순 작가는 <월남에서 온 편지>를 위하여 베트남전쟁 참전 군인들을 인터뷰하면서 특별한 경험을 했다. “전쟁 때 다리를 잃은 분을 인터뷰하는데 꿈 이야기를 하더군요. 잃어버린 다리가 꿈속에서는 온전히 붙어 있더랍니다. 잠에서 깨고 나니 고통스러웠대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뒤에 저도 꿈을 꾸었습니 다. 제 다리가 없어진 꿈이었죠. 깨고 나니 제 다리가 온전히 있는데, 그때의 심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 106
임흥순 작가는 또 다른 나이자 아버지인 대상에게 감정이입하고 있었다. 실은 그의 무의식 속에는 자 신과 동일시하는 인물들이 있다. 제주 4· 3항쟁 당시에 젊은 나이로 무장대 2대 총사령관이었다가 죽음 을 맞은 이덕구(1920~1949)와 한진중공업 노조 지회장으로 85크레인에 올라가 129일 동안 고공농성을 벌 인 끝에 목숨을 끊은 김주익(1963~2003)이 그들이다. “그들이 곧 나”였다. 그리고 이덕구는 <비념>, 김주 익은 <위로공단>과 무관하지 않다. 오랜 준비 끝에 2013년에 개봉하여 호평을 받은 <비념> 역시 ‘ 아는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또한 여 성들, 그러니까 <비념>의 공동기획자이자 프로듀서인 김민경 씨와 그녀의 외할머니 강상희 씨의 도움이 컸다. 김민경 프로듀서의 외할아버지이자 강상희 할머니의 남편인 김봉수 씨는 노형초등학교 교사로 재 직하다가 4· 3의 회오리 속에서 경찰에게 총살당했다. 이들의 이야기가 전시회 <비는 마음_제주 4· 3과 숭시>를 낳았고, 첫 장편 다큐멘터리 작품인 <비념>으로 다리를 뻗어갔다. 보는 사람들은 힘들겠지만 정작 자신은 편안한 마음으로 임했다는 <비념>은 제주도의 풍광 속으로 들 어서며 각자가 조금씩 말을 걸도록 하는 작품이었다. 임흥순 작가 개인에게도 전환점이었다. 그전까지는 자신을 위해서이자 예술의 의무와 목적을 위해 작품을 만들었다면, <비념> 이후는 타인을 위한 작업으로 가게 된 것이다. <위로공단>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과정과 믿음을 말하는 당원 임흥순 2013년 4· 11총선을 앞두고 문화예술위원회가 주도한 ‘ 문화예술인 269인 진보신당 지지선언’에 동참 한 임흥순 당원은 대화 중간 중간에 노동당에 대한 생각을 물을 때마다 예술에 대한 자신의 지론과 일관 성 있는 답을 돌려주었다. “<비념>을 본 관객의 수는 적었고, 제 입장에서 실망도 했지만, 관객 2,300명이 23,000명의 역할을, 아 니 230,000명의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 무엇’ 도 중요하지만 ‘ 어떻게’도 중요하지요. ‘ 빨리’ 보다는 ‘ 어떤 과정’을 밟는지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노동당의 녹록치 않은 현실과 일부 당원들의 안타까움을 전했을 때에도 자신이 살아온 삶과 다르지 않 은 답이 돌아왔다. “재능은 기술만이 아닙니다. 기술이 있어도 신뢰가 없는 기술은 의미가 없습니다. 믿음을 갖고 제 자리 를 지키는 것이 제 역할이었죠. 지금 당원들과 지지자들은 힘들겠지만, 이런 과정이 켜켜이 쌓여갈 것입 니다. 대중을 따르자고 합니다만 대중은 시시각각 변해요. 길게 보고 휘둘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굳건하 게 갔으면 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승리의 길 아닐까요.” 그는 마흔 전까진 채우려고 했다면 이제 하나씩 놓아가는 단계에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다시 처음, 그 러니까 태어났을 때로 돌아가는 중인지도 모른다면서. 임흥순 작가는 사회적으로 연약한 사람들, 아직 드 러나지 않았고 언어화할 수 없지만 가치 있는 부분들, 그것들을 매개하고 중계하는 역할을 꿈꾸고 있다. “이것이 예술이죠. 이것이 나를 찾아가는 길이고요.” 삶과 문화 107
불온한 서재
승리를 위한 불온한 조직화를 시작하자 노동운동의 혁신과 조직화 루스 밀크먼 외/ 노동의지평 / 2013년12월 / 15,000원
양솔규 기획조정실 국장
현재와의 단절은 불온하다 꼭지 제목이 ‘ 불온한 서재’이다 보니, 책을 선정할 때 어떤 책이 불온한 지 고민을 안 할 수가 없다. 불온 하다는 것은 온건하지 않다는 것인데, 그 기준도 애매모호할 뿐더러, 사람에 따라 상대적이고 주관적일 수 있다.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불온한 주제가 변하기도 한다. 기후위기의 징후가 뚜렷해지면서 ‘ 탈 핵’과 ‘ 에너지전환’은 점차 ‘ 불온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고, ‘ 평화’와 ‘ 북한문제’는 여전히 ‘ 불온’의 온 상이다. 불온하다는 의미를 돌려 생각해보면, 현재와의 단절을 의미할 수도 있다. 곧 출간될 《녹색평론》에는 에콰 도르와 볼리비아가 2008년 자국 헌법에 명시한 ‘ 부엔 비비르’ (buen vivir· 자연친화적인 ‘ 좋은 삶’ 이란 뜻을 담 은 스페인어)에 관한 글이 실린다고 한다. 노동당의 강령은 우리 시대를 위기의 시대로 규정하고 있다. 자
본주의의 위기, 지구생태계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가 그것이다. ‘ 위기를 극복’하는 ‘ 단절’의 중심 개념 으로서 ‘ 부엔 비비르’야말로 불온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적 위기는 ‘ 주체의 위기’가 뒷받침 하고 있어서 더욱 심각한 것은 아닐까? ‘ 단절’을 결단한 주체의 위기, 주체의 부재, 주체의 미약, 주체의 부동. 우리 운동이 맞이하고 있는 오래된 위기의 근원에는 바로 이와 같은 주체의 위기가 있다. 우리 노동 108
자본주의의 위기,
운동은 96~97 총파업 이후 좀처럼 사회변화의 중심세력으로 부각되지 못했다.
지구생태계의 위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낮은 조직률과 적은 조합원수, 정규직 중심 조직임은 말
기, 민주주의의 위
할 것도 없다. 계급 대표조직이 굳건하게 서 있지 못하고, 계급적 성과가 만들어
기, … 그런데 이러
지지 못하고, 설사 만들어지더라도 공유되지 못하는 속에서 사회운동의 중심에
한 구조적 위기는
계급적 쟁점이 들어서지 못하고, 계급운동의 힘이 투영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
‘ 주체의 위기’ 가
다.
