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사회 2014년 22권 1호
성곡언론문화재단/언론과사회사
차례
특집: 감정과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 실천으로서 공감 : 시론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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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호 · 성민규
감응 연구의 관점에서 본 ‘현재’의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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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은
감정과 공론장 79
: 비이성적 형식으로서의 감정에 대한 비판적 재고 이강형 · 김상호
한국 치유 문화 작동의 정치학 : 신자유주의 통치 시기 주체 구성에 대한 일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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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미
유교적 가족 안에서 개인은 어떤 모습으로 사는가? : 한국과 중국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타난 개인성의 변모 강명구
이용자의 기술놀이 : 개인용컴퓨터 초기 이용자의 해킹을 중심으로 조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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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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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작성 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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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투고 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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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논문
감응 연구의 관점에서 본 ‘현재’의 부재* 이희은**
이 연구는 소위 ‘감응으로의 전환’ 이후 이루어진 감응 연구의 이론적 의미를 살 펴보고, 신자유주의의 사회와 문화가 보여주는 퇴보적 특성을 ‘현재’의 부재에서 찾으려는 탐색적 시론이다. 감응 연구는 재현과 매개 연구의 한계를 벗어나 현재 성과 즉시성을 다루려는 철학적 사유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 때 ‘감응’은 사회학 이나 심리학의 관점과는 달리 몸과 정신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몸과 몸 사이에 전 이될 수 있는 경험적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감응 연구는 신자유주의가 우리 의 삶과 문화에서 현재성을 제거하는 방식을 학문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재현이 아닌 감각과 감응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만 현재성을 복구할 수 있다는 문 화실천적인 방안을 제시해 줄 수 있다. 이 연구에서는 구체적으로 <무한도전> 등의 사례를 통해 감응 연구가 우리 사회와 문화의 현재성을 복구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본다. 이론적으로나 개념적으로 아직 정교화되지 않은 감 응 연구를 통찰함으로써, 한국의 신자유주의 상황에서 감응 연구가 제시하는 학 문적 의미와 방향을 탐색하는 것이 이 연구의 목표다. K E Y W O R D S 감응 • 현재 • 감정 • 느낌 • 신자유주의 •
잔혹한 낙관주의 • 공감
* 이 논문의 초고는 2013년 12월 13일에 ‘감성과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주제로 열렸 던 ≪언론과 사회≫ 2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발표되었다. ** helee@chosun.ac.kr
감응 연구의 관점에서 본 ‘현재’의 부재 35
It’s being here now that’s important. There’s no past and there’s no future. Time is a very misleading thing. All there is ever, is the now. We can gain experience from the past, but we can’t relive it; and we can hope for the future, but we don’t know if there is one.
―George Harrison
1. 들어가며 디지털 문화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한창이던 2013년 12월, 서 울의 어느 대학에 이미 낡은 표현 양식이 된 줄로만 알았던 대자보가 다 시 등장했다. 한 대학생이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인사말을 담아 시작 한 이 대자보는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며 확산되었다. 사 실, 빠르게 확산되었던 것은 대자보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형식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부끄러움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 혹은 느낌이었다. 철도노 조 파업에 참여한 노조원들에 대한 직위해제, 밀양 송전탑 문제, 대선 부 정선거 등 우리 사회가 현재 처한 주요 이슈들에 대해 물음을 던지면서 시작되었던 대자보 열풍이 그 어느 뉴스 매체보다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 킨 까닭은 무엇일까? 대자보 한 장이 불러일으킨 감정의 파고와 밀도는 일반적인 사회 분석 방법만으로는 가늠하기 힘들만큼 크고 복잡한 것이 었다. 2013년의 대자보 현상에 대한 의미를 본격적으로 분석하기에는 아 직 충분한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최초의 대자보가 환기한 성찰의 질 문이 우리 사회에 어떠한 감정의 연쇄를 불러일으켰다는 것만큼은 어렵 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의 연쇄, 즉 ‘현재성’을 지닌 문화 의 분위기는 단순히 대자보 문구의 의미만을 기계적으로 따져서는 알 수 없는 공통의 경험과 환경에서 기인한다. “안녕들 하십니까?”로 시작 하는 대자보에 적힌 문구를 이해하고 의미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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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사회적 현상을 일차적으로는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한 가운데서 아날로그 방식으로 번져나가는 이 현상에 공통으로 존재하 는 감정과 느낌을 알고 감응(affect)1)한다면, 이 현상과 나와의 관계는 한층 더 깊어지고 풍부해질 것이다. 스튜어트 홀의 말처럼, “문화는 개 념이고 생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느낌이고 애착이고 감정”이기도 한 것이다(Hall, 1997, p. 2). 감정이나 느낌에 대한 학문적 접근의 역사가 짧은 것은 아니지만, 감정을 개인의 내면세계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요소로 인식하 고 본격적인 논의를 펼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근대 의 삶은 감정보다는 이성을, 상상력보다는 합리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왔고, 어느 순간 스쳐 지나가듯 느끼는 감정의 세계는 아직 의 미가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3년의 대 자보 사례를 비롯한 한국의 상황들이 보여주듯이 ‘지금 이 순간 여기’라 는 현재성은 그 어떤 분석으로도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지만 가장 폭발 적인 힘을 지닌 결정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그 순간의 감정을 그저 불완 전한 것으로 보지 않고 구체적인 사회관계의 측면에서 이해할 때, 현재 성이라는 순간은 비로소 지속이라는 궤적 위에 놓이게 된다. 이 글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우리 사회와 문화가 보여주는 퇴보적 특 성을 ‘현재’의 부재에서 찾고자 한다. 그리고 현재성의 발견이나 복구는 언어와 시각으로 재현되지 않은 감각과 정서를 찾아내는 일이어야 한다 는 점에서, 몸과 정신의 이원론을 극복하고 현재에 집중하는 감응 연구 (affect studies)의 시의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와 문화 에서 ‘현재’가 부재하는 방식과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감응 연구의 관점에서 문화를 바라보는 것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논
1) 이 글에서 감응(感應)은 ‘affect’를 옮긴 말로 사용한다. 이 개념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는 이 글의 2장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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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할 것이다. 이를 위해 <무한도전>과 같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나 건 축가 정기용의 공공프로젝트 등의 사례가 왜 감응 연구의 관점으로 볼 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는지 탐색해 보고자 한다. 이 사례들을 통해, 어떤 텍스트의 재현이나 의미 연구만으로는 총체적으로 파악하기 힘든 문화의 현재성과 즉시성을 감응 연구의 관점으로 조명할 수 있음을 보 여주고자 한다. 감응 연구는 연구자를 연구대상 바깥의 객관적 위치에 두는 전통적 인 과학적 연구방법론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주체와 대상 혹은 몸과 환경 사이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인식하려는 움직임이다. 본문에서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감응 연구는 지금 현재 새롭게 부상 중인 현 상이나 기존의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일들을 대상으로 할 때 그 의 의가 더 또렷이 드러난다. 이는 감응 연구가 이미 재현된 의미에 대한 비 판적 관심을 아직 재현되지 않은 잠재성에 대한 비평적 관심으로 이동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널리 알려진 대중문화 현상이면서도 여 전히 설명되지 않는 측면이 많이 남아 있고, 실제 시청률에 비해서 더 많 은 화제를 몰고 다니는 <무한도전>은 감응연구의 의미와 적용을 논의 하기에 적절한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2) 물론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현상이나 밀양 송전탑 건설과 관련 된 문제 등 문화 정치적으로 더 시급하게 살펴보아야 할 문제들이 산적 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논문이 본격적인 사례 분석 연구라기 보다는 감응 연구에 대한 탐색적 시론의 성격을 더 띠고 있다는 점, 그리 고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중미디어가 배제하고 있는 ‘현재성’에 초점을 맞춘다는 의미에서 제한적이나마 <무한도전>의 경우를 언급하고자 한
2) 한국갤럽의 2013년 12월 보고서에 따르면, 무한도전은 10개월 연속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 는 방송 프로그램 1위에 꼽혔다. 한국갤럽은 이 보고서의 결과가 특정한 시청 행위나 시청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요즘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물어본 결과라는 점에서 “한국인의 감성적 TV프로그램 선호 지표”를 나타낸다고 설명한다(한국갤럽리포트, 2013년 12월호,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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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무엇보다도 이 글에서 중점을 두는 것은 개별 프로그램의 수준이나 의미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상황에서 감응 연구가 제시하 는 학문적인 의미와 방향을 탐색하는 것임을 밝힌다.
