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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한책
기억발전소 “기억하는 것은 곧 사는 것이다
To Remember is To Live” 기억발전소는 사진을 매개로 전시와 출판, 교육 컨텐츠 기획을 통해 ‘개인과 사회의 기억을
지금여기에 “국가폭력 피해자를 기억하는 지금 이 시간, 지금 이 곳, 지금 여기에” 지금여기에는 국가기관에 의해 고문으로 간첩이 된 국가폭력 피해 당사자들의 진실을 함께 찾아가고,
가치있게 만드는 기업’입니다. 문화예술 그리고 기억을
과거의 피해가 반복되지 않도록 그 분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평범한 삶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재발견하고,
기록 하고, 개인 혹은 가족 구성원의 트라우마를
개인과 사회 모두가 자신의 존재감과 정체성을 확인해
치유하는 비영리단체입니다.
작은 기억도 소외되지 않는 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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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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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진 고통, 숨겨진 기억
만들어진 간첩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유도 모른 체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20년 가까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고립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도 그저 팔자려니 하며 주어진 형기를 성실히 마쳤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몰래 만들어진 간첩들은 우리 주변에 할아버지나 할머니로, 노동자로, 어머니로 외롭게 숨죽인 채 살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아들 딸을 낳아 잘 키운다고 한들 부모인 게 죄일 뿐입니다. 육군사관학교나 경찰은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요 내일의 길잡이이다.” 얼마 전 역사교과서
꿈도 꿀 수 없습니다. 공무원은 처음부터 자신이 갈 수 있는 길이
국정화 문제로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이 하신 말씀입니다. 현재를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이야 어쨌건 ‘만들어진 간첩’의 자식이기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 자세히 따져보고 살펴보고 반성할 것은
때문입니다. 모든 게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반성하며 미래세대에게 교훈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현대사를 지나면서 많은 성과와 아픔을 경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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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청춘을 고스란히 빼앗긴 이 사람들과 철저히 파괴된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휘황한 결과에만 주목합니다. 성장에 감춰진 고통은 누구도 기억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전히
그들의 가족은 삶의 희망이 있었을까요? 어떻게 살고 싶었을까요?
오늘은 고통스럽고 내일은 밝지 못합니다.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그럼 간첩이 사라지면 곤란하다며 끊임없이
도대체 살아갈 이유가 없었을 것 같은 이들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간첩을 만들어냈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요?
우리는 이제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 피하고 싶었던, 감추고
우리는 누구와 함께 살고 있는 걸까요? 교도소에서 주어진 형기를
싶었던 모습을 아프게 드러내 보려고 합니다. 공권력에 의해
마쳤다면 더 이상 간첩이 아닌 걸까요? 그런 간첩과 함께 살고 있는
‘간첩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가정주부에서 노동자,
우리 사회는 괜찮은 걸까요?
보험판매원, 대학교수에 이르기까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일상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이웃의 작은 역사를 통해 오늘을 진단하고 내일을 준비해보려고 합니다. “때려잡자 공산당”이라는 반공표어가 유행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멀쩡하고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이 물고문, 전기고문, 구타 등으로 ‘때려잡혀’ 공산주의자로 ‘만들어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 시절 대통령은 자꾸 북한에서 간첩이 내려와야 한다고 합니다. 간첩이 내려와야 전과 올리고 훈장 타고 진급이 된다며, 오히려 내려오지 않으면 곤란하다고까지 간첩이 오지 않으면 곤란한 사회라니….
합니다.❶
이제 ‘간첩으로 만들어진’ 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보려 합니다. 외면했던 그들의 역사를 우리가 기록하고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오늘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애써 모른 체 했던 우리들은 삶은 뭐가 달라졌는지. 이제라도 더 나은 내일을 꿈꾸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함께.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알지 못하는 더 많은 만들어진 ‘간첩’이 있습니다. 혹시 당신의 주변에서 본 적이 있습니까? ‘신고’ 해 주십시오. ‘만들어진 간첩’을….
지금여기에 변상철 ❶ ‘1984년도 대간첩대책중앙회의’ 전두환 대통령 오찬연설. 1984년 1월 21일 영빈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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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던 고국 땅에 첫발을 내딛는 재일조총련계동포 하계모국 방문단 . 1978.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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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회관 별관에서 열린 10 월 유신 기념식 . 1975.10.17 주 3년 이성희가 간첩으로 만들어질 당시의 시대 상황 / 1972년 유신헌법 발표 장기집권을 꿈꾸는 박정희 대통령은 ‘민족 중흥과 평화적 통일지향,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위해 유신이 필요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유신은 헌법질서를 파괴하고 민중의 자유의지를 파괴하며 평화통일을 위협하는 독재체제로 당시 수많은 지식인, 학생, 노동자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박순애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형을 선고받을 당시의 시대 상황 / 1978년 재일조총련계동포 방문 땅굴발견, 어선 납북과 해상에서의 잦은 충돌, 해외에서의 유학생 및 여행자 납북, 간첩 남파 등으로 유신시대 내내 남북 간에 긴장이 강화되었다. 한국은 정권 위기가 닥칠 때마다 북한의 지령을 받는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여 북으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았으며, 북한은 불필요한 도발을 자행하여 간첩단 사건의 명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남한 정부가 조총련계 교포들의 조국 방문을 주선하여 많은 조총련계 동포들이 남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가장 많은 동포가 살고 있는 일본에서는 교포 사회조차 남과 북을 지지하는 민단과 조총련으로 나뉘어 이데올로기 대립을 하고 있었다. 남북은 정부 차원에서 이들을 지원하여 동포사회에 각자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을 집중했다.