뒷받침하고 있어 서 더욱 심각한 것 은 아닐까?
켄 로치의 영화 <빵과 장미>는 멕시코에서 LA로 불법이민 온 청소노동자와 SEIU(국제서비스노조) 활동가의 투쟁을 그린 영화이다. 영화에도 묘사되어 있듯이 SEIU는 ‘ 청소노동자에게 정의를’ (J4J : Justice for Janitors) 운동을 통해 대도시 지역의 저임금(이주) 청소노동자들을 조직화한다. 잘 알다시피 영미권 노동운동은 유럽 노동운동에 비해 노사관계의 제도화 수준도 낮고 노동운동의 조직율과 단체협약 적용률도 낮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신자유주의와의 대결에서 패하면서 위기가 심화되던 영미권 노동운동은 ‘ 노동운동의 혁신’을 부르짖었다. 1990년대와 2000 년대 영미 노동운동에서 시작된 ‘ 노동운동의 혁신’의 중심에는 ‘ 노조 조직화’ 과 제가 놓여 있다.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80년에서 2010년까지 약 30 년동안 영미권 노동조합 조직률은 급속하게 낮아졌다.(뉴질랜드 69%→20%, 영국 49%→29%, 미국 22%→13%, 호주 48%→18%) 한국 역시 1990년 18.4%에서 2010년 9.7%
로 반토막이 났다. 게다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노동조합(do-nothing unionism)을 빼면 실질 조직률은 3~4% 정도에 머물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영미권과 한국, 일본 등 은 조직률 뿐만 아니라 낮은 협약적용률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시작 된 미국노동운동의 혁신노력은 노선으로서의 ‘ 사회운동 노동조합주의(social movement unionism)’ 의 정립과 ‘ 노조 조직화의 과제’ 로 정리되었다. 이 와중에 킴 무
디, 워터만 등(사회진보연대에서 번역한 일련의 책들) 미국 노동운동의 이론가들은 남아공, 브라질 노동운동과 함께 한국의 노동운동을 ‘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모범 사례로 제시하기도 했었다.
전 세계 노동운동이 맞닥뜨리고 있는 과제, 혁신과 노조운동 재생 변화의 시작은 9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다. 1995년 미국노총(AFL-CIO) 위원장 선거 가 40년만에 이루어졌다. 노동총연맹 AFL과 산별회의 CIO가 통합한 1955년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경선을 통해 SEIU 출신인 존 스위니(John Sweeney)가 위원장에 삶과 문화 109
당선된다. 전임 위원장이었던 커클랜드(Kirkland)와는 달리 존 스위니는 전면적인 조직강화와 혁신을 내걸었고, 자신이 위원장으로 있던 SEIU의 경험에 따라 전체 예산의 30%를 조직화사업에 투여하는 등 혁신을 이끌었다. 그러나 스위니 집행 부의 이러한 노력은 혁신을 이끌던 SEIU, UFCW(식품노조), UFWA(농업노동자연 맹), 팀스터(Teamsters, 전미트럭운전자조합) 등의 요구 수준에는 못 미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조직화 방법과 속도 등을 둘러싼 갈등 등으로 미국노총(AFL-CIO)은 역 사적 분열을 하게 된다. SEIU의 앤디 스턴 위원장과 팀스터 호파 위원장(바로 잭 니콜슨 주연의 영화 <호파>의 아들이 바로 그다.) 등이 주도해 만든 제2 미국노총(CtW : Change to Win, 승리를 위한 변화)은 바로 그 결과물이다. (AFL-CIO와 CtW의 조합원 규모 는 각각 약 800만 명과 650만 명 정도이다.) 미국 노동운동의 이러한 조직화전략은 영
국, 캐나다 등 영미권 국가와 한국을 비롯한 노동운동의 재생을 꾀하는 나라의 노 동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시카고에 소재한 CtW의 전략조직화센터(Strategic Organizing Center)에는 수백만 달러의 예산과 100명이 넘는 활동가들이 배치되어 있
다고 한다. 이 센터 소장은 한국에도 방문한 적이 있는 SEIU 부위원장 톰 우드러 『노동운동의 혁신 과 조직화』은 세계
프가 맡고 있다. 『노동운동의 혁신과 조직화』는 한국노동운동연구소의 기관지 <노동의지평>에
곳곳에서 전략조
실린 각 나라 노동운동의 혁신과 조직화와 관련한 글들을 모아 낸 자료집이다. 이
직화와 혁신을 주
책이 목적하는 바는 분명하다. 바로 전세계 노동운동이 고통스럽게 맞이하고 있
도한 노동운동의
는 혁신과 노조운동 재생의 과제를 공유하면서 우리 운동의 반면교사와 타산지
역사적 경험을 공
석으로 삼자는 것이다.
유하면서 우리 운
조금 길더라도 목차를 일별하자면 1. 미국 노조의 회생은 가능한가? 노동운동의
동의 반면교사와 타산지석으로 삼 고자 한다.
쇠퇴와 재생 / 2. 실리조합주의에서 사회운동노조주의로 / 3. 일터에서 거리까지: Unite HERE의 LA 호텔 조직화 / 4. 씨, 세 뿌에데: 노조의 조직화 전략과 이주노 동자들 / 5. 영국: 새로운 조직화문화의 개발을 위한 TUC의 접근 / 6. 영국 노조 조직활동가들과 그들의 이야기 / 7. 캐나다 : 노조 조직화와 노조 재활성화 / 8. 프 랑스의 노조 혁신: 쉬드-철도노조(SUD-Rail)의 사례 / 9. 일본: 유니온 운동의 형성 과 실태 등이다. 전략조직화와 혁신을 주도한 미국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 전 실리 주의 조합주의에서 벗어나 사회노동조합주의(Social Unionism)로 노선을 정리하고 급 진화된 노동운동이 정당운동의 급진화를 이끈 캐나다의 노동운동, 그리고 1995년 공공부문 투쟁을 통해 CFDT로부터 떨어져 나온 프랑스 SUD의 활동, 그리고 우 리나라 청년유니온 운동 등에 영향을 끼친 일본의 유니온 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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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살펴볼 수 있다.
새 술은 새로운 사람들이 담글 수밖에 없다 민주노총의 전략조직화 사업도 이제 3기에 들어섰다. 미국, 영국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전략조직화 역시 활동가들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직률 새로운 조합원들 의 진입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조
하락을 반등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삼성전자 서비스 부문 조직화, 성동 조선 노동조합 설립, 인천공항 비정규직 조직화, 학교 청소용역노동자 조직화, 대 형마트 조직화, 학교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 티브로드 투쟁 등 성과가 없었던 것
합원 숫자의 문제
만도 아니다. 새로운 조합원들의 진입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조합원 숫자의 문
가 아니라 노동조
제가 아니라 노동조합 문화와 활력들을 재생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합 문화와 활력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고, 그 이전에 새 술은 새로운 사람들이 담글 수밖에
을 재생시키는 계
없다. 박근혜는 고용률 70%라는 야심찬 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우리 노동운동과
기가 될 수 있다.
