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8
제23호
2015.8
해방 70주년을 돌아보다
www.laborparty.kr
값 10,000원
특집
해방 70주년을 돌아보다 기획 ■ 다시 생각해보는 IMF 숨은 문화예술 당원 찾기 ■ 음악평론가 나도원 대중음악, 그리고대중정치
표지 이야기
음악평론가 나도원
대중음악, 그리고 대중정치
미래에서 온 편지 제23호 발행인 김상철 편집인 이장규 위원회 김건담 김성현 김혜연 박권일 백시진 장석준 정정은
“내가 음악에 대해서 얘기하는 대중성이라는 것과 진
정철수 조윤호 최백순
보정당의 대중성이라는 것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사람
교 열 김혜연 정정은
들은 대중음악을 상업음악과 등치시킨다. 보통 상업적
디자인 고미숙
이고 잘 팔리는 것이 대중성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건 틀린 말이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잘 담아내고 녹여 내는 것이 대중성이고, 그래야 역사성도 갖게 된다. 대중정당이라는 것도 많이 알려지고 표 많이 받는 정 당이 아니다. 구성원들의 삶이 녹아 있는 정당이 대중정 당이고, 몇몇 사람들이 아니라 당원들이 움직이는 정당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 영등포, 라00407) 발행일 2015년 7월 26일 주 소 서울 영등포구 국회대로 664 한흥빌딩 2층 노동당 전 화 02) 6004-2006, 2007 팩 스 02) 6004-2001 이메일 laborzine@gmail.com
이 대중정당이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하는 대중음악의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대중성과 진보정당의 대중성은 같은 것이다. 그런 가치
인 쇄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973-15 원일컴
를 지켜나가고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나도원 당원의 인터뷰 전문은 114~121쪽 <숨은 문화예술 당원 찾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격 10,000원
미래에서 온 편지
‘ 미래에서 온 편지’ 는 영국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작가, 미술가인 윌리엄 모리스가 1891년에 낸 소설 제목
News 『News from Nowhere』 을 우리말로 의역한 것입니다. from Nowhere
nowhere는 ‘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는 뜻입니다. ‘ 유토피아’ 라는 말의 원래 의미도 ‘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고 하지요. 이제 노동당의 기관지에 ‘ 미래에서 온 편지’ 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한국 사회의 답답한 현재에 햇살을 들이는 미래의 틈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고 보니 nowhere는 now+here(지금 여기)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미래가 되기 위해, 이 편지를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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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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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띄우며 회자정리, 거자필반|<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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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모집
지금+여기 노동당 6 10
노동당이 세상의 희망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함께 힘을 모아주십시오|최승현 2015년 비상대책위원회 사업계획|김상철
특집 ■ 해방 70주년을 돌아보다 16 해방이전 사회주의운동 소고(小考)|최백순 23 ‘식민지 근대화론’ 에서 근대 비판으로|안효상 29 노동조합의 독자성을 보장하라!|예대열 34 김구의 길, 김규식의 길|장석준 39 끝나지 않은 박정희 시대|김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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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진보정치 열전 11|전북도당 비대위원장 허옥희 “유쾌하고‘아쌀한’타고난 조직가” |이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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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표절당한 글, 추방당한 기록 노동자|서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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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포럼 재개발과 문화유산, 정치와 역사 사이①
무악제2구역 재개발로 살펴보는 도시이야기|김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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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제23호
·목차
기획 ■ 다시 생각해보는 IMF 46
브레턴우즈 체제와 IMF|유승경
50
국제통화기금의 진화와 한계|지주형
지역에서 현장에서 76
국민의 선택, 최저임금 1만원|구교현
80
초보 위원장이“숨은 강서당원을 찾습니다” |박예준
84
먼 좌파 이웃 좌파⑰ 미국 대선‘사회주의자’후보 버니 샌더스의 정책|장석준
90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메르스를 타고 토건이 왔다|김상철
100
연속기획 한국 대학 체제의 형성⑧ 대학도 산업이다|김예찬
삶과 문화 102
성정치 칼럼 2015년, 서울과 대구에서의 자긍심 행진|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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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공업사④ 재미는 나누고, 가치는 더하고, 지역은 살리고!|화덕헌
110
오보로 보는 한국언론 ‘오보’ 에‘오버’ 하는 KBS, 이승만은 성역인가|조윤호
114
숨은 문화예술 당원찾기 음악평론가 나도원 대중음악, 그리고 대중정치|현린
122
노래의 꿈 제발|민정연
126
만화 파견의 품격?|공기
128
편지를 접으며 다시 친숙해지기|박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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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띄우며
회자정리, 거자필반
지난 6.28 당대회 이후, 진보결집 관련 당원총투표 부의안이 부결된 데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당 대표가 사퇴하고 일부 당원들이 탈당하거나 탈당을 준비하는 조직에 가담하는 안타까운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7월 11일 열린 전국위원회에서 중앙당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 김상철 서울시당 위 원장)를 구성하는 등 당의 체계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노력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떠난 분들의 정치적 판단에 대해선 굳이 말씀드릴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누군가 말했듯이, 삶의 어느 길목에서 만났더라도 언젠가는 헤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회자정리(會者定離)’ 까 지만 이야기할 뿐, 바로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잘 언급하지 않습니다.‘회자정리(會者定離)’다음에 오는 말은‘거자필반(去者必返)’ 입니다. 간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뜻이지요. 물론 그간의 역사적 경험을 보 면, 간 사람이 반드시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지요. 하지만 다시 돌아올 가능성을 아예 포기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정치란 가능성의 예술이니까요. 누군가 다시 돌아올 때, 지금보다 더 좋고 단단한 정당이 되어 그 분들을 맞이하는 것이 남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물론 당분간은 지금보다 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좋은 정당이란 단순히 규모나 세력이라 는 하나의 기준으로만 평가될 수 없습니다. 작더라도, 스스로 끊임없이 자기혁신을 하고 미래에 대한 새 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내부적으로 단단해지는 일이 우선입니다. 그럴 때만이 외부와의 연대나 결집 또한 가능합니다. 스스로 일어서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함께 걸어갈 수 없습니다. 어려워도 스스로 일어서기 위한 노력부터 해야 합니다.
설사 그 과정이 오래 걸리더라도, 좀 더 길게 보면 우리의 가치와 비전이 확산될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 좌파의 제1 덕목입니다. 마침 8월은 해방 70주년이 되는 달입니다. 이번 호 특집으 로 해방 전후의 역사를 다루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좌파운동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거의 맥이 끊기다시피 했지만 80년대 이후 다시 부활했습니다. 여전히 더디다고는 하나, 한국전쟁 이후부터 박정희 시기까지에 비하면 급속히 확산된 셈입니다. 역사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는 8월이 되었으면 합니다.
2015년 7월 26일 <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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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모집 오늘 우리의 한 걸음이 길을 엽니다. 미래가 됩니다. 우리는 길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 사람과 자연이 공존 가능한 지구생태계, 차별과 소외 넘어 모두가 평등한 세상, …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밑그림을 그려나가면서 없는 길을 만들고, 스스로 길이 됩니다. 그래서 노동당의 꿈은 곧 <미래에서 온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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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노동당
노동당이 세상의 희망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함께 힘을 모아주십시오 당대표 사퇴부터 비상대책위원회 구성까지 최승현 전 당대표 권한대행, 전 부대표
6.28 당대회에서의 진보결집 당원총 투표 부결을 이유로 2015년 7월 3일 나 경채 대표가 사퇴했습니다. 여러 당원들 과 인사들이 예상했던 일이고, 걱정했던 일입니다. 당대회 전에 고문단회의가 있었습니 다. 고문단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우려 하면서, 회의를 마치고“당원 모두 당대 회 결정을 존중하고 따를 것이라 믿습니 다. 당원 동지에 대한 존중과 믿음을 확 인하는 당대회, 진보정치 역사에 남을 당 대회로 승화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민주 주의의 기본원칙을 확인하고 지키는 것 이 진보정치의 새로운 출발이 될 것입니 6.28 정기당대회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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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발표하기까지
7월 11일 전국위원회 전에 열린 중앙집행위원회 간담회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했지만 당대회 이후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았습니다.
당대표가 사퇴하면서 저와 문미정 부대표가 대표단회의를 하였고, 제가 대표 권한대행으로 선출됐습 니다. 이후 당 운영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나 또한 사퇴를 할 것인가? 임기를 마칠 것인가? 고민이 됐 습니다. 2011년 9월 4일 당대회 이후의 당 홈페이지 공지 글과 게시 글들을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당원들 의 기억, 그리고 그 아픔이 무엇인지 간접적으로 느꼈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그 당시와 어떻게 달리 처신을 해야 하나 고민을 했습니다. 고민 끝에 저와 문미정 부대표는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면 부대표직을 사퇴할 뜻을 밝히고, 비상대 책위원회를 구성하는 전국위원회 소집을 공지했습니다. 짧은 시간의 권한대행 기간에 굳이 당직 인선 등 을 하는 것은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고, 최소한의 업무를 해나가면서 과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야겠다 마음먹었습니다. 대표와 함께 사퇴한 당직자들도 많았지만, 꿋꿋이 남아있는 당직자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썰렁해진 당 사무실과 깨끗이 정돈된 책상들은 남은 이들에게 가슴 아픈 모습이었습니다. 한 분씩 만나서 당이 다시 자리를 잡을 테니 조금만 더 힘을 내자고 말했습니다. 과거 대표단회의에는 실장들만 배석을 했던 것과 달리 모든 당직자들이 함께 모여서 회의를 했고, 직후에 집행위회의를 하면서 급하게 처리할 일들을 해냈 습니다. 무엇보다 조직실 구성원이 모두 사퇴한 상태에서 안식휴가 중에 복귀한 공태윤 국장에게 정말 고 마웠습니다.
권한대행 기간에 제일 중요한 일은 비상대책위원회를 제대로 잘 구성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권한 지금+여기 노동당 7
대행이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을 하실 분들을 일일이 찾아뵈어야 할지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방식 보다는 고문단회의를 통해서 좋은 방식을 찾아내고, 당원들의 마음을 모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 니다. 7월 8일 수요일에 고문단회의가 열렸습니다. 고문님들 모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의 공 적질서가 무너졌다는 데 개탄을 금치 못하시며, 현재 당의 공적질서로 남아있는 중앙집행위원회가 책임 지고 당을 이끌어나가는 비상대책위원회 구상에 대해 제안해주셨습니다.
고문단회의 전까지는 중앙집행위원회 소집을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고문단의 제안도 있고 하 니, 직후에 중앙집행위원회 간담회를 소집했습니다. 예정된 전국위원회가 열리기 2시간 전인 7월 11일 토 요일 12시에 중앙집행위원회 간담회를 열어서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에 대한 안건을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시도당위원장, 부문위원장으로 구성되는 중앙집행위원회 성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비상대책위원회 구 성과 관련한 논의를 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의견을 구했지만, 비상한 시국에 비상대책위원회를 몇 명으로 할지, 어떻게 구성할지, 누구로 할지는 제안하지 못했습니다. 무책임한 것이 아닐까 생각도 들었지만 중 앙집행위원들이 함께 고민을 나누면서 결론을 내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중앙집행위원회 간담회에는 서울, 인천, 충남, 전남, 광주, 울산/노동위, 부산, 경북, 경남, 장애인위, 문예위, 건강위, 청학위, 농업위에서 참석을 해주셨습니다. 간담회는 당대표 사퇴 이후의 경과보고로 시 작해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에 대한 의견들을 나누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우선, 고문단회의에서 권고한 바처럼 중앙집행위원회가 책임지고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자고 결의 했습니다. 성원을 중앙집행위원들로만 할지 좀 더 확대할지도 논의했지만, 만약 좀 더 확대를 한다면 구 체적으로 누구에게 제안을 할지도 정해야 하는데, 시간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당장 정할 수가 없었습니 다. 결국, 중앙집행위원이 책임을 지는 것이 제일 나은 방향이란 생각으로 중앙집행위원들로만 구성하기 로 결정했습니다. 비상대책위원의 정수는 여성할당을 고려해 세 명으로 정했습니다.
이후 비상대책위원에 대한 추천을 받았고, 김상철 서울시당 위원장, 김규찬 인천시당 위원장, 이경자 농업위원장이 추천되었습니다. 그중 김규찬 위원장은, 비상대책위원회를 당내 여러 세력들이 함께 구성 하고 당내 화합을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로 추천되었으나, 현재 구의회 활동으로 바빠서 여러 번의 권유에 도 불구하고 고사하셨습니다. 이후 이건수 강원도당 위원장이 비상대책위원을 할 의사가 있음을 전하셨 고, 최종적으로 김상철, 이경자, 이건수 위원장이 비상대책위원으로 추천되었습니다. 비상대책위원장에 대해서는 3인 공동위원장 제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집중해서 당무를 해나가고 책 임소재가 명확해지기 위해서는 1인 위원장 체계가 더 좋다는 의견이 많아,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김상 철 서울시당 위원장을 비대위원장으로 추천하는 의견이 있었고, 김상철 위원장도 흔쾌히 수락을 했습니 다. 8
7월11일 전국위원회에서 김상철 위원장, 이경자 위원, 이건수 위원으로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이후 전국위원회에서 김상철 위원장, 이경자 위원, 이건수 위원으로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데 만 장일치로 찬성했고,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이 완료되었습니다. 전국위원회가 끝날 무렵, 중앙당의 공백을 메운 당직자들이 인사를 드리고, 저와 문미정 부대표도 사 퇴인사를 드리며 공식적으로 부대표직을 내려놓았습니다.
당대표가 사퇴하고, 여러 당원들이 탈당을 하고, 당이 희망이 없다고 이야기를 하는 때입니다. 당의 일 상적인 업무를 추진하는 동시에, 당대표 선거도 잘 준비하고, 당의 희망을 만들어가야 하는 막중한 임무 가 비상대책위원회에 부여됐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책무는 지금의 과정에서 보듯이 단지 비상대책위원회만의 몫이 아닙니다. 함께 제대로 당을 잘 만들어가자고 중앙집행위원회가 결의했고, 고문단의 든든한 지원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무 엇보다도 당원들의 의연한 신뢰가 필요할 것입니다. 각종 투쟁현장의 최선두에 우리 당원들이 있습니다. 수십 년의 진보좌파운동 역사의 궤를 이어가는 우 리 노동당입니다. 비상대책위원회가 지금의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하고, 노동당이 세상의 희망으로 거듭 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저도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가겠습니다. 당원 동지들, 비상대책위원 회에 함께 힘을 모아주십시오.
지금+여기 노동당 9
지금+여기 노동당
2015년 비상대책위원회 사업계획 당대회 후속조치 및 조직 안정화 김상철 비상대책위원장
당 비상대책위원장 김상철입니다. 지난 전국위원회에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출된 후 밝혔던 몇 가지 부분에 대한 사업계획을 내놓습 니다. 사실 사업계획을 통해서 노동당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우려를 모두 불식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 다. 하지만 비대위가 수임한‘당의 조속한 정비’ 라는 역할은 단순히 몇몇 비대위원들의 노력만으로 달 성되기 어렵고, 각 당부와 더불어 당원들, 그리고 노동당에 여전히 애정을 가지고 있는 분들과 함께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선 지금까지 점검한 당의 재정적 정비 방향에 대한 계획과 더불어, 총선기본계획에 따라 우선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부분을 중심으로 사업계획을 마련하고 결정 했습니다. 8월부터 본격적인 당직선거에 들어가면 이 과정에서 지난 진보결집 과정에 대한 평가와 새 로운 역할에 대한 고민, 그리고 노동당 노선을 만들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의제들을 만들어내는 과정 을 담은 계획을 마련하겠습니다. 노동당은 한두 명의 뛰어난 현자의 조직이 아니라 다수의 당원이 가 진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만들어진 조직임을 확인합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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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1일 전국위원회에서 선출된 비상대책위원회. 왼쪽부터 이경자 위원, 이건수 위원, 김상철 위원장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1. 배경 노동당은 6월 정기당대회 이후 권한대행 체계로 전환되었으며, 7월 4일 4기 4차 전국위원회를 통해 비 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가 구성되었다. 당규에 의한 주요 당직에 대한 보궐선거 종료 시까지 조직의 유 실을 최소화하는 한편, 당면한 대내외적 현안을 대응하기 위한 기구로서 임시적인 집행기구의 역할을 맡 게 된다. 이에 비대위 내의 역할과 사업의 내용을 명확히 하고, 이의 집행과 평가를 위하여 사업계획을 작 성하고 확정한다.
2. 구성 및 내용 4기 4차 전국위원회에서 비대위가 구성된 직후, 비대위원장은 두 가지 부분에서의 비대위 운영 방향을 제안한 바 있다. 첫 번째는 가장 신속하게 당직선거 절차를 진행하여 조직의 정상화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내용이었고, 두 번째는 지난 당대회에서 확정된 총선기본계획 및 장기성장전략에 따른 후속조치들을 차질 없이 수행 하고, 당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조직/재정진단을 실시해 이 결과를 차기 대표단에게 제출하겠다는 내용이 었다. 이에 따라 비대위 사업계획은 크게 (1) 당직선거 추진 (2) 후속조치 및 조직진단으로 구분된다. 지금+여기 노동당 11
(1) 당직선거 추진 6기 대표단 총사퇴에 따라 3개월 내에 7기 대표단을 선출해야 함 당원들의 편의, 선거관리 효율성, 투표율 제고 등을 위해 각급 선출직 당직자 보궐선거를 포함한 동시선거가 필요함 복수의 일정 중에서 선거일정 판단 : 7월 24일 중앙선관위 회의 전까지 각급 선출직 당직자 거취(현직 유지 또는 사퇴 여부) 확인 : 7월 말까지 ■선거일정 1안 8월 3일(월)
선거공고
8월 7일(금)
선거인명부 작성기준일
8월 8일(토)~10일(월)
선거인명부 열람 및 이의신청기간(3일간)
8월 11일(화)
선거인명부 확정일
8월 12일(수)~18일(화)
후보자등록기간(7일)
8월 19일(수)~9월 6일(일)
선거운동기간(19일)
9월 7일(월)~11일(금)
투표
9월 14일(월)~18일(금)
결선투표
■선거일정 2안 8월 10일(월)
선거공고
8월 14일(금)
선거인명부 작성기준일
8월 15일(토)~17일(월)
선거인명부 열람 및 이의신청기간(3일간)
8월 18일(화)
선거인명부 확정일
8월 19일(수)~25일(화)
후보자등록기간(7일)
8월 26일(수)~9월 13일(일)
선거운동기간(19일)
9월 14일(월)~18일(금)
투표
9월 21일(월)~25일(금)
결선투표
■7기 대표단 당내선거비용 예산안 내 역
예 산
당내선거비용
3,000,000
합계
12
3,000,000
비
고
내
역
집
행 (안)
대표단 선거공보회의비
회의비
50,000
및 발송비용
공보물
1,300,000
TM비용
750,000
출장비
400,000
문자발송비
400,000
소모품비 외
100,000
(2) 후속조치 및 조직진단
총선기본계획 후속조치로서, 9월까지 4차에 걸쳐 진행될 총선출마지역 선정 작업과 연동한 조직현황 파악사업, 하반기 의제사업의 집중을 위한 의제공약화사업의 추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조직현황 분 석 및 총선준비태세 점검을 위한 사업은 집행위원장을 매개로 하는 실질적인 점검사업으로 추진하고, 의 제사업의 경우에는 두 가지 핵심의제의 구체화를 위한 당내 워크숍 및 당원이 직접 참여하는 총선의제발 굴사업으로 정책당대회까지 수렴하는 과정을 준비한다.
총선 핵심의제 논의를 위한 워크숍 개최 지금까지 이원화한 총선준비사업을 중앙당 집행위와 총선준비위원회의 유기적 결합으로 일원화 · 총선준비위원회 지역구조직사업 : 집행위원장 및 조직실 · 총선준비위원회 산하 전략의제사업단 : 홍보실, 편집실 · 총선준비위원회 산하 총선기금위원회 : 살림실, 홍보실 총선전략지역구 공개 모집 : 4차(7월17일, 7월말, 8월말, 9월말)에 걸쳐 진행 일반지역구 준비 현황 점검 총선기금 조성을 위한 홍보작업
조직진단의 경우에는 조직의 지속가능성에 초점을 두고, 기존의 사무총국 구조진단 및 개선, 그리고 현행 교부금제도가 가진 문제점을 개선하는 데 주력한다. 이를 위해‘적절한 임금보장과 업무의 복합화’ 를 기조로 하는 조직개편안을 마련하는 한편, 현행‘현상유지적 교부금제도’ 를 당의 확대에 유인을 제공 하는 보조금체제로 개편한다. 전자를 위해서 사무처규정을 개선하고 후자를 위해서 회계규정을 제정한 다. 현행 교부금제도의 한계 : 현행 교부금제도는 교부금을 창당 광역시도당과 미 창당 광역시도당으로 구분해 정산함 미 창당 지역은 적립금 형식으로 교부함으로써, 현재‘당월 최종 잔여금’ 이 적립되어 있는 상황 미 창당 지역은 회계보고의 의무가 없기 때문에 당원들이 재정상황을 확인하기 어려운 구조 교부금제도 개선방향 : 미 창당 지역의 경우 창당을 유인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설계해야 할 필요가 있고, 재정의 투명 성을 높이고 사업의 흐름을 알 수 있는 회계보고 공개를 의무화해야 함. 산술적인 교부비율조정이 아닌, 교부금 전반에 대한 인식개선과 현재 당의 운영수준에 맞는 체 질개선이 필요
지금+여기 노동당 13
각각의 조치들은 차기 대표단을 통해서 전국위원회 등 의결절차를 거쳐야 하는 만 큼, 단일안으로 제출하기보다는 비대위안과 더불어 보수적안과 적극적안, 총 세 가지의 옵션으로 구체화하여 제시함으로써 차기 대 표단의 수용성을 높인다. 이와 별개로 현재 비대위를 통해 부문위 원회정비 및 사업단정비를 병행하며, 이는 비대위원장을 제외한 2인의 비대위원의 책 임 하에 집행한다.
3. 추진계획 7월 중 위와 같은 사업계획을 전 당원들 에게 공지하고 집행한다. 이와 별도로 8월 부터는 장기성장전략에 부합하는 당의 정치 전망 및 전략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 이를 위해 당직선거 및 총선의제개발까지 연동하 는 정책당대회를 제안하고 준비한다. 8월 중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시도당부간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위한 내부 토론을 진행한다. 또 정책의 제와 관련하여 당원들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사업을 대표단 선거과정을 활용하여 집행한다. 이를 통해 서 8월 중 정세분석 및 정치전략에 대한 2차 사업계획을 수립·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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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해방 70주년을 돌아보다 8월은 해방 70주년이 되는 달이다. 해방 전후는 이후 한국사회의 근본적 틀을 규정한 시기이다. 이 시기를 되돌아본다는 측면에서, 일제하와 해방공간의 좌우파 운동을 인물 중심으로 살펴보 고, 식민지근대화론과 박정희의 경제정책 등 해방 전후의 가장 중요한 경제사적 쟁점도 함께 돌 아보았다. 우리는 늘 역사로부터 배워야 한다.
특집 해방 70주년을 돌아보다 15
조선노동총동맹 창립 기념 사진
특집 / 해방 70주년을 돌아보다
해방 이전 사회주의운동 소고(小考) 고려총국 국내부를 중심으로 각 조직들의 사회주의경향과 민족주의경향이 대립을 지나 빠르게 분화 중이 었다. 재조직화와 단일한 조직 건설의 필요성이 자연스럽게 대두되었다. 그리 고, 그 갈증을 더 느끼는 쪽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최백순 레드북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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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봉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국내로 다시 돌아온 때는 1923년 봄이었다. 국내를 떠난 지 꼭 이십 개월만이었다. 경성을 떠나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회에 참석한 후 치타에 잠시 머무르다 베르흐 네우딘스크1)를 거쳐 경성으로 돌아온 긴 여정이었다. 신철은 국내에 먼저 들어와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김찬을 만나 국내의 현황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세 사람의 회동은 쉽게 이뤄졌다. 김재봉은 고려총국 국내부2)를 조직하는 일이 자신의 임무임을 설명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고려총 국이 파견한 김재봉과 신철, 두 사람의 임무가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신철을 통해 이미 어느 정도 파악을 하고 있었던 김찬은 신속하게 움직일 것을 제안했다. 김찬은 그동안 연계를 맺어왔던 무산자 동맹회와 조선노동연맹회에 주목하고 있었다.
국내당의 맹아, 고려총국 국내부의 탄생 김재봉과 김찬은 조선노동연맹회의 윤덕병과 무산자동맹회의 원우관, 신백우 등을 만나 고려총국 국 내부를 함께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쉽게 의견일치에 도달했다. 제안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 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시기적으로 국내의 각 조직들의 사회주의경향과 민족주의경향이 대립을 지나 빠르게 분화 중이었다. 재조직화도 필연적이었지만 단일한 조직을 건설해야한다는 필요성도 자연스럽게 대두되었다. 그리고 그 갈증을 더 느끼는 쪽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거기에다 그동안 국외에서 계속된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대립이 국내까지 그대로 전달됨으로써 국 내 사회주의자들의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다. 결정적인 이유는 코민테른이 직접 지원하는 조직을 국내에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백지 위에 새롭게 당의 맹아를‘함께’건설하자는 제안은 빠르게 힘을 얻었다. 또 하나의 희소식은 북성회가 참가한다는 것이었다. 정태신을 베르흐네우딘스크에 대표로 파견했던, 재일본 한인공산주의자단체라는 긴 이름의 이 조직은 지난해 겨울 그 이름을 북성회라고 변경했다. 리더는 김약 수였다. 1923년에 결성된 고려총국 국내부는 김재봉, 김찬, 신철을 포함해 북성회의 김약수, 조선공산당(중립 당)의 원우관, 윤덕병, 신백우, 그리고 국내상해파의 이봉수가 참여했다. 이봉수의 참여는 국내상해파의
일부가 참여한다는 메시지를 주는 의미가 있었다. 국내부의 책임비서는 김재봉이 맡았다. 국내부라는 비선조직이 공개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대중적인 외곽조직이 당연히 필요했다. 1923년 여름,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한 다양한 모임들이 계속됐다. 신사상연구회라는 단체가 탄생한 것은 그해 7월이었다. 김찬, 윤덕병, 이준태 등이 전면에 나섰고 글 솜씨가 뛰어난 홍명희를 끌어들였다. 홍수
1)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의 통합당대회가 개최된 곳이다. 오늘날의 울란우데(Ulan-Ude)이다. 대표권의 다수를 점하고 있던 상해파의 이동휘는 일방적으로 대회를 진행했다. 이에 반발한 이르쿠츠크파는 대회를 보이콧하고 치타에서 별도의 대회를 개최했다. 수차례의 조정을 무시한 두 파에 대해 코민테른은 고려공산당의 해산을 통보했다. 2) 코민테른은 고려공산당 해산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 꼬르뷰로(고려총국)을 설치하고, 국내에 당 건설을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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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넘쳐나는 신사상을 연구한다고 전면에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대중적인 강연 등을 통해 조직을 확대 했다. 하지만 김재봉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잠행했다. 김찬과 역할분담을 한 것이 분명했다. 신사상연구회는 조금씩 덩치를 불리며 조직을 확대해 나갔지만 국내부는 여전히 제자리를 잡지 못했 다. 비밀조직이라는 특수성도 작용했지만 북성회가 독자적인 강연을 계속하며 활동하는 것도 국내부의 구심력을 강화시키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였다. 북성회는 독자적으로 국내에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움직 임을 계속했고, 고려총국 국내부는 신사상연구회를 통해 외연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한 지붕 두 가족 은 그나마도 이름뿐인 상태로 전락했다. 해가 바뀌자 신철은 국내부에서 이탈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곧 북성회에 가담한다는 의미였다. 국내부는 사실상 이르쿠츠크파와 조선공산당(중립당) 중심의 조직으로 외 형이 축소되었다.
서울파와의 타협과 조선노농총동맹의 탄생 이해 여름, 평양 양말공장 여성노동자들 1천여 명이 파업에 나서고, 인천 가토정미소에서도 5백여 명 이 임금삭감에 반대해 파업하는 등 노동자들의 저항이 전국적으로 분출되었다.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경 성의 주요 고무공장은 담합을 통해 일방적으로 임금을 삭감한다는 통보를 내렸다. 일자리를 원하는 여성 들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에 손쉽게 이익을 올리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일본인들의 생 각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해동(海東)을 비롯한 네 개 회사의 여성노동자들이 연대총파업에 나섰기 때문이 다. 여성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결사체를 아사동맹(餓死同盟)이라고 명명했다. 파업은 열흘 만에 여성노동자 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윤덕병과 안동 출신의 김남수는 <경성고무 여공(女工) 동맹파업의 전말(顚末)>이라는 보고서를 제작해 전국에 배포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였다. 파업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 주목적이었지만 이면에는 조선노동 연맹회의 역할을 환기시키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노동연맹회가 새로운 전국조직을 만들겠다 고 선언한 때도 이 무렵이었다. 그런데 조직의 명칭이 조선노농총연맹이었다. 노동자뿐만 아니라 농민들 도 포괄하는 전국조직을 건설하겠다는 의미였다. 국내부에 깊숙이 참여하고 있는 조선노동연맹회의 윤덕병과 강달영의 움직임에 대해 서울청년회는 즉 각적으로 맞불을 놓으며 대응했다. 조선노동공제회 출신의 서울파 차금봉을 중심으로 조선노농대회 준비 회의 결성을 선언한 것이다. 고려총국 국내부는 당 건설과 그를 위한 대중조직의 확대를 놓고 서울파와 계속되는 대립상태를 피할 수 없었다. 일단 조선노동연맹회가 주도하는 조선노농총동맹이 우위를 점했 다. 하지만 두 개의 중앙조직이 움직이면 지방조직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지방의 작은 조직들은 오랫동 안 학연과 지연으로 관계들이 얽혀 있고, 시골의 경우 혈연으로 연결된 경우도 적지 않다. 중앙의 노선 중 어느 쪽이 옳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방 조직이 분열되는 데 모두가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중앙의 18
조직이 단일한 조직으로 통합하라는 압박이 지방으로부터 전해져 경성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지방조직들 의“적은 일제다” 라는 간명한 슬로건이 힘을 발휘한 것이다. 이런 흐름들은 1923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강 력하게 움직였다. 이듬해 대구와 안동을 중심으로 광주까지 거의 대부분의 지방조직들이 가입한 남조선 노농동맹(남선노농동맹)이 결성되었다. 서정 희, 최원택, 정운해 등이 중심이 된 남선노농 동맹은 국내부의 조선노동총동맹과 서울파
“적은 일제다” 라는 간명한 슬로건이 힘을
의 조선노농대회 준비위에 통합을 주문했다.
발휘했다. 중앙의 조직이 단일한 조직으로
남선노농동맹은 3대 강령 중 하나로“노농운
통합하라는 압박이 지방으로부터 전해졌
동의 전력(戰力)을 집중하기 위해 전국적 총
다. 이듬해, 거의 대부분의 지방조직들이
단결” 을 명시할 정도였다. 국내부와 서울파
가입한 남조선 노농동맹이 결성되었다.
