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쿨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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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 미국 공교육의 역사 1770~2000 세라 먼데일, 세라 B. 패튼 지음 유성상 옮김

대한민국, 서울, 학이시습, 2014


추천의 글

학창 시절을 돌아볼 때, 종종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어떤’ 선 생님을 떠올리곤 한다. 내게는 음악 선생님이 그런 분이셨다. 그분의 이름은 클레어 캘러핸(Claire Callahan)이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나는 캘러핸 선생님을 정말 ‘늙으신 분’이라 생각했다. 당시 선생님은 스물네 살 정도였다. 선생님은 안드레스 세고비아(Andrés Segovia)에게 기타 를 배우는 학생이었는데, 기타를 배우는 데 충분한 돈이 없어서였는지 뉴저지주 교외에 위치한 우리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교사들은 매일 미국에서 주요한 기적들을 행하고 있다. 공교육에 대한 나의 관심은 교사가 하는 일에 대한 존경심에서 비롯되었다. 아주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걸 잘 안다. 내 남동생은 뉴욕의 한 공립고등학교 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다. 나는 동생이 정말 자랑스럽다. 동생을 통해 교사들이 매일 직면하는 문제에 눈뜨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문제는 교사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관심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데에서 생기는 것이었다. 또한 교사들은 아주 적은 월급을 받고 있다. 나는 뉴 저지주의 공립학교를 다녔다. 내 아이들은 아프리카, 영국, 호주, 그리 고 미국의 텍사스주, 캘리포니아주, 뉴욕주, 코네티컷주 등 4대륙과 미 동부와 서부 해안에 있는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에 보냈다. 물론 이 학교 들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학교들이다. 학부모가 되었을 때, 내가 살던 코네티컷주의 학교구는 늘 재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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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해 힘들었는데, 나는 그런 상황이 무척 당황스러웠다. 학교 밴드부 는 유니폼조차 맞출 수 없었다. 악기는 말할 필요도 없다. 당연히 학교 가 음악 프로그램을 갖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학교는 당장 재정을 확충해야 했다. 그 일에 부모들이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를 돌아보았다. 학교에는 밴드도 있었고, 학교 식당에서 넘칠 듯 따듯한 점심을 제공했다. 새로 지은 학교 건물에는 큰 강당이 있어 연극이 상연되곤 했다. 하지만 내가 아이들을 공립학교 에 보낼 때에는 아이들에게 도시락을 싸서 보내야 했다. 아이들은 강당 이 아닌 체육관에서 연극을 상연하곤 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내가 학교를 다니던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군복무를 마치고 사 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때였다. 돈이 충분하지 않았고, 모든 사람이 길가의 아주 작은 집에 살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시기에 그렇게 훌륭한 학교교육이 이루어졌던 것일까? 어쨌든, 나는 정말로 훌륭한 음악 선생 님에게 배울 수 있었다. 정말 멋진 미술부도 있었다. 그리고 내 연기 인 생이 시작되었던 연극부도 있었다. 감사하게도, 연극부 활동을 통해 <뮤직맨(The Music Man)>에서 도서관 사서 역인 매리언을 연기할 수 있었다. 솔직히, 나는 과거와 현재의 공립학교에 이러한 차이가 생긴 이유 가 무척 궁금하다. 자명한 사실은, 전쟁 이후 학교교육이 아주 중요하 다는 생각에 많은 돈이 쓰였다는 것이다. 다른 이유를 찾자면, 그때는 아주 똑똑한 여성들이 영리함과 야망을 발휘할 장소가 학교 이외에 마 땅하지 않았다는 점도 있다. 그런 여성들이 지금은 법대나 의대에서 공 부하고 있고, 훨씬 많은 연봉을 받으면서 장점을 살려 새로운 삶을 개척 하고 있다. 우리는 아주 훌륭한 선생님들을 잃었다. 잘 가르칠 수 있는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도시의 형편없는 학교를 보다 가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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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만들려면, 당장이라도 잘 훈련된 선생님들을 그곳에 보내 가르치 게 해야 한다. 미국 공교육의 역사를 볼 때, 우리는 논쟁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는 더 많은 관심을 공교육에 쏟으라고 요구한다. 도움이 필요한 특 정 학교에 투자할 것을 강요한다. 이 책은 미국 공교육에 관한 역사적 관점을 보여 준다. 물론, 현재 학교교육과의 연계성 역시 잊지 않고 있 다. 또한 한 번쯤은 던져 봤을 공립학교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다루고 있어 많은 점을 배우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모든 미국 사람에게 공교육이 비교적 새로운 것이라는 점, 그리고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메릴 스트립(Meryl Stre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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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며