자료제공
현장에서 사건을 재현하는 김재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1979.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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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 “ 북괴 반미 공산혁명 음모사건 으 ” 로 검찰에 압수된 증거품들 . 1987.2.24
김순자가 간첩으로 연행되어 재판 후 수감 중일 당시의 시대 상황 / 1979년 부마항쟁과 10·26사태 부마항쟁은 유신체제하의 1인 통치가 제도화된 상태에서 민주화운동세력과 유신체제와의 대립관계, 즉 유신 정권의 탄압에 분연히 맞서 진행된 민주화운동이다. 이 항쟁의 결과 권력내부의 갈등을 유발시켜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 한 10·26 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정미의 남편 심진구가 간첩으로 연행되었던 당시의 시대 상황 / 1980년대 민주화 운동 1980년대는 군사정권에 대한 민주화운동이 전개되면서 민주화 세력의 통일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민주화 세력은 분단 상황이 내부의 민주화를 가로 막는 주된 요인으로 인식하고 민주화와 통일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 인식했다. 이들은 정부가 분단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한편 통일논의를 독점함으로써 독재체제를 강화한다고 판단 했다. 당시 남북관계는 주변 강대국의 이익이나 북미관계에 의해 주로 영향을 받았기에 민주화운동세력이 반미입장을 주장하는 것은 이런 사정과도 관련이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같은 민주화 세력을 공산혁명분자로 몰아 공안 통치를 하였고 수많은 음모사건과 항쟁을 낳았다.
이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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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처럼 기구한 운명을 산 이가 없소” 부인과 세 아들과 함께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그가 1974년
2월, 영문을 모른 채 중앙정보부 전주분실로 끌려가 모진 고문과 협박을 받았다. 전북대학교 수의학과 교수였던 그가 일본 유학 시절 만난 사람들, 북한에 다녀온 이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사관들은 그의 군인이던 동생, 울릉도 간첩 사건 등과 연결시켜 더 많은 죄를 덧붙였고, ‘일본을 거점으로 한 간첩, 이성희’라는 이름으로 그를 기소하였다. 이후 그에게 ‘간첩’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그의 나이 마흔아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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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8월 17일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대문안집에서 태어났다. 9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동네에서도 인자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어머니와 군산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 농장에서 근무를 하신 아버지 아래서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
아버지는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아버지는 그를 위해 양복점에서 교복, 모자, 소가죽으로 된 구두를 새로 맞춰주셨다. 같은 학교를 다니던 일본인 학생들도 학교에서 제공하는 교복을 입는데 반해 그의 교복은 눈에 띄었다.
어린 시절 그의 고집을 말릴 자가 없었다. 동네에선 그의 고집 때문에 그를 떼보, 짜가사리, 까시락쟁이
간첩이란 딱지는 비단 그에게만 붙는 게 아니었다. 간첩의
등으로 불렀다. 한 번 목표로 한 것이면
부인, 간첩의 가족으로 살며 그의 가족들은 함께 모진 세월을 함께 견뎌냈다. 17년 간 복역 후 예순여섯의 나이로 출소한 뒤 연고 없는
어떻게든 해내고 마는 성미 덕에 세 번
인제에 정착하여 아흔의 나이까지 생계를 위해 일을 하였다. 그의
있었다. 열여섯, 수의축산과와의 인연은 이리농림학교에서 시작되었다.
나이 여든아홉이던 2014년 12월, 그가 하지 않았던 일들에 대해
농림학교를 다니게 된 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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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보고 이리농림학교에 들어갈 수
받았던 ‘간첩’이라는 오명을 씻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에겐 남은 세월을 부인과 가족 곁에서 서로 의지하며 ‘지금처럼만’ 살았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이리농림학교 시절 오른쪽 중학교 학 . 6년 추 (정 왼쪽 . 중학교 학 3년
)
그는 이리농림학교 졸업과 동시에
동기의 집에서 동기의 사촌여동생이던
스물일곱, 1952년 4월 약혼을 하고, 5월 6일 이리농과대학 강당에서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 어떤 날엔 그가
결혼식을 하였다. 전쟁 때다보니 제대로
다른 동기들이 군청 등에 취직할 때
지금의 부인에게 동생들과 함께 사진을
된 결혼식장을 구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그는 1948년 전북대학교 농과대학에
찍자고 해 사진관에 가기도 하였다.
강의를 시작하던 때여서 이리(지금의
일본에 거주하던 조총련계 사람을
당시엔 연애결혼이 흠이어서 부모님 모르게 당숙모와 이모가 대신 중매를
익산)에 신혼집을 차렸다. 1년 뒤 첫 아이가 태어났다. 이후 대학교수,
입학하였다. 그가 졸업할 무렵 개설된 수의학과에서 졸업과 동시에 수의학과에 조교 생활을 시작하였다. 강의할
서주었다.
교학처장을 역임하며 부인, 세 아들과
사람이 부족하여 조교생활 2년째 되던
나누었다. 이를 통해 알게 된 북한에 대한 실상과 통일에 대해 알고자 동년
함께 풍족하게는 아니지만 행복하게
해부터 강의를 시작하였다. 당시 김용필
살았다.
교수는 그에게 “손끝이 좋으니 외과학을
해방 후 이리농림학교를 함께 놀던
수의사 면허를 받은 마지막 세대였다.
맡으라.” 하였다.
마흔둘, 1967년 10월, 만 4년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비슷한 시기, 만나게 되어 남북한에 대해 이야기를
10월 31일부터 11월 4일, 3박 4일간 북한을 방문하였고, 김일 부수상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이후 1967년 11월에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였다. 귀국하여 전북대에서 강의를 하였고, 교무처장을 역임하였다. 13
강당에서 )
년 1955(6) 전북대학교 이리캠퍼스 수의학과 연구실에서
년 월 1952 5 일 6 이리농림학교 그 ( 당시는 이리농과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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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아홉, 1964년 2월 일본 동경대학 대학원으로 유학을 갔다.
남들도 그가 행복하게 산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 시절 다른 사람의 주례도
행복했던 시절, 마흔아홉이 되던 해
많이 서주었다. 교무처장 시절, 그에게
2월, 중앙정보부 전주분실로 연행되어 조사관들의 고문과 협박으로 조서를 썼고, 그 결과 그 해 3월 기소되어 ‘일본을 거점으로 한 간첩, 이성희’가 되었다. 이 일은 당시 울릉도를 기반으로한 간첩단 사건 ‘울릉도사건’과 연계되었고, 7월 1심에서 사형, 12월 2심에서 무기징역, 1975년 4월 무기징역으로 형이 확정되어 징역을 살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당시 장군이던 남동생은 군으로부터, 그는 전북대학교로부터 파면을 당하였다. 이후 부인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했다.
