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 분필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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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uberkreide Kinderliteratur seit 1945 마법 분필 1945년 이후 독일 어린이문학


들어가면서

어린이문학은 문예학과 문학비평에서, 그리고 많은 독자층 에서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한다. 대상 독자를 배려해야 하 기 때문에 정도 이상으로 어려워서는 안 되는 특수 문학으 로 규정된다. 현대문학은−다른 예술 분야들도 그렇듯− 이론적 성찰의 자세, 그리고 일견 사소한 것, 상식적으로 ‘과장되고’ 터무니없어 보이는 것에 몰두하는 인내심 등 독 자에게 노력을 요구한다. 텍스트와 악곡을 이해하려는 사 람, 회화나 아상블라주1), 환경 미술 작품을 앞에 두고 별거 아니라는 듯 쓱 지나치며 무시하는 시선으로 감상할 때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 내려는 사람은 결론을 알 수 없는 인식의 모험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어떤 예술가도 자신의 작품이 재미와 휴식을 제공하며, 고생 없이 배움을 선사하고, 도덕 적으로 재무장하게 해 준다고 장담할 수 없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이 현대에 와서야 예술가 와 예술에 나타난 유별난 특성이라는 의견이 맞는지는 모르 1) (옮긴이 주) 아상블라주(Assemblage): 돌, 나뭇조각, 차바퀴, 머리털 등 자연 물 또는 예술과 무관한 물건을 한데 모아 미술 작품을 만드는 기법 또는 그 러한 기법으로 만든 작품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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겠다. 옛것이란 이미 아는 것이기에 워낙 친숙해서 더 이상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보다는 예술은 예전부터 학문적 소양의 영역이고, ‘소박’하며, 누구라도 기 본 바탕 없이 향유하고 이해하고 생산까지 할 수 있는 것이 라는 발상은 ‘감상적인’ 역사적 구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 해가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어찌 되었거나 어린이문학에는 위에서 말한 소박함이 있 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자를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렇게 감수해야 할 제약이 있다 보니 어린이문학은 성인 독 자에게는 관심 밖에 있는데, 다음과 같이 특별한 이유가 있 는 경우는 예외다. 즉, 성인 독자가 책을 읽어 주거나 함께 읽을 자녀가 있다든지, 독서에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싶은 학생이 있다든지, 어린이문학을 읽으며 성인 자신의 유년기 추억을 되살리고픈 바람이 있다든지 하는 경우, 그리고 위 대한 작품보다 한 수 아래 있는 문학의 폭넓은 범위를 문화 사·일상사·유년사에 관한 중요한 증빙 자료로 보는 학문 적 관심의 경우다.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같은 20세기의 저명한 작가들이 어린이문학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해서, 그리고 어린이문학이 1970년대 이후로 매우 진지한 연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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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이 되었으며 이런 연구가 어느덧 어린이문학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게서도 반향을 불러일으키곤 한다고 해서 어 린이문학이 관심권 밖에 있다는 사실이 감추어지지는 않는 다. 학자들이 자신의 연구 대상인 어린이문학의 가치와 위 엄에 대해 가끔은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보이는 집착은 연 구 대상의 고립성을 극복하기보다는 오히려 강조하는 것에 가깝다. 예를 들어 발터 파페가 집필한 ≪문학적인 어린이 책≫2) 이라는 두껍고 학술적인 저작이 그렇다. 이 책에서 저자는 통속문학으로서 어린이문학이라는 명칭을 단호히 거부한 다[그가 베티나 후렐만(Bettina Hurrelmann), 말테 다렌도 르프(Malte Dahrendorf)와 벌인 논쟁3)을 참조하라]4). 그렇 지만 그가 ‘문학적인 어린이 책’으로 보고(이 말은 곧 통속적 이지 않은 어린이 책으로 본다는 뜻일 텐데) 심도 있게 연구 한 작품들은 어린이문학의 가치에 회의적인 독자들을 납득