2. ‘감응’의 개념에 관한 논의 감응 연구에 대한 논의 이전에 먼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감응’이라 는 개념의 사용 문제다. 이 글에서 말하는 ‘감응’은 라틴어의 affectus, 불 어의 l’affect, 영어의 affect에 해당하는 말을 옮긴 것이다. 스피노자는 인 간의 가장 근본적인 정서인 기쁨과 슬픔을 감응(라틴어의 affectus, 영어 의 affect)이라 부른다. 그는 감응을 변용(라틴어의 affectio, 영어의 affection)과 구분하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스 피노자에게 있어서는 변용에 가깝다. 반면 그가 말하는 감응은 하나의 변용에서 다른 변용으로 이행하는 것을 의미한다(Deleuze, 1970/2001 에서 재인용). 지금까지 이 말은 학자들과 번역자들에 따라 ‘정서’, ‘정동’, ‘변양’, ‘감성’, ‘감응’ 등 여러 가지로 사용되어 왔으나, 이 글에서는 ‘감응’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3) 일상어에서 ‘감응’은 주로 동사로 영 향을 미치거나 심리적인 감동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철학적인 의미로의 감응은 주로 명사로서 느낌의 강도, 몸의 감흥, 그리고 전(前) 인식적인(precognitive) 반응을 의미한다. 이러한 감응의 개념은 스피노 자(Baruch Spinoza)의 주장에 크게 의지하고 있으며, 그 바탕에서 철학
3) 이 말은 아직까지 통일되지 않은 채 여러 가지 다른 용어로 번역되어 혼용되고 있다. 국내에 번역된 들뢰즈의 책에서만 보더라도 ‘변양’(≪천 개의 고원≫), ‘정감’(≪영화 1≫), ‘감응’(≪질 들뢰즈≫) 등으로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 이 밖에도 학자와 번역자들에 따라 ‘정서’(하트와 네 그리, ≪제국≫), ‘정동’(마수미, ≪가상계≫, 빌라니 & 싸소, ≪들뢰즈 개념어 사전≫)을 사용 하기도 하며, 보다 심리학적인 의미가 강한 ‘감흥’이나 ‘감성’ 등의 용어도 혼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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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정우(2009), 건축가 정기용(2008), 문화연구자 한선(2013) 등도 ‘감 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용어의 혼란 속에서도 ‘감응’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자 하는 이유로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잠재성의 ‘상태’와 이행으로서의 ‘현실태’를 구분했던 스피노자(affectus/affectio)와 들뢰즈(l’affect/l’affection)와 마 수미(affect/affection)의 설명을 고려하면, ‘정동/정서’ 혹은 ‘감응/감응 하기’라는 용어의 짝이 그 의미를 가장 잘 살린다고 할 수 있다. 마수미의 ≪가상계≫의 번역본과 자율평론번역모임의 ≪비물질노동과 다중≫에 서는 이러한 이유로 affect를 ‘정동(情動)’이라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 다.4) 그러나 ‘정동’은 잠재성의 상태가 지닌 ‘관계’의 특성을 살리는데 약 하며 우리말에 없는 조어라서 문장으로 만들기 어렵다는 약점이 있다. 예컨대 ‘정동-하다’라는 표현은 어색하고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정 동’은 철학적 개념으로 사용하기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이 글에서 논의 하고자 하는 사회와 문화 분석의 틀로 사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 에 비해 ‘감응’은 주체와 대상 혹은 몸과 정신 사이의 관계성을 역동적으 로 표현하면서도 삶의 한 국면을 설명하는 문화이론에서 응용하기에 좋 다는 장점이 있다. ‘감응 받고 감응하다’라는 표현에도 어색함이 없다. 따라서 철학적 논증보다는 문화연구에서 감응의 의미를 강조하려는 목 적을 갖고 있는 이 글에서, 나는 ‘affect’와 ‘affect studies’를 지칭하는 말 로 각각 ‘감응’과 ‘감응 연구’를 사용한다.5) 감응 연구에서 말하는 ‘affect’는 철학적으로 스피노자와 들뢰즈
4) 이후 ≪비물질노동과 다중≫을 펴낸 갈무리 출판사는 ‘정동’이라는 용어를 선택하여 사용 하고 있다. ‘정동’이라는 용어를 출판사가 채택하게 된 과정과 논의에 대해서는 신지영이 번역 한 ≪들뢰즈의 개념어 사전≫(2003/2012, 348∼349쪽) 참조. 5) 그러나 가장 자연스럽게 사용된다는 점에서 ‘감응’이라는 용어가 학문적으로는 지나치게 느슨하다는 비판도 있는 만큼, 앞으로 이 개념에 대한 학술적인 논의가 더욱 집중적으로 이루 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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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lles Deleuze)에 빚지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정서나 감정 등의 용어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데카르트 이후로 감정이나 정서 는 대개 신체의 속성에 의존하여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으며, 비합 리적이고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affectus’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의 몸이 대상과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정 서나 몸은 모두 능동적이 된다고 말함으로써, 17세기 이후 팽배했던 몸 과 정신의 이원론에 정면 도전한다. 특히 일반적인 사회학이나 심리학 의 관점과 달리, 철학적 의미의 ‘감응’은 그 대상을 인간에만 국한하지 않고 모든 종류의 몸으로 확대해서 파악한다. 감응은 의식하지 않은 채 몸과 몸 사이로 전이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며(Brennan, 2004), 이때 의 몸은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 움직이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감 응을 연구한다는 것은 근대의 인식론적 이분법(몸과 정신 혹은 이성과 감성)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고, 이 과정 속에서 스피노 자와 들뢰즈, 그리고 현상학과 페미니즘과 감각에 관련된 이론들이 함 께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처럼 인식론적으로나 학제적으로나 ‘감응’은 비교적 뚜렷한 역사 적 궤적을 보여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을 정의하기란 여전 히 쉽지 않다. 그래서 그로스버그는 감응이란 진정 “우리의 삶에서 아마 도 가장 정의하기 어려운 면”일 것이라고 토로한다(Grossberg, 2006, p. 585). 그는 그 어려움의 이유로 감응이 의미보다는 즐거움의 영역에 속 한다는 점과 감응이 우리 일상생활에서 평범하고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 기 때문이라는 점을 꼽는다. 그로스버그가 보기에 감응은 감정 (emotion)이나 욕망(desire)과는 다르지만 느낌(feeling)과 비슷하다. 그러나 느낌과 달리 감응은 개인 주체의 내적이고 본질적인 경험이 아 니다.6)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있고 그들과 의미와 즐거
6) 감정이나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이 용어들 역시 번역과 학문적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로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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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을 나눌 수도 있으나, 느낌을 공유할 수는 없다. 즐거운 느낌이라 하 더라도 얼마나 짜릿하게 즐거운 느낌인지, 아픈 느낌이라 한다면 어느 정도 아픈 느낌인지 공유할 수 있는 공통 근거를 우리는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응’이 ‘감정’이나 ‘느낌’과는 어떻게 비슷하고 다를 것인가. 이 세 개념의 구별에 대한 가장 간결한 정의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개 의 고원≫을 영어로 번역한 마수미가 이 책에 쓴 서문에서 찾을 수 있다. 마수미는 감응이란 개인적인 느낌이나 감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감응은 감응하고 감응 받는 능력(affect is an ability to affect and be affected)”라고 정의한다(Massumi, 2002, xvi).7) 여기서 감응은 느낌처럼 개인적이거나 생물학적인 정서도 아니고 감정처럼 사회적으 로 표현된 정서도 아니다. 마수미의 표현을 빌자면, 느낌은 감각의 지각 이나 움직임과 관련되고, 감정은 감응이 일정한 강도를 갖고 감지된 것 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감응은 스피노자의 ‘affectus’에 뿌리를 둔 말로 행위 가능성이나 잠재력을 의미한다. 마수미는 느낌이나 감정과 구분되 는 이러한 감응의 특성을 ‘pre-personal(前개인, 자아 이전)’하다고 설명 한다. 즉 감응이란 개인이 타고 나거나 개인이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 이 아니며, 아직 감지되지 않을지라도 곧 행위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 이나 잠재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감응은 개인 내부에 완결된 형태로 남 아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것이다. 마수미의 설명을 참고해서 조금 더 일상적으로 풀어서 말하자면 느
용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감응(affect)과 함께 감정(emotion), 느낌(feeling), 욕망(desire)으로 용어를 통일해서 사용한다. 다만 윌리엄스의 “정서의 구조(structure of feeling)”와 같이 이미 일반적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는 개념의 경우는 그 쓰임새를 그대로 따랐다. 7) 이 인용문은 마수미가 영어로 번역한 A Thousand plateaus(2002)에서 따온 것이다. 한국어 판 ≪천 개의 고원≫은 프랑스어를 원본으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영문판에 실린 마수미의 서문은 담겨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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낌과 감정과 감응은 각각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먼저 ‘느낌’은 과거의 경험을 기반으로 확인되는 어떠한 감각이다. 느낌은 개인의 과거 경험에 의해 명명되거나 개인에게 고유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개인적이고 생물학적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느낌’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에게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시절이 없었고 경 험을 했다 하더라도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언어체계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들이 외부에서 관찰하기에 아이들은 ‘느 낌’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때 부모들이 관찰한 것은 사실상 ‘느낌’이 아니라 ‘감응’이다. ‘감정’은 느낌을 표현하거나 투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느낌’은 속일 수 없지만 ‘감정’은 속일 수 있다. ‘감정 노동’은 가능해도 ‘느낌 노동’이라 는 개념은 가능하지 않은 이유다.8)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자신 의 느낌을 그대로 감정으로 표현하거나 투사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어 려움을 겪는다(Hochschild, 1983/2009). 한 마디로 감정 노동은 개인의 느낌과 상황적인 감정 표현 사이의 간극으로 인해서 생긴다. 따라서 ‘감 정’은 느낌과 달리 개인적인 차원만은 아니며, 때로는 인간의 내면적인 상태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간이 바라는 사회적인 기대 상태나 욕망을 표현하기도 한다. ‘감응’은 의식하지 않은 채 일어나는 경험의 강도를 의미한다. 이는 아직 구체적으로 구조화되거나 형성되지 않은 가능성의 상태, 즉 가능 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감응은 언어나 어떤 양식으로 완전히 표현되기 가 힘들기 때문에 관찰하기도 어렵고 가장 추상적이다. 이를 근거로 마
8) 마이클 하트가 말한 ‘정동적(감응적) 노동(affective labor)’은 그 자체로 공동체들과 집단적 주체성을 구성하는, 긍정적인 의미를 겸해 사용된다. 즉 자본주의의 생산 회로에서 감응적 노 동은 대안적인 자율적 회로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친족 노동’이나 ‘돌봄 노동’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이 노동의 실천이 집단적 주체성을 생산하고 결국 사회 그 자체를 생산 하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Hardt, 1999/2005, pp. 139∼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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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는 ≪가상계≫에서 ‘감응’이 언제나 개인의 의식 이전에 있거나 혹 은 그 바깥에 있다고 설명한다(Massumi, 2002/2011). 이것이 바로 그가 감응을 전개인적인 것이라고 설명하는 이유다.9) 마수미는 ‘감응’이 얼 굴표정, 근육의 움직임, 호흡, 골격, 피의 순환 등과 함께 작용하며 자아 내는 상호 반응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갓 태어난 아기들의 옹알 이나 벙싯거리는 웃음이나 홍조는 아기와 정서적 관계를 유지하는 부모 에게는 특별한 표현이자 행위로 다가가지만, 낯선 이들에게는 무의미한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 감응이 없다면 다른 이의 ‘느낌’은 내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손을 베이고 피가 나면 아프지만, 다른 이의 손이 베이고 피가 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는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다른 이의 아픔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까닭은 바로 감응 때문이다. 즉 나의 경험 에서 알게 된 과거의 경험 강도를 통해 타인의 느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감응은 개인과 외부 환경(개인과 개인, 몸과 몸, 개인과 환경, 개 인과 타자 등) 사이의 관계를 결정하고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데 필수적 인 역할을 한다. 결국 감응 이론은 몸이라는 물질이자 실재가 품고 있는 수많은 정
9) 감응과 의식과의 관계는 음악치료를 사례로 들면 알 수 있다. 사고로 갑자기 하반신 마비가 온 환자가 있을 경우, 그는 치료가 완료된 이후에도 다리에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즉 감각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평소 좋아하던 음악을 들려주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즉, 무의 식적으로) 발가락을 까닥거리는 ‘느낌’을 갖게 된다. 결국 음악치료를 통해 자신도 알 수 없었 던 감응(능력)을 ‘느낌’으로 의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감응은 인간 의 의지나 의식보다 선행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모성애’라는 감응은 의지나 의식에 의해 갖게 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으로 갖게 되는 개인적 능력도 아니다. 다만 개인이 살고 경험한 일상의 역사가 축적되어 생겨난 어떠한 가능태가 새로운 외부세계와 작용할 때 발현되는 감응인 것이다. 따라서 생물학적인 여성이 모두 모성애를 가지고 있다(혹은 그래야 한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며, 아이를 낳고 열심히 노력하면 모성애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 을 것이다(혹은 그래야 한다)는 주장도 잘못된 것이다. 모성애는 타자에 대한 사랑과 관심과 배려라는 느낌과 정서적 훈련이 축적된 가능성의 상태에서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대타 자가 나타났을 때 비로소 발현되는 하나의 전이과정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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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에 관한 이론라고 할 수 있다. 몸과 몸의 관계로 나타나는 이러한 정보, 즉 감응은 제 아무리 정교하고 촘촘한 언어로도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제임슨은 느낌이 몸의 상태(bodily states)이고 감 정이 물화된 의식의 상태(reified states of consciousness)라면 감응은 ‘뭐라 부를 수 없는 상태(nameless states)’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10) 한 마디로 감응은 우리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온몸으로 겪게 되는 에너 지의 상태인 것이다. 좋은 음악을 듣고 말할 수 없는 흥분과 기쁨을 느 낄 때, 혹은 엄청난 일을 경험하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멍한 상 태로 있을 때, 우리는 그런 감응을 몸과 마음으로 겪게 된다. 따라서 감 응은 몸을 “닫힌 체계가 아닌 세계와 교류하는 열린 체계로 만들어, 언 제나 잠재성과 되기(becoming)의 가능성이 함께 하는 상태”로 만들어 준다(Pellegrini, 2009, p. 37). 불과 30여 년 전 제임슨(Jameson, 1984, p. 10)이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를 “감응의 쇠락(waning of affect)”으로 규정했던 것을 떠올리 면, 최근 일어나고 있는 감응 연구의 부흥은 더욱 흥미롭다.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에서 드러나는 천박함과 진부함이 곧 근대 주체의 파편화를 보여준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감응의 쇠락으로 인해 결국 상 품만 남고 정치는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었다. 오늘날 제임 슨의 예상은 어느 정도 현실화되었을까? 그의 예상처럼 예술과 문화이 론에서 감응이 쇠락했다고 볼 수 있을까? 제임슨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 은 아닐지라도 수많은 감응 이론들이 재발견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어지는 글에서는 먼저 새롭게 부상하는 감 응 연구의 흐름과 경향을 살펴본다.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우리의 삶과 문화에서 현재성을 제거하는 방식에 대해 논의한 후, 현재성으로의 복
10) 제임슨의 이러한 구분은 2012년 12월 4일에 호주의 UNSW(University of New South Wales)에서 가졌던 강연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그의 책 The anatomies of realism(2013) 에도 이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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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 감응 연구가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구체적 사례와 함께 모색할 것 이다. 이를 통해 감응 연구에 대한 이론적 정교화를 추구해야 할 필요성 과 한국의 신자유주의 상황에서 감응 연구가 제시해 주는 학문적 방향 에 대해 탐색해 본다.
