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원잡기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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筆苑雜記 필원잡기


<지식을만드는지식 수필비평선집>은 인류의 유산으로 남을 만한 작품만을 선정합니다. 오랜 시간 그 작품을 연구한 전문가가 정확한 번역, 전문적인 해설, 풍부한 작가 소개, 친절한 주석을 제공하는 고급 수필비평 선집입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수필비평선집

筆苑雜記 필원잡기 서거정(徐居正) 지음 박홍갑 옮김

대한민국, 서울,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편집자 일러두기 ∙ 이 책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1642년(인조 20)]을 원전으로 삼아 번역한 것입니다. ∙ 고전은 직역을 하면 뜻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있고, 너무 의역에 의존하다 보면 원래의 뜻이 왜곡되는 수가 많습니다. 그래 서 옮긴이는 독자들에게 원전의 느낌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다소 어려운 한자어라도 그대로 두고 주석을 붙여 설명했습니다.


차례

권1 ·······················1 권2 ·······················83

해설 ······················153 지은이에 대해··················161 옮긴이에 대해··················163


○ 충렬공(忠烈公) 구치관(具致寬)은 성품이 엄격하고 공 정하였다. 일찍이 이조판서가 되어 뇌물이나 청탁을 행하 지 아니하였다. 그 전에는 이조판서가 되면 관리를 제수할 적에 으레 친히 선발하는 명부를 잡고 자기 멋대로 행하였 고, 참판 이하는 팔짱만 끼고 옆에서 볼 뿐이었는데, 공이 이를 분하게 여기고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사람을 올리고 내리는 데는 여러 사람 의논을 널리 취하였고, 비록 작고 낮 은 관직이라도 단독으로 추천하지 않았다. 사사로운 은혜 로써 친구를 용서하지 않았으며, 남이 청탁하는 것을 미워 하여 혹 청탁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올릴 것도 올려주지 않았다. 그때 내가 참의가 되어 하루는 정방에 있다가 마침 술이 취하여 잠이 들었는데, 공이 거친 목소리로 “참의는 내 가 인물 등용을 마음대로 행한다 하여 참견하지 않으려 하 는가? 후일 사람을 잘못 쓴 일이 있으면, 참의는 집에 있어 서 알지 못했다고 할 것인가?” 하였다. 일찍이 이름이 알려진 한 문사를 추천하여 대관(臺官)으 로 삼으려 하니, 반발하는 자가 “이 사람은 익살이 심하니 불가하다” 하였다. 공이 “만약 그러면 한 무제는 어찌 동방 삭(東方朔)46)을 취하여 썼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대관으

46) 동방삭: 한 무제 때 문인으로,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을 상주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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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추천하였다. 또, 한 문사가 외방 교관으로 있으면서 10년 동안 승진하지 못하였다. 공이 현감으로 추천하려 하니, 반 대하는 이가 “이 사람은 실정에 어두워서 불가하다” 하였다. 공이 “천도도 10년이면 변하는 법인데, 어찌 사람을 이와 같이 오래도록 굽혀둘 것인가” 하며 마침내 현감으로 천거 하였는데, 과연 그가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공이 사람을 쓰 고 버릴 적에 하나같이 공정하게 했음이 이 같았다.

○ 문정공(文靖公) 최항(崔恒)은 성품이 겸손하고 단정 간 결하여 겉치레를 싫어했다. 평생토록 남과 말할 적에는 먼 저 양보하고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으며, 또 별다른 이론을 세우지도 않았다. 글을 짓는 데도 옛 사람 규범을 따르지 아 니하고, 스스로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 크게 펼쳐놓으니, 웅 장하고 풍부함이 큰 물결 같아 뛰고 넘치고 솟구치고 굽이 치듯 형세가 그치지 않았다. 더욱이 변려문(騈驪文)47)에 공교하여 무릇 조정에서 중국에 올리는 표문과 전문이 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를 자조한 문장 ≪객난(客難)≫과 ≪비유선생지론 (非有先生之論)≫을 남겼다. 조정 미관으로 있으면서 재담과 농담을 잘 하였으며 임금 앞에서 괴이한 행동을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47) 변려문: 중국 고대의 한문체(漢文體)로, 문장이 4자와 6자를 기본으로 한 대구(對句)로 이루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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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에서 나왔다. 중국 사람이 매번 우리나라 표문이 정 밀하고 적절하다고 칭찬한 것은 모두 공이 지은 것이다. 평 상시에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이라도 의관을 정제하고 종 일토록 단정히 앉아 태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빠른 말이나 급한 표정을 하지도 않았으니, 천성이 그러하였다.