진보정당운동도 민주노총 직선제와 같은 소모적 쟁점에 주력하기보다는 전대미 문의 조직률 20%를 장기적 목표로 설정하고 함께 실천하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 고 노력해보면 어떨까?
*안타깝게도 저작권 문제 등으로 인해 『노동운동의 혁신과 조직화』는 비매품 이다. 필요하신 분들은 한국노동운동연구소로 연락(070-8220-3130/ sanbyoul@hanmail.net)을 하면 구할 수 있다.
<더 읽을만한 책> •킴 보스, 라셸 셔먼, <과두제의 철칙 깨뜨리기 : 미국 노동운동의 노조 재활성화>, 영남노 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2006년 1월(139호) •에드문드 히어리, 멜라니 심스 등, <영국 노총의 조직화 아카데미 평>, 영남노동운동연구 소, 《연대와실천》 2006년 2월(140호) •임월산, <전략조직화와 국제연대를 위한 공공운수노조 CtW 방문기>, 사회진보연대, 《사 회운동》 2011년 9· 10월(102호) •김종진, <민주노총 미조직· 비정규 전략조직화사업 진단과 향후 과제>, 한국노동사회연 구소, 《노동사회》, 2013년 11· 12월(173호) •한국노동운동연구소· 노동자운동연구소, <공단조직화사업 진단과 과제> 토론회 자료집 (2013.4.24.) 삶과 문화 111
우리동네 현대사
우리 동네 사립명문 성남고, 그 자랑과 치욕의 역사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준) 대표
요즘 상급학교 진학을 앞둔 학생이나 학부모들은 특히 가슴 설렐 것이다. 오늘은 학교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우리 동네 동작구에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고가 유독 많 은 편이다. 1899년 관립상공학교로 출발한 ‘ 실업교육의 발상지’ 서울공고가 있고, 1903년 평양에서 출발한 기독교계 명문사립 숭의여고가 있다. 오늘 이야기하려고 하는 성남고도 1938년에 만들어졌으니 제법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고라 할 수 있다. 성남고는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넥센의 박병호, 두산의 노경은을 배출한 야구 명문이기도 한데, 우리 동네 학부모나 학생들 사이에서는 ‘ 보내고 싶은 학교, 가고 싶은 학교’로 통한다. 학생들의 대학진학 성적도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어서다.
서울 최초로 3· 15 부정선거에 맞서 시위를 벌이다
서울에서 벌어진 최초의 시위가 바로 우리 동네 성남고 학생들이 일으킨 ‘ 3 · 17의거’ 다. 긴급 출동한 경찰은 공
성남고는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자랑스러운 지위를 차지한다. 1960 년의 4· 19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3 · 15부정선거에 맞선 반독재 민주
포탄까지 쏘면서 학생들을 해산시키
화운동의 효시다. 그때 서울에서 벌
고 100여 명을 강제 연행했다.
어진 최초의 시위가 바로 우리 동네 성남고 학생들이 일으킨 ‘ 3· 17의
거’다. 마산에서 3· 15부정선거에 맞서 일어난 시위를 이어받아 성남고 학생들이 이틀 후 인 3월 17일 규탄투쟁을 전개한다. 영등포시장 로타리에서 학생들 400여 명이 삐라를 뿌리 면서 영등포구청까지 데모를 감행했다. 손으로 직접 쓴 삐라에는 ‘ 경찰은 자숙하라’ , ‘ 정 112
성남고 3· 17의거 당시 (사진: 동아일보)
의를 위해서 싸우는 학생을 구타하지 말라’ , ‘ 경찰은 학생사살 사건을 책임지라’ , ‘ 체포한 학생을 석방하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어서 200여 명씩 나뉜 시위 대는 인천 방면과 수원 방면으로 각각 행진한다. 긴급 출동한 경찰은 공포탄까지 쏘면서 학생들을 해산시키 고 100여 명을 강제 연행한다. 이중 세 명(유무거, 김만옥, 김종운)의 학생은 구류 3일 처분을 받기에 이른다. 이 과
성남고 3· 17의거 기념비 (사진: 김학규)
정에서 재미있는 일도 벌어진다. 서울지검은 이 시위를 “영등포학생데모사건”으로 명명하고, “이 데모사건이 종래의 어떤 데모와도 달리 경찰을 비난하고 있기 때문에 오열의 잠동여부를 조사할 것”이라고 발표한다. 요즘 말로 치면 “종북세력의 개입여부를 조사하 겠다”는 건데,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 지배세력이 하는 짓거리는 똑같았던 셈이다. 성남고 교정에는 학 생들의 자랑스러운 민주항쟁 참여를 기리는 뜻에서 “3· 17의거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교가가 좀 이상해요!” 설립자 숭배를 넘어 일제 찬양 이렇듯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반면, 태생적 한계에 가까운 부끄러운 역사도 설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학생들이 부르고 있는 교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먼--동이 트--니이 온누리- 환하도다 환---한 이 강산에 원석두님 나셔서배--움길 여--시니 크신공덕 가이없네 성남성남 우리학교 무궁탄탄 할지어다
삶과 문화 113
이 성남고 교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남고 의 탄생 과정과 그 설립자에 대해 알아야 한다. 1938년 2월 성남고등보통학교로 개교한 성남고는 친일기업인 원윤수(1887〜1940)와 김석원(1893〜1978) 이 공동설립자다. 성남고 재단인 학교법인 원석 학원은 원윤수의 ‘ 원’ 자와 김석원의 ‘ 석’ 자를 따 서 지었다. 우리 동네 사람 중에도 성남고 설립자 를 김석원만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설립자금의 상당수(80만원)는 공동설립자인 원윤 수가 냈다. 원윤수는 남대문 잡화상(1907〜), 과일 위탁판매업(1915〜) 등을 하다가 일화광업(日華鑛業) 을 설립하고 백년광산(텅스텐, 황해도곡산)을 개 발하여 더 큰 부를 축적하는데, 이렇게 쌓은 부를 일본군에 군량미(3,000석)와 비행기 대금으로 헌납 하는 등 최창학(경교장 원주인), 방응모(조선일보 사 주)와 함께 일제강점기 3대 광산재벌로 통하면서
광산 성금으로 이름을 더럽힌 대표적인 친일 기업 인이었다.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이름이 많이 알 려지지 않은 이유는 해방 전인 1940년에 병으로 일찍 사망한 탓이다. 김석원 역시 1915년 일본 육사를 제27기로 졸 업하고 1917년부터 보병 소위로 임관해서 해방될 때까지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친일군인이었다. 그는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 때는 중대장으로 화 려한 전과를 올렸고, 1937년 중국침략 때는 대대 장으로 출전했다. 태평양 전쟁 때는 학병으로 참 전할 것을 권유하는 강연회를 같은 일본군 장교였 던 이응준 등과 함께 수행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 서 그는 ‘ 일본군국주의의 화신’이라는 별명을 얻 기도 한다. 김석원의 해방 직전 일본군 최종 계급 ▲성남고 공동설립자 원윤수가 일본군에 군량미 3,000석을 헌납했다는 보도자료(사진 : 동아일보) ▼성남고 교가가 새겨진 대형 석조물 (사진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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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대좌(대령)였는데, 일본군에 복무한 조선인 중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을 역임한 홍사익 중장, 관
동군 보급부대장을 역임한 박병두 중장에 이은 최고위급 인물이었다. 김석원은 해방이후에도 줄곧 성남고에 관여한다. 대한민국 국군장교로 복무하다 예편한 1956년 이후 에는 성남고등학교 교장과 원석학원의 이사장을 맡는다. 1978년 사망하면서 학교 뒷산에 묻히는데, 생존 중에 성남고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잔재청산을 요구하는 항의시위를 하게 되면서 2002년에 철거되는 수난을 당하기도 한다.