3. 감응 연구의 흐름과 경향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감응’의 개념이 대두하기 이전까지 서구의 지 적 전통에서 감정은 합리성이나 자유의지에 중심 자리를 뺏긴 채 늘 부 차적이거나 잉여적인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그 근거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이성과 감정의 이분법이다. 이러한 전통은 철학뿐 아니라 사회과학 에도 이어져, 감정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며 비합리적인 토대를 갖고 있 는 것으로 여겨졌다(Joffe, 1999). 고전 사회학에서도 느낌이나 감정에 대한 문제는 거의 공백으로 남아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느낌, 정서, 감정 등에 대한 문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흐메드(Sara Ahmed)의 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2004b), 브레넌(Teresa Brennan)의 The Transmission of Affect(2004), 마수미(Brian Massumi)의 ≪가상계≫(2002/2011), 벌란트 (Lauren Berlant)의 Cruel Optimism(2011) 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러한 일련의 학문적 경향은 흔히 “감응으로의 전환(affective turn)”이라 는 말로 표현된다(Clough, 2008, p. 1). 이는 언어와 시각적 요소에 집중 하는 텍스트 재현 연구에서 벗어나 몸과 감각과 물질적 바탕에 중심을 둔 연구로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경험의 강조라 할 수 있 다. 즉 경험의 의미를 파악하는 지표로 감응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감응 으로 빚어내는 세상에 대한 감각으로 현실 경험을 보다 풍부하게 이해하 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감정을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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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어내어 사회적인 경험이자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 방향으로 유 도했다. 이러한 감응 연구는 주체가 재현되는 방식에 관심을 두는 구조 주의를 비판하고, 주체의 감정이 사회나 환경과 맺는 관계를 통해 테크 놀로지와 생정치(biopolitics) 등의 구조적 문제는 물론 테러와 인종차별 등의 사회문화적인 문제들도 파악하려 시도한다. 감응 연구는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하지 않으며, 이들이 시간성 속에서 맺는 사회문화적 관 계에 관심을 가진다. 쓰리프트(Thrift, 2008)는 구조주의적 언어중심주 의로부터 거리를 둔다는 점에서 감응 연구를 공간 연구와 함께 비재현 이론(non-representational theory)의 범주에 넣기도 한다. 그는 문화 이 론이 재현이나 의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특정한 공간에서 인간이 자 신과 타자에 대해 행하는 일상적이고 별 것 아닌 행동들에 주목해야 한다 고 주장한다. 그러다보니 2000년대 이후 시작된 감응 연구의 흐름은 윌리엄스 (Raymond Williams),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스피노 자, 베르그송(Henri Bergson), 들뢰즈 등 과학과 철학과 문학을 가로지 르는 수많은 학자들의 논의에 폭넓게 걸쳐 있다. 이 때문에 감응에 관한 논의들을 모아 책을 편집한 그레그와 시그워스는 “아직까지 통일된 감 응 이론은 없으며, 고맙게도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Gregg & Seigworth, 2010, p. 3)11)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학제에서 벌어지 는 감응 연구가 이론적으로 하나의 경향 혹은 범주로 묶이게 된 이유는 감응이라는 개념이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의 한계를 넘어 광범위한 사
11) 이 책은 감응 이론을 여덟 갈래의 흐름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는 개론서다. 그 갈래들은 현상학, 사이버네틱스, 탈 데카르트주의, 정신분석학, 페미니즘과 서발턴 이론, 언어적 전환에 대한 반응 이론, 비판이론, 과학과 신경학이다. Chang(2012)은 이 분류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명시적으로 제외되었다며, 감응 이론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관련성도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 장한다. 그는 대부분의 감응 이론들이 몸과 감각을 중시 여김으로써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에 대항하지만, 만일 마르크스 초기 사상에서 언급된 미학 영역을 돌이켜 본다면 감응이론과 마르크스주의와의 연관성을 찾지 못할 이유도 없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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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이론으로 확장되면서부터다. 이 확장의 근간이 된 것은 서구전통의 이원론에 도전하는 지적 움직 임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감응에 관한 이론은 이분법을 해체하거나 통합할 것을 요구하게 되는데, 분배와 재현, 정신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생물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기술적인 것과 미학적인 것 등의 이분법 이 그 해체와 통합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이러한 이분법 해체가 감응 이 론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하르트(Michael Hardt)는 The Affective Turn 에 쓴 서문에서 감응이 인문학과 사회과학으로 귀환하게 된 전조를 두 가지의 이론적 흐름에서 찾는다. 하나는 몸에 대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논의했던 페미니즘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그동안 전통적인 사회학 연구 에서 소외되었던 ‘부끄러움’ 등의 정서 구조에 대한 관심이다. 이와 더불어 언급해야 할 또 하나의 결정적인 계기는 사회적인 환경 의 변화다. 후기자본주의 사회에 테크놀로지 정치학이 대두되면서, 미 디어, 사이버, 정보, 과학 등의 실재가 몸, 물질, 존재, 시간 등의 실재와 융합하게 된 것이다. 감응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결국 몸과 테크놀로지 와 물질에 대한 관심을 사회적인 것으로 만들어온 일련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테크놀로지가 발달한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전쟁이나 고문이나 테러와 같은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 적인 이론의 반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학문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이원론과 이분법에 도전하는 감 응 연구가 새로운 사회 현상들이나 경계에서 벌어지는 문화 현상들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타블로이드 문화, 리얼리티 프 로그램, 미디어 이벤트 등이 대표적인 사례가 되며, 뉴스나 시사 프로그 램 등 사실을 다루는 장르가 연성화되는 경향도 감응 연구의 측면에서 볼 때 흥미로운 주제가 된다. 지금까지 행해진 감응 연구의 사례들을 보 더라도 새롭게 등장하는 미디어 테크놀로지나 장르 혹은 문화 현상을 연구대상으로 선택한 경우가 많다. 국가적 행사 보도에 나타난 민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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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대한 감응 연구(Bociurkiwm, 2011), 인터넷 매체의 재난 보도에서 감응을 활용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McCosker, 2013), 배우나 정치인 등 의 유명인들의 미디어에서 소비되는 방식을 통해 몸과 감응의 관계를 살펴본 연구(Featherstone, 2010), 온라인 여성커뮤니티의 감성공론장 으로서의 성격을 탐색한 연구(김예란, 2010) 등이 그러한 사례다. 흔히 시시한 오락으로 치부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왜 사람들이 감응하는 가를 살피기 위해 수용자들의 반응 강도와 유사언어(혀를 차는 소리, 한 숨, 신음, 웃음 등)의 사용을 조사한 연구도 있다(Skeggs et. al., 2007). 아직까지 하나의 뚜렷한 학문 분과를 형성할 만큼 감응 연구의 분석 결과물들이 많이 축적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이론적 스펙트 럼에서 진행되어온 감응이론들은 몇 가지의 공통점을 보여준다. 첫째, 대개 스피노자와 들뢰즈의 논의를 따라 경험을 중시하고, 둘째, 감응이 미학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을 주장하고, 셋째, 이 미학이 어떻게 다시 일 상과 정치학 사이의 접촉점이 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다. 특히 신자유주의가 공동체적인 정치적 축의 가능성을 앗아가고 있 는 이 시대에, 느낌과 감정과 감응 등이 주체 형성과 정치적 가능성에 어 떻게 도움을 주는지 이해하는 데 많은 연구들이 공을 들이고 있다. 이렇 게 보면 제임슨이 우려했던 “감응의 쇠락”도 감응 그 자체가 사라지거나 없어진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예술과 미학에서 드러나는 감응의 쇠락 현 상이 정치적 저항성을 죽이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 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임슨이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현재의 감응 연 구들은 퀴어 이론에서부터 테크노사이언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제 에서 정치적인 가능성들의 복구를 꾀하고 있다. 그렇다면 감응 연구가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정치’ 그 자체에 대한 개념을 재고하게 만든 것일 지도 모른다. 사적/공적 그리고 개인적/정치적이라는 근대의 이분법에 서 벗어나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도 곧 정치적이고 사회적임을 이론적으 로 또 경험적으로 보여주는 데 감응 연구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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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라진 ‘현재’와 잔혹한 낙관주의 [T]he question of the future is an affective one; it is a question of hope for what we might yet be, as well as fear for what we could become. Sara Ahmed(2004b, pp. 183∼184)