어떤 이가 찾아와 주례를 부탁했다. 그에게 전북대 교수 중에서 제일로 행복하게 사는 이가 누구냐는 대답에 모두 이성희를 가리켰다며, 막무가내로 주례를 부탁하였다. 이후 많은 이들의 주례를 서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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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있어 걱정 없이 살며
예순여섯, 1991년 만 17년 복역 후 출소하였다. 출소 이후 먹고 살 길을
아흔, 올해 9월까지 도계공장에서 일을 하였다. 이제 그에게는 부인
마련하기 위해 아무런 연고가 없던
그리고 아들, 며느리, 손주들 곁에서
인제에 정착하여, 축협, 도계공장
지금처럼만 편안하게, 걱정 없이
등에서 수의사를 하며 적은 월급으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남았다.
생활하였다. 전깃불 하나 켜는 것도 아끼는 습관이 생겼다. 여든하나,
2006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를 통해 진실규명을 신청하였다. 여든아홉, 2014년 12월, 최종적으로 북한에 다녀왔던 일을 제외한 혐의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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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1991 출소 이후 서울집에서
년대 1970 오른쪽 . 나고야에서 강의 왼쪽 . 도쿄 신칸센에서
박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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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9월 9월 평범한 재일교포와 결혼해 오손도손 살던 한 중년 여자가 입국과 동시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일본에서 생활하며 잠깐 조총련계 인사를 만났다는 이유였다. 성한 곳 하나 없이 허벅지며, 엉덩이가 날마다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밤마다 평생 가본 적 없던 모란봉을 가고, 김일성 수령으로 부터 남파작전을 전달받았다는 소설을 써야했다. 37일간의 고문 끝에 ‘북녘여행기’ 한 편을 탈고했고 그렇게 간첩이 되었다. 12년 3개월을 복역하고 모범수로 출소했다. 그 사이 일본의 남편은 사고로 죽어 없고, 혈육은 간첩의 가족으로 낙인이 찍혀 원수가 되어있었다.
박순애는 1930년 8일 8일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에서 한약방을
오빠의 뜻에 따라 전주간호학교에
경영하던 망부(亡父) 박양규와
입학했지만 취미를 붙히지 못해
망모(亡母) 양양순의 칠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곱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와
2학년까지만 다니다 1949년 전주 명륜학원 법학과❶에 새로 입학했다.
아버지가 별거를 시작했고 박순애는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넘어가 잠시 살았다.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전주도청에 취직한 첫째 오빠를 따라 전라북도 전주 노성동으로 이사를 왔다.
국가보안법 위반, 이라는 딱지는 출소 후에도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할 수 없게 사지를 잘라놓았다. 그렇게 온 몸으로 기어 살아낸 37년의 세월. 이제 곧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 법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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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만에 그녀의 무죄를 선고했다.
풍남국민학교, 전주 북중학교를 거쳐 첫째 오빠의 권유로 김제여자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김제에서 혼자 하숙을 하며 학교를 다니다 해방 후 1946년 전북여자고등학교 2학년으로 편입 해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전학으로 인해 공부에 어려움을 겪던 박순애는 낙제를 면하기 위해 1947년 경상남도 진주여자고등학교로 전학을 가 그곳에서 학교를 마쳤다.
❶
현 전북대학교
이듬해 교육열이 강하던 첫째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학교를 그만 두고 어머니가 있는 남원군 아영면으로 가서 지냈다. 아영면에서는 전북여고 동창을 만나 연맹위원단 활동을 권유받았고 얼떨결에 아영면의 ‘여성동맹위원장’으로 취임 해 20여일 간 활동 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월북하던 인민군과 농민들에 휩쓸려 피난길에 올랐으나 이튿날 충남 영동군 영동경찰서에 자수했다. 1951년 그때 나이 만 스물 한 살이었다. 당시 전주경찰서에 재직하고 있던 셋째 형부 덕분에 전주경찰서로 이송되어 자술서만 작성하고 풀려났지만, '여성동맹위원장'을 하고 피난길을 떠났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영면에 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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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동네에 살던 재일교포가 아버지와 계모가 있는 부산으로 자신의 형이 재혼해 일본에서 함께 살 넘어갔다. 아버지의 한약방은 곧 배필을 구한다며 같은 동네에 사는 잘 되는 편이어서 부산에 있는 큰 박순애를 소개시켜 주었다. 혼자 회사 부인들도 종종 와서 한약을 사는 것보다 결혼해 일본으로 가는 지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말만 잘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부산에서 하면 사무직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결혼한 뒤, 1년 후인 1970년 8월 일본 아버지는 박순애에게 일하지 말고 집에만 고베로 들어가 남편과 함께 구두공장을 있으라고 했다. 그렇게 별 다른 일 없이 운영했다. 그러나 가정불화로 3개월만에 처녀시절을 보내던 어느날, 아버지가 이혼을 했고, 남편 집을 나와 홀로 돌아가셨다. 1961년 그의 나이 만 서른 생활하게 되었다. 이때 결혼을 주선했던 한 살이었다. 살던 집은 계모가 지내고, 지인의 소개로 처음 강아세 가족❷을 박순애는 부산 영도 신선동 동사무소 알게 되었다. 20 뒷편에 십오만원짜리 전세방 하나를 얻어 나왔다. 당시 전주도청에 다니던 첫째 1971년 이혼 후 후쿠오카로 넘어가 오빠가 박순애 앞으로 다방이나 미장원을 시내의 불고기집에서 일을 하다가, 차려준다고 했지만, 5.18 쿠데타가 다시 오사카로 넘어와 ‘에딘바라 호텔’, 일어나면서 오빠의 사정도 좋지 않았다. ‘광성(光城)호텔’ 일을 하며 지냈다. 스스로 벌어서 살아야하는 상황이 되어 1972년, 고된 호텔 일을 그만두고 화장품 외판원과 보험회사 외무사원으로 사무직으로 취업하기 위해 요코하마로 일을 했다. 