모두 예기치 않은 전개였다. 이럴 경우 선택은 두 가지다. 정면 돌파냐
타협이냐. 국내부의 노동총책이나 마찬가지인 윤덕병은 언제나 정면 돌파를 선택해왔다. 하지만 김재봉 은 국내부의 야체이카를 비밀리에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고, 김찬은 언제나 전략가였 다. 성급한 이보전진보다는 우회로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일보 전진하는 데 탁월한 인물이었다. 이듬해 양 조직은‘타협’ 에 참여했다. 국내에서는 고려총국 국내부와 서울파의 지속적인 대립으로 당 건설을 위한 발걸음이 순조롭지 못했 다. 하지만 대중조직은 조선노농총동맹으로 통일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내부의 위기와 13인회 그런데 악천고투하며 전진하는 국내부와 달리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총국은 스스로 와해되는 중이었 다. 고려총국이 설치됨에 따라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대립은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보 이틴스키3)가 난데없이 아군진영에 화살을 쏘았다. 1923년 여름, 보이틴스키가‘윤자영그룹’ 이 적대적인 행위를 계속하면서 혁명운동을 방해한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윤자영그룹이란 곧 상해파 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이동휘그룹이나 마찬가지였다. 무늬뿐인 고려총국의 파국 을 선택한 이는 이동휘였다. 새해를 하루 앞두고 이동휘는 이동휘·정재달·이성은 공동명의로 고려총국의 탈퇴를 선언했다. 이동 휘는“고려총국이 정치적 매음자와 간통” 하는 데 열중하면서 지도할 자격을 상실했다고 맹비난했다. 파
3) Voitinsky, G. N. 코민테른이 창설된 이후 극동지역의 전권대표 역할을 하면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 정치적으로는 고려공산 당 이르쿠츠크파를 편향적으로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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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읍 오미리에 있는 김재봉 생가. 추모비에 적혀 있는 '조선의 독립을 목적하고'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할 때 이력란에 쓴 내용이다. '공산주의를 희망함'이라는 두 단어는 끝내 새겨넣지 못했다. (사진 : 최백순)
국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고 있던 고려총국 국내부는 그 위치마저 불분명해졌다. 상부기관이 사실상 해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고려총국 국내부는 이제‘국내부 파’ 로 호명되기 시작했다. 해가 바뀌면서 평양교도소에서는 트로이카가 감옥 문을 열고 나왔다. 1년 6개월 전 고려공산청년회 중 앙을 국내로 이전하려다 체포된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이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것이다. 트로이카가 경 성에 입성하자 김재봉과 김찬은 곧바로 국내부의 또 다른 외곽조직인 청년조직의 결성에 착수했다. 1924 년 2월에 결성된 신흥청년동맹은 김찬과 박일병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실무는 트로이카와 조봉암 등이 사 실상 주도했다. 국내부는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고, 마지막 판단을 해야만 했다. 13인회. 통일적 조선공산당을 건설하기 위한 최초의 회합, 그 다른 이름이었다. 단순히 13인이라는 인 물들이 모였다는 뜻이 아니라 각 정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모인 회합으로서, 김재봉그룹(국내부), 고려공 산동맹(서울파), 북성회파 중앙(까엔당), 신생활파4) 등이 참여했다. 불과 1년 전에는 고려총국의 전권을 가 진 국내부가 당 건설을 주도했다면, 13인회는 각 정파가 대등한 위치에서 당 중앙을 건설하기 위한 모임 이었다. 그동안 전국적인 노동조직의 건설을 둘러싸고 서울파, 국내부, 북성회파의 힘겨루기가 계속됐다. 하지만 코민테른의‘통일조선공산당’ 이라는 방침은 요지부동이었다. 각 그룹들과 단일한 테이블을 꾸리
4) 조선청년총연합회를 이끌던 장덕수와 결별하면서 사회주의 경향으로 움직인 그룹이다. 장덕수는 고려공산당 상해파에 속해 있었 기 때문에 국내 상해파 좌파로 불린다.《신생활》 이라는 잡지에서 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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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은 불가피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총국이 와해된 것도 서울파로서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 다. 그렇게 탄생한 모임이 13인회였다. 13인이 누구인지,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졌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각 그룹별로 두 명씩 대표자 가 파견됐다. 고려총국 국내부를 대표해 파견된 사람은 김재봉과 신백우였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김재 봉이 전면에 나선 것이다. 언제나처럼 김찬은 전면에 나서는 대신 2선으로 한 발짝 빠져 있었다. 서울파의 대표는 김사국과 이영이었다. 마찬가지로 북성회파는 김약수와 김종범를 내보냈다. 마지막 그룹은 잡지 인《신생활》 에 관여하던 두 사람이었다. 유진희와 이혁로였다. 1년 전, 코민테른 고려총국에서 전권을 가지고 국내로 들어온 김재봉은 서울파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 했다. 김재봉과 김찬은 김약수의 북성회와 함께 고려총국 국내부를 출범시켰지만 오랫동안 국내에서 활 동해온 서울파의 대중조직에 대한 탄탄 한 기반은 가장 큰 난제였다. 그해 겨울 북성회마저 국내부에서 이탈하기 시작 했고, 이듬해 봄이 되자 국내부는 사실 상‘김재봉그룹’ 으로 전락했다. 서울파 가 그 빈틈을 비집고 반격에 나섰다. 13
국내부는 사실상‘김재봉 그룹’ 으로 전락했다. 서울파가 그 빈틈을 비집고 반격에 나섰다. 13 인회였다. 통일당의 건설 외에는 스스로의 존립 근거가 없었던 국내부도 13인회에 참여했다.
인회였다. 서울파가 주도하는 13인회에 무늬뿐인 국내부가 참여한 이유는 하나였다. 국내부는 통일당의 건설이라는 최초의 지침을 벗어날 경우 스스로의 존립근거가 없었다. 13인회의 주도권을 쥔 서울파는 김재봉그룹이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를 했다. 서울파는 13인회가 당을 건설하기 전까지는 해외에서 활동 중인 사회주의자들과 접촉을 금지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더 나아 가 코민테른과의 연락조차 중단할 것을 규정으로 만들라고 요구했다. 김재봉그룹의 사상적 고향은 바이 칼호 서쪽에 있는 조직이다. 이르쿠츠크파와 절연은 김재봉과 김찬의 시나리오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박 헌영과 트로이카들도 서울파의 주장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코민테른이 승인한 유일한 국내조직의 책임 자가 스스로 권한을 포기하고 중앙위원들에 임무 중지를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국내에 상부조직은 없지만 코민테른이 승인한 고려공청은 엄연히 코민테른의 공식조직이고 박헌영은 여전히 그 책임비서였다.
화요회 그리고 제1차 조선공산당 1924년 가을, 김재봉과 김찬은 13인회에서 철수를 결정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지전이 아니라 독자적 으로 당을 건설하겠다는 기동전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사국은 철수 결정을 너무 가볍게 보았 다. 김재봉과 김사국의 짧은 오월동주는 종로거리의 늦여름비와 함께 막을 내렸다. 13인회를 탈퇴한 이후 특집 해방 70주년을 돌아보다 21
김재봉과 김찬은 앞으로만 나가기로 결정했다. 1924년 늦가을부터 두 사람은 조선공산당을 창당할 때까 지 기동전으로 일관했으며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김재봉그룹은 당을 건설하기 위한 야체이카를 전국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 조직의 재편이 필요했다. 신사상연구회를 일사불란한 조직으로 체계를 개편했다. 1924년 11월 19일 화요 회라는 조직이 탄생했다. 흔히 알려진 바처럼 마르크스가 태어난 날이 화요일이었다고 해서 화요회라고 명명했다. 제1차 조선공산당을 창당하면서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조직이었고, 이후에도 김재봉그룹은 화요 파라고 오랫동안 불리었다. 이해 겨울 화요회는 당을 건설하기 위한 시나리오를 준비했다. 그리고 재경사회운동자간친회를 개최 한다고 선언했다. 첫 번째 기동전이었다. 경성에서 유명한 중국집 중 하나로 열빈루(悅賓樓)가 있었다. 정 초에 열빈루에는 150여 명이 넘는 사회주의자들이 빼곡히 자리를 잡았다. 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5)을 비롯해 조선노농총동맹에 참여한 비서울파들의 주요 활동가들이 거의 대부분 참여한 회합이었다. 김찬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의 회합은“운동을 통일하자” 는 지극히 당연한 결의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서울파를 제외한 조직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힘을 모은다는 암묵적인 약속을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날 의 대담한 기획은 모험이었고, 이 기획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후 삶은 지옥으로 가는 티켓을 예약한 것이 나 마찬가지기도 했다. 북풍회가 화요회와 본격적인 논의를 이어가자 서울파 지도부들에게는 적신호가 켜졌다. 그만큼 서울파는 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이 자신들의 예측을 뛰어넘어 빠르게 논의를 진행하 는 데에 대해 극단적인 위기감을 느꼈다. 김사국은 타협책을 제안했다. 하지만 화요회는 서울파의 제안을 냉정하게 거절했다. 서울파에게 더 충 격적인 상황은 북풍회와 조선노동당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계추의 무게를 움직일 수 있는 조직은 북성회였다. 북풍회는 여전히 중립적인 태도의 경계를 오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북풍회가 화요회와 물밑에서 논의를 진척시킨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어쨌든 화요회는 여전히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점이 북풍회로서는 약한 고리였다. 간친회에 이어 화요회가 내놓은 카드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였다. 1925년 2월 17일 공개적으로 발표 된 준비위원회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은 김재봉, 김찬, 강달영, 윤덕병,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조봉암, 이준태, 김남수 등이었다. 화요회 지도부가 전면에 나선 것이다. 준비위원으로 북성회의 정운해 등이 함 께 이름을 올렸다. 정운해는 영남과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남선노동총동맹(?)의 지도자 중 한명이었다. 이 는 곧 조선노동총동맹이 와해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에 일제의 시선을 분산시킨 이 들은 그 작은 틈을 이용해 전격적으로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김재봉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지 2년 만이었다.
5) 러시아에서 들어온 이극광과 이남두가 건설한 조직이다. 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공개적으로 활동하던 대중조직이었다. 이들의 비선 중앙의 이름은 스파르타쿠스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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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의 남대문로
특집 / 해방 70주년을 돌아보다
‘식민지 근대화론’ 에서 근대 비판으로 (서구적) 근대는 자본주의 체제의 자기모순이라는 내재적 비판과 생태적 위기와 다른 문화의 대항이라는 외재적 비판 모두에 직면했다. 근대 비 판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안효상 노동당 고문
특집 해방 70주년을 돌아보다 23
‘신민지 근대화론’ 의 출현 식민지 시기에 대한 인식과 해석은 한국 현대사의 중추였다. 근대를 국민(민족)국가의 형성, 그리고 국 민국가들 사이의 경쟁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우리도 다른‘정상적인’민 족과 마찬가지로 자주적인 발전의 길을 걸을 수 있었으나, 우리는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민족에 의해 식민 지로 전락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해방을 통해 자주적인 독립 국가를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시점 에서 볼 때 식민지 시기는 당연히 일종의 일탈이었고, 하루라도 빨리 그 시기의‘잔재’ 에서 벗어나는 것이 당면한 과제였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에서‘과거 청산’혹은‘과거사 정리’ 는 녹록치 않은 과제였다. 분단, 전쟁, 냉전이 라는 체제 속에서‘친일파’ 가 도리어 한국의 주류세력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19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운동과 민중운동이 자신의 역
1980년대 후반 이후 민주화가 이루어지
사적 기반을 식민지 시기 혹은 포스트식민지
고, 그보다 더 놀라운 속도로 경제성장이
시기로 잡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1980년
진행되면서 지적·이데올로기적 풍경이 바뀌었고, 이는 다시 시민지 시기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강요했다.
대 급진주의자들이 현 시기의 과제를 도출하 기 위한‘사회구성체 논쟁’ 을 전개할 때 식민 지 사회 성격 논쟁이 따라붙은 것도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이후 민주 화가 이루어지고, 그보다 더 놀라운 속도로
경제성장이 진행되면서 지적·이데올로기적 풍경이 바뀌었고, 이는 다시 식민지 시기에 대한 인식의 변 화를 강요했다.1) 한국 경제가‘IMF 외환위기’ 라는 방식으로 위기에 빠졌을 때 많이 이야기되었던 말이 펀더멘털이었 다.‘한강의 기적’ 을 이룬‘네 마리 용’가운데 하나인 한국의 경제적 기초가 과연 튼튼한 것인가라는 질문 속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좀 더 넓게 보자면 뿌리 없는 현실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인데,‘식민지 근대 화론’ 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시각으로 식민지 시기를 보고자 한다. 이들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이루어진 한국 경제의 또 다른 성장에 놀랐고, 전반적으로 발전한 한국 경제의 뿌리로 식민지 시기, 특히 1930년~40년대 초의 공업화를 발견했다. 또한 이 공업화의 전제 조건으로 1910년대 에 실시된‘토지조사사업’ 을 발굴했다.2)
1)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의 민중운동을 다룬《민중 만들기 :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재현의 정치학》(이남희, 후마니타스, 2015)은 민중운동을“전형적인 한국의 포스트식민주의적 현상” 이라고 보면서, 많은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해방 이후의 역사는‘실패한 역 사’ 였다고 말한다. 이런‘역사 주체성의 위기’ 가 민중운동이라는‘대항 공론장’ 을 형성한 힘이었다. 2)《조선토지조사업의 연구》 (김홍식 외, 민음사, 1997); <식민지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의 재검토>(조석곤,《동향과전망》38.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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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식민지 시기가‘수탈’ 이 아니라‘개발’ 의 시기였고, 더 나아가 이런 개발이 한국 경제성장의 밑 거름이 되었다는‘식민지 근대화론’ 이 출현한 데에는 역사적 사회주의의 붕괴이자, 20세기 사회주의·공 산주의 운동에서 주로 쓰던 개념과 방법론의 폐기라는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이를 대신한 것이‘중진 자 본주의론’ 이었으며, 경제사학계의 장기경제통계 추계의 연구 성과가 나오면서 이를‘실증적으로’뒷받침 했다.3) 이런 식으로 구성된‘식민지 근대화론’ 에 대한 기존 역사학계의 반발과 비판은 매우 격렬했다. 그동안 한국 사학계의 주류 입장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식민지 수탈론’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제국주의의 식민 지 지배 논리인‘타율성론’ 과‘정체성론’ 을 비판하고 나온‘내재적 발전론’ 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내재 적 발전론에 따르면 조선 후기에 봉건 사회(중세 사회)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 사회(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이 민족 내부적으로 마련되고 있었다. 하지만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화는 이를 가로막고, 인적·물 적 수탈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이러한 수탈에 맞서‘저항’ 을 했고, 결국 (온전히 자주적 이지는 않지만) 해방을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이러한‘식민지 수탈론’ 에서 볼 때‘식민지 근대화론’ 은 한 마디로 어불성설이었다. 개발 혹은 근대적 조치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일들은 사실 식민지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이었고, 설사 개발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일제를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토지조사사업은 그 명목과 달리 일제에 의한 토지 수탈 및 지세 수탈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근대적인 지주제를 온존하는 사업이었다. 또한 식민지 시기의 공 업화에 대해서도 일본 독점자본에 의한 조선 공업의 장악, 원료와 생산 등의 식민지적 배치에 따른 불균 형 등 식민지적 파행성을 강조한다.4)
근대비판의 본격화 역사학이 과거의 사실을 그저 기술하는 게 아니라 논구(論究)하는 것이라고 할 때 역사는 끊임없이 다 시 쓰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장기 경제통계 추계에 근거한‘식민지 근대화론’ 의 식민지 시기 인식은 그간 ‘암흑시대’ 로만 그려졌던 식민지 시기를 자본주의 발전의 전사 혹은 토대로서 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역사학 연구의 상당한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논쟁이 학술 논쟁을 넘어서 이데올 로기적 전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라 학술 논쟁 자체가 퇴행하거나 무화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
3) 중진자본주의론의 대표적인 논자는 일본의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이다. 대표작은《近代世界史像の再構成》 (1991)과《세계자본 주의와 이행의 이론》(비봉출판사, 1991)이 있으며, 한국 학자들과 공동 연구로는《조선근대경제의 구조》(비봉출판사, 1989) 등이 있다. 중진자본주의론에 대한 역사학계의 비판으로는 주종환, <증진자본주의론의‘근대’개념과 신식민사관>(주종환,《역사비 평》29. 1994)를 보라. 4) 여러 글이 있지만 정돈된 글로는《한국 근대와 식민지 근대화 논쟁》 (정연태, 푸른역사, 2011)의 제1장을 보라. 주요 쟁점이었던 일 제의 농정 및 공업화 문제에 대해서는 각각 다음을 보라. <1930년대 일제의 식민농정에 대한 재검토>(정연태); <1930년대 일제의 ‘조선공업화’ 론 비판>(배성준,《역사비평》30. 1995). 또한‘식민지 근대화론’ 에 맞선 경제사적 연구로는《개발 없는 개발》 (허수 열, 은행나무, 2005)을 보라.
특집 해방 70주년을 돌아보다 25
일본이 조선의 경제를 독점할 목적으로 세운 동양척식주식회사
던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식민지 시기에 대한 인식 자체가 가지는 거의 무매개적인 정치적 성격 때문이 다. 간단하게 말하면‘식민지 근대화론’ 을 나쁘게 바라보는 시각에서 이런 논자들은 식민지 시기를 미화 한 친일파=매국노라고 보았고, 더 나아가 현 체제를 옹호하는‘어용’ 의 일종이라고 보았다(물론 반대편에 서는 기존 역사학계를 전혀 과학적이지 못하고 공상적인 추론이나 하는 집단으로 매도하기도 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각각 더 진전된 연구가 나오고, 분위기도 어느 정도 진정되면서 서로 배우거나 종합하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5) 여기에 더해‘식민지 수탈론’ 과‘식민지 근대화론’ 이 동일한 인식 지 평과 논리 구조 위에 놓여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근대성 자체를 문제 삼는 입장도 등장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두 입장 모두 근대화=선이라는 가정 위에 서 있고, 식민지 근대화론이 개발 자체를 강조한다면, 식민지 수탈론은 일제에 의한 개발은 진정한 근대화가 아니라 수탈일 뿐이라고 본다는 말이다.6) 이렇게 식민지 근대화론을 둘러싼 논쟁에 사선(斜線)으로 개입하는 관점은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 대화론을 공히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서구적) 근대성 자체를 문제로 삼는다. 이는 크게 자본주의 비판, 권
5) 이에 대해서는 <식민지 근대화론 연구 성과의 비판적 수용을 위한 제언>(조석곤,《역사비평》75. 2006); <수탈론과 근대화론을 넘어서 : 식민지 시대의 재인식>(조석곤,《창작과비평》96. 1997)을 보고, 앞서 언급한 정연태의 저서도 참고하라. 6) <다시 생각하는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과 민족주의>(고석규,《문학과학》31. 2002); <근대성의 내재하는 외부로서 식민지성/식민 지적 차이와 변이의 문제>(조형근,《사회와역사》73. 2007); ‘ < 식민지 근대화’논쟁의 한계 지점에 서서>(배성준,《당대비평》1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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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 비판, 지식 비판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자본주의는 인류의 일부에게 물질적 풍요를 가져 다주었을지 모르지만, 사회적 양극화와 사회적 불안을 가속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무한한 착 취를 통해 인간의 삶 자체를 위험에 빠트렸다. 다음으로 근대 권력은 근대 국가를 매개로 하여 국경부터 인간의 마음속까지 온전하게 지배하는 다양한 기제를 만들어냈다. 이는 끝으로 지식 비판으로 이어진다. 그 무엇보다 이성의 우위를 내세웠던 계몽사상은 이성/비이성의 이분법 도식 속에서 자신이 포획할 수 없 는 모든 것을‘타자화’ 함으로써 전제의 일종임을 드러냈다. 이러한 근대 비판은 근대성의 탄생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본격화된 때는 근대가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진보’ 의 아이러니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해진 20세기에 들어서였다. 대량 살상무기의 사용으로 인 한 어마어마한 전쟁 피해,‘계급의 적’ 에 대한 무자비한 테러와‘수용소 군도’ , 무감각한 관료제의 일반 화, 대공황, 풍요 속의 빈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끊임없는 배제 등등은 같은 세기에 이루어진 다른 수많 은‘진보’ 를 무색하게 했다. 이런 근대성에 대한 항의가 전 세계적으로 벌어진 사건이 68년 혁명이었다. 유형적으로 보면 제1세계에서는 자본주의‘문명’ 에 대한 항의가, 제2세계에서는 정치적 억압에 대한 저항 이, 제3세계에서는 제국주의적 억압에 대한 투쟁이 벌어졌다고 할 수 있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근대가 약 속한 단일한 진보에 대한 반대였다. 한국에서 이런 근대 비판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때는 87년 체제가 자리 잡으면서다. 87년 체제의 제도 적 민주주의는 다양한 정치적·사회적 공간을 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거
한국에서 근대 비판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때는
기서 다양한 권리의 이름으로 개인과
87년 체제가 자리 잡으면서다. 87년 체제의 제
집단의 요구가 등장했다. 청소년의 권 리, 동성애자의‘커밍아웃’ 과 권리 요구
도적 민주주의는 다양한 정치·사회적 공간을
에서 시작해서 급진적 페미니즘, 장애
여는 기회를 제공했고, 거기서 다양한 권리의
인 차별 철폐의 요구까지. 그리고 이 바
이름으로 개인과 집단의 요구가 등장했다.
탕에는 언제나 다원적이고 분권화된 정 치적·사회적 생태학의 목표가 있었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 68년 혁명은 폭발적인 형태가 아니라 지연된 발효의 형태로 나타났고, 따라서 마치 서구에서 68년 혁명이‘사후적으로 살았던 삶’ 처럼 포섭과 배제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러한 근대 비판 속에서 이제는 어느 누구도 손쉽게 (운동의) 중심이나 (역사적) 사명을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
피할 수 없는 과제, 근대 비판 근대 비판이라는 관점은 포스트식민주의라는 학제적 연구에 힘입어 식민지 시기를 또 다른 근대 혹은 ‘병렬적’근대인 식민지 근대로 개념화한다. 이런 용어 사용법은 겉보기에‘식민지 수탈론’ 이 아니라‘식 특집 해방 70주년을 돌아보다 27
민지 근대화론’ 의 손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조선이라는 일국의 범위로 볼 때 식민지이긴 했지만 결 국 근대성의 경험을 했다는 식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자본주의가 구체적으로 작 동하는 역사적 장인‘세계 경제’ 라는 개념의 도입이다. 이때 세계 경제는 최대의 이윤을 추출하기 위한 세 계적인 규모의‘분업 체제’ 이며, 이 속에서 자본주의는 다양한 형태의 착취와 수탈을 활용한다. 이렇게 보 면 식민지는 근대적인 자본주의 세계 경제 내에 있는 한 부분이 된다. 그렇다면 식민지‘근대성’ 은 바로 ‘식민지’근대성일 수밖에 없다.7) 하지만 한 가지 남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왜 자본주의 세계 경제 내의 국가가 민족(국민)을 단위로 구성 되었는가다. 근대적 민족 구성론에 따르면 (앤더슨의‘상상된 공동체’혹은 발리바르의‘허구적 종족성’ ) 민족 은 개인들을 민족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만들어냄으로써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로 통합하 는 과정이며 (물론 이 속에서 다른 갈등이 만들어지지만), 헤게모니를 행사하는‘국가 부르주아지’ 가 만들어 지는 과정이었다. 이렇게 구성된 민족은 중심부가 주변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적 수단이 되었다. 반대 로 주변부는 이 수단을 다시 저항의 틀로 만들어냈다. 민족주의가 이렇게 일반화된 시기가 20세기이며, 이에 따라 자본주의 세계 경제 내에는 무수히 많은 국민국가가 존재하게 되었다.8) 이렇게 보면 주변부의 근대는 식민지라는 조건에서 경험한 근대일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언제나 불 충분한 혹은 결여된 근대성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독립 이후에도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전반 적인 구조는 변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민지 수탈론’ 은 이런 변화 속의 불변화
‘식민지 수탈론’ 은 이런 변화 속의 불변화
에 기반을 둔다. 하지만 자본주의 세계 경
에 기반을 둔다. 하지만 자본주의 세계 경
제 내의 여러 국가들은 이러저러한 위치 변동을 경험한다.‘식민지 근대화론’ 은이 런 변화 속의 변화에 주목할 뿐이다.
제 내의 여러 국가들은 이러저러한 위치 변 동을 경험한다.‘식민지 근대화론’ 은 이런 변화 속의 변화에 주목할 뿐이다. 하지만 해방 70년을 맞이하는 지금 두 입장이 공히 근거하고 있는 (서구적) 근대는
저무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 체제의 자기모순이라는 내재적 비판과 생태적 위기와 다른 문화의 대항 이라는 외재적 비판 모두에 직면해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근대 비판은 어느 때보다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된다.
7) 포스트식민주의 및 다양한 근대성에 관한 논의는 무수히 많기 때문에 일일이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여기서는‘트랜스내셔 널 역사학’ 의 관점에서 이런 시도들을 정리한 다음 글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제국과 식민지를 연구하는 또 하나의 시각 :‘트랜스내셔널 역사학’ 과‘다양한 근대성’ >(박용희,《역사학보》203. 2009) 8)《상상의 공동체》 (베네딕트 앤더슨, 나남, 2003); Balibar and Wallerstein, Race, Nation, Class: Ambiguous Identities(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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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로동법령 실시 경축 시위대
특집 / 해방 70주년을 돌아보다
노동조합의 독자성을 보장하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노동국장 오기섭 국유화를 사회주의 부문으로 이해한 인식 이면에는 생산관계만 변화되 면 노동자의 이익은 저절로 보장된다는 생각이 깔려있었다. 즉‘국유화= 전 인민의 소유=사회주의=노동계급의 이익보장’ 이라는 논리구조였다.
예대열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특집 해방 70주년을 돌아보다 29
해방 후의 사회주의 … 인민민주주의의 설정 한국에서 사회주의 이념은 일본제국주의의 피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수용되었 다. 식민지 시기 사회주의자들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인민들의 반제투쟁의식을 고취시키며 민족해방운 동을 벌여나갔다. 그 결과 사회주의자들은 해방 후 어느 정치세력보다도 넓은 대중적 지지기반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국가건설 과정에서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주·객관적 조건이 갖추어 졌는가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정치적으로는 체제를 달리하는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경계로 주둔해 있 었고,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로 이행할 만큼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되어 있지 않았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 북한의 사회주의자들은 인민민주주의 단계의 과도기를 설정하여 사회주의를 현 단계가 아닌 이후의 과제로 전망하면서 국가건설을 해나갔다. 인민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 사회주의를 지 향하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닌 평화적 방법을 통한 이행을 전망한다는 점에서 소비에트 방식과는 구별되는 모델이었다. 이는 정치·경제적으로 다양한 요소들의 공존, 즉 좌우합작·혼합경제에 기반을 둔 장기적인 사회주의건설 전망이었다. 인민민주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가장 큰 주축은 국가경제 요소였다. 북한은 1946년 8월 10일 중요산업 국유화 법령을 발표했다. 이 법령은 일본이 한반도의 주요 국부를 차지한 상황에서 적산(敵産)을 접수한 신생국가가 취할 수 있는 당연한 조치였다. 아울
북한의 사회주의자들은 인민민주주의 단
러 10월 4일에는 개인소유권의 보호와 개인 상
계의 과도기를 설정해 국가건설을 해나갔
공업자들의 자유로운 생산활동을 보장하는 법령
다. 이는 좌우합작·혼합경제에 기반을 둔 장기적인 사회주의건설 전망이었다.
을 발표했다. 국유화된 산업시설로는 인민들의 기본적인 생필품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 었기 때문에, 개인 상공업자들의 생산활동 보장 을 통해 부족한 물품을 충당하려는 의도였다. 여
기에 소비조합과 생산합작사 등 협동조합 소유를 신생 범주로 구성하였다. 당시 북한의 경제구조는 국가 경제요소, 자본주의 경제요소, 협동조합 경제요소가 함께 공존하는 혼합경제 형태의 사회구성체였다.
새로운 노동정책 필요성의 대두 북한의 경제정책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선 생산력 발전 여부가 중요한 관건이었다. 일제로부터 몰수한 방대한 규모의 산업시설을 재가동하기 위해선 상당한 양의 자본·물자·노동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일제 말기 전시동원으로 인한 자원의 고갈 속에서 그것들 대부분이 소진되어 있었다. 그나마 동원 가능한 것은 노동력이었다. 일제 전시체제 하에서 생산력 확충을 위해 지속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자원이 노 동력이었던 것과 동일한 이치였다. 30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이와 같은 사정 앞에 사회주의 제 정치세력은 해방 직후 자신의 활동에 대한 자아비판과 과거 운동과 정에서 내세웠던 강령의 수정 등을 통해 노동문제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 갔다. 국내 계열은 자신 들이 행했던 공장관리운동에 대해“조합주의 노선” 이라고 평가했고, 노동규율을 파괴한 행위에 대해서는 “무정부주의적 신디칼리즘” 이라고 자아비판 했다. 조선독립동맹 계열은 연안에서 독립동맹을 결성하면 서부터 고수해왔던‘파업권’ 을 조선신민당 강령에서 삭제했다. 동북항일연군 계열의 김일성은 해방 직후 벌어진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와 식량 요구 투쟁에 대해“실업쟁이” “노력시간 낭비자들” “해독적 경향”등 적나라한 표현을 써가며 비판 하였다. 혁명운동에서 국가건설로 목표가 전환되면 서, 사회주의자들은 생산력 발전을 위한 현실적
혁명운동에서 국가건설로 목표가 전환되 면서, 사회주의자들은 생산력 발전을 위 한 현실적 조건 앞에서 노동력의 중요성 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건 앞에서 노동력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제말기 노동력의 소진과 수탈을 경험했던 노동자들에게 노동력 중심의 생산력 발전 은 양날의 칼과 같은 것이었다. 경제재건이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지는 노동력 중심의 경제발전 전략은 체 제와 이념을 떠나 국가가 설정한 계획목표 아래 노동대중의 권리를 부차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이 정권의 주도권을 잡은 이상 노동자들은 국가가 제정한 노동법령에 의해 보호되 었다. 그러나 하부단위 생산시설의 책임자들은 계획에 따른 목표액 달성과 노동법령이 규정한 보호규정 특집 해방 70주년을 돌아보다 31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했다. 당시 생산시설 책임자들은 제반 경제요소의 부족 때문에 강력한 노동규율을 요구하면서도 그것이 노동법령에 저촉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토로하곤 했다.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그 들의 자율성을 보장하면서도 동시에 높은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노동정책에 관한 고민이 필요 하였다.
노동조합 고유의 역할을 강조한 오기섭 이 문제를 둘러싸고 사회주의자들 내부에서 이견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 논쟁의 중심에는 당시 북한 의 노동정책 책임자였던 임시인민위원회 노동국장 오기섭이 있었다. 그는 1947년 인민경제계획 실시에 따라 노동정책이 중요시되던 시점에‘국가’ 와‘노동자’ (직업동맹)의 역할 및 그 관계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였다. 오기섭은 당시의 경제조건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면서 직업동맹과 국가의 역할 모두를 인정했다. 직업 동맹은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집합체이지만, 경제건설을 위해 노동자들을 조직 동원해야 하는 역할도 함께 부여받았다고 규정하였다. 이에 조응하여 국가도 노동자들에게 노동규율과 증산을 요구하면서도, 사회보험·노동보호 등 노동자들의 물질적 향상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직업 동맹은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더라도 당시와 같은“경제적 제한성”하에서는“권리의 역사성” 을염 두에 두어야 하며, 국가 역시 생산력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 노동행정을 집행해서는 안 된다는 절 충적 주장이었다. 그러나 오기섭은 만일 노동자들이 식량부족 및 생활 곤란과 같은 문제로 정권기관과 마찰을 겪게 된다 면, 직업동맹은 노동자들의 입장에 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생산력 발전이 미약한 조건에서는 해당 기업과 노동자 간에 마찰과 의견대립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국유화가 되었다 하더라 도 국가와 노동자 간의 이익이 대립할 수 있고, 그럴 경우 직업동맹은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국가와 노동자 모두 당시의 시대적 제약과 경제조건을 고려해야 하지만, 완전히 사회주의로 이행하지 않은 조건에서 직업동맹은 국가에 종속되기보다는 고유의 역할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었다.
‘과정’ 의 취약함이 가져온 노동자들의 대상화 오기섭의 주장은 조선로동당 내에서 즉각적인 비판에 부딪혔다. 1947년 3월 19일 조선로동당 중앙상 무위원회에서는 오기섭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조합 이론을 그 대로 적용해 노동자의 투쟁 대상이 마치 국유화된 산업기관인 것처럼 주장한다는 이유였다. 국유화된 조 건 하에서 인민경제 발전이 대중의 이해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을 부인하고, 노동계급과 인민정권 사이 32
의‘계급적 이익의 대립’ 을 강조하여 노동자들을 태공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의 기저에는 국유화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주류적 인식이 반영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사 회주의자들은 산업생산기관이 국유화된 조건에서는 소유와 노동에 대한 관계가 근본적으로 전변되어 국 가와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보았다.‘인민정권’하에서는 노동의 성과를 독점하는 자본가가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동의 성과로 발생한 잉여가치가 전적으로 인민생활을 향상시키는 데 사용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모든 노 동자 개인의 이익은 국가와 전체 인민의 이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은 산업생산기관이
익에 의존하고 있으며, 국가와 인민을 떠난
국유화되면 국가와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어떠한 개인의 이익도 있을 수 없다는 논리 가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국유화를 사회주의 부문으로 이해한 인 식 이면에는 생산관계만 변화되면 노동자의
일치한다고 보았다.‘국유화=전 인민의 소 유=사회주의=노동계급의 이익보장’ 이라 는 논리구조였다.
이익은 저절로 보장된다는 생각이 깔려있었 다. 즉‘국유화=전 인민의 소유=사회주의=노동계급의 이익보장’ 이라는 논리구조였다. 그만큼 사회주의 자들의 주된 관심은 사회주의‘도달점’ 에 집중되어 있던 반면, 그 목표에 이르는‘과정’ 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기반은 취약했다. 실제로 노동법령을 통해 직업동맹은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았지만, 현실에서 직 업동맹의 역할을 노동생산성 향상에 관한 임무로 축소되기 시작했다. 단체계약 또한 점차 노동자들의 의 무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해갔고, 생산협의회도 노동자들의 생산관리 참여라는 애초의 취지와 달리 생 산실적 제고를 위한 결의의 장으로 변해갔다. 결국 생산관계의 변화만을 강조한 채 그‘과정’ 의 내용을 채우기 위한 고민의 부재는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에서 노동자들이 대상화되는 결과의 하나의 이유가 되고 말았다.
특집 해방 70주년을 돌아보다 33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 기념사진. 가운데에 김구와 김규식이 나란히 서있다.
특집 / 해방 70주년을 돌아보다
김구의 길, 김규식의 길 해방공간의 우파 지도자들 민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숭고한 민족주의자. 이것만이 역사 속 김구의 모습일까? 김구와 해방공간 우파에게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장석준 기관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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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공간의 우파 지도자라고 하면, 흔히 이승만과 김구를 떠올린다. 간혹 이에 덧붙여 김규식을 기억 하는 정도다. 안재홍이나 송진우, 김성수 등의 이름이 나올 정도면 역사에 꽤 박식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그만큼 이승만과 김구는 그야말로 해방공간 우파의‘상징’ 이다. 동시에 이 두 사람은 격렬히 대립하는 두 노선의 상징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에게 김구는 민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숭고한 민족주의자인 반면, 이승만은 권력을 위해 분단과 대미종속을 택한 현대사의 오점 이다. 열혈 민족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진보좌파 사이에서도 이것이 상식이다. 이런 일반적 평가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승만을 복권시키려는 일부 뉴라이트의 시도에도 불구 하고 그는 비판과 극복의 대상일 뿐이다. 우리가 거듭 환기해야 할 것은 이승만이‘현실’ 이라는 이름으로 왜곡하고 억압한 민족사의 전혀 다른 가능성들이다. 이렇게 보면 이승만과 대척점에 선 김구를 높이 평가 하는 시각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역사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이 목전에 다가온 시점 부터 김구는 이승만과 확연히 갈라섰고, 우리가 기억하는 김구의 이미지는 대개 이 시기의 것이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과의 정치적 대결을 준비하다 총탄에 희생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민족사 의 또 다른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 앞에 그저 비감해질 따름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역사 속 김구의 모습일 까? 1948년 이전의 그는 어떠했는가? 김구와 해방공간 우파에게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이미 역사학계에서는 일정하게 평가가 이뤄졌지만 세인들 사이에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얼굴. 그리고 이와 대비해 우리가 상대적인 무관심과 망각으로부 터 건져내야 할 다른 우파 지도자들이 있다. 김규식, 안재홍 등이 그들이다.
