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당 기관지 201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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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는 영국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작가, 미술가인 윌리엄 모리스가 1891년에 낸 소설 제목

News 『News from Nowhere』 을 우리말로 의역한 것입니다. from Nowhere

nowhere는‘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유토피아’라는 말의 원래 의미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고 하지요. 이제 노동당의 기관지에‘미래에서 온 편지’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한국 사회의 답답한 현재에 햇살을 들이는 미래의 틈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고 보니 nowhere는 now+here(지금 여기)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미래가 되기 위해, 이 편지를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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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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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띄우며 벌써 세 번째 편지입니다|<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지금+여기 노동당 같이 쉬자, 빨간날 6

빨간날을 빨간날이라 부르지 못하고|<미래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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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동구 이영도 당원, 황보곤 구의원을 만나다

‘빨간날’캠페인부터 임금명세서 교부의무화 입법청원까지|<미래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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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1 ■ 대한민국 교과서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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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감자, 국정교과서 |장석준

19 ‘올드라이트’ 의 귀환?

교학사 역사 교과서에 숨은 박근혜의 딜레마|후지이 다케시 23

교학사 역사 교과서의 핵심은 친일(親日)이 아니라 반공(反共)|조가림

28 ‘착한’ 시민의 탄생

사회과 교과서 아래에 숨은 이데올로기들|남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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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 ■ 마트 없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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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 집중 탐방기 알고 가면 빈손으로 나온다 |이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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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의회 여영국 도의원 인터뷰 농협, 너마저! 창원 가음정시장이 무너진다|김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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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니> 김경 사무국장 대담“생산에서 재순환까지 전체를 보아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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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산물 직거래, 도시와 농민이 함께 찾는 먹거리 대안|김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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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진보정치 열전 2|경기도의회 최김재연 의원 편(2부) “동네야 함께 놀자!” 사람이 살아야 동네다|최혜영·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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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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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살아남은 자의 아픔|서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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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포럼 2014년 예산, 구조적 세입 부족

·목차

선(先) 적자 후(後) 증세가 답이다|홍원표 72

2014 지방선거 지방선거 목표는‘유효정당’ 으로의 재진입|최백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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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토론 ■ 같은 실패, 다른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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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을 가르친 자들의 비애|김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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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밖의 진보? 헌법 안의 진보?|윤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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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진보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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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파 통신 남의 나라 선거운동을 뛰어보다|김강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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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좌파 이웃 좌파④ 동병상련? 이웃 나라 일본의 좌파(2)|장석준

삶과 문화 98

불온한 서재 신자유주의적 분절 노동시장을 넘어 사회적 노동시장으로|양솔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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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문화예술 당원 찾기 다큐멘터리 <꿈의 공장> 감독 김성균|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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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수의 DIY 공작소“서울에서 제주까지 노동당 LED 깃발 뜬다” |곽동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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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꿈 짤린 손가락|민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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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평범한 사람|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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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비평 밀양 송전탑 공사현장, 언론은 없고 카메라만 있다|<미래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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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마니 칼럼 머루랑 다래랑 알아야 먹는다 |이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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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다운 당원들의 유쾌한 청각생활을 지지하는 이달의 음원 다운로딩 가이드|장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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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아침마다 나는 통학버스를 탄다 |조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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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접으며 밀양에 필요한 것|박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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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띄우며

벌써 세 번째 편지입니다 매번 이 글의 첫머리가‘벌써 몇 번째 편지입니다’ 로 시작할까봐 걱정입니다. 그만큼 편집 을 마무리할 때마다 믿기지가 않습니다. 창당 6년만에 처음 당 기관지라는 것을 만들다 보니 모든 게 처음이고 낯섭니다. 부족한 재정과 인력으로 만들다 보니 더더욱 그러합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기관지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변화들입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가 종이 바깥으로 폴짝 뛰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박은지 부대표가 진행하는‘기관지 읽어주는 팟캐 스트’ 에 벌써 여섯 분의 필자들이 다녀갔습니다.‘여성 진보정치 열전’ 을 연재하는 여성위원 회는 첫 인터뷰 손님이었던 김혜경 고문과 함께 은평 민중의집 <랄랄라>에서 토크콘서트를 열었습니다. 10월호 특집 <자전거로 충분하다> 이후에도‘노동당 잔차질 번개’ 는 계속 이어져 이제 세 번째 모임을 앞두고 있습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도 조금씩 바뀌어갑니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변화는 전국에서 활 약 중인 노동당 지방의원들의 목소리를 싣는 지면이 점점 늘고 있다는 점입니다. 원외정당이 서럽다고 하지만 노동당에는 열두명의 광역·기초의원들이 있습니다. ‘여성 진보정치 열전’ 에서는 뉴타운 토건세력들과 맞선 경기도의회 최김재연 의원의 활약 상을 만나봅니다. 경남도의회 여영국 의원은 이번 호 특집‘마트 없이 충분하다’ 에서 농협 대형 유통센터의 등장으로 인해 무너지는 창원 가음정시장 소식을 전합니다.‘지금+여기 노동당’ 대담에서는 울산 동구 황보곤 의원과 이영도 당원이 사내하청 노동자 실태조사 이후 빨간날 캠페인을 제안하기까지 2년에 걸친 과정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지난 호에 이어 이번 호에도 전국 시도당에서‘지금+여기 노동당’코너에 생기발랄한 사진 을 보내주셨습니다. 가난하고 의석도 없는 노동당에서 가장 소중한 자산은 만 사천 당원들입 니다. 그리고 노동당의 이야기는 곧 만 사천 개의 꿈과 역사이기도 합니다. 아직 싣지 못한 이 야기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지역과 현장에서 오늘도 열심히 뛰고 있는 노동당 당원들의 목소 리를 생생하게 전하겠습니다.

2013년 10월 26일 <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4


구독자 모집 오늘 우리의 한 걸음이 길을 엽니다. 미래가 됩니다. 우리는 길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 사람과 자연이 공존 가능한 지구생태계, 차별과 소외 넘어 모두가 평등한 세상, …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밑그림을 그려나가면서 없는 길을 만들고, 스스로 길이 됩니다. 그래서 노동당의 꿈은 곧 <미래에서 온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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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노동당

같이 쉬자, 빨간날

빨간날을 빨간날이라 부르지 못하고 “크리스마스가 유급휴일이 아니라구요?” 백화점 앞을 지나던 시민들이 발걸음을 잠시 멈춘다. 설날, 어린이날, 추석, 크리스마스, … 달력에는 분명히 공휴일로 표시되어 있는데‘빨간날’ 을‘빨간날’ 인지 아닌지 물으니 의아해한다.‘유급휴일’자체 가 무슨 말인지 모르는 시민들도 적지 않다. 스티커를 붙이려다 말고‘유급휴일이 뭐냐’ 고 되묻는 20대층 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같이 쉬자 빨간날!”노동당이 재창당 후 전당적으로 벌이는 두 번째 사업이다. 지난 9월초 서울 구로 디지털단지에서 캠페인을 시작, 전국 각지에서 정당연설회와 함께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경남도당과 울 산시당은‘유급휴일 OX 퀴즈’ 도 함께 진행했다. 노동당이 거리에서 만난 대부분의 시민들은 달력에 빨간 날로 표시된 공휴일과 유급휴일을 혼동하고 있었다. 설날, 어린이날, 추석, 크리스마스, 석가탄신일, … 달력에는 빨간날로 표시돼있지만 모두에게 빨간날 은 아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빨간날’ 은 엄밀히 말하면‘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규정’ 에 명시된‘공무원 이 쉬는 날’ 이다. 이렇듯 유급휴일이 아니지만 달력에는 빨간날로 표시된 날은 설과 추석 같은 명절과 현 충일 등의 국경일을 포함해 16일이다.

120일 vs 53일 주5일제가 시행되고 토요일도 사실상의 휴일이 되면서 공무원의 연간 휴일은 120일로 늘어났다. 하지 만 공무원이 아닌 노동자에게 적용되는 연간 법정휴일은 일요일과 노동절을 포함해 총 53일에 불과하다. “저는 공무원이 아니지만 빨간날에 쉬는데요?”웬만한 규모의 기업에 다니는 노동자들은 빨간날에 쉴 수 있다. 이는 노사 간에 체결한 단체협약에서 공휴일을 유급휴일로 보장받는 경우다. 명절처럼 소비지출 지금+여기 노동당 7


이 많은 명절에는 적지 않은 액수의 상여금이 지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불안정 노동자들에게 이 모든 것 은 그림의 떡이다.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10.1퍼센트.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서비스 직 노동자들은 사용자가 별도로 공휴일을 보장해주지 않는 한 빨간날에도 출근해야 한다. 설이나 추석에 도“정상 영업”현수막을 내걸고 홍보하는 대형 마트에서 볼 수 있듯 명절에도 쉴 수 없다. 연차로 대체하 는‘꼼수’ 도 비일비재하다. 빨간날이 유급휴일이 되면 일하지 않고 쉬더라도 기본임금을 받게 돼 임금 하락이 없다.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빨간날 일을 해야 하는 경우엔 기존 임금에 특근수당을 추가로 받게 돼 1.5배의 임금 상승 효 과를 가져오게 된다.

열심히 일한 그대, 같이 쉬자 빨간날 ‘유급휴일’ 은 말 그대로 일하지 않아도 노동수당을 받고 쉬는 날이다. 일하지 않는데도 수당이 나온 다? 열심히 일하고 충분히 쉬는 것이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여가를 확 보하기 위해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싸워 쟁취한 권리이지만,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의 악명을 떨치는 한국 에서는 이마저도 아직 낯설다. “다른 선전전에 비해 냉담한 반응이 많았어요. 일용직 노동자들의 경우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자영업자들은 최저임금인상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비용지출을 우려해 반대하고요. 빨간날은 ‘남의 일’ 이라고 아예 체념하는 경우도 있어요. 노동법에 대해 잘 몰라서 막연하게‘쉬는 날이겠지’여기 는 사람들도 상당수입니다.” 강원도당 박성기 사무국장은‘근면성실’ 을 강조하는 한국문화에서 제대로 쉬고 놀자는 주장에 쉬이 동 의하기 어렵지 않겠냐며, 그나마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계층은 젊은 여성들이었다고도 덧붙였다. 공휴일을 유급휴일로 보장하라는 요구가 나올 때마다 재계는“OECD 국가 중에 빨간날을 유급휴일로 지정한 나라는 거의 없다” 며 펄펄 뛴다. 거짓말이다. 많은 나라들이 공휴일을 유급휴일로 지정하거나 아 니면 유급휴가 자체가 충분히 길기 때문에 유급휴일을 따로 더 늘릴 이유가 없다. 재계가 툭 하면 들고 나 오는‘OECD 평균’ 에 견주었을 때 한국은‘너무 많이 일하고 너무 적게 쉬는’후진국에 해당된다. 빨간날 유급휴일화는 원론적 차원에서만 논의되어 왔던‘노동시간 단축’ 이라는 의제를 구체화하는 첫걸음이다. 노동당은‘빨간날’캠페인과 더불어, 장시간 초과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휴일 사용 실 태를 조사해 발표할 예정이다. 또한 명절 연휴에도 쉬지 못하는 대표적 사업장인 대형마트 앞에서 공휴일 마다 집중 행동을 진행한다. 관련 법개정을 요구하는 입법청 원을 위한 온라인 서명운동도 시작됐다. 당원과 시민 여러분 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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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날 유급휴일화 온라인 서명운동 : http://redday.laborparty.kr/


지금+여기 노동당

같이 쉬자, 빨간날

‘빨간날’캠페인부터 임금명세서 교부 입법청원까지 울산 동구 이영도 당원, 황보곤 구의원을 만나다 <미래에서 온 편지>

2011년 7월, 노동당(당시 진보신당) 비정규노동 위원회와 울산동구당원협의회에서 공동으로 진행 한 한 편의 연구보고서가 나왔다. 울산 동구 지역 의 조선업체 3개 회사에서 일하는 사내하청 노동 자들 500여 명을 대상으로 이뤄진 노동조건 실태 조사다. 이 보고서를 통해 미조직 사내하청 노동 자들의 근로계약부터 임금과 노동시간, 휴일/휴가 이용 현황까지 구체적인 데이터가 확보되었다. 그 리고 이를 바탕으로 이영도 당원과 울산동구의회 황보곤 구의원은 노동당에‘빨간날’캠페인을 제 안하고, 지역 노동/시민단체들과 함께 임금명세서

빨간날 캠페인을 노동당에 처음 제안한 울산 동구 이영도 당원

교부의무화 입법청원을 추진 중이다. 이 보고서, 그리고 울산시당 당원들과의 만남을 빼놓고서는 노동당에서 현재 진행하고 있는‘빨간날’ 을 이야기하기 어렵다. 시내 모 백화점 앞에서‘같이 쉬자 빨간날’거리 캠페인이 한창 진행 중인 울산시 당을 찾아갔다.

민방위 교육장에서‘노동실태 조사’설문지를 돌리다 <울산동구지역 조선3사 사내하청노동자 주요 노동조건 실태조사 보고서>를 처음 펼치면서부터 호기 지금+여기 노동당 9


심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설문조사가 진행된 장소는 특이하게도 지역 민방위 교육장이었다. “애초 이 실태조사를 처음 기획했을 때에는 1:1 직접 면접 방식으로 진행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설문의 분량이 너무 많아서 리서치 업체에서도 고 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라고요. 시간도 생각보다 너 무 많이 잡아먹고, 설문에 응하는 노동자들을 만 나기도 쉽지가 않았어요. 노조 사무실이 있는 것 도 아니고, 미조직화된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한꺼 번에 만나서 장시간 설문을 진행할 수 있는 곳이 울산 동구의회 황보곤 의원

어디일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릎을 탁 쳤죠. 사 내하청 노동자들은 구청 강당에 모여서 지역민방

위 교육을 받아요.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은 대부분 직장민방위에서 교육을 받지만 군소 하청업체 노동 자들은‘직장민방위’ 조차 없거든요. 그리고 민방위교육은 네 시간동안 진행되니까 시간도 충분할 거 아니 에요? 그래서 설문 응답률도 높았죠.” 비록 응답자 대부분이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남성 노동자라는 한계는 있지만, 노조도 없는 미조 직 노동자들을 한꺼번에 만날 흔치 않은 기회를 잡은 셈이다. 그런데 궁금증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민 방위 교육은 대개 군 장교 출신 등 보수 인사들의 반공교육을 강제로 들으며 하품 깨물다 오는 곳이 아닌 가. 그곳에서 '노동실태 설문조사'가 가당키나 할까? 이영도 당원이 이어 대답했다. “제가 그 당시에 지역민방위 교육 강사로 있었거든요. 교육 주제는 강사가 누구냐에 따라 그때그때 달 라요. 보수 인사가 오면 반공교육 하는 거고, 건강 문제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저는 주로 세계 노동절, 산 업재해 문제, 등등 노동 의제를 얘기하죠. 사실

설문조사를 마친 사내하청 노동자들에게 당에서 만든 '비정규직 권리수첩도 배포 했다. 원외정당에서 기초의원의 존재가 새삼 귀하고 고맙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노동실태’설문조사 하려고 할 때 실무공무원들 이 반대를 많이 했어요. 그래도 동구에 황보곤 의 원도 있고 해서 밀어붙일 수 있었죠.” 당시 설문조사는 황보곤 의원의 이름으로 진행 되었고, 설문조사를 마치고 나가는 사내하청 노동 자들에게 당에서 만든‘비정규직 권리수첩’ 도배

포했다고 한다. 원외정당에서 기초의원의 존재가 새삼 귀하고 고맙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조선 노동자들 중 절반 이상이 사내하청… 정규직과의 차별도 심각해 울산은 노동자 밀집 지역이고 노동조합 조직률이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다. 87년 노동자대투쟁 10


이후 울산의 조직노동자들은 노조의 교섭력에 힘입어 임금 등 주요 노동조건과 자녀 교육비 등 노동복지 를 상당한 수준으로 개선해왔다. 그들의 주요 노동조건은 노동법이 아니라 단체협약 즉 노조의 교섭/투쟁 력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수직적 노사관계 하에서 개별적 거래로 결정된다. 즉 산업 경 기와 같은 시장질서에 따라 불안정하거니와, 근로기준법 등의 법률에서 정해주는 최저 노동조건이 거의 유일한 보호막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황보곤 의원이 이 연구조사를 시작한 취지를 설명했다. “울산 동구의 노동자들 중 절대다수가 조선소 노동자들이예요. 그중 절반 이상이 사내하청이고요. 사 내하청 노동자들의 비중이 워낙 커진데다 정규직과의 차별이 갈수록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으니, 정확한 진단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죠.” 예상은 했지만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취업 시 업체 측으로부터 임금 및 노동조건에 대해 설명을 들었느냐는 질문에 열 명 중 여섯 명 이상이 임금에 대해서만 듣거나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답했다. 심지 어 근로계약서를 교부받았다고 응답한 사람은 23.9%에 그쳤다. 공직선거일이 유급휴일로 적용되지 않는 다고 답한 노동자는 67.9%에 달했다. 임금명세표는 대부분 받기는 하지만 임금과 근로시간 산정방식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고 답한 사람은 21.4%에 그쳤다. 소속업체가 취업규칙을 노동자들이 볼 수 있는 장 소에 게시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지만 취업규칙이란 것을 보았다고 말한 사람도 네 명 중 한 명 밖에 되 지 않는다. “미조직된 계약직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은 개별 사업장의‘취업규칙’ 에 따라 다 정해져요. 그‘취업규

울산시당 사무실에서 대담이 진행되고 있다. 왼쪽부터 황보곤 의원, 이영도 당원, 울산시당 권진회 위원장

지금+여기 노동당 11


칙’ 이 제대로 게시되어있지 않으면 사업주들이 제대로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알 도리가 없는 거예요. 고 용노동부 울산지청에 사내하청 업체 취업규칙을 공개하라고 정보공개청구를 신청했는데 이해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하더라고요. 그래서 중앙행정심판위에 행정심판 청구를 내서 재결을 받았어요. 전 국적으로 최초의 싸움이었어요. 중공업 사

울산 사내하청 업체들의 취업규칙을 공개하 라고 정보공개청구에 행정심판까지... 전국 최초의 싸움이었다. 이를 통해 사내하청 노동 자들의 열악한 실태가 명백히 드러났다.

내하청 업체가 200여곳 있는데, 현대중공 업 사내하청업체 73곳의 취업규칙을 받아 내서 다 분석을 했어요. 이 작업을 하고 나 니까 토요일이 유급인지 무급인지 정리가 쫙 되더라고요. 앞서 진행했던 설문조사에 이어서, 사내하청 노동자들 실태가 객관적

으로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거예요. 대다수가 자신의 근로계약 내용도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서 일하고 있 었고요. 토요일은커녕, 법정 공휴일도 무급, 명절도 무급인 데가 부지기수예요.” 사내하청은 그나마도 양반이다. 취업규칙을 붙여놓을‘자기 사업장’자체가 없는 파견노동자들에게는 ‘노동자들이 볼 수 있는 장소에 게시하라’ 는 법규 자체가 쓸모없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갈수록 악랄하고 영악해진다.

상세 임금명세서만 교부돼도 엉터리 임금계산 막을 수 있다 최근 황보곤 구의원과 이영도 당원은 지역 시민/노동단체들과 함께 공동으로‘임금명세서 교부의무화 입법청원’ 을 추진하고 있다. “실태조사에서 근로시간과 임금 산정방식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고 답변한 노동자가 다섯 명 중에 한 명 꼴이었어요. 우리가 사내하청 노동자들한테 직접 받아서 확보한 급여명세서들도 꼼꼼히 뜯어보면 노동시간이 적혀 있지 않거나, 통상임금으로 지급해야 할 각종 수당을 전부 기본급으로 계산해서 지급해 요. 시간외 근로수당을 착복하는 거예요. 노동자들이 매월 자기한테 지급되는 임금이 제대로, 법대로 계 산된 건지 알아야 돼요. 힘겹게 일한 대가로 받는 건데, 많이 받지는 못하더라도 정확히는 받아야죠.” 2011년 사내하청 노동 실태조사 이후로 울산에서 끈질기게 이어져온 이러한 노력들이 올해 비로소 결 실을 맺었다. 언론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여러 단체들과 연대하여 이번 정기국회에 입법청원서를 전 달하는 동시에 근로기준법 개정안도 공동발의됐다. 오랜 시간 열정적으로 노동의제에 천착하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모색해온 활동가들의 저력을 새삼 다시 확인하게 되는 곳, 바로 노동당 울산시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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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1

대한민국 교과서 다시 읽기 역사 교과서에 역사가 없다?‘교과서 파동’ 의 주역,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얘깁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사회 교과서에 는 노동이 없습니다. 노동 교육의 차이는 곧 노동 환경의 차이가 됩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가 대한민국 교과서를 집중해부합니다. 자, 14쪽을 폅니다.


특집 1 / 대한민국 교과서 다시 읽기

뜨거운 감자, 국정교과서 극우사관으로 점철된 한국사 교과서는 반드시 막아야 한다. 전교조도 꼭 지켜야 한다. 하지만 이 모두는 단지 출발점일 뿐이다. 역사와 사회 전반을 시민권, 노 동권, 여성권, 다양한 소수자의 권리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정규 교육 과 정에 뿌리내리게 만드는 것은 노동운동과 진보 세력 모두의 근본 과제이며, 일 상적으로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일이다.

장석준 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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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로 인해 교과서가 정치 쟁점이 되었다. 그간 역사 교과서 논란이라고 하면 그저 일본만의 특수한 현상쯤으로 여겼는데, 뉴라이트 덕분에 한국 사회에서도 어느덧 교과서 논란이 첨예한 정치적 대립선 중 하나가 됐다. 이것은 분명 중요한 쟁점이다. 우리는 극우사관이 한국사 수업에 침투하 는 것을 막아야 한다. 단순히 정치인들의 입씨름 거리로 맡겨둘 게 아니라 우리 모두 감시인이 되어 이 싸 움에 나서야 한다. 그런데 따져야 할 게 이것만은 아닌 것 같다. 한국사 교과서가 쟁점이 된 김에 우리가 깊이 파고들어야 할 문제가 더 있다. 크게 두 가지다.

정답 제시하고 암기시키는 교과서는 이제 그만 첫째, 교과서 중심의 교육관이다. 뉴라이트는 자신들의 엉성한 역사관을 교과서에 반영하면 그게 자라 나는 세대에게‘주입’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사 교과서를 급조해 보급하는 데 저렇게 기를 쓰고 달려든다. 그런데 이에 맞서는 진영도 기본 시각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역시 교과서 내용이 미래 세 대에게‘주입’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어떤 내용을‘주입’ 할 지를 놓고 다투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인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미래 세대에게 다른 내용이‘주입’ 되고 그래서 그들의 가치관이 정 권에 따라 바뀌게 된다니 말이다. 이 상황에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미래 세대에게 다른

우리의 답은“그러니까 우리가 빨리 정권을 잡

내용이‘주입’ 되고 그래서 그들의 가치관

아야 한다” 가 되어선 안 된다. 교육을 바라보는 이런 지배적 시각 자체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참에 올바른 교육의 방법 자체를 다시 생

이 정권에 따라 바뀌게 된다니, 이게 얼마 나 무서운 이야기인가!

각해봐야겠다. 국정 혹은 검인정 교과서가 정 말 필요하냐는 물음을 던져봐야 하고, 또한 교과서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도 따져봐야 한다. 한국 사 회는 지금 교과서가 어떤 관점을 정답으로 제시할지를 놓고 다투고 있다. 하지만 과연 교과서가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고 이것을 암기하라고 하는 게 옳은 것인가? 교과서의 몫은 오히려 학생들이 스스로 답을 찾아나가도록 그 방법을 안내하는 일 아닐까. 기존의 여러 시각들을 요약해서 펼쳐 보이고, 학생들 스스 로 생각을 다듬어갈 수 있도록 학습과 토론의 방법을 충고하며, 중요한 읽을거리들을 소개해주는 일 말이 다. 이 문제는 결국 우리 교육 전반의 목표와 지향, 체계를 새로 세우는 일과 직결된 것이기도 하다.

한국사만이 아니라 사회 교과에 주목해야 한다 둘째로 짚어야 할 것은 한국사 외의 교과다. 뉴라이트가 한국사를 주된 싸움터로 삼아서 역사 교과만 부각되지만, 과연 문제가 한국사뿐인가? 다른 교과들은 문제가 없는가? 특히 우리가 관심을 쏟아야 할 것 특집1 대한민국 교과서 다시 읽기 15


은 사회 교과다. 민주주의의 기본 교양, 노동권과 노사문제 인식, 환경 생태 문제의 환기, 여성 및 다양한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시각 등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지속 가능하기 위해 필요한 참으로 중요한 내용들 이 여기에 포괄된다. 그런데 과연 지금 한국의 학교들에서 이런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가? 입시에 밀려 주목도 받지 못하고 있고,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수업도 편향된 신자유주

중학교 시절부터 노동조합이 왜 필요한지 배우는

의적 경제관 투성이인 게 현실이다. 이

나라가 있는가 하면 노동조합을 적대시하는 시각

런 식으로,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에 길들여지며 자라는 나라가 있다. 이 차이는 고

벌써 30여 년이 다 돼 가는데도 노동조

스란히 두 나라 노동운동 여건의 차이가 된다.

합과 파업, 좌파 이념을 불온시하는 문 화가 여전히 세대를 이어 전수되고 있 는 것이다.

외국은 그럼 어떨까? 다른 나라도 자본주의 사회인 한, 사회 교과 내용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분명 한국과는 다른 데가 있다. 프랑스에서는 중고등학교 과정에‘시민교육’ 이 있어서 기본 적인 인권, 시민권, 노동권 등을 학습한다. 여기에서는 노동조합의 단결권, 단체행동권, 단체교섭권을 시 민권의 필수적인 일부로 다룬다. 노동조합, 정당, 사회단체 가입을 장려하며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이들 조직의 활발한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중학교 시절부터 이런 내용을 접하며 성장하는 프랑스 학생들이 있다. 이와 달리 언론 매체 등을 통해 노동조합을 적대시하는 시각에 길들여지는 한국 학생들이 있다. 당연히 사회에 진출하고 나서 노동운동

역사 교과서 중 광주 5.18 설명한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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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바라보는 둘의 시각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이 고스란히 프랑스와 한국 의 노동운동 여건 차이로 나타나게 된다. 파업 이 닥치면 그때 가서 시민사회 여론을 좋게 해 보려는 식으로 접근해서 될 일이 아니다. 프랑스만이 아니다. 독일에서도 인문계와 실업계를 가리지 않고 노동 교육을 실시한다. 독일 노동 교육은 노사관계를 기본적으로 민주 주의와 공동 결정의 문제로 다룬다. 이게 중요 하다. 한국에서‘노사관계’ 라고 하면‘밥그릇 싸움’ 부터 떠올린다. 반면 독일에서는 학교에 서부터 이를‘민주주의’ 의 문제로 바라보도록 인도한다. 심지어는 유럽에서 신자유주의가 가 장 번성한 영국조차 한국 하고는 많이 다르다. 영국사 수업에서는 노동조합운동이 영국 사회

『프랑스 경제사회 통합 교과서』 , 휴머니스트, 2010

의 발전에 기여한 바를 강조하며, 지리 교과서 에서는 마거릿 대처 정부의 산업 구조조정 정 책이 탄광촌에 끼친 부정적 결과를 가감 없이

프랑스의 교과서는 마치 콜라주처럼 신문

다룬다.

기사, 학술서, 법률, 사진 등의 다양한 자료

교과서는 질문을 던지고 학생은 스스로 조사하고 토론해

들을 오려 모아놓고 학생들 스스로 이 자료 들을 바탕으로 생각을 전개하고 정리하게 한다.

유럽에서는 이렇게 한국에 비해 정규 교육 과정에서 시민권과 노동권 교육이 충실히 이뤄 진다. 그런데 내용만이 아니라 학습 방식도 크게 다르다. 프랑스의 교과서는 한국 교과서와는 달리 어떤 사안에 대해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하나의 정답으로 마무리하지 않는다. 마치 콜라주처럼 신문기 사, 학술서, 법률, 사진 등의 다양한 자료들을 오려 모아놓고 학생들 스스로 이 자료들을 바탕으로 생각을 전개하고 정리하게 한다. 교과서 본문은 단지 중요한 질문들을 던져서 학생들의 사고를 자극하는 역할에 만족한다. 따라서 주입식 교육을 하려야 할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토론 학습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말로 번역된 프랑스 사회 교과서로는『프랑스 경제사회 통합 교과서』 , [휴머니스트, 2010]가 있다.) 이런 식이다. 교과서에 큼지막하게 파업 시위 사진이 실려 있다. 한국이라면 대개 언제 어느 때 이런 파 특집1 대한민국 교과서 다시 읽기 17


업이 있었다고 설명을 달면서 대체로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게 보통일 것이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사 진 속 노동자들은 왜 파업을 하는지 학생들 스스로 조사하고 토론하게 한다. 물론 파업이‘준법’ 의틀안 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결론을 유도하는 질문도 있다. 하지만 이런 파업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맥락을 토론하게 함으로써 단체행동을 민주주의의 정당한 절차 중 하나로 인식하게 만들기도 한다. 독일에서는 토론의 특수한 형태로 모의 역할극을 장려한다. 학생들이 노동자 측도 되어보고 사용자 편 도 되면서 노사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다지자는 것이다. 가령 교과서는 실제 사례에 기초한 노사 갈등 상황을 제시한다. 어느 기업이 매출 저하

독일에서는 학생들이 경영진, 노동조합, 직원 평의회로 나뉘어 모의 역할극을 해본다. 실제 노동법에 따라 단체교섭 형태로 토론도 한다. 그들에게 노동조합이 낯설게 느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로 구조조정을 실시하려 한다. 사용자는 동유럽 기업들에게 가격 경쟁에서 밀리 는 데서 원인을 찾는다. 반면 노동조합과 직원평의회(독일의 노사공동결정제에 따른 노동자 대의 기구)는 노동 조건 악화로 인

한 고충을 토로한다. 교과서는 노사 양쪽 의 판단 근거가 되는 산업 현실과 노동 현

장의 정보를 자세히 제시하고 좀 더 자세한 조사를 실시할 방법도 안내한다. 학생들은 경영진, 노동조합, 직원평의회 등으로 나뉘어 각자 자기 입장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논리를 가다듬는다. 그러고 나서 실 제 노동법 절차에 따라 단체교섭 형태로 서로 토론한다. 이런 모의 역할극을 경험한 학생들에게는 최소한 사회 진출 이후에 노동조합이 낯설게 느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 차례 논쟁만 하고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극우사관으로 점철된 한국사 교과서는 반드시 막아야 한다. 전교조도 꼭 지켜야 한다. 하지만 이 모두 는 단지 출발점일 뿐이다. 한 차례 논쟁하고 넘어가면 될 사안이 아니다. 좁은 의미의 교육운동만의 과제 도 아니다. 역사와 사회 전반을 시민권, 노동권, 여성권, 다양한 소수자의 권리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시각 이 정규 교육 과정에 뿌리내리게 만드는 것은 노동운동과 진보 세력 모두의 근본 과제이며, 일상적으로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일이다. 그 동안 진보 세력은 교육 개혁을 지나치게 재정(무상교육)이나 체계(국공립 대학 통합 네트워크) 차원 에서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재원과 체 계를 통해 이뤄질 학습의 내용과 방식이다. 그래서 <미래에서 온 편지>는 이번호 특집만이 아니라 앞으로 도 계속 이 문제를 주시하며 여러 사례와 제안들을 다뤄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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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기자회견 (사진 : 참세상)

특집 1 / 대한민국 교과서 다시 읽기

‘올드라이트’ 의 귀환? 교학사 역사 교과서에 숨은 박근혜의 딜레마 냉전이라는 전선이 세계적으로 형성된 시점은 1947년 이후다. 그러나 이 교과서는 냉 전 구도를 과거에까지 소급시켜 거의 20세기 전체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 결과 이 교과 서는 대한민국 역사상 아마도 레닌의 비중이 가장 높은 교과서가 되었다.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특집1 대한민국 교과서 다시 읽기 19


일인당 국민소득 목표가 1만 달러였다고? 흔히들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교학사판 한국사 교과서를‘뉴라이트’교과서라고 말한다. 언론에서 비 판적으로 보도하는 것을 보아도 대체로 그들의 입장을‘식민지근대화론’ 으로 보고‘친일 미화’ 라는 부분 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가? 2008년에 뉴라이트임을 분명히 했던 교과서포럼에서 간행한『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와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듯이, 교학사판 교과서에도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한 서술이 물론 포함되어 있지만, 그렇다 고 그것이 특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교과서포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한 서술이 포함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렇다면 교학사판 교과서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냉전’ 이다.