학교는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사회 기관이다. 도시 깊숙한 빈민가에 서 녹지가 무성하게 펼쳐진 한적한 교외 지역까지, 혹은 애팔래치아산 맥의 계곡에서 로키산맥의 광산 마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 어김없 이 학교가 있다. 비행기를 타고 미국 중부를 끝없이 가로지르는 대초원 위를 날아가다 보면, 모든 지역의 마을들이 36개 구역으로 나누어진 모 습을 발견할 것이다. 2세기 전, 미 연방 정부는 이 지역구들을 정비하면서 개척지 주민 들에게 여섯 번째 구역(6구역)을 교육 용도로 사용하도록 했다. 이렇게 땅을 무상으로 지원받아 설립된 공립학교는 당시 신생국이던 미국과 서부 개척지 전역을 아우르는 시민권의 상징이 되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마을은 물론, 개척 마을에서도 지역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미국 독립의 아버지라 불리는 건국 초기 지도자들은 오직 교육받 은 시민만이 공화국을 지속시킬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후에도 학교 는 계속해서 국가 정체성의 요체를 형성해 왔다. 애들라이 스티븐슨 2 세1)는 “자유로운 공립학교 시스템은 가장 미국적인 것”이라 말했을 정

1) Adlai Stevenson II(1900∼1965). 미국 외교관 겸 정치인. 31대 일리노이 주지사를 역임 했고, 1952년과 1956년에 민주당 대통령 선거 후보로 지명되었다. 1960년에도 민주당 대 통령 선거 후보 지명에 도전했지만, 당시 케네디에게 후보 자리를 내줬다. 이후 UN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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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였다. 19세기 초, 토머스 제퍼슨2)은 공립학교가 두 가지 측면에서 민주 적 기관의 특징을 보여 준다고 봤다. 첫째, 기본적으로 공립학교는 올바른 정치 원칙을 아이들에게 가 르쳐, 아이들이 시민의 덕망을 키울 수 있도록 교육한다. 둘째, 공립학 교의 자율적인 운영은 지역 주민들에게 자치의 기회를 주고 민주주의 의 발달에 기여한다. 20세기에는 존 듀이(John Dewey)가 민주주의교 육에 대해 이와 유사한 주장을 내세웠다. 듀이는 시민의 정치적 사회화 와 현명하고 집단적인 결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민주주의 철 학자들에게 교육은 단순히 개별 소비재가 아닌, 공공선(公共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통된 교육 목표의 필요성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란 쉽 지 않았다. 두 세기 동안 공립학교 학교구는 시민들이 논쟁을 거듭하는 정치적 장이었다. 사실, 미국만큼 사회적 구성이 다양한 사회에서 공립 학교교육의 목적과 실재에 관한 논쟁이 있다는 건 놀랄 일도 아니다. 이 같은 학교 정책에 관한 논쟁은 시민들이 국가의 미래에 대해 희망과 우려를 동시에 표현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민들이 아이들의 교육 을 두고 깊이 고민한다는 것은 이들이 국가 전체의 미래 방향성을 고민 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대사(1961∼1965)를 역임했다. 민주당 내에서 자유주의적 신념을 강하게 정치적 연설로 제시했던 대표적인 인물로 기억된다.-역자 주 2) Thomas Jefferson(1743∼1826).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미국 독립선언서 를 주도적으로 작성한 인물이다. 미국의 초기 정치체제에서 의회의원, 버지니아 주지사, 재정부장관, 국무장관, 부통령을 지냈고, 제3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공교육과 관련해, ‘민 주시민교육’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공립학교 체제’를 제안했다.-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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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둘러싼 이야기들은 토머스 벤더(Thomas Bender)가 말한 ‘대중문화’를 정의하는 과정의 일부분이다. 벤더는 “정의와 합법성”을 추구하는 집단끼리의 다툼으로 대중문화가 창조되고 또 재창조되어 왔 다고 본다. 또한 이러한 과정이 “국가 혹은 대중 단위에서 우리의 일상 생활”을 형성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특정 집단과 가치가 특정한 시기에 대중의 삶과 주류 문화, 그리고 학교를 대표하게 된 이유를 이해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혹자에게는 공립학교에서 배운 공동의 가치라는 개념이 구식이고 순진한 생각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특히 최근 비평가들은 공립학 교가 비효율적이고, 관료주의적이고, 강압적이라고 비판한다. 혹은 미 국인들이 서로 너무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시민적 가치를 공유하는 것 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특정한 인종과 민족 집단은 전통적인 미국 역 사관이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며 공격한다. 미 의회와 주 정부는 물론이 고 주류 학계 전체가 가져야 할 표준화된 지식의 기준이 무엇이어야 하 는지에 대한 논쟁이 멈추지 않고 있다. 여러모로 오늘날 공립학교는 곤경에 처해 있다. 