○ 세조께서 일찍이 우리나라 학자들은 어음(語音)이 바르 지 못하고 구두가 분명치 못하여, 비록 선유인 권근(權 近)·정몽주(鄭夢周) 등의 구결(口訣)이 있지만, 아직도

오류가 많은데 진부한 세속 선비들이 그대로 이어받음을 염 려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노숙한 신하와 경험 있는 유학 자에게 명하여 사서오경을 주어 고금의 책을 고증하여 구결 을 정하였고, 또 글하는 선비를 모아서 같고 다름을 강론하 게 하고 임금이 직접 결정하였다. 이때 문정공 최항이 항상 좌우에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정밀하게 분석하여 민첩하게 응대하니, 상감이 듣고는 싫증내는 일이 없었다. 좌우에 있 는 신하들에게, “영성(寧城)48)은 참으로 천재다” 하였다.

48) 영성: 문정공(文靖公) 최항(崔恒)을 이름. 최항이 영성부원군으로 봉해 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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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익평(權翼平)54)이 경오년(1450)에 향시·회시·전시 세 시험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였는데, 군수 김수광(金秀 光)은 향시·회시·전시 세 시험에 모두 꼴찌로 합격하였

다. 당시 사람들이 웃으며, “삼장(三場) 장원은 고금을 통하 여 흔히 있는 일이나, 삼장의 꼴찌는 천하에 정녕코 없던 일 이다” 하였다.

○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가 기미년(1439) 과거 에서 3등으로 합격하고 정묘년(1447) 복시에서는 4등으로 합격하였는데, 나 또한 갑자년(1444) 과거에 3등으로, 정축 년(1457) 복시에서 4등으로 합격하였다. 내가 고령군을 알 현하니 웃으며, “자네 같은 재주로 어찌하여 네 번째가 되었 는가?” 하였다. 내가 “화응(和凝) 이후에 범질(范質)이 있었 으니,55) 김구(金坵) 이전에 어찌 김인경(金仁鏡)이 없겠습 니까?” 하였더니, 고령군이 크게 웃었다. 불초한 나를 감히 화응과 범질에 비교한 것이 아니라 다만 큰소리해 본 데 불 과하다. 옛날 노국공 화응이 13등으로 합격한 일이 있었는 데, 뒤에 공거(貢擧)를 관장하게 되어 노국공 범질에게, “그 54) “익평”은 세조 집권의 공신이었던 권람(權擥)의 시호. 55) 화응은 중국 오대(五代) 때 진(晉)나라 정승을 지낸 사람으로 사람을 알아 보는 식견이 높았던 인물이며, 범질은 그의 제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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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 문장이 마땅히 1등이 되어야 할 것이나 잠시 13등으로 강등시킨 것은 나의 의발(衣鉢)을 전하기 위해서다” 하였 다. 고려 때 정숙공 김인경이 지공거가 되어 김구를 2등으 로 발탁키시고, 노국공의 의발 전한 고사를 들어 말한 적이 있는데, 정숙공 또한 명종 때 2등으로 합격하였기 때문이 다.

○ 세조 말년에 선비를 더욱 중히 여겨 임금이 친히 대책(對 策)56)으로 인재를 선발했다. 최후에 등준시(登俊試)라 하

여 13명을 선발하였는데, 나 서거정도 3등으로 뽑혔다. 세 조가 합격한 신 등을 내전으로 불러, “옛날에 좌주(座主) 문 생(門生)57)의 호칭이 있었는데, 이번 과거는 내가 친히 선 발하였으니 내가 마땅히 은문(恩門)이 되리라. 이 궁전을 은전(恩殿)이라 칭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에 신 등은 엎드려 절하고 사례하였다. 수일 지나 임금과 중전이 사정 전에 앉고, 신 등이 잔 올리기를 한결같이 좌주문생 규례와

56) 대책: 조선조 과거 시험의 하나. 시정(時政)에 대해 제시하고 그에 대한 대 책을 논하게 하였는데, 이때 문제를 써놓은 글이 책(策)이다. 57) 좌주(座主)란 급제한 자가 시험관을 높여 부르던 칭호이고, 문생(門生)은 급제자를 이름. 고려 때부터 좌주문생의 관계가 너무 돈독하게 지속되어 폐해가 나타나자 조선 시대에는 좌주문생 제도를 폐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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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하여 은총이 대단하였으니, 우리 동방에서 전례 없이 거룩한 일이었다.