럼에서 만든 대안교과서는‘경제성장’ 을 중심축 으로 삼아 한국 근현대사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식민지근대화론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필연성이 있었다. 또한 교과 서포럼 자체가 줄곧 문제 삼았던 것이 민족주의 였기 때문에 친일 경향이 나타나는 것도 당연하

다. 이것은 그들의 핵심적인 이념이 신자유주의라는 데서 비롯된 필연적 현상이다. 그런데 교학사판 교과 서는 그렇지 않다. 근대사뿐만 아니라 현대사에서 경제 관련 서술들을 살펴보면 엉성한 대목이 한두 군데 가 아니다. 50년대와 60년대를 혼동하는 등 부정확한 서술들은‘애교’ 로 봐준다고 하더라도, 1973년에 중화학공 업 육성 계획을 발표했을 당시 1981년까지 달성하고자 내걸었던 목표인‘일인당 국민 소득 천 달러’ 를“국 민 소득 1만 달러” 로 서술한 것을 보면(332쪽), 필자들이 경제개발 부분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음 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점은 교과서포럼의 한 축이었던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경제사학자 들의 도움도 받지 못했음을 짐작케 한다. 여기에는 틀림없이 어떤 변화가 있다. 그렇다면 교학사판 교과 서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냉전’ 이다.

20세기 전체를 냉전 구도로 설명하려는 황당한 시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실제로 냉전이라는 전선이 세계적으로 형성된 시점이 1947년 이후이기 때문에 냉전이라는 틀을 통해서 서술할 수 있는 것은 현대사 부분밖에 없다. 하지만 이 교과서는 그 구도를 과거 에까지 소급시켜 거의 20세기 전체를 그러한 구도로 설명하려고 한다. 즉, 20세기 전반의 민족해방운동 노선을 둘러싼 동향은 윌슨의‘민족자결주의’ 와 레닌의‘반제국주의’ 라는 두 노선의 대립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그 결과 이 교과서는 대한민국 역사상 아마도 레닌의 비중이 가장 높은 교과서가 되었다. 공산주의에 대해서도“공산주의는 노동계급의 독재를 위해서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제국주 20


의의 지배를 물리쳐야 한다는 생각에 기초한 정치사상” 이라고 서술하고 있다(300쪽). 공산주의는‘반자본 주의’사상이 아니라‘반제국주의’사상으로 설명됨으로써 국내의 계급모순이 아니라 소련의‘대외정책’ 에서 비롯된 것으로 묘사된다. 결국 공산주의는‘외부세력’ 을 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외부세력’ 에 대항하는 내부란 민족이 아니라‘진영’ 이다. 현대사 부분의 첫 페이지부터 냉전이“자유 민주주의 체제와 공산주의 체제 사이의 경쟁” 으로 설명되 고 대한민국이“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일원” 이라고 서술되듯이, 냉전은 다양한 국가들의 동맹관계와 같 은 것이 아니라 균질적인 내부성을 지닌 두 개의‘체제’ 로 묘사된다. 여기에는 민족주의가 개입할 여지도, 제3의 체제를 지향할 여지도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교과서가 제헌헌법에 대해 허위서술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발생한다.

“역사를 덮어라”구태의연한 냉전 사관의 귀환 1948년 7월에 제정된 대한민국헌법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더불어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를 골간으로 한 것이었다. 당시 헌법의 기초자인 유진오는‘균등사회 수립’ 을 목표로 한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야말 로 대한민국헌법의 특징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한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제헌헌법에는 경제에 관 한 조항을 따로 두고‘각인(各人)의 경제상 자유’ 가 사회정의의 실현과 국민경제의 균형 발전이라는 틀 속 에서 보장된다고 기술한다. 또한 중요한 지하자원의 국유화,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도, 가스 등 공공성을 지닌 기업의 국 영화 또는 공영화 등을 규정했다. 유진오는 이 경제조항을 두고“우리나라는 경제문제에 있어서 개인주의 적 자본주의국가의 체제를 폐기하고 사회주의적 균등의 원리를 채택하기는 하였으나 일면 개인주의적 자 본주의의 장점인 각인의 자유와 평등 및 창의의 가 치를 존중하여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사회적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라는 일견 대립되는 두 주의가 한층 높은

이념으로 건국된 나라여야 하고, 이념

단계에서 조화되고 융합되는 새로운 국가형태를 실현함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 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유진오,『헌법해의』 , 명세당, 1949, 177쪽). 그 실현가능성 여부는 일단 차치하고 여기서 볼

갈등이 존재해서는 안된다. 이들의 주 된 목표는 새로운 역사상을 제시한다 기보다는 역사를 덮어버리는 데 있다.

수 있는 것은‘자유민주주의’ 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념이다. 실제로 제헌헌법에는‘자유민주주의’ 와 같은 낱말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데도(참고로 현행 헌법 전문에 있는‘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라는 표현은 1972년‘유신헌법’ 이 제정될 때 최초로 등장했 다), 교학사판 교과서에서는“7월 17일 제정된 제헌 헌법은 정치, 경제, 사회에 있어서 자유 민주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하였다” 라고 너무나 뻔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307쪽). 특집1 대한민국 교과서 다시 읽기 21


또한“6·25 전쟁을 통하여 대한민국에서는 더 이상 체제 이념을 놓고 다투는 일이 없게 되었다” (321 쪽)라는 비현실적인 서술이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솔직하게 말해주고 있듯이, 이들의 주된 목표는

새로운 역사상을 제시한다기보다는 역사를 덮어버리는 데 있다. 한국사회의 문제를 지적하고 정부를 비 판하는 이들을‘반대세’ , 즉‘반 대한민국 세력’ 이라는‘외부적인 존재’ 로 몰아가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이념으로 건국된 나라여야 하며 내부에 이념갈등이 존재해서도 안된다. 이와 같은 당위를 실현하기 위해서 구태의연한 냉전사관을 동원한 셈이다. 그들이 가진 역사관은‘올드라이트 (old right)’ 라고 불려야 마땅하다.

민족주의를 안을 수도 내칠 수도 없고… 절충안이‘냉전’ 이었건만 여기서 우리는 이 교과서 문제를 현재의 정치적인 맥락 속에서 바라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같은 보수정권이라고 해도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이 다른 만큼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지형 역시 달라 지고 있다. MB와의 차별화가 필요한 현 정권 입장에서는 신자유주의를 핵심노선으로 민족주의를 부정하 는 식의 역사사술을 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미국과의 현실적 관계를 고려한다면, 민족주의를 강조하 기도 어렵다. 그래서 그 절충으로 나온 것이 냉전이라는 프레임이었던 셈인데, 여기에는 아버지의 뒤를 잇는 태생적인 딜레마가 있다.

민족주의를 부정할 수도, 강조하기도 어려 운 상황에서 절충으로 나온 것이‘냉전’ 이 라는 프레임이었던 셈인데, 여기에는 아버 지의 뒤를 잇는 태생적인 딜레마가 있다.

유신 선포 이래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서 박정희는 민족주의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 으며 그 결과 근현대사에 대한 사람들의 관 심이 높아지기도 했다. 유신 말기에『해방전 후사의 인식』 이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 며, 말하자면 독재자가 스스로 판 무덤 중의

하나였다. 국민을 통합하기 위해서 민족주의만한 것이 없다는 것은 세계적인 상식이지만 한국에서는 오 히려 그것이 정권을 위태롭게 만들지도 모른다. 이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뉴라이트 세력은 과감하게 민족 주의를 폐기하고 신자유주의로 대체하자고 주장했지만, 이미 양극화가 완전히 가시화되고 지칠 대로 지 친 한국사회에서 경제성장만을 지상가치로 내세우는 것으로는 국민통합은 불가능하다. 그럼 어떤 대안이 있을까? 일단 교학사판 한국사 교과서가 보여준 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대안이 없다 는 것이었다. 결국 박근혜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이 딜레마를 안고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딜레마를 가리기 위해 어떤 강압적인 수단이 동원될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그것으로 이 딜레마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교과서 문제는 이‘늙은 두더지’ 가 어디에 있는지 잘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도 있다. 앞으로도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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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1 / 대한민국 교과서 다시 읽기

교학사 역사 교과서의 핵심은 친일(親日)이 아니라 반공(反共) 교학사 교과서가 무서운 이유는 단지 이들이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기 때문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교학사 교과서에 흐르는 논리, 즉 체제 수호를 위해 민주주의 원칙이든 무엇이든 짓밟을 수 있다는 그 논리다.

조가림

특집1 대한민국 교과서 다시 읽기 23


교학사 교과서가 대한민국 역사 전쟁의 중심에 있다. 야권과 진보진영은 교학사 교과서가 친일과 독재 를 미화한‘뉴라이트 교과서’ 라고 말한다. 민주당 의원들과 진보 언론들은 교학사 교과서가 제대로 다루 지 않은 부분들을 찾아내‘역시 친일과 독재를 미화한 교과서’ 라고 비판한다. 반면 교학사 교과서를 지지 하는 보수 세력은 오히려 기존 교과서가 좌편향 됐다고 응수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교학사 교과서에서 발견해야 할 것은‘친일을 친일이라 말하지 못하고’ ‘독재에 관한 비판이 없는’부분 부분의 구절이 아니라, 교과서 전체에 흐르는 하나의 기조다. 그것은‘반공주의’ 와‘체 제수호’ 다. 교학사 교과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반공주의로 가득 차 있고, 대한민국의 역사가 반공주의에 맞서서 어떻게 승리해왔는지 서술하고 있다.

독재도 정당화하는 마법의 칼, 반공주의 대한민국 민중들에게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 정권은‘아픈 역사’ 다. 그렇지만 교학사 교과서 는 세간의 비판처럼 독재를‘정당화’ 하고, 독재 정권이 짓밟은 민중들의 희생을‘어쩔 수 없는 것’정도로 치부한다. 그 근거는 반공주의다. 이승만에 관해 서술한 부분을 보자.

이승만이 공산주의의 도전을 받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국회는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정부는 국군 내의 좌익세력을 정리하였다. 이러한 국군 정비가 6·25전쟁에 대처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공산주의 세력이 농민층에 침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농민들의 염원이었던 농지개혁을 실시하였다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다양한 형태의 탄압, 국가 보안법과 군대 내 빨갱이 척결 등은 공산주의의 도전 이라는 명분 앞에 정당화된다. 심지어 농지 개혁조차 공산주의 세력이 농민층에 침투하는 일을 막으려는 정책이었다. 교학사 교과서는 6·25 전쟁 중 이승만 정권이 민간인을 대량 학살한 보도 연맹 사건에 대해 서는 어떻게 설명할까?

남한에서도 민간인들에 대하여 살상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사례가 보도연맹 사건이다. 보도연맹은 좌익 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도하기 위하여 조직한 단체이다. 그러나 북한군이 남침하자 이들이 북한에 협조할지 모른다는 의구심 때문에 이들을 처형하였다. 대전 형무소에 감금되었던 보도연맹원 3,500여 명이 처형당하기도 하였다.

이 부분에서 이승만 정권의 책임은 눈 씻고 찾아도 없다. 오히려‘북한군에 협조할지도 모른다는 의구 심’ 이라는, 반공주의 정권의 논리를 그대로 전달한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교학사 교과서는 이승만 정권 시기 또 다른 민간인 학살, 제주 4·3 학살을 이렇게 설명한다. 24


4월 3일 남로당 주도로 총선거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켜 경찰서와 고용기관을 습격하였다. 이때 많은 경찰들도 우익인사들이 살해당하였다. 사건을 수습하는 괴정에서는 무고한 양민의 희생도 초래되었다.

4·3사건을 설명한 부분은 이게 전부다. 공산주의 세력이 폭동을 일으키고 많은 경찰과 우익인사들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이것을‘수습’ 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도 희생됐다는 식이다. 독재 정권이 빨갱이 색출이라는 명분으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 교과서만 읽으면 전혀 알 수가 없다. 박정희 정부에 관해 서술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교학사 교과서는 4·19 이후 국내 상황이 매우 혼란 스러웠고, 공산주의 세력의 도전을 받는 상황에서 국내 정치 세력들이 무능했으며 이것을 수습하려고 쿠 데타를 일으켰다고 서술한다. 교학사 교과서 저자들 머릿속에 뭐가 들었기에 독재를 이렇게 설명하는 걸 까? 교학사 교과서 대표 저자인 이명희 현대사학회 회장(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 박정희 정권을 미화하는 등 독재를 정당화했다는 비판도 있다.

▷ 우리 교과서가 추구하는 가치는 자유민주주의다. 자유민주주의를 기본가치로 전제하는 교과서가 독재 를 미화하고 정당화한다니 말이 안 된다.

▶ 박정희 정권에 관해 서술할 때 그 당시 상황 때문에 독재가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서술한 건 사실 아닌가.

▷ 역사서술을 하면서 그 당시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광복 이후 한반도에 자유민주주의 를 부정하는 세력이 있었다.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때 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래 서 반공이 국시였다.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박정희 정권이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수호 한 측면이 있다고 서술자가 평가한 것이다. 혹자들은 이러한 해석에 관해 독재를 미화한다고 평가한 1)

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은 자유민주주의 세력에 반하는 공산주의와 맞섰고, 대한민국을 수호했다는 주장 이다. 아무래도 교학사 교과서 저자들이 알고 있는‘민주주의’ 와 우리가 알고 있는‘민주주의’ 가 다른 뜻 인 것 같다.

목적은‘민주주의’ 가 아니라‘체제 수호’ 그렇다면 남로당도 없었고 공산주의 북한의 위협도 약하던 시절, 전두환 정권의 독재는 어떻게 설명할

1)「노무현 대한민국 부정발언 근거는? 이명희“잘 모르겠다” 」 , <미디어오늘> 2013년 10월 8일자 기사

특집1 대한민국 교과서 다시 읽기 25


까? 교학사 교과서가 5·18을 어떻게 서술하는지 살펴보자.

5월 18일 광주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의 시위가 일어났다. 하지만 진압군이 투입되면서 대규모 시위로 번지게 되었다. 충돌은 유혈화 되었고 시위대의 일부가 무장을 하고 도청을 점거하였다. 5월 27일 계엄 사령부는 계엄군을 광주에 진입시켜 광주를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교학사 교과서가 5·18에 관해 설명하는 부분은 이게 전부다. 5·18 때문에 어떤 피해가 있었고, 진압 군이 어떤 학살을 벌였는지에 관한 사진은 한 장도 없다. 시위가 일어나 진압군이 진압하다‘희생자가 많 이 발생했다’ 는 설명이 끝이다. 이명희 교수의 인터뷰 내용을 다시 한 번 참조하자.

▶ 지배층이 민주주의에 기여한 것이 무엇이 있나.

▷ 민주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산업화가 필요하고 중산층이 형성되어야 한다. 민주화된 국민들도 있어야 한다. 이는 그 시대를 주도해왔던 지배층이 한 일이다. 또한 지배층에서 주체적인 노력을 했다. 일부 교과서는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가 김대중 정부라고 말하는데,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는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넘어갈 때 이루어졌다. 세계의 독재 역사에서 드문 경우다. 민주화 운동에 대해 민중의 노력만 서술해서는 안 된다. 신군부나 지배 세력이 민중의 요구를 수용한 부 분이 있다. 독재를 하긴 했지만 근대민주주의의 가치 이런 것들을 배운 사람들이고 그것을 받아들 인 것이다.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내용의 문제를 보도한 SBS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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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대편에서는 독재를 옹호한다고 말할 것 같은데.

▷ 우리 세상이 자유롭지 못한 거다. 이 문제에 대해 너무 정서적으로 접근한다.

교학사 교과서가 주장하는‘자유민주주의’ 란 우리가 생각하는‘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진 다’ 는 의미의 민주주의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란 곧 대한민국이며,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의미는 대 한민국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이 사람들이 수호하고자 하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라는 체제다. 그래서 박정희나 이승만도 독재자지만 체제를 수호했으니 높게 평가받아야 하며, 이 과정에 서 자행된 희생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교과서 거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북한에서는 조선 노동당이 공산주의적 독재 체제로 지배했으므로 반대 세력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 나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특정 정당이 북한과 같은 독재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자 유 선거와 정권의 교체가 그러한 방식의 통치를 불가능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상식을 뒤집는 설명이다. 반대 세력을 용납하지 않은 건 대한민국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우리가 배운 독재의 역사는 다 무엇인가. 교학사 교과서는 이런 서술을 통해, 반공주의에 맞선 대한민국이 역사적으로 승리했다는 결론에 도달 한다. 책의 맨 끝 부분에는 남북한 체제 경쟁의 결과 한국이 무역 총액, 경제 성장과 총소득 등

교학사 교과서는 이런 서술을 통해, 반

에서 북한보다 훨씬 앞서고 있다고 말한다. 북한

공주의에 맞선 대한민국이 역사적으로

은 완전 망해 가는데 한국은 경제도 성장하고 잘

승리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살아남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생존을 위해, 체제 수호를 위해 약간의 희생이 있던 것뿐이다.

교학사 역사 교과서가 무서운 진짜 이유 교학사 교과서가 무서운 이유는 단지 이 사람들이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기 때문이 아니다. 친일과 독 재 미화가 나쁘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교학사 교과서에 흐르는 논리, 곧 체제 수호를 위해서라면 민주주의 원칙이든 무엇이든 짓밟을 수 있고 반공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대한민 국을 지키려면 누구든 탄압할 수 있다는 그 논리다. 이것이 우리가 교학사 교과서를 비판해야 하는 진짜 이유다.

특집1 대한민국 교과서 다시 읽기 27


특집 1 / 대한민국 교과서 다시 읽기

‘착한’ 시민의 탄생 사회과 교과서 아래에 숨은 이데올로기들 아이들은 부르주아적 규범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이런 규범 틀 안에서 자신의 요구와 권리를 행사하며, 자신의 실천을 통해 체제 의 논리를 재생산하도록 훈육된다.

남종석 부산 동래구 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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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목표 : 부르주아 사회체제에 순응적인 시민 되기 아이들은 부르주아적 규범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이런 규범 틀 안에서 자신의 요구와 권리를 행사하 며, 자신의 실천을 통해 체제의 논리를 재생산하도록 훈육된다. 제 7차 교육 과정의 중등 교육에서 사회과는 역사와 지리를 제외하고도 <사회 문화>, <법과 정치>, <경 제>를 포함한다. 보통 사회과라고 하면 이 세 과목을 일컫는다. 9차 교육 과정의 사회과 과목의 목표는 “민주 시민사회의 시민으로서 가치와 태도를 함양하고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합리적 대안” 을 탐색하며, 경제적, 정치적 과정에서“합리적 의사결정 능력” 을 함양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사회과 교과서의 목표 는 민주 시민 사회의“합리적 주체” 를 형성하는 것이다. 민주적 시민 사회란 부르주아 사회체제를 말하며 이것은 정치, 경제, 시민 사회의 3원 구조를 지닌다. 경제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정치란 의회민주주의 체제를, 사회 문화란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들(대학, 종교, 문화 산업, 시민 사회 단체 등)의 영역을 일컫는다. 여기서 주체 형성이란 개인들을 부르주 아적 시민으로 호명하는 것을 말한다. 아이들은 부르주아적 규범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이런 규범 틀 안 에서 자신의 요구와 권리를 행사하며, 자신의 실천을 통해 체제의 논리를 재생산하도록 훈육된다. 주류 문화를 학습하고(사회화), 법을 지키며(법적 권리의 주체), 합리적 선택으로 효용을 극대화 하고(경제적 인간), 민주적 권리를 행사하는 존재(정치적 주체)가 된다는 말이다.

교과서 속에만 존재하는‘관리 가능한 사회’ <사회 문화> 교과서 내용에 토대를 이루는 이론은 구조 기능주의다. 구조 기능주의는 전후 미국 사회 를 배경으로 사회 제도의 안정적인 상호 의존을 이론화해서 20세기 미국의 현대성을 옹호한다. 사회 체계 란“개인들의 상호 의존에 의해 개인에게 강제되는 행위의 사회적 체계” 로 규정된다. 하나의 사회 체계는 하위 체계로 구성돼 있고, 각 체계들은 각각의 기능을 담당하면서 동시에 상호 보완적 기능을 통해 사회 체계를 안정적으로 재생산한다. 개인들은 각 체계에 할당된 자리에 있으며, 그 위치에서 요구되는 역할을 담당해 체계의 담지자가 된다. 핵가족은 사회 성원의 초기 사회화를 담당하고, 학교는 성취 지위를 획득하는 수단이 되며, 경제는 필 요를 생산하고, 정치는 공동체를 관리한다. 각 하위 체계들은 투입과 산출의 기능을 한다. 가정에서 배출 된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학교에서 배출된 학생은 기업으로 가고, 기업에 고용된 직장인은 가정을 꾸린 다는 식이다. 이런 체계를 통해 사회는 전체적으로 안정을 찾는다. 더불어 각 체계는 점진적으로 분화하 면서 현대화 되고, 고도화 된다. 이것이 구조 기능주의에서 정당화 하는 현대화이자 발전의 모델이다. 구조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으면 갈등도 발생하고 불평등도 확대될 수 있다. 노동자 운동, 사회 운동이

특집1 대한민국 교과서 다시 읽기 29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더라도 이 운동이 나타나는 원인을 치유해서 갈등은 조정될 수 있다는 것이 사회학 교과서의 기본적 틀이다. 불평등 역시 사회적으로 조정되기 때문에 체제는 안정적으로 재생산 될 수 있 다. 갈등은 구조의 문제를 드러내지만 체제

사회 교과서의 이론적 토대인 구조기능주의 는 계급관계의 적대성을 사고하지 못하며, 갈등의 근본적 원인을 사고하지 않는다. 갈 등을 관리할 수 있다는 논리도 허구적이다.

는 문제를 치유해서 더 안정된 구조를 형성 할 수 있다. 갈등이 단지 부정적인 것만이 아니라 생산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는 것이 갈등 기능론이다. 그러나 구조 기능주의는 궁극적으로 “지배적 규범의 내면화와 사회의 기능적

통합성” 에만 주목하고 있으며, 사회 체제의 부당한 현실을 정당화하는 체제 이데올로기라는 비판을 벗어 나지 못한다. 이 체계에서는 계급 관계의 적대성을 사고하지 못하며, 갈등의 근본적 원인을 사고하지 않 는다. 갈등을 관리할 수 있다는 논리도 허구적이다. 미국 체제의 위기에 직면한 현실에 관해서 구조 기능 주의와 갈등 기능론은 아무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구조 기능주의는 핵가족 안에서 성별분 리를 옹호한다. 남성은 임금 노동을 여성은 가사 노동을 담당하도록 성역할을 규정한다. 구조 기능주의는 성별 역할 분리를 옹호하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현대적 판본이다.

그‘경제’ 는 누가 말하는‘경제’ 인가 <경제> 교과서에서 호명되는 개인 주체는‘효용 극대화’ 를 추구하는 공리주의적 인간이다. 모든 개별 시민들은 효용 극대화의 원리에 따라 합리적 선택을 한다. 합리적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는 기회비용 을 따지는 것이다. 자신의 경제적 선택이 희생시키는 다른 선택보다 더 나은 선택을 했을 때 개인들은 합 리적 선택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개인들이 이렇게 합리적 선택을 하면 자원은 효율적으로 배분되고, 시장은 균형 상태에 도달한다. <경제> 교과서는 시장 실패도 논한다. 시장 실패는 시장 자체가 균형에서 일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 별적인 행위자가 효용극대화를 추구하는 합리적 선택을 하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비합리적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이것을 구성의 오류라고 한다. 개인의 노력하고 상관없이 경제적 보상이 주어지는 상황도 있다. 이것을 외부성이라 한다. 독점 때문에 완전 경쟁 시장이 왜곡될 수 있다. 정부는 경제에 개입해서 시장 실 패를 조정하고 시장의 자기 완결성을 높인다. 그러므로 경제 교과서가 시장 만능주의에 물들었다는 비판 은 정확하지 않다. 이것뿐만 아니라 경제학 교과서는 시장의 효율성이 곧바로 시장 체제의 형평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 주장한다. 파레토 효율성은 형평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장 체제에서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되더라 도 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할 수 있다. 경제학은 정부가 조세를 통해 부를 재조정해서 사회 전체의 효용을 30


극대화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경제> 교과서 또한 이러한 주장을 고스란히 답습한다. 정부가 부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면 사회 전체의 효용을 극대화 할 수 있다 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조세 정책에서 누진세로 나타난다. 여기에 케인즈 경제학이 더하는 것은 실업의 해결이다. 케인즈는 경제가 균형 상태에 도달해도 실업이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럴 때 케인즈는 정부가 재정 정책, 통화 정책을 통해 유효 수요를 늘려 실업 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경제> 교과서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거시경제학의 핵심 가운데 하 나다. 더불어 케인즈 경제학은 노동조합 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 사람들의 실질

새(new)케인즈주의는 저임금과 불안정 고용

임금 향상을 전제로 계급 타협을 시도한

으로 실업을 낮춰 노동자들의‘최소한의 생존

다. 케인즈의 적자라고 주장하는 포스트 케인즈주의자들의 임금 주도 성장론도 이런 케인즈의 관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권’ 만 보장하는 고용정책이다. 한국의 <경제> 교과서 또한 이 흐름을 잘 따르고 있다.

물론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고전적 케 인즈주의는 쇠퇴한다. 새(new)케인즈주의는 노동조합을 상대화하고 노동자들의 비정규직화를 지향한다. 불안정 고용을 확대하면 노동자들의 협상력이 약화되고, 이런 협상력의 약화는 임금 저하로 귀결된다. 새 케인즈주의의 핵심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춰 고용을 확대하는 정책이다. 비정규직을 확대해(이것이 노 동 유연성이다)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을 삭감해서 자본의 이윤율을 회복하고 동시에 고용을 확대해 노동 자들의 실업률을 낮추는 것이다. 고전적 케인즈주의가 호황기의 경제 정책이라면 새케인즈주의는 불황기의 정책이다. 새케인즈주의는 노동의 희생 아래에서 자본의 위기를 극복하되 저임금과 불안정 고용으로 실업을 낮춰 노동자들의‘최소 한의 생존권만’보장하는 고용 정책이다. 이것이 오늘날 유럽 사민당과 미국 민주당이 실행하고 있는 중 도 좌파의 모습이다. 한국의 사회과 교육에서 가르치는 경제 교과서 또한 이런 흐름을 잘 따르고 있다.

‘권리’ 를 빼앗겼을 때 어떻게 되찾아와야 하는지 가르치지 않아 <법과 정치> 교과서의 목표는 학생들로 하여금“민주주의의 근본 가치와 원리를 이해하고 법·정치적 쟁점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정치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 하는 민주 시민의 자세를 함양하는 데 있 다. <경제> 교과서나 <사회 문화>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법과 정치> 교과서에서 호명되는 주체 역시 현존하 는‘민주적 질서’ 를 수용하고‘법적 권리와 의무’ 를 실행하는‘순종적인 개인’ 이다. 이렇듯 모든 사회과 교 과서는 아이들로 하여금 우리 사회의 보편 규범을 내면화하도록 만들고 자발적 복종을 정당화하고 있다. 문제는 사회과 교과서들에서 생산하는‘권리의 주체’ 는 허구적 존재라는 점이다. <법과 정치> 교과서 는 민주주의를 정당화하고 인권을 옹호하지만 인권이 구조적 폭력과 제도적 억압 때문에 파괴되거나 훼 특집1 대한민국 교과서 다시 읽기 31


사회과 교과서에서 자유 무역 협정을 설명한 대목

손됐을 때 권리의 주체들이 이런 권리를 회복하는 방법은 전혀 논하지 않는다. 교과서에서 시민은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현존하는 질서에 그저 복종하는 존재일 뿐이다. 교과서의 시민은 권력한테서 호명된 소문 자의 주체다. 더군다나 모든 사회과 교과서는 노동자들을 투명한 존재로 다룬다. 사회 교과서는 노동 과 정을 전혀 다루지 않으며, 계급 갈등의 근본 원인에 관해서 침묵한다. 노동의 존엄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경제 교과서에서 표상되는 행위 주체는 개인이다.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들이 진정한 권리의 주 체가 된다는 사실을 이 교과서들은 다루지 않는다. 법과 질서도 그렇게 강조하면서 노동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이 무너졌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들이 진정한 권리의 주체가 된다는 사실을 다루지 않는다. 노동 의 존엄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교과 서 속에서 노동자들은‘투명인간’ 이다.

들의 권리를 보호해야 하는지는 전혀 다루 지 않는다. 사회 교과서가 진정으로 시민 사회 안에 서 권리의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 목적이라 면, 시민들을 단지 개인이 아니라 집합적 실 천의 주체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시민은 개

인이면서 동시에 노동자로서 계급적 존재이자 성별화된 권리의 주체로서 여성이거나 남성이다. 더불어 교과서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권리가 침해됐을 때 어떻게 자신의 권리를 찾을 수 있는가를 자세히 다뤄야 한다. 부당한 질서에 저항할 수 있는 주체야말로 진정한 권리의 주체이며, 이런 주체의 권리가 보장될 때 보편적 인권은 실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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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

마트 없이 충분하다

도시에서 마트를 안 가고 살 수 있을까요? 마트 이 외에 대안은 있나요? 마트에 들고나는 물건과 사람 이 보여주는 현대사회의 모순을 하나하나 짚고 그 대안을 모색합니다.


특집2 / 마트 없이 충분하다

알고 가면 빈손으로 나온다 마트 집중 탐방기

어두운 하늘에 마트의 상표가 환히 빛난다. 삼성물산이 만들었다가 영국유통업체에 판 회사, 이랜드가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한 그 회사를 인수한 회사, 지역 영세 상인들의 생존권 투쟁에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회사. 2007년 뜨겁게 투쟁했던 이랜드 노동자들, 대형유통업체에 상권 을 빼앗긴 영세상인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현대사회 에서 대형마트는 공급-유통-소비 구조의 모순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대기업 생태계를 탈출하기 위 해 집에서 음식을 해먹고, 전기

의 노동현장 문제까지 한눈에 보여주는 절단면 같은 공간이다. 자본주 의의 요지경, 마트를 한 바퀴 돌아보자.

를 아끼고 반환경적인 생활용 품을 쓰지 않고, 동네 빵집을

1층 라운지, 패스트푸드와 패스트패션이 손짓하지만

이용하는 개인적인 노력이 필 요하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턱

1층에 들어서니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딱히 갈 데도

없이 부족하다. 대기업에서 받

없고 큰 돈 쓸 여유도 없는 서민가족의 휴일 놀이터, 마트에서 그들은

은 월급을 다시 빼앗기지 않을

옷 구경을 하고 쇼핑을 하고 식사를 해결한다. 패스트푸드점에 앉아 저

우리들의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녁식사를 하고 있는 엄마와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저건 첨가물 덩어리야’주문을 외어 보아도 사실, 나도 때론 새우버거가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얼른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린다. 알록달록 다양한 색과 맛을 하루 한 가지씩 한 달 내내 즐겨보라고 유혹하는 아이스크림 가게. 저

이봉화 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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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창업주 버트 배스킨이 아이스크림 즐기다가 50대에 고혈압으로 사망했고 다른 창업주인 어브 라빈스도 당뇨와 고혈압으로 고생했다지.


그의 아들 존 라빈스는 채식운동가가 되어 아버지가 만든 아이스크림의 유해함을 알리고 있지만 아직은 역부족인지,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골라먹는 재미’ 를 맛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롯데리아-에인저리너스, 던킨도넛-배스킨라빈스, 이런 식으로 같은 계열사의 식 음료 매장이 나란히 입점하는 추세다. 식사에서 후식까지, 아이 입맛에서 어른 입맛까지, 동시 해결함으 로써 수익을 높이겠다는 입지 전략일 것이다. 중저가대의 의류매장. 경기 침체의 영향을 가장 빨리, 가장 심하게 받는 품목이라 그런지 쇼핑객의 수 를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지경이다. 패스트 패션의 시대, 빈국의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환경을 파괴하며 생 산한 이 많은 옷들이 철 지나면 아울렛으로 가고, 거기서도 안 팔리면 땡처리를 하고, 거기서 또 남으면 무 게를 달아서 수출을 한다. 의류든 식량이든, 팔다 남아 결국엔 몰래 버릴지언정, 구매력이 없는 빈곤계층 에게 공짜로 줄 것은 없다.