매일같이 대중매 체는 폭력 사태, 높은 중퇴율, 낮은 시험 성적 같은 암울한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이러한 눈앞의 염려와 걱정 이면에는 우리가 올바른 길로 가 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과 불만이 숨어 있다. 공교육 전체에 반향을 주었던 더 큰 목표를 향한 목소리가 사그라 지자, 한때 공교육을 지지했던 선거구들은 갈라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교육에 관한 정책 토론은 과장된 문구와 경각심을 유발하는 각종 설교로 가득차곤 했다. 최근의 토론은 더욱더 심하게 교육의 현주소를 비난하고는, 어김없이 혁명적인 개혁을 약속하는 방식의 패턴에서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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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지 않고 있다. 이 책은 최근의 무기력감에서 비롯한 위기나 교육 현장에 실재하 는 문제들을 소홀히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최근 공교육과 관련해 ‘무엇 이 시민들을 통합시키고 분열시키는가’, ‘시민사회의 보편적인 목표는 다원적인 사회에서 어떻게 제 기능을 수행하는가’, ‘공립학교의 어떤 특 징이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어떻게 교육은 미국 인구 구성의 다 원화에 적응해 왔는가’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이 얼마나 등한시되어 왔 는지를 지적한다. 많은 미국인이 미국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었다고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개혁가들은 종종 교육을 재정비하는 데는 과거를 잊는 게 좋다고 주장하며 과거를 반추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이런 태도의 문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모든 사람은 일상생활에서도 과거에 대한 감각을 사용하고, 지도자들은 시대적으로 보편적인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서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은 ‘우리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적용하는 역 사적 사실이 우리 선택에 대한 이해를 촉진하고 확고히 해 주는가’라는 것이다. 역사의 교훈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역사의 교훈이 단순하다면, 역 사학자들은 서로 반대 의견을 접할 수 없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연구는 의사결정을 위한 맥락과 제한, 또는 가능성의 그림을 제시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 책 속의 이야기는 복잡하고, 논란이 많으며, 정해진 답이 없다. 이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의 시민과 교육자들이 가지는 열망, 두려움, 성취, 그리고 실패를 다룬다. 어떻게 미국인들이 공교육을 통 해 사회를 형성하고자 했는지를 탐구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오늘날 논란이 되는 문제들과 이에 대한 해결책에서 한 발짝 떨어져 우리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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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 있었고 어디로 가게 될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독립한 이후 한 세기 동안 미국 사회를 관찰했던 외부인들은, 미 국인들이 정부로부터 거리를 둔 채, 그들을 얼마나 불신했는지에 대해 언급하곤 한다. 그 대상이 영국의 왕(조지 3세)3)이든 돈을 물 쓰듯 했 던 주 의회 입법자들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유권자들은 입안자들의 영 향력을 제한하고 정부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지속적으로 주 법안을 개 정해 나갔다. 정부를 바라보는 이러한 뿌리 깊은 불신이 공공 기관을 통한 사회보장제도의 도입을 수년간 더디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19세기 중반 공교육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할 일이 많 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다양한 부류의 사립학교와 끊임없이 경쟁 해야 했다. 요즘과 마찬가지로 부유층들은 교육시장에서 공립과 사립, 자선과 영리, 종교와 세속 학교에 이르기까지 많은 선택권을 가질 수 있 었다. 이토록 다양한 종류의 취학 시스템이 가져온 결과는 상당히 인상 적이었다. 이들 학교에서는 출석률과 문해율이 상당히 높았다. 여하튼 1890년경의 공립학교는 10분의 9에 이르는 학생들이 다닐 정도로 교육 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 정부를 불신하고 세금 내는 데 인색한 독립적인 미국인들은 다양 한 선택권을 주는 학교교육 체제에 계속 안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안주하지 않았다. 대신,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교 육 시스템을 확립하고 지속시키는 쪽을 택했다.

