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록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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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록



제1권 주여, 당신은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며 찬양을 받으실 분이십 니다. 당신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기에 당신 안에 쉬기 전에 는 우리 마음이 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여, 내가 당신을 내 안에 모시려 합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나왔고 주 안 에 모든 것이 있사오니, 나 역시 당신 안에 있지 않으면 존재 할 수도 없습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하나님, 지극히 높으 시고 지극히 선하시며 지극히 전능하시고 항상 존재하시며, 모든 것을 바꾸시지만 바뀌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며 다함이 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누가 나 를 당신 안에서 쉬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내 마음을 당신께 빠져 들게 하소서. 모든 죄악을 잊고 유일하신 나의 행복, 당신께 다가서고 싶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말 로 가장 비참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내 영혼의 집은 당신이 들어오시기에는 비좁 으니 넓혀주소서. 무너질 것처럼 허름한 집이오니 수리해 주소서. 내가 당신의 눈에 거슬리게 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숨기지 않겠습니다. 당신 외에 누가 내 죄를 깨끗이 씻어주 겠습니까? 나는 비록 티끌처럼 보잘것없는 존재지만, 당신 21


의 자비를 힘입어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소서. 주여, 나는 과연 어디로부터 이 죽은 것 같으나 살아 있 는 이곳에, 그리고 살아 있으나 죽은 것 같은 이곳으로 왔습 니까? 기억할 수는 없지만, 당신께서 내 육신의 부모를 통해 나를 지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유모의 젖이 나를 양육했지 만, 따지고 보면 이 역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당신께서 그 들을 통해 나를 먹이신 것입니다. 갓난아이 시절, 나는 젖을 먹고 잠을 자거나 몸이 불편하 면 우는 것밖에 몰랐습니다. 시간이 흘러 웃음 짓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것도 내가 기억하는 것은 아니고 남 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에 불과합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 는지를 조금씩 느낄 수 있게 되었고, 내가 원하는 일들을 표 현하고 싶어도 잘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럴 때면 내 맘 대로 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질을 부리고 울음을 터뜨려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주여, 내 어린 시절은 이미 흘러갔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항상 변함이 없으십니다.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며 덧없는 모든 것들의 원인이신 주여, 시간적인 모든 존재의 영원한 진리가 당신 안에 있사오니, 내게 말씀해 주소서. 갓난아이 시절 이전의 나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나는 누구였습니까? 이것을 알기에는 경험과 기억이 너무나 모자랍니다. 당신만 22


이 진리이시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주여, 당신 앞에 죄 없는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 에서 단 하루를 살았던 어린아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백 하오니 주여, 내가 어디서나 언제나 죄 없었던 때가 없었습 니다. 심지어 어머니 젖이 넘쳐나도 다른 젖먹이가 그것을 먹는 것을 보면 얼굴이 파랗게 되어 분을 내는 아기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모금의 젖으로 목숨을 이어가는 아이에게 나누어주기 싫어하는 이것이야말로 죄의 흔적이 아니고 무 엇이겠습니까? 나는 말할 줄 모르는 젖먹이에서 말할 줄 아는 어린이로 성장했습니다. 말을 배우는 과정에서, 여러 마디의 말을 반 복해서 듣고 그 말이 표시하는 물건을 알아갔던 것 같습니 다. 그리고 거듭하여 귀동냥을 통해 말의 뜻을 알게 되고 입 을 통해 의사 표현을 할 수 있었던 듯싶습니다. 주여, 어린 시절 나는 학교에 들어가 문학을 배웠지만 그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숙제를 내 주고 쓰기와 읽기에 태만한 아이들을 매로 훈계하는 스승들 을 보면서, 나만은 매 맞지 않기를 기도하곤 했습니다. 재능 이 없어서가 아니라 노는 데 정신이 팔려 어른들에게 벌을 받는 셈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매질하던 그 어른들도 질 투심과 놀이에 정신이 팔리기는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23