감응은 언어나 시각적 형식으로 환원되기를 거부하는 끊임없는 현재형 이다. 감응은 개인이 경험한 삶의 역사 과정에서 축적되며, 그 어떤 표상 이나 상징체계로도 완벽히 재현되지 않는다. 다만 몸을 통해 그 가능태 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감응은 그 어떤 것도 재현하지 않는 사유양식이다. 우리는 희망, 고통, 사랑과 같은 감응에 대해 말하지만, 이들은 관념으로 만 존재할 뿐 재현되지 않는다. 베르그송(Bergson, 1896/2005)과 스피 노자(Spinoza, 1677/2006)의 말처럼 감응은 관념을 전제한다. 예를 들 어 ‘사랑’에 감응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할 대상에 대한 관념이 필요하 다는 것이다. 따라서 감응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의 감각 을 사용하는 것이고, 감각을 통해 관념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몸 과 감각의 활용은 ‘현재’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베르그송은 ‘있다’는 것은 체험을 통한 경험이나 느낌으로만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지속으로서의 ‘현재’는 과거나 미래도 함께 포함 하고 있으며,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는 현재의 시간이야말로 우주의 가 장 본질적인 것이라 주장한다. 그는 플라톤 이후 지속되던 인식론상의 ‘정지’라는 주제를 운동으로 바꾸고, 공간을 시간으로 바꾸며, 생명현상 의 양을 질로 바꾸었다. 이를 이정우(2009)의 설명으로 풀어서 말하자 면, 존재가 살아 있다는 것은 타자와 직접 접촉하고 경험하고 감응하는 일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정우는 이를 ‘겪음’이라 표 현하는데, ‘겪는다’는 것은 그 존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 다. 예를 들어 사람은 비바람을 ‘겪을’ 수 있지만 책상은 비바람을 ‘겪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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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감응을 현재에 겪는 일이 아닌 과거형이나 미래형으 로 사용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희망의 새 시대”(문화체육관광부), “열 정이 미래를 만든다”(GM 대우),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와 같은 시간성의 표현, 그리고 “사람, 사랑, 삼성생명”(삼성생명)이라거나 “매 력 있는 관광 한국”(한국관광공사)과 같은 집단 환원적인 표현 등이 그 것이다. 이러한 슬로건에서 내세운 희망, 열정, 사랑, 매력 등은 모두 현 재형의 감각으로만 감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직접 겪어야만 비로 소 알 수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이 감정들을 재현하거나 의식적으로 구 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게다가 미래에 그렇게 감응할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더더욱 없다. 아직 모두 잠재태이기 때문이다. 위의 슬로건이 내세우는 감정들이 실재임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잉여의 수사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예를 들어 “희망의 새 시대”라는 구 호의 존재를 미리 입증하기 위해 ‘창조 경제’라는 물질적 근거를 갖추고, 이를 “생각은 현실로, 상상은 가치로”(미래창조과학부)라는 논거의 형 식으로 구체화하는 식이다. “열정이 미래를 만든다”를 시각적으로 재현 하려는 기업광고에서는,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주인공의 아들이 “아 빠! 엄마보다 차가 더 좋아? 왜 맨날 차 얘기만 해?”라며 자랑스러운(?) 불평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여준다.12) 이 광고에서 제시하는 미래란 현 재의 사랑을 유예하는 정도의 열정을 보여야만 간신히 얻을 수 있는 것, 그런 희생을 겪어서라도 얻어내야 할 만큼 값진 것으로 묘사된다. 아직 ‘겪지’ 못한 감정을 희망하느라 현재의 모진 현실을 견뎌내도 록 추동하는 모습이 그저 미디어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실 제 삶도 그에 못지않다. 벌란트는 이러한 현대 사회의 특성을 ‘잔혹한 낙 관주의(cruel optimism)’라 지칭한다(Berlant, 2011). 이 말은 자신이 미
12) GM 대우의 기업광고 참조 (http://www.youtube.com/watch?v=lTRRmlqXP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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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에 대해 욕망하는 것이 실제로는 자신의 현재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멋진 몸을 갖겠다는 욕망으로 현재 누려야 할 먹는 즐거움을 앗아가는 다이어트, 경제적인 성공을 위해 놀이의 즐거 움을 포기하는 검약, 안정된 미래를 위해 사랑보다는 조건을 바탕으로 최적의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 실현 불가능한 헛된 공약으로 민주주의 를 포기하는 정치적인 선전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즉 언제 다가올 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희망으로 현재의 고통을 견뎌내는 것을 의미한다. 벌란트는 이 잔혹한 낙관주의가 개인들을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넣 고 있다고 비판한다. 우리들이 겪고 있는 현실적인 고통은 마치 개인의 선택처럼 보이기 쉽지만 사실은 사회가 규정한 틀에 따라 생겨난 정치 적 문제라는 점도 아울러 지적한다. 어떤 대상에 애착을 갖는다는 것 그 자체는 긍정적이다. 만족할 만한 것을 얻기 위한 자기 극복 과정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문제는 이러한 낙관주의가 현재를 긍정적 혹은 낙관적 으로 “느끼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는 점이다(Berlant, 2011, p. 2). 예를 들어 애인의 사랑을 갈구하며 살을 뺐더니 그렇게 먹는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은 싫다며 애인이 떠나 버리는 상황 같은 것, 혹은 자식 잘 되라고 허리띠 졸라매며 집안 살림을 일구어 놓았더니 그 자식이 부모 님은 돈만 알 뿐 무식하다며 무시하는 상황 같은 것에서 잔혹한 낙관주 의의 실체를 볼 수 있다. 취업을 위해 스펙을 쌓으려다보니 막상 학교생 활이 지독히도 괴롭기만 한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미래의 성공에 대 한 열망으로 연애와 결혼과 출산이라는 현재의 삶을 포기하는 소위 ‘삼 포 세대’는 잔혹한 낙관주의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결국 벌란트가 말한 ‘잔혹한 낙관주의’가 증언하는 것은 미래의 이 름으로 저당 잡힌 현재의 부재다. 현재는 흘러가면서 지속되는 지금 이 순간이며, 베르그송과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지속하지 않는 현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재를 존재하게 만드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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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지속되는 이 순간을 감응하여 지각하는 것뿐이다. 현재의 실체를 감응하기도 전에 어떤 대상으로 매개된다면(예를 들어 ‘사랑’의 감응이 비싼 물건으로 매개되고, ‘희망’의 감응이 1등이라는 경쟁 순위로 매개 된다면), 현재는 벌란트가 말한 “막다른 골목”(Berlant, 2011, p. 17)에 다다른 채 정지해 버린다. 즉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가 지금 현재를 살고 있으면서도 마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처럼 감 응하고 있다면, 그래서 현재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멈춰 있는 것처럼 지각된다면, 이는 현재가 사실상 부재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렇듯 감응이 집단적인 매개의 형식으로 양산될 때, 우리가 현재 를 감각하는 방식은 영향을 받는다. 이것이 감응이 단지 개인적이고 주체적이며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관계적이며 수동적인 것인 이유다.13) ‘현재’를 감응의 측면에서 설명한 학자들은 본격적인 감응 연구의 도래 이전에도 여럿 있었다. “정서 구조”(Williams, 1961), “역사적 공명(historical resonance)”(Jameson, 1984), “소속감(feeling of belonging)”(Anderson, 2006) 등은 모두 개인의 느낌이나 주관성이 사회와 문화의 현재성을 인식하게 한다는 점을 설명해 준다. 그러나 이 논의들에 비해서 감응 이론이 구별되는 지점은, 오늘날 의 ‘현재’란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처럼 자기 자신을 잡아먹는 방식으로 감각되고 살아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벌란트는
13) 여기서 ‘능동/수동’의 구별은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 스피노자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스 피노자 철학의 핵심은 능동(action)과 수동(정념, passion)을 구분하는 일인데, 능동은 사유의 논리적 질서로부터 생겨나지만 수동은 자연의 공통 질서로부터 생겨난다. 예를 들어 하얗게 내리는 눈송이에 감탄할 때, 이것이 수증기의 속성이나 대기의 상황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 온다면 그 정신 상태는 능동이지만 눈송이를 보고 만지는 감각적 경험의 변용에서 파생된 것 이라면 그 정신 상태는 수동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으로 보이는 행동조차도 능동이라고 보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 존재를 보존하는 일 을 도외시하지 않는 것이 본성적인 필연성인데, 이를 의도적으로 피하여 자신을 죽일 까닭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자살이란 외부 원인에 의해 강제된 수동이자 정념이 된다(Nadler, 2002/2013, 323∼3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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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말하는 ‘일상의 삶’이란, 일상을 구조의 반대로 보는 일상이론의 패러다임과는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가 말하는 일상은 들뢰즈 와 마수미를 따라 “현재와의 만남에서 감응적 공명을 통해 역사를 읽는 것”(Berlant, 2011, p. 69)이다. 따라서 그에게 일상은 불안하고 불확정 적이며 감응으로만 파악될 수 있는 현재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감 응의 통제는 결국 통제사회의 생정치로 이어진다. 클러프(Clough, 2008)가 비판하듯이 이제 통제의 목표는 개인 주체가 아니라 감정, 분위 기, 가능성 등의 감응과 유전자 코드, 개인식별번호 등의 개인정보다. 통제사회는 이러한 감응의 통제를 목표로 삼는다. 즉 개인의 몸이 지닌 정보와 데이터를 통제함으로써 사회를 통제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 으며, 감응 역시 개인 몸에 새겨진 정보처럼 다루어지고 관리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 구체적인 비판은 “감응 경제(affective economy)”를 이야기한 아흐메드(Ahmed, 2004a)의 논의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지극히 개인 적인 느낌이나 몸의 정보들이라도 어떤 공통성을 기반으로 분배된다면 그것은 이미 감응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지적 한다. 그는 개인이 특정 대상에 지닌 애착의 강도를 통해 개인과 커뮤니 티가 혹은 개인과 사회의 공간이 하나로 정렬된다고 주장한다. 아흐메 드가 보기에 감정은 주체와 대상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으면서 그 둘 모 두에 작용한다. 그래서 그는 감정을 “특정한 역사의 효과가 자신의 궤적 을 감춘 채 머무는 형태”라고 정의한다(Ahmed, 2004a, p. 119). 이렇듯 오늘날 신자유주의에서 ‘현재’는 부재한 것처럼 보이고, 자 신의 역사적 궤적을 감춘 채 머물고 있는 ‘미래’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감 응된다. 현재를 저당 잡히고 미래와 과거를 소환하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통제사회의 징후다.14) 한국사회는 벌란트가 말한