좌우합작 가능성을 깬 첫 번째 계기는 반탁운동 흔히 알고 있기로 좌우합작은 1946년 봄에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 없이 끝난 뒤 우파에서는 김 규식이, 좌파에서는 여운형이 나서서 통일임시정부 수립의 첫 단추를 꿰려 한 시도다. 그러나 이것은 엄 밀히 말하면 좌우합작의‘제2차’시도다. 이미 첫 번째 시도가 있었다. 1945년에서 1946년으로 넘어가는 연말연시에 전개된 민족통일전선 결성 노력이 그것이다. 이 무렵 좌파는 미군 상륙 이전에 임시정부 성격으로 선포한‘인민공화국(이하 인공)’ 에 결집해 있었다. 반면 우파는 인공에 반대하며 중경 임시정부를 그대로 정부로 옹립해야 한다는‘임정 추대 운동’ 을 벌였 다. 벌써부터 격렬한 좌우 대립의 전조가 나타난 것이다. 실제로 우파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 안에는 상 황을 이렇게 몰아가려는 흐름이 존재했다. 그러나 대립이 필연은 아니었다. 대립으로 치닫는 힘의 이면에는 합작을 추진하는 힘도 작동했다. 특 히 여운형의 인민당, 임정 내 좌파 세력이 나서서 인공과 임정 사이의 대화를 추진했다. 이 노력은 신탁통 치안을 둘러싼 대립이 이미 시작된 1946년 1월에도 계속돼서 1월 7일에는 인민당, 공산당, 국민당(안재홍 특집 해방 70주년을 돌아보다 35
계 우파), 한민당의 4당 합의까지 나왔다. 합의문은 이렇게 천명했다.
“조선 문제에 관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결정에 대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고 민주주의적 발전을 원조한다는 정신과 의도는 전면적으로 지지한다. 신탁은 장래 수립될 우리 정부로 하여금 자주독 립의 정신에 기하여 해결케 한다.” 《한국 ( 현대 민족운동 연구 : 해방후 민족국가 건설 운동과 통일전선》서중석, 역사비평사, 2002. 339쪽에서 재인용)
한민당에서 좌우합작파인 김병로, 원세훈이 대표로 나온 덕분에 이런 합의문이 나올 수 있었다. 만약 한민당이 반탁운동을 명분으로 이 합의를 사후 번복하지 않았더라면, 이는 곧바로 좌우합작과 이에 따른 통일임시정부 수립의 출발점이 되었을 것이다. 민족통일전선 결성 노력을 압살한 것은 이 무렵 이와 동시에 전개된 반탁운동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 반탁운동의 중심에 바로 임정이 있었고, 그 임정의 중심에 다시 김구 세력(정당으로는 한국독립당)이 있었 다. 이들은 신탁통치안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폭발하자 이를 임정이 정권을 장악할 절호의 기회로 보았 다. 12월 29일 <동아일보> 보도로 모스크바 3상 회의 결과를 접한 뒤 임정은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 회를 조직하고 총파업을 호소했다. 국민총동원위원회의 포고문 제1호는“미군정 행정 요원들을 임정 지 휘 하에 예속케 한다” 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임정‘추대’ 를 넘어서 미군정을 임정으로 대체한다는 계획 이었다. 물론 미군정의 무력 앞에서 이 거사는 애당초 용두사미로 끝날 운명이었다. 김구는 1월 1일 라디
1946년 5월부터 김규식은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돌입했으나 실패했다. 그림은 10월 28일 <제3특보>에 실린 시사만평. 극좌세력과 극우세력이 좌우합작을 방해하는 모습을 풍자하고 있다. 왼쪽이 여운형, 오른쪽이 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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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를 통해 총파업을 중지하라고 방송했다. 미군정과의 관계만을 놓고 보면 이러한 임정의 정권 장악 시도가 민족 자결권의 정당한 행사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 민중을 대표하는 정치 세력이 임정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임정은 단지 미 군정으로부터 권한을 넘겨받겠다고 나섰을 뿐만 아니라 인민당, 공산당 등 좌파를 배제한 정권을 수립하 려 했던 것이다. 당장 임정 내 좌파 세력(김원봉, 장건상, 김성숙 등)부터 이러한 노선에 반발해 임정에서 이 탈했다. 그러나 김구 세력은 1947년 말까지 계속 독선적 태도를 고수했다. 이들은 오직 임정만이 민족 대표성 을 지니며 따라서 통일임시정부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임정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른바‘임정 법통 론’ 이다. 물론 3.1운동의 성과를 이어받은 상해 임시정부 수립은 민족사의 위대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후 민 족해방운동의 상당 부분이 임시정부 바깥에서 전개됐다. 임시정부는 임정 밖 항일운동 세력과 통합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다. 중경 임시정부만 해도 그러한 통합 노력에 따른 좌우합작 정부였다. 그렇 다면 임정 계승 세력은 단지 임정의 상징성만 고집할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안팎에서 전개된 민족통일전선 결성의 계승자로 나섰어야 했다. 하지만 두 차례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던 1946~1947년이라는 너무도 중대한 시기에 김구 세력은 그 역할을 하지 않았 다. 이미 시효를 상실한 반탁운동에만 집착했다.
김구는 분명 위대한 항일투사다. 그러나
김구는 분명 위대한 항일투사였다. 그가 간판
해방공간에서 그가 임시정부의 명분과
만 남은 임정을 지키느라 고군분투한 이야기는
위엄을 인정받는 것과 통일독립국가 건
우리 역사에서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한 장면이 다. 그러나 해방공간에서 그가 임정의 명분과 위
설을 등치시킨 것은 크나큰 오류다.
엄을 인정받는 것과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등치 시킨 것은 크나큰 오류다. 김구는 오직 대의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드문 지도자였으나 그의 대의는 이성의 세계보다는 감정의 세계에 너무 치우쳐 있었다. 이로 인해 좌우합작의 잇단 기회는 유실됐고, 오히려 좌 와 우 사이의 골을 넓힘으로써 통일독립국가 건설로 나아갈 길을 닫고 말았다.
이성의 지도자, 감정의 지도자 해방공간에서 냉철한 이성으로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고민하고 추진한 우파 지도자는 김규식이다. 그 는 본래 중국에서 활동할 때부터 김구와는 노선이 달랐다. 김구가 임정 안팎의 연합전선 결성에 소극적이 었던 데 반해 김규식의 항일운동사는 곧 연합전선 건설운동사라 해도 좋을 정도로 민족통일전선 결성에 앞장섰다. 김규식도 1946년 초까지는 반탁운동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이내 반탁 진영의 주류와 거리를 뒀다. 특집 해방 70주년을 돌아보다 37
그는 신탁통치 문제는 반탁운동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 보았다.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되면 연합국 들의 신탁통치 결정은 협상을 통해 충분히 교정할 수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찬탁이냐 반탁이냐를 놓고 싸울 게 아니라 하루빨리 좌와 우의 민족 세력들을 규합해 통일임시정부를 결성해야만 했다. 이런 정세 인식에 따라 김규식은 1946년 5월부터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돌입했다. 아쉽게도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더구나 좌우합작운동의 좌파 쪽 기둥이던 여운형이 1947년 7월 흉 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후 김규식은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남한 내 좌우 세력(이후 흔히‘중도파’ 라 불리게 되는)을 모두 보듬으며 이승만 노선에 맞선 고된 투쟁의 길에 나서야 했다. 김구 세력이 이 길에 합류한 것
은 통일독립국가 건설 노력에 이미 패색이 짙어진 뒤였다. 이렇게 차가운 이성의 눈으로 상황을 읽고 그 시기, 그 상황에 꼭 필요한 정치 행위에 나섰다는 점에서 김규식은 김구보다 더 뛰어난 지도자였다. 다만 그는 해방 직후처럼 험난한 역사적 순간에 대중의 힘을 모으기에는 너무 학자형 정치가였다. 이승만, 김구 같은 카리스마가 부족했다. 이 점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김규식 노선의 원조이면서 카리스마적 지도력 또한 지녔던 위대한 한 지도자가 해방이 닥치기 전 일제에 의해 희생당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바로 안창호다. 안창호는 임시정부 수립의 진정한 구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로 일제에 체포되기 전까지 임정을 포함 한 좌우 민족통일전선 결성에 앞장섰다. 그런 그가 해방공간에 생존해 있었다면 이승만, 김구 이상으로 우파의 대표 지도자가 됐을 테고 그의 노선은 분명 김규식의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런 지도자가 꼭 필요 한 시기, 꼭 필요한 상황에 적들에게 희생돼 부재했다는 것이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다(4월 혁명 시 기 조봉암의 부재로 이러한 비극은 반복된다).
결국 분단이 동족 간 전쟁으로 치달은 뒤 김규식은 납북 여정 중에 북한-중국 국경지대에서 생을 마감 해야 했다. 그가 남긴 말은 이러했다.“자기 자신을 정복해야 모든 것이 잘 될 수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정복해야 한다. 김구 주석은 자신이 정복해야 되고, 이승만도 이승만 자신이 정복해야 되고, 삼천만 온 겨레가 각자 자신을 정복하면 다 되는 것이다. 자주적인 통일도 독립도 결국 자기 자신이 자신 을 정복하는 문제다.”《남북협상 ( : 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서중석, 한울, 2000. 343쪽에서 재인용) 이 유언을 산문의 세계에 맞게 번역하면 이런 이야기가 아닐까. 감정이 아닌 이성에 따라, 고집스런 추 상적 대의만이 아니라 시의에 부응하는 과제에 도전해야 한다는 것. 이는 단지 지나간 역사 속 회한이 아 니라 바로 지금 우리보고 들으라는 절실한 외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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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대선 당시 청주에서 유세 중인 박정희와 육영수
특집 / 해방 70주년을 돌아보다
끝나지 않은 박정희 시대 박정희의 생물학적 딸인 박근혜가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박정희에 대해 끝없는 평가를 반복해야 하는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우리는 여전히 박정희 시대 에 대해 논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김민하 <미디어스> 기자
특집 해방 70주년을 돌아보다 39
어떤 의미에서 박정희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박정희 시대에 대해 논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특히 박정희의 생물학적 딸인 박근혜가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박정희에 대해 끝없 는 평가를 반복해야 하는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장관 후보자들에 대한 국회 청문회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5.16은 혁명인가 쿠데타인가?” 라는 질문은 이런 비극의 대표적 풍경이다. 이 질문에 대한 가장 현명한(?) 답변을 내놓은 사람은 2013년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자격으로 청문회에 출석한 조윤선 의원이었다. 대 답은 다음과 같았다.“역사적인 문제에 대해 판단을 할 만큼 깊은 공부가 안 되어 있다.”이럴 수가! 마치 러시아 10월 혁명에 대해 일부 우익 지식인들이“볼셰비키의 쿠데타였다” 고 주장하듯 5.16 군사 정변 역시 누군가에겐 여전히 혁명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진보를 자칭하는 사람이라면 5.16 군사정변 에 대해 다른 평가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군인이 군대를 동원해 정권을 장악하고 장기독재체제를 구축해 민주주의의 적으로 등극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박정희의 통치에서 정치적인 부분과 경 제적인 부분을 분리해 사유할 이유가 없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제를 성장으로 이끌고 근대화의 기틀 을 만들었다는 점을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는 사람도 있다. 박정희 정권의‘공과’ 를 같이 보자는 게 이런 주장의 전형이다. 이 글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을 다루기는 하지만 짧은 분량 안에 18년간의 공과를 모두 논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단순히 독재를 통한 경제개발의 효용을 따져보는 것은 식상한 일이 될 것이다. 결국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경제정책의 몇 가지 특징을 사례를 통해 짚어보는 정도에 그치게 된 점을 양해 부탁드린다.
비계획과 디테일의 신화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경제정책의 가장 큰 특징은 당연히 독재를 기반으로 한 수출 중심의 발전모델이 라는 점일 것이다. 이는 누구나 아는 상식에 속한다. 박정희 정권의 정책을 얘기할 때, 흔히들 여기에 해당 하는 부분을 5년 단위로 추진됐던‘경제개발5개년계획’ 에서 찾는다.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 직후인 1961 년 7월 기존 건설부의 종합계획국 및 물동계획국, 내무부의 통계국, 재무부의 예산국을 흡수한 부처인 경 제기획원을 만들어 이를 추진하게 했다. 경제기획원은 거시경제계획 전반을 종합적으로 책임지는 부서로 서 1963년에는 경제기획원 장관이 부총리를 겸하게 된다. 이후 김학렬, 남덕우, 신현확 등의 인사가 이 자 리를 거쳐간 것을 보면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의외인 점은 이 경제개발5개년계획마저도 독재 앞에서는 무력화되곤 했다는 것이다.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대표적 사례들이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포함돼있지 않았다는 점은 이런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를테면 10월 유신 다음해인 1973년 선포된‘중화학공업화’ 가 대표적이다. 당시 박정희는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중화학공업화와 이를 수행할 인적자원의 개발을 의미하는‘국민의 과학화’ 를 선언하는 40
데, 정작 1972년부터 1976년까지를 아우르는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는 이러한 구상이 포함돼있지 않다. 박정희는 자신이 신뢰하던 오원철 경제수석 등 일부 측근들을 통해서만 이러한 구상을 공유했으므 로 중화학공업화 발표 당시 자금의 조달방안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안도 없는 상태였다. 박정희에게 난데없는 자금조달 방안의 마련을 지시받은 남덕우 당시 재무부장관은 각종 공공기금을 끌어다 쓰는 데 더해 금융기관의 자금까지 반강제로 동원하는‘국민투자기금’ 이라는 제도적 틀을 고안하 기에 이르는데, 이는 국민투자채권을 발행해 조달된 자금을 은행에 대여하고 은행이 이를 중화학기업에 융자하는 방식이었으므로 후에 정경유착의 고리로 기능하게 됐다. 애초 박정희의 구상은 중화학기업화를 통해 방위산업을 육성하고 사실상 북한과의 군비경쟁에서 승기를 잡겠다는 것이었는데 의도치 않게 재벌 중심 경제의 연결고리가 형성돼버린 것이다. 중화학공업화와 함께 또 다른 업적(?)으로 꼽히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나 포항제철 건설 역시 당시 수 립된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포함돼있지 않던 대표적 사업이다. 당시 경제기획원에서 근무하던 강경식의 회고를 보면, 이러한 박정희의 비계획적 특성 때문에 정부 내에서의 경제기획원과 경제개발5 개년계획의 위상은 위축돼갔으나, 이것들이 오 히려 정권이 국가의 발전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 는 어떤 상징으로 기능하면서‘신화’ 가 되었다
박정희의 비계획적인 특성은 정권이 국 가의 발전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어떤 상징으로 기능하면서‘신화’ 가 되었다.
는 걸 알 수 있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만든 것도 지도자다운(?) 일이었지만, 그것조차 앞지르는 독재자의 결단이 통치 신화를 재생산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신화적 면모를 보여주는 또 다른 측면은‘디테일’ 이다. 국민들이 직접 박정희의 통치를 체감할 수 있도록 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예로 들만한 것이 오늘날에도 음식점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공깃밥의 존재다. 본래 한국인들은 사발에 고봉밥을 퍼서 먹었는데, 당연히 음식점에서도 이러한 예를 따라 사발에 마음껏 밥을 퍼먹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곡물의 공급부족과 국제소맥가격의 하락으 로 분식장려운동이 시작된 이후 박정희 정권이‘공기’ 라는 새로운 그릇을 만들어 여기에 밥을 담되 반드 시 돈을 지불하고 먹도록 행정명령을 내린 것이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공기는 지름 105밀리미터 높이 60밀리미터 이내여야 하며 밥은 여기에 5분의 4 이내로만 담도록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69년 가정의례준칙을 선포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근대적 관혼상제를 제도화한 것도 이런 ‘디테일’ 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가정의례준칙의 선포는 국민을 테일러주의에 입각해 근대적 노동자로 훈육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재미있는 점은 1973년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이 제 정되면서 예식 및 장례산업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한국사람이 맵고 짠 음식을 좋 아한다는 이유로 박정희가 삼양라면에 고춧가루를 넣도록 지시하고 자금을 지원해줬다는 일화나, 경부고 속도로 건설 당시 포병 출신의 면모를 살려 직접 지도에 노선을 그려가며 온갖 반대를 뚫고 공사를 통제했 특집 해방 70주년을 돌아보다 41
다는 사실 등도 같은 맥락에서 박정희식 개발독재와 이를 통한‘조국근대화’ 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외환위기의 씨앗이 된 재벌 편향 이와 같은 박정희식 개발독재는‘통치의 신화’ 를 낳았지만, 이후 이어지는 한국경제의 어두운 면 역시 만들어냈다는 게 주지의 사실이다. 중화학공업 등에 대한 과잉 중복투자 및 대외적자 확대, 노동계급을 탄압해 임금인상을 억제한 결과인 내수성장 지연과 경제적 불평등은 이‘어두운 면’ 의 하나였다. 그런데 특히 이후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하게 되는 핵심은 박정희 정권이 개발독재를 통해 재벌 중심의 경제 체제를 성립시켰다는 것이다. 앞서 국민투자기금의 조성을 언급하면서 시사하였지만 박정희 정권의 기업정책은 신용 분배를 통한 특혜성 자금 지원과 대폭적인 조세감면을 통해 성장과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의 경제발전 모델은 외국차관을 통한 경공업 위주 산업을 육성하는 것이었는데, 이 모델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신호가 1969년 13.8%였던 성장률이 1972년 5.7%까지 떨어지는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당시 기업들의 부채의존 도는 80%에 달했고 국내저축이 부족한 상황에서 사채를 끌어다 쓰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박정희 정권 은 8.3조치(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제15호)를 발표해 사실상 사채를 동결하고 금융기관이 기업 구 제에 나서게 함으로써 대출 증가에 따른 물가상승 압력의 고통을 서민에게 전가해버렸다. 이 조치 이후 기업들은 계열 간 상호출자 및 순환출자를 비롯한 각종 편법을 통해 몸집을 불리고 특혜성 정책금융으로 확보한 자금은 부동산 투기에 투입하는 전근대적 경영으로 일관했다. 이미‘기차 재벌’ ,‘문어발 경영’ 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와중에서도 기업은 각종 세금감면 조치는 빠지 지 않고 챙겼기 때문에 사실상 법인세를 내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당시 재무 부에서 근무 중이던 강만수는 8.3조치와 당시의 특혜성 세금감면에 대해“돈을 빌렸다고 사채 동결, 중화 학공업을 한다고 면세, 수출하고 투자한다고 저리의 정책자금 대출, 증자한다고 증자소득공제, 배당한다 고 법인에게 법인 간 수입배당 세액공제를 하고 주주에게는 내지도 않은 법인세를 낸 것으로 간주하여 배 당세액공제를 해주었다” 고 회고한다. 사실상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부정적 집단으로서의 재벌이 이 때 형 성된 셈이다. 8.3조치와 궤를 같이 하여 볼만한 것이 단자회사의 설립이다. 단자회사의 근거가 되는 단기금융업법은 1973년 8.3조치의 여파로 사금융 양성화의 필요성이 절실해지자 상호신용금고법, 신용협동조합법과 함 께 제정됐다. 이는 이른바 오늘날의 제2금융권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당시 단자회사는 기업의 단기자금 융통을 도맡게 됐지만 박정희 정권의 경제관료들은 이들을 이후 장기투자금융회사로 발전시킨다는 계획 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75년 중화학공업화를 뒷받침하기 위한 외자유치를 위해 종합금융회사가 설립되고 이들의 역 할이 단자회사와 중복되면서 문제가 꼬이기 시작했다. 전두환 정권인 1982년 장영자 사건의 후폭풍으로 42
단자회사의 무제한 설립이 일시적으로 허용되고 이후 정권들이 제2금융권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하면서 이들은 1997년 무분별한 단기외환 차입으로 외환위기의 직접적 도화선이 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외환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재벌의 방만한 경영과 종합금융회사들의 단기외채 문제의 씨앗 이 모두 박정희 정권에서 잉태됐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싹트기 시작한 신자유주의 물론 박정희 정권이 모든 경제정책에 대해 비합리적으로 일관한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부가가치세 도입과 같은 부분들은 통치를 합리적으로 해보려는 시도를 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일반소비세, 간접소비 세, 다단계거래세의 성격을 갖는 부가가치세는 1955년 프랑스가 최초 도입한 이후 1967년 유럽공동체 (EC)가 회원국 공통세로 인정하며 세계적 대세가 됐다. 박정희 정권은 중화학공업을 추진하면서 세입증 대의 한계를 절감해 부가가치세 도입을 핵심으로 하는 세제개혁을 실시하기로 한다. 1976년 박정희는 연 두기자회견을 통해 부가가치세 도입을 공식 발표했고 197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시행했는데, 당시의 후진 적 국내환경을 돌이켜볼 때 유럽에 비해 단지 10년이 뒤졌을 뿐이라는 점은 평가할 만한 부분이다. 부가 가치세 도입은 당시 영업세, 물품세, 직물류세, 석유류세, 전기가스세, 통행세, 입장세, 유흥음식세 등 8개 간접세를 대체하고 단일세율을 적용함으로써 세무행정의 근대화를 촉진했고 구조적으로 탈세를 어렵게 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조세제도에 있어서 일종의 합리성을 추구한 이 조치는 실은 미국 유학 중 신고전파 경제학을 배워온 김재익 등이 주도했다. 1973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재익은 김용환 경제수석 밑에서 일하다 남덕우의 눈에 들어 1974년에는 경제기획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이후 남덕우는 김재익을 경제기획원 요직인 경제기획국장에 앉히기 위해 공무원 임용규정까지 변경할 정도로 그를 아꼈는데, 고도성장의 아이콘과 같았던 남덕우가 김재익을 높이 평가한 이유는 이미 당시에 저성장, 고물가, 국제수지 악화의 삼중고가 발생하는 중화학공업화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김재익은 시작부터‘안정, 자율, 개방’ 으로 요약되는 훗날의 신자유주의 노선을 주장했다. 세금을 소득 세, 소비세(부가가치세), 재산세로 단순화하고 법인세와 관세는 낮추거나 아예 없애며 수출이 아니라 수입 에 주력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당시 그의 이런 주장은 정부 내에서 매우 독특한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부 서의 관료들은 그를 두고‘정신 나간 친구’ 라는 평가를 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그러나 이 시기 경제기획원, 한국개발연구원(KDI), 한국은행 등을 비롯한 주요 기관들은 신고전파 경제 학의 세례를 받고 돌아온 학위소지자들로 채워지는 중이었다. 이들은 정부가 주도한 고도성장으로 통화 가 폭증해 인플레이션 압력이 증가하였다는 점, 중동특수로 인한 임금인상 등으로 수출경쟁력이 약화됐 고 내수시장의 중요성이 대두됐다는 점, 기업들이 장기적인 기술개발 투자나 수출시장 개척 등을 등한시 하고 인플레이션 이익에 기대려 한다는 점 등을 들어 안정화 정책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더 이상 특집 해방 70주년을 돌아보다 43
정부가 주도하는 고도성장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는 게 이들의 인식이었다.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는 대표적 성장론자들이었던 경제기획원장관 남덕우, 재무부장관 김용환, 청와 대 비서실장 김정렴 등이 1978년 총선 패배로 물러나고 상대적으로 안정화 정책에 친화적이었던 신현확 이 경제기획원장관으로 임명되면서, 정부 역할을 줄이고 시장경제 원리를 최대한 도입하자는 주장이 힘 을 얻게 됐고 급기야 물가안정, 재정긴축, 중화학투자 조정, 정책금융운용방식 개선 등을 골자로 하는 경 제안정화종합시책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시책은 앞서 서술하였듯 그간 중화학공업화와 수출 중심 개발독재를 추진한 박정희의‘배 려’ 로 상당한 이득을 누려온 기업들이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당시 전경련 회장 이었던 정주영을 필두로 재계가 반발하는 가운데 기업의 도산과 실업이 증가하는 상황에 이르자 박정희 는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지만 마침 10.26이 터지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바로 이 구도가 이후 정권에까지 이어지면서 신자유주의에‘개혁’ 의 외피를 둘러주는 계기가 됐다. 이 후 정권에서 경제기획원 인사들을 중심으로 추진한 안정화 시책이 금융자율화라는 민감한 주제에까지 이 르자 실물과 금융을 장악하고 있던 재무부가 이에 반발하면서‘모피아’ 로 상징되는 경제관료들의 양대 파 벌이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전두환 정권 때에는 김재익이 대통령의‘경제 가정교사’ 로 입지를 다지 게 되면서 경제기획원 측 인사들이 재무부의 주요 요직까지 차지하는‘경제기획원의 재무부 점령사건’ 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개발독재에 익숙한 재계는 신자유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경제기획원 주요 인사들의 구상에 지속적으로 반발했다. 1992년에는 정주영이 직접 대선에 출마하는‘불경죄’ 까지 저지르게 되었으니 어떤 구도가 형성되었는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개발독재에 익숙한 재계는 신자유주의의
개혁(?)을 추진하려는 경제기획원과 이에 저항
이상을 실현하려는 경제기획원의 구상에
하는 재무부 및 재계라는 대립구도는 1997년
지속적으로 반발했고, 이 대립구도는 1997년 외환위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외환위기 직전까지 이어졌으며, 이후 경제기획 원 출신 인사들은 참여정부 시기 완전히 주도권 을 잡게 돼 동북아 금융 허브 구상과 한미FTA 체결 등을 실행에 옮겼다. 재무부 출신들은 이
명박 정부 시기 강만수를 중심으로 재기해 언젠가는 반대했던 신자유주의의 이상을 현실에 옮기면서도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펼쳐 수출을 방어했다. 이제 박근혜 시대에는 다시 경제기획원 출신들이 득세를 해 “통화신용정책의 한계” 를 논하며 적극적인 재정정책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으니 참 얄궂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서두에 언급했듯 어찌 보면 박정희의 시대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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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다시 생각해보는 IMF 최근 그리스 사태 등을 맞아 IMF가 재조명되고 있다. IMF는 우리와 도 악연이 깊다. 현재의 신자유주의 체제가 본격화한 때가 97년 IMF 구제금융사태 이후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극복을 위해서, IMF의 탄생과 80년대 이후 IMF의 국가개입의 역사를 다시 살펴보 았다. 우리는 늘 국제적 시야 또한 갖추어야 한다.
기획 다시 생각해보는 IMF 45
기획 / 다시 생각해보는 IMF
브레턴우즈 체제와 IMF
제2차 대전이 끝나가던 1944년, 종전 이후 어떤 형태의 국제경제 질서를 수립할지를 논의하기 위해서 연합국 측 44개국의 대표들이 미 국 동북부의 작은 도시 브레턴우즈(Bretton Woods)에 모였다. 1930년대 경쟁적 평가절하와 보호주의의 대두로 세계경제가 대공 황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국제적 협조가 이뤄 지지 않아 국제무역이 위축되고 이로 인해 경제가 깊은 침체에 빠졌다 IMF는 돈을 낸 비율에 따라 의 결권을 갖기 때문에 돈을 가장 많이 낸 미국의 영향력이 절대 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고 믿었다. 이런 인식에 따라 브레턴우즈에 모인 각국 대표들은 자유 무역 환경의 회복과 안정적 국제통화체제의 건설이라는 명분하에 브 레턴우즈 체제를 탄생시켰다.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국제통화체제와 관련해 고정환율제도가 재건 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원칙적인 합의가 쉽게 이뤄졌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고정환율제도를 운영할지에 대해서는 나라 별로 입장이 엇갈 렸다. 이는 영국 입장을 대변하는 케인즈안과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화이트안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금환본위제로 출발한 브레턴우즈 체제 브레턴우즈 체제의 성격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케 인즈안과 화이트안의 쟁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케인즈의 제안 유승경《월간 좌파》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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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들어있는 핵심 요소를 살펴보자. 첫 번째는 국제청산동맹의 창설과 청산거래를 통한 국제결제체제
의 수립이다. 케인즈는 각국의 대외거래를 반드시 중앙은행을 통해 결제하는데, 거래 당사자나 당사국들 은 직접 외환을 주고받지 않고 국제청산은행에 개설된 해당 중앙은행들의 계좌에 적립과 인출로 표시하 는 청산방식을 제안했다. 두 번째는 국제결제수단으로서 가상의 국제화폐인 뱅코(bancor)를 도입하는 것과 조정 가능한 고정환 율제도의 도입이다. 세 번째는 적자국과 흑자국이 모두 부담을 떠안는 국제수지 불균형의 조정장치의 도입이다. 각국의 적 자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 1년 이상 지속될 경우에는 국제청산동맹은 평가절하나 적자를 감축하기 위한 조 치를 요구할 수 있으며, 흑자일 경우에도 평가절상 또는 임금 인상, 과도한 관세와 수입 억제 조치들의 축 소 등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상수지 적자국과 흑자국 모두 초과액에 대해서 과징금 을 지불해야 한다는 조항을 두는 등 케인즈는 적자국과 흑자국 모두 경상수지 불균형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 번째는 자본의 국제적 이동에 대한 통제이다. 케인즈를 비롯한 당시의 많은 경제학자들은 전간기의 세계경제위기의 원인을 투기적 자본의 국제적 이동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 같은 투기적 행위를 몰아내는 일이 국제경제질서의 안정과 경제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라는 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서 케인즈의 주된 강조점은 자본의 국제적 이동에 대한 통제에 있었다. 국제청산동맹을 설립하고 국제거래를 집중화하려 한 이유는 이러한 자본이동의 통제를 위해서였다. 이론적으로 후에 먼델이 불가 능한‘삼위일체론(impossible trinity)’ 으로 정식화한 것처럼 자본의 국제적 이동이 통제될 때 개별 나라들 은 국내 정책의 자율성을 가질 수 있고 환율의 안정적 유지도 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로 케인즈는 자본통 제가 전후 체제의 항구적 특성이 되기를 바랐다.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케인즈의 국제청산동맹안은 미국에 의해 거부되고 그 대신 미국이 제안한 국제 통화기금(이하 IMF)의 창설이 결의되었다. IMF는 회원국들에게 경상수지 방어를 위한
IMF의 대출 및 정책감독 기능은 고정환율
자금을 대출하고 회원국들의 거시경제정책운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용을 감독할 국제기구로서 설립되었다. IMF 의 대출 및 정책감독 기능은 고정환율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금 1온스
금 태환성을 회복하고, 미국 이외의 나라 들은 달러에 대한 환율을 고정시켰다.
=35달러의 비율로 금 태환성을 회복하였고 미국 이외의 나라들은 달러에 대한 환율을 고정시켰다. 이처럼 브레턴우즈 체제는 유일한 금태환 통화인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금환본위제로 출발하였다. 국제청산동맹의 설립이 무산되었지만 케인즈의 경제사상이 완전히 거부된 것은 아니었다. 케인즈는 국력이 약화된 영국을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모두 관철시키지는 못했지만 그의 지적 권 위는 당시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기획 다시 생각해보는 IMF 47
브레턴우즈 체제에 반영된 케인즈적 요소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자본통제의 허용이다. IMF 는 오직 경상거래(수출입)를 위해서만 자유로운 환전을 허용하는 식으로 회원국들의 자본통제를 용인했 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국제금융거래를 투기꾼들의 사냥터로 만들 수 있다는 케인즈의 주장이 영향 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조정 가능한 고정환율제’ 를 수용했다는 점이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고정환율제도를 원칙으 로 하면서도 구조적으로 국제수지적자가 발생할 때에는 평가절하를 통해 대외균형을 회복하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만약 조정 불가능한 고정환율제를 취한다면 최근 유로존 위기가 보여주듯이 경상수지 균형 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강도 높은 긴축정책을 통해 대량 실업을 용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혼란에 빠진 달러, 변동환율제로의 이행 그러나 브레턴우즈 체제의 케인즈적 요소는 이후 국제통화질서가 구체적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점차 사라졌다. 국제청산동맹을 통한 청산방식의 국제결제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조건에서 자본이동에 대한 통 제는 다국적 기업의 영역 확대와 국제수지 불균형의 증대라는 현실 앞에서 유명무실해졌다. 자본통제가 국제적 규범으로 강제된 것이 아니라 개별 국가의 선택 사항이었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 다. 더군다나 자본의 국제적 이동이 증가함에 따라 조정 가능한 고정환율제의 유지도 난관에 부딪혔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미국 밖에 달러 잔고가 쌓이면서 달러의 금태환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 했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준비위원회
자본의 국제적 이동이 증가함에 따라 조정 가
(FRB)가 보유한 금의 양은 큰 변화가 없
능한 고정환율제의 유지도 난관에 부딪혔다.
는 상황에서 미국 이외의 나라들이 보유
미국 외의 나라들이 보유하는 달러의 양이 증 가하면서, 미국이 금/달러 태환성 약속을 지킬 수 없으리라는 불안감이 일반화되었다.
