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서 온 편지 12호 (2014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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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 제 호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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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8.21 2:38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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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제12호

2014.9

불로소득 공화국

www.laborparty.kr

값 원

10,000

불로소득공화국

지금 +여기노동당 ■ 몸과마음지친그대, 여기로오라 특집

기획 ■ 진보의민낯 청소년진보정치열전 ■ 청년, 그리고청소년운동가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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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 제 호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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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8.21 2:38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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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이야기

“사진기와함께세상속으로 가족과함께도시바깥으로” ,

다큐멘터리사진가이상엽

이상엽은다큐멘터리사진가이자작가이다 그동안《흐르는 강물처럼》《레닌이 있는 풍경》《낡은 카메라를 들고 떠나 다》《사진가로사는법》《파미르에서 윈난까지 》등개인저 서만 열일곱 권 공저까지 포함하면 스물여덟 권을 펴냈을 정도로부지런한사람이다 진보신당창당과함께입당하여 문화예술위원회의 탄생을 함께 준비한 당원이고 진보신당 정책위원회부의장을역임하기도했다 이상엽의 당적은 진보신당연대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후 노동당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는 문화예술위원회 준비모임 을제안한사람이기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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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에인재가많았어요 진보정당에매우중요한문화 예술인들을엮어위원회를만들려했죠 그런데 년당대 회때에통합이냐독자냐하는논쟁이일었지요 저는통합 파였지만 당에남았고요 어떤결정이나든우리문화예술 위원회는함께가기로했거든요 무엇보다진보신당에대한 의리 나의판단에대한존중 그런판단을한나에대한자기 존중때문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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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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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사진가 이상엽 인터뷰 전문은 110~115쪽 <숨 은문화예술당원찾기>에서볼수있습니다.

미래에서온편지제12호

발행인 이용길 편집인 이장규 위원회 김건담김성현노정박권일장석준정정은정철수

조윤호최백순홍원표

교 열 노정정정은 디자인 고미숙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영등포, 라00407) 발행일 2014년 8월 26일 주 소 서울영등포구국회대로 664 한흥빌딩 2층노동당 전 화 02) 6004-2006, 2007 팩 스 02) 6004-2001 이메일 laborzine@gmail.com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인 쇄 인천시계양구계산동 973-15 원일컴 가격 10,000원


미래에서 온 편지

‘ 미래에서 온 편지’ 는 영국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작가, 미술가인 윌리엄 모리스가 1891년에 낸 소설 제목

News 『News from Nowhere』 을 우리말로 의역한 것입니다. from Nowhere

nowhere는 ‘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는 뜻입니다. ‘ 유토피아’ 라는 말의 원래 의미도 ‘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고 하지요. 이제 노동당의 기관지에 ‘ 미래에서 온 편지’ 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한국 사회의 답답한 현재에 햇살을 들이는 미래의 틈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고 보니 nowhere는 now+here(지금 여기)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미래가 되기 위해, 이 편지를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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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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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띄우며“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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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모집·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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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노동당 ■ 노동당 활동가 쉼터 편 몸과 마음 지친 그대, 여기로 오라|김재호

특집 ■ 불로소득 공화국 14

이 불평등엔 내일이 없다|박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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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한국의 새로운 정치 지형을 만들 캐스팅보트|이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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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세를 강화해야|김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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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려라, 돈이 될지어라|홍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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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소득의 분배와 재분배|정승일

기획 ■ 진보의 민낯 42

야권연대 vs. 진보재편|장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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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는 세대교체 안하나?|홍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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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시민사회는 존재했는가|최백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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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콜트콜텍을 읽는 열두 개의 시선⑦

같은 운명을 지닌 다른 싸움 - 콜트이야기 1⃞|이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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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제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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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1|청년, 그리고 청소년운동가 강승 가만히 있지 않는 사람들| 신원, 정우

76

정책포럼 상가임대차문제, 개인관계를 넘어 사회관계의 재구성으로 풀자|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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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시민운동사 원전 추진, 일본 진보운동의‘붉은 개발주의’ |임경화

86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싱크홀, 자본주의형 도시괴담이 되다|김상철

90

왼쪽에서 본 농업이야기 다양성이 배제된 사회|연승우

94

지역에서 현장에서 관리와 본질의 정치|서태성

삶과 문화 98

오비환의 야담외전 변강쇠와 옹녀 - 19세기 하층민의 성과 삶 ①|오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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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정치칼럼 2004-2014 성소수자/성정치위원회 10년|박자민

106

오보로 보는 한국언론‘특종’ 에서‘오보’ 로 전락, 권력 따라 춤추는 언론보도|조윤호

110

숨은 문화예술 당원찾기 다큐멘터리 사진가 이상엽

“사진기와 함께 세상 속으로, 가족과 함께 도시 바깥으로” |나도원 116

불온한 서재 로빈 후드,‘재미와 장난’ 으로 도시를 뒤엎다|양솔규

120

노래의 꿈 엄마 미안해|민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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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파견의 품격|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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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입맛 닭 한 마리가 품은 사연 ⑤ 바닥과 꼭대기의 만남, 치맥 |정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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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접으며 추석 따위든지, 추석을 이용하든지|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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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띄우며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불로소득은 말 그대로‘일하지 않고 얻는 소득’ 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자본-국가 는 노동자들이 자본의 억압과 착취에 항거하며 파업을 일으키면 늘‘무노동 무임금’원칙을 들이대지만, 더 큰 도둑은 따로 있습니다.《미래에서 온 편지》9월호 특집은 부동산과 금융소 득에 이르기까지 일하지 않고 버는 돈‘불로소득’ 을 집중 분석합니다. 한국사회의 불평등을 강력한 대중적 의제로 정치화시키는 것, 결국 진보정치의 본령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불 로소득의 불평등을 타개할 노동당의 대안과 해결방안도 함께 제시합니다.

지방선거에 이어‘미니총선’ 이라 불리던 재보궐 선거도 끝났습니다. 진보정당의 사분오열 속에서 이번에도 전면적 야권연대를 되풀이하는 익숙한 풍경이 연출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야를 막론하고 세대 교체론이 터져 나오고 있기도 합니다. 진보정당들 또한 이 문제에서 예 외가 아닙니다.《미래에서 온 편지》9월호 기획 면에서는 선거가 끝난 자리 갈 곳 잃고 서 있 는 진보의 민낯을 집중 조명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창간 1주년을 넘긴 노동당 기관지《미래에서 온 편지》9월호부터는 새로운 연재 코너들을 여럿 선보입니다. <여성 진보정치 열전>과 <청년(청소년) 진보정치 열전>이 번 갈아가며 격월로 연재됩니다. 임경화 당원의 <동아시아 시민운동사>, 김상철 당원의 <빨간 도 시교통 이야기>, 오비환 당원의 <오비환의 야담외전> 등 새 연재칼럼이 추가되었습니다. 조윤 호 기자의 <미디어비평>은 <오보로 보는 한국언론>이라는 코너로 새단장을 했습니다. 너무 무겁지 않되 내실있고 호기심 당기는 읽을거리들과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2014년 8월 26일 <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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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모집 우리는 길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 사람과 자연이 공존 가능한 지구생태계, 차별과 소외 넘어 모두가 평등한 세상, …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밑그림을 그려나가면서 없는 길을 만들고, 스스로 길이 됩니다. 그래서 노동당의 꿈은 곧 <미래에서 온 편지>입니다.

정기구독자가 되어주세요 창간호부터 정기구독자에게 한정발송됩니다 구독료 : 매월 1만원, 1년 10만원(일시불), 10년 50만원(일시불) 입금 결제일 : 5일, 25일 중 선택가능 직접납부 : 신한은행 100-028-812208(예금주 : 노동당) 구독문의 : 중앙당 편집실 정정은 / 02)6004-2007 / laborzine@gmail.com

■정정합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2014년 8월호 기획 기사 중 30쪽 <감시자 아닌‘플레이어’ 로 뛴다, 조중동 이 데올로그>의 필자 조윤호 기자의 직함을‘<미디어오늘> 기자’ 로, <여성 진보정치 열전> 기사 중 55 쪽 최혜영 당원의 직함을‘경기도당 사무처장’ 으로 정정합니다. 오기로 인해 혼선을 드린 점, 독자들과 두 분 필자께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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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노동당

몸과 마음 지친 그대, 여기로 오라 노동당 활동가 쉼터 편 김재호 노동당 농업위원회

죄송합니다 故이재영 동지, 김주영 동지, 권문석 동지, 박은지 동지…. 많은 분들이 당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돌아 가셨습니다. 어려운 조건에서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활동가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농촌에서 사는 저희 들은 그래도 좀 나은 편입니다. 시골이라고 도시와 크게 다를 게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땅을 일구며 자연 과 함께하는 삶이 삭막한 도시의 활동보다는 나은 게 사실이지요. 저희 농민 당원들은 도시생활을 하면서 6


사진설명 : ① 홍보 손팻말을 든 아이들 ② 활동가 쉼터 전경 ③ 쉼터에서 함께 벼농사를 짓는 당원들

‘이건 아니다’싶은 생각에 활동을 접고, 훌쩍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내려온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농촌 에서도 다들 열심히 활동하고 있지요. 그래도 도시에 남은 동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일종의 부 채의식이라고 할까요. 아까운 생을 마감하는 동지들 소식을 들을 때마다 안타깝습니다. 시골에 터를 잡은 지 갓 1년, 2년, 5년, 10년, 15년째 살아가고 있는 농민 당원들이 이제서야 동지들을 위한 작은 쉼터 하나 마련했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희도 시골 내려와 자리 잡느라, 먹고 사느라, 소중한 활동가들 챙기 는 데 소흘했습니다.

이제야, 작은 쉼터 하나 마련했습니다 농업위원회 활동은 당원들에게 농민 당원들의 존재를 알리는 정도의 걸음마 단계입니다. 연락이 닿는 농민 당원들과 투쟁 현장에 농산물을 조금씩 후원하고 있고, 농민 당원과 도시 당원이 농산물 직거래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도시 당원들의 귀농·귀촌을 지원하고 있기도 합니다. 2013년 열린 귀농 수련회와 농업위원회 집행위 회의에서도 쉼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활동가들의 휴 식과 재충전이 필요하며 농민 당원들의 별채나 빈집을 활용해 활동가 쉼터를 준비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바쁜 농사일로 미뤄오다가 박은지 부대표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며‘아차’싶어 서둘러 쉼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여기 노동당 7


이렇게 준비했습니다 마침, 전북 장수 하늘소마을에 사는 당원의 별채가 비었습니다. 15평 정도의 크기로 욕실 과 부엌, 거실방, 작은방이 딸린 흙집이었습니 다. 박은지 부대표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던 당 원 가족은 흔쾌히 쉼터 사용을 허락해주었습 니다. 우선 도배 장판을 새로 했습니다. 장수 농민의집(민중의집) 박은영 회원이 뜻있는 일이 라며 도배 장판 비용을 선뜻 후원했습니다. 자 연의학 침뜸 강의를 하시는 남편께서도 쉼터 주치의를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전북도당 허옥희 부위원장님이 책꽃이를, 장수당협 유달리 위원장님이 다기 세트를, 장 수로 귀농한 조혜원·이수현 당원이 커피를, 귀농수련회 참가했던 당원이 유기농 녹차세트 를, 다른 당원과 지인들이 가스레인지, 전자레 인지, 선풍기, 온풍기 등 중고가전제품을, 주 방용품, 중고피아노를 기증했습니다. 정성스 럽게 가꾸던 화분도 기증해주셨습니다. 숟가 락 젓가락 하나까지 돈 들이지 않고 모을 수 있 었습니다. 흔들의자가 들어오고, 해먹이 들어 오고, 화장지가 들어오고, 식탁이 들어오고, 유기농 밀가루며, 유정란이 배달되었습니다. 그렇게 돈 안 들이고도 기적처럼 필요한 물건 이 마련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재활용, 중고용 품, 기증품과 재능기부로 다시 태어난 쉼터였 습니다. 숟가락도 젓가락도 짝이 안 맞고, 그 릇도 제각각이지만 그래도 뿌듯했습니다. 화 룡점정, 마지막으로 버려진 목재를 활용해‘노 동당 활동가 쉼터’ 라고 쓴 예쁜 현판을 만들어 노동당 활동가 쉼터 내부와 외부 전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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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걸었습니다.


전북 장수 하늘소마을에 터 잡은 <노동당 활동가 쉼터> 쉼터는 전북 장수군 하늘소마을에 마련되 었습니다. 장수는“무진장 좋다” 고 할 때 등장 하는 무주, 진안, 장수 중 한 곳으로,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의 경계에 있는 교통의 요지입 니다. 해발 500m이상의 고랭지로 강원도 평 창과 연중기온이 같을 만큼 산세가 깊고 춥습 니다. 빨치산, 사과, 한우, 오미자, 토마토, 노 동당이 유명해 Red City로 불립니다(^^). 서울 에서 세 시간, 부산에서 두 시간 반, 대전에서 한 시간, 광주에서 한 시간 반이 걸리는 곳입 니다. 의외로 가깝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당원들이 열심히 활동하는 지역으로 농촌형 민중의집 1호인‘장수농민의집’ 이 문을 연 곳 이기도 합니다. 하늘소마을은 유기농으로 농사짓는 귀농인 들이 모여 사는 생태마을입니다. 화학비료와 농약, 수세식 화장실을 전혀 쓰지 않습니다. 비누, 치약, 세제도 친환경제품만을 씁니다. 자연과 사람, 이웃이 어울려 예쁘게 사는 곳으 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릴 수 있는 좋은 곳입 니다.

노동당 활동가 쉼터 현판 만들기 작업 과정과 완성된 모습

활동가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리는 쉼터 쉼터는 양파망에 황토를 넣어 쌓아 만든 흙부대집입니다. 열 다섯 평 남짓 되는 크기로 나무 마루가 있 습니다. 요리도 하고 씻을 수 있도록 주방과 욕실이 갖춰져 있습니다. 넓은 거실방에서는 차 한 잔 하며 담 소를 나누거나 작은 규모의 모임을 할 수도 있습니다. 작은방이 하나 더 있어 두 가족이 사용할 수 있습니 다. 작은방은 절간처럼 단촐하게 꾸며져 책을 읽거나 명상하면서 조용히 쉴 수 있습니다. 유리창으로 햇 살이 들어와 따뜻하고 아늑합니다. 지금+여기 노동당 9


쉼터는 구들로 난방을 합니다. 쉼터에 오시 는 활동가들이 장작도 패고 직접 불을 지피는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뜨끈한 아랫목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이곳 은 환경을 생각해서 재래식 화장실만을 사용 하는데, 불편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이것 도 추억으로 남는다고 하더군요. 앞 뒤 마루에 는 중고 흔들의자와 해먹이 있어 한껏 여유롭 고 한가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아이 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도, 윗집 아랫집 개짖는 소리도 정겹게 느껴집니다. 쉼터에서는 유기농 우렁이농법으로 논농사 도 500평 짓습니다. 쉼터 방문자들과 농민 당 원들이 함께 농사지으며 관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쌀은 노동당 당직자와 활동가들 의 식탁을 풍성하게 하는데 쓰입니다. 고생하 는 동지들께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한다는 심정 으로 마련한 논입니다. 벼가 어느 해보다 잘 자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운영합니다 노동당 활동가 쉼터는 힘든 여건에서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당직자나 활동가, 그 가족과 지인들을 우선으로 배려하는 공간입니다. 그 렇다고 평당원과 노동당 당적이 아닌 이들의 사용이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쉼터는 온전히 이용자가 원하는 대로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 다. 누구도 간섭하지 않습니다. 쉬고 싶을 때 쉬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쉼터의 친환경 재래식 화장실(맨위). 유기농 우렁이농법으로 방문 자들과 농민 당원들이 함께 논농사를 짓고 있다(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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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눈치 안보고 맘껏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 다.


쉼터는 쌀과 채소, 양념류, 식기, 조리기구가 준비되어 있어 자기가 먹을 것만 간단하게 준비해 오면 됩니다. 쉼터 이용자를 위한 텃밭이 함께 있 어 고추, 상추, 토마토, 호박, 가지, 옥수수 등 채소 를 무료로 수확해 드실 수 있습니다. 쉼터지기에 게 부탁하면 인근에 돌아볼 만한 곳도 알아볼 수 있고, 농사일도 거들면서 들판에서 막걸리 한 잔 걸칠 수 있고, 마음 따뜻해지는 좋은 얘기도 나눌 수 있습니다. 쉬는 동안 쉼터 주치의 선생님에게 침뜸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지난 4월에 문을 연 이후 서울과 경기, 경남, 충 남, 대전, 전북 등지에서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습 니다. 활동가 가족이 함께 오거나 지역 당협 동지 들이 단체로 농활을 오기도 했고, 학생당원들이 세미나 MT를 왔습니다. 한두 명이 와서 조용히 쉬 었다 가는 분들도 많습니다. 표정이 한층 밝아진 활동가들을 보면‘쉼터 만들길 잘 했구나’싶습니 다. 휴가철에는 예약이 다 차서 아쉬워하는 분들 도 많습니다. 현재 두 번 째 쉼터가 준비되고 있습 니다.

언제든 고향집처럼 다녀 가세요 노동당의 활동가들은 많이 소중한 존재들입니 다. 지친 몸과 마음으로는 장기적인 전망을 세울 수도 없고,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 갈 수도 없습 니다. 휴식과 재충전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누구 나 훌쩍 떠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마음 편히 내

노동당 활동가 쉼터를 다녀간 사람들

집이다 생각하고 갈 수 있는 곳, 부모님 계신 고향 집이다 생각하고 갈 수 있는 곳, 쉼터는 바로 그런 곳입니다. 활동가 동지 여러분! 언제든지 달려오세요. 따뜻하게 불 지펴 놓겠습니다.

지금+여기 노동당 11



특집

불로소득 공화국 토지를, 혹은 금융자산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여러 사람의 노력으 로 만든 가치를 일부 개인이 독식합니다. 노동에서 산출되는 소득보 다 재산에서 산출되는 소득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평등 은 그 자체로 체제의 존립을 위협합니다. 이번호 특집은 불로소득을 집중 분석하고 노동당의 대안을 제시합니다.


브라질 상파울루 모룸비. 브라질의 사회적 불평등을 한눈에 보여준다. (사진 : MBC)

특집 / 불로소득 공화국

이 불평등엔 내일이 없다 소득도 불평등하고 자산도 불평등한데 복지도 미비한 사회. 이런 사 회에서 미래를 계획하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건 한갓 백일몽이거나 역겨운 기만일 뿐이다.

박권일 기관지위원,《88만원 세대》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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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 불로소득, 하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경구다.“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라는 말로 더 잘 알 려지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이 말을 좌파와 우파 모두가 사랑한다. 과거의 소비에트를 비롯한 좌파들에게 ‘일하지 않는 자=부르주아’ 였다. 노동으로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였고 부르주아들은 생 산수단의 독점을 통해 그 생산물을 강탈해가는 존재였다. 반면 부르주아들도 저 말을 즐겨 인용했다. 칼 뱅주의 성향이 강한 부르주아들은 나태한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와 번 돈을 매번 탕진하는 자제력 없는 프 롤레타리아트들을 경멸했다. 그들은 자신의 부가 온전히 자신의 지혜와 금욕과 노력으로 창출된다고 진 심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마음껏 혐오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자본-국가는 노동 자들이 억압과 착취에 항거하며 파업, 태업을 일으키면‘무노동 무임금’원칙을 곧장 들이대는 유구한 전 통을 이어오고 있다.

전 세계적 문제, 자산소득 불평등 불로소득은 말 자체로는 일하지 않고 얻는 소득을 가리킬 뿐이지만 유통되는 의미는 결코 가치중립적 이지 않다. 소득의 정당한 자격을 따져 묻는다는 점에서, 강한 도덕적 비난의 뉘앙스를 지니고 있고 바로 그런 강한 이데올로기적 특성 때문에 노동과 자본 모두에게 전유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자체로 하 나의 흥미로운 개념사적 주제이긴 하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논의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21세기 자본주 의 국가에서, 특히 OECD 국가에서 불로소득이 진지한 논의의 주제가 된다면 그건 결국 자산소득을 둘러 싼 해석과 대응일 테다. 더 명확히 말한다면, 자산소득 불평등이라는 문제다. 세계적 신드롬을 일으키는 중인 토마 피케티의《21세기 자본》 이 다루는 핵심주제도 바로 이 문제와 직 결되어 있다. 자본수익률(r)이 국민소득증가율 혹은 성장률(g)보다 높다는 점을 핵심모순으로 보았다. 그 것이 유명한 피케티의 부등식 (r>g)이다. 자본수익률이 국민

소득증가율보다 크다는 말은 곧 자본 소유자들, 즉 부자들 이 경제성장률보다 더 높은 수 익을 올린다는 것이다. 피땀 흘려 일해서 번 돈이 아니라 기존에 쌓여있거나 물려받은 재산을 통해 벌어들이는 돈이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내게 된다.

토마스 피케티와《21세기 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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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피케티의 자본 개념은 마르크스가 말한 그것과는 다르다. 노동소득, 자본소득 등을 모두 합한 총 체적 부 혹은 재산(wealth)에 가까운 개념이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말한 이윤율과 피케티가 말하는 자본수 익률도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피케티는 최상위계층으로 소득이 집중되는 소득불평등 현상을 완화시키 지 않는 한 미래가 더 참혹할 거라 경고하고 있다. 그는 성장률을 다시 끌어올려서 자본수익률을 초과하 게 만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봤다. 대안은 무엇인가? 피케티는 노동자 혁명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 가 해결책으로 제시한 건 소득세율을 높이고 부유세를 부과하는 것이다. 피케티의 도구를 빌리지 않더라도 이미 여러 연구들은 한국의 경제적 불평등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줬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소득불평등도의 악화이고, 그중에서도 자산불평등의 악화추세다. 자본소득분배율의 상승과 노동소득분배율의 하락이라는 말로 표현해도 좋다. 어쨌든 노동에 서 산출되는 소득보다 재산에서 산출되는 소득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은 명확하다. 많은 이들이 이 문제에 천착하는 건 이런 현실이 부정의할 뿐 아니라 인류 대다수의 고통을 증대시키 고 있기 때문이다. 생산을 자극할만한 동기부여도 없다는 면에서 이 불평등에는 내일이 없다. 지금 벌어 지는 현상은 소위 정통 좌파가 아닌 주류경제학의 시선으로 봐도 부조리한 현상이다. 제도권 경제학계에 서 훈련받고 거기서 배운 도구들로 평생을 연구해온 피케티조차 자본가들이 가져가는 어마어마한 돈이 과연 생산과정에서 그들이 실제 기여한 만큼인지에 대해 노골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을 정도다. 그리고 이 의문을 좀 더 연장하면 주류경제학에서 주장하는 소득분배이론, 이윤에 대한 정의 자체에 대한 근본적 인 의문에 닿게 된다. 주류경제학은 이자와 이윤이 현재의 소비를 희생하고 금욕한 대가라느니, 자본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한 대가라느니 하는 등으로 정당화해왔지만 신리카도학파의 문제제기 등으로 밝혀졌 듯 이자와 이윤을 자본의 한계생산성과 결부시키는 이론은 일종의 순환논리로 파탄을 맞은지 오래됐다 (소위‘캠브리지 논쟁’ ).

부정의와 모순성에 눈을 감는다 해도 체제가 만들어낸 불평등은 그 자체로 체제의 존립을 위협하기 때 문에 완화되어야할 문제가 된다. 보수주의자들이 나서서 헬기로 돈을 뿌려야할 정도로 불평등이 야기한 고통은 이미 임계치를 향해 육박하는 상황이다. 미국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으로 자산불평등에 관한 연구 가 거대한 붐을 이룬 것도 바로 그런 위기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의 극우정권은 근본적 해 결방안은커녕 대증요법조차 망설이고 있다. 바로 이 점이 국민경제 전체를 출구 없는 파국으로 몰아가는 중이다.

낙수효과론의 종말, 이중의 불평등 폴 크루그먼에 따르면 스탠더드앤드푸어스가 최신보고서에서“심각한 불평등이 지속적 경제성장의 장 애물” 임을 인정했다고 한다. 리버럴과 좌파들은 원래 낙수효과론, 그러니까 부자들이 많이 벌어야 그 부 가 흘러내려와 경제성장을 촉진한다는 가설에 시큰둥하거나 코웃음을 쳐왔다. 하지만 우파들에겐‘전가 16


의 보도’같은 논리였다. 그런데 이제 우파들조차 낙수효과론을 주장하기 어렵게 됐다. 물론 여전히 한국 우파는 좀 예외이긴 하지만. 부가 위로 빨려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오지 않기 때문에 국민경제는 점점 더 악순환에 빠져들 수밖에 없 다. 부자들은 돈 놓고 돈 먹는데 여념이 없고, 중산층 이하는 돈이 없어 돈을 못쓰니 경제가 활력을 잃는 건 너무나 당연한 노릇이다. 201년 발표된 <한국에서 자산빈곤의 변화추이와 요인분해>라는 논문에서 이상 은·이은혜·정찬미는“자산의 전반적 성장에 의한 빈곤 감소효과보다 분배 악화에 의한 빈곤 증가효과가 훨씬 컸다’ (1쪽)고 지적한다. 성장률 자체도 낮거니와 성장의 열매가 고루 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엔진’ 을 돌리려면 인위적·강제적인 방법으로라도 재분배를 실현해야 하는 상황인데 이게 쉽지가 않 다. 참여정부 당시 종부세 논란과 끝내 누더기가 된 종부세의 몰골을 보면 기득권층의 저항만이 아니라 국민 일반의 세금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부정적인지 잘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전혀 종부세 대상이 아 님에도 종부세에 극렬하게 반대했다. 대체 왜 그랬을까. 쉽게 말해 그들은 종부세 대상인 부자들과 자신 을 동일시했던 것이다. 현재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익이 아니라 선망하는 계급의 이익을 개변하는 이런 현상은 마치 스톡홀름 신드롬을 연상시키는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계층이동이 매우 활발했던 사회 라는 점에서 하나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불평등의 완화, 재분배가 정치 문제이면서 동시에 이데 올로기 문제임을 웅변하는 에피소드라 할 수 있다. 이명박 정권을 거쳐 박근혜 정권 하인 지금에는 좀 다를지 모르겠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제 한국 사회가 예전 같은 초고속성장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낙수효과에 대한 회

OECD 국가들의 소득재분배율(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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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감도 확산되었다. 문제는 한국사회의 불평등이 구조화되어서 이미 대증적 처방으로는 전혀 흐름을 반 전시킬 수 없는 상태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신진욱은 단순히 자산소득 불평등에만 주목하는 기존 연구들 에서 좀 더 나아가 다른 OECD 국가와의 유형비교를 시도한다. 그는‘한국에서 자산 및 소득의 이중적 불 평등(2011)’제하의 연구에서 자산불평등과 소득불평등 간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정교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자산불평등과 소득불평등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의 상 대적 평등에 의해 상쇄되는 패턴을 보이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2000년대 이후 자산불평등과 소득불평등 의 동반상승으로 임금소득과 가계자산 중 어느 쪽으로도 경제적 필요를 충족하기 힘든 이중적 불평등 구 조가 심화되고 있다. 실제 스웨덴 등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일부는 낮은 소득불평등과 높은 자산불평등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소득불평등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고 자산불평등이 중간 수준인 D유형에 서 소득불평등과 자산불평등이 모두 극단적으로 높은 A유형으로 이행하는 추세다. A유형의 대표국가는 미국으로, 자산불평등과 소득불평등에서 다른 어떤 국가도 따라올 수 없는 (거의 그래프 밖으로 튀어나갈 정 도의) 압도적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

다시, 문제는 정치다 한국은 토지가 전체 부의 절반 정도 비중으로 다른 선진국가와 비교해 매우 높은 비중이다. 자산불평 등 문제에서 부동산 문제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소득불평등이 다시 자산불평등을 강화하는 구조 속에 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문제가 바로 불안정·비정규노동 문제다. 도식적으로 표현하자면 자 산소득 불평등은 부동산 문제와, 근로소득 불평등은 비정규직 문제와 직결된다. 두 가지 문제 공히 21세 기 한국사회의 가장 첨예한 모순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시민이 부를 축적하는 세 가지 경로는 소득, 자산, 복지인데 한국사회는 지금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 다. 소득도 불평등하고 자산도 불평등한데 복지도 미비한 사회. 이런 사회에서 미래를 계획하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건 한갓 백일몽이거나 역겨운 기만일 뿐이다. 지난 20년의 이른바 신자유주의 개혁 결과, 저축은커녕 사채를 끌어다 교육비와 생활비를 대야할 지경 에 놓인‘워킹 푸어’ 들이 양산됐다. 가계부채 문제가 한국경제의 뇌관이 된지도 오래됐다. 심지어 국책연 구기관이 나서서“법인세를 다시 인상하는 것이 불가피하지 않을까” 라고 제안할 정도로 현 시기 경기침체 추세는 심상치 않다(박종규,한국경제의 구조적 과제: 임금없는 성장과 기업저축의 역설(2013), 한국금융연구원). 하지만 재벌이 스스로 나서서 정규직 고용을 늘리고 비정규직을 줄인다거나나, 부자들이 공동체를 위 해 양보하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 이미 지난 정권들의 경험이 여지없이 보여준 바 있다. 타협도 어느 정도 상대에게 위협이 될 때나 가능한 것이다. 작은 법안들, 조례 하나하나가 결국 싸워가며 따내야할 목 표다. 한국사회의 불평등을 시민들이 응집할 수 있는 강렬한 대중적 의제로 정치화시키는 일, 그것이야말 로 진보정치의 본령이자 당면과제다. 18


재개발이 진행 중인 서울 상도동의 빛과 그늘 (사진 : 정정은)

특집 / 불로소득 공화국

부동산, 한국의 새로운 정치 지형을 만들 캐스팅보트! 가계자산의 80%가 부동산에 잠식돼 있고, 넓은 땅을 소수의 사람이 소유하는 등 토지 소유의 편중도가 매우 편향된 한국은 토지 불로소 득이 자산소득의 불평등을 야기시키는 주범이다.

이성영 토지정의시민연대 정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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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다 부동산은 한국의 보수정권이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조건인 민심을 획 득하려고 사용한 주요한 도구였다. 보수정권이 부동산을 사용하는 방식은 이렇다. 첫째, 경기부양의 지렛 대로 부동산을 적극 활용했다. 물론 부작용은 크지만, 단기적으로 큰 과시 효과를 낼 수 있다. 둘째, 빠른 시일 안에 아파트를 셀 수 없이 많이 공급해 집을 가진 계층을 빠르게 늘렸다. 이때 집을 산 사람들은 보수 정권의 이해관계와 맞물리는 정치적, 경제적 보수계층으로 성장했다. 박정희 정권의 영동지구 개발(강남 개발), 전두환 정권의‘주택 500만호 건설’공약, 노태우 정권의‘주택 200만호 공급’공약과 신도시 건

설, MB의 대표공약인 뉴타운 건설 등 보수정권은 민심을 얻으려고 부동산을 적극 활용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한 세대들도 2008년 내 집값을 올려주겠다는 뉴타운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보수진영에 몰표를 줬다. 또한 상대적으로 내 집값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 같은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밀었 다. 다시 말해 부동산은 전세계의 보수 세력 중 비교적 수준이 떨어지는 한국의 보수진영이 계속 정권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주요한 무기다. 반면

부동산은 전세계의 보수 세력 중 비교적 수준 이 떨어지는 한국의 보수진영이 계속 정권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주요한 무기다.

진보진영은 부동산의 중요성을 상대적으 로 간과하고 부동산을 활용할 방안을 찾으 려는 노력을 그리 열심히 보이지 않았다. 2008년 이후 부동산 가격의 상승률이 둔화돼 부동산 정책의 중요성이 줄어든 것

처럼 보이지만, 부동산 불로소득의 메커니즘을 제대로 알고 정치에 활용하는 일은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부동산 가격이 빠르게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부동산 불로소득은 다른 방식으로 여전히 한국 기득권층의 물적 토대가 되고 있으며, 한국의 절반 가까운 가구는 부동산이 없는 계층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부동산 은 고착화된 듯 보이는 한국의 정치 지형을 뒤흔들 수 있는 와일드카드다. 부동산을 정치에 활용하려면 부동산 불로소득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 불로소 득을 활용해 어떻게 한국의 정치 지형을 흔들지 생각해야 한다.

토지 불로소득의 메커니즘 먼저 용어를 정확하게 정의해야 한다. 불로소득이란 노동을 하지 않고 벌어들이는 소득을 말한다. 엄 밀히 말하면 부동산 소득은 불로소득과 노동소득이 결합돼 있다. 부동산은 토지와 토지 위에 지어진 건물로 나눌 수 있다. 건물은 사람이 노력해 지은 노동의 결과물이 다. 이 결과물을 빌려줘 사용료를 받거나 팔아서 적당한 이윤을 남기는 것은 불로소득보다 노동소득이라 고 볼 수 있다. 토지를 뺀 건물은 중고차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감가상각이 일어나 가치가 점점 더 떨어진 20


다. 일반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상승한다는 뜻은 건물의 가치는 하락하지만 건물 아래에 있는 토지 가격은 올라가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반면 토지는 인간이 노력한다고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토지의 가치가 상승하는 원인에 개인의 노력이 개입될 여지도 거의 없다. 토지 의 가치는 크게 세 경우에 상승한다. 첫 째, 인구가 증가할 때다. 인구가 늘거나 상업이 활성화돼 토지를 사용하려고 하 는 사람이 많아지면 토지의 가치는 상

토지는 인간이 노력한다고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토지의 가치가 상승하는 원인에 개인의 노력이 개입될 여지도 거의 없다.

