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보기 팬덤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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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팬덤 문화 홍종윤

대한민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팬덤 문화의 이해

팬 문화와 팬덤 연구 트위터(twitter)에서 해시태그로 “#8년 전 자신에게 절대 믿지 못할 말을 해 보자”는 놀이가 유행한 2013년 여름. 한 국의 트위터 이용자들이 8년 전의 자신에게 남긴 말 중 특 히 다음의 표현이 많이 등장했다. “너 여전히 덕후다?” ‘덕 후’는 일본어 오타쿠(おたく)에서 유래한 용어로 무언가 에 열성적인 팬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표현은 ‘너는 아직 도 OOO의 열성적인 팬이다’로 해석된다. 사실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팬(fan)으 로서의 정체성은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지배적인 방식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인터넷 웹사이트, 커뮤니 티, 블로그, 소셜 미디어 따위의 공간에서 무엇인가, 누군 가의 팬이거나 팬과 같은 활동을 하고 있다. TV 프로그램, 음악, 영화, 스포츠, 스타 등 그 선호하는 대상이나 장르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다 른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공유하고, 즐거워하는 유 사한 행동 양식을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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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미디어를 통한 소통 방식의 확산과 팬 문화의 일상화로 팬과 팬 문화에 대한 학문적 연구 역시 주목받고 있다. 팬덤에 대한 연구는 10대 소녀들의 반항 심리에 따 른 행동으로 설명하는 사회심리학 관점부터 문화 생산 주 체로 이들을 설명하려는 문화연구에 이르기까지 그 폭과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하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문화연구 분야에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최근 디지털 미디어의 발전과 더불어 팬덤의 진화 혹은 팬덤의 권력화 등으로 설명의 방식과 폭이 확대되고 있다. 이 책이 다루 고 있는 항목 10개는 팬덤 문화를 설명하는 문화연구의 관 점들을 담고 있다.

하위문화와 문화적 생산 팬덤에 대한 학문적 논의를 본격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 를 한 연구서는 1992년 발간된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 의 󰡔텍스트 밀렵자들(Textual Poachers)󰡕이다. 당시만 해 도 팬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부정적 스테레오타입이 지 배적이었다. 사생팬, 안티팬, 그루피(groupie) 따위의 용어 에서 잘 드러나듯이 흔히 팬들은 무지하고, 순진하고, 부도 덕하고, 반사회적이고,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는, 일종의 문 화적 마약 중독자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젠킨스의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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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는 학계는 물론이거니와 미디어, 문화평론가, 심지어 수 용자 스스로에게 만연해 있던 팬덤에 대한 부정적 스테레 오타입에 저항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젠킨스는 팬 수용자들을 가장 능동적인 수용자(active audience) 분파로 간주하고, 텔레비전 프로그램 팬들이 구 축한 하위문화적 특성을 분석하여 팬 활동이 지니는 사회 문화적 의미와 중요성을 다섯 가지로 제시한다(Jenkins, 1992, pp.277∼283). 첫째는 특수한 텍스트 수용 양식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다. 팬들은 일반 수용자들과 달리 세밀하고, 집중적이며, 중복적인 시청 행태를 보이며, 텍스트에 대한 감정적인 근 접성과 더불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자 애쓴다. 또한 텍스트 소비에 그치지 않고 다른 팬들과의 사회적 상호작 용으로 연결해 텍스트의 의미를 공유하고 토론한다. 둘째는 특수한 비판적 해석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점 이다. 특정 팬덤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그 공동체만 의 선호된 해독 방식에 대한 학습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 를 통해 팬들은 원작의 텍스트가 드러내지 못한 심층 사항 들과 잠재성을 탐구하며 원작을 넘어서는 풍부하고 복잡 하며 흥미진진한 메타 텍스트를 구축한다. 셋째는 소비자 행동주의를 위한 토대를 구성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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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팬들은 프로그램의 내용 전개나 시리즈 연장에 대 한 의견 표명의 권리를 주장하고 프로그램 제작자들에 대 한 피드백을 실행에 옮긴다. 넷째는 팬덤 고유의 문화적 생산, 미학적 전통과 관행 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팬덤은 원작 텍스트 소비 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문화적 창작을 위해 원작으로부터 재료를 끌어오고, 자신들의 특수한 미학적 전통을 가진 팬 텍스트들을 생산한다. 팬 아티스트, 작가, 비디오 제작자, 음악가들이 팬 공동체의 특수한 관심사에 소구하는 작품 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팬덤은 자신들만의 고 유한 장르들을 발전시키고, 대안적인 생산, 분배, 전시, 소 비 제도들을 구축한다. 다섯째는 대안적인 사회적 공동체로서 기능한다는 점 이다. 팬덤은 인종, 성, 지역, 정치, 직업 등에 기반을 둔 전 통적인 공동체와 달리 선호하는 미디어 텍스트들을 중심 으로 정의되는 소비자 공동체다. 따라서 팬들 개개인의 차 이를 인정하는 동시에, 팬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민주적 공 동체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때문에 지배 문화 속에서 종속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참여가 활발하다. 이처럼 젠킨스는 팬덤을 생산적이며 참여적인 하위문화 로 파악한다. 단순히 문화 상품을 소비하는 일반 수용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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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달리 팬덤은 지배적 헤게모니 문화에 도전하는 해석틀을 지니고, 자신들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창조적이고 능동적이며 참여적인 생산 활동을 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문화적 생산’에서는 팬덤 문화가 보여 주는 생산적 측 면들을 기호, 언술, 텍스트의 차원에서 고찰하고 단순 소 비자를 넘어 문화의 생산과 유통에 참여하는 생산 소비자 (prosumer)로서 팬의 위상을 점검한다. 또한 팬픽, 팬 아 트, 팬 비디오, 팬 음악, 코스프레 등 팬들이 기존 문화 상 품을 가공하여 만들어 낸 대표적 팬 제작물의 유형을 살펴 보고 문화적 전유의 관점에서 팬덤의 문화적 생산의 의미 를 고찰한다. ‘팬픽’은 가장 보편적인 팬 창작물 중 하나다. 다양한 팬픽의 창작 유형을 검토해 팬들이 원작의 한계 지 점에서 출발하여 자신들의 욕망에 따라 미디어 텍스트를 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살펴본다. ‘집단지성’에서는 팬 자막 공동체의 사례를 들어 팬덤이 온라인 공간을 기반으 로 공동체 고유의 지식과 정보를 협력적으로 생산하고 공 유하고 활용하는 방식을 검토한다.