14) 이하 한 단락은 이희은(2012)의 내용을 재구성하여 서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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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낙관주의로 뒤덮여 있어서, 유명 멘토들은 불안한 20대에게 현 재가 아닌 미래를 바라보며 꿈을 가지라고 독려한다. 이러한 잔혹한 낙 관주의가 보여주는 역설은, 욕망하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정서적인 투 여를 아끼게 되고, 바로 그 희망에 대한 투자 때문에 우리 현재는 텅 비 게 된다는 점이다. 극단적인 형태로는 부모로부터 성공한 판사가 되라 는 닦달을 받던 아이가 결국 이루지 못할 것만 같은 그 꿈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버린 사건과 같은 일이 있다. 이주민 여성들은 자문화에 대한 자 부심이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저당 잡힌 채 한국의 인정받는 시민이 되겠다는 보장받지 않은 미래에 목숨을 건다. 이러한 소식은 결코 우연 한 사고가 아니다. 오히려 이 소식들의 축적은 베르그송의 말처럼 정신 과 물질이 만나는 ‘사건’이고, 이러한 사건의 반복은 ‘기억’으로 남아 우 리가 현재를 감응하는 방식을 좌우한다(Bergson, 1896/2005). 또한 예 능 프로그램에서 기어이 살을 빼면서 고통스러워하거나 온갖 시련을 겪 으면서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한 사람이 성공의 열망으로 자신의 개인 사를 고스란히 노출할 때, 우리는 잔혹한 낙관주의가 개인의 선택이 아 니라 사회적 조건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현재를 유예하는 것 은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이며, 현재를 즐기자는 것은 사회 의 질서에 반하는 일이 되어 버린다. 현재가 부재한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감응되는 미래는 두 가지의 얼 굴을 가진다. 하나는 ‘희망’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이다. 그리고 이 두 감응은 모두 ‘기대’라는 감각에 의해 감지된다. ‘기대’는 미래를 향해 생 각하고 살아가는 방식을 의미하며, 우리가 기회와 가능성을 잘 활용하 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라는 이성적 판단이다(Adams, et al., 2009). 현재가 관리되고 규제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이렇게 ‘기대’ 되는 미래는 다시 현재에 투사되어 현재를 구조화한다. 기대를 거는 방 향에 따라 희망이나 두려움의 감응이 드러나고, 이 감응은 현재의 정치 적 국면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9·11 이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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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에 대한 감응 형성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와 기업이 병합한 군산 복합체는 시민 주체들을 다스리고 관리하기 위해 두려움과 불안을 생 산하고 전파하고 투사한다. 이것이 아흐메드가 “두려움의 감응 경제 (affective economies of fear)”라 부르는 것이다(Ahmed, 2004a).15) 발 생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현재의 사회적 감응으로 생산되고 축적되어, 테러 방지를 위해서는 테러의 현재적인 요소들을 뿌리 뽑아 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게끔 한다. 즉 감응은 개인의 몸 내부에서 발 생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순환과 교환과정을 유발하고, 그것은 하나의 도덕경제로서 가치와 가능성을 축적해 나간다.16) 기대는 그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도박이 아니라, 기대를 통해 투사한 미래가 현재의 행동 가 능성의 조건을 설정한다는 의미에서 도덕경제가 되는 것이다. 미래가 마치 지금 현재 일어날 것처럼 긴급하게 느껴지는 것 또한 ‘기대’의 작용 때문이다. 그리고 기대는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이성적 판단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감응을 동원한다. 이 때 감응을 일으키 도록 동원되는 이성적 판단의 형태가 바로 ‘공포’와 ‘희망’인 것이다. 그런데 감응을 개인의 역량(코나투스)으로 파악했던 스피노자에 따르면, 감응은 변화의 원인이거나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조건에서 다 른 조건으로 이행하는 그 자체다. 그래서 그는 세 개의 기본 감응(기쁨, 슬픔, 욕망)에서 여러 가지 다른 감응들이 파생될 수 있다고 보는데, 예
15) 헨리 젠킨스(Jenkins, 2006)가 설명한 “감응의 경제학(affective economics)”은 사라 아흐 메드의 ‘감응의 경제’와 비슷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젠킨스는 이 용어를 일종의 마케팅 개념으로 바라보고, 사람들의 소비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감정에 관련된 요소들 을 상품에 활용하는 전략적 결정을 일컫는 말로 사용한다. 간혹 아흐메드와 젠킨스의 용어가 혼용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개념의 배경을 오해한 데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16) 여기서 ‘도덕경제’는 시장경제의 원칙을 비판한 칼 폴라니(Karl Polanyi)가 제시한 개념을 의미한다. 출리아라키는 “감응의 도덕경제(moral economy of affect)”(Chouliaraki, 2013, p. 115)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카리스마나 존경과 애정과 같은 감정에 기대어 공적인 권위를 행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가치가 축적되고 교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온갖 역경을 딛고 기어코 눈부신 일을 이루어낸다는 성공신화로 점철된 미디어 스펙터클 등이 대표적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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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대 사랑은 기쁨에서 파생되고 미움은 슬픔에서 파생되며, 욕망은 사 랑의 대상을 소유하거나 미워하는 대상이 파괴되기를 바라는 것과 관련 된다. 이렇게 파생된 이차적 정념들 중에서 스피노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바로 희망과 두려움이다. 스피노자는 희망을 “우리가 그 결과 를 의심하는 미래나 과거의 이미지로부터 생겨난 비지속적 즐거움에 다 름 아닌 것”으로 정의한다. 두려움은 “의심스러운 것의 이미지로부터 생 겨난 비지속적 슬픔”으로 정의한다. 즉, 희망이란 불안정한 기쁨이며 두 려움은 불안정한 슬픔이다. 스피노자에게 희망과 두려움은 모두 “초조 해하는 마음에, 먼 일을 생각하는 탓에 걱정하는 상태의 마음”이며 현재 를 살아가기보다는 먼 미래에 우리의 생각을 투사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인간에게 축복이라 할 수 있는 예 지력이 이 순간 저주로 바뀐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지난 것과 도래할 것 모두에 의해 똑같이 고통 받는다”고 말한다(Nadler, 2002/2013, 340∼ 341쪽). 결국 우리를 현재의 일상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고 영속적인 예속 상 태로 묶어두는 원인은 이 두 감응, 즉 희망과 두려움이다. 두려움과 희 망은 모두 미래에 대한 의심에서 나오는 것으로, 서로 반대되는 정서가 아니다. 미래에 대한 의심이 기쁨이 될지(희망) 슬픔이 될지(두려움)는 되어 봐야 아는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기쁨이 될 것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의 발생을 촉진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와 반대되는 슬픔이 될 것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의 발생을 피하고 파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다면 없는 살림을 쪼개어 보험을 드는 것은 두려움에 의해서인가 희망에 의 해서인가. 놀고 싶은 마음을 묶어두고 스펙 쌓기에 몰두하는 젊은이들 은 두려움을 피하고 있는 것인가 희망을 추구하고 있는 것인가. 문제는 ‘희망’이라는 빌미로 우리를 묶어두는 바로 그것이 결국은 우리에게 ‘두 려움’을 주는 동인과 같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것을 좋은 것이라 판단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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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그것을 얻고자 노력하고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얻고자 노력하고 욕망하기 때문에 그것을 좋은 것이라고 판단한다(Spinoza, 1677/2006). 현재 우리를 예속 상태에 묶어두는 보험, 스펙, 다이어트 등은 성공과 행복을 얻기 위해 우리가 노력하는 방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스피노자의 해석에 의하자면 정반대다. 우리가 보험금을 납입 하고 스펙을 쌓고 다이어트를 하려 노력하고 욕망하다 보면 그것이 좋 은 것이라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배 이데올로기는 늘 우리에 게 무엇인가에 마음을 쏟으며 열심히 할 것을 권한다. 그래야 그것을 좋 은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단, 현재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서 열심히 하라고 한다. 그래야 그 결과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드 러나더라도 책임질 일이 없기 때문이다.
