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십리
화설(話說)1), 중국 명나라 성덕 연간(年間)2)에 변경(邊境) 대동부 연화방3)에 한 재상이 있으니 성(姓)은 장이요, 이름 은 연수였다. 대대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어려서 급제하 여 벼슬이 좌승상(左丞相)에 이르렀고, 사람됨이 정직하여 명망(名望)이 조야(朝野)4)에 진동하고 나라 사람들이 공경 하였다. 공(公)이 항상 예부상서(禮部尙書)5) 왕성일과 함 께 진충갈력(盡忠竭力)6)으로 나라를 도와 천하가 태평하 고 모든 백성이 격양가(擊壤歌)7)를 불렀다. 승상이 일찍이 다른 자녀가 없다가 늦게야 다만 한 아들
1) 화설(話說): 고전소설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때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말. 2) 성덕 연간(年間) : 연간은 ‘어느 왕이 왕위에 있는 동안’을 말하며, 그 앞의 ‘성덕’은 ‘성덕’이라는 연호(年號)를 말한다. 연호란 왕이 즉위한 후 해의 차 례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이름인데, 중국 명나라에 ‘성덕’이라는 연호 는 존재하지 않는다. 명나라에서는 선종(宣宗, 재위 1425∼1435) 때에 ‘선 덕(宣德)’이라는 연호를 사용했고, 청나라에서는 태종(太宗, 재위 1626∼ 1643) 때 ‘숭덕(崇德, 이 연호는 1636∼1643년 동안 사용함)’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바 있다. 3) 대동부 연화방: ‘부(府)’나 ‘방(坊)’은 지방행정 단위. ‘대동’이라는 부(府)에 속한 ‘연화’라는 방(坊)을 뜻함. 4) 조야(朝野): 조정과 민간을 통틀어 이르는 말. 5) 예부상서(禮部尙書) : 예부의 장관. 6) 진충갈력(盡忠竭力) : 충성을 다하고 있는 힘을 다 바침. 7) 격양가(擊壤歌): 풍년이 들어 농부가 태평한 세월을 즐기는 노래. 중국의 요임금 때에, 태평한 생활을 즐거워해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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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얻었는데 아이가 비록 핏덩이를 면하지 못하였으나 골격 (骨格)이 심히 비상하였다. 승상 부부가 이름을 경문이라 하고, 자(字)를 천보라 하여 장중보옥(掌中寶玉)8)같이 몹 시 사랑하였다. 슬프다, 경문이 강보를 떠나지 못하여9) 모 부인이 우연히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니 승상이 경문을 더 욱 불쌍히 여겨 사랑하는 마음이 일층 더하였다. 세월이 여류(如流)하여 어느덧 경문의 나이 십 세를 지 나니 얼굴은 관옥(冠玉)10) 같고 도량(度量)은 푸른 바다와 같아 글을 배우면 문일지십(聞一知十)11)하며, 이두(李 杜)12)의 문장(文章)과 왕희지(王羲之)13)의 필법(筆法)을
겸하였다. 승상이 크게 기특히 여겨 요조숙녀(窈窕淑女)14)
8) 장중보옥(掌中寶玉): 손안에 있는 보배로운 구슬이란 뜻으로, ‘귀하고 보 배롭게 여기는 존재’를 비유적으로 이르던 말. 9) 강보를 떠나지 못하여: ‘아이가 걷지도 못할 정도로 어릴 때’를 비유적으로 이르던 말. ‘강보’는 어린아이를 눕히거나 싸거나 업을 때 사용하는 포대기 를 말함. 10) 관옥(冠玉):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을 비유적으로 이르던 말. 11) 문일지십(聞一知十):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뜻으로 매우 총명함을 이르는 말. 12) 이두(李杜):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13) 왕희지(王羲之): 중국 진(晉)나라의 서예가(307~365). 붓글씨를 예술적 완성의 영역까지 끌어올려 서성(書聖)이라고 부름. 14) 요조숙녀(窈窕淑女): 말과 행동에 품위가 있으며 얌전하고 정숙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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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구하여 원앙의 쌍유(雙遊)함15)을 보고자 하나 세상에 그 와 같은 짝이 없을까 항상 근심하였다. 하루는 공(公)이 한가하여 춘경(春景)을 구경하려고 대 지팡이를 짚고 후원에 올라 나무 사이를 따라 거닐며 좌우 를 바라보니, 어떠한 아이 둘이 나무를 베다가 성(城) 아래 에 앉아 졸고 있었다. 공이 한참 동안 유심히 바라보다가 이 상히 여겨 시자(侍者)16)로 하여금 불러다 보니, 두 아이가 다 십여 세쯤 되어 보이고 의복은 남루하여 살을 못 가리지 만 은은한 골격이 하향(遐鄕)17) 천인(賤人)의 자식은 아니 었다. 공이 심히 애석히 여겨 가까이 오게 하여 앉히고 각자 에게 그 내력을 자세히 물으니, 한 아이 이름은 윤광옥으로 그전 한림학사(翰林學士)18) 윤여성의 아들이고, 한 아이는 이름이 진평중으로 그전 어사중승(御使中丞)19) 진유제의 아들이었다. 두 아이가 모두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정처 없이 떠돌아