정체성과 사회문화적 위계 팬 수용자들의 능동적 문화 생산에 주목하는 젠킨스의 시 각은 이후 많은 연구들에서 계승되었다. 이들은 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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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의미의 해석과 실천을 둘러싼 권력투쟁의 장소로 간주 하고, 팬덤 연구를 주로 사회 구성체 내의 종속적 지위에 있는 자들의 문화적 취향과 관련된 것으로 파악하는 경향 을 보인다. 1세대 팬덤 연구의 특징인 이러한 경향성은 계 급, 젠더, 세대, 인종 관점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벗 어나는 모습을 보이는 피지배자의 문화적 실천을 대변하 고 옹호하려는 연구자들의 학문적 입장과 밀접한 연관성 을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이 팬덤의 일면적 측면에만 주목해 오히려 팬덤들 사이의 차별적 정체성이나 다층성을 분석하 는 데는 한계로 작용한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부정적 팬덤 이미지와 담론을 극복하고 팬덤의 긍정적 의미를 발굴하고 자 하는 학자들의 자의식 과잉이 팬덤을 일반화하고 세부 적 차이들을 사상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레이 등 (Jonathan Gray, et al.)은 이러한 젠킨스류의 연구를 팬과 대항 헤게모니적 팬 문화에 대한 낭만적 관점이라고 비판 하면서 1세대 팬덤 연구 경향을 “팬덤은 아름답다(Fandom is beautiful)”는 문장으로 요약한다(2007. p.1). 1세대 팬덤 연구 경향에 대한 비판은 피지배자들의 문 화적 저항 프레임을 벗어나 좀 더 다양한 수용자 분파들의 팬 문화 및 실천에 주목하는 또 다른 연구 경향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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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주로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구별짓 기(distinction), 문화 자본(cultural capital), 아비투스 (habitus) 개념들을 빌려 팬덤의 차별적 정체성 수립 방식 을 탐구하거나, 팬 문화 또는 하위문화 내에서도 기존의 사회·문화·경제적 자본의 논리가 작동하면서 사회문화 적 위계가 구축되는 과정을 분석하였다(Thornton, 1995; Dell, 1998; Harris, 1998). 부르디외 이론의 적용은 팬 문화를 공동체 관점뿐만 아 니라 사회적 위계의 시각에서도 파악할 수 있게 해 팬덤 연구의 지평을 확장해 주었다. 즉, 팬들이 공통의 관심사 와 즐거움을 공유하고 생산하는 것과 더불어 팬 지식과 팬 대상에 대한 접근성 측면에서 경쟁을 벌이면서 위계적 차 별성을 구축하는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문화적 정체성의 재생산이 사회·문화·경제 자본을 반 영하고 표현하는 아비투스를 통해 구조화된다는 부르디 외의 시각은 팬 대상을 선택하고 소비하는 실천들이 다양 한 계급과 계층 분파들에 따라 다르게 전개되는 양상을 고 찰할 수 있게 해 준다. ‘팬덤 정체성’은 팬덤이 차별과 구별의 기제를 통해 자 신들만의 사회적, 집단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과정을 살펴 보며, 이 과정에서 팬덤 고유의 문화 자본이 형성됨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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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준다. ‘아이돌 팬덤’은 아이돌을 추종하는 10대 중심의 팬덤 성격이 성인 팬을 포괄하는 형태로 진화함에 따라 나 타나는 변화를 다룬다. 성인층의 아이돌 팬덤 구성원 진 입이 스타(아이돌), 기획사, 팬덤 간의 권력관계나 문화적 실천 양태를 어떻게 변모시키는지 살펴볼 것이다. ‘팬덤과 젠더’는 여성이 팬덤과 관련되면서 나타나는 젠더 측면의 이슈들을 다룬다. ‘안티팬’은 특정 대중문화 텍스트나 스 타에 대한 강한 불호를 표현하는 수용자를 일컫는 말이다. 안티팬의 정체성과 생성 동인에 대한 관점들을 소개한다.

