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서 온 편지 16호 (2015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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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제16호

“정책당대회보다 힘들었어요”

www.laborparty.kr

2015.1

값 10,000원

특집 ■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지금+여기 노동당 ■ 육아위원회 엠티, 1박2일의 긴 여정

“정책당대회보다 힘들었어요”


표지 이야기

“표지촬영도, 정책당대회보다 힘들었어요!” 육아위원회 엠티 1박2일의 긴 여정 열한 명의 아기들과 열여섯 명의‘육아위원’ 들이 모여 육아 위원회 엠티를 간다는 소식에 기관지 편집팀은‘이게 바로 미래에서 온 편지 제16호

신년호 표지다!’덥썩 물었다. 그러나. 아기들이 옹기종기 앉 아있는 사진을 찍겠다는 편집팀의 바람은 안일했다. 뭐? 한 시도 제자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저 아기들을‘나란히’앉 히겠다고? 1박2일 동안 눕고, 엎드리고, 뛰어다니며 박성훈 홍보실장이 수백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아기들이‘나란히’앉아있는 사

발행인 이용길 편집인 이장규 위원회 김건담 김성현 노정 박권일 장석준 정정은 정철수

조윤호 최백순 홍원표 교 열 노정 양솔규 정정은 표석 디자인 고미숙

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엠티 둘째 날 화원에 나들이를 갔을 때 여람이 아빠 김한울 당원이 삼각대와 타이머를 이용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 영등포, 라00407)

해 단체 사진을 찍었지만 안타깝게도 초점이 흔들렸다.

발행일 2014년 12월 26일

수백 장의 사진을 넘겨보다가 한 장을 겨우 뽑아냈다. 이미

주 소 서울 영등포구 국회대로 664 한흥빌딩 2층 노동당

지-윤현배 당원의 딸 선우가 이마에 손을 짚으면서 이렇게

전 화 02) 6004-2006, 2007

말하는 것만 같다.“당신들만 힘든 게 아니야. 우리도 정책당

팩 스 02) 6004-2001

대회보다힘들었다구!”

이메일 laborzine@gmail.com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육아위원회 엠티 기사 전문은 6~10쪽 <지금+여기 노동당>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인 쇄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973-15 원일컴 가격 10,000원


미래에서 온 편지

‘ 미래에서 온 편지’ 는 영국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작가, 미술가인 윌리엄 모리스가 1891년에 낸 소설 제목

News 『News from Nowhere』 을 우리말로 의역한 것입니다. from Nowhere

nowhere는 ‘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는 뜻입니다. ‘ 유토피아’ 라는 말의 원래 의미도 ‘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고 하지요. 이제 노동당의 기관지에 ‘ 미래에서 온 편지’ 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한국 사회의 답답한 현재에 햇살을 들이는 미래의 틈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고 보니 nowhere는 now+here(지금 여기)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미래가 되기 위해, 이 편지를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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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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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띄우며 희망은 불안을 먹고 자란다|<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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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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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노동당 ■ 육아위원회 엠티, 1박2일의 긴 여정 “정책당대회보다 힘들었어요” |노 정

특집 ■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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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잘 것 없지만 적나라한‘노동’ 의 기억|해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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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시대를 위하여|이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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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모험의 지옥, 자영업 천국|찐기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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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없는 청년들|용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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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한국사회 청년들을 대표할 수 있어야 해요” |정정은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3 |청소년인권 활동가 박건진 “모든 운동은 부문운동이라고 생각해요” |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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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콜트콜텍을 읽는 열두 개의 시선⑪

벽|이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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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포럼 2015년, 정치를 기획하자|홍원표


2015년 1월 제16호

·목차

기획 ■ 2015년을 전망한다 44

정치적인, 더욱 정치적인|강병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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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 그 속의 한국|유승경

56

중국의 꿈 실현될까|하남석

85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자동차 중독 사회 어떻게 벗어날까|김상철

90

연속기획 한국 대학 체제의 형성① 일제 강점기와 경성제국대학|김예찬

94

먼 좌파 이웃좌파⑫ 포데모스, 21세기형 정치조직의 등장인가?|장석준

100

기고 전태일 열사 정신을 잊지 말자|김승호

삶과 문화 102

오덕칼럼 로봇 애니메이션과 극우의 향수|김민하

106

오비환의 야담외전 왕, 시간, 그리고 주체②|오비환

110

오보로 본 언론 박근혜 대통령의 핵개발 선언? YTN의 황당 오보, 왜?|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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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문화예술 당원찾기 성실한 기록자, 분투하는 창작자, 다큐멘터리 감독 정용택

“정말 나쁜 놈들이에요” |나도원 120

불온한 서재 가림막 안에서 별 헤아리는‘난쟁이’ 들에 대한 기록|양솔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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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꿈 진주|민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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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접으며 미생과 일베|박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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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띄우며

희망은 불안을 먹고 자란다 2015년 새해 첫 편지입니다. 이번 호는 유난히 젊습니다. <지금+여기 노동당>은 아이 키 우는 젊은 당원들의 목소리를 싣습니다. 특집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에서는 대형마트서 일 하는‘미생’ 부터 초짜 자영업 사장, 노동조합 상근자, 노동당 활동가 당원들까지 험난한 시대 를 꾸역꾸역 살아가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진보정치 열전>은 순탄치 않은 길을 꿋꿋이 걷고 있는 청소년 인권운동가를 찾아갔습니다.

마음 깊숙한 곳에 신념이, 이상이, 목표가 새파랗게 살아 숨쉬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습니 다. 그래서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가는 저 이야기들에는 여기도 저기도 불안한 물음표들이 가 득합니다. 초보 부모는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성장하기 어려운 세상이라서 불안하고, 초보 사 장은 건물주 자녀들 유학비나 보태주는 꼴이 될까봐 불안하고, 초보 활동가는 평생 생계를 걱 정하면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불안합니다. 껍질 밖으로 나와 처음 부딪친 세계는 사방이 온통 벽입니다. 그러나 현실과의 팽팽한 긴장 위에서 길항하지 않고서 낡은 질서에 균 열을 낼 수 있을까요? 새로운 것을 잉태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삶도, 그리고 정치에서도 희 망은 불안을 먹고 자랍니다.

다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기획> 면에서는 새해 한국 사회의 정치와 경제를 전망해 봅니다. 그와 더불어 <정책포럼>에서는 비록 국회의원 하나 없는 원외정당이지만 진보정당으 로서 2015년 역점을 두어야 할 정책과 방향을 제시합니다. 어느 것 하나 섣불리 희망을 말하 기 어려운 불안 위에서 용기 내어 한발씩 내딛는, 노동당도 청년입니다.

특집에서 한 당원이 말하듯, 일하는 사람들에게“당신의 오늘 하루 어떠셨습니까?”하고 말을 건네는 노동당이 되기를 희망합니다.“사실은 당신도 이놈의 세상이 마음에 안 들지요? 어찌, 같이 바꿔보지 않으렵니까? 당신 마음 속 진주 한 알 키워보지 않으시렵니까?”<노래의 꿈>에서 민정연 당원이 이야기하듯 그렇게 손을 내미는 2015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독자 여러분, 새해에도 복 많이 지으십시오. 2014년 12월 26일 <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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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모집 오늘 우리의 한 걸음이 길을 엽니다. 미래가 됩니다. 우리는 길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 사람과 자연이 공존 가능한 지구생태계, 차별과 소외 넘어 모두가 평등한 세상, …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밑그림을 그려나가면서 없는 길을 만들고, 스스로 길이 됩니다. 그래서 노동당의 꿈은 곧 <미래에서 온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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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당대회보다 힘들었어요”

지금+여기 노동당

육아위원회 엠티 1박2일의 긴 여정 노 정 편집실장 / 사진 박성훈 홍보실장

“여러분, 취침 시각까지 한 시간 이십 분 남았습니다.”열한 시 정각에 터지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기라 도 하듯, 사회를 맡은 들이 아빠 나도원 당원은 시계를 연신 쳐다본다. 아기들 입에 저녁밥 한술씩 떠먹이 는 데만 세 시간을 훌쩍 보내고 나서야 육아위원들은 맥주잔을 들고 모여 앉았다. 모두의 간절한 바람을 담아, 건배사도“빨리 자라!” 다. 아기들이 옹기종기 나온 사진을 찍어서 신년호 표지로 쓰자는 편집진의 바람은, 안일했다. 뭐? 한시도 제자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저 아기들을‘나란히’앉히겠다고? 그 와중에‘퀴즈로 가족 소개를 하고 육 아 고민을 이야기한 뒤에 조별 토론과 발표를 하자(!)’ 고 성율이 엄마 백연주 당원이 운을 떼자, 누군가 이 6


렇게 받아쳤다.“그건 정책당대회보다도 더 힘들어!” 열한 명의 아기들과 열여섯 명의 육아위원들이 모인 12월 5일과 6일, 육아위원회 엠티가 그렇게 시작 됐다. 믿기 어렵겠지만 정말로 가족 소개 퀴즈를 하고, 모둠모둠 모여서 육아 대토론회를 진행했다. 정책 당대회보다도 힘들었고, 동시에 정책당대회만큼 원대하게 꿈꾸고 치열하게 토론이 벌어졌다.

“출산 파업, 더 해야 돼요” 육아 ‘위원회’ 라고 이름 붙였지만 정식으로 인준 받은 부문위원회는 아니다. 당원이 많지만 비당원도 있다. 들이 엄마 최운 당원이 <정치신문 R>에 기고했듯“육아와 가사 노동이 허드렛일로 취급당하는 사회 에 대한 일침” 으로 그들은 이 소모임을‘육아위원회’ 라고 부른다. 내남없이 아이들을 걱정하는 시대지만, 매일 아이들과 함께 눈을 뜨고 부대끼는 사람들에게는 그 걱정 들 하나하나가 현실이다.‘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은 부모가 될 것인가’ ,‘육아하기 좋은 사회는 어떻게 가능 한가’ 라는 물음은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당장 맞닥뜨리고 있는 절박한 과제다. “맞벌이하면서 아이 키우는 집들이 경이로워요. 육아휴직이 끝나면 복직을 해야 되는데 일과 육아, 둘 다 잘할 수 있을까요? 쉬면서 생긴 공백기도 굉장히 크게 느껴져요.”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너무 피곤해서 아이한테 온전히 신경써줄 수가 없어요. 잠도 부족하고 육아도 부족하고, 항상 모든 게 부족한 느낌이에요. 아이와 더 많이 놀아주고 아이가 성장해가는 과정을 더 오래 지켜보고 싶지만, 제 사회생활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잖아요.” “기업 문화가 바뀌어야 해요. 탄력근무제도 더 널리 도입되어야 하고요. 야근수당을 무조건 줘야 된다 지금+여기 노동당 7


면 돈 아까워서라도 빨리 집에 가라고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출산 파업을 더 해야 돼. 아직 멀었어요. 국 가가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 해요.” 아빠가‘칼퇴근’하는 게 눈치 보인다고 말하고 엄마 입에서‘출산 파업 더 해야 된다’ 는 말이 나올 만 큼, 이 사회는‘육아하기 좋은 사회’ 로부터 동떨어져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입 모아 말한다. 개인적으로 해 결될 문제, 개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고. 그렇지만 동시에, 당장 부닥치는 현실은 현실대로 존재하며, 주어진 상황 위에서 그저 최선을 다할 도리밖에 없다고. 그리고 그‘최선’ 은 오늘 내 아이의 문제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육아위원회는 세월호 단식농성 당시 유모차를 끌고 농성장을 찾아‘최연소 방문 기록’ 을 남겼고, 전국장애인연대의 장애인이동권 투쟁에 연대 해 광화문역 엘리베이터 설치에 목소리를 보태기도 했다. 현실 위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 사람들은 모순에 대한 감수성도 함께 성장할 수밖에 없다.

“알아서 치우는 날? 그런 건 오지 않아요” 몇 년 전‘선거와 가족주의’ 라는 주제로 열린 당내 토론회. 여성 당원들은 선거운동 하다가도 밥하러 가고, 남성 당원으로부터‘힘들면 사무국장 그만 두고 그냥 열성 당원 하시죠’ 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고 증 언한 바 있다. 그만큼 가사와 육아의 공간은 이 시대 성평등 수준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현장이기도 하다. 육아위원회에서 만난 여성 당원들이 체감하는‘우리집 성정치’ 의 수준은 어디쯤에 있을까? 엠티 이 튿날 아침, 남성 당원들이 아침을 준비하는 사이 옆방에 모인 여성 당원들의 대화는 가사 분담의 주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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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졌다. “남편은 일대 일로 노동을 교환 하는 게 가사 분담이라는 인식이 커요. 니가 밥을 하니까 나는 청소 를 한다는 식이에요. 근데 집안일 이라는 건 그런 게 아니잖아요. 피 터지게 싸웠어요. 아니 그럼 모든 걸 다아 일대 일로 나눠서 해보자 고.” “입을 옷이 없으면 빨아야 되잖 아. 그러니까 빨래는 해요. 근데 먼지는 자기 눈에 안 보인다는 거 야. 그러면서 나더러‘네 눈에는 그게 어떻게 보이니?’이래요.‘우 리 딸이 나중에 당신 같은 남자랑 결혼하면 좋을 것 같냐’ 고 물으니 가만히 생각해보더니만, 싫대요.” “(남편이)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한다는 건 이 세대에서는 불가능한 건지도 몰라요. 정말로 일이 일로 안 보여서, 몰라서 못하 는 거죠. 교육을 받지 않아서 그래요. 그래서 다음 세대를 지금 엄마들이 집에서 가르쳐야 되는 거죠.” ‘내가 얘기하지 않아도 남편이 알아서 치우는 날 같은 건 오지 않아요’ 라니, 이렇게 허망하고 암울한 말이 어디 있는가. 그래도 희망은 있다. 엄마는 다섯 살짜리 아들에게 쓰레기 분리수거부터 가르친다. 어 린이집에서 아이가‘우리 아빠는 요리 못하는데’ 라고 말했다는 얘길 전해들은 남편은 충격을 받고, 요리 를 배우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부모도 아이도 배우면서 큰다.

“친구랑 같이 앉으라고 아빠 다리는 두 개야” “몇 살쯤 되면 좀 나아질까요?” “배변 훈련은 언제부터 시켜야 될까요?” “나이가 더 들면 잠투정이 줄 어들까요?” 1박2일 내내 초보 부모들은 서로의 고민을 함께 하고 조언을 주고받았다. 한 인간의 성장과 발달을 지 지금+여기 노동당 9


켜보고 함께 하는 시간, 즐거운 만큼 버겁고 경이로운 만큼 막막할 수밖 에 없다. 남편이 호러무비 마니아인 데 아기 앞에서 자꾸 호러무비를 틀 어놓는 것도 걱정이다. 노는 것도 걱 정이다. 어느 집에는 장난감을 하나 도 놔두지 않는다는데 우리집은 장 난감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 같다. 방사능은 더 걱정이다. 어떤 부모들 은 식품회사에 일일이 전화해서 원 재료가 어디서 왔는지, GMO가 들어 있는지 안 들어있는지 다 알아본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 나라 에 도대체‘안전한 먹거리’ 란 존재하 지 않는다. 소율이 엄마 박선경 당원 이“학교 안 보내고 어떻게 잘 키울 수 있을지”고민이라고 하니 소율이 아빠는“그게 내 고민입니다,(좌중웃 음) 초등학교는 좀 보내자구요…”하

고 울상이다. 대한민국 입시경쟁 속으로 아이가 휘말려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공포다. 아니, 취학 문제는 아직 고민하기도 이르다. 말도 안 통하고 어디로 튈지 몰라서 공포인 아기들을 먹이 고 재우고 달래는 게 지금 당장 맞닥뜨린 중대사다. 1박2일 내내 이 아기들은 꼬물꼬물 천지사방 기어 다 니며 연신 부딪치고 밟고 밟혔다. 여기서 울음을 그치면 저기서 통곡이 시작됐다. 그나마‘함께 맞는 비’ 라서 다행이다. 니 아이 내 아이 가릴 것 없이, 울면 어르고 게워내면 닦아주니까. 제 아빠 무릎을 다른 친 구가 차지했다고 한 아기가 왕- 울음을 터뜨리며 기어오니 아빠는 다른 한쪽에 앉히며 달랜다.“그래서 아빠 다리가 두 개잖아, 친구랑 같이 앉으라고.”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를 발행하는 김규항 씨는 얼마 전 SNS에서‘부모가 오로지 내 걱정만 한다고 생각하며 자라는 아이와, 다른 아이 걱정도 함께 한다고 생각하며 자라는 아이의 인격적 성장이 같을 수 없다’ 고 말한 적이 있다. 더불어 크고, 함께 키우는 일의 소중함이 여기에 있다. 당원들이 삼삼오 오 모여 육아위원회를 꾸린 이유이기도 하다. 노동당 육아위원회로 오시라. 여기에 당신의 동지들이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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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오늘날 청년 문제는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모순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리트머스지다. 대형마트 김대리부터 자영업자, 노조 활동가에 이르기까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 민국 청년들의 목소리를 들어본다.

특집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11


(사진 : EBS)

특집 /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보잘 것 없지만 적나라한 ‘노동’ 의 기억 마트 김대리 분투기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던 주부사원‘여사님’ 들이랑, 가까스로 취직 턱걸이한 나랑, 알바, 인턴을 거쳐 몇 해 만에 정규직 전환까지 얻어낸 나보다 다섯 살 어 린 청년이 함께 주말도 없이 문을 열고 같이 문을 닫았다.

해태 서울 강서구 당원, ○○마트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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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만 원 알바생, 정규직 되다 그해 봄 어느 날, 드라마 <미생>에서처럼 나에게도 알바 도중에 문자가 왔다. 첫 최종합격 통보였다. 취 직이 너무 안되어 시작한 알바는 한 달에 68만 원밖에 주지 않았지만 혼자 먹고 살 만큼은 되었다. 대학 동창이나 후배들은 별로 만나고 싶지도 않았고 만나도 얻어먹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었다. 녀석들이 회 사 월급으로 사는 무슨 등심이며 참치 같은, 학생 때는 언감생심이었던 먹거리들은 실제로 매우 맛있었 고, 나는 조금도 미안한 기색 없이 녀석들의 얼굴이 굳어질 때까지 더 시켜 먹었다. 졸업은 내가 더 빨랐는 데. 학교를 떠나 사회인이 되어 박봉이지만 처음으로 풀타임 월급이란 걸 받아보고는 기분이 좋아서, 취업 준비하느라 졸업도 미루고 고생 중이던 녀석들을 찾아다니며 치킨도 사고 맥주도 사고, 노래방에도 데려 간 기억이 났다. 남과 다른 일, 내가 정말 하고 싶었다는 그 일이란 건

학교를 떠나 사회인이 되어 박봉이지만 처음으로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세상의 무

풀타임 월급이란 걸 받아보고는 기분이 좋았다.

관심과 친구들의 무심한 냉담 앞에 서 날마다 조금씩 깃털이 빠져갔다. “네가 일반 회사에 안 다녀봐서 그

취업 준비하는 녀석들을 찾아다니며 치킨도 사고 맥주도 사고 노래방에도 데려갔다.

래.”언젠가 딱히 언쟁도 없었던 대 화 속에서 가장 친한 친구 하나가 무심코 던진 그 말을, 나는 첫 합격 문자를 받은 그 날까지 참 오래도 잊 지 못하고 살아왔다.

매출 잘 나오면 힘든 줄 몰랐다 영업직으로 입사하고 매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대졸 신입사원 연수‘뽕빨’ 이 빠질 때쯤 나를 비롯한 입 사동기들에게 힘든 매장근무를 버티게 하는 최대의 동기부여는 역시 본사근무였다. 열심히 하면 된다, 아 니다 눈에 띄어야 한다, 본사에도 가끔 가서 인맥도 터야 한다, 그럴 것 없다, 하다 보면 반드시 소문은 난 다 등 온갖 얘기들이 난무했고 또 저마다 각자의 스타일대로 그 중 하나를 좇았다. 나는 나이도 많은 축이 었고 그런 쪽으로는 딱히 능력도 관심도 없어 그냥 시키는 일 열심히 하던 사이에, 하나 둘 본사로‘올라 가는’동기들도 생겨났다. 매장근무는 쉽지 않았다. 아침 8시에 문을 열고 자정에 닫을 때까지, 이렇다 할 쉬는 시간도 없이 계속 물건을 나르고 진열하고 계산도 했다. 계약직 주부사원들은 이보다 훨씬 짧게 하루 여덟 시간씩만 일했고 급여도 우리보다 훨씬 적었다. 알바 공고를 보고 온 스물 한두 살 대학생들도 있었는데, 대부분 한 달을 넘 기지 못했다. 이 일 말고도 선택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았을 것이다. 특집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13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던 주부사원‘여사님’ 들이랑, 가까스로 취직 턱걸이한 나랑, 젊은 나이에 선택 지 중 하필 유통영업을 골라서 알바, 인턴을 거쳐 몇 해 만에 정규직 전환까지 얻어낸 나보다 다섯 살 어린 청년이 함께 주말도 없이 문을 열고 같이 문을 닫았다. 힘든 일도 많았지만, 유통업

유통업계에서 누구라도 하는 말처럼 매출이

계에서 누구라도 하는 말처럼 매출이 잘

잘 나오면 그게 내 월급이랑 아무 상관없는

나오면 그게 내 월급이랑 아무 상관없는데 도 힘든 줄을 몰랐다. 마음이 아니라, 정말

데도 힘든 줄을 몰랐다. 마음이 아니라, 정

로 몸이 안 힘들었다. 그때를 돌아보면 가

말로 몸이 안 힘들었다. 돌아보면 가장 신기

장 신기했던 기억이다.

했던 기억이다.

혼자 서럽게 울고 난 퇴근길은 따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그 즈음 점장이 하루에 한 번이라도 직원들에게 욕설과 짜증을 퍼붓지 않는 날이 없어 다들 전전긍긍하던 때였다. 홈페이지 고객의 소리에 올라온 한 건의 서비스 클레임 때문에 점 장이 심하게 문책을 당한 직후였다. 기분 상할 이유는 점장에게만 있는 건 아니어서 우리도 하루 종일 침 울했다. 오픈부터 마감까지 하루 꼬박 열일곱 시간씩 일하는 우리가 진상고객을 만나 겪는 이야기보다는 그 진상고객들이 하는 얘기를 회사는 더 중히 여기는구나 싶었다. 그날따라 참으로 고객이 싫었다. 서비스 노동자답게 감정을 감추고 인사하고 웃으며 묵묵히 짐을 나르는데, 바쁠 때 제일 힘든 고객 중 하나인, 걸음이 느리고 통로를 막고 선 노인 고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 어깨에 박스를 들쳐 멘 채 말 했다.“죄송합니다, 잠시 지나가겠습니다 고객님!”좀 지나갈게요, 늦으면 또 저만 욕먹거든요 고객님. 노 인 고객들은 보통 귀도 어두운 경우가 많다. 순간 잠시 머릿속에서 뭔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내 의지와는 전혀 다르게 왼손을 들어 그분들을 옆으로 떠밀면서 날카롭게 외치고 말았다.“잠시만요!”아, 그 다음 순 간에 내 눈에 들어온 모습은 엉거주

“잠시만요!”아, 그 다음 순간에 내 눈에 들어온 모습은 엉거주춤하게 밀려난 할머니와 그 할머니 를 또 주춤거리며 부축하는 할아버지와, 그 두 노 부부의 비틀거리면서도 꽉 맞잡은 두 손이었다.

춤하게 밀려난 할머니와 그 할머니 를 또 주춤거리며 부축하는 할아버 지와, 그 두 노부부의 비틀거리면서 도 꽉 맞잡은 두 손이었다. 그 날 난 창고에 가서 한참을 울 었다. 울고 싶지 않은데도 눈물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고작 이러려고 그렇게 힘들게 들어왔는지, 뭐 대단한 일 한다고 그렇게 끙끙대는 지, 일하는 게 아무리 불만족스러워도 이렇게 쉽게 예의도 뭣도 다 잊어버리게 되는 건지, 나를 포함한 그 모든 것들이 참으로 싫고 지긋지긋했다. 14


마트의 문을 열고 닫을 때까지 물건을 나르고 진열하는 일이 계속된다. (사진 : 해태 제공)

그러다가 그날 밤의 퇴근길에는 뭔가 조금 편안해진 마음의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야, 그래도 네가 이 일을 했기 때문에 이런 느낌도 겪어보는 거잖아. 안 해봤으면 절대 이런 이야기들을 몰랐을 거잖아. 어쩌 면 그 누구한테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자기만의 견뎌냄을 스스로 그렇게라도 다독거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매장을 생각할 때면 여러 가지 기억이 떠오르지만, 그 중에서 가장 가장 보잘 것 없고 적나라한 기억이기도 하다.

편해짐 vs 외로움 본사라는 곳에서 일하게 된 지도 꽤 지났다. 본사라고 불리는 사무직 조직과 현장이라고 불리는 영업 직/생산직 조직은 직장 생활하는 마음을 공유하는 구조가 조금 다른 것 같다. 사무직은 특수한 직무가 아 닌 이상 같은 팀에서도 개개인의 역량과 성과가 달리 평가되고, 그 우열에 따라 칭찬과 질책이 차별적으 로 주어지거나 그에 따른 상벌성격으로 업무강도가 적용된다. 그에 비해 현장은 어느 정도 덩어리로, 단 위로 평가받는다. 매장, 영업소, 지점 등. (공장 쪽 일은 안 해봐서 자신이 좀 없다. 생산라인 단위는 그렇지 않 을까?) 또 하나, 보통은 본사보다 현장이 인원도 더 많고 좀 더 보편적이다. 매장근무 시절 만났던 다른 매

장의 동일직무, 동일직급 동료들과는 친해지기가 참 쉬웠다. 처음에는 경계도 하고 기싸움도 하고, 입사 경로며 근속년수 같은 것도 확인해 보지만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나면 나도 모르게 조금씩 마음이 풀린 특집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15


다. 화제는 대부분 회사(점장)가 얼마나‘X같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나면 나도 모르게

은지’ , 그리고 일이 얼마나‘X같이’힘든지

조금씩 마음이 풀린다. 화제는 대부분 회

로 요약된다. 대부분 비슷한 일을 하기 때문에 힘든 마음의 공유가 수월하다. 그에 비해 사무직

사(점장)가 얼마나‘X같은지’ , 그리고 일이 얼마나‘X같이’힘든지로 요약된다.

은 저마다 일과 처지가 각양각색이다. 거칠 게 말하자면, 사무직은 대부분 근무시간 내내 외로운 것 같다.

노동자와 직장인 사이 어디쯤에서 나는 노동당 당원이기도 하다. 노동당은 노동자의 권익을 추구하는 정당이고, 나는 그 의의가 지금도 옳다고 생각해서 당적을 유지하고 있다. 노동당이 그 뜻을 잃지 않는 한 나도 계속 당원일 것이다. 다만, 나는 노동당이 아끼는 그‘노동자’ 의 범위를 보다 확장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글을 쓰는 지금 이 밤 11시에도 계산대에서 바코드 스캐너를 들고‘어서 오세요 고객님’ 을 부르는 매장 주부사원도 노동자이고, 아마 내일 보고준비 때문에 아직까지 퇴근하지 못했을 옆 팀 팀장도 노동자이다. 노동자라는 단어를 그렇게 어렵게 배우지 않았다. 일하는 사람은 모두 노동자라고. 그렇게 늦게까지 일하 는 사람은 또 힘든 노동자이기도 한 거니까, 이 모든 노동에 대해 애정과 관심을 보여줄 수 있는 당이었으 면 좋겠다. 당신의 오늘 하루 일은 어떠셨냐고, 당신 일 얘기 좀 해 보시라고. 나눠야 할 다른 얘기도 많지 만 저것 또한 하나의 화제가 되는 당원모임이 우리 노동당의 우리 지역 모임이 되었으면 좋겠다. 2015년 에는 좀 더 많은 동네사람을 만나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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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별이 빛나는 시대를 위하여 노조 활동가 분투기 운동의 빛나던 전망은 길을 잃은 지 이미 오래되었고, 전업 활동가들의 삶은 익히 아는 대로‘고단함’그 자체다. 그러나 누군가는 남아 별빛이 되어 길을 환히 밝혀야 되지 않겠는가.

이만재 서울 강북구 당원

특집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17


이야기를 꺼내며 자전적인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나처럼 나약하면서도 자의식 이 강한 사람의 경우에는, 혼자서만 간직했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한다는 자체가 고역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청년들이 내가 과거에 했던 고민들, 지금 하고 있는 고민들을 혼자서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부끄러움을 벗어던지고 내가 간직했던 이야기들을 청년 당원들과 함께 나 누고자 한다.

고민을 선택으로 바꾸기까지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2002년 촛불항쟁과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약진을 보 면서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당시에 다니던 고등학교 앞에 작은 도서관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육필메모가 가득한 80년대 운동권 서적과 김남주 선생님의 시집을 읽으며 어렴풋하게나마 대학에 들어가서 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와 어느 정치단체에 가입해서 활동했지만, 그리 균일하지는 못했다. 워낙에 게으르고 내성 적인 성격에다가 활동보다는 이론에 대한 관심이 더 컸기 때문에 회원들과 토론하고 활동하는 것보다는 혼자서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게 더 좋았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휴학을 하고 전일제 아르바이트를 했던 시기도 이따금씩 있었고, 활동과 멀어질수록 부채감은 점점 더 커졌다. 어쩌면 사소할지도 모르는 정치적 이견이 쌓여 근본적인 회의감이 들 무렵, 가입했던 정치단체를 탈퇴했다. 하지만 군 문제도 아직 해결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진로에 대한 고민 역시 있었다. 막연하게나마 내 신 념을 펼치는 활동을 하면서 살고 싶

막연하게나마 내 신념을 펼치는 활동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지만, 경제적인 문제 로 고통을 겪어봤는지라 평생 생계를 걱정하며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매우 컸다.

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지만, 경 제적인 문제로 고통을 겪어봤는지라, 평생 생계를 걱정하며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매우 컸다. 활동 가로 살면서 평생을 헌신하는 사람들 에 대한 부채감, 그 길이 옳다고 생각

하면서도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선뜻 선택을 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군대에 다녀와서 당 장 무엇을 할 것인지 알 수 없는 막막함. 이런 감정들에 뒤섞인 채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군에 입대했 다. 오히려 군에서 생활하는 동안은 마음이 비교적 편안했던 것 같다. 일종의 도피처라는 심리도 작용했을 것이다.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대학시절 내내 느꼈던 조바심과도 작 18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선뜻 선택을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별할 수 있었다. 한 발짝 떨어져 있다는 생각 때문에 부채감은 줄어들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부채감을 어 떻게 갚아나갈 것인가에 대해 신중하게 고민할 수 있었다. 몇 가지 선택지를 가지고 제대 후에 세상을 좀 더 경험해 본 다음 최종적으로 판단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제대 후 생계 때문에 1년 가까이 이곳저곳에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주말이면 손님이 장사진을 이 루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몇 달간 일도 했고, 입시학원에서 학생들도 가르쳤다. 노동조합이 있어 근로기 준법의 적용만이라도 받을 수 있는 노동자들을 부러워하던 동료들의 푸념. 직접 느낀 비정규직의 설움. 이렇게 직접 경험한 일들은 그동안 책에서만 읽던 철학자들의 담론이나 정치단체에서 활동하며 느꼈던 것들보다 내게 더 큰 영향을 주었다. 노동자들의 정치적 조직화. 몇 가지 선택지들 중에서 비로소 내 진로 를 정할 수 있었다.

낯선 리얼리티 속에서 노동조합 활동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후, 작년 10월부터 민주노총에 가맹된 산별노동조합 중앙사무처 조직쟁의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수많은 산별노조와 지역본부, 단위노조 중 반드시 이곳에서 일해야겠다 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우연하게 기회가 왔을 뿐이고, 어디든 뛰어들어 부딪쳐 봐야겠다는 마 음이 컸다. 평소에 조금이나마 관심 있던 담론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기 에 첫 출근을 앞두고 내심 여러 가지 기대도 많았다. 특집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19


하지만 솔직히 처음 한 달 동안은 실망을 많이 했다. 주변에서 정치조직과 대중조직은 다르다는 조언 도 많이 해주었고, 내 나름대로 융통성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생각도 몇 번씩 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실 망감이 지워지지는 않았다. 선후배 관계를 따지는 위계질서와 권위주의, 대중정서와 하등 다를 바 없는 구성 원들의 정서와 분위기, 이론의 부재 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정치적 깊이, 정규직 노동자들 위주의 활동과 정책

주변에서 정치조직과 대중조직은 다르다는 조언 도 많이 해주었고, 내 나름대로 융통성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생각도 몇 번씩 했다. 그렇다고 하더 라도 실망감이 지워지지는 않았다.