성남고, 교가 새로 만들어야 이렇듯 대표적인 친일파 원윤수와 김석원이 세우고, 거기에 아베(安倍)라는 일본육군 소장이 설립 당 시 교장을 맡은 학교의 교가에 건강한 내용이 담길 수는 없었다. 성남고 교가를 보면 누구나 “환---한 이 강산에 원석두님 나셔서- 배--움길 여-시니 크신공덕 가이없네”라는 대목에서
대표적인 친일파 원윤수와 김석원이 세우
두 친일파 설립자를 지금도 추앙하고 있다
고, 거기에 아베(安倍)라는 일본군 소장이 설
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성남고 교가의 문제점은 두 친일파를 우상숭배하 는 데 머물지 않는다. “먼--동이 트--니이
립 당시 교장을 맡은 학교의 교가에 건강한 내용이 담길 수는 없었다.
온누리- 환하도다”라는 교가의 앞부분에 주목하자. 자연의 섭리를 단순히 표현한 거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성남고가 설립된 1938년은 만주침략 에 이어 중국침략을 벌이고 내선일체니 황국신민이니 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배가가 더욱더 노골화되던 시점이었다. 이제 다르게 보이는가. 일제와 일본천황이 위치한 동쪽에서 먼동이 트면서 온누리가 환히 밝 으리라는 대목은 일본군국주의의 상징인 ‘ 욱일승천기’를 연상케 한다. 이제 원윤수와 김석원을 추앙하는 그 다음 구절은 이런 앞구절 해석과 결합될 때 그 진정한 의미가 살아난다. ‘ 원석 두님’도 일본 천황이 비 춘 은혜로운 ‘ 환한 이 강산에’ 나심으로써 비로소 배움의 길을 열 수 있었으니 말이다. 충격적이다. 일제를 찬양하는 이런 교가가 일제 강점기 때는 그렇다 쳐도 어떻게 지금까지도 불리고 있단 말인가. 일제잔재 청산을 게을리 한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무런 죄도 없는 성남고생들이 이 노래의 참의미조차 모른 채 부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라도 성남고는 두 설립자에 대한 찬양을 중단해야 하며, 학생들이 부르는 성남고 교가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을 때 성남고 학생들의 자랑스러운 ‘ 3.17의거’도 그 빛을 더 발하게 될 것이다. 학생과 학부모들의 학교에 대한 자부심도 더 높아질 것이고, 지역사회와의 결합도 보다 용이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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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의 씁쓸한 기억 한 청년의 ‘ 안녕들 하십니까?’ 로 시작한 안부 인사가 2013년 세밑을 달구었습니다. ‘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접하면서 떠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2010년 최저임금투 쟁집회는 한 시간가량을 청년노동자 중심으로 진행했는데, 그때 삼각김밥 모양의 모자 를 쓰고 나타났던 청년들과 락밴드가 그들입니다. 집회 문화제에 연이어 등장하는 삼각김밥 모자를 쓴 청년들과 락밴드의 상황극을 보 며 집회 대오가 술렁였습니다. 30여 분이 흐르자 각 집회 대오의 책임자들이 무대 뒤로 하나둘씩 몰려와 항의하더군요. “우리가 이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아느 냐? 한 해 농사 다 망칠 일 있느냐? 청년문화제를 줄여라.” 항의하는 분들이 지나치다 싶 어 그 집회의 기획자가 아니었음에도 결국 저도 참견했습니다. “당황하신 것은 이해하겠 지만 저 모습이 바로 청년입니다. 저들은 저들에게는 낯선 우리 어른들의 집회를 몇 시간 을 참고 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른들은 고작 한 시간도 못 참겠다는 겁니까? 익숙한 모습은 아니지만 그대로 진행할 수 있도록 협조해주십시오.” 제 말은 그분들 귀 에 들리지 않았을 겁니다. 결국, 일부 대오가 집회에서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 이후, 그날과 같은 집회 문화제는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그 집회를 기획했던 사람 들의 회의를 옆에서 지켜보다가, “그게 민주노총에서 받아들여지겠어? 너무 충격 받지 않을까? 시나브로 작전이 낫지 않을까?”라고 우려 섞인 참견을 했던 저나 항의했던 분들 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보면 ‘ 시나브로’ 겠지만 모든 새로운 문화는 접하는 그 순간만큼은 충격일 텐데, 제 조언은 대놓고 하지 말라는 말보다 얄미운 말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항의하고 대오를 뺀 사람들이나 저 같은 사람이 나 그날 그 무대가 온전히 진행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면할 길은 없지 않을까 생각 합니다. 그 일 이후, 저는 낯선 그들을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까 가끔 궁리해보곤 합니다. 하지만 생각만큼 실천하지 못했으니 대자보를 읽으며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청년들에게 새삼 미안해지더군요.