팬덤의 일상성과 디지털 참여 문화 인터넷의 등장은 팬덤 활동과 팬 문화를 혁명적으로 변 화시켰다. 인터넷 이전의 팬 활동은 주로 정기적인 회합 (convention)이나 팬 잡지(fanzine)를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팬덤의 소통 방식에서 시공간적 한계를 지닐 수밖 에 없었다. 인터넷은 사실상 팬 활동의 시공간적 제약을 걷어내었고, 인터넷 팬 커뮤니티 사이트들을 중심으로 보 다 즉각적이고 광범위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만들 었다. 소통의 속도와 빈도의 증가는 팬덤의 가시성을 높 이는 동시에 더 많은 사람들이 팬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함으로써 팬덤의 규모와 지역적 범위의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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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가져왔다. 팬덤의 규모가 증가하면서 팬들도 다층화됐다. 전통적 인 의미의 팬들부터 특정 팬덤이나 커뮤니티 활동에 열성 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스스로를 팬으로 칭하는 수용 자들까지 팬 활동에 대한 관여와 참여의 정도에 따라 다양 한 팬층이 형성된 것이다. 인터넷 시대에 팬 활동은 더 이 상 소수 열성적 팬 중심의 비주류 문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참여 문화적 소비 양식 을 의미하게 되었다. 팬 소비가 현대적 커뮤니케이션과 소비의 당연한 측면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팬 문화에 대한 인식 역시 달라졌다. 현대사회에서 팬 의 지위나 팬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더 이상 부정적 스 테레오타입의 대중문화 프레임에 갇혀 있지 않다. 오히려 팬 소비는 대중문화 산업의 주된 마케팅 전략이 되고 있으 며, 정치인이나 유명 인사들이 특정 팬임을 인증하는 방식 을 통해 팬 구성원들과 상징적 친밀성을 구축하려 애쓰는 것도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팬덤의 일상화와 참여 문화의 확산은 필연적으로 팬덤 연구의 주제와 대상, 방법론의 변화를 수반하였다. 팬덤 은 더 이상 헤게모니적 문화에 대항하는 해석 공동체나 사 회문화적 위계와 구별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매개체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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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주되지는 않는다. 일상 문화의 관점에서 보다 다양한 관심 주제에 따라 팬덤 대상의 선택과 그것을 둘러싼 실천 들을 분석하기 시작하면서 연구의 스펙트럼이 넓어진 것 이다. 팬 해독, 취향, 실천이 헤게모니나 계급 계층의 문제 를 넘어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의 시대적 전환 문 제로 다뤄지기도 하고, 특정 지역을 넘어선 글로벌 차원의 이슈로 확대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슈들을 다루기 위해 다양한 개념, 이론, 방법론들의 적용이 시도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레이 등(Gray et. al., 2007, pp.9~10)은 현대사회에 서 팬덤 연구의 의의를 일상생활의 일부가 된 팬 문화 분 석을 통해 현대적 삶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을 포착하는 것 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전쟁, 인종 갈등, 불평등 심화, 정치적 폭력, 생태적 재난 등에 대한 현대적 경험은 팬 대상에 대한 감정적 관여 메커니즘과 동일한 패턴으로 미디어의 매개를 통해 경험된다. 따라서 팬 수용자에 대 한 연구는 매개된 현대사회에서 우리 자신이나 타인들과 감정적 연대를 형성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기여할 것이 라는 것이다. ‘디지털 네트워크와 글로벌 팬덤’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네트워크의 구축과 소셜 미디어 플랫폼의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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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팬덤의 국제화를 가져오는 현상을 살펴본다. ‘팬덤 경 제’는 선물 경제, 무료 노동, 조공 문화의 개념을 통해 팬덤 내부에서 팬−스타−미디어 기업 간에 형성되는 다양한 경제적 관계를 고찰한다. 나아가 자본주의 상품 경제 시 스템의 내부와 외부를 넘나드는 팬덤의 경제활동이 디지 털 시대 문화 산업의 자본−시장−노동 관계의 재편과 맞 물리는 지점을 파악해 본다. ‘팬 문화와 저작권’은 팬 제작 물의 저작권 침해 이슈에 대한 미디어 산업의 대응 방식을 살펴보고, 공정 이용 관점에서 팬 창작물의 성격을 분석한 다. 나아가 창작자의 권리 보호와 공중의 접근권 보호 사 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저작권 제도 재구성의 필요성을 검 토한다. 현대사회에서 팬덤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곧 인간의 현 대적 생활 방식에 대한 맥락을 이해하는 작업이 된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10개 항목은 팬덤 문화의 일부분을 드러 낼 뿐이지만, 대중문화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단초 를 제시해 줄 것이다. 그 미래는 이미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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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Dell, C.(1998). “Lookit That Hunk of Man!”: Subversive Pleasures, Female Fandom, and Professional Wrestling. In Harris, C. & Alexander, A.(eds.), Theorizing Fandom: Fans,