○ 전후에 명나라 사신으로 온 자는 모두 문장과 절의가 뛰 어난 인물이었으니, 육옹(陸顒)·단목효사(端木孝思)·축 맹헌(祝孟獻) 이하 여러 사람이 모두 그러하다. 내가 직접 본 바로는, 세종 말년에 시강(侍講) 예겸(倪謙)과 급사(給 事) 사마순(司馬恂)이 같이 왔었다. 예겸은 널리 통달하고

융화하였으며 사마순은 성실하고 정직하였는데, 재주와 이 름은 사마씨가 예씨에 미치지 못하였고 조행은 예씨가 사마 씨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 뒤에 이부(吏部) 진순(陳純)과 사정(司正) 이관(李寬)이 잇달아 왔는데, 진씨의 높은 기절 과 품위는 태산과 북두처럼 우러러 보였고 이씨는 풍채와 의표가 준수하였다. 일 처리하는 것은 진씨보다 나을 게 없 으나 모나지 않았으니, 역시 훌륭한 인물이었다. 뒤에 시강(侍講) 진감(陳鑑)과 태상(太常) 고윤(高閏) 이 있었는데, 진씨 문장은 예겸에 버금하였으나 조행은 비 슷했고, 고씨는 문장도 진씨를 따르지 못하거니와 조행은 더욱 떨어졌다. 처음에 진·고씨 두 사신이 압록강을 건넜 는데, 국가에서 선위사를 보내 계절에 맞는 옷을 보냈으나 이들은 받지 않았다. 고윤이 보낸 옷을 받지 않았다는 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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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었는데, 그 내용이 자못 오만했다. 그가 지은 성균관 기문 에 “하늘의 이치가 일찍이 없어지지 않았다” 한 것이 있고, 시에도 “승냥이와 수달도 조상에 제사를 지낼 줄 안다”는 말 이 있다. 양촌(陽村) 권근의 응제시 발문에 “조선에 와보니 족히 아무것도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할 만한 것이 없음이 한스럽도다” 하였으니, 그가 동방을 경멸함이 심하다 하겠 다. <제태평관루시(題太平館樓詩)>를 스스로 비평하여 “호화로운 기운을 다하였으나 한결같이 청고(淸高)를 근본 으로 삼았다” 하였고, 성균관 창수시 발문에는 자필로 크게 “시를 이루지 못한 네 사람은 뒤에 마땅히 채워야 한다”라고 썼으니, 이것은 우리나라 재상 중에 시를 짓지 못한 자가 있 음을 기롱한 것이다. 일찍이 진초(眞草)58) 두서너 서첩을 쓰고는, “희지 글씨 와 똑같아 천금을 가지고도 얻기 어려운 것이니, 배우는 자 는 마땅히 보배롭게 간직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의 경박함이 이 정도였다. 이때 내가 사신 접대하는 객관 아 래에서 일을 보고 있었는데, 고윤의 작품을 볼 때마다 노기 가 솟아올라 안색이 변하였으며 혹간 손으로 찢어 땅에 던 지기도 하였는데, 동료들이 모두 웃었다. 하루는 고씨가 승

58) 진초: 왕희지의 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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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 박사 곽의경(郭義卿) 손을 빌려 그의 행록(行錄)을 썼 는데, 내가 가만히 엿보니 제일 먼저 어버이를 생각하는 글 [思親詞] 한 수를 쓰고, 다음에 보낸 옷을 받지 않은 시[送衣 不受詩], 다음에는 기생을 물리쳤다는 시[却妓詩], 그다음