5. 현재에 대한 감응으로 바라본 <무한도전> 제임슨은 자신이 사용하는 ‘감응’은 프로이드와 라캉이 말하는 ‘감정’과 는 구별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이 두 개념을 시간성의 개념에 따라 구분한다. 즉 ‘감정’이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목적론적인 궤적 을 그리는 반면, ‘감응’은 영원한 현재라는 것이다.17) 그는 이러한 기준 으로 볼 때 바그너의 오페라는 이야기가 아닌 몸/마음의 다양한 측면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감응의 현재성을 다루었다고 평가한다.18) 예를 들어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바그너는 외적인 사건보다는 인물의 내면에
17) 제임슨은 19세기 예술에서 몸을 현재적으로 다루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모더니즘이 시작 되었다고 본다. 플로베르와 보들레르와 톨스토이는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인간 내면 그 자체 를 탐구했고, 마네는 몸의 의미가 아니라 몸을 그린 그림 그 자체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18) 2012년 12월 4일 호주의 UNSW에서 “Allegory and Dramaturgy in Wagner’s Ring”라는 제 목의 강연 내용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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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을 맞춘 비극을 지향했고, 음악적으로도 무한선율과 불협화음을 전 면에 내세우는 등 독창적인 음악기법을 사용한다.19) 여기서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바그너 음악에 대한 제임슨의 평가가 옳은지 그른지가 아니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감응에 관심을 갖는 학자들이 여러 가지의 표현 양식 중 특히 소리와 음악에 대해 가장 큰 관 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언어 중심, 시각적 재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 현대 세계에서, 음악이야말로 아직까지 완벽하게 재현하 지 못한 끊임없는 현재성과 시간성의 도구이자 표현이기 때문이다. 제 임슨 역시 음악에서 현재성의 감응을 찾아내려 했고, 그것으로 일종의 시대적 특성을 읽어내려 했다. ‘감응’을 몸과 몸 사이로 전달되는 잠재적 이고 현재적인 감각이라고 정의할 때, 음악처럼 감응이 잘 드러나는 사 례는 없다. 그러나 이미 재현의 테크놀로지가 더욱 발달된 현대의 미디 어 정경에서 바그너의 음악과 같은 사례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로스버 그가 록음악의 감응을 논의하기는 했지만, 이는 록음악 자체가 특별히 감응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록음악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대중문화가 일 종의 감성장을 통해 구성되기 때문이었다(Grossberg, 1992). 일상에 대한 판타지 예능인 <무한도전>을 감응이라는 측면에서 살 피고자 하는 까닭 역시 감응의 사회성과 현재성을 통해 물질적인 맥락 을 살피기 위해서다. 사실, 재현되거나 현실화되지 않은 잠재태로서의 감응을 따로 떼어내어 미디어와 같은 공유된 상징체계에 적용하는 것은 위험한 시도일 수 있다. 지젝은 “감응의 정치(politics of affect)”란 한 마디로 모순이라며, 이러한 시도는 부르주아의 감각적인 자기몰입을
19) 실제로 지휘자인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은 바그너가 소리의 연속성에 관심을 갖고 소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음악을 만들었다고 평가한다(Said & Barenboim, 2004/2011). 이탈 리아 오페라의 경우 아리아에 번호를 붙여 이야기를 구분하는 반면, 바그너는 서곡-간주곡-아 리아의 구분 없이 모든 음악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 이어지게 만든다. 이러한 구성에서 음 악은 하나의 전체로 이해될 뿐 그 중에 어느 것이 아리아인지(즉, 이야기이자 메시지인지)가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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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이고 다루기 어려운 행동으로 꾸미는 가면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다(Žižek, 2004/2006). 그러나 감응에 대한 정서적 투자가 가능하다고 보았던 그로스버그(1992)는 물론, 마수미(2002/2011)와 벌란트(2011) 역시 감응의 분위기는 결코 고립되어 있거나 개인의 영역에 머무는 것 이 아니라 공유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때 우리의 몸은 이 분위 기를 감응하며 외부 환경과 지속적으로 관계하고, 이를 통해 미학적 판 단을 내리느라 분주한 하나의 매개체이자 기관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웃음이라는 형식으로 의미에 구애받지 않고 현재성을 드러내는 <무한 도전>에서 감응의 물질적 순간을 읽어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이다. “사람들은 무한도전에 열광하거나 싫어한다”(권경우, 2012). 이 말 은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이 왜 감응을 이야기하기에 좋은 사례인 지를 보여준다. <무한도전>은 비평적 거리를 두고 찬찬히 의미를 살피 는 프로그램이 아니며, 그렇다고 외부세계를 잊을 정도로 완전히 몰입 하여 감정을 투사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아니다. <무한도전>은 아무 때 나 뛰어들어 보더라도 큰 지장이 없지만, 몰입해서 감응의 관계를 맺고 보게 되면 더 많은 느낌을 갖게 되는 그런 프로그램이다. 내용면으로 볼 때 <무한도전>의 가장 큰 특징은 현실의 욕망에 충실한 것이다. 비록 최 근 들어 자기계발의 내용이 자주 다루어진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 지만, <무한도전>의 초기 정신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평균 이하의 바보들이 펼치는 무모한 도전이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무한히 도전 할 만큼 이들에게 무한히 시간이 많다는(많아 보인다는) 점이다. 이택광 (2012)의 지적처럼 <무한도전>의 시간은 무의미한 되풀이의 시간이다. 의미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을 무의미하게 되풀이하는 일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캐릭터는 행복해 보인다. 감응의 가장 중요 한 요소가 ‘현재’라고 본다면 <무한도전>의 정치성은 정치적이지 않은 차원(일상과 현재)조차 정치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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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첫 방송을 시작한 이래, <무한도전>의 소재는 변화무쌍하게 변주되었지만 그 안의 캐릭터는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다. 이는 마니아 시청자를 양산하는 한편 새로운 시청자들이 유입되기 힘들게 만드는 구 조를 형성한다. 이야기와 의미가 중심이 되는 구조에서는 캐릭터(주체) 가 변화무쌍한 일들을 겪으면서 서사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런데 <무 한도전>에는 서사가 없다. 게다가 어딘가 약간씩 모자란 듯 보이는 캐릭 터는 시간이 지나도 변할 줄을 모른다. 권선징악이나 파국 따위도 없다. 비슷하지만 매일 다른 우리 일상처럼, <무한도전>에서도 그저 비슷한 일들이 반복된다. 이런 식으로 <무한도전>은 현재에 충실하자는 서사를 만드는 대신 현재에 충실함 그 자체를 내용과 형식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무한도전>이 제작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숨기지 않고 보여주는 방식과 선택은 중요하다. 아이디어 기획 회의에서 불쑥 튀어 나왔던 말 한 마디 때문에 알래스카에 가기도 하고 추격전을 벌이기도 하며 힘든 스포츠에 땀을 쏟기도 한다. 2년마다 벌어지는 가요제 프로젝 트의 경우 정작 가요제 당일보다 더 재미있고 길게 방송되는 것은 노래 를 만들어 나가는 말 많고 탈 많은 과정이다. 즉 무한도전은 ‘서사’가 아 니라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다보니 감동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사건에 밀도 있게 집중한 이후, 다시 털어내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권경우(2012)는 이를 두고 <무한도전>이 명확한 의도를 드러내지 않고 목표를 갖지 않음으로써 사건에 집중하는 열린 텍스트를 지향한다고 분 석한다. 이는 ‘현재’의 강조가 현재의 ‘망각’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실제 많은 프로그램(뉴스, 드라마, 특히 오디션 쇼)들이 더 나은 미 래를 위해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는 담론을 꾸준히 생산하고 있는 동안, <무한도전>은 미래는 잘 모르겠고 일단 현재에 충실하자는 분위기를 이어간다. 물론 이러한 감응은 ‘평균보다 약간 모자란 남자들’로 구성되 었다는 프로그램의 성격 아래에서 웃음을 주는 요소로 자기를 감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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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나 의미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무한도전>은, 그래서 몸 과 관련된 감응이나 정보를 수집하는 통제 사회의 논리로부터도 상대적 으로 자유롭다. <무한도전>의 세계에 뛰어들기 위한 정보는 수량화된 데이터나 서사구조가 뚜렷한 이야기로 정리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 닌, 몸의 감각으로 느끼는 일종의 직관에 가깝기 때문이다. 윌리엄스가 말하듯 현재는 “창발의 과정”(Williams, 1977, p. 126) 이며, 따라서 새로운 장르나 익숙하지 않은 미학적 실험 형식은 현재를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거울이기도 하다. 벌란트가 리얼리티 쇼의 대두를 통해 신자유주의의 잔혹한 낙관주의를 살핀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Berlant, 2011). 그는 ‘현재가 위기’라는 의식이 미디어의 장르 구축에도 영향을 주어 서바이벌 형태의 리얼리티 쇼를 시장에 내놓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파악한다. 결과적으로 리얼리티 쇼는 ‘위기 장르’의 일종이 되 어, 일상적인 일들을 마치 예외적이고 엄청난 것처럼 과장하거나 왜곡 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된 현실을 보여주는 장르 는 다시 현실을 실제보다 더 위기와 경쟁이 난무하는 양상으로 만든다 는 것이다. 감응 연구의 관점에서 볼 때 <무한도전>과 같은 리얼리티 쇼는 그 시대의 현재적 정서와 분위기를 상품화된 형식으로 전파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무한도전>이 제공하는 감응의 자극은 행복과 불행, 희망과 두 려움, 나눔과 탐욕 등을 사회적으로 감각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그 러한 감응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임을 인식할 수 있게 해 준다. 오늘날의 미디어 문화로서 <무한도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 특정다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무한도전>에 감응하며 또 <무한도전>을 보는 다른 사람들과도 감응하는지를 이해하는 일이 함께 진행되어야 한 다. 이는 이 프로그램이 제공하는 현재성의 감응을 텍스트 내부에서가 아니라 텍스트 바깥에서, 즉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일상생활에서 찾 아야 함을 의미한다. 이때의 일상생활은 인간과 비인간을 가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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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몸 사이에 벌어지는 현재적 관계와 상호작용들을 살피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감응으로의 전환”은 곧 윤리적 전환이자 물 질적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6. 감응의 확대와 재생산은 가능한가 감응 연구에서 말하는 ‘몸’이 심신이 원론적인 것이 아니라 ‘되기’로서의 몸이라면, 그리고 스피노자의 말처럼 개인의 특성은 관계에 선행하지 않 는 것이라면, 재현된 상품인 <무한도전>에 감응하는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감응은 재현을 거부하는 잠재적인 것이면서도 공동의 느낌을 자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전파되어야 하는 딜레 마를 갖고 있다. 아흐메드(Ahmed, 2004b)는 감응이 어떤 대상에 끈끈 하게 달라붙는 물질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로 이러한 딜레마를 설명한다. 예를 들어 ‘행복’이라는 감응은 하나의 사건처럼 벌어지며, 어떤 대상에 서 긍정적인 느낌을 받을 때 그 행복은 더욱 커진다. 그리고 행복이 커진 사람은 그 몸의 주변 공간을 행복하게 만들고 그가 선택한 대상이나 라 이프스타일까지도 행복해 보이도록 만든다. 이 때 감응은 해당 대상에 달라붙어, 결국 그 대상만으로도 행복을 감응할 수 있게 된다. 행복할 때 골라 입었던 옷은 행복의 감응을 담고 있어서 결국엔 그 옷만 입어도 행 복을 감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미디어는 이러한 감응의 강도를 강화 하고 축적함으로써 감응의 강도가 질적으로 배가되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Clough, 2008; Featherstone, 2010). 특히 디지털 미디어 환경은 스 치고 지나가 버리는 현재의 순간들을 정지 화면이나 느린 화면으로 반복 적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무한도전>의 경우처럼 자막이나 음악을 적절 히 활용하기도 함으로써, 몸 사이의 감응과 그 상호작용이 더 직접적이 고 강력하게 느껴지도록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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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더스톤(Featherstone, 2010)은 이러한 이미지의 강도, 즉 감응이 몸의 이미지를 그 내용으로부터 떼어놓는 현상에 주목하고, 유명 연예 인이나 정치인의 ‘감응적인 몸(affective body)’을 예로 든다. 미디어에 서 재현된 유명인들의 몸은 한 마디로 감응적인 몸, 즉 의미가 없이 스쳐 지 나가는 몸이다. 예를 들어 유명인이 입은 옷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왜 입었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멋있다거나 아름답다는 감응 으로만 보게 된다. 그런데 미디어의 경우 이러한 감응의 과정을 활용하 여 기존의 의미나 이미지를 없애고 몸의 느낌 그 자체를 강화하는 전략 을 구사하기도 한다. 예컨대 시상식 레드카펫에 멋진 드레스를 입고 나 온 배우를 볼 때, 그 배우의 연기나 인간됨보다는 옷의 분위기만 강하게 감응하는 식이다. 마수미(Massumi, 2002/2011)의 책에서 언급된 미국 의 레이건 대통령 사례나 최근 우리나라의 언론에서 볼 수 있는 대통령 동정 보도가 그러하다.20) 이처럼 아흐메드가 말한 ‘끈끈한 감응’을 개념 적 도구로 사용하면, 행복한 분위기가 전파되는 상황과 혐오연설이나 ‘악플’처럼 부정적인 물결이 번져가는 상황과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 감응 이론이 다학제적으로 등장한 이래, 최근의 감응 이론은 그 정 치적인 측면에 대한 관심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즉 감응이 무엇을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문제다. 아흐메드 의 표현을 빌자면 감정이 “작용하는가(do things)”의 문제인 셈이다 (Ahmed, 2004a, p .119).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감응’ 그 자체에 대한 정 의도 다르지만, 특히 인간이 주체적으로 감응을 개발, 발전, 투여할 수