2) Walter Pape, ≪Das literarische Kinderbuch≫, Berlin / New York, 1981. 3) (옮긴이 주) 후렐만과 다렌도르프는 어린이문학을 교수법과 교육학적 견지 에서 다루는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특히 1970년대 이후로 어린이문학의 사 회화 기능이라든지 제도 교육 커리큘럼 활용 문제 등을 둘러싼 갖가지 문학 교수법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4) Vgl. Pape, ebd., p.16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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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키기엔 정말로 적당하지 않은 것들이다. 그는 크리스토프 폰 슈미트(Christoph von Schmid), 크리스티안 바이세 (Christian Weiße), 프란츠 폰 포치(Franz von Pocci), 빌헬 름 부슈(Wilhelm Busch), 프랜시스 버넷(Frances H. Burnett)과 같은 작가들을 다루는데, 이들은 누가 봐도 문학적 수준이 매우 상이한 작품을 썼으며, 대다수 책은 이제는 문 학사적 차원에서나 특별한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어정쩡하게 어린이문학을 구출하려는 시도 들보다 이야기꾼에 대한 베냐민의 사유를 발전시킨 한스하 이노 에버스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 그는 이젠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옛일이 되어 버린 이야기하기 문화가 어린이문학 에 여전히 잘 보존되어 있다고 말한다.5) 그렇지만 다른 지 면에서는 에버스 역시 서평과 논고에서 자주 보게 되는, 독 자에 대한 질책에 가담한다. “이면의 깊이에 집착하는 성인 들의 독서에 대해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박하고 순진한 작품을 읽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자세, 이러한 작품을 읽음으로써 작품 속에서 무언가 모자

5) Hans-Heino Ewers, <Die Kinderliteratur−eine Lektüre auch für Erwachsene? Überlegungen zur allgemeinliterarischen Bedeutung der bürgerlichen Kinderliteratur seit dem ausgehenden 18. Jahrhundert>, ≪WW≫ 6, 1986, p.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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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것뿐 아니라 이상적인 것을 발견하려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6) 어린이문학의 ‘게토화’라든지 ‘주변부 지위’를 탄식하는 또 다른 목소리들은 자립적인 연구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어린이문학이 독립적이고, 어린이에 대한 아무런 고려 없 이도 중요한 문학이며, 성인들에게는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도 보람 있는 읽을거리라는 점을 독자적 연구를 통해 증명 해야 할 것이다.”7) 이에 대해서는 어린이문학의 학자들과 작가들이 견해를 같이한다. 작가들은 무시당한다고 느끼고 있는데, 이는 최소한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두말할 나위 없 는 사실이다. 보통 그들의 책에는 성인 문학 작가들의 책에 할당되는 것보다 훨씬 낮은 인세율이 책정되어 있다.8) 파페, 리프, 에버스 같은 대표적인 연구자들은 이론적으 로 엄청난 공을 들여 가며 때론 아주 명료하게, 때론 아주 지 적으로 논지를 전개한다. 그렇지만 이들의 논의에서는 감추

6) Ewers, ebd., p.480. 7) Maria Lypp, <Kinderliteratur als Erwachsenenlektüre? Über ein Aufgabenfeld der Kinderliteraturforschung>, ≪Fundevogel≫ 39, 1987, p.13. 8) 어린이 책 작가들의 인세와 그들의 사회적 지위에 관한 주관적 평가에 관해 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Helmut Müller, ≪Zur Lage der Jugendbuchautoren≫, Weinheim / Basel, 1980, p.59ff.(인세), p.15f.(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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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의도를 읽을 수 있으며, 그래서 기분이 상한다. 비록 그 의도란 것이 최근에 한스요아힘 겔베르크(Hans-Joachim Gelberg)가 “어른들은 어린이 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한 다”9)고 말한 것처럼 사업 수완 좋은 어린이 책 출판업자와 편집자가 하는 요구와는 다르다고 해도 말이다. 그 의도란 어린이 책이 어린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전통적인 중재자의 위치에 있지 않는 성인들에게도 읽을 만 한 가치가 있다는 점을 알리는 것이다. “다만 어른들이 그 가치를 모를 뿐이다.”10) 이런 주장의 힘과 확신의 근원은 근 거 마련의 측면에서는 각기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어린이는 더 나은 인간이라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널리 퍼져 있는 생 각이다.11) 미하엘 엔데(Michael Ende)의 모모를 성인(聖 人)으로 선언한 사회이니 이런 생각에 아주 광범위하고 막