에 문묘에서 공자를 알현한 시[謁宣聖詩]를 쓰고는, 그 나머 지로 볼거리를 관람하고 감회 읊은 따위의 글은 모두 숨기 고 쓰지 않았다. 내가 “이놈이 장차 중국에 돌아가면 이로써 이름 낚을 자료로 삼을 것이니, 사람의 불초함이 이 지경이 란 말인가?” 했다. 어느 날 임금이 말과 안장을 준 일이 있었다. 내가 동료 에게 “말안장은 전대 속에 넣을 물건이 아니니, 이자들이 필 연코 물리칠 것이다. 만일 물리친다면 고씨가 반드시 시를 지어 자랑할 것이니 자네들은 보고만 있으라” 하였는데, 얼 마 되지 않아 고씨는 말안장 물리친 시를 지었는데,

한나라 문제가 이미 천리마를 가볍게 여겼고(漢文旣是 輕千里)

조적은 한 채찍을 가질 마음이 없다(祖逖無心著一鞭)59)

59) 서진 때에 변방족들이 쳐들어와 동진이 건국되었고, 다시 옛 나라 양자강 이북을 차지하려고 군대를 동원하였을 때 앞장선 사람이 조적이었다. 그 때 조적의 친구 유곤이 “내가 중원의 땅을 회복하려고 창을 베개로 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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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그들이 떠나려 할 때 임금이 좋은 칼을 기증하니, 고 윤은 시를 지어 사례하였다. ≪황화집(皇華集)≫60)이 이 미 완성되어 나오자 고윤이 보고 처음에는 기뻐하더니, 읽 어 내려가다가 칼의 기증을 치사한 시에 이르러 노기 띤 안 색으로 놀라고 당황하니, 그의 가식과 사신의 체통을 잃음 이 이 같았다. 급사(給事) 진가유(陳嘉猷)는 너그럽고 정대하여 그 기 상만 보아도 대인군자임을 알 수 있고, 문장 또한 화평하고 담담하였으며, 급사 장녕(張寧)의 그 문장은 가히 진가유와 흡사하다 하겠으나 언어와 행동에서는 자못 억지로 하는 면 이 있었다. 그러나 역시 군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사인(舍 人) 김식(金湜)은 칠언사운을 잘했고 필법과 그림 또한 높

고 정묘하였으나, 조행만은 전혀 아니었다. 사인 장성(張 珹)은 온화하고 아담한 기상은 있으나 남다른 기절이 없었

고, 행인(行人) 강호(姜浩)는 관대한 도량은 있으나 학문과 예의가 적었으며, 호부(戶部) 기순(祈順)은 독실하고 조행

아침 되기를 기다리는데, 항상 조적이 나보다 먼저 채찍을 댈까 하는 염려 로다” 하여, “조적의 채찍”이란 말이 생겼다. 60) ≪황화집≫: 명나라 사신과 원접사(遠接使)가 서로 주고받았던 시를 모 아 편찬한 책이 다. 황화는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인 <황황자화 (皇皇者華)>의 약칭으로 임금이 사신을 보낼 때 부른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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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고 문장도 순정하였으니, 진가유와 장녕 두 급사에 필적 할 것이다. 행인 장근(張瑾)은 문장과 조행이 기순보다는 못하나 그 범위 안에 들 것이다.

○ 최근에 ≪요해편(遼海編)≫을 얻어 보니, 한림 시강(翰 林侍講) 예겸(倪謙)이 우리나라에 사명을 받들고 왔을 때

지은 것이었다. 우리나라 여러 사람들이 주고받은 것과 증 별시(贈別詩) 등이 뒤에 붙어 있는데, 나같이 재주 없는 사 람의 이름도 그 속에 있었다. 포정사참의(布政司參議) 노 옹(盧雍)이 쓴 서문에, “처음에 예 시강이 조선에 이르니 그 나라에서 문학에 능한 신하들을 가려 뽑아 관반(館伴)으로 삼았다. 공은 얼굴빛을 가식으로 굴종하니, 그 사람이 붓을 잡고 글을 쓰면서 얼굴에 극히 자부하는 빛이 있었다. 이에 공은 마침내 기이한 문장을 지어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였 다. 시상이 샘솟듯 붓 가는 대로 순식간에 지어놓았고, 별달 리 마음을 쓰지 않아도 그 말과 뜻이 뛰어나고 빼어나 좌중 을 내려보고 휘두르기를 사람이 곁에 없는 것 같았으니, 일 국의 사람들이 비로소 모두 경악하고 찬미하여 존경해 마지 않았다” 하였다. 지금 그 당시 관반을 살펴보면, 문성공(文 成公) 정인지(鄭麟趾)인데 자랑하고 자부하는 것이 어찌