하는 달러의 양이 증가하면서, 미국이 금/달러 태환성 약속을 지킬 수 없으리 라는 불안감이 일반화되었다. 이 당시 로버트 트리핀은,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 에 의한 달러 유출이 세계경제에 유동성
을 제공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밖의 달러 보유량의 증가로 달러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딜레마(트 리핀 딜레마)에 빠진다며 달러 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지적했다.
달러는 당시 미국의 대내외정책으로 인해 더욱 혼란에 빠져들었다. 특히 존슨 미국 대통령이 가난과 인종차별의 일소를 목표로 하는‘위대한 사회 프로그램’ 을 추진함에 따라 절약과 저축의 증대 없이 베트 남 전쟁을 계속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른바‘위대한 사회’ 라는 사회적 목표의 추구는 미국인 들이 베트남 전쟁을 수용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이었음이 분명하다. 48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달러 중심의 금환본위제에 대하여‘달러의 발행 규모가 너무 늘어나 1온스 당 35달러라는 교환비율이 지켜질 수 없다’ 는 것을 명확히 하며, 프랑스가 보유한 달러의 금 태환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결국 1971년 8월 미 당국은 달러의 금태환성을 일방적으로 유예하였다. 화폐는 일종의 빚이고 달러가 일정량의 금에 의해 뒷받침되었다고 전제하면, 미국은 지급 불능의 상태에 빠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 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결정을 계기로 국제통화체제는 미국에 대한 어떤 통제장치도 없는 상태에서 달러 본위제도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그리고 2년 뒤 달러는 변동환율제로 이행했으며 1976년 이후 변동환율제 가 전 세계적으로 일반화되었다. 변동환율제로의 이행은 신자유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의 부상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1970년대 말부터 금융시장의 변동성을 증폭시키고 통화체제의 속성을 점점 투기적으로 만들었다.
한편 브레턴우즈 체제하에서 국제수지의 불균형의 조정을 목적으로 하여 기능하던 IMF는 1980년 IMF·IBRD 합동 연례총회에서 비산유 개발도상국의 부채 격증에 따른 국제수지 악화를 집중 논의하면 서 IMF 융자한도를 600%로 확대하고 개발도상국의 경제구조에 필요한 조정차관을 제공하는 것으로 역 할을 수정했다. IMF는 돈을 낸 비율에 따라 의결권을 갖기 때문에 돈을 가장 많이 낸 미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다. 2012년 기준으로 미국은 전체 기금의 17%정도를 내고, 따라서 의결권도 17%를 행사한다. IMF의 정책이 결정되기 위해서는 83% 이상이 찬성해야 하기 때문에 미국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IMF는 경제위기 국가에 엄격한 대출조건을 전제로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미 국의 이해를 관철시키고 세계경제를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하는 데 첨병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오고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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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다시 생각해보는 IMF
국제통화기금의 진화와 한계
변화하는 IMF 최근 국제통화기금(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은 과거 우리 가 경험했던 매우 경직되고 강경한 IMF와는 다른 모습을 때때로 보여 준다. 예를 들면, 과거 한국과 IMF의 협상을 뒤에서 은밀히 조종했던 데이비드 립튼 국제통화기금 수석부총재(전 미 재무부 차관)는 올해 2 IMF는 국제적/역사적 맥락의
월 서울대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한국은 계층이동이 어렵고 중산층이
변동에 따라 계속 적응·진화
무너지고 있다며 공공사회지출 확대와 재분배 정책을 통해 불평등을
해왔다. 하지만 그것을 움직이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IMF가 올해 6월에 발표한 보고서는 상위 20%
는 힘에는 변화가 없는 이상,
의 소득지분이 증가하면 국내총생산(GDP)이 중기적으로 감소한다면
그러한 변화는 근본적일 수 없
서 이는 낙수효과가 나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다.
있다. 최근 그리스 위기에 대해서도 IMF는 그리스에 부채조정 없이 긴축정책을 강요하는 이른바 트로이카의 다른 두 축인 유럽연합집행 위원회 및 유럽중앙은행과 분명히 다른 입장을 보였다. 그리스의 부채 가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따라서 만기연장이나 탕감 등의 부채조정이 없다면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실 IMF는 이러한 의외의 모습을 그 이전부터도 빈번하게 보여왔다. 2008년 금융위기를 배경으로 IMF는 적절한 제도적 하부구조를 갖추 지 않은 상태로 개발도상국에서 자본이동의 자유화가 이뤄질 경우 생
지주형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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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수 있는 문제를 경고했으며, 필요하면 자본이동을 규제할 필요가 있다는 보고서를 2010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의 모
습이 비단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모습만도 아니다 1994년 멕시코, 1997년 아시아, 1998년 러시아, 1999년 브라질 등에서 연쇄적으로 위기가 발생하고 그에 대한 IMF의 개입이 국제적으로 수많은 비난을 받자, IMF는 글로벌금융구조의 개혁뿐만 아니라 IMF의 투명성 개선 및 지배구조 개혁, 구제금융조건의 슬림화 등을 표방하고 변화를 꾀해왔다. 이렇게 IMF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변화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IMF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 해야 할 것인가? 국내 언론에서는 IMF의 변화를 두고 IMF의 과거 행태가 잘못되었다는 증거라든가, IMF도 자신의 과거 행태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인정한다든가, 또는 IMF도 바뀔 정도니 세계경제가 근본 적인 변화를 겪을 조짐이 아닌가라는 식의 뉘앙스를 갖고 보도하는 것 같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IMF는 결코 과거와 급진적으로 단절한 것이 아니다. 상황에 맞게 진화해왔다는 쪽이 보다 올바른 해석이 라고 생각한다. 즉 국제기구로서 IMF의 성격과 역할은 그것을 규정하는 태생적 구조, 그리고 이에 영향 을 미치며 변동하는 전 지구적 세력관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표면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IMF를 지배하는 힘, 그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IMF가 미국 의 이해관계가 관철되는 한에서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려 하는 매우 정치적인 기관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IMF의 위상과 역할에는 일정한 변화가 관찰된다. 이는 전 지구적 정치경제 변동 에 대한 학습과 적응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1980년대 이후 IMF의 진화과정 을 살펴보려고 한다.
1980년 이후 IMF의 역할 변화 지구 정치경제에서 IMF가 수행하는 역할의 중요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IMF를 실질적 으로 통제하는 미국의 입장 또한 한결 같지 않다. 미 의회는 미 정부의 IMF 출자에 대해, 미국 납세자의 돈으로 도덕적 해이에 빠진 외국을 구제한다는 회의적인 입장을 종종 표명하고는 했다. 또한 IMF가 수행 하는 기능과 역할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그에 대한 사회적 비판과 견제 또한 함께 강해진다. IMF는 이 러한 외부의 자극에 대해 나름의 방식으로 응답한다. 하지만 거기에 일정하게 부여되는 한계, 즉 선택성 또한 존재한다. 본래 IMF는 1944년 미국 뉴햄프셔의 브레턴우즈에서 열린 승전국 회의의 결과로 탄생했다. 미국의 전 후 헤게모니 속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IMF와 IBRD(현 세계은행)의 지배구조는 미국의 통제하에 있다. IMF 는 유럽인이, 세계은행은 미국인이 수장을 맡는 것이 관례가 되어있으며, 구제금융 등의 안건이 IMF의 이사회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출자 지분 85% 이상의 지지가 필요한데 미국은 약 17%의 출자지분을 보유 함으로써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안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듯 미국에 극 도로 유리한 지배구조에 대해 수많은 비판과 이의, 그리고 도전이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 러한 미국 중심의 지배구조에는 단 한 번의 균열도 생긴 적이 없다. 이러한 구조하에서 IMF의 보고서와 기획 다시 생각해보는 IMF 51
정책은 매우 정치적으로 만들어진다. 예를 들면, 과거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에 대해 IMF는 통화 평가절하를 요구하지 않았다. 프랑스가 자국 상품의 아프리카 수출을 계속하기 위해 반대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은 자신이 전략적 이해관계를 가진 중동지역에 대한 IMF의 요구조건을 완화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대까지 IMF의 역할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IMF의 공식적인 역할은 국제수지 적자 로 인해 고정환율을 유지하기 곤란한 상태에 빠진 국가에 단기자금을 제공하여 환율을 유지하는 것이었 다. IMF는 환율안정과 세수증가에 의한 재정적자 해소 정도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자금지원 또한 단기적 인 것으로, 당연히 장기적인 함의를 가진 조건을 부과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IMF는 미국 신자유주의의 전 세계적인 전파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주 목을 받게 된다. 1980년대 이후 IMF의 주된 역할 변화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1980년대 초 라틴 아메리카 위기의 관리에서 시작한 것으로, IMF가 채권자를 대리하여 부채의 상환을 강제하는 것이 다. 다시 말해, 특정 국가가 외채위기에 처하게 되면 IMF는 자금을 지원하여 채권자들이 채권을 상환 받 을 수 있게 하고, 긴축정책을 구제금융 조건으로 부과해 재정흑자를 통해 해당 국가가 IMF 자금 또한 조 기에 상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는 간단히 말해 부채상환을 위해 구제금융국의 경제정책 주권을 강 탈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1980년대 말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IMF에 가입한 동유럽 국가들에서부터 본격화된 것으로, 긴축이나 수출을 통한 외환 확보뿐만 아니라 시장개방, 부정부패, 빈곤 등 보다 장기적 인 함의를 가지는 구조개혁을 요구하고 그 이행 여부를 감시하는 것이다(이행 실적 평가에 따라 자금의 계속 지원 여부가 결정된다). 이에 따라 1970년대까지만 해도 대략 10개 정도에 불과했던 구제금융 조건이 1990
년대 말에는 50에서 80개로 늘어났다. 이러한 IMF의 변화는 부분적으로는 구제금융을 받은 개발도상국 들이 독재, 부정부패 또는 정책오류로 자금을 낭비하여 부채를 상환하지 못한다는 인식과 교훈에 기인한 것이었으나, 보다 중요하게는 초국적 (금융)자본의 축적 기회를 보장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1990년대 IMF가 부과하는 구조개혁의 핵심은 자본이동의 자유화와 금융자본시장의 개방이었 다.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노골적으로 IMF를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의 도구로 사용했다. 1997년 9 월 IMF는 아시아 금융위기 와중에서도 자본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협정문(article of agreement)을 개정했으며, 1998년 러시아와 1999년 브라질 위기 이후에도 자본계정 자유화의 순서와 질
서를 강조했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화 기조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IMF의 획일적인 구제금융 정책을 둘러싼 비판 IMF가 부과하는 구제금융 조건은 나라마다 획일적으로 적용되어‘표준 패키지(standard package)’ 라 불린다. 한 나라에 사용한 문건을 다른 나라에도 이름만 바꾸어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빈번할 지경이 다. 이러한 획일적 정책들은 IMF뿐만 아니라 미국 워싱턴 DC에 위치한 세계은행, 미 재무부도 공유한다 는 점에서‘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 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결국 미국이 주도 52
하는 금융자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IMF 구제금융의 이면에‘미 재무부-IMF-월스트리트 복합체’ 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IMF 구제금융 조건은 전형적이다. 국제수지 및 재정적자 개 선을 위해 긴축적인 통화재정정책을, 그리고 수출확대를 위해 통화의 평가절하를 처방한다. 이는 채권자 에 대한 채무상환을 그 무엇보다도 최우선시하는 조치이다. 그 다음으로 IMF는 상품시장 개방(무역자유 화), 금융/자본시장 개방(자본이동 자유화), 외환거래 자유화, 공기업 민영화, 조세개혁(감세), 노동시장 유연
화, 부정부패 퇴치, 사회안전망 도입 등을 처방한다. 이는 초국적 자본의 축적 기회를 확대하는 조치이다. IMF가 부과하는 획일적 조건은 다음과 같은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첫째, 캐나다의 경제학자 미셸 초 수도프스키는‘긴축정책은 IMF 구제금융국의 경기를 과도하게 위축시켜 기업도산과 실업을 증가시키고, 시장개방은 초국적 자본이 해당 국가의 자산을 헐값에 인수할 수 있게 한다’ 는 비판을 제기하였다. 그 결 과 IMF 구제금융을 받은 국가는 경제성장이나 빈곤탈출을 거의 하지 못하고 빈곤이 도리어 세계화되었 다는 것이다. IMF는 결국 미국, 유럽, 일본 등의 지배적인 초국적 자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뿐이다. 둘째, IMF의 표준 패키지가 각국의 구체적 현실과 맥락을 무시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아시아 금 융위기 당시 세계은행 수석 경제학자였던 스티글리츠는‘1980년대 라틴 아메리카 위기와 달리 아시아의 외채위기는 사적부문에서 발생했으므로 정부에 긴축재정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고 항의했다. 하지 만 IMF는 이러한 비판을 조금도 수용하지 않았고, 스티글리츠는 세계은행 수석 경제학자직을 사임하였 다. 스티글리츠에 따르면, IMF가 사용하는 경제모델은 그다지 수준이 높지 않으며 인력 또한 최상급이 아니다. 동아시아 위기 당시 제프리 삭스는‘개발도상국 1개국 당 할당된 IMF의 경제학자가 평균 7명으 로, IMF에는 해당 국가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에 기초해 정책을 처방할 능력이 없다’ 고 비판한 바 있다. 2015년 현재에도 IMF 가입 국가는 188개에 달하지만 직원은 2천6백 명(물론 이들 모두가 경제학자는 아니 다) 정도로, 1개국당 담당 인력이 평균 13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셋째, IMF 구제금융이‘도덕적 해이(moral hazard)’ 를 조장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IMF는 금융위 기의 이유로 정실자본주의, 도덕적 해이, 불투명성, 잘못된 정책 등을 얘기하며 책임을 약소국에 돌린다. 구제금융 과정에서 채권자의 책임은 거의 부각되지 않으며, 채권자는 IMF의 도움으로 채권을 거의 모두 회수하는 반면 채무국은 위기관리의 거의 모든 비용을 부담한다. 이에 따라 채권자에게 리스크가 높은 투 자를 계속할 유인이 생김으로써 금융위기가 더욱더 빈발한다는 것이다. 또한 IMF 자체도 도덕적 해이로 부터 자유롭지 않은데, 이는 IMF가 자신이 부과한 정책의 결과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기 때문이 다. 넷째, IMF의 구제금융 정책은 위선적이고 모순적인‘이중 잣대(double standard)’ 를 적용한다는 비판 이 제기되었다. 예를 들면 IMF의 구제금융 조건은 대부분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의 강대국에서는 결 코 시행하려고 하지 않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경제를 주도하는 국가들이 어떤 압력도 받지 않 고 비용도 치루지 않기 때문에 기존 체제가 계속 유지된다. 게다가 IMF는 겉으로는 시장에 대한 인위적 개입을 반대하지만 자신만큼은 시장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며,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옹호하지만 실제 정책 기획 다시 생각해보는 IMF 53
결정 과정에서는 민주주의를 배제한다. 일례로 IMF는 정보 불투명성을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들면서도 정작 자신의 의사결정 과정과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아시아 금융위기로 촉발된 이러한 논란에 대응하여 IMF는 2000년대 초부터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IMF는 금융제도 강화 및 공통 기준과 규범 도입을 통한 국제금융체제(international financial architecture)의 강화, 정책문서 공개와 독립적 평가기구(independent evaluation office) 설치, 시민사회화
의 협의 확대를 통한 IMF 및 회원국의 투명성과 책임성 강화, IMF의 전문/책임 영역이 아닌 분야에서의 조건을 축소하는 구제금융 조건의 슬림화 및 사적자본의 이해관계를 일방적으로 대변하지 않도록 하는 국가채무 조정 방식의 개혁 등 IMF 금융지원의 유연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실제로는 매 우 미약하거나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그 예로,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의사결정 구조가 지속되었고 총재 선출은 계속 폐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독립평가기구의 장은 공개된 절차를 통해서가 아니라 민간 기업에 의해 폐쇄적으로 선택되었다. 게다가 IMF와 국제금융체제 개혁에 대한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와 여러 대안들도 거의 수용하지 않았다. 민영화, 자본시장 자유화, 시장 기제에 의한 가격 결정 확대, 자유 무역 등의 기존의 기본 노선에도 변화가 없었다. 이와 같이 IMF는 국제적/역사적 맥락의 변동에 따라 계 속 적응·진화해왔으나 그것을 움직이는 힘에는 변화가 없었고, 따라서 그러한 변화는 근본적일 수 없었 다.
그렇다면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IMF는 어떨까? 위기는 IMF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만큼의 충격을 가했을까? 금융위기 이후 IMF는 저소득 국가에 대한 구제금융 조건을 완화했고 2016년까지 이자를 받 지 않기로 했다. 또한 이른바 강한 펀더멘탈을 가진 국가를 위해서는 정책조건 없는 금융지원제도를 신설 했다. 하지만 동시에 지구적 금융위기가 IMF의 역할을 더욱더 강화했다. IMF는 위기관리를 위해 기금의 규모를 크게 확대(2015년 3월 현재 3270억 달러)하였고 이외에도 추가적으로 8850억 달러를 동원할 수 있 게 되었다. 또한 IMF는 2012년에 지구적 안정성에 영향을 주는 모든 거시경제 및 금융부문의 문제에 대 한 개입을 협정문에 명시했다. 매년 대략 120여 개국, 즉 전체 가입국 중에서 약 3분의 2가 IMF의 감독 컨설팅(surveillance consultations)을 받고 있다. 즉 IMF의 지구 정치경제에 대한 영향력은 더욱더 확대되 었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보았을 때 얼핏 기존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최근 IMF의 행보는 미국 중심 의 지배구조가 유지되는 속에서 IMF의 전 지구적 위기관리 역할이 강화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앞서도 말 했듯이 IMF의 보고서와 정책은 매우 정치적인 고려에 의거해 작성된다. IMF의 경제예측에 나오는 수치 란, 모두 협상된 수치이자 정치적 고려가 들어간 수치다. 앞에서 언급한 낙수효과를 부정하고 그리스 부 채탕감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IMF의 모습은 미국의 최근 최저임금 인상 및 경기회복 우선이라든가, 그리 스의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접근 등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가 가져올 지정학적 위기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반영한다. 자본이동에 대한 규제 또한 자본이동 자유화 노선 자체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제도적 뒷받침이 54
없는 자본이동의 자유화는 위험하다는 2000년대 초반 노선의 재탕에 가깝다. 미국 중심의, 초국적 금융 자본 편향의 지배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우리가 IMF에 기대할 수 있는 변화의 최대치는 (물론 그 의미가 전적으로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초국적 자본의 축적에 대한 보다 정교한 지원과 신자유주의 체제
의 생명 연장을 목적으로 한, 다양한 정치적·사회적 비판에 대한 수용에 그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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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다시 생각해보는 IMF 55
여성 진보정치 열전 11
전북도당 비대위원장 허옥희
유쾌하고‘아쌀한’ 타고난 조직가 “나도 나 혼자 똑똑한 소리 하면서 잘 살 자신은 있지. 다만 나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 여럿이 모여서, 함께 잘 사는 세상 만들고 싶은 거지”
인터뷰 : 고미숙, 김윤희, 김진희, 이봉화 여성위원회 정리 : 이봉화 사진 : 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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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진보정치 열전 57
“그 사람들이 나를 더 이쪽 길로 가도록 만든 것 같애.” 이봉화(이하 이) :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광주에서 고등학교 다니셨죠? 허옥희(이하 허) : 부모님들이 경제력이 없고 애가 셋이니 부담스러워서 고등학교를 안 보내려고 했는 데 오빠가 고등학교는 나와야 한다고 해서 상고를 갔어요. 주산, 부기, 이런 걸 해야 하는데, 학교에서 배 워서 속타 3급까지는 따고, 부기는 따로 학원을 다닐 형편이 안 되니까 어려웠고. 가정환경이 그래서 사춘 기에 껌 좀 씹었죠, 집에 가기가 싫었던 거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내 성적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 람도 없고, 성적이 잘 나와도 칭찬해 주는 사람도 없고. 선생님들은 원 없게 전문대라도 가라고 얘기했는데, 고등학교 졸업반 때 오빠가 사립학교 행정실에 취 직을 시켰어. 선생님이 꿈이었는데, 사립학교에 취직하니까 전교조가 왜 생겼는지 알겠더라구. 행정실장 이 이사장 아들인데 머리가 허연 교장이 퇴근할 때 행정실에 와서 허리 굽히고 퇴근한다고 보고하고, 평 교사인 며느리는 다리 꼬고 앉아서 교장에게 보고 받고. 어느 날 행정실장이 학교 앞으로 이사를 왔는데 직원들을 다 데리고 가서 이삿짐을 나르게 하는 거야. 그때가 4월이라 손이 시릴 땐데 걸레를 주면서 장독 대를 닦으라고 하더라구.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고 집을 나왔어. 이 : 그럼 그 길로 직장을 그만둔 거예요? 그 때가 몇 년이었어요? 허 : 1984년. 학교를 그만두니까, 익산 후레아패션 수출단지에 다니던 언니가“너는 고생을 한 번 해봐 야 한다” 고 해서 익산으로, 말하자면 귀양을 간 거지. 상고를 나왔다고 하면 사무실에서 일을 하게 할 텐 데, 언니가 고생 좀 해보라고 인문계 나왔다고 해서 현장으로 갔지. 첫 근무를 2교대 야근부터 시작을 했 는데 내내 서서 하는 일을 시키더라구. 매일 밤 커피를 한 사발씩 먹었어. 여기서 못 버티면 집에서 인정을 못 받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 몸은 고됐지만 정신적으로 편하더라구. 사람들이랑은 말도 잘 안하고 지냈지. 말씨가 달라서 사람들이 나를 보면 쫓아다니면서 웃는 거야. 이 래저래 말도 안 섞고 살았어. 현장 분위기가 폭력적이고 욕설이 난무했어요. 조장들이 조원들 군기를 심 하게 잡았지. 현장 관리자도 조장이 그렇게 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거야. 조장들에게 대들면 난리가 나는 거지. 어느 날 불량이 나오니까 조장이 하도 욕을 해서 어린 아이가 너무 힘들어 하는 거야. 그래서 걔를 데리고 나와서“니가 열 번 욕을 먹어도 한 번 들이받으면 이기는 거야” 라고 가르쳐줬는데 점심 먹고 오자마자 난리가 난 거야. 둘이 불려가고 노조에서 오고 난리가 났었지. 걔는 결국 힘들어서 그만두고. 나 는 2년이 넘으니까 검사에 베테랑이 됐지. 그러다가 87년 4월 말인가 노조위원장이 직권조인을 하고 날라버린 거야. 노조에 카톨릭학생회 사람 들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난리가 난 거지. 위원장이 4월 7일에 임금협상하고 날랐고 4월 30일 노조간부 들을 다 해고시켰어. 누가 불러서 가보니까,“야, 니들 거기서 뭐했어?”그러는 거야. 우린 어차피 찍혔으 니까 저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뭔지 들어보자고 계속 쫓아다녔는데, 그 사람들은 내가 프락치인 줄 알았 대. 그 주에 나는 맞선 약속이 잡혀 있었는데, 그날 회사 앞에서 모이자고 해서 달려가다가 넘어지는 바람 58
에 턱을 다쳐서 맞선도 못 보고. 그날 길거리에서 농성을 하는데 거기다가 사측에서 대형에어콘을 틀었 어. 덜덜 떨면서 밤을 새고 아침에 보니까 현장관리자들이 그 자리에서 솎아낼 수 있는 사람들을 불러내 는 거야. 그날 원광대 학생들이 지원을 나온다고 들었는데, 등 뒤에 청자켓 입은 사람들이 있어서 원광대 에서 지원하러 온 줄 알았는데 그게 백골단이더라구. 협박에 못 견딘 사람들은 떨어져 나가고, 남은 사람 들은 차인동 성당으로 간다고 해서 따라가다가, 친구가 집에 전화한다고 해서 잠시 대오에서 빠져나왔어. 전화하고 돌아와보니까 사람들이 다 경찰에 연행되고 둘만 남았더라구. 그래서 우리도 경찰서로 갔는데, 사람들이 경찰서에서 하도 난리를 치니까 몇 명만 남기고 다 풀어줬어. 그때부터 노동운동에 발을 담그기 시작한 거지. 출근하면 일도 못하고 불려가서 추궁당하고 미행 붙으니까, 그 사람들이 나를 더 이쪽 길로 가도록 만든 것 같애. 어떻게 합의한 끝에 노조위원장 직선제를 이끌어냈어. 노조집행부 구성을 하는데, 나는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 역할을 못 맡겠다고 했고 내 친구가 위원장 후보가 됐는데, 후보로 나온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 겼지. 친구는 안타까운 희생양이 되었고, 나는 결혼을 해서 밖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내가 이 길로 계 속 간 이유가 친구를 혼자 두고 나온 죄책감 때문이야.
순응하는 며느리에서 다시 바깥세상으로 이 : 결혼하고는 어디에서 사셨어요? 허 : 남편 고향인 김제. 아저씨가 농사짓고 있었지. 시골생활이 어떤지도 모르고 개, 고양이 안 키우고 버스에서 내려서 5분 거리에 집이 있다길래 시집갔지. 시집살이를 해보니 불합리한 게 많더라고. 제사상 도 남자상, 여자상이 따로 있었어. 시어머니는 닭을 삶아도 모가지, 발 이런 건 여자상에 올리고, 좋은 건 남자상에 올리고. 나는 결혼하면 며느리한테 저리지 말아야지 했지. 며느리를 일꾼 하나 더 생긴 것처럼 부리는 거. 내가 착한 딸은 아니었지만, 우리 큰올케 영향으로 착한 며느리로 순응하며 5년을 살았던 것 같애. 이 : 결혼하고 5년 후에는요? 허 : 92년에 익산노동자회를 만들면서 다시 바깥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어. 작은 것부터 시작했지. 매월 한 번씩 모여 정세분석, 시사상식 공부를 했고, 마지막 달엔 평가를 했어. 그러면서 무조건 부모님께 순응 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지. 우리 신랑은 더 놀랐지. 애 셋 데리고 매달 모임에 갔으니까. 그 모 임이 전북 여성노동자회의 토대가 된 거지. 그 전부터 여성노동자회를 만들자고는 했는데 다들 애 낳고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어. 95년에 전북여성노동자회를 만들었어. 첨엔 익산에 있다가 전주로 옮겼지. 이 : 3년 동안 꾸준히 매달 모임을 한 거네요. 허 : 가족들이 같이 모이기도 했고. 남편들은 노동운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자기 와이프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뭐하는지, 무슨 얘기하는지, 면면은 어떤지 확인시켜줘야 이해를 했 여성 진보정치 열전 59
지. 우리 남편도 처음에는 이해를 못했는데 나중에는 모임 있다고 하면 애도 봐주고. 애 들이 크면 한가해서 더 잘 할 줄 알았는데, 조직이 여성노동자회로 발전하면서 점점 횟 수가 줄어들었어. 이 : 전북여성노동자회에서는 뭐 맡으셨 어요? 허 : 창립멤버였죠. 초반에 회장을 했던 친구가 잠적했을 때, 사무국장이 나를 찾아 와서 회장을 하라고 했지만, 나는 87년에 잠 깐 발을 담근 게 전부라 아는 사람도 없고 애 들도 어렸고 지역활동도 모르고 경제적 여유 도 없어서 거절했어. 미안했지. 2003년부터 무료보육서비스팀장으로 상근을 시작했어. 2008년에 회장을 하고. 조직 내에서 불미스 런 일이 생겨서 중도 사퇴했지만, 후원회장 을 맡아서 후원회원을 더 많이 늘렸지. 내가 회장을 그만두고 나서 더 많이 인정받고 괜 찮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어서‘내가 헛고
“한 달에 한 번 분회모임을 할 때 내가 매번 전화를 했지. 내 성격의 강점이 한 번 만난 사람에게 먼저 친하게 다가가는 거니까.”
생은 안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 : 전북여성노동자회 창립할 때 회원은 몇 명이었어요? 허 : 20~30명. 우리가 2세대였다면 3세 대가 있잖아. 88년 민주노조운동이 활성화
되면서 후배 여성노동자들이‘익산 노동자의 집’ 에서 활동을 하고 있더라구요. 우리들과 그 멤버들이 함 께 만들었지. 이 : 전북여성노동자회는 주로 어떤 사업을 했어요? 지금의 여성노동자회들을 보면, 솔직히 대중적이 라는 느낌이 들지는 않거든요. 실례되는 표현일 수 있지만 노동자 없는 노동자 조직? 상근자 중심으로 돌 아가는? 허 : 그때는 현장에서 노동조합 조직이 활발하게 움직이던 때여서, 선배들에게 의존하던 과거와는 상 황이 달랐어요.‘평등의 전화(여성노동자 상담)’ 부터 시작했지. 정책사업으로 프로젝트를 받아서 지역 노동 통계 찾아서 정리하고. 60
이 :‘평등의 전화’ 가 핵심사업이었겠네요? 허 : 지금도 그렇지. 무료보육서비스팀장으로 일할 때, 전국회의를 하면 담당자들이 보육사들이 정리 한 내용을 보고하는 데 그쳤어. 나는 일일이 수혜가정을 방문했거든. 수혜가정에 가면, 내가 무료보육서 비스를 제공해준 것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다고 개인적으로 사례를 하려고 하셨어. 무료보육서비스는 여성 노동자회에서 하는 일이고, 내가 개인적으로 제공하는 혜택이 아니다, 이런 서비스가 계속 유지되려면 여 성노동자회가 잘 운영되어야 하니까, 회원으로 가입해서 후원을 해달라고 했지.
