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협전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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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협전



서(序)

≪검협전(劍俠傳)≫ 4권은 누가 저술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기록된 것은 월(越)과 수(隋) 외에도 당송(唐宋) 시 기의 일들이 많이 들어 있는데, 후인들이 송(宋) 시기의 책 이라 이르는 것이 이치상 그럴듯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고 사들은 비록 자주 볼 수 있는 것들은 아니지만, ≪총서(叢 書)≫, ≪설부(說郛)≫ 등에도 아울러 수록되어 있다. 고

사에 정통한 자들은 반드시 신뢰할 만한 사적에 도움을 구 할 필요가 없는데, 또한 책을 펼치면 능히 기이함에 놀라게 된다. 이에 전(傳) 2권을 전해 이후 널리 살피는 것을 갖추 고자 했다. 강희(康熙) 무신(戊申)년1) 음력 11월 동짓날 왕 사한(汪士漢)이 적다.

≪劍俠傳≫四卷, 不知著自何人, 然所記載則已越隋 外, 多引唐宋事, 後人謂宋時書, 理或然歟? 其事雖不 經見, 然≪叢書≫、≪說郛≫諸書並載之, 博古者即 不必援為信史, 亦能使展卷驚奇. 玆附二傳後以備弘 覽云. 康熙戊申一陽月2)冬至日星源汪士漢識3).

1) 강희(康熙) 무신(戊申)년: 강희(康熙) 7년, 16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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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양월(一陽月): 음력 11월. 3) 식(識): 글을 다 적고 나서 아무개가 적었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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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일(之一)



노인화원(老人化猿)4)

월왕(越王)5)이 범려(范蠡)6)에게 검을 사용하는 기술에 대 해 물으니 범려가 대답했다. “신이 들으니 조(趙)나라에 처녀가 있는데, 나라 사람들 이 그의 검술을 칭찬하오니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그녀에게 가르침을 청해 보십시오.”

4) 이 글은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데, 당(唐) 구양순(歐陽詢)의 ≪예문류취(藝 文類聚)≫라고 보고 있으며, 조엽(趙曄)의 ≪오월춘추(吳越春秋)≫에도

관련 고사가 전해진다. 5) 월왕(越王): 구천(句踐, ?~BC 465, BC 497~465 재위). 월은 구천의 부친 윤 상(允常) 때부터 인접국 오(吳)와 숙적 관계에 있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구천은 쳐들어온 오왕(吳王) 합려(閤閭)를 격퇴, 전사시키는 쾌거를 올 렸다. 그러나 기원전 494년 합려의 유언을 받고 침략해 온 아들 부차(夫差) 에게 패하고 회계산(會稽山)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어야만 했다. 그 뒤 명신(名臣) 범려(范蠡)와 함께 군비를 증강하고 힘을 키우며 와신상담(臥 薪嘗膽)하기를 20년, 기원전 473년 구천은 드디어 부차를 물리쳐 자살하게

함으로써 복수에 성공했다. 그 뒤 월의 국력은 더욱 막강해져 구천은 패왕 (覇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6) 범려(范蠡, ?~?): 춘추전국시대 월(越)나라의 정치가, 군인, 자는 소백(少 伯). 전하는 말에 의하면 초(楚)나라 평왕 20년(BC 517년) 출생이라고도

한다.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완지[지금의 하남 남양(南阳)] 사람으로, 초나 라 초기의 가장 유명한 정치가, 군사가, 경제학자였다. 월왕 구천을 섬기고, 구천을 춘추오패에 설 수 있게 한 공로가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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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처녀일(趙處女一) “처녀여, 공지저(處女如, 公之狙)”는 “처녀의 무예가 원공(猿公)을 넘어선다”는 뜻이다. 조 처녀가 월왕(越王)을 배알하러 가는 도중 원공을 만나 무예를 겨루었고, 원공은 승복하고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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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월왕은 사람을 보내 조 처녀를 청해 왔다. 조 처 녀는 월왕을 배알하러 오는 길에 한 노인을 만났는데, 노인 은 스스로를 원공(袁公)7)이라 했다. 원공이 조 처녀에게 물 었다. “노부가 듣기에 당신의 검술이 뛰어나다고 하던데, 한 번 보기를 원하오.” 조 처녀가 대답했다. “첩은 감히 숨기는 바가 있지 않습니다. 공께서 시험해 보시지요.” 원공은 숲의 대나무 가지 하나를 끌어당겼는데, 우물 위 에 가로놓인 지렛대 같았다. 갈라진 끝이 땅에 닿았고, 조 처녀는 대나무 끝을 받아 잡았다. 원공이 대나무의 밑 부분 을 쥐고 조 처녀를 찌르자, 조 처녀는 막대기로 원공을 공격 했다. 그러자 원공은 나무 위로 날아올랐고, 흰 원숭이로 변 했다.

