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연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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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향연*

* 소크라테스의 친구 아폴로도로스가 BC 416년경 비극 작가 아가톤의 집 만 찬에서 소크라테스와 여러 사람들이 사랑에 관해 나눈 대화를 아리스토데모 스로부터 전해 듣고, 그 이야기를 15년쯤 지난 후에 글라우콘을 비롯한 친구 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플라톤은 아카데미아 학원을 세운 다음 해인 BC 385 년경 지혜에 대한 사랑의 화신인 소크라테스의 철학 정신을 통해 아테네 청 년들을 훌륭한 공동체의 시민으로 교육하고자 이 대화편을 저술했다.


만찬장으로 가는 길

아폴로도로스: 나는 자네가 궁금해하는 일에 대해 언제든지 말해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네. 실은 그제 팔레론에 있는 우리 집에서 시내로 올라오는 도중에 한 친구가 멀리서 뒤 따라오다 나를 알아보고는 장난조로 나를 불렀네. “어이, 팔레론의 아폴로도로스(Apollodoros)라고 불리 는 사람! 거기 좀 서게.” 그래서 발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더니, 그 친구가 다가와 이렇게 말했네. “아폴로도로스! 자네를 계속 찾고 있었는데, 마침 잘 됐 네.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1) 등이 아가톤(Agathon)의 집 만찬에서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특히 사랑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네. 사실 어떤 사람이, 필립포스(Philipos)의 아들인 포이닉스(Phoinix)에 게 들었다면서, 나에게 그 모임에 대해 말해주긴 했어. 그는 자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더군. 그렇지만 그의 이야 1) 알키비아데스(Alcibiades): 알키비아데스는 페르시아와의 포테이다이아 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해 소크라테스가 구해주었던 매우 아끼는 제자였으 나, 나중에 정치적 술책에 능한 장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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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는 전혀 분명하지 않았네. 그러니 자네가 이야기해 주게. 자네의 친구인 소크라테스의 말을 전해줄 사람이 자네 말고 누가 있겠나? 그런데 우선 자네가 그 만찬에 참석했는지부 터 말해주게.”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의 이야기가 정말 분명하지 않았던 모양이군. 자네도 그 모임이 내가 참석할 수 있을 만큼 최근 에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라고 말했네. “물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럴 리는 없지, 글라우콘(Glaucon)! 자네는 아가톤이 아테네에서 떠난 지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지 모르는가? 또 내가 소크라테스를 따라다니며 그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알려고 날마다 마음 쓰게 된 지 아직 3년이 안 되었다 는 것도 모르는가? 그때까지 나는 마치 대단한 일을 하며 사 는 듯이 우쭐거리며 사방으로 돌아다녔지. 그런데 실제로 는, 철학[지혜를 사랑함]하는 것보다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낫 다고 생각하는 지금의 자네처럼, 누구보다도 불쌍한 사람이 었네.” “그렇게 비웃지만 말고, 그 모임이 언제 있었는지 어서 말해주게.” “그건 우리가 어렸을 때 일이네. 아가톤이 그의 첫 작품 으로 비극 경연 대회에서 우승해 합창단원들과 함께 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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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제물을 바치며 축하연을 열었던 바로 그다음 날이었 지.” “그렇다면 오래전의 일이군. 그런데 누가 그 이야기를 자 네에게 해주었나? 소크라테스 자신인가?” “아니야, 포이닉스에게 이야기해 준 그 사람이네. 키다테 나이온 사람으로 키는 작고 언제나 맨발로 다닌다는 아리스 토데모스(Aristodemos)라네. 그는 그 모임에 참석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 당시 소크라테스를 열렬하게 추종했던 사 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야. 나는 그에게 들은 것들 가운데 몇 가지를 소크라테스에게 직접 물어보았는데, 모두 사실이라 더군.” “그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해주게. 시내로 올라가는 길은 걸으면서 말을 주고받기에 안성맞춤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길을 걸으면서 그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 누게 되었네. 그러니 앞에서도 말했듯이, 자네의 질문에 대 답하는 데 전혀 궁색하지가 않네. 자네들에게 다시 이야기 해야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 사실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내 가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듣는 건, 거기서 얻는 이득은 제외 하더라도, 항상 나에게 큰 기쁨을 주기 때문이지. 하지만 자 네와 같은 부자들이나 상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언짢아지네. 실제로 나는 보잘것없는 일을 하면서도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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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일이나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자네들이, 비록 내 친구이지만, 불쌍하게 보이네. 어쩌면 자네들이 나를 불 쌍하게 여길지도 모르지. 물론 자네들의 이런 생각이 맞을 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자네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불쌍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고 있네. 친구: 아폴로도로스! 자네는 여전하군. 항상 자기 자신과 남을 욕하는 게 말이야. 소크라테스만 빼고 모든 사람을 불 쌍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네. 우선 자네 자신부터 말이야. 자 네가 어떻게 미치광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입만 열면 언제나 소크라테스만 빼고 자기 자신과 우리 모 두에게 크게 화를 내며 욕지거리를 퍼붓지 않는가. 아폴로도로스: 그래, 이 친구야. 내가 나 자신뿐 아니라 자네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정신 을 잃고 미쳤다는 말을 듣는 게 분명하겠군! 친구: 그런 문제로 시비를 벌여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아폴로도로스! 그러니 내가 요청한 대로 그때 나누었던 이 야기나 들려주게. 아폴로도로스: 좋아. 그 이야기는 대강 이런 것이었지. 하지만 아리스토데모스가 말해주었던 걸 그대로 옮기고, 그 런 다음 내 방식으로 자네에게 다시 말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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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이 열림