민주노동당 입당, 남 일인 줄 알았던 정치의 시작 이 : 민주노동당에는 언제 입당하셨어요? 허 : 2004년. 내가 살고 있는 지역구에 나랑 같이 활동했던 친구 남편이 출마를 했어(이금희 전 전노협 부위원장, 17대 총선 전주시 완산구을 출마). 도와달라고 하는데 도와줄 것도 없고, 근데 남들이 고생하는 꼴
도 못 봐서 거길 왔다 갔다 했어. 그때까지 정치는 나랑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건 줄 알았지. 빼다가 어쩔 수 없이 6월에 입당을 했어. 내가 남의 집 애를 봐주고 있던 때라 외출도 자유롭지 않고, 당 사무실이 멀어서 차를 가지고 다녀야 하는 시절 이었는데, 나한테 여성위원회를 맡으라고 하는 거야. 당시 여성상근자가 혼자 아등바등하는 게 안쓰러워 서 모임을 하면 내가 조금 일찍 갔지. 그러니까 분회(효자4동)총무를 나한테 시키는 거야. 뭘 해야 하나 생 각하다가 일단 명단을 달라고 해서 한 달에 한 번씩 분회모임을 할 때 내가 매번 전화를 했지. 내 성격의 강점이 한 번 만난 사람에게 먼저 친하게 다가가는 거니까. 분회원이 40명 정도였는데, 잘나가는 덕진구 에서도 분회모임이 그렇게 잘 되지는 않았어. 아직도 수첩이 있어. 누가 왔는지 회비내역도 다 적어놨지. 그 회비를 좋은 데 쓰자고 해서 급식비 지원을 하기로 했고, 아들이 다니던 고등학교에 5만 원씩 지원을 했어. 그러다가 당이 깨지는 바람에 아들 졸업할 때까지 내가 사비로 지원했지. 이 : 아파트 자치활동은 언제부터 하셨어요? 허 : 분회총무를 하다가 2005년에 덕진구랑 완산구 지구당이 통합이 되는데, 완산구 몫으로 내가 부위 원장이 됐어. 그때 내가 살던 아파트의 임차인대표 선거공고가 뜨더라구. 우리 아파트가 분양을 앞두고 있던 때라, 여기서 뭔가 활동을 해봐야겠다 생각했지. 김제에서도 아파트 활동을 했으니까. 2005년에 임 차인대표회에 들어가서 문제점을 파헤쳤지. 아파트 활동은 자신이 있었으니까. 분양대책위원회가 만들어 지면서 부회장을 맡았어. 대책위원들 면면을 보니 각자 이해관계 때문에 분양대책위원회에 들어왔어. 총 회 진행을 내가 하겠다고 했지. 그때부터 분양될 때까지 집회를 여덟 번을 했는데, 한번 빼고 다 내가 진행 했어. 그러다가 지방선거 얘기가 나왔어.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였기 때문에 후보들 모두 인지도가 없었 고 기회가 좋았지. 내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다 인사를 하고. 분양싸움 할 때 매일 아침 방송을 하면서 자연 스럽게 유명인사가 된 거지. 여성 진보정치 열전 61
다른 단지보다 천만 원 싸게 분양을 받았는데, 대책위가 파탄이 났어. 입주자대표회의를 구성하는데 다 본색을 드러내고 자기 회사가 수의계약 따려고 하고, 나는 나대로 출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내가 선거 나가려고 아파트 활동을 한 건 맞지만 나쁜 짓 한 건 아니잖아. 그런데도 동대표들이 나를 불신하고 급선 회를 한 거야. 회장 선거를 하는데, 전주시 아선거구 출마자로 내 이름이 나온 기사를 스크랩해 왔더라구. 동대표 회장이 선거에 나가면 안 된다는 거야. 그래도 내가 두 표 차이로 이겼어. 다른 후보들은 다른 사람 들이 부추겨서 나온 사람들이라 뒷심이 없더라고. 나도 정치적인 목표가 없었다면 못 했을 거야. 지방선거 선거운동 하면서 입주자대표회의를 다시 꾸렸어. 우리 아파트 주민들이 밀어줬으면 당선됐 을 텐데 오히려 우리 아파트에서 표가 안 나왔어. 집안 형편도 안 좋아졌고, 아이들도 중고등학교 다니던 때라 선거운동 하다가 들어가서 밥해 주고 나오고. 밤 9시 넘으면 선거운동을 하기 힘들었어, 취객들이 성 희롱 하고. 사람들이 내가 분양대책위 하면서 사십 몇 억을 해먹었다고 해서 선거기간 중에 경찰서에 가 서 조사도 받았잖아. 나 선거는 다시 안 하고 싶어. 이 : 헉, 사십 몇 억? 누가 고발한 거예요? 허 : 폭력배 출신의 전 시의원, 여론을 호도한 거지. 그런데 나를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 런 게 다 먹혀. 내가 여성후보고 민주노동당이니까 다른 동네에선 신선하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동네만 오면 속이 시끄러워지는 거야. 그 후 4년에 걸쳐서 아파트를 안정시켜 놨는데, 모르지 2010년에 선거 나 갔으면 사람들이 인정해 줬을지. 지금까지 잘 지내는 사람들도 많고, 내가 필요할 때는 도움 줄 사람들도 생겨서 헛살지는 않은 것 같아. 이 : 선거운동 할 때 분회사람들은 많이 참여했어요? 허 : 선거 끝났을 때 득표(10.25%)는 저조했지만, 내가 뭐가 있어서 이 사람들이 나에게 이런 도움을 주 었겠나, 내가 당에 있으니까 이런 거지. 무급으로 두 달 이상을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한 사람들, 아침 일찍 나와서 선거운동 해준 사람들….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 저 친구가 후보로 나온다면 나도 그럴 수 있을까? 내가 답례를 못했지만 그 고마움은 가슴 깊지. 그런데 지금은 점점 더 선거운동 결합을 안 하더만. 서운한 점도 있었지만 당에서 나를 인정해주었다는 데 감사한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 그때 친했던 사람들과 끈끈한 정이 있었는데 도당 간부 맡으면서 다 깨져버렸네. 일 안 도와주면 욕하고.(하하)
“나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 여럿이 모여서, 함께 잘 사는 세상 만들고 싶은 거지” 이 : 민주노동당 탈당은 2008년 2월에 하셨어요? 허 : 나는 당시에 분당에 반대했어. 조직으로 밀어붙이면 조직을 만들어서 붙어야지. 그런데 같이 활동 하던 사람들 다 나가는데 나 혼자 남아서 뭘 할 수도 없고. 맘에 없는 탈당을 하고 한동안은 무당적으로 있 었지. 이 : 진보신당에는 언제 입당하셨어요? 62
전주시 버스문제 해결 촉구를 위한 3보1배 행렬에 서윤근 전 전북도당 위원장과 함께한 허옥희 비대위원장 (사진 : 노동당 전북도당)
허 : 2009년 8월. 무당적으로 있다보니 정치적 감이 떨어지는 거야. 내 사회활동의 시발점이 당이었는 데, 어딘가는 소속이 되어야 정세도 알고. 여성노동자회에서 일하고 있을 때인데, 정책은 정치권에서 채 택을 해야 실현이 되는데, 이런 시민사회단체들은 선거 때만 되면 중립을 선언하고 안 움직이는 거야. NL 은 자기들끼리 단체 만들어서 당을 밀어주잖아.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어. 진보신당 전북도당 사람들도 계속 입당하라고 했지. 무당적이었지만 2009년 염경석 위원장 보궐선거 나갔을 때 세액공제후원금 불나게 모아줬어. 그러다보니 어찌어찌 입당하게 되더라구. 그때 도당 당원이 백 명 정도였는데, 입당하자마다 열 명을 입당시켰지. 입당은 해도 아무 것도 안 맡아야지 했는데 그게 되 나. 2009년 도당 창립하는데 도당 부위원장을 하라는 거야. 나는 내공도 안 되고 능력이 안 된다고 했는 데, 염경석 위원장이 자꾸 설득하길래 사람이 없나보다 하고 하기로 했지. 지방선거 비례대표로 내 이름 이 오르내리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는데, 모 당원이 내가 비정규법안 통과시키라고 피켓팅을 했다는 말도 안 되는 비방을 하고, 그런 사람이 후보가 되면 안 된다고 했다는 얘기를 접하게 된 거야. 공개사과를 요구 했지만 거부하길래 당기위원회에 제소까지 했잖아. 이런 불명예스러운 상황에서 부위원장직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해서 바로 사퇴했어. 그러다가 2011년 통합 논쟁이 있었고 서윤근 위원장의 설득과 권유로 전북도당 부위원장, 집행위원장 으로 일했어요. 이 : 어려운 시기에 조직을 잘 운영한 케이스잖아요, 전북이. 인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녹록치 않았을 텐데 늘 활기차게 활동해 오셨는데요. 그런 에너지와 열정의 원천이 무엇인가요? 여성 진보정치 열전 63
허 : 전북여성노동자회 그만두고 공백기가 있었잖아요. 한발 물러서서 보니까 내가 다 잘한 것만은 아 니더라구. 나와서 보니까 보여요. 그러면서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더라고. 이래서 활동가들에게 잠시 쉼이 필요하구나.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책임감 때문에 놓지 못하면서 정서적으로 피폐해지잖아. 활동을 쉬니까 집안이 평안해지더라구. 애들이 잘 풀어주니까 남편도 내 활동에 대해 긍정적으로 봐주고. 내 개 인적인 이득을 위해 다니면 모르겠지만 다들 위해서 하는 거니까. 나는 재정을 맡으면 잘 할 수 있어. 내가 잘 할 수 있는 영역에서 내 할 일을 찾아서 하면, 나는 어지간 히 화 안 나고는 웃으면서 화내거든. 개인적으로 원망이나 미움이 없기 때문에, 당원들이 협조적이면 겁 나 이뻤다가 안 하면 미워. 그러다가 또 뭐 해준다고 하면 속없이 좋아하고. 이 :“이런 정당 활동을 해보고 싶다” 라든가,“이런 사업을 해보고 싶다” 라는 꿈이 있을 텐데요. 허 : 나도 나 혼자 똑똑한 소리 하면서 잘 살 자신은 있지. 다만 나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 여럿이 모여 서, 함께 잘 사는 세상 만들고 싶어. 이제 정당활동을 그만둔다고 하면, 아이들 어릴 때 방치하면서 니네들 좀 더 잘사는 세상 만들기 위해 활동한다고 했는데 애들 볼 낯이 없어. 나와 같은 사람들이 더불어서 같이 보람 느끼고 뭔가 만들어내는 정당활동을 하고 싶은 것인데. 이사한 아파트에서도 7월에 입주자 회의를 구성할 거야. 이번에 하면 다시 이 일부터, 밑으로 내려가서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내 할 일을 하고 싶어요. 거기까지 정리가 되었어. 우리 아파트 관리소장이 나 한테 호감을 갖고 있어서 가능하면 대표회장까지 해볼까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건 잘 모르겠고. 이 : 타고난 조직가의 면모가 얘기 중에도 언뜻언뜻 나왔습니다. 사람들의 뜻을 모으고 마음을 얻으려 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허 : 내가 사람들에게 뭔가를 하자고 할 때는 물귀신작전으로‘내가 할 거니까 너도 하자, 니가 하는 거 나도 다 할게’그렇게 하니까 조금 더 움직여요. 문자만 보내고 만다거나 알아서 하라고 하면 절대 조직은 안 되는 거죠. 진심으로 애정을 가지고 사람을 챙겨야지. 지가 알아서 잘 하겠거니 하면 절대 움직이지 않 더라구. 이 : 긴 시간 재밌게 이야기보따리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이 일하면 유쾌하고‘아쌀하게’할 수 있 을 것 같습니다. 그런 기회가 있기를 기대하며 인터뷰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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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표절당한 글, 추방당한 기록 노동자 르포 작가에게 노동조합이 필요했던 이유
6월 11일 희망버스의 문화예술인 참가자들 (사진 : 서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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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표절당한 글, 추방당한 기록 노동자 르포 작가에게 노동조합이 필요했던 이유 서분숙 기록 노동자
이십칠 년째다. 예술적 전문성을 가지고 진보운동에 참여하던 이들을 당시에는‘문예활 동가’ 라고 불렀다. 이십칠 년 전, 나도‘문예활동가’ 로 예술활동을 시작했다. 내가 활동했던 곳은 지역의‘민중문화예술운동연합’ 에 속해 있던 문학 분과였다. 스무 살을 갓 넘긴 대학 생이었지만 일찌감치 나는 전문 예술단체에서 전업적인 문예활동가의 삶을 시작했다. 문학 으로 세상과 교감하고 소통한 세월 이십칠 년. 서른 살이 넘어 글을 쓰지 않고 살았던 몇 해 가 있다. 안 쓰고는 살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린 건 훨씬 오래 전이었지만 작심하고 다시 글을 쓴 건 나이 마흔 때였다. 그해 여름, 지금도 기억나는 건 글을 쓰기 위해 머물렀던 방의 지독 한 더위다. 선풍기조차 켜지 않은 채, 고여 있던 열기를 물처럼 들이키며 글을 썼다. 한 여 름의 더위가 조금씩 식어갈 무렵, 나는 더위가 가득했던 그 방에서 여름 내내 내가 쓴 글들 과 함께 나왔다. 그렇게 쓴 글들 중 몇 편들을 떠나보냈고, 내게서 떠난 글들은 전태일 문학 상 수상의 소식을 안고 다시 내게 돌아왔다. 이십대 때부터 수상을 기대한 상이었다. 그 상 을 받으면서 나는 내 글을 좀 넓은 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내보일 기회를 얻게 되었다. 작은 공장들이 양쪽으로 빼곡하게 들어앉아 있던 창신동 골목길을 올라서 찾아간 전태 일 기념사업회. 그곳에서 나는 앞으로 어떻게 쓸 것인가를 사색할 수 있는 여러 만남들을 가졌다. 전태일 문학상 수상자들이 계속 글을 써야만 노동문학이 살아날 수 있다던 이소선 여사의 말은 지금도 내게 나무그늘 밑을 누비는 발자국 소리처럼 선명하게 들려온다. 누군 가를 기다리는 간절함, 혹은 잠시 노동에서 벗어나 내면으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처럼 그 목소리는 늘 내게 머물고 있다. 그리고 사라져가는 소리들, 살아있는 고통의 소리를 담으며 현장을 누비던 르포작가들과의 만남은 내가 어떤 글을 써야할지를 생생하게 알려주었다. 66
그때는 그랬다. 이제 열심히 쓰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열심히 쓰기만 하면 좋은 작가가 저절로 되는 줄 알았다. 글을 쓰기 위해서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생존이라는 걸, 그리고 자신이 쓴 글조차도 눈앞에서 빼앗기 고 표절당하는 어이없는 일이 자유로운(더구나 진보적이기까지 한) 예술가들이 모인 곳에서도 일어난다는 걸 경험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많은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고 여러 사람들의 육성을 녹음기에 담았다. 현장에서 담아온 사진과 육성 을 다시 풀어서 글로 담아내는 시간은 내가 만난 사람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내게로 전해 오는 시간이었 다. 아픈 건 마음만이 아니었다. 원고지 서너 장 정도의 분량을 채우는 노동을 했을 뿐인데도 몸이 자주 아 팠다. 안 쓰겠다고 맘먹으면 그 순간은 후련하지만 얼마 후 쓰지 않는 허전함이 또 한기처럼 몸을 휘젓고 다닌다. 생존을 유지해야 하며 도난과 표절 앞에서 자신의 작품을 지켜야 하는 책무뿐만 아니라 수시로 엄습해오는 창작의 고통과도 맞서야 하는 것이 이 시대에 예술을 업으로 삼는 이들의 숙명이란 걸 깨닫는 데는 정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표절당한 글, 지울 수 없는 상처 나는 예술인소셜유니온 조합원이다. 오랫동안 여러 현장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의 문제 를 사회적 현상으로 인식하고 해결하는 데는 우둔했다. 글을 쓰면 쓸수록 점점 더 몸이 아파오는 증상 또 한 현장 사람들의 고통이 내게 전이된 현상으로만 받아들였다. 물론 전이 또한 분명 고통의 일부겠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글을 쓰는 나의 환경이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란 걸 깨달은 건 몸이 아프고도 한참이 지나서다. 작품을 생산하는 환경은 작가의 열정과 의지를 넘어선 일이다. 내가 예술인소셜유니온 의 조합원이 된 이유는 내가 겪은 아픔들은 결코 내 개인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구조에 원인 이 있다는 자각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예술가들에게 깃든 많은 어려움들을 사회적으로 풀어내는 데 큰 버 팀목이 되리라 여긴다. 내가 가장 최근에 겪은 어려움은‘표절’ 과 관련해서다. 소설가 신경숙의‘표절’ 에 관한 기사를 읽을 때만 해도 그 사건이 주는 충격이 내 일상을 흔들어놓을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타인의 글들을 뜯어가서 자신의 글 속에 듬성듬성 이식하는 작가의 작업을 상상하 노라면 섬뜩하고 기이했다. 이후 작가는 자신의 글이 표절이 아니라고 했다가, 표절이라는 지적을 할 만 하지만 자신은 표절 부분의 원문이 실린《우국》 을 읽은 기억이 나지 않고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기억조차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실망을 넘어서 숨을 쉴 수 없을 듯한 답답함이 차올랐 다. 자주 숨이 찼고 답답했다. 나는 혼잣말을 자주 했고 그 말의 대부분은 욕설이었다.‘미친’ ‘미쳤어’ ‘날 뭘로 보고 ’ ‘왜 하필 내 글이야’ 라는 말이 불쑥불쑥 내 입에서 터져 나올 때는 나도 내가 낯설었다. 가 슴이 자주 답답했다. 주먹으로 퉁퉁 가슴을 치는 날들이 많았다.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다가‘도대체 내가 왜 이러지?’ 스스로 되묻는 일이 잦아졌다.‘신경숙’때문만 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 노동르포 67
았다. 나를 점점 몰아가는 답답함과 분노의 정체가 궁금했다. 스스로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어느 날, 나는 내게 일어난 한 사건을 떠올렸다. 내 글이‘표절’ 당한 일이었다. 그때 나에게 일어난 일을 내 몸과 마음이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그때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도대체 내게 일어난 어떤 일들 이 지금도‘표절’ 이라는 사건에 대해 나를 이토록 민감하게 하는 걸까. 이년 전의 자료함을 열어서 당시에 내게 일어났던 일들을 다시 정리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내가 얼마 나 바보 같았는지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삼년 전, 노동현장을 소재로 글을 쓰던 소설가가 새 소설집을 출간했다. 신문기사에는 새로 출간한 소 설책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고, 노동현장을 담은 르포를 쓰는 내 입장에서도 현장의 삶과 투쟁을 다룬 소 설집이 나온 건 관심이 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나는 그 작가의 새로운 소설집의 표제작이자, 내가 이전에 르포에 담은 적이 있는 현장을 소재로 한 그의 소설을 읽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그의 소설 군 데군데서 내가 르포에서 쓴 문장이 그대로 녹아있는 부분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말로 만 듣던‘표절’ 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표절 피해자가 겪는 고통은 막연히 생각하는 그 이상이다. 몸 에 힘이 빠지고 심장이 크게 뛰었다. 마음은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으로 어지러웠다. 내가 그린 그림의 일 부를 오려간 듯한, 혹은 정리해놓은 안방 서랍장을 누군가 열고 함부로 내 옷을 들고 간 듯한, 혹은 부지런 히 일구고 가꾼 밭의 한 부분을 누군가 밟고 지나간 듯한, 결코 단순한 몇 마디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한동안 나를 휘감았다. 내 글을 함부로 옮겨 쓴 작가에게 당장‘당신이 내 글을 표절했다’ 고 말하고 싶었 다. 그러나 주변의 작가들뿐만 아니라 가족들조차도 그 일을 말렸다. 결과적으로 내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은 일이 될 거라 했다. 설령 표절이 맞다고 해도 그 소설가가 노동현실을 고발하는 정의로운 일에 네 르포를 쓴 것이니 이해해야 한다는 말을 들려준 이도 있었다. 들어보면 다 맞는 말 같아서 한동안은 그 일 을 가슴에 묻어두었다. 그러나 그리 오래 묻어두진 못했다. 억울했기 때문이다. 그 소설가가 아무리 좋은 소설을 쓴다고 해도, 내 글을 가져가 흩뿌리듯 이리저리 던져놓은 글이 내게도 좋은 소설일 리는 결코 없 었다. 그의 소설이 아무리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칠지라도 내게는 오히려 독처럼 나를 병들게 하는 글이 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의 표절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나만은 그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표절을 당 한 작가에게 회복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단지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만 남는다. 표절이 주는 충격은 피해자에게는 치명적이다. 나는 먼저 그 소설가와 내가 함께 속해있던 문학단체의 작가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표절에 대한 사 회적 잣대나 문단 내의 기준조차도 없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내가 제기한 문제는 그 소 설가와 내가 직접 해결하는 방식으로 흘러갔다. 당시에 내가 제기한 표절 부분은 적어도 두 줄 이상이 거 의 같거나 비슷한 문장 세 군데였다. 내가 제기한 표절 부분에 대한 소설가의 해명이 담긴 긴 메일을 이년 만에 다시 읽어보았다. 다시 읽어보니 최근까지 내게 가득했던 답답함과 분노의 감정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근원을 알겠다. 소설가가 내게 보낸 메일 어디에도 표절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오히려 내 르포가 묘사 한 이미지가 시간적으로는 자신이 먼저 떠올린 이미지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르포에 담긴 문장과 68
그림쟁이들 할 말 많다 집담회 (사진 : 예술인소셜유니온 제공)
자신의 소설 속 문장이 상당히 비슷한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한다는 내용이었다. 내가‘표절’ 을 주장한 세 군데 문장 중 그는 문장이 거의 일치한 한 군데만‘인용’ 을 인정했고, 나머지 두 군데는 나의 오해라고 했 다. 내가 직접 취재해서 쓴 노동자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두고 그는 이미 언론에도 나와 있는 알려진 이 야기라고 해명했다.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 르포의 문장 순서와 그의 소설 속 문장 순서가 똑같은 것조차 해명하지 않은 부분은 지금 생각해도 답답하다. 나머지 묘사에 대한 부분도 그는 현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라고 했지만, 이 역시 내가 밤늦게까지 현장을 지켜보고서야 나온 묘사이기 때 문에 단 한 번도 소설 속 현장을 와보지 않은 그가 짐작만으로 묘사한 글이라고 하기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들이다. 소설가와 내가 주고받은 메일들을 보니 그 소설가에게나 나에게나 다시 화가 난다. 그리고 표절 피해자와 표절을 한 당사자끼리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는 문단의 구조도 답답하다. 강 자와 약자의 구도를 굳이 여기서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 그 소설가는 부담이 되는 존 재였다.‘인용’ 을 인정하는 정도의 사과임에도 내가 사과를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까지 한 메일이 있었다. 그 기록들이 나를 힘들게 한다. 치욕스럽기조차 하다. 기억하기 싫었던 탓인지 이후에 는 이 일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신경숙의‘표절’이후 나는 다시 아프다. 나에게 불쑥불쑥 화가 난다. 이 아픔과 분노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면 나는 정말 내가 괜찮아졌다고 여길 뻔 했다. 지금도 세상에는 여전히 자신의 작품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분명한 현실이다. 어느 사이인가 다른 이의 계좌로 넘어가버린 돈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창작물이 도난당하고 있다. 노동르포 69
돈만 아는 기업이 어떻게 문화예술을 할 수 있나 김창의 작가는 2009년 한국콘텐츠진흥원‘기획창작 아카데미’ 를 수료한 기획자이자 시나리오 작가이 다. 2009년 그는 졸업작품으로 영화기획서《차붐》 (차범근과 파독광부 이야기)을 완성했다. 이 기획서는 실 제로 그가 그의 가족이 있는 독일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만난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의 삶을 표현해보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했다. 영화기획을 공부하기 전에 십년 이상 마케팅 분야의 일을 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영화기획 공부를 시작한 건 어린 시절,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기 전부터 그의 몸에 배어있던 꿈 때문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늦둥이인 그가 나중에 혼자 고생할 것을 우려했던 탓인지 아 버지는 그가 유능한 경영인이 되길 원했다. 그림이 아니라면 국문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그조차도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대로 경영학을 전공했고 전공과 관련한 직업을 가졌다. 마흔을 눈앞에 둔 2009년, 그는 다시 길을 돌아서 그의 꿈이 서린 길로 돌아왔다. 영화를 만들고 싶었 다. 한두 줄 스쳐가는 영감만으로도 엄청난 분량의 작업이 이뤄지고 두 시간짜리 긴 영화가 만들어지는 출발점이 기획자의 위치다. 그는 그 일을 하고 싶었다. 그 첫 작품이《차붐》 (차범근과 파독광부 이야기)이다. 그러나 돌고 돌아온 길에서 그의 출발은 막혀있다. 영화《국제시장》 이 그의 작품《차붐》 을 표절했다는 글을 다음 아고라에 올린 게 지난 오월의 일이다. 일만 명 서명을 목표로, 지금 그는 도난당한《차붐》 을찾 기 위해 홀로 달리는 중이다.《차붐》 의 기획서와 시나리오는 제출 전 저작권등록을 해두었다. 저작권 전문 변호사들로 구성된 정부기관인 콘텐츠분쟁조정위원회에서도《국제시장》제작사인 CJ에 게 타협하라는 조정안(보상안)을 권고했다. 그러나 CJ는 권고안에 대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오히려 김창 의 작가에게 명예훼손에 대한 법적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이다. 서울 신도림역 인근, 사람들로 붐비는 카페에서 만난 김창의 작가는 나와는 첫 만남이었지만 낯설지 않은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그의 이야기의 중심이 영화와 표절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의 꿈과 사람에 관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획자의 꿈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고 싶어 하는 사람 이었다. 그런 그이기에 이윤을 추구하는 CJ가 문화산업을 장악하는 현실에 대한 우려가 컸다. 문화는 돈 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에 놓여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이 그가 가진 원칙이다. 늦둥이 아들인 자신을 키우며 늙어갔고 지금은 세상을 떠나버린 부모님에 대한 여한이 그의 마음속엔 크게 남아있다. 꿈을 이룬 아들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부모님. 언젠가 부모님 영전에 그의 작 품을 올려놓는 일이 그의 또 하나의 꿈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예술가도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싸우는 사람 김창의 작가 또한 직장생활 하면서 벌어놓은 돈을 쓰며 살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영화기획자로 자리 잡기도 전에‘표절’ 이라는 사태를 만난 그가 영화를 기획해서 먹고살 만큼의 돈을 벌 수 있는 날이 언제 70
올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눈 한번 꽉 감고 제작사인 CJ와 싸우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 에게 새로운 영화기획의 제안이 다시 왔을 수도 있을까. 그러나 그는 그럴 가능성을 애초 염두에 두지 않 았다. 한마디로 문화나 예술은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입 작가를 키우고 발굴하기 위한‘기획 창작 아카데미’ 에 대기업인 CJ 소속 강사가 와서 강의를 하고 수강생의 작품을 도용해서 만드는 영화계의 생태가 변하지 않는 이상, 예술이나 문화로서의 희망은 더 이상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표절’ 은창 작자가 꿈을 펼치기도 전에 그 새순부터 밟아버리는 영혼의 살인이었다. 김창의 작가와의 만남은 잠시 후 예술인소셜유니온의 하장호 사무처장과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내가 먼저 요청한 만남이었다. 성북구에서 신도림으로, 다시 성북구로 넘어가 회의를 해야 하는 그의 빡빡한 일정 속에 잠시 틈을 내어 마주한 자리였다. 문화연대 정원옥 박사도 함께했다. 정원옥 박사는‘표절’ 문제 를 당한 경험이 있는 작가들처럼, 비슷한 입장에 있는 작가들이 서로 연대해서 스스로 문제를 풀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나와 김창의 작가의 만남도 정원옥 박사처럼 현장을 응시하는 연구자들 덕분에 이 뤄질 수 있었다. 예술인소셜유니온은 2011년 최고은 작가의 죽음을 계기로 만들어진 모임이다. 하장호 처장이 이 문제 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도 예술기획자로 활동하면서 스스로 너무나 열악한 예술가들의 생존현실을 경 험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작품을 도용당하는 일뿐만 아니라 당장 먹고사는 일조차도 어려운 게 예술가들 의 현실이다. 심지어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출발한 학교예술강사 지원제도 또한 예술가들의 생계를 해결하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주 1회 강의에, 그나마 일 년에 평균 육칠 개월 정도를 지원하는 제도지만, 올해는 메르스 전염의 우려 때문에 대분의의 학교가 6월 한 달은 꼬박 외부강사의 강의를 휴강했다. 전염 병과 같은 변수에도 예술가들은 전혀 생계비를 지원받지 못한다. 내가 만난 예술가들은 유일한 수입원인 예술강사비마저 끊긴 6월 한 달은 정말 밥 먹고 살기도 힘들었다고 했다. 내게도 글을 쓰는 일이 곧 생계를 잇는 일이 되어야 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진보적인 성향의 지역신문 사에 일 년 가까이 원고료와 취재료를 전혀 받지 않고 원고를 기고했던 적이 있다. 내 글이 그 신문사와 지 역에 진심으로 도움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연재 글을 쓰는 조건으로 일년간 월 십만 원 정 도의 원고료를 지급해 줄 것을 신문사에 요청한 일이 있었다. 당시 나는 오래 앓고 있던 병이 재발했고 당 장 입원비와 치료비가 필요했다. 글을 쓸 테니 일년간 고정적으로 원고료를 달라던 요청에 편집장은“원 고료 받으려면 쓰지 말라” 고 말했다(당시 기자들에게는 평균 월 이백 이상의 임금이 지급되고 있었다). 다른 운 영진들도 침묵으로 편집장의 의견을 지지했다. 병들고 내쫓기는 비참한 상황이 되어서야 나는 내 처지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었다. 내가 예술인소셜유니온의 조합원이 된 이유다.
노동르포 71
정책포럼
재개발과 문화유산, 정치와 역사 사이 ①
무악제2구역 재개발로 살펴보는 도시이야기 김한울 서울시당 사무처장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별 진척이 없다고 들었던 재개발사업이 어느새 관리처분계획을 제 출하는 데 이르렀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종로구 무악동의 무악제2구역에 관한 이야기다. 관리처분계획은 재개발사업을 할 때 넘어야 하는 마지막 고갯마루 같은 것이다. 다음 단 계는 이주와 철거다. 재개발사업 자체가 중단되거나 되돌려지는 게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지 는 변곡점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직접적인 구조요청이 왔다.
뉴타운, 재개발, 출구전략 이명박 시절의 뉴타운 재개발 남발이 원죄다. 서울을 통째로 아파트 공사장으로 갈아엎 는 것이나 다름없는 지구지정이 곳곳에 병증을 깊게 하는 가운데, 박원순 서울시장이 보궐 임기를 시작하며 재개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뉴타운 출구전략’ 으로 이름 붙여진 주거재생으로의 패러다임 전환 선언은 당장 기대를 받기도 했으나, 결국 지지부진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사실상 공전 중이었었다. 서울시당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꾸준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이러기도 저러기도 난감하기 마련인 재개발사업에 대해, 박원순 서울시장은 문제가 있는 곳은 단호하게 중단하 고 문제가 없는 곳은 행정적 지원을 통해 박차를 가하는 식으로 상황과 조건에 따른 맞춤형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진척이 되지 않는 곳을 직권 해제 하는 방식으로 상당수의 구역이 최근 들어 해제되긴 했지만, 당장 기로에 서서 가장 첨 72
무악제2구역 재개발예정지 선정에 대한 보도화면 (국민TV뉴스, 2015년 7월 1일 방송화면)
예한 갈등을 겪는 현장에는 수수방관하는 것이 서울시의 공식적인 입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재개발사업은 물론,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하겠다는‘뉴타운 출구전략’역시 지지부진한 가운데, 서울 시당은 여건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관여해서 서울시의 적극적인 개입을 유도하고 궁극적으로는 서울시의 ‘뉴타운 출구전략’ 이 실제로 유효한 정책적 대안으로 작동할 수 있기를 바라왔다. 이러한 이유로 구조요 청에 대한 응답의 근거는 충분했다.
미션 임파서블, 기자들이 많이 오는 기자회견 “기자들이 많이 오는 기자회견이어야 한다” 는 구체적인 조건이 붙었다. 기자들이 많이 오는 기자회견 이라니, 사안도 사안이지만 붕어가 들어있는 붕어빵이 낯설 수밖에 없듯 기자가 있는 기자회견이 낯설게 되어버린 상황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신선한’조건이었다. 서울시당에서는 바로 얼마 전, 서울시의 대중교통요금 인상을 저지하기 위해 (주민등록 기준의) 서울시 민 6천 명의 서명을 받았다. 주민번호 수집 금지 덕분에 생년월일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이름과 주소, 생년 월일을 요구하는 최소한의 청구인 서명요건조차 시민들에겐 선뜻 펜을 들게 하지 못하는 이유로 충분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직과 무관한 당원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서울시 최초의 시민공청회청구서명을 완성해서 제출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은 언론의 무반응이었다. 당장 천만 서울시민과 천만 경기도민, 삼백만 인천시민이 직접적으로 경제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사안이었다. 전철 기준으로 매일 왕복 400원의 추가부담이 일어 정책포럼 73
무악제2구역 재개발예정지 선정에 대한 보도화면 (국민TV뉴스, 2015년 7월 1일 방송화면)
나는 문제였다. 주말에 꼼짝 않는다 하더라도 월 8천 원의 추가부담이 생겨나고, 성인 4인 가족 기준으로 보면 3만2천 원이 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인구가 수도권 인구의 절반이고, 그 중 절반이 성인요금을 내고 대중교통을 매일 이용하는 사람들이라고 가정하고 단순계산 하더라도 매일 23억 원의 흐름이 결정 되는 문제였다. 월 환산하면 700억 원에 육박한다. 인상분만 해도 이 정도라는 얘기다. 사례차원에서도 의미가 있었다. 서울시 주민참여기본조례는 4년 동안 첫 울음조차 터뜨리지 못한 채 그 존재감을 제대로 나타내본 적이 없었다. 말뿐인‘주민참여’ 가 서울시당의‘시민 공청회청구’ 로 그 존재 감을 과시할 첫 기회를 얻은 것이다. 시민의 시정참여 역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 다. 이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당의 서울시 대중교통요금 인상안 반대와 시민공청회청구서명 개 시, 청구서명 완성 및 제출, 서울시
붕어가 든 붕어빵이 낯설 듯 기자가 있는 기자회 견이 낯설게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기자들 이 많이 오는 기자회견” 을 기획하라니, 물 위를 걷는 기적이라도 만들어내라는 게 아닌가.
의 공청회청구 무시, 일방적인 강행 으로 인한 물가대책심의위원회 졸속 통과, 그 어느 것도 언론에서 단 한 줄도 다뤄지지 않았다. 이른바 주요 언론사는 물론, 대개 진보적인 성향 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되는 언론
사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기자들이 많이 오는 기자회견을 기획해야 한다니, 물 위를 걷는 기적 74
이라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역사의 다른 이름은 정치의 흔적 불행인지 다행인지 재개발문제로만 접근했을 때보다 폭넓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이슈가 있었다. 요행이라고 보기엔 필연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현재 국내 3만 제곱미터 이상의 모든 건설공사는 무조건 문화재지표조사를 거치도록 강제되어 있다. 여기서 예외가 되는 곳은 서울 사대문(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 안쪽으로, 단 한 평의 땅이라도 건 물을 신축하려면 문화재지표조사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이는 600년 도읍의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다. 다른 곳에 비해 매장유물이 집중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조건을 반영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유물매장 가능성으로만 치환되지 않는다. 매장된 유산은 아니어도 여러 역사문화 자원들 또한 도시에 집중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무악제2구역은 조선시대 청나라와 교류하기 위해 드나들 던 의주로 길 언저리에 해당하던 곳으로, 청나라 사신들이‘대국의 사신을 환영한다’ 는 의미의 영은문에 당도하기 직전에 지나쳤던 곳이다. 당시에는 민가의 흔적조차 확인하기 쉽지 않았던 곳이니, 길만 있었을 뿐 그 곁으로 변변한 유물이 매장됐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얘기다. 험하기로 유명했던 무악재와 바짝 붙어있는 인왕산 서쪽 기슭일 뿐이었던 이 곳은, 구한말에 그 역사 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일제가 조선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신축했던, 현재의 서대문형무소가 들어선 것이 다. 일제는 물론, 일제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독재정권을 겪어내며 감방으로, 고문실로, 형장으로 끌려갔던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의 자취가 집중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감옥에 갇힌 이가 있으면 이들을 뒷바라 지하는 이들도 있기 마련이다. 전자의 공간이 감 옥이라면, 후자의 공간은 감옥 바깥 언저리 어딘 가일 수밖에 없었다. 유관순, 김구, 강우규와 같
형무소 담장 바깥에서 함께 시대를 겪 어낸 이들의 역사는, 지금의 무악제2구 역 그 언저리에서 아직 비춰지지 않은 역사로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은 이들이 서대문형무소와 함께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는 것에 반해, 형무소 담장 바깥에서 이들과 함께 시대를 겪어냈던 이들의 역사는 그 언저리에 아직 비춰지지 않은 역사로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비단 일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일제보다 더 긴 독재 의 역사에서 더 가깝고도 많은 이들의 역사가 그 곳에서 시간을 견뎌왔다. (계속)
정책포럼 75
지역에서 현장에서
국민의 선택, 최저임금 1만원 구교현 최저임금1만원 모든 노동자 권리보장 운동본부 본부장, 아르바이트노동조합 위원장
저임금 일자리라는 암세포, 최저임금 1만원으로 고칠 수 있다 우리사회에는 저임금 비정규 불안정 노동자들이 넘쳐난다. 일자리를 가지지 못한 사람 들부터, 낮은 임금으로 생계를 꾸려가기 어려운 직장인들, 퇴직 후에도 여전히 생계를 책임 져야 하는 장년층까지, 수많은 국민들이 임금이 낮고 불안정한 일자리에서 노동을 하며 살 아간다. 최저임금 문제는 최소 100만, 최대 300만으로 추정되는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에게 도 생존이 달린 문제이다. 한편, 저임금 일자리의 확대는 수많은 자영업자들을 양산했다. 이 좁은 나라의 치킨집 수는 3만 2천여 개. 전 세계 맥도날드 매장 수 3만 6천여 개에 가까운 수준이다. 이 같은 과 도한 경쟁도 모자라 자영업자들
저임금 일자리는 우리사회의 암적인 존재
은 높은 임대료와 금융수수료
다. 암이 말기로 치닫기 전에, 저임금 일자
수탈, 프랜차이즈의 경우는 가
리들을 깨끗이 도려내고 최저임금 1만원 일자리들을 투입해야 한다.