Subculture, and Identity. Hampton, Cresskill: NJ. Gray, J., Sandvoss, C., Harrington, C. L.(2007). Why Study fans? In Gray, J., et. al.(eds.), Fandom: Identities and Communities

in a Mediated World. New York and London: New York University Press. Harris, C.(1998). A Sociology of Television Fandom. In Harris, C. & Alexander, A.(eds.), Theorizing Fandom: Fans,

Subculture, and Identity. Hampton, Cresskill: NJ. Jenkins, H.(1992). Textual Poachers: Television Fans &

Participatory Culture. New York: Routledge. Richardson, B. & Turley, D.(2008). It’s Far More Important Than That: Football Fandom and Cultural Capital. In Advances in

Consumer Research: European Conference Proceedings, Vol. 8. Thornton, S.(1995). Club Cultures: Music, Media and

Subcultural Capital. Cambridge, U. K.: Pol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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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문화적 생산

팬덤은 주류 문화 상품의 소비를 넘어 생산적 활동을 수행한다. 기호학적 의미, 언술 행위, 작품의 생산을 통해 팬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의미와 정체성을 표현하는 대중문화를 구축해 나간다.


팬덤 팬덤(fandom)은 특정 스타 또는 미디어 텍스트에 대한 애호와 충성심을 공유하는 조직된 공동체 또는 하위문화 를 일컫는 용어다. 특정 스타나 문화 텍스트를 열광적으 로 좋아하는 수용자를 의미하는 ‘fan’과 접미사인 ‘dom’을 붙여 만든 합성어다. ‘dom’은 지위, 상태, 영토 등을 나타 낼 때 사용한다. 예를 들어 스타덤(stardom)은 스타, 스타 의 지위나 신분, 스타 세계 따위를 나타낸다. 관료사회 (officialdom) 역시 단순히 관료만을 지칭하는 것을 넘어 서 관료 특유의 규범이나 행동 양식 등을 포괄적으로 의미 한다. 따라서 팬덤 역시 팬 또는 집합적 팬들, 팬 문화 현 상과 관련된 규범·관습·제도 따위를 총체적으로 포괄 하는 팬 사회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팬 생산성 팬들은 단순히 주류 미디어 문화 상품을 소비하는 데 그치 지 않고 그것들을 재료 삼아 자신들을 위한 즐거움을 창조 해 내는 방식으로 그들만의 대중문화를 구축해 간다. 이 과 정에서 팬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피스크 (John Fiske)는 팬 문화가 지니는 생산성(fan productivity) 을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1992, pp.3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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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기호학적 생산성(semiotic productivity)이다. 문화 상품들의 기호학적 자원들로부터 사회적 정체성과 경험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돈나 팬이 가부장 제적 섹슈얼리티 대신 자신들만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의 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나, 로맨스 소설 팬이 가부장제적 가치에 대항하는 여성적 가치를 합법화하는 의미를 만들 어 내는 것이 그 예다. 둘째는 언술적 생산성(enunciative productivity)이다. 팬들이 기호학적으로 만들어진 의미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공유하기 시작하면서 의미는 공적인 성격을 지 니게 된다. 팬들의 언술 행위는 팬덤의 대상에 대한 특정 의미를 만들어 내고 유통시킨다. 이것이 언술적 생산성이 다. 기호학적 생산성이 개인적 차원의 의미 생산이라면, 언술적 생산성은 공동체 차원의 의미 공유를 말한다. 언 술적 생산성은 단순히 언어적 행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 니다. 팬들이 자신들만의 특정한 헤어스타일이나 메이크 업, 의상, 액세서리를 착용하는 따위의 비언어적 행위들 도 특정 팬 구성원임을 나타내는 언술적 행위이자 정체성 구축의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셋째는 텍스트 생산성(textual productivity)이다. 팬들 은 문학, 예술, 대중문화 분야의 공식 작품들에 비견될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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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품들을 만들어 낸다. 종종 공식 문화만큼 작품 가치 를 지닌 텍스트들을 생산하고 공동체 내에 유통시킨다. 피스크의 논의를 요약하면 팬들은 문화 상품의 소비와 관련하여 의미, 소통, 작품 등을 만들어 내는 문화 생산자 다. 