승한다. 이런 까닭에 서울, 특히 강남의 토지 가격이 높다. 둘째, 교통과 문화 등 사회기반시설이 공급되거나 정부의 특정 정책 때문에 토지의 가 치가 높아진다. 주변에 지하철이나 공원이 들어서는 지역, 용적률을 높여주는 지역은 여지없이 토지 가격 이 상승한다. 사회기반시설은 대부분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다. 1960년대까지 황무지이던 강남은 국 민의 세금으로 교통, 문화, 교육 등 사회기반시설이 만들어져 오늘날 한국 최고의 입지를 자랑하게 됐다. 셋째, 천연자원이 발견되면 토지의 가치는 상승한다. 석유 등 천연자원이 매장돼 있거나 온천이 발견되면 해당 지역의 토지 가격과 임대료는 높아진다. 이렇듯 토지 가치가 높아지는 이유는 대부분 개인의 노력이랑 상관없이 공동체 전체가 노력했거나 자 연 그대로의 가치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의 노력이 가미된 건물에서 발생하는 소득과 개인의 노력이 거의 들어가지 않은 토지에서 발생하는 소득은 구분해야 한다. 엄밀히 정의하면 부동산 불로소득 이 아니라 토지 불로소득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토지사유제를 기반으로 한 한국에서는 개인이 토지를 가 졌다는 이유만으로 여러 사람의 노력 또는 자연의 혜택으로 높아진 토지가치의 상승분을 가져간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노력해 만든 가치를 일부 개인이 독식한다는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토지를 골고루 소유하고 있다면 토지 불로소득 때문에 생기는 문제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가구 중 40%는 땅이 전혀 없다. 가구 중 상위 2.5%가 토지의 57%를 소유 한 한국의 현실(2013년 토지소유현황)은 자산소득의 극심한 불평등을 불러들이고 있다. 토지에서 불로소득을 얻는 방법은 토지를 사용한 대가인 지대를 월세나 임대료로 받거나 지가 상승을 통한 시세차익을 얻는 것이다. 주택의 경우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가 일어나기 전에는 주택 가격이 급격하게 상승해 시세차익에서 토지 불로소득을 얻는 방식이 선호됐다. 그러나 2008년 이후 주택 가격이 크게 상승하지 않으면서 시세 차익보다 월세를 높여 임대소득을 통해 토지 불로소득을 취하는 방식이 보편화되고 있다. 전세가 월세로 전환되는 추세도 이런 상황에서 토지 불로소득의 수입을 극대화하려는 지주들의 이해관계하고 맞닿아 있 다. 현금 흐름이 활발한 상가의 경우 기본적으로 임대료를 통해 수익을 얻는 구조다. 그렇지만 입지 조건 특집 불로소득 공화국 21


이 좋아 지대상승률이 높은 상가는 상가의 매매를 통한 시세차익도 상당한 이윤을 남긴다. 간혹 악덕 지 주들은 상인들의 권리금마저 가져가는 방식으로 불로소득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지대 기본소득’ , 빼앗긴 중산층을 데리고 올 진보진영의 와일드카드 프랑스의 경제학자 피케티는《21세기 자본》 으로 경제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피케티의 논리를 거칠게 요약하면 노동소득보다 자산소득에서 불평등이 심각해 빈부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으며, 자산세 또는 부유세가 이런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라는 것이다. 특히 가계자산의 80%가 부동산에 잠식돼 있고, 넓은 땅을 소수의 사람이 소유하는 등 토지 소유의 편중도가 매우 편향된 한국은 토지 불로소득이 자산소득의 불평등을 야기시키는 주범이다. 한국에서 토지 불로소득을 환수할 수 있 는 효과적인 방법은 토지보유세를 강화해 지주가 가져가던 지대를 세금으로 공동체 가 환수하는 방식이다. 참여정부의 종합부 동산세가 이런 토지보유세 강화라는 기조 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모두 알다시피 기 득권층의 주요한 물적 토대를 건드린 참여 정부 수장과 종합부동산세의 말로는 비참 했다. 마치 기득권층의 물적 토대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고 협박하듯 정권이 바뀌자 마자 종합부동산세는 세대별 합산 위헌 판 정과 과세구간 조정으로 무력화됐고, 참여 정부의 수장은 기득권층의 집요한 공격에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이렇듯 기득권층의 물적 토대를 건드리 는 개혁은 쉽지 않다. 종부세를 만들 때도 국세인 종부세를 부동산교부세로 모두 지 방으로 보내 만약 정권이 바뀌어 종부세를 없애려고 하더라도 지자체에서 반발하게 만들었지만 그리 큰 효과는 없었다. 기득권 층의 물적 토대를 건드리는 개혁이 성공하 출처 : 마린블루스 2006-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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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면 시민들이 개혁적 정책을 명확히 인식


하고 그 정책으로 얻을 수 있는 혜택을 피부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종부세를 분배하는 일 에 관한 설계는 여러모로 아쉬운 측면이 있다. 어떻게 하면 기득권층의 물적 토대를 건드리는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지대 기본소득’ 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지대를 환수해 기본소득으로 배분하는 방식은 기본소득을 받는 사람에게 기본 소득의 원천이 무엇인지 확실히 인지시킬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권이 바뀌어 정책이 바뀐다고 해도 기본소득을 누리는 시민들은 토지 불로소득이 다시 일부 기득권층에게 돌아가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막을 것이다. 토지 불로소득인‘지대’ 가 과연 기본소득을 충당할 만큼 충분할 것인가라는 우려는 내려놓자. 지가 기 준을 보수적으로 공시지가로 잡아도 200조 원 가까운 지대가 발생하고 있다.1) 여기다가 점진적인 방식으 로 지대 환수 비율을 높여간다면 지대의 상당량을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관건은 지대 기본소득을 도입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한국 사회의 정치 지형도는 여전히 보수진영한테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그렇지 만 진보진영이 시민들의 피부에 와 닿

진보진영이 제대로 된 민생 관련 정책 의제를

을 수 있는 제대로 된 민생 관련 정책

제시하고, 그 정책 의제를 실현할 수 있다는 신

의제를 제시하고, 그 정책 의제를 실현 할 수 있다는 신뢰를 줄 수 있는 정치 인이 있다면 한국의 정치 지형도는 새

뢰를 줄 수 있는 정치인이 있다면 한국의 정치 지형도는 새롭게 재편될 수 있다.

롭게 재편될 수 있다. 한국의 양극화 조짐이 심상치 않은 상황이다. 피케티가 말했듯 자산소득, 한국의 상황에서는 특히 토 지 불로소득이 양극화의 중심에 있다. 초등학생이 장래희망으로‘임대업’ 을 말하는 지금의 한국은 토지를 많이 가진 계층과 내 집이 있는 땅밖에 없는 계층, 땅도 없는 계층으로 새롭게 재편되고 있다. 지대 기본소득은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 기득권층인 토지 독과점 계층을 격리시키고 토지가 없는 중산 층과 노동소득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중산층을 다시 진보진영으로 부를 수 있는 와일드카드가 될 수 있다. 보수진영은 지금도 LTV, DTI 완화 등 집값을 떠받치는 일에 골몰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세력을 확보하는 데 부동산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진보진영도 부동산이라는 조커를 적극 활용해 새로운 국면을 만들 기회가 도래하고 있다. 지금 토지 불로소득을 활용한 정교한 정책과 신뢰감 있는 정치인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1) 남기업(2012),“지대 기본소득의 잠재력과 마르크스의 착취론” , 토지+자유 연구 12호, 토지+자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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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시대에도 세제 개편안은 발표 나흘 만에 뒤집히곤 한다. (사진: 구글)

특집 / 불로소득 공화국

소득세를 강화해야 소득세제 자체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소득불평등을 해소할 수도 없고, 복지재원을 마련하기도 어렵다. 소득세, 법인세 이 두 세제를 개혁하 지 않고서는 소득불평등 해소와 복지지출 마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다.

김정진 변호사, 서울 영등포 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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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불평등 해소 효과는 세계 꼴찌 수준 애초에 청탁을 받은 주제는 자산관련 과세에 관한 것이었으나 현행 세제가 유독 자산관련 과세만 문제 된다고 보기는 어려워 세제, 특히 소득세제 전반의 문제점을 짚어보는 것이 적절하다. 특히 일정한 액수 이상의 소득은 사업이나 노동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소득세의 경우 일정한 액수 이상의 소 득에 부과되는 소득세는 자산관련 과세 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소득세의 문제점은 자산관련 세제의 문제점과 연 결된다. 한국 세제는 GDP 대비 전체 세금 규모도 낮을 뿐만 아니라 소득불평등을

한국 세제는 GDP 대비 전체 세금 규모도 낮을 뿐만 아니라 소득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수단 인 GDP 대비 소득세제의 비중도 낮은 결과 소 득불평등 해소 효과가 전혀 없다.

해소할 수 있는 수단인 GDP 대비 소득 세제의 비중도 낮은 결과 소득불평등 해소 효과가 전혀 없다는 것이 기본적 문제점이다. OECD에서 매년 발간하는 조세수입에 대한 보고서인“Revenue Statistics” 에 의하면1) 2011년도 한국의 GDP 대비 국민 부담률(세금+사회보험료)은 25.9%로 34개국 중 30위이며, GDP대비 소득세(소득세+법인세) 부담률은 7.8% 로 34개국 중 24위다. 더욱 심각한 것은 얼마 전 국회예산정책처에서 2010년 OECD 국가의 세전-세후 지니계수(0이면 극단적 평등, 1이면 극단적 불평등)를 분석한 결과 31개국 중 한국의 세전 지니계수와 세후 지니계수의 차이가 0.02에 불과하여 세제를 통한 소득불평등 해소 효과 순위가 30번째에 불과하였다.2)

조세부담률 8%의 차이가 복지국가의 차이 현재 한국의 소득불평등은 자산불평등에 기인하고, 자산불평등은 부동산 불평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부동산 불평등을 해소하는 수단은 세제 이외에도 금융 및 각종 직접 규제, 주택공급 정책 등 다양 한 수단에 의하여 좌우된다고 할 수 있지만 소득불평등은 직접적으로 세제에 의하여 해결할 수 있다. 특 히 확보된 세수로 사회복지지출에 투여한다면 사람들의 불평등은 그만큼 해소되는 것이기에 대개의 복지 국가들은 과세단계에서 소득불평등을 완화시키고 복지지출 단계에서 다시 한 번 그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만약에 2011년도 기준으로 한국이 세금을 OECD 평균만큼 걷는다고 하면 GDP대비 8.2%(=OECD 평 균 34.1%-한국 평균 25.9%)를 더 걷어야 하고, 2011년도 한국의 GDP를 1200조 정도라고 할 때 약 100조 (=1200조*8.2%) 정도의 추가세수가 가능하다. 결국 이 8%의 차이가 쉽게 말하면 복지국가이냐 아니냐의 1) OECD,“Revenue Statistics 1965-2012” , 2014, pp. 25~27 2) 국회예산정책처,“조세의 이해화 쟁점 V. 통계편” , 2014, pp.6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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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자산 격차(왼쪽), 계층별 자산 및 순자산액 평균 비교(오른쪽) (자료 : 통계청)

차이고 이는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 구조의 변화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유럽에서 노동 당이 계속 3당이었던 아일랜드가 조세부담률 최하위라는 것(2011년도 27.9%), 사회민주당이나 노동당이 거의 없거나 미미한 미국(2011년도 24.0%, 일본 28.6%) 등이 조세부담률이 낮은 것은 조세부담률이라고 하 는 것이 한 나라의 GDP 규모뿐만 아니라 정치적 조건에도 영향을 받는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소득세와 법인세 개혁해야 소득세제 일반 외에 자산관련 과세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고 할 수는 있으나 소득세 일반이 가지 고 있는 문제에 비하면 이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속세, 증여세의 경우 노무현 정부 이후로 완 전포괄주의가 도입되어 제도 자체의 큰 문제점이 있다고 할 수 없으며 세수규모도 크지 않기 때문에 현재 에서는 주요한 관심사가 될 수 없다. 종합부동산세의 경우 이명박 정부 들어서 대폭 완화시킨 면이 있기 는 하지만 과표현실화가 후퇴되지는 않았고, 이 또한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양도소득세의 경우에도 일부 중과세 제도가 후퇴되기는 하였으나, 실거래가 과세라는 대원칙이 흔들리지 않았고, 양도소득세의 경우 그 세수규모가 부동산 경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크기 때문에 이것 또한 현재 문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는 없다.

차라리 법인세 부담을 올려 그것을 복지지출에 투여하는 것이 가계소득

소득세제 자체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소득불평 등을 해소할 수도 없고, 복지재원을 마련하기도 어 렵다. 현 정부가 사내유보금에 대해서 과세한다고

을 간접적으로 증대시키는 효과가

하여 여론의 일부 기대를 받았으나 대상 기업도 얼

훨씬 클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마 되지 않고, 기존 유보금도 해당사항이 없어 용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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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에 그칠 가능성이 매우 큰데, 차라리 법인세 부담을 올려 그것을 복지지출에 투여하는 것이 가계소득 을 간접적으로 증대시키는 효과가 훨씬 클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즉, 소득세, 법인세 이 두 세제를 개 혁하지 않고서는 소득불평등 해소와 복지지출 마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다.

비과세, 감면 대폭 정리 가장 손쉬운 것은 비과세, 감면을 대폭 정리하는 것이다. 특히 법인세의 경우 명목세율과 달리 실효세 율이 얼마 되지 않고, 실제 투자와 별로 관련없는 항목에 대해서까지 비과세, 감면조치를 유지하고 있는 데 과감한 정리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가 없지만 해당 집단들이 매우 반발하고 있어 실 제로 국회에서 그 성과가 나지 않고 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세금을 깎아주던 임시투자세액공제제도도 고 용창출투자세액공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다만 요건에 상시근로자 수를 감소시키지 않은 경우만 추가 한 것에 불과한 실정이다. 다음으로 소득세나 법인세율 인상을 점진적으로 검토하여야 한다. 1970년대 이후 자본이동의 자유화 로 인하여 세계 각국에서 전체적으로 세율 인하가 이루어졌으나 이제는 전세계적으로 이에 대해서 검토 가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행 소득세 최고세율 38%, 법인세 최고세율 22%를 소득 세는 40%대, 법인세는 25~26%대로 상향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IMF 이전 수준으로 회복 하는 것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현행 소득세의 면세점이 너무 높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근로소득세를 내는 사람의 비중 및 액수가 너무 적다는 것 이 한국의 세제특징 중이 하나이다. 이 부분 에 대해서는 진보진영에서도 발상의 전환을

근로소득세를 내는 사람의 비중 및 액수가 너무 적다는 것이 한국의 세제특징 중의 하나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진보진영에 서도 발상의 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세법 상 근로소득 의 범위는 매우 넓어서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저임금노동자의 소득뿐만 아니라 고임금을 받는 상층 노동 자 및 거의 대기업 임원급에 해당하는 이들의 소득까지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면세점을 낮추는 것이 저소 득 노동자에 대한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임금을 받는 고소득 노동자 및 임원급들의 보수에 대 한 필요, 적절한 과세가 가능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근로소득공제 및 세액공제에 대해 서 전체적으로 적절한 개편이 필요하다.

사회보험도 세금이다 사회보험도 결국에는 세금의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이에 대한 개선도 필요하다. 유럽 국가에서는 사회 특집 불로소득 공화국 27


보험료 부담에서 있어서 한국처럼 사용 자:노동자의 비율을 5:5로 하는 것이 아니라 6:4로 하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보인다. 건강보험료나 각종 사회보험료 에 대해서도 이러한 기준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이는 실제로 소득불평 등 해소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소득세의 회피나 탈루 등을 고려할 때 전지구적인 부유세는 유의미하다.

전지구적 부유세, 공상이 아니다 전지구적 불평등에 대해서 피케티가 한 제안은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니다.3) 그는 누진적 소득세의 경험 을 검토한 뒤 전지구적 부유세를 주장한 바 있다. 부유세는 소득세보다 더 오래된 세이다. 다만, 전세계적 인 국가가 당장에 합의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그 자신도 유토피아라는 표현을 쓰기는 하였으나 소득의 정 의가 다소 모호하기 때문에 소득세의 회피나 탈루 등을 고려할 때 전지구적인 부유세가 유의미하다는 것 이고, 유럽차원의 부유세는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한다. 전지구적인 부유세가 다소 공상적으로 들리기는 하다. 그러나, 토빈세가 처음 나왔을 때는 그야말로 공상으로 들렸다. 하지만 현재에는 각국이

토빈세가 처음 나왔을 때는 그야말로 공상으 로 들렸다. 하지만 현재에는 각국이 유력한 대안으로 검토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유력한 대안으로 검토하기에까지 이르렀 다. 피케티의 제안도 토빈세처럼 적극적인 대안으로 검토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다만, 그것이 당장에 실현되기는 어렵기 때문에 일국적으로 한국에서는 일단은 소

득세를 강화하는 것이 순서인 것 같다. 이는 자본이동의 자유화에도 불구하고 유럽 각국에서 달성한 방법 이기 때문이다. 뜨거운 관심을 가지고 현재의 문제에 천착하면서도 이상의 끈을 놓치지 않는 것이 모든 분야에서 필요하고 그것은 세금도 마찬가지다.

3) Thomas Picketty,“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 , translated by Arthur Goldhammer, London: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pp. 49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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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미국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 (사진 : 구글)

특집 / 불로소득 공화국

놀려라, 돈이 될지어라 자본은 늘어난 수익으로 고용이나 투자, 연구개발을 늘리기보다는 고배 당, 고이율, 유상감자/구조조정 후 자산매각 등을 통해 자본의 불로소득만 남기고 사라졌다. 자본의 불로소득은 결국 다른 누군가의 손해를 의미하 고, 직접적 형태든 (세금 등을 통한) 간접적 형태든 그 피해자는 늘 노동자 서민이다.

홍원표 정책실장

특집 불로소득 공화국 29


건전한 자본? 불량 자본?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장사’ 를 해야 돈을 번다. 뭔가를 만들거나 혹은 팔거나, 아 니면 서비스를 제공해서 이윤을 남긴다. 어 쨌거나 생산적 활동을 해야 돈이 된다. 교과 서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꼭 그럴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장사’ 를 해야 돈을 번다. 뭔가를 만들거나 혹은 팔거나, 아니면 서비스를 제공해서 이윤을 남긴다. 교과서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꼭 그럴까?

1997년, 외환위기로 국가부도 사태를 겪 었던 IMF 구제금융 사태의 원인으로 많은 이들이‘해지펀드’ 를 지목했다. 해지펀드는 소수의 투자자로 거액의 자본을 형성한 뒤 파생상품이나 환투기 등 금융상품에 대한 단기 투자로 고수익을 창출하는 자본 운용 방식이다. 한국의 IMF 사태나 같은 해 태국의 바트화 폭락 사태, 영국과 아르헨티나에 대한 금융 공 격처럼 한 나라의 경제를 휘청거리게 할 정도의 위력을 보여 왔다. 일국 경제의 근간을 흔들 정도의 공격성으로 인해 해지펀드에 대해서는 주류경제학에서조차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물론 보다 신실한 주류경제학자들은 해지펀드가 자본의 유동성과 효율성을 높여 오 히려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며, 해지펀드의 공격을 받았던 국가의 경제 위기는 무리한 경기부양, 화 폐가치 왜곡 등 시장에 대한 과도한 정치적 개입이 원인이지 해지펀드의 공격 탓이 아니라 주장하기도 한 다. 주류경제학들의 논쟁이 어찌 결론이 났든 호되게 IMF를 겪었던 우리 사회는 해지펀드에 대해‘부당한 돈벌이’혹은‘위험한 돈’ 이라는 인식 정도는 갖고 있는 듯하다.‘위험한 돈’ 이라는 인식의 반대편에는 당 연하게도‘건전한 돈’ 에 대한 환상이 있다. 이른바‘외국인직접투자(Foreign Direct Investment. FDI)’ 가그 것인데,‘직접’투자라는 명칭으로 인해 공장을 막 짓거나 어마무시한 생산설비를 바다 건너에서 싣고 오 는 상상이 뒤따른다. 하지만 이‘직접’투자는 사실 직접이라기보다는 (상대적) 장기를 의미한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KOTRA)는 FDI를‘외국인이 대한민국 법인 혹은 대한민국 국민이 영위하는 기업과 지속적인 경제관계를

수립할 목적으로 그 기업의 주식 또는 지분을 소유하거나, 해외모기업 등이 외국인투자기업에 5년 이상 의 장기차관을 대부하거나, 외국인이 비영리법인에 대해 출연하는 것’ 으로,‘단기적인 이익을 취득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식의 매매차익을 노리는 주식투자(Portfolio Investment)와는 다른 개념’ 이라고 설명한다. 단기 매매차익을 노리는 투자는 아니지만,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직접투자는 대부분 공장을 짓거나 생 산설비를 증설하는 게 아니라 포트폴리오 투자와 마찬가지로 주식을 사거나, 돈을 빌려 주는 일이다. 물 론 기업은 주식을 발행한 돈(또는 주식 지분을 매각한 돈)으로 자본을 형성해 공장을 짓거나, 빌린 돈으로 설 비를 증설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체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론스타 외환은행 먹튀 행위다. 론스타 자본은 2003년 외환은행을 2조 30


1,548억 원에 인수해, 7년 동안 지분매각 1조 1,928억 원, 배당 1조 2,130억 원, 지분처분 4조 6,888억 원 으로 총 4조 9,398억 원의 이익을 봤다. 론스타는 대표적인 사모펀드지만, 외환은행 매각과 관련한 핵심 쟁점 중 하나는 인수 당시 자본의 성격이 산업자본인가 아닌가였다. 아직까지 거리에서 싸우고 있는 쌍용자동차 역시 마찬가지다. 상하이 자본은 회계장부까지 조작해 구 조조정을 시도해 격렬한 노사 갈등으로 막대한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 그리고 기술 유출 의혹과 함께 철수했다. 지하철 9호선에 참여한 맥쿼리는 자신이 투자한 회사에 자금을 대출해주고 고액의 이자율을 책정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챙겨 나갔다. 서울시메트로9호선이 금융감독원에 낸‘2011년 감사보고서’ 를 보면, 서울시로부터 2010년분 운임수입 보조금으로 326억 원을 받고도 당기순손실 466억 원을 기록했 다. 영업손실은 26억 원에 불과했지만 이자비용으로 461억 원을 지출했기 때문이다. 국민 세금으로 맥쿼 리의 이자 수익을 보장한 꼴이다. 2002년 민영화된 KT의 경우에는 주주 배당률이 급격히 높아져 2003년 이후에는 평균 50% 이상의 배 당률을 보였으며 2009년에는 94.2%까지 급등했다. 심지어 영업이익이 저조한 해에는 부동산 등 자산을 매각하여 이를 배당 가능한 수익에 포함해 배당액을 높였다. KT가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은 과거 한국통 신 시절 전화국이 있던 도심의 소위 노른자위 땅으로, 이는 통신이라는 공공사업을 위해 국가가 제공한 땅이었다. 반면, KT의 설비 투자율은 2000년 매출액 대비 34.08%에서 2010년 14.12%로, 연구개발비는 매출액 대비 5.72%에서 2.58%로 급감했다. 설비투자와 연구개발은 고용 창출과 직결된 기업 활동이다. <KT 주주 배당률 추이> 연도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배당률(%)

20.6

10.8

50.8

50.4

63.8

33.4

42.5

50.3

94.2

50.0

자본의 불로소득을 위해 노동자 서민이 고통 받는 사례는 이외에도 수없이 많다. 위니아만도는 기업 인수 이후 유상감자와 고배당을 통해 투자 수익을 챙긴 후 자산매각과 구조조정을 통해 3배 이상의 차익 을 남기고 철수했다. 발레오공조코리아는 당기순이익이 아닌‘매출액의 2.4%’ 를 수수료로 책정해 투자 수익을 챙긴 후 2009년 일방적 구조조정과 공장 청산을 통보했다. 경기도와 5천만 달러 투자양해각서를 체결하고 한일유압을 인수한 파카하니핀 자본은 150%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경영상의 이유로 일방적 구 조조정·정리해고를 단행했다. 이들 모두는‘직접 투자’ 였지만, 열심히 번 돈으로 고용이나 투자, 연구개발을 늘리기보다는 고배당, 고이율, 유상감자/구조조정 후 자산매각 등을 통해 자본의 불로소득만 남기고 사라졌다. 자본의 불로소득 은 결국 다른 누군가의 손해를 의미하고, 직접적 형태든 (세금 등을 통한) 간접적 형태든 그 피해자는 늘 노 동자 서민이다.

특집 불로소득 공화국 31


‘배당’ 으로‘환류’ 하면 가계 소득이‘증대’ 할까? 지난 7월 24일 박근혜 정부의 소위‘새 경제팀’ 이 내수활성화를 중심으로 한 경제정책방향을 제시했 고, 그 주요 수단으로 근로소득 증대세제, 기업소득 환류세제, 배당소득 증대세제다. 이 세가지 세제 개편 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막대한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기업소득 환류세제)를 통해 자본 운용을 압박하고, 임금 인상(근로소득 증대세제)과 주주 배당(배당소득 증대세제) 감세로 사용처를 유도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새 경제팀의 경제정책의 일부일 뿐이며, 40여 쪽에 달하는 주요 정책은 대부 분 온갖 규제 완화와 기업 세제 혜택, 민영화 정책으로 채워져 있다. 박근혜 정부의 새 경제팀이 이러한 정책을 제시한 배경에는 과도한 자본/노동 소득 불균형에 있다. 2001년 기업들의 사내유보율은 4.6%에 불과했지만 2002년 11.9%로 급증한 뒤 2최근에는 20%대까지 증 가했다. 금융사를 제외한 국내 10대 그룹만의 사내유보금이 2013년 6월 기준으로 무려 477조원에 이른 다. 이는 한 해 정부 예산의 1.5배에 달하는 돈이다. 이처럼 기업의 사내유보금 규모가 커

2000년 이후 기업의 소득은 두 배 증가한데 반해 가계소득은 1/4수준으로 급락하였다.

진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경제 성장의 과실을 기업이 독차지하다시피 했기 때문 이다. 산업연구원이 발간한《한국경제의

한국 자본이 챙겨온 이윤은 우리 사회의 평

가계와 기업간 소득성장 불균형 문제》 에

균을 훨씬 웃돌았던 셈이다.

따르면 외환위기 이전에는 가계와 기업의 가처분소득은 비슷한 증가세를 보였으나,

2000년 이후 기업의 소득은 두 배 증가한데 반해 가계소득은 1/4수준으로 급락하였다. 최근 유행하는 피 케티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국 자본이 챙겨온 이윤은 우리 사회의 평균을 훨씬 웃돌았던 셈이다.

<그림> 가계와 기업의 소득증가율 (순가처분소득 기준)

소득이 높으면 모아두는 돈도 늘어나게 되지만, 한국 기업의 사내유보금 규모는 경제성장 과실의 불균 32


등 배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돈을 기업에 쌓아두게 만든 것은 세법과 상관 있다. 법인세가 소득세보 다 낮기 때문이다. 3대 세습이 가능할 정도로 지배구조가 집중된 상황에서 기업에 쌓여 있는 돈은 사실상 대주주가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주주의 입장에서는 낮은 법인세를 이용해 기업에 쌓아 두면 굳이 세금을 더 낼 필요 없이 자금을 운용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내유보금 과세를 통해‘배당’ 이나‘임금 인상’ 으로 돈의 흐름을‘환류’ 시킨다고 해서 가계 소득의 증가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기업 유보금 역시 대기업으로 편향되어 있고, 설령 기업유보금 과세가 임금 인상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대다수 중소기업 노동자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고배당 유인 역시 마찬가지다. 2012년 현재 상장 주식의 32%는 외국인이, 25%는 일반법인이, 15%는 기관투자가 소유하고 있고,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경우는 23%에 불과하다. 23%의 개인에는 기업 대주주들이 포함되어 있으 며, 대부분 상대적 고소득자들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고배당 유인은 가계 소득 증대와 내수 촉진으로 이 어지기보다는 오히려 소득격차를 확대시키고, 실물경제 성과보다는 고배당 수익을 노리는 투기 자본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게 될 것이다.

법인세를 높이고, 기업이익분배법을 도입하라 기업유보금이 문제라면 유보금을 적립하는 것이 불리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그것은 박근혜 정부처 럼 유보금에 과세하는 방식이 될 수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법인세를 높여 기업이 임금이든 설비 투 자든, 고용확대든 더 쓰게 만들어야 한다. 또한 유보금 사용이 진정 가계 소득으로 이어지길 원한다면, 주주 배당률을 높일 것이 아니라 제한을 가해야 한다. 노동당은 이미 지난 2012년 총선에서 기업의 주주 배당이 평년보다 높거나, 동종 업계 평균 의 2배를 초과할 경우 초과 이익배당금에 상응하는 사회보장기금 납부를 의무화한‘기업이익분배법’ 을 제안한 바 있다. 기업이 주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려면, 그만큼 사회적 책임도 분담하라는 취지다. 기업의 경제적 존재 이유는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지만, 기업의 사회 적 존재 이유는 고용과 납세다. 자본주 의 사회에서 개별 기업이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 연하지만, 정부가 기업에게 물어야 할

지난 시기 한국 정부는 누가 집권하든‘기업하 기 좋은 나라’ 라는 구호 아래 친기업 정책으로 자본/노동 소득의 격차를 확대시켜 왔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불균형은 그 결과다.

것은 기업의 사회적 존재 이유다. 하지 만 지난 시기 한국 정부는 누가 집권하든‘기업하기 좋은 나라’ 라는 구호 아래 친기업 정책으로 자본/노동 소득의 격차를 확대시켜 왔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불균형은 그 결과다. 불균형을 시정하려거든 우선 반대쪽으로 구부려야 한다. 특집 불로소득 공화국 33


총자본과 총노동 사이의 소득분배는 본질적으로 불공정하고 불평등하다. (사진 : 구글)

특집 / 불로소득 공화국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소득의 분배와 재분배 단계적으로 여러 부분에서 증세를 해야 하고 4대 보험료를 징수하는 일을 확대해야 한다. 물론 단계적으로 국민들의 열렬한 정치적 지지를 조심스럽게 기획해야 가능한 일이다.

정승일 사회민주주의센터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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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요즘에는 많이 수그러들었지만 2년 전 2012년에만 해도‘경제민주화’ 와‘복지국가’ 라는 두 키워드는 당시의 총선과 대통령 선거를 모두 이끈 정치적 화두였다. 이명박 정부가 시종일관 외쳐댄‘시장주의’ 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정신 또는 새로운 대안경제 모델로서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가 제시된 것이다. 여기서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불로소득’ 과‘근로소득, 그리고 소득의 분배와 재분배의 관점에서 이해해보겠다.

자유주의 관점의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경제민주화 또는 경제민주주의부터 이야기해보자. 먼저 경제민주화란 무엇인가? 이 개념에 관해서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경제민주화를‘공정한 시장질서’ 를 구축하는 일로 이해하는 시각이다. 주로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경제민주화를 이렇게 이해한다. 이런 시각에서 경제민주화는‘완전한 경쟁 적 시장’ 을 구축하는 일이고, 또한 이것을 위해‘경제력의 집중’ 을 완화하거나 축소하는 일로 이해한다. 이 런 시각의 대표적 인물이 장하성, 정운찬, 김광수, 선대인 등이다. 2년 전 선거에서 안철수와 문재인 후보 를 도운 모든 진보·개혁 경제학자들 역시 경제민주화를 공정한 시장질서를 확립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경제민주화를 고전파와 신고전파 경제학의 자유주의 프레임으로 이해하는 이런 사람들은 완전한 경쟁 적 시장이 구축됐을 경우(이것을‘기회의 평등’ 이라 부른다) 자본, 노동, 토지 같은 생산요소의 소유자들 사이 에 매우 공정하고 공평한 소득분배가 달성되며 따라서‘불로소득은 없다’

경제민주화를 고전파와 신고전파 경제학의 자유

고 말한다. 불로소득은 오로지 시장

주의 프레임으로 이해하는 이런 사람들은‘불로

질서가‘왜곡’ 됐을 때만 나타난다. 시 장이 왜곡돼 불로소득이 발생하는, 곧 불공정거래의 대표적인 경우는 경

소득은 없다’ 고 말한다. 불로소득은 오로지 시장 질서가‘왜곡’ 됐을 때만 나타난다.

제력이 재벌그룹으로 집중되는 것, 대기업이 수요를 독점하는 것(그래서 하청 단가가 인하하는 것), 노동조합, 특히 산별노조가 존재하는 것, 국 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재벌그룹을 개혁해 재벌그룹에 집중되는 경제력을 축 소시키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할 수 있는 정책을 시행해 하청 단가를 인하하라는 압력을 제거하고, 대기업 정규직의 노동조합을 약화시키거나 해체시키고, 관치 경제를 축소하거나 모피아 같은 존재를 없 애는 일이 불로소득을 없애는 데, 다시 말해 경제민주화를 달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또한 이렇게 시장을 개혁하면 누구나 1차 소득분배 때 공정하게 이익을 받을 수 있는 까닭에 2차 소득분배, 곧 증세와 복지재정 등 재분재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특집 불로소득 공화국 35


사회민주주의 관점의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반면 사회민주주의는 경제민주화를 다르게 본다. 경제민주주의라는 용어는 1920년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처음으로 언급됐다. 그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과 북유럽 사회민주당은 스탈린의 전면 국유 화와 명령식 계획경제에 대비되는 민주주의적 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의 프레임에서 경제민주화 를 체계화했다. 여기서 경제민주주의(Wirtschaftsdemokratie)는 총자본에 맞서는 총노동의 권리와 권력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노동조합이 산업별로 그리고 전국적으로 조직돼 사용자 쪽하고 맞설 권리, 그리고 대 기업 이사회에 노동자들이 자신의 대표를 직접 선거로 선출해 내보낼 권리로 이해됐다. 대기업을 사회화 하는 방법으로 국유화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이사회를 비롯한 회사의 각종 의사결정 권력기구에 노동 자 대표가 참여해 직접‘노동자’ 를 통제하는 일을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또한 거시경제 차원에 서는 국민 경제의 민주적 통제를 위한 각종 공적 기구들, 예를 들어 중앙은행과 금융 감독 기구의 이사회 에 노동조합과 시민의 대표가 참여하는 것을 경제민주주의의 하나로 추진했다. 이런 시각에서는 불로소득이‘시장의

사회민주주의적 시각에서는 불로소득이‘시장 의 왜곡’때문에 발생한다고 보지 않는다. 모든 불로소득은 총노동에 관한 총자본의 자본주의 적 착취에서 비롯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왜곡’때문에 발생한다고 보지 않는다. 모든 불로소득은 총노동에 관한 총자본 의 자본주의적 착취에서 비롯된다고 보 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자유주의적 으로 재벌을 개혁해도, 예를 들어 삼성 그룹이 축소되거나 해체되고 그 결과 삼

성전자와 삼성생명이 그룹에서 분리되거나 독립된다고 해도 신규 주주와 경영진이 자발적으로 노동자의 임금과 하청 단가를 인상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대단한 착각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자유주의 학자와 정 치인들은 이것을 기대한다. 총자본과 총노동 사이의 소득분배는 본질적으로 불공정하고 불평등하다. 이런 본질적 특성을 사람들 은‘착취’ 라고 부른다. 불로소득을 줄이고 근로소득을 늘리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과제는 경제력의 집중 을 완화하거나 축소하는 일보다 자본주의적 착취를 완화하거나 축소하는 일이다.