농수산물 매장 여기도 저기도“확! 내렸습니다” 마트의 꽃, 식품매장으로 향한다. 무빙워크를 따라 붙어있는 식료품 전단지가 호객행위를 한다.“꽃게 확! 내렸습니다. 100g 950원!”내리긴 뭘 내려. 우리 동네 재래시장 어물전에서는 요즘 꽃게가 풍어라 1kg에 5천원인데. 국내산 채소와 과일 가격도 몇 년 새 큰 폭으로 올랐다. 관행농법으로 재배한 것들임에 도 생협에서 사는 유기농산물 가격과 비슷할 정도다. 요즘은 채소나 과일을 연중 하우스에서 재배하고 종 자, 농자재 가격 상승 등으로 생산비도 증가하고 있지만, 서너 개의 독과점 대형유통업체들의 과다한 유 통마진이 가격 상승의 큰 몫을 차지한다. 사실, 대부분의 품목에서 재래시장 물 가가 대형마트보다 싸다는 점을 많은 사 람들이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한 번에 필요 한 생필품을 모두 구매할 수 있다는 편리 함 때문에, 혹은 휴일 여가시간을 보내는 수단이라서 대형마트를 포기하지 못한다. 젊은 세대들 중에는 물건 가격을 표시하 지 않는 재래시장에서 상인과 흥정해야 (대화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럽거나 두렵 다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과일, 견과류, 육류, 심지어 채소까지 수입산 투성이다. 한-칠레FTA 체결 후, 칠레산 포도가 판을 치더니, 이제는 그 자

여기저기 할인이라고 붙여놨지만 과다한 유통마진 때문에 대부분 재래 시장보다 물가가 더 비싸다.

특집2 마트 없이 충분하다 35


리를 미국산 포도가 차지하고 있고, 쇠고기, 돼지고기, 석류, 가자미까지 미국산이 눈에 띄게 늘었다. 역 시, 한-미FTA의 위엄! 라디치오(적양상추), 샐러리처럼 수분이 많이 함유된 채소가 미국에서 한국까지 생생한 채로 오려면 대체 무슨 짓을 해야 하는 거지? 미국, 중국, 베트남, 대만, 태국, 필리핀, 호주, 페루, 러시아, 노르웨이, 세네갈, 인도네시아, 마다가스카르, 멕시코, 독일, 폴란드, 오늘 이 마트에서 판매 중인 1차 농수축산물의 국적이다.

두부의 전쟁? 싸우지만 말고 원산지 표시도 좀 두부 전쟁은 요즘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2005년까지 국내 시장에서 80%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점유 율을 차지하고 있었던 풀무원은 CJ의 두부 시장 진출로 시장점유율 25%를 빼앗겼다. 그래서 대형마트마 다 두부 판매대에서는 진열부터 판촉까지 두 회사의 경쟁이 치열하다. 두부가 단순해 보이지만 제품군이 다양하다. 용도에 따라 찌개용과 부침용이 있고, 콩의 원산지와 사양에 따라 국내산, 유기농(주로 호주 산), 수입산이 있다. 여기서 국적을 밝히지 않고 있는‘수입산’ 이 문제인데 미국산 GMO 콩일 가능성이 높다. 저렴하다고 덥석 집어 들지 말고 원산지가 어디인

똑같은 사양과 비슷한 포장의 두 부가 조금 더 저렴한 가격표를 달 고 나란히 비치돼 있다. 대형마트 의 PB상품이다.

지 꼭 확인하시기 바란다. 현재 생협들과 농민단체들을 중심으로 GMO 반대와 GMO 완전표시제를 추진하고 있 다. 서명운동도 진행 중이다. 두부 판매대를 자세히 보면 또 재밌는 점이 있다. 풀 무원 제품과 CJ 제품 옆에 똑같은 사양과 비슷한 포장의 두부가 조금 더 저렴한 가격표를 달고 나란히 비치되어

있다. 대형마트의 PB상품(Private Brand Goods)이다. 유통파워를 무기로 납품업체의 인기제품과 똑같 은 사양으로 PB상품을 납품하도록 하는 것이다. 브랜드 파워가 막강한 몇몇 제품 외에는 이런 유통업체 의 횡포를 거절하기 어렵다. 요구를 거절하면 마트에서 자사 제품을 판매할 수 없기 때문에 납품업체들은 손해를 감수하고 PB상품을 만들어 납품한다. 1인 가구, 맞벌이부부가 늘어나면서 폭증하고 있는 품목이 즉석조리식품이다. 각종 국, 찌개, 볶음, 양 념은 물론이고 지역특산 요리도 데우기만 하면 먹을 수 있는 형태로 판매한다. 20여 년 전 불고기양념이 처음 나왔을 때‘저런 것까지 만들어서 팔다니!’ 했는데 요즘은 너무나 당연한 식문화로 자리 잡았다. 맛도 요리 못하는 사람이 직접 만든 것보다 훨씬 낫다. 그러나 원재료 사양을 살펴보면 여지없이 MSG(L-글루 타민산나트륨)가 들어있고 방부제, 유화제, 발색제, 착향료 등 유해한 합성첨가물이 듬뿍 들어있다. 물 대 용으로 마시는 차 음료에도 생각보다 훨씬 많은 첨가물이 들어간다. 이러한 첨가물들은 암이나 피부질환, 호흡기질환 등을 유발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나, 허용기준이나 표시제도가 엄격하지 않아 식품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36


의자는 생겼지만 사람이 하나 둘 사라지는 마트 계산대 제품 하나하나 딴지를 걸며 살펴보다 보니 2시간이 훌쩍 지났다. 계산대로 향 했다. 2007~8년 무렵에 민주노총과 진보 정당들은“여성노동자에게 의자를!” 이라 는 캠페인을 했다. 대형유통업체를 비롯 하여 서비스업에서 서서 일하는 여성노동 자들에게 의자를 제공하라는 내용이었는 데, 비교적 빨리 성과를 보았다. 대형유통 업체 계산대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에 게 의자가 제공되기 시작한 것이다. 계산 대에 앉아계시는 노동자들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다른 마트에서는 등받이 의자를 제공하던데 여긴 그렇지 않아 아쉽다. 소 비자 의견을 써야겠다. 계산대에 2년 전에는 없던 것이 생겼

차츰 늘어나는 무인 계산대. 마트 노동자들 숫자도 눈에 띄게 줄었다.

다. 무인 계산대. 이것 때문에 있던 것이 없어졌다. 유인 계산대 두 개가 사라졌다. 계산대 두 개가 사라짐으로써 두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 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1층 의류매장도 그렇고 마트의 노동자들 숫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 미국에서 스포 츠용품 전문 대형마트에 간 적이 있는데, 1,2층 통틀어 노동자는 계산대에 딱 1명뿐이어서 황당했던 기억 이 난다. 2층에서 옷을 고르고 사이즈를 찾으려고 해도 1층 계산대에 가서 문의해야 하는 번거로운 경험 을 했다. 한국에도 조만간 닥쳐올 미래일까?

한 달 열심히 일해서 번 노동자의 월급이 마트로, 외식업체로, 편의점으로, 영화관으로, 다시 대기업의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 대기업 계열 금융사의 신용카드나 포인트 카드를 매개로 대기업이 구축한 생 태계는 점점 거대하고 막강해지고 있다. 대기업 생태계를 탈출하기 위해 집에서 음식을 해먹고, 전기를 아끼고 반환경적인 생활용품을 쓰지 않고, 동네 빵집을 이용하는 개인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 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대기업에서 받은 월급을 다시 빼앗기지 않을 우리들의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것이 소비자협동조합이든, 마을기업이든, 꾸러미사업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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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 / 마트 없이 충분하다

농협, 너마저! 창원 가음정시장이 무너진다 경남도의회 여영국 도의원 인터뷰

창원은 한국의 대표적인 계획도시다. 이곳 창원에도 홈플러스, 이마 트, 롯데마트 두 개 지점이 들어선데다 곳곳에 SSM까지 이미 포화상태 다.“작년도 올해도 최악” 이라는 지역 중소영세상인들의 하소연이 해마 다 끊이지 않는다. 대형마트들 간의 전국적인 유통 전쟁으로 지역의 재래시장이나 골목 상권이 무너져 가는 와중인데 최근 가음정동에서 지역단위농협이 대형 대형마트가 들어서서 새로 생 겨나는 일자리보다 재래시장이

마트에 버금가는 농수산물유통센터를 개장했다. 가음정동은 공단 노동 자들이 밀집한 주거지역으로 창원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인 가음정시장

몰락하고 지역상권이 스러지면

이 있다. 경남도의회 여영국 도의원을 만나 농협의 횡포 아래 휘청거리

서 감소하는 일자리가 더 많다

는 재래시장과 지역상권 실태를 전해듣는다.

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다. 실제 로 대형마트가 들어선다고 일

2011년 가음정시장 상인들의 반발 속에 남창원 농협 농수산물종합유

자리 창출에 큰 도움이 되지 않

통센터가 들어섰는데요.

는다.

창원시가 남창원 농협에 땅을 매각할 때부터 문제가 있었습니다. 2009년에 지구단위계획을 재정비하면서‘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 에 관한 법률’ (이하 농안법)에 의한 농수산물종합유통센터로 허용 용도 를 특정해 지구단위계획을 확정 고시했고, 2010년 2월 매각 공고를 거

■ 인터뷰·정리

김성훈 경남도당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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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 5월에 남창원 농협으로 매각했어요. 이 사실이 2010년 하반기에 알려지면서 가음정시장을 중심으로 반


창원 가음정시장 앞에 들어선 농협 농수산물종합유통센터(사진 : 경남도민일보)

대대책위를 구성해 특혜 의혹 제기와 함께 유통센터 건립 반대 운동을 전개했지요. 이후 2011년 4월 건축 허가가 났고 대책위는 2011년 7월 창원지법에 건축허가 처분 취소 소송을 냈지만, 2013년 4월 재판부는 허가 과정에 하자가 없다며 농협 측의 손을 들어줬고 올해 9월 추석을 앞두고 개장했습니다.

당시에 유통센터 설치가 잠정적으로 결정되면서 상인들이 건축허가 처분 취소 소송을 내는 등 논란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재판은 어떻게 진행되고 마무리되었나요? 소송의 핵심은 남창원 농협이 추진하는 유통센터가 농안법에서 정한 농수산물종합유통센터가 아니라 는 것, 창원시가 농림수산식품부장관이나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사업계획서를 제출해 사업계획의 타당성 을 검토하고 사업대상자를 선정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 또 농안법에서 규정하는 농 수산물종합유통센터 시설 기준에도 미달하는데 건축허가는 부당하다는 것이었어요. 1심결과 대책위 측이 패소했습니다. 개장일은 다가오고 압박감을 느낀 가음정시장 측은 결국 합의를 하고 소송을 취하했지요.

지상 3층 규모의 대형마트 급 유통센터라고 들었습니다. 그 규모가 실제로 얼마만한지, 다루는 품목은 어떤 것들인가요? 남창원 농협농수산물종합유통센터는 건축면적만 3만5천770㎡에 달하고, 지역농협이 세운 판매시설 로는 전국 최대 규모입니다. 농수축산물 전문매장 외에도 패션·잡화 매장, 가전매장, 어린이 도서관, 문 화센터까지 갖춰 사실상 대형마트가 입점했다고 보는 게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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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은 말 그대로‘농업협동조합’ 인데요, 실제로 지역에서 농협은 어떻게 기능하고 있나요? 전국 어디서나 지역농협이 말썽을 부리는 건 주지의 사실이죠. 농협이 금융과 유통에서 농민의 권익을 보호하기보다는 효율성과 수익성을 잣대로 들이대다 보니 기존 금융유통업체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정책 을 펴고 있어요. 이게 제일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국내 농수산물을 직접 공급해 농수산물의 가격 안정 에 이바지하도록 설립한 농수산물유통센터가 설립 취지를 벗어난 판매를 하니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유통센터 인근의 전통시장, 상가의 상인들 분위기는 어떤지요? 올 추석 때 특히 타격이 컸을 것 같습 니다. 인근 재래시장을 찾았더니 추석인사를 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손님이 드물어요. 상인들은 이구동성으 로 장사 시작하고 나서 이런 경우는 처음 겪는다고 하소연 하더군요. 추석뿐만 아니라 평일 매출에도 상 당한 타격을 미쳐서 인근 재래시장이나 골목상권이 붕괴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어요. 가음정시장은 벌써부터 빈 점포가 속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재래시장 상인들에게는 타격이 있을 수 있겠지만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일자리 창출과 쾌적한 시설 등 으로 반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대형마트가 들어서서 새로 생겨나는 일자리보다 재래시장이 몰락하고 지역상권이 스러지면서 감소하 는 일자리가 더 많다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습니다. 실제로 대형마트가 들어선다고 일자리 창출에 큰 도움

왼쪽은 인적이 뚝 끊긴 창원 가음정시장, 오른쪽 사진은 발 디딜 틈 없는 농협 종합유통센터 내부(사진: 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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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안 돼요. 소비자 입장에서는 많은 유통업체가 생기면 질 좋은 상품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고 생각 할 수 있지만 결국은 대자본을 중심으로 유통시장이 재편되면서 독과점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 들에게 돌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수죽순처럼 생기는 대형마트의 입점을 찬성할 수가 없는 거예요.

언론에서는 가음정시장 상인들과 남창원 농협 간에 상생협약을 맺고 논란이 잠재워졌다고 보도했습니 다.‘상생협약’ 의 내용은 무엇인지요? 소송에서 패소하고 매우 불리한 여건에 처한 가음정 시장상인회가 개장을 앞두고 올 8월에 상 생협약을 체결했는데, 이 협약은 유통산업발전법 에 근거한 상생협약이 아니에요. 대형마트로 허가 가 나면 유통산업발전법에 의해 인근 1km 이내의 전통시장과는 의무적으로 상생협약을 맺어야 하

질 좋은 상품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 결국은 대자본을 중심으로 유통 시장이 재편되면서 독과점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에게 돌아갈 것

는데, 남창원 농협농수산물종합유통센터는 실제 로는 대형마트임에도 유통센터로 허가가 나면서 인근 전통시장과 상생협약을 맺지 않았어요. 개장하는 날 인근 가음정대상가상인들이 집회를 하는 등 상생협약 요구를 이어가고 있어요.

향후 이 사안에 대해 노동당 경남도당과 여영국 의원은 어떻게 대응할 예정인가요? 남창원 농협농수산물종합유통센터 개장 이후 위기를 느낀 창원 재래시장상인연합회 임원들의 요구로 한 차례 간담회를 통해 대응책을 논의했고, 인근의 상생협약을 체결하지 못한 전통시장들이 다시 소송에 나설 것으로 압니다. 이와는 별도로 대형마트에 신음하는 영세 상인들의 생존권 확보를 위해 협동조합 전 환 등의 자구책을 마련해 나갈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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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 / 마트 없이 가능하다

“생산에서 재순환까지 전체를 보아야 정의로운 밥상” 삶과 먹을거리 협동조합 <끼니> 김경 사무국장 인터뷰

누구나 안전하고 좋은 먹거리를 먹을 권리가 있다. 하나 더 있다. 내 입만 입이 아니다. 인간은 공동체를 떠나 홀로 살 수 없는 존재이기에 ‘두루 잘 먹고 두루 행복한 세상’ 에 대한 고민 또한 함께 가야 한다.‘삶 과 먹을거리 협동조합’ 을 내걸고 창립한 <끼니>가 바로 그런 곳이다. <끼니>의 김경 사무국장이 노동자협동조합 <이피쿱(ep coop)>과 함께 매달 개최하는‘맛 콘서트’ 는 치킨부터 어묵, 쇠고기 등 우리에게 익숙 우리가 무심하게 먹고 마시는 사이 누군가가 지금 자기들의

한 식재료를 하나씩 주제로 삼아 진행된다. 이 땅의 먹거리에 대해 양심 껏 주장하고, 그 주장이 실제로 밥상에 담길 수 있도록 교육사업 모델을

편의와 이윤을 위해 음식문화

차근차근 만들어가고 있다. 공간의 이름도 우리나라 최초의 요리책인

를 왜곡시키고 있어요. 그렇다

‘수운잡방(需雲雜方)’ 이다.‘풍류를 알고 격조를 지닌 사람들에게 걸맞

면 우리는 어떤 프레임을 만들

은 특별한 요리’ 라는 뜻이라고 한다. 커피향 가득한‘수운잡방’ 에서 김

고 어떻게 대응할 거냐는 거죠.

경 사무국장을 만났다.

먹거리와 음식문화의 새로운 프레임이 필요하다 주머니에 여유가 있으면‘유기농’ ‘친환경’표시가 된 채소에 손이 가기 마련이다. 정제염보다는 햇볕과 바람에 말린 천일염이 몸에 더 좋 다고도 한다. 직접 장을 담그는 일은 엄두를 내기 쉽지 않다. 된장과 간 <미래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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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고추장뿐만 아니라 각종 소스도 가공 생산된 제품을 사서 먹는다. 이 른바‘진보좌파’ 들 중에서‘맛집’ 을 찾아다니는‘미식가’ 들을 향한 경멸


을 숨기지 않고 그것을 가난한 노동자들이 향유 하기 어려운, 돈 많은 부르주아의 문화로 치부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먹거리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먹거리와 음식문화에 대한 무관 심과 무지에서 비롯한다고 김경 씨는 말한다. 한국은 6월부터 8월까지 전체 작물의 70~80%가 성장하는데 이때‘유기농’한답시 고 모든 작물에 농약을 안 친다면? 장마철 병충 해를 이겨내지 못해 식량 자급률이 현저히 떨 어지고 말 것이다. 김경 씨는 무작정 농약 쓰는 관행 농법을 벼랑으로 내몰 일이 아니라, 독성 이 강한 농약의 사용을 어떻게 최소화시킬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 도출과 정책 마련을 고민해 야 한다고 말한다. “유기농이라며 축분을 엄청나게 뿌리면 토 양은 질산과다 상태가 돼요. 환경 재앙이지요. 거기다 질소 성분이 엄청 올라오니 맛도 없어요. 무엇보다 도 근본적인 문제는 유기농업 자체가 이미 자본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강원도에 가보면 산 하나가 통째 로 고랭지 배추밭이에요. 이 정도 수준

“유기농이라며 축분을 엄청나게 뿌리니 토양은 질산과다 상태죠, 환경 재앙이에요. 강원도에

이면 기업이지 농민이 아니에요. 유기농 은 그 자체로 자본을 축적하는 데 굉장 히 유용한 도구가 됐어요.”

가보면 산 하나가 통째로 고랭지 배추밭이예

특히 천일염 이야기에서 김경 팀장의

요. 이 정도 되면 기업이예요, 농민이 아니라.”

목소리는 더욱 격앙됐다. 천일염 신앙은 ‘한식 세계화’붐이 일면서 전 국민적으 로 퍼져나갔다. 국내 최대의 천일염 생

산지는 전남 신안군이다. 신안은 갯벌이 물러서 흙을 다져 그 위에서 소금을 만드는 토판염은 만들기 힘 들다. 대신 장판염, 즉 갯벌 위에 장판을 깔고 소금을 걷는다. 한 번 장판을 깔면 15년을 쓴다. 사람 몸으로 흡수될 유해물질도 문제거니와 엄청난 면적의 우수한 갯벌이 장판 밑에서 썩어간다. 그럼 우리는 어떤 소 금을 먹어야 한단 말인가. 소금을 생산하는 것과 갯벌을 살리는 것, 어느 것이 더 친환경적이고 경제적인 지 고민이 필요하다. 김경 씨는 민중의 음식문화, 노동자의 먹거리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좌파진영이 프레임을 생산하지 못하고 자본과 국가에 계속 휘둘리기만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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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음식이라도 분명히 맛있게 먹는 방법이 있는데 왜? “좌파 지식인들조차‘미식’ 이라고 금기시하는 등 먹거리 문제에 대해서는 굉장히 폭력적으로 접근하 는 걸 보고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맛있는 음식은 꼭 돈을 엄청 들여야 먹을 수 있는 비싼 취향이 아 니에요. 같은 음식이라도 맛있게 먹는 방법이 있어요. 우리 어렸을 적에 어머니들은 생선을 사오면 반 갈 라서 말리곤 했죠. 아미노산이 올라오면서 감칠맛이 늘어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죠. 오랜 세월에 걸쳐 왕족이든 노예든 나름의 음식문화를 발전시켜왔는데, 우리가 무심하게 먹고 마시는 사이에 누군가가 지 금 자기들의 편의와 이윤을 위해 음식문화를 왜곡시키고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프레임을 만들고, 어떻게 대응할 거냐는 거예요.” 멸치와 표고버섯만 기본적으로 갖추어도 맛있는 육수를 낼 수 있다. 삼겹살 먹을 때 좋은 간장에 들기

“나물에 왜간장만 넣어선 절대 제대로

름 두 방울만 치면 굉장히 훌륭한 소스가 된다. 소 스의‘비법’ 을 찾겠다고 온갖 잡다한 걸 몰아넣는

맛이 안 나요. 장 직접 담가봤는데 어

까닭은 좋은 재료가 없어서다. 왜간장의 나쁜 향을

렵지 않아요. 장은 한국 음식문화에서

감추려니 달게 만들고, 단맛을 죽이려니 과일을 넣

자본으로부터 내 먹거리를 독립시킬

는 식이라는 얘기다. 특히 김경 씨는 장이야말로

수 있는 기초에 해당돼요.”

자본으로부터의 먹거리 독립에 기초가 된다고 강 조한다.

“나물에 왜간장만 넣어선 절대 제대로 맛이 안 나요. 장 직접 담가봤는데 어렵지 않아요. 도시에 혼자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장을 어떻게 만드나 겁낼 일이 아니에요. 장 한 번 담그면 정말 오래 먹어요. 장은 한국 음식문화에서 자본으로부터 내 먹거리를 독립시킬 수 있는 기초에 해당돼요.”

도시 자영업자가 살면 소농이 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은 자본 축적에 유리하게 구조화된다. 자본가는 임금을 적게 주고 언제든 해고할 수 있는 비정규직을 고용한다. 시간에 쫓기고 돈에 쪼들리는 노동자들은 싼 값에 빨리 먹을 수 있 는 음식을 사먹는다. 음식도 마찬가지로 싸게, 빨리, 그리고 대량생산해야 한다. 공산품뿐만 아니라 땅에 서 나는 농산물도 단일품종으로 대량생산된다. 식재료의 종류가 줄면‘규모의 경제’ 가 나올 수밖에 없다. 단일품종을 생산함으로써 기업농이 등장하고, 품목의 수가 적으니 마트와 프랜차이즈 쪽에서는 유통과 관리가 쉬워지는 셈이다. 다양성이 무너지면서 음식문화도 획일화된다. 보리된장, 밀된장, 검은콩된장, … 한국 음식문화에서 된장의 종류는 굉장히 다양했다. 하지만 더 이상 이런 된장들을 맛볼 수 있는 곳이 없다. 김경 씨는 재래시장과 도시자영업자 문제가 농업 문제와 직결된다고 말한다. 김경 씨는 서울 시내의 한 두부전문 식당 사례를 든다. 매일 새벽마다 그날 내놓을 만큼만 두부를 만들 44


고 포장판매도 하지 않는 다. 두부의 맛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다. 이곳 두부를 맛본 사람들은 ‘어렸을 때 갓 삶은 메주 콩을 씹어 먹던 기억’ 을 떠올린다. 시중에서 파는 두부만 먹으면서 잊고 있 었던 당연한 사실도 상기 하게 된다. 아, 두부는 콩 으로 만드는 거였지. “이 식당에서 일 년에

<끼니>가 노동자협동조합 <이피쿱(ep coop)>과 함께 매달 개최하는‘맛 콘서트’홍보 전단

콩 60kg짜리 120가마를 소화합니다. 그런데 생산현장 가서는 못 사요. 대한민국에서 120가마 정도 생산하는 농가는 이미 거대 식 품회사들과 계약이 돼있어요. 이 식당 주인은 콩 농사짓는 집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새벽에 1톤 트럭 몰고 부리나케 쫓아가요. 그래도 좋은 콩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거죠. 만일 도시 자영업자들이 좋은 재료를 확 보할 수 있고 다양한 메뉴를 개발해서‘우리 가게의 스토리’ 를 만들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도시 자영업 자들이 자본이 못 끼어들 만큼 충분한 경쟁력을 갖고 맛있게 음식을 만들면요, 1차 산업이 살아요. 다품종 소량 생산하는 소농들과 도시 자영업자

“만일 도시 자영업자들이 좋은 재료를 확보할

들 사이에 직거래가 활성화되는 거죠.”

수 있고 다양한 메뉴를 개발해서‘우리 가게의

한국 근현대사부터 식량 시스템의 신

스토리’ 를 만들게 된다면? 1차 산업, 즉 다품종 소량생산하는 소농들이 살아나요.”

자유주의적 재편까지, 강원도 산간에서 서울 도심의 두부식당까지. 김경 씨와의 인터뷰는 두 시간에 걸쳐 학문과 지리적 경계를 넘나들며 진행됐다.

“자본주의는 학문도 산업도 개별기업도 하나하나 개별화시켰어요. 자기 분야 하나만 봐선 구조 전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식량산업의 문제를 세계 5대 곡물 메이저기업 탓으로 돌리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 도 없어요. 마트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생산-가공-유통-소비-재순환 그리고 노동까지, 전체적으로 바라 보아야 근본적인 실마리가 보여요. 이런 게 노동당이 견지해야 할 관점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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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 / 마트 없이 충분하다

농산물 직거래, 도시와 농민이 함께 찾는 먹거리 대안

먹을거리, 전환이 필요한 시점 도시 서민과 노동자들은 무얼 먹고 살까? 그리고 이들이 소비하는 농 산물의 총량은 어느 정도 규모일까? 가까운 일례로 노동당 당원들의 농 산물 소비량을 따져보자. 14,000명 당원 1인당 1년 평균 쌀 소비량을 70kg으로 보고, 하루 두 끼만 집에서 먹는다 치면 당원들이 먹는 쌀만 1 농민들은 가격결정에서 철저히

년에 무려 653톤이다. 김치만 해도 230톤, 양파 289톤, 감자 90톤, 상

배제된다. 소비자 또한 자본주

추, 고추, 오이, 고구마, 과일 등 농산물 전반을 따져보면 어마어마한 양

의 상업광고 속에서 시달린다.

이다. 가족들 소비량까지 합치면 두세 배가 훨씬 넘는다. 당원들 중 생협

농민의 통장잔고는 비어가고,

이용자나 유기농산물 직거래 회원이 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소수라

도시 서민과 노동자들의 지갑

당원들의 농산물 소비패턴은 일반 대형마트 이용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

엔 카드영수증만 넘쳐난다.

다고 봐야 할 것이다. 노동자, 서민 역시 자본주의 체제가 초래한 최대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최대의 소비처다. 한국은 변혁운동과 생협운동의 연계가 취약한 나라로 분류된다. 당 원들의 소비패턴이 일반인과 다르지 않은 이유가 조금은 설명이 된다. 생협운동을 중산층운동으로 보았던 변혁운동의 비판적인 시각이 영향 을 미쳤을 것이다. 우리의 모습은 두 가지다. 밖에서는 활동가로, 집에 서는 일반인으로. 우리 모두 알게 모르게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살아간

김재호 전북 장수 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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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활동공간에서는 급진적이되, 생활주거공간에서는 대중들과 크게 다 르지 않다. 먹을거리도 마찬가지다.


생협매장이 늘어나면서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다. 소비자조합이면서도 생산자들과 유기적으로 연대했던 좋은 풍토가 줄어들고, 치열한 시장경쟁에 따른 부작용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생협 운동에 비해 온전히 시장논리가 지배하는 농산물유통구조에서는 오죽하겠는가. 공판장에 물건을 내는 농 민들은 가격결정에서 철저히 배제된다. 자기가 키운 농산물 가격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소비자 또한 자본주의 상업광고로 조장된 소비욕구에 시달린다. 식욕과 오감을 자극하는 광고홍수 속에 자율적 소비 를 하지 못한다. 단계를 거친 유통업자들의 농간 속에 비싼 농산물을 사고 만다. 농민의 통장잔고는 비어 가고, 도시서민과 노동자들의 지갑엔 카드영수증만 넘쳐난다.

누가 먹는지 알고 짓는 농사, 누가 먹는지 알고 짓는 밥상 농부와 구매자 사이에 유통자본의 입김을 차단하는 방법이 바로 직거래다. 직거래하는 농부들이 굉장 히 많다. 우리 노동당 농민당원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농민당원들 대부분 친환경 농사를 짓는다. 사과, 배, 쌀, 오이, 고추, 배추, 고구마, 감자, 유정란.... 우리가 먹는 모든 걸 생산하고 있다. 시골 부모님이 농 사지으면 도시에 있는 자식들한테 농산물 바리바리 싸서 보내듯이 우리도 그러고 싶다. 시골 당원들 대부 분이 농산물 파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다들 능력자들이다. 다만 모르는 사람, 공감대가 없는 사람들에게 농산물을 보내고 싶지는 않다. 얼굴 없는 소비자가 아니라, 세계관을 나누고 함께 실천하는 동지들에게 소중한 농산물을 보내고 싶다. 얼굴 없는 마트농산물이 아니라 정성을 담은‘진보농산물’ 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야 사회도, 사람도 건강해진다고 믿는다. 먹을거리, 이제는 농민들과, 농민당원들과, 농민회 회 원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할 때다. 노동자들과 도시당원들의 스마트폰에는 직거래하는 농민들 전화번호가 가득하고, 페이스북 친구 중에 는 농사짓는 농민들 소식이 넘쳐난다. 식탁은 풍성해지고, 여름이면 함께 모깃불 피워놓고 술 한 잔하는 모습, 멋지지 않은가. 농민들이 밭을 하나씩 마련해‘연대의 밭’ 이라 이름 지어 보자. 장수에서는‘쌍용노동자 연대의 밭’ 이, 홍 성에서는‘콜트콜텍 연대의 밭’ 이, 영월에서는‘삼성노 동자 연대의 밭’ 이 만들어지고. 2000일, 3000일 장기 투쟁으로 지친 노동자들이 일주일정도 함께 시골에 머

농부와 구매자 사이에 유통자본 의 입김을 차단하는 방법이 바로 직거래다. 관계형성이 없는 농산 물 거래는 우리의 방식이 아니다.

물면서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가을걷이 때 함께 수 확의 기쁨을 누리고, 농산물도 함께 나누는 정겨운 모습! 노동자들이‘연대의 밭’ 에 와서 다친 마음을 치 유 받고, 함께 농사짓는 상상, 즐겁지 않은가. 누가 먹는지 알고 짓는 농사, 누가 먹는지 알고 짓는 밥상. 관계형성이 없는 농산물 거래는 우리의 방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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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시골 장수에는 진보정당 당원들이 많다. 노동당, 녹색당, 통합진보당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진보정당에서 활동한 개인들이 함께 어울린다.