연하게 그리고 별 고민 없이 가볍게 동의할 수 있다. 이런 생

9) 겔베르크는 1988년 9월 9일 베를린 볼프(Wolff) 서점에서 열린 강연에서 위 와 같이 말했다. 10) Lypp, <Kinderliteratur>(각주 7번), p.14. 11) “어린이문학과 청소년문학은 낮은 연령층을 위한 문학일 뿐만 아니라, 어 두운 현실과 어른들의 절망보다 우월한 아이들의 소망과 희망을 그려 내 는 문학이다. 현대 어린이문학과 청소년문학은 어른들의 필수 도서가 되 어야 한다”(Winfried Freund, ≪Das zeitgenössische Kinder- und Jugendbuch≫, Paderborn u. a., 1982,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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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은 어린이라는 신화를 깊이 생각하는 대신 이 신화에 가 담한다. 같은 작가들이 다른 자리에서는 이 신화를 반추하 려고 노력하면서 말이다. 잘 생각해 보면 성인 독자들이 어린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기보다는 어리둥절하게 만드 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따져 볼 때 이 주장은 성인의 유아화 를 의미하지 않을까? 디터 렌첸은 ≪유년의 신화≫12)에서 “성인문화에서 아이다움의 영속화”13)라는 당대 경향을 탁 월하게 파헤쳤다. 이로써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당연시했으 며 일상화한 생각이자, 교육학과 심리학, 어린이문학 연구 에서는 금기가 된 ‘아이들 편들기’라는 관념에 도전한다. 그 가 새로운 ‘부정적’ 교육학의 대변자가 되었다는 말은 아니 다. 그의 관심은 오히려 “오로지 그저 인간적인 것”14)을 지 향한다. 아이들과 어른들에 대한 편들기를 포기할 때 비로 소 “선택한 입장으로 인해 결과가 미리 정해지는 일이 없는”, “유년의 상황에 대한 선입견 없는 분석”15)이 가능하다는 것

12) Dieter Lenzen, ≪Mythologie der Kindheit. Die Verewigung des Kindlichen in der Erwachsenenkultur. Versteckte Bilder und vergessene Geschichten≫, Reinbek, 1985. 13) ≪유년의 신화≫의 부제이기도 하다(각주 12번). 14) Ebd.,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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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의 주장이다. 책 도입부에서만 해도 너무나 일반적이고 자의적으로 들 리던 그의 주장은 연구가 진행되면서 구체화해 전체 생애 주기로 관심 영역을 확장한다. 그는 수명을 단계별로 나누 어 놓은, 삶의 종점인 죽음과 연관되기 때문에 흐르는 시간 으로 느껴지는 연령대라는 관념을 (겉보기에) 영원한 삶의 신화, 즉 유년의 영속화가 대체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렌첸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1986년에 잭 자이프 스는 미국 사회에서 “영원한 유년”을 이미 현실화했다며 그 와 같은 주장을 한다. “유년기와 사춘기는, 어른이 되지 않 으려고 기를 쓰며 사회적·정치적 책임을 거부하는 미국인 들에게 지속되는 상태다. 유년기와 사춘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점점 더 그리고 아주 합리적인 방식으로 미국 사회 를 지배하고 있다.”16) “영원한 유년”이라는 것이 얼마나 의심쩍은지에 대해서 는 디터 리히터나 에버스가 “나이 먹은 아이”라는 문학 속