맹본사의 수탈까지 각종 다양한 수탈에 시달려야 한다. 그나마 도 유통업을 중심으로 대기업의 시장점유율이 높아지면서 자영
업자들의 설자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저임금 일자리의 확대가 수탈당하는 자영업자들 의 탈출구를 완전히 틀어막은 상태인 것이다. 또한 저임금 일자리의 확대는 수많은 청년실업자를 양산했다. 청년실업은 일자리의 절 대량이 부족해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청년들이 원하는 양질의 일자리, 다시 말해 임금이 76
높고 고용이 안정된 일자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기업들은 중소기업 대기업 할 것 없이 신규채용을 줄이며 채용감소규모를 매년 갱신하고 있고, 청년실업률은 꾸준히 늘어나 이제 10%를 육박했 다. 서울시의 실질 청년실업률은 31.8% 수준이라는 충격적인 연구결과도 있다. 청년 10명 중 6명이 가장 극단적인 저임금 불안정 노동인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고, 10명 중 7명은“미래가 불안하다” 고 말한 다. 심화되는 청년실업은 우리사회의 미래마저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더불어 저임금 일자리의 확대는 OECD 최장의 노동시간, OECD 최고의 임금격차, OECD 하위권의 노 동소득분배율을 초래했다. 대한민국 노동자들은 세계적으로 가장 길게 일하면서도, 가장 가난한 노동자 들이다. 역설적인 이 상황의 결정적 원인은 기가 막히게 낮은 대한민국의 최저임금이다. 이렇듯 저임금 일자리는 우리사회의 암적인 존재다. 사회곳곳으로 빠르게 확산되며 경제를 마비시키 고, 노동자·자영업자 등 대다수 국민들의 생존을 위협한다. 암이 말기로 치닫기 전에, 우리사회가 돌이 킬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저임금 일자리들을 깨끗이 도려내고 최저임 금 1만원 일자리들을 투입해야 한다. 저임금 일자리라는 암세포는 최저임금 1만원으로 고칠 수 있다. 200~300원의 인상 수준이 아닌 1만원으로의 최저임금 대폭 인상은 기본급이 낮은 정규직 노동자를 포함 한 모든 노동자의 임금을 높이고, 고임금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줄일 수 있게 만든다. 노동시간이 줄어 들면 일자리도 늘릴 수 있다. 올해 사상 최대를 기록한 대기업의 주식배당, 대기업의 내부거래, 사내유보 금을 풀면 최저임금 1만원 일자리는 충분히 가능하다.
국민이 선택한 최저임금 1만원 최저임금1만원 모든 노동자 권리 보장 운동본부(이하 운동본부)는 상반 기 최저임금 사업으로 국민투표를 구 상했다. 최저임금이 2천만 명에 달하 는 국민들의 임금기준선이 되고, 300 만 명에 가까운 국민들이 직접적인 영 향을 받는데도, 최저임금 결정 과정에 서 국민들의 의사를 물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최저임금 1만원에 대한 지지여론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국민들의 의사를 묻는 과 정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5월 31일, 최저임금 1만원을 가장
최저임금 국민투표의 홍보물.“최저임금 인상, 당신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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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주장한 故 권문석 동지의 2주기 추모제에서 국민투표 개막행사를 열어 국민투표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6월 한 달 간, 노동계의 주장“최저임금 노동자와 가족의 생계를 위해선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인상 해야 한다” 와 경영계의 주장“매년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기업 부담이 과도하므로 안정화해야 한다”중 국민들의 선택을 묻는 방식으로 국민투표를 진행했다. 6월 2일에는 경총 앞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해, 최저 임금위원회 사용자위원들을 대표하는
최저임금 국민투표에 참여한 국민들 중 95%가
경총이 국민투표사업에 함께할 것을
노동계의 주장인‘최저임금 1만원’ 을 선택했다.
제안했다. 투표는 온·오프라인에서
경영계의 주장이 매년 최저임금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지만, 정작 그를 지지하는 국민들 은 별로 없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활발히 진행되었고, 총 2만5천186명 이 참여했다. 결과는 생각보다 압도적 이었다. 투표에 참여한 국민들 중 95% 가 노동계의 주장을 선택했다. 경영계 의 주장이 매년 최저임금 결정에 지대
한 영향을 미쳐왔지만, 정작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국민들은 별로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번에 진행된 최저임금 국민투표는 미디어의 주목이나 국민들의 높은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당내 여 러 상황 때문에 오프라인에서 적극적인 투표운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노동당 이외에 함께할 단위들을 발 굴하지 못한 점이 한계로 지적되었다. 홍보만화를 제작하기는 했지만, 최저임금에 대한 더 다양한 홍보 컨텐츠를 개발하지 못한 것도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별다른 광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SNS 등에서 꾸
6월 2일 경총 앞에서 진행한 국민투표 제안 기자회견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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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히 회자되며, 최저임금에 대해 할 말이 있는 사람이나 자기의사를 표현하고 싶은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 어냈다. 실시 기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시기에 있었던 최저임금을 주제로 한 국민여론조사 중 가장 많은 응답자를 확보한 사업이기도 했다. 또한 국민투표 사업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 노동당의 주요 주장을 효과 적으로 선전하고 사실상 노동당에 투표하라는 메시지를 전파할 수 있는 꽤 적절한 수단이라는 판단도 가 능했다. 향후 더 다양한 의제들을 가지고 좀 더 적극적으로 국민투표 사업을 기획할 필요가 있다.
최저임금 1만원 사업,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7월 9일 새벽, 최저임금위원회가 내년도 최저임금을 6,030원으로 결정했다. 450원 인상. 국민들의 삶 은 또 100원짜리 몇 개의 흥정으로 치환되었다. 이번에도 사용자위원들은 동결안을 고수했고, 막판에 10 원짜리 인상안을 내놨다. 노동자위원들은 1만원에서 8,100원까지 요구안을 낮췄지만, 어림도 없는 공익 위원안에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다. 이미 심의가 끝나기 전부터 예상된 상황이었고, 결정된 금액까지도 예 상치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내년도 최저임금 심의의 과정과 결과 또한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몇 백 원 수준의 인상으로 최저임금 노동자들은 사실상 말라죽어 가고 있다. 노동당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당장 공익위원들에게 책임을 묻는 활동부터 시작 해, 최저임금위원회 제도의 전면수정과 최저임금 1만원을 통한 우리사회 노동시장의 혁신까지 하나의 그 림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영향력 있는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업 그레이드 된 국민투표사업을 기획해야 한다. 올해 처음 노동계의 요구로 최저임금 1만원이 채택되면서 국 민들 사이에 1만원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되고 있는 만큼, 최저임금 1만원을 주제로 한 사업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노동당이 최저임금 1만원과 같은 새로운 노동의제를 선도하는 정치세력이 될 수 있도록 많은 당원 동 지들의 관심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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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위원장이 “숨은 강서당원을 찾습니다”
지역에서 현장에서
강서구 당원협의회 재건기 박예준 강서당협 위원장
2015년 6월 26일, 강서구 당원협의회가 직선 위원장을 선출했습니다. 2014년 1월 6일, 서울시당 제5기 2차 운영위원회가 강서구 당원협의회를 사고당협으로 지정한 지 537일만 이었습니다. 이로써 강서구 당원협의회는 1년 6개월여의 사고 상태에서 벗어나 온전한‘당 원협의회’ 가 되었습니다.
신입당원, 강서구 당원-되기 저는 2014년 3월 7일에 입당했습니다. 제주도당에서 입당을 했고, 5월 24일자로 서울시 당 강서구 당원협의회에 전입을 신청했습니다. 지금 확인해보니 승인은 5월 29일이었네요. 마침 그때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강남역에 있는 삼성사옥 앞에서 농성을 하고 있어 그 집회 에 자주 참석했습니다. 보름 정도를 홀로 농성장에 다니다, 서울시당 홈페이지 방명록에 강 서 당원이라며 글을 남겼습니다. 전화를 달라는 시당의 답글을 보고 전화를 하니, 강서당협 은 사고 상태이나 모임을 주도하는 당원이 있으니 그 분께 연락을 해 보라고 알려주었습니 다.‘그분’ 이 바로 지금 강서당협 부위원장을 맡고 계신 정세원 동지입니다. 여차저차 시간이 흘러 당직선거 때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 사이, 강서 당원모임에도 나가 고, 서울시당 신입당원 환영회에도 가고, 2014년 청년정치학교에도 참석했습니다. 아 참, 중앙당 당직자 면접도 보았습니다. 당직선거 기간에는 김상철 서울시당 위원장의 선거운동 을 도왔습니다. 그때의 당직선거로 강서에서도 두 명의 대의원을 배출했습니다. 80
2015년 3월 13일, 강서당협 준비위원회 결성 모임 (사진 : 박예준)
당협을 다시 세우자 선거가 끝나고 당원들이 모였습니다. 이제 대의원도 뽑았으니, 하루 빨리 당원들을 모아 당협을 정상 화해보자는 데 뜻을 모았습니다. 대의원을 포함한 몇몇 당원들이 모여‘강서당협 준비위원회’ 를 결성했습 니다. 그렇게 준비위위원회를 만들고, 시당의 인준을 요청하는 공문(?)까지 만들어 찾아갔지만 인준을 받울 수 없었습니다. 준비위원회는 미 창당 지역에서만 구성할 수 있는데, 강서당협은 사고당협으로 지정되었 을 뿐 당원협의회가 구성되어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준비위원회를 만들었으니, 당원들에게 연락도 하고 모임도 가졌습니다. 지금 강서당협 부위원 장이신 박효정 동지의 제안으로 모든 당원에게 우편으로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준비위원회의 목적인 당협 정상화를 위해서는 선거를 치러야 했습니다. 강서당협 준 비위원회는 2차 회의에서 서울시당에 당직선거 진행을 요청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준비위원장이 위원장 후보로, 사고당협이 된 직후부터 당원들을 조직해온 정세원 동지와 여성명부 대의원이신 박효정 동지가 부위원장 후보로 나섰고, 이에 따라 선본(?)도 꾸려졌습니다. 선거가 시작되기까지 많은 분들께서 우려 섞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무 급하게 진행하는 것 아니냐, 당협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협 위원장은 무거운 자리다 등등 많은 분들께서 진심어린 걱정 지역에서 현장에서 81
2015년 6월 28일, 당연직 대의원으로서 정기당대회에 참석했다. (사진 : 박예준)
을 하셨습니다. 뒤에 따를 어려움을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당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역조직부터 튼튼 하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 결국 선거를 치르기로 결정했습니다. 각오한 일이지만, 투표율 과반을 넘기는 일은 역시나 쉽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과반을 조금 넘겨 투표가 성사되었고, 6월 26일자로 세 명 의 강서당협 임원이 당선되었습니다. 이제야 고백하자면, 당선자 공고가 난 이후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긴장이 풀려서 아무것도 못 하고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내내 거의 누워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인 일요일은 2015년 정기당대회가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숨은 강서당원을 찾습니다 당연직 대의원으로 정기당대회에 참석하는 일이 당협위원장으로서의 첫 당무였습니다. 만나는 분마다 축하의 말씀을 해주시고, 당 대표께서는 단상에서 직접 강서당협의 재건을 축하해 주셨습니다. 저는 당협 임원 후보자 토론회를 겸한 당 대회 사전토론회에서 당원들의 의견을 묻고, 당 대의원으로서 표결에 참여 했습니다. 정기당대회가 끝나고, 당협 위원장으로서의 일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인트라넷 접속 권한도 받았고, 서 울시당 운영위원으로 인준도 받았습니다. 지난 7월 8일에는 강서당협 제4기 1차 운영위원회도 치렀습니 82
다. 운영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강서당협 카 페1)와 강서당협 페이스북 페이지2)도 만들고, 한 가지 사업도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름하여‘숨은 강서당원 찾기 프로젝 트’ .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저도 잘 모르겠 습니다. 점심 한 끼, 커피 한 잔, 저녁에 반주 한 잔 하면서 강서의 당원들을 만나려고 합 니다. 위원장과 대화를 하고 싶으시거나, 당 원 모임에 참여하고 싶으시거나, 당협에 궁 금한 점이나 바라는 바가 있으면 언제든 연 락을 주시면 달려가겠습니다. 강서당원, 또 는 강서당원을 알고 계신 분들의 연락을 기 다립니다. “선거가 끝나면 꼭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 겠습니다.”위원장 선거운동을 하면서 당원 동지들께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시당 칼 럼을 통한 당선인사에서“그 약속을 반드시
“숨은 강서당원을 찾습니다”숨은 강서당원 찾기 프로젝트의 홍보 웹자보 (노동당 강서당협 제공)
지키겠다” 고 말했습니다. 이제 약속을 지킬 차례입니다. 지역에서 노동당을 대표하는 당협으로서, 할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구정을 감시하고, 의제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정치활동을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제 사무실이기도 한‘강서양천 민중의집 사람과 공간’ 을 중심으로 지역의 노조와 단체들과의 연대관계도 확보해나갈 계획입니다. 하고 싶은 사업도, 해야 하는 활동도 많지만 아직은 초보 위원장입니다. 솔직히 아직 지역활동을 어떻 게 해나가야 할지 감도 잘 안 잡히고,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도 많이 됩니다. 그렇지만 저와 함께하는 강 서당협의 당원들께서, 그리고 지켜보시는 많은 당원 동지들께서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동안 받은 응 원과 걱정, 모두 가슴에 새기며 강서당협 정상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1) 강서당협 카페 cafe.daum.net/laborparty.gangseo 2) 강서당협 페이스북 페이지 facebook.com/laborparty.gangseo
지역에서 현장에서 83
먼 좌파 이웃 좌파 ⑰
미국 대선‘사회주의자’ 후보 버니 샌더스의 정책 장석준 기관지위원
지금 미국에서는 2016년 대통령 선거의 예비경선이 한창 진행 중이다. 공화당은 후보가 10명 안팎으로 북적대지만, 민주당은 시작 전부터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독주 양상 이었다. 그런데 싱겁게 끝날 것만 같던 민주당 경선에 난데없는 바람이 일었다. 버니 샌더 스 상원의원이 민주당 경선에 뛰어들어 클린턴 후보를 맹추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샌더스 의원은 본래 민주당원이 아니라 무소속이다. 1941년생인 그는 동년배의 다른 많 은 미국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베트남 반전운동으로 정치에 처음 뛰어들었다. 1981년에 그 는 버몬트 주 벌링턴 시에서 무소속으로 시장에 당선됐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때도 그는 자 칭‘민주적 사회주의자’ 였다. 이런 사람이 다른 시절도 아니고 한창 레이건 보수혁명이 시 작되던 미국에서 자치단체장에 당선됐으니 화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그는 택지 개발 사업을 서민을 위해 공공적 방 식으로 추진하는 등 많은 인상적인 개혁 행정을 펼쳤고, 그래서 보수 언론은‘벌링턴 인민 공화국’ 이라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버몬트 주에 서는 이 성과를 바탕으로 버몬트 진 보당이라는 진보정당이 등장했다. 그리고 샌더스는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돼 중앙정치에 진출했다. 이후 하원의원을 거쳐 상원의원 에까지 이르렀지만, 샌더스의 행보 1981년 벌링턴 시장에 당선된 뒤 환호하는 샌더스와 지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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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한결 같았다. 미국의 이라크 침
민주당 대선 예비경 선에 뛰어든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략을 반대했고, 금융 위기 때는 긴축 정책을 성토했다. 특히 오바마 식 반쪽짜리 의료보험이 아니라 제대 로 된 전 국민 의료보험 제도 도입을 위해 앞장서고 있다. 그런 그가 이번 민주당 대선 예비경선에 뛰어든 것이다. 무소속 진보파가 민주당 경선에 참여한 데 대해서는 물론 말들이 많다. 실망하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 다. 하지만 양당 체제가 너무나 강력한 미국에서 진보정치가 좀 더 많은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샌더스 자신은 이번 경선을 오바마 정부에 대한 실망으로 의기소 침해 있는 사회운동 진영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는 기회로 삼겠다고 밝혔다. 지금까지의 성과를 보면 이런 샌더스의 포부가 일정하게 실현되는 모양새다. 6월의 위스콘신 주 비공식 투표에서는 샌더스 후보가 클 린턴 후보를 겨우 8% 차이로 바짝 추격하기까지 했다(41% 획득). 그럼 샌더스 후보는 어떠한 비전과 정책을 제시하고 있는가? 여기에 그의 기본 정책을 소개한다. 웬만 한 요즘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가령 영국 노동당)보다 훨씬 더 좌파적이고 공세적인 내용이다. 우리가 ‘샌더스 바람’ 에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이유다.
미국을 위한 의제1) 1. 우리의 무너지는 인프라스트럭처를 재건하자 우리의 중요한 투자 대상은 우리의 무너지는 인프라스트럭처, 즉 도로, 교량, 수도 시스템, 하수 처리
1)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정책을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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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공항, 철도 그리고 학교를 재건하는 일이다. 우리가 결코 저지르지 말았어야 할 부시와 체니의 이라크 전쟁에 든 비용은 참전 용사들이 죽을 때까지 받을 복지 비용까지 다 합쳐서 총 3조 달러에 달한다. 반면 인프라스트럭처에 1조 달러만 투자해도 1300만 개의 괜찮은 임금 수준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으며 이 나라를 보다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전쟁이 아니라 인프라스트럭처에 투자해야 한 다.
2. 기후 변화를 역전시키자 미국은 기후 변화 역전의 선도국이 되어야 하며, 이 행성이 우리의 자녀와 손자가 살만한 곳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에너지 시스템을 화석 연료에서 에너지 효율성과 지속 가능 에너지 중심으 로 전환해야 한다. 수백만 가옥과 건물이 내후성(耐候性)을 갖추어야 하며, 우리의 교통 시스템은 에너지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또한 우리는 풍력, 태양, 지열, 바이오매스 등등의 지속 가능 에너지에서 이미 확 인하고 있는 진보를 한층 가속화해야 한다. 에너지 체제 전환은 단지 환경 보호만이 아니라 좋은 임금 수 준의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것이다.
3. 노동자 협동조합을 만들자 우리는 일자리 창출과 생산성 향상을 위해 새로운 경제 모델을 발전시켜야 한다. 일자리를 중국과 여 타 저임금 국가로 옮겨버리는 기업들에 대규모 법인세 감면을 베풀 게 아니라 노동자 소유 협동조합을 설 립해 스스로 사업을 꾸려나가길 원하는 노동자들에게 재정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 노동자들이 자신이 일 하는 기업의 소유에 참여할 경우에 생산성이 상승하고 결근이 줄어들며 직무 만족도도 높아진다는 것은
◀버니 샌더스를 영화 백 투 더 퓨처 등장인물로 묘사 한 선거운동용 티셔츠 도안 ▼샌더스 후보의 선거운동용 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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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더스의 상원의원 선거운동
수많은 연구 결과들이 입증하는 바이다.
4. 노동조합운동을 성장시키자 단체교섭을 통해 임금 및 수당을 올릴 수 있는 조직 노동자들은 미조직 노동자들에 비해 소득 수준이 상당히 높다. 오늘날 노동조합 조직화에 저항하는 기업 때문에 노동자가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게 무척 어 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노동자들이 쉽게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도록 노동법을 바꿔야 한다.
5. 최저임금을 올리자 현재 시간당 7.25 달러인 연방 최저 임금은 기아 임금이다. 우리는 생활 수준에 맞춰 최저 임금을 인상 해야 한다. 이 나라에서 일주일에 40시간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빈곤에 내몰리지 않아야 한다.
6. 여성 노동자에게 동일 임금을 오늘날 여성 노동자의 평균 소득은 남성 노동자의 78% 수준이다. 우리는 이 나라에 임금 평등을 실현 해야 한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원칙을 관철하자.
7. 미국 노동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무역 정책 2001년 이후 이 나라에서는 6만 개가 넘는 공장이 사라졌고, 490만 개가 넘는 괜찮은 제조업 일자리가 먼 좌파 이웃 좌파 87
사라졌다. 우리는 미국 기업들이 국내 공장을 폐쇄하고 중국 및 여타 저임금 국가들로 떠날 수 있게 해주 는 파괴적인 무역 정책들(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중미자유무역협정CAFTA, 중국에 대한 항구적 정상무역관계 PNTR 협정[무역 상의 최혜국 지위 부여] 등)을 중단시켜야 한다. 우리는 바닥을 향한 경쟁을 중단시켜야 하
며, 미국 기업들이 해외가 아니라 국내에 일자리를 창출하도록 요구하는 무역 정책들을 발전시켜야 한다.
8. 누구나 돈 걱정 없이 교육 받을 수 있는 대학을 만들자 오늘날의 고도 경쟁 지구 경제에서 수백만 미국인들은 좋은 임금 수준의 일자리를 얻기 위해 필요한 고등 교육을 받을 여유가 없다. 또한 노동계급 가정의 대다수가 맞벌이 부부인 상황에서 돈 걱정 없이 자 녀를 맡길 질 좋은 보육 시설을 찾기 힘들다. 미국에는 보육에서 고등 교육까지 누구나 돈 걱정 없이 받을 수 있는 질 좋은 교육이 필요하다. 이런 질 좋고 돈 걱정 없는 교육 시스템이 없다면, 우리는 지구 경제에 서 버텨나갈 수 없고 우리의 생활수준은 계속 추락하기만 할 것이다.
9. 월스트리트를 손보자 은행의 역할은 자본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생산적 활동으로 흘러들어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금융 기 관들은 고립된 섬처럼 실물 경제로부터 동떨어져 높은 이윤을 좇아선 안 된다. 오늘날 월스트리트의 6대 금융 기관들이 국내총생산의 61%에 해당하는(9조 8천억 달러가 넘는)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기관은 이 나라의 대출 담보 중 절반 이상 그리고 신용카드의 3분의 2 이상을 떠안고 있다. 이러한 월스트리트 주
의사당 앞 집회에서 연설하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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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기업들의 탐욕과 몰염치 그리고 불법 행동이 이 나라를 1930년대 이후 최악의 금융 위기에 몰아넣었 다. 이들은 개혁되기에는 너무도 막강하다. 해체해야만 한다.
10. 보건은 만인의 권리 미국은 보건이 만인의 권리이지 특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며, [전 국민 의료보험 제도를 지닌-역 자] 다른 산업국들의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 4천만이 넘는 미국인들이 의료보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 리의 1인당 의료 비용 지출은 다른 나라에 비해 거의 두 배에 달한다. 우리는 전 국민 의료보험 제도를 확 립해야 한다.
11. 가장 취약한 계층을 보호하자 수백만 노령층이 빈곤 상태에 있고, 아동 빈곤율은 주요 국가 중 가장 높다. 우리는 사회안전망을 약화 시킬 게 아니라 더욱 보강해야 한다. 사회 보장, 노령층 의료보장(Medicare), 빈곤층 의료보호(Medicaid), 급식 프로그램의 예산을 깎을 게 아니라 오히려 더욱 확대해야 한다.
12. 조세 제도를 제대로 개혁하자 부와 소득이 극도로 불평등한 이런 상황에서는 소득별 누진 조세 시스템을 도입해야만 한다. 높은 수 익을 거두는 기업들이 연방 소득세를 전혀 내지 않으며 이 나라의 기업 CEO들이 자기 비서보다 더 적은 세금을 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용납될 수 없다. 기업과 부유층이 전 세계의 조세 도피처에 현금을 은 닉하는 바람에 매년 1천억 달러 이상의 세수가 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제대로 된 조세 개혁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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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메르스를 타고 토건이 왔다 2015년 정부 추경사업 분석 김상철 서울시당 위원장
메르스라는 국가적 재난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전염병 대응에는 그토록 무능했던 정부가 이를 핑계 삼아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얻어가는 데에는 발 빠르게 대응 중이다. 이번 에 정부가 편성한 11.8조 원 규
국가적 재난이었던 메르스 대응에는 무능
모의 추가경정예산안이 그렇다.
했던 정부가 이를 핑계 삼아 자신들이 바
과거 이명박 정부에서부터 박근
라는 것을 얻어가는 데에는 발 빠르게 대 응 중이다. 이번에 편성한 11.8조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이 그렇다.
혜 정부까지 공통된 재정운용 원칙은 긴축에 가까웠다. 통상 적으로 긴축이라고 이야기하면 무조건 돈을 줄이는 것으로 생 각하지만, 현실적인 긴축은 기
존에 있던 대중적인 재정정책을 줄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올 상반기 뜨겁게 논란이 되었던 공무원연금 구조조정 문제는 본질적으로 이런 긴축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반면 부 자감세와 재벌 등 대기업에 대한 세제혜택을 늘림으로써‘재정을 통한 특권’ 을 강화한다. 이번 박근혜 정부의 추경에서 특히 눈길이 가는 부분은 각종 토건사업에 대한 것이다. 특히 도로건설과 철도건설 사업이 대거 반영되었다. 이번 추경을 통해서 시행되는 재정정책은 전체 22조 원 규모다. 당초 계획이 없던 재정 지출을 위해 실시하는 추경 외에, 기존 기금의 세출을 변경하는 부분, 공기업을 통한 투자 분, 그리고 신용보증기금, 기술신용보증기금, 무역보험기금 등을 통해 시행되는 금융성 지 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부는 이 추경에 소요되는 돈의 절대액인 9.6조 원을 국채로 채운다고 밝혔다. 즉 빚을 90
정부는 총 22조 원의 재정대책을 내놓으면서, 이 중 11.8조 원을 추경으로 편성했다. 이 재원은 대부분이 국 채발행을 통해서 마련되는 것으로서, 결과적으로 국민 부담이 된다.
내서 사업을 하겠다는 말인데, 국채는 장기적으로 국가재정에 부담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에 따른 이자 에 대한 부담이 추가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에서 매우 신중해야 한다. 이를테면 당장 생계를 잃게 되는 서 민가계에 대한 긴급지원은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고려했을 때 당연히 필요한 조치라 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장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무리해서 하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추경이라는 긴급성을 이유로 특수한 목적사업을 포함시키고, 그 부담은 전체 국민에게 전가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약품 구매로 눈가림한 토건사업들 이번 추경은 특히 메르스 사태 과정에서 벌어진 문제점을 고치자는 목적이 크다. 그래서 메르스 대응 예산이 가장 높은 비중을 보인다. 사업의 골자는 메르스 등 신종감염병의 국내 유입·확산에 대비하기 위 해 항바이러스제 등 국가 비축물자를 확보하고, 메르스 의심·확진환자의 진료비용을 지원하는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원래 약품 구입 사업에는 52억 원만 편성했었는데 여기에 685억 원을 증액했다. 이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항목은 항바이러스제(리렌자) 300만명분의 구입비로, 555억 원을 편성했 다.‘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제40조에 따라, 정부가 우선 항바이러스제인 타미플루와 리렌 자를 비축하는 것인데, 문제는 현재 비축해둔 약품이 이미 319만명분이고, 이것의 유효기간이 2016년 11 월이라는 사실이다. 정부는 해당 약품의 유효기간이 도래해 어쩔 수 없다고 했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내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91
년도 일반예산에 반영해도 크게 무리가 없다. 통상 이 약품의 제조에는 3개월 정도가 걸리기 때문에 유효 기간 내에 충분히 발주가 가능한 상태다. 그런데도 보건복지부는 2016년 7~8월에 생산품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2015년에 납품계약을 체결한다 고 한다. 보통 계약은 선금을 지급한 후 물건을 받고, 이후에 나머지 금액을 지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런데도 이번 추경을 메르스 대책으로 포장하기 위해 무리하게 전체 대금을 1년 전에 지급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듯 누가 봐도 허술하기 짝이 없
누가 봐도 허술하기 짝이 없는 이 예산편성
는 예산편성을 하는 이유는 사실 메르스 사
의 이유는 사실 메르스 때문이 아니다. 메르
태의 해결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를 기회로
스를 명분 삼아, 지난 해 예산에 반영하지 못 한 토건사업들을 추진하려는 것이다.
다른 사업들을 추진하려는, 특히 건설경기 를 통해 경기부양을 하려는 전통적인 토건 적 성장방식 때문이다. 즉, 메르스를 명분 삼아서 지난 해 예산에 반영하지 못했던 토
건사업들을 추진하려는 것이다. 만약 그냥 도로를 짓거나 철도를 늘리기 위해 국채를 발행해야 한다고 했 다면 어떤 국민이 동의를 하겠는가. 메르스 탓에 빚을 내서라도 전염병에 따른 후속대처를 해야 한다는 말로 국민들의 비판을 피해가는 얄팍한 꼼수를 부린 것이다. 일단 수많은 고속도로 사업들이 대거 들어갔다. 세금으로 짓는 재정고속도로의 경우는 기존 본예산이 었던 8천602억 원보다 2천억 원 이상이 추가되어 1조를 넘어섰다. 고속도로 사업의 추경편성이 가진 첫 번째 문제점은 시급성에 대한 부분이다. 과연 2천496억 원을 추경으로 편성할 만큼 고속도로건설사업이 긴급성을 띠고 있는 것일까. 무리하게 예산을 편성해서 올해 안에 준공을 한다는 성산-담양 고속도로, 양 재-기흥 고속도로, 충주-제천 고속도로 등 5개 도로가 메르스 사태로 촉발된 긴급추경의 사업이 될 수 있 는지 의문이다. 두 번째 문제점은 부담이 외부화되는 구조에 대한 것이다. 재정고속도로 사업은 국토교통 부가 토지보상비 전액과 공사비의 40%를 부담하고, 한국도로공사가 공사비의 60%를 부담한다. 그러므 로 국토교통부가 추경을 편성하면 그만 큼 한국도로공사의 부담이 늘어날 수밖 에 없다. 따라서 이번 추경 때문에 공사 가 추가로 편성해야 하는 비용이 2천 920억 원에 달한다고 나타났다. 문제는 한국도로공사가 이미 작년 기준으로 부
이번 추경 때문에 한국도로공사가 추가로 편성 해야 하는 비용은 2천920억에 달한다. 이미 부 채 26.5조의 부실 공사인 도로공사가 막대한 공사채를 발행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채가 26.5조 원에 달하는 부실 공사라는 점인데, 결국 이번 추경의 결과로 한국도로공사는 막대한 공사채를 발행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뿐만 아니라 민자사업자와 계약을 통해서 공기가 관리되는 민자고속도로에 대해서도 1천500억 원이 편성되었다. 국토교통부는 당초 2015년 6월 서울-문산 민자고속도로사업 실시계획을 승인하고 공사에 92
이번 추경에 반영된 도로사업(위)과 철도사업(아래)의 현황이다. 대부분이 원래 편성했던 예산에 비해 30% 수준으로 증액되었다. 이는 토건사업의 특징상 예산이 과다하게 배정되면 예산낭비 역시 지속적으 로 커진다는 점 때문에 문제가 된다. (단위는 억 원, %)
착공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고양시 국사봉 구간 지하화와 관련해 지자체와 협의가 지연되면서, 2015년 8 월 중 착공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한 상태다. 이에 따라 올해 토지보상비로 예산에 편성된 1천억 원이 2015년 7월까지 전액 미집행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토교통부는 추경예산으로 동 사업 토지보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93
상비를 1천300억 원 증액한 2천300억 원으로 편성했다. 국토교통부가 제출한 사업별 설명서를 보면, 논 란이 있는 구간을 제외한 다른 구간 지자체와 지역주민들이 조기 사업착수 및 보상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 이며, 총보상비 규모가 1조 1천억 원에 달하므로 공사가 착공되면 20.9% 수준인 2천300억 원은 토지보상 비로 연내집행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여전히 해당 지자체와는 협의가 진행 중이어서 착공시점 을 특정하기 어렵고, 토지보상 협의 및 매수절차를 진행하고 수용재결까지 거치는 데 일반적으로 수개월 이 소요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과연 제대로 집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결국 앞으로 쓸 돈을 빚내서 미리 챙겨놓는 꼴 밖에는 되지 않는다.