주여, 내가 아직 어렸을 때, 갑자기 위장에 탈이 나서 고 열로 죽을 뻔했던 일을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 어머니는 가 슴을 졸이며 당황하면서 당신께 부르짖었습니다. 주 예수 여, 어머니는 이 일을 통해 내가 당신께 참회하여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의 성례로 깨끗이 씻어주시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 셨지만, 내 병은 곧바로 치유되었습니다. 그 결과, 나의 죄 씻음이 지체되었습니다. 어쨌든 나는 이미 믿는 자였고 아 버지를 제외한 온 집안과 어머니가 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 었습니다. 아버지는 아직 믿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경건의 영향을 가로막거나 신앙생활을 방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 만일 세례를 받고 당신의 보호를 받아 안전하게 인도되 어 왔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소년기에 나는 공부하기가 싫었고 억지로 공부시키는 것 자체가 혐오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공부를 해두 었던 것이 그나마 유익했습니다. 어릴 때 희랍어 공부를 왜 그렇게 싫어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라틴어는 꽤나 좋아했 습니다. 읽기 쓰기 등 초등교과는 따분하고 부담스러웠습니 다. 벌써부터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의 바람에 들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당신을 멀리 떠난 내 모습을 불쌍히 여기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문학 작품 24


≪아이네이스≫의 주인공 디도가 사랑 때문에 자살한 것을 슬퍼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었습니다. 외국어인 희랍어를 배우는 것은 어려웠고 상대적으로 라틴어를 좋아했던 나는 의사 표현을 위해서라도 라틴어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장래 가 촉망되는 소년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주여, 나는 당신께서 주신 이러한 재능을 허비하는 데 몰두 했습니다. 말재주와 언변이 친구들보다 뛰어나 갈채를 받기 는 했지만 욕정에 끌렸습니다. 철자법을 지키는 데는 열정 을 쏟았지만 당신이 주신 영원한 법은 관심도 없었습니다. 소년 시절, 나는 안타깝게도 이러한 풍습에 젖어 있었습 니다. ‘경기장’이라는 말을 문법적으로 틀리게 쓰지나 않을 까 걱정할 뿐, 말솜씨가 어눌한 친구들 꾸짖기를 즐겨 했습 니다. 인기 얻는 것을 보람으로 삼았고 수많은 거짓말로 부 모와 교사들을 속였습니다. 게다가 집안 창고와 식탁에서 좀도둑질도 서슴지 않았습 니다. 무엇이 먹고 싶었던 이유도 약간은 있었지만, 훔친 것 을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며 자랑하고 싶은 이유가 더 컸습니 다. 심지어 놀이에 있어서도 다른 아이들을 이기고 싶은 욕 망에 속임수라도 쓰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어린이의 천진난 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죄짓기를 즐기는 자였습니다. 당 신 아닌 곳에서 즐거움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 결과 슬픔과 25


혼란과 오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제2권 내가 부끄러운 이야기를 들춰내는 것은 내 과거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서입니다. 돌이켜보면, 나 는 당신을 떠나 산산조각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당신 은 조각난 나를 하나로 모아 새롭게 만드셨습니다. 한때, 세상적인 것에 만족하려는 욕망으로 젊음을 불살 랐습니다. 여러 가지 허망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부 끄러움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진흙 같은 육체의 정욕과 사춘기 격정의 안개가 솟아올라 마음을 흐리게 했습 니다. 내 마음은 어두워져서 순수한 사랑과 추잡한 정욕을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정욕의 고삐가 풀리고 말았습 니다. 그때 당신의 음성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어야 했습니 다. 당신의 말씀들에 정신만 차렸다면 당신의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나는 육체의 충동을 따라 당신의 계명을 어기며 살았습니다. 열여섯 살 되던 때, 나는 당신을 떠나 맹렬한 정욕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부끄러 26