진보정당 당원, 농민회원들이 함께하는 <장수꾸러미밥상> 작은 시골 장수에는 진보정당 당원들이 많다. 노동당, 녹색당, 통합진보당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진 보정당에서 활동한 개인들이 함께 어울린다. 유기농사를 지으면서 교육운동, 귀농운동, 시국회의, 농민의 집, 농민회, 카톨릭농민회 활동에 열심인 분들도 많다. 이들이 장수친환경영농조합으로 결성하고 친환경 농업 확대와 농산물대안유통, 친환경학교급식운동을 펼치면서 <장수꾸러미밥상>을 운영하고 있다. 회원 들은 주로 우리와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건넨다. 도시의 노동조합과 진보정당, 진보적인 시민 사회단체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홍보를 시작했다. 노동당 중앙당, 서울시당, 노동당 거점공간 회원, 일반 당원들이 먼저 가입하기 시작했다. 뜻있는 당원들과 노동당 농업위원회도‘고생하는 당직자들과 투쟁사 업장에 후원해달라’ 며 가입신청이 이어졌다. 덕분에 쌍용차심리치유센터 <와락>과 강정마을, 여러 투쟁 사업장과 단체, 활동가에게 꾸러미 농산물을 후원하고 있다. 농부는 좋은 분들께 농산물 보내서 기쁘고, 도시회원들은 가치를 공유하는 농부들의 친환경농산물 받아서 즐겁고, 장기농성중인 노동자들은 농산물 후원받아 행복해 한다. 한 지역 당원들이 운영하는 장수꾸러미밥상을 모델로, 보다 많은 노동당 농민당원들이 참여하는 <노동 당꾸러미밥상>을 상상해 본다. 당내 생활문화운동 차원에서 함께 시도해 볼 것을 제안한다. 200-300명 의 당원들을 노동당꾸러미 회원으로 모집해서 운영한다면 상당한 반향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농민당 원과 도시당원이 활발히 교류하는 노동당, 운동과 생활을 하나로 묶어내는 노동당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 지 않을까 한다. 더 나아가 노동당생협을 만들어 가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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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꾸러미밥상, 노동당 CSA, 대안소비의 시작이다 다른 한편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 <노동당 CSA>다. 이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협력모델인데 공동체 지원농업(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의 줄임말이다. 매달 5만원씩 내는 20여명의 당원이 한 농가의 CSA 회원이 되면, 1년 동안 각종 유기농 야채와 농산물을 해당금액만큼 제철에 공급해준다. 물론 농사경험과 날씨, 상황에 따라 농산물의 공급시기와 품질에 차이가 날 수 있다. 노동당꾸러미와는 달리 회비만큼의 농산물이 안 갈 수도 있다. 그것조차 회원들이 감수할 수 있는 것이 CSA의 특징이다. 귀농한 당원들이 초기에 생계비 걱정을 하지 않고 안정되게 농사지을 수 있는 방안이기도 하다. 귀농당원 한 명 당 20명의 노동당 CSA 회원이 있으면 매달 100만원의 소득이 보장된다. CSA 회원이 100명이면 5인의 귀농당원이 정착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런 구상은 굳이 노동당 당내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노동당이 이런 활동을 이어간다면 농산물 과 민중의집을 매개로 전농, 카톨릭농민회,

농민회와 민주노총, 그리고 진보정당 당

민주노총, 진보정당, 사회단체가 함께 참여

원이 하나되는 노-농연대는 또 어떤가. 조

하는 대안프로젝트를 구상해 볼 수도 있겠 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의 언니네텃밭 꾸 러미, 장수친환경영농조합의 장수꾸러미밥 상도 전체 운동진영이 함께 머리를 맞댄다면

합원과 활동가들이 은퇴 후 귀농하면 동네 에서‘막내’취급을 받으며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에서 젊게 살 수도 있다.

경쟁시장에 내몰리는 생협운동과는 또 다른 흐름의 대안직거래운동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꾸러미회원제가 무매개적인 시민 일반을 대상으로 할 게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데 서로 연대하는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 회원들로 확대해야 한다. 농민회 회원과 민주노총 조합원, 진보정당 당원이 하나 되는 생활운동, 노-농연대는 자연스럽게 이어 질 것이며 반목으로 찢겨진 진보정당의 마음도 조금은 열릴 것이다. 50대를 넘어선 노조조합원과 활동가 들은 은퇴 후 자연스럽게 귀농을 결심할 수 있다. 정적이 감도는 시골 동네에 활력을 불어 넣게 되며 은퇴 와 함께 활동이 단절되는 일도 없다. 은퇴하고 귀농하면 동네에서 거의 막내 취급을 받으니 새로운 인생 의 출발점에서 젊게 살 수 있다. 이런 구상은 상상으로만 끝날 것인가. 노동당은 당원의 자발적인 참여로 힘을 발휘하는 정당이다. 지도부의 의지와 당원들의 자발적인 참여 가 있다면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당내 농산물 직거래운동도 마찬가지다. 농민당원들도 끊임없는 노력 아끼지 않겠다.

특집2 마트 없이 충분하다 49


장수꾸러미밥상은? 해발 500m이상의 고랭지인 전북 장수에서 노동당, 녹색당 등 진보정당 당원, 농민회, 카톨릭농민회 회원, 진보적인 개인들이 운 영하는 친환경농산물 회원제를 말합니다. 유기농으로 키운 신선한 제철농산물과 두 부, 빵, 떡, 장류 등 100여 가지로 구성되는 직거래회원제입니다. 회원들은 매주1회, 또 는 격주 1회로 농산물을 받아보게 됩니다.

▣ 기본1회 배송품목 우리콩두부, 유정란 6알, 유기농제철채소 4~6가지, 친환경가공식품 등

▣ 1년 48주(격주회원은 24주) 연중공급 품목 •기 본 : 유정란, 우리콩두부, 쌈채, 제철농산물, 가공식품 등 •채소류 : 파, 양상추, 쌈채, 시금치, 양배추, 브로콜리, 쑥, 두릅, 쑥갓, 배추, 풋고추 등 •과일류 : 사과, 배, 자두, 매실, 호두, 은행 등 •과채류 : 방울토마토, 토마토, 애호박, 오이, 옥수수, 단호박, 파프리카 등 •근채류 : 감자, 고구마, 당근, 무, 마늘, 양파, 땅콩, 생강 등 •주잡곡 : 백미, 현미, 흑미, 통밀쌀, 우리밀가루, 보리쌀, 우리콩, 수수 등 •가공식품 : 쌀빵, 장류, 수제차, 효소, 부각, 연잎밥, 두부, 떡, 미수가루, 과일즙 등 •버섯류 : 느타리버섯, 표고버섯 등 •나물류 : 고사리, 취나물, 무말랭이, 고구마줄기, 말린애호박, 시래기 등 ※ 품목은 산지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 장수꾸러미밥상 가격 매주회원 : 월4회 12만원(택배비포함) / 격주회원 : 월2회 6만원(택배비포함)

▣ 배송 매주회원은 1주일에 한 번, 격주회원은 2주에 한 번 배송되며, 수요일/금요일 중 요일을 선택해 받 아보실 수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장수꾸러미밥상 다음카페 참조)

▣ 신청 및 문의 참여하실 분은 전화로 신청하시거나 [장수꾸러미밥상] 다음카페에서 가입서를 다운받아 이메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이름 / 연락처 / 매주·격주 선택 / 주소 / 받으실 요일) 장수친환경영농조합 전화 063) 352-6262 / 353-6262 팩스 063) 352-6263 / 노동당 담당자 010-6686-6651 (김재호) 장수꾸러미밥상카페 http://cafe.daum.net/jangsubapsang 이메일 ecojangsu@hanmail.net 계좌번호 농협 355-0002-3570-93 장수친환경영농조합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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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진보정치 열전 2

드럼 치는 도의원,

경기도의회 최김재연 의원 편 (2부)

“동네야 함께 놀자!” 사람이 살아야 동네다

인터뷰 : 최혜영·김윤희 여성위원회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2년 동안 파리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최김재연은 사업자 등록을 하고 본격적으로 설계 일을 시작했 다. 그러다 2010년, 지방선거 후보자를 찾아 헤맨 고양 당원들이 최김재연에게 경기도의원 출마를 권유 해왔다.

“출마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후보들 홈페이지 만들고 현수막 만들어 주는 게 내 특기였다고요. 게다 가 무대 공포증이 있어서 연설도 못하는데, 당원들이‘유세는 안 해도 된다’ 는 거야. 안 해도 되긴 개 뿔!(좌중폭소)”

얼떨결에 당선해 공부 또 공부… 최우수도의원으로 선정돼 “아-씨, 클났다. 어떡하지 이거?”경기도 고양시에서 야권 단일화로 1:1 선거 구도가 만들어졌지만 그 래도 다들 긴가민가했다. 그런데 덜컥, 당선이 됐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모든 일이 다 두렵고 겁이 났다.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화분이랑 선물이 들어오면 그것도 겁이 났어요. 민원 청탁성 뇌물일지도 모르는데, 받으면 이상하잖 아!! 서울시의원 했던 심재옥 동지가‘가벼운 건 받고 무거운 건 돌려주라’ 고 하더라고요. 법적으로 삼만 원인지 사만 원인지 받아도 되는 상한선도 있고요. 한 번은 와인세트가 들어왔는데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오만 얼마짜리더라고, 그래서 다시 돌려보냈잖아. 아우, 아까워. 와인인데!(좌중웃음)”

경기도당에 특별당비를 내고 보좌관부터 채용했다. 좋은예산센터에 가서 예산 교육을 듣고 전문가들 을 찾아다니며 개인 교습도 받았다. 밤낮없이 공부하고 의정 활동을 펼친 첫해, 2010년 행정사무감사를

밤낮없이 공부하고 의정 활동을 펼치면서 시민단체와 공무원노조, 그리고 지역 언론인들이 뽑은 최우수 도의원으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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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청한 경기도 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가‘우수도의원’ 으로 선정했다. 뿐만 아니다. 2010년 경기도청 공 무원노조가 선정한 최우수도의원, 2011년 지역 언론인들이 뽑은 의정대상과 최우수의원이 되었다. 팔당 유기농 단지부터 경기도내 고시원/임대 아파트 실태 조사, 뉴타운 출구 전략 마련, 가로수 방제, 경기북부 청의 예산 효율성 진단까지 부실한 행정 실태 를 구석구석 짚고 탄탄한 대안을 제시해온 결 과다.

바깥에서 쏟아지는 호평하고는 별개로,

바깥에서 쏟아지는 호평하고는 별개로, 최

최김재연 의원은 여전히 공부가 목마르

김재연 의원은 여전히 공부가 목마르다. 올해

다. 올해 초부터는 서울 모 대학원에서

초부터는 서울 모 대학원에서 도시계획 공부를

도시계획 공부를 시작했다.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살인적인‘등록금 귀신’ 은 도의원도 비껴갈 수 없다. 한 학기 등록금이 600만 원. 결국 2학기 등록금은 일시불이 여의치 않아 분 할 납부를 신청했다.

“경기도의회에 입성하고 나서 건축 전공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도시환경위원회에 들어갔 거든요. 그런데 건축이랑 도시계획은 완전히 달라요. 첨엔 다 아는 듯이 얘기했는데 나중 되니까 말문이 막히더라고요. 더 근본적인 고민도 있어요. 마을만들기 사업은 동네가 황폐해지는 걸 막고 살기 좋은 동 네를 만들려고 하는 거고, 주거환경개선사업도 개별 건축물이 아니라 그 지역의 기반 시설을 개선하는 사 업이잖아요. 근데 이런 사업들을 해서 길도 좋아지고 시설이 나아지면 토지 소유자들이 임대료를 올려. 그럼 세입자가 쫓겨나. 잘 살자고 시작한 사업이 사람 쫓아내는 사업이 되는 거예요. 뉴타운도 마찬가지 구요. 동네를 발전시킨다? 물론 개발한 지역에서 소비가 촉진되는 건 맞아요. 그렇지만 그 돈이 결국은 흘 러흘러 어디로 들어가겠어요? 그 지역의 지주들한테 가요. 국가예산을 무지막지하게 쏟아 부어 지주를 먹 여 살리는 결과가 되는 셈이죠. 실무와 동시에 공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좋게 만들면 좋은 거잖아’단순 하게 생각하기 쉬워요. 의정 활동을 하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내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고 발언하는지 나 자신을 믿기 어려운 시기가 닥치더라고요.”

GRES 시스템, 뉴타운 출구 조례, … 전국 최초로‘뉴타운 출구 전략’만들다 기존의 도시재개발 방식을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면서 근본적인 고민이 시작됐다. 예컨대 전국을 휩쓸 었던 뉴타운 사업처럼 있던 집 다 부수고 아파트 단지를 짓는 게 정말‘주거환경 개선’ 일까? 멀쩡한 주택 가가 뉴타운 사업지구로 선정되면 지가가 오르고 투기세력이 지분 쪼개기를 하면서 사업성이 점점 악화 된다. 결국 원주민들이 재입주하려면 1억원, 2억원씩 웃돈을 얹어줘야 한다. 소송이 줄을 잇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뉴타운 사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주민들과 반대측 주민들 간 갈등도 극에 달한다. 여성 진보정치 열전 53


“뉴타운 사업은 당시에 이미 실패했어요. 부동산 경기가 살아났더라도 마찬가지였죠. 주민들이 무리하 게 대출을 받아서 분담금을 냈다가 분양 대금을 다시 대출로 막는 악순환을 반복하다 빚더미에 오르는 일 도 많아요. 명확하게 사업성이 떨어지는 구역은 사업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주민들에게 정확히 알려야 해요. 그리고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주민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도록 해야 이후에 더 큰 분쟁을 막을 수 있어요. 그래서 만든 게 GRES 시스템이예요.”

경기도의회에서 만든 GRES 시스템은 뉴타운 지구, 재개발과 재건축 구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사업 완료 후 재입주하려면 얼마나 추가 분담금을 내야 되는지 예측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시스템이다. 이 시 스템에 주민들이 들어가서 직접 자기집 주소를 검색하면 사업 완료 시 자신이 더 내야 할 추정 분담금을 계산해준다. 정부나 건축업자들 말만 믿고 뉴타운 사업에 동의했다가 낭패보지 말고, 주민들이 직접 데이 터를 보고 스스로 판단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 시스템이 만들어진 뒤로 뉴타운과 재개발 사업이 본격화되 기 전에 주민들의 피해를 미리 막을 수 있게 됐다. 뉴타운 사업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당연히 커 졌다. 뉴타운 사업에 동의하지 않는 주민들의 의견이 모아지면 뉴타운 지정을 철회해달라고 경기도에 요구 할 수도 있다. 2010년, 경기도의회에서 도시재정비촉진조례가 개정되면서부터다. 거저 얻은 게 아니다. 뉴타운 반대대책위원회 주민들이 출구 전략을 마련하라고 청원을 제출하고 줄기차게 요구한 결과다. 당시 뉴타운 반대대책연합 정책국장을 맡았던 의정부 이의환 당원은‘뉴타운 반대운동사에 한 획을 긋 54


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고 말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추진위가 구성되지 않은 지역은 뉴타운 해제 방안이 법적으로 딱히 명시되어있지 않았다. 뉴타운 해당 지역에 2년동안 추진위가 구성되지 않으면 자동으로 뉴타운이 해제되는, 이른바‘일몰제’ 만 있었다. 그런데 전국 최초로 경기도에서 25퍼센트 이상의 주민들 이 반대하면 뉴타운을 해제하도록 조례를 개정한 것이다. 이에 힘입어 그해 연말 도정법(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 4조 3항을 개정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고, 추진위가 구성되지 않은 지역에 30퍼센트 이상 주

민들이 반대하면 뉴타운을 해제할 수 있다는 조항을 만들게 되었다. 실제로 의정부 금의2구역은 지역 주민의 30퍼센트가 반대하여 경기도 도시재정비 위원회에 제출하고 이것을 통해 뉴타운 구역에서 해제됐다. 뉴타운반대대책연합 위원장을 맡아 뉴타운 반대투쟁을 승리로 이끈 의정부 목영대 위원장과 이의환 정책국장을 비롯한 노동당 당원들과 최김재연 의원이 함께 일구어 낸 초유의 승리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12년 경기도의회 행정사무감사에서 최김재연 의원은 GRES 시스템 입력 현 황을 분석하여 이용 주민이 16퍼센트에 그치고 있는 현황과 더불어, 경기도 내 뉴타운 73개 구역 대부분 사업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33평을 분양 받으려면 일부 지역은 최고 2억 7500만 원 까지 분담금을 더 내야 하고, 이렇게 웃돈을 더 내야 재입주 가능한 곳이 절반을 훌쩍 넘었다. 뉴타운이 멀 쩡한 주민들 내쫓고 부동산 업계만 잇속을 챙기는 사업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증명해낸 것이다.

돈 안 주고 세입자 쫓아내는 법 가르치는‘뉴타운 강의’없애다 경기도에서‘뉴타운 전문상담가 파견제 강의’ 라는 이름으로 거짓 정보를 유포한 전문가 강연도 딱 걸 렸다. 이곳에서 파견된‘전문가’ 들 중에는 재개발조합장 출신 등 실제로 재개발사업에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다.

“도 예산으로 3800만 원을 들여서 뉴타운 전 문가들을 초빙해‘찾아가는 뉴타운 설명회’ 를 버젓이 진행하고 있었어요. 뉴타운 사업에 찬성 하는 집주인들 모아놓고서 세입자 쫓아내는 방 법, 세입자 쫓아낼 때 돈 안 주는 방법, 이런 걸

“전문가들이랍시고 나와서 주민들 앉혀 놓고 사기를 치고 있더라고요. 도의회 상임위 회의에서 마이크에다 대고 동영 상 파일을 직접 틀어서 들려줬어요”

가르친 거야. 거기 참석한 사람 중 하나가 녹음 을 해서 인터넷에 올렸다가 문제가 될 것 같으니 바로 내렸는데, 지우기 직전에 이의환 정책국장이 그걸 딱 다운을 받아서 보내왔어요. 들어보니 내용이 장-난이 아닌 거야. 전문가들이랍시고 나와서 주민들 앉 혀놓고 사기를 치고 있더라고요. 도의회 상임위 회의에서 마이크에다 대고 동영상 파일을 직접 틀어서 들 려줬어요. 말도 안되는 질문 몇 개를 따서 담당 실장들한테 미리 물어보고, 그리고는‘전문가 강연에선 전 여성 진보정치 열전 55


혀 다르게 얘기하던데요? 그 부분의 동영상을 들려드리겠습니다’하고 문제가 되는 대목을 하나씩 하나 씩 틀어준 거지. 거짓말 뿐만이 아니예요,‘처녀는 시집 가면 아줌마가 돼서 돌아오지만 뉴타운 사업은 시 집갔다 돌아와도 계속 처녀다’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여성 비하 발언도 있었어. 그것도 다 틀어줬어요. 너 무 열 받아서 얼굴 벌개져서 버벅거리고, 아유, 난 그날 내가 뭐라고 얘기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나.”

뉴타운 사업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아무리 항의해도 꿋꿋하게 진행되던‘전문상담가 파견’강연은 2011년 행정사무감사 뒤 프로그램 자체가 없어졌다.

사람이 살아야‘마을’ 이고, 있는 그대로 두어야‘생태’ 다 신도시를 짓는 건 한계가 있다. 주거 환경은 개선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동안 시도한 도시재생 방법은 전혀 친인간적이지 않다. 사람이 쫓겨나고 네트워크가 산산조각난 곳을‘마을’ 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어떻게 하면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으면서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도시재생이 가능할까? 그 대안으 로 최김재연 의원이 2012년 공동발의한 조례안이‘경기도 마을만들기 지원조례’ 다. 기존의 관 주도가 아 니라 도지사와 주민의 책무를 같이 규정해서 주민이 주도하는 마을만들기, 상호 대등한 관계 속에서 주민

최김재연 의원 자신도‘마을’ 의 매력 속으로 함께 녹아들었다. 고양시 지역공동체 사업 <동굴(동네를 굴려라)>에서 뺀드 공연에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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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정하고 추진하는 마을만들기 사업을 해보자는 것이다. 최김재연 의원은 여러 부서를 통합적으로 운 영하고 특히 민관 협력을 통해서 추진하려고 전담 부서 안에 민간 전문가를 채용하고 배치하는 내용을 중 심으로 조례안을 만들었다.

“관건은 또 다른 뉴타운 사업, 제2의 돈 뿌리기 사업이 되지 않게 하는 거예요. 서울시 마을만들기 사 업은 이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일고 있죠. 경기도의 마을만들기 사업은 다르게 운영되게 감시할 겁니다. 주거 약자를 포함한 주민들이 마을 공동체를 형성하고 직접 바꾸어나가는, 제대로 된‘마을’ 을만 들 수 있게 말이죠”

최김재연 의원 자신도‘마을’ 의 매력 속으로 함께 녹아들었다. 고양시 지역공동체 사업으로 지원받고 있는 <동굴(동네를 굴려라)>에서 뺀드 공연에 함께 한다. 뺀드 이름은 <우리동네 활짝 열린 뺀드, 봄날은 온다>. 멤버는 고정적이지 않다. 아무나 와서 함께 할 수 있는 프로젝트 뺀드다. 악기가 없으면 쓰레기통 이든 뭐든 두드린다. 이제까지 1기, 1.5기, 2기로 3회 공연을 마친 <봄날은 온다> 뺀드에서 최김재연 의원 은 드럼을 친다. 뺀드 드러머 뿐만 아니다. 동네의 조합 소유 작은 도서관인 <재미있는 느티나무 온가족 도서관>의 조

‘우리동네 활짝 열린 뺀드’<봄날은 온다>에서 드럼을 치는 최김재연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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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원이자 동네 대안학교 <고양우리학교> 학부모이기도 하다. 최김재연은 이미 마을 공동체의 구성원 중 한 명이다. 한정된 지면에 상세히 싣지 못해 아쉬울 만큼 최김재연 의원의 관심 영역은 넓고 그 활약상 또한 놀랍 다. 지난 2월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에서 터진 불산 누출 사고 당시에는 최김재연 의원이 주도하여 시민사 회단체들과 함께 경기도의회 도시환경위원회에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발의했다. 최근에는 4대강 사업의 후속 작업인‘생태하천 복원사업’ 에 제동을 걸었다. 생태계를 복원하려면 땅을 사서 강폭을 넓히거나 보를 철거해야 하는데 제외지(하천 내부)까지 건드려가며 자전거 도로를 놓고 청계 천처럼 인공적으로 물을 순환시키려고 전기 펌프까지 설치하겠다니, 환경은 환경대로 파괴되고 돈은 돈 대로 버리고 대신 정치인들은 표를 얻겠다는 속셈이다.

“생태계 복원이 아니라‘공원화’ 예요. 처음에 사업 계획서를 보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중단하거나 전 면적으로 수정해야 할 사업’ 이라고 강하게 반대했는데도 그대로 강행되고 있어요. 도심 하천 같은 게 ‘표’ 가 되거든. 예산을 짜를려고 덤비니 지역구 의원들이랑 계속 싸워야했어요. 예결위에 들어갔을 때는 겨우 대여섯 개 짤랐어, 내 지역구랑 예결위에 안 들어와 있던 의원 지역구에(좌중 허망). 이건 정말 아니다 싶어서, 하다못해 중간 평가라도 하자고 제안하고 평가 용역 예산을 따내서 지금 진행 중이예요.”

“이래서 지방 의원이 필요한 거구나, 절실히 느껴요” 초선 의원으로 삼 년을 보낸 지금, 최김재연 의원은 공공연히 내년 불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2년 이상 한군데 붙어있어 본 적이 없던 최김재연, 본업인 건축 설계로 돌아가고 싶다며‘간절히’부르짖는다. 돈 들여 선거운동 해가며 가까스로 의원 하나 만들어 놓고는 나몰라라 하는 당을 향한 원망도 숨기지 않았 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원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사업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지방선거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건축·도시·문화 관련 시민단체에서 일할 때랑 비교해보면, 의원 되고 나서 정말 놀라웠어요. 시민 단체에 있으면서 할 수 있는 일보다 의원활동을 하면서 바꿀 수 있는 게 훨씬 많았어요. 조례 개정하고, 조 례랑 따로 노는 예산을 공무원이랑 협의해서 반영하고, 그러면 작은 도서관이든 마을 사업이든 확확 만들 어지는 거야. 진행도 일사천리예요. 그런 게 참 신기했어요. 이래서 의원이 필요한 거구나, 이게 정치구 나! 절실히 느꼈죠. 영화 <도가니>가 나왔을 때 경남에서 장애인 차별금지와 인권보장에 관한 조례를 발 의한 것도 여영국 의원을 위시한 노동당(당시 진보신당) 도의원들이었잖아요. 지방의원들 사이에 네트워 크가 긴밀하게 형성되고 소통이 되면 혼자 고군분투하는 것보다 훨씬 든든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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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살아남은 자들의 아픔 대구 지하철 해고 노동자들 이야기

2003년 참사의 책임은 고스란히 현장 노동자들에게 돌아갔다. 안전 위원회 구성과 인력 확충을 요구하며 88일간 파업을 한 노동자들의 요구에 사측은 해고로 화답했다.


노동르포

살아남은 자의 아픔 대구 지하철 해고 노동자들 이야기 서분숙 기록 노동자

2003년 2월 18일, 그 후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으로 내려갈 때마다 발걸음이 무겁다.. 십 년 전, 중앙로역 화재 발 생 소식을 듣고 이곳을 찾아왔을 때의 기억 때문일까. 그때 이곳은 이승과 저승 그 어디쯤 경계에 있는 장소 같았다. 세상을 떠난 사람, 너무나 갑자기, 그리고 너무나 처참하게 떠나 버려서 죽었다고는 도무지 믿기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의 흔적이 지하철 곳 곳에 스며있었다. 검게 타버린 검은 벽은 살아남은 자들의 글씨로 가득 차 있었다.‘사랑 해’ ‘ , 보고 싶어’ ‘ , 천국 가세요’ ….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만이 가득 차 있던 검은 벽. 그리고 이승과 저승, 그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 없던 사람들, 화마 속으로 사라져 버린 채 생사를 아직 확인하지 못한 사람들을 찾는 사진이 지하철 역 곳곳에 붙어있었다. 일 년도 아닌, 한 달도 아닌, 불과 며칠 전까지 한집에서 밥 먹고 웃던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눈빛은 퀭했다. 그리운 이들을 찾아 달라며, 실종자들의 사진을 내걸고 담요 한 장만 몸에 두른 채 화재의 현장에서 노숙을 하던 사람들의 눈빛이 선명하던 십년 전 중앙로 역. 십년이 지났어도 나는 그날의 이곳, 이 장소를 잊을 수 없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빼앗 아 가버린 곳. 삶과 죽음이 이렇게 한꺼번에 단절될 수 있다는 것을 순식간에 깨닫게 해 준 곳. 터질 듯이 가슴이 아파도 아픔을 묻고 사는 수밖에 없음을 수차 확인시켜준 곳. 떠나버 린 자에게나 살아남은 자들에게나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은 분노와 허망함을 동시에 알려준 장소일 것이다. 그러나 이곳의 아픔은 우연히 발생한 사건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2003년 2월 18 일. 그날,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직까지 그날의 아픔과 고 통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날, 지하철 사고 현장과 가장 가까 이에 있었던 대구 지하철 노동자들이다. 그날 그들도 동료를 잃었다. 가족을 잃거나 심한 60


노조 사무실에 모인 대구 지하철 조합원들 (사진 : 대구 지하철 해고자 복직 투쟁위)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상처는 세월이 갈수록 선명해지는 마음의 상처다. 대구 지하 철 노조 13명의 해고 노동자들. 그들은 십 년 전의 상처를 문신처럼 가슴에 깊이 새겨 넣고 살아가는 사람 들이다.

죽음을 빗겨간 공포 “지하철과는 무슨 인연이 있었던지, 대구에서 지하철 관련 큰 사고가 날 때마다 나는 잠깐 차이로 그 장소를 벗어나 있었어요. 내가 지하철하고 정말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전경배(대구 지하철 해고자 복직을 위한 투쟁 위원회 의장) 씨의 근무지는 대구 중앙로역이었다. 지하철 운 행과 관련된 전산 일이 그의 주 업무였다. 십 년 전, 중앙로역에서 화재 사고가 났던 시간은 그가 근무하던 시간을 벗어나 있었다. 192명의 사망자 명단 속에는 그날, 역사에 있던 두 명의 역무원과 청소 업무를 맡 았던 용역업체 노동자들도 있었다. 지하철 건설 공사가 한창이던 1995년, 전경배 씨가 살던 동네 부근 지하철 공사 현장에서 가스 폭발 사 고가 일어났다. 그가 막 직장에 도착하고 난 후에 일어난 사고였다. 그가 탄 버스는 방금 그 폭발 현장을 지나온 터였다. 사람이 붕 날아오르더니 순식간에 파편처럼 찢겨져 버렸다던 목격자들의 증언과 공사장 위를 지나가던 자동차가 장난감처럼 구겨져 널브러져 있던 현장 사진은 아직도 대구 지하철 도시가스 폭 노동르포 61


발 사고를 떠올리면 생생하게 떠오르는 장면들이다. 당시 사망자 수만 101명이었다. 부상이 심각한 사람 들도 많았다. 그는 두 번의 대형 참사를 모두 아슬아슬하게 빗겨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자의 아픔이 이런 걸까.‘지 하철과의 인연이 되려고 그런 일이 있었나 봐요’ 라고 말하지만 그의 무의식에는 죽음을 빗겨간 공포와 사 고 현장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에 대한 아픔이 깔려 있을 것이다. 너무 무겁고 아픈 감정이라서 스스 로 '인연'이라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한 것일 뿐. 그 무거운 운명을 어찌 인연이라고만 말할 수 있 을까.

승무원이 한 사람만 더 있었더라면, 비상등이 있었더라면… 어느 누구도 스스로 자신의 잘못이라 말하지 않던 중앙로역 사고는 지하철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에게 로 고스란히 사고의 책임이 돌아갔다. 이미 화재가 발생한 중앙로역으로 진입한 기관사가 정말 그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안고 있는가. 참사의 주범으로 몰린 1080호 기관사는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는 앞으로도 마음의 감옥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긴박했던 순간에 이미 반대편 철로의 전 동차는 불타고 있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기관사 외에 승무원 한 사람만 더 있었더라 도 불이 난 것을 빨리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전동차의 재질이 화재에 강한 재료들이었 다면 불은 훨씬 더디게 번졌을 것이다.

중앙로 역사는 질식할 듯한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문을 열 수도 닫을 수도 없는 그 순 간의 선택이, 본능적으로 마스터키를 뽑아 든 그 기관사가 정말 대형 참사를 일으켰나. 맨 처음 1079호 열차에서 불이 난 곳은 기관사가 있는 위치에서 화재를 알아채기

어려운 곳이었다. 기관사 외에 승무원 한 사람만 더 있었더라도 불이 난 것을 빨리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승객 대피도 더 빨랐을 것이며 상황실에 빨리 보고했더라면 맞은 편 1080호 전동차가 중앙로 역사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하철 재질의 문제도 참사를 키웠다. 땅 밑 밀폐된 공간을 지나는 전동차임에도 불구하고 차체의 재 질은 화재에 강한 것들이 아니었다. 마른 나뭇잎처럼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불이 번질 수 있었을까. 전 동차의 재질이 화재에 강한 재료들이었다면 불은 훨씬 더디게 번졌을 것이다. 전동차 안에서 사망한 사람뿐만 아니라 탈출 과정에서 출구를 찾지 못해 질식사한 사람들도 많다. 중 앙로 역사는 화재에 대비한 비상 시설이나 비상등이 없었다. 깜깜한 터널 속에서 기력을 다해 살 길을 찾 아봐도 길을 알려 줄 등대 하나 없는 절망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 사고가 난 당시는 중앙로역 바깥에서도 하늘을 볼 수 없을 만큼 검은 연기가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고가 난 몇 해 뒤에 찾아가 본 중앙로역 바닥엔 형광색 라인이 박혀 있었다. 저게 생명줄인가 싶어 한참을 바라본 기억이 난다. 생명줄이라고 하 62


기엔 너무나 허술해 보였던 푸른색 라인. 깜깜한 연기 속에서 과연 저 줄이 보이기나 할까 싶었다.