越王問范蠡手劍之術, 蠡曰: “臣聞趙有處女, 國人稱 之, 願王問之.” 於是王乃請女. 女將見王, 道逢老人 自稱袁公. 袁公問女曰: “聞女善爲劍, 願得一觀之.” 女曰: “妾不敢有所隱也, 惟公所試.” 公即挽林杪之

7) 원공(袁公): 전설 속에 전하는 검술의 달인인 백원옹(白猿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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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 似桔槔8), 末析地9), 女接取其末. 公操其本而刺 女10); 女因舉杖擊之, 公即飛上樹化爲白猿.

8) 길고(桔槔): 두레박틀, 우물 위에 물을 긷는 데 용이하도록 가로로 걸쳐 놓 은 지렛대 장치. 9) 말석지(末析地): 원전에는 “갈라진 끝이 땅에 떨어져 있는 것(末析墮地)” 으로 되어 있다. 10) 공조기본이자녀(公操其本而刺女): 원전에는 공조기본이자녀(公操其本 而刺女) 다음에 “조 처녀도 응대해 원공을 찔러 들어갔고, 세 번을 찔러 들

어갔다(處女應卽入之, 三入)”가 첨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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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국왕(扶餘國王)11)

수(隋) 양제(煬帝)12)가 강도(江都)13)로 행차했을 때, 사공 (司空) 양소(楊素)14)에게 명해서 서경(西京)을 지키게 했 다. 양소는 귀하게만 자랐고, 또 세상이 어지러운 시기였기 에 천하에서 권세가 크고 명망이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만 한 사람은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사치와 호화로움 을 마음껏 누렸고, 예법도 다른 신하들과 달리했다. 매번 공 경대부들과 말할 때나, 빈객들이 알현하러 올 때도 언제나 의자에 걸터앉은 채로 만났으며, 미녀의 부축을 받으며 나 왔다. 시녀들을 나란히 세워 놓는 것은 자못 황제의 위엄을 넘어설 정도였고, 말년에는 더욱 심해졌다. 게다가 자신이 맡은 책임을 알고, 위난에 빠진 나라를 구할 마음도 없었다.

11) 이 글은 두광정(杜光庭)의 <규염객전(虯髥客傳)>에 전한다. 배형(裴 鉶)의 ≪전기(傳奇)≫에 수록되어 있으며, 일부에서는 배형의 작품이라

고도 한다. ≪태평광기(太平廣記)≫에도 전한다. 12) 양제(煬帝, 569~618): 양광(煬廣), 604~618년 재위. 13) 강도(江都): 지금의 양주시(揚州市). 14) 양소(楊素, ?~606): 자는 처도(處道), 홍농화양[農華陽, 지금의 섬서성(陝 西省)] 사람. 양제 재위 시 태자태사(太子太師), 사도(司徒) 등을 역임했