공이 할 바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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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 시강 오절(吳節)이 발문에 “공이 그 나라에 갔을 때 평소 시문에 능한 자를 널리 선발하여 관반을 맡게 하였다. 선생의 재주와 의사가 물이 솟고 산이 나오는 것같이 민첩 하여 붓 가는 대로 휘둘러 순식간에 글을 이루었다. 그 나라 사람들이 혹 머리를 모아 칭찬하고 탄복하였으나 위축되어 감히 잘하는 바를 내놓지 못하였는데, 오직 정인지(鄭麟趾) 와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등 세 사람만이 약간 재치 있는 소리를 할 줄 알아 간혹 화답을 하니, 선생 또한 누차 권장을 가하였다” 하였다. 애석하다. 노옹과 오절 두 사람이 예 시강만 높이고, 우리 동국 여러 사람을 깔보는 것 이 너무 심하다. 이제 예 시강의 ≪요해편≫ 전편을 읽어보 니, 다만 평범한 시문뿐이요, 크게 뛰어나거나 기이하고 위 대한 말이 있는 것을 보지는 못하겠다. 예 시강의 <설제등 루부(雪霽登樓賦)> 같은 것은 비록 아름답긴 하나, 신 문 충공(申文忠公)61)이 차운한 사부(辭賦) 역시 문리가 순하 고 구성이 알맞아 초성(楚聲)62)과 같은 운치가 있으니, 역 시 시강과 백중이라 할 만하다. 어찌 쉽게 말하리오. 노옹과 오절 두 사람의 말은 실로 공정한 논평이 아니다. 61) 신숙주의 시호가 문충공임. 62) 초성: 중국 전국시대 말년 초나라 지방에서 일어난 새로운 문학 경향. 비 애와 청신(淸新)한 것을 주로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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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사람들은 법도가 되는 기물은 반드시 주척을 사용했 으나, 척도의 규격을 비교하여 결정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 다. 주자(朱子)는 사마문정공(司馬文正公)63) 집안의 석각 본(石刻本) 척법(尺法)을 취하여 ≪가례(家禮)≫에 실었 다. 그러나 ≪가례≫의 판본이 세상에 간행된 것이 하나뿐 이 아니고, 주척의 길고 짧은 것도 모두 같지 않아 역시 의 거하기 어려웠다. 세종 때에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가 진우량(陳友諒) 아들 진리(陳理)의 가묘에 있는 신주(神 主) 법식을 구해 얻어 임시로 자의 기본을 만들고, 또 의랑

(議郞) 강천주(姜天霔)의 집에서 종이로 만든 주척을 얻으 니, 이는 그 아버지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석(姜碩)의 집에 원나라 원사(院使) 금강(金剛)이 소장했던 상아척(象牙尺) 이 전해 내려온 것이었다. 전면에 “신주척(神主尺) 정식(定 式)은 지금의 관척(官尺)으로는 2촌 5푼을 제하고 7촌 5푼

을 쓴다” 하였으니, 곧 ≪가례≫ 부주(附註)에, 반시거(潘 時擧)의 “주척은 현재의 자에 비하여 7촌 5푼이 약하다”라

는 말과 같아 두 개의 척 본을 서로 비교하매 차이가 없었다. 이에 비로소 자의 제도를 정하니, 모든 사대부 집 사당의 신 주와 천문의 누기(漏器)64), 도로의 이수(里數)와 사장(射

63) 사마문정공: 사마광(司馬光)을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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場)의 보법(步法) 등을 이에 의거하여 정식으로 삼았다. 뒤