등. 물론, 내가 워낙 정치적으로 예민 한 성격이라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대중조직에서 활동한 경험이 없어서 구성원들의 정서가 구체적으로 어떠한지 미리 파악하지 못해서 실망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노동운동 자체에 대해서 회의감이 든 것은 아니다. 비록 많지는 않지만 노동운동에 대해 진정 성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선배 활동가들도 있고, 조합원 수 는 적지만 자신들의 업종에서 노동 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새로운 방향성을 치열하게 모색하는 현장 지부들도 있다. 나 또한 조직되지 못한 수많은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 자들을 산별노동조합의 깃발 아래 조직화하는 과제를 가지고 나름 동 분서주하고 있다. 아직 이곳에서 일한 지 몇 달 되 지 않은데다가, 최근에는 민주노 총 직선제 일정까지 겹쳐서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 사무처 구성원들이나 현장 조합원들과 소 통하는 것도 여전히 많이 낯설다.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이상과는 거 리가 꽤 먼 리얼리티 속에서 상대 방에게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조차 씨앤앰 노동자들의 투쟁지지 1인 시위에 참여한 이만재 당원 (사진 : 이만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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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러울 때도 많다. 게다가 경


험이 풍부하고 역량 있는 활동가들에게도 쉽지 않은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에 발을 담그게 되어 부담감이 든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지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채 방향성을 잡지 못해 좌충우돌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면서 의도적으로 친화력을 발휘하지만 그조차도 여의치 않았던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 한 과정을 겪어야 조직 활동가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에 매일 매 일 기쁜 마음으로 도전해야겠다는 생각 이 든다. 다만 몇 가지 목표를 정해 놓았다. 의 도하지는 않더라도 이 자리에 안주하거

이러한 과정을 겪어야 조직 활동가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에 매일 매일 기쁜 마음으로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몇 가지 목표를 정해 놓았다.

나 스스로와 타협하지 않기 위해서다. 어 느 정도의 기간이 지난 후에 지금 정한 몇 가지 목표들을 이루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실현될 가능성이 보 인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여전히 이 곳에 남아 그 목표들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가능성조 차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미련을 버리고 이곳을 떠나 새로운 공간을 찾을 것이다.

별이 빛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기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 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환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게오르그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에서 공동체적 삶의 방향을 상실한 채 각자 알아서 길을 찾아나서야 하는 근대적 인간의 고단한 삶을 위와 같이 표현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자신의 진로와 미래를 고민하 는 진보적인 청년들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운동의 빛나던 전망은 길을 잃은 지 이미 오래되 었고, 전업 활동가들의 삶은 익히 아는 대로‘고단함’그 자체다. 이 길이 보통 사람들의 삶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 자리를 찾아 안주하라는 말이거나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 비록 이 길을 선택했지만 진로 선택에 대해 고민하는 청년 당원들에게 섣불리 전업 활동가의 길을 걸으라고 감히 조언 하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뻔한 말 하나만은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누군가는 남아 별빛이 되어 길을 환히 밝혀야 되지 않겠냐고.

특집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21


특집 /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꿈과 모험의 지옥, 자영업 천국 청년 자영업자 분투기 답 모를 걱정을 하면서 오늘도 가게 문을 연다. 내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와 별개로, 찾아오는 손님은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으니까. 내가 문을 안 열어도 월세는 계속 나가니까.

찐기춘 서울 강남·서초구 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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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들도 죽 쑨다 내가 장사를 한다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아는 장사 노하우를 내놓는다. 내가 아직 어려서 한 수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인지, 아니면 그 동안 잘되는 가게를 많이 봐왔으니 장사가 잘되는 조건은 알 만 큼 안다는 생각에서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열심히 듣다 보면 가끔 새로운 사업 아이템의 정보를 얻는 일 도 있어서 감사한 마음으로 듣곤 한다. “부동산업자들이 장사를 하면 십중팔구 망해요.”언젠가‘업자’ 에게서 들은 얘기다. 중개업을 오래 하 다 보면 아무래도 상권에는 통달하게 되는 법이라, 어떤 자리가 좋은 자리인지 어떤 업종이 잘되는지 파 악하기가 쉽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중개업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가게를 운영해서 수익을 내보자는 생 각을 하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알 만큼 아는‘선수’ 들이 직접 가게를 내면 번번이 죽을 쑨다는 것이다. 장사는 묘하다. 똑같은 아이템으로 똑같은 자리에 가게를 내도 누구는 돈을 벌고 누구는 빚더미에 앉 는다. 아무리 좋은 아이템을 가지고 시작해도 운영할 실력이 없으면 유지가 안된다. 검증이 끝난 업종은 이미 포화상태라서 지금 뛰어들어봐야 이윤이 크게 남지 않는다.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업종은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 크다. 준비가 없으면 실패하지만 준비가 너무 길어도 시 기를 놓친다. 도대체 답이 없다. 실 수를 줄이는 방법은 있지만 실패를 완전히 피할 방법은 없다. 성공할 확 률을 높이는 방법은 있지만 무조건

빚까지 져서 건물주 자녀들 유학비나 보태주는 꼴이 될지도 모르는데, 일단 시작하면 적자가 나 더라도 당장 그만두지도 못한다. 이런 판에 무슨 기대를 가지고 그 많은 사람들이 뛰어드는가.

대박이 나는 방법은 없다. 빚까지 져 서 건물주 자녀들 유학비나 보태주는 꼴이 될지도 모르는데, 심지어 일단 시작하면 적자가 나더라도 당장 그만두지도 못한다. 이런 자영업 판에 무슨 기대를 가지고 그 많은 사람들이 뛰어드는 걸까.

재정난 부딪친 첫 직장을 떠나 나의 경우에는 직장의 재정난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첫 직장이었던 진보신당 중앙당이 19대 총선에서 득표율 미달로 등록취소되면서 더 이상 기존의 인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무려 4대 보험도 적용되 는, 공채로 들어간, 소중한 첫 직장이었는데. 여기서 뼈를 묻겠다던 다짐을 철회하고 곧장 짐을 쌌다.“뭐 그렇게 급하게 떠나냐” 고 사무총장이 물었을 때 나는 대답했다.“당직자 임금지출은 줄이고 당비수입은 늘리는 보급투쟁입니다! 저 이제부터 당비 열 배 냅니다!” 사촌형이 자영업자였는데 마침 그때 새로 가게를 낸다며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이미 요식업 4년차에 문을 여는 가게마다 제법 잘돼서 친척들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장사 배우고 싶다며 찾아가 뭐든 시 특집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23


켜달라고 했다. 월 150을 받아 120을 저금해서 1년 동안 1천 5백만 원을 모았다. 경기도에서 한 칸짜리 실 내포차를 하려고 해도 1억 이상이 필요했다. 혼자서는 시작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실패한 사업가였다. 대기업에서 과장으로 일하다 동기들이 모두 승진할 때까지 부장이 되지 못하자 사업체를 차렸다. 3년 동안 몇 억쯤을 모았는데 더는 유지하지 못하고 정리한 게 내가 고3일 때였 다. 해마다 조금씩 까먹긴 했지만, 또 얼마간 남겨둔 자금이 아버지에게 있었다. 아들이 장사를 한다고 하 면 한 번은 밀어줄 수 있는 자금. 두 번은 아니고 한 번은. 우여곡절 끝에 세 명이 지분을 합쳐 강남에 레스토랑을 하나 냈다. 홀 50평에 테이블 26개를 놓고 1회 전을 돌리면 90만 원쯤 버는 구조였

우여곡절 끝에 세 명이 지분을 합쳐 강남에 레스 토랑을 하나 냈다. 오픈 두 달째에 월 매출 1억을 달성했다.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욕심이 훨씬 크기도 했거니와, 생각보다 남은 게 없었다.

다. 점심 1회전, 저녁 2회전, 하루 평 균 3회전씩 꾸준히 한 달을 벌면 8 천만 원 정도 매출을 올리고 월 1천 만 원 정도 수익을 남긴다는 것이 최 소한의 계산이었다. 물론 이렇게 벌 어서는 몇 년이 가도 손익분기를 넘

길 수가 없었다. 진짜 욕심은 최대 월 2억씩 벌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매출이 늘어날수록 마진율도 커지는 법. 2억 팔아서 1억 가까이 남으면 셋이서 해외여행 가야겠다는 흰소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근거도 준비도 없이 세운 계획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소위 원플레이트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가장 핫한 아이템이었다. 강남의 한 가게는 월 4억의 매출을 올렸다. 수요는 확대되는 중이었고 후발주자들에게도 기회는 열려 있었다. 아무리 장사가 안 돼도 적자를 보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길 때까지 준비했고, 절 대로 망해서 나가지 않겠다는 각오도 있었다. 오픈 두 달째에 월 매출 1억을 달성했다.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욕심이 훨씬 크기도 했거니와, 생각보 다 남은 게 없었다. 정산자료를 보면서 대책을 세웠다. 식자재 지출이 4천이었다. 양을 줄이거나 싼 재료 를 쓰면 만족도가 떨어지니 이건 손댈 수 없었다. 다음은 월세 1천. 장사가 어렵다고 줄여줄 월세가 아니 다. 그 다음은 가스비 2백, 전기세 2백, 수도세 1백 등. 대기업 제조공장도 아닌 일반음식점에 정부가 산업 용 수준의 공과금을 적용할 리 없으니 이것도 대책이 없었다. 남은 건 인건비 2천이었다.

발가락 찧고 디스크 도지고… 초짜 사장 수난기 요식업에 적정한 인건비 비중은 매출대비 17~18%라고 한다. 우리는 이 기준을 제법 초과하고 있었다. 당장 인력사무소부터 끊었다. 파출 이모가 없으니 설거지와 재료 준비작업 따위를 남은 인원이 분담해야 했다. 알바생들의 근무시간을 줄이고 피크 시간인 저녁 위주로만 스케줄을 짰다. 오픈준비와 마감청소가 힘들어졌지만 그렇게 해야 했다. 24


여름에는 뜨거운 그릴 앞에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나 앞이 보이지 않는다. (사진 : 찐기춘 제공)

석 달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매일 12시간 이상씩 일하고 퇴근하면 술을 마시고 자고 일어나면 출 근했다. 피로회복제를, 비타민제를, 두통약을 마구 먹었다. 숙취해소음료가 피로를 덜어준다는 얘기를 들 은 후부터는 매일 두 캔씩 사서 먹었다. 그래야 좀 버틸만했다. 감기몸살이 심해서 오한이 나고 콧물이 멈 추지 않는 날도 있었다. 도저히 서빙을 할 상태가 아닌 날에는 주방에 들어가 설거지를 했다. 언제는 컵을 씻다 깨진 컵을 못 보고 손가락을 좀 크게 베였다. 조금만 움직이면 상처가 벌어져서 피가 멈추지 않았다. 살이 완전히 붙을 때까지 2주 동안 방수밴드를 붙이고 압박붕대를 감은 채

컵을 씻다 깨진 컵을 못 보고 손가락을 좀

남은 손으로 서빙을 하고 청소를 했다.

크게 베였다. 어느 날은 철판을 떨어뜨려

어느 날은 주방 오픈준비를 하다 철판을 떨어뜨려 발가락을 찧었다. 너무 아파서 다 음날 아침 병원에 갔더니 뼈가 부러졌다고 했 다. 치료를 받은 뒤에 출근했다. 그릴을 잡으

발가락을 찧었다. 전에 앓던 허리디스크 도 도졌다. 보험 적용도 안되는 18만 원짜 리 인대강화주사를 맞았다.

면 발을 거의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종일 한 자리에 서서 고기를 굽고 퇴근하면 비척비척 숙소에 돌아가는 생활을 한 달쯤 하고 나니 의사가 완치판 정을 했다. 그렇게 일하다 전에 앓던 허리디스크가 도졌다. 아파서 잠이 안올 정도가 되어 병원에 갔다. 2주에 한 특집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25


번씩 보험 적용도 안되는 18만 원짜리 인대강화주사를 맞고 매일 세 번 진통제를 먹었다. 잠들기가 쉬워 졌다. 장사를 1년쯤 하니 통장에 8천만 원이 모였다. 투자원금의 절반 가까이를 회수한 셈이다. 2년 장사해 서 손익분기를 찍으면 잘된 장사라고 치니까 이대로만 꾸준히 하면 꽤 성공한 축에 들 수 있었다. 문제는 점점 떨어지는 매출이었다. 트렌드가 적어도 2년은 더 갈 거라는 당초 예상과 달리, 다른 가게들도 슬슬 손님이 떨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주변에는 동종업종의 가게가 다섯 개 더 생겼다. 더 늦 기 전에 새로운 업종을 찾아야 했다. 반년을 준비해서 새 가게를 열었다. 해당 업종이 상승세를 타는 걸 1년쯤 지켜본 뒤 이 정도면 충분히 검증됐고 시작하기에도 너무 늦지 않았다고 판단했는데, 막상 오픈할 때는 주변에 비슷한 업종의 가게가 셋이나 있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다들 같은 시기에 같은 업종을 선택해서 진입한 것이다. 1년 전보다도 훨 씬 경쟁이 치열해진 것을 피부로 느낀다.

문 안 열어도 월세는 나간다 이쯤 되면 나 혼자 장사 열심히 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고용안정화를 통한 노동인구의 임금노동시장 이탈 방지와 임금상승을 통한 내수 진작 없이 자영업 분야의 경쟁을 완화시킬 방법이 있을 까. 이대로 가다가‘이제 나눠먹을 것도 없는 판에 서로 달려들어’모두 함께 절벽에 몰리는 건 아닌지. 자 영업 대란 시대의 끝에 자영업 대붕괴가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지. 답 모를 걱정을 하면서 오늘도 가게 문 을 연다. 내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와 별개로, 찾아오는 손님은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으니까. 내가 문을 안 열어도 월세는 계속 나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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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집 없는 청년들 서울시 청년주거정책과 문제점 대다수의 청년들이 자신의 힘으로 주거비용을 마련할 수 없거나, 주거를 해결하기 위해 저축은 물론이고 자기계발에 투자할 수도 없다. 청년들이 매우 불안정하게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용가람 서울 서대문구 당원, 청년학생위원

특집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27


지난 10월‘이화여대 기숙사 증축을 둘러싼 이슈’ 를 소재로 노동당 서울시당과 녹색당이 함께 적록포 럼을 진행했다. 노동당과 녹색당의 청년들, 이에 관심 있는 학보사의 기자들, 그리고 이화여대 인근에서 원룸을 운영하는 분들까지 함께 참여한 뜻 깊은 자리였다.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는 이화여대 기숙사 증 축을 학생들과 임대인들의 대립적인 구조로 다루기보다는, 청년주거의 문제로서 바라보고 심도 있는 대 화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나는 주거문제 때문에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적이 없다. 하지만 주거문제가 많은 청년들의 화두이며 나 역시 청년으로서 주거문제의 당사자라고 생각했기에 포럼에 참여했다. 기획단의 도움으로 발제를 진 행했고, 어쩌다 보니 기관지에 기고까지 하게 되었다. 어쨌든 청년주거 문제에 대해서 전문적이지는 않지 만 이번 기회를 통해 몇 가지 생각과 조사한 자료들을 정리해보려 한다.

한국 사회의 주거문제 청년의 주거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현재 한국사회의 주거 현황을 살펴봐야 한다. 현재 한국사회 는 오피스텔, 고시원, 쪽방을 제외하고도 주택보급률이 100퍼센트를 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집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주

현재 한국사회는 오피스텔, 고시원, 쪽방을 제외하고도 주택보급률이 100퍼센트를 넘는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집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택들이 텅 비어있지만 많은 이들이 집이 없는 상태로 평생을 살아가거나,‘하우 스푸어’ 가 되어 집을 마련하기 위해 큰 규모의 빚을 내고 있다. 이는 주택을 거 주지가 아닌 사유재산으로 생각하는 한 국 사회, 즉 수요중심이 아닌 공급중심

건설로 인해서 주택공급의 불균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국민의 절반 이상이 세입자로 살고 있지만 자기 집과 같은 편안함을 느껴 집을 소유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독일과는 대조적이다. 어쨌든 주택을 소유한다는 개념이 굳어지면서 한국 사회 내부에 악순환의 고리가 생긴다. 부동산 시장 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임대주택의 수요는 증가하지만 비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이는 사람들이 집을‘소 유’ 하지 않으면 불안함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집을 소유하기 위해서 다시 빚을 내게 되고 더 큰 가계부채 를 불러온다. 가계부채는 다시 불안정한 삶을, 불안정한 사회를 만들어낸다. 주택문제는 한국사회에서 반 드시 해결해야 하는 과제인 것이다.

서울에 살고 있는 청년들의 주거문제 이러한 한국사회의 주택분배구조 속에서 청년들의 주거 실태는 어떨까. 전국민의 4분의 1이 넘는 인구 28


가 집중되어 있는 서울의 청년 수는 220만이

전국민의 4분의 1이 넘는 인구가 집중되어

다. 그리고 이들 서울 전체 청년인구 중 14.7

있는 서울의 청년 수는 220만이다. 그리고

퍼센트가 주거 빈곤의 상태에 놓여 있다. 게 다가 부모 혹은 친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 청년, 즉 1인 청년 가구의 경우 이보다 높은

이들 서울 전체 청년인구 중 14.7퍼센트가 주거 빈곤의 상태에 놓여 있다.

36.3퍼센트가 주거 빈곤 상태에 놓여있다. 이는 전국 평균인 23.6퍼센트보다도 13퍼센트가 높은 수치이다.1) 청년들의 주거 빈곤 문제의 중심에는 비싼 세입비용이 있다. 현재 서울의 원룸 비용 41만 원에 주거유 지비 8만2천 원을 더하면 약 50만 원으로, 이는 대학생 평균소득인 79만7천 원의 절반을 넘는 금액이다.2) 즉 대다수의 청년들이 자신의 힘으로 주거비용을 마련할 수 없거나, 주거를 해결하기 위해 저축은 물론이 고 자기계발에 투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청년 주거 빈곤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형성할 청년들 이 매우 불안정하게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원인이 되며, 혼인, 취업, 경제력 감소의 주요 원인 중의 하나라 는 측면에서 치명적이다.

서울시가 제시하는 청년주거정책 세 가지 이런 청년주거빈곤 문제는 서울시와 정부의 입장에서도 심각한 문제이다. 현재 청년주거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 현재 서울시에서 주요하게 실시하고 있는 정책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희망하우징 정책이다. 희망하우징은 서울특별시 SH공사에서 매입한 다가구주택 및 공릉, 정릉 등에 건설한 원룸을 대학생에게 저렴하게 공급하는 임대주택이다. 희망하우징의 신청 자격은 서울 소재의 대학생으로 주로 지역에서 올라온 대학생들, 부모의 소득수준이 낮은 대학생들을 우선순위로 두 고 있다. 두 번째는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대학기숙사 건축 규제완화이다. 서울시는 2012년도에 대학기숙사 증 축을 위한 규제완화 안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녹지에 대한 건축을 허용, 기숙사 건축물에 한한 층수제한 완화, 건축물 높이 완화 등이 포함된다. 2012년 당시 기숙사 수용인원은 3만8천 명, 즉 서울 소재 주요 33 개 대학의 기숙사 수용률은 9.6퍼센트이다. 대학생 중 통학이 불가능한 거리에서 학교를 다니는 대학생의 비율은 35퍼센트로, 현재의 수용률로는 많은 비율의 대학생들이 어쩔 수 없이 근처에서 하숙 또는 원룸을 구해야 한다. 서울시는 이를 근거로 2014년까지 대학기숙사 증축을 통해 1만2천 명을 추가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인데, 이에 탄력을 받은 서울소재의 주요 대학들이 기숙사 증축을 진행 중이다. 이번

1)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2010 2) 서울연구원, 서울시 거주 대학생의 주거비 부담능력 분석

특집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29


청년 주거 문제의 답답한 현실을 알리고자 청년들이 이색 캠페인을 열기도 했다. (사진 : 희망플래너)

에 불거진 이대 기숙사 문제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세 번째는 청년 주택협동조합형 공공주택이다. 원룸형 매입 임대주택을 활용해서 청년 주택 협동조합 을 구성한다는 계획인데, 19~35세 비대학생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보증금 1000만~2000만 원에 임대료는 6~12만 원선으로 주변시세의 40퍼센트 수준에 불과하지만 보증금 마련이 거의 어려운 청년들 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요원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현 서울시 청년주거정책의 문제점? 위 세 정책들 중 희망하우징과 대학기숙사 증축은 대학생들을 수혜 대상자로 한정짓고 있다. 이는 비 (非)대학생 청년들의 경우에는 극소수의 협

희망하우징과 대학기숙사 증축은 대학생

동조합 공공주택을 제외하고는 아주 열악한

들을 수혜 대상자로 한정짓고 있는데, 서울

환경의 고시텔 등만이 대안으로 남는다는 것

소재 주요 33개 대학 재학생들을 전부 합쳐 도 전체 중 20퍼센트에 불과하다.

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비대학생 청년들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적은 인원인가? 그렇지 않다. 서울 소재 주요 33개 대학의 재학생들 을 전부 합쳐도 39만7천명이다. 이는 서울시

에서 거주하고 있는 전체 청년 220만의 20퍼센트 정도의 수치에 불과하다. 30


한국과 마찬가지로 주거환경이 열악한 미국의 경우, 뉴욕주에서는 대학생뿐만 아니라 청년층을 포괄 하는 주거정책을 시행한다. 마찬가지로 영국의 경우에도 청년 1인가구를 위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에 비해서 서울시의 청년주거정책은 지나치게 대학생 중심이다. 이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청년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의 실제 주거문제를 해결해주기에는 역부족이다.

청년들의 안정적인 삶을 위한 해결책들을 찾아보자 청년들의 생애주기와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19-35세 청년들의 생활이 안정 될 수 있을 때까지 부모의 소득수준이나 재산과 관계없는 장기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네덜란드와 덴마크 같은 나라들은‘독립지원금’ 이나‘학생지 원금’ 의 명목으로 부모의 소득수준과 관 계없이 일정 나이가 지난 청년세대의 주 거비용을 지원해주는 제도로써 청년주거 문제를 일정부분 해결한다. 청년들의 주거문제는 단순히 주거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청년주거의

청년들의 주거문제는 단순히 주거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경제력 감소, 취업난, 교육기 간 장기화 등의 문제와 맞물려 나타난다. 더 넓게 청년들의 삶을 안정화할 수 있는 방향 설정이 필요하다.

문제는 청년들의 경제력 감소, 취업난, 교 육기간 장기화 등의 문제와 맞물려 나타난다. 이 사회의 미래 세대인 청년들은 사회생활의 시작부터 난관 에 부딪힌다. 더 넓게 청년들의 삶을 안정화할 수 있는 방향 설정이 필요하다. 노동당의 청년들이 함께 청 년 문제를 고민하고 적극적으로 대안을 제시해 나갔으면 한다.

특집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31


특집 /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한국사회 청년들을 대표할 수 있어야 해요” 대담 ■ 청년 노동당원 분투기

촛불집회나 희망버스, 밀양 송전탑 투쟁과 같은 정치적 경험들을 관통하면서 진보정치의 감수성이 싹튼다. 진중권이나 한윤형 등‘진보 논객’ 들의 글을 읽으면서 진보정당에 처음 호감을 갖게 된다. 그래서 노동당에 입당을 했는데 지역 당협 모임에 나가보면“아저씨들 만 계셔서”발길이 뜸해진다. 당원으로서, 활동가로서 하고 싶은 일과 현실적인 장벽 사이 에서 겪는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날 대담 자리에서 만난 청년 당원들 사이에서 공통적 으로 발견되는 코드들이다. 대한민국에서 노동당 당원 혹은 활동가로서 산다는 것은 이들 에게 어떤 의미와 궤적을 남기고 있을까? 청년 당원들을 만나보았다. 대담 : 강현주 용가람 이태중 한민호 진행 : 김예찬 정리·사진 : 정정은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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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찬 :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기관지 독자들께서 읽으시는 글이니까 자기소개부터 시작 하겠습니다. 사회자를 맡은 저는 지금 대학원생이고요, 김예찬입니다. 용가람 : 서울 서대문 당협 소속이고, 청년학생위원회와 평화캠프라는 NGO에서 활동하는 용가람, 얼 마 전에 개명을 해서 용윤신이라고 합니다. 한민호 : 저는 강서구에 살고 있고요, 지금 공부를 하는 고시생이자, 지역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라고 스 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민호라고 합니다. 이태중 : 저는 양천 당협의 이태중이고요, 당협 사무국장이랑 지역거점 운영을 같이 하며 뭔가 경계가 없는 세계에 여러 가지로 발을 들이고 있습니다.(웃음) 강현주 : 강현주라고 하고요, 시민단체 쪽에서 계속 있었어요. 용산의 탈성매매 여성을 지원하 는 막달레나공동체에 있었고, 퀴어문화축제에서 지금도 활동을 계속 하고 있어요. 내년이면 5년차 가 됩니다. 서울시 청년정책네트워크의 성소수자 팀장을 맡고 있기도 한데, 사실은 대학원생입니 다.(일동 웃음) 어제 여성학과 대학원생인 줄 알았 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저는 공대 대학원생입니 다.(일동 웃음)

김예찬 : 여러 번 뵈었지만, 우리가 안에 가지 고 있는 얘기들을 나눌 수 있는 자리는 별로 없었 던 것 같아요. 각자 당에 가지고 있는 생각들도 다

강현주

를 텐데, 먼저 왜 하필 노동당에 입당을 했고 왜 노동당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지부터 얘기를 해봤 으면 좋겠어요.

“계속 입당을 고민한 이유는 시민사회

강현주 : 9월 25일인가, 그때 입당했으니까 입

단체 진영에 남았을 때의 한계를 엄청

당한 지 백일도 안됐어요. 이건 자랑할 건 아닌데

많이 느꼈기 때문이에요. 정치인이 될

… 민호씨가 페이스북에‘정당 활동은 안하고 신

생각은 없지만 제도정치와 만나고 싶다

선처럼 입바른 말만 하는 누구누구누구’ 라는 글

는 생각에 입당을 결심하게 됐어요.”

을 공유한 적이 있어요. 그거 보고 되게 찔렸어 요. 왜냐하면 저도 그게 되게 자랑이었거든요. 당

적이 없다는 게. 저는 원래 시민사회단체에 있었고 그 진영에서 계속 있으려고 했었으니까요. 사실 입당 을 고민한 지는 1년쯤 됐어요. 계속 망설였던 이유는 당에 들어가면 내가 분명히 거기서도 일을 엄청 열심 특집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33


히 할 게 뻔하기 때문에 스스로 막고 싶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입당을 고민한 이유는 시민사회 단체 진영에 남았을 때의 한계를 엄청 많이 느꼈기 때문이에요. 내가 생각하는 변화는 시민사회단체에서 는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앞서 말한 것처럼 사회활동은 신선놀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정치인이 될 생각은 없지만 제도정치와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입당을 결심하게 됐어요. 직접적인 계기는, 서울시당 신입당원 환영회에 왔는데, 레크리에이션이 정말 재밌더라구요. 그래서 친 구한테 여기 있는 사람들 정말 재미있다면서 행사중계를 해줬더니 이 친구가“녹색당에 입당하려고 했더 니 이 당이다! 개그코드가 맞는다! 같이 입당하자!” 고 해서 그 친구와 함께 당에 들어왔어요.(일동 웃음) 이태중 : 저는 촛불 때, 2008년 여름쯤에 입당했어요. 민주노동당 생길 때부터 지지자 정도로 쭉 지냈 고, 누나나 가까운 친척들이 약간‘깨시민’ 스러운 얘기를 할 때‘어, 그것만으로는 뭔가 좀 부족하지 않 나?’ 하는 생각을 굳혀가던 중이었어요. 촛불집회에 열심히 나간 건 아니었고 1학기가 끝나가는 중에 친구 놈이 자꾸 문자 보내고 같이 가자고 해서 몇 번 참석했는데, 어린 아이들과 여자들이 앞에 있는데 물대포 를 엄청 세게 쏘는 걸 보고‘빡쳐서’두어 달 동안 엄청 열심히 집회에 나갔어요. 그런데 이미 끝났다는 게 느껴지는 시점에 제가 합류한 거라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민주노동당 때에는 어쨌든 꺼 림칙해서 입당은 안했는데 진보신당이 생기면서 약간은 해소된 부분이 있어 입당했어요. 지역에서도 급 식문제라든지, 계속 열심히 활동하는 걸 봐와서 지지는 하고 있었어요. 제가 운동권도 아니었고 실제로 도울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았는데, 일단 후원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입당했어요. 김예찬 : 지금 당직자까지 하고 계신 걸 보면 또 다른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이태중 : 그게 좀 애매해요. 원래는 탈당을 하려고….(일동 폭소) 원래는 2011년쯤부터 탈당해야 하나 고 민 중이었어요. 통합독자 논란이 시작됐는데, 어느 쪽이 되든지 이 당은 진전이 안 될 것 같고, 사람들은 너무 많이 흩어졌고, 지지부진한 상태로 이 당은 망할 것 같았고 탈당해야 하나 고민했어요. 그러던 중에 당협 모임에 하도 불러서 한번 나갔는데, 생각해보니까 내가 이 당에 입당해 놓고서 딱히 한 게 없는 거예 요. 탈당을 해도 가는 데까지 가보고서 하는 게 후련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발을 들이다보니까 여기까지 왔네요. 한민호 : 이태중 당원이나 저나 어쨌건 촛불집회를 관심 있게 본 촛불당원 비슷한 건데, 그 중에서 저는 진중권 씨나 한윤형 씨의 팬이었어요. 다른 지식인들은, 얼마 전에 윤현식 의장님께서 쓰신 글에 나온 얘 기처럼‘정치적 행보는 굉장히 많이 하는데 정치적 책임은 안 지고, 입당을 하지도 않고 그냥 하늘에서 내 려다보면서 훈수만 놓는’모습이 너무 싫었어요. 입당 후에 공익근무를 하게 돼서 탈당을 했는데, 공익근 무 중에 아까 얘기가 나왔던 통합독자 논쟁이 심해진 거예요. 그래서 너무 지겹기도 하고 거기에 제가 끼 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공익근무가 끝났는데도 최근까지 입당을 다시 안 했어요. 다시 입당한 건 올해 5 월이에요. 김예찬 : 그런 결심을 했는데도 재입당을 한 이유는 뭐예요? 한민호 : 선거 때문이었어요. 정치발전소에서 하는 정치제도개혁모임에서 스터디를 했는데, 거기서 황 34


종섭 당원을 만났습니다. 종섭이 형이 어느 날 술 을 먹이더니 수행을 해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 가“선거에 나가시냐? 왜 나가냐?”물었어요. 저 는 솔직히 그 형이“노동자를 위해서, 진보정치를 위해서”이렇게 대답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 데 딱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뉴타운을 해제하 기 위해서” 라고. 저는 선거와 정치는 어쨌거나 구 체적인 공약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뉴타운 해제하겠다는 얘기가 되게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선거를 뛰게 됐고, 이후에 역시 노동당에 입당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 금 노동당이 또 통합이나 독자냐 하는 상황이잖

한민호

아요. 그래서 진보정치가 과연 무엇인가 고민하 고 있는 상태입니다. 아무튼 지금은 민중의 집에 결합해서 지역 활

“선거에 나가는 이유가 노동자를 위해

동을 하고 있고요, 강서당협이 지금 사고 당협이

서, 진보정치를 위해서라고 대답할 거

라 몇 명 남아있는 당원들과 함께 당협을 만들기

라 생각했는데‘뉴타운을 해제하기 위

위해 열심히 전화도 돌리고 사람도 만나고 있습 니다. 용가람 : 촛불 때 저는 고등학생이었어요. 2학

해서’ 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선거를 뛰게 됐고, 노동당에 입당했어요.”

년 겨울이었던 것 같아요. 친구들이랑“이것이 우 리의 마지막 냉면이다” 라며 냉면을 먹는데, 집회 에 너무 가보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그땐 학생이었고 집이 멀어서, 뭔가 시작하기도 전에 다시 돌아와야 했어요. 다녀온 다음에 아빠한테 걸려서 엄청 두들겨 맞고요. 그때 진중권 씨를 보고서 멋있다고 생각했 는데, 나중에 진중권 씨가‘정당투표는 16번’ 이라며 인증샷을 찍었잖아요.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까지는 진중권 씨를 좋아했기 때문에 진보신당이 아주 괜찮은 정당이라고 생각했어요. 입당은 2012년에 밀양 초록농활에 다녀와서 했어요. 저는 원래 평화캠프라는 단체의 전신인 인연맺기 운동본부에서 일했는데, 거기가 사무실을 사회당이랑 같이 썼어요. 그런데 그때 당시에는 당에 별 관심이 없어서 별 느낌도 없고 그냥 사무실을 같이 쓴다는 정도였고 그냥 인연맺기운동본부 활동만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밀양에 가게 됐어요. 고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촛불집회에도 가고 마을에서 할머니랑 같이 지냈 더니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막상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사실 평화캠프는 넓 은 의미의 대중운동이고 낮은 운동력을 가지고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하다는 생 특집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35


각이 들었고 다녀와서도 많이 고민했어요. 그러다가 아무것도 모른 채로 (당에) 들어갈 수는 없다는 생각 에 청년학생위원회 총회에 참석하고, 제 나름대로 형식적인 과정을 거친 이후 입당했죠. 이후에 당협 모임에도 나갔는데 아저씨들만 계셔서 그 이후로 다시 당협 모임에 나가지 않았어요. 그러 다가 올해 초부터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다시 이런저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김예찬 : 얘기를 들어보니까 각자의 계기들에 비슷한 코드들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촛불집회나 희망버스처럼 우리의 10대와 20대를 관통했던 정치적 경험들, 대중적으로 충격을 줄 수밖에 없 었던 사건들 속에서 정치적 움직임이 생겨났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예찬 : 얘기가 나왔으니 자연스럽게 당협 얘 기로 넘어가 볼게요. 사실 청년들이 지역 당협에 서 활동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지요. 문화적인 코드도 안 맞고 마초적인 문화도 있고요. 강현주 : 저도 당협 모임에 나갔는데… 거기에 서 겪은 이야기를 친구에게 전했더니“그거 당기 김예찬

위 감이야!” 라고 하더라구요.(일동 웃음) 옛날 같 았으면 다 때려치웠을 것 같은데, 이제는‘아…

“촛불집회나 희망버스처럼 우리의 10

이런 사람도 있는 곳이구나’싶어요. 40대 이상의

대와 20대를 관통했던 정치적 경험들,

이성애자 남성으로 살아오면서 그 분들만이 갖는

대중적으로 충격을 줄 수밖에 없었던 사건들 속에서 정치적 움직임이 생겨났 다는 생각이 들어요.”

