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짜오컬럼[VOL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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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COLUMN 중언부언

계 2차대전 일본이 패망한 후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베 트남의 기득권을 주장하며 베트남을 재 점령한 프랑스 군은 그들에 맞서 싸우는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민[Viet Minh] 에게 점차 밀리는 형국이었다. 호찌민에게 모든 군사적 권한을 위임받은 <보 윙 얍 Võ Nguyên Giáp>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 의 게릴라 전술은 현대식 병기로 무장한 프랑스 군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프랑스군은 어디서나 볼 수 있었지만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인민과 함께 하는 베트민’ 과의 전투에서는 언제나 처음에는 우세한 화력을 전개했지만 곧이어 신출귀몰하게 이 동하며 허점을 찌르는 베트민의 게릴라 전에 밀리는 전투상황 이 반복되었다. 게다가 한국 전쟁이 발발한 탓에 미국의 프랑 스 점령군에 대한 지원이 소홀해지면서 기동력이 열세인 프랑 스 군은 베트민을 격퇴할 마땅한 수단이 없었다. 한국 전쟁 휴전이 성사되자 베트남을 점령하고 있는 프랑스 역 시 베트민과의 평화 협상을 모색하게 된다. 그러나 <눈 덮인 화 산>으로 불리는 얍장군이 이끄는 베트민은 중국과 소련으로부 터 이미 많은 무기를 지원받아 전장을 게릴라전에서 전면전으 로의 전환을 준비하고 있었다. 평화협상을 하고 싶어도 전투에 서 밀리는 형국에서는 건져낼 것이 없다고 판단한 당시 프랑스 군 총 사령관 나바르는 베트민의 주요 보급로인 딘빈푸에 거점 을 확보하고 그들의 행보에 제약을 가한다면 그들을 협상테이 블로 끌어와 유리한 협상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미군이 지원 한 비행기를 이용하여 베트남 인민들이 <휴식하기 좋은 장소> 혹은 <신들의 경쟁장>이라고 불리던 라오스 국경 근처 작은 마 을 딘빈푸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여 진지를 구축한 후 가능하 면 많은 수의 베트민이 공격하기를 기다렸다. 그 순간 자신들이 갖고 있는 우세한 화기와 비행기로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겠다는 작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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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프랑스 군 입장에서는 생각해 볼만한 작전이었으나 그들 은 밥 한 공기만으로 하룻밤에 50킬로를 행군할 수 있는 베트 민의 저력과 이미 그들이 중국으로부터 상당수의 중화기를 공 급받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전투는 사실상 시작하기 전에 이미 승부가 결정되었다. 프랑스군이 딘빈푸에 대규모 요새를 구축하고 전투를 준비하 고 있었지만 얍장군의 베트민은 그들의 퇴로를 막아놓은 채 일 체의 대응을 하지 않고 자신들이 이길 수 있는 상황이 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트민은 3개월만에 병사와 인민들의 힘만 으로 프랑스군이 가지고 있던 화기보다 3배나 많은 중화기를 딘빈푸를 병풍처럼 둘러쌓은 고지 위로 올려놓고 전투를 준 비했다. 병력도 무기도 프랑스군을 압도할 만큼 준비를 마친 시점, 1954 년 3월 12일 오후 5시 베트민은 엄청난 포탄을 프랑스 진지에 쏟아 부으며 전투는 시작된다. 공격이 시작된 지 한 시간 만에 500여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하고 밤 12시에는 프랑스군의 첨병 요새인 베아트리체는 거대한 무덤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그 장면을 목격한 유격대 포병 지휘관 샤를 피로트는 자살을 한다. 포격으로 시작된 전투를 곧 육박전으로 전개되었 고 몇 차례의 공방을 거치며 양방이 모두 상당한 인명 손실을 입으며 일진일퇴를 나누었지만 양쪽 다 이미 승부가 정해져 있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그런 승부를 인정하기 위하여 더 많은 인명과 시간을 댓가로 지불해야 할 뿐이었다. 예상보다 막강한 화력을 지닌 베트민의 50여일에 거친 공세로 대부분의 요새가 함락되고 거의 절반의 병력을 소모한 채 헤어 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프랑스군에게 베트민의 확


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는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의 독 립을 위해 싸우던 레지스탕스의 낯익은 노래, “동지여, 자유는 우리의 소리를 밤에 듣는다” 라는 구절이 반복되 는 바로 그 노래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기지 엘리앙에서 프랑스 국가를 부르며 밤을 세운 프랑스군은, 5월 7일 백 기를 걸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항복을 선언한다. 이렇게 55일간의 딘빈푸 전투는 프랑스군의 처참한 패배 로 마감된다. 이 승리로 얍장군은 베트남의 영웅으로 탄생하고, 서방 언론으로부터 붉은 나폴레웅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세계 전사에 기록될 명장으로 등장한다. 그 전투를 계기로 프랑스는 가장 값진 식민지인 베트남 에서 물러갔지만 베트남에게는 또 다른 투쟁의 시작점 이기도 했다.

“구정공세를군사적인목적에국한시켜서이야기하는것은잘 못됐다고봅니다.구정공세는군사적이면서,정치적이고동시 에외교적인활동이었습니다.당시에우리는전쟁을단계적으 로축소시키기를원했습니다. 우리도적을섬멸할수없다는걸알고있었습니다.하지만미군 의싸울의지는없앨수있다고생각했습니다. 그게구정공세의이유입니다.” 결국 그는 조국의 독립과 통일이라는 뜻을 이루었다. 그 리고 103세의 생을 누린 후 지난 10월 4일 운명을 달리했 다. 전장에서 수많은 죽음과 함께 살아온 그가 100세를 넘기도록 건강하게 생존했던 이유는 그에게 전장에서의 죽음이란 감내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철학이 있었 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는 말했다.

호찌민을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운 프랑스의 농간 에 빠진 미국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의 공산주의 도미노 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고딘디엠 (Ngo Dinh Diem)을 내세 워 남 베트남 정부를 만들어 남북 분단을 형성한다. 이제 막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룬 베트남 에게 통일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던져놓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얍장군의 역할이 빛을 발한다. 1968년 미국과의 벌인 구정공세가 그것이다. 구정을 맞아 관례적인 휴전으로 오랜만에 총소리가 멎을 것을 기대하던 베트남의 전선은 새해의 해가 뜨기 전 북 베트남의 대공세로 뜨겁게 달궈졌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결과는 북 베트남 군의 완패로 끝 났다. 이 전투로 북 베트남은 남부 게릴라의 근거가 완전히 괴 멸되는 회복하기 힘든 손실을 입었지만 최후의 승리는 북 베트남으로 돌아갔다. 베트남의 수만 명의 피해보다 자국군인 수백 명의 목숨에 관심이 많은 미국의 여론은 반전 분위기를 띄우며 철군을 종용했다. 결국 이 전투를 기점으로 미군은 종전을 준비하기 시작 했고 그로써, 북 베트남 군은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략적으로 대승을 거둔 것이다. 얍장군은 정글이 아닌 시가지에서 벌이는 전투에서 미군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 다. 그런데 왜, 뻔한 손실을 감내하고 과연 그는 무엇을 얻으려 했는가? 얍장군은 미국인 전기작가와의 인터뷰에 서 그 의미를 밝혔다.

“우리는 어떤전투에서도 크게이기지못했지만 전쟁에서이겼다.” 이제 그는 생을 달리하여 그와 함께 전장을 누비던 수많은 베트남 장병들과 적군으로 대적했던 영혼들을 만날 것 이다. 생전에 경외롭던 전쟁 영웅은 하늘에서 그들과 어 떤 만남을 가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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