3) George William Frederick(1738∼1820). 1760년부터 영국의 왕이었다. 강력한 왕권회 복을 추구했으며, 왕위에 있는 동안 미국의 독립전쟁, 프랑스혁명, 나폴레옹전쟁 등 굵 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다.-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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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와중에 자신들의 전통을 굳건히 지키면서도 가장 분권화된 학교 운영 체계를 확립했다. 지역민들은 스스로 학교에 재정을 지원하 고 학교를 운영했다. 이러한 자치권 확립이 없었다면 공교육은 이토록 번창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방분권적인 체계 덕분에 지역민은 자신들 의 학교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다수결의 원칙으로 문제를 해결 해 나갈 수 있었다. 미국의 학교운영위원회 위원들은 19세기 미국에서 가장 거대한 공무원 집단을 형성했다. 심지어 몇몇 교외 지역에서는 이 들의 수가 교사의 수를 넘어섰다. 하지만 지방 자치적인 교육 시스템을 따져보면 혼란스러워진다. 지역에 기반을 둔 학교 운영 체계는 중앙 관청이 보편적인 기준안을 마 련하고 이를 강압적으로 시행한 적이 없는 데도 어떻게 서로 비슷한 모 습을 띠게 된 것일까? 애덤 스미스(Adam Smith)의 “보이지 않는 손”의 비유를 들어 이야기하자면, 미국의 보편적인 정치적, 사회적 가치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해 미국 전역에서 유사한 형태의 보통 학교 를 낳은 것이다. 이처럼 공유된 신념이 사람들로 하여금 교육기관을 설 립하게 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학교교육이 건강한 국가를 위한 필수 적 공공선임을 믿게 되었다. 물론 개개인도 학교교육으로부터 이득을 얻었다. 하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시민사회가 공통의 가치를 받아 들이도록 하게 했다는 점이다. 과연 이 공통의 가치는 무엇일까? 미국인들은 경쟁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19세기를 통틀어 교회는 영혼과 신도를 두고 서로 경쟁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국가가 제시한 공동의 원칙에 동의하게 된 것일 까? 더욱이 19세기는 정당끼리 치열하게 경쟁하던 시기였다. 각 정당 은 서로를 비난하고 흠집 내기를 즐겼다. 경제적으로도 거친 충돌과 다 툼이 많았다. 이토록 다른 분야에서는 서로 흠집 내고 충돌하기 바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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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이 왜 학교는 도덕과 시민교육을 해야 한다는 데에는 통일된 의견을 내고자 했을까? 19세기의 위대한 학교개혁가인 호러스 만4)과 수천 명의 주 단위, 지역 단위 지도자들은 계획이 있었다. 물론 보통학교의 설립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종교 단체에 휴전을 제안하고 한발 물러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이유가 너무도 명확했다. 즉, 공교육의 주된 목적 은 좋은 심성을 계발하는 일이다. 그 심성은 기본적으로 종교에 기초를 두고 있고, 종교는 곧 성경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도덕 교육은 종파적인 언급을 배제한 성경 교육에 기초해야만 한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교육을 비종파적으로 다루겠다는 국가적 합의는 공교육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개신교 주류세력에 호소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가 톨릭에서는 이 제안이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 각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자신들만의 학교를 설립하며 보통학교에 대 항했다. 비종파적인 도덕 교육에 대한 신념으로 교육개혁가들과 종교계가 연대하게 되면서, 정치적으로도 교육에 대한 초당파적인 합의가 가능 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관측이 나왔다. 이러한 합의에 따라, 보통학교는 미국의 단결을 가능하게 했던 순수한 공화주의적 원칙과 실재에 기반 을 두고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여겨졌다. 이 애국주의적 교육론은 건국의 아버지를 찬양하는 미국 역사 교과서에서 그 영향력이 확연히