참사 뒤 안전을 요구한 노동자들의 88일 파업, 사측은 해고로 화답 2003년 참사의 책임은 고스란히 현장 노동자들에게 돌아갔다. 기관사와 역무원들이 구속되고 옥살이 를 하는 동안 대구 시장이나 지하철 공사 사장은 그 무엇도 책임지지 않았다. 당시 지하철 공사 사장은 참 사 때문이 아니라 중앙로 역사 화재 현장의 물청소를 지시한 증거인멸 혐의로 구속됐다. 무겁고 아픈 짐이 고스란히 노동자들의 삶을 짓눌러 질식시키는 걸 똑똑히 목격한 노동자들은 안전 위 원회 구성과 인력 확충을 요구하며 88일간 파업을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요구에 사측은 해고로 화답했 다. 그리고 오랜 숙련도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기관사 업무에 외주용역과 비정규직 고용을 추진하 고 있다. 지하철의 안전을 요구하며 파업을 한 노동자들을 해고한 도시. 그래서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하철 해고 노동자들이 있는 도시. 오늘날 대구는 지하철 안전을 위해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을까. 대구 지하철은 아 직도 여전히 기관사 한 명만이 탑승해 운행한다. 그들의 외롭고 위험한 질주는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빨리 떠날 줄은 몰랐는데. 젊어서 그런지 암이 번지는 속도도 빠르더라고요. 그 분만이라도 복 직 시키라고 두 달간 시청에 가서 집회도 하고 그랬는데…”

대구 지하철 본사 앞 농성 천막. 해고자들은 올해 여름을 여기서 보냈다.(사진 : 서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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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구 지하철 노조의 해고 노동자는 열두 명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직 열두 명이라는 숫자가 낯설다.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은 열세 명으로 불렸지만 지난 해 지하철 노조 해고자 서장환 씨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해고자라는 이름표를 꼭 떼어 주고 싶었지만, 그 이름표를 떼버리면 어쩌면 기적처럼 그 가 병을 이기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도 품었지만 그는 결국 해고자의 이름표를 떼버리지 못한 채 삶의 경계를 넘어가버렸다. 또 다시 살아남은 자의 아픔이 시작되었다. 열두 명이란 숫자가 여전히 낯설 고 아픈 이유는 끝끝내 해고자인 채 세상을 떠나 버린 동지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통곡의 벽’ 에는“안전한 지하철”홍보 글만 잔뜩 대구 중앙로 역사에는‘통곡의 벽’ 이라 불리는 벽이 있다. 알루미늄 합판을 세운 벽일 뿐이지만 그 벽 너머에는 십년 전 화재 사고 당시의 참혹한 현장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중앙로 역사 안으로 내려가는 계 단을 밟는다. 이미 여러 번 이 계단을 밟았지만 밟을 때마다 만감이 교차한다. 그날 이 계단으로 살아서 올 라 온 사람. 혹은 다시는 살아서 이 계단을 밟지 못한 사람. 그리고 실종자들을 찾는 가족들이 발길이 닳도 록 오르고 또 내렸을 계단. 이렇게 아픈 계단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역사 안을 두리번거려 봐도 통곡의 벽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안내판 하나 정도는 세워두지 않았을 까 내심 기대를 했지만 그것은 나의 섣부른 기대일 뿐이었다. 들어가는 곳과 나가는 곳이라는 안내판도

십년 전 화재 사고의 현장을 증언하는 통곡의 벽. 추모의 글귀는커녕 지하철이 얼마나 안전하고 우수한 교통수단인지를 알리는 홍보 글만 잔뜩 벽을 도배하고 있다.(사진 : 서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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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직하게 걸어 놓았지만 이 역사 안 어디에도 그날의 기억을 증언하는 푯말은 보이지 않는다. 개찰구 옆 에 서 있는 역무원에게 다가가 '통곡의 벽'이 어디에 있냐고 물어 보았다. 순간 그의 표정에서 당황하는 기 색이 역력하다. 무슨 일로 그러느냐고, 어디서 왔느냐고 재차 의심하듯 되묻는 역무원의 태도가 몹시 맘 에 걸린다. 그냥‘통곡의 벽’ 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할 뿐이라는 나의 말에 그는 손가락으로‘저쪽’ 이라며 방향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곳 안은 절대로 볼 수 없다는 말도 덧붙인다. 이미 십 년 전에 다 보았던 현장 이다. 그 현장을 다시 본들 그게 뭔 대수일까. 사고를 은폐하고 가리기에 급급했던 지하철 공사의 태도는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는 듯하다. 저 얇은 벽 너머엔 그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흔적을 보관하고자 한 쪽은 유족들이었을 것 이다. 해마다 2월 18일이 되면 유족들은 닫힌 저 문을 열고 그날의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날의 비 명과 절규가 남아 있는 곳. 흘러내린 전화 줄과 연기에 그을린 사물함, 그리고 누군가가 써놓은‘천국에서 만나’ 라는 글귀가 타버린 벽 위에 벽화처럼 새겨진 그곳엔 그들의 죽음이 정말 누구의 책임인지 되묻는 목소리가 살아있다. 추모하는 글귀라도 하나 걸려있지 않을까 싶어 벽 구석구석을 훑어 봤지만 추모의 글귀는커녕 지하철 이 얼마나 안전하고 우수한 교통수단인지를 알리는 홍보 글만 잔뜩 벽을 도배하고 있다. 그 옆에는‘대구 시민의 무더위 쉼터’ 라는 안내글도 나란히 붙어 있다. 도심의 더위를 피해 잠시 머물고 가라는 의미로만 받아들이기엔 맘이 너무 복잡하다.‘무더위 쉼터’ 라는 이름에 걸맞게 비치 파라솔 용도로나 쓸 법한 의자 와 탁자가 여러 개 놓여있다. 그곳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저 벽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느 냐고 물어 보았다.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은‘우리는 그저 여기서 쉬고 있을 뿐, 저 벽 너머 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고 태평스럽게 말한다. 참 무서운 도시의 벽이다.

대구 지하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까닭 “그날의 기억이 사라지질 않길 바라는 마음, 왜곡되거나 훼손되지 않도록 지키고 싶은 마음, 그것이 아 프지만 참사 현장을 보존하고픈 유족의 마음일겁니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아픈 장소를 남기고 싶은 건지, 통곡의 벽 너머에 있는 장소에 대해 유족들이 가진 마음은 어떤 것일까 하는 나의 물음에 전경배 씨가 들려준 대답이다. 아픈 것보다 견디기 힘든 게 왜곡되 는 것이다. 왜곡되는 것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건 잊혀지는 것이 아닐까. 해고가 되고 복직 투쟁을 이어온 세월이 팔 년이다. 그 사이 지하철 노조엔 복수 노조가 만들어지고 해고자들에게 지급되던 생계비도 절반 으로 줄어들었다. 인천, 부산 등 다른 도시의 해고자들은 모두 지하철 현장으로 돌아갔지만 대구시는 아 직도 이들의 복직을 외면하고 있다. 사방을 둘러보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처럼 바람 한 점 들 지 않는 이 도시가 답답하다. 노동르포 65


지난 6, 7, 8월. 삼 개월 동안 대구 지하철 본사 앞에서 진행된 천막 농성 당시 시민들이 보여준 관심은 진지했다. 지하철에 이토록 오랫동안 해고자가 있었다는 사실도, 그리고 내년에 개통될 3호선은 무인 전 동차로 운행되기 때문에 1, 2호선보다 더 많은 위험을 안고 있다는 조합원들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기울 이고 호응했다. 그러나 대구의 정치적인 지향을 바꾸기까진 아직 길이 먼 걸까.‘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묻 고 가자’ 는 식으로 주저앉아 버리는 대구 시민들의 정서가 답답하다. 그런 정서가 결국은 수많은 참사를 일으키고, 이 젊은 노동자들을 오랜 세월 일터 밖으로 내몬 주범은 아닐까. 난생 처음 대구가 질식할 듯 숨 막히게 다가오던 순간이었다. 통곡의 벽 너머에 있는 장소처럼 해고자들의 존재도 참사의 아픔을 증언하 는 상징이다. 기억해야 할 건 아직 너무나 많다. 대구 지하철이 개통되던 97년에 입사해서 대부분 2005년 전후로 해고되었으니 이제 지하철에서 일한 시간과 해고 이후 거리에서 보낸 날들이 엇비슷하다. 지하철 직원들이 사용하는 패스카드 대신 동그란 승 차권을 넣고 개찰구를 통과할 때마다 여전히

참사 직후에는 시민들에게 몰매를 맞을까 싶어 지하철 공사 작업복을 입지도 못하 게 했다. 이제는 살아남은 자의 아픔을 딛 고 그 옷을 다시 입으려 한다.

적응되지 않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하철 개찰구를 지나고 전동차에 오르지만 언제나 아프고 쓸쓸하다. 역사에 서면 비참함과 상실 감이 몰려온다는 어느 해고 노동자의 말은 그 만이 겪는 특수한 감정은 아닐 것이다. 십년 전 참사 직후에는 시민들에게 몰매를 맞을까

싶어 입지도 못하게 했다는 지하철 공사의 작업복. 그러나 이제는 살아남은 자의 아픔을 딛고 다시 그 옷 을 다시 입으려 한다. 대구 지하철 해고 노동자들은 참사의 트라우마가 만든 활화산이다. 그러나 이 뜨거운 열기가 이들의 가슴 속에만 있을 것인가. 아직도 밀폐된 공간에 홀로 있지 못한다는 그날의 생존자들. 갓 생긴 생채기처 럼 몸과 마음에 선연한 그날의 핏자욱을 지울 수 없는 사람들. 이들이 모두 대구의 활화산이다. 지하철에 서 약간의 위험만 감지되어도 소름이 돋고 뛰쳐나가고 싶다는 대다수의 대구 시민들은 그날의 참사를 기 억하는 증인들이다. 그 생생한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현장에 대구 지하철 해고 노동자들이 있다. 그들이 반드시 일터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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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포럼

2014년 예산, 구조적 세입 부족 선(先) 적자 후(後) 증세가 답이다 홍원표 정책실장

경제 위기 이후 최대 적자 규모 2014년 예산의 총수입은 370.7조원이고, 총지출은 357.7조원이다. 총수입과 총지출만 따지면 13조원이 남는 흑자예산이지만, 흑자는 기금(수입 125.5조, 지출 105.9조)에서 발 생하는 것이고 기금을 제외한 예산은 수입보다 지출이 6.6조원 더 많다. 적자예산이다. 조세수입은 2014년 218.5조원으로 2013년 본예산에 비해 불과 1.0% 증가에 그쳤다. 경 제성장이나 물가인상률을 따지면 실질 조세수입은 감소다. 세외수입은 2013년(본예산) 36.9조에서 2014년 26.7조원으로 10.2조원 감소되었고, 2013년 추가경정예산에 비하면 3 조원 가량 감소한 수준이다. 2014년 예산은 국민연금 등의 사회보장성 기금을 제외하고는 모든 수입이 부족한 형편 이다. 그러다보니 2014년 관리재정수지는 25조 9,000억원 적자다. 이는 올 추경예산안 적 자인 23조 4,000억원보다 많고,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의 43조 2,000억원 적자 이후 가장 큰 규모다. <표> 2014년 예산 개요(단위: 조원, %) ’ 13예산

’ 14안

증가율

본예산

증가율

추경

증가율

본예산

추경

ㅇ총수입

372.6

8.5

360.8

5.0

370.7

△0.5

2.8

ㅇ총지출

342.0

5.1

349.0

7.2

357.7

4.6

2.5

ㅇ 관리재정수지

△4.7

△23.4

△25.9

(GDP대비)

(△0.3)

(△1.8)

(△1.8)

464.6

480.3

515.2

(34.3)

(36.2)

(36.5)

ㅇ 국가채무 (GDP대비)

정책포럼 67


뻥튀기 세입 전망 2014년 총지출증가율은 2013년 본예산 대비 4.6%, 추경예산 대비 2.5%로 경제성장과 물가인상을 고 려할 때 사실상 지출 동결에 가깝다. 그럼에도 적자가 나는 이유는 세입이 충분히 증가하지 않기 때문이 다. 정부는 세입이 충분히 늘어나지 않는 원인으로 성장세 회복 지연을 꼽는다. 하지만 2014년 예산은‘회 복 지연’ 이라고 하기에 비교적 높은 3.9%의 성장률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행은 지난 7월에 발 표했던 4.0% 전망을 10월 들어 3.8%로 하향조정 했고, IMF 역시 3.9%에서 3.7%로 하향조정했다.

2001년 이후 정부의 세수예측보다 징

최근에 발표된 국회예산정책처의 경제성장률 전

수 실적이 높았던 경우는 13회 중 6회

망은 3.5%다. 정부의 예상만큼 경제가 성장하지

로 채 절반이 되지 않는다.

못 하면, 조세 수입은 줄어들고 세수부족과 적자 규모는 더욱 커질 것이다. 2012년 예산안 편성의 전제가 되었던 성장률

전망은 3.3%였고 실제 성장률은 2.0%였다. 2012년 국세수입 예산은 205.8조원이었고, 실제 수입은 203 조원으로 2.8조원이 부족했다. 2013년 경제성장률 전망은 4.0%였으나 3/4분기가 지난 시점에서 조정된 전망치는 2.7%다. 2013년 예산안은 결국 추경을 통해 국세수입을 6조원 줄였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국 채를 발행했다. 그럼에도 2013년 7월까지 걷힌 국세수입은 122.7조원으로 2012년(130.9조원)에 비해 8.2조원이 적은 수준이다. 이는 올 한 해 걷혀야 하는 전체 세수의 58.3%에 불과해 최근 3년 간 7월 세수 진도비 평균인 64.2%에 비해 5.9%나 낮은 수준이다. 2001년 이후 정부의 세수예측보다 징수 실적이 높 았던 경우는 13회 중 6회로 채 절반이 되지 않는다.

구조적 세입 부족 경기 침체가 세입 감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하지만, 현재의 세입 부진은 경기 침체가 아닌 다른 원인의 영향이 크다. 단적으로 3.9% 성장률을 전제로 편성된 2014년 예산안에서 세입 증가율은 경제 성 장률에 크게 못 미치는 1.0%에 불과하다. 국회예산정책처는「2014년 재정운용 방향 및 주요 현안」 이라는 보고서를 통해‘최근의 세입 부진은 경 기적 요인뿐만 아니라 경기외적인 구조적 요인에도 일부 기인’ 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국회예산정책처가 꼽는‘경기외적인 구조적 요인’ 으로는‘법인세율 인하 등 법인세 부담을 완화시키는 세제개편으로 인해 영업잉여에서 법인세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 와‘FTA 등 무역자유화의 확대 등 으로 실효관세율이 지속적으로 하락(1980년대 8%대 → 2012년 1.7%)’등이다. 쉽게 말하면, 기업들이 돈 68


박근혜 대표는 중장기적으로 재정균형을 이루겠다고 약속한다.(SBS 보도자료)

은 많이 버는데 충분히 세금을 내지 않아서 걷어 들이는 조세 수입이 시원찮다는 얘기다.

근거 없는 균형 회복 약속 적자예산을 제출한 정부는 중장기적으로 재정균형을 이루겠다고 약속한다. 세입 확대와 세출 절감을 통해 2017년까지 총수입 증가율은 5.0%로 유지하고 총지출 증가율은 3.5%로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2014년 총수입 증가율은 -0.5%이고 세입증가율도 1.0%에 불과하다.‘구조적 요 인’ 을 바꾸지 않는 한, 수입 증가율을 5.0%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해 6~7% 이상의 경제성장이 보장되 어야 한다. 아니면 국가 자산을 팔아 치워야 한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가 발표한 중기재정운영계획에 따르면 2017년 610조에 달하는 국가채무를 GDP 대비 35.6%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를 역산하면 2017년 GDP 규모는 1,700조원을 넘는다. 이는 매해 7% 이상의 경제성장을 전제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도 버렸던 747 공약의 재림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적자 예산, 정책 비전도 실현 의지도 없는 예산 누적된 세수 부진으로 인해 2014년 국가채무는 515조에 달할 예정이고, 2017년에는 610조에 육박하 게 된다. 이렇게 채무가 늘고 나라 살림살이에 적자가 나는 것 자체가 큰 문제는 아니다. 명확한 정책 목표 가 있고, 이후 살림살이 운영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균형예산 또는 흑자예산을 무리하게 고집 정책포럼 69


하는 것보다는 적절한 적자예산 운영을 통해 적극적으로 경제정책이나 사회정책을 집행하는 것이 낫다. 예산은 단순한 살림살이가 아니라 정책 비전을 실현하고자 하는 집행 의지의 표현이다. 예를 들어, 김 대중 정부는 기초생활보장제나 육아휴직제의 도입, 실업보험의 확대 등 자신의 복지 확대 정책을 예산에 반영했다. 이명박 정부는 4대강에 50조라는 사상 초유의 예산을 쏟아 붇기도 했다. (물론 과거 정부가 잘 했다는 이야긴 아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의 2014년 예산안에서 정부의 정책 의지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2014년 예산안 은 ① 경제활력 회복과 성장잠재력 확충 ② 일자리 창출 ③ 서민생활 안정과 삶의 질 제고 ④ 국민안정 확 보와 든든한 정부 구현 ⑤ 건전재정 기반 확충과 재정운용 개선 등 5개 중점 사업을 제시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이들 중점 사업은 정부가 이전까지 진행해 오던 사업을 그저 묶음으로 내놓은 것 이상의 정책 비 전을 담고 있지 못 하다.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 대한 진단도 없고, 중 점 사업을 통해 해당 과제를 어느 정도까지 해결하겠다는 정책 목표도 불명확하다. 따라서 적자 예산이 편성되어야 할 이유 또한 찾기 어렵다. 마치 제대 말년까지 근근이 시간이나 떼우자는 말년 병장의 생활 계획표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비정규직 확대 예산, 반복지 예산 명확한 정책 의지가 없다보니, 2014년 예산은 자신의 공약조차 번복하는 예산이 되었다. 이미 언론 등 을 통해 수없이 지적된 것처럼,‘모든 어른신’ 께 드리겠다던 기초노령연금은 대상층을 70%로 축소하고 그나마 선별 지급으로 바뀌었다. 4대 중대질병 지원도, 5세 이하 보육 지원도, 반값 등록금도, 단계적 고 교 무상교육 도입도, 방과후 돌봄서비스 확대도 모두 축소·후퇴되었다. 대표적인 반(反)복지 예산이다. 복지 공약 후퇴와 더불어 2014년 예산의 더 큰 문제는 비정규직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는 점이 다. 5대 중점 사업 예산으로 제시된‘일자리 창출

2014년 예산은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 조차 번복하는 반(反)복지 예산이고, 비 정규직을 더욱 확산시키겠다는 반(反) 노동 예산이다.

사업’ 의 핵심 중 하나는‘시간 선택제 일자리 확 산을 위한 패키지 지원’예산이다.‘시간 선택제’ 라고 우아하게 표현했지만, 단시간 노동을 확대하 겠다는 것이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한국은 OECD 가입국 중 비정규직 비율이 가장 높고 그에 따른 고용불안이

가장 심각한 나라다. 한국 비정규직 노동시장의 특징은 파트타임(단시간 노동) 비중이 높은 서유럽과는 달리 주로 기간제와 간접고용 비정규직의 비중이 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은 고 사하고 오히려 단시간 비정규직을 더욱 확산시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대표적인 반(反)노동 예산 이다. 70


선(先)적자 후(後)균형 예산 편성해야 정책 비전도, 재정 철학도 없는 박근혜 예산이지만, 어쨌거나 공은 국회로 넘어왔다. 새누리당은 자당 의 대통령이 제출한 예산이니 이른바‘쪽지 예산’ 으로 자기 지역구 챙기기 계수 조정이나 지역 토목 사업 끼워넣기 외에는 큰 변화 없이 통과시킬 가능성이 크다. 민주당은 공약 포기 예산, 국민 사기 예산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지금의 한정된 조세 구조 안에서 크 게 다른 대안을 찾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물론 불요불급한 국방비 예산이나 SOC 예산 일부를 삭감하고 복지와 일자리 정책으로 그 재원을 돌리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 재원으로 민주당이 주장 하는 보편복지 확대는 물론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 이행조차 쉽지 않다. 한편, 최근 몇 년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3% 내외를 보여 왔다. 경제성장률은 경기 침체의 영향도 받 지만, 경제 규모가 커지면 성장률 자체가 2~3% 이하로 낮아지는 경향도 보인다. 따라서 세계 10위권 대 경제 규모를 가진 한국이 향후 4~5%대 성장을 전제로 한 재정정책을 유지한다면 만성적 적자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즉 보편복지 확대 등 재정 지출 증가 요인이 발생하지 않더라도,‘경기외적인 구조적 요 인’ 을 수정하지 않으면 현 상태의 재정 균형조차도 유지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증세는 불가피하다. 하지만 증세의 필요성이 증세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우리 사회가 큰 틀의 사회적 합의를 이룬다 해도 구체적인 방안을 둘러싼 이해관계 조정 역시 단기간에 이루어질 일은 아니다. 따라서 2014년 예산은‘증세도, 복지 확대도 없는’예산이 되거나‘증세 없는 복지 확대’예 산이 될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가 제출한 예

당장의 증세가 어렵더라도 보편적 복지

산안이‘증세도, 복지 확대도 없는’예산이니 이

확대를 위한 공격적 예산 편성이 필요하

를 위한 특별한 대안이 필요하진 않다. 고로

다. 선 적자 후 증세 전략이 필요하다.

2014년 예산을 둘러싸고 진보진영이 주장해야 할 것은‘증세 없는 복지 확대’예산이다. 이는 수입 증가 없이 지출을 늘리자는 것이니 결국 적자 폭을 키우자는 것이다. 즉 진보진영이 주장해야 할 것 은 (국채 발행 등을 통해) 2014년 예산의 적자폭을 현 정부가 제출한 25조 9,000억원보다 더 크게 늘려 보편 복지 확대를 위한 지출 재원을 확보하고 향후 증세를 통해 중장기적으로 재정 균형을 맞추자는 것이 어야 한다. 선 적자 후 증세 전략이 필요하다.

정책포럼 71


2014 지방선거

지방선거 목표는 ‘유효정당’ 으로의 재진입 최백순 비서실장

정치는 기본적으로‘돈’ 과‘조직’ 이다. 기초적인 정치사업을 하더라도 돈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당의 기초조직인 당원협의회를 예로 들어보자. 지역현안을 가지고 캠페인을 진 행하려고 한다면 당연히 돈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조직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도 당연하 다. 돈이 없다면 캠페인은 수세적인 형태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거꾸로 돈이 있더라도 조 직이 가동될 수 없다면 마찬가지다. 돈과 조직은 동전의 양면이다.

독일의 정당보조금 독일정당들의 정치자금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당원들이 내는 당비다. 독 일의 정당들은 역사가 오래된 탓에 당원들의 당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편이다.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사민당의 경우 한때는

돈과 조직은 정당정치에서 동전의 양면과 도 같다. 독일의 경우 득표수에 따른 국가 보조금 외에도 진성당원이 많은 정당에

당원들이 내는 당비가 연간 천 억여 원에 달할 정도였다. 과거 사민당의 당비수입은 기민당을 압도했지만 지금은 그 차이가

국가보조금이 나온다. 진성당원 중심의

많이 좁혀진 상태다. 그 이유는

정당을 우대하는 것이다.

기민당의 당비수입이 늘어난 것 이 아니라 사민당의 당비수입이

급감한 탓이다. 전통적으로 노동조합의 지지를 받아왔던 사민당은 적록연정 당시에 노동조 건과 복지를 후퇴하는 정책으로 인해 당원들이 대거 탈당했다. 두 번째는 특별당비와 정치후원금이다. 특별당비는 연방의원들이 당에 내는 당비다. 연 간 수십억원에 달하는 적지 않은 금액이다. 정치후원금이 큰 비중을 차지할 것 같지만 실상 72


은 그렇지 않다. 주로 기업들이 후원하는 경우인데 기민당이나 사민당이나 특별당비 규모 수준이다. 물론 기민당의 경우 기업들의 정치후원금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기는 하다. 최근 독일총선에서 5퍼센트 득 표에 실패해 90여명의 연방의원들이 길거리로 나앉은 자민당의 정치후원금이 압도적이다. 친(親) 자본가 정당인 자민당에게 기업들이 후원을 하고 자민당이 기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때 자본의 입김을 불어 넣는 구조다. 독일총선 결과에 가장 경악한 것은 자민당이 아니라 기업들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치자금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국고보조금이다. 불법적인 정치자금을 차단 하고 정당의 재정이 투명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국가가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철저하게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는 정당에게 국고보조금이 집중되는 구조다. 하지만 독일의 경우 정당이 획득한 득표수에 따라 국고보조금을 배분한다. 400만 표까지는 1표당 0.85유로, 그 이상은 1표당 0.7유로를 국 고보조금으로 지원한다. 철저하게 표의 등가에 의한 지원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400만 표를 기준으로 보 조금액을 줄이고 있다는 점이다. 거대정당과 중소정당의 보조금 금액차가 벌어지는 것을 어느 정도 제한 하는 장치인 셈이다. 당원들이 내는 당비에도 별도의 보조금이 있다. 당비 1유로당 0.38유로를 국가보조금으로 추가 지원 해준다. 요컨대 사민당의 당원들이 연간 백억원의 당비를 낸다면 국가가 38억원의 국가보조금을 지원해 주는 식이다. 득표수에 의한 국가보조금이 등가성에 기초하고 있다면 당비에 대한 추가 보조금은 진성당 원이 많은 정당에게 주어지는 인센티브에 해당된다. 정치자금을 공영화하고 진성당원 중심의 정당을 우

2012년 총선 당시 광주시당 당원들이 선거운동을 하는 모습 (사진 : 노동당 광주시당)

2014 지방선거 73


대하는 것, 이것이 독일 국가보조금의 기본방향인 셈이다.

2012 총선, 그리고 광역당부의 현실 지난해 총선에서 노동당(당시 진보신당)은 정당지지율 1.11퍼센트를 얻었다. 그 결과 정당법에 따라 당 이 등록취소를 당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맞이했다. 애초에 당의 목표는 정당지지율 3퍼센트 획득을 통한 국회의원‘최소’한 명의 당선 즉, 원내재진입으로 당의‘시민권’ 을 되찾는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여의도 의 연단에 스피커가 없는 원외정당이 갖는 한계를 당과 당원들이 절감하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사실 정당 이 원내에 의석을 확보하려는 것은 몇 석이냐는 차이가 있을 뿐 당연한 목표에 불과하다. 목표의 핵심은‘최소’ 라는 것에 있었다. 원외정당의 약점은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활동가들만의 정당 으로 당원과 지지자들에게 인식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언론의 노출횟수가 급격히 줄어 들고 그것은 평당원들과 지지자들에게 정치적인 피로감을 안겨주게 된다. 한마디로 당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낮아진다는 것이다. 지지자들의 경우는 다른 진보정당으로 그 기대감을 바꾸는 것으로 이어진다. 흔 쾌하지는 않지만,“무엇인가를 하는 당과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 당”사이에서 지지자들이 선택을 바꾸는 것을 탓할 수도 없다. 단 한 석이라도 국회에 의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지지자들에게 당에 대한 기대감 을 유지하게 하는 출발점인 것이다. 그 최소한의 목표가 실패한 것이다. 총선에서 시민권의 획득에 실패한 것은 정치적으로 가장 큰 평가의 영역일 것이다. 재차 말하지만 정 치적인 결과만을 선거의 평가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정당은 재정이 필요하고 당원의 당비만으로 당을 운영하거나 선거에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3퍼센트가 원내진출 규정이라면, 2퍼센 트는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 규정이다. 2012년 총선 직전 노동당이 받은 국고보조금은 1억 7천만원 정도 다. 연간 금액을 일시불로 받은 것이 아니다. 1/4분기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같은 분기에 여전히 국회의원 두석을 가지고 있던 창조한국당이 받은 금액

지난해 총선에서 노동당은 정당지지율 2 퍼센트를 넘지 못해 선관위 등록이 취소 됐다. 그와 함께 4년간 활용할 수 있는 국

은 2억원 정도다. 2008년 정당 지지율이 2.5 퍼센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기억을 되살려보면 2008년 총선에서 당은 2.94퍼센트를 획득해 원내진출에 실패한 바

고보조금 또한 허공으로 날린 것도 간과

있다. 하지만 이때 2퍼센트 이상을 득표하면

해서는 안되는 대목이다.

서 4년간 국고보조금을 확보한 것이다. 4년간 의 총액으로 보면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다.

지난해 총선에서 노동당은 2퍼센트를 넘지 못해 등록취소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그것과 함께 4년간 활용할 수 있는 재정을 일시에 허공으로 날린 것도 간과해서는 안되는 대목이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중앙당 당직자들의 임금이 모두 백만 원 미만으로 삭감되었다. 여덟 시간 노동을 74


2010년 당시 진보신당 경남도당 지방선거 후보자 기자회견 (사진 : 노동당 경남도당)

기준으로 보았을 때 최저임금법 위반이다. 결국 당직자들의 출근시간을 늦추고 퇴근시간을 당기는 결정 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앞당긴 퇴근시간에도 업무를 계속하고 있는 당직자에게 사무총국 책임자는 뭐라고 이야기해야만 했을까. 홍원표 정책실장! 일 그만하고 퇴근하시오? 유탄을 맞은 곳은 다른 데 있었다. 서울 정도를 제외한 광역당부였다. 16개 광역당부는 국고보조금을 통해 중앙당 파견당직자 제도라는 것을 운영하고 있었다. 요컨대 국고보조금으로 16개 광역당부에 당직 자 한 명의 인건비를 지원한 것이다. 또 다른 핵심은 여기에 있다. 강원도당에 당직자 한 명이 더 있는 것 과 그렇지 않은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충 남도당, 대전시당, 아니 제주도당 역시 마찬 가지다. 대전시당은 최근에야 상근 사무처장

유탄을 맞은 곳은 다른 데 있었다. 서울을

을 발령냈다. 선거를 준비하기 위해서이고 그

제외한 광역당부였다. 16개 광역당부는

재정은 확인해보지 않아도‘적자편성’ 일 것이

국고보조금으로 파견당직자 제도라는 것

다. 선거를 앞두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는

을 운영하고 있었다. 각 지역에 당직자 한

법이다. 지방 광역당부의 상근자 한 명은 고

명의 인건비를 지원한 것이다.

양이 손이 아니라 호랑이 손이다.

‘평균’ 이라는 착시 현상에 빠져선 안된다 먼저 간단한 문제를 확인하고 넘어가자. 현역기초의원과 당선이 가능한 기초후보는‘당연히’무조건 2014 지방선거 75


출마해야 한다. 필요에 따라 선거연합도‘당연히’열어놓고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위원회가 결정한 광역후보 출마는 최소한 재정적으로 지난해 총선 이전으로 당을 복귀시키자는 것이다. 당이 재정 적으로 유동성에 빠져 광천김을 파는 사태는 더 이상 곤란하다. 전국위원회에서 제출된 득표 목표 수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당원들이 있다. 전국적으로 정당득표율 평 균 2퍼센트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출마한 후보들이‘평균’15퍼센트의 득표율을 올려야 하며,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수치라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평균’ 이라는 수치에만 빠진 일종의 착시현상이다. 전국위 원회에 제출된 데이터를‘종합적’ 으로 살펴보지 않은 결과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40만 표다. 출마한 후보들의 평균이 아니라‘득표수’ 가 핵심이다. 예컨대 현재 경남 도의원인 여영국 당원이 지난 선거에서 획득한 표는 2만 표다. 마찬가지로 창원 선

광역후보 60명 이상 출마전술은 노동당이 여전히‘유효정당’ 이라는 것을 천명하기 위 해 필요하다. 당원들과의 소통보다 더 중요 한 것이‘지지자들과의 소통’ 이다. 그것이 우리가 정당을 하는 이유다.

거구에 출마할 다른 광역후보도 최소한 그 절반의 득표는 가능하다. 부산, 울산, 그리 고 창원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부울경벨트 는 평균 이상의 득표수를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수도권에서 출마하는 광역후보들이 “반드시 15퍼센트를 득표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 라는 것이다.

노동당이 준비하는 선거는 총선이 아니다. 진보정당은 지방선거에서“당선 가능한 기초의원” 을 제외 하고 대응할 수 있는 선거전략이 많지 않다. 즉, 지방선거는 노동당이 획득할 시민권 같은 것이 불분명한 선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당이 여전히‘유효정당’ 이라는 것을 당원과 지지자들에게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 광역후보 60명 이상 출마전술은 그런 면에서 당원과 지지자들에게 당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의미가 있다. 당원들과의 소통보다 더 필요한 것은“지지자들과의 소통” 이다. 그것이 우리 가 정당을 하는 이유이고 선거에 참여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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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토론

같은 실패, 다른 배움 •심상정을 가르친 자들의 비애 •헌법 밖의 진보? 헌법 안의 진보?


쟁점 토론

같은 실패, 다른 배움 ①

심상정을 가르친 자들의 비애 김민하 정책위원

살다보면 아픈 상처도 다시 꺼내어 들여다봐야 할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심상정은 각계에서 제기되는 정계개편 시나리오의 가장 중 요한 고리를 쥐고 있는 사람 들 중 하나다.