온 박순애는 강아세 가족의 소개로 조총련계 재일교포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취업을 시켜준다고 해서 왔지만, 일자리는 커녕 자신을 계속 집에만 있게 하거나, 북에 가면 좋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이상하게 느껴 6일째 되던 날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그 길로 곧장 오사카로 돌아가 강아세를 만나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고 그 집에 머물며 시내의 ‘아카사카 호텔’, ‘플로리다 호텔’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스물 한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❷ 재일교포 강아세는 1971년부터 2000년 간암으로 죽기 전까지 일본에 의지할 곳 하나 없는 박순애가 어렵게 지내지 않도록 물심양면으로 챙겨 준 또다른 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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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역 중 다른 수감자들에게 책을
안쓰러웠던지 강아세 가족은 가와사키
나눠주며 ‘책할머니’라 불리웠던
한인촌에 살던 재일교포 이상희를
그는 1990년 모범수로 12년 3개월을
소개시켜주었고 박순애는 가와사키로
살고 출소했다. 12년 동안 단 한명의
건너가 그와 재혼을 했다. 그는
면회객도 없었다. 둘째 오빠와는 간간히
자동차부속품을 만드는 회사원으로
편지를 주고 받았지만 출소 후 찾아간
조금 모자랐지만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른 가족들은 그를 외면했다. 형편이
남편이 회사를 나가면, 아내는
어려운 가족을 위해 일본에서 선물과
시장에서 바지락을 팔았다. 비자문제로
편지를 보냈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가
재일허가기간을 연장하지 못했지만
고문 받는 동안, 그의 오빠들 역시
큰 문제는 없었다. 그 시절로 다시
남산으로 끌려와 고문과 심문을 받았다.
돌아가고 싶을 만큼 평범하고 평화로운
일본의 남편 이상희는 이미 세상을 뜬지
부부생활을 했다고 한다.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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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중 당시 유일하게 연락을 주고 받았던 둘째 오빠의 서신
박순애가 혼자 지내는 것이
23 1977년 7월 29일 밤 11시, 집에 있던 박순애는 요코하마 입국관리소 직원에 의해 체포되었고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요코하마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기간에 남편 이상희는 회사도 나가지 않고 매일 면회를 왔다. 남편의 조카와 시숙도 찾아와 그가 일본에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고 했지만, 결국 9월 9일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박순애는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중앙정보부에서 나와 불법체류자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37일간의 불법구금으로 만들어진 혐의는 ‘1972년
11월부터 1973년 1월 사이 조총련에 포섭되어 북한에 다녀와 지령을 수행했다는 것’ 이었다. 박순애는 1978년 7월 28일, 49세의 나이로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최종 선고 받았다.
사회에 나와 혼자가 된 박순애는 광주에 터를 잡고 파출부일을 하며 기초생활수급자로 지냈다. 매일 원망스럽다는 생각으로 살았다고 한다. 2006년이 되서야 지인의 소개로 진실규명을 신청하게 되었고 10년 후인
2015년 11월 6일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일본에서 증거 수집을 도와주었던 타국의 강아세 가족이 어쩌면 그의 곁을 지켜준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일지도 모른다.
김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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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자는 1945년 7월 15일, 4남 3녀
끊임없이 확장되는 상처들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상회와
그 시절 많은 아이들이 그렇듯 한
김순자는 남동생을 잡아가며 “곧 올테니 꼼짝 말라”던 경찰의
어머니 김경옥은 강원도 삼척군
말대로 이제나 저제나 고분고분 그들을 기다렸다. 어느 날 직장으로
근덕면에서 살다 만나 1942년 그믐께
시간씩, 두 시간씩 걸어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학교까지 걸어 다녔지만 학교
들이닥친 경찰들. 딸 둘, 아들 하나. 아직 어린 자식들의 얼굴을
결혼했다고 한다. 김순자는 1945년으로
기성회비를 내지 못해 매일 선생님에게
제대로 챙겨볼 틈도 없이 영등포에서 남영동 안기부를 거쳐
되어 있는 자신의 출생신고가 사실은
두드려 맞고 집으로 쫓겨났다고 했다.
춘천보안대로 이송됐고 아이 셋은 졸지에 간첩의 딸, 간첩의 아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만 정확히 언제
하지만 김순자의 기억 속 고향의 풍경은
되었다.
태어난 것인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가난해도 아름답고 평화롭다. 보부상을
태어나고 곧 6.25 전쟁이 났고 찢어지게
하던 어머니가 돌아올 무렵이면 마중을
가난한 생활 속에 살아난 것이 기적일
나가 어머니의 짐을 나누어지거나
정도라고 했다.
어머니 등에 잠든 동생을 돌보며 함께
경찰들은 김순자의 기억속에서도 가물가물한 11년 전의 일을 들어 국가보안법을 위반하고, 내란예비음모를 꾸몄다고 했다. 그들이 하는 말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외당숙❶의
집으로 걸어오던 일을 떠올렸다. 때로는
이름 하나….
6.25 전쟁 당시 월북했다 간첩으로 남파된 친척과 만나거나 같은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렇게 일가족 열두 명이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잡혀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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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오래 다니지 못했다.
“나는 태어나가지고 죽는 줄 알았대요.
멀리 바닷가까지 20리를 걸어가기도
엄마 젖도 못 물고. 엄마가 먹은 것이 없어서 젖도 안 나오고, 엄마가 못
했다. 어머니와 동생이랑 나뭇단을 이고 지고 나가 바닷가에서 팔고, 그 몇 푼
먹이니까 할머니 젖을 자꾸 빨더래.
안 되는 돈으로 글씨가 잘 적히지도 않는
내가 그 정도로 못 먹어가지고 아이고
시커먼 종이를 사서 글자를 썼단다.