삶의 궤적이 있을 거 아녜요. 내가 그동안 만난 분들과는 다른 궤적을 가진 사람들이니까. 그런 부분이 이해는 되는데 고민은 돼요. 내가 당협 모 임에 나가서 얻는 것이 무엇일까, 만날 술만 먹고 집에 가는 문화가 어렵기도 하고요. 김예찬 : 이태중 당원 같은 경우에는 가운데

끼어있는 느낌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본인도 젊은 당원이지만 당협에서 일을 하고, 거기에 선배님들이 계시고, 신입당원들이나 젊은 당원들과의 관계도 있을 거고요. 이태중 : 저도 제가 좀 더 감수성이 충만하고 전투적일 때 당협을 만났다면 엄청 불편했을 것 같은 부분 들이 있어요. 꼭 당협 얘기가 아니라, 당원들을 만나다 보면 이 사람이 우리 당원이라고 해서 꼭 진보적이 라든가 각자의 다른 인권감수성이 충분히 인지되어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아까 말이 나왔듯이 삶의 궤적 36


이 다르니까 쉽게 고쳐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김예찬 : 저도 참 고민이 되는 부분인데, 당내 인권교육도 필요하지만 그 부분과 관련해 정책적인 사업 을 벌여 당원들이 결합을 해야 경험이 쌓인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사실 지역에서는 인권적인 사업을 가져가는 경우가 별로 없죠. 한민호 : 연장자인 남성이 연하의 여성을 대할 때는 그나마 최소한의 조심은 하는데, 남성끼리는 당연 하게 위계를 잡는 군대문화가 있어요. 되게 권위적이에요. 보자마자 말을 놔요 그냥. 저도 인권감수성이 떨어지는 축에 속해서 많이 노력중인데, 우리가 노동당 당원이지만 누구나 똑같이 높은 인권감수성을 지 닐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당협에 공동체적인 분위기도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불편한 부분을 바꿀 때까지 서로 이해하는 노력도 필요하고요. 그리고 저는, 사실 강서에 당협이 없기 때 문에 이런 논란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럽습니다.(일동 탄식) 김예찬 : 당협마다 구성원에 따라 분위기가 다른 것 같기는 해요. 저희 당협 같은 경우에는 다들 바쁘셔 서 따로 만날 수가 없거든요. 용가람 : 저희 당협에는 30대 중반의 여성 당원들이 좀 있어요. 그러다보니 그 분들이 일정 부분 차단 해 주시는 게 있어서, 그렇게까지 마초적인 분위기는 없는 것 같아요. 저도 인권감수성이 떨어져서, 있었 는데 제가 못 느끼는 걸 수도 있고요.(웃음) 강현주 : 이런 분위기를 한 번에 바꿀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까지 내가 참 무균질의 공간에서 살았다는 생각도 들고요. 저는 입당한 지 얼마 안 된 입장에서, 제가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면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단 제가 그 사람들에게 내가 도망갈 사람이 아니고,‘엿 먹일’사람이 아 니라는 신뢰를 줘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런 후에 불편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이야기를 해야 서로가 납득할 수 있지 당장은 힘들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런 상황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상황이라 좀 더 지켜봐야겠다고 생각중이에요. 용가람 : 저는 어찌됐든 그런 상황에 대해서 지적을 해주는 것 자체가 당사자에게도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당원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니까요. 김예찬 : 중앙 차원에서의 교육을 통해 이런 문화를 뿌리 뽑아야 할 필요도 있지만 내부 구성원들의 투 쟁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간 안에서 계속 지적도 해야 하고 전략적 선택도 해야 하고요. 계속해 서 부딪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연배가 있는 남성 당원들이 가끔“여기 여성 당원이 없으니 하는 말인 데” 라며 말을 시작할 때가 있어요. 그럼 그냥 하지 마시라고 해요. 없으니까 하는 얘기면 그냥 마음속으로 만 하시라고. 이런 문제들에 대해 계속해서 발언을 하는 것도 젊은 세대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또 한편, 당의 놀이문화라는 게 술밖에 없어요. 저도 술을 좋아하지만, 같이 당협에서 만나서 노는 문 화가 술 말고 다른 걸로 좀 변화돼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태중 : 저는 당협 모임 때 술 마시러 나가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는 쪽으로 얘기해요. 할 건 회의 자리 에서 다 해야지, 나가서는 얘기해봤자 저도 기억도 못하고 중요한 얘기를 술 마실 때 해버리면 제 입장에 특집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37


서는 술 마시다 말고 이걸 녹취를 해야 하나 적어놔야 하나 싶거든요. 정책당대회 사전토론회 때도 보면, 시간 없다고 급하게 마무리 짓고 실질적인 얘기는 뒤풀이에 가서 다 하더라고요. 김예찬 :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우리가 반성과 평가를 하고, 청년 당원들이 진행하는 사업이나 행사에 서는 안 좋은 부분들을 빼고 진행하는 걸 목표로 삼아 구체적인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김예찬 : 지금 각자 바쁘게 여러 활동들을 하고 계시잖아요. 운동을 하는 삶을 살다 보니 다들 경제적으 로 모종의 위기에 처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독립된 삶이라는 게 좀 불가능한 부분이 있지 않나요? 부모님과의 관계도 종속적인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태중 : 집에 내가 하는 걸 보고하거나 허락받거나 간섭받는 건 아니어서 크게 상관은 없는데, 책임져 야 하는 것들이 있는 상황이라면 못하지요. 자취만 하더라도 안 할 거예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잖아요. 그래서 다른 분들께도 당협 일로만은 안되고 지역 일이든 다른 일들을 걸쳐서 하라고 해요. 그런데 그걸 다 하자니 제가 못 견딜 것 같고, 지역 당협 일에 소홀해질까 걱정도 되죠. 한민호 : 저는 갈등은 없는데 제가 죄송해요. 부모님께서 두 분 다 아직 일을 하시는 상황에서 제가 도움을 받고 있으니까요. 제 수입이라고는 아르바이트 조금 하고, 민중의 집에서 제가 결합 하고 있는 부분에서 돈을 조금 받는 게 있어요. 내년부터는 민중의 집에서 반상근을 하기로 해서 약간은 해소가 될 것도 같지만, 부모님께는 어쨌 거나 죄송하지요. 이태중 : 그냥 목숨을 유지하는 정도의 삶을 살자고 이 일을 하는 건 아닌데, 겨우겨우 넘어가 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게 고민이에요. 이태중

강현주 : 대학원에서는 기업이나 정부 과제를 하면서 기업이 과제비를 주면 그걸 학생에게 월

“그냥 목숨을 유지하는 정도의 삶을 살

급으로 줘서 학비랑 약간의 생활비가 나와요. 저

자고 이 일을 하는 건 아닌데, 겨우겨우

축은 못해도 생계유지는 돼요. 그런데 고민인 게

넘어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게 고민 이에요.”

나는 활동을 하면서 살고 싶은데 내가 지금 하는 공부가 내 활동에 보탬이 되는 일이 아니란 거예 요. 그런데도 약간의 보상심리는 생겨요. 부모님 과의 절충으로 대학원에 가긴 했지만, 바로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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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가면 박사급 연구원으로 들어가 갑자기 중산층 진입이 가능하게 되는 거예요.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하 더라고요. 박사가 되자마자 활동에 투신할 거라 생각했는데 전세금은 벌고 들어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저랑 같이 활동하는 상근자는 80만 원을 받아요. 이렇게 사는 게 맞는지 매일 고민해요. 결정을 유 예하고 싶어서 대학원에 온 것도 없지 않아요. 돈 안 쓰고 살기는 터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동가 의 삶에 대한 회의가 들어요. 용가람 : 이전까지는 진로에 대한 잔소리를 엄청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때까지는 저도 활동가로서 의 삶에 대한 확신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대선 선거운동하며 집에서 나왔어요. 그때 부모님이 충격도 받 으셨지만 약간의 인정도 해주신 것 같아요. 이제는 많이 이해해주시는 편이에요. 그리고 언니가 결혼도 하고 행시합격도 했더니, 이제 우리 집은 자식 농사는 어느 정도 됐다는 안심이 된 것 같아요. 김예찬 : 저는 당직을 할 때 월급을 받아 생활비를 좀 드렸어요. 그때는 별 말씀이 없었는데, 요즘 벌금 고지서가 날아오니까 왜 이런 걸 하느냐 범법자가 된 거냐? 하는 걱정이 생기셨어요. 우리가 민주당이기라도 하면 좀 다를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소수정당이기 때문에 활동가로서의 비 전이 부모님들께는 많이 보이지도 않고, 레드컴플렉스에 연루된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김예찬 : 앞으로도 당 내에서 청년 활동을 계속 해 나가실 텐데, 각자가 생각하시는 당에서의 청년활동 에 대해 그리고 있는 상이나 고민들이 있으신지요. 강현주 : 저는 지금 청년정책네트워크를 하고 있어요. 지금 같이 하고 있는 친구들은 정당 소속도 아니 고 운동권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청년정치, 대학생의 정치를 접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친구들인데, 그래서 오히려 더 이 쪽에 발을 붙여보자고 말을 걸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의외로 열심히 하고 배타적 이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맘때 동시에 들어가게 된 집단이다 보니까, 우리 당과 비교를 하게 되더라고 요. 우리 당은 청년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우리 당에서 청년 일은 누가 하지? 그러면 청년학생위원회로 자연스럽게 생각이 넘어가잖아요. 그럼 청년학생위원회는 뭘 하지? 알 수가 없다!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친구에게 박원순 홍위병이라는 얘기도 들었지만, 여기는 열려있는 데라 하자는 대로만 하면 의외로 서 울시를 잘 움직여볼 수 있는 구조예요. 저도 최대한 얻을 수 있는 걸 얻어 보자는 전략으로 들어갔고, 우리 당 청년 당원들도 이런 장치가 있으면 이걸 전략적으로 이용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태중 : 꼭 청년에 국한된 건 아닌데, 우리 당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 요. 구청이나 서울시에서 이런이런 사람을 찾는데, 정작 나도 그런 사람이 있는지를 몰라서 해당 사업을 못한 적이 많았거든요. 작년부터 사무국장을 해서, 지금은 당협 소속 당원들의 직업이라든가 이 사람이 어디에서 무슨 활동을 하고 있나 많이 파악을 하게 됐는데, 생각보다 당협 모임에 안 나오는 사람들도 어 딘가에서 관련한 일을 엄청 많이 하고 있더라고요. 당협에 인원이 많지 않은데도 꽤 많아요. 작년까지만 해도 당협 사무국장들이 하는 모임도 따로 있었는데, 현재는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 당협이 거의 없어요. 특집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39


우리가 갖고 있는 자원부터 파악을 해야 거기서 어떤 사업도 출발할 수 있는데, 가장 기본적인 걸 하기 위해서라도 당협들이 정상화가 되었으면 좋 겠어요. 재편을 하든 독자로 가든, 어느 쪽이든 이건 필요한 일들이라고 생각해요. 용가람 : 정책당대회 때 참여섹션에 참여했을 때에도 했던 얘긴데, 노동당에 있는 청년들이 한 국사회에 있는 청년들을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 고 생각해요. 청년들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 그 들에게 뭐가 가장 필요한지도 알고 있어야 하고 요. 어느 정도 선도적으로 운동할 수 있어야 한다 고 생각해요. 노동당의 당원이라면 이 정도 패기

용가람

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그런 게 잘 안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에 건강한 청년 들이 정말 많이 있는데 이 청년들과 같이 청년학

“노동당에 있는 청년들이 한국사회에

생위원회를 좀 더 잘 해봐야 하지 않을까 고민이

있는 청년들을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

많아요. 요새 서대문의 20대들과 모임을 하고 있

고 생각해요. 청년들의 마음을 가장 잘

는데, 지금 당의 청년들이 서로를 너무 잘 몰라

알고, 그들에게 뭐가 가장 필요한지도

요. 청년들의 네트워크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 각해요.

알고 있어야 하고요.”

청년들이 미래에 이 당을 주도해야 하는 사람 들로서 좀 더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과정들이 많이 필요하겠다, 정책당대회 때도 그렇고 요새 있었던 토론회를 봐도 거기 참여한 분들이 다 당에 있는 아저씨들이었고 여성도 없었고 중년 남성들이 다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에 청년이 갑자기 나타나서 전망 에 대해 끼어들어 토론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게 역설적이잖아요. 사실은 당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청년들인데 당의 전망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사실 청년들이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역설적이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이야기를 하든 어떤 사업을 하든 간에 일단은 청년들이 많이 모여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끼리라도 청년들이 당장에 할 수 있는 걸 많이 찾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청년정치학교도 참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해요. 한민호 : 저는 당내에서 청년문제가 굉장히 심각하다고 봐요. 끼리끼리 노는 분위기가 많아요. 끼리끼 리 놀더라도 뭉칠 때는 확실히 뭉쳐서 이 사람은 누구다 이런 건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그 런 게 너무 안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처음 본 청년들도 되게 많아요. 어디 집회 나가면 다 당원이래요, 모르 40


는 사람인데. 거기다 어디서 사무국장하고 있대요. 사실 청년문제라고 하는 걸 국가적인 정책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지만,‘청년문제’자체만 바라봐서는 안 풀린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청년정치학교를 열고 청년모임을 하는 것도 좋지만, 그 전에 국가적으로 본다면 노동문제나, 결혼문제나 성차별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청년문제가 풀린다고 봐요. 그건 당도 마찬 가지예요. 우리 당의 구조가 안돼 있는데 청년정치학교도 의미가 있지만 그것보다 더 급한 게 있다는 생 각이 들어요. 같이 안 뭉쳐지는 건 리더쉽 의 문제가 크다고 생각해요. 구체적으로 들

“ ‘청년문제’자체만 바라봐서는 안 풀린다고

어가자면, 청년들이 필요한 걸 알아야 하고

생각해요. 노동문제나, 결혼문제나 성차별

우리가 대표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해요. 사 실 우리보다 더 전문적으로 파고 있는 단체 들이 많아요. 요새 더 많은 청년 단체들이

문제를 해결해야 청년문제가 풀린다고 봐요. 그건 당도 마찬가지예요.”

생겨나고 있고요. 그런데 그런 곳들과 우리 당이 교류가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저같은 경우는 바깥 활동을 많이 하려고 해요. 그리고 지역의 청년들이 함께 어울리는 자리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지역 동네 친구들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당 활동을 하면 답답한 게 많잖아요. 그런데 얘기할 데가 없 어요. 그걸 얘기할 공간이 필요한데 선배들이 있는 자리에서 막 얘기하기가 힘들잖아요. 좀 더 편한 자리 에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태중 : 청년학생위원회가 있긴 한데 목소리를 제대로 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 정책당대 회 때에도 참여섹션이 있긴 했지만, 평소에 정책 섹션이라든지 그 쪽에서 더 이야기를 했으면 하는 거고, 그냥 교육받고 집회에 동원되는 대상일 이유도 없고 그러면서 청년이 이 당을 바꿀 거라고 기대하는 건 맞 지 않잖아요. 대학생으로서 학교에 편재되는 학생들도 많은 건 아는데, 연속성은 지역이든 직군이든 관심 사로 갈 수밖에 없는 거고요. 너무 과다 대표되는 연령대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젊은 사람들이 대의원 이나 청년학생위원장으로 뽑혀 있어도 그 사람들이 청년들의 대표성을 갖거나 그런 활동을 하는 것 같지 도 않아서 당의 청년활동에 대해 공감이 가지 않아요. 용가람 : 저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거고, 사실은 저도 그때 느꼈던 게 정책당대 회 후기에도 했던 얘긴데, 우리는 이것만 준비해서 이걸 했으니 참여를 했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고, 오히 려 전망섹션이나 정책섹션에서 청년들이 질의응답 시간에 참여하는 걸 딱 한 분만 봤거든요. 그런 과정이 없었다는 게 참 아쉬워요.

김예찬 : 이제 2014년이 가고 2015년이 오고 있죠. 2015년에는 내가 당에서 이런 걸 꼭 하겠다는 거 하 나씩만 얘기하고 끝내죠. 강현주 : 저는 사실‘청년’ 이라는 말을 싫어했어요. 왜냐면 나부터도 평균적인 생애주기를 따라가지 않 특집 대한민국 청년 분투기 41


는데 애매하게 나이로 싸잡는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내가 그 친구들과 공유할 수 있는 고민들이 없는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나이가 비슷하고 나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친구를 만나서 그들과 관계를 맺고 싶어요. 저는 지금까지 성소수자/여성 진영에만 있었으니까 더 넓은 세상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서 손 내밀고 같이 얘기를 하면서 나의 기반이랄까, 동지를 만드는 게 제 목표예요. 이전에 만난 친구들이 나의 든든한 버팀목인가 회의가 들기도 한 것 같아요. 친구들이 좋긴 하지만, 정치적 동지 아니면 뭐가 남 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한민호 : 지역에서 활동을 하다 보면 지역이 생각보다 훨씬 만만치 않다고 느껴져요. 진보정당들이 지 역을 너무 과소평가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가서 얼굴 조금만 비치고 조금만 활동하면 찍어줄 거라고 생 각했는데, 절대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 지역의 당원들이 최대한의 힘을 짜내서 활동해야 뚫을 수 있을까 말까한 게 지역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내년의 가장 첫 번째 목표는 당협을 만드는 거고, 그래서 청년학생 위원회든 다른 자리든 지역 활동이나 다른 곳에서 받은 상처를 청년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위로받고 교감 할 수 있는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태중 : 제가 원래 엄청 느린 편이라 1년 반 정도 동안은 많이 탐색하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래 서 내년부터는 좀 더 내 목소리를 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당 안에서도 제가 얘기를 들어도 금방금방 파 악이 안 되는 맥락들이 있어서, 계속 공부하고 파악하는 과정이 필요했어요. 이제는 당을 돌아가게 하는 톱니바퀴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저도 좀 더 적극적으로 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용가람 : 저도 지난 2년 반 정도 당원이긴 했지만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 해요. 말로 때울 생각은 없고 저의 목표는 청년학생위원회를 잘 해보는 게 목표고요. 곧 청년학생위원회 선거도 할 텐데, 제가 어떤 일을 맡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거기에 맞춰 잘 해내고 당의 청년들에 대한 교육 과 청년의제 발굴, 당의 주체로서 청년들이 바로 서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럴 수 있는 청년들을 많이 만나고, 궁극적으로는 청년 당원들이 청년학생위원회뿐만 아니라 노동위원회든 여성위원 회든 어디에 가서든 주체적이고 중추적인 활동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 인큐베이터로서의 청년학 생위원회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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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2015년을 전망한다

기획 2015년을 전망한다 43


기획/2015년을 전망한다

정치적인, 더욱 정치적인

정치무대에서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은 상존한다. 허나 그것이 전망이나 예측의 영역은 아니기 때문에 2014년 말의 상 황을 출발점으로 예상되는 구도와 균열을 서술할 수밖에 없다. 정치는 조직화된 갈등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의지와 기대의 영역이기 도 하다. 또한 구조와 행위 간 갈등 및 수렴 과정이기도 하기에 언제나 국면적인 변화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선 2015년의 2015년은 전국적인 선거가 없

정치지도를 규정하는 조건들을 살펴보자.

는 해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전 국선거라는 정치행사가 없기

2015년의 정치적 조건들

때문에 오히려 더욱 정치적 한 해가 될 가능성도 있다.

첫째, 2015년은 전국적인 선거가 없는 해다. 선거는 대표자들의 선 출이라는 기능적 목적을 넘어 정치·사회적 이슈와 의제, 그리고 담론 들이 각축을 벌이는 장으로서 정당 간 혹은 정치세력 간 권력을 둘러 싼 노선과 비전이 분출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의미를 중심에 놓는다면 2015년은 짧게는 2016년 총선, 길게는 2017년 대선의 준비기라고 규 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전국선거라는 정치행사가 없기 때 문에 오히려 더욱 정치적 한 해가 될 가능성도 있다. 이를테면 개헌과 선거구획정 문제가 그렇다. 둘째, 이제는 상수라고 봐도 무방할 허약한‘야권’ 의 존재다. 지금

강병익 경기 용인성남 당원, 한신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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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정치 상황을 가장 간략하게 정의한다면 바로‘야당 부재’ 다. 제1야 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정련)은 해방 이래 가장 많은 국회의원을


가진 거대야당이지만, 존재감 면에서는 역

지금의 정치 상황을 가장 간략하게 정의한

대 최약체 야당이다. 진보정당들의 사정은

다면 바로‘야당 부재’ 다. 제1야당인 새정련

더욱 열악하다. 야권의 허약성은 이슈 개 입능력 부재에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 특 히 새정련은 정치적 반대당일지는 모르지

은 존재감 면에서 역대 최약체 야당이다. 진 보정당들의 사정은 더욱 열악하다.

만, 이념적으로는 시장자유주의를 우위에 놓는 또 다른 보수정당이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위기 시대의 대안세력으로 인식되지 못하는 근본적인 문 제를 안고 있다. 세 번째로 거론될 조건은 정치 환경이다. 보수정권 7년 만에 제도언론의 정권감시 기능은 거의 무력화 되었고, 노동진영과 사회운동진영 역시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진보블록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는 역부족 이다. 마지막으로 집권세력 내부, 즉 박근혜 정부 내부의 균열 조짐이다. 현재의 야당 부재 현상 속에서 아마 도 2015년의 정치가 이전과는 다른 조건에서 작동한다면 바로 정권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투쟁이 가장 유효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권의 내부균열은 레임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 이기도 하다. 한편 정권의 레임덕 현상은 앞서 언급한 정치 환경으로서의 언론, 특히 보수언론의 보도 태 도에서도 그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집권세력 내부의 권력투쟁에 대한 보수언론의 적극적인 보도 태도는 레임덕의 징후이자, 정권의 불안정성으로 파생된 보수진영의 위기관리 징후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 다. 이러한 정치적 조건들 속에서 예상되는 몇 가지 정치 변화의 계기 혹은 변수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새정련 전당대회와 제3정당론 우선 상반기인 2월 8일 새정련 전당대회가 열린다. 여기서 새로운 당대표와 최고위원을 선출하는데, 여기서 뽑힌 당대표는 중간에 사퇴하지 않는다면 2016년 총선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현재 대표 후보로는 이른바‘빅3(박지원, 정세균, 문재인)’ 의 출마가 유력시되면서, 친노(親盧) 대 비노(非盧)의 대결 구도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야당 부재 현상을 극복할 리더십이 등 장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즉 전당대회를 통해 제1야당으로서와 집권 가능한 정당으로서의 야권 지지 층을 규합할 수 있느냐가 목전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비노(非盧) 측에서 제기하고 있는 당권 대 대권분리론 같은 것은 오히려 전당대회를 소모적인 이전투구의 장으로 만들 여지를 크게 할 것이 다. 어차피 현행 당헌이 유지된다면, 대선후보는 대선 1년 전 당대표를 사퇴해야 한다. 제1야당의 지리멸렬과 진보정당의 축소분립 과정에서 야권 일부와 시민사회 한켠에서는‘제3정당’ 론 이 어김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제3정당의 성공가능성은 멀리 갈 것도 없이 안철수 신당 추진 사례만 봐도 기획 2015년을 전망한다 45


희박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번 신당 추진설은 다분히 새정련 전당대회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신당의 추진 일정이 전당대회 이후로 맞춰져 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소득주도 성장론 한편 전당대회를 경유하면서 새정련의 당론으로 거론될 가능성이 있는 경제사회적 대안담론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문재인 의원 측에서 매우 공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소득주도성장론’ 이 바로 그것 이다. 국민경제에서 안정적 소득과 공정한 분배, 그리고 이를 위한 적극적 정부라는 삼각구조를 기본 모 형으로 하는 소득주도 성장론은 새정련 입

국민경제에서 안정적 소득과 공정한 분배,

장에서도 몇 가지 측면에서 구미가 당기는

그리고 이를 위한 적극적 정부라는 삼각구조

프로그램이자 담론일 수 있다. 첫째, 논리

를 기본 모형으로 하는 소득주도 성장론은 새정련 입장에서도 구미가 당기는 프로그램 이자 담론일 수 있다.

구조가 간결하고, 보편적 복지보다 성장친 화적으로‘중도층’ 을 견인하는데 유리하 다고 판단할 만하다. 둘째, 국제노동기구 (ILO)에 이어 국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연구보고서를 통해 경제성장에서 소득분 배의 중요성, 특히 중하위층의 소득증대가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이는 2008년 미 국발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성장전략에 대한 국제기구의‘성찰’ 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새 로운‘세계 기준(global standard)’ 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소득주도 성장론 역시 경제성장 담론의 하위 담론이고 영세자영업자들의 소득 보장 방안이 생략 되어 있는 점 등 구체적인 로드맵도 제출되는 않은 상황을 고려할 때 논쟁의 여지가 많다. 또한 아직까지 는 진보진영 내에서 그 적합성을 놓고 치열한 토론이 전개되고 있지도 못하다. 하지만 민주노총에서 임금 주도 성장론을 제기하고 진보정당 일부에서도 소득주도 성장론을 거론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최 저임금 인상 및 생활임금 전략과도 잇닿아 있다는 점에서 의제 확산 여부도 눈여겨 볼만하다. 나아가 그 파장 여하에 따라서는 2017년 대선을 앞두고 야권연합에 아교로 작동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세월호 참사 1주기 대한민국은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는 말처럼, 세월호 참사는 한국정치에 커다란 과제를 남 겨주었다. 하지만 용두사미로 끝난 박근혜 정권의‘국가개조론’ 과 참사정국의 한 가운데서 벌어진 6.4 지 방선거에서 사실상 패배한 야권 사이에서 과연 이 중차대한 과제를 누가 수행할 수 있을까의 문제는 여전 히 공백상태로 남아있다. 이러한 측면에서도 세월호 참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우여곡절 끝에 통과 46


65개 시민·학부모 단체들이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반드시 밝혀낼 것을 촉구하며,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을 감시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사진 : 참세상 자료사진)

된‘세월호 특별법(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 에 의한 진상조사위원회(이 하 위원회)의 구성과 활동이 1월 1일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위원회의 구성 여부에서부터 여야 간 상당한 진

통이 예상된다. 그리고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는 위원회의 활동 역시 국정조사와 과거 특검의 예에서 보듯 근본적인 한계를 노정할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4월 26일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이하게 된다. 기대와 바 람이긴 하지만, 이를 기점으로 시민사회 내에서 다시 한 번 철저한 진상규명에 대한 요구들이 분출하고 새로운 정치에 대한 대중적 욕구도 다시 수면위로 떠오른다면, 정치적으로도 의미 있는 성과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개헌공방 및 선거법 개정 개헌은 2004년 이후로 정치권의 단골메뉴다. 구체적인 제안으로 등장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이른바 ‘원포인트’개헌 제안이었고, 박근혜 대통령도 한나라당 당대표 시절부터 꾸준하게 대통령 4년 중임제와 정·부통령제가 소신임을 밝혀왔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갖는 폐단은 여야를 막론하고 공유하는 사안이지 만, 문제는 항상 야권 혹은 소수파에 의해 개헌 추진이 제기되고 언제나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다는 데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도 사실상 분점정부의 수장으로서 이슈를 선점하려는 의도가 컸다고 할 수 있 다. 한편 국가공동체의 질서 전반을 규율하는 기본법으로서의 헌법 개정 논의가 정부 형태로 국한해서 논 기획 2015년을 전망한다 47


헌법재판소의 현행 선거구 위헌 판결을 계기로 선거구제개편 논의가 본격적으로 다뤄질 전망이다. (사진 : MBC <100분토론> 예고방송 갈무리)

의되고 기존의 개헌 선례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론장에 진입하기에는 제약조건이 있다고 판단된다. 예컨대 세월호 참사를 통해 투영된 위험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정치·사회적 대응으로서의 개 헌 국면을 조성하는 것은 정치권의 관심 바깥에 있다는 것이다. 국민의 과반수가 개헌의 필요성에 동의한 다는 여론조사가 있긴 하지만, 필요성과 절박함은 다른 문제다. 어쨌든 이러한 와중에 종교계와 시민사회 단체, 그리고 여야 의원 153명이 이름을 올린‘개헌추진국민연대’ 가 발족했다. 새정련은 정윤회 국정개입 사태를 기화로 삼아 개헌 추진에 박차를 가한다는 입장이지만, 정윤회 사태가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에 관 련된 제도 문제보다는 비선 개입 유무의 진실공방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많다는 점에서 양자가 시너지 효 과를 불러일으키기는 어려워 보인다. 한편 지난 10월 말 헌법재판소의 현행 선거구 획정에 대한 위헌 판결을 계기로 선거구제개편논의도 국 회정치개혁특위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질 것이다. 새누리당은 이미 선거구획정조정위원회를 선거관리위원 회 산하에 둔다는 입장을 당론으로 결정했고, 새정련은 아예 선거구획정조정위원회를 독립기구화하여 게 리맨더링(자당에 유리하게 혹은 상

헌법재판소의 현행 선거구 위헌 판결을 계기로 선거 구제개편논의도 본격적으로 다뤄질 것이다. 선거가

대당에게 불리하게 선거구를 개편하 는 행위)을 원천봉쇄한다는 선거

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하지

없는 해이지만, 선거제도를 둘러싼 논쟁이 그 중요

만 정작 문제는 지역구 증설로 비

성을 더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례대표가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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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점이다. 이것이 진보정당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은 명약관화하다. 선거가 없는 해이지만, 선거제도를 둘러싼 논쟁이 그 중요성을 더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윤회 논란과 레임덕 2014년에서 2015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단연 정국의 핵으로 부상한 것은 정윤회와 이른바 십상시 (十常侍)의 비선실세 국정개입 논란이다. 이는 그동안 박근혜 정권의 인사 파동 및 일방주의 국정 운영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2015년뿐만 아니라 이후 정국주도권을 행사하는 데 분명히 걸림돌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태는 정권의 이른 레임덕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도 앞으로의 정치지형 형성에 분기점이 될 것 같다. 집권세력 내 균열의 깊이와 정권의 레임덕 시기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 균열이란 두 가지 차원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현재 보도 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는 집권세력 내부의 균열이 고, 다른 하나는 집권당인 새누리당과 대통령 간의 균열, 즉 긴장 관계다. 두 가지 차원의 균열 양상에 끼 어 있는 새누리당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지금까지 대정부관계에서 보여 왔던 치고빠지기 식의 태도로 는 다수당으로서 대야관계를 주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집권 3년차를 맞는 정권의 입장에서 레임덕을 거론하는 것이 시기상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인화된 권력내부의 암투가 일정부분 드러난 이상, 그것도 권력을 이용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던 정권 말기의 전형적인 권력형 부패범죄와 달리 정권 내부의 의사 결정체계와 직결된 문제이니만큼 앞으로 정국에 주는 파급력이 클 수밖에 없다.

섣불리 희망을 말할 수 없는 2015년 보수정치를 통해 정치를 내다볼 수밖에

축소분립의 진보정치 현실을 희망으로 치환

없다는 것이 희망을 기대하기 어려운 가장

하기보다는 민낯 그대로 투영하는 태도가 무

큰 이유다. 그래서 축소분립의 진보정치 현실을 희망으로 치환하기보다는 민낯 그 대로 투영하는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지

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모순과 균열 이 있는 곳에 운동이 있고 정치가 있다.

않을까 싶다. 모순과 균열이 있는 곳에 운 동이 있고 정치가 있기 때문에 섣불리 희망을 말하기 어려운 2015년이지만 그래도 새 달력을 펼쳐드는 이 유가 여기에 있다.

기획 2015년을 전망한다 49


기획/2015년을 전망한다

세계경제, 그 속의 한국

세계경제, 유효수요 부족에 따른 경제 침체 심화 신자유주의 세계화 과정에서 사회 다수의 빈곤화가 진행되어 주요 경제권은 민간의 구매력(유효 수요) 부족에 직면했다. 이 문제를 선진 권은 부채에 의존하고 신흥개도권은 주로 수출에 의존하면서 성장을 유지해왔다. 2015년 세계경제는 유로존 위 기 재현, 일본 아베노믹스 실

그런데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는 부채에 의존한 성장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그 여파로 부채의

패, 중국경제 급락, 그리고 지

존성장 국가는 대부분 공공/민간 부채가 한계점에 다가섰음을 보여주

정학적 위기 고조 등이 현실화

었다. 한편 신흥개도국은 주요 시장인 선진권이 경제 침체에 빠져 있

되어 파국적 위기에 빠져들 가

어 자국의 경제 부흥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재산업화와 자국시장보호

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

에 나서고 있어 신흥개도국이 위기를 탈출하는 방안에는 큰 난관이 따 를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2015년 세계경제는 유로존 위기 재현, 일본 아베노믹스 실 패, 중국경제 급락, 그리고 지정학적 위기 고조 등이 현실화되어 파국 적 위기에 빠져들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 미국 달러의 강세 전환 도 세계금융질서를 교란시키는 돌발 요인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2015년 세계경제성장률은 위기 요인이 돌발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2014년 2.6%(UN 추정치)보다 낮은 2.0%에 머물 것으로 예

유승경 LG경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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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된다.


