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이_맛보기

Page 1

이 아이



제1장



젊은 여자와 젊은 남자. 여자는 임신 중이다(아마도 8개월 정도).

임신한 여자 이제는 거울을 쳐다볼 수 있을 것 같아/ 매일 아

침 일어날 힘이 생길 거야/ 드디어 내 인생을 들어 올 릴 힘이 생길 거야/ 이 아이는 내게 힘을 줄 거야/ 내 가 누군지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 줄 거야/ 그 사람들 한테 내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 라는 걸 보여 줄 거야/ 우리 부모한테 내가 그들이 생 각하고 있는 그런 딸이 아니라는 걸 보여 줄 거야/ 엄 마가 날 믿어 주지 않았던 게 잘못이었다는 걸 보여 줄 거야/ 내 아이는 내 아이가 되는 걸 자랑스러워할 거야/ 내 아이는 행복할 거야/ 보통 애들보다 더 행 복한 아이가 될 거야/ 얘는 부족한 게 없을 거야/ 원 하는 걸 가지려고 엄마한테 떼쓸 필요가 없을 거야/ 요구할 필요조차 없을 거야, 필요한 건 다 가지게 될 테니까/ 얘는 꿈꾸는 걸 모두 가지게 될 거야/ 난 내 아이가 슬프게 놔두지 않을 거니까/ 내 아이는 “그게 얼만지 알긴 알아?!” 하고 늘 이런 식으로 대답하는 그런 엄마를 두지 않을 거야/ 내 아이는 귀여움을 많

5


이 받게 될 거야/ 다른 애들은 내 아이가 얼마나 귀여 움을 받는지 보고는 질투하게 될 거야/ 난 내 아이를 때리지 않을 거야/ 내가 내 아이한테 때리려고 손을 드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얘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되면 난 얘한테 해야 하는 일이 뭔지 차근차근 설명해 줄 거야/ 인내심을 가질 거야/ 얘를 위해 달 라질 거야/ 옛날처럼 포기하고 살지 않을 거야/ 내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더 나은 삶을 꿈꿀 수가 없었 어/ 괜찮은 월급을 주는 괜찮은 직업을 찾을 거야, 완벽한 엄마가 되기 위해서/ 일을 찾는 게 아무리 힘 들어도 아침 일찍 일어나 사장들한테 직접 이력서를 들고 갈 거야/ 끝까지 할 거야/ 더 이상 머리를 숙이 지 않을 거야/ 내가 원하는 걸 줄 때까지 오히려 머리 를 치켜들 거야/ 더 이상 어깨가 처지지 않게 할 거야 / 지금 내겐 더 이상 그대로만 있을 수 없는 좋은 이 유가 있으니까/ 내 아이를 위해 난 남들이 놀랄 만한 특별한 사람이 될 거야/ 내 아이가 태어나면 난 나 자 신을 가꿀 거야/ 외모도 가꿀 거고/ 이제 더 이상 포 기하고 있지 않을 거야/ 멋진 여자가 될 거야/ 얘가 창피해하지 않도록/ 얘가 엄마를 창피해하지 않도록 / 얘가 사내아이라면 자기 엄마를 사랑하도록/ 다른

6


애들, 학교 친구들이 부러워하도록/ 멋지고 여성스 럽고 모성애가 있는 엄마를 말이야/ 난 아이가 동정 심을 갖는 그런 엄마는 되지 않을 거야/ 난 이제 이유 없이 울지 않을 거야/ 이제 불행하지도/ 우울증에 빠 지지도 않을 거야/ 텔레비전이나 켜 놓고 소파에 앉 아 담배나 연신 피워 대는 언제나 우울해 보이는 그 런 엄마가 되지 않을 거야/ 어느 날 저녁 엄마를 우리 집에 초대할 거야, 괜찮은 아파트에 살게 되고 그 아 파트가 나무랄 데 없이 정리되었을 때/ 엄마를 집에 초대할 거야, 엄마가 나에 대해 얼마나 잘못 생각했 는지 깨닫게 해 주기 위해/ 아빠는 전혀 관심도 없겠 지만 아빠도 초대할 거야/ 그래, 아빠를 초대할 거야, 아빠가 온다면 엄마한테 더 의미 있는 거니까/ 엄마 는 내가 누굴 닮았는지 알게 될 거야/ 엄마는 내가 뭔 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될 거야/ 엄마가 그걸 모를 리가 없지/ 그래서 엄마는 속으로 참을 수 가 없을 거야/ 엄마는 내가 뭔가 할 수 있다는 걸 보 고는 참을 수 없을 거야/ 내가 내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다는 걸 말이야/ 엄마는 자기가 아이들한테 한 것 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다는 걸 보고는 참을 수가 없 을 거야/ 엄마는 내 아이가 행복한 걸 보고는 참을 수