에 사역원사(司譯院事) 조충좌(趙忠佐)가 북경에 갔다가 새로 만든 신주를 사가지고 와 이자와 비교하여 촌과 푼이 서로 맞으니, 지금 우리나라에서 쓰고 있는 주척이 중국과 같은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 ≪몽계필담(夢溪筆談)≫에 “희령(熙寧)65) 중엽에 고려 에서 들어가 공물(貢物)을 바치는데, 지나는 지방마다 모두 지도(地圖)를 요구하니, 이르는 곳마다 모두 만들어 보내왔 는데, 산천과 도로의 험하고 평탄함을 갖추어 싣지 않은 것 이 없었다. 양주(楊州)에 이르러 고을에 공문을 보내어 지 도를 취하려 하니, 이때의 승상(丞相) 진수공(陳秀公)은 양 주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사신을 속여 ‘절동(浙東)과 절서 (浙西)에서 제공한 지도를 다 보고, 그 규모를 모방하여 만 들어주려 한다’ 하고는, 지도가 도착하자 전부 한군데 모아 불사르고, 이 사실을 상세히 갖추어 조정에 보고하였다” 하 였다. 내가 상고하건대, 고려는 요나라가 가로막혀서 송나 라와 통하지 못한 것이 이미 오래였다. 신종 희령 4년인 고

64) 누기: 물시계를 가리킴. 65) 희령: 송나라 신종(神宗)의 연호(1068~1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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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 문종 25년(1071) 신해에, 민부시랑(民部侍郞) 김제(金 悌)를 보내어 등주(登州)를 거쳐 송나라에 들어가 공물을

바쳤으니, 아마도 이때의 일이 아닌가 싶다.

○ 고려 때에는 당직한 승선이 5경에 궁궐 문으로 나아가 환관이 나오면 임금 문안을 묻고, 곧 열쇠를 청하여 궁성과 나성(羅城)66)의 모든 문을 열어놓았다. 조선이 개국한 후 로 오경 삼점(三點)에 파루를 치면 궁성 문과 외성 문을 모 두 열었는데, 예종 때부터는 날이 밝을 때 비로소 궁의 문을 열었다.

○ 옛 법식에는 모든 대소 조회에 문관 무관이 동서로 나누 어 들어가고, 감찰 두 사람이 각각 문반과 무반의 뒤에 서서 조회 의식을 법대로 하지 않는 자를 규찰하였다. 조선조에 서는 동반과 서반의 열마다 각기 대관(臺官)을 두어 동서로 서로 향하여 서게 하였으니, 이는 중국의 제도를 본뜬 것이 다. 또 구례에 대간 관원이 반열에 들어오면, 아전 각 한 사 람이 포(袍)와 홀(笏)을 갖추어 출입하는 대로 따라다녔다. 반열이 퇴장하면 대간은 근정문 밖 영제교 남쪽에서 차례로

66) 나성: 도시 외곽을 둘러싼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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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향하여 서쪽을 상으로 하여 섰다가 백관이 모두 나가기를 기다려서 비로소 나갔으니, 이는 여러 관료들과 뒤섞이지 않고자 함이었다.

○ 당·송대에는 임금에게 아뢰는 일은 모두 차자(箚子)를 사용하였다. 내가 사헌부 장관으로 있을 때 처음으로 차자 법 세우기를 건의하였으니, 이는 말을 출납할 즈음에 빠뜨 림이 있을까 두려워서였고, 또 후세에 임금을 가까이 모시 고 있는 환관이 권세 잡는 길을 막기 위함이었다. 법을 세우 니 사람들이 모두 만대까지 행할 수 있는 좋은 법이라 하더 니, 근래에 와서는 대간이 된 자들이 대체를 인식하지 못하 고 조그마한 과실만 찾아내면 심각한 법으로 죄를 얽고 온 갖 말로 비방하니, 차자를 만든 것이 도리어 사람을 해칠 뿐 이다. 천하에 법을 세우고서 폐단 없는 것은 있지 않을 것이 다.