손가락 같았대. 너무 못 먹어서, 외삼촌이 와서 ‘걔는 내가 집에 도착하기
키가 더 자라나자, 남자아이들은
전에 죽었을 거요’ 이랬대. 나중에 커서
그래도 학교에 갔지만 여자아이들은
외갓집에 갔더니 죽을 줄 알았는데
소를 먹였다. 그런 시절이었다.
컸다고 신기하다고. 아이고.”
열아홉이 되니 키가 다 컸다. 열여덟 살부터 중매가 들어왔는데 억지로 거절하다가 스물한 살에 시집을 갔다. 신랑은 특무대❷에 다니는 군인이었다. “신랑이 특무대 군인이라고 알아주고 이러니까 아이고…. 시집을 갔는데
13남매 집안이었어요! 13남매 장남에게 시집간 거예요!”
❶
외당숙 : 아버지의 외사촌.
❷ 특무대 (혹은 방첩대) : 1950년 10월 육군본부 직할부대로 특무부대본부가 설치되었다. 이후 1960년 4.19혁명 이후 육군방첩부대, 1968년 육군보안사령부, 1977년 국군보안사령부, 1991년 국군기무사령부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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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자의 증명사진
그 모진 고생의 기억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을까. 친자식과 동년배인
대한교육보험 영등포영업국에서
어린 시누이를 다 업어 키웠다. 휴가
일을 하던 때였다. 아들 나이가
때가 되어야 돌아오는 남편은 속을
네 살인가 되었던 것 같다고 기억한다.
상하게 했다. 어느 날 불쑥 이혼도장을
금방 돌아올 줄 알고 아이는 올케에게
찍으라 하여 고개를 저었지만 세 달만
맡겼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지나면 호적에 다시 올려주겠다기에
김순자는 1968년, 친정에 갔다가
그 말을 믿고 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외당숙(진항식)의 집에 내려와 있던 진현식과 한 집에서 만났다는 이유로
“어리석죠. 그렇게 뭘 몰랐어요. 정말 몰라도 너무 몰랐어요.”
11년 후 1979년에 연행되어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와 강원도경찰국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받고 허위 자백 후 7년 형을 선고 받고 5년형으로 감형되어 1985년에 석방되었다. 29
딸 둘은 고향에, 아들은 남편에게
28
그러던 어느날, 사달이 난 것이다.
보내놓고 김순자는 친척의 소개로 서울에서 일을 했다. 뭘 잘 몰라서 일단은 남의 집 일을 시작했다. 일하고 구속되기 전
받을 삯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속앓이만 하던 순진한 시절이었다. 배운 것이 없고 가진 것이 없었으나 남다른
김순자의 세 아이들 ,
생활력과 강인한 독립심으로 서울에서 고향을 오가며 물건을 사고파는 일도 했고, 지인의 권유로 보험일을 시작했다. 남편에게 가있던 아들을 데려와 등에 업고 다니며 보험을 팔았다. 아이를 업고 일을 다니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억척”이라 했다. “남편은 무얼 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사우디에 돈 벌러 갔다”고 하며 더 열심히 일을 했다.
어머니 김경옥 조카와 함께 찍은 사진 . 조카는 ( ), 무기징역을 받은 동생 김 ( 태룡 의 ) 아들로 구속되던 년 당시 100 일이 겨우 지났었다 . 1979
30
하지만 지옥은 그때부터
그는 자신이 아무리 억울하다고
시작이었다. 함께 끌려들어간 아버지는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사형
말해도 남들이 자신을 간첩이라고
선고를 받고 1980년, 형장의 이슬로
때에 엄마를 잃었던 아들딸도 세상이
세상을 떠났다. 자신보다 2년 여 먼저
손가락질 하듯 엄마에게 “간첩”이라
석방된 노모(김경옥, 1923년생, 징역 3년 6개월)는 어린 조카를 돌보며
했다. 반가워도 반갑다고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다시 돌아왔으니
나무젓가락을 만드는 하루벌이를 하며
반갑고 다행이기도 하였지만 또
일상을 꾸려가고 있었다. 함께 구속된
한편으로는 어찌 야속하지 않았겠는가.
열 두 가족들 중 두 집안의 어른이
감옥 안에서 “내 새끼들은 어떻게
사형되었고, 무기징역, 징역 10년, 징역 7년 등을 선고받은 동생과 사촌
지내나” 걱정이 되어 뜬 눈으로 밤을
형제들은 여전히 갇혀있었으며, 조부와
되어 주지 않는 모진 세상에서 “우리
사촌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엄마는 나를 버리고 어딜 갔나” 기다리던 31 어린 자식의 마음. 그 둘 중 무엇이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오히려 고통은 출소 후 민가협 활동을 하며 수많은 시위 현장을 쫓아다녔다 . 아직 출소하지 못한 동생들의 무고함과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 어린 손녀들을 돌보느라 등에 업고 길 위에 서기를 여러 번이었다 .
배가되었다. 살아있는 것이 죄일 수도 있음을 그때 알았다. 세상은 김씨 집안과 진씨 집안 30여 명 중 열두 명이 간첩이라
본다고 말했다. 엄마가 가장 필요한
지새운 어미의 마음과 그 누구도 편이
더 하고 덜 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이 받은 상처는 오롯이
말했다. 잡혀 들어간 것은 열둘이었지만 집안사람 모두 발붙일 곳 없었다. 당연히
한 사람의 것일까? 차라리 그럴 수
그들도 돌아갈 자리가 없었다.
그렇지 못하다. 한 사람의 상처는
있다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절대 한 사람의 몫일 수 없다. 상처는
“출소 후에 강원도에 갔는데 우연히
내 형제, 자매, 내 자식, 친구, 이웃….
시장에서 큰댁 고모를 마주쳤어요.
그렇게 확장된다. 하나의 세계가
너무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다가가 손을
깨진다는 건 결국 그를 둘러싼 세계의
덥석 잡았는데 손을 뿌리치는 거예요.