현재 추경에 반영된 철도건설사업 역시 비슷한 문제를 보인다. 일단 열한 개의 일반철도는 현재 집행 과정에서 별다르게 추가재원 수요가 발생하지 않는데도 이를 편성했다. 실제 어떤 사업의 경우에는 터널 굴착 방법의 변경으로 주요 터널 완공시기가 상당 시일 미뤄졌다. 또 다른 구간은 사업실시계획 자체가 늦게 승인이 된 탓에 올해 편성한 사업계획조차도 완수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또 세 개의 광역철도 사업 은 기본적으로 지방자치단체를 통해서 집행하는데, 이 부분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상반기에 270억 원을 교부했던 별내선 복선전철은 같은 기간 12억 남짓을 집행했다고 나타났다. 이처럼 철도에서도 추경편성의 주요한 요건인 긴급성에 부합하는 사업을 찾아보기 힘들다. 더 큰 문제는 아예 국
대구도시철도 1호선 화원연장 사업의 평면 및 종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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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보조사업으로 진행되는 사업의 추경사업들이다.‘대구도시철도 1호선 화원연장’ 사업과‘도시철도 스 크린도어 설치지원’ 사업이 그런데, 현행 도시철도법에 따르면 총사업비의 60%를 국가에서 보조하고 지 방자치단체가 나머지 40%를 부담하는 구조다. 따라서 앞서 고속도로의 도로공사와 마찬가지로 지방자치 단체 역시 늘어나는 국비에 상응하는 추경예산을 만들어야 한다. 편성규모만으로 본다면, 대구도시철도 1 호선 화원연장사업 역시 120억 원을 대구시가 편성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지방자치단체의 매칭비용이 없으면 해당 사업은 집행하기 어렵다. 이런 구조는 도시철도 스크린도어 설치지원사업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과연 해당 광역지방자치단체들이 이에 맞게 추경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여전히 먼 탈토건 사회 이번 추경은 여러 가지 점에서 한계가 많은 내용이지만, 무엇보다 고속도로·철도건설과 같은 전통적 인 토건사업의 비중이 상당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본다. 적절한 수요예측과 합리적인 재정투자 계 획을 바탕으로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 의 끼워넣기와 같이 추경을 통해서 예산을 반영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예산낭비를 수 반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해당 사업이 메
이번 추경은 오로지 이참에 돈을 끼워넣자 는 의도 외에는 어떤 합리성도 찾기 힘들다.
르스 사태 이후의 국민안전과 어떤 직접적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내는 것은 기업뿐만
인 연관성이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오로지
아니라 기업화된 정부의 능력이기도 하다.
이참에 돈을 끼어넣자는 의도 외에는 어떤 합리성도 찾기 힘들다. 이처럼 하나의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만들어내는 것은 기업뿐만 아니라 기업화된 정부의 능력이기도 하다.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95
연속기획
한국 대학 체제의 형성⑧
대학도 산업이다 노무현의 실패와‘진격의 대학’ 김예찬 서울 강남서초 당원
무능과 혼란이 낳은 노무현의 U턴 노무현 정권은 출범 초기,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교육문화 TF팀의 평가를 통해 5.31 교육 개혁조치가“세계화와 국가경쟁력 이데올로기, 신자유주의, 수요자 중심 논리가 더욱 강 화” 했다고 비판했다. 5.31 교육개혁안의 노선을 수용한 김대중 정권의 교육정책에 대해서 도“자신들의 국정철학에 걸맞는 교육정책을 개발하고 정책수행 환경을 조성하는 데 무능 력” 했다고 반성했다.1) 하지만 노무현 정권 역시 종국에는 5.31 교육개혁의 노선에 따른 고 등교육정책을 펼쳐나갔고, 그 결과는 사학개혁의 실패, 사상 최대의 고액등록금 시대와 기 업이 지배하는 대학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러한 실패의 이유를 따져보기 위해 먼저 노무현 정권의 교육정책 주체들을 둘러싼 혼란들에 대해 살펴 보자.
넘을 수 없는 관료의 벽 김영삼 정권의 교육개혁위원회 이후 대통령직속 교육 자문기구는 김대중 정권의 새교육 공동체위원회, 인적자원정책위원회 등으로 변화해왔다. 2003년, 노무현 정권의 시작과 더 불어 대통령직속 교육 자문기구 역시 새롭게 변화를 맞이해야 하는 시점이 왔다. 그러나 노 무현 정권의 교육 자문기구였던 교육혁신위원회의 출범은 난항을 거듭했다. 위원장과 위원 임명 등 인사문제를 두고 지체를 거듭한 끝에, 정부 출범이 반년이나 지난 2003년 7월 31일
1)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교육개혁과 지식문화강국실현 TF팀 2003년 2월 보고서
96
에야 교육혁신위원회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통령이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정책 드라이브를 펼칠 수 있을 집권 초기에 이미 6개월이라는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그나마도‘코드인사’ 라는 비판에 부딪혀야 했으며, 이라크 파병, 대북송금 특검,“대통령 못해 먹겠다”발언, 행정수도 이전 등등 대통령 이 집권 1년차부터 강력한 논란과 비판에 직면하면서, 교육혁신위원회 역시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대통 령 자문기구가 힘을 얻지 못하고 표류하는
대통령직속 자문기구가 표류하면서 자연스 럽게 교육관료 중심의 정책결정구조가 성립 되었다. 결국 노무현 정권의 고등교육 정책 역시 5.31교육개혁안의 기조 아래 놓였다.
상황에서, 교육관료 중심의 정책결정구조 가 성립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노무현 정권의 고등교육정책 역시 5.31 교육개혁안의 기조 아래 놓였다. 교육정책에 있어서 교육혁신위원회가 힘을 갖지 못하고 교육부의 통제 아래 놓였던 상황을 대표적으 로 보여주는 사례가 대입개혁문제다. 교육혁신위원회 산하 대학입학제도개혁특별위원회의 개혁안에도 불구하고, 교육인적자원부는 따로 TF팀을 구성하여 독자적인 대입개혁안을 발표했다. 1기 교육혁신위원 장을 맡았던 전성은의 회고에 따르면, 수능등급제를 완화하고 직능교육을 강화하자는 교육혁신위원회의 개혁안은 노무현 대통령, 문재인 비서실장, 이정우 정책실장의 찬성에도 불구하고 교육부 관료들의 반대 를 넘지 못했다.2) 이러한 현상에는 진보적인 교육주체들의 무능과 기회주의도 한몫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일로 세칭‘개혁·진보적 지식인’ 들이 관 직을 사냥하는 모습은 수구·보수적 지식인들의 그것과 너무 닮아가고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정책 내용 의 타협 내지 전향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식인들이 능력을 고려치 않고 자리에 연연해하는 3) 틈새를 관료권력이 치고 들어와 메운 것이다.”
“대학도 산업이다” 2005년 1월,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탄핵사태와 총선승리 이후 재임 3년 차를 맞이하여 전면적인 개 각을 단행한다. 서울대 총장 출신의 이기준 교육부총리를 임용하여, 사학법 개정 등 대학개혁을 국정과제 의 중심에 두고 쇄신 드라이브를 걸겠다는 뜻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 과정에서“대학경쟁력 강화를 위한 개혁과 구조조정을 이끌 사람” “대학도 산업이 되어야 한다” 는 말을 통해 대학개혁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이기준 부총리는 임명 3일 만에 각종 비리가 드러나며 자진사퇴했다. 2) <교육부가 일선 학교에 커피 타주는 세상>, 시사인 371호, 2014. 10. 29 3) ‘ < 5.31교육개혁’ 과 단절하고 싶었던 참여정부…초심은 왜 변질됐나> 중 한국해양대 김용일 교수의 발표 발췌, 한겨레신문, 2015.05.29
연속기획 97
“난 CEO 총장 … 기업이 투자하고 싶은 대학 만들겠다”임덕호 당시 한양대 총장의 인터뷰 기사.‘CEO 총장’ 이라는 이름으 로 추진된 대학 기업화의 핵심은‘재원확보’ 와‘순위경쟁’ 이었다. (한국경제 2011년 4월 21일 17면 갈무리)
이후 노무현 대통령은 교육계 경력이 없는 경제각료 출신인 김진표 교육부총리를 새로 임용하고, 다시 ‘대학은 산업’ 이라는 논리를 펼쳐 갈등을 빚었다.“경제계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배출할 수 있도록 대학을 개혁해야 한다” 는 것이 노무현 정권의 의지였다. 이는 5.31 교육개혁이 내세웠던 경쟁력 이데올로기의 답 습인 동시에, 김대중 정권의‘교육인적자원론’ 의 반복이었다. 2003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부터 2005년 김진표 교육부총리 임용까지, 2년 사이에 노무현 정권의 고등교육정책의 방향이 완전히 돌아선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대학개혁 담론에 대한 비판은 존재했으나, 비판을 넘어서는 대안을 만들어내 고 이를 실천할 인적주체가 부재했던 노무현 정권의 한계였다.
진격의 대학 노무현 정권이‘대학의 산업화’ 를 표방하던 때, 이미 대학 현장에서는‘대학의 기업화’추세가 더욱 급 속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1992년부터 연세대 송자 총장은‘CEO 총장’ 을 자임하며 대학운영에 경영 마인드와 시장원리의 도입을 주장해왔다. 1996년에 성균관대를 인수한 삼성그룹은 대학의 목표를‘교육 서비스 제공’ 에 두고 대학컨설팅과 교수성과제, 졸업인증제 등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2003년 취임한 고 려대 어윤대 총장은‘글로벌 고대’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고 영어강의 확대, 해외거점대학 구축, 캠 퍼스 리모델링에 나섰다. 이처럼 2000년대 초중반‘대학경영’ ,‘CEO 총장’ 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된 대학 기업화의 핵심은‘재 원확보’ 와‘순위경쟁’ 이었다. 대학이 경영컨설팅 회사와 연계하여 기금확보 방안으로 기업의 연구 공간 사용을 보장하거나, 기업의 이름을 딴 건물을 만들거나, 수강학점별 차등 등록금제도를 시행한다거나, 수 98
익사업들을 시도하는 등 과거의‘땅 투기’ 에서 벗어난 미국적인 경영기법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서강대 손병두 총장은 캠퍼스 내에 홈플러스를 유치하겠다는 과감한 시도를 하기도 했으며, 대학 병원들은 흑자경영을 모토로 병원 영리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노무현 정권은 이러한 대학 현장의 변화가 기업수요에 맞는 대학개혁을 이끌어 낼 거라 판단하고 정책 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003년에는 국립대 등록금 자율화 조치가 시행되었다. 교육부가 2005년 발표 한 <제2차 국가인적자원개발기본계획안>은 대학 구조조정을 통해“시장수요가 적은 학과(전공)를 중심으 로 학생 정원을 축소하고, 비교우위 분야로 특성화” 하여“대학의 인력양성 방식을‘시장반응형’ 으로 전 환”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2007년에는 <대학 교육력 향상 지원방안>을 통해 대학캠퍼스 내 민간 상업시설 유치를 개방하고, 사학기관의 재무·회계에 관한 규칙을 개정해 교비회계 적립금 이내에서 금 융상품 투자를 허용하기로 했다. 이러한 노무현 정권의 정책은 고스란히 등록금 폭등, 대학 구조조정과 대학 등록금의 펀드 투자 등 이후 10년간의 대학 현장을 악화시키는 결과들로 이어졌다.
노무현 이후 10년 노무현 정권 이후 10년 동안 대학을 둘러싼 문제들을 보여주는 지표들은 다음과 같다. <표 Ⅰ-1> 연도별 대학등록금과 물가 상승률 비교 (단위 : 천원, %)
구분
국립대학 등록금 총역 금액
인상률(A)
사립대학 등록금 총역 금액
인상률(B)
사립대와 물가상승률 국립대화의 (C) 차이 2,318 -
2000
2,193
-
4,511
-
2001
2,300
4.9
4,779
5.9
2,479
4.1
2002
2,471
7.4
5,109
6.9
2,638
2.7
2003
2,645
7.4
5,452
6.7
2,798
3.6
2004
2,903
9.4
5,776
5.9
2,873
3.6
2005
3,115
7.3
6,068
5.1
2,953
3.1
2006
3,426
10.0
6,472
6.6
3,046
2.8
2007
3,836
9.7
6,917
6.9
3,081
2.2
2008
4,167
8.6
7,383
6.7
3,216
4.7
2009
4,190
0.6
7,420
0.5
3,230
2.8
2010
4,384
4.6
7,587
2.3
3,203
2.9
2011
4,402
0.4
7,761
2.3
3,359
4.7
-
70.3
-
55.8
-
37.2
누적인상률
주 : 1) 4년제 대학 기준임 2) 국립대는 수업료와 기성회비를 합산한 금액임 3) 물가상승률은 소비자물가 상승률이고, 2011년도는 1-4개월 평균 수치임 출처 : 반상진(2008), 고등교육경제학, p.213: 국회입법조사처(2008).『국공립대학의 등록금 현황과 인상률 관련 정책방향 조사』: 대학알리미
연속기획 99
먼저 등록금을 보자면, 2000년 이후 대학 등록금은 물가상승률을 넘어서 지속적으로 폭등해왔다. 특 히 2003년 국립대 등록금 자율화 조치 이후 상당 기간 동안, 국립대 등록금의 상승률은 사립대의 등록금 인상을 이끌며 고액등록금 문제를 사회적 문제로 인식시켰고, 결국‘반값등록금’ 이 화두가 된 이명박 정 권에 들어서야 인상률이 저하되는 추세를 보였다. 2003년 대비 2013년 학과 수 및 입학정원 모두 감소한 학과 - 입학정원 감소 기준 (단위 : 명, %)
대계열
소계열
자연
학
과
2003년
2013년
교양자연과학
107
44
인문
교양인문학
123
사회
교양사회과학
118
인문
교양어ㆍ문학
85
인문
기타유럽어ㆍ문학
49
수 감소
입 학 정 원 감소율
2003년
2013년
-63
-58.9
10,174
1,766
86
-37
-30.1
12,110
40
-78
-66.1
9,958
37
-48
-56.5
6,788
27
-22
-44.9
2,514
감소
감소율
-8,408
-82.6
4,811
-7,299
-60.3
3,282
-6,676
-67.0
1,679
-5,109
-75.3
640
-1,874
-74.5
인문
기타아시아어ㆍ문학
46
29
-17
-37.0
2,219
826
-1,393
-62.8
예체능
순수미술
122
112
-10
-8.2
3,637
2,751
-886
-24.4
인문
종교학
124
115
-9
-7.3
4,474
3,659
-815
-18.2
자연
물리ㆍ과학
107
104
-3
-2.8
3,030
2,518
-512
-16.9
예체능
조형
44
36
-8
-18.2
1,362
936
-426
-31.3
교육
인문교육
32
28
-4
-12.5
931
560
-371
-39.8
예체능
음악학
68
62 `
-6
-8.8
3,030
2,667
-363
-12.0
자연
농업학
47
18
-29
-61.7
629
297
-32
-52.8
예체능
공예
36
35
-1
-2.8
856
703
-153
-17.9
자연
수산학
10
3
-7
-70.0
180
30
-150
-83.3
교육
예체능교육
54
43
-11
-20.4
1,488
1,362
-126
-8.5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10년 동안 교양인문/자연계열 학과와 예체능 학과에 대한 구조조정이 거세게 일 어났다.‘학문’ 이 아니라‘교육서비 스’ 를 제공하는 대학에서, 취업률을 지표로 한 학과통폐합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순수학문의 자리가 사라진 대학에서, 학생들은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이 되기 위해 고군분 투했다. 100
'학문'이 아니라 '교육서비스'를 제공하는 대학은 취업률을 지표로 학과통폐합을 진행했다. (사진 : KBS '뉴스7' 보도화면 갈무리)
2013년 회계연도 사립대학 적립금 금융투자 현황 (단위 : 억원)
구분
채무증권 지분증권 수익증권 투자계약증권 파생결합증권 증권예탁증건
투자원금(A)
2744.2
198.8
4306.9
1.3
257.3
0.1
투자비중
36.3%
2.6%
56.9%
0.0%
3.4%
0.0%
기타
총합계
60.0
7568.6
0.8% 100.0%
평가액(B)
2743.1
235.8
4269.0
1.3
247.6
1.5
60.0
7558.3
평가차액(C)
-1.1
37.0
-37.9
0.0
-9.7
1.4
0.0
-10.3
수익률(C/A)
0.0%
18.6%
-0.9%
0.0%
-3.8%
2586.0%
0.0%
-0.1%
대학 기업화 이후 대학들의 경영능력이 향상되었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 역시 부실하다. 특히 재 단적립금의 금융투자가 허가된 이후 많은 대학이 위험한 투자에 따르는 손실위험을 안게 되었다. 위 표에 서 보듯 대표적인 펀드종목인 수익증권, 파생결합증권 등에서 대학들의 손실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수십 억 이상의 손실을 낸 사립대 재단들이 속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대학이 재정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공개를 꺼리고, 부정과 비리를 통해 대학의 발전보다는 재단의 이익에 치중하는 등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처럼 노무현 정권은 고등교육정책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지 못하고, 오히려 대학의 기 업화를 완성시키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민주개혁정부 10년은 철저하게 대학에서 시장논리가 관철되는 기간으로 전락했다. 2007년 노무현 정권 말기에 자행된 사학법 개악은 한국의 대학체제를 둘러싼 정부와 대학 간의 힘겨루기가 소수의 자본가 집단에 의한 대학 장악으로 귀결될 것을 알리는 팡파르였다.
연속기획 101
성정치 칼럼
2015년, 서울과 대구에서의 자긍심 행진 강현주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팀, 서울 양천 당원
서울과 대구에서의 퀴어문화축제가 막을 내렸다. 서울에서는 시청광장에서, 대구에서 는 대구백화점 앞 광장에서 행사가 열렸다. 대구에서 올라온 지 이틀이 지났고, 아직도 얼 떨떨하다. 서울에서는 약 삼만 명, 대구에서는 약 육백 명이 참가했으며, 두 행사 모두 역대 최대 규모였다.
혐오의 북소리와 찬송가가 울리던 광장 행사 전날, 몇몇 기획단들과 함께 시청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토요일 밤 12시쯤 숙소로 향하는 길에 북을 치는 일부 혐오세력을 보았다. 다음날 쓰일 영상 작업을 마무리하고 누웠 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혐오세력은 전국에서 약 5만여 명이 참가한다는 내용의 집회신고 를 마친 상태였다. 혐오세력의 행진신고는 불허되고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의 행진신고 는 행정심판 승소로 허가가 났으니, 작년과 같은 대치 상황과 경찰의 무력한 대처-그들도 합법적으로 집회신고를 했으니 어쩔 수 없다던-가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하게 빌었다. 행사 당일, 시청광장에 가장 빨리 모이는 팀의 집결 시각은 6시였다. 작년에 서울과 대 구에서 봤던 얼굴들이 보였다. 혐오세력은 일찌감치 광장 한 편에 은색돗자리를 깔아놓고 한쪽에서 북을 쳐대고 있었다. 그중 카메라를 든 누군가는 끊임없이 기획단을 채증했다. 경 찰에게 항의했지만 경찰은“알아서 갈 테니 내버려두라” 는 말만 반복했다.“너네를 다 죽이 겠다” “부모님이 이러고 다니는 걸 아시냐” “동성애는 죄악이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등 의 폭언이 난무했지만 경찰은 제지하지 않았다. 부스를 설치할 때 김조광수 감독의 결혼식 때 오물을 끼얹었던 장로가 부스를 쓰러뜨리고 사람을 칠 때도 경찰은 가만히 있었다. 기획 102
서울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의 퍼레이드 모습 (사진 : 강현주)
단이 다시 강력하게 항의하자 그제야 경찰은 연두색 철 펜스를 설치하고 일부 혐오세력을 만류했지만, 광 장 가운데에서 통성기도를 하는 이들을 제지하진 않았다. 시간이 지나, 광장 안에서 통성기도를 하던 혐오세력을 끌어내고 조직위가 신고한 공간에서 북을 치며 찬송가를 부르는 혐오세력의 자리는 옮겼지만, 대한문 앞과 시청역 5번 출구 앞, 국가인권위원회 앞에 무 대를 세우고 윙카까지 가져온 혐오세력의 찬송가 소리와 북소리가 들려왔다.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경찰 은 분명‘합법적으로 신고를 했으니 어쩔 수 없다’ 고 반복할 터였다. 11시부터 공식적인 부스행사가 시작되었다. 광장 안으로 사람들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잔디밭을 둘러 싸고 열린 행사는 처음이었다. 광장 안에 들어온 참가자들은 생각보다 평온해 보였다. 혐오세력은 한복을 입고 북을 치며“예수!” 라고 연속해서 외쳤다. 동성애자였던 차이코프스키 음악에 맞춰 발레를 추던 5번 출구 쪽을 순찰하는 팀으로부터“펜스 너머로 물통이 날아온다. 경찰 병력 보내 달라” 는 무전이 계속 들려 왔다. 광장 안으로 들어와서 부스 운영팀이 파는 음료를 공짜로 달라다가 쫓겨나는 혐오세력도 보았다.
‘내년이 아니라 당장 다음 주에 보겠지’ 올해 퍼레이드는 역대 행사 중 가장 많은 숫자인 일곱 대의 차량이 2.6킬로미터의 가장 긴 코스를 행진 하도록 준비했다. 사람들이 퍼레이드를 나간 뒤 제발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빌며 광장을 청소했다. 큰 충 돌이 없어 계획대로 축하무대를 진행하고 예상한 시간대로 전체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행사가 끝났지만, 여전히 광장에 남은 사람들이 꽤 되었다. 퍼레이드 때 사용하는 대형 6색 무지개 깃 발을 무대 앞에 깔아놓았는데, 그 위에 앉거나 누워 즐거운 표정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삶과 문화 103
처음으로 잔디밭에 앉아서 시청사를, 하늘을 바라보았다. 작년 12월의 나는 시청사 로비에 앉아 시청 바닥이 따뜻해서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올 3월에는 서울시청 혁신기획관이“인권과장과 싸우지 마시라” 는 말을 들었고, 그날 만난 인권과장은 내게“도대체 왜 동성애자들이 시끄럽게 행사를 하는지 이 해할 수 없었는데, 내 딸의‘그래야 그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 아니냐’ 는 말에 그제야 수긍이 갔다” 고 말했다.“나는 개인적으로 동성애자의 인권을 지지하지만 정치인으로서 이런 이야기를 하기는 어렵다” 던 박원순 시장의 인터뷰도 떠올랐다. 혐오세력이 대놓고 던지는 폭언도 쓰리지만, 너무나도 말끔한 얼굴로 ‘싸우지 말라’ 는 사람을 보면 이게‘희망 서울’ 의 정치인가 싶어 얼떨떨했다. 해가 뜨면 이 광장도 작년의 신촌 거리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금 말끔한 얼굴로 돌아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혐오세력은 밤 10시가 넘도록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고 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심지어는 아들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오는 영상을 틀어 보여주더니, 내년에 다시 보자고 말했다.‘내 년이 아니라 당장 다음 주에 대구에서 보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우리는,“난나나~ 사랑해” 대구에 도착해 부스를 차리러 나가니 경찰이 이미 펜스를 치고 둘러싸고 있었다. 서울광장과 다르게 대구백화점 앞의 거리에 부스를 깐 터라 자꾸 난입하는 혐오세력이 있었다.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나가 라” 고 외치며 내보냈다. 모든 부스의 유인물을 말없이 모두 집어가며 눈을 맞추지 않는 혐오세력도 가끔 보였다. 나는 한국 최초의 성소수자를 위한 재단인‘비온뒤무지개재단’부스에서 자원활동을 했는데, 마 스크로 얼굴을 가린 10대 성소수자들이 우르르 와서 웃고 떠들고 가던 때가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다. 이
대구 퀴어문화축제의 부스를 둘러싸고‘동성애 아웃’ 을 외치는 혐오세력들 (사진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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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퀴어퍼레이드에서 함께 행진하는 사람들의 모습. 이들은 이 행진이‘자긍심 행진’ 임을 잘 안다. (사진 : 김민수)
들이 (학교를 다니고 있다면) 학교에서 어떻게 지낼지, 요새도 신촌공원1) 같은 공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10대이던 시절보단 덜 갑갑하기를 바란다. 행렬의 전체 그림이 좀 더 화려해지도록 서울에서 퍼레이드 할 때 쓰는 6색 무지개 깃발을 챙겨갔다. 차량 바로 뒤에 붙어 있던 무지개 깃발들이 그 깃발들이다. 깃발을 들고 앞에 서 있는데, 서울광장에서 아 침에 호통을 치던 이 모 장로가 인분을 뒤집어쓰고 행렬 선두의 대형 현수막을 찢으러 돌진하다가 잡혀나 가는 사건도 있었다. 이 사람은 2014년에도 인분 테러를 한 전적이 있는데, 현수막에서 끌려 나온 뒤에 사 람들에게 돌진해 행패를 부리다 체포되었다. 행진 하는 내내 쫓아오면서 고성을 지르는 사람, 우는 사람, 호통을 치는 사람, 때리는 사람들이 있었 지만, 참가자들은 고성을 지르는 사람에게“사랑해” 라고 입을 모아 외쳤다. 음향사고로 차량에서 소리가 나지 않으면 함께 목소리 높여 노래를 불렀다.“반대한다” 고 세 박자로 외치는 이들에겐“난난나~” 라고 같은 박자로 외쳐주었다. 행진하는 사람들이 혐오세력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웃으며 대응하는 모습은, 이 행진이‘자긍심 행진’ 임을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나 스스로 되새기게 해서 의미가 깊다. 행 사장 안에 들어온 시간, 행진을 하는 시간만큼은 자신의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모두 상관없이 행복할 수 있기를. 그래서 다음 행사까지의 기간 동안 사람들이 기댈 기억을 만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내 가 당사자로서 그리고 주최자로서 퀴어문화축제를 준비할 이유로 충분하다.
1) 현 창천어린이공원. 2000년대 10대 여성이반들이 모이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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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공업사④
재미는나누고,가치는더하고, 지역은살리고! 글·사진 : 화덕헌 마을기업 에코에코협동조합 아트디렉터
새옹지마 지난 호 지면을 통해 메아리공업사가 마을기업에 선정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 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는 법. 행정자치부 마을기업에 선정되면서 우리의 열정이 서류 작성이나 행사 참석 등과 같은 2차적인 일을 진행하는 데 다 빨려나가는 것 같은 느낌 이 들기도 합니다. 마을기업 신청을 위해 제안서를 쓰는 작업에서부터 시작해 선정 과정, 그리고 선정 이후에도 계속해서 서류와 싸우고, 박람회, 워크숍, 각종 회의 등 공식행사 일 정에 쫓겨 다니는 느낌을 받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문제점은 예상은 했지만 미리 예상했다 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그렇다고 이런 행사에 참석하는 일이 전적으로 무 익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메아리공업사 시절, 배관부품을 찾으러 인근 고물상을 샅샅 이 뒤지고 다니던 재미(?)와 같은 소박한 기쁨을 즐길 여유가 없어졌다는 게 좀 아쉽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공식 일정 중에, 지난 6월 해운대구 주관으로 열린 사회적기업과 마을기 업을 위한 워크숍과 우수기업 견학이 있었습니다. 담당부서로부터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고 의무감에 따라나섰는데 의외의 성과가 있었습니다. 협동조합의 시초인 영국 로치데일 협동 조합에 대한 강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협동조합 운동이 일어난 배경과 과정에 대한 역사 적 사실을 접하면서‘심쿵’ 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일에 쫓겨서 잊고 있던 마을기업·협동 조합의 목적을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값받기, 좋은 뜻보다 좋은 제품이 먼저 마을기업으로서 정부로부터 받은 보조금에 걸맞는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당장 106
사회적기업 워크숍 단체사진. 다들 주먹다짐을 하는데 저만 주먹다짐을 못해 어정쩡하게 웃고 있습니다.
마음이 분주합니다. 사업을 해보신 분들은 공감하실 겁니다. 사업을 위한 기획, 설비 투자, 자재구매, 제품생산, 제품판매 등등 모든 부분이 걸음마를 배울 때처럼 처음 시작하는 거라 하나부터 열까지 시행착오 의 연속입니다. 특히 판매나 영업의 경우 는 물건을 만든다고 바로 판로가 열리는 것은 아니라는 현실의 압박감이 참으로 큽 니다. 함께 일하는 4명 중 1명의 인건비는 보조금으로 충당하고, 또 1명은 수익금과 출자금으로 인건비를 지급하고 있지만, 저
폐파라솔을 재봉질 중인 화덕헌 아트디렉터
와 마을기업 대표 두 사람은 아직 급여를 가져갈 형편이 못됩니다. 수익금 통장의 잔고가 바닥나면 그날 점심 끼니 걱정하기 바쁩니다. 사람이 돈을 많이 벌면 다른 사람을 부릴 수 있어 좋다고 말하지만, 제가 보기엔 오히려‘사람을 부리 면 돈을 더 많이 번다’ 는 게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인 것 같습니다. 웬만한 사업의 수익이나 비용은 인건비 에서 상당부분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협동조합형 마을기업인 에코에코는 무턱대고 일하는 사람들 의 인건비를 박하게 책정하거나, 인건비를 절약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진행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지켜갈 삶과 문화 107
마을공원의 메아리도서관 옆에 재설치 된 메아리수족관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좋은 뜻을 가격표에 앞세우는 것도 조심스럽습니다. 우수한 제품을 만들어 제품 자체가 가진 매력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켜 제값을 받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 다.
재미는 나누고, 가치는 더하고 지난 호에 말씀드렸던 해운대 모레축제에 출품한 공중전화통 수족관을 부흥공원에 가져다 두었습니 다. 공중전화통 5개로 만든 메아리도서관이 있는 곳입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무척 좋아합니다. 수익금 확보를 위해 수족관을 매각하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다녔지만 여의치 않았는데, 마을공원에 가져다두 고보니 오히려 안 팔려서 잘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야자(야간자율학습)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공원에 잠시 들러 쉬던 학생들이 수족관에 관심을 보이고 제작자인 제게 이것저것 물어볼 때 보람을 느낍니다. 사물의 맥락을 살짝 바꾸거나 뒤집으면 전혀 엉뚱한 사태가 벌어진다는 재미난 사실을 나누는 기쁨이랄까요? 요즘은 파라솔, 그리고 파라솔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 중입니다. 우선 가방 만드는 데 쓰이는 폐파라솔 천부터 종류별로 수집하고 분류해서 자료화합니다. 옛 해운대 해수욕장 사진에 나타나는 파라솔의 종류 와 디자인은 무척 흥미를 끄는 관심사입니다. 해운대가 세계적인 해수욕장이라고 떠벌리는 지역정치인들 은 많지만, 정작 해운대와 관련된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곳은 없어 보입니다. 사소해 보이지만 108
해수욕장 용품 중에 하나인 파 라솔 하나라도 제대로 자료를 만들어 가치를 입혀볼까 합니 다. 이런 작업도 지역에 기반 을 둔 마을기업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을 많이 벌면 낭비하며 살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 본주의사회는 낭비를 통해 돈 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구조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불필 요한 낭비를 줄이려고 자재를 아끼거나 자투리 자재를 재사 용하면 결코 작업의 능률이 오 르지 않아 결국 이익도 감소되
해운대 해수욕장 파라솔 종류 중 일부. 파라솔 하나라도 제대로 자료를 만들어 가치를 입혀볼 생각입니다.
는 게 사업의 이치입니다. 자 투리 재료는 모아 두었다가 쓸모를 찾아 사용하는 것이 이치상 맞는 일인데, 능률의 측면에서 보자면 자 투리는 그냥 버리는 게 낫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메아리공업사는 출발부터 성공과는 거리가 먼 회사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더디 가더라도 지역의 자원을 아끼고, 지역의 특성을 살리며, 지역에 뿌리내려 회사 가 속한 지역사회에 구체적인 유익을 끼치는 기업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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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보’ 에‘오버’ 하는 KBS, 이승만은 성역인가
오보로 보는 한국언론
조윤호 <미디어오늘> 기자
오보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오보에 대응하는 해당 언론사의 태도다. 오보에 대 응하는 태도는 언론사가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KBS의 이승만 관 련 보도가 대표적인 사례다. KBS의 오보에 대응하는 태도는‘오버’ 였다. 지난 6월 24일 KBS는 이승만 정부의 일본망명설에 대한 단독보도를 내놨다. 이승만 정부가 한국전쟁 당시 일본으로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는 의혹은 예전부터 역사학계를 통 해 제기되어 왔는데, KBS가 관련 문건을 확인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단독보도가 10일 만에‘굴욕적 반론보도’ 로 KBS는 6월 24일자‘뉴스9’리포트 “ < 이승만, 망명정부 요청”日 문서 확인>에서“이 승만 정부가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일본정부에 6만 명의 망명 의사를 밝혔고 일본이 피 난인 캠프계획을 세운 비밀문서를 확인했다” 고 보도했다. KBS가 확인한 문건은 야마구치 현 도서관에 있는 공식 역사기록이다. KBS에 따르 면, 이 기록에는 한국전쟁 발발 이틀 뒤인 6월 27일 일본 외무성이 야마구치 현에‘한국 이 망명정권을 야마구치 현에 세우고 싶다고 알려왔다’ 며 가능한지 물었다는 내용이 나 와 있다. 야마구치 현의 지사는 피난인 캠프를 만들 계획을 세우고 미군정에 예산 지원까 지 요청했다고 한다. 이 보도가 나가자 KBS 안팎이 들끓었다. 각종 보수단체들은 KBS가 왜곡보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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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4일자 KBS 뉴스9 갈무리
며 KBS 앞에서 기자회견과 시위를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며느리인 조혜자 여사는 KBS 보도 다음 날인 6월 25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어제 KBS가 보도한 문서는 북한이나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 연합회) 조작이다. KBS가 종북 빨갱이 소굴” 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해당 문서에‘6월 27일’ (한국전쟁 발발 이틀 뒤)이라는 날짜라는 기록이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 며 오보라는 비판이 거세졌다. 보수성향의 KBS 공영노동조합은“KBS가 국가정체성을 부인하고 국 기를 흔드는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상황” 이라고 비난했고, 조선일보는 7월 2일자 칼 럼에서 KBS 기사가 단독이 아니며 공개한 문서에 대한 검증도 부족했다고 비판했다. 보수 우익단체 들은 KBS 기사에 대한 사과 및 정정을 요구했다. 안팎에서 시달리던 KBS는 지난 3일‘뉴스9’리포트 <이승만 기념사업회,‘일 망명 정부 요청설’ 부인>에서“이승만 대통령 기념사업회 측은 정부 공식기록이 아니라며 보도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KBS는 앞서 충분한 반론 기회를 주지 못한 것에 대해 유감” 이라며 6월 27일이라는 날짜는 문서 내용에 없고 이승만 정부가 난민 수용을 요청한 것이라 볼 수 없다는 이승만 기념사업회 측 반박 을 그대로 내보냈다. 반론만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굴욕이 이어졌다. 3일 당초의 단독보도는 KBS 홈페이지에서 삭제 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KBS 보도국 간부들은 이승만 기념사업회를 찾아가 이인수 사업회 상임이 사와 박진 회장 등 관계자들을 만났고, 보도경위를 해명했다. 복수의 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은 미디어 오늘에“KBS 보도본부 관계자 3명이 기념사업회 이사진을 만났다” 며“(KBS 해명과 반론보도에) 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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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일자 KBS뉴스9 갈무리
수 박사가 아주 만족한 것은 아니지만 (KBS 보도가) 앞으로 좋은 방향으로 나갈 것 같다” 고 말했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는 이러한 굴욕적 반론보도에 대해“통상적인 반론보도였다면 27일 날짜 표기 오류에 대한 수정과 우리 보도의 한계에 대한 기념사업회 측 입장을 단신으로 전하는 정도면 됐 을 내용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불필요 한 유감 표명과 이승만 전 대통령 미 화 내용까지 담아 당초 보도와 같은 분량과 형식의 리포트로 반론보도를 내주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굴욕적 반론보도가 나갔다” 고 지적했다.