흔히 현대 대중문화 수용자의 변화된 위상과 특성을 지칭하기 위해 생비자(prosumer)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원래 생비자는 단순 소비자를 넘어 문화의 생산과 유통에 관여하는 소비자들의 능동성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팬덤 문화가 보여 주는 팬 생산성은 이제 수용자들이 단순 관여 적 차원도 넘어서서 자신들 스스로가 실제로 생산하는 진 정한 의미의 생비자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팬 제작물 인터넷 미디어 시대에 접어든 이후 대중문화 수용자들은 피스크가 텍스트 생산성으로 설명했던 문화적 생산물을 전보다 훨씬 더 많이 생산해 내고 있으며, 이러한 일반 수 용자들이 만든 글, 사진, 동영상 따위의 제작물을 지칭하 기 위해 손수제작물(user-generated content)이라는 용어 도 등장하였다. 팬들 역시 팬덤 고유의 다양한 손수 제작 물을 창작한다. 팬픽(fanfic), 팬 아트(fanart), 팬 비디오 (fanvid), 팬 음악(fan music), 코스프레(cosplay)는 팬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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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물의 유형들을 지칭하는 대표적인 용어들이다. 팬픽은 원작의 주인공이나 배경들을 빌려와 창작한 픽션으로 가장 일반적인 팬 제작물 중 하나다. 팬픽은 팬 들의 창의성이 가장 잘 표현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팬픽 을 통해 주로 원작이 표현하지 못한 이야기의 빈틈을 메 우거나 새로운 스토리를 창조해 내기 때문이다. 인터넷 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팬들이 직접 제작하는 잡지인 팬진 (fanzine)이 팬픽을 교류하는 유일한 통로였지만, 현재는 인터넷 웹사이트나 블로그가 팬진 문화를 대체하고 있다. 팬 아트는 팬덤 대상과 관련된 회화나 일러스트레이션, 사진 관련 창작물을 일컫는다. 전통적인 시각예술이나 그 래픽디자인 방식을 차용하여 제작한 아마추어 작품들이 지만 전문가들을 능가하는 작품들도 흔히 발견된다. 단순 한 회화나 사진 형태 외에 웹 사이트나 디지털 미디어 기 기에서 주로 활용되는 배경화면, 포스터, 화면보호기, 짤 방(게시판의 성격에 맞지 않는 글이 삭제되는 것을 방지 하기 위해 만든 짧은 사진이나 애니메이션, 동영상) 따위 도 넓은 의미의 팬 아트에 포함된다. 팬 비디오는 TV, 영화 등 원작 영상물의 일부 장면들을 재편집하거나 음악과 결합하는 방식 등으로 만든 뮤직비 디오나 편집 영상물이다. 팬 비디오는 일종의 새로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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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티브를 창작함으로써 원작과는 다른 의미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자주 활용된다. 가령 범죄 수사물 장르의 원작 을 편집하여 두 남성 주인공의 우정이나 연대에 초점을 맞 춘 멜로드라마 장르의 뮤직비디오로 재구성하는 식이다. 패러디도 원작의 의미를 변용시키기 위해 자주 차용되는 팬 비디오 제작 방식 중 하나다. 팬 음악은 팬들이 직접 작사 작곡한 오리지널 음악 창 작물이나 기존 음악 작품들을 이용하여 재구성한 2차 음 악 창작물들을 말한다. 때로는 팬 음악이 특정 팬덤의 고 유한 팬 문화를 나타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공상과학(SF) 팬덤은 필크(Filk)라는 고유의 음악 문화를 지니고 있다. 필크란 팝 음악이나 포크송의 가사를 바꾼 노래를 말하는 것으로 공상과학 팬덤의 공식 또는 비공식 회합에서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 행사를 실시하는 것에서 유래했다. 코스프레는 ‘코스툼 플레이(Costume Play)’의 약자로 공상과학, 망가, 애니메이션 팬들이 직접 제작한 캐릭터 의상을 입는 행위를 말한다. 코스프레는 물리적 현실 공 간에서 가상공간의 세계를 구현하는 행위로, 관련 팬덤의 팬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다.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는 이러한 팬덤의 팬 제작 물 생산을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의 용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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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 ‘텍스트 밀렵(textual poaching)’ 행위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팬 창작의 본성은 미디어 산업의 저 작권 보유에 도전하는 성격을 지니며, 주류 문화 생산의 이기적인 동기와도 날카롭게 대비된다. 팬 아티스트들은 이윤 추구의 목적이 아니라 다른 팬 동료들과 공유하기 위 해 예술 작품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또한 팬덤은 예술가 와 소비자들 간에 명확한 구분이 없고, 모든 팬들이 잠재 적 작가이자 공동체의 문화적 부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으 로 간주된다. 이는 팬덤이 창조성의 이윤 추구를 거부하 고 창조적 작품에 대한 개방적 접근을 추구하는 규범을 지 니고 있는데서 유래한다(Jenkins, 1992).