아프더라도 되짚어봐야 하는 것들 심상정, 그 이름 석 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슬프다거나 안타 깝다는 뜻이 아니다. 말 그대로 가슴이 아프다. 화병이 이런 것인가 싶 다. 아마 나만 느끼는 감정이 아닐 것이다. 2010년 지방선거부터 지금 까지 노동당에 남아있는 당원들이면 누구나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그 만큼 정치인 심상정은 노동당에 엄청난 상처를 남긴 사람이다. 떠난 사람 이야기를 왜 또 꺼내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기억하고 싶 지 않은 수많은 아픔들을 왜 새삼 떠올리게 만드느냐고 타박을 들을지 도 모른다. 하지만 살다보면 아무리 아픈 상처도 다시 꺼내어 들여다봐 야 할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진보정치의 입장에서는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런 저런 정계개편 시나리오가 각계에서 제기 되고 있다. 민주당이‘신(新)야권연대’ 를 언급하는가 하면 정의당과 안 철수 신당과의 연대설도 흘러나온다. 노동계 일각에서 노동자들이 중 심이 된 진보정당을 다시 건설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는가 하면 우리 당과 정의당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수의 활동가들도 점차 목소리를 높여가는 상황이다. 이런 시기에 어떤 세력이나 사람에 대한 호불호를 말하는 것은 오히 려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냥 말을 하면 된다. 정계개편의 어떤 전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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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아무런 신경을 쓰지 말자거나, 노동계의 움직임에 주목해야 한다거나, 최소한 정의당과는 함께해야 한 다거나, 안철수까지 포괄하는 제3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등의 말을 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어떤 특정한 주장들을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자기 주장만을 반복하며 끝나지 않는 평행선을 달려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이 보 았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만든 선입견들이 어떤 사안에 대한 진지한 논의 자체를 가로막고 있다.

『실패로부터 배운다는 것』 이 낯설지 않은 까닭 이런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일단 주장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는 것이다. 주변 상황의 인식 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대가 있어야 토론을 하고 결정을 할 수 있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논의해야 할 주제 의 핵심을 엮어낼 연결고리를 찾아내고 그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향후 우리가 마주해야 할 정계개편의 가장 중요한 고리를 잡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라는 것은 쉽게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심상정 원내대표는 노동계 출신이 면서 상당한 인지도를 얻었고 최근에는 안철수-심상정 교감설의 한가운데 서기도 했다.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가장 쉬운 방법은 그가 남긴 글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정치인 심상정의

2008년 2월 민주노동당 임시 당대회에서 비대위 혁신안이 무산된 후 퇴장하는 심상정 대표 (사진 : 참세상)

쟁점토론 79


글 중 가장 최근에 나온 데다 분석해볼 만한 진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실패로부터 배운다는 것』 이라 는 단행본이다. 앞서 언급한 안철수-심상정 연대설도 바로 이 책의 일부 서술로부터 제기됐다. 때문에 진 보정치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세력의 입장에서는 이 책의 내용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

민주노동당을 나와 진보신당을 창당하고, 다시

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익히 아는 이야기들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

진보신당을 나가 통합진보당을 창당하고, 또

다. 이 책은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구성

다시 통합진보당을 나와 정의당의 원내대표가

돼있다. 첫 번째는 정치인 심상정이 생

될 동안 별다른 발전이 없었다는 자기고백으로

각하는 이 시대에‘진보’ 라고 불릴 만한

읽힌다.

정책적 지향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는 향후의 정치적 전망에 대한 것이다. 세 번째는 정치인 심상정이 그간 해온 일들

에 대한 반성인데 이 모든 내용이 그리 낯선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잠시 놀라게 된다. 그가 제시하는 정책적 지향과 정치적 전망은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문제의식에서 크게 벗어나있 지 않다. 정치개혁을 해야 하고 노동의 몫을 찾아줘야 하고 복지제도의 확대가 필요하며 젊은 세대들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는 식의 선언들은 2000년대 초반 민주노동당에서 이미 제기된 문제의식들이다. 또, 보 수정당과 구분된 제3당으로서의 진보정당이 존재해야 한다는 구상 역시 그가 통합진보당의 창당을 주장 할 때 이미 내놓았던 생각이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인 심상정이 민주노동당을 나와 진보신당을 창당하고, 다시 진보신당을 나가 통합 진보당을 창당하고, 또 다시 통합진보당을 나와 정의당의 원내대표가 될 동안 정책과 전망에 있어서는 별 로 발전을 이룬 바가 없다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숱한 실패의 역사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은 다만, 새로운 목소리가 없지는 않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그가 진보정치세력의 가장 큰 문 제로 반(反)정치주의를 꼽는 대목이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사람들이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만 익 숙해서 정치를 멀리하고 권력의지를 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정 치인 심상정은 권력의지를 가지고 주도적으로 정치를 이끌어가는 그런 사람인데 진보정치의 다른 인자들 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아마도 그가 지칭하는 반(反)정치주 의자들이란 그가 통합진보당을 창당할 때 진보신당을 떠나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우리의 소중한 노 동당원들을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지금까지 보여준 그의‘정치’ 가 무엇이었는지 따져볼 수밖에 없다. 놀랍 80


게도 권력의지를 갖고 정치를 한다는 그의 정치적 선택은 본인이 인정하듯 거의 모든 게 실패로 귀결됐 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우리 모두를 경악케 한 경기도지사 선거 후보 사퇴 사건을 떠올려보자. 당시 진 보신당은 전체 광역자치단체 선거에 전 면적으로 대응하기로 결의했다. 큰 선거 에 당의 이름을 건 후보들을 내서 정당득

놀랍게도 권력의지를 갖고 정치를 한다는 그의

표에 기여하자는 전략이었다. 이러한 결

정치적 선택은 본인이 인정하듯 거의 모든 게

의에 따라 경기도지사 선거에는 심상정

실패로 귀결됐다.

당시 당원이 출마하게 됐다. 하지만 그는 선거를 며칠 앞두고“당심과 민심이 다 를 때 지도자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는 황당한 말을 남기고 갑자기 사퇴를 해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그가 당 전체를 혼란으로 몰고 간 사퇴를 통해 무엇을 얻었는지 확인한 바 없다. 후보 사퇴라는 대의를 위한 크나큰 희생이 대중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기나 한가? 하다못해 그 사퇴로 돈이라도 아끼게 됐다면 모르겠다. 후보등록 비용에 공보물 비용까지 쓸 수 있는 돈은 다 써놓고 사퇴를 했다. 그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결과적으로 단일화 효과를 누리게 된 유시민 당시 국민참여당 후보는 낙선을 했 다. 조직에 엄청난 혼란을 끼친 그‘결단’ 으로 심상정이 얻은 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다. 통합진보당 창당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노동당에 남아있는 상당수의 당원들은 당시 심상정이 내놓 은 구상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점을 수차례 지적했다. 오히려 그 시점에 정치인 심상정이 이 당에 남아있 는 것이 이후 진보정치세력의 통합과 재편에 더 득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 은 순식간에‘반정치주의’ 가 돼 간단하게 묵살됐고 통합진보당 창당에 합류한 심상정은 전 국민 앞에서 파국의 스펙터클을 매우 놀라운 방식으로 전시한 바 있다. 18대 대통령 선거에 진보정의당 후보로 출마해 쥐도 새도 모르게 사퇴한 사건도 그의 정치를 잘 보여 주는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심상정은 이 책에서 그 사건에 대해“사퇴는 예정돼있었지만 후보 등록 을 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 고 말하고 있는데, 무슨 정치적 판단이 그런 식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완 주를 하겠다고 난리를 치다가 마지못해 사퇴를 하는 게 더‘정치적’ 인 방식이 아니었을까? 오로지 실패만 을 향해 달려가는‘권력의지’ 는 없느니만 못하다.

심상정의 정치적 깨달음에 도움을 준 가정교사들 이쯤에서 도대체 왜 그가 이런 식으로‘정치’ 와‘권력의지’ 를 들먹이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책 에는 처음부터 심상정이 지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완성돼있었을 것이라고 여기는 세간의 시선과는 달리 2004년 처음 국회의원이 됐을 당시의 심상정은 실제로 정치를 잘 몰랐을 것이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부 분이 곳곳에 있다. 그가 이 책을 통해 자신의 개인적인 특성에 대해 설명한 부분을 모으면 그런 결론에 도 쟁점토론 81


달하게 된다. 그랬던 그가 이제 와서 정치의 도를 깨달은 사람마냥 발언하는 것은 민주노동당의 분당 이후 창당과 탈당을 거듭하는 과정 속에서 그가 실제로 얻게 된 정치적 깨달음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러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은 상기의 내용

심상정은 세 번의 분당과 세 번의 창당이라는

으로 이해해 볼 때 과거부터 진보정치에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서“권력의지를 가지고

대한 진지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던 사람

정치를 하자” 는 슬로건을 찾아냈다. 그가 깨달 음을 얻는 데 우리는 가정교사 같은 역할을 한 셈인가?

이라면 상당수가 겪는 것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다만 그 중‘의원’ 이 되어 무언 가 주체적이고 주도적인 정치적 행위를 할 기회를 갖게 된 사람이 하필 심상정 이었을 뿐이다.

즉, 우리가 심상정과 함께 같은 당에서 활동했던 기간 동안 우리는 그가 정치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도와주는 가정교사 같은 역할을 한 셈인 것이다! 그가 세 번의 분당과 세 번의 창당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서“권력의지를 가지고 정치를 하자” 는 슬로건을 찾아낸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보면 상당 히 보람찬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 핑계조차 없었으면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했 을지…

“운동이 아니라 정치를 하자” 는 말에 담긴 역설 나는 묻고 싶다. 실패가 뻔히 보이는 길로 돌진하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 것은 왜 정치가 아닌가? 연 립정부 따위에 목매지 않는 독자적인 진보정치의 필요성에 동감해온 노동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은 왜 정치가 아닌가? 현장에서,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울고 웃으며 그들의 문제에 적극적으 로 개입하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게 왜 정치가 아닌가? 도대체 심상정처럼 해서 망하면 정치고 그렇지 않 으면 정치가 아니라는 그런 생각은 어떤 과정을 거쳐 도출된 결론인가? “운동이 아니라 정치를 해야 한다” 고 기계처럼 되뇌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심상정을 떠올린다. 물론 우리에게는 더 많은 정치적 판단과 행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러한 결론은 운동과 정치의 이분법으로부 터 도출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회운동과‘정당’ 정치가 제각각 감당해야 할 몫이 따로 있다고 주장하는 정치학적 관점이 존재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 대당하는 관점의 주장을 이미 10 여년(20년이라고 해도 좋다)의 진보정치 역사를 통해 접해온 바 있다. 그렇다면 이 맥락과 관련해 필요한 것은 우리가 만들어갈 진보정당의 모델에 대한 토론과 합의이지“운동이 아닌 정치를 하자” 면서 남을 깎 아내리고 자신들의 실패를 은폐하려는 정치적 변명을 늘어놓아서는 안된다. 그러고 보면‘실패로부터 배운다는 것’ 이라는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실패를 두려워할 것은 아니라는 82


의장단 폭행사태 등 파국의 스펙터클을 매우 놀라운 방식으로 전 국민 앞에 보여주었던 2012년 당시 통합진보당 (사진 : 참세상)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

도대체 심상정처럼 해서 망하면 정

머니라는 말도 있고, 더 낫게 실패하면 되는 거라는 말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항상 망설임 없이 갈 길을

치고 그렇지 않으면 정치가 아니라

정하되 과거에서 교훈을 얻고 같은 실패를 되풀이

는 그런 생각은 어떤 과정을 거쳐

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번에는 정치인 심

도출된 결론인가?

상정이 더 낫게 실패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은 감상은 전혀 그런 확신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쟁점토론 83


쟁점 토론

같은 실패, 다른 배움 ②

헌법 밖의 진보? 헌법 안의 진보? 윤현식 정책위원회 의장

“국민들은 헌법 밖의 진보를 결 코 용납하지 않을 것”정의당 심상정 의원의 발언은 진보의 정체성과 그 활동 양식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그런데 왜 논의 는 더 나아가지 않았을까?

“국민들은 헌법 밖의 진보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 지난 9월 1일, 정의당의 심상정 의원은“국민들은 헌법 밖의 진보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 이라는 내용을 담은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2013년 여름, 정국의 모든 이슈를 빨아들인 블랙홀, 통합진보당 현역 의원이 포함된‘내란음모사건’ 이 세상을 들썩이게 하던 시기였다. 사 안이 사안인 만큼 이 발언의 배경과 맥락에 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 요하다. 그러나 이 발언은 다른 측면에서 문제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 다. 바로‘진보’ 와‘헌법’ 의 관계다. 이 발언은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누군가는 이것이 제도권 정당과 정치인의 당연한 자세라고 평가했다. 진보도 현실을 제대로 보고 대중 의 이해를 구하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도 등장했다. 반면 어떤 사람은‘자유주의 헌법관’ 이라고 비판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헌법을 넘어서는 비전과 상상력을 제시해야 할 진보 정치의 책임을 버렸다고 비판했다. 더불어 헌법이 진보의 행동 기준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진보는 헌법의 틀 안에 안주하지 않으며 새로운 담론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헌법 밖” 에서 진행되고 있는 국정 원과 새누리당의 작태가 문제라는 지적도 있었다. 이후 이 발언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 더 의아스럽다. 이 발언은 진보의 정체성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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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이자 그 활동 양식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변혁을 모색하는 진보 혹은 좌파의 행위가 어디까지 가능한지 그 한계를 짚어야만 하는 과제가 던져진 것이다. 이렇게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도 논의가 진척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보수 쪽에서는 어차피 더 이상 이야기할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굳이 말을 덧 댈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반대로 진보 진영은 왜 말을 묻어두고 있을까? 그것은 기실 진보 좌파는 그동안 헌법과 변혁의 상관관계 또는 변혁의 종국에 기획돼야 할 총론적 규범 구조에 별다른 고민이 없었기 때문 이다. 오래도록 상상된 미완의 시공간에 관한 추상적 기획은 있지만 그 구체적인 제도는 도래할 그날 구 성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진보 좌파 역시 말을 묻어둔 게 아니라 할 말 이 없었다.

좌파의 딜레마: 헌법은 활용할 것인가, 극복할 것인가 구체적으로 보면 이렇다. 헌정 질서의 수호를 스스로 자신의 책임으로 설정하는 우파는 질서의 존속을 헌법의 가치로 삼는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인데, 우파의 처지에서 현행 헌법은 바로 그 사람들의 헌법이 기 때문이다. 따라서 헌정 질서 수호는 자신들의 이해가 담긴 헌법 체계를 지키는 행위이며, 그 체계 때문 에 보장되는 이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뜻한다. 전형적인 체제 수호 논리에 헌법이 동원된다. 헌 법이 자신의 것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는 우파는 모든 사회적 현상에 헌법의 잣대를 들이밀며 자신들 의 이해에 어긋나는 모든 것을 헌정 질서를 파괴하려는 음모로 재단할 수 있다. 반면 헌법에 관한 좌파의 태도는 매우 모호하다. 변혁을 이야기하는 좌파는 실질적으로는 헌법의 규범 구조 위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좌파는 현행의 헌법이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법을 지배 계급의 도구로 파악하는 고전적 해석은 이쪽에서 강력하게 작동한다. 특히 혁명 노선에 복무하 는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감당하는 분파에 헌법은 아예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것보다는 좀더 대중 적인 노선의 좌파 역시 체제 질서의 유지 를 위해 헌정된 헌법 체계는 도래할 그날 에 완전히 분해돼야 할 대상으로 남게 된

보수는 지킬 것을 지키면 되지만, 진보는 헌법

다. 그렇지만 좌파가 헌법에 마냥 거리를

이 활용의 대상인지 극복의 대상인지를 판단

두는 것은 아니다. 좌파는 수시로 헌법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야기하고 꺼내들며 헌법으로 우파를 공 격한다. 따라서 논의는 보수 우파가 아니라 진보 좌파 쪽에서 유효한 의미를 갖는다. 보수는 지킬 것을 지키면 되지만, 진보는 헌법이 활용의 대상인지 극복의 대상인지를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만일 헌법이 수인과 활용의 도구가 될 수 있다면‘헌법 밖의 진보’ 와‘헌법 안의 진보’ 는 양립할 수 있다. 반대로 현행 헌정 질 쟁점토론 85


서의 용인이 체제 변혁이라는 목적 수행을 방해한다면 진보는 선택의 여지없이‘헌법 밖의 진보’ 를 추구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헌법의 안과 밖을 단순하게 구분하게 되면 모순이 발생한다.‘헌법 밖의 진보’ 가 불가피한 노선 이라고 판단되면 실질적으로 현행 헌법 질서와 법체계 안으로 한정되는 모든 투쟁은 개량주의이거나 이 념의 배반이 된다. 법은 오로지 어기고 저항해야 할 대상일 뿐, 하다못해 사법 기관의 판단을 구하는 것조 차도 진보가 취할 행동 양식이 될 수 없다. 반대로‘헌법 안의 진보’ 를 추구하면 과연 그것이 체제 유지를 헌정 질서의 핵심으로 판단하는 보수 우파와 어떤 차별성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보수와 진보, 우파 와 좌파의 구분은 불분명해지고 양자 사이의 적대는 더 이상의 의미가 없어진다. 따라서 이것에 관한 명 민한 판단이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논의되는 헌법과 진보의 관련성은 목적을 잃고 하나마나한 소리로 전락하게 된다. 맥락 상 진보와 헌법과 헌정 질서의 상관관계에 관한 문제의식이 생략된 심상정 의원의 발언은 그래서 한계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고 어떤 기준으로 헌법의‘밖’ 과‘안’ 을 구분할 수 있을지 설명을 덧붙 여야 한다. 이 부분을 해명하지 않는다면 이 발언은 세간을 흔든‘내란음모사건’ 하고 자신은 관련이 없다 는 알리바이를 제시하는 것 말고는 의미를 상실한다. 특히 진보 좌파가 헌정 질서 체계에 어떤 견해를 보

헌법은 우리의 무기인 동시에 극복의 대상이기도 하다. 2012년 비례후보 선거운동 제한 규정에 대해 헌법소원을 청구하던 당시 진보신당 기자회견 (사진 : 박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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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하는지 논란만을 증폭시키게 될 것이다.

헌법의 활용과 헌법 현실의 극복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헌법에 관한 판단이 선행돼야 한다. 일반적으로 진보란 보수와 대척점에서 현존 체제의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는 성향을 말한다. 여기서 그 급진적 개혁이라는 것이 무장 혁명을 통 한 체제의 전복이라면 헌법에 관한 판단은 간단명료하다. 그것은 전복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이 명쾌한 도식은 현실적으로 유용하지 않다. 혁명의 도래를 망상이라고 치부하는 것이 변혁을 향한 상상력을 위축시킨다면, 존재의 실상을 망각한 혁명의 논의는 흔히‘농담’ 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 후하다. 따라서 그 급진성이 담보될 수 있는 현실적 여지를 확장하고 적대의 기준을 확정해야 한다. 그런 필요에 부응하는 하나의 방법은 헌법과 헌정 질서가 과연 누구의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진보에 있어서 헌법의 안과 밖은 양립할 수 있어야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활용의 대상은 헌법의 구조이며 극복의 대상은 헌법 현실이다. 헌법이라는 규범 체계는 고유한 특수성을 간직하고 있다.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자 고도의 추상성을 가진 헌법은 우파든 좌 파든 어느 누구에게만 유리하게 작동할 수 없는 양면적 가치를 가진다. 헌법은 정

진보에 있어서 헌법의 안과 밖은 양립할 수 있 어야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활용의 대상 은 헌법의 구조이며 극복의 대상은 헌법 현실 이다.

치적으로 완성된 귀결이 아니다. 국가 공 동체 안에 있는 많은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소멸하고, 합종연횡을 하면서 최소한의 규범을 기획한 것이 헌 법이다. 따라서 헌법은 그 고유한 특성 때문에 어느 특정 정치 세력에만 유리하게 작동되게 설계되지 않 는다.1) 헌법이 규정하는 규범이 보수의 이해가 아닌 진보의 이해를 관철할 수 있게 설득력 있는 해석을 제시 하고, 동시에 헌법을 둘러싸고 있는 실제의 시공간이 그런 해석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재구조화하면서 안 과 밖의 양립 가능성은 현실성을 확보한다. 따라서 진보는 단지 전복의 대상으로 헌정 질서를 규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현재 진보가 당면 한 문제점은 헌법을 넘어선 비전과 상상력을 제시하지 못하면서도 헌법 체제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않 고 있다는 점이다. 더 적실하게 말하면 그 어떤 것을 상상하더라도 헌법 체계의 구조에서 담보되는 포괄 성과 추상성을 넘어설 수 없다. 차라리 현행 헌법의 구조가 가지는 전체적인 틀을 통합적으로 검토하면서 그것이 기실 보수의 담론이 아닌 진보의 담론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더욱 큰 실효성을 담보할 수

1) 이에 대해 필자는 2012년 7월 2일자 노동당 온라인 매체 <사랑과 혁명의 정치신문 R>에 기고한“헌법 해석투쟁: 헌법도 우리의 무기다” 라는 칼럼에서 이에 대해 문제제기한 바 있다.

쟁점토론 87


있다. 이것은 단지 헌정 질서 안에 진보를 고착시키는 행위가 아니라 헌법 현실에 관한 운동성을 강화하고 헌정 질서를 새롭게 구축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 사파티스타의 사령관들이 자신들의 마을 입구에 세운 저 선언,“이곳은 민중이 지배하고 정부가 복종한다” 는 당위는 이것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

그러므로‘거피취차(去彼取此)’하라 보수의 원리를 버리고 진보의 원리를 취해야 거피(去彼)가 가능하고, 취차(取此)에 성공한다면‘헌법 안의 진보’ 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보수의 원리를 버리고 진보의 원리를 취해야 거피(去彼)가 가능하고, 취차(取此)에 성공한 다면‘헌법 안의 진보’ 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최근 심상정 의원이 낸 책이 한 권 있 다. 그 책의 서문에 노자의 도덕경 한 구절 이 있다.‘거피취차(去彼取此)’ 가 그것이 다. 노자는 도덕경 여러 곳에서‘거피취 차’ 를 부르짖는데, 그 일관된 의미는 유위

(有爲)하지 말고 무위(無爲)하라는 말이다. 심상정 의원은 어떤 인문학자의 입을 빌어 이 말의 의미가 이념 과 결별하고 구체적인 것에 주목하라는 의미라고 해석한다. 노자의 도덕경은 무위자연이라는‘이념’ 을 설파하는 것이다. 무위라는 이념을 말하는 노자를 거론하면서 이념과 결별하라는 말은 생뚱맞기 그지없 다. 노자의 원래 취지는 둘째 치고, 심상정 의원이 현실의 직시를 중요하게 바라본 점은 훌륭한 태도다. 더 불어 심상정 의원의 해석을 차용해 말하자면, 헌법을‘거피취차’ 의 도로 바라봐야 한다. 보수의 원리를 버 리고 진보의 원리를 취해야 거피(去彼)가 가능하고, 취차(取此)에 성공한다면‘헌법 안의 진보’ 도 얼마든 지 가능하다. 물론 그 경계에서 온전하게 자세를 유지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진보는 원 래 그래서 어려운 것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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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진보정당


구라파 통신

남의나라선거운동을뛰어보다 독일 좌파당 총선 선거운동 체험기 김강기명 유럽당원, 독일 베를린 거주

8.6% 득표! 창당 이래 처음으로 원내 제 3당 되다 9월 22일 일요일, 총선 투표가 끝날 무렵 동네 술집 한 곳에 당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 다. 약간은 상기된 얼굴로 마당에 모여 담소를 나누던 당원들은 6시가 되자 TV를 켜놓은 술집 안으로 한꺼번에 몰려 들어갔다. 지구당(Kreisverband, 베를린은 Bezirksverband) 위원장이자 좌파당 학생당SDS의 회원이기도 한 모리츠가 마이크를 잡았다.“동지들, 그리 고 좌파당의 친구 여러분, 모두 수고했습니다. 오늘은 잔치를 즐겨야죠. 십시일반 모아서 뷔페를 차렸습니다. 즐겁게 선거 결과를 기다려봅시다” 6시 10분, 출구 조사 결과가 쏟아졌다. 기민·기사연합 42%.“우우…….”경악이 깃든 한숨이 터져나왔다. 이미 바로 한 주 전 일요일의 바이에른 주 선거에서 기사련은 단독 과반 으로 주정부를 혼자서 구성한 터. 연방은 어떻게 될까. 그러나 뒤를 이어 자민당의 결과가 발표되자 모두 환호성을 내질렀다. 4.7%, 의회 입성 실패! 경제 위기 이후에도 굳건하게 대 기업과 부자들의 이익을 옹호하던 이 관록의 자유주의 정당의 대패는 이 날 가장 큰 환호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나의 당, 좌파당이 8.6%를 얻어 창당 이후 처음으로 원내 제 3당이 됐다! 그렇다, 나는 현재 한국 노동당 당원이고, 독일 좌파당 당원이다. 방송을 통해 전해진 좌파당 중앙당의 공식 선거 파티는 승리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여기, 우리도!

선거운동원 등록을 할 필요도 없고 선관위가 따라다니지도 않아 총선 선거운동은 보통 선거 50일 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만, 그 준비는 훨씬 더 일 찍 시작한다. 처음 하원 선거운동에 관한 정보를 당에서 받은 것은 선거일이 아직 확정되 기도 전인 작년 가을이었다. 중앙당과 지구당이 각각 선거운동 참여를 독려하는 우편물을 보냈고, 3개월 쯤 뒤에 좀 더 자세하게 당원으로서 참여할 수 있는 선거운동의 종류가 무엇 인지를 알려주는 우편을 또 보냈다. 90


◀기초조직에서 차린 부스 ▲ “실컷 떠들었다! 지금 당장 최저임금 10유로!”독일 에서는 당원들이 자기 당 포스터를‘금지되지 않은’ 곳이면 어디든지 내걸 수 있다.

선거운동에 내 힘을 보태기 시작한 것은 각 당이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돌입하는 선거 50일 전부터였 다. 이때가 되면 이미 각 선거구 별로 선거운동 일정이 짜여 있고, 틈새를 가장 기초적인 단위인 분회 (Ortsverband)나 기초 조직(Basisorganisation)이 메우게 된다. 두 주나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우리 동네 Reuterkiez의 기초 조직 모임에는 정기적으로 나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동네 당원들과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선거운동을 하게 됐다. 마지막으로 선거운동을 직접 뛴 게 2004년 민주노동당 총선이었는데, 한국에서 국회의원 선거운동을 할 때랑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무엇보다 당원의 자율성이 매우 높았다. 어떤 형태의 선거운동을 할지, 얼 마만큼의 자원을 투입하고, 어느 시간에 할지는 느슨한 규정만 있는 듯 했고, 우리가 스스로 정해서 할 수 있었다. 한국처럼 선거운동원 등록을 할 필요도 없고, 선관위 관계자가 따라 다니지도 않았다. 한국에서 는 선거 포스터도 선관위가 모아서 지정된 벽에만 부착하지만 독일에서는 당원들이 자기 당 포스터를“금 지되지 않은”곳에 설치하면 된다. 기초 단위에서 선거운동은 바로 이 선거 포스터를 동네 모든 전봇대에 걸면서 시작된다. 좌파당은 이번에 일관된 콘셉트로 주요 정책 구호를 커다란 글씨로 인쇄한 인상적인 포 스터를 제작했다.“충분히 떠들었으면 이제 그만 최저 임금 10유로” ,“병 줍기 대신 최저 연금 1050유로” , “나눔은 즐거운 일: 부유세!”이런 정책 구호 포스터는 이번 선거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좌파당은 철저하게 정책 위주로 선거운동을 했고, 우리 기초 조직은 심지어 선거운동보다는 선거 국면 을 통해 베를린에서 벌어지고 있는 몇 가지 노동이나 공공성 의제에 관한 당의 주장을 선전하고 서명 운동 등 연대를 호소하는 일에 더 집중했다. 이것은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고 우리 지구당이 특히 좌파당 안에 서도 독특하게 두 개의 트로츠키주의 의견 그룹이 상당수 가입해서 활동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인 듯 했 다. 우리 기초 조직에서 지난 몇 달 동안 계속 주목하는 문제는 베를린의 공공 병원 노동조합의 인력 충원 구라파통신 91


투쟁과 베를린 전기 우선 공급 회사를 다시 공영화하는 주민 투표였는지라 수요일 저녁마다 내가 참여한 부스는 곧 서명 운동 부스이기도 했다.

천천히 걷는 사람들, 한참을 서서 토론하다 선거운동은 그다지 시끄럽지 않았다. 한국처럼 짧은 두 주 동안 미친 듯이 스피커의 볼륨을 올리고, 옷 을 맞춰 입고 춤을 추는 그런 선거운동이 아니라 긴 호흡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대면하는 선거운동이 주 된 방식이었다. 단순 다수 대표제의 지역구 선거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막판 에는 각 지역마다 당의 정치 집회를 크게 열어 주요 정치인들의 연설회를 갖기도 한다. 우리 동네에는 좌 파당의 수위 후보인 그레고르 기지가 직접 와서 연설을 하고, 당원들이 준비한 퍼포먼스를 펼쳤다. 부스를 차리고 동네에서 선거운동을 할 때는 아무래도 독일어가 서툰 내가 테이블을 지키고 당원들이 팸플릿을 돌렸는데, 그냥 팸플릿만 뿌리는 게 아니다.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팸플릿을 받을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멈춰 서서 한참을 당원들과 토론을 한다! 좀 정치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은 적-적-녹 연정의 가능성을 묻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트로츠키주의자인 당원과 함께 사회주의의 미 래(!)에 관해 신나게 토론을 하기도 한다. 선거운동을 하는 좌파당 당원들은 전반적으로 매우 능란하게 정 견을 잘 설명하는 편이었고, 논쟁적인 지점들을 누구도 피하지 않았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당보 선거 특별판과 브로슈어를 기꺼이 받아가서 처음에는‘독일 사람들이 원래 활자로 인쇄된 것을 좋아하니까…….’하고 잠시 생각했지만 가만히 지켜보니, 이 사람들 정말‘천천히’걷는다! 서울의 거리 풍경하고는 너무나 다르게 천천히 걷다가 누가 뭘 하고 있으면 잠시

그레고르 기지의 연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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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 서서 구경도 하고, 이야기도 듣는다. 옆에서 같이 선거 캠페인을 하던 친구한테 물어보니 어느 연구 결과를 따르면 베를린 사람들이 전 세계의 메트로폴리스 거주자 들 중에 가장 천천히 걷는단다. 천천히 걷 는 사람들은 정치 토론을 할 수 있다. 멈춰 서서 정견에 귀를 기울일 수도 있다. 당에 서 뿌리는 신문을 천천히 볼 여유도 있다. 서명 운동 취지에 동의한다면 기꺼이 이름 을 쓸 수도 있다. 그 자리에서 급하게 서명 하고 가는 장면만을 기억하던 내게 와서 꼬치꼬치 캐묻거나, 서명을 하고서도 이 런 저런 잡담을 나누며 한참을 머물다 가 는 동네 사람들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동네 교차로에서 선거운동중인 당원들. 삼삼오오 모여 주민들과 이 야기를 나누고 있다.

녹색당과 좌파당이 1위와 2위를 다투는 우리 동네 좌파당의 최종 지지율은 8.6%. 지난 2009년보다 오히려 감소한 결과이지만 당의 분위기는 매우 좋다. 2009년 선거는 양대 국민 정당이 죽을 쑤고 소수 정당들이 약진한 선거였기 때문에 단순히 숫자만 놓고 절대평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작년에 한참 당내 갈등이 심화됐을 때 지지율이 5% 아래로 곤두박이치 면서 두 곳의 연방주 의회에서는 퇴출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미디어에서도 당내 갈등을 성공적으로 불 식시키고, 새로운 당 대표단을 통해 당의 역량을 잘 모아내서 좌파당 고유의 정책을 잡음 없이 유권자들 에게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우리 동네 분위기는? 우리 동네 Reuterkiez가 속한 Neukolln 선거구의 인물 선거에서는 사민당이 기 민당을 이겼고, 우리 동네만 놓고 보면 녹색당과 좌파당이 제1당과 제2당을 놓고 다투는 아름다운 결과가 나왔다. 전반적으로 기민당이 압승하는 가운데서도 베를린 주는 왼쪽으로 좀더 이동하였고, 우리 지구당 도 지난번 선거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다. 그렇지만 문제는 투표율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번 선거 이후 나온 분석을 보면 독일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구의 투표율이 중산층 거주지보다 상당히 낮은 편이라고 한다. 아무튼 선거는 끝났다. 일단은 밤늦게까지 시끌벅적 맥주를 마시는 거다. 그리고 선거에 관한 각 단위 들의 평가가 이어지고, 또 곧 있을 베를린 시 전기 사업자 공영화 주민 투표를 준비해야 하고, 그 다음은 유럽 의회 선거다. 이렇게 좌파당의 지역 정치는 계속 이어진다.