움도 모른 채 광란으로 치달았습니다. 부모도 망가져 가는 나 를 결혼이라도 시켜서 구해줄 생각을 하지 않던 때였습니다. 그때 공부가 중단되었습니다. 문법과 수사학을 공부하 던 인근 도시 마다우라에서 돌아온 나는 훨씬 먼 카르타고 유학 경비가 마련되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 계획은 내 아버지의 재력 때문이라기보다 자식을 위한 열성 때문이었 다고 봅니다. 주변 사람들은 멀리 유학을 떠날 자식을 위해 힘겹게 학비를 마련하는 아버지를 칭송하기도 했습니다. 내 나이 열여섯, 가정의 어려운 형편 때문에 학업을 중단 하고 부모님과 함께 집에서 쉬고 있었던 그해, 정욕의 잡초 가 내 머리 위에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뽑아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목욕탕에서 성징이 나타 나고 사춘기의 정열이 타오르는 내 육체를 보자 손자라도 기다리는 듯 기뻐하며 어머니에게 알렸습니다. 아버지는 학 습 교인으로, 믿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가 혹시라도 하나님을 떠난 무리들과 섞 여 추잡한 길로 빠지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어머니의 훈계를 듣는 것 자체가 거북했던 나는 어리석 게도 추잡한 짓을 자랑하는 친구들보다 뻔뻔스럽지 못함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흉잡히지 않으려고 더 못된 짓을 일삼았고 그 한도를 넘어 방탕하게 살았습니 27


다. 그러는 동안 당신으로부터 멀어졌고 안개만 자욱해졌습 니다. 주여, 당신은 도둑질을 금하셨고 우리의 마음에 율법으 로 새겨놓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당신께서 금하신 그 도둑 질을 하고 싶었고 또한 그렇게 하고 말았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정의로움이 없었고 사악함에 찌들 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도둑질을 한 것은 훔친 것 을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도둑질이라는 죄 그 자체가 좋아 서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우리 집 포도밭 근처에 배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열 매가 많이 열리기는 했지만 모양이나 색깔이 탐스럽지는 못 했습니다. 어느 늦은 밤, 친구들과 모여 나무를 흔들어 배를 땄습니다. 잔뜩 가지고 오기는 했지만, 겨우 몇 개 맛만 본 다음 돼지 떼에 던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당신께 고백합니다. 내가 얻으려 했던 것이 무엇이 었는지요. 악한 짓을 할 때, 그렇게 하도록 자극한 동기는 다름 아닌 내 악한 의지였습니다. 나는 스스로 멸망하는 일 을 사랑했고, 내 결함을 사랑했고, 악함 자체를 사랑했습니 다. 타락한 내 영혼은 당신에게서 떨어졌습니다. 아무것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짓만 반복했습니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에는 그에 합당한 매력이 있습니다. 28


그러나 모든 것은 당신의 질서와 법에 어긋나면 안 됩니다. 세상살이에 속하는 것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기에 그것을 추 구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무분별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층의 질서에 속하는 것들을 더 사랑하고, 참 좋고 아주 좋으신 당신, 당신의 진리 와 법도를 게을리 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열여섯 살 그날 밤에 저지른 도둑질에서 내가 탐내었던 것은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지닌 과일이 아니었습니다. 더 좋은 배가 우리 집에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도둑질이라는 목적 하나로 배를 땄고 배를 훔치자마자 내버렸습니다. 그 배에서 내가 만족하려 했던 것은 결국 내 죄였습니다. 배가 내 입으로 들어가서 맛있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아마도 훔 친 배를 먹는 내 죄의 맛이었을 겁니다. 만일 훔친 배를 탐냈거나 정말 먹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 면 혼자도 충분했을 것이고 그래야 만족했을 것 같습니다. 굳이 나쁜 친구들의 간지러운 자극을 받아 탐욕을 불붙게 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내가 느낀 쾌감은 그 배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짓는 데 있었습니다. 나쁜 친 구들과 함께 죄를 저지르는 데에서 느끼는 쾌감을 즐긴 것입 니다. 정말 되돌아보기 부끄러운 시절이었습니다. 과연 누가 29


헝클어지고 얽힌 매듭을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 어찌나 더 러운지 내 스스로 생각하기도 싫고 보기도 싫습니다. 성결 하신 당신을 만나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오, 나의 하나 님. 젊은 시절 나는 당신으로부터 떨어져 길을 잃었습니다. 내 스스로 황량해졌습니다.