문화적 전유와 재전유 팬덤의 문화적 생산은 일종의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 행위다. 전유란 타인의 것을 동의 없이 도 용하거나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문화적 전유란 대중문화 수용자들이 원작의 내용이나 이미지, 단어 등을 차용하여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임의대로 사용하는 행위 를 일컫는다. 대중문화 수용자들은 문화적 전유 행위를 통해 텍스트로부터 자신들만의 고유한 의미와 정체성을 생산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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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덤의 문화적 전유 행위가 항상 원작자나 제작자들 의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대중문화 제작자 들은 팬 제작물을 포함한 팬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모 니터링해 새로운 상품 시장을 개척하기도 한다. TV 프로 그램 제작자들도 새로운 에피소드 제작에 대한 단서를 얻기도 한다. 이처럼 주류 문화 산업이 특정 하위문화 스 타일이나 요소들을 다시 주류 문화로 편입시키는 것을 재전유(reappropriation)라고 한다. 팬 문화의 문화적 생산과 관련한 전유 및 재전유 과정 은 대중문화 산업의 제작자, 상품, 수용자 간의 복잡한 상 호작용 방식을 보여 주며, 문화적 의미가 수용자들의 해석 적 개입에 의해 끊임없이 생산·유통되고 변화한다는 것 을 나타낸다.

참고문헌 Fiske, J.(1992). The Cultural Economy of Fandom. Adoring

Audience. Lisa A. Lewis Routledge: New York. Jenkins, H.(1992). Textual Poachers: Television Fans &

Participatory Culture. New York: 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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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팬픽

팬픽은 가장 보편적인 팬 창작물 유형이다. 팬 작가들은 자신들의 다양한 관심사와 욕망을 반영한 글쓰기를 통해 원작이 구현하지 못한 잠재적 가능성들을 탐구하고 미디어 텍스트를 자원으로 활용하는 능력을 보여 준다.


팬 픽션 팬픽(fanfic)은 팩 픽션(fan fiction)의 줄임말이다. 스타나 TV 프로그램, 영화, 소설, 만화, 음악 따위의 대중문화 작 품들의 팬들이 창작한 픽션을 일컫는다. 팬 작가들은 대 중문화 작품들로부터 등장인물, 배경, 설정 등을 차용하 여 특정 장르 방식의 글쓰기를 수행한다. 팬픽은 원작이 추구하지 않는 주제나 아이디어를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 며 소설이나 대본, 시집, 짧은 이야기 같은 다양한 형태의 픽션으로 구체화된다. 팬 공동체는 공통의 애호 대상을 중심으로 형성되지만, 모든 팬들이 반드시 동질적인 속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팬들은 서로 다른 선호와 욕망을 지닐 수 있으며, 팬픽은 팬 자신의 다양한 관심사를 반영한 글쓰기이기 때문에 다 양한 하위 장르를 지니고 있다. 동성 간의 사랑, 정사, 신 뢰, 에로티시즘을 다루는 슬래시(Slash)가 있는가 하면, 로맨스나 섹스 스토리를 삼가는 젠픽(Genfic)도 존재한 다. 신체적 정신적 폭력에 의한 고통을 다루는 다크픽 (Darkfic), 서로 다른 작품의 주인공들이 한 작품에 등장 하는 크로스오버(Crossover)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르다. 동일 장르라 할지라도 주인공의 관계에 따라 더 많은 하위 유형으로 나뉠 수도 있다. 슬래시 장르는 적대적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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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에너미 슬래시(enemy slash),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버디 슬래시(buddy slash), 사제지간 또는 상사와 부하 등 권력관계의 차이가 나는 등 장인물 간의 사랑을 다루는 파워 슬래시(power slash) 등 이 존재한다. 해리 포터(Harry Potter) 팬픽을 예로 들면, 에너미 슬래시는 해리 포터와 드레이코 말포이, 버디 슬래 시는 리무스와 시리우스, 파워 슬래시는 해리 포터와 세베 루스 스네이프를 주인공으로 하는 식이다.