2. 공정한 시장질서는 1차 소득분배를 얼마나 개선할까? 흔히 경제민주화는 1차 소득분배에 관한 것인데 반해 복지국가는 2차 소득분배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 다. 곧 경제민주화란 임금 인상과 비정규직 처우 개선, 하청 단가 인상과 대리점 수탈 규제처럼 시장과 기 업에서 일어나는 본원적인 소득분배(월급, 이윤, 하청 단가)에 관한 것이고, 복지국가란‘세금을 거두어 사 36


회복지 늘리는 것’ , 다시 말해 소득의 재분배로 이해된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일단 이런 구분을 인정 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해보자. 먼저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중시하는‘공정한 시장질서 구축’ 에 성공할 경우 과연 얼마의 소득이 대자 본에서 시민한테 분배될까? 이것을 알려면 (1) 대기업 전체의 연간 본원적 소득(법인소득)을 알아야 한다. 또한 그중 (2) 얼마만큼이 공정한 시장질서 구축에 따른 결과로서 본원적인 소득분배로 지급될 수 있는지 를 추정해야 한다. 먼저 2010~2012년 3년 동안 727개 상장회사(대부분 대기업) 전체의 연간 영업이익 총계는 120조 원에 서 130조 원 사이였고, 순이익(법인소득)은 80조 원에서 100조 원 사이였다. 그렇다면 순이익 중 얼마만큼 의 기업이익(법인소득)이 하청 단가 인상을 위한 공정거래법 개정 등을 통해 중소기업의 이익으로 트리클 다운(trickle down)되게 강제할 수 있을까? 중요한 사실은 대부분의 상장회사들의 수익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다. 10대 재벌그룹 소속 상장회 사가 총영업이익의 75%(90~100조 원), 그 중 총순이익의 78%(60~75조 원)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삼성 전자가 있는 삼성그룹과 현대차와 기아차가 있는 현대자동차그룹의 법인소득이 전체 상장회사 법인소득 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나머지 재벌그룹 계열사와 독립 대기업들의 수익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이런 상황은 재벌그룹을 개혁하고 대 기업과 중소기업이 동반성장하는 등의 자유주의적 경제민주화가 아무리 잘 구 현된다 해도 소득이 연 10~20조 원밖에 추가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정규직과 비정

재벌그룹을 개혁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동반성장하는 등의 자유주의적 경제민주화가 아무리 잘 구현된다 해도 소득이 연 10~20조 원밖에 추가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규직을 포함한 노동자(정규직+ 비정규직) 의 임금과 하청 단가를 올리는 트리클 다운 효과가 가능할까? 과연 이 정도의 액수로 서민들의 살림살이 가 획기적으로 나아질 수 있을까?

대자본 대 중소·영세자본 사이의 대결인가, 총자본 대 총노동 사이의 대결인가?

노동부의 공식 통계를 따르면 현재 전체 취업 노동자의 1/3인 600만 명가량이 비정규직이다. 그리고 취업 노동자들의 월평균 소득을 150만 원이라고 가정할 때, 월소득을 대기업 정규직 수준인 월 300만 원 정도로 높이는 데 필요한 비용은 연간 약 110조 원이다. 한국 사회가 직면한 경제민주화의 핵심 과제는 어 떻게 연 110조 원의 소득을 총자본 쪽에서 총노동 쪽으로 추가적으로 분배되게 만들 것인가이다. 앞서 살 펴봤듯이 자유주의적 경제민주화 프레임은 단지 연간 10~20조 원의 소득을 더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다. 더구나 그 소득이 모두 다 노동자한테 분배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중소기 특집 불로소득 공화국 37


업과 영세기업, 식당 등에서 인권과 노동권, 노동조합권이 야만적으로 유린되고 있기 때문이다. 10~20조 원마저 사업주들의 호주머니로 고스란히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이런 현실에서는‘알바(아르바이트 노동자)’ 와 비정규직, 중소기업, 영세기업의 노동자를 모두 포함하는 전면적이고 포괄적인 노동운동과 그 노동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새로운 집권 세력의 입법·사법· 행정이 없으면 총노동이 총자본에 자기의 권리와 권력을 획득할 수 없다. 연 10~20조 원, 나아가 연 110 조 원의 소득을 총노동 쪽에 유리하게 분배하는 일은 꿈도 꿀 수 없다는 것이다.

주주자본주의의 불로소득 증가, 사내유보금 과세

경제민주화를 공정한 시장질서를 구축하는 일로 이해하는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아이디얼한 경쟁적 시장질서와 매우 유사한 자본시장 특히, 주식시장을 매우 공정하고 민주적인 시장으로 묘사한다. 따라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주식시장이 대기업의 주인 노릇을 하는 통치 체제를 매우 효율적이고 공정하고 공평한 곳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비판적 학자들은 그런 주주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가 월스트 리트의 글로벌 금융 패권과 직결돼 있다고 비판한다. 김대중 정부부터 박근혜 정권까지 역대 정권은 미국의 주주자본주의적 기업 통치 구조와 월스트리트 형 금융시장을 한국 기업과 금융의 미래로 제시했다. 정권은 기업의 지배 구조와 금융 산업을 개혁하자고 말했지만, 한국 기업은 현금배당과 자사주 매입·소각 형태로 법인소득을 주식 투자자들에게 적극 분배 해왔다. 현금배당에 자사주 매입·소각 총액을 더한 것을 당기순이익으로 나눈 것을‘주주이익 환원율’ 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대주주가 없고 소액주주가 판치는 방향으로 사영화된 KT와 KT&G, 포스코 같은 과거 공기업들은 주주이익 환원율이 연 50%에 달한다. 삼성전자 등 100대 글로벌 상장회사 들도 모두 비슷하게 주주를 중시하는 형태로 경영에 나서고 있다. 그 결과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상장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상장회사 720개에서 연 30~50조 원이 현금배당과 자사주를 매입 하고 소각하는 데 사용됐다. 그 정도의 금액만 큼 불로소득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회사 720개에서 연 30~50조 원이 현금배 당과 자사주를 매입하고 소각하는 데 사 용됐다. 이 금액은 상장회사의 순이익인 80~100조 원의 40~50% 정도다. 투자자 들과 재벌총수 일가들은 그 정도의 금액 만큼 불로소득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최근 수익성이 저하하면서 상장회사들의 주주이익 환원율도 약간 줄었지만, 글로벌 금융 위기가 발발 한 뒤에도 여전히 순이익의 30% 내외를 주주이익으로 환원하고 있다. 만약 매년 30~50조 원의 액수가 주주이익 환원이 아니라 노동자(원금 : 종업원) 임금 인상 등의 통로를 통해 총노동 쪽 소득으로 추가될 수 있다면 불로소득을 크게 줄일 수 있다. 38


최근 박근혜 정부의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대기업들이 쌓아놓은 높은 사내유보금에 세금을 부여하겠다 고 발표했다. 경기가 좋지 않으니 대기업들은 사내유보금을 더 적립하지 말고 주주배당, 노동자(원금: 종 업원) 임금 인상, 생산적 투자 증대에 나서라는 취지였다. 그런데 그 발표 이후 주주배당 확대를 환영하는 국내외 투자자들의 환호소리만 요란할 뿐, 임금 인상이나 투자 확대에 관한 논의는 감감 무소식이다.

3.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의 새로운 노선 경제민주화: 연 60~110조 원의 1차 소득분배

앞서 말했듯이, 사회민주주의와 민주적 사회주의는 총자본에 맞서는 총노동의 권리와 권력을 강화함 으로써 총노동에 유리한 방향으로 1차 소득인 시장소득을 분배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자본과 노 동 사이의 1차적 소득분배를 얼마만큼 개선해야 할 것인가? 이런 질문은 한국은행의 국민계정 통계를 분 석해 답할 수 있다. 2012년 1년 동안의 총부가가치생산(국내총생산 : GDP)은 1,273조 원이다. 그 중 총노동의 몫(A)인 근로 소득(피용자 보수)은 583.4조 원이고, 총자본의 몫(B)인 자본소득(영업 잉여)은 384.2조 원이다. 그리고 정 부의 몫인 세금 등이 140조 원이다. 나머지 164.3조 원은 고정자본(감가상각)으로 사용됐다. (단위 : 원)

피용자 보수(근로소득): A

583.4 조

영업 잉여(자본소득): B

384.2 조

세금(순생산과 수입에 관한 정부의 소득)

140.6 조

고정자본

164.3 조

합계

1272.5 조

여기서 정부소득을 제외하고 총노동 대비 총자본의 소득분배율을‘근로소득분배율’ 이라고 부른다. 근 로소득분배율=A/A+B=0.60, 곧 60%이다. 한국은 식당과 카페, 구멍가게 등 자영업자의 소득이 영업 잉 여(B)에 포함돼 있는데, 그 액수는 약 90조 원으로 추정된다. 신자유주의적 시장 개혁의 결과로 대기업에 서 정리해고나 명예퇴직, 희망퇴직으로 밀려난 수백만 명이 울며 겨자 먹기로 자영업 창업에 나섰다. 그 결과 한국은 OECD 평균보다 두 배나 자영업자들이 많다. 한국의 현재 근로소득분배율은 60%이다. 여기에 자영업자를 고려하면, 근로소득분배율은 약 64% 가 량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에서 총노동에 가장 유리한 쪽으로 소득이 분배되는 스웨덴의 근로 소득분배율은 지난 30년 평균 75%이다. 선진국 평균인 독일도 지난 30년을 평균냈을 때 70%이다. 한국이 독일 수준으로 근로소득분배율을 개선하려면 현재 자영업자를 포함한 64%보다 6%를 개선해 야 한다. 이 말은 2012년 기준 약 60조 원(A+B=967조 원 곱하기 6%)의 본원적 소득이 총자본에서 총노동 특집 불로소득 공화국 39


쪽으로 더 분배돼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연 60조 원이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에 사용 돼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달성하려면 자유주의적 재벌 개혁과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 노동조합 지키기 운동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정리해고와 명예퇴직, 희망퇴직을 저지하고, 비정규직을 줄이고 권리 를 찾고, 산별교섭과 산별노조를 법적으로 의무화하는 등 총자본에 맞서는 총노동의 권리와 협상력이 획 기적으로 강화되는 질적으로 새로운 경제민주주의가 필수적이다. 한국이 스웨덴 수준의 근로소득분배율을 달성하려면 지금보다 11%를 개선해야 하는데, 이것은 2012 년 기준 약 106조 원이 임금 인상 등의 방법을 통해 총자본 쪽에서 총노동 쪽으로 추가 분배돼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앞서 우리는 6백만 명에 이르는 저임금 비정규직의 임금을 대기업 정규직 수준으로 높이려면 연 110조 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보듯이 스웨덴 수준의 근로소득 분배를 위해서는 그와 비슷 한 연 106조 원이 노동 쪽에 추가 분배돼야 한다.

복지국가 : 연 150~250조 원의 2차 소득분배

더구나 한국이 지금 독일 수준의 복지국가가 되려면 국내총생산 대비 복지예산을 현재의 3배로 늘려 야 한다. 이것은 2012년 기준 약 150조 원이 기존의 복지예산에 새로 추가돼야 한다는 뜻이다. 더구나 스 웨덴 수준의 복지국가로 나아가려면 지금의 5배로 늘려야 하는데, 이런 계산은 연 250조원 이상이 기존 복지예산에 새로 추가돼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렇게 확보되는 연 250조~350조 원의 복지예산을 노 인연금과 아동수당, 공교육, 주택복지와

단계적으로 여러 부분에서 증세를 해야 하고 4대 보험료를 징수하는 일을 확대해야 한다. 물론 단계적으로 국민들의 열렬한 정치적 지 지를 조심스럽게 기획해야 가능한 일이다.

도시계획, 건강보험과 실업수당 등 다양 한 복지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데 사용 해야 한다. 이 모든 추가 예산을 조달하려면 단계 적으로 여러 부분에서 증세를 해야 하고 4대 보험료를 징수하는 일을 확대해야 한

다. 물론 단계적으로 국민들의 열렬한 정치적 지지를 조심스럽게 기획해야 가능한 일이다. 이런 계획은 앞으로 수십 년에 걸친 계획경제 곧‘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 인간개발을 위한 5개년 계획’ 의 수립을 필 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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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진보의 민낯 지방선거에 이어‘미니총선’ 이라 불리던 재보궐 선거도 끝났습니다. 진보정당의 사분오열 속에서 이번에도 전면적 야권연대를 되풀이하는 익숙한 풍경이 연출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야를 막론 하고, 진보정당들 또한 예외없이, 여기저기서 세대 교체론이 터져나오고 있기도 합니다. 선거가 끝난 자리, 갈 곳 잃고 서 있는 진보의 민낯을 집중 조 명합니다.


기획/진보의 민낯

야권연대 vs. 진보재편

7월 재보궐선거는 노동당에는 어이없고 곤혹스러운 시험이 되고 말았다. 정의당 노회찬 전 의원의 난데없는 서울 동작(을) 선거구 출마 때문이었다. 노 전 의원이 2008년부터 근거지로 삼아오고 2012년에 당선된 지역구가 서울 노원(병)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 고, 동작(을)이 진보신당 시절부터 김종철 노동당 동작당협위원장이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해온 곳이라는 것도 진보정치 판에서 알 만한 사 정의당한테 동작(을) 선거구에 출마하는 일은 장기판 어느 곳

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노동당은 정몽준 전 의원이 서울시장 에 도전하면서 급작스레 열린 동작(을) 보궐선거에 자연스럽게 김종철

에 말을 놓을지 결정하는 문제

위원장의 출마를 결정했다. 한데 이곳에 갑자기 정의당이 노회찬 전

일 뿐, 노동당은 전혀 고려 사

의원을 후보로 공천한 것이다.

항이 아니었다.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정연)하고 겨루기를 원한 노동 당은 느닷없이 정의당 후보와도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됐다. 과정은 불 편했고, 결과는 안타까웠다. 정의당은 어쨌든 노동당이 진보정치혁신 회의 추진모임(비록 정식으로 출범한 기구는 아니지만)에서 함께 머리를 맞대며 공동 정책을 의논하고 연대 활동을 모색하는 대상이었다. 그런 당이 노동당과 어떤 사전 협의도 하지 않고 동작(을)을 자신들의 격전 지로 선포했다. 진보정당들 사이의 소통과 연대를 조금이라도 진전시 켜보려고 이제까지 한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돌리는‘신의 한 수’ 였 다. 그 결과 노회찬 후보는 자칭‘야권단일후보’ 까지 됐지만, 결국 낙

장석준 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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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 김종철 후보 역시 2012년 총선 이전으로 돌아가는 성적을 마주해야 했다.


정의당, 야권연대에 명운을 걸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비록 진보정당이 사분오열돼 있다고 하지만, 지난 지방선거를 돌아 보면 분명 서로 대립하는 것은 피하려는 분위기였다. 최소한 노동당과 정의당 사이에는 그런 기류가 대세 였다(물론, 예외인 곳도 있었지만). 따라서 지방선거를 거치며 진보정당운동이 전반적으로 곤경에 처한 현실 을 확인한 상황에서 오히려 이런 분위기를 더욱 강화하려고 노력하는 게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의당 의 선택은 정반대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정의당은 진보정 당들과 관계를 맺는 것보다 다른 목표 와 계획, 전략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

특별히 사악해서 다른 진보정당을 짓밟으려고 했다기보다 그런 문제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었다. 특별히 사악해서 다른 진보정당

정도로 절박한 다른 과제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을 짓밟으려고 했다기보다 그런 문제

새정연과 전면적으로 야권연대를 맺는 것이다.

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절박 한 다른 과제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새정연과 전면적으로 야권연대를 맺는 것이다. 지방선거 때 비교적 소극적으로 대응한 것하고 다르게 정의당은 재보선에 당력을 총동원했다. 재보선 이 실시된 선거구 11곳 중 6곳, 다시 말해 절반이 넘는 곳에 후보를 냈다. 그 중에는 동작(을)의 노회찬 후 보뿐만 아니라 수원의 두 선거구에 출마한 천호선 대표와 이정미 부대표도 포함돼 있었다. 현역 국회의원 을 제외한 당의 간판급 정치인이 총출동한 셈이었다. 이 과정에서 정의당한테 동작(을) 선거구에 출마하 는 일은 장기판 어느 곳에 말을 놓을지 결정하는 문제일 뿐, 노동당은 전혀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이런 총력 대응의 의도는 심상정 원내대표의 입을 통해 공표됐다. 심 의원은 7월 9일 새정연에“야권의 혁신과 재보선 승리” 를 위한“당 대 당 협상” 을 제안했다. 심 의원은“정권교체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대의 를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협력할 자세가 되어 있다” 며 일종의‘반새누리당 연합’ 을 제안했다. 새정연과 정 의당의 후보가 겹치는 선거구에서 후보를 단일화할 수 있게 중앙당 차원의 협상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정치에서 익숙한 풍경이 된 전면적 야권연대를 되풀이하는 일이었다. 보수 야당 인 범민주당과 진보정당들 사이의 전국적인 반새누리당 후보 단일화. 2010년 지방선거 때 처음 등장한 이 정치 관행은 2012년 총선에서 꽃을 활짝 피웠다. 단지 진보 쪽의 주체가 조금씩 바뀌었을 뿐이다. 2012년 에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나뉜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해서 만들어진 통합진보당이 진보 쪽의 단일 창구 노릇을 했다. 2012년 이후 한 동안 이런 야권연대 구조는 와해된 상태였다. 먼저 통합진보당이 총선 이후 곧바로 잔 류 통합진보당과 정의당으로 양분됐다. 그리고 작년에 일어난 이른바‘내란 음모’사건으로 그 중 한 쪽이 제도 정치에서 강제로 추방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런 와중에 안철수 세력의 주도로 재편된 새정연은 통합 진보당과 협력하지 않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야권연대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기획 진보의 민낯 43


이번 재보선에서 정의당의 목표는 야권연 대 구조를 복원하는 것이었다.‘야권’ 은곧 ‘새정연+정의당’ 으로 인식될 테고, 이 위상 은 2016년 총선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이번 재보선에서 정의당의 목표는 야권 연대 구조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이 제는 정의당을 진보 쪽 단일 창구로 부상시 켜서 말이다. 심상정 원내대표의 제안에 새 정연의 반응을 확인하기 전부터 이미 언론 에는 다른 선거구의 자당 후보들을 사퇴시

키는 대가로 동작(을) 노회찬 후보와 수원영통 천호선 후보를‘야권단일후보’ 로 만드는 게 정의당의 복안 이라는 이야기가 새나왔다. 실제로 이런 목표를 쟁취한다면, 정의당으로서는 국회의원을 몇 명 늘리는 수 준을 넘어서는 성과를 얻게 될 것이었다.‘야권’ 은 곧‘새정연+정의당’ 으로 인식될 테고, 이 위상은 2016 년 총선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7월 20일“새정연이‘당 대 당 협상’제의를 거부한 것으로 받아들여” “야권연대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 고 한 심상정 원내대표의 발언은 바로 이런 결의를 담고 있었다. 이 발언의 이면에는 비록 재보선 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정의당 후보들 때문에 새정연의 당선자 숫자가 줄어든다면 그런 상황 역시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다. 이런 결과는 새정연 내부에서 전면적 야권연대를 다시 모 색하게 만드는, 말하자면 새정연을 훈육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목표는 2016년 총선에서 2012년 총선 때의 야권연대 구조를 반복하고 그 구조에서 정의당이 한 쪽 축이 되는 것 이었다. 항상 그렇듯 현실의 역동성은 전략 기획자가 처음 예상한 그림을 뛰어넘었다. 당 대 당 협상이 좌절된 상황에서 노회찬 후보가 던진 승부수에 새정연 기동민 후보가 자진 사퇴라는 뜻밖의 답을 내놓았다. 기동 민 후보가 사퇴하자 마치 미리 결정한 계획이라도 있다는 듯 수원의 정의당 천호선 후보와 이정미 후보가 잇달아 사퇴했다. 중앙당 차원의 협상 없이도 사실상 전면적 야권연대가 이뤄진 셈이었다. 이런 사정은 “정의당 후보가 있는 곳에서는 정의당을, 없는 곳에서는 새정연 후보를 지지해 달라” 는 천호선 대표의 막 판 호소에 잘 나타나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당은 이번 재보선에서 당선자를 한 명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결코 실패 라고만 볼 수는 없다. 정의당은 일단 화제의 중심이 됐고 덩달아 지지율도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더 중요 한 점은 새정연 안에서 정의당과 통합하자는 이야기가 나오는 등 이른바 정의당의‘몸값’ 이 치솟고 있다 는 것이다.

야권연대는 진보정당운동의 독이다 재보선은 끝났다. 이제 돌발 상황 때문에 일어난 감정의 격랑은 자제해야 할 것이다. 정치 조직이라면 당연히 감정보다 이성을 앞세워야 한다. 가슴에 맺힌 게 더 늘어났다고 진보정치 전반을 재편하는 일에 44


손을 떼거나 관심을 거둘 때가 아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렇지만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차가운 이성으로 평가하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바로 재보선 의 정치 지형, 그것도 진보 쪽 지형을 규정한‘전면적 야권연대’전략이다. 이 노선은 적어도 겉으로 볼 때 는 한창 승리를 구가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2016년 총선을 내다보는 진보정당운동한테는 여러 선택 지 중 하나가 아니라 상수 아니냐 는 분위기도 있다. 그러나 진보정당운동한테 이것 은 명백한 오류다. 전면적 야권연

전면적 야권연대는 진보정당운동한테 독이다. 진 보정당은 어느덧 보수야당의 한‘이색’분파로 인

대는 진보정당운동한테 독이다.

식되고, 후보 단일화는 범민주당 안에서 흔히 벌어

잠시의 고통을 잊어보자고 들이키

지는 공천 갈등의 확대판으로 여겨지게 된다.

는 독배다. 굳이 운동권 안에서 익 숙한‘민주대연합’노선을 비판하는 논리들을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 이제 우리는 어떤 예언이나 이론적 단정이 아니라 눈앞에 전개되는 현실의 사태를 통해 문제를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니라 이번 재보선이 야권연대의 문제를 생생히 보여주었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야권연대는 보수야당과 진보정당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아니, 그 경계를 실질적으로 해체 한다. 한 번의 선거도 아니고 선거 때마다 그것도 전국의 모든 선거구에 걸쳐 단일한 후보를 낸다면, 유권

7.30 재보선 당시 동작(을) 지역에서 거리유세 중인 김종철 선본과 노회찬 선본 (사진 : 홍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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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서는 이런 연대를 반복하는 세력들을 자연히‘하나의 정당’ 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반새누리 당’ 을 정체성으로 하는 단일 정당으로 말이다. 진보정당은 어느덧 보수야당의 한‘이색’분파로 인식되고, 후보 단일화는 범민주당 안에서 흔히 벌어지는 공천 갈등의 확대판으로 여겨지게 된다. 이렇게‘하나의 정당’ 이라는 생각이 굳어진다는 말은 결국 실제‘하나의 정당’ 이 돼야 할 필요 또한 늘어난다는 뜻이다. 이번 재보선의 여러 일화들이 이런 논리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노회찬 후보와 기동민 후보는 단일화하 는 과정에서 정책 협상이나 정책 합의를 전혀 말하지 않았다. 당 대표인 천호선 후보가 사퇴하는데도 그 런 전제 따위는 문제될 게 없었다. 2010년과 2012년에는 요식 행위일지라도 정책를 합의하는 과정이 있 었고, 그게 후보 단일화의 명분이 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절차조차 없었던 것이다. 두 당 사이에‘반 새누리당’말고 더 중요한 다른 정책 쟁점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었다. 동작(을)의 막판 선거운동 또한 인상적이었다.‘야권단일후보’ 의 당선을 위해 새정연의 주요 정치인들 이 총출동했다. 전 대통령 후보인 문재인 의원을 포함한 새정연 국회의원들과 동작(을) 새정연 조직 속에 노회찬 후보를 비롯한 정의당 인사들이 점처럼 박혀 있는 모양새였다. 노동당은 이 거창한 파란 색 대오 와 노란 색 대오에 맞서야 했다. 누가 보더라도 파란 색과 노란 색의‘합당’조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광경 이었다. 실제로 선거가 끝나자마자 새정연 내부를 비롯해 이곳저곳에서‘합당’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물론 정 의당의 뜻있는 당원들은 합당을 반대하는 것으로 안다. 당연히 노동당 당원들은 진보정당운동의 물줄기 를 이어가려는 이런 정의당 당원들의 대의에 공감하며 지지할 것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이런 상황을 만든 책임은 전면적 야권연대를 추진한 사람들에게 있다. 둘째, 야권연대는 지금 진보정당에 절실히 필요한 다른 실천들을 무력화시킨다. 한국 진보정당운동의 위기에는 장기, 중기 그리고 단기의 요인들이 겹쳐 있다. 가장 근본적인 장기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무엇 보다 노동운동을 재구성해야 하고 지역 생활 현장에 뿌리박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중기적인 측면에 서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이후’ 의상

야권연대는 지금 진보정당에 절실히 필요한 다른 실천들을 무력화시킨다. 이런 시도들

황에 맞는 정책 대안을 다시 정리하고 젊 은 세대를 조직해야 한다. 한데 야권연대 는 이 모든 실천들과 동시에 진행할 수 있

이 등장하고 발전할 가능성을 송두리째 빨

는 또 하나의 실천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아들여 버리는‘블랙홀’ 이다.

시도들이 등장하고 발전할 가능성을 송두 리째 빨아들여 버리는‘블랙홀’ 이다.

야권연대가 정말 뛰어난 약효가 있는 진통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야권연대가 작동하는 동안은 진보정 당운동의 위기 요인들 중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않더라도 진보정당이 위기 상황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이번 지방선거가 끝나자 진보정당들이 몰락했다고 통탄하는 목소리가 새삼 높았다. 2012년 총선에서는 통합진보당이 10% 넘는 지지율을 얻고 지역구 국회의원 당선자도 여럿 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분열된 46


바람에 지지율도 떨어지고 지역구 당선자도 거의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2012년에도 진보정 당은 추락 상태였다. 단지 야권연대의 장막이 그 사실을 아름답게 가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때도 위기였 지만 민주통합당과 후보 단일화를 해 당선자들을 내면서 허망한 잔치를 벌인 것이다. 진통제를 먹는 기간이 늘어날수록 위기는 더욱더 해결하기 힘든 수준으로 악화될 따름이다. 진보정당 운동의 중장기 발전을 위해 필요한 다양한 시도들은 야권연대의 화려한 재연을 위해 관심 바깥으로 밀려 난다. 심지어 야권연대를 위해 희생하라 는 강요까지 당한다. 동작(을) 사태의 본

진보정당운동의 중장기 발전을 위해 필요한

질이 바로 이것이다. 김종철 후보가 지역

다양한 시도들은 야권연대의 화려한 재연을

활동을 벌여온 곳에 무연고의 노회찬 후 보가 뛰어든 일에 관해 정치 조직 사이의 ‘도의’또는 선후배 사이의‘의리’ 를 따지

위해 관심 바깥으로 밀려난다. 심지어 야권 연대를 위해 희생하라는 강요까지 당한다.

는 말들도 있다. 그렇지만 정작 핵심은 다 른 곳에 있다. 정의당의 선택에 깔려 있던 것은 전국적인 야권연대 전략을 실현하는 일하고 비교하면 지 역에서 거점을 구축하는 등의 노력은 부차적일 따름이라는 판단이다. 그런 노력 정도는‘이번에는’무시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지만‘이번에도’무시될 수 있다면‘그 어느 때라도’거듭 무시될 수 있는 것 이다. 셋째, 야권연대는 진보정당운동의 세대가 계승되는 것을 방해한다. 한국 정치는 지금 심각한 세대 정 체 상태에 있다. 486 이후 세대가 제도 정치에서 제대로 대표되지 못하고 있다. 젊은 세대들이야말로 신 자유주의‘이후’ 에 관해 가장 할 말이 많은데도 말이다. 그래서 새누리당도 몇몇 젊은 인사를 내세워‘혁 신’ 을 이야기하는 형편이고, 새정연에서도 재보선 이후 곧바로 터져 나온 게 세대 교체론이다. 진보정당 들도 이 문제에서 예외가 아니다. 아니, 어느 나라에서나 보수우파보다 진보좌파가 청년 세대에 더 강한 호소력을 발휘해온 것을 감안하면, 진보정당 역시 세대 정체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정말 심각한 문 제가 아닐 수 없다. 과연 2016년 총선에서도 노회찬, 심상정, 이정희가 진보의 얼굴이 돼야 하겠는가? 그런데 야권연대는 세대 정체를 조장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전국 적으로 야권연대를 하더라도 지역마다 사정이 다르다. 노동조합이 일정한 영향력을 지닌 영남의 몇몇 선 거구에서는 노동운동의 지지 여부가 보수야당에 맞서 경쟁력을 갖추는 데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된다. 그래 서 후보 단일화 전술과 세대 문제는 별 관계가 없다. 그러나 수도권은 사정이 다르다. 지방 진보정당들하 고 비교해 수도권에서 진보정당들은 기반이 없다. 그래서 전국적인 야권연대 협상에서 내세울 수 있는 게 이른바‘인물 경쟁력’뿐인데, 인물 경쟁력은‘이미 이름이 언론에 널리 알려져 있다는 사실’ 을 에두른 표 현일 뿐이다. 다시 말해 진보 쪽에서는‘이미 유명한’사람이 계속‘야권단일후보’ 로 나설 수밖에 없다. 심지어 천호선 대표도 더 유명한 노회찬 전 의원을 위한 희생양이 돼야 한다. 하물며 그 이후의 세대야 말해 뭣할까. 야권연대의 쳇바퀴 속에서 이렇게 진보정치의‘사투르누스’ (제 권력을 잃을까봐 두려워 자식을 기획 진보의 민낯 47


잡아먹었다는 고대 로마 신화의 신. 이 신화를 소재로 한 F. 고야의 유명한 그림이 있다.)들은 자기 자식들을 잡아

먹으며 목숨을 이어간다.

야권연대 노선을 극복하는 진보정치 재편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전면적 야권연대 전략이 진보정당운동에 끼치는 폐해를 살펴봤다. 진보정치의 재편과 재건 은 단순히 이러저런 세력을 모으거나 기존 노선들의 교집합을 만드는 것일 수 없다. 다른 여러 과제가 있 지만, 이번에 우리가 확인한 사실은 진

진보정치의 재편은 야권연대라는 노선을 극복 하는 과정이 돼야 한다. 새누리당에 맞서 새정 연과 연대할 정당이 아니라 새누리당과 새정연 하고 대결할 정당으로 귀결돼야 한다.

보정치를 재편하는 일이 야권연대라는 노선을 극복하는 과정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정치의 재편은 새누리당 에 맞서 새정연과 연대할 정당이 아니 라 새누리당과 새정연하고 대결할 정 당으로 귀결돼야 한다.

물론 현실이 쉽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쉽지 않아서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 것이기도 하 다. 대통령중심제-국회의원 소선거구제의 정치 체제에서, 그것도 가장 보수적인 세력이 집권한 상황에서 진보좌파정당이 존립하고 성장하는 일이란 정말 피와 눈물만을 요구하는 고투처럼 보인다. 그래서 영남 의 몇몇 노동자 밀집 선거구에서는 앞으로도 계속 고육지책으로 보수야당과 선거 연대 게임을 벌여야 할 지 모른다. 진보정당이 이론 집단이 아닌 현실 정치 세력인 한 그런 전술적 출구마저 거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전면적 야권연대’ 는 더 이상 안 된다. 지금의 정치 체제에서 전면적 야권연대를 거부하는 일이 제도 정치 영역 안에서 세력을 어느 정도 축소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이런 후퇴를 감내하 면서 다른 출구를 찾아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평택에서 김득중 후보가 거둔 5~6%대 의 지지율이다. 이것을 어떻게 진보정당운동 전체의 단단한 전국적 지지층으로 복원할 것인가? 어떻게 이 를 최소한 차기 총선의 진보정당 정당투표 득표율로 실체화할 것인가? 이제 이 물음을 중심으로 진보정치 의 재편과 재구성을 고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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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진보의 민낯

좌파는 세대교체 안하나?

집에서 홈쇼핑을 보고 있으면 절로 감탄이 나온다. 매시간 쏟아지 는 신상품 때문이다. 옷이건 자동차건 세탁기건 냉장고건 종류를 불문 하고 늘 새로운 상품이 등장한다. 공산품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 다.‘정치상품’ 도 예외는 아니다. 기성 정당들은 어떤 한계 상황에 봉착했을 때마다 신속하게 당 이 름도 바꾸고 정책도 바꾸고 중심인물도 바꾼다. 종종 다른 당의 노선 좌파정치는 권영길 세대의 그림 자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을 자기 것으로 내놓는다. 정책, 인물, 색깔 등 포장지를 주기적으로 바꿔가면서‘새로운 정치상품’ 을 계속 내놓는 것이다. 지난 세월 동안

있다. 세대교체 그리고 세대교체

한국 정치를 지배해온 양당 구도는 이렇게 지속적으로‘새로운 정치상

를 담보할 생각의 교체야말로

품’ 을 내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좌파적 생명력의 원천이다.

이런 정치상품하고 비교해보면‘좌파’ 의 자기 변신은 거의 굼벵이 수준이다. 1980년대 중반, 6월 항쟁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한 세대 (=30년)를 비슷한 얘기만 듣고 살아오지 않았나 싶다. 자본주의는 매

일 새로운 상품을 쏟아내는데, 한국의 좌파는 30년째 같은 소리만 하 고 있다.