불꽃이 함께 꺼진다는 것을 말하는지
그러면서 ‘나 너 같은 조카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김순자의 어미, 김순자의 동생, 김순자의 딸이 된다.
둔 적 없다’라고 하셨지….”
김재명 자살
진순이
진순남
진충식 (월북)
진현식 (월북)
진복자
진연대
OOO
진향식 (외당숙) 사형
윤정자 (당숙모) 징역 3년6월
진형대 징역 10년
진형수
진윤식 (외당숙) 징역 5년
진옥남
진복남
진원식
진창식 (외당숙) 무기징역
32
33 김상회 (부친) 사형
김경옥 (모친) 징역 3년6월
김건회 (삼촌) 징역 7년, 자살
김순자 징역 5년
김옥순 자살
김태홍 (군대에서 사망)
김복순
김태룡 무기징역
김태원
김영자 김태일 7년 김태옥
김달회 (삼촌) 징역 7년
김경분
박옥출
김강연
김숙명
김태영
김태열
김순자 가계도
이정미는 어릴 때 서울로 올라와 구로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었다. 1985년 구로에서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났고, 그 남자와 사랑에 빠져 1년 후 결혼식을 올렸다.
이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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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행복한 신혼생활은 채 두 달을 넘지 못했다.
1986년 12월 남편이 안기부로 끌려가는 걸 지켜봐야 했고, 이듬해 2월 그녀의 남편은 혹독한 고문 끝에 ‘전향한 간첩’으로 세상에 나왔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낯선 서울에서 노동자로, 이후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남편과 함께 살아가면서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에 지쳐갔지만 그럴 때 마다 그녀 옆에는 남편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전향한 간첩’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애들 아빠’이자, ‘든든한 남편’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남편을 떠나보낸 지 이제 일 년, 그녀는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싶다.
35
이정미는 경기도 화성군 팔달면의 한 집성촌에서 1964년 10월 31일에 태어났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형제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이정미는 낮에는 일을, 밤에는 야학을 다니면서
결혼 후 다시 돌아온 크리스마스를
“그 사람들은 차를 가지고 나와야 되는
원망보다는 서로 보듬어주는
앞두고, 역시나 크리스마스카드를 팔고 집으로 돌아오던 이정미는 집 앞으로
거예요. 그래서 1분인가 4분인가 그 정도의 시간이 있었어요. 저 사람들이
삶이었고, 의지라는 말보다 운명이라는 말로 남편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찾아온 수사관에게 남편 심진구가
나를 첩으로 몰려고 하고 있다. 간첩으로 이정미는 깊이 있게 나를 일깨워주고,
잡혀가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몰고 있다. 애기 아빠가 그렇게 말했고,
정신적으로 리드했던 남편을 가장
나는 아예 주저앉았어요. 첫 눈인지 뭔지 고마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공부를 지속했다. 구로에서 미싱 노동자 생활을 하던 80년대 초 자연스럽게
“느낌이 이상한 거예요. 누군가 하얀
근로자의 처우 개선을 외치게 됐고,
차에서 신문을 영화에 나오듯이 보고
노동자를 위한 여러 활동에 함께 하게
있어요. 그래도 긴가민가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가 느낌이 이상해서 다시
강요로 찍게 된 전향방송을 통해
있는 이정미는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나오면서 도망가려고 막 달렸어요.
친북괴반미공산혁명 음모사건
삶을 받아들이면서 다시 살아가고 있다.
나를 잡으려고 사람들이 막 달려드는데
지도책으로 세상에 알려진다.
내가 잡히려고 하니깐 그 모습을 본 애기
이 사건으로 이정미와 심진구는
“우리 딸이 만약에 엄마 아빠가 다시
아빠가 걸음을 멈췄어요. 뛰다가 잡히는
가족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부산-남원-
태어난다면 아빠가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안성-산본-안산을 떠돌며 십여 년을 보냈다.
학문을 갖고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채 남편을 만나게 된다. 그 때 남편을
“우리는 외계인처럼 뚝 떨어져서 네
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잡아간 사람들이 안기부 직원이었다는
가족만 살았던 것 같아요. 망망대해에
것을 그리고 그들이 남편을 간첩으로
아무도 없고 우리 배만 파도치고 당장
만들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죽을 정도로 고비를 넘기면서 살았던 것
심진구가 과거에 했던 노동자의 처우
같아요.”
되었다.
85년 11월 당시 근무하던 구로 서광에서 해고당한 노동자들을 위한 36 활동을 하면서 남편이 될 심진구를 처음 만났다. 85년 12월 해고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관악산에서 등산객들을 대상으로 크리스마스카드를 팔았고, 당시 카드를 만들고 있던 심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이후 구로독산지역노동자모임에 함께 하면서 1년 후 둘은 부부가 되었다.
거 보고 딱 멈추더라고요.” 심진구가 끌려간 지 몇 주가 흘러
그 때 눈이 살짝 내렸던 것 같아요.” 지난 해 갑작스럽게 남편을 하늘로 이후 심진구는 안기부의
호텔에서 안기부 수사관들에 둘러싸인
보내고 남편과의 기억, 추억을 정리하고
아니라 지금 이 생애에서 쌓아올렸던 거예요. 저도 그래요. 아빠가 다시 태어나서 그 재능을 좋을 쪽으로 발휘를
개선 운동이나, 박영진 열사 장례식
‘간첩’이라는 말을 듣고 너무 놀라 지금도 그 장면이 머리에 박혀 있다.
하 “ 얀 달이 떴어
이정미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하얀 달이 . ”
년 안산에서 고문 피해 사실을 알리려던 88 심진구는 경찰의 군홧발 사이로 보이는 하얀 달을 기억한다 . 파란 하늘에 떠있는 하얀 달은 이정미가 안고 있던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 그의 첫 째 딸이었다 . 딸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심진구는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에 그림을 그리면서 생활을 이어갔는데 , 그의 그림에는 언제나 두 딸이 함께 있었다 .