팬픽의 창작 방식 젠킨스는 팬들과 대중문화 텍스트의 관계를 매혹 (fascination)과 좌절(frustration)의 모순적 관계로 묘사 한다. 팬들은 대중문화 텍스트의 무엇인가에 매혹되지만, 동시에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 때문에 좌절한다는 것이 다. 좌절의 지점이 팬 창작의 출발점이 된다. 젠킨스는 팬 픽이 원작을 변형시키는 방식을 열 가지 범주로 설명한다 (Henry Jenkins, 1992, 162~177). 첫째는 재맥락화(Recontextualization)다. 이는 원작에 서 미처 담아내지 못한 장면에 대한 짧은 스토리를 쓰거 나, 등장인물의 행동에 대한 추가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 다. 예를 들면 원작에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한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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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과거 역사나 문화적 배경, 심리 상태 등을 묘사하여 행 동의 원인을 찾아낸다. 둘째는 시리즈의 연대기를 확장(Expanding the Series Timeline)하는 것이다. 원작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 의 이야기를 쓰거나, 반대로 미래의 이야기를 추가하는 방 식이다. 과거 이야기는 주로 원작에서 등장인물의 과거에 대한 암시가 등장할 경우 이를 모티브 삼아 이야기를 전개 한다. 반면 미래 이야기는 시리즈물이 종영되어 더 이상 진 행되지 않거나 제작자와는 다르게 팬들의 관점에서 주인 공들의 미래 삶을 다루고자 하는 욕망을 반영한다. 셋째는 중심인물 변경(Refocalization)이다. 원작의 주 인공이 아닌 조연, 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주변 인물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다. 남성 주인공 중 심 구조에서 배제되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여성 자율성, 권 위, 야망 등 여성적 관심사를 다루는 것이 예다. 넷째는 도덕적 재편성(Moral Realignment)이다. 원 작의 도덕적 세계관을 뒤집어 악당을 주인공으로 이야기 를 쓰는 방식이다. 원작의 명확한 선악 구도의 경계를 흐 리거나, 선악 구도는 유지하되 악당의 시각으로 이야기를 쓸 수도 있다. 다섯째는 장르 전환(Genre Shifting)이다. 공상과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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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의 원작을 로맨스물로 바꾸거나 하는 식이다. 여섯째는 크로스오버(Cross-over)다. 서로 다른 작품들 을 혼합하여 하나의 스토리를 구성하는 것이다. 크로스오 버 팬픽은 텍스트 사이의 경계뿐만 아니라 장르 간 경계를 허문다. 익숙한 주인공이 급진적으로 변화된 상황 속에서 어떻게 대처하는가가 관건이다. 일곱째는 주인공 위치 변경(Character Dislocation)이 다. 주인공을 원작에서 처한 상황을 벗어나게 하여 다른 이름과 다른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개인화(Personalization)다. 원작의 허구적 세계와 팬 자신의 실제 경험을 통합하여 이야기를 쓰는 방 식이다. 아홉째는 감정적 강화(Emotional Intensification)다. 여기서는 주인공의 욕구나 심리 상태에 대한 이슈를 중요 하게 다룬다. 심리적 문제, 인격적 갈등, 육체적 고통 따위 를 극복하기 위한 주인공의 대응이 중요시된다. 열째는 에로티시즘화(Eroticization)다. TV 시리즈물의 표현 제약 때문에 탐구되지 못하는 에로티시즘 차원에 초 점을 맞춘다. 팬픽은 흔히 미디어 수용자들이 단순한 소비자를 넘어 자신들의 욕구나 이해관계에 따라 미디어 텍스트를 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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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활용하는 능력을 보여 주는 모범 사례로 간주된다. 팬들은 원작에서 구현되지 않은 다양한 가능성들을 탐구 해 원작이 담아내지 못하는 문화적 빈틈을 메우는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슬래시 슬래시 픽션