20) 최근 언론은 대통령의 패션을 그의 ‘분위기’와 연결하는 보도를 했다. 이러한 보도 방식은 정치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감응적 몸의 정체성으로 감추려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몇 개의 사 례만 예로 들자면 다음과 같다. “[박근혜 대통령 방미] 격식 중시하고 한복 즐겨 입어 ‘클래식 외 교’”(한국일보, 2013년 5월 9일), “화사한 박근혜, 한복 곱게 차려입고 한류 열풍”(헤럴드경 제, 2013년 5월 6일), “[박근혜 대통령 취임] 카키색 양장 → 붉은색 한복…신뢰의 ‘패션정치’ ” (한국경제, 2013년 2월 25일). 이와 같은 보도에서 대통령의 정책이나 외교 관련 문제들은 탈색되고, 그 자리를 ‘클래식’, ‘화사한’, ‘한류’, ‘신뢰’ 등 긍정적인 뉘앙스의 분위기가 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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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감응의 도식
E
C
A’
B’
A
B
A
B
A
B
R(A)
R(B)
R(A)
R(B)
R(A)
R(B)
(a)
(b)
(c)
있는가의 문제에 있어서 학자들은 의견을 달리 한다. 예를 들어 그로스 버그(Grossberg, 2010, p. 195)는 감응은 보편적인 실재이기 때문에 우 리가 현실 속에서 개인적인 투여를 할 수 있는 장소라고 본다. 그는 종교 가 문화이면서도 감응적으로 기능한다는 점을 그 사례로 든다. 자신의 조부모는 유대교의 교리나 의미에는 큰 관심이 없고, 그저 세상을 기쁘 게 살아갈 수 있는 법을 말해주는 하나의 방식으로 종교에 감응한다는 것이다. 반면 마수미(Massumi, 2002/2011)는 그로스버그의 “감응적 투자 (affective investments)”라는 개념이 말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데, 마수미가 보기에 감응이란 의식 이전에 혹은 그 바깥에 있는 것이기 때 문에 의지에 따라 “투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감응의 형태를 향상시키기 위한 실천 방식이 없다거나 불가능하다는 뜻 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행동과 실천에 참여하는 일은 감응에 대한 직접 적인 투자가 아니라 감응의 잠재력이나 가능성에 대한 노력에 더 가깝 다는 것이 마수미의 주장이다. 마수미와 그로스버그 사이에서 드러나는 의견의 차이는 결국 집단 적이고 사회적인 감응의 가능성 여부로 이어진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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릅쓰고 이를 도식화해서 표현하자면 <그림 1>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첫 번째 도식 (a)는 한 개인(A)과 다른 개인(B)을 각자 환경이나 타자와 독립된 개체로 파악할 때를 나타낸 것이다. 여기에서 B는 A의 재현인 R(A)로부터 일방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으나, A 자체에 직접 접 근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B의 재현인 R(B) 역시 마찬가지다. 두 번째 도식 (b)는 개인을 환경이나 타자와 관계를 갖는 존재로 파 악할 때를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개인 A와 B가 각자의 재현을 통해 서 로 직접 감응하기 힘들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A와 B가 같은 사 회나 문화 속에서 살면서 경험을 공유한다면, 즉 개인(A와 B)을 환경(E) 의 영향을 받는 존재로 파악한다면, 이들은 상호적이지는 않지만 공통 의 환경에 의해서 어느 정도 감응하게 된다. 세 번째 도식 (c)는 A와 B가 각각 자신을 둘러싼 환경 및 타자에 대 해 적극적인 정서적 투자와 노력을 할 때, 그들의 환경(E)이 하나의 공 통성(C)으로 바뀔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전의 도식 (b)에 비해 개 인과 개인 사이, 개인과 환경 사이의 상호성과 공통성이 강하다는 점을 실선의 도형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감응의 단계가 되면 개인 A와 공통 의 환경 C는 별개가 아닌 하나의 정체성을 구축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A는 A’이라는 존재로 새로이 이행하게 된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A’=A+C가 되는 것이다. B 역시 C와의 감응을 통해 B’이 되므로 B’=B+C 가 된다. 세 번째 도식은 개인과 환경 혹은 개인과 타자 사이의 단순한 상호 작용을 넘어 감응이 일어나고 물질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으며, 여기서 공통성(C)과 개인과의 감응 정도에 따라 마수미와 그 로스버그의 입장이 갈라진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로스버그는 개인과 공 통성(C)과의 감응 강도를 마수미의 설명에서보다 더 크게 보고 있는 셈 이다. 물질성을 획득한 감응은 새로이 부상하는 문화적인 양식과 적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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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조우할 경우 문화적인 공통성을 강화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그 러나 여기서 만일 공통성(C)에 대한 인위적인 투자가 대량으로 행해질 경우, 즉 개인과 공통성을 둘러싼 실선이 지나치게 굵고 견고해질 경우 에는, 아흐메드가 말한 것처럼 ‘감응 경제’가 성립하게 될 수도 있다. 그 러한 위험성을 피하기 위해서 개인 A와 B는 각각 C와의 감응을 토대로 서로 공감하며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는데, 세 번째 도식 (c)에서 A’과 B’ 으로 표기한 것이 바로 그 과정을 나타낸다. 결국 감응은 사회와 문화와 타자를 직접 몸으로 경험하며 겪는 과정 이고, 이를 통해 타자에게도 영향을 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의 첫 부분에서 말했던 “안녕들 하십니까?”의 대자보 현상도 개인과 개인이 비슷한 형식으로 공감할 뿐 공통의 환경을 조성 하지 않는다면(즉, 위의 도식에서 (b)에 머문다면), 사회적으로나 문화 적으로 광범위한 감응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현상이 감응을 일으 키면서도 상업적이거나 이념적인 환원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개 인과 개인 사이뿐 아니라 타자와 환경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교감하는 것이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공감 혹은 감정 이입(empathy)은 주로 원거리 에서 타인의 고통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얻어진다. 피터스(Peters, 2001) 와 손탁(Sontag, 2003/2004)이 날카롭게 지적하듯이, 매개된 공감은 때 로 기쁨이나 안도를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고통스럽다. 타인의 고통 안에서 나의 고통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을 그저 연민이나 볼거리로 치부하지 않고 공통의 고통으로 공감하기 위해서는 위의 도식 (c)와 같은 감응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b)에서 (c)로 가는 과 정은 쉽거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때로는 고통으로 때로는 파격으로 타인과의 비대칭성을 극복할 때에만 감응의 확산이 이루어질 것이다. 공 감이 감정이입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감응은 공통의 고통을 함께 겪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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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감응’이라는 용어를 원래의 철학적인 의미에 가깝게 이해했던 이로 건축가 정기용이 있다. 그는 건축을 기술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의 영역으로 이해했으며, 건축은 사람과 건축물, 건축물과 땅, 사람과 땅,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해와 소통을 넘어 서로에게 교감하고 스며드 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 ≪감응의 건축≫(2008)에서 전 라북도 무주의 공공건축 프로젝트를 10년간 지속했던 이야기를 펼쳐 놓 는다. 그는 시차를 두고 이루어진 ‘다섯 번의 만남의 풍경’에 대한 이야 기로부터 이 책을 시작한다. 그 만남 중에는 땅과의 만남도 있고 사람과 의 만남도 있다. 이러한 만남에서 그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의 삶과 사회를 이해하고 공공건축이라는 프로젝트를 공간적으로 구현하게 된 다. 이는 건축이란 무엇보다도 전일적인(holistic) 과정이어야 하며 시간 이 지날수록 건축은 환경과 감응하며 그 의미를 달리한다는 자신의 철 학을 기본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건축가란 무엇인가를 혼자 만들 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여러 곳에 감응하는 열린 사람”(2008, 306쪽)이 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기용의 공공건축 사례를 <그림 1>의 감응의 도식으로 설명하자 면 다음과 같다. 정기용이라는 건축가(A)는 무주의 주민(B)과 만나 무 주라는 공간(E)을 함께 겪고 경험함으로써 공통성(C)을 감응하게 된 다. 이러한 감응을 통해 정기용은 끊임없이 운동하며 변화하는 건축가 (A’)가 되고 무주 주민도 변화하는 존재로서의 주민(B’)이 된다. 따라서 무주의 공공건축 프로젝트는 건축가와 현지 주민과 땅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진 하나의 물질적이고 시간적인 새로운 존재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무한도전>,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정기용 건축과 같은 사례
21) 감응은 공감(共感)보다는 공고(共苦)에 가까운 것이어야 한다. 우리말에는 ‘공고’라는 단 어가 없지만 영어에는 ‘compassion’이라는 단어가 있다. 라틴어의 어원상 이 ‘컴패션’이라는 말에는 ‘함께(com-)’, ‘고통을 겪다(pati)’는 의미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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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드러내듯, 감응 연구는 몸의 움직임이나 감각이 문화적으로나 이 론적으로 관찰 가능하며 연구가 가능한 실재 대상임을 보여주었다. 이 는 말해지거나 표현되지 않는 것들은 분석하지 않는 구조주의와 기호학 의 재현 중심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기도 하다. 마수미는 구조주의 가 모든 문화적 과정과 움직임과 숨결과 색채들을 마치 수학처럼 도식 화해서 설명하려 한다고 비판한다. 반면 그로스버그는 그러한 마수미조 차도 여전히 지나치게 과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하나의 자동기계(오토 마타)로 취급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그로스버그의 비판에 대해 다시 마수미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삶은 운동의 연속인데, 그 어느 한 지 점을 연구한다거나 감응을 투자 가능한 인간 의지의 발현으로 보는 것 은 잘못이라며 그로스버그를 비판한다. 인간의 역할이 어느 정도까지인가를 놓고 벌이는 이러한 논쟁에서, 우리는 감응 이론이 결국은 판단과 윤리의 문제로 이어진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스피노자는 부정적인 감응이 어떻게 시간과 공간에 따라 축적 되어 특정한 행동을 하거나 할 수 없게 만드는가에 대한 문제를 논의한 다. 예를 들어 ‘혐오’와 같은 감응은 혐오의 대상을 직접 향하는 것이 아 니라 그 주변 환경이 ‘혐오스럽다’는 판단과 생각으로 이어져 특정한 행 동을 하거나 하지 않도록 만든다. 이러한 혐오의 감응은 인종차별이나 혐오범죄에서 손쉬운 근거로 사용되곤 한다.22) 차별이나 혐오의 행동 이 ‘냄새’라든가 ‘어두운 색깔’이라든가 ‘시끄럽다’와 같은 감각과 연결되 는 사례는 현실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혐오와 같은 이러한
22) 2009년 어느 날 성공회대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던 보노짓 후세인은 버스 안에 동승한 승객 으로부터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듣는다. 친구와 가만히 있던 그에게 승객이 쏟아낸 말은 “너 어 디서 왔어, 이 냄새나는 XX야”였다. 이때의 냄새는 진짜 후각에 의한 냄새가 아니라 차별적인 시선에서 유래한 냄새다. 2013년 8월에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마련한 ‘평등예감: ‘을’들의 이 어말하기’ 행사에서는 ‘냄새의 출처’라는 제목으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 논의에서는 “결혼에 는 국적이 없지만, 냄새에는 국적이 있고 계급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신윤동욱, 당신의 눈이 냄새 맡는다, ≪한겨레 21≫, 2013년 8월, 9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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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이 계급적으로, 집단적으로 이해될 때, 이는 중산층의 계급 정체성 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가 된다는 연구도 있다(Lawler, 2005). 감응에 대한 이러한 극단적인 관리와 통제는 앞에서 말했던 ‘통제사 회’의 논의(Clough, 2008)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된다. 마수미가 정보 과학과 커뮤니케이션학의 발달을 감응과 연결하려 하는 데 더 적극적인 반면, 그로스버그는 감응을 거의 ‘자극-반응’식의 자동적인 과정으로 바라본다며 과학적 입장에 불편함을 표명한다. 그러나 그로스버그도 사 회가 감응을 감정과 분위기와 가능성과 유전자코드 등으로 개인을 통제 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다고 말하며, 다만 이 러한 분석방법이 문화연구나 사회과학에서 사용되는 것에는 그다지 찬 성할 수 없다고 말한다.23)