15) Ebd., p.22f. 16) Jack Zipes, <Huckleberry Finns arme Erben. Alltagshelden in der zeitgenössischen amerikanischen Adoleszenzliteratur>, ≪Neue Helden in der Kinder- und Jugendliteratur≫[Klaus Doderer(ed.)], Weinheim / München, 1986,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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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연구를 통해 강조한 바 있다.17) 빌헬름 하우프(Wilhelm Hauff)의 ≪난쟁이 무크≫와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Christine Nöstlinger)의 ≪후고, 가장 좋은 시절의 아이≫ 는 각각 19세기와 20세기의 예다. 리히터와 에버스는 각자 의 분석에서 어른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의 웅크린 이미지를 제시한다. 이는 환하게 빛나는 피터팬이 아닌 아웃사이더와 장애인의 이미지다. 미국 사회에 대한 자이프스의 글과 마 찬가지로 리히터나 에버스의 연구도, 어린이문학 연구가 종 종 눈에 띌 정도로 연구 대상을 편들지만 렌첸의 주장으로 부터 더 이상 아주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겠다. 아무튼 앞으로는 어른들이 아이들과 친구해 주느라 읽는 것 외에도 어린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주장은 “월트 디즈니 가 왕으로 있는”18) 영원한 유년기라는 치명적인 생각을 불

17) Dieter Richter, ≪Das fremde Kind. Zur Entstehung der Kindheitsbilder des bürgerlichen Zeitalters≫, Frankfurt, 1987, p.280∼285. Hans-Heino Ewers, <Kinder, die nicht erwachsen werden. Die Geniusgestalt des ewigen Kindes bei Goethe, Tieck, E. T. A. Hoffmann, J. M. Barrie, Ende und Nöstlinger>, ≪Kinderwelten. Kinder und Kindheit in der neueren Literatur. Festschrift für Klaus Doderer≫, Weinheim / Basel, 1985, p.42 ∼70. 18) Zipes, <Huckleberry>(각주 16번),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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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낸다. 그런 유년기는 아이들이 제약받지 않고 온갖 책에 접근할 수 있는 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런 사회에 서는 문자의 세상 전체가 아이에게 개방되어서 아이는 자신 의 독서욕과 지적·미적 호기심이 미치는 만큼 많은 것을 얻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영원한 유년의 사회에서는 세상이 모든 독자에게 어린이 책의 판형으로 줄어드는 것이다. 어린이를 위한 특수 문학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려는 시도 는 여러 가지 논거를 통해 반복적으로, 특히 19세기에 집중 적으로 반박되었다. 하인리히 볼가스트는 “청소년을 위하 여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청소년을 위한 글을 써서는 안 된다”라는 테오도어 슈토름(Theodor Storm)의 말에 동 의한다. 그러면서 “유치한 기법”을 비판하며 소재와 형식을 제멋대로 “유년에 맞는 것”이 되게 손질해 버리는, “가뿐히 소화되는 음식”으로서의 문학을 비판한다.19) 그가 연구 대 상으로 삼았던 역사적 상황은 비록 다를지라도, 유치함에 대한 비판은 지금 상황에서도 유효하다. 어쨌거나 어린이문학은 존재하고, 심지어 그 시장은 팽