미국의 금리인상, 불안요인 될 수도 미국 경제는 선진권 경제 중에서 2008년 금융위기의 영향에서 가장 빠르게 벗어나 미약하나마 회복세 를 보이고 있다. 실업률은 한 때 10%까지 치솟았으나 지난 11월 5.8%까지 낮아졌다. 2015년 성장률도 2014년 2.3%(추정치)보다 소폭 상승한 2.5%가 예상된다. 2008년 위기를 낳았던 민간부채 문제가 빠르게 해결되었고, 양적완화 정책이 일관되게 추진된 결과, 경쟁력이 살아 있는 IT 산업과 제조업을 중심으로 활력이 살아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과거와 같은 최종 소비지가 아닌 생산기지로 탈바꿈한다는 전략적 방침을 추진하고 있어 세계경제 회복의 견인차 역할은 예전에 비해 떨어질 것이다. 미국은 경기가 호조를 보이자 2014 년 10월 양적완화정책을 종료하고, 2015년도 이른 시점에 제로금리에서도 벗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하지만 경기 회복세가 미약한 상황에서 실제 로 금리 정상화를 조기에 실시할지는

금리 인상으로 달러가 강세를 띠게 되면 미국이 최근 역점을 두고 있는 수출이 타격을 입게 되 고, 미국으로 대규모 자금이 유입되어 나머지 국 가들의 경제 회복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

미지수다. 금리 인상으로 달러가 강세 를 띠게 되면 미국이 최근 역점을 두고 있는 수출이 타격을 입게 되고, 미국으로 대규모 자금이 유입되어 나머지 국가들의 경제 회복에 타격을 입힐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의 금리인상은 2015년의 불안요인이라 할 수 있다.

설비 과잉의 덫에 빠진 중국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며 수출에 의존해 고성장을 해왔지만, 2012년부터는 내수 중심 경제로의 전환을 공식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수출 수요를 충분히 대체할 만큼 내수가 빠르게 신장되지 않아 경기 침체가 이어지고 있다. 중국의 2014년 경제성장률은 7.3%에 그친 것으로 추정되는데 2015년 성장 률은 7.0%로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설비 과잉이다. 중국은 철강, 화학, 태양광 전지 등의 산업에 장기간 대규 모 투자를 해왔는데 대외경제가 침체함에 따라 유휴설비가 늘어나고 있다. 이 때문에 2014년 11월 생산자 물가지수가 33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등 디플레이션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중국이 경제 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금리를 추가로 인하하고 위안화를 평가절하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 이 같은 선택을 한다면 일본과 유럽의 저금리 및 통화절하 효과를 반감시키고, 주요 국 간의 정책 협력 여부에 따라 화폐 전쟁을 야기할 위험도 있다.

기획 2015년을 전망한다 51


바닥치는 유로존, 그 운명은? 유럽경제의 핵인 유로존의 위기는 양상을 달리하며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단일통화지역 은 재정이전을 통해 지역 간 격차를 줄일 수 있게 지역 내 재정이 통합되어야 한다. 하지만 공동의 재정을 꾸리는 것은 국민국가의 주권 소멸을 의미한다. 국민국가 별로 국가 정체성이 확립되어 있는 유럽의 현실 에서 가까운 시일 내에 재정통합이 이뤄지길 기대할 수는 없다. 현재 EU위원회와 회원국 정상들은 국가부채와 재정적자 수준의 나라별 격차를 줄이기 위해 긴축정책 을 실시하고 있다. 이로 인해 유로존은 극심한 경제침체를 겪고 있다. 2014년에는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 어나 0.8%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지만, 회원국 별 성장률 격차는 크다. 게다가 남유럽뿐 만 아니라 프랑스까지 디플레이션 상황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2015년에는 일본식 디플레이션 불황이 진 행되어 성장률은 -0.3%로 다시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실업률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그 리스의 경우, 실업률은 여전히 26.4%이고 특히 청년 실업률이 51.5%에 이를 만큼 긴축재정으로 인한 사 회적 피로감이 극심한 상황이다.

유로존 위기는 2013년으로 접어들면서 정치 적 영역으로 넘어간다. 2015년 각국이 총선 혹은 대선을 치르면서 그 향방에 따라 유로 존의 운명이 결정 날지도 모른다.

유로존 위기는 2013년으로 접어들면서 정치적 영역으로 넘어간다. 유로존은 경제 적으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지만 각국 정 부의 정책적 협력을 통해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유로존에 반대하는 극 우정당 국민전선(FN)이 여론조사 1위를 하

고 있으며, 독일의 경우 반유로 정당이 3개주에서 집권했다. 이탈리아의 집권정당은 구제금융에 대한 재 협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2015년에는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 총선 혹은 대선을 치르게 되어 있고, 각종 선거의 향방에 따라서 2015년 유로존의 운명이 결정 날지도 모른다.

아베노믹스와 일본의 딜레마 일본은 1998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디플레이션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2012년 12월부터 대규모 양적 완화를 핵심수단으로 하는 아베노믹스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아베노믹스 이후 일본경제는 자산시장이 일정정도 활성화되고 엔저유도정책이 효과적으로 작동함에 따라 대기업 수출을 중심으로 경기가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 일본은 국채수준이 GDP의 240%에 이르러 경기자극 정책과 동시에 재정을 건전화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2014년 4월 재정건전화를 위한 소비세 인상으로 인해 미약하게나마 회복되는 경기가 일순간 에 꺾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은행이 국채의 직접인수 등을 불사할 태세이기에 재정건전성 문제는 일단 52


유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엔화가 달러당 120엔에 근접할 정도로 절하되었음에도 기업의 대규모 해외이전은 과거와 같은 수출증 대효과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수출에 일정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계 교역의 규모가 축 소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이 장기 불황을 끝낼 정도의 성과를 낼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일본은 2013년 1.5%의 상대적으로 양호한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소비세 인상의 후과로 2014년에는 0.4%의 성장에 그친 것으로 추정된다. 2015년에는 미국, 중국 등과의 정책 협력이 뒷받침된다면 1.2%의 성장이 예상된다.

선진국의 침체, 신흥개도국으로 이어져 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를 필두로 한 신흥개도국은 2000년대 선진국을 압도하는 고성장을 통해 향후 선진국과의 격차를 좁혀 새로운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기대가 컸었다. 하지만 신흥개도국은 독자적인 발전 모델에 따라 성장한 것이 아니라 선진국 시장을 대상으로 한 수출 에 크게 의존해왔기 때문에 선진국 경제의 침체는 신흥개도국의 침체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들어 달러가 강세를 보이면서 신흥개도국 통화의 불안정도 크게 높아지는 등 실물부문뿐만 아니라 금융부문도 위기에 노출되어 있다. 신흥개도국은 선진권의 경제가 부진한 동안에는 다시 성장세를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으 로 보이며, 선진권이 안고 있는 돌발적인 위협 요인이 현실화될 경우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브라질과 러시아의 경우 유가 및 원자재 시장의 침체 등으로 인해 2014년에는 각각 0.3%, 0.5%의 성 장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며 2015년에는 각각 1.2%, 0.3%의 성장이 예상된다.

한국, 수출의 성장 견인력 약화 한국경제는 소득 양극화와 과다한 가계 부채에 따른 가계의 소비지출이 감소하고, 세계수요의 위축과 각국의 내수 중심 경제체제로의 전환 움직임으로 인해 수출부문도 활력을 상실한데다, 기업의 투자 심리 를 자극할 적절한 경기부양책의 부재로 경 기 침체가 2015년에도 계속될 전망이다. 또한 대외경제의 여러 위험요인들이 부상 하고 있어서 대외 충격으로 한국경제가 위 기상황에 접어들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2015년도의 한국경제 성장률은 대외적

한국의 경기 침체가 2015년에도 계속될 전망 이다. 또한 대외경제의 여러 위험요인들이 부상하고 있어서 대외 충격으로 한국경제가 위기상황에 접어들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충격을 배제하더라도 경기부양책의 적절 성에 따라 2014년 3.5%(추정치)보다 낮은 1.0%~2.8%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주요 무역대상국들은 성장모델의 전환을 시도함에 따라 세 기획 2015년을 전망한다 53


박근혜정부는 내수 진작을 통해 경제를 살린다며 41조 원의 돈을 푼다고 발표했다. (사진 : MBC 뉴스 갈무리)

계분업체계가 새롭게 정립되고 있다. 미국은 재산업화 정책을 통해 세계의 소비시장으로서의 역할에서 벗어나 경상수지의 대규모 적자를 줄인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중국이 내수중심경제로의 전환 을 모색하고 있는 것도 한국경제에서 수출의 역할을 좁히고 있다. 즉 중국 성장률 하락, 산업구조 고도화 로 인한 자급률 증대, 가공무역 축소 등으로 수출의 성장기여도는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유럽은 유로존의 구조적 결함을 치유하지 못한 채 오히려 디플레이션 침체에 빠져들 위험에 처해 있는 등 세계경 제 전반의 경기 위축으로 수출에서 성장활로를 찾는 데 난관이 예상된다. 한국과 세계시장을 두고 주요부문에서 경합하고 있는 일본의 엔저정책도 한국의 수출부문 대기업을 큰 곤경에 빠뜨릴 위험이 있다. 2015년에도 원/엔 환율의 추가 하락이 예상되는 가운데, 한국과 일본의 수 출 경합도는 최근 들어 계속 상승해왔다. 2015년에 일본 기업이 수출단가 인하를 본격화하면 한국 제품의 경쟁력은 약화될 것이다. 2015년에 원/100엔 환율이 평균 950원으로 떨어질 경우 한국의 총수출이 4.2% 감소하고, 900원까지 떨어질 경우 8.8% 급감할 것으로 우려된다.

내수 진작의 정책 효과 의문 한국 경제가 부채에 의존하여 성장 활력을 불어넣는 것도 심각한 소득불평등과 위험수준에 있는 가계 부채 때문에 순조로운 탈출구를 제공하기 어렵다. 박근혜 정부는 소비 진작을 위해서 가계소득의 증가가 필요하다고 보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통해 가계의 임금소득을 높인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하지만 정부는 정규직의 과보호를 문제를 삼고 있다. 이는 54


정부가 대외경쟁력 유지를 위해 경제의 총임금소득에 변화를 주지 않은 선에서 임금 격차를 해소하는 방 식을 염두에 두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방식은 저소득층 소득 개선으로 소비 진작에 일정한 효과를 낼 수 도 있지만 노동에 비해 자본의 소득분배율이 높다는 근본문제를 회피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정부는 내수 진작을 위한 정책으로 주택시장 활성화를 제시하고 있다. 부동산 등 자산가격을 반 등시켜 소비를 진작하고 건설 등 부문의 투자 심리를 자극한다는 방안이다. 이 안은 주택시장 활성화에 효과적일지도 의문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주택 등 자산가격의 상승은 경제의 실질적인 변화 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전세값 폭등과 같은 부작용을 낳아 소비지출을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또한 임대 소득과 같은 임금 외 소득의 증가는 소득 불평등을 심화한다. 또한 주택대출의 증대는 가 계부채를 더욱 위험한 수준으로 몰아갈 위험도 있다. 하지만 대외적 위험 요인들이 현실화된다면 급격한 외국단기자본의 유출로 금융시장이 크게 교란되고 수출 부문의 부진이 더욱 심화되어 1997년~1998년과 같은 위기를 반복할 수도 있다. 앞서 본 것과 같이 수출의 성장기여 도가 낮아지는 한편 수출의 국내 타영역 으로의 파급효과도 해외생산기지의 이 전의 증가도 예전보다 크게 약화되었다. 더욱이 성장의 고용창출효과도 1980년 이후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최근

성장의 고용창출효과도 1980년 이후 지속적으 로 약화되고 있다. 고용의 질도 점차 악화되고 있으며 이에 경제성장률까지 하락하고 있기 때 문에 고용 사정은 점차 더 어려워질 전망이다.

고용률이 크게 높아졌다는 통계가 나오 고 있지만 고용의 질은 점차 악화되고 있다. 이에 경제성장률까지 하락하고 있기 때문에 고용 사정은 점 차 더 어려워질 전망이다.

결론에 대신하여 현재의 세계경제위기는‘무역과 자본의 자유화’ 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낳은 선진권의 탈산 업화, 금융화 및 전세계적 차원의 소득 양극화 등으로 인해 야기된 경제적 혼란이다. 또한 세계자본주의 의 축적방식이 파산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들, 즉 위와 아래로부터의 여러 시도들이 이뤄지 는 전환기적 현상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의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역사적 전환은 우리에게 새로운 책무를 부여하고 있다. 우리는 분명 하나의 단절을 기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낼 정책적 대안과 노력이 필요한 시점에 서 있다. 2015 년은 새질서로 가는 도정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기획 2015년을 전망한다 55


기획/2015년을 전망한다

중국의 꿈 실현될까

중국만큼 극단적인 평가와 전망들이 교차하는 나라도 없다. 세계적 차원에서는 미국의 헤게모니(워싱턴 컨센서스)를 대체하는 제3세계의 대안 헤게모니의 모델(베이징 컨센서스)로 중국이 언급되다가도 곧 몰 락을 앞두고서 마지막으로 발악하고 있는 일당 독재의 전제 국가로 묘 사되기도 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로는 침체된 세계 경제 의 구원투수이자 무궁한 시장으로 평가되던 중국이 최근에는 경제의 한국 사람들은 중국의 경제발 전을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

경착륙으로 세계 경제의 장기침체를 야기할 주범으로 간주되기도 하 고 심지어는 곧 붕괴할 것처럼 예측되기도 한다.

는 중국붕괴론을 선호한다. 그

중국을 통치하고 있는 중국 공산당에 대해서도 상반된 전망이 교차

런데 막상 중국에 경제적/정치

한다. 2014년, 홍콩의 우산시위와 봄부터 내내 이어진 노동자들의 파

적 위기가 닥치면 가장 힘들어

업 물결, 그리고 (비록 시진핑 체제 등장 이후 부정부패에 대한 강력한 사정

지고 큰 피해를 입을 곳은 바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드러나는 중국의 고질적

한국이 아닐까?

인 문제인 권력과 자본의 부정부패를 바라보고 있으면 언제 망해도 이 상하지 않을 정당이 바로 중국 공산당이다. 한때 한국의 적지 않은 이 들이‘대장정’ 과‘연안 사회주의’ 에서 중국 공산당의 인민에 대한 헌 신과 대중노선을 보며 사회의 변혁을 꿈꾸던 적도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당과 시진핑에 대한 중국 인민들의 지지도는 여전히 높고 확고하다.

하남석 비정규직 시간강사, <중국, 자본주의를 바꾸다> 공동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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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순적인 전망 속에서 한국 사람들은 한편으로 중국의 계속되 는 경제발전을 부러워하고 중국에 대한 경제적 종속을 두려워하면서 도, 우리가 IMF 위기를 겪었던 것처럼 중국도 일정 발전단계에서 경


제위기가 터질 것이라는 중국붕괴론을 선호한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날까? 막상 중국에 경제 적/정치적 위기가 닥치면 가장 힘들어지고 큰 피해를 입을 곳은 바로 한국이 아닐까? 이 글에서는 중국의 2014년을 회고하며 위와 같은 쟁점들에 대한 평가와 전망을 시도하고자 한다.

호랑이와 파리를 때려잡아라 2014년 일명“호랑이와 파리 때려잡기(

)” 로 불리는 중국식‘부패와의 전쟁’ 이 강도가 더 높아

졌다. 호랑이는 권력의 상층부인 고위직을 의미하고 파리는 하위직 부패사범을 비유한 표현이다. 중국 공 산당은 개혁개방 이후 시장화와 경제성장 과정에서 특권을 가진 간부들의 만연한 부패로 통치 정당성에 큰 위협을 받고 있다. 실제로 1989년 천안문 사건 당시에 대중들은‘민주’만큼이나‘부정부패 척결’ 을가 장 큰 요구사항으로 내걸었었다. 그간 몇몇 고위직들의 부정부패 사건들이 터져 나오기는 했지만 보통 각 파벌들이나 권력엘리트들 간의 권력투쟁에 불과했다. 그러나 2012년 시진핑 체제가 들어선 이후로 반(反) 부패운동의 강도와 범위는 유례없이 강력 했다. 그 절정은 지난 후진타오 체제에서

2012년 시진핑 체제가 들어선 이후로 반(反)

권력의 심장부였던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

부패운동의 강도와 범위는 유례없이 강력했

국 상무위원 중 한 명이자 공안 및 사법을 총괄했던 정법위원회 서기를 맡았던 저우 용캉(周永康)에 대한 처리였다.

다. 반부패운동이 여기서 멈출까? 아니면 더 큰 호랑이를 노리고 있을까?

이미 작년부터 캉스푸(康師傅 : 중화권의 대표적인 라면 및 스낵업체로 중국 네티즌들이 검열을 피해 온라인에서 저우용캉을 일러 부르는 별명)가 내사를

받고 있다는 것은 루머를 넘어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전직 상무위원이 부정부패로 처벌받지 않는다는 기존의 관례를 깨뜨리는 초유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사법처리가 공식화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2014년 7월 29일 인민일보 등을 비롯한 각종 언론 매체에 그의 부정부패에 대한 내용이 전면 공개되기 시작했고 부정부패 척결과 당 기율 위반에 대한 엄중한 처리가 예고되었다. 대대적인 캠페인에 이어 12월 6일 자정 을 기해 저우용캉에 대한 당적 박탈 및 출당 조치가 이루어졌으며, 검찰로 사건이 이첩되었고, 뇌물수수 와 간통, 성상납, 국가기밀 유출 등의 죄목도 모두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다. 저우용캉뿐만 아니라 중앙군 사위원회 부주석을 지낸 군의 실세 쉬차이허우도 자택 지하실에 현금을 무려 1톤이나 가지고 있었다는 일 부 언론의 보도와 함께 부정부패 혐의로 체포되었다. 권력 최상층부였던 이들을 비롯해 수많은 호랑이와 파리들이 잡혀 들어갔다. 이러한 강력한 반부패운동을 통해 중국 공산당은 각종 산업부문에 자리 잡은 기 득권들을 타파하기 위한 개혁을 시도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대중들에게 큰 환심을 사게 되었다. 시진핑과 당 기율검사위원회 서기인 왕치산(王岐山)이 이끌고 있는 반부패운동이 여기서 멈출지 아니면 저우용캉 보다 더 큰 호랑이(중국 내외에서 장쩌민이 다음 타겟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를 노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주 기획 2015년을 전망한다 57


목해볼 필요가 있다.

너는 내가 주는 것만 가질 수 있다 현재 중국 인민들이 위와 같은 반부패운동을 바라보는 태도는 한 마디로“只反貪官, 不反皇帝” (부패한 지방관료들에 반대하지 당 중앙에는 반대하지 않는다)라고 할 수 있다. 즉 강력한 당 중앙이 아니고서야 누가

전횡을 부리는 지방과 관료들을 견제하겠는가라는 심리가 작동하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반부패운동의 흐름과 더불어 시진핑이 보여주고 있는 친근한 대중노선은 더욱더 많은 인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경제 발전에 따라 중산층이 생겨나고 이 중산층이 체제의 민주화를 요구할 것이라는 보편적인 예측과는 달리 오히려 중국에서는 중산층이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이끌어내는 중국 공산당의 능력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몇몇 서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중국 공산당의‘업적 정당성(performance legitimacy)’ 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특히 개혁개방 이후 중국 공산당의 가장 큰 목표는 경제성장이었으

며, 이는 사회주의, 자본주의도 아닌‘GDP주의’ 라고 표현될 정도였다. 하지만“권력도 부도 가난도 세습된

개혁개방이 가져다준 기회의 문은 슬슬 닫히는 중이다. 아직은 당의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 하지만 이런 문제들이 고착화되었을 때 불만이 터져 나올 약한 고리는 노동자와 농민이다.

다(官二代, 富二代, 窮二代)” 는 말이 인 민들 사이에서 회자될 정도로 개혁개방 이 가져다줬던 기회의 문이 슬슬 닫혀 가는 중이고 아직은 당의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은 하지만 이런 문제들이 고착화되었을 때 불만이 터져 나올 수

있는 약한 고리는 노동자와 농민으로 보인다. 그들은 지방 관료나 해당 기업에는 격렬하게 심지어 폭력적 으로 저항하지만 중앙 정부에 대해서는 항의보다는 청원(petition)을 한다. 물론 중국에 다당제를 비롯한 서구식 민주주의를 도입하려는 운동이나 시민사회의 역량 강화와 보편적 인권의 확립이라는 목표를 가지 고 활동하는 이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현재 옥중에 있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류샤오보(劉曉波)를 비롯 해 공직자 재산공개 운동과 1989 천안문 재평가 등을 요구했던 변호사이자 인권활동가인 쉬즈융(許志永) 과 푸즈창(浦志强) 등이 있다. 쉬즈융과 푸즈창은 2014년 둘 다 공공질서 교란죄로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 받았다. 중국 공산당은 한편에서 대중노선과 일부 친민정책을 실시하여 대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한 편에서 자유주의적 활동가들에게는 여지를 두지 않고 바로 탄압하고 있다. 이런 당의 모습은 장이모우 감 독의 영화 <황후화>에서 황제로 분했던 주윤발이 반란을 일으켰던 둘째 아들인 주걸륜을 진압하고 건네 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너는 내가 주는 것만 가질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은 안정적인 통치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대중노선과 강압적 통치의 양면성을 띤다. 소설가 위화(余華)의 표현에 따르면,“마오쩌둥 시기 중국엔 계급이 없었지만 지도자들은‘계급투쟁을 잊지 말 58


2014년 호주 브리즈번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 참석한 시진핑

자’ 고 강조했고 심지어 베개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이 구호를 써놓아 꿈에서도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정 작 개혁개방 이후 계급과 빈부격차가 다시 생겨나고 모순이 심화되자 이 구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 조화사회'와 '안정우선'으로 대체되었다.”

닭 방귀 뀌시네 그렇다면 중국 정치와 경제는 계속해서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개혁개방 이후 서구의 소비수요에 대한 과잉의존과 수출주도형, 민간소비 억제형의 불균형적인 중국의 발전모델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및 유럽의 소비시장이 크게 위축되면서 커다란 위험에 직면해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중국의 성장세가 지속되고 있는 것은 2008년 11월에 중국정부가 실시한 4조 위안(약 5700억 달러)에 달하는 경기부양책이 주된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경기부양책의 내용 은 대부분 고정자산 투자로 이루어져 있어서 중국 경제의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심화시켰다. 특 히 이런 과도한 유동성 공급으로 인해 주요 도시지역의 부동산 거품이 심각해졌으며, 생산영역에서의 과 잉투자 문제도 해결되지 못하여 생산기업의 부채는 증가하고 수익성은 하락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시진핑과 리커창은 집권 이후 꾸준히 중국 경제의 구조개혁 등을 강조해왔으며, 수 출주도에서 내수 확대로의 정책전환을 시도해왔다. 나름대로 최저임금을 꾸준히 올렸고 2010년 폭스콘 에서의 노동자 연쇄자살, 2010년 혼다 파업 등을 겪으며 사회 안정을 위해 당-국가 주도 하에 단체교섭을 기획 2015년을 전망한다 59


이끌어내려고 했다. 즉 한편으로는 일정 정도의 당근을 통해 파업 등의 사회 불안정을 없애고 내수 확대 를 통해 경제 위기를 벗어나보려는 정책적 시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지에도 불구하고 정

파업 등 사회 불안정을 없애고 내수 확대를 통해 경제 위기를 벗어나보려는 정책적 시도가 없지 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 전환이 부드 럽게 잘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다.

책 전환이 부드럽게 잘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다. 2014년 들어서자마자 1949년 신중국 건국 이후 단일 사업장 의 파업으로는 최다인원(4만 8천 명) 이 참여했다고 알려진 광둥성 위위안 (裕元 : 나이키, 아디다스, 컨버스 등의 하

청업체) 파업이 벌어졌고 그 뒤이어 광동지역의 여러 생산업체에서 연쇄 파업이 이어졌으며, 다른 지역에

서도 월마트 노동자 등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과 교사들이 처우개선 등을 요구하며 파업의 물결 이 일어났다. 현재 중국에서는 신세대 농민공을 중심으로 계급의식이 새로이 형성되고 있으며, 권리의식 또한 성장하는 중이다. 한 예로 중국의 노동계급은 당-국가의 발전주의적인 GDP 담론을 자신의 언어로 풍자한다. 민간에서 GDP를‘

’ (중국어 발음으로 GDP와 동일한데, 닭 방귀라는 뜻이 된다. 중국어에서‘

소리한다는 뜻이다)로 표기한다던가“官員熱衷GDP,

’ (방귀 뀌시네)는 헛

”(관료들은 GDP에 열중하지만, 인민들

은 닭 방귀를 혐오한다네) 같은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중국의 GDP주의로 집약되는 신자유주의적

광둥성 위위안 파업. 신중국 건국 이후 단일사업장 파업으로는 최다인원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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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주의 담론이 일정하게 사회적 저항에 직면하자 중국 당국 역시 여기에 맞춰 일정한 변형을 추구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즉, GDP주의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되 계속해서‘포용적 성장’ ,‘내수중심의 발전으 로의 전환’ ,‘민생개선’ ,‘구조개혁’등의 담론을 꺼내놓고 있다. 이런 것들이 수사적 차원의 담론에 그칠 것인지 아니면 어떤 실질적인 결과물들을 만들어내면서 연착륙할 것인지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실 질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더 격렬한 저항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상이몽이 아닌 같이 꾸는 중국몽은 가능한가? 시진핑은 2013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중국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것이 중국 인민의 꿈이라고 하는‘중국몽’ 이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왔다. 중국몽은 아직은 세부적인 내용이 비어있는 구호이자 목표지 만 그것이 점차 비어가고 있는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공백을 민족주의적인 슬로건으로 메우려고 하 는 것은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올해 만들어진 <Chinese Dreamers>라는 짧은 다큐멘터리에서 중국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지금 느 끼고 있는 것을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고백한다. 농촌에서 올라온 젊은 농민공들은“적응하지 못하면 배척 당한다. 도시의 삶은 전쟁과도 같다” ,“나는 이 도시에 와서 타락했다. 처음에 이 도시에 왔을 때 난 거지 들을 만나면 돈을 주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이 콘크리트 정글은 내 심장을 강철로 만들어버리고 말았 다. 난 계속해서 타락하고 있다. 이 중압감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겠다. 때때로 난 정말 울고 싶다” 고 도시 에서의 소외된 삶들을 증언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노동에 대하여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농민공이 없었으면 중국이 이렇게 빨리 발전할 수 없었다. 힘들고 더러운 일을 하는 것은 농 민공들인데 대중들은 그것을 보지 않는 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집도, 먹는 음식도, 입고 있는 옷도 다 농민공들이 만들어낸 것인데도 말이다.”그들은 세계 최대의 빈

중국 젊은이들의 삶과 꿈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 중국몽은 각자도생의 '동상이몽'이 아 니라 평범한 이들, 그리고 우리가 같이 꾸는 꿈이어야 한다.

부격차라는 문제를 지닌‘사회주의’국가 중국이 더 평등하고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중국 젊은이들의 삶과 꿈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 중국몽은 각 자도생의 '동상이몽'이 아니라 평범한 이들, 그리고 우리가 같이 꾸는 꿈이어야 한다.

기획 2015년을 전망한다 61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3

청소년인권 활동가 박건진

모든 운동은 부문운동이라고 생각해요 만나기가 쉽지 않다. 평일에는‘알바’ 로 바쁘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인천에 사는 청소년활동가 박건진 당원을 인터뷰했다. 청소년인권운동을 주로 했다 는 박건진 당원은, <발칙한 청소년을 상상하자>라는 글을‘아리데’ 라는 필명 으로《미래에서 온 편지》제13호에 기고한 바 있다. 그의 가출-독립생활 이야 기, 대학거부 이야기, 노동당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대답을 들어보 니,“권력구조의 가장 아랫부분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터져 나올 때, 비로 소 불평등한 관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것이다” 라던 기고문의 입장은 여전했 다. 지역운동-부문운동 연계와 당내 연령 제한에 관한 다소‘발칙한’견해도 내놨다. 청소년활동가 주거협동조합을 꾸리고 있다는 그에게 앞으로도 꽤나 오랫동안‘현장’ 은 청소년운동일 듯하다. 인터뷰·정리 : 강승 청소년위원회(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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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63


안녕하세요.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음… 우선 당적부터 말해야 하는 건가요?(웃음) 인천 남동구 당원협의회와 청소년위원회에 소속되어 있고요, 주로 쓰는 활동명은‘아리데’ 입니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인천지역모임에서 2009년부터 활 동하고 있어요. 요즘은 청소년활동가 주거협동조합‘비행’ 이라는 주거공동체를 인천에 만들어서 꾸려나 가고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공인노무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막상 공부를 하려니 돈도 없고 시간도 없네요.

언제부터 노동당 당원이셨나요? 입당하게 된 계기도 궁금해요. 별 거 없으면 안 되는 거죠? 별 거 없는데….(웃음) 아수나로 인천지역모임에 당시 진보신당 당원인 활 동가가 있었어요. 그 사람이랑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입당 권유를 받고 독서실에서 인터넷으로 당원 가입을 했어요. 2009년 9월인가? 그랬을 거예요. 진보신당의 강령 중 청소년 부분이 마음에 들었던 게 가 장 큰 이유였던 거 같아요. 그렇게 진보신당에 입당한 게 지금까지 왔네요. 저를 소개해준 친구는 아쉽지 만 다른 당으로 당적을 옮겼더라고요.

당 안팎에서 어떤 활동을 주로 하시나요? 청소년인권에 관련된 운동을 많이 했어요.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학생인권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 고, 그래서 그에 대한 활동을 많이 했어요. 제가 사는 인천이 워낙 학생인권 상황이 열악하기도 했고요. 저 는 두발규제가 너무 싫었거든요. 용의복장규제나 핸드폰 검열 같은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나오게 됐어요. 친권자와 싸우고 집을 나와서 한 달 정도 밖에서 지 냈는데요, 집에 돌아왔더니 학교에서 저를 무단결석으로 징계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저에게는 학교가 청 소년인권운동의 나름 치열한‘현장’중 하나였

“저에게는 학교가 청소년인권운동의

으니까 그 안에 남아 운동을 하고 싶었어요. 징

나름 치열한‘현장’중 하나였으니까 그

계 받고 계속 학교를 다니고 싶었지만, 징계를

안에 남아 운동을 하고 싶었어요. 징계

받으면 교육대학에 갈 수 없다며 친권자가 강제 로 자퇴를 시켰어요. 그리고 노량진에 있는 재수

받고 계속 학교를 다니고 싶었지만 친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요, 하라는 공부는 안

권자가 강제로 자퇴를 시켰어요.”

하고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에서 시간을 많이 보 냈어요. 그러다 친권자에게 들켰고, 집에서 쫓겨

나게 됐어요. 다시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고 갑작스럽게 준비 안된 가출-독립생활이 시작되었어요. 사실 독립은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어요. 집에서 친권자와 싸우다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싸움이 심했 거든요. 수많은 길고 짧은 가출이 이어졌고, 집을 나오기 위해 조금씩 돈을 모았어요. 목표는 50만 원. 그 정도 금액이면 한 달을‘버티는’건 가능할 거 같았거든요. 그런데 생각보다 일찍, 갑작스럽게 집을 나오 64


인천 거리에서 청소년 휴식권 보장을 위한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사진 : 사카린<아수나로 인천지역모임>)

게 된 거죠. 집을 나오니까 주변의 모든 것이 달라진 느낌이었어요. 청소년이라는 이유만으로 삶을 살아가는 데 필 요한 기본적인 것조차 가로막혀 있었어요. 노동에는 보호자 동의서가 필요하고, 거소지정권 때문에 친권 자가 경찰에 신고만 하면 언제든지 집으로 잡혀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라 제 명의로 된 카드도 사용할 수 없었고 병원에도 마음대로 갈 수 없었어요. 실제로 제가 살던 공간에 경찰이 들이닥쳐서 함께 생활하던 가출 상태의 청소년활동가를 잡아간 적도 있어요. 언젠가 월급을 인출하려다 통장 인출 비밀번호를 다섯 번 틀려서 은행을 찾아갔어요. 그런데 제가 통 장을 만들 수는 있지만 비밀번호는 친권자가 직접 은행에 와야만 바꿀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 상황이 어 이가 없기도 하고 당장 방세를 내야 하는 상황이었어 요. 은행 창구에서 울면서, 가출했는데 친권자에게 어 떻게 연락을 하냐고 30분 동안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 니 창구 직원이 몰래 바꿔주겠다고 이야기하며 비밀번 호 재설정을 해줬어요. 보호자 동의서가 현실에서는 가출한 청소년들이 동의서를 허위로 작성하거나 애초

“청소년의 독립이 어려운 것은 청소 년이 미성숙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으로 청소년의 독립을 불가능하도 록 만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에 동의서가 필요 없는 불안정하고 위험한 노동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들고 있어요. 이처럼 청소년의 독립이 어려운 것은 청소년이 미성숙해서가 아니라 사회 적으로 청소년의 독립을 불가능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처음에 집을 나와서 서울의 구자혁 당원이랑 청소년위원회 사람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사람들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65


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하루 열두 시간 동안 홍대의 고깃집에서 시급 5000원을 받으면서 일하기 시작 했고, 청소년 노동권에 관심이 많아져서 당시 진보신당 청소년위원회의 노동권팀을 만들어보기도 했고, 청소년 노동조합 준비모임을 만들어서 활동해보기도 했어요. 그 이후로도 이런저런 활동을 해오고 있는데요. 2012년 대선에서의 정치개입사태에 대응하면서‘민주 주의 회복을 위한 인천 청소년 1515인 시국선언’ 도 해보고, 새학기에“쉬지도 못했는데 무슨 개학이냐” 라 며 개학반대 캠페인도 해보고요. 요즘은 인천에서 두발규제 폐지를 위한 캠페인을 준비하고 있고, 전국적 으로 학생들의 과도한 학습시간을 줄이자는 취지의‘학습시간 셧다운’캠페인을 준비하고 있어요.