○ 산기(散騎) 이하는 옛날에는 문하성에 예속되어 있었다. 정희계(鄭熙啓) 공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었는 데, 일찍이 사람들과 더불어 도당에서 도박을 했다 하여 문 하성 여러 낭관들이 영후례(迎候禮)67)를 행하지 않자 정공 이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돌아갔다. 이때 문충공(文忠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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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趙浚)이 수상이 되어 아문으로 나가려 할 때 아전이 정공이 앉지 않은 것을 고하니, 문충공이 웃으며 “우리 낭사 에 사람이 있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 사문(斯文)의 옛 풍습에 문주회(文酒會)가 있으면 삼관 (三館)68) 관원들이 큰 술잔을 잡고 가득히 따르며 선생이라 호칭하였는데, 고관부터 아래로 낮은 관직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게 했다. 그 모임에 참여한 자는 비록 현달한 관원 과 귀인이라 할지라도 홍지(紅紙)69) 위에 이름을 올리지 못 했으면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대인(大人)이라 불렀으니, 이 풍습은 고려에서 비롯되었다. 지금도 혹 홍지에 이름을 올 리지 못한 자가 있으면 일부러 사문회를 피하니, 이는 대인 이란 소리를 듣기 싫어함 때문이었다.

○ 개국한 후로 문사(文士)를 택하여 문형(文衡)을 맡기려 면 예문관 응교로 삼고, 다른 벼슬로 이를 겸임하게 하여 문 필을 전업으로 삼게 하였다. 집현전을 설치한 후로는 집현

67) 영후례: 아래 관원이 상관을 맞는 예식. 68) 삼관: 승문원·성균관·교서관을 말하며, 문과 급제자들은 이 세 관청에 분관되어 근무를 시작함. 69) 홍지: 문과에 합격했다는 증서. 문과 합격자에게 홍패(紅牌)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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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 한 사람으로 겸하게 하였고, 집현전을 파하고 예문관 을 설치함에 이르러서는 응교 한 사람이라도 실직인 본관 관원으로 관례에 따라 돌아가며 임명하여 사람을 가려 뽑지 않고 제수하니, 문필 책임이 전일하지 못하고 일도 정밀하 지 못했다. 내 일찍이 들으니, 여흥(驪興)부원군 민제(閔 霽) 공이 고려에 벼슬하였는데, 이조에 보낸 시에,

예문 응교는 나의 본분이 아니나(藝文應敎非吾分) 세 글자의 화려한 직함은 무방하다(三字華啣也不妨)

하였으니, 예문 응교는 조선 초기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고 려조부터 있었던 것이다. 세 글자라 함은 지제교를 말한다.

○ 시호 짓는 법은 옛사람이 소중하게 다루던 바였는데, 지 금은 다만 태상(太常)70)에 위임하니, 신진 후학들이 사체에 숙달하지 못하여 시호를 짓는 데 법도가 없다. 홍순손(洪順 孫) 같은 이는 나중에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녹훈되긴

했으나 공도 낮고 최종 관직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

70) 태상: 조선 시대 시호를 관장했던 봉상시(奉常寺)의 별칭. 고려 전기에 설 치했던 대상부(大常府)가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봉상으로 개칭하 였던 바, 이로부터 생긴 별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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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인데다 품질도 낮거늘, 마침내 공훈이라 하여 태상에서

특별히 시호를 양무(襄武)라 하였다. 이는 ‘일로 인하여 공 이 있음을 양(襄)이라 하고, 능히 화란을 평정함을 무(武)라 한다’는 것을 취한 것이니, 아, 심하도다! 그 일의 대체를 알 지 못함이여! ‘능히 화란을 평정함을 무라 한다’는 그 ‘무’ 자 (字)는 곧 임금에게 쓰는 ‘무’니, 어찌 가히 신하에게 베풀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미 ‘일로 인하여 공이 있다’ 하였다면, 그 공을 알 수 있는데, 또 능히 화란을 평정하였다는 것을 더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또 영성부원군 최항(崔恒)을 태상에서 문정(文靖)이라 시호를 붙이니, 이는 ‘도덕에 널리 들은 것을 문(文)이라 하 고,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말이 적은 것을 정(靖)이라 한다’ 는 말을 취한 것이다. 이미 ‘도덕에 널리 들었다’ 했다면, 몸 가짐을 공손히 하고 말이 적은 것은 도덕 속의 말미에 속하 는 일이다. 문이니 정이니 함은 역시 전도된 것이 아니겠는 가? 중추부사 이숭지(李崇之) 같은 이는 태상에서 맥려(麥 厲)라 시호하였는데, 시호법에 보리 맥 자가 없으니, 필시

뽐낸다는 ‘과(夸)’ 자의 착오일 것이다. 이런 유가 매우 많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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