제3권 마침내 카르타고에 왔습니다. 그곳은 가증스러운 사랑의 튀 김 그릇이 달아올라 기름이 튀어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나 는 아직 사랑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사랑하기를 사랑했습니 다. 깊이 숨겨진 허전함에서 욕구불만 자체를 더 강렬하게 느끼지 못하는 내가 스스로 싫어질 정도였습니다. 무엇을 사랑해야 할지 몰라서 사랑하기를 사랑하며 찾아 헤매고 있 었습니다. 내 마음의 양식인 당신을 굶주린 마음으로 찾기는 했지 만 배고픔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내 영혼은 가려움을 없애려고 감각적인 것들로 긁어대는 수준 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혼 없는 감각적 대상들은 진정한 사랑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의 육체를 30


즐기며 달콤해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추하고 부정직 한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어서 고상한 척 점잖게 꾸미고 지 냈습니다. 또한 비참한 내 모습을 담은 연극들에 빠져 들었 습니다. 자기가 직접 당하기는 싫어하면서도 슬픈 이야기들 을 구경하며 슬픈 쾌락을 즐겼습니다. 가상으로 꾸며낸 슬 픔이었지만 나는 배우들의 연기를 아주 좋아했고 사랑하던 자들이 헤어지는 모습에 빠져서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나 자신이 당신의 양 떼를 떠나 다른 길로 도망친 불쌍한 양 한 마리라는 것을 슬퍼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나 는 죄악에 젖어 지냈고 당신을 점점 멀리 떠나 헤매었고, 당 신의 길이 아닌 내 자신의 길을 따라가는 어설픈 자유를 사 랑했습니다. 그 어간에 나는 수사학 학교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교만 으로 잔뜩 부풀었습니다. 문제아처럼 난폭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그들 축에 끼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도 했습니 다. 초급생의 미숙함을 비꼬아 괴롭히며 가증스러운 만족을 즐기는 그들이 재미있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가담 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 다행입니다. 그 와중에 나는 교과 과정을 따라 키케로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호르텐시 우스(Hortensius)≫라는 책은 철학에 입문할 것을 권유하 는 책으로, 내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31


이 책을 읽은 후 이때까지 품어왔던 나의 헛된 희망은 모 두 시들해졌습니다. 내 마음은 불멸의 지혜를 추구하려는 욕구로 가득 찼습니다. 드디어 나는 당신에게 돌아가고 싶 은 마음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내 나이 열아홉이었습 니다. 두 해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어머니가 마련해 준 학비로 공부하고 있던 그때, 이 책은 그 말솜씨가 아니라 그 내용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주여, 당신에게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 지혜를 사랑함을 희랍어로 철학이라 일컬었는데, 그 책은 지혜에 대한 사랑 으로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에 허전함 이 남은 것은 그 책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일 것 입니다. 당신의 진리가 아닌 한, 아무리 수준이 높고 세련된 책이라 해도 내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성서로 마음을 돌려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교만 으로 가득 찬 나에게 성서는 여전히 신비에 싸여 있었습니 다. 성서의 뜻을 깨달을 수도 없었고 그 말씀을 따를 겸손도 없었습니다. 성서의 문체도 키케로의 웅변에 비길 것이 못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만에 들떠서 스스로 큰 체하고 있 었습니다. 이 무렵, 나는 거만하게 날뛰는 육체적인 말재주꾼들에 게 빠져 들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주장에는 하나님과 그리 32