슬래시(Slash) 또는 슬래시 픽션(Slash fiction)은 일반적 으로 남성 주인공들 간의 호모에로틱한 관계를 소재로 한 팬픽의 하위 장르를 말한다. 슬래시 용어의 기원은 1970 년대 미국 TV 시리즈물 <스타트렉(Star Trek)>의 두 남성 주인공인 커크(Kirk)와 스팍(Spock)을 주인공으로 한 동 성 팬픽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커크/스팍 (Kirk/Spock)’으로 명명된 팬픽에서 슬래시(/) 기호를 차 용하여 남성 간 동성연애를 다루는 팬픽을 지칭하는 용어 로 굳어진 것이다. 다른 팬픽들처럼 슬래시 역시 원작에서 표현되지 않 는 대안적 스토리를 창작한다. 주로 원작의 동성 우정 (homosocial friendship) 관계를 동성연애 욕망(homosextual desire)으로 치환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최초의 동료 관 계나 우정에서 출발하여, 숨겨진 욕망 등장으로 고통을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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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고, 고백의 순간, 유토피아적 관계의 안정화 단계로 이어지는 내러티브 구조를 보인다(Duffett, 2013). 슬래시는 중심이 되는 두 남성 주인공의 짝짓기를 의미 하는 커플링(pairing), 능동적 역할과 수동적 역할을 부여 하는 공수(active/passive) 선정으로 시작된다. 해외 슬래 시들이 주로 TV 드라마 시리즈나 영화 주인공을 차용하는 장르형 팬픽이 중심인 반면, 한국의 슬래시는 아이돌 그룹 의 구성원을 중심으로 하는 스타형 팬픽이 주류를 이룬다. 남성 아이돌 팬픽은 구성원들 사이의 수많은 커플링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슈퍼주니어’는 13명의 구성원으로 인해 78가지 짝짓기가 가능하고, 공수 전환까지 고려하면 원칙적으로 156쌍의 커플링이 가능하다. 아이돌 중심의 스타형 팬픽은 준거로 삼을 원작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 라서 모든 배경과 설정을 창작하거나(가상물), 그룹 활동 을 현실 세계의 이야기인 것처럼 쓰는 방식(리얼물)으로 작성된다.

슬래시와 여성 판타지

슬래시 작가들은 주로 이성애 성향의 여성들이며, 여성의 성적 판타지를 탐구하는 경향을 지닌다. 따라서 슬래시 장르는 여성 주체의 젠더 정체성 및 섹슈얼리티 연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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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주된 관심 대상이다. 슬래시가 여성의 관점에서 남성 주인공들의 캐릭터를 묘사해 전통적인 남성성의 한계를 드러내고 대안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흔히 남성 중심의 배틀 게임에서 육체적 용맹성과 성적 매력을 동시에 구현하는 여성 캐릭터가 자주 목도된다. 이는 여성의 육체를 통제하려는 남성의 욕망을 구현한 것 으로, 여성의 사이버 육체가 조종의 수단이자 성적 대상이 된다. 슬래시 팬픽은 정확히 그러한 남성−여성 관계의 역전을 구축한다. 남성의 몸을 탈권력화하고 성애 대상화 함으로써 남성의 몸을 도구 삼아 자신의 성적 환상을 실현 하는 여성 주체를 그려내는 것이다. 그러나 슬래시가 여성 팬들에게 주목받는 것은 에로틱 한 속성보다는 젠더 관계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이런 점에 서 슬래시는 종종 여성적 신뢰(trust)와 돌봄(caring)에 대 한 탐구로 인식된다. 슬래시 속 남성 주인공들은 권력과 지 배라는 전통적인 남성성을 보유하면서도 감정적으로 연약 하고 의존적인 성격도 드러낸다. 점차로 감정 돌봄의 신호 를 인지하는 방식을 학습함으로써 친밀한 관계 속에서 상 호 평등과 자율성을 찾는 과정을 그리는 것이다(Duffett, 2013, pp.172∼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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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Duffett, M.(2013). Understanding fandom: An introduction to th

study of media fan culture. Bloomsbury: New York, London, New Delhi, Sydney. Jenkins, H.(1992). Textual Poachers: Television Fans &

Participatory Culture. New York: Routledge. Mazar, R.(2006). Slash Fiction/Fanfiction. The International

Handbook of Virtual Learning Environments, pp.1141~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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