구라파통신 93


먼 좌파 이웃 좌파 ④

동병상련? 이웃 나라 일본의 좌파(2) 장석준 부대표

노동조합총평의회의 배타적 지지로 존립 유지돼 “5만 당원으로 천만 표를 모으는 불가사의한 당.”한 정치학자는 일본 사회당을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실제로 사회당 당원 수는 원내에 다수 의석을 확보한 좌파 대중정당 치고 는 너무나 적었다. 1969년 당원 재등록 기간 중에 확인된 당원 수는 고작 3만 명이었다. 이 중 5천 명 가량이 국회의원과 지방의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회당에는 간부만 있고 당원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회당이 존립하고 또한 제1야당으로 버틸 수 있었던 요인은 단 하나, 바로 일 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일본의 민주노총’ 이라 할 수 있었다)의 배타적 지지였다. 총평 은 선거 기간 중에 사회당의 자금과 조직 동원을 떠맡았다. 대신 사회당 국회의원 대부분은 총평 간부 출신이었다. 사실 좌파정당이 노동조합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 자체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느냐가 문제다. 일본의 노동자들은 당에 대거 개별 입당하 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사회당에 영국 노동당 식의 노동조합 집단입당제도가 존재한 것도 아니었다. 오직 총평 간부들만 사회당에 입당하고 당과 관계를 맺었다. 비록 총평 간부들이 급진적 성향을 지녔다고는 해도 이렇게 의원과 의원 지망자, 노조 간부들로만 이뤄진 좌파 정당이 오래도록 건강하게 발전하기란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일본의 노조는 산별

노동조합운동의 한계는 고스란히 사회 당의 한계로도 다가왔다. 대다수 미조직 노동자에게는‘남의 당’ 이었다.

이 아닌 기업별이었다. 일본 노조 운동은 조직률이 50%를 넘던 전 쟁 직후의 전성기에 산별로 전환 하는 데 실패했다. 기업별 노조 체제가 정착되었다. 그 결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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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노총인 연합(렌고)의 실내 집회 모습

소기업 노동자들은 대기업 중심의 기업별 노조 체제 바깥에서 계속 미조직 상태로 머물고 말았다. 이런 노동조합운동의 한계는 고스란히 사회당의 한계로도 다가왔다. 대기업 노동조합은 점점 우경화 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사회당은 총평 산하 일부 전투적 공공부문 노동조합만의 노동자정당이 되어갔다. 그리고 대다수 미조직 노동자에게는‘남의 당’ 이었다. 이런 사회당을 국민들이 수권능력을 갖춘 당이라 고 볼 리 만무했다. 사회당은 언제인가부터 자민당의 지나친 횡포를 견제할 수단일 뿐이었다.

총평 의존 정당이었던 일본 사회당 이런 상황에서 총평계 노동운동의 위기가 닥쳤다. 1980년 중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자민당은 기존 의 일본형 케인스주의를 시장지상주의적 긴축 재정으로 전환하면서 동시에 노동계를 손보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1987년에‘국철(國鐵) 개혁’ 이라는 구호 아래 철도 사유화를 단행했다. 총평의 핵심인 공공 부문 노동조합을 깨기 위한 조치였다. 같은 해에 민간 대기업 노조의 우경화한 분위기를 대변하는 새로운 총연맹 렌고(連合, 일본노동조합연 합)가 800만 조합원을 자랑하며 출범했다. 2년 뒤에는 총평이 결국 해산하고 렌고에 흡수 통합됐다. 렌고 의 노선은 총평의 정반대라고 보면 된다. 노동조합에 의존해온 사회당으로서는 이제 렌고에 맞춰 자신도 오른쪽으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신세가 되었다. 노조운동의 우경화와 함께 노동자들의 사회당 지지율 도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사회당은 나름의 자구 노력을 벌였다. 시민운동 출신의 여성 정치인 도이 다카코를 대표로 내세운 것 도 그 일환이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인지 1989년 참의원(상원) 선거와 1990년 중의원 선거는 사회당이 오랜만에 약진하는 의외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사회당의 득표율이 다시 20%를 넘어섰다. 먼 좌파 이웃 좌파 95


그러나 사회당의 약진은 오히려 당을 궁지에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사회당에 표를 빼앗긴 소수 정 당들(대표적으로 공명당)이 자민당과 유착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보수 세력 주도 정계개편에 시동이 걸렸던 것이다. 렌고는 이를 부채질하는 역할을 했다. 렌고는“사회민주주의와 리버럴 세력의 총결집(이 른바‘사민-리버럴 정당’ 론)” 을 주장하며 노골적으로 좌파정당인 사회당을 해체하고 중도정당을 건설하 라고 요구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2012년 한국 대선의 이른바‘빅 텐트’ 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자민당에서 떨어져 나온 일본신당, 신생당 등 보수 계열 신당이 대거 선거에 참여한 93년 7월 중의원 선거는 사회당 붕괴의 신호탄이 되었다. 사회당의 의석은 136석에서 70석으로 절반이 줄었다. 당의 오른 쪽에서나 왼쪽에서나 똑같이 대규모 이탈이 나타났다. 렌고 소속 노조 지도부는 사회당이 너무 왼쪽에 있 다며 사회당이 아닌 보수 신당들을 지지하기로 결의했다. 반면 기존 사회당 지지자 중에서 38.9%만이 사 회당을 지지하고 나머지는 대거 이탈했는데, 이 중에는 좌파 성향 유권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다수 를 차지했다. 사회당의 와해가 시작된 것이다. 총선 직후 렌고 지도부의 압력으로 일본신당의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주도하는 최초의 비자민당 연립정 부가 들어섰다. 이 연정에 사회당도 무라야마 토미이치 신임 위원장이 입각했고 한때 무라야마가 총리가 되기도 했다. 겉만 보면,‘집권’ 이고‘성공’ 이었다. 하지만 공동 집권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자민당에서 탈 당한 보수 정파들이었다. 보수파와의 공동 집권은 사회당의 정체성 위기만 가중시켰다. 사회당의 영혼이 사라진 그 자리에 더 이상 대중적 좌파 구심은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 사회의 총보수화가 시작된 것이다.

총보수화의 시작이 된 보수파-사회당 공동 집권 지금 일본의 좌파 정치 공간은 초토화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회당은 1996년 1월 사회민주당(약칭 사 민당)으로 당명을 바꿨다. 이때 좌파 일부는 탈당해 신사회당이라는 소규모 정당을 따로 차렸고(지방의원은

▲참의원선거에서 지역구로 당선된 일본 공산당의 기라 요시코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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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산당 선전 차량


자유민주당의 헌법 96조 개정에 반대하는 일본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공동 시위

있으나 아직까지 원내 의석은 없다), 48명의 우파 의원은 렌고의 권유에 따라 신생 중도우파 정당인 민주당

에 합류했다. 사회당의 전통은 사민당으로 이어졌지만, 사실상은 기존 사회당의 붕괴였다. 사민당은 소선거구-비례대표 병립제가 처음 실시된 96년 중의원 선거에서 16명의 당선자를 냈다. 비 례대표 선거에서는 공산당이 13%를 얻은 데 반해 6%만을 얻었다. 사민당은 초기에는 그래도 도이 다카코 위원장의 인기에 의지해 근근이 버텼지만 도이가 물러난 뒤에는 계속 당세가 추락하고 있다. 작년 중의원 (총480석) 선거에서는 정당 투표 2.38% 득표로, 2개의 의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물론 공산당이 버티고 있다. 일본 공산당은 현재 자민당보다 더 많은 지방의원을 보유하고 있다. 중의 원 선거에서는 정당투표 6.17% 득표로 8석을 확보했다. 일단 선방이었다. 그러다가 올해 도쿄도(都) 지방 선거에서는 의석을 8석에서 17석으로 늘리며 상승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7월의 참의원(총242석) 선거에 서는 기존 의석 6석에 5석을 더하는 결과를 얻었으며, 더 중요한 것은 지역구 당선자를 배출했다는 사실 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비록 자민당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치이지만 6% 정도의 지지율을 보이며 유 일 좌파 야당이자 제1야당의 위상을 인정받고 있다. 사회당이 붕괴하고‘사민-리버럴 정당’민주당마저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한 공간을 공산당이 채워나가 고 있는 셈이다. 공산당이 그나마 버티고 있으니 다행이다. 하지만 워낙 사회당, 공산당, 신좌파 사이의 분열과 대립이 심했던 터라 공산당이 과연 진보적 여론 전체의 새로운 대변자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 이다.(최근 일본 공산당의 정책에 대해서는, 시이 가즈오 위원장의 연설문들을 모은『지금, 일본 공산당』 [이매진, 2013]을 참고할 수 있다.)

아무튼 일본 좌파정당의 역사를 보면 볼수록 저들이 20세기 후반에 보인 여러 패착이 한국 진보정당운 동에서 지난 2-3년 동안 집약적으로 반복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두 나라의 진보좌파 모두 지금 그 폐허를 수습하고 새 출발을 모색해야 하는 처지다. 동병상련 — 이것이 지금 두 나라 진보좌파를 가로 지르는 열쇳말이다. 먼 좌파 이웃 좌파 97


불온한 서재

신자유주의적 분절 노동시장을 넘어 사회적 노동시장으로 양솔규 기획조정실 국장





숨은 문화예술 당원 찾기

다큐멘터리 <꿈의 공장> 감독 김성균

“악기 만들던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한 아웃사이더” 인터뷰·정리 : 나도원 문화예술위원장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어제 공연은 어땠습니까?” “첫날이라 사람들이 많이 왔죠. 물론 대부분 아는 사람들이 모이는 가족잔치 분위기였는데, 그래도 뭔 가 해냈다는 분위기는 있었어요. 연기자들은 다들 한번 이상씩 틀렸어요. 특히 주인공인 햄릿이 많이 틀 렸죠. 이젠 암기가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서울의 유서 깊은 동네들 중 한곳인 성북동에 자리한 작업실에서 다큐멘터리 감독인 김성균 당원을 만 났다. 위에서 말하는‘연기자’ 들은 다름아닌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이다. 그들이 배우로 연기한 <구일만 102


햄릿>의 첫 공연이 인터뷰 전날에 있었다. 실제 연기와 영상이 교차하는 방식인 이 작 품에도 김성균 감독이 손길이 묻어있다. 세계적인 기타 생산 업체였던 콜트콜텍 은 노동조합 파괴와 해외공장 이전을 위하 여 2007년에 노동자들을 일방 해고하고 공 장을 폐쇄했다. 노동자들은 장기투쟁을 벌 여 2013년에 대법원으로부터 정리해고의 부당함을 인정받았지만, 박영호 사장은 노 동자들을 재차 해고하고 공장마저 팔아버 렸다. 그동안 노동자들은‘콜트콜텍 기타노 동자 밴드’ , 일명‘콜밴’ 을 만들어 움직였 다. 공장에서 기타를 만들기만 했던 노동자 들이 집단으로 일터를 잃은 후, 직접 악기 를 연주함으로써 또 다른 저항의 몸짓을 보 여준 것이다. 자신만의 싸움을 위해서가 아 니라 다른 이들과 연대하기 위하여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 그리고 2013년 10월, 연극 <구일만 햄릿>을 무대에 올리기

연극 <구일만 햄릿> 포스터

에 이른 것이다. 김성균 감독은 콜트콜텍 노동자들과 인연이 깊다. 그의 다큐멘터리인 <기타 이야기>(2009)와 <꿈의 공 장>(2010)이 모두 그들을 지켜보며 기록한 작품들이다. 제목들은 중의를 품고 있다. <기타 이야기>의 기타 는 기타(guitar)이면서 기타(其他)였고, <꿈의 공장>에서‘꿈의 공장’ 은 악덕 자본가 박영호가 자신의 공 장을 일컫던 말이기도 하다. 특히 <꿈의 공장>은 사회적으로 콜트콜텍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에 기여했다. 2011년에 인디다큐페스티벌에서 진보상을 수상했고, 2012년에는 한국대중음악상으로부터 특별상을 받 았다. 당시에 선정위원으로서 이 수상작 결정을 강하게 주장했던 터라 시상식장에서 만난 방종운 지회장 과 김성균 감독이 무척 반가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들은 무대에 올라 음악인들의 익살스럽거나 진지한 수상소감과는 결이 다른 말들을 했고, 특별했으며, 더욱 큰 박수를 받았다.

록 음악을 좋아한 아웃사이더, 영화에 빠지다 “특별히 뭐 없는 놈이었죠. 유일한 취미는 음악 듣는 것이었고.” 삶과 문화 103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나 현재의 송파구와 강동구에서 성장하던 시절, 청소년 김성균은 음악마니아였 다. 서정적인 곡 <Before The Dawn> 때문에‘속아서’샀지만 좋아하게 된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를 비롯하여 씬 리지(Thin Lizzy)처럼 1970~80년대의 록과 헤비메탈을 즐겨듣는 학생이었다. 그 리고 지금도 그렇지만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학교 축제 때 시화전 같은 걸 하잖아요. 거길 지키고 서 있다가 형들이 가져온 이런저런 것들을 보게 되죠. 야한 잡지를 돌려보기도 했지만, 그중에는 광주항쟁을 만화로 그린 책도 있었어요. 그 책 뒤에는 실 제 사진들이 실려 있었죠.” 1980년대에 적지 않은 중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이 사진이라는 기록물을 통하여 광주의 진실을 접하 고 세상을 달리 보게 되었듯이 김성균 감독 역시 충격을 받았다. 또한 독재정권의 탄압으로 참교육운동을 외치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교사들이 집단해직을 당하자 많은 학생들에게도 상처를 남겼고 김성균에 게도 그러했다. “그때가 해금의 시대였잖아요. 사회성 있는 영화와 음악이 풀려나던 때였죠. 코스타 가브라스(Costa Gavras)의 <제트> 같은 영화들을 보게 되고. 그런데 이런저런 고민은 많았지만 저는 그냥 귀에 이어폰 꼽 고 혼자 음악 들으며 다니던 학생이었죠.”

1991년, 역시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러하듯이 학력고사 점수에 맞춰 지원하여 모 대학 국문과에 진학한 다. 그러나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썩 내키지 않았다. 음악마니아들이 대개 그렇듯이 김성균 감 독은 영화에도 이끌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진지한 영화의 붐이 일던 시기였다. 그는 희귀아이템을 찾아 비디오대여점인‘으뜸과 버금’선릉점까지 다녀올 정도였다. 그렇게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의

연극 <구일만 햄릿> 연습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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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열한 거리>와 <성난 황소> 등의 작품을 보았다. “글쓰기는 나를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전 그게 싫었거든요. 그런데 영상은 나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좀 유치하지만 이렇게 생각했죠. 영상의 힘이 크다!”

김성균의‘엎어먹기’ 史 “영화가 하고 싶어요!” 역시 아웃사이더답게 학교의 영화패에도 들어가지 않았던 그는 군복무를 하면서 영화를 직접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다. 그리고 만화『슬램덩크』주인공의 외침과 같은 마음의 소리에 이끌려 영화에 발을 들이게 된다. 창작의 통로가 글에서 영상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독립영화워크숍에서 16mm제작을 배우면서 연을 맺은 사람들과 함께 영화집단을 만들었다. 당시에는 ‘파적’ ,‘젊은 영화’ ,‘시선’ 과 같은 영화집단들이 여럿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대개의 첫사랑처럼 동 료들은 이런저런 작업 끝에 상업영화, 독립영화 등 각자의 진로로 흩어진다. 그리고 단편영화 <비가 내린 다>(2001)의 연출부로 일하면서 알게 된 오점균 감독의 단편영화 <생산적 활동>(2004)에서 조연출을 맡게 되었다.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한국의 대중음악사를 인터뷰 중심으로 서술한『한국 팝의 고고학』 이란 책을 만드는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하면서부터다. 하지만 결과물을 만들어내진 못했다. 중간에 카메라를 잃어버린 일도 있었고 집안사정 탓도 있어서 학원에서 동영상 제작을 강의하는 일을 해 야 했다. 또 다른 계기는‘삶창’ 에서 진행한 르포 교실을 기록하는 작업이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청 계천을 다룬『마지막 공간』 이나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부서진 미래』등을 로프화한 적이 있다. 여기에 누 군가 그를 끌어들인 것이다. “강성훈이란 친구가 문제였어요. 르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영상으로 만들어보자는 꼬임에 제가 넘어 갔죠. 주거권 문제를 다루면서 그 테마로 책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담기로 했죠. 그런데 그것도 중단되었 어요.” 다소 낭패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한국에선 대다수의 영화인들이 마음과는 다른 길로 방향을 틀곤 한다. 그들에게 암중모색과 전향(?)은 흔한 일이다. 1990년대 이후 불어온 영화의 바람과 영화 인력 의 증가를 한국식 영화산업은 소화할 수 없었다. 아니, 소화할 생각이 없었다. 다른 예술장르들도 마찬가 지다. 노동직종별 세대화의 진행으로 생산직 등이 중년 이상의 노동자로 고착된 반면, 청년세대 중 상당 수는 문화산업 등으로 진입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산업 내에도 계급차를 뛰어넘는 수준의 계층 차가 발생하는 내부불평등이 심화되어 있다. 그럼에도 김성균 감독에게 다큐멘터리는 새로운 길이었다. 극영화에서 카메라는 전문기사가 아니면 아무나 만질 수 없는 고귀한 물건이었지만 다큐멘터리는 직접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스스로 만들어내는 방식이었고, 더구나 혼자서도 해낼 수 있었다. 삶과 문화 105


영상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김성균 감독이 <다른 세상을 꿈꾸다-아줌마 교사되다>(2008)를 연출한 RTV에선 대안공동체 시리즈 를 기획하고 있었다. 그 대상들 중 하나로 홍대 앞에 있는 클럽‘빵’ 이 선정되었다. 인디 음악인들을 인터 뷰해나가던 중에 어느 노동자가‘우리 이야기도 다큐를 찍어주면 좋겠다’ 는 말을 건넸다. 송경동 시인이 큰 역할을 했다. “기륭투쟁이나 콜트콜텍투쟁 관련한 사진 한 장 쓱 보내주고는 영상으로 만들어보라고 제안하더라고 요. 콜트콜텍도 500일이 되었으니 한번 해보자, 뭐 이런 식이었어요. 그리고 점점 일이 커졌죠.” 클럽‘빵’ 은 매주 콜트콜텍 노동자 지지공연을 이어오고 있었다. 김성균 감독이 카메라와 함께 드나들 며 본격적으로 일을 벌이게 된 때는 2008년 겨

“우리 이야기도 다큐로 찍어줬으면”어느

울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큐멘터리가 <기 타 이야기>이다. 이 기록을 토대로 추후 보완하

노동자의 바람이 <기타 이야기>가 됐다.

고 확장하여 완성하려던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

지금은 연극 <구일만 햄릿>에 이르렀다.

나 점점 일이 커져갔고 별도의 작품으로 만들 정도가 되었다. 이것이 <꿈의 공장>이다. 기타 가 중심인 록음악 마니아였던 김성균 감독은 이

렇게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을 위한 영상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특정 사안만이 아니라 악기생산의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 즉 주문자상표부착생산방식을 공론화함으로써 자본주의 체제의 지구적 수탈구조 문제를 드러내고자 했다.

그리고 지금은 연극 <구일만 햄릿>에까지 이르렀다. 처음에‘구일만’ 의 뜻은 9일 동안 콜트콜텍의 이 야기에 맞춰 각색한 <햄릿>을 가지고 당사자들이 주인공들이 되어 무대에 오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극 장 사정상 10월 한 달 동안 8일만 가능하게 되었으니 실제로는‘팔일만 햄릿’ 인 셈이다. 어쨌든 이 과정까 지 다큐로 제작하고자 하는 현재의 계획이 성사된다면‘콜트콜텍 3부작’ 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노력과 작업이 부당해고를 해고할 수 있을까. 김성균 감독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는 <구일만 햄릿>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에도 신중한 편이다. 장기투쟁 농성장의 분위기를 알 만한 사람들은 안다.‘콜밴’ 의 음악활동도, <구일만 햄릿>이라는 연극도 스스로 기운 차리기 위한 안간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연극하니까 시간 빨리 가고 좋네’ 라던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는 김성균 감독의 표정에는 진심어린 안타까움이 번져갔다.

“해외원정투쟁에 동행하며 촬영하던 중이었죠. 샌디에이고를 지날 때였는데, 운전을 해주던 멕시코 출 신 이민자가 동네 구경을 시켜주더군요. 고가도로 기둥 벽면에 혁명가들의 그림들이 있었죠. 철거투쟁을 106


벌이면서 남은 것이래요. 패배했지만, 그래도 그림은 남겼다고…. 사실 그 장면을 <꿈의 공 장>의 엔딩으로 쓰려다가 그만뒀어요. 싸우는 분들 힘 빠지게 할 것 같아 미안해서….”

씁쓸함이 품은 진실 김성균 감독은 모든 걸 설명하려는 다큐멘 터리는 싫다고 말한다. 상황을 보면서 저절로 알게 하는 것들에 끌린다며 크리스 마르케 (Chris Marker)를 언급했다. 그리고 혁명의 실패사라라고 할 수 있는 <붉은 대기>와 <아 름다운 5월>과 같은 그의 작품들을 예로 들었 다. “슬로건을 제시하기보다는 고민이 많아지 게 하는 다큐거든요. 뭐, 제가 답을 만들 만큼 통찰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은폐된 왜곡을 가시화하는 계기를 계속 만들어주어야 한다. 김성균 감독 역시 그런 이들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기꺼이 이 질서의 일부로 살고자 하는 이들 은 제 아무리 다수처럼 보인다 해도 적벽의 조 조(曹操)군에 지나지 않고, 설령 크게 성공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유방(劉邦)의 동지들과 같은 운명일 뿐이다. 그러나 다른 길을 선택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사실과 다른 팩트에 둘러싸여 살아야 한다. 누군가는 은폐된 왜곡을 가시화하는 계기를 계속 만들어주어야 한다. 김성균 감독 역시 그런 이들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그에게 당원으로서 하고픈 말을 물었다. 그는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었다. “현장에 가면 알고 보니 노동당(진보신당) 당원들이 많아 좋아요. 그건 좋죠. 그런데 정당으로서 할 수 있는 영역은 더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되길 바라고요. 그리고… 당원으로서 미안합니다.” 인터뷰를 마친 후, 동행한 박성훈 중앙당 홍보실장이 자신의 옷에 달려있던 배지 하나를 희귀아이템이 라며 김성균 감독에게 건넸다. 서울시당에서 제작한 노동당 배지였다. 극구 사양하던 김성균 감독은 머쓱 해하더니 왼편 가슴에 작고 빨간 배지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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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수의 DIY 공작소

“서울에서 제주까지 노동당 LED 깃발 뜬다” -전국 16개 시도당에 LED 깃발 만들어 보내

인터뷰·정리 : 곽동건 서울 동작구 당원

노영수 동작당협 사무국장, 또 한 번 대형 사고를 쳤다. 지난 10월호에서 소개한 LED 당깃발을 전국 16개 시도당 그리고 당협 이름을 박아 무려 서른 세 개를 만들었다. 이름하 여“노동당, 전국을 밝혀라! 프로젝트” 다. 이 분, 도대체 정체가 뭘까? 이쯤 되니 좀 무서워 진다.

우선 작업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린다. 간단히 말하자면, 전국의 16개 광역시도당과 활발히 활동하는 당협에 노동당 LED 깃발 을 제작해 보내는 프로젝트다. 총 서른 세 개를 제작했다. 8월 말부터 작업을 시작했고 현 재 전체 작업 공정의 97%를 끝냈다. 완성되는 대로 깃발을 나눠드릴 예정이다.

지난 번 대형 LED깃발 제작도 그렇고, 이렇게 LED 제작을 계속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지? LED의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면 진보정치가 배워야 할 덕목이 있다. LED는 에너지 효율이 좋아서 같은 전력을 소비하면서도 훨씬 밝은 빛

할 덕목이 있다. LED는 같은 전력으로

을 낸다. 기존 백열전구는 열을 발

도 훨씬 밝은 빛을 내고, 정면을 중심으

산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로 한정된 각도 내에서 빛을 발산한다.

반면 LED는 열손실이 거의 없다. 108

LED의 속성을 보면 진보정치가 배워야


당의 진로와 정책을 놓고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 는 것, 백열전구처럼 뜨끈뜨끈한 열을 내는 것은 이 념정당을 지향하는 정치집단에게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끼리 열 내는 것 외에 대중 앞에 우리의 정치를 알려내는 데에는 소홀했 던 것 같다. 우리 정치의 내용이 대중들에게 인식될 수 있게 광도를 높이는 데 힘쓸 필요가 있다. LED는 지향성이 뚜렷하다. 정면을 중심으로 한 정된 각도의 범위로 빛을 발산한다. 비정규직 정리 해고 없는 세상, 핵 없는 세상, 차별 없는 세상을 위 해 벌이는 싸움판이 우리당의 분명한 지향성인 것 과 비슷하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세력에 맞서 보편적 인권을 옹호하고 그것의 후퇴 를 저지하는 것이 바로 우리당에게 요구되는 다이 오드와 같은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을 줄이야. 혼자서 LED깃발을 서른 세 개나 제작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어떤 계기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나? 당명이 바뀌면서 대형 LED깃발을 제작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집회에서의 주목도도 높 았고, 특히 한겨레 지면에 실렸던 우리당 광고에 깃 발 사진이 들어간 것을 보고 참 뿌듯했다. 재창당을 했으니 광역시도당과 당협들에서도 새로운 깃발이 필요할 텐데, LED로 만든 깃발을 나눠준다면 대중 집회에서 잘 활용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이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작업을 시작할 때까지 굉장히 막연한 계획이었다. 이렇게 오래 걸 릴 줄도 몰랐고, 기관지에서 이 프로젝트를 소개하 게 될 줄도 몰랐다. 그래서 주위에 알리지도 않고 혼자서 조용히 작업을 했다. 어느새 6주가 흘렀다. 삶과 문화 109


광역시도당은 몰라도, 전국의 모든 당협에 깃발을 보내는 것은 아닐 텐데, 어떤 기준으로 선정하려 하는지? 이 프로젝트가 공적으로 예산을 받아서 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인 작업이다 보니 분배 기준도 나름 대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생각난 것은 예전에 신세도 지고 도움도 받았던 고마운 당협들이었다. 2010년에 중앙대에서 학과 통폐합 구조조정이 일어났을 때, 일방적인 학교 본부와 싸우는 과정에서 퇴학을 당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구조조정 의 부당함을 알리고 학생징계에 항의하기

학교 구조조정에 대항해서 싸우다 퇴학을 당

위해 삼보일배를 진행했다. 중앙대 본부에

했다. 당시 학교본부에서 주최하는 국토대장

서 주최하는 국토대장정 코스를 추격하면서

정 코스를 추격하면서 삼보일배를 했는데,

삼보일배를 했는데, 그 과정에서 몇몇 당협

그 과정에서 몇몇 당협의 도움을 받았다.

의 도움을 받았다. 고마운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는데 나름의 보답을 해드리고 싶었다. 제작자 입장에서는 특히 활용을 잘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활발히 움직이는 당협에서는 LED깃발을 사용할 일도 많고, 관리도 잘 해주실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 구체적으로 어느 당협에 보낼지를 확정하지는 않았는데, 필요한 분들의 신청을 받겠다.

혼자서 제작하는 과정에서 들인 비용이나 수고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제작비는 얼마나 들었나? 총 비용은 130만 원 가량 들었다. 깃발 하나당 4만 원 정도의 제작비가 들어간 셈이다. 제작 기간도 그 렇고 제작비용도 그렇고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너무 과소평가했던 것 같다. 아마 미리 알았으면 시작도 안 하지 않았을까?(웃음) 그래서 최근에 페이스북에“거지가 됐다” 고 얘기하면서 주위 분들에게 밥도 많이 얻어먹었다. 이제는 프로젝트가 마무리 단계이니 기분 좋게 나눠드리려 한다. 쿨하게“그냥 굴러다니는

집회에서 LED 깃발을 깃대에 매는 노영수 당원(왼쪽), 그리고 집회 현장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노동당 깃발(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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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로 몇 개 만들었어요~” 하면서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웃음)

사후에 고장이 나면 수리해달라는 요청도 자주 받을 텐데… 그 생각은 많이 했다. 그래서 LED깃발 관리 방법과 사용 설명을 출력해서 동봉할 계획이다. 가급적 고 장이 나지 않도록 잘 관리해달라는 당부를 드리고 싶다. 혹시 고장이 나면 전부 다 고쳐드리기는 힘들 것 같고, 원리는 간단하니 주위에 전기를 다뤄본 분들에게 부탁하면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도 다른 곳에 LED깃발을 만들어드린 적이 있었는데, 관리가 잘 되지 않은 경우에는 금방 고장 나버려서 안타까웠다. 사실 관리만 잘 하면 아주 오랫동안 쓸 수 있다. 몇 년 전에 만든 진보신당 동작당협 깃발은 아직도 아무런 문제없이 잘 작동한다. 심지어 비를 조금 맞아도 문제가 없다. 노동당 당명이 바뀌 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쓸 수 있을 것이다. 보관이 가장 중요하다. LED가 박혀 있는‘노동당’글자를 접거나 구겨서 보관하면 안 된다. 그러면 단 선이 일어나거나 글자가 찌그러질 수 있다. 글자와 글자 사이에 LED가 없는 부분을 접어서 보관하면 된 다. 혹시 접착 부위가 뜨는 경우에는 평평한 곳에 깃발을 펴고, 글자 위에 책을 올려 눌러주면 된다.