15) 원앙의 쌍유(雙遊)함: 부부가 함께 즐겁게 사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이르 던 말. 16) 시자(侍者): 귀한 사람을 모시고 시중드는 사람. 17) 하향(遐鄕):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 18) 한림학사(翰林學士): 중국에서 황제의 조서(詔書)를 맡아 짓던 한림원 (翰林院)의 벼슬. 19) 어사중승(御使中丞): 어사대에 속한 벼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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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며 빌어먹다가 나이 십여 세가 되어 남의 고용(雇傭)20) 이 되어 나무 베기와 우마 치기21)로 살고 있었다. 승상이 한 편으로는 놀라며, 한편으로 생각하니 두 아이가 모두 예전 에 친밀히 지내던 벗의 아들이었다. 윤·진 두 사람이 이전 에 소인(小人)의 참소(讒訴)22)를 입어 고향으로 돌아간 후 지금까지 십여 년을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 못하다가, 오 늘 그 두 사람의 아들을 만나 보니 옛일이 생각나서 가련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슬피 한숨을 지어 탄식하고 두 아이 를 데리고 부중(府中)23)으로 돌아와 친아들같이 사랑하며 경문과 함께 학업에 힘쓰게 하였다. 두 아이의 영민총예(英 敏聰叡)24)함이 비록 경문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또한
드문 재주여서 승상이 더욱 사랑하였다. 그 아이들의 나이 가 경문보다 한두 살이 많은 까닭에 장성(長成)하기를 기다 려 각각 어진 가문의 숙녀를 얻어 결혼시키고, 그들에게 음 식을 사계절로 공급하기를 극진히 해 주니 두 사람이 그 은 혜를 뼈에 새겨 승상을 부모같이 섬기고 경문을 골육형제같
20) 고용(雇傭): 삯을 받고 남의 일을 해 줌. 21) 우마 치기: 소나 말을 돌보아 주는 일. 22) 참소(讒訴): 남을 헐뜯어서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윗사람에게 고해바침. 23) 부중(府中) : 높은 벼슬아치의 집안. 여기서는 자신의 집을 의미함. 24) 영민총예(英敏聰叡) : 영특하고 민첩하며 총명하고 지혜가 뛰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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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랑하였다. 때는 성종25) 황제 즉위 삼 년에 천하가 태평하고 감로 (甘露)26)가 내리니, 상(上)께서 요순(堯舜)27)의 덕화(德 化)를 베풀어 과거 시험을 보이시니, 사방에서 선비가 구름
모이듯 한 가운데 장경문 삼 인28)이 또한 장내(場內)에 들 어가 글제29)를 보고 일필휘지(一筆揮之)30)하여 제일 먼저 바치고 결과를 기다렸다. 이윽고 전두관(殿頭官)31)이 이름 을 부르는데 장원(壯元)에 장경문이고 나이 십삼 세요, 윤·진 두 사람도 또한 차례로 참방(參榜)32)하여 상(上)께 서 세 사람을 인견(引見)33)하여 무수히 진퇴시키신34) 후,
25) 성종: 명나라 황제 중에 성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제5대 황제가 ‘선종 (宣宗)’이며 연호가 ‘선덕(宣德)’이다. 26) 감로(甘露): 천하가 태평할 때 내린다고 하는 단 이슬. 27) 요순(堯舜): 고대 중국의 요임금과 순임금. 덕으로 천하를 다스린 임금으 로 평가받음. 28) 장경문 삼 인: 장경문, 윤광옥, 진평중 세 사람을 뜻함. 29) 글제: 글의 제목. 30) 일필휘지(一筆揮之): 글씨를 단숨에 죽 내리씀. 31) 전두관(殿頭官): 어떤 사람인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내용으로 판단할 때 건물 앞에 나와서 여러 사람들에게 전달 사항을 알리는 사람으로 추정된다. 32) 참방(參榜): 과거에 급제해 이름이 합격자 명부에 오르던 일. 33) 인견(引見):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불러서 만나 봄. 34) 무수히 진퇴시키신: 임금이 불러 나왔다 들어가기를 수없이 반복함. 즉 임 금이 술을 수차례 하사해 잔을 받기 위해 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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