4) Horace Mann(1796∼1859). 미국의 교육개혁가. 미국 보통학교(common school) 운동 의 아버지라 불린다. 매사추세츠 주의원을 지냈으며, 주 교육위원회 교육감으로 임명되 어 활동했다. 충실한 기독교인이자 공화당원으로서, 그의 공립학교에 대한 태도와 노력 은 국가에 충성할 수 있는 신실한 기독교인을 길러 내는 것이었다. 호러스 만의 보통학 교에 대한 기여와 쟁점은 본문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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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난다. 유명한 󰡔맥거피 리더스(The McGuffey Readers)󰡕5)를 만든 집필진들은 종파와 당파적인 색채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알아야 할 보 편적인 가치만을 책에 넣었다고 공언했다. 종교와 정치적 색채를 아우 르는 이런 책은 수요가 엄청났다. 󰡔맥거피 리더스󰡕는 1억 2200만 부가 팔리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다. 통일된 교과과정과 지역에 기반을 둔 운영 체계를 갖춘 보통학교 의 창립은 19세기 개혁의 대단한 성과 중 하나다. 공화주의적 이상과 보편적 교육의 확립에 대한 열망 덕분에 보통학교운동은 사람들의 오 랜 소망과 염려에 부응했던 것이다. 하지만 19세기가 저물어갈 때쯤, 개혁가들은 지방분권적인 체계와 공통된 교과과정에 서서히 불만을 드 러내기 시작한다.

지도자들이 20세기 초 산업화, 도시화한 새로운 사회를 맞아 민주주의 를 새롭게 정의하면서, 다시 한 번 미국의 교육 체제는 전환기를 맞았 다. 20세기의 민주주의 비전은 전문가들을 적극 우대했고, 평범하고 단 순한 참여는 못마땅하게 여겼다. 선출된 지역 학교운영위원회는 공교육의 민주적인 색채를 잘 유지 해 왔지만, 20세기 초 정책 입안자들에게는 이러한 지역 학교운영위원