아리스토데모스가 목욕을 막 마치고 나오는 소크라테스를 만났는데, 평소와 달리 신발을 신고 있기에, “이렇게 말쑥하 게 차리고 어디를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네. “아가톤이 만찬에 초대해 그 집에 간다네. 어제 우승 축 하연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혼잡할 것 같아 거절했지만, 대 신 오늘 가기로 약속했지. 아름다운 사람의 집을 방문하려 면 아름답게 차려입고 가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이렇게 차 려입었네. 어떤가. 자네는 초대받지 않았지만 나와 같이 가 지 않겠나?” 그러자 아리스토데모스는 “좋으실 대로 하지요”라고 말 했다네.2) 소크라테스: 그럼 따라오게. 그래서 ‘훌륭한 사람은 비천 한 사람의 잔치에 불청객으로 가도 괜찮다’는 속담을 ‘훌륭

2) 원전은 줄곧 아리스토데모스가 들려준 이야기를 바탕으로 아폴로도로스 와 그의 친구 글라우콘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그 만찬에서 누가 이렇게 “말했다”, “대답했다”는 형식으로 인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제부터 는 이렇게 반복된 인용의 번거로움을 피하고 대화의 생생함을 살리기 위해 직접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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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은 훌륭한 사람의 잔치에 불청객으로 가도 괜찮다’3) 로 바꾸지. 호메로스4)는 이 속담을 깨뜨렸을 뿐만 아니라 조롱까지 하지 않았는가! 왜냐하면 그는 아가멤논 매우 훌 륭한 전사로, 또 메넬라오스를 비겁한 병사로 묘사해 놓았 는데,5)을 정작 아가멤논이 제물을 바치고 잔치를 베풀 때 초대하지 않은 메넬라오스를 참석시킨 건, 비천한 사람을 훌륭한 사람의 잔치에 끌어들인 셈이기 때문이네. 아리스토데모스: (이 말을 듣고) 하지만, 소크라테스! 선 생이 말한 대로가 아니라 호메로스가 쓴 것처럼 되겠군요. 나는 못난 사람인데, 초대도 받지 않고 현명한 사람의 잔치 에 가는 셈이니 말입니다. 내키지는 않지만, 나는 선생이 초 대해 방문했다고 말할 테니, 나를 데려가시려면 적당히 변 명을 해주셔야겠습니다.

3) “훌륭한(선한, 귀한) 사람”은 그리스어 ‘아가톤(agathon)’이 지닌 뜻으로, 만찬에 초대한 인물의 이름 또한 ‘아가톤’이라는 사실에 주목해 소크라테 스가 기존의 속담을 변용한 것이다. 4) 호메로스(Homeros): 고대 그리스의 신화시대부터 다양한 형태로 구전되 어 왔던 영웅들의 무용담을 BC 8세기경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통해 집대성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5) “아가멤논(Agamemnon)”은 미케네의 왕이고, “메넬라오스(Menelaos)”는 그의 동생으로 스파르타의 왕이다. 메넬라오스의 아내인 헬레네(Helene) 를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Paris)가 유혹해 트로이로 데려가자, 아가멤논은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트로이 전쟁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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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둘이 함께 길을 가면, 한 사람이 보는 것보 다 훨씬 낫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가면서 생각해 보지. 자, 어서 가세.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은 길을 걷기 시작했대. 도중 에 소크라테스는 혼자 생각에 잠겨 뒤에 처지기도 했고. 그 래서 아리스토데모스가 기다리자, 소크라테스가 그에게 먼 저 가라고 권하더래. 그가 아가톤의 집에 도착해 보니 대문 이 활짝 열려 있었는데, 거기서 우스운 일이 일어났다네. 어 린 하인이 안에서 나오더니 대뜸 그를 다른 손님들이 비스 듬히 누워 있는 곳으로 안내했기 때문이지. 그들은 마침 식 사를 시작하려던 참이었고. 아가톤이 그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지.