노 래 의
꿈
혼자 울지 말고 민정연 문화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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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바닥에 내던져진 세대 90년대에 20대를 보낸 사람 중에는 ‘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10여 년 전에 문화 활동을 했던 삐삐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습니다. “문득 대학 졸업 전후 암울했던 기억이 자꾸만 떠올랐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이 안 된다는 상황을 최 초로 접한 세대이다. 캠퍼스를 누비며 대학생활을 즐기던 마지막 세대이고. 상대 학점이 아니라 절대 학 점의 시대, 그 낭만이 끝난 것이다. 삼십 대에 접어들기까지 대학친구 중 절반 이상이 여기저기 떠돌고 비 정규직이건 정규직이건 내 직장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가지기 힘든 불안한 조건 속에 마지막 청춘을 보냈 다. 부모님 사업, 가계는 부도나거나 정리해고였기에 우리에게까지 내려올 관심은 없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청춘은 길바닥에 내던져져서 살아남아야만 했다고. 밤마다 전화로 ‘ 죽지 못해 산다’ 가 첫 인사였고, ‘ 부모님 뵙기가 괴롭다’에 한숨. 그래서인지 직장에 대한 애착이 크게 없기도 하다. 언제라도 우리를 버릴 수 있는 곳. 돈 버는 것 외에 소속감을 요구하는 것이 우습다. 시스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진보적이건 아니건 충성도나 희생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경향이 크다. 사회에 첫발 디딜 때 경제, 정치, 교육, 가족 모두의 관심 밖에서 살아남아야만 했으니까. 어떤 세대는 자신들의 세대가 자랑스럽고 대견하 다 한다. 어떤 세대는 전 사회가 안쓰러워하며 자립의 길을 찾도록 도와주고 격려한다. 난 나와 동시대를 겪은 사람들이 가엾고 애잔하다. 문화, 사상의 자유로움을 누렸으나 자신의 삶에서는 (자유로움을) 펼쳐 보지 못한 소심하고 까칠하고 리버럴한 영혼들.” 이렇게 넋두리를 늘어놓고는 있지만, 이 친구가 스스로에 대한 연민으로 불평을 늘어놓는 친구는 아닙 니다. 자신이 사는 마을에 문화공간을 열고 야무지게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며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래 서 더 가슴에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청춘 역시 한없이 암울했고 슬펐으나 지금처럼 불안정한 미래에 떨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내 동년배들은 최소한 ‘ 우리는 버려졌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되었던 마지막 세대일까요? 역사 이래로 모든 청년은 되바라지고 나약한 존재들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청년들을 생각하며 만든 노래 2012년 어느 봄날, 꽃다지 정윤경 감독이 비정규직 노동자와 청년 노동자, 특히 청년유니온을 생각하
내 청춘 역시 한없이 암울했고 슬펐으나 지금처럼 불안정한 미래에 떨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내 동년배들은 최소한 ‘ 우리는 버려졌다’ 는 생각 은 하지 않아도 되었던 마지막 세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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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작업한 노래라면서 <혼자 울지 말고>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노래를 듣고 반가웠던 데는 아마도 청년들 에 대한 부채의식도 작용한 듯합니다. 번듯한 세상을 꿈꾸었고 세상을 바꾸겠다고 절치부심했으나 별로 바꾸지 못한 채, 어느새 이 사회의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한 사람으로서의 부채의식 말입니다. 옛날에는 정세를 분석하고 그 정세에 따라 이런 노래가 있으면 좋겠다고 의도한 창작물이 꽤 많았습니 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공연 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의 삶이 속에서 축적되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불 현듯 만든 노래를 더 많이 발표했는데, 이 노래는 참 오랜만에 의뢰받아 만든 노래입니다. 2012년 3월, 민주노총에서 ‘ 함께 살자 1-10-100 캠페인’ 목적으로 노래, 율동, 각종 UCC 공모전을 진 행했습니다. 민주노총이 국민적 대중운동으로 ‘ 함께 살자! 행동 1-10-100’ (한 번에 10대 우선 노동입법과제 를 19대 국회 개원 100일 안에 쟁취하자)을 실시하며 진행한 사업으로, 꽃다지도 기꺼운 마음으로 참여했습니
다. 민주노총 문화 사업으로는 꽤 큰돈을 들인 이 사업은 안타깝게도 대중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못한 채 막을 내렸습니다만, 지금도 민주노총 홈페이지에서는 음원과 함께 공연할 때 요긴하게 쓰시라고 반주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춤을 춥니다. 나른한 기타 연주가 시작되면 저는 어느 순간 마 리오네트가 되어 있습니다. 온몸에 줄이 연결되어 누군가 나를 조정하는 대로 축축 늘어진 손과 발을 움 직입니다. 그러다 거친 일렉트릭 기타 소리로 전환되면 그 줄을 끊어내고 내 맘대로 막춤을 추다가 ‘ 미래 는커녕 희망도 보이질 않지. 이대로라면 나는 못살 거 같아’ 라는 노래의 막바지 부분에 이르면 그야말로 힘찬 광란의 춤을…. 아직은 마음속으로만 춤추지만, 어 느 날엔가 광장에서 이 노래에 맞춰 함께 춤추는 모습을 상상하며 노래 듣기를 마칩니다. 청년들이 물었습니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답합니 다. “안녕하지 못합니다. 우리 같이 덥석 손잡고 함께 안 녕한 사회를 만들 방법을 찾아보고 함께 싸워봅시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이렇게 저렇게 우리의 안녕을 구할 방도가 있다고 호기롭게 화답하지 못해 미안할 따름입 니다. 다만 당신이 혼자 눈물 흘리게는 하고 싶지 않습 니다. 같이 울고 같이 싸워봅시다.
1228 민주노총 총파업에 결합한 ‘ 안녕들하십니까’ (사진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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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울지 말고 정윤경 작사· 작곡/꽃다지 노래 이게 뭐야 시급이 사천오백팔십 원이 뭐야 짜장
매일매일 8시간 이상을 일하고 파김치가 되어
면 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모르나봐
집에 돌아와
이게 뭐야 시급이 사천오백팔십 원이 뭐야 누군
내가 몽유병이 있나 밤새 쇼핑을 했나
가 말려줄 사람이 필요해 누군가
자고 나면 빚이 늘어나 있어
매일매일 8시간 이상을 일하고 파김치가 되어
미래는커녕 희망도 보이질 않지 이대로라면 나
집에 돌아와
는 못살 거 같아
내가 몽유병이 있나 밤새 쇼핑을 했나 자고 나면
내가 뭘 잘못한 건가 내가 죄를 지었나
빚이 늘어나있어
정부는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이게 사는 건가 이
이게 사는 건가 이게 사는 건가 이게 사는 건가
게 나라인가 이게 사는 건가
미래는커녕 희망도 보이질 않지 이대로라면 나
난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
는 못살 거 같아
내 인생을 위해서 싸워야 할 테니
내가 뭘 잘못한 건가 내가 죄를 지었나 정부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 힘을 모으자
대체 뭘 하고 있는지
혼자 울지 말고 혼자 울지 말고
이게 나라인가 이게 나라인가 이게 나라인가 죽기 전까지 살아있는 거야 내 몸속 어딘가 숨어 죽기 전까지 살아있는 거야 내 몸속 어딘가 숨어
있는 용기를 꺼내어
있는 용기를 꺼내어
무장을 할 거야 힘을 낼 거야
무장을 할 거야 힘을 낼 거야
<혼자 울지 말고>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청년 노동자, 특히 청년유니온을 생각하며 만든 노래입니다. 이 노래가 반가 웠던 건 아마도 청년들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인 듯합니다. 삶과 문화 119
노영수의 DIY 공작소
‘ 댓통령’ 풍자 알알이 담았다 1228 총파업 집회서 대형 키보드 선보여 강남규 서울 동작 당원
이제 LED 깃발은 다 만들었다. 그러나 노영수 동작당협 사무국장의 DIY 프로젝트는 계속된다. 제작 도중 필자와 한 전화에서 노영수는 ‘ 인생작품’을 만들고 있다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투쟁과 퍼포먼스 를 접목시킨 ‘ 투쟁 아티스트’가 인생작품이라고 부르는 작품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까. 12월 28 일 총파업 집회에서 마침내 공개된 노영수의 작품은 사람 크기의 키보드였다. 국가정보원과 국방부의 마 크, 그리고 박근혜 ‘ 댓통령’의 얼굴이 박힌 키보드, 관권 부정선거를 이보다 통렬하게 비판할 수 있을까?