5)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 가까이 미국 초등학교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교과서를 가 리킨다. 1∼6학년에 이르기까지 꽤 오랜 기간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미국 학교교육에서 중 요한 자료로 인용되고 있다. 책의 저자인 윌리엄 홈즈 맥거피(William Homes McGuffey, 1800∼1873)의 이름을 따라 명명된 교과서로, 읽기의 내용에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교사 경험을 토대로 작성되었다는 장점을 토대로 수준별 단어, 읽는 방법, 쓰는 방법 등에 대해서 가장 먼저 등장한 체계적인 교과서로 인정받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맥거피 리더스󰡕를 교재로 사용하는 사립학교 혹은 홈스쿨이 있다.-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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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학교운영위원회는 단지 지역민들 의 요구에 부합해 싸고 실용적인 학교교육을 실시했을 뿐이고, 학교를 통해 지역 사정에 정통한 교사를 고용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 어느 지도자는 이러한 공교육의 모습을 보고 “철 지난 민주주의(democracy gone to seed)”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어떻게 투자에 인색한 지역 관리 자들이 20세기에 걸맞은 인재들을 길러 낼 수 있겠는가 말이다. 더욱이 엘리트 사회 개혁가들은 도심 지역의 리더십이 빈약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느끼기에 도시의 학교운영위원회는 너무 비대했고, 전문가들에게 결정권을 주기보다는 하위 분과위원회에 결정을 떠맡기 고 있었다. 또한 잘못된 사람들이 학교를 운영하는 사례가 많아 보였 다. 부패한 정치인, 자신들의 문화가 인정받기를 원하는 이민자, 그리 고 자신의 친인척을 고용하려는 사람들이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런 와중에 어떻게 도시 학교들은 전문화하고 효율화할 수 있었던 걸까? 학교는 어떻게 이민자들이 ‘미국화(Americanize)’할 수 있도록 했을까? 심지어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선거구에 기반을 둔 교육위원회(ward boards)’라는 분권적인 지역구 시스템의 구시대적 유물을 유지하고 있 었다.6) “학교를 정치와 연관짓지 말라!” 이것은 20세기 초 공교육에서 새 로운 개념의 민주주의를 주창하던 사람들이 싸워야 할 이유였다. 이 엘

6) 교육위원회(board of education)는 연방 교육부, 주 교육부와 함께 시, 카운티, 주 등의 지역 단위 교육 정책을 결정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교육위원회는 인구 및 지역 단위로 구획된 선거구(ward)를 기준으로 만들어지고 유지되었다. 따라서 정치적 으로 독립적인 교육 정책 구상이나 논리를 만드는 일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러 한 폐해를 지적하며 ‘학군(school district)’의 규모와 수준을 결정하기 위한 노력이 끊임 없이 이루어졌다.-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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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트 개혁가들은 오래된 개념의 보통학교 관리 체계와 교과과정이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는 구시대의 산물이라는 데 동의했다. 미국 전역에 있는 학교운영위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학교를 비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개혁가들에게 최상의 민 주주의란 공립학교를 특별히 훈련된 전문가 집단에 맡기는 것을 의미 했다. 학교 체제는 공립 의료기관 시스템과 흡사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즉, 비전문가들은 일반적인 시각을 제공할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전문 가들이 담당해야 할 일이었다. 이 개혁가들은 지역의 작은 학교구들을 통합하기를 원했고, 주 정 부와 연방 정부가 학교에 대한 통제권을 더 많이 가지길 원했다. 도시의 학교를 정치 논리에서 배제한다는 것은 학교운영위원회의 규모를 줄이 고 선거구에 기반을 둔 교육위원회를 폐지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개혁가들은 교육을 표준화·중앙집권화하기를 원했고, 민주주의 는 모든 학생들에게 공통된 교과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오랜 개념을 거 부했다. 학생들의 지성과 미래의 운명은 분명히 지금과 다를 것이기에 그들은 이에 걸맞은 차별화된 교과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민주 주의적 학교들은 학생 각자가 자신의 적성에 맞는 교과 내용을 탐색하 도록 기회를 주었다. 이 상황에서 평등이란 모두에게 똑같이 대하는 것 이 아니라 각자에게 다른 방식으로 대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후로 공립학교는 “진정으로 아이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비 정치적인 전문가에 의해 운영되면서 “민주주의를 위한 기구(instrument of democracy)”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의 개혁가들은 아이들의 능 력과 삶의 방향에 따라 모든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중이 학교를 소유하지만 운영은 전문가들이 맡았다. 마치 기업에서 CEO가 실제 운영을 담당하는 것과 유사했다. 이는 민주주의 관리 방식의 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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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형태였다. 이것은 사회적·경제적으로 효율적인 시스템이었고, 각 자 다른 아이들에게 다른 적용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교육의 평등성을 보장했다. 민주주의를 재정의하고, 학교를 재조직하는 일은 이후 세대를 위 한 교육자들의 전통적 상식이 되었다. 그들은 거대한 학교구와 큰 학교 는 작은 것보다 더 좋으며, 중앙집권화되고 특화된 관리 구조는 분권화 되고 단순한 구조보다 더 효율적이며 책무성이 뛰어나다고 말했다. 분 화된 교과과정과 다양화된 선택 과목은 다양한 인종적·민족적 배경을 가졌거나, 각기 다른 능력을 지닌 학생들에게 평등의 기회를 제공했다.