“오, 아리스토데모스! 마침 잘 왔네. 함께 저녁을 먹지. 다른 어떤 일로 왔더라도, 그건 다음으로 미루세. 사실 어제 자네를 초대하려고 사방으로 돌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네. 그런데 왜 소크라테스 선생을 모시고 오지 않았는가?” 이 말을 듣고 아리토데모스가 뒤를 돌아보았지만 소크라 테스가 보이지 않자, 그는 소크라테스의 권유를 받고 함께 왔다고 말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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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톤: 아무튼 참 잘 왔네. 그런데 소크라테스 선생은 대체 어디 계신 건가? 아리스토데모스: 조금 전까지 내 뒤에 따라오셨는데, 어 쩐 일인지 알 수 없군. 아가톤: (어린 하인에게) 얘야, 네가 얼른 찾아 모시고 이 리로 오너라! 그리고 아리스토데모스! 자네는 에릭시마코 스6) 옆에 자리를 잡게. 그래서 한 어린 하인이 아리스토데모스가 자리에 앉도록 발을 씻어주고 있을 때, 다른 어린 하인이 “소크라테스 선생 님은 이웃집 문 앞에 서 계신데, 제가 불러도 들어오시려 하 지 않습니다”라고 전하더래. 아가톤: 그거 이상한 일이군! 얼른 가서 들어오시라고 다 시 말씀드려라. 선생을 그대로 돌아가시게 하면 절대로 안 된다. 알겠지! 아리스토데모스: 그러지 말고 그냥 놔두게. 그분 버릇이 니. 소크라테스 선생은 가끔 어디서나 그저 혼자 조용히 서 계시거든. 곧 오실 테니 방해하지 말게나. 아가톤: 좋아, 자네 생각대로 하겠네. 얘들아, 그럼 기다 릴 것 없이 상을 차려라. 아무도 간섭하지 않을 테니 너희 마

6) 에릭시마코스(Eryximachos): 범신론적 자연철학을 신봉한 아테네의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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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대로 차려보아라. (손님들에게) 이렇게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네. (다시 하인들에게) 자, 그럼 나나 여기 계신 여러 분이 너희의 만찬에 초대를 받은 걸로 치고, 칭찬을 듣도록 잘 차려라.

그런 다음 식사가 시작되었는데도 소크라테스는 나타나 지 않았대. 그래서 아가톤은 여러 차례 하인을 시켜 모셔 오 려 했으나 그때마다 아리스토데모스가 말렸다지. 얼마 후 대부분의 사람이 식사를 즐기고 있을 때 소크라테스가 들어 오는 것을 본 아가톤이 끝자리에 기대 앉아 있다 이렇게 말 했다네. 아가톤: 반갑네요, 소크라테스 선생! 여기 제 옆자리에 앉으시지요. 선생과 접촉함으로써 선생이 이웃집 문 앞에서 떠올렸던 지혜로운 생각을 나누어 갖고 싶군요. 분명히 그 런 지혜를 발견하셨을 줄 압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소크라테스: (자리에 앉으며) 안녕한가, 아가톤! 만약 지 혜라는 것이, 마치 물이 양모(羊毛)를 통해 물이 가득 찬 잔 에서 비어 있는 잔으로 흘러가듯이, 우리가 접촉함으로써 지혜가 충만한 사람으로부터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흘러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만약 지혜가 그런 거라면, 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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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권하는 그 자리를 매우 소중히 여길 걸세. 내가 자네의 훌륭한 지혜를 가득 흡수할 테니. 사실 나의 지혜는 보잘것 없고 꿈처럼 몽롱해 신통치도 않네. 하지만 자네의 지혜는 찬란한 빛을 내며 빠르게 자라고 있지 않나. 게다가 아직 젊 기도 하고. 그제만 해도 3만 명이 넘는 그리스 사람들 앞에 서 그 찬란한 빛을 여실히 보여주지 않았는가! 아가톤: 너무 놀리시는군요, 소크라테스 선생! 어쨌든 지 혜에 관한 문제는 선생과 제가 바로 조금 후에 디오니소스 를 심판관으로 모시고7) 누가 옳은지 판결을 내도록 하지요. 우선 당장은 저녁부터 드십시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리에 기대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식사를 했대. 식사를 마친 후 그들은 제주(祭酒)를 올리고 술의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등 여러 절차를 밟고 나 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네.

7) 디오니소스(Dionysos)는 포도와 포도주를 상징하는 신으로, 역동적인 음 악과 가무를 불러일으켜 준다. 여기서 디오니소스를 심판관으로 모시자는 것은, 그 신이 비극 경연 대회의 심판관이라는 점 이외에도 식사 후 술을 마 시면서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히 지혜에 관한 논의가 판결이 날 것이라는 뜻 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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