지난 세월 동안 한국 정치를 지배해온 양당 구도는 이렇게 지속적으로‘새로운 정치상품’ 을 내놓았 다. 이에 비해‘좌파’ 의 자기 변신은 거의 굼벵이 홍기표 서울 서대문구 당원

수준이다. 30년째 같은 소리만 하고 있다. 기획 진보의 민낯 49


단순한 정치기획이나 메시지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흔히‘세대’ 라 부르는‘인적 토대’ 가 거의 장기 에 걸쳐 고착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단적으로 민주노동당 이후 소위 진보정당의 구성원들을 보면 한마디 로‘고령화’현상이 뚜렷하다. 2000년 당시의 민주노동당은 30대 당원들이 가장 많았다. 그러나 이후 진 보신당과 노동당 시절을 거치면서 그때의 주력부대가 그대로 늙어가는 현상을 보여 왔다. 더 이상 새로운 세대를 충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세대를 흡수하지 못하면 자연 소멸할 수밖에 없다. 더 무서운 것은 진영 내부의 세대교체 실패 는 결국 미래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할 위험을 늘린다는 점이다. 이래저래 한국의 좌파는‘세대교체의 실 패’ 라는 총체적인 생존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아직 권영길 세대의 감옥에 갇혀있다 세대교체의 중대사라고 할 만한 사건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2000년 민주노동당의 등장은 그 자 체로 한국 정치에서 하나의 세대교체 사건이었다. 창당 전후로 안팎의 많은 저항에 부딪혔지만, 결국은 4 년 만에 의회 진출이라는 성과를 일궈내면서 새로운 정치 지형을 열었다. 이때 형성된‘민주당 왼쪽 블록’ 이 바로 오늘날 통진당-정의당-노동당-녹색당이 나눠먹고 있는 10% 정도의 구역이다. 당시 민노당을 이끌던 핵심 리더십은 권영길이었다. 따라서 당시 민노당의 주도세력은 죽으나 사나 ‘권영길 세대’ 라고 불릴 수밖에 없다.‘권영길 세대’ 는 민주화 세대의 특징을 많이 갖고 있다. 이른바‘자 주파’ 와‘평등파’ 의‘대동단결’ 을 핵심 철학으로 삼아 당을 유지하면서 1980년대 같이 데모한 사람들은 덮어 놓고 모두 동지라고 불렀다. 반드시 타도해야 할 어떤 대단한 악마를 격퇴하려면 무조건 단결해야 한다는 고전적인 발상에 사로 잡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언제나 신세대는 나오기 마련이다. 민노

민노당의 끝물에 노회찬과 심상정이 권영길을 대체할 신세대로 떠올랐다. 그러나 노회찬과 심상정은 나이가 몇 살 어린 권영길인 셈이었다.

당의 끝물에 노회찬과 심상정이 권영길을 대체할 신세대로 떠올랐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두 사 람은 권영길과 같은 생각의 영역 안에 있었다. 노 회찬과 심상정은 나이가 몇 살 어린 권영길인 셈 이었다. 아무리 나이가 젊다고 해도 머릿속에 든 생각

이 다를 게 없다면 세대교체의 의미가 없다. 결국 민노당을 박차고 나온 진보신당은 세대교체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자주와 평등이 함께 가야 한다는 운동권 세대의 가치관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상황에서 분당은 결국 한때의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된‘실수’ 로 취급받았다. 권영길을 대체할 신세대로 보이던 인물들은 스스로 ‘뻥쟁이’ 를 자임하며 줄줄이 진보신당을 배신했다. 결국 한국의 좌파정치는 권영길 세대의 그림자에서 아 50


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분당을 통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거듭나 좌파적 세대교체의 에너지를 만든 것 이 아니라 그냥‘쪼개진 민주노동당’ 으로 계속 존재했다.

중요한 것은 생각의 교체다 세대교체의 본질은‘나이의 교체’ 가 아니라‘생각의 교체’ 다. 만약 나이만 어릴 뿐 구세대하고 생각이 별로 다르지 않다면 그 사람을 신 세대라고 부르기 민망할 것이다.

요즘에 가끔‘좌파’ 를 지칭하는 개념으로‘민주·진

새로운 생각으로 무장함으로써 다

보세력’ 이라는 말을 쓰는 경우가 있다. 민주화 운동

가올 변화에 조응하자는 것이 세대 교체의 진정한 취지이기 때문이다. 장기수도 아니면서 30년 동안 똑같

이 끝난 지 3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민주’ 와‘진보’ 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은 생각의 감옥에 갇혀 있다면 아 무리 젊은 사람이라도 구세대인 셈 이다. 나는 가끔 불평분자들을 부러워 한다. 그 사람들은 모든 일을 아주 쉽게 재단하기 때문이다. 모든 문 제는 다 자본주의 문제이고, 모든 책임은 다 자본가들이 져야 하고, 썩은 세상 갈아 없어야 한다고 말 하면 그냥 끝이다. 아주 간단하다. 이렇게 쉽게 정리해버리는 버릇은 민주화 세대의 습관이다.‘군사정 권’ 이라는 거대한 적을 타도하려고 형성된 그 세대의 특징적 사고방식 이다. 요즘에 가끔‘좌파’ 를 지칭하는 개념으로‘민주·진보세력’ 이라는 말을 쓰는 경우가 있다. 나는 이것 이 좌파적 세대교체의 실패를 보여 주는 한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민

노회찬 선본 사무실 앞을 지나가는 김종철 유세차량 모습 (사진 : 홍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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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화 운동이 끝난 지 3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민주’ 와‘진보’ 라는 용어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민주화 투쟁 중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설정된 거대한 적’ 을 타도하려는‘대동단결’ 이 최고 의 가치가 되고 진영내부의 다양성은 인정받을 수 없다는 의미다. 실제로 선거 때마다 유행하는 후보 단 일화가 바로 이런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다. 민주화 세대의 특징적 사고방식은 또한 한국 사회를 자꾸 정치 논쟁의 영역에 묶어두려는 속성이 있 다. 사회가 발전하려면‘복지-증세’같은 경제 논쟁의 영역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논쟁의 진행을 자꾸 방해한다. 나는 최근 나타나는 민주당의 장기에 걸친 지지율 하락 현상을‘민주화 세대(또는 NL세대)의 퇴조 현 상’ 이라고 분석한다. 민주당은 한마디로 친북, 반미, 민족통일 같은 가치관에 경도되어 있었고 툭하면‘군 사정권 시절에도 없던 일’ 이라며 마치 지금이 1980년대인 양 행동해왔다. 그런데 민주당이 움켜쥐고 있던 바로 이 정치적 포지션 자체가 전사회적 세대교체의 흐름 속에서 자연도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민주화 세대를 자연 소멸시키고 있는 우리 사회 저변의 거대한 힘의 이동을 깨달아야 한다.

민주화 세대의 오래된 추억에서 벗어나자 사람의 생각이나 취향은 잘 바뀌지 않는다. 어릴 때 형성된 가치관이나 정치 성향도 잘 바뀌지 않는다. 할아버지 세대가 전쟁의 기억을 결코 잊지 못하고, 우리 엄마 세대가 결코 뽕짝의 감흥에서 벗어나지 못 하듯 민주화 세대는 데모의 추억을 털어

민주화 세대는 데모의 추억을 털어내지 못한 다. 한번‘세대’ 의 감옥에 갇히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그렇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목적의식 을 갖고 세대교체를 추구해야 한다.

내지 못한다. 다시 말해 한번‘세대’ 의 감옥에 갇히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그렇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목적의식 을 갖고 세대교체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 는 과연 유효한 세대교체에 성공하고 있 는가? 한국의 좌파정치는 과연 대중이

요구하는 신상품을 얼마나 유효하게 적절히 창출하고 있는가? 지속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먼저 민주화 세대의 낡은 그림자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주와 평등이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권 영길 세대의 복음서는 이제 그만 던져 버리자. 친북, 반미, 통일은 다 지나간 구세대의 낡은 레코드판일 뿐 이다. 세대교체 그리고 세대교체를 담보할 생각의 교체야말로 좌파적 생명력의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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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진보의 민낯

진보적 시민사회는 존재했는가

“민중만큼 정해지지 않은 것은 없고, 여론만큼 애매한 것은 없고, 선거인 전체의견만큼 허위적인 것은 없다.” 직접선거를 통해 집정관을 선출하는 공화정 로마의 수호자인 키케 로(Marcus Tullius Cicero)조차 선거를 통해 성립된 정치권력이 항상 민주적으로 행동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키케로의〈카틸리나 탄핵(In Catilinam)〉 은 라틴어를 배우려면 한번쯤은 꼭 읽어야 하는 명 시민단체가 시민사회를 대리해 버린 한국사회에서 지역에서부

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카틸리나가 반역을 계획했는지는 아직도 역사가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심지어 반역을 의심한 사람은 키케

터 시민사회를 복원하고 강화해

로 자신뿐이었다는 혹평마저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키케로의 탄핵시

야 한다. 시민사회의 주인이 시

리즈와 웅변술은 독재정치를 두려워한 로마시민들의 이성을 흔들었

민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우리가

고, 원로원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키케로가“여론만큼 애매한 것은 없

이제는 깨달아야만 한다.

다” 라고 말한 것은 자신을 향한 고백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키케로가 지금도 언급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시장이 보이 지 않는 손이라면, 보이지 않는 활이나 방패쯤 되어버린 시민사회와 연관되어서다. 물론, 그가 부동산투기에 관해 공화정 로마의 독보적인

키케로는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외에‘시민적 가치’ 의 중요성에 대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설파했다. 즉, 정치와 경제가 아닌 시민들의 목소리가 전달되 최백순 기관지위원

는 다른 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획 진보의 민낯 53


인물 중에 하나이며, 경제영역에서 평등이나 분배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키케 로는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외에‘시민적 가치’ 의 중요성에 대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설파했다. 즉, 정치와 경제가 아닌 시민들의 목소리가 전달되는 다른 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메두사의 머리 숫자보 다 더 많은 이름으로 시민사회가 정의되고 있지만 키케로의 철학에서 근원을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태생적으로 진보적인 시민사회 흔히 시민사회를 근대나 동유럽의 붕괴과정에서 그 전환점을 찾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기원전 의 인물인 키케로에서 보듯이 시민사회라는 개념이 근대 혹은 현대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사회라는 것은 이런 개념” 이라고 한마디로 정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이 글과도 직접적인 관련성 이 없다. 하지만 시민사회란 국가와 경제가 아닌 제3의 영역이라는 사실만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새 로운 영역(혹은 사회)의 필요성을 말하는

새로운 영역(혹은 사회)의 필요성을 말하는 이유 는 간단하다. 기존의 국가와 경제에 대한‘견제’ 가 그 목적이다. 기존의 자유주의 공공영역으로 는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존의 국가와 경제 에 대한‘견제’ 가 그 목적이다. 기존의 자유주의 공공영역으로는 더 이상 해결 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버마스 에 따르면 현대자본주의의‘전일적인 상품화’ 에 대항하는 새로운 시민사회가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요컨대 시민들의 자유로운‘의견’ ,‘판단’ ,‘활동’ 으로 국가와 경제 라는 영역을 견제하는 것이 시민사회 자신의 임무인 셈이다. 따라서 그런 의미의 시민사회가 보수적일 수 는 없다. 시민사회가 태생적으로‘진보적’ 이어야만 하는 것도 당연할 수밖에 없다. 68혁명의 여진이 끝을 맺을 무렵부터 유럽 전역에는‘신사회운동’ 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등장하기 시 작했다. 신사회운동의 공통적인 특징은 기존의 계급투쟁 중심의 운동을 넘어‘다양한 가치’ 에 주목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녹색운동과 여성운동 등이며 이전에는 활발하지 않았던 소수자운동들도 광범위하 게 일어났다. 노동에 대한 관점도 바뀌기 시작했다. 소득의 증가를 위해 더 많은 노동시간을 당연하게 여 겼던 사고에서 벗어나 더 적은 노동을 하는 대신, 그 댓가로‘여가’ 를 선택했다. 흔히 말하는 삶의 질을 우 선적으로 추구하는 태도들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노동시간의 단축은 노동자들이자 시민인 그들의 생활 공간에서 과거와 다른 형태의 운동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지역이나 공간마다 운동들의 모습들 은 다르지만 그런 운동들을‘풀뿌리’ ,‘자율’ ,‘네트워크’ 와 같은 몇 가지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정치권 력에 대항해서는 풀뿌리자치를 통해 맞서거나, 경제권력에 대항해서는 재생가능에너지와 같은 새로운 대 안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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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가 시민사회가 되어버린 현실 통설에 따르면 한국사회에서 시민사회는 1987년의 6월 항쟁을 새로운 전환점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 리고 마치 이런 움직임은 유럽의 신사회운동과 유사한 형태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요컨대 기존에 착목하 지 않았던 다양한 가치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들이 급격하게 가속화된 것 은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바로 불과 얼마 후에 시작된 동유럽 국가사회주의의 연쇄적인 몰락과 소 련의 해체였다. 그리고 한때‘자칭 정통사회주의자’ 였던 사람들이‘다양한 가치’ 와 관련된 운동의‘다양 한 명함’ 을 들고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그런데 필자는 그동안 묵혀왔던 한 가지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시민사회는 시민단체를 의미하는 것 인가. 그렇지 않다면 시민단체들의 네트워크가 한국사회의 시민사회를 의미하는 것일까. 혹시 그동안 우 리는 시민사회라는 영역을 시민단체들에게 위탁하고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닐까. 20년 전에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참여연대)라는 조직이 출범했다. 최초의 참여연대는 두 가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기존의 시민단체들이 하나의 가치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면 참여연대는 센터라는 체계를 통해 여러 영역에 개입하고자 했다. 또 하나는 공세적인 재정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이다. 기존의 시민단체들이 한 명 정도의 상근자를 두는 소규모체계였다면 참여연대는 공세적인 재정을 통해 출범부터 다수의 상근자를 두는 등‘규모화’ 를 지향했다는 것이 확연한 차이점이었다. 한 명의 상근자는 조직을 유지하고 기본적인 사업을‘관리’ 하는 것 이상은 불가능하다. 반면에 다수의 상근자는 사회의 여러 현안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나의 상품이 아니라 다양한 상품을 파는 참여연대라는 대기업이 등장한 것이다. 이후 참여연대는 그야말로 눈부시게 성장했다. 이론으로 무 장한 학계와 현장에서 잔뼈 가 굵은 전문가들이 대거 참 여함으로서 어느 순간‘시민 운동은 곧 참여연대’ 라는 등 식이 성립했다.

지역에서부터 시민사회를 강화해야 그런데 우리는 이 과정에 서 눈여겨 봐야 할 인물이 있 다. 바로 박원순 현 서울시장 이다. 참여연대에 사무처장

박원순 현 서울시장은 참여연대, 아름다운 가게, 희망제작소를 만들면서 시민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로 자리를 잡았다.(사진 :《원순씨를 빌려드립니다》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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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직책으로 상근을 시작한 박원순은 이후 아름다운재단과 가게, 희망제작소 등을 창립하며 시민운 동의 대표적인 인물로 자리를 잡았다. 당연히 정치권에서 보면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실제로 여러 차례 정치입문을 제의받았지만 박원순은 그때마다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참여연대와 환경운동연합과 같은 대 규모의 시민단체 ‘들’ 이 시민사회를 대리하고 있는 현실에서 박원순의 이런 선긋기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 고 있었다. 그동안 참여연대를 거쳐 정치권에 입문한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개인’이상 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박원순의 경우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20년 가까이 상근을 하면서 조직과 사업, 그리고 수많은 인맥에 직접 개입한 한국 시민운동의 거의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 다. 인맥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특히 정치에 입문하려고 하는 인물이라면 더욱 그렇다. 박원순의 인맥은 한국사회에 거미줄처럼 퍼져있다. 보궐선거를 통해 드라마틱하게 서울시에 입성한 박원순은 재선에 성공함으로서 차기대권을 향한 발판 까지 만들었다. 지방선거이후 여론조사에서 박원순은 김무성과 함께 1, 2위를 다툴 정도로 지지율이 급등 했다. 보궐선거 패배로 자멸한 안철수의 상품가치는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반면에 박원순의 주가는 급등 하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지방선거에서 강남3구에서 그 어느 때보다 높은 득표율을 얻었다는 것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박원순이라는 상품을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고 강남3구의 유권자들이 판단한다는 징후이 며 이것은 박원순을 오른쪽으로 이동시킬 가능성이 얼마든지 열려있다는 의미이다. 이미 오른쪽으로 이 동을 계속해서 새누리당과 경계선마저 모호해진 새정치연합을 박원순이 왼쪽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가능 하지도 않고, 그럴 가능성도 거의 없다.

박원순의 정치입문은 이전의 반짝 수혈론을 넘어 언제든지 필요할 경우 그의 인맥들이

박원순의 정치입문은 이전의 반짝 수혈 론을 넘어 언제든지 필요할 경우 그의 인 맥들이 새정치연합의 방패막이 될 수 있는

새정치연합의 방패막이 될 수 있는 것이 부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박원순이

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울시장이라는 자리를 넘어 대권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규모는 더욱 커질 것이

다. 그것은 박원순의 시민단체들의 인맥들과 네트워크가 이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민단체가 시민사 회를 대리해버린 한국사회에서 지역에서부터 시민사회를 복원하고 강화해야 한다. 시민사회의 주인이 시 민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우리가 이제는 깨달아야만 한다. 그것이 작은 목소리라고 하더라도 시민 스스로 ‘의견’ ,‘판단’ ,‘활동’ 을 주체적으로 할 전환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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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콜트콜텍을 읽는 열두 개의 시선 ⑦

같은 운명을 지닌 다른 싸움-콜트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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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콜트콜텍을 읽는 열두 개의 시선⑦

같은 운명을 지닌 다른 싸움 콜트이야기1⃞ 이선옥 기록 노동자

같은 기업주에게 같은 일을 당했지만 콜트콜텍 이야기를 쓴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게 한 공장의 이야기인 줄 안다. 그러다 콜 트는 이기고, 콜텍은 진 재판에 대해 얘기하면 그제야“어? 둘이 다른 건가?”고개를 갸우 뚱한다. 위장폐업과 집단 정리해고를 당하고 8년 동안 거리농성을 하고 있는 사연은 콜트 와 콜텍 모두 같다. 하지만 같 은 기업주에게 같은 일을 당했 다고 해서 두 싸움이 같은 건 아니다. 사장은 같지만 노동자 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콜트와

콜트와 콜텍은 공장이 있는 지역이 다르고, 작업장의 분위기가 다르고, 지역본부와 노조 지도부, 조합원도 다 다르다. 당연히

콜텍은 공장이 있는 지역이 다

남아 있는 해고자들의 숫자부터 성향까지

르고, 작업장의 분위기가 다르

모두 다르다.

고, 상급단체인 지역본부와 노 조 지도부, 조합원도 다 다르다. 당연히 남아 있는 해고자들의 숫자부터 성향까지 모두 다 르다. 같은 운명을 지녔지만 다른 싸움, 이것이 콜트와 콜텍의 투쟁이다. 하지만 콜트콜텍 싸움에 수 년 동안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당연히 이런 사정을 모른다. 해고와 함께 시작된 법정 싸움에서 콜텍은 끝내 졌다. 투쟁 8년차가 되는 올해 법으로 해 볼 수 있는 건 모두 끝이 났다. 하지만 콜트는 아직 재판 중이다. 법정 싸움을 진행하고 있 는 사건만 해도 수십 건이다. 정리해고를 철회하고 공장으로 돌아가겠다는 목표는 같지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여정은 종종 다르다. 멀리서 볼 때 노동자들의 투쟁은 다 똑같아 보 이지만, 노조탄압, 해고, 파업, 농성, 재판 등 싸움의 모습이 비슷해 보일 뿐 모든 노동자들 58


잭데라로차와 함께 한 방종운지회장

의 투쟁은 다 다르다. 하루 백 건 씩 교통사고가 일어나도 다 같은 사고일 수 없듯, 천 개의 투쟁에는 천 개 의 이야기가 있는 법이다. 콜트와 콜텍에도 조합원 숫자만큼 수백 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철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하고, 밴드를 만들어 공연을 하고, 연극 무대까지 서는 등 콜텍 해고자 들의 투쟁이 흔치 않은 방식이다 보니 콜트보다 콜텍의 이야기가 많이 알려진 게 사실이다. 장기투쟁사업 장들 모두 힘들지만, 그 안에서도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곳은 소외감을 느끼게 마련이듯 콜트콜텍도 그렇 다. 거기에는 서로 다른 두 이야기를 각자 드러내지 못하고 늘 뭉뚱그려서 콜트콜텍이라는 하나의 이야기 로 써 온 나 같은 사람의 책임도 있다. 콜텍의 싸움으로 콜트콜텍 이야기를 처음 접했고, 콜텍의 해고자들 과 먼저 알게 됐으므로 당연히 그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게 되고 써 왔다. 그래서 이번엔 그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던 콜트이야기를 할 차례다. 콜트악기는 일렉트릭 기타를 만들던 곳으로 인천의 부평에 공장이 있(었)고, 콜텍악기는 어쿠스틱 기 타를 만들던 곳으로 충남 계룡시에 공장이 있다. 두 공장은 콜트악기라는 같은 회사에 소속되어 있고 경 영자는 모두 박영호 사장이다. 부평에는 콜트악기 공장이 3개가 있었다. 1공장과 3공장은 기타 만들던 기 계들을 빼서 인도네시아와 중국의 공장으로 옮기고 다른 업체에 임대 중이다. 지금 콜트와 콜텍 해고자들 이 농성을 하고 있는 곳은 예전 콜트악기 2공장 건너편이다. 가동을 멈춰 비어있는 2공장을 노동자들이 점거하고‘콜트콜텍 노동자의 집’ 을 만들기 시작하자 박영호 사장은 아예 공장을 팔았고 건물은 이내 철 거됐다. 공장이 있던 자리에는 지금 가스충전소가 들어서 있다. 공장 건너편, 예전에 공장이 있던 자리라 노동르포 59


는 것 말고는 아무 연고도 없는 길가에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농성장이 있다. 그런 역사를 알지 못하면 그 야말로 생뚱맞은 곳에 농성장이 있는 셈이다. 늦은 밤 콜트악기지회 방종운 지회장을 만나러 농성장에 갔다. 그는 보름 동안 노동자통일선봉대로 전 국을 다니고 돌아와 동료가 사 준 술을 한 잔 먹고 온 길이라고 했다. 연휴를 맞아 대전 집에 내려간 콜텍 해고자들 대신 농성장 당번을 서야 해서 집에도 못 들르고 바로 온 길이었다. 농성장에는 그 혼자였다. “콜텍이 있어야 손님이 북적거리는데 우리가 있으면 한산하다” 고 하는데 그 말끝이 영 편치 않게 들렸다. 나도 콜텍 해고자들이 있을 때만 가곤 했기 때문이다. 농성장이란 곳은 사람이 북적거릴 때도 어쩔 수 없 이 쓸쓸한 느낌이 들곤 하는데, 그 안에서도 더 쓸쓸한 사람이 있었다는 걸 몰랐다.

콜트악기 투쟁밖에 모르는 사람 방종운 지회장은 스스로를 꼴통이라 칭한다. 그는 정말 콜트악기 투쟁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하루 24 시간, 1년 365일을 그는 이 사안에만 몰입해서 지낸다. 얼마나 오래 가지고 다녔는지 접힌 자리마다 너덜 하게 닳아버린 재판 자료, 사측이 거짓말 을 하고 있다는 걸 입증할 증거들, 온갖 자료들의 복사본, 그는 언제나 그런 걸 한 무더기 들고 다닌다. 콜트 이야기가 나오거나 투쟁 관련한 질문을 받으면 가 방에서, 조끼 주머니에서, 바지 주머니에 서 자료들을 꺼내 설명을 시작한다. 만일 그 집착이 투쟁이 아닌 다른 분야로 나타 났다면 그는 아마 사회생활에 문제 있는 사람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것이다. 모든 일상이 한 곳에 몰입된 삶은 정상일 수 없 다. 그도 그 사실을 안다. 이제 그만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라는 얘기도 너무나 많 이 듣고 있다. 특히 대법원에서 이기고도 다시 해고 된 후 부쩍 그런 말을 자주 듣 는다고 했다.

“이번에 강정평화순례단이랑 노동자 클럽빵에서_방종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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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선봉대를 다녀왔어요. 민주노총선봉


대도 있고 통진당선봉대도 있는데 통진당 선봉대를 택했어요. 이석기 의원이나 내 꼴이나 똑같다는 생각 이 들었어요. 주변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게. 나는 이 싸움에 대해 자료를 정리하면서 이길 수 있는 싸움 이라 생각하고 덤비고 있는데, 주변에서는 아니다, 못 이긴다고 해요. 이 싸움 정리하는

“나는 이 싸움에 대해 자료를 정리하면서

게 맞지 않겠느냐는 질문들을 많이 해요.

이길 수 있는 싸움이라 생각하고 덤비고 있

2012년에 대법판결에서 이겼을 때 이제 (합의 보고) 그만 정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많이

는데, 주변에서는 아니다, 못 이긴다고 해

했어요. 오늘도 광화문 집회에 갔다가 고생

요. 이 싸움 정리하는 게 맞지 않겠느냐는

했다고 술 한 잔 사준대서 먹는데 막판에 그

질문들을 많이 해요.”

런 얘길 하더라고요. 요샌 뻔해요. 이 싸움 정 리해야 하지 않느냐고 다들 그 말만 해요. 특히 콜트콜텍 한꺼번에 해결하려면 너무 무겁고 힘드니까 콜 트 먼저 정리하자고 많이 그래요. 지역에서는 인천 지역에서 투쟁하면서 지역 선배들 얘기 무시하고 고집 부린다고 하고, 천막에 가면 콜트는 없고 맨날 콜텍만 있고, 조합원들도 투쟁에 나서지 않는데 정리해야 하지 않느냐고…”

이렇게 천덕꾸러기가 된 콜트악기의 정리해고 싸움은 2007년 4월부터지만, 실제 싸움이 시작된 것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콜텍악기는 2006년에 처음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2007년에 해고를 당했지 만, 콜트악기는 1987년에 이미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콜트콜텍이라는 이름의 공동투쟁은 콜트악기 노조 의 긴 투쟁 과정 중 새롭게 시작된 또 한 갈래의 투쟁이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콜트악기 노조는 끊임 없이 투쟁을 해왔고, 결국 장기투쟁사업장이 되었다. 노동자들이 원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니다. 이들이 이 렇게 거리의 삶을 살게 된 이유는 콜트악기의 박영호 사장이 노동조합을 너무나 싫어했기 때문이다. 모든 불행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노조만은 안 된다는 극단의 혐오를 가진 사장. 한국 사회에서 경영자가 노동조합을 싫어하는 건 흔한 일이지만 벌이가 좋은 공장 문을 닫으면서까지 노조를 깨려는 사장님은 흔치 않다. 이들의 인생이 꼬여버린 건 하필 이런 사장을 만나 끝까지 노동조합을 포기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종운 지회장은 공수부대를 제대하고 국가와 가족을 위해 일하는 게 최고인 줄만 알았던 그 고지식함으로 노동조합을 지켰다. 둘 사이는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83년 3월에 공수부대 제대하고 특채 비슷하게 남들보다 호봉도 높게 받고 대우자동차에 들어갔어요. 회사에‘대우산악회’ 라는 모임이 있었는데 내가 산을 좋아하고 잘 타니까 가입해서 대회 일등도 하고 그 랬어요. 노조 대의원에 위원장 선거도 나오고 그런 조직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게 어용 조직이었어요. 그 때 대우자동차 위원장 나오려면 집 팔아야 되고 대의원은 전셋돈 빼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어요. 대의원 돼서 강경 발언 조금 하면 회사가 자기 연고지에 정비 센터 같은 데로 발령 내 주고 그러던 때니까. 노동르포 61


나는 데모하는 학생들 보면 배때기에 기름져서 부모들이 어렵게 공부 시켰더니 맨날 데모만 하고 국가 에 반대만 한다고 욕했던 사람이었어요.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인 줄만 알고 살던 사람. 그런데 천주교 인 천 주보를 보는 바람에 그만… “

공수부대 출신이라고 하면 웬만한 업체는 쉽게 들어갈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는 대우자동차라는 대기 업에 들어가 상사에게 인정받으며 일하던 청년이었는데 어느 날 이상한 글을 접하게 되었다. 누군가 천주 교 인천주보의‘소금’난을 보라고 한 것이다. 거기에는 팀스피리트 훈련의 문제점, 88올림픽을 앞두고 온갖 부정과 안 좋은 사실들이 써있었다.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인줄만 알고 있던 그는 충격을 받았고, 혼 자서 천주교 부평사목, 부천사목을 드나들면서 동일방직, 원풍모방, 콘트롤데이타의 투쟁들을 알게 되었 다. <말>지와 <길>지, <알기 쉬운 근로기준법> 같은 책을 읽으며‘내가 세상을 잘 못 살았다’ 는 것도 알아 버렸다. 세상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그는‘정의’ 라는 개념에 눈을 떴다. 회사가 5급 사원 발령을 내면서 부품업 체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좋은 자리를 주었지만 노동자로 살겠다고 그 발령을 거부했다. 로비를 해서 라도 가고 싶어 하는 자리였고, 이전 같으 면 얼른 갔을 테지만 그 때는 스스로 용납 이 안 됐다. 회사의 지시를 거부한 죄로 그는 86년 연말에 해고가 됐고 결국 사표 를 쓰고 대우자동차를 나오게 된다. 평생 후회로 남은 잘못된 선택. 그는 그때 사표 쓴 걸 지금도 후회한다. 어디 가서 해고됐 다는 얘기를 잘 못하는 것도 어리석게 사 표를 써 버린 자신이 부끄러워서다. 그렇 게 짧은 대우자동차 시절이 끝나고 콜트 악기와의 질긴 연이 시작되었다.

질긴 인연의 시작 87년도에 콜트악기에 입사를 했다. 결 혼도 했고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대우 자동차보다 못한 조건이어도 그냥 들어 갔다. 일이 훨씬 힘들어 대우자동차 생각 콜트노조 이명숙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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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많이 났다. 그런데 조금 다니다보니


적응이 되면서 오히려 콜트악기가 좋아졌다. 대우자동차 때는 라인을 타니까 각자 자리에서 일하고 서로 깊게 정이 안 들었는데, 콜트는 수작업인데다 함께 일한다는 느낌이 있어서 그게 좋았다. 시급이 대우자 동차에 견줘 3분의2가 안 될 정도로 많이 적었고 일도 더 힘들었는데도 그랬다. 그는 기타 네크(손잡이)를 만드는 공작반 소속이었는데 사각형 나무를 반 타원형으로 깎고, 이를 매끈하게 다듬는 공정이었다. 콜트 악기는 1,2,3공장이 있었는데 그는 지금 농성장 맞은편에 있는 2공장에 다녔다. 콜트악기 전체 노동자 수 가 550명이었고 공장 별로 150명 정도씩 일했다. 87년은 6월 항쟁에 이어 7,8,9 노동자 대투쟁이 있던 해 였고 인천은 전통적으로 사회운동의 뿌리가 깊은 지역이어서 공단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일어 나고 있었다. 친인척으로 얽히지 않으면 직원을 뽑지 않기 때문에 노조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자신했던 콜트악기였 지만 그곳에도 민주노조를 만들려는 열망은 어김없이 스며들었다.

“87년에 콜트에 입사했는데 노조추진위가 만들어졌어요. 민주노조가 세워지는가 했는데 추진위에서 임금 5만원 인상과 상여금 600%, 남녀동등하게 중고등학교 자녀 장학금지급, 정년 연장 등을 회사가 받 아들이는 대신 노조를 안 만들기로 합의를 한 거예요. 그러면서 노조가 무산됐어요. 550명 정도 되는 종 업원이 87년도에 7억원이라는 이익을 내게 해 줬는데 그게 창사 이래 최대였어요. 그런데 회사가 사정이 어렵다며 오히려 50세 이상 된 사람들을 다 잘라버렸어요. 불과 몇 달 전에 노조 안 하는 대신 그런 약속 들을 했는데. 88년도에는 그렇게 잘려나간 사람들을 빼니 350명 정도가 남았어요. 그때 내가 서울에 있는 전경련 회관에 가서 콜트악기 감사보고서를 열람했어요. 그런데 어렵다는 회사 가 29억 8,200만원이라는 이익을 낸 거예요. 그걸 복사해서 사람들한테 보여주니까 다들 눈이 돌아간 거 죠. 87년도에 실패한 민주노조를 88년도에 다시 만들었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콜트악기 노조 호적 은 88년 4월5일 생이에요. 3개 공장을 조직해서 1공장으로 다 모여서 가입원서를 받았어요. 한국노총 연 합노조 소속으로 신고를 하고 설립 필증을 받았죠. 나는 87년에는 참여를 못했고 88년도에는 같이 참여 해서 창립멤버로 일했어요.”

이런 증언을 들을 때면 한국의 기업들은 정말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지 답답하다. 일년 만에 7억 원에 서 29억 원으로 이익이 뛸 정도로 경기가 좋은 상황인데 굳이 50세 이상 직원들을 해고까지 해야 했을까. 노동자들과 합의한 내용을 몇 년도 아니고 몇 달 만에 바로 뒤집어 배신감을 느끼게 해야 했을까. 왜 사람 의 분노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상황을 몰아갔을까. 해고도 문제지만 사람은 마음이란 게 있기 때문에 회사 의 행동에 큰 배신감을 느낀다. 회사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을까 하는 배신감은 큰 상처로 남고 오래 도록 잊히지 않는다. 피치 못할 감원이라 하더라도 이런 방식은 옳지 않은데, 하물며 큰 흑자를 기록하면 서도 왜 그렇게 노동자를 대해야 하는지, 어떤 매뉴얼을 가지고 사람을 운용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회사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마 노동조합이 쉽게 만들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경영진이 종업원들 노동르포 63


앞에서 합의한 사항을 지키는 상황이라면 아무리 의식 있는 활동가들이 노조의 필요성을 역설한들 직원들 이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굳이 회사에게 찍혀 불이익을 감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노동조 합은 대부분 회사 때문에 만들어진다. 노조 없는 회사를 그토록 바라는 사람들이 노조를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노동자들을 자극하는 것은, 아무리 그들의 입장에서 계산해 보아도 남는 장사 같지가 않다. 회사는 노동조합 결성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노조를 만든 다음날부터 바로 탄압이 시작됐다. 노조 에 가입한 조합원들에게 주말을 이용해 사퇴서를 받았다. 월요일에 출근한 조합원들이“사장이 노조 생기 면 문 닫는다고 하더라, 노조 좋은 거 나도 알지만

“노동조합을 인정하라!” 는 요구를 걸고 콜트악기 노조의 첫 파업투쟁이 시작 된다. 88년 4월의 일이다.

회사가 문 닫는데 노조가 무슨 필요냐” 며 똑같은 소 리를 했다. 회사는 탈퇴한 조합원들을 따로 모아서 분리 출근을 시켰다. 노조는 탈퇴하지 않은 조합원 들을 1공장으로 다 모이게 했는데 회사의 노조 탈퇴 공작을 비난하며 농성에 들어가면서 자동으로 점거

파업이 됐다. 탈퇴한 조합원들이 구사대가 되어 농성 조합원들을 공장 밖으로 쫓아냈다. 점거 이틀만이었 다.“노동조합을 인정하라!” 는 요구를 걸고 콜트악기 노조의 첫 파업투쟁이 시작된다. 88년 4월의 일이다.