고, 초국공(楚國公)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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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염객이(虯髥客二) “부심가최, 비공세계(負心可嘬, 非公世界)”는 “배신자를 썰어 먹으나, 이 세상은 공의 세상이 아니오”라는 뜻이다. 규염객이 배신자를 처단하며 대업을 도모했지만, 결국 이세민의 등장으로 대업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다른 곳으로 떠나 뜻을 도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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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위공(衛公) 이정(李靖)15)이 평민 복장으로 배알 해 와서 기발한 정책을 진언했는데, 양소는 역시 거만하게 의자에 걸터앉아 만나 보는 것이었다. 이정은 앞으로 나아 가 읍(揖)하고 말했다. “천하가 바야흐로 어지러워져 영웅들이 다투어 봉기하 고 있사옵니다. 공께서는 황실의 중신이시니 반드시 호걸 들을 모으는 것에 마음을 두셔야 하며, 이처럼 거만한 자세 로 앉아 빈객을 만나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러자 양소는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일어서서 이정에 게 사과했다. 그리고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주 즐 거워하며 이정의 대책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물러가게 했다. 이정이 나아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용모가 빼어난 한 기녀가 붉은 먼지떨이를 들고 앞에 서서 공(公)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정이 가려고 하자 먼지떨이를 쥔 기녀는 처마 끝 에 이르러 관리를 불러 말했다. “지금 물러가시는 처사(處士)는 항렬이 몇째이시며, 어 디에 살고 계시는지요?” 관리가 자세하게 대답해 주자, 기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15) 이정(李靖, 571~649): 자는 약사(藥師), 삼원[三原, 지금의 섬서(陝西) 삼 원현(三原縣) 동북 지역] 사람. 명장으로 위국공(衛國公)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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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갔다. 공은 여관으로 돌아왔는데, 그날 밤 오경(五更)16) 초에 홀연히 문을 두드리며 나지막이 소리하는 자가 있었다. 공 이 일어나 물어보니, 자주색 옷을 입고 모자를 쓴 사람이 지 팡이와 자루 하나를 들고 있었다. 공이 물었다. “누구시오?” 그 사람이 대답했다. “소첩은 양씨 댁에서 먼지떨이를 들고 있던 기녀입니 다.” 공은 황급히 그녀를 들어오게 했는데, 옷과 모자를 벗고 나니 18~19세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여인은 화장기 없는 얼굴에 수놓은 옷을 입고서 공에게 절을 했다. 공도 놀라면 서 답례를 했다. 그녀가 말했다. “소첩은 오랫동안 양사공(楊司空)을 모시고 있으면서 세상 사람들을 많이 봐 왔습니다만, 공과 같으신 분은 없었 습니다. 무늬 비단은 홀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니, 높은 나무 에 의지하고 싶어서 이렇게 뛰쳐나와 찾아왔습니다.”

16) 오경(五更): 하룻밤을 다섯으로 나눈 다섯째 시각으로, 새벽 3시부터 5시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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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말했다. “양사공은 경사(京師)에서 권세가 대단한데, 어찌할 것 이오?” 그녀는 대답했다. “그분은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기에 두려워할 것이 못 됩니다. 그 집의 기녀들도 그가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떠난 자도 많습니다. 양사공 또한 찾으려 쫓지도 않았습니 다. 저는 이미 상세하게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아무쪼록 물 리치지 말아 주십시오.” 그녀의 성을 물어보았다. “장(張) 씨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형제간 항렬을 물었다. “첫째입니다.” 공이 그녀의 피부라든지 행동거지와 말투, 그리고 기질 을 살펴보니 진정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 같았다. 공은 뜻하 지 않게 그녀를 얻게 되었는데, 기뻐하면서도 두려움 또한 따랐다. 짧은 순간 수만 가지의 걱정으로 불안해했다. 더군 다나 집의 동정을 살피는 자들의 발걸음이 그치지도 않는 상황이었다. 며칠 후, 과연 기녀의 행방을 찾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지 만, 또한 엄중하지는 않은 듯했다. 그래서 그녀가 남장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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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해 말을 타고 대문을 열고 나와 길을 나섰다. 태원(太原)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영석(靈石)17)의 객점 에 묵게 되었다. 화로를 설치해 놓고, 고기를 삶는데, 막 익 고 있었다. 장 씨는 머리가 길어서 땅까지 닿았는데, 침대 앞에 서서 빗질을 했다. 공은 말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한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체격은 보통이었고, 붉은 수염이 용의 수염처럼 휘어져 있었고, 다리를 저는 나귀를 타고 왔다. 와서는 가죽 배낭을 앞에 내던지고는 베개를 가 져다 비스듬히 기대고 누워 장 씨가 머리 빗고 있는 것을 보 았다. 공은 매우 화가 났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고, 친근하게 말만 손질해 주는 척했다. 장 씨는 그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한쪽 손을 몸으로 가리고 공에게 흔들어 보이며 화내지 말라고 했다. 그러고는 급히 머리를 다 빗고 복장을 단정히 하고 나서 나 그네에게 다가가 성씨를 물어보았다. 누워 있던 나그네가 대답했다. “장 씨요.” 기녀가 대답해 말했다. 17) 영석(靈石): 현(縣) 이름으로 수나라 시기에는 서하군(西河郡)에 속했는 데,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 서남쪽이다. 장안(長安)에서 태 원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지나는 길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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