7


가 없을 거야, 우린 불행했으니까/ 그래서 엄마는 내 가 행복하고 알아서 잘 헤쳐 나가고 있고 이제 더 이 상 엄마가 필요치 않다는 걸 보고는 참을 수가 없을 거야/ 엄마는 참을 수가 없을 거야, 그러면 난 정말 행복할 거야/ 난 행복할 거야/ 정말 행복할 거야/ 난 정말 행복할 거고 내 아이도 행복할 거야/ 얘는 행복 할 거야/ 얘는 꼭 행복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8


제2장



아빠와 다섯 살 난 어린 딸.

아빠

더 많이 컸구나…. 지난번보다.

(딸애의 침묵)

그럼 안 컸단 말이니? 딸

몰라요.

아빠

컸지, 이제 정말 큰 애가 됐구나.

난 내가 언제 크는지 안 보여요.

아빠

그래, 근데 아빤 보여.

그럼 당신도 컸어요?

(아빠의 침묵)

아빠

당신? 누구한테 말하는 거니? (딸애의 침묵) 당신? 지금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

누구냐 하면…. 내가 누구한테 말하는지 잘 알잖아 요. 여기 다른 사람 있어요? 여기 다른 사람 없잖아 요!

11


아빠

네가 지금 나한테 “당신”이라고 했어?

“당신”이라고 안 그랬어요!

아빠

난 네 아빠야, 근데 아빠한테 당신이라고 그러니?

“당신”이라고 안 했어요…. 어쨌든!

아빠

당신이라니…. 왜?

몰라요…. 그냥 당신이 컸는지 묻고 싶었어요.

아빠

누가 너더러 나한테 당신이라고 하라고 그랬어?

아니요.

아빠

그전엔 당신이라고 안 했는데…. 넌 내가 너한테 당 신이라고 하면 좋겠어?

상관없어요.

아빠

말도 안 돼, 아빠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아니야. (딸애의 침묵) 그건 네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야, 넌 내게 마치 모르는 사람한테 하듯 말하잖아, 아 냐?

몰라요.

아빠

이제 아빠 안 보고 싶어?

몰라요.

아빠

몰라?

네.

아빠

근데 애들에겐 아빠가 필요하단다, 알겠니? 모든 사

12


람한테 다 그런 거란다, 이제 우리가 서로 안 봐도 슬 프지 않겠어? 딸

네.

아빠

그래? 그건 왜?

몰라요.

아빠

이제 날 안 봐도 슬프지 않을 거라고?

네, 그럴 것 같아요….

아빠

그럼 이제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보지 말지 뭐, 그럴 필요 없지 뭐….

좋아요.

아빠

좋다고?! 이게 정말 네가 원하는 거니?

난 상관없어요.

아빠

네가 좋다면 그럼 우리 보지 말지 뭐…. 그럼 오늘이 우리가 보는 마지막 날이다…. 네가 이제 날 보고 싶 지 않다면 말이야.

좋아요.

아빠

너 아무렇지도 않아?

네, 아직 엄마가 있으니까…. 나랑 같은 집에 사니 까.

아빠

엄마만 있으면 돼?

네.

13


아빠

우리가 이제 다시 못 보게 되면…. 너 우리가 오늘 마지막으로 본다는 거 알기는 해?

네.

아빠

슬프지 않아?

네.

(침묵)

아빠

그럼…. 그럼 집에 데려다줄까?

좋아요.

아빠

지금 바로? 그러는 게 좋겠어?

좋겠어요.

아빠

그럼 나 윗도리 좀 입을게.

나도.

아빠

그래…. 좀 슬프지 않아?

아니요.

아빠

있잖아 이제 우리 못 보는 거야.

네, 알아요.

아빠

그게 다야?

몰라요…. 괜찮아요.

아빠

난 슬픈데…. 나한테 어느 날 자기 아빠를 사랑하지

14


않는 딸이 생길 줄은 전혀 상상 못했거든….

(침묵)

그럼 갈까? 딸

네, 벌써 세 번이나 그 말 했어요.

아빠

확실하게 하려는 거야.

뭘 확실히 해요?

아빠

몰라.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넌 내가 슬픈 게 안 보여? 딸

네, 안 보여요. 난 슬픈 것도 싫고 우는 것도 싫어요.

(침묵)

아빠

네 엄마가 너무 빨리 돌아왔다고 놀라겠다.

아니 엄만 기뻐할 거예요, 아주 기뻐할 거예요, 엄만 내가 집에 없으면 안 좋아하거든요….

15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