7. 맺으며 이제까지 미디어와 문화의 이데올로기 분석에 있어서 감응은 “잃어버린 연결고리(missing link)”였다(Grossberg, 2010). 텍스트 분석과 수용자 연구들이 다양한 시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프 로그램을 왜 좋아하며 왜 독특한 방식으로 읽어내는지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무한도전>과 같은 변화가 많은 리 얼리티 프로그램, <오로라 공주>와 같은 소위 막장 드라마, <쾌도난마> 와 같은 변종 시사 프로그램 등의 경우는 그 이유를 밝히기가 더욱 쉽지
23) 그로스버그는 특히 마수미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읽는 방식이 자신의 이해 방식과는 상당 히 다르다며 차이를 분명히 한다. 그로스버그는 감응이 가상(virtual)의 영역에서만 자율적이 고, 현실(actual)에서는 자율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현실에서 감응은 언제나 기계적으로 구 조화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Grossberg, 2010, p. 314). 이는 마수미가 감응을 언제나 구조화 되지 않고 구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는 입장과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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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은 일이다. 그러나 시청자가 해당 프로그램과 맺는 관계, 그리고 시청 자가 다른 시청자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감응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대중매체와 대중문화는 근본적으로 텍스 트와 수용자 사이의 상호관계와 친밀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특성을 갖 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응의 관계는 종종 텍스트의 구체적인 내용 이나 수용자들의 참여 의지와는 무관하게 벌어지기도 한다. 특정 프로그 램이나 상황이 때로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현재를 느끼고 판단하게 함으 로써 윤리적 선택을 하게 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공명심을 생산하고 문화적 차별이나 무관심을 재생산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감응 이 이데올로기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Skeggs & Wood, 2012). 이처럼 현대의 문화와 일상의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문화 텍스트나 행위의 내용 못지않게 그 감응 관계를 중시 여기는 일이 어야 한다. 참여관찰 연구나 수용자 연구 등 여러 사회 이론이나 방법론 이 그러한 시도를 하고 있지만, 특히 감응 연구라 일컬어지는 일련의 연 구 흐름은 공적/사적, 몸/정신, 인간/환경 등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환경 을 총체적으로 살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감응 연구에서는 미처 텍스트로 완결되지 않은 잠재적인 의미,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위 기, 드러나지는 않지만 실재하는 관계 등에 더 엄밀하고 깊이 있는 눈길 을 돌린다. 감응 연구의 관점으로 볼 때, 2013년 현재 한국 사회의 “아프니까 청 춘이다” 혹은 “창조 경제”라는 언설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오히려 이 문 장들은 벌란트가 말한 ‘잔혹한 낙관주의’에 더 가깝다. 청춘들이 야망을 가지기 힘든 상황을 예측하게 만들어놓고 야망을 가지라고 하는 것은, 미래를 두려워하도록 느낄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형성하고 이를 다시 현재에 투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현재는 그 자체로 두려움 이고, 따라서 현재의 두려움을 참아내면 미래의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 라는 논리는 모순이다. 이는 사후에 일어난 것을 그 효과라고 이해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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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 오류(post hoc fallacy), 즉 전후관계를 인과관계로 혼동하는 논 리적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감응 연구는 인간을 하나의 독립적인 주체이자 자연과 별개로 인식 하는 철학적 흐름에서 벗어난 급진적 경험주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심신이원론을 극복하려 했던 스피노자와 들뢰즈를 따른다는 점에 서 극단적 형태의 일원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감응 이론의 입장 에서 볼 때 인간은 본질적으로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인 간에게 계시나 구원이나 미래에 대한 약속이나 전지전능한 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오직 현재이며, 다만 인간의 몸이 지닌 감각 시스템의 특성상 현재의 환경과 나의 삶을 어우러지게 하는 능력 (잠재성)을 발휘할 수 있을 뿐이다. 감응 이론은 고전 철학 체계와는 달 리 ‘존재’를 완전하게 규정하고 범주화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지 않는 다. 또한 개념이나 선험적 형식은 제한된 효용성을 가진 방법일 뿐, 오 히려 직관과 감정과 통찰과 이해와 체험이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 진다. 삶이란 개념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파악되고 ‘이 해’를 통해 낯선 삶을 자기와 연결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감응 이론은 시각적인 이미지와 언어의 분석에 중심을 두었던 재현 이론에서 비재현 이론으로 옮겨갈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준다는 의미 가 있다. 또한 <무한도전>이나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의 경우처럼 재현된 장르적 특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미디어와 문화의 분위기나 현상을 분석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해 준다는 의미도 있다. 그리고 무 엇보다도 인간을 세계 안에서 고립된 본질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 라 항상 타자와 감응하고 관계하는 상호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해준다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관계 분석에서 재현된 이미지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은 재현이 어렵지만 관계 형성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 는 느낌, 소리, 분위기, 끌림, 겪음 등의 감응이다. 현재 우리의 삶에서 사라진 ‘현재’와 ‘감각’을 복구한다는 것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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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주변의 관계를 감응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르페브르의 표현에 따르자면 “스펙터클에 대한 관여를 통해 스펙터클을 해석하는 것” (Lefebvre, 2004/2013, 28쪽)이다. 전통적인 논리학이나 사회학의 입장 에서라면 스펙터클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고 분석해야 한다. 그 러나 르페브르는 비록 전통 사회학처럼 체계적이지는 못할지 모르지만 스펙터클 안에 몸을 담는 일 자체를 통해 규칙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멀리서 파도의 패턴을 파악할 수도 있겠지만, 바다에 직접 몸을 담그고 파도의 리듬을 느끼는 일도 가능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르페브르가 말 하는 규칙은 공간과 시간 속에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으나 반복되는 형태와 배열이 존재하는, 그의 표현을 빌자면 ‘리듬’이다. 그래서 르페브 르는 수신자나 수용자를 자폐적인 존재로 가정하는 커뮤니케이션 지상 주의를 벗어나, “감각적인 것”에서 구체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에게 감각적인 것이란 “외형적인 것도 아니며 현상적인 것도 아니다. 그 것은 현재다”(Lefebvre, 2004/2013, 34쪽). 결국 르페브르가 말한 감각 적인 것의 복원이란 관찰자와 연구자가 현재 일상의 리듬을 분석하는 감수성을 복원시켜야 함을 의미한다. 이처럼 현재의 감각을 복구한다는 의미에서, 감응 연구는 지금 우 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잔혹하고 불안하고 위험하고 탐욕스러운 분위 기가 결코 개인적인 느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감응이자 물질화된 형태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이러한 감응 이 전파되거나 확대되는 것은 단순히 일방향적인 흐름이 아니라 몸과 정신과 환경과 경험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통해 가능한 것임도 알 수 있 게 해준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미디어는 긍정적인 면으로나 부정적인 면으로 모두 이러한 감응이 이루어지는 주요한 매개이기도 하다. 그래 서 특정한 감응의 자극이 미래를 대비하는 생각과 판단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미디어 연구와 문화연구에 있어서 감응이라는 개념의 탐색이나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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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연구에 대한 관심은 이제 막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텍스트의 이데올로기적인 힘과 수용자의 수행성 사이의 이분법을 극복하고, 개인 의 일상성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공동체성과 만나는 접점을 찾아주는 데 감응 연구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살 고 있는 시대는 감각이나 현재성을 잠시 유예하라는 요구로 가득 차 있 지만, 좋은 음악이나 좋은 예술이 그러하듯 감응 연구 역시 우리 문화의 현재성을 복구하는 방향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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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투고: 2014. 01. 01 최종 수정본 입고: 2014. 02. 16 최종 게재 결정: 2014. 02. 20 참고문헌 수: 4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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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ence of Present and the Affect Studies Hee-Eun Lee
Since the so-called ‘affective turn’ in the late 1990s, questions of affect, embodiment and emotion have gained increasing currency in recent social theory and cultural criticism. In this paper I explore the general turn to affect studies, particularly the turn to the contemporary cultural and social issues, that has recently taken place in the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A diverse range of theorists are concerned less with what texts signify than with how they exert an affective impact on audiences and viewers who encounter cultural environments. I first take a genealogical approach to the problems and issues of affective culture and communication that are identified in experiences such as ‘Infinite Challenges’(television entertainment program), ‘How’s it going?’ poster phenomena, and the public architecture project. Then I suggest to re-engage the problematic of subjectivity by asking what a turn to affect entails within such cultural and social issues. This is particularly important when such an affect explores and restores the endangered contemporariness and present-ness in our society under neoliberalism. K E Y W O R D S affect • present • emotion • feeling • neoliberalism • cruel optimism • empat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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