대형 키보드 제작 과정
1. 키보드의 ‘ 알맹이’ 들을 준비한다. 3mm 짜리 폼보드를 십자군 마크 모양으로 오려서 모 은다. 쉬프트, 캡스락, 스페이스 등등 크기 가 다른 알맹이들도 따로 준비한다.
2. 알맹이들을 접은 다음 그림처럼 곱게 모아 놓는다.
3. 쭉 배치해보고, 혹시 빠진 것은 없는지 본인 의 키보드와 비교해보자. 노영수는 이 과정 을 생략한 탓인지, 알맹이 하나를 놓치고 말았다.
4. 알맹이들을 끼워 넣을 밑판을 만든다. 이것 도 본인의 키보드와 비교해 가면서 규격을 잘 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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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밑판에 알맹이들을 하나하나 빈틈없이 차 곡차곡 채워 넣는다.
6.대통령의 용상을 잘라서 키보드 홈들 사이로 맞추어 붙인다.
7. 국가정보원, 국방부 마크, 그리고 노동당의 작품임을 알릴 수 있는 문구를 잘 토막 내 서 적재적소에 붙인다. 알맹이에도 글자를 붙인다.
8. 완성! 그런데 이 키보드에는 'ESC' 버튼이 없 다. 'ESC‘ 버튼이 없다는 지인의 민원에 대 해 노영수는 “이 정권은 ESC가 없는 정권 이기 때문”이라고 답했지만, 궁색한 변명 으로 보인다.
12월 28일 총파업 집회에서 위용을 뽐냈다. 삶과 문화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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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123
소리 다운
당원들의 유쾌한 청각생활을 지지하는 이 달의 음원 다운로딩 가이드 장석원 음악 블로그 soundz.egloos.com 주인장
희망
순위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 『Wrecking Ball』 록큰롤이 미국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록큰롤이 탄생하는 사회적 원동력은 50년대 미국의 경제호황이다. 이를 배경으로 구매력이 커진 10대의 하위문화 와 노동계급의 하위문화가 새로운 음악양식을 만들었다. 그러나 미국 노동자의 중산층 화가 진행되면서 ‘ 계급성’ 은 록의 구성요소에서 지워졌다. (대서양 건너 영국에서는 반 대로 진행됐다.) 미국 록에서 급격하게 계급적 색채가 탈색되던 70년대에 등장한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이런 추세와 다르게 뉴저지 노동계급 공동체의 정서를 배경으로, 몰락하 고 위축하는 미국 산업노동자의 이야기를 노래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지금, 수십억대 의 수익을 올리는 공연을 다니지만 그는 여전히 존 스타인벡과 피트 시거가 그랬던 것처 럼 미국의 참모습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전념하고 있다. 2012년 발표한 “Wrecking Ball” 앨 범의 영감은 동시기에 진행된 ‘ 월스트리트점거운동’ 이다. 사실상 인재였던 허리케인 카 트리나의 피해와 금융위기 등을 거치면서 금융자본과 지배계급에게 직접 문제를 제기 하는 운동으로 발전한 민중운동에 대한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연대성명은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우린 우리 스스로 더 잘해나갈 수 있다.We take care of our own.” 그래서 그는 여전히 우리 모두의 두목Boss이다. ●한국 무대에서 꼭 듣고 싶은 트랙 : ‘ We Take Care of Our Own’ , ‘ Death to My Hometown’,‘ Wrecking Ball’,‘ Land of Hope and Dreams’
...그래서 가능성은?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1월, 자기 노래를 셀프커버한 “High Hopes” 앨범을 발표하고 다시 한 번 월드 투어에 나선다. 이미 오스트 레일리아와 뉴질랜드 공연 일정이 발표됐다. 대규모 무대만 도는 롤링스톤즈나 U2와 달리 작은 무대도 서는 만큼 한국 공연을 살짝 기대해보지만 공연천국 일본에도 30년 전 한 번 공연한 기록밖에 없을 정도로 아시아 무대에 인색하다. U2는 오는 4월 새 앨범 발표가 예고돼 있고 이어서 월드투어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U2와 마돈나는 국내 프로모터들이 데려오고 싶으나 (돈 때문에) 부르지 못하는 대표적인 아티스트다. 밴 모리슨은 금액이나 일정이나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공연이 성사 될 수 있으나 국내 인지도가 너무 낮아 흥행이 어려워 보인다. 정치나 문화나 기적을 바래야 하는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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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한국에서 만나고 싶은 아티스트
희망
순위
U2, 『All That You Can’ t Leave Behind』 현재 공연업계에서 가장 큰 손 셋은 롤링 스톤즈와 마돈나, 그리고 U2다. 지금까지 가장 많 은 수익을 낸 투어 10개중 6개가 이들 세 아티스트가 만든 것이다. 그 중에서도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진행된 “U2 360° Tour”는 동원관중 7천2백만명, 수익 7,825억달러로 부동의 1위 다. 아마 꽤 오랜 시간 이 기록은 깨지기 어려울 것이다. 이쯤 되면 밴드라기보다는 움직이 는 대기업 수준이다. 하긴 이 밴드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도 어지간한 국가 지도자급 뺨치는 수준이기도 하다. 그러나 U2가 어마어마한 공연수익을 챙긴 2000년대에 발표한 두 장의 앨 범은 졸작은 아니지만 밴드의 지위를 생각할 때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그래서 “U2 360° Tour”의 뼈대도 최근 두 앨범이 아닌 20세기의 끝자락에 나온 “All That You Can’ t Leave Behind” 앨범의 노래들이었다. 2000년 10월이라는 발매 시점 덕분에 이 앨범은 20세기의 마 지막 걸작이 됐다. 그만큼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특히 21세기를 맞는 세계인에게 보내는 인사인 ‘ Beautiful Day’ 에서 시작해 아웅산 수치를 모델로 한 ‘ Walk On’ 으로 이어지는 첫 네 곡은 ‘ 왜 U2의 공연을 보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 한국 무대에서 꼭 듣고 싶은 트랙 : ‘ Beautiful Day’ , ‘ Stuck in a Moment You Can't Get Out Of’ , ‘ Elevation’ , ‘ Walk On’