“갈산역 근처 2층에‘민중교육연구소(민교련)’ 라는 곳이 있었는데 공장서 쫓겨나면서 거기를 아지트 삼 아 모였어요. 87년에 550명이던 직원이 잘리면서 88년에는 330명 정도 남았는데 회사가 탈퇴시키면서 많이 나가고 80명이 노조원으로 남고 나머지는 구사대가 됐어요. 플랜카드 들고 공단 주변을 돌아다니다 가 민교련에 가면 주변 노조인 한독금속, 남일금속 같은 인천노동조합협의회 소속 사업장들이 막 지원을 해 줬어요. 로얄포토라고 화장실 수도꼭지 만드는 회사 조합원들이 지원을 나왔다가 구사대한테 잡혀서 벌을 서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가 막 달려갔는데, 짱돌 던지면서 서로 전투하고 싸웠어요.”

그 때는 파업에 들어가려면 법적인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출근을 하기 싫어 안 한 게 아 니라 회사가 공장 출입을 막으니 자연스레 공장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들도 이 상황이 낯설었다. 쇠갈고리에 맞아 머리가 터지고, 담 넘어 들어간 조합원들은 사지가 들려 던져졌다. 어제까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손에 그렇게 당했다. 회사가 시켜서 하는 일이었지만 노조 때문에 공장이 망하면 자신들도 끝이라는 절박함이 그 못지않았다. 하지만 제성정밀, 남일, 한덕금속, 미미양행, 지에스 마그네틱 등 인근의 노조라는 노조가 다 와서 싸워주니 회사랑 구사대도 겁을 먹었다. 죽어도 저 안에서 죽자고 80명이 전부 1공장 담을 넘어 또 점거를 했고, 결국 회사의 항복을 받아냈다. 6개월을 싸워 노조를 인정받고 단협 체결을 약속하면서 첫 파업 투쟁을 마무리했다. 보험을 깨가며 버텼던 몇 달 동안 80명이 던 조합원은 겨우 20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상처뿐인 승리. 민주노조의 앞날이 결코 순탄치 못할 것임을 모두 예감했다. (계속)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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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1

청년, 그리고 청소년운동가 강승

가만히 있지 않는 사람들 인터뷰·정리 : 신원, 정우 / 사진 : 장성렬 66


2014년 하반기에 들어섰다. 한 해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절대로 잊지 못하고, 잊어서도 안 된다고 외쳤던‘세월호 참사’ 는 벌써 많은 사람의 기억에서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유가 족의 동의가 철저히 배제된 채 세월호 특별법에 대한‘야합’ 이 이루어진 지 이틀 후‘가만 히 있으라’제안자 용혜인 씨를 비롯한 청년들과 유가족들은 새정치민주연합을 규탄하며 당사 안과 밖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 보수 여야 당이 판치는 여의도, 청년으로서, 그리고 청소년 운동가로서 살아가고 있는 강승 씨를 그곳에서 만났다.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67


Q : 안녕하세요? 2014년 한 해 동안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이나 선거운동, 당 청소년위 사 무담당자 등 많은 일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재 하고 계신 일들이나 하셨던 일들을 포함해 자기소 개를 부탁합니다. 강승 : 진술을 거부하겠습니다(웃음). 22살 강승이라고 합니다. 김호라는 이름을 쓰기도 합니다. 기관지 에 실리는 건 이번이 두 번째네요. 그리고 노동당 청소년위원회에서 사무담당자를 맡고 있고요.‘청소년 세미나모임 세모’ 라는 곳에 발을 걸치고 있습니다. 현재는 대학생입니다.

Q :‘가만히 있으라’ 에 합류하게 된 계기, 특히‘청소년 가만히 있으라’ 를 함께 하게 된 이유 등이 궁금 합니다만. 강승 : 세월호 참사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큰 충격에 빠졌죠.‘슬픔에서 벗어나 무엇을 말할 것인가’그 리고‘무엇을 문제라고 말할 것인가’ 라 는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이 문제는 진상규명이든 뭐든 정치적 문제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 정치적 문제가 어디서부터 기원하고 있느냐면 정치적 목소리를

진상규명이든 뭐든 정치적 문제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 정치적 문제가 어디서부터 기원하고 있느냐면 정치적 목소리 를 내지 못함에서부터 시작된 거거든요.

내지 못함에서부터 시작된 거거든요. 현재 시민들의‘정치’ 가 활발하지 못하다, 그래서 그 정치를 되살리는 노력 중 하나가‘가만히 있으라’ 였 던 것 같아요

“가만히 있으라” 는 세월호 침몰 사고를 기억하고,‘분노’ 하기 위해, 청와대 게시판에 올라간 용혜인씨의 제안으로 시작된 침묵행진이다. 행진시위의 참가자들은 마스크를 쓰고“가만히 있으라” 라는 말이 쓰인 손 피켓과 국화를 들고 행진하였는데,“가만히 있으라” 라는 이름은 이 손팻말에서 비롯되었다. 여러 차례 진행 된 행진에선 수백 명의 시민들이 연행되었다.

사실 세월호 참사에서‘가만히 있으라’ 가 나온 배경을 살펴보면, 배의 선장이 침몰하는 배에서 (승객들 에게) 가만히 있으라 하고 선원들만 빠져나왔잖아요. 이것이 현 사회에서의 어떤 상징처럼 되는 거죠. 우

리가 그 어떠한 생명의 위기나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어도, 이를테면 체벌의 현장이나 노동의 현장이 되 었든 과도한 입시의 현장이 되었든 곳곳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받죠. 이러한‘가만히 있으라’ 는말 이,“정치는 물론이거니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가만히 있어” 라는 식으로 청소년에게 특히나 많이 해당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그렇고, 거기에 문제의식을 느껴서 참여하게 된 사람들이 많은 것 같고요. 특 히 청소년 의제와 관련된 운동을 하면서 그런 지점에 많은 공감을 하게 되었죠. 68


6.10 만인대회 당시 연행되던 모습 (사진 : <월간좌파> ⓒ양희석)

아무튼, 학기 중임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으라’ 를 포함한 세월호 집 회 현장에선 꽤 많은 청소년들을 볼 수 있었어요. 평일엔 덜 했지만, 주말 집회의 경우엔 실제로 그 수가 꽤 되

세월호 집회 현장에선 꽤 많은 청소년 분들을 볼 수 있었어요.‘가만히 있으라’ 는 이 교육에 대해 서, 청소년을 둘러싼 시스템에 대해서 문제와 불만 을 제시하는 청소년들이 정말 상당했습니다.

었고, 발언자도 청소년이 많았어요. ‘가만히 있으라’ 는 이 교육에 대해서, 청소년을 둘러싼 시스템에 대해서 문제와 불만을 제기하는 청소년 들이 정말 상당했습니다. 그래서‘청소년 가만히 있으라’ 가 시작된 거였어요. 사실‘청소년 가만히 있으 라’ 를 제안하신 분들은 기존에 청소년 세미나 세모를 함께하던 분들이었어요, 학교는 다르지만… 아, 세모를 소개하자면‘각자 다른 공간에 있는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것, 학교에서 가르치 지 않는 것을 함께 공부해보자’ 라는 생각에서 시작하게 되었고요, 특히 작년‘안녕들 하십니까’정국에서 대자보를 썼던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모여서 지금까지는 교육이나 학교, 노동, 생태 등과 관련한 세미나를 진행한다든지, 여러 진보적 의제들에 대한 공부 세미나를 진행해왔어요. 그러면서 세모에 참여하시는 분들이‘청소년 가만히 있으라’제안문을 써서 청와대 게시판과 페이스 북에 올렸어요. 그때 이미 여러 지역에서‘가만히 있으라’행진 제안문이 올라오는 중이었는데, 어떤 계층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69


에서 제안이 올라온 것은‘청소년 가만히 있으라’ 가 최초예요. 그러곤 명동에서 시작을 하게 되었고, 수십 명의 청소년들이 모여서 행진을 진행했어요. 그런데 사실 아쉬움이 남는 부분들이 좀 있는데, 참사 희생 자들 중에 청소년들이 많았고 그 지역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집회가 있기도 했는데, 그러한 흐름이 이어지 지 못했다는 점이나 교육현장의 구조적인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 등이 좀 아쉬워요.

Q : 조금 다른 질문입니다만, 그러한 흐름 속에서 어떻게 기호 5번 노동당 정진우 후보 선본‘연대와 희망’ 에 합류하게 된 것인가요. 강승 : 시간이 흐르고 난 후,‘가만히 있으라’ 라는 말과 행진 도중에 줄곧 외쳤던‘이윤보다 생명을’ 이 란 말이 국민적인 호응을 얻었죠. 아무튼, 세월호 참사의 문제나 진상규명의 문제들은 계속 있어왔는데, 사실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지만 확실히 누가 책임져야 하나, 그리고 지금 진상규명의 주체가 누구냐, 누가 권력을 잡고 있느냐, 이런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죠. 이제는 슬픔만을 말하고 있을 수 는 없다. 정치적인 행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더욱 적극적으로. 지금 뭐가 문제인지 누가 최고 책임자인지 확실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가만히 있으라’ 와 함께 만민공동회와 같은 움직임들이 이곳저곳에서 있었 고, 결국 6.10 만인대회에서 만나게 되었죠.

6.10 만인대회 때 정진우 부대표가 구속 되었잖아요.‘가만히 있으라’ 에 함께하는 청년과 청소년들이 외면할 수 없었죠. 뜻 을 같이 하기에 돕게 되었고요.

아시다시피 6.10 만인대회 때 정진우 부대표 가 구속되었잖아요. 뭐 지금은 보석이 된 상태 지만. 구속된 상태에서 옥중 출마를 하기로 결 정했죠.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다 가 감옥에 갇혔고, 이 문제를 좀 더 알리고 또 한 현재 가장 악질적인 자본 중 하나인 삼성의

문제를 알리기 위해 출마를 하겠다. 그러한 와중에‘가만히 있으라’ 에 함께하는 청년과 청소년들이 외면 할 수 없었죠. 뜻을 같이 하기에 돕게 되었고요. 사실 모두가 돕고 싶었어요. 근데 문제가 있었죠. 공직선거법상 미성년자는 선거운동을 할 수 없게 되 어있어요. 그 법이 웃기는 게, 선거권이 없는 자는 선거운동을 못 한다고 적혀있는데 심지어 미성년자는 따로 또 한 번 적혀 있어요. 그래서 청소년들은 선거운동에 참여할 수가 없었어요. 이거 관련해서 잠깐 말 씀을 드리면, 청소년의 경우에는 정치적 기본권이 거의 박탈되어 있다시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실 저희 청소년위원회가 불법이거든요.

Q : 일단 위원장부터 청소년이지 않습니까(웃음). 좀 더 들어보고 싶은 것이, 청소년 운동가로서 청소년 이 참가할 수 없는 선거에 참여하게 된 거잖아요. 몇 차례 청소년과 관련된 정책논평 등을 냈던 것으로 기 억하는데요. 선본에 참가했던 소감과 하셨던 역할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강승 : 음, 좀 고민이 있긴 했어요. 원래 선거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거든요. 청소년은 투표권이 70


없고, 선거권을 가진 비청소년 중심의 선거가 항상 이루어졌기 때문에 굉장히 불만이었는데 이번 선거는 어쩌다 보니 부대변인으로 참여하게 되었어요. 선거운동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지역구에 출마한 정의당의 대표인 천호선 후보가 교육공 약을 들고 왔어요. 그중 하나가‘중2병’ 을 때려잡겠다는 내용이었어요. 이와 관련하여 선본에서 논평을 발표했었는데, 천 후보의 공약을 풀어보면 보통 중2가 말을 잘 안 듣고 소위 말하는 일탈행동들을 하니 이 런 증상들을‘학급 수 인원 감축’등을 통해 때려잡겠다는 거였고, 실제로 기자회견에서도 그런 표현을 쓰 더라고요. 사실 중2병은 저처럼 나이가 많은데 자기중심적이고 자꾸 막 우주를 걱정하는 이런 이상한 사 람들 있잖아요(웃음). 이런 사람들에게 붙이는 건데, 중2병이란 걸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그걸 무슨 표심을 사로잡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하려고 하고 있다, 첫 번째 비판 지점이었어요. 그 다음은 중2병에 담긴 어떤 의미 같은 건데요, 사실 중2병이라 불리는 사춘기 시절의 일들은 대부분 소위‘발달과정’ 에서 일어나는, 있을 수 있는 일들이거든요. 근데 그것을 무조건 사회와 분리시키려 하고, 학교라는 특정한 시 스템 안에 가둬두려 하기 때문에 분출되는 방식이 제한되어 있어요. 그리고 과도한 입시나 성적 부담, 학 급정원수 등의 여러 가지 오인들이 있는 건데, 중2병을 무슨 해결해야 하는 질병처럼 묘사한다는 점이 문 제였죠. 사실 천호선 후보가 청소년들에게 중2병을 해결해 줄게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학부모들한 테“자녀들의 중2병을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학급정원수를 줄여서 청소년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 가 아니라 학부모들 보기에 마음에 안 드는 행위들을 교정해 주겠다는 수준이었던 게 가장 큰 문제였고, 논평에는 그러한 지점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들어갔는데, 천 후보가 선본으로 직접 전화도 했었더랬죠(웃음). 또 하나, 최근에 청소년 인권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서명운동을 진행했던 주제 하나가‘아이스마트키 퍼’ 라는 것인데요. 청소년의 스마트폰에 엄청난 권한들을 가지고 있는 앱을 설치해서, 청소년들의 휴대폰 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하고 뭐든 열람할 수 있게 만들겠다라는 아주 무서운 발상이 진행 중에 있었어 요. 청소년들의 통신권 문제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을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는 처사죠. 단순히 스마 트폰중독이니 게임중독이니 이런 말들을 읊으면서 눈에서 치워내고 싶은 거죠. 그러곤 사이버 왕따 예방 했다면서. 처음에 컴퓨터가 나왔을 때 인터넷 왕따가 생겼으니 컴퓨터를 치워버리자고 했던 것처럼. 근데 그게‘진보’후보인 천호선 후보의 공약 중에 있더라고요.“스마트 보안관 앱을 깔아서 통제를 하겠다” 라 고요. 자녀들이 무슨 인터넷 페이지를 들어갔는지를 확인할 수 있고, 이용시간을 체크할 수 있는 거죠. 근 데 이것을 청소년 관련 단체들과 청소년 주체들의 그 어떠한 합의도 없이 쓰는 것은 굉장히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진보후보들이나 진보적인 정책을 가지고 있는 정당들도 교육정책이나 보육정책은 보수적 인 시각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청소년들을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문제점을 크게 느낄 수 있 었어요.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청소년은 투표권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이 청소년이란 존재에 관해 정치 세력들은 관심이 없어요. 평소에도 그렇지만 선거 때는 더욱이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주체로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71


소위 말하는 진보후보들이나 진보적인 정책을

대우하는 정책들은 찾아보기가 힘들죠.

가지고 있는 정당들도 교육정책이나 보육정책

교육/보육정책이 매우 많음에도 불구하

은 보수적인 시각에 머물러 있어요.

고 그것들이 사실 어떻게 하면 좋은 대 학을 보낼까 하는 욕망을 대변하고 있 고, 명품교육이니 스마트 교육이니, 혹

은‘강남’같은 교육이라느니 이런 이야기가 대다수예요. 청소년의 교육권은 무엇인가 하는 기본적인 이 야기는 어디에도 없고요. 물론 이 이야기는 매 선거 때 제기되는 문제예요. 심지어 교육감 선거 때도 마찬 가지였고, 이런 문제들이 가장 크게 느껴지고 있어요. 사실 그러한 문제를 고려해, 선거운동을 진행할 때 논평 등의 방식으로 많이 노력을 하려고 했습니다.

Q : 처음 운동을 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만. 강승 : 사실 중학교 때 전교 남성 중에 머리가 제일 길었던 적이 있었어요. 그냥 자르기 싫어서. 한국에 선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의 인권이 신체의 부분에서부터 보장받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계속 싸우고,‘이 건 인권침해다’등을 적은 글 가져가서 이게 내가 안 자르는 이유라며 항의하고, 교무실에 딱 갖다 놓고 그러곤 자주 싸우고 화장실에서 울고… 그러다가 청소년인권과 관련하여 운동을 시작했던 것 같아요. 고 등학교 때도 미션스쿨에 진학했거든요. 그때 진학한 이유도‘주변에 있는 학교들 중에 두발규제가 약하 다’ 라는 소문을 들어서 간 거였는데 거기서도 많이 도망 다녔죠. 그리고 미션스쿨에 갔는데 저는 종교가 없거든요. 예배 및 종교행사를 하는 걸 틈틈이 거부했죠. 그래서 1, 2학년 때는 승강이를 벌이다 3학년 때 는 담임교사가 안 하고 싶으면 이유를 말하라는 거에요. 그래서 글을 한 장 써서 줬더니 좋다면서 교사가 공론화를 시키겠다 했는데, 교감한테 막혔죠 뭐.

Q : 교사가 공론화를 시키자고 한 건가요? 강승 : 교사가 전교조였거든요(웃음). 그 뒤에도 여러 번 그 학교에서 강제 종교행사 문제가 있었고, 또 꾸준히 문제제기를 했죠. 그때 언론에도 한번 이슈가 돼서 질의서를 보내고 서로 회답하고 학칙을 고치기 도 했는데… 제가 그 뒤에 지역을 떠나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은 모릅니다.

Q : 그러면 어떻게 입당하게 되었나요. 강승 : 트위터! 트위터가 잘못했습니다. 인생을 망치는 지름길입니다(웃음). 사실 여러 가지 고민이 있 었어요.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서울에 가면은 정당에 관련된 활동을 해보고 싶다 는 생각이 있었는데, 당시 진보신당(현 노동당) 청소년위원회(준)이 셧다운제 관련 시위를 하는 것을 봤고, 어떤 공식적인 정치세력 내에서 청소년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는 곳이 있다는 것이 저에게 희망적으로 보 였죠. 그러다가 합당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서 망설임 없이 가입을 했죠. 사실 진보신당과 사회당 사이에서 72


고민 중이었거든요. 그렇게 평범한 당권자 상태로만 있다가 포이동에서 준비모임이 당 원교육을 진행한 적이 있어요. 그때 처음 청소년위원회 사람들을 만나 게 된 것 같아요. 계속 트위터로만 당 활동을 지켜보다가 그 다음해 서 울 소재의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어 요. 그때부터 활동을 시작해보고자 해서 청소년위에 얼굴을 들이밀게 되었죠.

Q : 사실 지금 청년이시잖아요. 정당 안팎으로 청소년 운동을 계속 이어나가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강승 : 사실 그 질문을 자주 받아

학교를 다니던 예전 지역에서 셧다운제 반대 시위를 진행하는 모습

요. 왜 이렇게 늙었냐고들 하세요. 사실 일반적으로 청소년이라고 부 르는 시기는 지났죠. 그런데 저는 그 렇게 생각을 해요. 청소년을 하나의 주체로 보고 청소년운동의 방향성 과 질문에 대해서 끊임없이 동의하 고 그 나아가는 길에 있다면 그 누구

청소년을 하나의 주체로 보고 청소년운동의 방향성 과 질문에 대해서 끊임없이 동의하고 그 나아가는 길에 있다면 그 누구든지, 심지어 90세 노인이라도 누구나 청소년운동에 함께할 수 있어요.

든지, 심지어 90세 노인이라도 누구 나 청소년운동에 함께할 수 있다고. 사실 대학에 있기 때문에 학교 학생운동에 발을 걸치고 있다고 할 수 있죠. 학회나 이것저것 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떠한 것을 하면서도 청소년운동에서 얻은 것들 습관이랄지 태도 같은 건 버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를테면 나이주의라 불리는, 나이로 받는 차별과 또는 나이로 생기는 구조적 측면들 을 항상 생각하면서 활동을 하고 있어요. 사실 권위주의라 할지 교육에 대한 사유라 할지 모르겠지만, 한 인간이 한 생애에 걸쳐서 어떻게 대우받아야 하는지, 한 인간이 어떻게 인간으로서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도 저의 운동을 이끄는 한 축이고요. 직접적으로는 주로 대학에서 이야기되는 학벌문제 역시 입시 관련해 서 청소년운동과 항상 맞닿아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73


물론 사람은 계속 바뀌기 때문에 제가 본격적인 청소년운동과는 좀 멀어질 지도 모르지만, 거기서 받 은 경험들은 결코 잊지 않고 꾸준히 이어나갈 것 같아요. 그게 당내에서 청소년운동이 계속 있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해요. 자본주의 구조에 대한 질문이나, 당에서 다루고 있는 의제 중 하나인 학벌이나 노동 의 문제에서도“우리는 인간을 어떤 교육제도나 분류제도에 따라 어떻게 평가를 할 것인가” , 혹은“어떻 게 인간을 시민으로 만들어 갈 것인가” ,“공장의 주인은 누구이고 학교의 주인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계속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또 어떻게 사람이 주체화되는지, 사람의 정신이나 습관이 어떻게 형 성되는지가 청소년과 밀접하게 닿아있기 때문에‘청소년’ 은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중요하죠. 좀 다른 얘 기일 수도 있는데, 어떻게 보면 모두를 애 취급하는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누구도 애 취급하지 않 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요. 그리고 청소년 운동을 이곳에서 이어나가는 다른 이유로는, 노동당이 청소년/청년 정당을 표방하고 있 기 때문이죠. 모든 정당이 젊은 정당을 표방하려고 하지만 실제론 그 표방하는‘청년’ 이 없잖아요. 당장 당협 모임만 가도 그렇고. 어떻게 해 야 청소년들이 관심을 가지게 만드

청소년 운동을 이곳에서 이어나가는 다른 이유로

냐는 것은 청소년의제와 청년의제

는, 노동당이 청소년/청년 정당을 표방하고 있기

를, 그들이 관심 있는 것들을 적극적

때문이죠. 모든 정당이 젊은 정당을 표방하려고 하지만 실제론 그 표방하는‘청년’ 이 없잖아요.

으로 발굴하거나 가지고 오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들이 정말 원하는 욕망은 무엇인지 보다‘정치 적’ 으로 대변할 필요가 있죠.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 없는 정당이란 것은 사실 상상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예전 통합진보당 당시에 청소년 당 원들의 당원 자격을 박탈했던 부분 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으로 생각합 니다. 아무튼 현재 청소년위원회는 다 양한 역할이 있지만, 사람들을 정치 적으로 주체화시킬 수 있는 공간이 기도 하다는 점에서 중요해요. 예를 들어 지금 청년학위의 위원장을 맡 고 있는 김재석 씨의 경우도 예전에

‘청소년 정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포럼 당시 발제 중인 모습

74

는 청소년위에서 같이 일했었고 지


금은 청년녹색운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계신 걸 보면, 단순히 청소년의제 뿐 아니라 노동당의 여러 정면의 제를 말하는 활동가를 만드는 창구로서 청소년 정당을 표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 로는 노동당이, 예를 들면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와 청소년의 선거권의 의제를 적극적으로 요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Q : 청년으로서, 그리고 청소년운동가로서 현재 진보정치가 처한 상황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강승 : 기본적으로 현재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노동당의 이런 여러 가지 각각의 지역의제와 부문의제를 가지고 있는 여러 사람들을 연계하고 구축하는 작업이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청년학생위와 청소년위가 학벌과 입시에 관련하여 당원들과 적극적으로 연계해서 이 의제를 적극적으로 펼쳐나가는 작업을 할 수도 있겠죠. 그리고 각 시민운동, 청소년, 청년, 노동, 여성, 성소수자 운동 등을 통해서 나오는 여러 가지 성과물들을 당에서 정책이나 여러 가지 행사들을 통해서 배 합하고 이것을 전당적으로 풀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당원교육을 시범적으로 몇 번 진행했었을 때, 참여율이 꽤 저조했었습니다. 당원교육을 활성화 하고, 한편으론 이 당이 무엇을 주장 하는지를 많이 알릴 필요가 있고,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각 부문들과 지역들의 연계가 시급하다고 생각해 요. 직접적으로 청소년 관련해서는 정치적 권리 관련하여 청소년이 당내 부문위원장 혹은 전국위원/대의 원으로 존재하는 정당으로서, 그런 것에 대해서 확실히 못박고 주장해야겠죠. 그리 고 청소년, 청년부터 노인까지 되는 다양 한 당원들과 적극적으로 함께 해야겠고, 그들 또한 적극적인 주체가 되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진보정치의 재편도 쓸모가 없다

청소년, 청년부터 노인까지 되는 다양한 당원 들과 적극적으로 함께 해야겠고, 그들 또한 적 극적인 주체가 되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진보 정치의 재편도 쓸모가 없다는 게 명확해야죠.

는 게 명확해야죠.

Q : 마지막 질문입니다만, 이런 흥미진진한 한 해를 보내셨으니 이후엔 무엇을 하실 예정인지요. 강승 : 저는 아까 말했다시피‘어떻게 청소년들과 만날 것인가’ 하는 고민들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청소년들과 만나고 의제를 주장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죠. 개인적으로는 꽤나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청소년의 정치적 움직임에 대해 관심이 있는 청소년활동가들과 함께 연구와 활동 을 통해 청소년 정치 운동의 바탕을 만드는 작업을 해보려 합니다.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75


정책포럼

상가임대차문제, 개인관계를 넘어

사회관계의 재구성으로 풀자 김상철 서울시당 사무처장

아마 한국 자본주의의 가장 비인간적 측면을 드러내는 공간이 상가일 것이다. 애초 지하 철이나 철도역사와 같은 공적 공간을 잠식해 들어갔던 선두에 백화점과 쇼핑몰이 있었고, 이들은 지하철로, 기차로 걸어가는 길을 자신의 내부로 삼켜버림으로써 시민을 강제로 소 비자로 둔갑시켰다. 그렇게 공적 공간을 잠식해가는 자본의 천민성은 홍대 앞이나 명동과 같은 상업밀집지역에서는 아예 야만 그 자체가 되고 만다. 저명한 건축가인 김석철은 그저 자신의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데 방해가 되는 상가임차인을 내쫓으려 혈안이 된 건물주에 불과하고(까페 12PM이 그렇게 쫓겨났다),‘당신의 꿈을 이루어드린다’ 는 온라인 창업지원업

10년 영업을 약속했던 건물주는 임차인‘킹오브블루스’측에 어떤 일언반구도 없이 메이크샵에 건물을 매각했다. 상가세입자가 열심히 일해서 만들어놓은 무형의 가치인 상권이 고스란히 건물주의 재산으로 착취되는 것이다. (사진 : 서울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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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메이크샵은 하루 아침에 상가임차인에게 소송도 불사한다(홍대앞 킹오브블루스가 그렇다).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창의성을 바탕으로 대표적인 패션몰로 성장한‘난다’ 의 전례없이 창의적인 명도 소송이다. 난다가 구입한 명동의 상가건물에는 이미 장사를 하고 있던 임차인이 있었고, 계약기간 역시 남아있는 상태였다. 이 경우 건물주의 변경이라는 이유만으로 임차인을 내쫓을 방법이 없다. 그래서 건물 을 인수한 난다는 임차인이 매월 납부해야 하는 월임대료의 납부계좌를 가르쳐주지 않고‘일단 맡아두라’ 는 식으로 임차인에게 말한다. 임차인은 당연히 건물주가 그렇게 말했으니 임대료 입금계좌를 통보해줄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데 3월이 지난 시점에 갑자기 법원에서 서류 한 통이 날아든다.‘명도소송’ 이 제기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서류였다. 내용을 보니 임대료를 밀렸기 때문에 명도소송을 제기한다는 것이었는 데, 현재‘상가임차인보호법’ 에서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사항을 악용한 것이다. 여기에 기획부동산까지 끼어들면, 홍대나 신촌, 명동이나 강남역과 같

홍대나 신촌, 명동이나 강남역과 같은 상업밀집

은 상업밀집지역은 그야말로 정글이

지역은 그야말로 정글이 되고 만다. 무조건적인

되고 만다. 무조건적인 약육강식의 세계, 건물소유주가 무소불위의 권한 을 행사할 수 있는 절대적인‘자본의

약육강식의 세계, 건물소유주가 무소불위의 권한 을 행사하는 절대적인‘자본의 공간’ 인 것이다.

공간’ 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그래 서 기본적으로 상가임차인의 문제는 냉정한 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구체적인 상업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투쟁의 장으로 이해해야 한다.

누가 가치를 생산하는가 이런 상가임차인 문제를 접근하는 데 도통 도움이 되지 않는 법제도와 더불어, 상인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정서도 곤란스러운 부분이다. 우리는 보통 약자라고 할 때 무결점의 순수한, 100% 약자를 생각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상가임차인의 문제에서 이를 기대하면 안된다. 노동당이 주목하는 약자는 불합 리한 관행과 자본에게만 유리한 법제도에 의해 발생하는 구조적인 의미에서의 약자이지, 윤리적 선함으 로 무장한 개인이 아니다. 따라서 상업이라는 공간에서 임차인들 역시 경제적 이익을 최우선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상가임차인 문제에 있어 핵심적인 질문은‘상가건물의 가치는 누가 만들어내는가’ 이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 2월 25일‘경제혁신 3개년 계획’ 을 발표했고 곧장 뒤이어 3월 5일에는‘세부 실행 과제’ 를 확정 발표했다. 여기에는 그동안 정부가 인정하지 않았던 상가 권리금 문제가 본격적으로 언급되 었다. 즉, 권리금의 법적 정의 등을 올해 안에 정비하고 2017년까지 임차인 피해구제를 위한 구체적인 방 안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정책포럼 77


과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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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건물 ·상가건물임대차 보호법 개정 임대차 보호법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 개정 개정안 시행 ·권리금 피해구제를 위한 보험상품 개발 기타 구제방안 ·권리금거래·상가임대차 표준계약서 보급 지난 3월 5일 발표한 세부 실행계획 중, 상가 권리금 문제에 대한 추진계획이다. 단기적 처 방으로 법 개정과 함께, 보험상품 개발이 들어가 있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2014. 3. 5. <경제혁신 3개년 계획, 세부 실행계획>, 관계부처 합동.

이렇게 상가권리금 문제가 주요하게 다루어진 것은 권리금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지속적으로 야기 된 탓도 있지만, 명백하게 현존함에도 불구하고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없는 것’ 처럼 대해온 행정/사 법기관의 의도적인 방치에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 이럴 경우, 법적 지위에 있어 임차인에 비해 월등한 위 치에 있는 임대인이 권리금 구조에 일방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 즉, 임차인이 형성한 무형의 자산을 임대 인이 일방적으로 편취할 수 있도록 했다고 볼 수 있다. 권리금은 크게 점포 내에 설치된 인테리어, 영업시설, 비품 등 유형물에 대한 대가라는 측면에서의‘시 설권리금’ , 거래처나 신용, 그리고 영업상의 노하우 등 점포의 상호와 고객을 모두 인수하는 대가는‘영업 권리금’ 이라 하며 빈 점포에 존재하는 것으로 장소적 이익에 대한 대가로서‘바닥권리금’ 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이는 상가임차인 입장에서 보면 실질적으로 큰 의미가 없는 구

권리금이라 불리는 무형의 자산에 대한 처분권은

분으로, 사실상 건물 소유주인 임대

상권 형성에 직접적인 이해관계자이자 업종의

인과 맺는 계약과는 별개로 임차인

선정 및 단골의 형성, 거래처의 확보까지 만드는

간에 거래되는 무형의 자산에 대한

임차인에게 귀속되는 것이 타당하다.

거래를 통칭하는 의미로 권리금이라 보면 된다. 실제로 대법원 2000년 판례(2000다26326), 2001년 판례

(2000다59050), 2002년 판례(2002다25013)에서는 권리금을 속성별로 분류하여 보장 가능한 권리금의 범

위를 한정하려 했지만, 2013년 판례(2012다115120)에서는 권리금 자체의 속성 구분보다는“임대차계약이 나 임차권양도계약 등에 수반되어 체결되지만 임대차계약 등과는 별개의 계약” 으로 독립적 계약의 성격 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권리금이라 불리는, 기존 임대차 계약에 따른 부동산의 임대 외에 수반되는 무형 78


의 자산에 대한 처분권이 어디에 귀속되는 것이 타당하느냐의 문제이고 이는 상권 형성에 직접적인 이해 관계자이자 업종의 선정 및 단골의 형성, 거래처의 확보까지 만드는 임차인에게 귀속되는 권리로 파악하 는 것이 타당하다. 그것이 권리금 문제에 있어 핵심적인 질문으로‘누가 가치를 생산하는가’ 라는 물음이 던져지는 이유다.

노동당의 대안, 개인간의 계약을 넘어서는 사회관계의 관점 원래 정부는 지난 7월 중에 권리금 양성화와 관련된 공청회를 개최할 예정이었다. 그 방안은 기획재정 부, 중소기업청, 산업자원부가 개별 용역위탁을 통해 마련하고 이를 가다듬어 양성화방안을 마련한다는 것이었는데 이 계획이 연기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권리금의 양성화는 필연적으로 상가임차인의 권리보 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재산권’ 을 천부인권으로 삼는 정부에서는 소유주인 건물주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장 권리금에 대한 과도한 보장이 건물 매매시장에 부작용을 줄 수 있다는 소리가 주요 경제지를 통해서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다. 일반적인 관점이라면 권리금의 문제를 특정 건물주와 임차인, 그리고 기존 혹은 신규 임차인 간의 관 계 즉, 개인 간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올해 초에 나온‘상가권리금 보호에 관한 특별법안(민병두 의원 대표발의)’역시 그런 관점에서, 임대인의 임차인간 권리금 거래 보장, 권리금 거래에 대한 기장 및 보고 의무 신설, 임대인에 대한 권리금 상당액의 피해보상 요구권 보장 등을 포함하고 있다. 즉, 권리금의 문제를 건물주인 임대인과, 기존 임차인-신규 임차인의 계약관계로 접근하면서 몇 가지 법 적 의무를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위험한데, 왜냐하면 권리금이라는 것이 객관적인 조건에 따라 산정되는 금액이 라기보다는 오히려 미래에 대한 기대심리나 혹은 기존 상권에 대한 주관적 평가에 따른 금액의 성격이 더 욱 크기 때문이다. 즉, 임차인 간에 거래되는 권리금은 그야말로‘조정’ 을 통한 합의를 통해서 형성된다. 그런데 정부의 계획이나 민병두 법안에서와 같이 이를 개인 간 계약관계로 특정하게 되면 그 금액을 평가 하는 방식을 둘러싼 추가적인 논란이 불가피 하다. 실제로 재개발 과정에서 나타나는 상 가보상에 있어 손실감정은 늘 첨예한 쟁점으 로 제기되며 숱한 소송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권리금은 이미 거래이력이 존재하는 실

권리금 문제를 해결하려면 단순히 임대인과 임차인, 그리고 임차인과 임차인의 개별적 인 관계로만 풀기에는 한계가 있다.