스도, 그리고 성령에 관한 이야기들이 섞여 있어서 그럴싸 하게 보였습니다. 그들은 입을 열어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내실도 없이 떠벌리는 혀의 소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들은 진리이신 당신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당신의 피조물인 우주의 원소들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했습니다. 당신을 굶주 려 하는 나에게 당신 대신 해와 달을 믿으라고 말할 뿐이었습 니다. 나는 그것들이 당신인 줄 알고 받아먹으며 굶주림을 채워보려 했지만 나의 지적 허기는 더 심해졌습니다. 마니주의자들의 환상은 전혀 당신과 비슷하지도 않았지 만, 당시 나는 망상에 사로잡혔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존 재하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습 니다. 그들은 다섯 가지 원소를 다섯 가지 암흑의 동굴과 관 련시켜 여러 가지로 꾸며댔습니다. 나는 진리에 목말라 있 었지만, 당신을 영혼의 지성을 통해 찾지 않고 육체의 감각 으로 찾고 있었기 때문에 솔깃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어리석은 사기꾼들이 나에게 질문했습니다. 악은 어 디에서 오는가? 하나님의 형체는 과연 어떤 것이며 한계는 무엇인가? 하나님도 머리털이나 발톱이 있는가? 아내를 동 시에 여러 명 데리고 사는 자, 사람을 죽이는 자, 혹은 동물 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자들도 의롭다고 할 수 있는가? 당시, 나는 악이란 선의 결여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33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질문에 어리둥절해하다가 그들 에게 설득되고 말았습니다. 보이는 것만을 전부라고 생각한 나머지 그 이상의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영(靈)이시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나 님은 길이와 넓이를 채우는 지체를 가지지 않으시며, 양적 으로 측량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인간 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라는 말이 무슨 뜻 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의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심판 이란 풍속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로운 율법에 서 옵니다. 그리고 지역과 시대를 따라 각각의 풍속이 생겨 난 것일 뿐 그 본질은 변함없이 정의로운 율법에서 옵니다. 나는 이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마니교가 아브라 함을 비롯한 믿음의 조상들을 비난하는 것이 자의적인 관점 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왜곡했다는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의인이라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따르 는 것이라는 점을 모르고 마니교의 주장에 휩쓸렸습니다. 당신은 때마다 이유가 있어서 각각 다르게 보이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러나 본질상 당신의 정의에 순종한다는 점에 서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계명은 항상 34


옳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 본성을 더럽히는 죄악은 언제라도 징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항상 교제해야 하지만, 인간이 정욕으로 더럽혀지면 교제가 가로막혀 버립니다. 당신께는 죄가 전혀 없으십니다. 죄는 인간이 짓습니다. 당신께는 악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을 변덕스럽다고 탓하는 마니교에 속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예언자들과 거룩한 종들을 비웃었습니 다. 그들을 비웃는 나 자신이 당신의 비웃음거리가 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나는 점점 더 마니교의 어리석은 주장에 빠져 들었습니 다. 그들은 무화과를 딸 때 나무가 운다고 합니다. 어미나무 도 젖 같은 눈물을 흘린다고도 합니다. 마니교 성인이 남의 죄로 인해 떨어진 무화과를 먹으면, 소화 과정을 거쳐 그가 기도하는 중에 날숨을 통해 신의 일부분인 천사를 내뱉어 놓는다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신의 일부분을 풀어놓지 않으 면 무화과나무에 갇혀 있을 것이라는 허황된 주장도 있습니 다. 나는 그들의 이러한 어리석은 가르침을 수용하기 바빴 습니다. 주여, 당신은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어머니가 엎드려 기도할 때 초상집에서보다 더 애절하게 울며 흘린 그 눈물을 업신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꿈을 통해 어 35


머니를 위로하셨습니다. 어머니의 꿈에 한 젊은이가 나타나 왜 울고 있느냐 물었을 때, 아들의 타락을 보고 운다고 하자, 안심하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합니다. 나는 어머니의 꿈 자 체보다 어머니를 통해 주신 당신의 대답, ‘너 있는 곳에 그분 도 계신다고 하더라’ 하는 부분이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당 신은 이 꿈을 통해 미래의 모습을 어머니에게 예고하신 것이 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이 일 후에도 거의 9년 동안 마 니교의 진흙탕과 그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 의 기도는 더 깊어졌고 당신은 그 기도를 듣고 계셨습니다. 당신이 어머니에게 주신 또 다른 답을 기억합니다. 당신 의 교회에서 자랐고 당신의 책에 정통한 당신의 주교를 통 해 주신 답입니다. 어머니가 그를 찾아가 내 아들을 권면해 달라고 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로 그를 놔 두시오. 그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만 하시오. 자신의 오류를 깨닫게 될 것이오.” 어머니가 울며 매달리자 그는 이렇게 말 했습니다. “그만 가시오.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그 대답을 하늘로부터 들려온 소리로 받아들였다 고 회상하시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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