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나탄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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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 나탄

들어오라, 여기도 신들은 계시나니. 1)- -겔리우스 *

* 2세기 후반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문필가.



나오는 사람들

살라딘 술탄 시타 살라딘의 누이동생 나탄 예루살렘의 유대인 부호 레하 나탄의 양녀 다야 기독교인, 나탄의 집에 사는 레하의 보모, 말동무 젊은 신전 기사 알하피1) 회교 탁발승 예루살렘 대주교 수사 살라딘의 장군, 근위병들

무대: 예루살렘

1) 맨발이라는 뜻의 아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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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막



제1장

무대: 나탄의 집 현관 여행에서 돌아오는 나탄, 그를 맞이하는 다야

다야

주인 나리가 오셨네. 나리, 마침내 돌아오셨군요. 하 느님, 감사합니다.

나탄

그래, 보모. 고마운 일이야. 그런데 어째서 마침내라 고 하는 거지? 내가 이보다 빨리 돌아오려고 했고 또 그럴 수 있었단 말인가? 예루살렘에서 바빌론까지는 이곳저곳 들를 데가 많아서 족히 200마일이나 되지. 그리고 빚의 회수란 게 눈에 띄게 진척되거나 술술 풀리는 일도 아니고.

다야

아이고, 나리! 그사이 여기 계셨더라면 얼마나 험한 꼴을 당하셨을지 모릅니다. 나리 댁에서는….

나탄

화재가 났었다지. 그 얘기는 이미 들었네. 손실이 내 가 이미 들은 것뿐이라면 좋으련만.

다야

하마터면 몽땅 타 버릴 뻔했어요.

나탄

그랬으면 새집을 지으면 그만이지. 한결 안락한 걸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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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야

그렇긴 하지만 아가씨가 하마터면 불에 타 죽을 뻔 했어요.

나탄

불에 타 죽다니? 누가? 우리 레하가? 그 애가? 그 얘 기는 듣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집 따윈 필요 없지. 하마터면 불타 죽을 뻔했다고? 정말 그런 모양이군. 어서 말해 보게. 제발 나를 더 괴롭히지 말고 차라리 죽여 주게. 그래, 불타 죽은 게야.

다야

만약 그리되었다면 제 입에서 그 얘기를 들으시겠어 요?

나탄

그렇다면 왜 이리 놀라게 하나? 아이고, 레하, 내 레 하야!

다야

나리의 레하라고요?

나탄

언젠가 그 애를 내 딸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된다면 큰일이지.

다야

소유하신 것이면 무엇이든 그토록 당당하게 나리 것 이라고 하시나요?

나탄

그보다 당당하게 내 것이라 한 건 없네. 그 애 말고 내가 가진 건 모두 자연과 행운이 베풀어 준 거야. 그 애만은 덕으로 얻었지.

다야

나리의 선심 때문에 제가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러 야 하는지 모릅니다. 선심을 그런 의도로 행해도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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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이라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탄

그런 의도라니? 어떤 의도 말인가?

다야

제 양심은….

나탄

내 얘기부터 먼저 들어 보게….

다야

제 양심 말인데요….

나탄

자네 주려고 바빌론에서 고운 옷감을 사 왔다네. 아 주 화려해.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거야. 레하에게 주 려고 사 온 것도 그보다 낫지 않아.

다야

제 양심을 더는 달랠 길 없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마당에 그런 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나탄

그리고 자네 주려고 다마스쿠스에서 팔찌며 귀걸이, 반지와 목걸이를 고르고 골라 사 왔는데 자네 마음 에 드는지 보고 싶네.

다야

나리답군요. 나리는 그저 선물하고 베풀어 주실 수 있기만 바라십니다.

나탄

내가 흔쾌히 주는 것인 만큼 기꺼이 받기나 하게. 입 은 다물고.

다야

입 다물라고요? 나리가 바로 정직, 아량의 화신이란 걸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하지만….

나탄

하지만 내가 한낱 유대인에 불과하다는 말이겠지.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지,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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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야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나리께서 더 잘 아십니 다.

나탄

그렇다면 잠자코 있게.

다야

입을 다물지요. 그러다가 하느님 앞에 벌 받아야 할 일이 생겨도 저로서는 막지도 못하고 바꾸어 놓지도 못하니, 그 벌은 나리께서 받으셔야 합니다.

나탄

내가 받지. 한데 아이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보모, 날 속이는 건 아니겠지? 내가 돌아온 걸 아이가 알기 나 하나?

다야

그건 제가 여쭤 보고 싶은 일인데요. 아가씨는 아직 도 겁에 질려 온몸이 떨리는가 봐요. 아직도 모든 게 불로 보이는 환상에 시달리는 모양이에요. 아가씨의 정신은 잠잘 땐 깨어 있고 깨어 있을 땐 잠들어 있는 것 같아요. 어떤 때는 짐승보다 못한 것 같기도 하다 가 또 어떤 때는 천사보다 착해 보이기도 해요.

나탄

불쌍한 것! 우리 인간이란 대체 뭔가!

다야

아가씨는 오늘 아침 오랫동안 눈을 감고 누워 있었 어요. 죽은 듯이.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서 외쳤어요. “들어 봐. 들어 봐. 아버님이 타신 낙타가 온다. 아버 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 그러다가 다시 눈이 감겼어요. 괴고 있던 팔이 빠지면서 머리가 베개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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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떨어졌고요. 그래서 제가 대문 밖으로 뛰어나가 봤더니, 이럴 수가! 정말 나리께서 돌아오시지 않겠 어요.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아가씨의 마음은 줄곧 나리한테만 가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분한테. 나탄

그분이라니? 누구 말인가?