19) Heinrich Wolgast, <Die Aufgabe der poetischen Jugendlektüre>(zuerst 1896), ≪Die Diskussion um das Jugendbuch. Ein forschungsgeschichtlicher Überblick von 1890 bis heute≫[Jörg Becker(ed.)], Darmstadt, 1986, p.19;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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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하고 있으며, 어린이문학의 저명 작가인 엔데가 장차 그 렇게 되었으면 하고 기대했던20) 어린이문학의 폐기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성인뿐 아니라 어린이 독자도 위협하는 유 아화의 위험이 있지만, 어린이문학의 폐기는 적어도 현재로 서는 바람직하지도 않다. “아이들은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 이 익숙하지 않다”21)는 리프의 현실적 관찰은 두말할 나위 없이 옳다. 당연히 아이들은 초심자다. 언어 능력과 독서 능 력 습득, 제반 지식 분야와 복잡하고 조망 불가한 현실을 인 식하고 극복해 가는 능력 등 어느 모로 보나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 책은 불필요한 게 아니다. 유년기 동안 어린 이 책은 어린이에게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되고 용기를 주는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좋은 책은 정보를 제공하며 여러 지평 을 열어 주고 감각의 인지 능력을 예리하게 하며, 사회적인 상상을 촉진하고 언어적·문학적으로 향유 능력과 인식 능 력을 일깨운다. 어린이 책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아이를 놓아주지 못하 20) Michael Ende, <‘Literatur für Kinder?’ Rede anlässlich der Verleihung des ‘Großen Preises der Deutschen Akademie für Kinder- und Jugendliteratur. Volkach 1980’>, ≪Neue Sammlung≫ 21, 1981, H.4, p.310∼ 316. 21) Maria Lypp, ≪Einfachheit als Kategorie der Kinderliteratur≫, Frankfurt, 1984,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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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어머니들처럼 책이 아이를 꼭 붙들고 있을 때다. 아이는 성장하면서 어린이 책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어린이 책 자 체가 성장을 도와서 결국에는 없어도 그만인 물건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파페는 클라이브 루이스(Clive S. Lewis)의 의견을 빌려 어린이문학을 “통과 독서물”22)로 보는 견해를 반박한다. 왜 그럴까? 그게 욕이라도 되는가? 유년은 하나 의 이행 과정이며 통로다. 어떤 아이가 어른이 되고 싶지 않 아 하며, 어느 어른이 아이가 크는 걸 바라지 않을까? 장 샤토는 아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자고 힘주어 피력하 는 글에서 “아이를 존중한다는 것은, 아이가 성숙하도록 이 끌어 주는 것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썼다. “자신에게 가장 즉흥적인 활동이며 자신의 삶에서 본질적인 활동이라 할 놀 이를 하면서 항상 진지함을 견지하는 존재, 이 존재를 당신 은 시답지 않은 장난으로 낚으려 한다니! … 자기 스스로는 다 컸다고 생각하는 존재, 그런데 당신들은 아이로 다루는 존재!”23) 여정이 도착에 비해 무가치한 게 아니듯이, 유년기를 통 로라고 보는 생각이 평가절하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

22) Pape, ≪Kinderbuch≫(각주 2번), p.18. 23) Jean Château, ≪Das Spiel des Kindes≫(frz. 1964), dt. Paderborn, 2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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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죽음 말고 다른 도착점이 있는가?) 통로란 아슬아슬하 기 짝이 없으며 위험이 도사린 곳이다. 조력자는 반갑고 또 필요한 존재다. “통과 독서물”도 마찬가지다. 최고의 어린 이 책은−나는 이 점에서는 앞서 인용한 모든 어린이 책 연 구자들과 의견을 같이한다−의심할 것도 없이 가장 멀리까 지 아이들과 동행하는 책, 유년과 성인 세계 사이의 간극에 다리를 놓는(리프의 개념이다)24) 책, 독자와 하나가 된다 하 더라도 아직 온전히 이해되지 못하고 완전히 파악되지 못한 부스러기가 남는 책, 오래오래 어쩌면 일생 동안 생각하고 기억할 거리를 주는 책이다. 항상 그 안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사유 이미지를 제공하는 책이다.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쉬워야 하는 의무가 있는데도 어느 정도 미 학적 복합성을 지니고 있는 책은 통속적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는다. 물론 어린이문학의 역사에서 그런 책은 예나 지금 이나 드물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나머지 책을 더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소 홀히 다룰 건 아니다. 모든 별것 아닌 책 무더기 중에는 온정 어린 이미지를 간직한 것도 있고, 인상적인 형상을 독자에 게 전달하는 것도 있다. 관습적인 해피엔드로 작가 스스로

24) Vgl. Lypp, ≪Einfachheit≫(각주 21번),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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