인천 지역에서 청소년운동을 하고 계신데요. 어떻게 보면‘지역에서 부문운동을 한다’ 고도 말할 수 있는데, 그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마 모든 사람에게는 편한 동네가 있을 거예요. 저에게는 인천이 그런 공간이에요. 열두 살 때 인천에 이사를 왔고, 인천에서 살고 있어요. 제가 살던 동네라서 애정이 많이 가요. 이 공간을 제가 더 살기 좋은 동네로 바꾸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거죠. 지역운동의 의미라고 한다면 뭐 다른 운동과 다를 바 없을 거 같은데요, 지역에서 직접 생활을 하게 되면 여러 지역의 문제들을 직접 마주하게 되고, 더 많이 관심을 가 지게 되는 거 같아요. 그게 되게 중요한 지 점인 것 같아요. 2012년에서 2013년까지는 서울 회기동에서 살았거든요. 그래도 인천 에서 운동을 하고 싶어서 주말만 되면 인천 지부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왕복 3시간이 넘 는 거리를 왔다 갔다 하곤 했어요. 사람들이 회기동에 인천으로 가는 비밀의 문을 만들 어놓은 게 아니냐는 농담을 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제가 좀 삐뚤어진 건지는 모르겠 는데, 저는‘부문운동’ 이라는 말을 별로 좋 아하지 않아요. 서울도 지역이고 인천도 지 (사진 : 아리데)

“지역마다 고유한 특성은 존재하겠지만, 운동 에서 지역과 중앙, 전체와 부문을 나누는 것이

역이죠. 지역마다 고유한 특성은 존재하겠 지만, 운동에서 지역과 중앙(서울을 말하죠), 전체와 부문을 나누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게 어떤 실효성이 있는 지도 잘 모르겠어요. 모든 운동은 부문운동

어떤 실효성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모든

이라고 생각해요.‘청소년 부문운동을’ ,‘지

운동은 부문운동이라고 생각해요.”

역에서’하는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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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나로 인천지역모임 회의 중인 모습 (사진 : 사카린<아수나로 인천지역모임>)

지역에서 청소년들과 만나고 자신의 생활과 밀접하게 닿아있는 것들의 변화를 직접 느끼면서 운동할 수 있는 생생함이 있다는 것 정도 있을 거 같아요. 구체적으로는 인천지역이 학생인권의 불모지 수준인데, 학생들이 두발자유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도 많고 민감하게 반응해요. 사실 신체에 대한 부당한 억압만큼 참기 힘든 것도 없으니까요. 저는 모든 운동 이 마찬가지겠지만 학생인권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당사자인 청소년들이 직접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 거든요. 그런데 청소년들은 부당함은 느낌으로 알지만 문제를 제기할 언어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거 같기도 해요. 두발자유 운동을 함께 하면서 그것을 시작으로, 여기에서도 다양한 학생인권에 대한 이야기 들이 터져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대학거부를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대학에 가지 않겠다” 라고 선언하기는 쉽지 않은 데요. 그 동기가 궁금합니다. 어릴 때는 당연히 대학에 가야한다고 생각했어요. 마치 제 자리가 이미 있는 것처럼요. 그런데 나중에 와서 생각해보니, 대학에 가는 것은 친권자가 정해준 제 삶의 목록을 채워나가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집에서 살 때 항상 친권자의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어요. 회의나 모임을 갈 때도 항상 독서실에 간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어요. 친권자가 제게 요구한 각본에 충실해야했고, 그러지 못하면 어김없이 벌을 받았어요. 제가 원하는 삶은 다른 곳에 있는데, 끊임없이 친권자가 원하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그런 게 너 무 싫었어요. 아버지는 항상“대학만 가면 너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주겠다” 라고 이야기하곤 했는데,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67


솔직히 대학에 간다고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살게 놔두지 않을 거 같았어요. 대학부터 끊어내지 않 으면 평생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살아야할 것 같은데,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던 거죠. 실제로 대학에 간 누나가 총학생회를 한다고 하니까, 아버지는 공부는 언제 하냐며 막 화를 낸 적도 있어요. 그게 가장 큰 이유이고, 그 이외에도 대학이 지식을 독점하는 지금의 교육현실에 대한 문제제기도 하 고 싶었고, 학생인권침해의‘끝판왕’ 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입시경쟁에 맞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 었어요.

대학거부를 하면서 염려되는 부분은 없 었나요? 그리고 대학거부 후 가족을 비롯 한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요? 먹고사는 문제가 좀 고민이 되기는 했어 요. 그런데 그것도 되게 이상하더라고요. 먹고 살기 위해서 대학에 간다는 게 웃기잖 아요. 대학은 공부하라고 있는 곳인데,“현 실적으로 먹고살려면 대학에 가야한다” 라 니. 결국 이 사회가 원하는 대로 저를 맞춰 야 더 편하게 살 수 있다는 말로 들렸어요. 누군가 뽑아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자신 (사진 : 아리데)

을 남들보다 멋진 상품으로 포장하라는 거 죠. 별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조금

“대학을 가지 않겠다는, 집에서 편하게 살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 순간 저는 이전의 저와 다른 삶의 양식을 갖게 되죠. 돈을 쓰는 카테 고리에서부터 생각하는 방식까지.”

못 살더라도 제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떳 떳하게 살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어요. 대학거부를 했다고 하면 항상 주변의 반 응을 물어봐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그게 왜 중요해요?” 라고 물어보고 싶어요. 그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주변에

서는 다 뜯어 말렸어요” 라는 답을 기대하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주변의 반응은 중요하지 않다 고 생각해요. 제가 어떤 마음으로 대학을 거부했으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죠. 대학을 가지 않겠다는, 집에서 편하게 살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 순간 저는 이전의 저와 다른 삶의 양식 을 갖게 되죠. 돈을 쓰는 카테고리에서부터 생각하는 방식까지 삶의 모든 부분이 바뀔 거예요. 많이 힘든 점이 있고, 요즘은 그런 것들과 부딪히며 순간순간 힘들게 살아가기도 해요. 하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기꺼이 가지 않겠다고 생각했고, 선택했으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평 68


2014년 박건진의 새해 소망은‘일 쪼금하고 여유 폭발하는 삶’ 이었다. 2015년에는? (사진 : 아리데)

가할지는 그 사람들의 몫이죠.

그밖에 청소년활동가로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청소년이 미성숙하다고 생각하는 시선 때문에 받는 상처가 많아요. 사회적으로 청소년을 미성숙하다 고 생각하잖아요. 사실 조심스럽기는 한데 운동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청소년 미성숙 담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되게 많다고 느껴요. 다른 활동가들과 다르게 대우하는 부분이 느껴지면 답답하기도 하고 … 친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대뜸 말을 놓는 경우가 가장 당황스러워요. 같이 말을 놓기도 좀 이상하고, 그렇다고 왜 반말이냐고 문제제기를 하기에도 관계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이야기를 잘 하지 못하기도 하고 요.

현재 노동당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저와 같이 인천에서 지역시당 청소년위원회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함께 준비하는 사람 중에 나이가 안돼서 입당을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지금 중학교 1학년인가? 그렇더라고요. 입당하고 싶다길래“노동당은 청소년도 당원이 될 수 있어요!” 라고 자신있게 말했는데, 그날 저녁에 입당이 안된다 는 말을 듣고 얼마나 부끄럽던지… 15세 이하의 청소년도 노동당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입당 나이 기준을 조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판단력의 기준이나 당원가입의 기준을 나이로 제한해야 한다는 사고방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69


식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해요. 항상“그래서 원하는 게 몇 살이 냐” 를 묻곤 하는데, 다들 그런 나 이기준이 자의적이고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요. 입당이나 당권행사에서 나이 기준을 철폐하고, 다른 방식으로 당내 민주주의를 실현할 방법을 찾아야한다고 생각해요. 또한 당내에서 나이에 따른

인천인권영화제 회의 중의 모습 (사진 : 아리데)

차별이나 권력관계가 생기지 않 도록 주기적으로 전당원을 대상 으로 인권교육을 실시하고, 대의 원, 전국위원, 상근자 등을 대상

“나이에 따른 차별이나 권력관계가 생기지 않도록 주 기적으로 전당원을 대상으로 인권교육을 실시하고, 대

으로는 소수자 인권 교육을 의무

의원, 전국위원, 상근자 등을 대상으로는 소수자 인권

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서로

교육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평등하게 만나 고민을 나눌 수 있는 환경이야말로 진보정치의 탄탄한 토양이지 않을까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인천에서 꾸준히 이런저런 것들을 하며 지낼 거 같아요. 주거협동조합을 안정적으로 만드는 것과 인천 지역 청소년운동의 판을 키우는 것이 가장 큰 계획인데요. 일단 활동 욕심은 조금 줄이고 공인노무사 시 험을 준비할 생각이에요. 곧 군대 영장도 나올 텐데, 병역거부를 해야 하나 고민이 되기도 하네요.

마지막으로,‘청소년활동가 주거협동조합 비행’ 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청소년활동가 주거협동조합 비행은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청소년활동가들이 모여 함께 생활하는 공간 이에요. 청소년이 독립하여 삶을 살아갈 권리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고 싶기도 했고, 빈곤한 지역 청소년 운동이 비빌 공간을 만들어보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인천 부평구에 공간을 마련했고, 세 명의 청소년활동 가가 함께 생활하고 있어요. 청소년들이 삶을 살아갈 권리로는 주거권, 노동권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터 져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페이스북에“청소년활동가 주거협동조합‘비행’ ” 을 검색해보시면 페이 지가 나와요! (https://www.facebook.com/youthcomm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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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콜트콜텍을 읽는 열두 개의 시선 ⑪

(사진 위 : 박성훈 홍보실장 / 아래 : 콜트콜텍 공동행동) 노동르포 71


노동르포

콜트콜텍을 읽는 열두 개의 시선⑪

벽 이선옥 기록 노동자

마감을 지키지 못한 탓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쌍용차 해고자 둘이 공장 안 굴뚝에 올 랐다는 소식을 들었다. 구미 스타케미칼 공장 굴뚝 위의 차광호는 여섯 달, 광화문 파이낸 스 빌딩 광고탑에 올라간 씨앤앰 노동자 강성덕 임정균의 고공농성은 한 달을 넘겼다. 얼마 전에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시민인권헌장> 선포를 거부하면서 인권운동가들이 시청 로비에서 농성을 벌였고, 광화문 지하도에는‘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 를 내걸고 삼 년째 농성중인 장애인농성단이 있다. 하늘과 땅 도처에 농성이 넘쳐난다. 수도권에 있는 농성장들만 이어도 꽤 많은 선들이 연결될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전혀 새로운 권리를 얻어내기 위한 것도 아니다. 빼앗긴 것 을 되찾기 위한 농성, 지금

더 나은 세상을, 전혀 새로운 권리를 얻어내기 위한 것도 아니다.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한

보다 더 나빠지지 않기 위 한 농성들이다. 이긴다 할 지라도 우리가 돌아가는 곳

농성,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한 농성이

은 예전보다 못한 제자리이

다. 이긴다 할지라도 예전보다 못한 제자리다.

며 덜 나빠진 지금에 머무 를 따름이다. 작은 승리의

경험조차 없다시피 한 요즘, 또 다시 들리는 고공농성 소식은 절망스럽다. 이겨도 제자리인 싸움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계속 걸어야 할까.

적막이 흐르는 순간 며칠 전 늦은 밤 인천의 콜트콜텍 농성장을 찾았다. 많이 늦은 시간이라 조심스럽게 들 72


농성장에서 연습중인 콜밴 (사진 : 콜트콜텍 공동행동)

어갔는데 천막 안은 뜻밖에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마침 콜밴이 노래 연습을 하는 날이라고 했다. 요즘 콜 텍 해고자들은 시, 일기, 노래, 연극, 작사 작곡까지 종합 문화예술인의 길을 걷고 있다. 이날도 새로 발표 할 자작곡의 노랫말을 두고 서로 살가운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콜밴은 벌써 자작곡이 세 개나 되고 계속 작곡 수업을 받는 중이다. 내년쯤 음반을 녹음하는 게 목표다. 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은‘옛정서 발굴밴드 <푼돈들>’ 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밴드다. 월요일마다 수 업을 한 지가 꽤 오래 되었다고 한다. 노래와 연주에 대한 기술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공연을 계획하고 노랫말을 가르치면서 노동자들이 가장 적절한 언어를 뽑아내도록 자극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다. 해고자들은 자기가 만든 노랫말이 최종 가사로 채택되면 즐거워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노랫말이 더 적당하다 주장하며 채택 경쟁을 벌였다. 늦은 밤 천막 안의 분위기는 즐거웠다. 안 그래도 밴드 수업하 는 모습을 본 지 오래되어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오늘 마침 좋은 날 찾아왔구나 싶어 나도 즐거웠다. 별스럽지 않은 일상의 수다들이 오가고 서로 까르르거리다가, 어떤 단체와 조정해야 하는 일정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중간에 의사소통이 잘 안되어 다시 무언가를 확인하는 상황이 되었나 본데 이인근 지회장 이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화를 냈다. 다른 조합원은 잠시 자리를 피했고, 순간 정적이 돌면서 어색해졌다. 수다가 끊기면서 뮤지션 중 한 분은 말없이 기타를 튕겼고 나는 땅바닥만 쳐다봤다. 천막 안에는 적막이 돌았다.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할까, 내가 푼수처럼 웃으며 너스레를 떨까, 아무렇지 않은 듯 다른 얘기로 화제를 돌려볼까, 고개 숙인 채 온갖 궁리를 했다. 손님으로 놀러온 데다가 이런 상황이 자연스러울 만큼 노동르포 73


일상을 함께 하지도 않는 내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순간이었다. 빨리 저 명랑하고 친밀도 높아 보이는 여성분이 이 상황을 해결해 주기만을 바랐다. 다행히 민망한 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평소 분위기를 즐겁게 이끌어 가는 김경봉 조합원이 아무 일 없었던 듯 말을 던졌고 이인근 지회장도 자연스럽게 그 말을 받아 대화를 이었다. 다시 농성장은 즐거운 교습소로 바뀌었다. 고작 몇 분밖에 안 되는 그 순간이 길게 느껴졌다. 나는 호기롭게 생맥주와 치킨을 쏘 겠다고 선언했다. 집에 돌아가려던 강사님들은 해고자들의 부탁에 대중교통 귀가를 포기하고 주저앉았 다. 한밤중 농성장에는 작은 술자리가 벌어졌다.

갈등의 골 작년 이맘 때 송년 공연 리허설을 하다가 콜밴 조합원들끼리 다툼이 났다. 그곳에는 공연을 요청한 단 체의 스텝들과 조금 일찍 도착한 관객도 있었다. 남의 눈이 많은 상황인데도 다툼을 숨기지 못하는 걸 보 니 걱정이 됐다. 같은 집단 안에 아무리 사이가 안 좋은 사람들이 있다 해도 바깥으로는 그 갈등을 내보이 기 싫어하기 마련이다. 막지 못해 터져 나오는 경우가 아니라면 조직원들 사이의 다툼은 잘 드러나지 않 는다. 남들 앞에서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고 다툼을 보이는 것은 서로가 관용의 임계점을 넘어버린 이들의 상황을 보여준다. 그때도 나는 어쩔 줄 모르고 그 상황을 지켜봤다. 꽤 심각한 모습으로 다퉜기 때문에 무사히 공연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누군가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 같아 조마조마했는데 어찌어찌 상황은 수습되고 공연도 무사히 마쳤다. 행사를 끝내고 돌아가는 이들을 배웅하는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서로 어울리며 멀어져 갔다. 조금 전의 긴장된 다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묘하게 냉랭한 기류가 흘렀다. 순간의 돌발 상황이어서 바로 수습할 수 있

순간의 돌발 상황이어서 바로 수습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하루 이틀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보니 갈등과 해소를 반복하 는 것 자체가 일상이 된 느낌이었다.

었던 게 아니라, 하루 이틀 일어나는 일이 아니 다 보니 갈등과 해소를 반복하는 것 자체가 일 상이 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해고자 한 분은 요양을 떠났다. 콜밴은 이제 네 명이 아닌 세 명이 공연을 다닌다. 떠난 사람의 빈자리를 보면 이가 하나

빠진 것 같다. 그는 판결이 끝나고 법원 마당에 서 있는 회사 관리자한테 욕을 퍼부었다. 차마 상대방한테 주먹을 날리지는 못하고 꼭 쥔 손을 부르르 떨기만 했다. “니들이 사람이냐 이 XXX야!”그는 같은 욕을 반복했다. 그런 분위기여서 요즘 어떻게 지내고, 건강은 어떤지, 이제 어떡할 건지 물어보려던 말은 쑥 들어가 버렸다. 지리산 어딘가에서 생계 일과 요양을 함께 하고 있다는 소식만 풍문으로 들었다. 전화를 해 보려고 몇 차례 망설이다 편치 않게 떠난 상황이리라 짐 74


작해서 그냥 접었다. 그가 하고 싶지 않은 말을 묻게 될 것 같아서다. 지난 상처를 찔러보는 일이 꼭 필요 하지도 않고 갈등의 상황을 굳이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이 지나고 세 명뿐인 콜밴도 익숙해져 간다. 그래도 네 사람일 때보다 마음은 허전하다.

또 하나의 가족이 주는 괴로움 어느 장기 투쟁 사업장 해고자가 말했다. 바로 곁에 있으니 가족보다 가깝고, 그만큼 긴 시간을 함께하 는 사람을 미워하는 일은 엄청나게 힘들다고. 오랜만에 들른 농성장에서 서로 화를 내는 모습을 보니 예 전 공연 연습 때 다투던 장면이 떠올랐다. 지금 이들은 하루에 몇 차례나 이런 다툼을 반복하면서 살까? 옴짝달싹도 못하고 서로 부대껴야만 하는 좁은 공간과, 늘 함께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장기 농성자들에게 서로에 대한 미움은 치명적인 독일 것이다. 장기 투쟁 노동자들이“차라리 회사랑 싸우는 게 낫다” ,“내부의 갈등이 투쟁 과정에서 가장 힘든 일” 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 감정의 소 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투쟁이 팔 년째 접어들고 사법부에 서도 패배를 선고한 상황, 갈등 끝에 떠 나는 동료마저 생긴 지금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농성을 이어간

투쟁이 팔 년째 접어들고 사법부에서도 패배를 선고한 상황, 갈등 끝에 떠나는 동료마저 생긴 지금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농성 을 이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여기서 멈추 면 너무 억울하다는 그 마음 하나로 계속 거리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 이들의 삶에 너무 큰 손해가 아닐까? 지난 대법원 판결 이후 해고자들은 총회를 열었다. 앞으로 콜텍 지회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총회다. 대전의 조합원들은 이제 그만 끝냈으면 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심각해 지금 상황이. 빨리 끝내자 이거지. 이렇게 (길거리에서)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 생계가 문 제지. 조합원 스물여섯 명 중에 이번 판결 나오고 나서 떠난 사람은 없어. 대신 투쟁 전담조 생계비는 안 내고, 그냥 조합비 삼천 원씩 내는 거는 하기로 하고. 개인적으로 그만두고 싶은 사람들도 있고 그러자고 도 하지만 또 지회장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포기하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지. 콜 트악기가 아직 재판 중인데 어떻게 우리만 정리하냐 하는 사람도 있고. 사실은 내 책 나오고 나면 나도 그 만 둔다고 얘기했어. 이렇게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가정이 있고 생계가 있는데… 쉬운 일이 아니지 ….” (임재춘)

임재춘 씨는 다음 달에 그동안 쓴 농성장 일기를 책으로 묶어낸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되는 것을 보 노동르포 75


‘움직이는 사진관’ 에서 촬영을 함께한 김경봉 씨(좌)와 임재춘 씨(우) (사진 : 콜트콜텍 공동행동)

고 한 출판사가 제안을 했다고 한다. 장기 투쟁 덕(?)에 난생 처음 내 이름으로 나온 책도 갖게 되었다. 책 이 나오면 열심히 투쟁 다니면서 팔아야 할 텐데 그만두면 그 책을 어떻게 팔 거냐고 물어도 돌아오는 답 은 같다. 이렇게 사는 일이 쉬운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공장을 들어가든가 농사를 짓든가 해야 돼. 설마 백만 원짜리라도 어디 공장 자리 하나는 있겠 지. 가서 아부 떨어가지고 안 짤리게 하면 되지.(웃음) 어차피 기타 공장은 못 들어가, 어디서 써주지도 않 을 거고. 생계가 해결이 안 되니까 쉬운 문제가 아니야. 콜밴으로 노래해서 보태자는데 지금 우리가 받는 공연비로는 세 명 생계비도 안 나와. 생계비를 육십만 원으로 정했는데 그걸로 생활하기는 어렵지. CMS 후원금도 그래. 우리한테 후원해 줄 만한 사람들은 대전충청 지역에 많이 있는데 그쪽에도 싸우는 사업장 이 너무 많아. 지역에서 우리만 올라와 있는데 우리한테 돈 보내라고 하기도 그렇고. 손 벌릴 데가 없어 ….”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동안 대전의 여성 조합원들이 하던 장류사업도 함께 접기로 했다. 노력하는 것 에 비해 생계비도 안 나올 만큼 소득이 적은 까닭이다. 거기에 지난번 대법 재판에서 패소한 측이 소송비 를 부담하라는 판결 내용 때문에 조합원들한테 일인당 백오십만 원 정도씩 청구서가 날아왔다. 큰돈이다. 회사는 합의해 주면 이 돈 안 받고 끝낼 수 있다고 조합원들한테 말을 흘린다. 조합원들은 당연히 흔들린 다. 76


“그걸로 또 우리를 분리시키려고 하고 있어. 몇 달치 월급 주고 끝내려는 거지. 판결만 이겼으면 끝나 는 문젠데… 이겼어도 복직을 시켰으리란 보장도 없고, 현대차 비정규직만 봐도 법으로 이겼어도 (복직)안 시키는 거 보면, 우리도 그랬을 거야. 그 대신에 우리가 유리한 조건으로 싸울 수는 있었을 텐데…” (임재춘)

임재춘 씨는 아직도 그 재판 결과가 야속하기만 하다. 신기하게도 장기 투쟁 사업장들 중에서는 손해 배상(이하 손배)과 가압류가 없었던 콜트콜텍. 손배 가압류 사업장에 대한 지원마저도 비껴가는 박복한 곳 이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이제 특별한 기록도 곧 깨질지 모른다. 회사는 소송비라는 무기로 조합원들 한테 손배 압력을 넣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재판까지 이긴 마당에 회사는 더 강도 높게 나올 것이고, 어찌 할 방법이 없다. 사장이나 지회장 둘 중 하나가 죽기 전에는 안 끝난다는 농이 그냥 농으로만 들리지 않는 다.

“공장 안 하겠다는 각서만 써주면 돼” 해고자 총회에서 가장 강력하게 농성을 지속하고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이인근 지회장에게 물었 다. 원직복직을 관철해야만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는 거냐고. 몇 달 전 콜트악기의 방종운 지회장에게 끝까 지 싸워서 승리한다는 게 어떤 수위를 말하는 거냐고 물었을 때“적어도 1심 승소한 조합원들만이라도 복 직시켜야 한다” 는 구체적인 목표가 대답으로 돌아왔던 것처럼, 이인근 지회장도 그런 목표가 있을 것 같 았다.

“그건 아니야. 전원 원직복직이 되어야만 싸움 을 끝낸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박영호 사장이 우리를 죽어도 못 받아들이겠다면 한국에서 다시 기타공장을 열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주면 돼. 적 어도 그건 받아낼 거야. 그러겠다고 하고 몰래 운

“박영호 사장이 우리를 죽어도 못 받아 들이겠다면 한국에서 다시 기타공장을 열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주면 돼. 적어 도 그건 받아낼 거야.”

영하면 어떡하냐고? 어기면 엄청나게 배상하도 록 각서에 공증을 받아놔야지. 우리를 다 자르고, 몇 년 세월을 이렇게 싸웠는데 아무 성과도 없이 포기할 수는 없잖아. 적어도 한국 땅에서 다시 공장을 하는 건 막을 거야. 아마 (이 제안을) 절대 못 받겠지.”

상대가 절대 못 받을 거라고 말하면서 이 제안을 던지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는 생떼요 어거지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원직복직까지는 안 바란다고 말할 때의 그 마음을 안다면 이 제안의 효능만을 떼어서 저울 눈금처럼 냉정하게 잴 수는 없을 것이다. 대법 판결 후 총회에서 조합원들은 어떤 얘기를 했고, 앞으로 어떻게 하자고 하는지 들어보고 싶어서 노동르포 77


들른 그 날의 방문은 사방에 온통 세워진 벽만을 확인하고 끝났다.

굴뚝에 오른 쌍용차 해고자 김정욱 씨는“다시 담쟁이처럼 푸른 잎을 피우면서 저 담을 넘고 말겠다” 고 쓴다. 공장 밖에서 떠돈 지난 세월 동안 공장의 담벼락은 그들에게 정말 단단한 장벽으로 보였을 것이다. 김정욱 씨가 쓴 글을 보고 떠오른 <담쟁이>라는 시. 한때 그 시를 참 좋아했는데 함께 넘어줄 것만 같던 시인은 저 혼자 벽을 타 넘은 뒤 담장 밖의 잎들에게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 굴뚝과 농성장에서 복직 이라는 희망의 담을 향해 넝쿨을 뻗어야 할 잎들은 오늘도 저 벽을 넘지도, 멈추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다. 저 담을 넘는다 해도 복직이라는 희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사방이 벽이다 지난 12월 12일, 강원도 춘천지법에서는 35년 동안 간첩의 누명을 쓰고 살았던 일가족 여덟 명에게 무 죄가 선고됐다. 무려 35년 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가 결정된 이 재판에서 재판부는 판결문을 낭독한 후 자 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여 사과를 했다. 강 모 부장판사는“피고인들에게 육체적 정신적 피해를 준 점에 대 해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인권을 보장해줄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하는 사법부의 잘못으로 형언 하기 어려운 일을 당한 점에 대해 사법부의 구성원인 우리 재판부가 사과를 드립니다” 고 말했다 한다. 유 가족들도 진심 어린 사과에 고맙다고 화답했다. 한 피해자는“진심 어린 사과에 감동 받았다” 고 말하기도 했다. 35년을 기다려 받은 저 사과 한 마디가 이 피해자들의 삶을 얼마나 치유하고 복원해 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법부의 사과는 피해 당사자가 아닌 나도 울컥할 만큼 마음을 울렸다.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에“노동권을 보

“노동권을 보장하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할 사법부의 잘못으로 형언하기 어려운 일 을 당한 여러분에게 사과드린다” 고 말할 사 법부가 존재할까.

장하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할 사법부의 잘못으로 형언하기 어려운 일을 당한 여러 분에게 사과드린다” 고 말할 사법부가 존재 할까.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희망 을 꿈꾸며 저 벽을 넘어야 할까. 이 절망의 장벽에 과연 끝은 있을까. 어

쩌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담을 넘어보겠다고 기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디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 아 넝쿨을 뻗어야 할지 모르는 세상이다. 사방이 온통 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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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포럼

2015년, 정치를 기획하자 홍원표 정책실장

2015년은 노동당에게 매우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이다. 올해 노동당은 새로운 대표단과 의결기구를 구성하게 된다. 2015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2016년부터 3년 연속 치러 지는 전국선거(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에 대응하는 당의 체력이 결정될 것이다. 새로 구성되는 대표단에 따라 2015년 이후 당의 진로가 결정되겠지만, 어떤 대표단 을 구성해도 노동당이 2015년을 우선적으로 실천해야 할 일 중 하나는‘정치’ 를 기획하는 일이다. 정당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말은 하나 마나 한 당연한 얘기다. 당연한 일을 굳이 지면을 통해 환기시키는 이유는 그만큼 당의 현실이 어렵기 때문이다. 2013년 전국위원회를 통해 노동당이 결정한 핵심 사업은 재창당, 지방선거 준비, 그리고 9대 핵심 사업이었다. 9대 핵 심 사업의 내용은 기관지 창간, 당원교육 강화, 홍보·미디어 사업, 당원배가 운동, 당 재정 확대 사업, 지역정책연구소 설립사업, 중앙연수원 설립 준비, 당 의원단 활동 및 지원 강화, 민생경제활동 등이다. 재창당 사업도 그렇고 주요 사업들 대부분 조직 정비·강화 사업이 었다. 2014년의 경우 상반기 사업은 지방선거 준비로 대체되었다. 2014년 하반기 사업은 조직 사업, 정치투쟁, 의정지원 사업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여전히 정책당대회 등 당 조직 정비 ·강화 사업이 주된 내용이며, 정치투쟁 사업의 정치개혁 투쟁을 제외하고는 주어진 의제 에 충실히 대응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조직 역량의 70%는 조직 유지에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라고는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당의 주요 사업은 지나치게 당 조직 정비·강화 사업에 치중돼 왔다. 2011년 독자통합 논의 이후 당 주요 정치인 및 활동가들의 집단 탈당, 2012년 대선 방침을 둘러싼 당내 갈등 등 당은 수년간 역량 유실과 끊임없는 이완으로 침체돼 왔기 때문에 조직 정비·강화를 위 정책포럼 79


한 노력을 불가피했고,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운동선수의 역량이 식단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당의 역량 역시 조직 사업만으로 복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은 정치를 위한

당은 정치를 위한 조직이고, 대중들에게

조직이고, 대중들에게 비전을 제시해야 할 책임

비전을 제시해야 할 책임을 갖는다. 따

을 갖는다. 따라서 선거라는 정해진 정치 일정

라서 선거라는 정해진 정치 일정이 없는 2015년, 노동당이 무엇보다 주력해야 하는 것은‘정치를 기획’ 하는 일이다.

이 없는 2015년, 노동당이 무엇보다 주력해야 하는 것은‘정치를 기획’ 하는 일이다. 이 글은 이러한 취지에서 지역과 중앙 차원 에서 2015년에 집중했으면 하는 몇 가지 사업을 제안하는 것이 목적이다. 아래에서 제시한 안들

은 일종의 예시다. 단순한 예시가 아니라 당에서 이미 수행한 경험이 있거나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지만, 집중적으로 실천에 옮기지 못한 것들이다. 또는 지난 정책당대회에 당원들이 참여하고 제안한 정책 사업 중 2015년 정세와 부합하리라고 판단하는 것들이다. 구체적 제안을 나열하는 것은 중앙당을 비롯해 각 당 부가 2015년 사업계획을 수립하면서 참조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2015년 지역 정치 사업을 위한 몇 가지 제안 흔히들 지방자치가 여전히 정치보다는 행정의 영역으로 인식될 정도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평가해 왔 다. 하지만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무상급식을 둘러싸고 의회와 대립하다 실패해 중도 사퇴했고,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진주의료원을 없애기 위해 의 회 날치기를 강행해야 했다. 오세훈 시장과 서울시의회의 대립은 광역의회 내 정치의 위상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경

흔히들 지방자치가 발전하지 못했다고 평가 해 왔다. 하지만 오세훈의 사퇴, 홍준표의

남도의회의 날치기는 역설적으로 의회의 역

의회 날치기는 지역 정치의 위상과 역할이

할이 그만큼 중요해졌음을 방증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해졌음을 보여준다.

다. 지역 정치는 더욱 활성화되고 있지만, 정작 지역을 강조했던 진보정치는 그만큼 지역 정치에 크게 집중해 오지 않았다. 노동당은 지난 지방선거에서 몇 가지 중요한, 하지만 소수정당이어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지역 정책 들을 제시한 바 있다. 또한 몇몇 지역에서는 의원 하나 없이 지역운동을 묶어내 조례를 제정하거나 지역 에서 의미있는 대안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2015년에는 이러한 정책 사업들을 당 조직 전체 사업으로 확장 하고, 없는 자원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 제안했던 지역 정책을 효율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80


주민발의로 방사능 급식 조례를 제정한 서울 구로구 (사진 : 구로구방사능안전급식지킴이)

■ 버스공영제 운동 대중교통은 계급과 환경, 그리고 지역경제와 복지 문제가 얽힌 의제다. 대중교통은 자가용-도로 중심 의 교통체계와 대립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에너지 문제와 직결된다. 대중교통은 주 이용자가 노동자 서 민이라는 점에서 계급적 이슈다. 교통 약자 이동권 보장은 대중교통의‘보편성’ 을 재정립하고 확대할 것 을 요구한다. 교통망 설계에 따른 지역 간 교류의 변화는 지역경제를 순환적 또는 위계적으로 만드는데 영향을 미친다. 기존의 자가용-도로 중심의 교통체계에서 벗어나 대중교통, 나아가 무상교통을 통한‘이 동의 자유’ 를 보장할 때 이는 다양한 사회적 권리를 강화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지역의 작은 변화로 큰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운동이다. 지역의 버스운영체계에 대한 모니터링, 공영제 전환 여론 형성, 지역 사정에 맞는 교통체계 개편안 등 을 마련하고 나아가 지역 공영버스 운영을 위한 조례 제정 및 예산 확보까지 이어지는 운동을 생각해 볼 수 있다.

■ 방사능 급식 조례 운동 방사능 급식 조례 운동은 이미 몇몇 지역에서 당이 주도하여 사업을 수행하였고 매우 큰 성과를 남기 기도 했다. 방사능 급식 조례 운동은 탈핵 문제와 안전 문제를 생활과 밀접한 의제로 연결시킴으로서 지 역 주민이 함께 할 유인을 높여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사업이다. 또한 이미 성과를 남긴 지역 정책포럼 81


사례를 당을 통해 유통시킴으로서 지역에서 사업화하기 용이하다는 장점도 있다.