희망
순위
밴 모리슨Van Morrison, 『Moondance (Expanded Edition)』 북아일랜드 출신의 밴 모리슨이 1945년생이니 벌써 일흔을 눈앞에 두고 있다. 두세살 위의 믹 재거나 폴 매카트니가 아직 현역으로 뛰고 있으니 노땅 취급하기는 미안하지만, 그래도 한참 때의 그 모습을 기대하기 미안한 나이다. 그러나 2008년 미국 헐리웃볼에서 자신의 대표작인 “Astral Weeks” 앨범 전체를 라이브로 연주했을 때, 관객들은 40년 전의 녹음과 차 이가 없는 성량과 기교에 놀랐다. 늙은 아티스트와 늙은 팬이 모여 추억을 공유하는 자리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음악이 밴 모리슨의 자존심이다. 그래서 그런가, 가장 최근 앨 범의 제목은 “Born to Sing: No Plan B(노래하기 위해 태어남, 다른 계획은 없음)”다. (이 앨범에 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우울을 그린 노래 ‘ End Of The Rainbow’ 는 꼭 들어보시길 권한다.) “Moondance”는 1970년에 나온 세 번째 솔로앨범이다. “Astral Weeks”와 쌍벽을 이루는 걸작 인데 뜬금없이 지난 해 혼자만 리마스터링 재발매됐다. 아티스트는 자신의 승인 없이 이루 어진 작업이라고 노발대발했지만, 팬의 입장에서는 시대의 흐름에 맞게 재정비한 사운드 와 앨범 녹음 당시를 엿볼 수 있는 추가트랙 등 반갑기만 한 선물이다. ● 한국 무대에서 꼭 듣고 싶은 트랙 : ‘ Moondance’ , ‘ Crazy Love’ , ‘ Into the Mystic’ , ‘ Glad Tid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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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입맛
소비자는 모른다, 요리사의 슬픈 얼굴 박찬일 삶과 먹을거리 협동조합 <끼니> 조합원, 셰프
납품 받다 / 전자레인지에 돌리다 사람들이 이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 중의 하나는 ‘ 그래도 세계는 진보한다’는 믿음이 있어서다. 불행하게도 요리에 있어서는 그런 믿음이 허망할 때가 많다. 요리책이 쏟아져 나오고, 텔레비전 프로그램 에서도 요리는 가장 쉽게 시청률을 올리는 ‘ 안전빵’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요리사가 광고 모델이 되기도 한다. 뭔가 요리가 ‘ 발달’한 듯 보이지만, 여전히 서울 시내 식당과 술집에서는 요리사 대신 전자레인지가 요리를 한다. 요리사라면 으레 시장을 보는 것이 당연하던 때가 있었다. 제철 재료라는 게 굳이 의미가 없던 때였다. 시장에서 가장 싱싱하고 값이 싼 것은 제철 재료였고, 요리사는 그걸 골라 요리하면 됐다. 맛은 계절이 내 고 요리사는 간을 맞추면 되던 시절이었다. 이제 요리사들은 인터넷으로 다른 식당에서 뭘 하는지 들여다본다. 유행하는 음식들의 그림을 본다. 제철 재료 같은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유행하는 요리에 어울리는 전 세계의 재료가 전자레인지에 돌 리기만 해도 팔 수 있을 만큼 완벽히 손질을 마치고 냉동 상태로 공급되기 때문이다. 요리사 없는 식당을 해 볼 수 있겠다는 상상을 후배들과 농담처럼 한 적이 있다. 놀랍게도 전자레인지 를 한 열 대쯤 들여놓으면 가능하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심지어 ‘ 불판’이라고 부르는 가스레인지 없이도 얼마든지 요리를 할 수 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차마 눈 뜨고 못 볼 광경 고시촌의 대형 밥집 부엌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는 후배가 있다. 그는 거기 서 맛본 국의 맛을 잊지 못한다. 맛없는 다리 부위만 따로 포장한 오징어가 공 급되었다. 그걸 해동한 후 잘게 썰었다. 커다란 국솥에 물을 100리터쯤 붓고 그 안에 오징어다리를 넣는다. 한 대접의 중국산 복합조미료를 퍼서 넣고 나면 요 리사는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요리를 끝냈다. 한국의 요리는 대체로 하향평준화 되어 있다. 어떻게 하면 가장 싸게 공급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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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을까 인간의 상상력을 모두 동원한 듯한 요리 재료들, 현대 과학의 총아들이 집약된 재료들이 넘쳐 난다. 무짠지 한 쪽이라면 소금과 무가 전부여야 한다. 그러나 두 줄이 넘는 첨가물은 도대체 무엇인가! 식 당의 위생수준도, 요리사들의 대우나 손님들의 태도도 다를 바 없다. “이봐, 스테이크 제일 비싼 걸로 가 져와 봐.” 부엌은 식당의 오지로 밀려난다. 식당이나 술집은 화장실로 가는 길목에 부엌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곳을 지날 때면 못 볼 걸 많이 보게 된다. 보통은 모르고 스쳐갈 수 있지만 나 같은 요리사 눈에는 심상 치 않은 장면들이다. 온갖 가공 소스로 빽빽한 찬장, 더러운 집기들, 어떠한 삶의 희망이나 요리에 대한 열망도 없어 보이는 얼굴로 피곤에 절어 인스턴트 음식 봉지를 뜯는 요리사들. 그들도 한때는 멋진 요리 사 복장에 높다란 모자를 쓰고 최고의 요리를 하겠다는 의지가 충만하던 요리학교 졸업생이지 않았을까.