질적인 재화의 흐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존에 거래되었던 권리금을 적정화하는 것은 기존 거래의 현실을 고려해 순차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그 래서 권리금 문제를 해결하려면 단순히 임대인과 임차인, 그리고 임차인과 임차인의 개별적인 관계로만 풀기에는 한계가 있다. 정책포럼 79


< 조사대상 임차인의 일반현황(평균) > ○ 종사자수 : 1.6명 ○ 월매출액 : 1,483만원 ○ 계약기간 : 2.6년 ○ 보 증 금 : 전세(4,982만원), 보증부 월세(2,635만원) ○월

세 : 보증부 월세(111만원), 무보증부 월세(106만원)

○ 임대유형 : 보증부 월세 95.3%, 전세 2.8%, 무보증 월세 1.7% 중소기업청은 2013년 12월‘상가임대차 실태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는 전국 15개 광역시도의 8천 명 정도의 샘플조사로 진행되었는데, 현행 상가임대차 보호법에 따른 법정 통계에 해당된다.

노동당은 상가임차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시급한 문제로, 임차기간 문제를 제기한다. 작년 중 소기업청이 진행한 <상가임대차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임차상인들의 평균적인 임차기간이 고작 2.6년 정도인 것으로 나타났다. 작년에 개정된 법률은 초기 3년에 추가 2년으로 총 5년간 임차기간을 보 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런 법의 취지를 찾아보기 힘들다. 더욱이 상가임차인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 자 체를 인지하고 있는 임차인이 고작 10% 미만이라는 점을 보면, 얼마나 많은 상가임차인들이 법의 사각지 대에 놓여 있는지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임차기간이 보장되면, 초기에 매몰된 권리금을 회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고 특정 업종 의 상권이 가지고 있는 실질적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합리적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더욱이, 2년마다 쫓기듯 점포를 정리하여 사실상 권리금 장사로 오인될 수 있는 임차관행 역시도 바뀔 수 있다(1년 남짓이야 손실을 감수하고 장사를 할 수 있지만, 5년 이상 장기간을 권리금 때문에 손실을 보고 장사를 하긴 힘들다).

이와 함께 권리금의 문제를 임차인과 임차인간의 관계로‘보호’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 은, 최근 홍대앞이나 강남역 주변에서 등장하는 기획부동산을 매개로 하는 프랜차이즈 법인과 개별 상가 임차인을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정부정책으로 임차인 단체 혹은 조합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대규모 자본을 가지고 있 는 프랜차이즈와 기획부동산에 맞설 수 있는 제 도적 대항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래서 정부정책으로 임차인 단체 혹은 조합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대규모 자본을 가지고 있는 프랜차이 즈와 기획부동산에 맞설 수 있는 제도 적 대항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 다. 당장 힘들다면, 개인 임차인이 요

구할 경우 임차계약 관계를 구청이나 혹은 임차인이 지정하는 공인중개사, 민간단체의 전문가가 대행하 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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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상업용도의 건물의 보증금에 대해 적정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일반 주택용도의 건물과 다 르게 상업용도의 건물 소유자는 그 자신이 상가를 운영하는 상인이 아닌 다음에야 임차상인이 만들어 놓 는 사회적 가치에 일방적으로 무임승차하는 불로소득자다. 노동당의 입장에선 단지 소유만으로 이윤을 편취해가는 천민 자본주의의 이자 생활자들의 행태까지 소유권에 따른 정당한 이익으로 볼 이유가 없다.

(1) 상가임차인의 최초 계약기간을 10년으로 한다 (2) 권리금은 임차인간의 양도양수권리를 보장해주며, 그 기준은 실 권리금 이력을 바탕으로 한다. 또 한, 법인임차인과의 대항력을 위해 개별 임차인 조합 등을 육성 지원하며, 요청이 있을 경우 대행할 수 있 는 권리를 부여한다. (3) 상업 용도 건물의 보증금 공시제도를 도입하고, 기준비율을 매년 수립한다.

지난 8월 14일부터 서울시당은 홍대

작년부터 서울시당이 함께한 상가임차인 분쟁

앞에서 상가임차인 권리상담소 사업을

사례에서 절대 다수가 홍대앞 상가에서 발생했

시작했다. 작년부터 서울시당이 함께한 상가임차인 분쟁사례에서 절대 다수가 홍대앞 상가에서 발생했으며, 이 과정

으며, 이 과정에서 구청 민원, 법원 제출서류, 탄 원서 조직, 기자회견 및 집회 등을 개최해왔다.

에서 구청 민원, 법원 제출서류, 탄원서 조직, 기자회견 및 집회 등을 개최해왔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례가 이미 사태가 진행된 상태에서 급박하 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늘 소송과 농성 등으로 이어지는 어려운 과정을 겪었다. 앞서 언급했듯 상가임차보 호법이 있어도 상인들에게는 그림 속의 떡에 불과한 상황에서 사전에 문제를 함께 논의하고 대책을 마련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당은 이 과정을 통해서 구체적인 상가임차인들의 사례를 모아 좀 더 근본적 인 상가임차인정책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정책포럼 81


원전 추진,일본 진보운동의 ‘붉은 개발주의’

동아시아 시민운동사

임경화 대학 비정규직 연구자, 서울 금천구 당원

2011년 3월 11일에 발생한 동일본대진재는 일본의 관측사상 최대의 지진과 쓰나미가 발 생하여 2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곧바로 인류가 일찍이 경험 해 보지 못한 초대형 원전 사고가 뒤따랐다.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사고가 그것이다. 3기의 원자로가 동시에 멜트다운을 일으켰고 대기중에 방출된 세슘의 양만 해도 IAEA에 보고된 것만으로도 히로시마 원폭 170발분에 상당하는 이 사고는, 후쿠시마의 광대한 땅을 무인지 대화했고 수많은 사람들을 방사능에 노출시켰다. 2년도 전에 일어난 일이라 한국에서는 많 이 잊혀졌지만, 실은 지금도 고농도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로 흘리고 처치가 곤란한 방사능 쓰레기를 방치하고 있어, 자국의 주민들은 물론이고 지구 규모로 그 피해가 확대되고 있지 만 언제 어떻게 종식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현재진행중인 극히 중대한 사고다.

원자력산업은 일본자본주의 성장노선의 상징 지진과 쓰나미 대국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일본은 어떻게 터졌다 하면 대형참사로 이 어지는 원전을 54기나 보유한 원전대국이 되었을까. 거기에는 경제대국의 꿈이 있었다. 전 후 일본은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 속에서 지정학적 중요성을 가지는 지역으로 미국의 원조 와 지원을 바탕으로 정치적 독립과 자본 축적에 성공하여 이미 50년대 후반부터 아시아 지 역에서 일정한 경제적 패권을 행사하며 미국과 그 경제적 지배권을 분점하기 시작했으며, 군사적으로도 미일동맹에 의존하여 그 요청에 따르면서도 거기에 자신들의 군사적 패권 추 구 욕망을 철저하게 겹쳐갔다. 1960년대에 경제대국화한 일본은 미일원자력동맹에 기초하 여 수출 주도 경제성장노선을 지속시키기 위한 에너지정책으로 원전개발을 추진하고 그와 동시에 다량의 플루토늄을 손에 넣음으로써 잠재적 핵보유국으로 군사대국화의 길을 내달 렸던 것이다. 82


3월 11일 대지진에 뒤따른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사고

원자력산업은 일본자본주의 성장노선의 상징이었다. 미국의 군산복합체인 원전을 도입하고 보급, 발 전, 유지하는 전 과정에는, 정계와 재계가 결탁하고 관계, 학계, 언론계가 유착하는 거대한 이익집단이 관 여했다. 오일쇼크 시절에는 에너지 절약과 IC 기술의 산업화에 성공하여 수출을 증대시킬 수 있었는데, 그 에너지절약정책의 일환으로 원전 이 선전되었던 것이다.“경제적이고 안전하고

원자력산업은 일본자본주의 성장노선의 상징이었다. 정계와 재계가 결탁하고 관

친환경적인 원자력에너지” 라고. 이 이익집단

계, 학계, 언론계가 유착하는 거대한 이익

은 79년과 86년에 각각 미국과 소련에서 원전

집단이 관여했다.

사고가 발생해 반원전의 기운이 세계적으로 고 양되었을 때도 끄떡없이 가동과 증설 붐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버블 붕괴 후 급격한 경기침체로 재정 적자가 이어지자, 경제위기를 회피하기 위해 비정규직을 양산하여 고용불안을 초래했고 복지정책도 후퇴 했으며, 각종 규제완화로 안전사고도 빈발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일본자본주의 성장노선의 파탄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원자력의 평화 이용 용인한 일본공산당 일본은 어쩌다가 이런 상황에 처하고 말았을까. 전후 일본자본주의의 틀을 짜온 보수 자민당 정권에 동아시아 시민운동사 83


씻을 수 없는 역사적인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다. 한데, 실은 2009년에 기나긴 자 민당 정권을 종식시키고 정권교체를 이룩한 민주당도 2030년까지 원전 의존율 50%라는 터무니없는 에 너지 기본계획을 수립했을 정도이니, 원전에 관한 한 자민당과 민주당의 차이는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진보세력들은 왜 그토록 흔들리는 대지에 원전대국을 건설하려는 보수정권들의 어처구니없는 꿈 에 제동을 걸지 못했을까. 다름이 아니다. 진보세력들도 원전추진 세력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공산당은, 각국의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세계 최초로 군사무기로서의 원수폭을 개발한 미국 을 제국주의 전쟁세력의 상징으로 간주한 반면, 1954년에 세계 최초로 원전을 건설한 소련은 원자력 평화 이용의 길을 개척한 평화세력의 상징으로 보

일본공산당은, 각국의 공산당과 마찬가지 로 1954년에 세계 최초로 원전을 건설한 소련을 원자력 평화 이용의 길을 개척한 평화세력의 상징으로 보았다.

았다. 그들에게 원전 개발이나 인공위성의 성 공 등에서 드러난 소련 과학기술의 우수함은 인간의 자연정복에 새로운 기원을 연 사회주 의체제의 우위성의 증명으로 여겨졌던 것이 다. 특히 1954년 미국의 비키니 섬 핵실험 시 에 그 일대를 지나던 일본의 참치 어선 선원

들이 피폭하여 생명을 잃는 사고가 발생하고 나서 국민운동으로까지 발전했던 원수폭금지운동이 전개되 었을 때, 일본공산당은 당시부터 원수폭 보유 및 사용에 대해서는 반대하면서도 원자력의 평화 이용은 용 인했다. 원수폭금지운동도 55년 출발 당시부터 원자력의 군사이용에는 반대하고 평화 이용으로 돌릴 것 을 제창했다. 이러한 움직임이 당시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쇼리키 마쓰타로 등이 국책으로 추진한 원전 도 입 시나리오를 측면에서 지원했던 것이다.

공산당 계열과 사회당 계열의 분열 여기에는 일본사회당이나 총평(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원전을 자립적 경제성장을 뒷받침해주는 안정적 에너지 공급의 토대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1961년 소련의 핵실험 재개 때부터‘어떠한 국가의 핵실험에도 반대’ 한다는 사회당 및 총평과,‘사회주의국가의 방위적 핵’ 을 인정하는 공산당이 대립하여, 65년에 공산당 계열 원수폭금지일본협의회(원수협)와 사회당 계열 원 수폭금지일본국민회의(원수금)로 분열했다. 70년대에 들면 사회당 계열은 원전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운 동, 환경운동에 관여하면서 반원전운동 진영에 서게 되었는데, 공산당 계열은 석유 위기를 돌파하는 대체 에너지로서의 원자력을 중시하여‘평화 이용’ 의 가능성을 고집했다. 최근까지 공산당에게 사회주의 하의 원자력은 생산력의 전면적 해방을 가져다 준다는 신념에 흔들림이 없었다. 즉, 자본주의적 개발주의와 사 회주의적 개발주의가 상호보완하면서 지진대국 일본을 원전대국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70년대부터 반핵, 반원전운동을 일관했으며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반원전운동의 상징이 된 원자력 84


공학자 고이데 히로아키 씨도 공산당 원이 많았던 일본원자력연구개발기구 로부터 공격을 받았던 사실을 폭로하 기도 했다. 고이데 씨가 줄곧 반원전 운동에 몸담아 온 것은 원전은 다름아 닌 차별의 문제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에서였다. 이것은 삼척 원전건설 반대투쟁이나, 밀양 송전탑 반대투쟁 에서 우리가 명확히 보았듯이, 대도시 나 수출공업단지에 대량의 전기를 안 정적으로 공급한다는 명목으로 농촌 과소지역에 원전을 건설하여 지역주 민에 위험을 떠넘기고, 긴 송전선에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반원전 운동의 상징이 된 원자력공학자 고이데 히로아키 (사진 : 레디앙)

고압 전류를 흐르게 함으로써 곳곳의 주민들의 건강과 삶을 파괴하는 과소지역 차별에 다름 아니다. 그 뿐인가. 원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평상시에도 내부피폭을 당하며 사고라도 일어나면 다량의 피폭으로 생명까지 위험한 상태에 놓인다. 원 전은 생명을 조금씩 죽여가는 노동자들의 노동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는 가장 악질적인 노동 차별 산업이 다. 그 뿐인가. 원전 가동으로 발생하는 전기는 현재 세대가 쓰면서 핵폐기물은 반영구적으로 미래 세대 에 남김으로써 미래 세대를 차별하는 구도가 원전 산업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뼈아픈 자기반성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명백한 차별과 착취의 구조를 옆에 두고서도 진보운동 측은 못 봤거나 안 봤거나 보고도 못 본 척했다. 왜 일까. 그것은 원전이 일본의 경제발전에 필수적이라는 믿음을 진보 진영도 공유했기 때 문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참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원전사고로 책임을 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고, 원전을 둘러싼 이권세력들은 사고를 축소, 은폐하는 데 급급할 뿐이다. 이쯤 되면 사회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이 무책임의 구조는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한데 여기 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지금 일본의 진보 진영은 반원전 공동전선을 짜고 원전 추진 세력과 대치하 고 있지만, 그와 함께 스스로가 과거에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지에 대한 뼈아픈 자기반성이 필요할 것이 다. 원전=핵정책에 쐐기를 박고 붉은 개발주의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추동 하는 세력임을 자임할 자격은 부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동아시아 시민운동사 85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싱크홀, 자본주의형 도시괴담이 되다 김상철 서울시당 사무처장

올해만 들어 다섯 개의 싱크홀이 생긴 송파구 석촌 호수 주변에서는 급기야 지하 동굴이 발견되는 처지에 이르렀다. 뭔가 사태의 규모가 굉장하게 확대되는 감이 없지 않다. 게다가 그 동굴의 위치가 현재 지하철9호선 연장 공사가 진행된 위쪽이라니 이것 뭔가 대단한 것들 이 서로 얽히고설켜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 아닌 기대를 갖게 된다. 때마침 제2롯데월 드를 지켜주어야 하는 송파구청에서는 연일‘지하철9호선’탓으로 돌리거나(구청 홈페이지 어디에도 구청의 공식적인 보도 자료는 발견할 수 없다), 제2롯데월드 부지와 싱크홀 지점 간의

거리를 부각시켜 다른 데로 눈을 돌리게 하느라 바쁘다.

최근 논란이 되는 싱크홀은 짧 은 기간에 송파구 석촌호수 주 변에 밀집하여 나타나고 있는 특징이 있다. 이는 싱크홀이 하나의 사소한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인 사태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높인다.(출처: 2014년 8월 9일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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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가 이 지경이니, 서울시와 국토교통부에서도 한 마디 안할 수 없는 상황이긴 하다. 국토부는 최근 싱크홀 발생 원인에 대해‘제2롯데월드, 지하철 9호선 등 건설공사 과정에서 터파기를 할 때 지하수 수맥 을 건드려 지하수가 흙을 쓸어내리면서 땅 밑에 공간이 생겼을 가능성 과 노후 상·하수도관이 부식되면 서 물이 흐르고 흙을 쓸어갔을 가능성 등’ 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 와중에 제2롯데월드는 시범개장을 한다 고 하고, 서울시는 싱크홀의 원인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채 임시개장을 허가했다. 서울시나 롯데월드 측은 원인이 특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롯데월드 개장을 미루는 것은 과도하다는 입장이다. 뭐, 이런 입장 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싱크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여러 가지 정의가 있지만 종합해보면, 원인을 특정할 수 없는 이유로 지반이 붕괴하여 큰 구멍이 발생하는 현상이다. 실제로 싱크 홀의 사례는 중국이나 태국과 같은 인근 아시아 국가에서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먼 나라까지 빈번히 발생 하고 있다. 과테말라에서 발생한 싱크홀은 그야말로 지구중심으로 뚫린 터널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데 이들 싱크홀의 출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많은 경우에 아스팔 트가 많은 도심부에서 관찰되고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지하철이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태국 영자지 <네이션>이 보도한 라마 4번 도로의 싱크홀은 그 아래 두 개의 노선이 교차하는 지하철 노선이 있 었다. 뉴욕 맨하탄에서 발생한 작년과 올해 싱크홀도 도로에서 발생했는데 그 아래로 지하철 노선이 지나 가거나 교차했다. 물론, 영국에서 보도된 사례는 런던 주변의 주택가에서 발견되어 싱크홀이 지하철과 직 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된 도심지역 에서 많이 나타나는 싱크홀은 일종의‘도시병’ 으로 볼 여지가 많다. 실제로 미국에서 발생한 싱크홀을 분 석한 기사에서 빈번히 출현하는 단어를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flood’ 라는 말로 흔히 홍수라고 번역된다.

2013년 1월에 중국 광저 우에서 발생한 싱크홀은 아예 도시 주차장에 절벽 을 만들어 냈다. 중국은 최근 도시지역을 중심으 로 싱크홀이 빈번하게 발 생하고 있는데, 올해 초 에도 청두지역에서 대규 모 싱크홀이 발생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약간 다른데, 국지성 호우로 보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니까 2일 동안 비가 꾸준히 내리는 것이 아니라 두 시간 동안 같은 양의 비가 홀라당 내리는 현상이다. 결국, 문제는‘물’구체적으로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87


는‘물은 아래로 흐른다’ 는 물리적 속성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현재 도시는 어떤가. 서울만 하 더라도 국립공원 등 보호된 녹지를 제외하고 불투수층 비율이 90%를 넘어서고 있다. 하늘에서 내린 빗물 이 넓은 범위에서 흡수되어 오랫동안 형성된 지층 내 물길 경로를 타고 흐르거나 도시의 상징인 하수체계 를 통해 흘러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물길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아스팔트의 틈이 있 다면, 주택과 지면의 틈이 있다면 빗물이 그 공간을 침투한다. 즉, 도시가 가지고 있는 어쩔 수 없는 균열 이 물의 물리적 속성에 의해 벌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층 내에서 새로운 물길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물길과 군데군데

지금의 도시는 매우 불안정하다.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의 예측을 가장 극단으로 밀어 붙여, 하나씩 그것을 소거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박혀 있는 바위의 중력이 시너지를 내면 붕 괴할 수밖에 없다. 말도 안 되는 공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 다. 크게 부인할 생각은 없다. 기껏해야 외 신 몇 개와 몇 십년동안 싱크홀을 연구해왔 다는 플로리다 모 교수의 인터뷰만 본 처지

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도시가 매우 불안정하다는 것은 추가적인 데이타가 없어도 쉽게 추정할 수 있 다. 점 점 더 한곳에 질량을 집중시키는 고층빌딩의 존재, 지속적으로 땅 속을 헤집는 지하상가 개발과 지

서울시 도시철도기본계획에 반영된 신규 경전철 건설 노선 현황. 총연장 89킬로미터에 달해, 기존의 노선 과 합쳐지면 771킬로미터에 달한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를 450킬로미터라고 한다면, 1.5배가 넘는 길이다. 멀쩡하게 사람이 걸어다니는 길 아래에 이런 빈 구멍들이 깔려 있다는 사실이 두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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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철 건설, 점점 촘촘하게 채워지고 있는 아스팔트와 시멘트바닥, 이런 조건에서 기후변화로 야기된 국지 성 호우가 반복되는 기후상황은 과거의 어떤 사례에서 만들어진 빈도로 측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예측을 가장 극단으로 밀어붙이고, 하나씩 그것을 소거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가장 극단적인 가정이라면 현재 서울시의 지하상가, 지하철 등 지하공간 상부의 동시 침하 문제다. 여 기에 상하수도관과 같은 지하매설 시설물까지 고려하면 사실상 서울시내는 지뢰를 품고 있다고 봐도 무 방하다. 2008년도에 국토교통부가 조사한 지하보도 규모를 보면, 서울시내에 29개의 공공지하보도시설 이 존재하고, 총연장은 5,820미터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의 총 면적은 14만 6,374제곱미터다. 여 의도의 면적이 2,900제곱미터이니, 서울지역의 지하는 논외로 하더라도 지하철의 경우에는 총연장이 20 개 노선에 682킬로미터 정도다. 상상이 가능한가. 여기에 박원순 서울시장은 경전철 10개 노선을 도입하겠다고 나섰다. 이 중 하나인 위례선은 노면전철 로 추진한다고 하니 지하철도는 총 9개 노선이 될 것이다. 아무리 전문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지하공간의 개발이 기존의 지층 구조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쉽게 추정할 수 있다. 게다가 물이 한 방울도 들 어가지 않는 불투수면의 증가가 그 밑의 지층에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영향을 줄 수밖에 없을 것이란 추 정, 적어도 아스팔트가 없던 시기와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은 충분히 할 수 있다. 또 서울시는 잠실주경기 장의 리모델링을 위한 재원을, 잠실주경기장 주변의 새로운 지하상가 개발을 통해서 충당한다는 계획이 며 이를 민자사업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또,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경인고속도로 서울시 부분을 제물포터 널이라는 민자사업으로 전체 지하화할 계획 을 추진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교훈은 꽤나 단순명징 하다.‘공짜는 없다’ 는 것이며,‘부자가 책임 지는 경우는 없다’ 는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교훈은 단순명징하다. ‘공짜는 없다’ 와‘부자가 책임지는 경우는 없다’ 는 사실이다. 세대와 계층을 중심으로

싸게 먹히는 보상비 때문에 지하공간의 개

비용과 피해가 끊임없이 전가되는 것이 재

발에 열을 올릴 때, 그 비용은 끊임없이 미

난자본주의의 특징이다.

래의 세대로 전가된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 의가 미래라는 시간을 착취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피해는 대부분‘없는 사람들’ 에게 집중된다. 그렇게 세 대와 계층을 중심으로 비용과 피해가 끊임없이 전가되는 것이 재난자본주의의 특징이다. 그런 면에서 보 면, 곧 민자사업자에게 넘어가게 될 지하철9호선 2, 3단계 노선이 싱크홀의 원인일 수 있다는 사실이 꽤 나 심각한 징후로 보인다. 이렇게 싱크홀은 대도시 서울을 둘러싼 도시괴담이 되어간다.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89


왼쪽에서 본 농업 이야기

다양성이 배제된 사회 연승우 농업 전문 기자

감자역병과 아일랜드 대기근 아일랜드에서 이주해 온 아일랜드 난민들과 북아메리카에 먼저 정착한 영국인들의 대혈 투 그린 영화 <갱스 오브 뉴욕>의 배경은 농업문제를 다룰 때 항상 나오는‘아일랜드 대기 근’ 이다. 이 영화를 보면 아일랜드인들은 모진 핍박과 설움을 받으면서도 아메리카로 이주 해온다. 그들은 정든 고향을 버리면서까지 왜 그렇게 이주를 했을까? 아일랜드 대기근의 발생은 감자역병이 돌면서 발생했다. 국민의 절반이 감자를 재배해 먹고살던 아일랜드에 1830년대부터 감자병이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84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대기근으로 인해 무려 100만여 명이 굶주려 죽고 300만 명이 이민을 떠나야 했다. 인근 영국은 충분히 도울 능력이 있었지만 외면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지금도 그 배고 팠던 시절 영국인들의 외면으로 인한 한을 풀지 않고 있다.

단작화의 위험성 아일랜드 대기근의 원인은 한가지로 볼 수만은 없지만 가장 주요한 원인이 바로 단작화 에 있다. 단작화는 다양한 농산물을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생산물 하나만을 키우는 것을 말한다. 아일랜드에 감자역병이 돌면서 감자는 흉년을 거듭했고, 감자이외에 농산물이 거 의 없었던 아일랜드 국민들은 엄청난 식량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두산대백과에 소개된 단작화는 단일한 작물을 대량으로 재배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의 작물에만 의존하면 시장의 가격 변동에 영향을 받아 경영이 불안정하게 되면서 이른바‘투 기 농업’ 의 성향을 띤다. 더욱이 단작에서는 지력이 한 작물에만 쏠려 연작 장해가 발생한다. 독성이 강한 농약으로 토양을 소독하는 등의 방법을 쓰지만, 병해충의 저항성을 키우게 90


되어 더 많은 농약을 살포하여야 한다. 단작화 로 주산지를 형성하여 시장에 유리하게 판매 할 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노동배분의 비효 율성과 지력 소모로 생산비가 증가되고 있다. 단작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다양성의 배제 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된다는 점이다. 한국에 서도 단작화 경향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논 란은 있지만 나는 쌀을 단작화된 작물로 보고 있다. 경북 성주, 전남 무안, 대관령 고랭지 등 에서도 단작화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컴퓨터의 단작화, 윈도우 이런 단작화는 한국에서 농업분야가 아닌 사회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이상하리만큼 한 국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의 OS인 윈도우즈 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10년 전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더 이상 윈 도우-98에 대한 보안패치를 하지 않겠다고 한국정부에 통보한 적이 있다. 당시 윈도우xp를 더 많이 사용하던 시절이었지만 한국정 부기관의 대다수, 특히 학교, 도서관 등의 컴 퓨터는 오래된 기종이고 따라서 아직도 윈도

대관령 고랭지 배추농사. 단작화는 다양한 농산물을 재배하는 것 이 아니라 주생산물 하나만을 키우는 것을 말한다.

우98을 쓰고 있어 보안패치가 계속되지 않으 면 해킹에 대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공식적 입장을 밝히자 한국정 부는 강력하게 보안패치를 계속 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으나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이를 거절하고 있다. 한국정부가 윈도우-98에서 윈도우-xp로 바꿀 경우 드는 비용이 어마어마해 공식적인 집계도 못하고 있다. 이에 국정원에서는 한국정부의 컴퓨터 OS가 지나치게 획일적으로 윈도우즈에 집중돼 있어 향후 리 눅스, 유닉스 등의 OS를 도입하는 것이 좋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윈도우즈-마이크로소프트사라는 단작화의 결과가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만든 것이다. 보안패치 서비 스 중단을 이미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발표했지만 한국에서는 안일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또 이 보안패치 이면에는 더 위험한 요소가 도사리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보안패치 서비스를 왼쪽에서 본 농업이야기 91


하지 않겠다고 발표하기 전에 한국의 공정거래위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끼워팔기를 문제삼아 약 700억 원의 벌금을 내게 했다고 한다. 이에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대응이 보안패치를 하지 않겠다는 것으 로 나온 것이다. 즉 마이크로소프트라는 거대한 독과점 형태의 회사에 한국정부는 거의 무기력하게 대응하고 있는 것 이다. 그 이유는 대체상품이 없기 때문이다. 즉 윈도우만을 유일하게 재배해온 단작화로 인해 발생한 문 제이다. 아일랜드 대기근의 교훈이 컴퓨터에도 적용되는 순간이다.

다양성을 무시하고 독주하는 괴물 단작화는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흔히 대규모 할인마트-롯 데마트, 이마트 등이 들어오면 반경 10km 이내의 상권은 죽는다고 한 다. 또 대규모의 할인매장이 들어서 면 2개의 일자리가 창출되지만 3개 의 일자리가 없어진다고 한다. 즉 할인매장으로 집중되면서 그 주변의 경제는 거의 몰락의 수준으

민주당-새정연의 단작화는 무능한 야당을 견제할 방법

로 침체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까지도 깡그리 없애버렸다. 한국정치도 야당에 대한 단

문제가 되는 것은 부익부 빈익빈을 초래하기 때문에 그 위험성을 지적

작화로 인한 수많은 난민을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하는 것이다. 정치에서는 야당이 단작화 돼 있다. 민주당-새정연의 단작화는 진보정당에게 사표로, 단일화로 민폐 를 끼칠 뿐만 아니라 무능한 야당을 견제할 방법까지도 깡그리 없애버렸다. 민주당이 130석이라는 거대한 야당이 됐지만 무능함으로 인해 괴물이 돼 버렸다. 그들은 야권연대니 단일화라는 명분만 들이대면서 진보정당의 다양성을 없애버리고 독주하는 괴물이 됐다. 한국인들의 종족 특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단작화로 인한 피해는 서민이 보고 있다. 1800년대 아일랜드에서는 감자만 대량으로 재배하다 감자역병이 발생하면서 수백만명이 기아로 죽거 나 미국으로 이민을 가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한국정치도 야당에 대한 단작화로 인한 수많은 난민을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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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본 농업이야기 93


지역에서 현장에서

관리와 본질의 정치 7.30 국회의원 보궐선거 정진우 선거운동본부와 함께 하며 서태성 수원/오산/화성 당원협의회 사무국장, 정진우 후보 선거사무장

정진우, 영통구에 출마하다 6.4지방선거가 끝나자 또 하나의 거대한 것이 밀려들어왔다. 7.30재보궐선거가 그것이 다. 내가 살고 있는 수원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구가 네 곳 있는데, 그 중 세 곳(수원시 팔달구, 권선구, 영통구)에서 선거가 치뤄졌고, 우리 당의 정진우 부대표가 영통구에 출마하게 되었

다. 영통구는 생긴지가 얼마 안된 신도시에다가 대부분의 주민이 아파트에 살고 물가도 비 싸 나름 수원의 강남으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지방선거 전까지는 새정치민주연합 김진표 경기도지사 후보(전 국회의원)의 지역구이기도 했다. 이런 소위‘세련’ 된 곳에 정진우 부대 표가 출마했다. 그것도 옥중출마로 말이다.

후보없이 옥중출마를 준비하다 후보 등록도 다른 후보에 비해 어려움이 있었다. 후보가 부재하다보니 서류를 떼는 절차 도 한결 복잡해졌고, 등록서류 역시 한 두 다리를 건너 정보를 획득한 후에야 작성할 수 있 었다. 후보 사진 역시 서울 구치소에 협조 공문을 보낸 후에야 촬영할 수 있었다. 그렇게 후보없이 옥중출마를 준비하고(심지어는 선거 공보와 벽보까지‘감옥에 있는 후보’ 중심으로 구성했었다) 무후보 선거전략을 취하는 중 선거운동 첫날 후보가 보석으로 나왔다.

축하해야 마땅한 일이었지만, 혼란스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이미 공보와 벽보가 제출된 후라 난감함은 더해졌지만, 이럴 때는 정면돌파 밖에 답이 없어 보였다. 왜 후보가 감옥에 갔는지 혹은 갈 수 밖에 없었는지를 주로 얘기하는 선 94


거운동 방식이 떠오르게 되었다.

‘정치 없는 정치’ 라는 현실 속에서 당 내외로 적지 않은 분들께서 옥중출마 또는 후보가 없는 선거운동에 우려를 보이셨던 것으로 기억한 다. 확실히 후보가 없으면 할 수 있는 선거운동 방법은 적어진다. 주민들에게 후보가 얼굴로 다가가지 못 하는 어려움도 있다. 그렇지만 300명이 죽어도, 관리의 책임(그것이 새누리당이냐 아니냐 수준의)만 묻고 그 사회가 어떻게 구 성되어 있길래 그런 참사가 일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선 묻지 않는‘정치 없는 정치’현실 속에서, 관리의 주체로만 자임하는‘우리 ( 당(정진우)이(가) 관리하면 다릅니다’ 류의) 정치는 현재의 노동당에게는 돌파구가 아 니라 생각된다. 우리는 아직 거대 보수 양당만큼도 국가를 관리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이는 사람들에게도 자명하게 인식되어 있으리라 생각한다), 관리를 잘 하겠다는 말조차도 그럴 듯하게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 다. 그에 대한 대답은 다소 전형적으로 들릴 지라도 신자유주의, 이윤&성장 지상주의를 정치 안으로 끌어 들이는 일일 것이다. 어떤 정당도, 심지어는 진보정당이라 분류되는 당들조차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 고, 관리와 여야의 문제에 천착했다. 우리의 길은 여기이지 싶다.

‘관리’ 가 아니라‘사회의 재구성’ 을 말하다 다시 돌아가자면, 이렇게 정치가 아닌 것을 정치로 끌어들이는 일을 '이윤보다 생명을' 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에서 해왔던 이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우리당의 정진우 부대표라는 것이다. 관리만이 아닌 사 회의 재구성을 이야기해야 하는 우리에게‘세월호 양심수’정진우는 후보로서 매우 매력적이다. 또 실제 로 선거운동 기간에 그런 얘기들을 외치며 다니기도 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후보는 선거운동 첫날 나왔고, 다음날부터 바로 활동을 재개했다. 먼저 당사에 들르고, 민주노 총에 들른 후, 비정규직 활동가들을 만나러 다녔다. 유세단은 버스정류장, 지하철역과 큰 삼거리에서 시 민들을 만나러 다니기 시작했고 하얀 옷과 노란 어깨띠를 두른 많은 청년 선거운동원들이 함께 했다. 노동당 당원들도 많이 있었지만, 당원이 아닌 청년들(주로 세월호 투쟁에 함께 했던)이‘세월호 양심수’ 정진우 후보와 함께 이윤보다 생명인 사회를 위해 선거운동에 나서주었다.