■ 공공서비스 공단 설립 조례 제정 운동 고령화 사회가 진척되고 복지 수요가 늘어나면서 한국 사회에서도 사회서비스의 확대가 불가피하다. 하지만 현행 한국의 사회서비스 공급 체계는 전적으로 민간 시장에 의존하고 있고, 그 비용만 정부가 지 원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공급 방식 아래에서는 사회서비스 질 관리가 부실해지고 무엇보다 사 회서비스 제공 노동자의 처우가 열악해지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보육 서비스의 경우 단순히 보육료 지원 을 넘어 국공립 시설에 대한 요구가 존재하고 이를 위한 운동도 있어 왔지만, 장애인활동보조나 요양보호 사업의 경우 아직까지는 지원 수준(바우처 비용)에 대한 논란이 주를 이루고 공적 공급에 대한 요구는 크게 조직화되지 못했다. 공공서비스 공단 설립 조례 제정을 통해 지역 정부가 이러한 사회서비스 제공을 위해 공적 공급 기관 을 설립하게 될 경우 민간위탁에서 발생하는 업체 이윤 분만큼 절감 효과가 있어 이를 서비스 질 향상 또 는 종사자 임금 인상에 사용할 수 있다. 민간위탁에 따른 업체 이윤 분은 평균 전체 비용의 7~10퍼센트에 달한다. 반면 대다수 사회서비스의 경우 예산 또는 기금을 통해 비용을 지원하기 때문에 공단 운영에 소 요되는 지역 예산은 크게 소요되지 않는다.

2015년 중앙 정치 사업을 위한 몇 가지 제안 진보정치는 지역정치를 통해 당 활동의 근거지

진보정치는 지역정치를 통해 당 활동의

를 확대하는 것과 동시에, 중앙으로 집중된 전국

근거지를 확대하는 것과 동시에, 중앙

적 정치 이슈에 대한 대응과 주도를 통해 당의 정 치력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노동당이 2015년 전

으로 집중된 전국적 정치 이슈에 대한

국적 이슈로 주도했으면 하는 의제를 아래와 같이

대응과 주도를 통해 당의 정치력을 확

제안한다.

대해 나가야 한다.

■ 직접세 증세 운동 담배세가 결국 인상됐다. 박근혜 정부는 이를 금연 정책과 연동시키고 있지만, 실제로 이는 증세다. 지 난 11월호 정책포럼에서 주장한 것처럼, 최근 몇 년간 세입 감소가 지속됐다. 2012년에는 기금을 제외한 세수 부분에서 2.8조 원 적게 걷혔고, 2013년에는 8.5조 원이 덜 걷혔다. 2014년 세수 감소는 최소 10조, 최대 2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수가 부족한 이유는 수출-내수 간 불균형, 제조업-서비스업간의 불균형, 노동소득과 기업소득의 불 균형 때문인데, 이러한 불균형은 당분간 해소되기 어렵고, 현 정부는 해소하려는 의지 역시 갖고 있지 않 82


다. 따라서 2015년에도 세수 감소 문제는 지속될 것이다. 증세가 없다던 박근혜 정부가 꼼수 증세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당은 직접세 중심의 당론을 갖고 있다. 이러한 당론을 사회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시민사회와 노동계, 진보정치 세력들에게 적극적으로 증세를 위한 연대 구축을 제안하고 합의를 모아가야 한다.

■ 정치개혁 유권자 운동 지난 10월 헌법재판소는 인구 편차를 3대1 이하로 하는 현행 선거구 획정 기준이 위헌이라고 판결했 다. 이에 따라 2015년 12월 31일까지 선거법을 개정해 2016년 국회의원 총선부터 적용해야 할 상황이다. 노동당을 비롯해 진보진영은 오랫동안 비례대표 확대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개혁을 주장해 왔다. 비례 대표제의 확대는 투표를 통한 대표성을 보다 정확히 반영한다는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보수정당과의 선거연대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 공직 배출이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진보정치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 다. 하지만 실제 정치관계법을` 개정해야 할 당사자들이 바로 정치개혁의 대상인 지역구 기반 의원이라는 점에서 보수 정당의 정치관계법 개정에는 태생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진보진영의 의견 이 반영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정치관계법의 전면적이고 본질적 개혁을 끌어내기 위해 노동당은 진보정치 진영과 시민사회단체와 함께‘비례대표제 확대를 위한 유권자 운동’ 을 기획하고 연대를 확대하여 보수정 당을 압박해 진보정치에 유리한 정치개혁을 이뤄내도록 적극 개입해야 한다.

■ 연금 개악 저지를 넘어선 대안 제시 박근혜 정부는 개악된 국민연금을 기준으로 공무원 연금 개악을 시도하고 있다. 일단 공무원 연금 개 악 시도는 2014년을 넘길 것으로 예상되지만, 2015년 상반기에는 보다 적극적 공세가 이어질 것으로 보 인다. 노동계와 진보진영은 우선 공적 연금부터 강화하고 당사자가 포함된 사회적 대화기구를 수립해야 한 다고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공적 연금 강화에 대한 구체적 안이 마련되기 전까지 현상유 지의 입장으로 비춰져, 개악된 국민연금을 기준으로‘국민’ 과‘공무원’ 의 형평성을 문제 삼는 박근혜 정부 의 공세에 취약하다. 당은 조속히 현행 연금 제도가 갖고 있는 사각지대와 낮은 보장성 문제에 대한 대안을 중심으로 합리 적 연금 개혁안을 수립해 적극 대응하도록 해야 한다.

■ 비정규직 철폐 운동과 지역 주민 노동자 조직 운동 박근혜 정부는 11월에 발표하려던 비정규종합대책을 12월 중순으로 연기했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시 정책포럼 83


기까지 발표는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2015년 상반기로 연기될 것이란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다. 지금까지‘소문’ 으로 알려진 박 근혜 정부의 비정규종합대책의 주요 내용은 기간제를 더욱 고착 시키는‘중규직’도입, 기간제 고 용 제한 기간 연장, 파견직 허용 업종 확대 등이다. 사실상 비정규 직 오남용을 공식화하거나 더욱 확대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 는 셈이다. 이와 더불어 비정규직 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빌미로 정 규직 임금 체계와 고용안정을 공 격하고 있다. 노동당은 현 정부의 비정규직 확대 정책에 대해 단호한 반대와 더불어 비정규직 사용사유 제한 등을 전면 이슈화하고 진보진영 및 노동계와 연대 투쟁해 나가야 한다. 더불어 낮은 조직률로 사회적 비정규직 대량 해고에 맞선 씨앤엠 케이블 노동자들의 농성장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목소리를 갖지 못한 비정규직 노 동자를 조직하기 위해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만나는 노동자와의 접촉면을 넓혀야 한다. 예를 들어 최근 신현대 아파트 사건과 2015년 최저 임금 100% 적용을 앞두고 해고 대란의 위험에 처한 경비 노동자에 대한 지역 실태조사나 지역에서 늘상 마주치는 사회서비스 종사 노동자에 대한 조직화 지원과 연대 사업, 지역 내 알바 노동자 최저임금 등 노 동조건 상담을 통한 조직화 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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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자동차 중독 사회 어떻게 벗어날까 자동차를 사라고 부추기는 중앙정부 세금으로 주차장 지어주는 지방정부 김상철 서울시당 사무처장

90년대를 주름잡던 농담거리 중에‘티코 시리즈’ 가 있다. 빨간색 티코를‘깍두기’ , 하얀 색 티코를‘각설탕’ 이라 부르는 일은 애교에 속했고“삐삐를 진동으로 해두면 진동에 맞춰 차가 흔들린다” 랄지“티코가 과속하는 이유는 프라이드처럼 보일까봐” 와 같이 존재를 뒤흔 드는 농담도 성행했다. 그만큼 티코는 경차의 대명사였고 친근했고 무엇보다 많았다. 그런 데 이런 티코를 이제는 거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굳이 티코 뿐만 아니라 티코 같은 차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1.5층 높이에 앉아 보행자를 내려다 보는, SUV라 부르는 차들이 대세가 되었다. 자동차의 세계도 일종의 생태계라고 한다면 분명 중대한 변화가 있었던 셈이다. 하천에 송사리는 사라지고 메기만 가득 찬 상황이라고 할까. 하지만 황소개구리나 베스가 그렇듯 이 생태계의 변화는 인위적인 경우가 많다. 최근 이를 절실하게 느낀 계기가 있었다.

주차장 보급률이 낮아진다? 2015년 서울시 예산을 검토하는 토론회에서 교통정책 부분을 다루다가 생긴 일이다. 서 울시 교통본부 내 주차계획과는 매년 10개에서 20개 정도의 주택가 주차장 사업을 신규사 업에 반영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예산은 2014년 1,640억 원에서 2015년 1,816억 원으로 176억 원 증액되었다. 그런데 서울시의 중기재정계획을 보면, 주택가 주차장 확보율은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85


2013년에 100%이고 2014년에 100.7%, 2016년에는 101.8%까지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서울시 내에 있는 모든 차가 들어갈 수 있는 주차면수가 이미 확보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매년 10곳에서 20곳 정도의 주차장이 새로 만들어지고 기존 주차장을 확장하거나 유지·보수하는 데 2천억 원에 가까운 돈이 사용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물었다.“주차장 보급률을 보면 100%가 넘는데, 왜 지속적으로 주택가 주차장 수요가 발생하 는 거죠?”답은 두 가지로 나왔다. 하나는 지역간 불균형 이야기였다. 서울시내에 주차장 보급률이 70% 미만인 곳이 538개소에 달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500미터 반경을 기준으로 설정한 것이다. 아니 차를 주 차하는 사람들은 500미터 이상 걸으면 방전이라도 되는가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2017년이 되면 오히려 주차장 보급률이 90%대로 떨어진다” 고 말하는 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유인즉, 첫 번째는 주차장 면 적 기준이 커졌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주차장 규제 완화 탓이라고 한다. 2009년에 지정 고시된 서울시 보문역 주변 주차장완화구역 현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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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정부는‘주차장법 시행규칙’ 을 개정해 기존 주차너비 2.3미터를 2.5미터로 넓혔다. 기존 주차 장 13개가 12개로 변한 셈이다. 이는 중대형차의 비중이 2000년에는 전체 차종 중 40.3%에 불과했지만 2011년 현재 81.9%로 급격하게 늘어난 탓이다. 생각해보라, 불과 10년 남짓한 시간 동안 국토의 면적은 변함없는데 자동차의 크기만 커진 것이다. 당연히 주차장은 비좁고 주차난은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단순히 주차면적의 변화만이라면 다행이지만 여기에 한 가지가 더해진다. 원래‘주택법’ 에는 신축주택 에 대한 주차장 기준을 두고 있으며 정부는 이를‘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 을 통해서 관리한다. 이에 따르면 공동주택 건설시 세대당 주차대수는 1대 이상이 되어야 하지만 전용면적이 작은 세대의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이 기준을 낮춰서 적용했다. 하지만 이 역시도 2010년 도시형 생활주택에 대한 주차장 기준을 완화해줌으로써 사실상 노면주차를 방치했다. 대표적인 예로, 도시형 생활주택 인근 노면을 활용할 수 있 는 주차면수가 5대였는데 이를 8대까지 인정해주기로 한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이면도로의 한 축을 도시 형 생활주택 건설업자의 주차장으로 떼어주어 건축비를 아껴준 것이다. 게다가 서울시만 놓고 보더라도 이 조항을 마구잡이로 적용해서 대학가 주변이나 지하철 역 주변의 구역 자체를‘주차장 완화구역’ 으로 지정하여 고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지정된 구역은 세대당 1개의 주차장 기준을 적용받지 않고 건축허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기준이 고스란히 공용주차장의 부족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건설업자의 주택건설 비용을 줄여주기 위해 주차장 기준을 완화시켜주고 나중에 입주민들의 주차난이 발

건설업자의 주택건설 비용을 줄여주기

생하면 이를 근거로 주차장을 짓는 것이다. 이

위해 주차장 기준을 완화시켜주고 나중

런 행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통해서 널리 알 려진 바,‘재정을 통한 부담의 전가’ 라고 부르기 도 한다. 여기에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도 한 몫

에 입주민들의 주차난이 발생하면 이를 근거로 주차장을 짓는 것이다.

을 하는데, 지난 7월 서울시가 SH공사가 매입 하는 주택에 대해서는 주차장 설치기준을 기존의 가구당 0.6대에서 0.3대로 낮춰서 공급량을 늘리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자동차 오래 타면 매국이다 이런 어이없는 일은 앞에서 슬쩍 언급한 중대형차량의 비율이 급격히 늘어난 과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 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2009년에 경기활성화를 위한 조치 중 하나로 시행된‘노후차량 세제감면 제도’ 이 다.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2009년 한 해 동안 1999년 이전의 차를 폐차시키고 새 차를 사면 개별소비세, 취등록세를 70%까지 감면해줬다. 금액으로만 따지면 최대 250만 원에 달했다. 문제는 감면혜택이 세제 감면인 탓에 그동안 세부담이 컸던 중대형차로 신규 수요가 집중되었다는 점이다.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87


실제로 2009년 5월부터 11월까지 수혜 차량은 총 36만5천 대에 달했다. 같은 기간 가장 많이 팔린 차 종은 소나타로 5만2천 대가 팔렸고, 쏘렌토가 1만5천 대로 다음을 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미 세제감면 이 적용되던 경차의 경우에는 전혀 혜택이 없었고 클릭이나 베르나 등 소형차 역시 지원액은 매우 미미해 사실상 중대형차 위주의 지원 대책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EU가 대형차에 대한 환경규제를 강화하던 시점 이었던 것을 고려해보면, 이명박 정부는 단박에 우리나라 자동차 회사의 제고를‘세금지원’ 으로 해소시켜 준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시기에 등장한 주장들이 모두‘환경보호’ 를 근거로 들고 나왔다는 점인데, 말인 즉 노후차량은 연비가 낮고 이에 따라 나쁜 배기가스 배출이 많으니 신차로 바꾸면 환경에도 좋다는 말이 되 겠다. 그 말이 맞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기름을 덜 먹는 경차를 중대형차로 바꾸도록 한 일이 그렇게 친 환경적인지도 모르겠지만, 막대한 철제 쓰레기를 양산하는 폐차 종용이 친환경이라는 구호로 등장한 것 부터가 놀랍다. 그러니까 과거에서는 미담이었던 자동차 오래타기가 환경오염의 주범이 되었을 뿐만 아 니라, 새 차로 빨리 빨리 교체할수록 세금으로 지원해주는 이상한‘새 차 사기’지원제도가 만들어진 것이 다. 원래 상반기에만 실시하기로 했던 제도인데 판매량이 뚝 떨어지자 다시 연말까지로 연장했다. 현대기아차 승용차(내수) 판매증가율(%)

새사연, 현대기아차, 세제혜택 수익 사회 환원해야, 2009. 12.22.

경차를 위한 나라는 없다 안전성이나 실제 연비를 고려하면 경차를 굳이 친환경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88


하지만 경차를 포함한 소형차가 한정되어 있는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이라는 것에는 큰 의문 을 달기 힘들다. 앞서 살펴본 대로 주차장 면적을 넓히는 문제만 봐도 그렇다. 무엇보다 2000년대 초기에 잠깐 있었던 경차 진흥정책이 급격하게 중대형차 보급정책으로 전환된 것에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정책이 미치는 외부효과를 누가 부담하고 있는지 역시 중요하다. 2011년부터 기존에 경차 구입시 면제했 던 취등록세를 부과하기 시작했으며, 같은 시기에 고속도로 및 공영주차장 할인혜택 역시 기존의 50%에 서 30%로 축소되었다. 더구나 2012년부터 발표된 한미FTA에 의해 기존 2000cc 초과차량에 10%를 물리 던 특별소비세를 2015년부터 5%로 낮추게 되었다. 이는 1000cc 초과 차량과 같은 비율이다. 한미FTA 자동차 협상결과 중 세제 분야(2012년)

그래서 90년대 티코 열풍으로 잠깐 회자되었던 경차는 SUV를 필두로 하는 중대형 차량에 완전히 밀 려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2014년 현재 우리나라 인구는 5천만 명이고, 이중 면허증이 있는 인구는 3천만 명이다. 그리고 작년 말 현재 우리나라 등록차량대수는 2천만 대를 넘어섰다. 바야흐로 자동차 중독사회 인 셈인데 이를 단순히 경차를 무시하는 세태 탓으로만 돌리기엔 정부의 정책들이 노골적으로 뻔히 보인 다.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89


연속기획

한국 대학 체제의 형성①

일제 강점기와 경성제국대학 김예찬 서울 강남서초 당원

‘신민’만드는 교육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를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것만으로 는 제국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833년, 영국은 머콜리의‘교육각서’ 를 계기로 식민지에 대해 교육을 통한 헤게모니 통치를 시작한다. 이때 교육은 식민모국의 언어 를 통해 토착민들에게 계몽주의적 문화와 가치를 체득시켜, 제국에 동조하는‘신민’ 을 창출하기 위한 도구로 중요한 역할을 부여 받게 된다. 그러나 이미 수백 년의 교류가 있었던 조선을 대상으로 한 일본 제국주의의 경우, ‘문명화된 백인이 열등한 유색인을 계몽한다’ 라는 서구 제국주의의 프레임으로 식민통 치를 정당화하긴 어려웠다. 따라서 일본의‘동화주의’전략은 문명과 비문명이라는 도 식이 아니라 서구 열강과의 대비 속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대동아’ 로 토착민들을 일본민족으로 편입시키려 했던 것이었다. 그러한 전략 속에서 전체 조선인을 대상으로 보통교육을 실시하여, 일본 역사와 문화, 언어를 정착시켜 토착 문화와 전통을 파괴하 는 것이 교육 정책의 목표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교육은 보통교육의 정착과 확산이 그 제일 목적이었다.1) 원래 1911년 발표한‘1차 조선교육령’ 은‘국민성 함양’ 을 위한 보통교육에 집중한다 는 것, 인문교육이 아닌 실용기술 교육을 실시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조선인들의 ‘교육열’ 을 억압하는 교육정책은 결국 성공할 수 없었고, 1915년 이후에는 고등교육 억압 방침을 일부 수정하여 중등, 고등 부문의 사립 교육기관(주로 미션스쿨)을 일부 허 용하며 적절하게 식민교육체제로 포섭하려 했다.

1) 정준영, <경성제국대학의 유산 - 일본의 식민교육체제와 한국의 고등교육>, 현대일본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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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건물. 이후 서울대 의대 건물로 사용되었다.

제국대학의 탄생 그러다가 총독부는 1919년 3.1운동의 충격에 대응하여 기존의 식민통치 기조를 재검토했다. 교육부문 에서는 기존의‘우민화’방침을 수정하여 강력한 동화주의 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그러한 견지에 서 1922년‘2차 조선교육령’ 을 발표했는데, 기본원칙이 바로 조선의 학제와 일본의 학제를 일치시킨다는 ‘내지준거주의’ 였다. 이는 조선인들의 고등교육 열기를 식민교육체제로 흡수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급진적인‘동화’ 를 위해 제국대학을 설치한다는 뜻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24년 종합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을 세우게 된다.2) 1924년 설립되어, 1926년 법문학부 와 의학부로 공식 출발한 경성제대는 한해 입학생이 160명에 불과한 작은 규모의 대학이었다. 일본에서 의‘제국대학’ 은 후발제국주의 국가로서 일본이 서구의 학문 지식과 과학기술을 체계적으로 수용하기 위 해 설치한 특권적 엘리트기관이었다. 특히 관료양성소로서 기능했는데, 메이지정부 시기 제국대학 법학 부 졸업생은 무시험으로 고등관료로 임용될 수 있는 특전이 부여되었을 정도였다. 이러한 제국대학의 특 징은 졸업생들 대다수가 관료로 진출하는 결과를 낳아, 상대적으로 연구자 역량이 약화되는 상황을 초래 하기도 했다. 일본정부는 1893년‘강좌제’ 를 도입하여, 국가적으로 연구 지원할 필요가 있는 분야의 강좌 교수에 대한 처우를 크게 개선함으로써‘관학’아카데미즘을 확립했다. 제국대학의 강좌로 자리 잡느냐의 여부가 분과학문으로서 존립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으며, 국가의 필요성에 의한 학문 연구라는 것이 당연

2) 도쿄, 쿄도, 큐슈, 토호쿠, 홋카이도에 이어 여섯 번째 제국대학으로 설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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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분위기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관료양성소에서 진보사상에 심취하다 한편 1920년대 초반,‘다이쇼 데모크라시’시기의 제국대학에서는 강력한 교양주의와 비판적 학풍이 유행했다. 특권적 교육 여건을 가지고, 관료 코스가 예비되어 있던 제대생들이 학창 시절만큼은 진보사상 에 심취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일본 국가교육체제에서, 제국대학에 진학하기 위 해 일종의 예비 대학이었던 3년제 구제고등학교에 입학해야만 했던 것과 연관되어 있다. 미리 제국대학 진학이 보장된 구제고등학교 학생들은 외국어 중심의 교육을 받으면서, 교양 사상에 심취할 시간적 여유 가 보장되었다. 관료양성소로서의 제국대학의 기능과 대학사회의 교양주의 사이의 역설은 이후 일본의 전공투 운동이나 한국의 학생운동에 이르기까지‘지식인’ 으로서 대학생들의 상을 설정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경성제국대학 역시 이러한 일본‘내지’제국대학의 분위기에서 영향 받았는데, 특히 경성제대 교수 상 당수가 식민통치와 별다른 연관 없이, 단지‘제국대학 교수’ 가 되기 위해 건너온 이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이들은 경성제대가 가진‘식민지대학’ 의 역할을 비판하고,‘제국대학’특유의 교양주의와 관료 양성 기능을 강조했다. 그러나 경성제대의 교양주의 문화는 식민사회와의 접촉 속에서 자생적으로 형성 되지 못하고, 단순히 일본 조류를 수입하는 수준에 그쳤다. 조선인 학생들에게 교양주의는 식민지 현실을 성찰하는 이념적 수단이 되지 못했고, 그저 제국대학 학생이라는 엘리트 지위를 외면적으로 드러내는 표 식의 의미일 뿐이었다. 조선인 학생들의 엘리트의식은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을 적극적으로 극복하지 못 하고‘서구문화 선호’ 라는 지극히 우회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식민지 대학’ 으로서의 경성제대 경성제대는 법문학부와 의학부, 2개의 학부를 설치했다. 농학부, 이학부, 공학부 등은 설치하지 않았 고, 보통 나뉘어 있는 법학부와 문학부를 합쳐 법문학부로 운영했다. 총독부는 이렇게 학부의 규모를 작 게 설정한 이유로 경비절감을 들었다. 법문학부는 조선인들의‘법학 지향성’때문에 설치하지 않으면 곤 란하고, 의학부는 조선 내 의사의 부족을 극복하고 한의학을 연구하기 위해 불가결하기 때문에 두 개 학 부만 설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식민지 사회의 왜곡된 고용 구조라는 요인이 있었다. 총독 부에게 필요한 인재는 조선의 경제를 발전시킬 기술 인력이 아니라, 식민지 통치기구에 충원할 관료들이 었던 것이다.3)

1) 정준영, <경성제국대학의 유산 - 일본의 식민교육체제와 한국의 고등교육>, 현대일본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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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경성제대가 식민지 연구를 특화시켰다는 점이다. 조선 연구(조선어문학, 조선 사학, 조선 약초 및 한약 연구)를 정규 학문분야로 제도화시켰고, 다른 일반 강좌들도 조선과 관련된 주제를

활발히 연구했다. 중국 관련 강좌도 상대적으로 많았다. 경성제대는 총독부와 일본군 등 식민 당국의 전 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실증적 연구방법론으로 무장하여 식민지 조선에 관한 학술지식을 독점했다. 이 들은 실증적 과학관에 입각한 치밀한 연구로 민족주의 담론에 입각했던 조선인 엘리트들을 압도할 수 있 었다. 지식 생산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경성제대는 제국주의 지배체제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 기반이었 다. 경성제대는 일본 내지의 제국대학과 대조적으로 그 재정을 조선총독부에 의지하였다. 재정 의존의 문 제를 극복하기 위해 경성제대는 1930년대부터 시작된‘대륙진출’ 에 적극적으로 부응하게 된다. 경성제대 는‘만몽연구회’ 를 구성, 대륙진출에 있어서 상당한 성과를 내었고 다른 제국대학에 비해서도 높은 취업 률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30년대 이후 일본이 총동원체제에 들어가면서, 경성제대 역시‘식민지 대학’ 의 성격이 강화되어 많은 교수들이 대학을 떠나게 되는 상황이 오기도 했다.

경성제국대학이 남긴 유산 해방 이후 경성제대의 일본인 교직원들은 학교를 떠났고, 2/3을 차지했던 일본인 학생 역시 학교를 떠 났다. 또, 해방정국의 정치적 대립 속에서 경성제대 출신 서울대 인사는 그리 많이 남지 않게 된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최초의 대학’ 으로서 경성제국대학이 남긴 유산들은 그리 적지 않다. 1) 사회적 요구로부터 유리되어 철저하게 국가 이데올로기와 결합한 형태, 2) 학문 연구나 교양 교육보다는 ‘고시’ 로 대표되는 관료 배출의 공급처 성격, 3) 정부의 교육 정책에 대한 강한 종속성 등, 이후에도 확인 할 수 있는 한국 대학 체제의 특징들이 이미 경성제대에서부터 나타났다. 한편 경성제국대학뿐만 아니라 오늘날 여러 사립대학들의 원형이 되는 사립 전문학교들 역시 엄밀히 말하면 최종교육 기관의 역할을 했다. 대다수 조선인들은 고등보통학교 진학도 어려웠으며, 유일한 대학 이었던 경성제국대학 역시 극소수만 진학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적 여력이 있는 엘리 트들은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조선에 남은 이들은 보성전문이나 연희전문 같은 전문학교에 입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시기 대학과 전문학교는 동일한 고등교육 단계의 서로 다른 계통 이라기보다는, 대학과 전문학교라는 위계적 서열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제국대학 → 관립 전문학교 → 사 립 전문학교라는 서열구조 아래서, 전문학교 졸업생들은 관료 체제의 하위 그룹을 형성하거나 전문직으 로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사립 전문학교들은 자연스럽게 사립대학으로 전환되어, 오늘날의 대학 체제의 원형을 만들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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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좌파 이웃 좌파 ⑫

포데모스, 21세기형 정치조직의 등장인가? 장석준 부대표

최근 우리말로 번역된, 20세기 유럽 사회주의 역사를 다룬 대작《사회주의 100년》(황소 걸음)의 서문에서 저자인 영국 역사학자 도널드 서순은 이렇게 말한다.“좌파의 전망은 암울

하다. 좌파 정당들은 수세에 몰린 채 새로운 비전을 거의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방어 전략 은 일시적일 때만 통한다. 정치의 핵심은 이기는 것이지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 ( 주의 100년》상권, 32쪽) 그러나 지금 적어도 유럽의 두 나라만은 이 문장에 들어맞지 않는

다. 그리스와 스페인이다. 금융 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그리스에서는 급진좌파연합(SYRIZA, 이하‘시리자’ )이 여론 조사에서 계속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조기 총선이 실시된다면, 집권당이 될 가능성이 높다. 외채 상환을 놓고 유럽 금융 세력과 재협상을 벌이겠다는 이 정당이 집권하면 어떤 역사적 국면이 열릴지 모두들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또 한 나라가 있다.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금융 위기의 한복판에 있는 스페인이 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창당한 지 1년도 안된 신진 정치 세력이 기성 양대 정당을 누르며 지지율 1위 정당으로 떠오르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우리는 할 수 있다” 는뜻 의‘포데모스(PODEMOS, 뒷부분은‘데모스(민民)’ 를 연상시키려는 의도가 있다)’ 라는 낯선 이름 의 정치조직이 그 주인공이다.

흔들리는 스페인 사회 - 포데모스 약진의 배경 유럽의회 선거 결과를 짚은 2014년 7월호의 글“자본주의 ( 위기 - 대중운동 = 극우파 약진” ) 에서 포데모스의 약진을 간단히 소개한 바 있다. 한데 이들을 제대로 알려면, 우선 요즘 스 94


유럽의회 선거에서 포데모스 득표율의 전국적 분포-마드리드에서는 11퍼센트를 기록했다.(좌) 포데모스의 유럽의회 선거 포스터(우)

페인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스페인은 1970년대 말에 독재 체제에서 민주 국가로 이행했다. 이때부터 지 금까지 스페인 정치를 지배해온 것은 좌우 양대 정당, 즉 인민당(PP)과 사회주의노동자당(PSOE, 사회민주 주의 정당)이다. 이 두 정당이 유럽연합의 북쪽 부자 나라들에 값싼 하청노동을 제공하는 스페인 자본주의

를 이끌어왔다. 공산당(PCE)이 정당연합인‘연합좌파(IU)’ 를 결성해 이러한 양당 구도에 도전하기도 했지 만, 이제까지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2008년에 금융 위기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 이 단단한 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때는 금융 산업의 모범처럼 칭송받던 스페인의 거대 은행들이 무너졌다. PP 소속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가 이 끄는 우파 정부는, 우리가 이미 외환위기 때 경험했던 것과 똑같이, 공적 자금으로 은행들을 구제했다. 긴 축 정책을 통해 그 부담을 서민들에게 전가하면서 말이다. 은행 대출을 갚지 못한다는 이유로 50만 명이 집을 잃었다. 공식 실업률은 25퍼센트로 치솟았고, 25세 미만의 젊은 세대에서는 아예 절반이 실업자다. 이것만으로도 분노가 끓어오르기에 충분한데, 여기에 기름을 붓는 사건까지 터졌다. 왕실과 PP 정치 인들의 부정부패가 폭로된 것이다. 주로 대형 국책 사업이나 관급 계약 비리를 통한 공금 횡령이었다. 수 백 명의 정치인들이 기소됐고, 가뜩이나 긴축 정책으로 인심을 잃던 라호이 정부의 지지율은 곤두박질쳤 다. 한데 그렇다고 해서 제1야당인 PSOE가 반사 이익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PSOE 역시 이 당을 지지하 는 노총(UGT)과 함께 비리에 연루돼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기성‘정치’ 를 대변하는 두 당이 모두 불 신의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물론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요즘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스페인이 유독 다른 점은 이런 기성 체제에 대한 분노가 극우파 지지가 아니라 좌파 성향의 사회운동으로 폭발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도 2011년부터 수도 마드리드의 푸에르타 델 솔 광장을 점거하고 있는 청년들의‘분노한 자들 운동’ (5월 15일에 점거가 시작됐기 때문에‘5월 15일 운동’ 이라고도 불린다)이 있다. 전 세계에“지금 당장 진짜 민주주의

를!” ,“1퍼센트 대 99퍼센트”등의 구호를 유행시킨 바로 그 운동이다. 먼 좌파 이웃 좌파 95


이들만이 아니다.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2백만 실업자에게 최저 소득을 보장하라는 운동도 있고, 보 건, 교육 등 공공 서비스의 예산 삭감에 반대하는 운동도 있다. 또한 혈세를 통한 은행 구제에 반대하는 ‘존엄을 지키는 행진’ 도 전개되고 있다. 왕실 비리가 드러난 뒤에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하자 는 제헌의회 소집 운동도 시작됐다. 민주화 이후 처음인 이러한 대중운동의 르네상스 속에서 새로운 정치 실험이 태동한 것이다.