다야

아가씨를 불 속에서 구해 내신 분이지요.

나탄

그게 누군가? 누구냐니까? 그분 어디 계시나? 우리 레하를 구해 준 사람이 대체 누구야? 어떤 사람이야?

다야

젊은 신전 기사로 며칠 전 이곳에 포로로 끌려왔는 데 살라딘 술탄이 사면해 주었답니다.

나탄

뭐라고? 술탄이 목숨을 살려 준 신전 기사라고? 그보 다 작은 기적으로는 레하를 구할 수 없었단 말인가? 신이시여!

다야

뜻밖에 얻은 목숨을 과감하게 내던진 그분이 아니었 다면 아가씨는 끝장이었습니다.

나탄

그 귀인은 어디 계신가? 어디 계시냐니까? 엎드려 절 하게 그분한테 데려다주게. 급한 대로 우선 내가 맡 겨 놓은 돈과 값진 보화를 드렸겠지? 다 드렸는가? 더, 훨씬 더 많이 드리겠다고 약속했겠지?

다야

저희가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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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탄

안 드렸다고? 안 드렸어?

다야

그분은 홀연히 나타나셨는데 어디서 오셨는지 아무 도 모릅니다. 사라졌을 때도 어디로 가셨는지 아무 도 몰라요. 집 구조를 전혀 모른 채 귀에 들리는 소리 를 방향타 삼아 망토를 펼쳐 몸을 가리고 뛰어 들어 갔어요. 살려 달라고 외치는 소리를 향해 불길과 연 기를 헤치고 용감하게 돌진했습니다. 저희가 이제 그분마저 가망 없다고 생각할 무렵 연기와 불길 속 에서 홀연히 저희 앞에 나타났어요. 억센 팔에 아가 씨를 안고서요. 저희가 고마운 나머지 지른 환성에 도 냉정하게 아랑곳하지 않고 아가씨를 내려놓더니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고 말았답니다.

나탄

바라건대 영영 사라진 건 아니겠지.

다야

그 뒤 며칠은 저쪽 종려나무 아래를 거니는 모습을 보았어요. 저는 기쁜 마음에 다가가 고맙다는 인사 를 전하고 애걸복걸 간청했습니다. 딱 한 번만이라 도 좋으니 발밑에 엎드려 감사의 눈물을 쏟기 전에 는 마음이 편해질 수 없는 착한 아가씨를 만나 달라 고요.

나탄

그런데?

다야

허사였어요. 그분은 저희들의 간청을 들은 척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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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저한테는 심한 말까지 했어 요. 나탄

그래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는 건가?

다야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매일 찾아가서 간청했고 번번이 조롱당했어요. 제가 그 사람한테 얼마나 수 모를 당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무엇인들 기꺼이 감 수하지 않았겠습니까! 한데 오래전부터 그분은 예수 님의 무덤에 그늘을 드리우는 종려나무를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디 사는지 아무도 몰라요. 너무 놀라셨나요? 무얼 그리 골똘히 생각하십니까?

나탄

그런 일이 레하 같은 아이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줄 지 가늠해 보고 있네. 높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한테 그렇게 거부당하고, 무참하게 거부 당했는데도 몹시 끌리고 있어. 그러면 틀림없이 가 슴과 머리가 오래도록 싸우겠지. 인간 혐오가 이기 든지 우울증이 이기든지 결판이 날 때까지 싸우겠 지. 어느 쪽도 이기지 못할 때도 종종 있어. 그럴 경 우 환상이 싸움에 끼어들어 몽상가를 만들어 내지. 그러면 머리가 가슴 역할을 해야 할 때도 있고 가슴 이 머리 역할을 해야 할 때도 있어. 좋지 않은 교환이 지. 내가 레하를 모르지 않는다면 레하의 경우는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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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일 거야. 열광에 빠져 있겠어. 다야

하지만 아주 신실하고 귀여워요.

나탄

그래도 열광에 빠져 있는 거야.

다야

나리 말씀대로 망상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특히 한 가지 망상은 아가씨에겐 아주 소중하답니다. 그것은 그 신전 기사가 이승의 기사도, 사람의 아들도 아니 라는 겁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의 여린 마음을 지켜 준다고 믿어 온 천사 한 분이 평소에는 구름 속에 모 습을 감추고 있다가, 바로 그때의 불 속에서도 구름 에 감싸인 채 아가씨 주위를 맴돌다가 홀연히 신전 기사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겁니다. 웃지 마세요. 어찌 알겠습니까? 적어도 이 한 가지 망상만큼은 그 냥 웃어넘겨 주세요. 그런 망상 속에서는 유대인, 기 독교인, 모슬렘은 하나가 됩니다. 그러니 달콤한 망 상이지요.

나탄

내게도 그리 달콤할까? 가 보게, 야무진 보모. 가서 아이가 뭘 하고 있는지, 나랑 얘기할 수 있는 형편인 지 보고 오게. 그런 연후에 내가 그 야생적이고 변덕 스러운 수호천사를 찾아보겠어. 그 천사가 아직 이 지상에서 우리 인간들 사이에 머물며 버릇없는 기사 생활을 영위한다면 반드시 찾아서 데려오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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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야

꿈도 야무지시군요.

나탄

그러면 그 달콤한 망상은 한층 더 달콤한 진실에 자 리를 내주어야 해. 내 말을 믿게. 인간에게는 언제나 천사보다 인간이 더 좋은 법. 그러니 그 애의 천사에 대한 망상을 고쳐 주었다고 자네가 나한테 화를 내 진 않겠지?

다야

이렇게 좋으신 분이 왜 이리 짓궂으신지 모르겠네 요. 그럼 가 보겠어요. 아니, 저기 아가씨가 나오네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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