1960년대에 들어, 역사의 흐름을 바꾸려는 또 다른 노력이 고개를 든 다. 개혁가들은 또다시 민주주의를 정의하기 시작했고, 지난 반세기 동 안 이뤄진 교육 조직 개편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작은 학교와 자립적인 학교구가 좋다고 주장했다. 또한 학교는 학생들이 높은 표준 학력 기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분리된 교육과정이 학생들 의 학습 기회를 박탈하고 학교 개혁 과정에 부모들을 참여시킴으로써 교육개혁이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의 개혁가들은 그 어떠한 희망적인 생각으로도 교육을 정치 중립적으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학교는 본원적 으로 가치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따르는 질문은 ‘교육이 정치적 인가’가 아니라, ‘누구의 정치적 성향이 반영되는가’다. 최근 50년간의 학교 거버넌스 역사에서, 학교 주위에 세워진 완충지대와 보호막을 걷 어내려고 애쓴 이야기들은 상당 부분이 20세기 전반에 참여민주주의로 부터 이 완충지대와 보호막을 보호한 일들에 관한 것이다. 흑인, 라틴계, 장애인, 여성같이 사회로부터 배제당하고 부당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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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받던 집단들은 사회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을 만들 고, 공교육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그리고 전 통적인 정치적 전략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집단에 동등한 권 리와 존중을 보이는 ‘문화적 민주화’와 학교구 간의 빈부격차를 최소화 하는 ‘경제적 민주화’로까지 민주주의의 개념을 확장했다. 일찍이 오늘날처럼 교육정치학이 변화무쌍하고 복잡했던 적은 없 었다. 특히 바우처 제도와 학교선택입학제를 옹호하는 비평가들은 민 주주의에 새로운 개념을 불어넣고 있다. 이번에 해결해야 할 문제는 전 문가들을 교육 현장에 끌어들이려 했던 이전의 시도보다 더 근본적인 사안이다. 바우처 제도(vouchers)와 학교선택입학제(school choice) 를 옹호하는 이들은 공교육이 이미 너무 관료화되었고 특정 이익집단 을 대변하는 각종 정부 규제로 제한받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은 정치를 시장으로 대체하는 것이 해결책이라 말한다. 학교를 소비재처 럼 여기고 학부모에게 바우처를 제공하고 학교선택권을 줌으로써 교육 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집단적인 선택이 관료주의와 정체 현상을 낳았다고 주장하 며, 이제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개인들에게 최선의 선택을 하게 해 줄 거라고 말한다. 즉, 교육 시장이 경쟁을 통해 사람들을 만족시킬 것 이라 믿는 것이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자. 교육이 원래 소비재(consumer good)였 는가? 아니면 공공재(common good)였는가? 이 책은 이 질문의 답을 둘러싼 맥락을 보여 준다. 만약 토머스 제퍼슨, 호러스 만, 존 듀이가 오 늘날의 공교육 논쟁에 참여한다면, 그들은 미국인들이 길을 잃지 않았 는지 물어볼 것이다. 민주주의는 현명한 집단적 결단을 내리는 것이지 소비자 개인이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민주화와 민주주의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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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은 더 행복했던 먼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바로 오늘이, 우리가 가장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할 시기다.

데이비드 타이악7)

7) David Tyack. 스탠퍼드대학교의 명예교수로, 교육 정책과 미국 교육사를 가르쳤다. The One Best System: A History of American Urban Education, 래리 쿠번(Larry Cuban)과 함께 Tinkering toward Utopia: A Century of Public School Reform를 저술했다.-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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