후보, 출소하다 선관위 주관 방송 연설회에서는 당일 검찰의 보석 취소 청구를 비판하며, 세월호의 정치적 책임을 끝 지역에서 현장에서 95


정진우 선본에서 함께 한 하루하루 (사진 : 서태성)

까지 묻겠다고 의견을 밝혔으며, 삼성 의 노동과 인권 탄압을 규탄하며 세상 을 바꾸는 한 표를 호소하기도 하였 다. 공보물이 배포된 후에는 감옥에서 나왔냐며 반가워하는 시민 분들이 많 이 계셨고 특별히 선거운동 중간에 하 루를 잡아 삼성투쟁 관련자들, 연대 단위들과 함께 비정규직 간접고용 없는 세상과 삼성 지배구조 해체를 알리며 삼성 앞에서 선거운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선거기간이 지나가고 투표날이 다가왔다. 노동당 정진우 후보는 득표율 0.68%로 510 표를 득표했다. 당선된 새정치민주연합 박광온 후보는 39,461표로 52.67%를 득표했다. 통합진보당 김식 후보는 700표로 0.93%의 득표율을 보였다. 아직 선거 평가를 면밀히 하지 않아 섣불리 말하긴 힘들지만 96


정진우 선본에서 함께 한 하루하루 (사진 : 서태성)

그리 좋은 성적표를 아님에 틀림없 다. 냉정한 표에 속상한 선거운동원 들도 더러 있었지만, 우리는 여기에 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쉬운 길은 없다. 현재 한국은 거대 보수 양당 중심으로 관리의 신임을 얻는 구도로 선거가 짜여져 있다. 이렇게 형성된 구도에 파열을 일으키며 잠복한 본질의 문제(신자유주의, 자본 주의, 이윤&성장 지상주의 등)를 불러오지 않는다면 노동당은 선거에서 계속 이런 성적표를 받게 될 것이

다. 이는 물론 선거기간에만 활동해서 될 문제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평소 삶에서, 활동에서 구도를 깨고, 본질을 드러내야만 한다. 오직 그렇게 할 때만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세상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온다. 그 길에 노동당과 함께 해주시길!

지역에서 현장에서 97


오비환의 야담외전

변강쇠와 옹녀 19세기 하층민의 성과 삶 ① 오비환 역사 오타쿠, 경기 군포 당원

인간은 언제나 구조/체제와 갈등한다 노동당으로부터 원고청탁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생각했다. 조선시대 민화·전설·소설 ·야담·기담을 모아온 나의 오랜 시간이 헛되지 않은 것이라고. 드디어 나의 조선시대에 대한 각종 판타지를 사람들과 나눠볼 기회가 생겼구나, 라고. 그러나 청탁받은 것은 현재 정치를 비유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조선시대의 정치적 사건(?)이었다. 순간 나는 눈앞이 캄 캄해졌다. 대체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시스템 속의 문제가 조선이라는 왕권 국가에서 발생한 정치문제와 비교할 수 있거나 이를 통해 이해될 수 있는 것인가? 우리가 시공을 초월해 보편적으로 얘기해볼 수 있는 문제는 역사를 연구하는 내 입장에 서 보면 딱 하나가 있다. 그건 인간은 언제나 구조 혹은 체제와 모종의 갈등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체제와 갈등관계에 놓여있다는 사실이 양자가 대립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다만 인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구조와의 갈등을, 자신이 놓여 있는 맥락 안에서 어떻게든 재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변강쇠전,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음란한 판쇠 사설 어쨌든, 그런 맥락에서 이 연재의 첫 이야기로 고른 것은《변강쇠전》 이다. 인간이 성(性) 을 대하는 태도도 이러한 노력과 무관하지 않다. 성은 단지 섹스라는 행위 자체로만 끝나지 않고 제도나 구조와 연관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다들 변강쇠와 옹녀라고 하면 비정상적인 섹스에 몰두하는 두 남녀를 떠올리는 것 외에 다른 것은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사실 변강쇠와 관련된 것은 그저 몇몇 영화로 접해 98


본 외에 실제《변강쇠전》 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판소리계 사 설인《변강쇠전》 에는 확실히 음란하다 고 판단할 수 있는 사설이 다른 사설들 에 비해 아주 많다. 애초에 옹녀는 자신의 욕망을 가진 “간악한 계집년” 으로, 남자들을 유혹하 고 바로 그 이유에서 질서를 어지럽히 는 여자였다. 평안도 월경촌에 사는 옹 녀는“얼굴을 볼작시면 춘이월 반만 핀 도화가 귀밑머리에 어리었고, 초생에 자는 달빛은 아름다운 눈썹 사이에 비 치었다. 앵도 같은 고운 입은 빛난 당채 주홍 붓으로 세차게 꾹 찍은 듯하고, 세 류같이 가는 허리는 봄바람에 흐늘흐늘 하며, 찡그리며 웃는 것과 말하며 걷는 태도는 서시와 포사라도 따를 수가 없” 는 미인이란다. 이런 미인에 대한 묘사 는 아주 전형적인 것이어서 당최 어떻 게 생긴 여자인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남자를 잘 꼬실 조건을 갖춘 색기를 갖 춘 여자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옹녀 가 천하의 잡놈인 변강쇠를 만나 다른 것 볼 것 없이 산속에서 대낮에 속궁합 부터 맞춰본다는 내러티브는《변강쇠 전》 을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음란한 이

《변강쇠전》 이 기록된《광한루악부》(위), 마당놀이《변강쇠전》(아래)

야기 중 하나로 만들어주었다. 이런 음란성 때문인지《변강쇠전》 은 판소리마당에서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만다. 1843년에 저술된 송 만재의《관우희(觀優戱)》 와 1852년 윤달선의《광한루악부》 에는《변강쇠전》 이 판소리 열두 마당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후 1880년대 신재효가 개작한 내용만이 전해질 뿐 창이 사라지고 사설만 남은 판소리로 전승되었고 소설화되지도 못했다.

삶과 문화 99


판소리마당에서 사라진 변강쇠전, 왜? 그렇다면《변강쇠전》 이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사라진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조선창극사》 에 의하면 판소리인《변강쇠가》 는 동편제의, 가왕(歌王)이라 불리는 송홍록과 전북 순창의 미남 명창 장자백의 더늠 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일명 제(制)라고 불리는 더늠은 판소리 창자들이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고 나면 판 소리의 특정 부분을 자신만의 창법으로 부르는 것으로, 창자들의 장기라 할 수 있다. 송홍록과 장자백의 장기가《변강쇠가》 였다는 것은 당대 이 사설이 갖는 위상을 가늠하게 해준다. 동편제의 명창들에 의해 불 려졌다면,《변강쇠전》 은 전라도에서만 유행한 노래였을까? 그것은 아니다.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 근방 에서도 불렸다고 한다. 사실《변강쇠전》 의 전반부는 황해도와 평안도를, 후반부는 전라도를 배경으로 하 고 있기도 하다. 생각해보라. 야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인기가 없을 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변강쇠전》 은 사라졌다. 너무 야해서, 정절을 강조하는 조선의 문화와 맞지 않아서 사라진 것일까? 그렇다면《춘향전》 은 어떤가? 춘향이와 이몽룡이 보여주는 합방장면은 밤에 방에서 이루 어지고 있다뿐이지 만만치 않게 음란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음란한 두 사설 중 하나는 살아남고 하나는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사라진 사설에, 즉《변강쇠전》 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혹은 알고 싶지 않은 무엇인가가 들어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았던 옹녀 자, 각설하고,《변강쇠전》 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먼저 한 뒤에 위의 질문에 답해보자. 본격적인 이 야기는 주인공에 대한 소개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제목에는 변강쇠의 이름이 붙어 있지만, 사실 이 사 설의 주인공은 옹녀이다. 옹녀는 미인에, 남자를 꼬시는 데 능통한 간악한 여자이지만, 동시에 기구한 운 명을 가진 사람이었다. 옹녀에게는 청상살이 있었다. 옹녀는 여러 번 결혼을 하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음 란해서가 아니라 결혼할 때마다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럼 옹녀는 남편만 잃는 여자인가? 그렇다면 옹녀가 옹녀가 아니지.

“이삼년씩 걸러 가면서 남편을 잃을지라도 소문이 흉할 텐데, 한 해에 하나씩을 전례로 처치하되, 이것 은 남이 아는 기둥서방, 그 남은 샛서방, 애인, 더벅머리, 새호루기, 입 한번 맞춘 놈, 그리고 젖 한번 쥐인 놈, 슬쩍 훔쳐본 놈, 손 만져본 놈, (중략) 모두 결단을 내는 데, (중략) 삼십 리 안팎에 상투 올린 사나이는 고사하고 열다섯 넘은 총각도 없어 계집이 밭을 갈고 처녀가 짚을 이으니 (중략) 이 년을 두었다가는 우리 두 도(황해도, 평안도) 내에 좆단 놈이 다시없고 여인국이 될 터이니 쫓을 수밖에 도리가 없다.”

옹녀와 결혼하거나 접촉한 남자들은 모두 죽는다. 옹녀를 보거나 만지거나 성희롱 하거나 음심을 품거 100


나 한 남자들은 모두 죽어서 황해도와 평안도에 남자들이 남아나지 않아 여자들만의 황해도, 평안도가 되 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옹녀의 남편들은 어떻게 죽었을까?

“열다섯에 얻은 서방은 첫날밤 잠자리에서 급상한으로 죽고, 열여섯에 얻은 서방은 화류병으로 죽고, 열일곱에 얻은 서방은 문둥병에 죽고, 열여덟에 얻은 서방은 벼락 맞아 죽고, 열아홉에 얻은 서방은 천하 에 대적으로 포도청에 떨어지고, 스무살에 얻은 서방은 비상을 먹고 돌아가니, 서방에 싫증이 나고 송장 치기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마치 옹녀의 청상살 때문에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잘 보면 열아홉에 얻은 서방은 도적이 되어 잡혀 죽 고, 스무살에 얻은 서방은 독을 먹고 자살했다는 범상치 않은 이야기가 나온다. 네번째 서방까지야 그렇 다 치고, 열아홉, 스물, 나이가 들면서 옹녀는 점차 녹록치 않은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녀 의 마지막 두 남편의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적어도 이들이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회적 으로 불안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그들의 죽음의 형태로부터 유추해볼 수 있다.

“삼남 좆은 더 좋다더라!” 그렇다면 옹녀는 왜 수절하지 않고 재혼을 선택했을까. 조선시대에 모든 여성들이 수절을 강요당한 것 은 아니다. 원칙적으로 수절은 양반가의 여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국가로서는 조세의 근원이 되는 인구가 증가하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다. 기회가 있으면 얘기하겠지만, 조선시대에 신분을 가리지 않는 열녀의 증가는 국가가 원했던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층민들이 열녀가 됨으로써 당시의 도덕적 기준에 서 양반보다 더 양반다워지고자 했던 열망이라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조선에서 종이 아닌 다음에야 남자 의 보호받을 수 없는 여자, 즉 과부는 살아가기가 어렵다. 장사라도 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이름뿐이더 라도 남편이 필요한 것이다. 옹녀가 외모를 가꾸고 살랑살랑 허리를 흔들며 남자들을 유혹할 수 있는 화법과 표정을 갖추려는 것은 개인적인 취향일 수도 있지만,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수도 있다. 어떻게든 삶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남자를 유혹했던 옹녀는 결국 서북지역 전체의 배척을 받고 쫓겨나게 되었다. 황해도와 평안도의 사 람들이 옹녀가 사는 집을 부수고, 그녀는 쫓겨나게 되었지만, 옹녀는 지지 않았다. 봇짐을 옆에 끼고 동백 기름을 발라 낭자를 곱게 하고 산호 비녀를 찌르고 나들이 장옷을 입고 떠나면서 자신을 쫓아낸 그들에게 소리를 지른다.

“어허, 인심 흉악하다! 황해도 평안도 아니면 살 곳이 없겠느냐! 삼남 좆은 더 좋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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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정치 칼럼

2004-2014 성소수자/성정치위원회 10년 박자민 성정치위원회

동성애는 자본주의 사회의 파행적인 현상? 모든 것은 그의 입에서 시작되었다. 2004년, 민주노동당의 첫 국회입성 그 해에 당 정책 위원회 선거가 있었다. 한국정치 삼분지계를 달성한 신생 정당의 당직선거에 막대한 관심 이 모아졌고 후보자들은 정말 소신껏 관심에 답변했다. 정책위의장에 입후보한 이용대 당시 후보는 민주노동당 지지 네티즌 모임 '민지네'와의 인터뷰에서‘동성애는 자본주의 사회의 파행적인 현상’ 이라는 소신발언을, 최고위원에 입 후보한 김진선 당시 후보는 민주노동당 성소수자 모임‘붉은이반’ 의 질의서에‘신의 창조 질서에 따라 결국은 이성애로 돌아가야 한다’ 는 답변을 보냈다.

붉은 이반 그리고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의 출범 지금까지도 종종 회자되는 이용대 후보의 발언은 동성애를 썩고 병든 자본주의 사상으 로 규탄하는 북한의 언행을 떠올리게 하며 가장 파장이 컸다. 그의 한마디에 당 안팎의 여 론이 들끓었다. 성소수자 당원과 그 해 총선에서 지지선언으로 민주노동당을 응원한 성소 수자 단체들은 물론이고 이성애자 당원들도 들고 일어났다. ‘붉은 이반(성소수자를 의미하는 은어)’ 에 이어‘붉은 일반(이성애자를 의미하는 은어)’ 이탄 생했고 정책위의장에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로 전망되던 이용대는 낙선했다. 그리 고 2004년 9월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가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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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 민주노동당 성소수자 위원회 출범행사에서 김혜경 대표와 홍석천 (사진 : 여성신문)

한결같이 흐르는 장강, 성정치위원회 보수정당은 변신술에 능하다. 그들은 선거 때마다‘혁신’ 을 과대포장하기 위해 안 하던 짓을 일삼는다. 그러나 결혼이주여성이나 노동운동 투사를 공천하고 의원으로 만드는 그들의 생색내기가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진보적 가치도 있다. 2004년부터 2014년까지 10년이 지나며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사이에 흐르던 실개천은 물줄기가 말 라버렸고,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사이에 흐르던 장강은 실개천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 10년 동안 한결같이 흐르고 있는 장강이 있다면 성소수자/성정치위원회는 그것의 큰 줄기 중 하나일 것이다. 마치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의 구분점 중 하나가 동성결혼 문제인 것과 비슷하다.

‘일하는 LGBT의 희망’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부터 노동당 성정치위원회까지 지난 10년간 진보정당은‘일하는 LGBT의 희망’ 이었다. 지지와 투표도 '위원회'가 있는 진보정당으로 모아졌다. 지난 6월 서울 신촌에서 열린 퀴어문 화축제가 극우단체에 의해 잠시 중단되었을 때도 대표단이 현장으로 달려온 정당은 노동당뿐이었다. 이 봉화 부대표가 축제차량에 올라가 사태해결에 소극적인 관계당국을 비판하고, 퀴어문화축제 참가자들에 삶과 문화 103


2014년 6월 퀴어문화축제 축제차량 위에서 발언중인 이봉화 부대표 (사진 : 박자민)

게 연대와 지지의 인사를 보냈을 때 신촌거리가 요동치는 환호성이 돌아왔던 일은 지난 10년의 성과를 증 거했다. 진보정당은 지난 10년 동안 성소수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왔다. 하지만 앞으로의 10년도 그러하리 라는 확신은 어렵다. 물론 성소수자와 함께하는 진보정당은 이제 상식이 되었고 노동, 녹색, 정의 3당 모 두 성소수자 의제를 담당하는 위원회가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2008년과 2011년의 진보정당 이합집산 동 안 성소수자/성정치위원회도 함께 쪼개지고 무너졌고, 내실 있는 성소수자 사업을 추진하기보다는 명맥 유지에 급급해졌다.

이제는 새정치민주연합? 진보정당의 위원회가 약화되는 동안 성소수자 운동진영은 진보정당보다는 제1야당의 국회의원들을 찾 는 일이 더 많아졌다. 이것은 성소수자 운동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일은 아니다. 노동, 여성, 장애인, 이주 민 단체들의 의견이 모여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통해 발의되던 법안들이 19대 국회에 들어서는 새정 치민주연합을 통해 발의되고 있다. 지난 10년의 유산을 상속받은 사람들이 준비해야 할 앞으로의 10년은 모든 성소수자의 민의를 당으로 다시 모으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당은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가 민원을 소화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104


분주했던 시기에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음을 기억해야 하고, 위원회는 당의 성장가능성을 믿고 성소 수자 총선후보를 준비할 수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더불어 성소수자/성정치위원회의 설치가 진보정당 의 상식이 되었지만 동시에 파편화된 현상을 극복하고 성소수자의 목소리가 집중되는 단일화된 창구를 만들어야 한다.

가자, 성소수자의 여당으로 2011년 분당 이후 나는 성정치위원회에서 당직을 수행하며 노동당을 성소수자의 여당이라고 소개한 다. 이전과 같은 위상은 아니지만 여전히 한국에서 가장 많은 성소수자 당원들이 활동하고 있는 정당은 노동당이고 가장 진보적인 성소수자 정책을 생산해내는 곳도, 성소수자의 한결같은 지지를 받고 있는 곳 도 노동당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위원회가 존재하는 이유로 여당이 아닌 전체인구의 5~10%로 추산되는 성소수자의 지지를 모 두 흡수할 수 있는 강한 여당이 되어야 한다. 2008년 총선 이후 중단된 성소수자 출마를 재개할 수 있도록 위원회가 조직과 인물을 준비하고 이들을 당선시킬 수 있는 당을 준비하자. 영원한 성소수자의 여당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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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종’ 에서‘오보’ 로 전락, 권력 따라 춤추는 언론보도

오보로 보는 한국언론

조윤호 <미디어오늘> 기자

하루에도 수천 개의 기사가 쏟아져 나온다. 그 중에는 팩트가 틀린,‘오보’ 도많 다. 하지만 오보가 오보가 되는 과정이 꼭 공정하지는 않다. 팩트가 틀렸다는 이유 로 오보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굉장히 석연치 않은 이유로 오보가 되어버 린 특종이 있다. 국민일보는 지난해 10월 4일·1면 기사 ‘ < 不通 청와대’진영 파동 불렀다>에서 진영 당시 복지부 장관이 사퇴한 이유에 대해 단독보도를 했다. 국민일보에 따르면 진영 전 장관은 기초연금을 국민연금과 연계하는 방식에 반대하기 위해 박근혜 대

2013년 9월 29일자 YTN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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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령과 면담을 신청했으나 청와대 비서실로부터 면담을 거부당했다. 국민일보는 이 면담 거부가 진영 전 장관의 사퇴 이유라고 보도했다. 또한 여권 관계자의 말을 빌려 최원영 청와대 고용복지수석이 자 신이 주도한 수정안을 진 전 장관이 동의한 안인 것처럼 박 대통령에게 허위보고를 한 정황도 드러났 다고 전했다.

박근혜 정부‘불통’꼬집은 국민일보 특종…갑자기‘오보’인정? 이 특종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복지부장관까지 반대하는 안을 밀어붙이면서 장관 면담조차 거부 한 박근혜 정부‘불통’ 의 진면목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사실무근이라며 10월 17일 서울남부 지법에 정정보도 청구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 청와대가 언론사를 상대 로 소송을 제기한 첫 사례였다. 그런데 소송 관련 변론이 진행될 예정 이었던 올해 2월, 갑자기 국민일보가 단 독보도를 뒤집었다. 국민일보는 2월 5일 2면 기사 <진영 前 복지장관 면담 요청, 청와대 거부 없었다>에서“진영 전 보건 복지부 장관이 정부의 기초연금안에 대 해 박근혜 대통령과의 면담을 신청했다 가 청와대 비서실로부터 거절당했다는 국민일보 2013년 10월 4일자 보도와 관 련, 청와대가 밝힌 정황과 여러 증거를 종합한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 다” 고 밝혔다. 국민일보는“진 전 장관의 면담 요청 을 김기춘 비서실장이 묵살했다는 대목 은 사실무근으로 확인됐다” 며“최원영 청와대 고용복지수석이 진 전 장관을 배 제한 채 복지부 내 기초연금 정책을 담당 하는 실·국에 직접 지시해 만든 국민연 금 연계안을 마치 장관 동의를 받은 것처

2013년 10월 4일자 국민일보 1면(왼쪽) 2014년 2월 5일자 국민일보 2면(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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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박 대통령에게‘허위 보고’ 했다는 주장 역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고 전했다. 특종이 한순 간에 오보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이후 국민일보는 홈페이지에서 10월 4일 1면 기사 ‘ < 不通 청와대’진영 파동 불렀다>와 3면 관련 기사 <청와대 비서실에 막혀 식물장관 무력감…사퇴 항명>를 모두 삭제했다. 필자는 소송이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해 12월 국민일보 측 허윤 변호사와 통화를 한 적이 있다. 허 윤 변호사는“(청와대의 소송은) 권력이 언론의 감시와 견제를 받지 않겠다는 생각” 이라며“우리는 보도 가 진실이라고 믿고, 취재기자도 복수의 팩트 체크를 했다. 진실을 썼는데 손해배상에 정정보도까지 청구하는 것은 언론이기를 포기하라는 요구로, 언론사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고 말했다. 근거가 탄탄하고 반론권도 보장됐기에 문제없다는 것. 그런데 입장이 갑자기 바뀐 것이다.

청와대 소송 피하려고 단독보도 뒤집었나 결국 청와대와의 소송을 피하기 위해 보도를 뒤집었다는 의혹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전 국언론노조 국민일보 지부는 대자보를 통해“정치부 등을 통해 기사가 나간 배경을 들어보니 이 기사 는 청와대가‘진영 파동’기사를 상대로 제기한 정정보도 청구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종료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됐다” 며“소송의 대상이 된 기사를 우리 스스로 오보라고 밝혔으니 청와대가 소송 을 유지할 이유가 없어지는 셈” 이라고 말했다. 국민일보와 청와대 간의 소송이 진행되던 와중 양 측의 협상이 있었고 소송을 종료시키기 위해 국 민일보가 기사를 통해 오보를 인정하는 방식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필자도 기자 생활을 한 지 오래되 지는 않았지만‘기사’ 를 통해 자사 보도를

‘기사’ 를 통해 자사 보도를 뒤집는 경우는 처음 봤다. 보통 오보임이 드러났을 경우 ‘바로잡습니다’ 나‘알려왔습니다’등 반론 보도문이나 정정보도문을 싣는다.

뒤집는 경우는 처음 봤다. 보통 오보임이 드러났을 경우‘바로잡습니다’ 나‘알려왔 습니다’등 반론보도문이나 정정보도문을 싣는다. 이 오보가 진짜‘오보’ 가 아니라, 협상에 의해 오보라고 하기로‘합의’ 된사 항임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황은 하나 더 있다. 특종을 오보로 인정한 이 기사에는 내용이 하나도 없다.‘기사가 사실이 아니 다’ 는 주장만 있을 뿐 어떤 과정을 거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는지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다. 국 민일보 노조는“(기사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고 확인됐다는 데 기자가 이를 어떻게 밝히고 확인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 기사를 우리 스스로 검증한 결과 오보로 판정한 것인데 그 태도가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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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쿨 해서 기이할 정도” 라고 꼬집었다. 소송을 맡았던 허윤 변호사와 다시 통화했다. 허 변호사는“말씀드리기 애매하다. 회사의 정책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 생각 된다” 고 말했다. 회사의 정책적 판단이란, 청와대와의 소송을 피하기 위해 오보임을 쿨하게 인정하는 것일까? 국민일보 노조는“이번 기사가 사실에 진 결과였다면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기사 는 사실에 진 게 아니라 청와대, 김기춘, 소송 등 압력에 진 결과로 나온 것이라는 게 분명해지고 있 다” 며“이런 식으로 소송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언론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품위조차 내 다버렸다는 비난은 피할 수 없을 것” 이라 밝혔다. 오보란‘팩트’ 가 틀린 기사다. 기자 입장에서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오보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팩 트가 틀린 것이 아닌 데도 오보가 되면‘제정신이 박힌’기자라면 열 받을 수밖에 없다. 열심히 취재해 서 쓴 기사가 한 순간에 오보가 되어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국민일보의 한 기자는“협상을 할 수는 있 지만 언론이 자신의 보도를 스스로 사실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건 너무 굴욕적” 이라고 말했다.

특종보도‘왜’뒤집었을까 눈치 빠른 독자라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국민일보가 청와대와 소송을 피하기 위해 보도를 뒤집었다면,‘왜’ 라는 질문이 남는다. 팩트라면, 근거가 명확하다면 소송에서 지지 않을 텐데 왜 국민일보가 물러난 것일까? 스스로 특종을 오보라 인정하는 굴욕을 감내하면서 말이다. 이 부분은 아직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 기에 함부로 이야기하기 어렵다. 하지만

기사 하나를 둘러싸고도 엄청난‘정치’ 가

막연하게 이 보도를 둘러싸고 상상 밖의

있고, 권력이 이에 개입하기도 한다.‘석연

‘큰 그림’ 이 그려졌을 수도 있다는 추론은 할 수 있다. 언론은 이처럼 팩트와 진실만 가지고

치 않은 오보’ 를 통해 우리는 언론의 속성 을 들여다볼 수 있다.

움직이지 않는다. 기사 하나를 둘러싸고 도 엄청난‘정치’ 가 있고, 권력이 이에 개입하기도 한다.‘석연치 않은 오보’ 를 통해 우리는 언론의 속 성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오보를 단지‘팩트가 틀린’것으로만 생각하지 않았으 면 한다. 그 점을 유념하면 언론보도 속 행간을 더 잘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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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문화예술 당원 찾기

“사진기와 함께 세상 속으로, 가족과 함께 도시 바깥으로” 다큐멘터리 사진가 이상엽 인터뷰·정리 : 나도원 문화예술위원장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최근에 발간된《최후의 언어 : 나는 왜 찍는가》 는 열 여덟 대의 필름카메라 이야기와 맞물린 열 여덟 꼭지의 단상들이 사진과 글로 하나가 된 책이다.“표제인‘최후의 언어’ 는 롤랑 바르트가 말한 기록과 재 생(부활)의 도구로서의 사진을 은유한다” 고 한다. 이 책의 저자는 강정과 밀양을 응시하고, 티베트와 시베 리아를 넘나들며 기록한 사진과 기억을 종이 위에 차분히 펼쳐놓았다. 바로 그 사람, 이상엽은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작가이다. 그동안《흐르는 강물처럼》 ,《레닌이 있는 풍 경》 ,《낡은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 ,《사진가로 사는 법》 ,《파미르에서. 윈난까지.》등 개인저서만 열일곱 권, 공저까지 포함하면 스물여덟 권을 펴냈을 정도로 부지런한 사람이다. 진보신당 창당과 함께 입당하여 110


문화예술위원회의 탄생을 함께 준비한 당원이고, 진보신당 정책위원회 부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당 활 동을 하며 많은 대화와 술잔을 나누었지만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선 자세히 묻지 않았던 것 같 다.

화양리 소년, 불타는 청소년기를 지나 운동권 학생으로 한국에서 인디음악이 막 태동할 무렵에는 해괴한 이름을 지닌 밴드들도 여럿 등장했다.‘불타는 화양 리 쇼바를 올려라’ 라는 펑크 록 밴드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서울 화양리에서 태어나 성동구에서 쭉 살 아온 이상엽이 오토바이를 잘 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화양리에서 불타는 청춘을 보내지 않았을까 싶 어 동네 이야기부터 꺼내보았다. 어딘들 사연이 없을까 싶지만, 건국대학교와 세종대학교를 이어주는 어 린이회관과 어린이대공원의 역사도 어딘지 상징적이다. 원래 순종비 순명황후의 왕비능이 있던 자리가 일제강점기에 골프장이 개발되었고, 개발독재기에 어린이회관과 어린대공원이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 으니까. 2014년 지금의 사진가 이상엽은 원래 누구였을까. 소년 이상엽은 초등학교 6학년 때에 아바(ABBA)를 시작으로 레드 제플린(Led Zeppelin)과‘프로그레 시브 록’ 을 음미하게 된,“음악을 좋아하는 아이” 였다. 서울 황학동으로 속칭‘빽판’ 을 구하러 다니곤 했을 정도이다. 그림도 곧잘 그렸고, 훗날 부모님은 아들이 미대에 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음악을 좋아하 고 그림에 소질을 지닌 이상엽의 고등학교 시절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교사도, 학생도 폭력적인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힘 꽤나 쓰는 학생들과 척을 지고 싸움도 많이 하는 학생이었다. 아침에 학교 대신 천호동의 재개봉극장들로 등교했고, 점심때에 학교에 들렀다가 방과 후에 다시 극장으로 귀환했다. 일주 일에‘19금’영화를 포함하여 여덟 편의 영화를 섭렵했다. 그에게는 당대 유명 작가들의 소설 그리고 김지 하의 시집과 함께 세상을 알 수 있는 가장 큰 창문이 영화였던 것이다. 음악도, 미술도, 영화도 아닌 사회과학에 뜻을 둔 이상엽은 1986년에 모대학교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신입생이 김지하를 운운하고 있으니 포섭대상 이 되는 건 당연했다. 바로 3월부터 학습에 들 어갔고, 학생운동사에서 중요한 사건의 장소 인 그 학교의 시위에 참여하여 10월에 구속되 어 12월까지 갇혀 있었다. 이듬해인 1987년에 6월 항쟁을 맞았으니 이상엽은 폭압시기에 입

신입생이 김지하를 운운하고 있으니 포섭 대상이 되는 건 당연했다. 바로 3월부터 학습에 들어갔고, 시위에 참여하여 10월 에 구속되어 12월까지 갇혀 있었다.

학하여 유일하게 승리(?)한 경험을 가진 세대 의 일부였다. 그에게 대학시절은 오로지 학생운동의 시간이었다. 총학생회 문화부장을 맡으면서도 오로 지 민중가요만 듣는 운동권 학생으로 변해 있었다.

삶과 문화 111


세상을 위해 운동을 하다 사진을 만나 다시 세상으로 병역을 마친 후 복학하니 운동권의 정파구도가 엔엘(NL)과 피디(PD)로 정립되어 있었다. 다시 학습해 야 했고, 그가 택한 노선은 PD였다. 그가 다닌 학교 역시 NL계열이 장악한 상황에서 PD집단을 만드는 일에 참여했고, 학보에는 PD정파에게 할당된 만평과 칼럼을 채우는 역할을 맡았다. 그 연장선에서 대학 을 졸업할 무렵에 하나의 제안을 받았다.《말》 과 대당할 수 있는 대안매체를 지향하는‘길을 찾는 사람들’ 의《사회평론 길》 에 동참했다. 글과 만평을 시작으로 문화부 기자가 되어 당시 문화예술에 대한 해석 작 업을 벌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운명은 예기치 않은 전기를 맞게 되었다. 회사의 사진기자가 퇴사한 것이다. 사 진기도 없는 이상엽에게 사진부의 사진기자로 나서라는 오더가 내려졌다. 막연하게 매력을 느끼고 있었 던 사진, 이상엽은 그렇게 갑작스레 사진의 길에 들어섰다. 이렇게 선생이 없이 시작한 사진은 아스팔트 가 깔린 현장과 자신이 읽어온 책 그리고 암실을 거쳐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엽은 이때 이미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1993년에 결혼하여 이듬해에 아이를 낳았다. 집에 모아놓은 빈 병들을 팔아 출퇴근 비용을 마련해야 할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렸다. 여러 가지 상황에 인하 여 1995년에 퇴사하고 1996년부터 프리랜서 로 활동을 시작한다. 사진과 글로 승부를 보 고자 한 것이다. 청년 이상엽은 사진에 큰 열 망을 품고“바닥까지 가보자, 자신을 검증해 보자” 며 모든 것을 걸었다. 1996년에서 1997년 사이에는 열 명의 사 진가들과 함께 사진전문 웹진‘다큐비트’ 를 운영했다. 사진계에서 큰 위상을 얻은 매체 였고, 당시까지만 해도 대형포털로 성장하기 전에 이미지 중심이었던‘다음’ 과 대등할 정 도였다. 사진가가 된 이상엽은 카메라를 메 고 세상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1996년에 필리핀 회교 반군 취재를 시작으로 2000년 통티모르 내전까지 누비고 다녔다.“사진을 찾아 세계를 누비는 사진가” 를 꿈꾸며 분쟁 지역과 해외를 다닌 것이다. 2011년에 발간 한《파미르에서. 윈난까지.》 도 1999년에 처 이상엽의 사진집《파미르에서. 윈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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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중국 시안에 다녀온 후 2004년부터 취재


하기 시작하여 20여 차례나 중국 서부를 취재한 결과물이다. 그는 손품과 발품을 함께 파는 사진가이다.

예술가가 다작을 해야 하는 이유, 그리고 당에 대한 의리 프리랜서로 취재하고 기고하는 잡지는 단기 이슈 위주였다. 그는 점차 서적과 같은 장기작업으로 전환 한다. 그 계기는 IMF사태 이후 일거리가 줄어든 사정도 한몫했다. 더구나 1990년대에는 프리랜서 활동을 하며〈한겨레21〉등 잡지에 기고하는 것으로도 생활이 가능했다. 예술 관련 원고료 단가는 1990년대 수준 에 고정되어 있다. 당시에는 한 달에 글 몇 편을 쓰면 생계유지가 가능했으나, 지금은 다른 활동을 병행하 며 책을 꾸준히 써내지 않으면 기고만으로 생활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글 값은 헐값 처분되어 이 른바 학교나 연구소에 적을 둔‘선생님들’외에는 전업필자가 활동을 지속할 수 없는 실정이다. 젊은 시절에는 불합리한 관행을 성토하다가 입장이 바뀐 후에는 어떻게든 낮은 수준의 원고료를 나눠 주려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동료와 단합하는 대신 권력과 담합하며 입장의 번복을 반복한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이 일선의 착취자이자 교란자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비록 사정상 대가는 부실하지 만 상부상조하는 면도 있고 좋은 것들을 함께 생산함으로써 문화예술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다른 분야처럼 사진계도 사진기의 대중화와 대중적 관심의 폭증으로 사진교육 채널이 크게 증가하였 고, 그만큼 사진인력을 과잉 배출되었다. 물론 그들 중 대부분은 배운 것과는 무관한 일을 하며 살게 되었

노동당 문화팟캐스트<컬쳐쇼크>에 출연한 이상엽 작가

삶과 문화 113


다. 어쨌든 이러한 환경에서도 이상엽 작가는 자기작업의 성과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현재로 선 쉰 살까지 계속한 후에 자신의 작업성과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계획이다. 그에게 젊은 예술가들에게 하 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예술가들은 자기 창작을 위하여 자기가 투자해야 하는 현실 속에 살고 있어요. 하지만 가보지 않은 길 을 예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환상은 경계해야겠지요. 사진에 대하여 전혀 몰랐던 청년 이상엽도 지 금까지 버텨오지 않았습니까. 성공과 실패의 확률 속에 자신의 위치가 있습니다. 노력 여하에 따라 그 확 률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상엽의 당적은 진보신당연대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후 노동당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는 문화예술 위원회 준비모임을 제안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모임에 나와 당찬 소리를 해대는 나도원이란 자에게 무거 운 짐을 맡겨버렸다. 준비위원장 수락사를 기억한다.“이 원수를 잊지 않겠습니다!” )

“진보신당에 인재가 많았어요. 진보정당에 매우 중요한 문화예술인들을 엮어 위원회를 만들려 했죠. 그런데 2011년 당대회 때에 통합이냐 독자냐 하는 논쟁이 일었지요. 저는 통합파였지만, 당에 남았고요. 어떤 결정이 나든 우리 문화예술위원회는 함께 가기로 했거든요. 무엇보다 진보신당에 대한 의리, 나의 판단에 대한 존중, 그런 판단을 한 나에 대한 자기존중 때문입니다.”