누가‘스페인의 시리자’ 가 될 것인가 처음에는 IU가 이러한 분위기의 수혜자가 될 것처럼 보였다. IU가‘스페인의 시리자’ 가 될 거라고들 했다. 실제로 이제껏 5퍼센트 안팎에 머물던 IU의 지지율이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10퍼센트 중반대로 상승하기도 했다. 그러나 IU와 최근의 사회운동, 특히 분노한 자들 운동 사이에는 차이와 긴장도 존재한다. 새로 운동에 참여한 젊은 세대는 민주화 이후에 굳어진 IU의 정치 문화(우리로 치면‘운동권 문화’ )를 낯설어 했다. 이들 에게 IU는 비록 가두 시위나 점거 투쟁에 함께 하기는 하지만 양대 정당과 마찬가지인‘기성’정치세력으 로 보였다. 특히 비리 정치인 명단에 몇몇 IU 소속 인사도 이름을 올린 게 결정적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올해 1월, 아예 새로운 정치조직을 만들자는 호소문“한 ( 걸음을 내딛자 :‘분노’ 를 넘어 ‘정치의 변화’ 로” )이 발표됐다. 이 호소문을 주도한 것은 두 세력이다. 하나는 마드리드 콤풀텐세 대학의 좌

파 교수들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중남미 좌파 정부의 정책 자문

포데모스의 얼굴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좌), 유럽의회 선거운동 중인 포데모스와 이글레시아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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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으로 활동하면서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 사회주의 혁명 등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중 한 명이 포데모스 후보 명부 제1번으로 유럽의원에 당선돼 당의 간판 역할을 하고 있는 파블로 이 글레시아스다. 이글레시아스는 젊은 경제학 교수일 뿐만 아니라 유명 방송인이기도 하다. 그는 인터넷 방 송이나 케이블 TV의 토론 프로그램에서 사회운동의 입장을 대변하다가 공중파에까지 진출해 일약 스타 가 됐다. 호소문의 또 다른 한 축은 트로츠키주의 성향(제4인터내셔널 통합서기국 소속) 정파인‘반자본주의 좌파 (IA)’ 다. IA는 IU가 지방선거 등에서 PSOE와 전술적 연대를 하는 것을 비판하며 그간 IU에 참여하지 않

고 있었다. 이들은 IU와는 별도로 새로운 급진좌파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호소문에 동참했다. 호소문에 동의한 이들이 결성한 느슨한 전국적 네트워크가 바로 포데모스다. 유럽의회 선거 전에는 사 실 아직 내부 조직 구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IU와 선거연합을 맺을 가능성을 타진하 기도 했다. 그러나 대중 참여 예비 경선(오픈 프라이머리)을 통해 후보를 선출하자는 포데모스의 제안을 IU 가 반대하면서 선거연합은 무산됐다. 포데모스가 예비 경선을 대중 참여의 한 시도로 본 반면 IU는“예비 경선은 미국의 발명품” (IU 사무총장 카요 라라)이라서 좌파정당에는 맞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IU로 대표되 는 구좌파와 새 세대 사회운동 사이의 시각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아무튼 유럽의회 선거에서 IU는 10퍼센트를 득표해 6명의 당선자를 냈고 포데모스는 8퍼센트 가까이 (125만 명) 득표해 5명을 당선시켰다. 이 결과만 놓고 보면 IU가 약간 앞선 셈이다. 그러나 이미 이때부터

세인의 이목은 온통 포데모스 쪽으로 향했다. 창당한 지 129일 만에 주요 정치세력 중 하나로 우뚝 선 것 은 누가 봐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진짜 파란은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포데모스 열풍은 선거 이후에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좌파 대 우파’ 가 아닌‘민중 대 특권층’ 의틀 포데모스의 실질적 창당은 유럽의회 선거 이후에 비로소 본격화됐다. 당원이 급증해서 현재 20만을 넘 어섰다. 이는 PSOE 당원 수보다 더 많은 수치다. 이 중 절반이 인터넷(주로 페이스북)으로 가입한 당원이 다. 또한 각 지역에 기존 정당의 지역조직에 해당하는‘서클’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주의 서클에서 영향 받은) 들이 조직돼서 현재는 900여 개에 달한다. 이들 서클은 별도의 대의 기구 없이 모든 당원이 참여하는‘시 민 총회’ 를 통해 운영된다. 제2창당 작업은 10월에 마드리드에서 열린‘전국 시민 총회’ (대회명은“그래, 우리는 할 수 있다” 였다)로 한 매듭을 지었다. 이 총회를 준비하기 위해 한 달 전인 9월에 포데모스의 정책 지향, 조직 구조, 행동 원 칙에 대한 여러 입장이 문서로 제출됐다(제출자만 100여 팀). 온라인을 포함해 15만 명이 이들 문서에 대한 토론에 참여했고, 전국 시민 총회에는 8천여 명이 참석했다. 총회 토론 과정에서 이글레시아스를 중심으로 한 다수파(80퍼센트 넘는 압도적 지지)와 IA를 중심으로 먼 좌파 이웃 좌파 97


포데모스 지역 서클의 시민 총회(옥내)

한 소수파(12퍼센트의 지지) 사이의 격렬한 논쟁도 있었지만, 아무튼 이를 통해 중요한 정책 및 조직 원칙에 도 합의하고 집행부도 꾸렸다. 이때 합의한 원칙 중에는 포데모스의 당직자, 공직자는 숙련 노동자 평균 임금만큼의 급여만 받는다는 것도 있고, 포데모스 당원은 최대 8년만 공직을 맡을 수 있으며 이후 10년간 은 법인 이사나 감사를 맡을 수 없다는 것도 있다. 물론 공직자 소환제도 있다. 뜨거운 반부패 정치개혁 여 론에 답하는 결정들이다. 전국 시민 총회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포데모스는 일약 최대 지지 정당으로 부상했다. 포데모스의 지지율이 27.7퍼센트에 이르러 PP, PSOE를 모두 제친 것이다. 분석에 따르면, 포데모스 지지자 중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PSOE 지지에서 이동한 유권자들이라고 한다. 이와 비슷한 규모를 보이는 게 그간 선거에 불참했던 정치 실망층의 지지다. 물론 한때 10퍼센트가 넘어섰던 IU 지지층 중에서도 많은 수가 포데모스 지지로 돌아섰다. 이러한 믿기 힘든 돌풍을 낳은 요인은 도대체 무엇인가? 스페인 주류 언론은 주로 이글레시아스의 개 인적 인기를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글레시아스가 중남미의 포퓰리즘을 유럽에 들여오려 한다고,‘스페인 판 차베스’ 가 되려 한다고 비난한다. 반면 IA를 비롯한 급진 좌파는 사회운동과 결합된 서클들의 역할에 주목한다. 포데모스 실험이 사회운동의 구조를 정치조직에 그대로 반영하는‘운동 정당’ 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98


유럽의회 선거운동 중에 직접 현수막을 만드는 포데모스 당원들

모두 나름 일리 있는 지적들이다. 그러나 이들 요소와 결합된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포데 모스가 기성 좌파에게 익숙한 틀을 넘어 정치적 대립과 동맹의 새로운 틀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포데모스 는‘좌파 대 우파’대신‘낡은 정치 대 새 정치’ ,‘민중 대 특권층’ 의 구도를 강조한다. 그러면서‘좌파 연 합’ 이 아니라‘민중(서민) 연합’ 을 만들겠다고 천명한다. 덕분에 포데모스는 IU와는 달리 PSOE 왼쪽 정치 공간에 갇히지 않고 곧바로 스페인 정치의 중심을 새롭게 재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접근법은 효과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고 반론을 펼 수도 있다. 또한 창당한 지 몇 개월 안 된 정치 세력을 놓고 너무 커다란 의미 부여를 하는 것 아니냐고 의문을 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 구하고 포데모스 현상이 미래 좌파 정치의 모색에 아주 중요한 참고 사례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당장 이탈리아하고 비교해보자. 이탈리아에서는 기성 정치에 대한 불만이 코미디언 베페 그릴로가 이 끄는‘5성 운동’ 의 모호한 선동 정치에 포획돼 있다. 아니, 이탈리아는 오히려 낫다. 요즘 많은 유럽 국가 들(스웨덴까지도!)에서는 극우파가 이러한 정치 혐오를 부추겨 지지를 넓히고 있다. 그런데 스페인에서는 이런 대중 정서가 포데모스에 의해 변혁 정치의 갱생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포데모스의‘정치 혁명’ 은 먼 미래의 목표나 기대만은 아니다. 이들의 등장만으로 스페인 정치 전반이 바뀌고 있다. 예비 경선에 반대하던 IU는 뒤늦게 이 제도를 받아들였고 분노한 자들 운동을 통해 성장한 청년 세대(28세의 알베르토 가르손 의원이 그 대표적 인물) 중심으로 집행부를 교체하려 하고 있다. PSOE도 대중 참여 경선으로 젊은 사무총장(1972년생인 페드로 산체스)을 선출했다. 포데모스의‘정치 혁 명’ 은 이미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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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전태일 열사 정신을 잊지 말자 전태일 열사 44주기를 맞이하며 김승호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 대표

해마다‘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 가 열리고 있지만, 그 열기와 긴장감은 해가 갈수록 약 해지고 있다. 사람이든, 조직이든, 심지어 하나의 국가나 사회 체제조차도 세월이 지나면 관성화되고 그 ˇ

러다가 쇠퇴하기 마련이다. 다만 그 주체들이 자신의 존재 이유(raison d'etre)를“잊지 않고”계속 되새기 고 이를 바탕으로 부단히 자신을 혁신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를 더욱 높게 실현하는 것을 통해서 그런 관성화와 쇠퇴를 극복할 수 있다. 한국 국가체제와 정치조직도 그런‘관성화’ 의 지점에 도달해 있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 박근혜 정권은 국가개조를 입에 올렸다. 또 집권 수구보수 정당은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당명을‘새’ 누리당으로 고치더 니, 최근에는 한술 더 떠‘보수혁신’ 을 떠들고 있다. 한데, 그에 못지않게 관성화된 야당은 자신들이 관성 화되어 있다는 것조차 잘 모르고 있다.

진보의 관성화 마찬가지로 관성화되어 있는 것이 노동운동과

마찬가지로 관성화되어 있는 것이 노동 운동과 진보운동이다. 자본주의는 더욱 발달했고 그 결과 지금 급격히 쇠퇴하고

진보운동이다. 지금의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은 소

있다. 그런데도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은

련·동구 사회주의가 붕괴한 이후 그 충격 속에서

이런 현실 변화에 대해 둔감하다.

패배주의적으로 선택된 패러다임이다. 그 패러다 임은 1993년에서 95년 사이에 한국의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운동에 도입, 정착되었다. 그로부터 시간적으 로 벌써 20년이 지났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비해 세계와 한국사회의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조건이 현저하게 변했다. 자본주의는 더욱 발달했고 그 결과 지금 급격히 쇠퇴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노동운 동과 진보운동은 이런 현실 변화에 대해 매우 둔감하다. 기존의 운동 패러다임을 가지고 좀 더 열심히 하 면 계속 전진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아니면 낡은 운동을 혁신하자면서 엉뚱한 길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 사회는 지난 20년 사이에 전면적으로 자본주의화 되었다. 1990년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를 반자 본주의 사회라고 규정하는 조류가 있었다. 당시에는 전체 인구가 4천3백만 명이고, 노동자가 1천1백만 100


명, 농민이 3백2십만 명이었다. 농민과 도시의 자영업자를 합하면 7백만 명을 넘었다. 즉 경제활동인구 중 비(非)노동자 수가 노동자 수와 엇비슷했다. 그러므로 반자본주의라는 인식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2013년 현재 한국의 인구는 5천만 명이고, 노동자가 2천만 명에 이른다. 그러나 농민은 1백5십만 명에 지 나지 않고, 농민과 도시의 자영업자를 합해도 7백만 명에 미치지 못한다. 즉 농민은 반 이상 감소했고 노 동자는 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제 한국 사회는 완전히 도시화됐고 노동자가 경제활동인구의 4/5가 되었 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 사회를 반자본주의 사회라고 규정하는 것은 명백히 시대에 뒤떨어진 인식이다. 따라서 진보운동은 이제 낡은 인식을 바로잡고 노동계급 중심의 운동 이념과 노선을 가지고 나아가지 않 으면 안 된다. 노동자와 농민, 도시 소시민들과의 동맹이 여전히 필요하지만 진보운동의 주력은 노동계급 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막연하게 각계각층의 민중이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각계각 층의 민중이 연합하는 모양이 되어야 한다. 더불어 이제 노동계급이 진보운동 안에서 이념적으로나 실천 적으로나 확실하게 영도(領導)성을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 학생이나 청년이 자주파, 평등파 하는 소자산 가 이념으로 노동자를 이끌던 시대는 지났다. 반대로 이제 노동계급이 자신의 인간해방 이념으로써 청년 학생과 각계각층의 민중을 이끌고 나가야 한다.

노동운동은 계급해방운동 진보운동이 이렇게 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노동운동이 크게 변해야만 한다. 노동운동은 지금 조합 주의에 갇혀 있다. 이런 조합주의 운동은 계급적 노동운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그런데도 조합주의를 극복하는 노동운동의 자기혁신 문제는 혁신이라는 말이 식상할 정도로 답보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몇 년 전 진보정치운동 안에서 조합주의 극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에, 구체적으로 민주노총에 의 지하는 관계를 청산하자는 조류가 혁신의 이름으로 출현했다. 이렇게 거꾸로 된 방향으로 혁신(?)함으로 써 그 진보정치 조류는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망각했고 그 결과 생명력을 잃었다. 이렇게 노동운동은 여전히 자신이 누구를 대표하는지, 조합원을 대표하는지 노동계급을 대표하는지, 분간하지 못하고 있다. 계급적 노동운동은 조합원의 이해보다 노동계급의 이해를 우선적으로 대표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전투적으로 싸워도 그 투쟁은 전투적 경제주의나 전투적 실리주의에 머물 뿐 사회와 역사의 진보에 기여하지 못한다. 그런 운동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십중팔구 소수 보장-노동자 집 단의 이기주의로 굴절된다. 더구나 지금 조성된 정세 아래서는 변혁을 지향하지 않는 그런 노동운동은 더 이상 아무것도 이루어 낼 수 없다. 자본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디플레이션을 동반한 파국을 눈앞에 두고 있어서 보장-노동자 집단에게까지 심한 공격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자본주의의 파국은 노동계급이 자기해방을 향해 도전할 절호의 기회다. 이 기회를 방기하는 것은 노동운동이 계급해방운동이기를 영원히 포기하는 것이다.

기고 101


오덕 칼럼

로봇 애니메이션과 극우의 향수 김민하 <미디어스> 기자

우익의 추억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공명 연립정권이 압승하면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장기집 권은 기정사실이 되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는 이번 중의원 선거를 통해 확인된 국민적 지지 를 바탕으로 개헌을 위한 정치행보와 아베노믹스로 표현되는 확장적 재정정책을 계속 유지 해갈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우익들은 아베 신조 내각의 독주에 만족스러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선거 결과를 보면 일본 극우정당의 대표 격인 일본유신회(日本維新の )에서 갈라져 나온 이시하라 신타 로의 차세대당은 몰락했고,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일명‘재특회’ )와 논쟁을 벌 이며 중도적 색채를 강화해온 남은 일본유신회는 간신히 현상을 유지했다. 이런 상황을 보면 결국 이들 극우정당에 대한 지지가 자민-공명 연립정권으로 이동하면서 아베 신조 내각에 대한 극우세력의 영향력은 더 강화됐다고 볼 여지가 있는 셈이다. 현재 개헌과 아베노믹스는 일본 내 극우파들에게는 전후체제의 완전한 청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일종의‘향수’ 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는 실정이다. 이 향수란 한 때의 위대했던(?) 일

개헌과 아베노믹스는 일본 내 극우파들에게는 전후체제의 완전한 청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일종의 ‘향수’ 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는 실정이다. 102

본에 대한 추억인데, 위대한 일본 의 두 가지 상징은 전쟁을 위한 군대와 군수산업을 기반으로 한 제조업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국내의 극우세력이 박정희 시대


를 떠올리며 반공정신과 중화학 공업을 떠올리는 것과 유사하다. 사실 두 나라는 지정학적 위치와 식민통치라는 역사적 경험 때문에 유사한 발전경로를 밟아온 측면이 있다. 제조업 중시는 현대 자본주의 국가들이 경제구조를 고도화하면서 피해갈 수 없는 경로에 있다는 점 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한국과 일본의 제조업 중시 정책에 지정학적 처지에 의한‘전쟁’ 이라 는 요소가 긴밀히 결합돼 있다는 점에서는 특수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전쟁의 상흔, 제조업 부흥으로 딛고 일어나 이는 일본의 문화적 콘텐츠의 내용을 봐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2009년 일본TBS에서 방송된 <관료들 의 여름>이란 드라마의 오프닝 시퀀스를 보면 양국의 제조업에 대한 유사한 인식이 포착된다. 이 드라마 는 2차 대전 이후 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일본 통상산업성 소속 관료들의 노력을 다루고 있는 우익소설의 내용을 기본으로 만들어졌는데 오프닝 영상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나레이션의 내용이 특히 인상 깊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궤멸적 타격을 받았던 일본경제는 겨우 10년 만에 더 이상 전후 가 아니란 말을 들을 정도로 경이적인 부흥을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 이후로 10년 정도 뒤에 국민총생산 세계 제2위로 약진하는 대 위업을 달성하여 지금에까지 이어지는 번영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동양 의 기적으로 불렸던 전후 일본의 고도경제성장, 그 뒤엔 이름 없는 남자들의 뜨거운 싸움이 있었다.” 여기서‘일본’ 을‘한국’ 으로,‘2차 세계대전’ 을‘한국전쟁’ 으로 바꾼다면 우리가 자라면서 배운 근현대 사 교육의 내용에서 흔히 들을 수 있었던 상투적인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어떤 방식으로든 전쟁 을 겪은 나라로서 공유하는 유사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양국의 전후 경제체제 재건의 맥락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나라 로서 군수산업에 종사하던 기업들을 회생시키기 위해 제조업을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관료들의 여름> 을 보면 일본의 국민차 생산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주인공인 통산성 관료 카자코시 신고는 전쟁 이전 전투기 엔진을 만들던 업체를 찾아가 그 기술력으로 이제는 자동차 엔진을 만들어야 한다며 국민차 프로젝트에 합류해줄 것을 설득한다. 실제 로 도요타, 혼다, 닛산을 비롯한 글로벌 자 동차 업체와 미츠비시, 미츠이, 스미토모 등의 일본 3대 재벌 등 주요 기업들은 어 떤 형식으로든 전쟁과 관련 있는 기업들로 서 일본 제조업의 한 축을 떠받치고 있다.

도요타, 혼다, 닛산을 비롯한 글로벌 자동차 업체와 미츠비시, 미츠이, 스미토모 등은 어 떤 형식으로든 전쟁과 관련 있는 기업들로서 일본 제조업의 한 축을 떠받치고 있다.

한국의 경우 본격적인 제조업 중시 정 책이 채택된 것은 박정희 정권이‘중화학공업화’ 를 천명한 것을 결정적 계기로 볼 수 있는데 이 배경에는 북한과의 군비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하는 군사적 판단이 깔려 있었다는 게 주지의 사실이다. 삶과 문화 103


전범국인 일본과는 정반대의 경로라고 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전쟁의 과정과 결과를 대비한 결정 이라는 점에서는 판단의 근거가 일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철인28호와 아톰의 희망 일본인들의 제조업에 대한 당시의 희망적인 전망은 로봇만화 및 애니메이션의 태동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를 돌아보면 전후체제로부터 이어진 제조업 중시 정책에 대한 맥락을 명백히 찾아볼 수 있다. <철인28호>와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철인28호>는 1956년 최초로 그려졌는데 이 만화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로봇의 이름이기도 한 철인28호는 2차 대전 막바지에 미군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군이 개발해낸 비장의 무기다. 이 만화에서는 철인28호라는 비장의 무기를 써보지 못한 채 전쟁이 끝나 일본군이 패배한 것인데, 전 쟁무기였던 철인28호는 이후 지구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된다. 철인28호의 이런 기구한 운명은 일본의 제조업이 처한 현실과 대단히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의 제조업 역시 미군에 대항 하기 위한 군수산업에 복무했으나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전쟁에 패배했다는 점, 그리고 이후 전후경제 복 구를 위한 중요한 축을 담당하며 다시 부흥하게 됐다는 점을 철인28호가 웅변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 그리고 있는 로봇은 제조업이 상당한 수준의 기술력에 올라야 현실화될

일본 고베시에 세워진 철인28호(좌), 한국에서 출시된 <우주소년 아톰> DVD 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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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제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 그리고 있는 로봇

조업의 희망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예를

은 제조업이 상당한 수준의 기술력에 올라야

들면 1951년 만화로 그려졌다 1963년에 TV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한 <우주소년 아톰>의 경우 그 시대로서는 근미래인

현실화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제조업의 희망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2003년에 만들어진 로봇‘아톰’ 을 소재 로 한다는 점에서 제조업에 대한 어떤 희망을 읽을 수 있다. 특히 아톰을 개발한 텐마 박사가 과학청 장관 을 겸하는 천재과학자였고, 아톰이 결국‘소외’ 의 문제에 부딪쳐 고뇌하다 새로운 희망을 찾게 된다는 점 등은 제조업 부흥에 대한 정부의 배려와 산업 발전으로 이뤄질 기술의 발전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보여주 는 부분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문화 컨텐츠와 제조업 흥망성쇠의 함수 관계 초창기 로봇애니메이션의 유행은 특히 기술력 중심의 고부가가치 제조업을 발전시키는 데 상당한 노 력을 기울였던 일본 정부의 정책적 행보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셈이다.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일본은 IBM등 미국의 컴퓨터 산업과는 다른 표준으로 제작된 PC-98 시리즈 등의 컴퓨터와 이를 운영하 기 위한 OS를 개발하기도 하는데, 현대 일본의 게임 산업은 이러한 자체적인 컴퓨터 인프라를 바탕으로 하여 발전한 측면이 크다. 일본 게임 산업의 이런 특징은 2000년대와 가까워지면서 비로소 IBM컴퓨터 체제로 전환되며 해소되는데, 결국 일본의 자체적인 내수시장 형성이 일본 게임 산업이 더 성장하지 못하 도록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적 평가가 나오는 상황까지 이어지게 됐다. 전후체제를 극복하기 위 해 시행됐던 제조업 중시 정책이 오늘날의 문화 컨텐츠의 운명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는 측면 이다. 물론 일본의 로봇애니메이션에는 전후체제적 요소만이 반영된 것은 아니다. 사실 일본의 로봇애니메 이션은 일본 제조업의 흥망성쇠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그 내용과 성격을 변화시켜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속)

삶과 문화 105


오보로 보는 한국언론

박근혜대통령의핵개발선언? YTN의 황당 오보, 왜? 조윤호 <미디어오늘> 기자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 된다. 언론의 오보는 실수이지만 특정 언론사에서 오보가 반 복되면 그 언론사에 어떤 구조적인 문제점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핵무 기 개발 의사를 밝혔다는 내용의 어마어마한 오보를 냈던, YTN이 대표적인 사례다.

‘핵무기 개발’황당 오보는 영어 번역 때문? YTN은 지난 5월 30일 새벽 5시에 어마어마한 기사를 하나 내보냈다. 박근혜 대통령 이 미국 언론인 월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핵무기 개발 의사를 내비쳤다는 보도였 다. 사실이라면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파장이 올 수 있는 내용이었다. 핵 개발은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도 실패했던 일 아닌가. YTN은 5월 30일 기사 <북 핵실험 하면 남한도 핵무기 개발>에서“박근혜 대통령은 북한이 4차 핵실험을 할 경우 한국도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고밝 혔다. YTN의 이 보도는 박 대통령의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 내용을 번역해 소 개한 것이었다. 보도 이틀 전인 5

기사가 나가자 엄청난 파장이 일었다. 대통령이 핵무기를 개발하겠다고 공식 선언한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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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8일 박 대통령은 월스트리트 저널과 청와대에서 인터뷰를 가졌 다. 기사가 나가자 엄청난 파장이

우습게도 월스트리트 저널 원문을 잘못

일었다. 대통령이 핵무기를 개발

번역한, 즉 오역으로 인한 오보였다.

하겠다고 공식 선언한 셈이기 때


문이다. 새벽 5시 보도였지만 SNS에서는 이 기사에 대한 엄 청난 반향이 있었다.“박근혜 대 통령이 미친 거 아니냐” “큰일 났다”이런 우려의 목소리들이 많았다. 아마 이 엄청난 보도가 오보라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 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우습게도 월스트 리트 저널 원문을 잘못 번역한, 즉 오역으로 인한 오보였다. 월 스트리트 저널 기사 제목은 <한 국의 대통령이 핵 도미노 현상을 경고했다>이다. 월스트리트 저 널은 이 기사에서“박근혜 대통 령이 말하길, 북한의 핵실험은 주변국들이 핵무기로 무장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함으로써 핵 도 미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라 고 전한다. 기사를 아무리 찾아 봐도 핵 도미노 현상, 북한이 핵 무기를 보유함으로써 주변국도

지난 5월 30일 새벽 5시에 YTN은 <朴 대통령, 北 핵실험시 한국 핵개발 뜻밝혀> 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위) (사진 : YTN 홈페이지 캡쳐) 당일 오전 11시에 YTN은 오보 사과방송을 했다.(아래) (사진 : YTN 캡쳐)

핵무기를 가질 수 있다는 내용만 있을 뿐 한국이 핵무기를 개발하겠다는 내용은 없다. YTN도 오보를 인정했고 기사도 삭제했다. 미디어오늘이 30일 오전 YTN 측과 통화를 했을 때도 오보를 인정했다. 리포트를 한 기자는 YTN 뉴욕특파원 김원배 기자였으나 김 기자와는 연락이 잘 닿 지 않아 YTN 국제부에 문의를 했다. YTN 국제부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YTN 특파원이 기사 안에서 주변국, neighbors라는 표현을 잘못 해석했다. 주변국에 핵 도미나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뜻을 잘못 해석했다. 결과적으로 오보이기에 기사를 내렸다.” YTN은 오전 11시에 사과방송까지 했다. YTN은“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 인터뷰

삶과 문화 111


내용을 전하면서 사실과 다른 내용을 보도함으로써 시청자 여러분께 혼란을 끼쳐 진심으로 사과드린 다. 영문 기사 원문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부 단어에 대한 해석 오류로 결과적으로 오보를 하게 됐 다” 며 시청자 여러분께 혼란을 드린 점 거듭 깊이 사과드리며 YTN은 앞으로 더욱 정확한 보도를 통 해서 시청자의 신뢰를 높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고 밝혔다.

이해 안 가는 오보 이유…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오보 이유였다. 이 기사를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뉴욕특파원으로 간 사람이 이 해하지 어려운 수준의 영어가 아니다.‘neighbors’ 란 단어를 주변국이 아닌 한국으로 해석했다는 것 도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백번 양보해서 특파원 눈에 뭐가 씌어서 잘못 해석을 했다고 쳐도, 대 통령이 핵무기 개발 의사를 밝혔다는 엄청난 내용이라면 데스크 차원에서 검증을 해야만 하는 사안이 다. 이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YTN의 핵무기 개발 오보가 비판을 많이 받는

YTN의 핵무기 개발 오보가 비판을 많이 받는 이유는 이미 여러 차례의 오보나 편파적인 보도로 신뢰도가 하락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YTN이 이미 여러 차례의 오보나 편파적 인 보도로 신뢰도가 하락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사례가 YTN <호준석의 뉴스인>이 서 울시장 선거를 스케치하면서 빚어진 편파 방송 논 란이다. <뉴스인>은 정몽준 당시 새누리당 서울시 장 후보를 소개하며‘정을 몽땅 준 사람’ 이라는 자

막을 내보냈다. 정몽준 후보만 부각시키는 리포트를 했다는 이유로 이 보도는 선거방송심의위원회로 부터‘관계자 징계 및 경고’ 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YTN은 재심을 청구했으나 기각 당했다. 또 다른 사례는 김정은-무인기 화면 합성 사건이다. YTN은 지난 5월 10일 <북 김정은, 공군 전투 비행술 대회 참관>이라는 기사를 보도하며 앵커 백, 즉 앵커 뒤편의 배경화면으로 북한 김정은이 무인 기를 쳐다보고 있는 사진을 내보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사진은 김정은이 그냥 서 있는 사진과 무인 기 사진 두 가지를 합성한 것이었다. 사진 조작 논란에 휩싸인 이 보도는 방통심의위원회로부터 주의 조치를 받았다.

계속되는 오보의 원인?“부당한 인사 시스템과 솜방망이 처벌” 이런 사례들이 벌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핵무기 개발 보도 이후 중견기자 A씨는 미디어오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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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에서“특파원 선발에 있어서 회사가 자질 또는 업무능력보다 노조와의 친소 여부를 먼저 따져왔 다. 그동안 모든 사안을 이런 방식으로 접근했다” 며 YTN의 인사시스템을 원인으로 꼽았다. 실력이 뛰어난 사람보다 회사에 충성할 사람을 특파원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A 기자는“고등학생도 이런 식 으로 해석하거나 번역하지 않는다. 이번 사태는 원칙 없는 인사 기준을 보면 예상할 수 있었던 것” 이 라고 말하기도 했다. YTN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낙하산 사장에 반대하는 구성원들과 사측 간의 대립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파업과 해직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YTN 내부에서는 노조 조합원이나 노조와 친분 있는 인사는 승진에서 배제되고 자질이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 인사발령을 받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 다. 오보 역시 이러한 시스템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YTN 기자는“특파원 지원을 두고 경쟁이 붙었을 때 언제나 배석규 사장 측에 협조적이었던 사람이 선발됐다. 언제부턴가 능력에 대한 공정한 평가로 인사가 이뤄지는 경우는 드물어졌다” 고 비판했다. 솜방망이 처벌도 문제다. <호준석의 뉴스인>의 호준석 앵커는 가장 낮은 수위의‘주의’조치를 받 았고 핵무기 개발 오보를 했던 김원배 기자는‘경고’조치를 받았다. 경고는 주의 다음으로 낮은 징계 다. 이를 두고 임장혁 언론노조 YTN지부 공정방송추진위원장은“대형오보로 인해 YTN의 신뢰도가 일거에 무너지고 시청자에게 사과까지 했다. 그런데도 이런 징계가 떨어지는 것은 시청자를 조롱하는 행태나 다름없다” 고 비판했다. YTN의 또 다른 기자는“무능한 인사가 잘못해도 책임을 묻지 않는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형성돼 있다. YTN에는 지금 편집 기능이 없다. 큰 틀에서 보도방향이 잡히지 않으니 속보에 급급하고 문제 많은 리포트가 속출한다” 고 밝혔다. YTN의 신뢰도 하락이 상징하는 바가 있 다. 언론사의 경우 사내 민주주의와 노조의

YTN의 신뢰도 하락이 상징하는 바가 있다. 언론사의 경우 사내 민주주의와 노조의 사측에 대한 견제가 뉴스 품질 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사측에 대한 견제가 뉴스 품질로 이어진다 는 점이다. 사장이 독선적으로 의사결정을 하고, 노조와의 친소 여부에 따라 인사권을 휘두르는 언론 사에서는 좋은 기사가 나올 수 없다. 이는 독자와 시청자 입장에서도 큰 불행이다.

삶과 문화 113


숨은 문화예술 당원 찾기

“정말 나쁜 놈들이에요” 성실한 기록자, 분투하는 창작자, 다큐멘터리 감독 정용택 인터뷰·정리 : 나도원 문화예술위원장 /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2010년 즈음, 정용택 당원은 연남동에 살고 있었다. 당시 서울시장으로서 곳곳을 뒤집어엎으며 맹활 약(?) 중이던 오세훈 씨가 연남동까지 차이나타운으로 재개발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가뜩이나 스 트레스를 받고 있던 차에 역시 재개발 문제의 복판에 있는 동네 길 건너의 칼국수 식당‘두리반’ 에도 자연 스레 관심을 갖고 있었다. 더구나 경상도에서 알게 된 친구인 한받이 그곳에서 공연을 한다는 소식까지 입수했다. 영상 활동가 정용택이 카메라를 들고 찾아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른바‘두리반 투쟁’ 이 벌어진 장소는 신촌에서 홍대 앞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다. 행인들의 차림새 를 관찰하거나 시끄럽게 떠들며 2차로 이동하는 인파 사이에 긴 줄이 만들어지는 곳이 홍대 앞이다. 클럽 입구에서 요즘 주목받는 음악인을 볼 수 있는 무대까지 고작 몇 걸음 떨어져 있는 동네가 바로 옆에서 벌 어진 사건에 공감을 표했다. 장소와 사건이 만났고, 참여와 놀이의 장인 페스티벌이 색다른 현실을 만들 114


어냈다. 이 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파티 51>을 만든 사람이 정용택 감독이다.

재미있는 다큐멘터리 <파티51> <파티51>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자본의 논 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재개발과 철거민이, 제아무리 좋은 음악을 해도 TV에 나가 서바 이벌에 참가하지 않으면 밥벌어먹기 힘든 음 악인이, 가끔‘독립영화가 대박이 났다’ 는들 뜬 뉴스 뒤에서 맨손으로 작품을 만들어가야 하는 독립영화인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기도 했다. 침대에서 본 현실이 아니라 현장 속의 현실을,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지만 모 두가 외면하는 사실을 기록하는 작품의 소중 함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자본을 불편

다큐멘터리 <파티51> 포스터

하게 할 때, 국가를 불편하게 할 때 자본과 국 가는 이 소중함을 과감히 외면한다. 대신 외 면 받은 이가 외면 받는 이를 주목했다.

<파티51>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자본의 논리

음악동네에서는 일찌감치 뮤지션과 팬이

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재개발과 철거민이,

함께 앨범을 함께 만드는 방식이 시도되어 왔

음악인이, 독립영화인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

다. 그런데 영화의 경우에는 음반제작과 달리

정이기도 했다.

인건비를 비롯하여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 그 영화가 큰 이윤을 창출하기 힘든 독립영화 라면, 더구나 자본을 불편하게 만드는 다큐멘터리라면 더 힘들어진다. 애초에 <파티51>은 <뉴타운컬쳐파 티>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고, 사회적 제작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사회적 제작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아직 두터운 담벼락이 놓여 있었다. 이를 딛고 2010년부터 2013년 초까지 음악가들과 두리반에 대한 이 야기를 담으며 작업을 이어간 작품의 이름이<51+>였으며, 2013 전주국제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파티51>이란 이름으로 완성된 이 다큐멘터리는‘홍대 언저리 뮤지션들의 자립 성장 프로젝트’ 라는 수 식을 달고 있다. 하헌진, 회기동 단편선, 밤섬해적단, 한받, 박다함, 404 등 많은 음악인들과 두리반의 안 종녀 사장과 유채림 작가 부부도 등장한다. 음악과 드라마와 사회비판과 좌충우돌과 통곡과 유머가 뒤섞 인 <파티51>은 무척 재미있는 다큐멘터리이다. 전주국제영화제뿐만 아니라 인디다큐페스티벌과 서울국 삶과 문화 115


<파티51> GV에 참석한 정용택 감독과 출연 뮤지션들 (사진 : 정용택 페이스북)

제뉴미디어페스티벌 그리고 상상마당음악영화제를 통하여 소개되었고, 2014년 12월 11일에 정식으로 개 봉했다.

