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 시선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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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한산의 길 오르는데

이 장은 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거나 그 속에서 노니는 작자의 심정을 노래한 작품들이다. 중국 문학사에서 사령운(謝靈運) 이후 산수를 노래한 작 품이 수없이 많지만 한산의 산수시(山水詩)는 여느 산수시와는 다른 독특한 풍모가 있다. 속기(俗氣)라고는 전혀 없이 탁 트인 야인의 성정도 그렇지만 다른 시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오묘한 선적 깨달음이 그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산의 산수시는 대구와 평측 등의 수사 기교에도 신경을 쓴 것들이 많아 비교적 세련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정통 시학의 관점에서 볼 때 한산 시 중에서 문학적 성취도가 가장 높은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층층 바위 내 사는 곳

층층 바위 내 사는 곳 새 다니는 길에 인적은 끊어졌네. 정원 가에는 무엇이 있는가? 흰 구름이 그윽한 돌 안고 있네. 여기 머문 지 무릇 몇 해인가? 봄 겨울 바뀌는 것 누차 보았네. 부귀한 사람들에게 말하노라. 헛된 명성이란 실로 아무런 이익 없네.

重巖我卜居 鳥道絕人跡 庭際何所有 白雲抱幽石 住茲凡幾年 屢見春冬易 寄語鐘鼎家1) 虛名定無益

1) 종정가(鐘鼎家): 예로부터 종과 솥은 가문의 위세를 나타내는 물건이었 다. 종정가는 부귀를 누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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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여러 판본에서 권두에 등장하는 시다. 한산이 사는 곳은 깊은 산속 바위, 그곳은 새만 다니고 사람의 자취는 없는 곳이다. 그 저 간혹 흰 구름이 벗이 되어줄 뿐. 그러나 그 속에는 부귀와 명 성으로 이를 수 없는 고아한 정신세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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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은 깊어

한산은 깊어 내 마음에 맞네. 순수한 흰 돌이고 황금이 아니어라. 샘물 소리가 백아의 금 튕기면 종자기가 있어 이 소리 아네.

寒山深 稱我心 純白石2) 勿黃金3) 泉聲響

2) 백석(白石): 신선과 관련된 신비한 물질로 보기도 한다. ≪신선전(神仙 傳)≫에는 신선이 백석을 삶아 먹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그냥 자연

속의 흰 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3) 황금(黃金): 연단술(鍊丹術) 내지는 연금술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그냥 세상의 황금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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撫伯琴 有子期 辨此音4)

해제

한산이 사람 없는 깊은 산속에 사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어울리 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세상의 부귀를 멀리하고 순수한 자 연의 세계로 돌아왔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 한산이 아 니면 누가 알아주랴. 3언의 짧은 구절이기 때문에 한산의 깊은 정신세계가 더욱 잘 드러난다.

4) ≪열자(列子)≫의 <탕문(湯問)>편에는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면 종 자기(鍾子期)가 백아의 마음을 저절로 알아차렸다는 고사가 있다. 지음 (知音)은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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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가니 시름의 날도 바뀌고

해가 가니 시름의 날도 바뀌고 봄이 오니 만물은 신선한 색이로다. 산꽃은 푸른 물 앞에서 웃음 짓고 바위 동굴에는 푸른 안개 춤추는구나. 벌과 나비는 스스로 즐거워하고 새와 물고기는 더욱 사랑스럽네. 벗과 노니는 정 끝이 없으니 새벽이 다하도록 잠 못 이룬다.

歲去換愁年 春來物色鮮 山花笑綠水 巖岫舞青煙 蜂蝶自云樂 禽魚更可憐 朋遊情未已 徹曉不能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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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사람 없는 한산에서 겨울을 보내면 한산의 마음에도 쓸쓸함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봄이 되어 만물이 소생하면 한산의 마 음에는 생기가 치솟는다. 꽃과 물, 바위와 안개, 벌과 나비, 새 와 물고기, 이 모두가 한산의 벗이다. 그래서 인적 없는 깊은 산 중에 홀로 있지만 벗들과 노니느라 새벽까지 잠 못 이루기도 한 다. 산중의 만물의 생동하는 기운과 시인의 흥겨운 정취가 그 대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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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평생의 도를 즐기는데

스스로 평생의 도를 즐기는데 바위 동굴 사이에는 안개와 넝쿨이네. 야인의 정은 호탕하고 넓은데 늘 흰 구름 벗 삼아 한가롭네. 길이 있어도 세상에 통하지 않고 마음 없으니 무엇을 잡겠는가? 외로운 밤 돌 평상에 앉으니 밝은 달이 한산에 떠오르네.

自樂平生道 煙蘿石洞間 野情多放曠 長伴白雲閑 有路不通世 無心孰可攀 石牀孤夜坐 圓月上寒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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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평생을 바위와 구름과 더불어 사는 호탕하고 넓은 야인의 정이 잘 드러나는 시다. 마음이 세속을 떠나 있기에 길은 있으나 마 나다. 한밤중 홀로 평상에 앉아 있으니 밝은 달이 한산을 비춘 다. 달빛 아래 고요히 앉아 있는 한산의 모습, 이 얼마나 호탕하 면서도 고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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