“불필요한 유감 표명과 이승만 전 대통령 미화 내용까지 담아 당초 보도와 같은 분량과 형식 의 리포트로 반론보도를 내주는, 전례를 찾아 보기 힘든 굴욕적 반론보도가 나갔다”
이사회 압박에 담당자 문책인사까지 … KBS의‘오버’ 반론까지 받아주고 보도국 간부들이 직접 기념사업회를 찾아가 해명까지 했는데도 파문은 그치지 않았다. 이인호 KBS 이사장은 관련 보도경위를 이사회 안건으로 상정하겠다고 주장했고 몇몇 이사들 의 반대에도 이사회를 강행했다. 이인호 이사장은 7월 8일 열린 이사회에서“우리는 사흘 만에 적의 공격을 받아서 수도가 함락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남고 나라를 지켰는데 그런 인물(이승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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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 비방할 때에는 발끈하는 게 있다” 며“이번 계기로 국민과 교감하고 훌륭한 방송을 하는데 부족한 점이 있었는지 짚어보는 계기 삼아야 한다” 고 말했다. 보도에 대해 이사회가 의견을 제시하는 일은 언론의 독립성을 침해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그 간 금기시돼 왔다. 정권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사들이 보도 하나하나에 이사회를 열어 압박한다면 보도국이 위축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KBS는 7월 인사에서 이승만 보도의 책임자들에 대한 무더기 문책 인사까지 단행했다. KBS는 7월 15일자 인사발령에서 송 아무개 디지털뉴스국장과 용 아무개 보도국 국제주간을 심의실 심의부로 발 령 냈다. 백 아무개 디지털뉴스국 디지털뉴스부장과 이 아무개 보도국 국제부장 역시 발령 인사 명단 에 포함됐다. 백 부장은 보도국 라디오뉴스 제작부로, 이 부장은 디지털뉴스국 디지털뉴스부로 이동 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승만 보도와 관련 있다는 점이다. 국제주간과 국제부장은 해당 리포트의 데스크이고 디지털뉴스국 장과 부장은 해당 기사를‘디·퍼 뉴스’ (디지털퍼스트)로 뽑아 당일‘뉴스9’보도
KBS는 7월 인사에서 이승만 보도의 책임 자들에 대한 무더기 문책 인사까지 단행 했다.“가히‘화요일 밤의 대학살’ 이라고 불릴 만한 명백한 징계성 인사” 였다.
에 앞서 KBS 뉴스 홈페이지와 모바일앱 에 전송했다. KBS본부는“KBS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수준의 굴욕적 반론보도를 낸 것에 만족하지 않고 가히‘화요일 밤의 대학살’ 이라고 불릴 만한 명백한 징계성 인사를 단행했다” 고 비판했다.
오버 이유는“연임 앞둔 사장의 충성 맹세” 이렇게 오버하는 이유에 대해“연임을 앞둔 조대현 사장의 충성 맹세” 라는 비판이 나온다. KBS본 부는“조대현 사장이 차기 사장 선임권을 행사할 이사장에게 충성 맹세를 한 것” 이라며“또 차기 사장 경쟁자와 마찬가지로 정권 입맛대로 보도통제를 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차기 사장 선출을 위한 사전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고 밝혔다. KBS는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 온갖 오보에도 꿈쩍이지 않았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직접 사과를 요 청해도 사장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청와대로 향했다. KBS가 유독 이승만 보도에는 굴욕적으로 고개 를 숙이는 이유는 뭘까. KBS가 국민의 방송이 아니라 청와대 방송이라는 점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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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문화예술 당원 찾기
대중음악, 그리고 대중정치 음악평론가 나도원 인터뷰 : 백연주, 현린 문화예술위원회 운영위원|정리 : 현린|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음악실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바다와 강 사이를 가로 막는 둑 건설이 한창이던 30여 년 전, 이제 막 대 전시에서 충남 서천군으로 부임해온 음악교사가 보기에 이 초등학교 합창단의 노래는 수준 이하였다. 코 앞으로 다가온 경연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교사는 합창단을 해산시켰고, 대신 에 그동안 눈여겨봐왔던 소년 하나만을 음악실에 남겼다. 이 소년의 실력이라면 독창부문 수상은 가능하 리라 여겼고, 마지막으로 소년의 노래를 한 번 더 들어본 후에 경연 참가여부를 결정할 참이었다. 하지만 소년의 생각은 달랐다. 만약 이 오디션에서 발탁된다면,‘친구들 모두 집에 갈 때 나 혼자 학교 에 남아서 노래 연습을 해야 하는 거잖아?’하필 그 때 불렀다는 노래가 <바닷가에서>였다.‘해당화가 곱 114
게 핀 바닷가에서 나 혼자 걷노라면 수평선 멀리…’혼자 남는 것이 싫었던 이 소년은, 일부러 노래를 망 쳤다(적어도 소년은 그렇게 기억한다). 교사는 매우 낙담했고, 하는 수 없이 합창단을 다시 구성했다. 그리고 수준 이하였다던 그 합창단은 그해 서천군 예능발표회 합창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색 바랜 성장영화를 연상시키는 이 이야기 속의 색다른 소년을《미래에서 온 편지》 가 만났다. 서천까지 찾아갈 필요는 없었다. 지난달까지 이 꼭지의 연재를 맡아온 나도원이 바로 그 주인공이기 때문.‘숨은 문 화예술 당원’ 이라고 하기엔 나도원은 너무 많이 드러난 당원인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음악인으로서의 나도원을 당원에게 드러낼 기회는 별로 없었다는 점에서 그 역시‘숨은 문화예술 당원’ 이라 할 수 있을 것 이다. 게다가 오랫동안 맡아왔던 문화예술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동안 수고했다며 어깨도 다독여줄 겸 자리를 마련했다.
미래에서 온 편지(이하 미) : 음악에는 어떻게 빠지게 됐는가? 나도원(이하 나) : 중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왔다. 처음으로 나만의 방과 라디오를 갖게 되었다.
재건된 송석초등학교 합창단의 공연 모습. 앞줄 좌측에 소년 나도원이 보인다. (사진 : 나도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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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이나 외국이나 좋은 음악들이 많 았다. 주로 뉴에이지나 프로그레시브, 헤 비메탈 같은 음악에 푹 빠지게 되었다. 그 런데 음악을 듣다보면 음악을 하고 싶어지 지 않나?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에 오카리 나를 샀고, 그걸 가지고 곡을 만들기 시작 했다. 일본의 오카리나 연주자 노무라 소 지로를 능가하는 뉴에이지풍의 아름다운 곡을!
미 : 가요 듣는 친구들을 무시하면서 헤 비메탈 같은 장르를 듣는 친구들이 꼭 있 었다. 요즘 팬덤 문화와 차이점이 있는가? 나 : 메탈 안에서도 갈린다. 메탈리카 좋아하는 친구들은 본 조비 좋아하는 친구 들 무시했다. 나는 다 좋아했다. 파고들고 찾아 듣고, 탐구형 마니아나 수집가형 마 니아들이 많았다. 집에 음반이 몇 장 있다 는 걸 자랑하기도 하고, 빌려주기도 하고 그랬다. 반면에 요즘은 음반을 수집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대신 참여형 마니아들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지만, 전업으로 음악평론
이 많다. 음반을 찾아 듣고 수집하기 보다
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는 페스티벌이 열리는 장소에 직접 가서
내가 그 중에 하나다.(웃음)”
즐기는 문화로 바뀌었다.
미 : 음악평론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 했는가? 나 : 소위 인디밴드 생활을 2천 년대 초반까지 10년 가까이 했다. 하지만 90년대 후반에 병역으로 공익 근무를 하는 중에는 다른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PC통신이 있었다. 음악을 많이 들었고 그만큼 하 고 싶은 말이 많으니까 음악동호회에서 음악에 대한 글을 썼다. 그러다 동호회 관리자가 되고, 내 글을 좋 아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그래서 더 열심히 썼다. 그러다보니 2000~2001년 즈음에는 음반해설집부터 시 작해서 돈을 받고 글을 쓰게 됐다. 나뿐만 아니라 30대, 40대 평론가들 대개는 PC통신에서 글을 쓰며 평 116
론을 시작했고, 그렇게 새로운 사람들이 평론계에 수혈됐다. 물론,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지만 전업으로 음악평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내가 그 중에 하나다.(웃음)
음악의 대중성과 정치의 대중성 미 : 음악평론을 하다가 정당활동을 하기로 결정한 계기는 무엇인가? 나 : 중학생 시절부터 소위 의식화된 학생이었다. 집에 운동권 대학생 형들이 하숙을 하고 있어서 많은 책들을 읽었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 친했던 친구들 대부분이 어려운 형편의 친구들이었다. 나도 넉넉하지 않았고 해 서, 모이면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를 놓고 얘기를 많이 했다. 사람들은 내 가 귀공자 타입이라며 고생 안 하고 살 았을 거라 생각하지만, 고등학교 졸업한 이후에 안 해 본 일이 없다. 편의점 아르 바이트, 술집, 막노동, 방송국 보조 스태 프, 음악 틀어주는 클럽에서 디제잉, 청 소, 설거지, 서빙을 다 했었다. 이런 일 들을 하면서 느낀 게 꽤 많았다. 언젠가 는 우리나라에도 제대로 된 진보정당이 세워지길 바라며 기다렸다. 그래서 민주노동당 세워질 때 응원했 고, 사회당도 관심 있게 지켜봤다. 대학 시절에는 총장실 점거에 동참하기도 했 고, 2008년에는 과격하게 저항하다 경 찰에 두들겨 맞기도 했다. 그러다 진보 신당에 입당했다. 진보신당이 잘 될 거 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당시 밖 에서 진보정당에 대해 비판조의 평론만 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나도 당원이 돼 서 욕을 먹겠다고 마음먹었다. 또 당원 이 된 후에도 평론만 하는 분들이 많았
“밖에서 진보정당에 대해 비판조의 평론만 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나도 당원이 돼서 욕을 먹겠다 고 마음먹었다. 당원이 된 후에는, 나도 열심히 활 동하면서 욕을 먹겠다고 마음먹었다. ” 삶과 문화 117
는데, 나도 열심히 활동하면서 욕을 먹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지금 욕을 많이 먹고 있다.(웃음)
미 : 음악평론 자체와 정치활동 사이의 접점은 없었던 것인가? 나 : 내가 음악에 대해서 얘기하는 대중성이라는 것과 진보정당의 대중성이라는 것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사람들은 대중음악을 상업음악과 등치시킨다. 그래서 보통 상업적이고 잘 팔리는 것이 대중성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건 틀린 말이다. 대중음악은 아이돌 음악처럼 많이 팔리고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음악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우리들 의 이야기를 잘 담아내고 녹여내는 것이 대중성이고, 그래야 역사성도 갖게 된 다. 대중음악의 황금기라고 하는 80년대 후반에는 대중성과 음악성, 상업성이 하 나로 뭉쳐져 있었다. 이문세라든지 유재 하라든지 변진섭 같은 사람들은 음악성 도 높았고 대중성도 높았다. 그런데 어 느 순간부터 이것이 체계적으로 분리가 되었다. 그들 정도 수준의 음악이 지금 은 알려지지 않는다. 많이 알려지지 않 았지만 매우 훌륭한 대중성을 갖고 있는 음악들이 많다. 그런 곡들을 발굴하려고 많이 노력한다. 대중정당이라는 말도 대중음악과 비 슷하게 오해되고 있다. 대중정당이라는 것도 많이 알려지고 표 많이 받는 정당 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구성원들 의 삶이 녹아 있는 정당이 대중정당이 고, 몇몇 사람들이 아니라 당원들이 움
“우리들의 이야기를 잘 담아내고 녹여내는 것이 ‘대중성’ 이다. 구성원들의 삶이 녹아있는 정당이
직이는 정당이 대중정당이다. 그래서 내 가 이야기하는 대중음악의 대중성과 진 보정당의 대중성은 같은 것이다. 그런
대중정당이고, 몇몇 사람들이 아니라 당원들이
가치를 지켜나가고 확산시키는 것이 중
움직이는 정당이 대중정당이다.”
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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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창간 무렵부터 지금까지, 나도원은 <숨은 문화예술 당원 찾기>의 인터뷰와 글을 거의 매달 맡아왔다. 사진은 4 월에 있었던 김봉현 당원과의 인터뷰 모습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미 : 음악의 소비만이 아니라 음악의 생산에서도 대중성을 기대할 수 있는가? 나 : 태어나면서 음악인인 사람은 없다. 대부분의 음악인들, 특히 인디음악인들은 음악을 학교에서 배 우거나 한 게 아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서 집에서 일인제작시스템을 만들었고, 그렇게 해서 지금 수천 명의 젊은 음악인들이 태어났다. 사진 같은 경우는 상당히 대중화되지 않았나. 음악의 경우도 사진 처럼 자기 음악을 생활 속에서 표현하는 방법을 알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음악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분야도 마찬가지인데, 옛날에는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지 않았다. 자기가 노 래도 흥얼거리고 노동하면서 노동요를 불렀다. 동네 사람들이 잔칫날 모여서 같이 꽹과리를 치기도 했다. 그런데 자본주의 시대 들어와서 생산과 소비가 체계적으로 분리된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회복해야 할 것 이 문화예술의 주체화이다. 우리도 생산자가 되거나 생산이나 유통에 개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리뷰를 쓰 는 것도 한 방법이다.
미 : 요즘은 일반인도 인터넷을 통해 리뷰를 쓰고 발표한다. 일반인의 리뷰와 평론가의 리뷰는 어떻게 다른가? 나 : 뛰어난 일반인(?) 마니아와 형편없는 전업 평론가도 많기 때문에 일반론이 될 수는 없겠지만 내 경 험에 국한시켜본다면, 특정할 수 없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글과 말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춰야 한다. 삶과 문화 119
‘레드 어워드’ 의 연중 기획 프로 그램‘레드 토크’ 의 티저 광고 (노동당 문화예술위원회 제공)
보통 음악을 두고 취향의 문제 아니냐고 하지만, 음악 경험의 총화가 취향이고, 취향의 체계화가 음악관 이다. 때문에 체계화된 음악관을 바탕으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글쓰기 능력이 필요하고, 둘 중 하나가 부족하면 받아들여질 수 없다. 작품 가이드는 역할의 일부일 뿐이다. 비평가는 보편의 담론을 생성하여 생산자와 소비자 그리고 사회와 산업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흩어진 점들을 찾아내 선으로 연결 하고, 때로는 칼날 같은 차이를 발견하면서 좌표를 만들어 담론을 생성해야 한다.
당은 흔들리지 않는다 미 : 문화예술위원장으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행사는 무엇이고, 바라는 점은 무엇인가? 나 : 문화예술위원장을 오래 하다 그만둬서 솔직히 서운함은 있다. 문화예술위원회는 당에서 내 중심 이었기 때문에. 가장 기억에 남는 행사는 물론‘레드 어워드’ 다. 3회까지 올 줄 몰랐다. 부문위원회 발전 을 위해서도 노력을 많이 했다. 그래서‘무지개 페스티벌’ 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지난 몇 년 동안 무지개 기금도 마련하는 등 부문위들이 열심히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 이제는 일상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장 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레드 토크’ 가 그런 장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지난 레드 토크에서 오랜만에 만 난 당원도 많지 않았나. 그리고 사람이 오래 일을 하다보면 지친다. 문화예술위원회도 5년차다. 초기부터 120
끌고 왔던 사람들은 지친 면이 있 다. 새로운 분들과 함께 활기 있 게 하는 것이 좋겠다.
미 : 앞으로 활동계획과 함께 인사를 들려 달라. 나 : 가까이 있는 어느 당원이 나도원의 한 활동의 시기가 정리 되는 것 같다고, 다음이 기대가 된다고 했다. 당원으로서의 의무 는 열심히 할 것이다. 당 밖에서 는‘예술인 소셜 유니온’ 에서 기 획한 일들이 많다. 예술인 소셜 유니온이 국회 일을 많이 하니까 그 활동에 집중 할 것이다. 여러 당원들이 최근 노동당 상황들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는데, 크게 걱정할 것이 없다. 걱정하지 않도 록 나도 노력하겠다. 당원 수도 크게 줄지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크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
2015년 노동절에 열린 예술인 소셜 유니온 발족식에서. 공동위원장 나도원과 이 선옥. (사진 : 현린)
지만, 실제로 1만 2천에서 1만 3 천 당원 대오는 유지될 것이다. 이번에 당직선거 잘 치러서 내년 총선까지 힘 있게 돌파했으면 좋겠다.
노동당 문화팟캐스트 <컬쳐쇼크> 14회 음악평론가 나도원 편 듣기 http://www.podbbang.com/ch/1858
삶과 문화 121
1999년 노동자대회 전야제. 꽃다지 사람들은 그날 막 나온 꽃다지 3집 음반《진주》 를 파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700장의 음반을 팔았으니 얼마나 바빴겠습니까. 기획자와 가수들이 모두 나서 서 분주히 음반을 파는 와중에 어느 순간 사라진 음반 프로듀서 유인혁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찾았습니 다. 그는 꽃다지가 음반을 팔던 옆 천막에 쪼그리고 앉아 한 남자와 대화 중이었습니다. 비슷한 연배로 보 이는데다가 그가 친밀하게 이야기 나눌 정도의 사람이라면 일면식이라도 있을 법한데 전혀 모르는 사람 이었습니다. 전야제가 끝나기 전에 음반을 모두 팔고 대관절 누군데 그렇게 다정히 얘기를 했냐고 물었습 니다.‘정윤경’ 이라고 했습니다.“아, 정윤경!”노래패 강사 명단에서 본 이름이었습니다.‘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네’이 정도가 인상이랄 것도 없는 그의 첫인상이었습니다. 노래패‘새벽’ 에서 활동하다 노래패 강 사가 되었고 미국으로 음악 유학을 떠났다 금방 돌아온 사람이라는 정보는 덤으로 따라왔습니다. 활자로 만 존재하던‘정윤경’ 이 실재하는 뮤지션‘정윤경’ 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도,‘노래패 강사가 음반까지 냈구나. 특이하네’ 라며 스쳐 지나가는 사람쯤으로 치부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한 장의 음반 때문에 그냥 스쳐 지나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꽃다지와 비슷한 시기에 발표한 그의 첫 음반《temporary xxx files》때문이었습니다.
꽃다지가 찾던 그 사람, 정윤경 그때만 해도 노동자대회 전야제에는 전국 각지의 노동자와 함께, 현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문화활동 가 대부분도 참석을 했습니다. 뿔뿔이 흩어졌던 벗들이 명절을 맞아 오랜만에 고향에서 만나듯, 전야제에 서 노동자대회까지 1박 2일간 행사장을 오가며 서로의 근황을 묻곤 했습니다. 마음이 맞는 해에는 60~70 여 명의 문화활동가들이 노동자대회를 마치고 같이 모꼬지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이른바‘술연회’ .한해 동안 애썼으니 하루 정도는 모두 내려놓고 술 마시며 회포를 풀자는 자리였습니다. 그해에도 술연회를 떠 났습니다. 술연회를 떠나는 차 안에는 여러 민중가요가 울려 퍼졌는데, 그해의 최고 인기 음반은 정윤경 의 첫 음반이었습니다. 1998년 연영석의 음반이 그러했던 것처럼 1999년에는 정윤경의 음반이 현장노동자들의 반응과는 별 개로 문화활동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음반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런 사람이 왜 이제야 음반 을 냈는지 의아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뮤지션 정윤경의 음악 세 계에 대한 사심이었습니다. 몇 차례 밝힌 바대로 당시에 꽃다지는 새로운 노래의 길을 찾는 중이었습니
노래의 꿈
제발 민정연 문화기획자, 꽃다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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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나 이미 몸에 각인된 음악 언어를 가진 상황에서, 새로운 걸음을 뚜벅뚜벅 내딛는 게 쉽지는 않았 습니다. 그 무렵 김호철 선배와 통화하다가 호기롭게 말했습니다.“형, 새로운 투쟁가요의 정형을 만들고 싶어요. 형을 필두로 만들어진 현재의 투쟁가요 말고 다른 투쟁가요를 하고 싶어요. 그게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 과정이라 생각하고 좋게 지켜봐 주세요.”제 말에 형이 지었던 웃음이 걱정이 담긴 허 허로운 웃음이었는지 격려를 담은 호쾌한 웃음이었는지는 가물가물합니다. 호언장담했지만 새로운 음악 언어를 찾겠다고 두리번거리는 눈빛이 머물러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던 그때, 정윤경의 1집은 꽃다 지가 찾던 것과 비슷한 음악 언어를 담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저 사람과 음악작업을 해야겠구나’ 했던 바람은 꽤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2004년 가을에야 비로소 꽃다지 4집 음반의 프로듀서로 계약을 맺었으니 말입니다. 무려 5년여의 세월이 걸린 이유는 이미 같이 작업하던 유인혁이 있어서기도 했지만, 정윤경의 음악활동이 몹시 역동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첫 솔로 음반을 듣고 그의 공연을 자주 보고 싶었지만, 바람과는 달리 1999년 12월 아리랑 소극장에서 서기상, 윤미진, 연영석과 함께한 콘서트‘첩첩산중’이후로 무대에 선 그를 볼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뭐 하나 싶었는데 어느 날 밴드를 한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일상의 편린에서 소재를 찾은”유정고 밴드 유정고 밴드. 당시에는 어느 고등학교 밴드냐는 질문을 듣곤 했는데 유인혁, 정윤경, 고명원, 세 사람 의 성을 딴 밴드 이름이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여러 음반의 프로듀서 경험을 한 베테랑이었습니다. 80년대 말부터‘삶의 노래 예울림’ 과 꽃다지로 활동하며 <바위처럼>, <노래만큼 좋은 세상>, <사람이 태 어나> 등을 만들었고, 록을 전격 수용한‘조국과 청춘’5집 수록곡 대부분을 만들어 민중가요계에서는 명 성이 자자했던 유인혁, 최초의 노래운동 집단 노래모임‘새벽’ 에서 건반과 기타, 노래를 담당했고 팀 해체 후 노래패 강사로 활동하다 발표한 솔로 음반을 통해 음악적 저력을 인정받은 정윤경, 민중가요 록그룹 ‘메이데이’ 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고 연영석 음반의 프로듀서로 기량을 인정받은 고명원. 그야말로 민 중가요계에서는 내로라하는 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한 밴드의 리더로도 손색이 없을 이들이 함께 밴 드를 결성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이 들려줄 음악에 대한 민중가요 팬들의 기대는 크지 않을 수 없었습 니다. 저로서는 다 늙은 베테랑 셋이 뜬금없이 웬 밴드냐 싶었습니다. 사연인즉슨, 1999년 노동자대회 전 야제에서의 첫 만남에서 음악이 아닌 만화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통하였던 두 사람이 만나는 횟수가 늘면 서 결국은 음악 이야기를 하게 되었답니다. 그러다“노느니 밴드나 하자” 며 메이데이 출신인 고명원을 꾀 어 밴드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유정고 밴드의 활동은 열정과 격정의 결정체였습
뮤지션 정윤경. 스쳐 지나가는 사람쯤으로 치부했던 그가 한 장 의 음반 때문에 스쳐 지나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첫 음반《temporaryxxxfiles》 때문이었습니다. 삶과 문화 123
니다. 2001년 봄에 첫 음반《남상》 을 내고 그해 초여름에 콘서트를 하더니, 해산하기까지 단독 콘서트만 아홉 번을 했습니다. 이밖에도‘꽃다지’ ,‘소풍가는 날’ ,‘손현숙’ , 밴드‘천지인’ , 밴드‘가객’ ,‘이반밴 드’등과 네 번의 합동공연을 하고, 여러 주점에서 정기공연을 하는 등 신인 밴드로서는 엄두조차 내기 힘 든 일을 과감히 벌이며 골수팬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윤경 1집이 문화활동가들 사이에서 전폭적인 지지와 환호를 받았던 것과 달리, 유정고 밴드 의 초반 활동에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이게 민중가요야?” 라고도 했습니 다. 기존의 민중가요가 희망과 결연한 사명을 주로 노래했던 것과 달리, 이들은 희망이든 절망이든 그대 로 드러내며 소통하려 했던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마음이 변한 건 아니었습니다. 직 설적으로 대사회적 메시지를 보내지는 않았으나, 시선을 아래로 향한 그들의 노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 고 싶다는 꿈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거창하게 원칙 운운할 건 없고, 목적의식적으로 누구를 의 식화하기보다는 일상의 편린에서 소재를 찾는다. 격렬한 저항보다는 누구든 혼자 있을 때 느끼는 외로움 이나 절망 같은 것을 담아내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버렸다는 건 아니다. 옳지 못한 세상에 대한 저항의 방식을 달리했을 뿐이다.” 라던 그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단지 여전한 세상 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화법이 변했을 뿐이라는 걸 그들의 노래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짧다면 짧은 기간, 갸우뚱하던 이들을 음악으로 설득하고 열정과 실력으로 많은 팬을 만들었던 그들은 2014년에 해체를 선언했습니다. 한창 유정고 밴드가 주가를 올리던 때 만났던 정윤경은“내가 하루를 살 면 일만 몇 천 원씩의 빚이 늘어난다. 그래도 조금 더 나아가고 싶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정도로 열악했 던 조건과 함께 당연히 예상되었던 음악적 이견들이 맞물린 결과겠지요. 가수는 자신의 노래처럼 산다고 했던가요?“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라는 말 따윌 하며 나를 속이려 들지 않겠어” 라고 노래하던 그들은 그 들 표현대로 버티기와 나아감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깨닫는 순간 연명보다는 해체를 선택했습니다. 해체 를 결정하던 순간, 누군가는 음악의 길이 끊겼다고 절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모르 고 헤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해체 후에도 여전히 음악인이었습니다. 정윤경은 꽃다지 음악 감독으로, 유인혁은 생태주의 퍼포먼스 그룹 노리단 예술감독으로, 고명원은 음반 프로듀서와 연주자로. 그러다 2012년 겨울, 정윤경 솔로 콘서트에서 10여 년 만에 한 무대에 서서 보는 이들을 뭉클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어지러운 시절입니다. 너도나도“이것이야말로 정답이다” 라고 주장하지만, 그런 것이 있었다면 이런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겠지요. 이 순간 필요한 것은 나만 옳다는 고집보다는 각자의 선택에 대한 존중과 예의가 아닐까 합니다. 각자의 심지를 굳건히 하며 선택한 길을 잘 가다 보면 언젠가 어떤 길에서 다시 만 날 수 있겠지요. 유정고 밴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각자의 심지를 굳건히 하며 선택한 길을 잘 가다 보면 언젠가 어떤 길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 유정고 밴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124
제발 작사·작곡 정윤경 노래 유정고밴드
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라는 말 따윌 하며 나를 속이려 들지 않겠어 차라리 저 하늘이 무척 푸르고 곱다 말하는 게 더 날지 몰라 오~ 난 누군가가 쳐놓은 거미줄에 걸렸어 버둥거릴수록 더 점점 조여오고 희망이라곤 저놈의 거미가 조금만 더 있다 나를 찾아주길~ 바라는 것 이 모든 것들을 제발 꿈이라고 말을 해주게 난 그저 무서운 꿈을 꾸고 있는 거라 말을 해 말을 해 말을 해 제발 날 흔들어 깨워주게 깨워주게 제발 날 흔들어 깨워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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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접으며
다시 친숙해지기 박권일 기관지위원,《88만원 세대》공동저자
“어린이 여러부운~!” “에이, 이제 우리 어린이 아니에요. 다 컸어요.” “아, 그렇구나! 우리 친구들이 다 어른이 되었구나.” 종이를 접던 김영만 아저씨도 울고, 시청자들도 울었다. 이 친숙하고도 낯선 감정은 뭐란 말인가. 서랍 속 깊숙이 밀어 넣어둔 채 잊고 있던 즐거운 기억이 느닷없이 현실로 걸어 나와 나-들을 호명할 때, 공통 경험을 지닌 이들은 일제히 감정의 홍수에 휘말린다. 김영만 아저씨는 오래 전‘종이접기 아저씨’ 로 방송을 누비던 이다. 아저씨의 신통한 손재주에 홀려 종 이접기깨나 했던‘그때 그 꼬마들’ 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에 아저씨가 환기한 첫 번째 감정은 말할 나위 없이 노스탤지어였다. 언젠가 머물렀으되 이제는 결코 다시 갈 수 없는 곳을 향한 그리움. 그 시절 종 이접기를 따라하며 자라난 전국의 어린이들, 지금은 어른이 된 그들에게 김영만 아저씨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다. 어떤 세대에게나 그런 존재와 풍경들이 있다. 가수 김광석 또한 어떤 이들에게 그럴 것이다.‘토 토가’ 니‘쎄시봉’ 의 유행 또한 본질적으로는 이런 세대적 노스탤지어라 할 수 있다. ‘때 아닌’유행들이 각각의 세대들에게 우연하고 신기한 경험일지 몰라도 그런 사건들이 잇따라 나타 나면 그것은‘사회현상’ 이다. 최근의 리메이크 혹은 리마인드 붐은 확실히 어떤 공통성을 지닌다. 이 현상 을 나는,‘낯설게 하기’ 를 슬쩍 비틀어‘다시 친숙해지기(refamiliarization)’ 라 이름 붙이고 싶다. 낯설게 하 기(defamiliarization)는 러시아 형식주의 비평가 쉬클로프스키의 개념으로,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함으로써 새로운 경험을 유도하는 근대미학의 방법론이다. 반면‘다시 친숙해지기’ 는 한때 너무나 익숙했으되 이제 는 망각한 무엇을 재환기하여 정서의 공동체를 결성하는 것이다. 정서의 공동체라 해서 감정적인 동인만으로 지속되고 확산되는 것은 아니다. 그 공동체는 또한 폭발적 인 시장을 형성하는‘소비의 공동체’ 다. 일본사회에서는 오랜 불황을 겪으며‘좋았던 옛날’ 을 그리워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져왔고, 붐이 있을 때마다 관련 상품들이 쏟아져 나온 바 있다. 어떤 사람들은“퇴행” 이라거나“추억팔이” 라 일축해버린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런 현상들이 제로성장 시대에 빈번히 출현할 풍경이라는 점이다.‘다시 친숙해지기’ 는 자본주의의 심대한 위기신호일지 모른다. 지나간 쾌락을 재소환해야 할 정도로 시스템의 활력이 떨어지고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고 있다고 해 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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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이야기
음악평론가 나도원
대중음악, 그리고 대중정치
미래에서 온 편지 제23호 발행인 김상철 편집인 이장규 위원회 김건담 김성현 김혜연 박권일 백시진 장석준 정정은
“내가 음악에 대해서 얘기하는 대중성이라는 것과 진
정철수 조윤호 최백순
보정당의 대중성이라는 것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사람
교 열 김혜연 정정은
들은 대중음악을 상업음악과 등치시킨다. 보통 상업적
디자인 고미숙
이고 잘 팔리는 것이 대중성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건 틀린 말이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잘 담아내고 녹여 내는 것이 대중성이고, 그래야 역사성도 갖게 된다. 대중정당이라는 것도 많이 알려지고 표 많이 받는 정 당이 아니다. 구성원들의 삶이 녹아 있는 정당이 대중정 당이고, 몇몇 사람들이 아니라 당원들이 움직이는 정당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 영등포, 라00407) 발행일 2015년 7월 26일 주 소 서울 영등포구 국회대로 664 한흥빌딩 2층 노동당 전 화 02) 6004-2006, 2007 팩 스 02) 6004-2001 이메일 laborzine@gmail.com
이 대중정당이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하는 대중음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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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성과 진보정당의 대중성은 같은 것이다. 그런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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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지켜나가고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나도원 당원의 인터뷰 전문은 114~121쪽 <숨은 문화예술 당원 찾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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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제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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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통합진보당해산, 그다음은 쟁점토론 ■ 6기대표단선거: 나는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