서울을 떠나 고기리로, 다시 경계를 꿈꾸며 이상엽의 서울생활 마지막 거처는 금오동이었다. 서울생활에 회의를 품고 있었고, 큰 아이‘하늘이’ 의 교육문제를 고민하던 때였다. 2011년 겨울, 병에 걸렸다. 감기인 줄 알았는데, 폐렴 같았고, 그 정도인 줄 알았는데, 폐에 물이 차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병을 다스리며 입원한 후 퇴원하던 날, 놀라 운 통보를 받았다. 집이 이사를 했다는 것이다.‘하늘이’ 의 진학과 서울생활 정리를 아내가 홀로 결단했 다. 찾아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도착해도 시간당 두 대가 다니는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고기리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생활 첫해 겨울에는 폭설로 교통이 불통되어 고립되기도 했다. 그때를 떠올

리며 이상엽 작가가 한탄조로 내뱉었다.“저는 완전 피해자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일단 대도시, 특히 서울에 발을 들여놓으면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는 많아진 다. 대도시에 사는 것만으로도 에너지 집중과 지방의 희생, 환경의 오염과 식량생산구조의 왜곡을 비롯하 여 이 세상 곳곳에 심대한 해를 끼치는 대열에 본의와 다르게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더 가 까운 현실 속에는 이러저러한 이유와 사연이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다. 그런데 일단 벗어나보면, 놀랍게 도, 어떻게 사람 살만한 곳이 못되는 저런 곳에서 살았나 싶어지는 게 또한 대도시다. 그 사실을 알기 전까 114


진 서울과 같은 대도시, 그 중에서도 집값이 비싼 지역에 살다가 그 밖으로 밀려나기라 도 하면 자신이‘짐마차를 끄는 페가수스’ 의 처지라도 될 것 같아 두려워한다. 그런 생활 이야말로 자신을 빛을 잃은 은반지로 내버 려두는 격이다. 그래서 적잖은 사람들이 마 음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기회가 되면 떠나 고 싶어 하지만, 그러면서 절대로 떠나려 하 지 않는다. 어릴 적 고향을 생각하듯 단지 그리워할 뿐이다. 그런데 병원에 누워있는 동안 이사를 당 하고 2년 동안 살고 난 지금, 이상엽은 사는 집과 주변을 관리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곳 에 있는 동안이라도 이 공간을 소중하게 생 각하기로 했다. 식물에 별 관심이 없던 사람 이 어느덧 풀을 뽑고 텃밭을 가꾸고 꽃을 기 르고 있었다. 평생 동물을 키워본 적 없는 사람이 개와 고양이 그리고 물고기를 키우 고 있다. 아이를 셋 둔 부부, 그러니까 다섯

병원에 누워있는 동안 이사를 당하고 2년 동안

가족과 온갖 생명체들로 가득한 공간이 만

살고 난 지금, 이상엽은 사는 집과 주변을 관

들어졌다. 덕분에 외출 준비에는 두 시간 정 도가 걸린다. 마당을 정리하고, 개와 고양이 그리고 물고기에게 밥을 주고…. 불편하냐

리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이라 도 이 공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고? 아니란다. 이제 다시는 도시에서 살고 싶지 않아졌다. 물론 경계인 혹은 경계를 넘나드는 노마드의 지향은 여전하다.

“소박하게 살면서 환경을 아끼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서로 교육하고 서로 돕는 공동체가 출현할 겁 니다. 도-동의 다리가 될 수 있는 공간이 출현할 겁니다. 제 삶도 도시와 농촌의 경계에 있지 않을까 싶어 요.”

※ 사진과 책에 관한 더 많은 이야기는‘노동당 문화팟캐스트 <컬쳐쇼크> 이상엽 편’ 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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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서재

로빈 후드,‘재미와 장난’ 으로 도시를 뒤엎다 도시의 로빈후드 박용남 / 서해문집 / 2014년5월 / 17,000원

양솔규 기획조정실 국장

우리가 진보정당운동을 하고, 노동운동을 하고, 사회운동을 하는 이유는 우리의‘삶’ 을 더‘행복’ 하게 만 들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우리 삶은 크게‘일터’ 와‘삶터’ ,‘일하는 시간’ 과‘노는 시간’ ,‘돈벌이’ 와‘소 비’ 로 나눠진다. 오랫동안 우리 운동은 앞부분, 즉‘일터’ 의 문제,‘일하는 시간’ 에 벌어지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행복’ ,‘만족’ ,‘자유’ 와 관련한 것은 바로 뒷부분, 즉‘여가 시간’ ,‘삶터’ ‘ , 소비’ ‘ , 정주’ 에서 찾는다. 물론 이러한 구분이 기계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한 사람의 삶은 당연히 총체적이고, 두 가지 부분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교통이 발달(?)하면서 일터 와 삶터의 (물리적,심리적)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진 것이 도시의 비극일지도 모른다.

97년, 비로소‘대중적인’진보정당운동이 시작되었다. 익숙한 시야와 습관 때문인지 몰라도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뭔가 쭈삣쭈삣거렸다. 지역 분회모임을 하면 뭘 해야 할지 몰라 서로 머뭇거렸다. 고참 노동 조합운동 선배가 얘기하기를 기다리는데, 쟁쟁한 선배들도 주제가 겉돌고 헛기침만 할 뿐이었다. 동네 사 람들에게‘당’ 을 알리고자 하니 두려웠다. 방법도 잘 몰랐다. 마을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프로그램 리플 116


렛을 가져와서는 주민들 속으로 들어갈지 말지 머뭇거렸다. 생전 안 나가던 반상 회에 나가니 동네 사람들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고 이에 움츠려들었다.

초기 진보정당운동

초기 진보정당운동(민주노동당) 시절, 이렇게 쩔쩔 매고 막막해할 때 혜성처럼 등

(민주노동당) 시절,

장한 책이 바로 박용남 선생의 ≪꿈의 도시 꾸리찌바≫(2000년)였다. 이 책은 해

이렇게 쩔쩔 매고

를 거듭하면서 필독서가 되었고, 이후 ≪작은 실험들이 도시를 바꾼다≫(2006),

막막해할 때 혜성

≪꾸리찌바 에필로그≫(2011) 등으로 이어지면서 진보정당 활동가들과, 백화점식

처럼 등장한 책이

시민운동을 탈피하고자 하는 시민운동가들의 갈증을 풀어줬던 것 같다.

바로 박용남 선생 의 ≪꿈의 도시 꾸 리찌바≫(2000년) 였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막막함을 브라질 노동자당(PT)의 사례 를 통해 해소했고, 지방선거와 자치에 대한 상을“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의 참여 예산제” 를 통해 깨달았으며, 우리 삶터의 문제가 무엇이고, 어떻게 바꿀지에 대해 “꾸리찌바” 를 통해 상상할 수 있었다. 유럽의 사민주의 정당(-산별노조)과 사회민 주주의 복지국가 모델이 초기 진보정당운동에 준거점이 되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브라질과 남미의 경험은 초기 민주노동당 활동가들, 특히 울산과 창원 등의 노동 자 밀집 도시 민주노동당 활동가들에게‘한번 해보자’ 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신영복 선생의 경구를 빌어 보자면, 진보정당운동 초기의 역사는 박용남 선생의 책을 돌려보면서, 강의를 들으면서, 진보정당이 우리 지역을 어떻게 바꿀지, 무엇 을 통해 바꿀지 머리에서 시작해 가슴으로 이해하기 위한 활동이었다. 그리고 이 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발로 뛰며 지역을 일구고 씨를 뿌리는 활동을 했다. 물론 우리 진보정당운동은 빛나는 성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울산 북구와 동구, 창 원의 경험에 대해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성적 평가가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지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튼튼하지는 않더라도 초기와는 달리 진보정당운동의 손 길이 느껴지곤 한다. 지역주민들에 뿌리박은 진보정당 지방의원들의 활동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이 책에 소개되는‘로빈 후드’ 들의 빛나는 성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소수정당 의원으로서‘의미있는 반대’ 와 틈새‘조례 제정’ 은 눈물겨운 돌파의 흔적이다.

박용남 선생의 초기 저작들의 중심 모델이 브라질의‘꾸리찌바’ 였다면, ≪작은 실 험들이 도시를 바꾼다≫(2006)와 이번 책 ≪도시의 로빈후드≫에서 중심적으로 삶과 문화 117


다루고 있는 도시는 콜롬비아의 수도‘보고타’ 이다. 짧은 임기동안 획기적으로 보 고타를 바꾼‘로빈 후드’ 는‘엔리케 페냐로사’전 시장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기존 상식과는 달리 경제적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들의 중요성, 어린이들의 안전과 보 행자로서의 인간의 권리로 꽉 차 있다. 그의 이러한‘생태교통’ 에 입각한 도시계 획은 세계 최고의 간선급행버스체계(BRT)인 트랜스밀레니오(TransMilenio)를 만 들었고, 매년 2월 첫 번째 목요일을‘차 없는 날’ 로 선정해 세계 최대의‘차 없는 도시’실험을 만들었다. 여기에다 총연장 17km의 보행자 거리‘알라메다 엘 뽀르 베니르’ 도 보고타의 명물이다.

박용남 선생의 저

박용남 선생의 저작들의 중심에는‘생태교통’ 이 있다. 그런데 이때 교통은 단순히

작들의 중심에는

도시에 필요한 시스템 중 하나가 아니다. 교통은‘도시의 지속가능성’ 을 구현하는

‘생태교통’ 이 있다.

핵심 열쇠이다. 생태교통은 도시의 에너지 사용량을 획기적으로 감소시키고, 자

그런데 이때 교통

동차의 속도와 통행량을 저감시킬 뿐만 아니라 도시의 사회적 관계를 재조정하는

은 단순히 도시에

기제이기도 하다. 자동차 이동량의 감소와 사회적 교류의 활성화는 동전의 양면

필요한 시스템 중

이다.

하나가 아니다. 교 통은‘도시의 지속 가능성’ 을 구현하 는 핵심 열쇠이다.

브라질의 남동부에 위치한 도시 벨루오리존치(Belo Horizonte)는 세계 최초로‘식 량권’ 을 인정한 도시이다. 벨루오리존치는 기아 문제를‘식량부족’ 의 문제가 아니 라‘빈곤과 결부된 식량 접근의 결여’ 를 중심으로 바라보고 이의 원인을‘시장의

벨루오리존치의 민중식당(왼쪽), 보고타의 트랜스밀레니오(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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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때문으로 본다. PT당 소속 시장‘파투루스 아나니아스 데 소자’ 는 93년 시 민식량권을 인정하고 시에 조달국을 설치했다. 이후 벨루오리존치는 시민들에게 ‘민중식당(Restaurante Popular)’ 과‘기초식량바구니’ (22개 품목의 꾸러미)를 제공 하고,‘푸드뱅크’ 와‘영양실조 예방 및 퇴치 프로그램’ 을 실시한다. 농산물 직거래 결국 이러한 지구

시스템과 로컬 푸드, 가격명세서 공지 시스템, 학교 텃밭 등 먹거리와 관련한 상

곳곳에서 벌어지는

상할 수 있는 모든 정책을 펼친다.

새로운 실험들도 결국 우리가 살고

이 책에는 그 밖에도 낙후된 브라질 북동부 포르탈레자 시에서 출발한 파우마스

있는 이 땅에서 새

은행(공동체 은행)과 지역화페 파우마의 사례(조아킴 데 멜로 창립자), 내생적 발전을

롭게 해석되고, 새 롭게 뿌리내리고, 변형시키는 구체적 노력이 반드시 필 요하다.

추구하는 일본 가나자와 시, 그리고 자동차 없는 도시를 위해 고속도로를 폐쇄하 고, 공용자전거 벨리브를 도입했으며, 세느 강의 도로를 막고 해변(파리 플라주)을 만든 파리 시장 베르트랑 들라노에(사회당), 버려진 화물철도형 고가철도를 공원 으로 만들어 새로운 랜드마크로 부상한 하이라인(High Line)의 사례, 공용자전거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자동차 없는 뉴욕을 위해 분투하는 뉴욕 교통국장 자넷 사 딕-칸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실험들도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새롭게 뿌리내리고, 변형시키는 구체적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신영복 선생의 경구처럼 머리에서 가슴, 가슴에서 발로 이어지 는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 구상과 실행의 통일, 아니 간단하게(실은 간단치 않은) 우 리 모두의 노력이 켜켜이 쌓여야 할 것이다. 생각보다 가까이에 그런 활동가들이 있다. 에너지협동조합을 만들고, 동네 찻집을 운영하며, 지역 라디오방송국을 꾸 려 나가는 이들 말이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구체적인 고민들은 이러한 활동가들 과의 교류 속에서, 그리고 아래 추가로 소개하는 책들을 통해 얻을 수 있다.

■ 더 읽을만한 책

• 《무상교통》김상철 / 이매진 / 2014년5월 / 10,000원 • 《모두를 위한 마을은 없다》하승우 외 / 2014년5월 / 13,000원 • 《우리는 도시에서 행복한가》찰스 몽고메리 / 미디어 윌 / 2014년4월 /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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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정말 미안해 그런 마음뿐인데~/엄마 정말 미안해 그저 마음뿐이네~/아빠도 미안……”

지난 주말에 부모님 댁에 갔다 온 여파인지‘엄마 미안해’ 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다. 이 노래를 만들고 부른 이는 연영석이다. 가수 연영석이 아니라 문화노동자 연영석이라고 자 신을 소개하는 사람,‘문화노동자모임’회원이라고도 소개하는데 그 모임의 회원은 혼자 인 사람, 독립레이블의 사장이자 유일한 직원이자 유일한 소속가수이기도 한 사람.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은 실업극복문화한마당“엄마, 아빠! 힘내세요!” (이하 실업극복문화한마당)에서였다. 공식적인 그의 첫 무대였던 실업극복문화한마당은 1998년,

꽃다지가 매주 수요일마다 주최·주관했던 거리공연이다. 이 거리공연이 바탕이 되어 1999년에는‘노래판굿 꽃다지 40시간, 또 다른 세상으로’ 를 5년 만에 다시 하기도 했었다. IMF 구제금융위기 속에 수많은 노동자가 길거리로 쫓겨났던 1998년. 가족에게조차 해 고당한 사실을 말 못하고 출근하는 척 집을 나와 떠돌다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생 활을 하는 해고노동자가 부지기수였다. 그마저도 힘들어 아예 집을 나와 노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대량해고, 대량실업사태였으나 그 책 임을 일방적으로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꼴을 볼 수 없던 꽃다지는 그해 3월 거리로 나섰다. 거리공연의 목적은 딱 하나였다. 실업자들이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꽃 다지 공연과 함께 시민 발언대를 마련하여 대량실업사태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필연적으로 올 수밖에 없는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을, 무능력하여 실업자가 된 게 아니니 자책할 문제 가 아니라는 것을,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떳떳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 다. 예상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에게 고무되어 판을 키우기 시작했다. 거리공연 을 처음 제안했던 나와 다른 꽃다지 기획자 둘이서 거리공연을 전담하며 여러 예술인이 함 께 하는 거리공연으로 판을 키워갔다. 그들 중 한 명이었던 연영석은 매우 자발적으로 기 꺼이 참여했었던 기억이 난다. 서울역에서의 공연을 부탁하기 전에, 그에 대해 아는 바라고는 록 밴드‘메이데이’ 의노

노 래 의

엄마 미안해 민정연 문화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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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를 위한 발라드’ ,‘전선은 있다’ 의 작사가라는 점이 전부였다. 미술 동인‘현실감 래,‘동지에게’ 각’ 을 만들어 현장을 중심으로 한 미술운동을 했고, 노동문화운동을 본격적으로 하자면서‘문화예술생산 자연합’ 을 만들었다는 것과 메이데이가 그 회원단체여서 그 역시 동고동락하며 활동했다는 이력은 나중 에 안 것이었다. 이처럼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을 본 적도 없고, 가수 연영석이라는 인식조차 흐릿했던 그 에게 공연을 요청한 이유는 그의 첫 음반‘돼지 다이어트’ 를 듣고 홀딱 반했기 때문이었다. 썩 잘하는 노 래가 아닌데도 온종일 듣게 되는 그의 음악은 꽤 신선했고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다양한 모색을 하고 있 음에도 천편일률적으로 다가오던 노동가요계에서 느끼던 갈증의 상당한 부분을 해소해주는 그의 음악 세 계를 접하고, 어찌 덥석 손 내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노동가요가 음악 자체로 인정받으려면 오랜 세월, 노동가요가 현장의 투쟁 의지를 고취하고 노동자의 결기를 이끌어 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데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노동가요는 현장의 투쟁에 함께 하는 힘찬 노 래,‘투쟁가’ 와 동일시하곤 했다. 그런 기준이라면 그의 노래는 노동가요의 역할과 기능에 부합하는 노래 는 아니다. 그 옛날의 꽃다지만큼 그 기능에 매우 충실한 음악을 생산하고 꽤 수준 높은 공연수준을 자랑 했던 음악가가 있을까? 그런 꽃다지도 스스로 음악인이라고 자각한 순간, 음악인으로서 새로운 음악색깔 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조급했던 시절이 있었다. 90년대 중후반은 노동가요가 활짝 꽃을 피우던 시기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위기의식을 갖게 된 시기이 기도 하다. 수용자층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노동운동과 궤를 같이해온 노동가요이니 노동 운동의 정체와 맞물려 나란히 정체기를 겪는 것이라고 했는데 틀린 말은 아니나 참담한 말이기도 했다. 노동가요가 음악 자체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진단이니 말이다. 노동운동진영을 향해 문화를 도구적으로만 쓴다고 비난해왔지만 정작 자생력을 가질 만큼 음악 자체를 깊이 있고 풍성하게 만들지 못했던 것은 아닐 까? 그간 김호철, 꽃다지 등이 쌓아온 노동가요의 미학은 매우 유의미했고 90년대 초반부터 다양한 시도 를 하기는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자각 속에 꽃다지가 파업 현장이나 운동 권에서만 수용되는 음악이 아니라 좀 더 폭넓은 대중과 교감할 수 있는 음악, 노동자로서의 계급의식을 유지하면서 좀 더 그 삶에 밀착한 음악을 하자는 화두를 붙잡고 좌충우돌하던 시기에, 연영석은 꽃다지가

누군가는 노동운동과 궤를 같이해온 노동가요이니 노동운동의 정체와 맞물려 나란히 정체기를 겪는 것이라고 했다. 노동가요가 음악 자체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진단이다.

삶과 문화 121


새롭게 지향하던 바와 비슷한 결과물을 갖고 혜성처럼 나타났다. 비록 구체적인 음악 색깔은 다를지라도 음악 어법과 질감, 접근방식에서 그러했다. 노동가요가 세상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건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 때, 이 세상 한복판에서 처절하게 서 있는 음악인, 평범한 일상에서‘계급적 시각’ 을 끄집어내어 음악 으로 주조할 수 있는 음악인, 그렇게 노동가요의 지평을 넓히는 음악인의 출현에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연영석과 더불어 정윤경, 박창근 등도 그런 음악인들이었다.

낯설어도 가슴에 와닿는 음악, 연영석 연영석의 음악을 떠올리면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나온 음악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온몸에서 쌓이고 쌓인 것들이 자연스레 바깥으로 빠져나와 음악이 되는, 그래서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색깔을 띠게 된 음 악. 게다가 그 음악과 음악인의 태도가 노동자의 계급성을 잃지 않고 있으니 동종업종 종사자로서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그러나 노동문화판에서의 환호와 달리 현장에서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좀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썰렁했다. 그의 첫 무대인 서울역에서의 공연도 그랬다. 꽃다지 공연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렸다가 그가 노래하면 슬쩍 빠졌다. 그의 활동 초반에는 노동현장에서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이 상하게 분위기가 가라앉곤 했다. 기존의 노동가요와 달라 낯설었던 것일까? 요즘은 어떠냐고?‘이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할 줄 아나’ ,‘간절히’같은 노래를 부를 때, 사람들의 어깨가 들썩거리는 걸 보며 그 의 음악이 은근히 스며들고 있음을 느끼곤 한다. 그의 노래는 투쟁의 현장에서 흔히 요구하는 쎈 노래도 아니고 분위기를 확 띄울 수 있는 힘차고 경쾌 한 노래도 아니다. 오히려 애달프고 처량하고 구슬프다. 그런데 그것이 비루하게 다가오지 않고‘자본에 머리 숙이지 않고 내 꼴리는 대로 살아보겠다’ 며 발끈하는 근성으로 이어진다. 반짝거리는 별빛보다는 은 은히 길을 비춰주는 달빛에 가까운 이런 색깔의 음악은 순간의 폭발적인 환호성은 받지 못할지라도 삶의 옆자리에 오래 남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소망처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연영석처럼 음악 하고 싶다’ 는 생각을 음악을 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줄 수 있지 않을까? 어느 경지에 이른 기교가 주는 감동도 있지만, 기교가 모자라고 투박해도 가슴에 와 닿는 노래가 있다. 나는 그런 음악을‘좋은 음악’ 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영석은 이미 매우 좋은 음악을 하는 멋진 음악인임에 틀림없다.

반짝거리는 별빛보다는 은은히 길을 비춰주는 달빛에 가까운 이런 색깔의 음악은 순간의 폭 발적인 환호성은 받지 못할지라도 삶의 옆자 리에 오래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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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미안해 연영석 작사·작곡·노래

집엘 가면 엄만 내게 묻지 밥은 먹고 다니냐고 잘 사냐고 궁금한 게 많은 만큼 질문도 많은데 그런 엄마 얼굴 위엔 걱정이 가득 그런 것이 싫기도 해서 화를 내기도 했지 그래놓곤 후회를 해 봐도 나는 어쩔 순 없어 집에 있다 나올 때면 엄만 얘길 하지 밥은 먹고 다니라고 때 맞춰서 벌써가니 언제오니 어디로 가냐고 그런 엄마 얼굴 위엔 걱정이 가득 그런 엄말 이핸 하지만 왠지 싫기도 해서 뒤돌아선 인사도 못하고 그냥 나와 버렸어 * 엄마 정말 미안해 그런 마음뿐인데 엄마 정말 미안해 그저 마음뿐이네 워어어 라라랄라 워어워 라라랄라*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위한 후원콘서트에서 (사진 : 콜트콜텍문화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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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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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입맛

닭 한 마리가 품은 사연 ⑤*

바닥과 꼭대기의 만남, 치맥 정은정 삶과 먹을거리 협동조합 <끼니> 조합원

‘치맥현상’ 의 중심에는 치킨도 있지만 당연히 맥주도 있다. 한국의 맥주시장은 하이트진 로와 OB맥주 두 회사가 6:4의 황금비율로 오래도록 장악해 왔다. 이 대기업 두 곳의 시장 점유율이 96%에 이른다. 이 둘의 공급 능력 때문에 치맥의‘치’ 는 다양할 수 있어도‘맥’ 만 큼은 하이트 아니면 카스를 마신다. 맛이 아니라 탄산과 냉기로 치킨이나 기름진 안주와 함 께 먹기에 딱 좋도록 만든 한국 맥주의 형성은 이 두 기업의 공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2014 년 4월 롯데음료가‘클라우드’ 로 맥주시장에 진출했지만 판세가 어떻게 변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유통업계의 최대 강자인 롯데의 유통라인을 활용하면 맥주시장 판도가 삼파전으 로 변할 수 있을지 지켜 볼 일이다.

삐루, 한국맥주의 역사를 열다 한국 맥주는‘삐루’ 라고 불리던 일본 맥주에서 시작되었 다. 1876년‘삿뽀로맥주’ 와‘에비스맥주’ ,‘기린맥주’ 가 수입 되었는데, 조선 거류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고위층들도 이‘삐 루’ 를 즐겨 찾았다. 조선은 망했으나 맥주의 인기는 점점 높 아져 아예 맥주회사를 서울에 차린 때가 1933년이다.‘삿뽀 로맥주’ 와‘아사히맥주’ 로 유명한‘대일본맥주주식회사’ 가 설립되었고, 바로 이어서 일본‘소화기린맥주주식회사’ 가들 어섰다. 이후 두 회사는 적산관리 공장으로 지정되어 미군정 대한민국 치킨전 백숙에서 치킨으로, 한국을 지배한 닭 이야기

이 관리하다가 1950년대 민간인에게 불하되었다.

정은정 / 따비 / 2014년 7월 백숙은 어떻게 치킨이 되었나? 치킨을 먹고, 튀기고, 키우는 사람들이 그려내는 대한민국의 풍경 126

*〈미래에서 온 편지〉2014년 4월호부터 연재하고 있는‘닭 한 마리가 품은 사 연’ 이 일부 수록된《대한민국 치킨展-백숙에서 치킨으로, 한국을 지배한 닭 이야기》 가 출간되었습니다. 어느덧 한국인의 소울푸드로 자리매김한 치킨을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책입니다.


‘대일본맥주’ 를 인수한‘민간인’ 은 다름 아닌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구한말 세도가였던 민영익의 증손 자 민덕기다. 그는 덤핑 수준으로 회사를 사들였다. 아이러니는‘대일본맥주’ 가‘조선맥주’ 라는 이름을 달 면서 한국 맥주의 역사를 열었다는 것이다. 이 조선맥주를 1966년 부산 재벌이었던 대선주조 일가가 인수 했고, 현재 갈등 많은‘박 씨 가문’ 이‘하이트진로’ 로 이어가고 있다. 1993년 지하암반수를 뚫어 만들었다 는‘하이트’ 로 크게 히트를 치고 아예 사명을‘하이트맥주’ 로 바꿨다가, 진로의 소주 사업을 인수해 지금 의‘하이트진로’ 가 된 것인데, 최근엔‘맥스’ 로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중이다. 기린맥주를 생산하던‘소화 기린맥주’ 는 1952년 두산그룹 박두병 초대 회장이 사들여 이름을‘동양맥주’ 로 바꾸었다.‘OB(Oriental Brewery)맥주’ 라는 브랜드로 잘 알려져 있지만, OB맥주는 벨기에 맥주회사에 팔린데다 1999년 진로에서

맥주사업 분야를 인수해 지금은 아예‘카스’ 를 대표 브랜드로 삼고 있다. 한때 두산그룹의 상징이기도 했 던 OB맥주는 이제 두산그룹과 상관없는 맥주회사라고 볼 수 있다.

치맥, 완전경쟁 치킨과 독점의 맥주가 만나다 근대 음식 중에서 일본에 연원을 두지 않은 것이 없으니, 민족의 자존심 따위는 필요 없다. 다만 식민지 유제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일상, 특히 음식의 일상을 침투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어수선한 해방정국에서 헐값으로 일본 식품회사들을 덥석 받아 전쟁특수를 누리고, 휴전 이후에는‘최고급 식품’ 을 양산해 내는 기업들로 변모했다.‘먹는장사’ 로 재벌 대열에 들어서는 데에는 늘‘권력’ 이 개입했다. 실제로 정부는 맥주 공장 면허를 철저히 제한해왔고, 그 진입장벽을 높여 웬만한 자본력을 갖고는 맥 주시장에 진출할 엄두도 낼 수 없게 만들었다. 비록 망하기는 했지만 한때 재계 순위 30위 안에 머물던 진 로그룹 정도나 되어야 도전 가능하고, 롯데 정도나 되어야 진출 가능한 분야가 맥주다. 그러니 맛에 신경 쓸 필요도 없었을지 모른다. 꿋꿋하게‘라거’맥주만을 양판하고, 여기에 탄산을 과하게 주입해 개성 없는 맛을 연출해 왔다. 미군들이 전쟁터에서 술을 대신해 마시면서 스트레스를 풀던 코카콜라가 한국에 상륙 했을 때, 코카콜라를 생산하는 곳도 국내 최대의 맥주회사였던 OB였다. 맥주회사는 물과 탄산을 갖고 있 었고 거기에 설탕과 검은 색소가 들어가면 콜라, 보리 발효액이 들어가면 그것이 맥주다. 두 맥주회사는 주류 유통을 양분하면서‘생맥주’시장도‘병맥주’시장도 꽉 틀어쥐고 있다. 전국의 프렌차이즈 치킨집 생맥주시장도 사이좋게 양분하고 있는 중이다. 완전경쟁 벌판에 놓여진‘치킨’ 과 독점 의 온실에서 생산된‘맥주’ 가 만난 치맥. 시장의 꼭대기와 바닥이 만난 묘한 조합임에 틀림없다.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가 매달 삶과 먹을거리 협동조합 <끼니> 소식을 전합니다. 먹을거 리의 생산과 가공, 유통, 소비 등 각 분야의 전문가와 언론인, 인문학 연구자 등이 필진으로 참여합 니다. 한국인의 끼니가 그 실체를 선명히 드러낼 수 있도록 왜곡된 정보와 조작된 전통을 고발하고, 궁극적으로는 한국의 노동자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끼니를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모색 합니다. 이 글은 <끼니> 공식 블로그에 동시게재 됩니다.(http://blog.naver.com/gginicoop) 삶과 문화 127


편지를 접으며

추석 따위든지, 추석을 이용하든지 이장규 기관지위원장

곧 추석이 다가온다. 사람들은 명절을 통과의례 정도로 생각하지만, 명절이야말로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사회정치적 시공간이다. 평소에는 각자의 삶의 공간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이, 명절이라는 시공 간 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의 삶과 접촉하게 된다. 그 시공간을 주도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주류 이데올로기에 따른 성공신화이다. 명절 때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가는가? 누구네 자식이 서울대 들 어갔다는 둥, 누구네 자식이 삼성에 취업했다는 둥, 누구네 땅이 보상을 왕창 받았다는 둥 등등. 가난한 사람들이 왜 부자 정당에 투표하는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지만, 핵심은 단순하 다. 사람들은‘나도 부자가 될 수 있다’혹은‘내 자식이라도 성공할 수 있다’ 고 생각하면 부자 정당에 투표한다. 나나 내 자식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데 왜 굳이 가난한 이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하겠는가? 그건 비현실적인 희망이라고? 맞다. 97년 이후로 한국 사회는 근본적으로 바뀌었으며 이제 더 이상 가난한 이들이 신분상승을 이루기 어렵다. 하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90년대 중반까지 한국사회 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며 신분상승의 가능성, 이른바 계급유동성도 아주 높았다. 빈농의 자식 이라도 공부 잘하면 성공할 수 있었으며, 꼭 공부가 아니라도 부동산 투기 등‘재테크’ 에 재주가 있거 나 그조차도 아니라 재수 좋아 개발이익에 끼어들 수만 있어도 신분상승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공신화들이 가장 강력하게 유통되는 시공간이 바로 명절이다. 누구의 명문대 입학 이니 누구의 부동산 투기 같은 성공사례들이 자랑스럽게 이야기된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기준 으로 남들을 함부로 재단한다. 왜 공부 안하냐는 둥, 왜 결혼 안하냐는 둥. 그래서 명절은 철저한 배제의 시공간이기도 하다. 성공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동안 성공하지 못한 이들은 아무런 발언권이 없다. 차라리 처음부터 출발이 달랐다면 몰라도, 출발이 비슷했기에 오 히려 더 할 말이 없다. 그들은 그냥 패배자일 뿐이기에.‘평등 명절’ 을 이야기하지만, 그조차도 명절이 라는 시공간에 끼어들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배제된 자들은 평등할 자격조차 박탈된다. 물론 앞으로는 이러한 성공 이데올로기의 유포 통로로서 명절의 역할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한국 은 이미 신분 상승이 어려운 사회가 되었기에, 비슷하게 출발해서 성공했다고 자랑할 수 있는 사례들 이 드물어질 테니까. 다만 과거의 경험에 매여 있는‘어르신’ 들이나‘386 꼰대’ 들은 여전히 있겠지만 그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면 된다. 아니면 그 분들의 자부심을 적당히 맞춰주며 우리를 약간이나마 지 지하도록 만드는 것도, 마키아벨리적인 의미에서 좋은 선택이다. 추석 따위든지, 추석을 이용하든지 할 일이지, 추석에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자. 128


0820

원일 제 호표지 -

12

2014.8.21 2:38 AM

페이지

2

표지 이야기

“사진기와함께세상속으로 가족과함께도시바깥으로” ,

다큐멘터리사진가이상엽

이상엽은다큐멘터리사진가이자작가이다 그동안《흐르는 강물처럼》《레닌이 있는 풍경》《낡은 카메라를 들고 떠나 다》《사진가로사는법》《파미르에서 윈난까지 》등개인저 서만 열일곱 권 공저까지 포함하면 스물여덟 권을 펴냈을 정도로부지런한사람이다 진보신당창당과함께입당하여 문화예술위원회의 탄생을 함께 준비한 당원이고 진보신당 정책위원회부의장을역임하기도했다 이상엽의 당적은 진보신당연대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후 노동당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는 문화예술위원회 준비모임 을제안한사람이기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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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에인재가많았어요 진보정당에매우중요한문화 예술인들을엮어위원회를만들려했죠 그런데 년당대 회때에통합이냐독자냐하는논쟁이일었지요 저는통합 파였지만 당에남았고요 어떤결정이나든우리문화예술 위원회는함께가기로했거든요 무엇보다진보신당에대한 의리 나의판단에대한존중 그런판단을한나에대한자기 존중때문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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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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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사진가 이상엽 인터뷰 전문은 110~115쪽 <숨 은문화예술당원찾기>에서볼수있습니다.

미래에서온편지제12호

발행인 이용길 편집인 이장규 위원회 김건담김성현노정박권일장석준정정은정철수

조윤호최백순홍원표

교 열 노정정정은 디자인 고미숙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영등포, 라00407) 발행일 2014년 8월 26일 주 소 서울영등포구국회대로 664 한흥빌딩 2층노동당 전 화 02) 6004-2006, 2007 팩 스 02) 6004-2001 이메일 laborzine@gmail.com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인 쇄 인천시계양구계산동 973-15 원일컴 가격 10,000원


2013.12 제4호

제4호

www.laborparty.kr

특집 ■ 부동산 정책 잔혹사

그 많던 집은 누가 다 가졌나 기획 ■ 예술과 밥 이재영을 추모하며 ■ 정책이 살아야 진보정당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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