준비 활동으로 잡혀간 줄 알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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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대, 삼십 대 때 일은
“삼십 대 때도 고생이었죠. 그래
“사십 대 때는 복합적이었어요.
고생이라고 생각했어요. 고생이지만
내가 고생 받아드리겠다. 고생하겠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난 후회도 있었고,
후반을 지나고 애기 아빠한테 바라는
씩씩하게 지냈어요. 아빠가 그런
하면서 내 몸 안에서 정말 일이 안 풀릴
내가 이 사람을 만난 것이 무슨 의미가
건 전혀 없었죠. 가족들도 이 사람을
일을 겪고 난 다음에 힘들게 살면서도
때는 짐승 소리도 냈던 것 같아요.
있지 않을까 생각이 복합적으로
아침부터 김밥 싸서 미술관이나 그런
으으으 으으으 하면서 까짓것 고생 그래
곳들을 아이들이랑 많이 다녔어요. 사진을 보니깐 그렇더라고요. 우리
와라. 지금 현실이 지옥이더라고 지옥을 즐겨주마. 으으으 으으으 짐승소리를
나타났어요. 이런 사람을 만나서 고생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으니깐 무슨
등한시하고, 모든 사람이 이 사람을 등한시 하더라도 나는 꼭 지켜내야
애들한테 많이 보여주고 싶어서
내면서 조상 때문인가, 전생의 죄
인연으로 내가 저 사람을 지키기 위해
그랬죠.”
때문인가 별 생각이 다 들면서 오기로
만나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은 못해도
버텼죠. 사십 대 초반까지 그랬죠.”
나는 할 수 있으니까 어떤 다른 세계에서
인연으로 만났겠다고 생각했어요. 무슨
“이런 시기를 보내고 나니, 사십대
할 사람이고 그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를 그런 인물로 내린 것이 아닐까... 운명적으로 점지했다는 생각을 했죠.”
이정미와 심진구가 연애 하던 1986 년 월 6 , 인천 작약도에 여행 갔다 돌아오는 인천여객터미널에서 심진구가 찍어준 이정미의 모습이다 .
언제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 이정미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둘의 모습니다 . 두 번째 사진은 이정미 고향 화성에 고구마를 심으로 심진구와 함께 다녀왔던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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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심진구는 1986 년 영문도 모른채 안기부 지하실에 끌려가 자신을 고문했던 수사관들의 모습을 세상에 알리고 고발하기 위해 몽타주를 그렸다 . 여우 , 곰 , 불독 , 독사라는 이름은 고문 수사관의 특징을 따 붙였다 . 이정미는 심진구가 십여 일을 굶으며 그림을 그렸다고 기억한다 .
41 40
1970 4.22. 새마을 운동 실시
4.3. 민청학련사건 수사 발표
1.8.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선포
8.28. 납북조절위 평양 측에서 남북대화중단 성명
12.27. 유신헌법 발효
12.23. 박정희 선출(제8대 대통령)
10.17. 비상계엄 선포
7.4. 남북공동성명
12. 6. 국가비상사태 선언
8.12. 대한적십자사 남북이산가족찾기 회담 북에 제시(14일 북 수락)
4.27. 대통령 박정희 당선(제7대)
11.13. 전태일 분신사건 발생
8.15. 남북통일에 관한 8.15선언
1968 10. 주민등록증법 개정
1974
1973
1972
1971
1969
1967
1966
1965
1964
1963
1962
1961
1960
1959
1958
1957
1956
1955
1954
1953
1952
1951
1950
1949
5.3. 박정희 당선(제6대)
6.22. 한일협정 조인
8.14. 중앙정보부 인혁당사건 수사결과 발표
6.3. 비상계엄령 선포
3.24. 대학생 한일회담 반대 시위
10.15. 대통령 박정희 당선(제5대)
1.20. 국방경비법 폐지
5.16. 군사쿠데타
8.23. 장면내각 성립
5. 이승만 하와이 망명
4.19. 김주열 시체인양을 계기로 전국적 시위 확산
7.31. 진보당 조봉암 사형 집행
1.13. 진보당 사건 발생
5.25.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발족
11.29. 제2차 헌법 개정(4사5입)
10.1.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인
7.27. 휴전협정 조인
6.18. 반공포로 석방
6.8. 포로교환협정 조인
7.7. 제1차 헌법 개정(발췌개헌)
2.15. 제1차 한일회담 개최(65년 협정 완료)
2.11. 초대 수도경찰청 수도국장 최능진 국방경비법위반으로 사형
2.19. 거창양민학살사건 발생
6.25. 한국전쟁 발발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5.20. 국회프락치사건
1.1. 반민특위 발족
12.1. 국가보안법 제정
10.19. 여순사건 발생
9.7. 반민족행위자 처벌법 제정
8. 대한민국 건국
3.15 기소
2.15 중앙정보부 전주분실 연행
11. 귀국 이후 교수 재직
10.31 입북(-11.4)
8. 조총련계와 입북 합의
2. 동경대학원 재학(-67.11)
셋째아들(이재남) 출생
12. 둘째아들(이재호) 출생
2. 큰아들(이재근) 출생
5.6 결혼
4.26 약혼
수의학과 조교로 재직
전북대 졸업
1. 재일교포 이상희와 재혼
1.1 강아세 가족과 신정보냄
12.3 오사카 플로리다호텔 근무
11.3 오사카 아카사카 호텔 근무
오사카 에딘바라호텔, 광성호텔 근무
11. 이혼
8.31 도일
7.21 재일교포 김윤경과 이혼
아버지 돌아가심
어머니 돌아가심
아영면 여성동맹위원장
명륜학원(현 전북대) 법학과 입학
전주간호학교 입학
전북대 입학
이리농림학교 졸업
1948
7. 국방경비법 제정(-62년도)
1947
4.3. 제주 4.3사건 발생
전북여고 편입
김제여고 입학 진주여고 전학
군 제대
3.3 출생
박순애
1946
1945
1944
1943
1942