유모로 일한 고모 덕분에 영화를, 대학생 형 덕택에 음악을 그의 고향은 보수의 본산이라 해도 별다른 이견이 없는 대구이다. 정용택은 20대 초반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아버지는 마늘과 고추 등의 청과물을 다루는 중간도매상으로, 어머니는 청과물 보따리를 들고 시 장과 이곳저곳을 누빔으로써 생계를 이었다. 가족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는 경상북도의 시골사람 들이 대도시인 대구로 모여드는 북부 정류장 근처 동네였다. 그러니까 고향을 떠나왔지만 시내로 진입하 지 못한 저소득층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시장이 있는 그 동네에서 자랐지만, 그 곳을 떠난 이후 20년 동안 가보지 않았다. 단지 옛 모습 그대로라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다. 다양한 문화를 접하기에는 척박한 환경이었다. 그런데 극장을 경영하는 집에서 유모로 일하던 고모 덕 분에 영화초대권을 많이 얻을 수 있었고, 오히려 극장을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의 <미지와의 조우>를 극장에서 볼 수 있는, 몇 안되는 어린이였다(물론 관람목록에는 성 인들이 볼 수 있는 영화들의 제목도 여럿 들어 있다). 중학교 시절부터는 영화 자체를 좋아하여 EBS에서 일요

일마다 방영하는 영화들을 즐겨보았다. 유럽영화들로부터 색다른 감성을 발견했고, 아일랜드계 영화감독 으로 미국 서부극의 거장의 반열에 오른 존 포드(John Ford)를 통하여 감독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특히 일반적인 상업영화와는 결이 다른 <서부개척사>(1962)는 더욱 인상 깊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젊음의 행진’ 과 같은 TV방송으로 음악을 접했고, 혜은이와 같은 인기가 수들을 좋아한 정용택 학생이 대구 성광고등학교에 들어갈 때부터 다른 통로가 생겼다(성광고등학교는 훗 116


날 세월호 실소유주로 유명해진 유병언 씨의 모교이기도 하다). 네 살 터울인 친형이 1984년에 대학교에 들어

가면서 김민기의 음악이 전해졌다. 음악잡지를 통하여 한대수, 양병집, 양희은과 같은 모던 포크(modern folk)를 알게 되었다. 해외음악으로는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와 피트 시거(Pete Seeger)처럼 저항적

인 포크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다. 로버트 앨런 짐머맨(Robert Allen Zimmerman)이라는 본명을 가진 밥 딜 런(Bob Dylan)도 그런 음악인들 중 하나였다. 물론 정식 음반으로 이러한 음악들을 들을 수는 없었기에 대 부분‘리어카 테이프’ 를 사서 들어야 했지만, 십대의 정신에 미친 음악의 힘에는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삐딱이 이십대 청년이 실감한 영상의 힘 1980년대라는 시대와 주변 운동권의 영향 때문인지 정용택의 이십대는 삐딱한 부적응자에 가까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민정치학교 수업을 듣기도 하고, 병역을 마친 후에는 제일모직 비정규직 등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어딘가에 머무르지 못했다. 서울에 사는 친구의 꼬드김(?)으로 이른바 조직 활동에 발 을 들여놓기로 작정하고 서울로 상경하기도 했다. 사노맹 즉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에서 활동하기 위해 서였는데, 여러 상황 탓에 불행히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갈 곳을 잃고 만다. 운동권들 중‘학출’ 은돌 아갈 곳이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정용택에게 돌아갈 곳은 없었다. 이것이‘1차 미아 사건’ 의 발생이다.‘주 간노동자신문‘노동일보’ ( 의 전신)’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다가 IMF사태를 맞아 결국 대구로 돌아 왔다. 그런데 경상도에서 새로운‘동지’ 들을 만나게 된다. 1998년에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친구들을 만난 것이다. 김화범과 같은 영화인들 그리고 한받과 같은 전천후예술인이 그들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인 연을 맺어가면서 2000년 총선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낙선>에 대구지역의 촬영담당으로 합류했다. 이때

촬영 중인 정용택 감독 (사진 : 정용택 페이스북)

삶과 문화 117


부터 유세나 집회 등을 촬영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인연을 시작으로 서울의 시민단체로부터 제안을 받아 다시 상경하기로 한다. 그러나 제안을 해온 시민단체의 영상 관련 계획이 무산되면서‘정용택 2차 미아 사건’ 의 주인공이 될 처지에 놓였다.

진보넷 방송국에서 일하게 되면서 전기를 맞았 다. 2001년 대우GM정리해고, 2002년 발전노 조 파업, 2003년 멕시코 칸쿤 WTO반대 투쟁 등을 현장에서 취재했다. 파급력은 상당했다.

마침 지인을 통하여 진보넷 방송국에 서 일하게 되면서 전기를 맞았다. 그리 고 2001년 대우GM정리해고, 2002년 발전노조 파업, 2003년 멕시코 칸쿤 WTO반대 투쟁 등을 현장에서 취재했 다.‘참세상’ 은 한국에선 거의 최초로 영

상의 다운로드 서비스를 시도했고, 그 파급력은 상당했다. 대우자동차 대규모 정리해고에 맞선 파업 과정 을 영상에 담아 인터넷에 올렸는데, 경찰의 잔인한 진압장면을 담아 세상에 알리자 조회수가 200만 회에 달하고, 민주노총의 서버가 다운될 정도였다. 이 영상은 지상파 방송의 소스가 되었으며, 당시 김대중 대 통령이 유감을 표하는 상황까지 이끌어냈다. 이처럼‘영상의 힘’ 이 있던 시기, 정용택은 바로 그러한 영상 들을 만들며 현장에서 숙식하며 지내고 있었다.

‘영상의 힘’ 을 되찾기 위한 고군분투 문화산업이 발달했다는 지금, 영화 관객이 얼마를 돌파했고 K-POP 한류 관객들이 얼마나 몰려들었 다는 식으로 거대한 모래댐과 모래의 제국에 찬사를 보내는 지금, 애석하게도 시장콘텐츠가 아닌 대중예

전주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정용택 감독과 뮤지션들 (사진 : 정용택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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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마술사의 비둘기’취급을 받고 있다. 꼭 필요하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소품으로 대우받는 것이 다. 문화 ‘산업’ 이‘문화’ 산업을 억누르는 환경이다. 영상의 힘은 어떠할까? 모두가 온통 영상들에 둘러싸 여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진실한 영상의 힘은 갈수록 미약해지고 있다. 한국의 문화산업에서 대기업의 플 랫폼 독점은 점차 심각한 문제를 낳고 있으며, 영화시장은 대기업 계열사들이 투자와 배급, 상영관까지 과점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10여 개의 상영관을 가까스로 잡은 <파티51>의 입지는 좁을 수밖에 없다.‘다양성 영화’ 를 위해 스크린을 마련해둔다는 대형 복합상영관들은‘예매율이 낮으면 곧 내리겠다’ 고 압박했다. 작품의 개봉 자체를 알릴 수 없는 처지인 터라 극장을 찾는 관객의 수도 적다. 어떤 출연자는“기록적인 관객 수에 놀랐다” 며 역으로 한탄했다. 정감독 역시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끊임없이 지적하며 개탄했다.

“정말 나쁜 놈들이에요!”

이러한 시장구조의 근본적 문제는 대중예술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체계적인 분리이다. 과거에 예술의 생산자는 특별한 누가 아니었다. 소수에게 그 임무가 주어진 것은 대중예술의 산업화 이후에 생긴 변화이 다. 그런데 산업화로 불리는 다단계 구조에서 비정규 불안정 노동의 문제가 발생하고, 누구도 책임을 지 지 않는 책임분산사회가 도래했다. 곳곳에 대중예술이 넘쳐나지만 정작 생산자와 소비자는 소외되고 있 다. 창작자는 뭔가 납품업자가 된 기분이고 수용자는 어딘지 구경꾼이 된 기분이다. 독립

곳곳에 대중예술이 넘쳐나지만 정작 생산

영상의 길은 더욱 좁아졌다.

자와 소비자는 소외되고 있다. 독립영상의

주객분리를 의심하고 자본의 힘과 시스템 에 대한 순응을 강요하는 시장논리를 극복해 보려는 시도가 존재해야 한다. 생산자와 소비

길은 더욱 좁아졌다. 정용택 감독은 이 틈새 를 비집기 위하여 지금도 고군분투 중이다.

자, 주체와 객체, 현실과 예술이 분리되어 가 는 시대에 창작의 주체성과 수용·향유의 주체성을 자극하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 진짜 검열의 시대는 과 거가 아니라 현재일지 모른다. 정용택 감독은 이 틈새를 비집기 위하여 지금도 고군분투 중이다. 몇 해 전, 인디밴드‘허클베리 핀’ (이 밴드의 리더인 이기용 씨도 사회당을 거쳐 노동당의 당원이 된 사람이 다)이 운영하는 술집에서 (지난 회의 주인공이었던) 단편선을 만났다. 아마 이 자리에서 정용택 감독과 제대

로 된 대화를 처음으로 나눴던 것 같다. 어떤 책을 쓰기 위해 음악인 박다함을 인터뷰 하는 자리에도 그는 카메라를 들고 동행했다. 어떤 콘서트를 기획하여 자립음악생산조합 음악인들을 초대한 자리에도 그가 나타났다. 그러니까 정용택 감독에게‘찍힌’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노 동당은 이토록 성실한 창작자들에게 얼마나 마음을 써왔는가? 아니, 우리는 그처럼 성실했는가?

삶과 문화 119


불온한 서재

가림막 안에서 별 헤아리는 ‘난쟁이’ 들에 대한 기록 변경 지도 이상엽 / 현암사 / 2014년12월 / 25,000원

양솔규 기획조정실 국장

사진의 힘 우리 당원들의 책을 <불온한 서재>에 여러 번 소개하게 되니 너무‘당파적’ 인거 같아 면구스러운 구석이 없지 않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 당원들이 그만큼‘불온 ‘사진’ 이라는 ‘최

한’것을.

후의 언어’ 가 우리

이번엔 사진집이다. 아니,‘포토 르포르타주’ 이다. 사진집이라고 하기에는 글이

에게 너무 멀리 있

너무 많은 거 같고, 애드가 스노우의《중국의 붉은별》 이나, 존 리드의《세상을 뒤

는 것만은 아니었 다. 일찍이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사진은 수많은 사

흔든 열흘》 에 비해선 사진이 많다. 그러니까‘포토 르포르타주’ 이다. ‘사진’ 이라는‘최후의 언어’ 가 우리에게 너무 멀리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일찍 이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사진은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바꿔

람들의 인생 전체

놓지 않았던가? 또한 운동권의‘잘 나가던 시절’ 에는 사회사진연구소의 아주 선동

를 송두리째 바꿔

적인 사진들《노동자-강철과 ( 눈물의 빛》 )이 우리 가슴을 뜨겁게 달구웠다. 또 다른

놓지 않았던가?

종류의 사진들도 있었다. 1988년, 제1회 노동문학상을 수상한 박노해의 신작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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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되어 엄청난 판매고를 올렸던《노동문학》 의 표지에는《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의 작가 조세희 선생이 찍은 탄광촌의 소녀의 사진이 실 려 있었다.(조세희 선생의 《침묵의 뿌리》 의 표지에도 사용) 그리고 75년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 강운

구 선생의 사진들과, 부산 사람들의 억척스러운 삶을 기록한 최민식 선생의 사진들도 사람들에 게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이상엽이라는 낯익은 작가를 만난다. 우리에게 이상엽은 사진가보다는 진보신당 정책 위 부의장, 문화예술위원회 준비위원장으로 더 익숙하다. 그런 그가 사진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우발적이었다. 1991년 인민노련이 중심이 되어 만든 월간《길을 찾는 사람들》(93년에 사회평론과 통합해‘사회평론 길’ 이 됨. 보통‘말’ 지에 비교해 조세희 선생이 찍은 탄광 소녀 사진이 실린《노동문학》 (1988)

‘길’ 지로 불림)에 입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길》

지는 예술적 교양(?)에 상당한 공을 들였던 거 같 다. 지금은 시대의 스테디셀러가 된 유홍준의‘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가 이 지면을 통해 연재되었고, 탄광 화가로 잘 알려져 있는 황재형 작가의 그림이 표지를 장식 하곤 했다. 그런《길》 지였지만 경영난을 피할 수는 없었다. 사진부 기자들이 임금 체불로 모두 사직하게 되면서 이상엽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진부 기자로 발령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사진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상엽은《변경 지

변경은 자궁이다

도》 를 통해 이 땅 의 변경에 사는 사 람들과 생명을 기 록했다. 변경은“단 지 무질서의 세상

이상엽은《변경 지도》 를 통해 이 땅의 변경에 사는 사람들과 생명을 기록했다. 변경(邊境)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지리적 변경과 심상적 변경 양 측면을 모두 아우 른다. 예를 들어“변경처럼 보이지 않지만 사실은 이미 변경이 된 곳들, 예컨대 철

이 아니라 새로운

(10쪽)가 그렇다. 그렇기에“변경은 공간적으로만 구축되는 것이 거민들의 주거지”

세상을 만들어 내

아니” 며“모든 변경은 서사를 통해 역사적 기억에 관한 의식을 제공” 하면서 구축

는 자궁” 이다.

된다. 따라서“모든 변경은 역사적이며 인위적” 이다. 또한 변경은 원심력으로 밖 삶과 문화 121


으로 튀어나가기도 하지만, 구심력을 통해 중심으로 돌진하기도 한다. 변경은“단 지 무질서의 세상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는 자궁” 이다. 이때 오래된 권 력이자 자본이 만든‘중앙’ 에 맞서‘변경’ 은“자본과 낡은 권력을 허무는 진지” 가 된다.(16쪽) 우리가 이상엽의 사진들을 통해 이 러한 변경의 지도

이상엽을 비롯해 수많은 사진가들은 현장으로 달려갔다. 싸우는 현장, 소리치 는 현장으로 말이다. 용산으로, 강정으로, 밀양으로, 진도로, 광화문으로. 사람들 의 울부짖음과 고통을 사진으로 옮기고자 했다. 왜 그랬을까?“도덕적인 책무 때

를 각인해야 하는

문” 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상엽의 사진들을 통해 이러한 변경의 지도를

이유는“단지 슬퍼

각인해야 하는 이유는“단지 슬퍼서가 아니다. 이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서가 아니다. 이 도

(42쪽)이다.‘기묘한 사막’ 이 되고 만 새만금과 녹조로 인 이들의 기시감이기 때문”

시에서 살아가고

해 거대한 고체가 된 듯한 4대강의 운명은 어찌 이리도 같은가? 용산참사와 밀양

있는 수많은 이들

의 밀려나는 사람들은 어쩌면 이리 닮았을까? 그래서 저자는 다시 걱정하지 않을

의 기시감이기 때 문” 이다.

수 없다.“탐욕은 이제 강으로 갔고, 다음은 어디일까? 분명 산이다. 그 다음은 어 디일까? 섬이다. 그리고 또 어디로 이어진 것인가?” (79쪽) 변경에 머무는 것은 사 람만이 아니다. 내성천과 같이 자본과 권력에 피해 입는 자연도 역시 변경이다. 학 살당한 내성천의 수양버들과 금호동의 재개발지역의 철거민들은 모두 변경에 머 무는 주체들이다.“나무든 인민이든 소리치지 못하면 이리 된다.” (99쪽) 그럼에도 끊임없이 돌진하는 변경의 삶은‘깊게 흐르던 내성천’ 을 닮았는가? 눈에 잘 띄지 는 않아도 면면히 흐르는 도도한 삶의 의지가 우리를‘중심’ 으로 이끄는지도 모른 다. 지리적이든 심상적이든 변경은 무엇보다도 경계이다. 변경의 경계는‘가림막’ 으로 나타난다. 용산참사의 현장을 가리는 가림막, 강정 해군기지 건설현장의 참 혹함을 가리는 가림막, 그리고 밀양 송전탑 현장 접근을 막는 가림막. 성북에도, 왕십리에도, 서대문에도, 마포에도. 세상을 나누는 가림막“21세기,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가림막 안쪽에서 별을 헤는 난쟁이들이 있다.” (42쪽) 그리고‘난쟁이들’ 은“가림막 안쪽 폐허 속에서 소곤” 거린다.(26쪽)

삶은 계속 된다, 정치도 사실 그의 이러한‘변경’ 에 대한 사색은 오래된 것이다. 그의 전작《최후의 언 어》 에서도 이러한 사색의 일단을 내비췄으며,《파미르에서 윈난까지》 에서는 중국 122


의 변경 서부중국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번《변경 시대》 는 철저하게‘변경’ 만을 묵 묵히 기록한다. 그래서 사진은 흑백이다. 사진가들에게 흔히들 기대하는“아름다 운 이미지들은 중단” 된다.(40쪽) 화려한 스펙타클한 경관을 기대한다면 차라리 그 의 전작들,《파미르에서 윈난까지》 ,《최후의 언어》 ,《중국》 을 보기 바란다. 저자는 기록가로서의 자기역할에 충실하면서도 끊임없이 자기 삶에 대해 숙고 한다.“노동자 계급도 아니고, 인텔리겐차에 가까운, 그러나 노동자 계급처럼 행동 하지만 또한 자본과 권력의 미디어에 의존해야만 하는” (115쪽) 모순적 위치와 역할 행동에 대해 말이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분단의 풍경에 다가가지 못해“억지로라 도 망원렌즈를 당겨보지만, 피사체는 커지기만 할 뿐 그곳으로 한 발자국도 다가 서지 못한다.”노동자들은“사진가들의 사진을 사준 역사가 없” 을 뿐만이 아니라 ‘사진집’ 도 사지 않는다. OECD 최장 노동시간, 불평등 지수 최고인 한국 사회에 서 독서 안 하기로 OECD 1위인 것은 당연한 것인가?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우리 는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아마도 민중들이

그래서 그는“사진가라는 외피를 벗고 그들의 벗이 되어 보겠다고 진보정치에

‘노동당’ 을 필요로

뛰어들어 5년을 보냈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카메라는 무력했고 나의 글은 공허했

한다면, 노동당이 이러한 카메라가 되어주기를 기대하 는 것일 게다.“문 을 나서면 추락할

다. 19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앞으로 5년이 결정된 밤에 꾸역꾸역 글을 썼다. 그 《최후의 ( 언어》 , 38쪽) 그래서 그와 내 리고 또 깨닫는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가 동의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내게 가장 좋은 카메라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다 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손에 잡았을 때 그것이 손의 연장으로 느껴지며 파인더를

것 같은”사람들의

눈에 대는 순간 그것이 내 눈이라고 생각되는 카메라다.” 《최후의 ( 언어》 , 275쪽) 아

“몸을 녹여 주는

마도 민중들이‘노동당’ 을 필요로 한다면, 노동당이 이러한 카메라가 되어주기를

국밥 같은”존재

기대하는 것일 게다.“문을 나서면 추락할 것 같은” (125쪽) 사람들의“몸을 녹여 주

말이다.

는 국밥 같은”존재 말이다. ■ 더 읽을 만한 책

• 《최후의 언어》 / 이상엽 / 북멘토 / 2014년6월 / 16,000원 • 《파미르에서. 윈난까지.》 / 이상엽 / 현암사 / 2011년12월 / 17,000원 • 《중국》 / 이상엽 / 눈빛 / 2007년 / 45,000원

삶과 문화 123


조개 안에 모래알이나 뼛조각 등의 이물질이 들어가면, 조개는 이물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체 액을 분비한다고 합니다. 이물질을 체액으로 수백 겹 감싸 동그랗게 만든 그것이, 우리가 아름다운 보석 이라 말하는 진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물질이 들어가 체액으로 감싸기 시작했다고 모두 진주가 되는 건 아니라고 합니다. 진주가 만들어지기까지 2~3년이 걸리는데, 이 시간을 거치는 동안 태풍, 적조현상 등 바다환경의 변화 때문에 진주를 만들지 못한 채 조개가 죽어버린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보석이라 칭하는 진주가 생길 확률은 28퍼센트 가량이라고 하니, 그다지 높은 확률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 큰 진주를 얻겠 다고 오래 둘 경우엔 진주의 모양이 비틀어져 보석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하니 참 어려운 탄생 과정 입니다.

진주를 만드는 마음이었건만 1999년에 꽃다지가 노래 <진주>를 만들 때의 마음이 그랬습니다. 진주라는 보석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만드는 과정과 별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서 노래 <진주>는 시작됐습니다. 불평등과 부조리함이라는 이물질을 노동자의 꿈과 희망으로 감싸고 감싸 마침내 노동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내 겠다는 바람과 진주의 탄생 과정은 매우 흡사했으니까요. 그때는 조금만 더 싸우면 세상이 좀 더 나아질 줄로 믿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삶의 활기 넘치는 희망찬 세상을 노래해, 혼탁하고 절망적인 세상에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겠다며“괜찮아요. 세상은 바다~ 우린 상처 입고 그 아픔으로 진주를 키우 죠” 라고 단언할 만큼. 확실히 이 노래를 만들던 때는 지금보다 더 희망에 차 있고 덜 먹먹했습니다. 2014년. 1999년으로부터 15년이 흘렀습니다. 세상은 좀 더 좋아졌나요? 당신은 좀 더 행복해졌는가 요? 제 대답은요.“이번 생은 망했어.” 2015년, 저는‘오십!!! 반백 살!’ 이 되었습니다. 꽤 오래 살았군요. 더 오래 산 분들께는 죄송한 말이지 만,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습니다. 저에게도, 나이를 물어오는 이에게“꺾어진 오십!” 이라고 대답하던 시 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나에게도 나이 서른이 올까?’싶었습니다. 저에게‘나이 서른’ 은 진짜 어른이 되는 걸 의미했습니다.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으나 진짜 어른다운 어른이 될 자신이 없었기

노래의

진주 우린 상처 입고 그 아픔으로 진주를 키우죠 민정연 문화기획자, 꽃다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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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나이 서른’ 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었습니다. 피할 수 없으니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보자는 심정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오십이라니. 가스통 할배처럼 망 나니로 늙는 건 아닌지, 세상모른 체하고 나 하나 잘살고 보자는 못난이 심보가 생기지는 않을지 더럭 겁 이 납니다. 젊은이들에게“옜소, 살 만한 세상이요” 하고 번듯한 무언가를 남기지는 못할지라도“투표권 박탈해야 할 노인네 같으니라고”같은 손가락질은 받지 말아야 할 텐데. 서른을 앞두고 했던 질문을 이제 다시 해봅니다. 그때는 노동문화운동과 꽃다지라는 명확한 답을 얻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경험과 지 혜가 쌓였을 텐데도 분명한 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애면글면하더라도 뜻대로 되지 않는 그것이 인생’ 이라는 달관이 작용한 까닭인지 이십 대 시절보다 온도는 미지근하지만, 심경은 더욱 복잡 미묘하기 만 합니다.

이번 생은 망했어 뜻을 세우는 나이라 하여‘입지(立志)’ 라 일컫는 서른에는‘노래로 세상을 바꾸자’ 는 분명한 뜻을 세웠 는데,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의 나이 오십에는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여‘나는 어떻 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돌이켜 보니 사물의 이치를 터 득하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의 사십에 오히려 세상만사에 이리저리 흔들렸으니 오십이 되어 서도 하늘의 뜻 같은 것은 모르는 게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떠나고 싶다는 말을 되뇌게 하는 땅 에서 살고 있으니 부평초 같은 삶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매우 불행하다고 느끼는 삶인 건 확실합니다. 게다가 의아한 건 대부분의 사람은 별일 없이 잘만 사는 것 같은데, 저나 주변 사람들의 삶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는 겁니다. 늘 불만에 가득 차 있고 늘 분노하고 늘 길거리로 나와 팔뚝질을 해대고 있 으니 말입니다. 잠시 울고 분노하지만, 그냥저냥 잘 사는 듯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나는 왜 저들처럼 무 덤덤하게 살지 못하는가? 나는 왜 세상과 이다지도 불화하면서 사는가?’ ‘내가 잘못된 사람인가?’자문 하곤 합니다. 한때‘이번 생은 망했어’ 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이번 생은 망 했어. 왜? 십수 년 전에 관상 좀 본다고 자신하던 어느 택시기사가 제게“운명을 거스른 선택을 했기 때문에 삶이 고단할 것” 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택시기사는 저를 태운 후에 합승손님을 더 태우 려 했으나 방향이 달라서 번번이 실패하자 짜증을 내기 시작했습니다.“이상하다. 손님 관상을 보면 오천

“괜찮아요. 세상은 바다~ 우린 상처 입고 그 아픔으로 진주를 키우죠” 조금만 더 싸우면 세상이 좀 더 나아질 줄로 믿었습니다. 확실히 이 노래를 만들던 때는 지금보다 더 희망에 차 있고 덜 먹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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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이상의 합승손님이 있어야 하는데…” 로 시작한 원망은 뜬금없이“애들 밥 안 챙겨 주고 어디 가느냐? 손님은 이미 결혼해서 애가 둘이 있어야 한다” 면서 허무맹랑한 관상풀이로 변했습니다.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거짓말하지 마라” 며 제 인생을 맘대로 재단했습니다. 모두 틀린 헛소리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직업 을 묻길래 관상풀이 따위를 더 듣기 싫었던 저는 차라리 잘되었다 싶은 마음으로 제가 하는 일을 설명해주 었습니다.“꽃다지라고… 노동자가 일한 만큼 대접받고… 없는 사람이 괄시받지 않고… 뭐 그런 일을 하 고 있습니다.”설명을 듣더니“에이, 손님이 자기 인생을 거슬렀네. 원래 애 둘 낳고 잘사는 복 많은 팔자 인데… 스스로 복을 차버렸어” 라고 결론짓더군요. 제가 내리기 전에 좀 먼 곳으로 가는 합승손님을 태운 뒤에는“봐요. 내가 맞지” 라며 더욱 의기양양해졌습니다. 그야말로 별꼴을 다 보았다는 생각에 불쾌했던 기억입니다. 택시기사의 허무맹랑한 말을 지금도 믿지는 않으나 한가지에는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세상과 불화하 는 삶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그 택시기사가 제대로 읽어냈다는 것. 이 땅에서‘세상을 바꾸겠다’ 는 꿈을 품 고 사는 것은 제 복을 스스로 차버리는 행위라는 것. 이 땅에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산다는 것은 세상과 불화하겠다는 선전포고와 같다는 것. 그때는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는데 이 땅에 살면 살수록 그것 하나만 은 제대로 맞췄다 싶습니다. 짧게 살았건 길게 살았건 자기 생에 잊히지 않는 때가 있을 겁니다. 제 생에 잊히지 않는 때는 1987년, 1997년, 2001년입니다.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1987년, 노동자가 세상을 바꾸는 중심이 될 거라 확신 했던 1997년, 이어지는 죽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무너지지는 않을 거란 믿음만은 있었던 2001년. 많이 좌절했지만 그만큼 더 큰 꿈을 꾸었던 해입니다. 그리고‘더는 가만히 있지는 않겠다’ 는 전의와‘해도 안 되는 건가’싶은 먹먹함이 교차하는 2014년이 잊히지 않는 해로 보태질 테지요. 매번‘그때 제대로 이룰 때까지 더 치열하게 싸웠더라면’ 하는 회한이 남았는데 2014년은 더 큰 회한으로 남을 듯합니다. 그러니 새해이니만큼 잠시라도 들뜬 기분으로 덕담도 하고 대찬 포부를 밝히고 싶은데 그러하지 못하나 봅니다. 이렇게 비관에 차있으면서도 중얼거립니다.“고개를 떨군 채 힘없이 걷는 그대. 상처가 있나요? 아픔을 느끼나요? 나처럼 뒤척이며 눈물로 감싸나요? 괜찮아요.” 도저히 이 정도의 세상과는 화해하지 못하겠으니 불화의 기간은 더 길어질 듯합니다. 아마 오십이 되 어서도 점잖게 가만히 있지 못하고 더 불만에 가득 차 있을 것이고 더 분노할 것이고 더 길거리로 많이 나 갈 겁니다. 그리고 어느 행인에게 넌지시 다가가 말하겠습니다.“사실은 당신도 이놈의 세상이 마음에 안 들지요? 어찌, 같이 바꿔보지 않으렵니까? 당신 마음 속 진주 한 알 키워보지 않으시렵니까?”

이 정도의 세상과는 화해하지 못하겠으니 불화의 기간은 더 길어질 듯합니다.“어찌, 같이 바꿔보지 않으렵니까? 당신 마음 속 진주 한 알 키워보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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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작사·작곡 유인혁 노래 꽃다지

가슴이 아파와 상처를 생각해요 깊이 박힌 가시와 그 아픔을 느껴요 숱한 밤 깨어 홀로인 날 많았죠 눈물로 감싸면 진주가 되나요 고개를 떨군 채 힘없이 걷는 그대 상처가 있나요 아픔을 느끼나요 나처럼 뒤척이며 눈물로 감싸나요 괜찮아요 세상은 바다 우린 상처입고 그 아픔으로 진주를 키우죠 누구나 가슴에 영롱한 진주를 키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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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접으며

미생과 일베 박권일 기관지위원,《88만원 세대》공동저자

<미생>은‘고졸’계약직 사원 장그래가 종합상사에서 샐러리맨으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 기다. 주인공 장그래의 모습은 비정규직 천만 시대 청년들의 현실과 겹쳐 더 많은 공감을 얻었다. 웹툰도 그랬지만 드라마 버전을 보며 새삼 눈에 들어온 건 작품 속에서 개인의 능력은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묘사 되고 일중독은 바람직한 것으로 그려진다는 점이었다. 상사의 폭언과 강압, 부당노동행위들이 일상적으 로 벌어지지만 노동자들이 단결해 저항하거나 노동조합이 나서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부당한 현실에 대한 대처는 전부 개인의 몫이며 그 해결도 개인들의 호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그래서 더 리얼해 보이는 것 일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작품 전반에 깔려있는 능력주의다. 능력주의란 쉽게 말해 인간의 능력은 측정가

능하며, 그에 따라 차등대우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능력주의를 전통적인 의미에서의‘이데올로기’ 보다‘사회적 상상’ 의 하나로 인식하는 게 더 적절할 수 있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사회적 상상을“공통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고 정당성에 대한 감각을 공유하 게 하는 공통의 이해” 라 정의하는데, 이는 이데올로기보다 더 주체의 능동성에 방점을 찍고 있고 훨씬 더 자기의식적이다. 능력주의는 사회적 상상으로서 오랫동안 역사적으로 형성되었고 문화와 제도로, 그리고 개인의 내면으로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 능력주의를 우리는 좀 엉뚱한 공간에서 다시 대면하게 된다. 일 베 말이다. 일베의 심층적 동기는 그들을“사회 낙오자 집단”또는“불가해한 괴물” 로 규정하는 나태한 진보인사 들에게 결코 포착되지 않는다. 젊은 여성, 이주노동자, 정치적·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이들의 혐오는 자신들이 부당하게 피해를 입고 있다는 피해자 의식에 기인한다. 누구로부터의 피해인가? 바로‘자격과 능력을 갖추지 못한 자들’ 이다. 즉 남자의 등골을 빨아먹는“김치녀” , 한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외국인 노동자, 민주화운동 경력을 훈장삼아 호의호식하는 진보진영이다. 이런 자들이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 하는“애국시민” 들의 몫을 빼앗아가고 있다는 감각, 일종의 정의감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그 감각의 뿌리 를 더듬어가다 보면 극단화된 능력주의가 놓여있다. 이 능력주의는 능력에 따른 차등대우를 인정하는 것 을 넘어서 무능력자에 대한 배제와 증오를 정당화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소수자와 약자를 2등 국민화 하는 인종주의와 연결된다. 일베의 능력주의는 미생의 능력주의와 그리 멀지 않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근대 이후에 겨우 형성된 평등에 대한 감각이 유례없이 희미해진 오늘날에 와서는 더더욱 그렇다. 미생과 일베는 분명 같은 층위에서 논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지만 청년세대의 두 측면을 부각시키는 키워드이다. 동시에 그 둘은 한국사회에 내면화된 능력주의의 두 가지 판본을 보여주는 절묘한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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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이야기

“표지촬영도, 정책당대회보다 힘들었어요!” 육아위원회 엠티 1박2일의 긴 여정 열한 명의 아기들과 열여섯 명의‘육아위원’ 들이 모여 육아 위원회 엠티를 간다는 소식에 기관지 편집팀은‘이게 바로 미래에서 온 편지 제16호

신년호 표지다!’덥썩 물었다. 그러나. 아기들이 옹기종기 앉 아있는 사진을 찍겠다는 편집팀의 바람은 안일했다. 뭐? 한 시도 제자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저 아기들을‘나란히’앉 히겠다고? 1박2일 동안 눕고, 엎드리고, 뛰어다니며 박성훈 홍보실장이 수백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아기들이‘나란히’앉아있는 사

발행인 이용길 편집인 이장규 위원회 김건담 김성현 노정 박권일 장석준 정정은 정철수

조윤호 최백순 홍원표 교 열 노정 양솔규 정정은 표석 디자인 고미숙

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엠티 둘째 날 화원에 나들이를 갔을 때 여람이 아빠 김한울 당원이 삼각대와 타이머를 이용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 영등포, 라00407)

해 단체 사진을 찍었지만 안타깝게도 초점이 흔들렸다.

발행일 2014년 12월 26일

수백 장의 사진을 넘겨보다가 한 장을 겨우 뽑아냈다. 이미

주 소 서울 영등포구 국회대로 664 한흥빌딩 2층 노동당

지-윤현배 당원의 딸 선우가 이마에 손을 짚으면서 이렇게

전 화 02) 6004-2006, 2007

말하는 것만 같다.“당신들만 힘든 게 아니야. 우리도 정책당

팩 스 02) 6004-2001

대회보다힘들었다구!”

이메일 laborzine@gmail.com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육아위원회 엠티 기사 전문은 6~10쪽 <지금+여기 노동당>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인 쇄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973-15 원일컴 가격 10,000원


2014. 12

제15호

2014.12

미리 보는 정책당대회

www.laborparty.kr

값 10,000원

미리보는정책당대회

특집

기획 ■ 2014년 6대 미스터리 숨은 문화예술 당원 찾기 ■ 언저리의 중심에 선 자립음악가, 단편선 "올바름과 좋음과 기쁨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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