이번 프로젝트의 목표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노동자대회 전야제나 대중집회처럼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는 장면을 상상해 봤다. 전국의 당 깃 발들이 한 자리에 모여, LED로 대오를 이루는 모습을 만들어 보면 장관일 것이다. 지루하고 피곤한 작업 이었지만 그런 모습을 상상하면서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당원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작은 재주 로나마 당에 활력을 보탤 수 있다면 그걸 로 충분하다. 사실 제작자 입장에서는 제 작 그 자체에서 느끼는 즐거움도 크다. 만

LED 깃발이 물결치는 노동당 대오, 장관일 듯! 만약 당이 없었으면 이런 작업을 시작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작은 재주로나마 당에 힘을 보탤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약 당이 없었으면 이런 작업을 시작할 일 도 없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애정을 가지고 있는 당의 존재와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내게도 즐거운 일이라는 점이 맞아 떨어지면서 이런 결과물이 나온 것 같다.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이랄까.(웃음)

이후에 계획하고 있는 또 다른 프로젝트가 있나? 지난번 대형 LED깃발을 제작하면서 깃발 크기로 정점을 찍었다면, 이번에는 큰 깃발은 아니지만 개수 로 정점을 찍은 것 같다. 이제 LED에는 질려서 당분간은 LED깃발을 제작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후에 는 나무를 사용한 공작 DIY 정보를 소개하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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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의 시 <손 무덤>, 노래로 다시 태어나다 노래가 된 시가 있다. 시라는 형식 자체가 압축된 언어로 표현되다 보니 어떤 시 는 그 자체가 가락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노래가 된 시를 가장 많이 쓴 시 인은 누구일까? 통계를 내보지 않았으나 아마도 박노해 시인이 아닐까 싶다. <민들 레처럼>, <노동의 새벽>, <하늘>, <이 길의 전부>, <시다의 꿈>, <평온한 저녁을 위 하여>, <짤린 손가락>, … 그가 쓴 많은 시들이 노래가 되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상어로 노동자의 삶과 꿈을 담기에, 노래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락을 얹고 싶어진다. 박노해의 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노래 중에서 오늘은 <짤린 손가락>을 소개하 고자 한다. <짤린 손가락>의 원본이 되는 시는 <손 무덤>이다. <손 무덤>은 8연 53 행으로 이루어진 꽤 긴 시다. <손 무덤>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는 80년대 중반의 휘청거리는 한국의 현실과 눈부신 성장의 혜택에서 빗겨나 고된 노동에 시 달리다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서른여섯 살 노동자 정형의 손목이 잘렸다. 그러나 아무도 피 흘리는 정형을 자 신의 자가용에 태워주지 않는다. 결국 덜컹거리는 트럭에 몸을 싣고 정형은 병원으 로 치료받으러 가고 그의 동료인 나는 가족들에게 잘린 손목을 전해주러 정형의 집 을 찾지만 차마 그의 손을 전하지 못하고 돌아온다. 보상을 받을 길이 있는지 서울 한복판 대형 서점에 가서 책을 찾아 보지만‘엠병할, 산데미 같은 책들 중에 노동자 가 읽을 책은 두 눈 까뒤집어도 없고’화려한 치장을 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휘황찬 란 거리에서‘얼나간 미친 놈처럼 헤매이다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연 장노동 도장을 찍는다.’내 품속에서 푸르뎅뎅해진 정형의 손을 소주에 씻어 공장 담벼락 밑에 묻어준다. 그리고‘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 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혼자서 흥얼거리곤 했던 노래 <짤린 손가락>을 무대공연으로 본 적은 딱 두 번 있는데 공교롭게도 두 번 모두 이 곡을 작곡한 김호철의 무대였다. 부스스한 머리

노 래 의

짤린 손가락 민정연 문화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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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점퍼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 트럼펫을 부르며 노래하는 그의 모습을 보노라면 노래 속 정형의 동료가 바 로 김호철 자신인 듯 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노래를 그보다 잘 부르는 사람은 많지만 그만큼 <짤린 손가 락>을 자기 이야기처럼 맛깔나게 부르는 사람을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산재 보상이‘행운’ 이 된 세상 박노해의 시 <손 무덤>은 1984년에 세상에 나왔고, 노래 <짤린 손가락>은 노동자노래단 3집 <노동자행 진곡>에 처음 수록되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노동자가 산업재해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산재 처리하고 사후 보상을 받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수많은 서류를 준비해야만 한다. 완벽하게 서류를 갖추었다 할지라도 사측은 사고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미루며 책임을 회피한다. 언젠가 산재를 당한 노동자가 하종강 선생에게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여 재판에 증인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재판정에서 도표까지 그려가며 상세히 설명해줘도 생산설비에 대한 이해가 없던 판사들은 사측의 주장에 더 귀 기울이는 와중에, 간곡히 사고현장 답사를 주장하여 운좋게 받아들여졌다. 1-2초 간 격으로 오르내리는 기계 사이로 물건을 집어넣어야 하는 현장을 판사들이 두 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산재 판정을 내렸다고 한다. 하종강 선생을 찾아온 노동자는 운이 좋았을 뿐이다. 다양한 산재를 목격했던 현 장형 노동교육가 하종강 이름 석 자를 안 것도 그의 운이고, 현장답사 가잔다고 직접 나서는 판사가 흔치 도 않으니 그 또한 운이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 그런 행운은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일을 작파하고 발 품 팔아 증거를 수집하고 재판을 거치고 심지어 행운까지 보태져야만 산업재해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 다. 그게 한국의‘국격’ 이다. 한국인 노동자의 현실이 이럴진대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은 어떨까?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하다. 아무리 심하게 다쳐도 한국노동자들만큼 치료받지 못한다. 프레스 고장으로 손가락이 잘린 한 이주노동자는 봉합 수술을 받기는 했으나 신경이 통하지 않아 일을 그 만두어야 했다. 회사에서는 이주노동자의 실수라면서 치료비 외에 위자료 한 푼을 주지 않았다. 동료인 한국노동자들의 태도는 더욱 그를 힘들게 했다.“너는 어차피 돈 벌어서 너희 나라로 갈 거 아니냐? 그나 마도 타국에서 이 정도라도 해주는 걸 다행으로 알아라.”이런 태도는 과연 일부 비상식적인 한국인들만 의 사고일까? 내 주변에서조차 이주노동자에 대하여 한국노동자와 차별하는 이중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 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1-2초 간격으로 오르내리는 기계 사이로 물건 을 집어넣어야 하는 현장을 판사들이 두 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산재판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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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들이 이어 부르는 <짤린 손가락> 실제로 몇 년 전에 꽃다지는 이주노동자의‘노동삼권’ 을 제한해야 한다는 집회에 초청된 적이 있다. 공 연 섭외할 때의 집회 목적은‘중소기업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는 것이었다. 표현이 약간 애매 했지만, 노동자로서의 자기 권리를 처음 주장하는 경우라 어설플 수도 있겠지 생각하며 가겠노라고 약속 했다. 그런데 공연 당일에 아무래도 찜찜해서 주최 측에서 보내온 아홉 장 짜리 기획서를 꼼꼼히 읽어보 니 실제 내용은 섭외자의 말과는 사뭇 달랐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인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고 있으니 이 주노동자들에게 한국노동자와 같은 대우를 해서는 안 된다는 요지였다. 깨알같이 작게 쓰인 주최측 명의 도 다시 자세히 들여다 보니‘중소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 들이 아니라‘중소기업인’ 들이다. 그런데 과연 사장님들만 이런 사고를 하고 있을까? 그래서인지 <손 무덤>은 이주노동자들에 의해 또 한 번 노래로 만들어졌다. <노동의 새벽> 출간 20주 년 기념 음반에 수록된 이주노동자들로 구성된 밴드‘스탑크랙다운’ 의 <손 무덤>이 바로 그것이다. 김호 철의 <짤린 손가락>이 손을 묻고 소주 한잔 하는 쳐진 어깨의 노동자의 비애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가 락이라면 스탑크랙다운의 <손 무덤>은 매우 빠른 비트의 락사운드로 노래도 뜻밖에 밝고 씩씩하게 부르 고 있다. 그래서 듣는 이로서는 더욱 서글퍼지기도 한다. 당사자로서 이주노동자의 한과 설움을 직접 노 래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구닥다리로 취급받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30년 전, 20년 전 노래가 지금도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노래로 불리는 게 아니라‘이런 일이 있었단 말이야? 믿 을 수 없네’ 라고,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한다며 비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20여 년 전 노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014년이면 시집 <노동의 새벽> 발간 30주년이 된다. 박노해의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끝으로 그의 시를 멀리하게 되었다. <노동의 새벽>이 쓰인 현장에 시인이 있지 아니하다고 판단되는 순간 그의 시도 힘을 잃었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고백한다. <노동의 새벽>이 주었던 감동과 깨우침은 이미 내 속에 들어 와 있는데 예술인의 행보가 내 성에 차지 않는다는 이유로 작품 자체를 깎아내리고 있었다고. 예술작품과 예술가의 실생활을 분리하자는 이성적 기준과 관계없이 예술작품과 예술가 삶의 불일치를 느낄 때의 상 한 감정은 참 조절하기 쉽지 않다, 애정이 깊을수록. 오랜만에 <노동의 새벽>을 펼쳐봐야겠다. 그리고 <손 무덤>을 노래한 <짤린 손가락>도 다시 들어봐야 겠다. 어느 현장에서 김호철이 직접 트럼펫을 불며 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걸 보니 어느새 가 을인가 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구닥 다리로 취급받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우리의 20여 년 전 노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114


짤린 손가락 박노해 시 / 김호철 작곡 짤린 손가락 바라보면서 소주한잔 마시는 밤 덜걱덜걱 기계소리 귓가에 남아 하늘 바라보았네 짤린 손가락 묻고 오는 밤 설운 눈물 흘리던 밤 피묻은 작업복에 지나간 내 청춘 이리도 서럽구나

하루 하루 지쳐진 내 몸 쓴 소주에 달래며 고향두고 떠나오던 날 어머님 생각하며 술에 취해 터벅 손 묻은 산을 헤매어 다녔다오 터벅터벅 찬소주에 취해 헤매어 다녔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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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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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비평

밀양 송전탑 공사현장, 언론은 없고 카메라만 있다 <미래에서 온 편지>

본업이 기자이고 밀양 송전탑 현장을 몇 번 다녀오다 보니 주변 지인들이 만날 때마다 나에게 묻는 다.“밀양 송전탑, 뭐가 문제래?” “왜 저러는 거래?”왜 사람들은‘밀양 송전탑’ 이 화제인 건 아는데 왜 문제가 되는지는 알지 못하는 걸까. 밀양에 카메라는 많지만 언론이 없기 때문이다. 주민들과 공권력이 충돌하는 모습은 기자들에게는 좋은 장면이다. 자극적이고, 화제가 되기 때문 이다. 특히 밀양처럼 극렬하게 투쟁하는 곳은 금상첨화다. 기자들은 사람들의 눈을 끌기 위해 자극적 인 장면,‘그림 나오는’모습을 찾아다닌

주민들과 공권력이 충돌하는 모습은 기자 들에게는 좋은 장면이다. 자극적이고 화 제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밀양처럼 극렬 하게 투쟁하는 곳은 금상첨화다.

다. 이 그림들은 대중에게‘소비’ 된다. 행정대집행이 진행되던 4공구 건설현 장에 수많은 카메라들이 있었다. 그 카메 라 앞에서 리포트를 하는 많은 기자들도 있었다. 행정대집행을 진행하려는 밀양 시 공무원들과 주민들이 충돌하자 카메

라 셔터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쉬는 시간, 기자는 카메라 앞에 서서“이렇게 싸우고 있습니 다”하고 말한다. 그리고 차를 타고 사라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뉴스에는 현상만 있을 뿐‘왜’ 가 없다.

종편보다 못한 방송3사‘밀양 송전탑’뉴스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밀양 주민들과 연대하기 위해‘탈핵희망버스’ 를 꾸렸고 5일 밀 양에 도착했다. KBS의 같은 날 9시 뉴스는 18번째 순서‘간추린 단신’ 에서 밀양 송전탑 문제를 다루 었다.“경남 밀양의 송전선로 공사 재개 나흘째인 오늘 주민과 경찰 간 큰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 전 측은 송전탑 기초 공사에 착수했고, 공사반대 대책위는 시민 4명에 대한 구속영장 철회를 촉구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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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서로 대립하는 모습만 보여주는 형식적인 보도였다. MBC에 비하면 KBS는 양반이다. MBC 뉴스데스크는 한 꼭지에 걸쳐 밀양 송전탑 문제를 다뤘다. 단,‘외부세력’ 이라는 프레임으로 송전탑 문제를 바라보았다.“경남 밀양 송전탑 사태도 팽팽한 대치 가 계속되고 있다. 오늘도 외지인들이 버스를 타고 공사현장에 추가로 집결했다”외지인들이 왜 가깝 지도 않은 먼 산골짜기에 가서 주민들과 연대하고 있는지,‘왜’ 는 보이지 않았다. SBS는 또 어땠을까. 절망적이다. 밀양 송전탑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다루지 않았다. 대신 5일 SBS 뉴스는 불꽃놀이 소식으로 가득 찼다. 밀양 송전탑 문제보다 불꽃놀이의 화려한 영상이 더 자극적이 고, 사람들이 눈요기하기에 좋기 때문일까. 돋보였던 방송사는 JTBC였다. JTBC 주말뉴스는‘[탐사+] 극한 치닫는 밀양 송전탑, 무엇이 문제 인가’ 에서 12분 동안 송전탑 문제를 집중 분석했다. 송전탑이 이미 건설된 충남 청양 정수리에 송전탑 으로 인해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 송전탑 인근에 사는 주민들에게 건강문제는 없는지 심층적으로 다 루었다. 반대주민들 입장에서는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왜’ 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방송3사는 JTBC보다 못한 보도 행태를 보였다.

카메라만 들이대면 다행, 여전한 왜곡보도 그래도 몇몇 언론의 보도행태를 보면‘카메라’ 만 들이대는 것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뉴시스와 조선일보는 통합진보당 당원들이 밀양 송전탑 공사현장에서 무덤(구덩이)을 파고 목줄을 걸어놓았다 는 무시무시한 소식을 전했다. 주 민들과 관계없는 외부세력(그것도 ‘내란음모’ 의 통합진보당!)이 극렬 투쟁을 부추긴다는 내용이었다. “송전탑 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무덤처럼 생긴 구덩이는 통합진보 당 당원들이 판 것으로 전해졌다” “구덩이를 파는데 힘을 보탠 주민 은 2명으로 이들 역시 전 과정을 돕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목 줄을 메는 것 역시 통진당 당원들 JTBC는 주말뉴스에서 송전탑 문제를 집중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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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것으로 전해졌다” “(주민들


이) 노끈을 전달해 주거나 일부 거들기는 했지만 목줄을 건 사람은 당원이었다”뉴 시스 기사는 거의 전문에 걸쳐‘전해졌다’ 라는 동사로 끝난다. 조선일보 기사 또한 마찬가지다.“당원들이 3~4명씩 교대로 두 시간가량에 걸쳐 구덩이를 팠다…올가 미를 건 것 역시 통진당원들이었다” 하지만 이 보도는 오보였다. 주민들이 구덩이를 파고, 연대하러 왔던 통합진보당 당원들이 구덩이를 파던 주민들을 도와줬 던 것이다. 심지어 무덤인 줄 모르고, 그냥 움막 터잡기 정도의 작업인 줄 알고 도와줬 다는 통합진보당 당원들도 있었다. 이에 밀양 765kV송전탑 반대 대책위(대책위)는 7일 기자회견을 통해 사실관계가 왜곡 과 장됐다며 언론중재위 조정신청과 민·형 사 고발을 동시에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뉴시스와 조선일보의 오보에 대해 송전탑반대 대책위는 언론중 재위 조정신청과 민형사 고발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갈등만 보여주는 언론이 갈등을 더 부추긴다 언론의 역할은 공론장이다. 입장이 다른 이들이, 갈등하는 집단들이 언론이라는 공론장에서 만나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고, 그 안에서 합의점이나 대안을 발견한다. 하지만 밀양 송전탑 소식을 전하는 많은 언론은 공론장으로서의 기능을 전혀 못하고 있다. 합의점이나 대안을 모색하려면 갈등을 있는 그대로만 보여줘서는 안 된다.‘왜’한전은 기를 쓰고 송전탑을 지으려는 것인지,‘왜’주민들은 기를 쓰고 이를 막으려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몇몇 언론들은‘외부세력’운운하며 밀양 주민들을 고립시키고, 이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한 다. 거기다 내란음모로 지탄을 받고 있는 통합진보당까지 끌어들여 밀양 송전탑을 둘러싼 찬성-반대 의 갈등을 더욱 부추긴다. 언론은 외부세력들이 갈등을 부추긴다고 말한다. 하지만 갈등을 부추기는 건 언론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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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마니 칼럼

머루랑 다래랑 알아야 먹는다

숲과 들에서부터 농장까지 온갖 열매들이 형형색색 뽐내 며 익어가는 과일의 계절이다. 그러나 대형마트에서 볼 수 있 는 과일은 국내산이든 수입산이든 모두 품종이 개량된 재배 종뿐이다. 그렇다면 과일은 자연산이 없는 걸까? 있다. 오미자, 머루, 다래, 돌배, 산사 등 시골장터에 가면 여전히 산에서 직접 딴 자연산 열매를 볼 수 있다.“머루랑 다 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고려가요 <청산별곡> 중 많은

이재기 충남도당·약초꾼·목공공방 일꾼

사람들이 즐겨 읊는 대목이다. 하지만 머루와 다래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가을의 자연산 과일 중에서 덩굴성 식물의 열매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오미자(五味子)는 이름 그대로 단맛·신맛·쓴맛·짠맛·매 운맛의 5가지 맛이 나는데 그 중에서도 신맛과 단맛이 제일 강하다. 주로 백두대간 일대의 양지바른 계곡에 많이 자라며 주요 재배지는 경북 문경과 김천이다. 심장을 강하게 하고 혈압을 내리며 면역력을 높여 주어 강장 제로 쓰이며, 폐 기능을 강하게 하고 진해·거담 작용이 있 어서 기침이나 갈증 등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성 신경의 기능을 항진시키므로 유정·몽정·정력감퇴 등에 효 과가 현저하다. 당뇨환자가 입이 자주 마르고 갈증을 느낄 때 복용하면 갈증이 제거되고, 여름 에 땀을 많이 흘리고 난 뒤에 복용하여도 더위를 견디고 갈증을 적게 느끼게 된다. 오미자를 먹는 방법은 ① 말린 열매를 찬물에 담가 붉게 우러난 물에 꿀·설탕을 넣어 음료로 마시거나 화채나 녹말편을 만들어 먹으며, ② 밤·대추·미삼을 함께 넣고 끓여 차를 만들거나 술을 담그기도 하며, ③ 생과를 백설탕과 함께 1:1로 섞어 발효시켜서 3개월 후에 걸러서 물을 5~10배로 희석하여 먹으면 된다. 122


머루란 산포도의 총칭으로 열매를 식용하는 머루와 식용할 수 없는 개머루 로 나뉜다. 주로 산기슭이나 계곡 사이의 숲 속에 자라는데 주변의 다른 나 무를 타고 10m 이상 뻗어오르는 덩굴식물이다. 잘 익은 머루를 씻어 물기를 뺀 다음 꼭지를 떼고 소주를 부어놓으면 잘 익은 머루주가 된다. 약간의 백 설탕을 넣어도 무방하다. 발효액을 만드는 방법은 오미자의 ③과 같다. <청산별곡>에도 나오듯 우리네 생활과 밀접한 식물로, 예로부터 전해지는 많 은 속담에 등장한다.‘머루 먹은 속’ 이란 대강 짐작하고 있는 속마음을 나타 낸 것이고,‘개머루 먹듯’ 이란 맛도 모르고 먹는다는 뜻이며,‘소경 머루 먹 듯’ 이란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못하고 이것 저것 아무것이나 취한다는 뜻이다. Tip) 오미자나 머루의 발효액을 만들 때는 오미자의 선홍색과 머루의 자주색을 살리기 위해 반드시 백설탕으 로 담는 게 좋다. 다래 역시 산기슭이나 계곡 사이의 숲 속에 자라는데 주변의 다른 나무를 타고 10m 이상 뻗어 올라 자라는 덩굴식물이다. 유사한 것으로는 개다래(쥐 다래), 털다래, 키위 등이 있다. 다래의 어린 잎(순)은 나물로 하고, 열매는 날것으로 먹거나 과즙·과실주· 잼 등을 만들어 먹는다. 한방에서 열매를 약재로 쓰는데, 가슴이 답답하고 열 이 많은 증상을 치료하고 소갈증을 제거하며, 급성간염에도 효과가 있고, 식 욕부진과 소화불량에는 말린 머루를 물에 넣고 달여서 복용하기도 한다. 참고로 개다래 중 벌레먹어 기형으로 생긴 것(충영)을‘목천료’ 라고 하는데, 이는‘통풍’ 에 탁월한 효능이 있어 잘생긴 것보다 못생긴 것이 더 인기가 있는 열매다. 으름은 야산에서 나무를 타고 오르며 자란다. 열매의 생김새나 맛은 바나나 와 비슷하여‘코리언 바나나’ 로 부르기도 하는데, 과육의 맛은 매우 달아 맛 이 있지만 다닥다닥한 씨앗은 매우 쓰기 때문에 따발총을 쏘듯 후두둑 뱉어 내야 한다. 어린 순은 나물로 데쳐먹고 줄기로는 바구니를 만들 수 있다. 특히 줄기와 뿌리는 약으로 쓰이는데 이뇨·진통의 효능이 있어 소변불리·수종·관절 염·신경통에 치료제로 사용한다. 잎과 열매의 모양이 특이해서 조경수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지난 10월호에 당원들과 함께 걷는 버섯산행을 공지했으나, 올 가을엔 버섯이 매우 드물어 부득이하게 취소되었습니다. 이 지면을 통해 독자 여러분께 죄송한 마음을 전합니다.

심마니칼럼 123


소리 다운

당원들의 유쾌한 청각생활을 지지하는 이 달의 음원 다운로딩 가이드 장석원 음악 블로그 soundz.egloos.com 주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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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Manic Street Preachers,『Rewind the Film』 매닉스(밴드의 애칭)에 덧붙일 수사는 무궁무진하지만 노동당원을 대상으로 한 다면 이들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대중적인 좌익 밴드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노래 속에 슬쩍‘인터내셔널’ 을 끼워 넣거나 쿠바로 날아가 칼 맑스 극장에서 카스트로를 앉혀놓고 공연을 한다든가. 그러나 매닉스가 대중음 악시장에서 지난 22년간,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탑 밴드의 자리를 유지하는 비결은 이념 때문이 아니다. 이 웨일스 밴드의 미덕은 자신의 신념이 음악을 잠 식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음악 때문에 세상과 타협하지도 않는 경계를 유지한다 는 데 있다. 11번째 스튜디오 앨범인“Rewind the Film” 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하다. 우선 올해 4월까지 진행된 녹음에서 밴드는 35곡을 녹음했고 이중 절반도 안 되는 12곡만을 우선 발표했다. 나머지 곡들은“Futurology” 라는 타 이틀로 내년 5월에 발표할 예정이다. 아마도 곡들의 분위기와 앨범의 테마가 다른 것으로 보이는데 그 말인즉슨“Rewind the Film” 이 매닉스의 앨범치고 는 상당히 정제되고 어쿠스틱에 가까운 음악이라는 것이다. 일단 관악기 사용 의 비중이 눈에 띠게 늘었다. 게스트 보컬이 세 곡이나 되는 이유는 보컬의 단 조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특히 타이틀 트랙을 아예 외부인이 노 래하게 만든 것도 독특하다. 제임스 딘 브래드필드James Dean Bradfield의 날카롭고 지적인 노랫말은 여전하다. 다만 도쿄를 주제로 한 노래에 중국풍 멜 로디를 사용한 것은 오리엔탈리즘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실수라면 애 교, 무지라면 감점이다. ● 강력하게 밀어주고 싶은 트랙 :‘This Sullen Welsh Hear’ , ‘Show Me the Wonder’ ,‘Anthem for a Lost Cause’ , ‘3 Ways to See Despair’ ,‘30-Year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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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클래쉬The Clash,『The Clash Hits Back』 섹스 피스톨즈가 그냥 커피라면 클래쉬는 가솔린이다. 그만큼 위험하고 폭발적이다. 그러나 자본은 혁명의 화염병조차도 관광지 기념품으로 만들 수 있다. 밴드의 데뷔 몇 주년 이런 명분도 없이 소니뮤직은 올 가을 대규모 클래쉬 재발매 공세를 펼쳤다. 19 만원이 넘는 초호화세트인“Sound System” 부터 스튜디오 앨범만 모은 미니 박스세 트, 개별 앨범의 재발매판 등등. 프로젝트의 요체는 1977년 데뷔 이후 클래쉬가 발표한 앨범 5장의 리마스터링 음원으로 이걸 묶음포장과 개별 포장으로 만들었다. 서구문명 과 후기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가장 처절한 반항이었던 펑크운동이 이제는 프티부르주 아의 수집물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지만, 다행스럽게도 음악 그 자체는 1977 년에서 변함이 없다.“The Clash Hits Back” 은 새로운 리마스터링 음원을 활용해 만 든 베스트 앨범이다. 그러나 기존의 히트곡 모음집과는 좀 다르게 밴드가 1982년 가진 공연의 연주곡 순서를 재현했다. 상업적 기준에서 성공한 노래들 모음이 아니라 밴드 가 붕괴하기 전 음악적으로 가장 성숙한 시기, 무대 위에서 팬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바로 그 노래들을 담고 있다. 비록 라이브 앨범은 아니지만 볼륨을 높이고 눈앞의 밴드 를 상상하면서 분노와 절망이 어떻게 리듬으로 변환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자. ● 강력하게 밀어주고 싶은 트랙 :‘London Calling’ ,‘Train in Vain’ , ‘Should I Stay or Should I Go’ ,‘Hitsville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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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 오브 리온Kings of Leon,『Mechanical Bull』 여름에 블록버스터들이 정면충돌하는 영화판과 다르게 음악시장은 휴가기간인 여름이 끝 나야 불이 붙는다. 올해도 마찬가지로 특히 인디록계의 거물 밴드 셋이 대회전을 벌였다. 프란츠 퍼디난드Franz Ferdinand가 8월 26일, 악틱 몽키즈Arctic Monkeys가 9월 6 일, 그리고 킹스 오브 리온이 9월 20일 연이어 새 앨범을 선보였다. 결과는 예상(?)대로 악팅 몽키즈의 승리. 그러나 개인적인 판정은 3년 만에 돌아온 킹스 오브 리온이다. 악팅 몽키즈나 프란츠 퍼디난트 모두 정석대로 최신의 경향인 복고와 재현에 충실했고 결과물 도 훌륭하다. 하지만 킹스 오브 리온은 다른 선택을 했다. 2010년 목에 힘이 너무 들어간 나머지 꺾여버렸던“Come Around Sundown”앨범 이후 3년간 절치부심한 밴드는 선 배들 흉내 내기가 아니라 다름 아닌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가디언의 데 이브 심슨의 평을 빌려오면 밴드는“자신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영역으로 되돌아왔고” 그 덕분에 올해 하반기가 절반이나 남은 시점에서 이미 2013년 시즌을 끝내버렸다. 이 앨범이 다른 밴드들의 성과를 무색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소는 기타-베이스-드럼의 성스 러운 결합만 있으면 록은 언제든지 재림한다는 믿음을 확인한 것이다. 10월 말 선보일 아 케이드 파이어Arcade Fire의 새 앨범이 마지막 변수가 되겠지만 지금 현재로는 2013년 하반기 최고의 앨범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 강력하게 밀어주고 싶은 트랙 : ‘Supersoaker’ ,‘Rock City’ , ‘Family Tree’ ,‘Comeback Story’

소리다운 125


제주에서

아침마다 나는 통학버스를 탄다 오늘도 4시 좀 너머 눈을 떠서는 페이스북을 훑어보고 덧글도 달다 몇 가지 일들을 처리 하고 조용히 집을 나선다. 바람이 상쾌하다. 이제 완연한 가을이구나 싶은 새벽공기가 무거 운 몸을 조금은 가볍게 해 준다. 5분 정도 양쪽으로 감귤 밭이 있는 돌담길을 걸어 큰길가로 나가게 되면 위미로 가는 버스가 오는 정류장이 길 건너편에 있다. 사람 습관이란 게 어느 대중가요 가사처럼 우습다. 항상 비슷한 시간에 차를 타면 항상 비슷한 승객들이 버스 안에 있다. 그들도 나와 비슷한 오전 리듬을 갖고 있는 걸까? 일부러 좀 일찍 타거나 늦장을 부리다 타야 할 차를 놓치는 일이 생기는 게 아니라면 항상 같은 차 를 타게 되고 거의 같은 승객들을 만난다. 그러다 보니 눈에 익은 사람들도 많아진다.

제주도 남부의 중요한 교통수단, 동서교통 시내버스 이 시내버스는 대평리에서 위미3리까지 운행하는 버스와 컨벤션 센터에서 위미3리까지 운행하는 버스가 시간대별로 달리 온다. 뭐 내겐 별로 의미가 없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두 노선의 차량을 모두 탈 수 있고 목적지에도 모두 다 내려주니. 한 가지 염두해 두어야 할 일 은 제주도 대중교통의 아쉬움인데, 배차시간이 평균적으로 좀 길 다는 것이다. 해서 버스 시간표를 보고 길을 나서는 게 낭패를 막 는 방법이다. 도착하는 시간은 꽤 정확한 편이기 때문이다. 배차 시간이 긴 서귀포 시내버스도 오전에는 조금 상황이 다르다. 오전 엔 학교에 가야 하는 학생들로 시내버스가 거의 통학버스의 모습 이 되기 일쑤다. 출입문까지 가득 타게 되는 학생들로 미어터질 듯한 통학버스 에 몇몇 주민이 승차한 모양새가 되다 보니 오전엔 배차 간격이 짧 다. 게다가 학생들이 운전기사와 나누는 대화를 듣다 보면 지난날 학창 시절 통학버스를 타고 학교를 오가던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조성일_민중가수 조성일은 14년동안 <희망의 노래 꽃다지>에서 노래를 불렀다. 지금은 제주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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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 발짝씩 안으로 좀 들어가라” “위로 올라와라. 그렇게 있으면 뒤에가 안 보인다” “수 고 하세요” “어 그래”

같은 곳인데도 매일 지날 때마다 다른 풍경 집에서 위미까지 가는 데는 30분 정도 걸린다. 중문 방향에서 오는 동서교통 버스를 하원 마을에서 타면 올레 해안 7코스의 위쪽 4차선 도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 이 있는 이마트 앞 정류장을 거쳐 서귀포 여고에 버스가 서면 서귀포 여고생들이 내리게 되어 한결 차안은 여유가 생긴다. 다시 출발한 버스는 외돌개를 우측으로 두며 풍경 좋은 2차선 도 로를 따라 서귀포 시내로 들어간다. 이중섭거리와 서귀포 재래시장이 있는 중심가를 한 바퀴 돌고 서귀포 중앙로터리 버스 정 류장에 도착하게 되면 서귀포 남고 학생들이 어슬렁거리며 쏟아져 내린다. 그 빈자리에 다시 삼성여고 학생들이 시끌벅적 승차를 한다. 다시 출발한 버스는 서귀포 시내를 빠져나와 효돈 마을을 향한다. 효돈 마을에 들어서기 직전에 있는 삼성여고 정류장에서 또 한 차례 우르르 하 차를 하면 특별한 상황이 없는 이상, 나 혼자 달랑 버스에 남는다. 그리고는 혼자서 효돈 마을 을 지나가고 쇠소깍을 지나 몇 개의 아기자기한 까페들이 있는 공천포 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들어선다. 내리막길이다 보니 저 멀리 위미 항이 보이고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바다 쪽으로 나와서는 감탄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풍경을 선사하며 내게 아침 인사를 한다. 한 번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풍경들. 아침마다 내 안부를 묻는다. 난 웃음으로 인사를 나누며 그렇게 위미마을에 도착을 한다. 물론 상태가 안 좋을 때나 버스 안에서 잠에 빠져 있을 땐 인사고 뭐고 종점까지 가버려 낭 패를 보는 경우도 종종 있다. 글을 읽다 보면 한 번도 제주도 남부 쪽을 여행 오지 않은 사람들 에겐 전혀 다른 나라 얘기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런 분들을 위한 방법 한 가지. 뭐 서귀포에 다 녀왔던 이들에게도 흥미로울 방법이다. 이 글을 읽을 때 옆에 제주도 지리가 제법 구체적으로 나온 지도를 펴놓고 버스가 지나간 곳을 지도에 그리다 보면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본다.

제주도 남부의 주요 교통수단인 동서교통 버스에 관한 이야기 2탄은 다음 호에 이어진다. 상큼 달콤 풋풋한 이야기를 전해 볼까 한다.

제주에서 127


편지를 접으며

밀양에 필요한 것 박권일 칼럼니스트·<88만원 세대> 저자

밀양 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싸움이 처절하게 이어지고 있다. 조·중·동 등 극우언론은 송전탑 반대를 순전히 보상금 때문인 양 몰아가거나 통합진보당이 현장에 결합했다는 사실 을 강조해 색깔론을 집요하게 부추긴다. 악의적 보도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제대로 된 취재와 보도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밀양 사태는 지역주민과 기간산업-국가권력의 갈등이므로 겉보기에 전형적인 '님비현상' 처럼 보일 수 있다. 송전탑 건설은 공익추구이고 이에 대한 주민들의 저항은 사익추구라고 간 단히 정리해 버린다면 말이다(사실 주변의 흔한 님비현상들 역시 이렇게 간단히 정리해버려 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이 공익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이제 사태는 꽤 두텁 고 복잡해진다. 송전탑 건설은 공익이며 주민들이 양해하고 양보해야 하는 사업인가? 그 고압 송전탑을 반드시‘그곳’ 에‘지금 당장’지어야 하는가? 서울 주민을 위해 짓는 송전탑 때문에 밀양 사 람들이 피해를 보는 것처럼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지금 가장 문제가 되는 밀양의 765킬로 볼트 송전탑은 고리 핵발전소와 경남 북부 지역을 잇는다. 전력 부족으로 인한 블랙아웃을 막 기 위해 신고리 3호기를 빨리 가동해야 하고, 그 때문에 송전탑이 필요하다는 게 정부-한전 의 논리였다. 그러나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지적하듯 신고리 3호기는 시험성적서 가 위조된 부품을 사용해 크게 문제가 된 바 있다. 송전은 고사하고 전면적인 안전점검과 검 증부터 선행되어야 하는 위험

‘후쿠시마 이후’ 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핵발 전은 절박한 삶의 문제다. 제2, 제3의 밀양을 막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녹색정치를 실현할 진보정당이다.

천만한 상황인 것이다. 이른바 '후쿠시마 이후'를 살 아가는 우리에게 핵발전은 절 박한 삶의 문제다. 밀양 고압송 전탑 사태와 같은 운영상의 위 험과 비용, 거기에 어마어마한

폐기비용까지 더하면 핵 에너지는 결코 값싼 에너지가 아니며 안전한 에너지도 아니다. 지금 당장 밀양에 필요한 것은 시민들의 연대와 격려일 것이다. 하지만, 제2, 제3의 밀양을 막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녹색정치를 실현할 진보정당이다.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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