1941 이리농림학교 입학
소학교 졸업
1939
1930
8.17 출생
이성희
1926
연도
10. 3. 재일본조선거류민단(민단) 발족
10. 재일조선인연맹(조련) 결성
8.15. 광복
대한민국
아들 출생
둘째 딸 출생
큰 딸 출생
남파공작원 진현식(외당숙)과 만남
막냇동생 김명숙 출생
남동생 김태일 출생
여동생 김영자 출생
남동생 김태룡 출생
출생
김순자
10.31 이정미 출생
이정미
1978 1979
7.6. 박정희 선출(9대 대통령) 8.9. YH여성노동자신민당사 점거 농성
이명박 대통령(17대) 취임
12.1. 진실화해를 위한과거사정리 기본법 시행 및 위원회 발족
5.31.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 기본법 법률 공포
2005
1.25. 국회도서관 대강당, 국가폭력피해자 증언대회
2008
2007
2006
2004
2003
2002
2001
2000
1999
1998
1997
1996
1995
1994
1993
1992
1991
1990
1989
1988
1987
1986
1985
1984
1983
1982
1981
노무현 대통령(16대) 취임
2002 한일월드컵 개최
김대중 대통령(15대) 취임
12.3 IMF 구제금융 요청(-2001.8.23)
김영상 대통령(14대) 취임
2.5. 노태우 대통령(13대) 취임
6.29. 노태우 6.29 선언
1.14. 박종철 고문사건
3.17 고 박영진 열사 분신
10.9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
9.1. KAL기 폭파사건
3.3. 제5공화국 출범
8.27. (11대 대통령) 전두환 선출
8.16. 최규하 대통령 하야
5.31. 국가보위비상대책위 신설
7.26 진실규명 신청
2.25 출소
2.25 20년 감형
광주 두암동 가정부 생활
출소
5.15 진실규명 조사개시
1.13 진실규명 신청
서울 동서울 가정부 생활
우산동임대아파트이사
광주불로동,화정동가정부생활
2.28 진실화해위원회 재심 각하
11.30 진실규명 신청
(무기징역에서 20년형 감형)
김태룡 석방
김태일 석방 (징역 7년)
김순자 석방 (징역 5년)
아버지 김상회 사형
어머니 김경옥 석방(징역 3년 6개월)
9.9 대법원 기각, 형 확정
상고
5.1 고등법원에서 5년형으로 감형하여
8.9 검찰 송치, 기소
6.14 삼척경찰서 연행
김순자
5.18. 광주민주화운동
8. 교도소에서 환갑잔치
자격정지 15년 선고
7.28 국가보안법 위반 등 징역 15년,
9.10 남산 안기부로 이동
9.9 김포공항 입국, 수사 시작
7.27 요코하마수용소로 이동
7.27 불법체류자로 검거
박순애
12.20 징역형 선고
12.12. 군사쿠테타 1980
4.8 상고 기각. 형 확정.
12.9 무기징역 감형
7.24 사형 선고, 항소
이성희
10.26. 박정희 대통령 사망
10.16. 부마민주항쟁
1977
1976
8.18.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4.9. 인혁당사건 사형 집행
1975
연도
4.8. 대법원 인혁당재건위 사건 상고기각
5.27. 인혁당 재건위(2차 인혁당 사건) 발표
대한민국
1.10 진실규명 신청
12.14 각하
11.16 헌법소원 청구
8.18 각하
7.29 항고
4.30 검찰에서 공소권 없음으로 기각
고소, 고발
4.1 안기부 직원및 안성경찰서 정보과장
2년(집혜유예4년)선고,항소포기,형확정
4.20 심진구 징역 2년, 자격정지
2.심진구전향기자회견(KBS,MBC방영)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
1.15 심진구 서울지방검찰청에 송치,
12.10 심진구 안기부 남산분실로 연행
11.2 심진구와 결혼
9.서강해고
2.구로독산지역노동자모임해체
11.구로독산지역노동자모임참여
5. 서강어패럴 근무
이정미
2014
4.16 세월호 참사 11.5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국정화 확정고시
2015
2013
2.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구속 기소
10.29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무죄 확정
2012
2011
2010
2009
연도
박근혜 대통령(18대) 취임
대한민국
12. 대법원 상고심에서 원심 확정
6. 대법원 재심 개시 결정
서울고법 무죄 선고
6.30 진실규명 결정
이성희
11.7 무죄판결
10.7 재판
9.10 대법원무죄취지파기환송결정
3.10 일본직장동료진술서제출
7.25 상고
7.19 선고 재심기각(패소)
7.3 재심 1차 공판
10.22 서울고등법원 재심 신청
4.19 진실규명 기각
6.25 진실규명 이의신청
5.22 진실규명 불능 결정
박순애
3.28 형사보상 결정
11.14 대법원 무죄 확정
5.22 검사 대법원 상고
4.25 무죄 선고
10.25 담당 수사관 증인 소환
7.26 서울고등법원 선고기일(연기)
11.9 고등법원 재심신청
8.3 진실규명 재신청, 기각
김순자
11.29 남편 심진구 영면
8.23 형사 보상청구
7.11 상고 기각, 무죄 판결
4.16 검사 상고
4.4 검사 항소 기각
12.11 검사 항소
11.20 무죄 선고
10.11 심진구 재심신청
이정미
111: 수상한 책
발행인 지금여기에 이사장 이명춘 발행처 기억발전소 발행일 2015년 12월 16일 기획 지금여기에 진행 및 편집 기억발전소 기록 강혜지, 박소진, 이원영, 전미정 사진 스튜디오 것 윤유성 디자인 일상의실천 자료제공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제작지원 5·18기념재단
ISBN 979-11-956297-2-5
* 이 책은 5·18기념재단의 제작비 지원으로 발간되었습니다 * 이 책에 실린 글과 이미지는 해당 유족들과 구술 당사자에게 있으며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이 책의 내용 전부 또는 일부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구술 당사자와 기억발전소, 지금여기에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 2015 MemoryPlant&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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