5천 원짜리 밥상이 정상이라고 보는가 오랫동안 같이 일하는 아주머니가 있다. 우리는 한 때 그 분을 콩국수 아주머니로 불렀다. 당시에는 주 방 시설이 부족해 열 명이 넘는 직원들이 배달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온갖 배달음식점을 돌아가며 주문했는데, 이 분은 초지일관 콩국수만 주문했다. 하루는 “콩국수를 아주 좋아하시나 봐요?”라고 물었 다. 대답은 뜻밖이었다. “콩국수는 재활용을 안 하더군요.”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겠다. 사실, 음식 재활용은 일종의 시스템의 문제다. 우리 식당업의 현실이며, 한 끼 밥값이 5천원이라는 시 스템에서는 불가피한 문제다. 생각해 보라, 반찬 다섯 가지에 찌개 한 그릇을 포함하여 5,6천 원인 밥값을 정상이라고 보는 당신이 비정상 아닌가. 당신이 담근 김치의 정상적인 제조 원가를 생각해 보라. 절인배 추가 10 킬로그램에 2만 원인데, 완제품 김치가 1만8천 원인 까닭을 단 한 번이라도 고민해 보았는가. 일본의 한식당에서는 깍두기 한 접시에 5백 엔(약 7천원)이라고 놀라워하면서도 당신이 먹는 밥상에 세 가지 김치가 무한리필 되는 것에 대해 단 한 번이라도 의구심을 느낀 적이 있는가. 최근에 대만계 한 중식 당에 들렀다. 그 식당은 김치를 무료로 제공하지 않고 사먹어야 한다. 한 접시에 5천 원이었다. 누가 뭐라 하든, 나는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만든 김치의 원가를 생각해 보면 아마 당신도 고개를 끄덕 이게 될 것이다.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가 매달 삶과 먹을거리 협동조합 <끼니> 소식을 전합니다. 먹을거리 의 생산과 가공, 유통, 소비 등 각 분야의 전문가와 언론인, 인문학 연구자 등이 필진으로 참여합니다. 한국인의 끼니가 그 실체를 선명히 드러낼 수 있도록 왜곡된 정보와 조작된 전통을 고발하고, 궁극적 으로는 한국의 노동자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끼니를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모색합니다. 이 글은 <끼니> 공식 블로그에 동시게재됩니다.(http://blog.naver.com/gginicoop)
삶과 문화 127
편지를 접으며
당파성과 태도 박권일 『88만원 세대』 공동저자, 기관지위원 몇몇 지인들에게 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에 대해 물어본 적 있다. “기탄없이 소감을 말해 달라” 했더니 돌직구 같은 답변들이 돌아왔다. ‘ 대체로 읽을 만하다’면서도 부족한 점, 모자란 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기술적인 문제들도 있었고, 돈만 있으면 해결할 수 있는 문 제들도 있었다. 그런데 가장 뼈아팠던 말이 있다. “어설프게 일반 시사잡지의 흉내를 내는 느 낌이다. 당파성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사회의 모순에 대한 태도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이었다. 여기서 핵심어는 ‘ 당파성’과 ‘ 태도’다. 저 말을 듣는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 신이 번쩍 들었다. 세련된 디자인, 흥미로운 콘텐츠는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자본과 인력 만 충분하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미덕이다. 하지만 당파성과 태도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집 단정치이성에게만 가능한 역능이다. 당의 언어는 자체로 ‘ 역사의 산물’이며 ‘ 고민의 축적’이고 ‘ 의지의 실현’이어야 한다. 당 파성은 평등, 생태, 평화의 기치를 내건 명실상부한 진보정당으로서 스스로의 위치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이것은 관점 혹은 입장과는 다르다. 관점이나 입장은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를 찍고 그것을 밝히면 끝나는 일이지만 당파성을 보이는 것은 단순히 입장 표명을 넘어 적 과 친구가 누구인지, 그리고 전선은 어디인지를 규정하는 정치적 실천이다. 그럼 태도는 무엇일까. 태도는 당파성을 드러내는 모양새, 자세, 스타일이다. 흔히 ‘ 운동 권 문화’라 부르는 것도 일종의 태도다. “태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은 달리 말하면 스타 일이 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 운동권’ 소리를 들을까봐 대중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의미다. 나 는 사실 모두가 개탄하는 그 ‘ 운동권 문화’를 전부 갖다버려야 할 악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다. 문제는 ‘ 어떤’ 문화이냐다. ‘ 운동권 문화’엔 나쁜 문화도 있지만 좋은 문화도 있다. 운동 권 문화는 전부 ‘ 구악’이고 촛불시민 문화는 새롭고 좋은 것이라는 식의 설레발은, 타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체로 대중성을 담보해주지도 못한다. 어쨌든 한동안 소수파일수밖에 없는 진보정당의 대중성은 소위 ‘ 깨어있는 시민’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한 국사회의 다른 정당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 대체불가능성’에서 나온다. 《미래에서 온 편지》는 부족한 점이 많은 신생매체다. 글의 질이 들쭉날쭉하고 포맷도 아직 완전히 자리 잡진 못했다. 하지만 몇 해 매체에 몸담았던 경험으로 판단하건대 이 정도 인력 과 자본으로 이만큼 충실한 내용의 잡지를, 그것도 매달 만들어내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당파성과 태도를 회복한다면, 제작환경이 조금만 더 안정화된다면 어디에 견주어도 빠지지 않는 훌륭한 매체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당원독자 여러분의 참여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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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이야기
“안녕들 다음은? 당신과 나의 정치”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박혜림 사진가 정정은 편집부장
“청년의 정치를 말하려면 상당한 뻔뻔함이 필요하다. 왜냐고? 이놈 의 사회에선 좌우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이 주는 것 없이 청년들을 막 굴려먹었기때문이다”(1월호 <2030 플레이포럼을 소개합니다> 중에서) 어느 당직자는‘청년’세대를 이야기하기가 지겹거나 죄스러운 지경 에 이르렀다고 고백했다. 청년에게 학자금 대출로 빚이나 지우고 비 정규직으로 착취하는 이 가혹한 사회의 모습을 정치권이 그대로 반 영한 꼴이라고도 말했다. ‘그러나 청년들은 여전히 삶을 견디며 다시 정치를 기다리고 있지 않 을까?’위 기사는 이렇게 끝맺었지만, 아니다. 그들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목소리로 정치를 말하기 시작했다. 2013년 12월 서 울 모 대학에서“안녕들하십니까” 라는 일성으로 시작하는 한 장의 대 자보가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수많은 대자보들이 교문을 넘어 거 리로 퍼져 나갔고 이내 전국을 뒤덮었다. 2월호 특집 <안녕들하십니 까, 그후>에서 청년 당원들은‘각자의 자리에서 자기의 정치가 무엇 인지를이야기하자’ 고 제안한다. 2030 플레이포럼 강연과 밀양 희망버스에 참여한 노동당 청년 당원 들, 그리고“안녕들하십니까”대자보 열풍에 함께 했던 수많은 청년 들의 모습을 담았다. 당신과 나의 정치는 앞으로 어디서, 어떤 방식으 로 조우하게 될까?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듯 그 인연이 짜맞추어지면 서‘미래에서온 편지’ 는 완성될것이다.
미래에서 온 편지 제6호 발행인 이용길 편집인 이장규 위원회 김건담 김성현 노정 박권일 장석준 정정은 정철수
조윤호 최백순 홍원표 교 열 강남규 김규백 김성현 노정 정정은 디자인 고미숙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 마포-라00403) 발행일 2014년 1월 26일 주 소 서울 마포구 서교동 371-12 비금빌딩 7층 노동당 전 화 02) 6004-2006, 2007 팩 스 02) 6004-2001 이메일 laborzine@gmail.com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인 쇄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973-15 원일컴 가격 10,000원
2013.12 제4호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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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부동산 정책 잔혹사
그 많던 집은 누가 다 가졌나 기획 ■ 예술과 밥 이재영을 추모하며 ■ 정책이 살아야 진보정당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