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심의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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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방송심의 김영호

대한민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표현의 자유와 방송심의

방송심의 제도는 꼭 필요한가 2005년 KBS 2TV 드라마 <올드미스 다이어리>에서 며느 리가 시어머니의 뺨을 때리는 장면, 2008년 MBC <PD 수 첩> 광우병 방송에 대한 심의 제재 결정 등은 방송심의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킨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이처 럼 방송의 윤리성이나 공정성과 관련한 사건들이 발생하 면 평소에는 그 존재나 기능에 대해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심의라는 제도에 대해 이목이 집중되고 그 심의 결과 에 따라 ‘심의 무용론’이나 ‘심의 강화론’이 대두되어 팽팽 한 의견 대립을 보이기도 한다. 방송심의는 과연 필요한 제도인가? 필요한 제도라고 한 다면 그 철학적, 이론적 근거는 무엇인가? 만약 불필요하 다면 방송사 또는 방송 제작자의 양식에만 맡겨 두어도 괜 찮을까? 다른 언론 매체, 예를 들면 신문 등에 대해서는 심 의를 하지 않는데 방송에 대해서만 심의를 하는 이유는 무 엇일까? 심의가 꼭 필요한 제도적 절차라고 한다면 ‘사후 약방문’ 격인 현행 심의 방식보다는 차라리 문제 있는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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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물 또는 프로그램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실효성이 있 는 것이 아닐까? 심의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할까? 방송에서 심의라는 문제는 오랫동안 관행적으로 이루 어져 왔기 때문에 당연히 거쳐야 하는 절차쯤으로 여기지 만 실제로는 그 정당성이나 타당성에 대해서 여러 가지 대 립되는 의견과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 논란의 출발점은 바로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와의 충돌이다. 표현의 자유는 영국에서 밀턴(John Milton)이 일찍이 17세기 중엽 󰡔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ca)󰡕(1644)라는 저작물을 통해 주장한 이후 민주주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로크(J. Locke), 󰡔자유론󰡕의 저자인 밀(J. S. Mill) 등을 거 치며 서구 민주주의 발전에 기본 골격이 되었으며, 이후 현대 민주주의의 존립과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기본권으 로 자리 잡게 되었다. 표현의 자유란 정부를 포함해 그 누 구의 제한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의견 을 말하고, 쓰고, 인쇄하고, 공표할 수 있는 자유이자 권리 를 의미한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보장 없이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는 없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랜 세월에 걸친 투쟁을 거쳐 이룩한 민주주의의 역사는 말을 막으려는 자 와 자유롭게 말을 하고자 하는 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 과 조정 과정이라고도 요약할 수 있을 만큼, 표현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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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자유 중 가장 으뜸이 되는 자유 일 뿐만 아니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만 다른 자유도 비로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밀턴은 국가 권력이 저지르는 부당한 검열에 항의해 발 표한 󰡔아레오파지티카󰡕에서 후세 학자들이 ‘사상의 자유 공개 시장 이론’이라고 이름 붙인 주장을 펼쳤다. 밀턴은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에 대해 누군가가 옳고 그르다고 판 정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마치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의 원 리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고 좋은 상품은 소비자에게 선택 되고 불량품은 시장에서 도태되듯이 다양한 사상들이 자 유롭고 공개적으로 경쟁하도록 하면 결과적으로 선과 정 의, 진리만이 존속할 것이며, 인간은 이성의 힘에 의해 자 가 수정 과정을 통해 최선의 사상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표현의 자유는 영국에서는 1649년의 인민협정 (Agreement of the People)에서 선언되고, 1695년에 검 열법의 폐지로 확립되었으며, 미국에서는 1776년의 버 지니아 권리장전, 1791년의 수정헌법 제1조, 1789년 프 랑스 인권선언 등에서 이 자유가 규정된 이래 세계 각국 의 헌법에서 기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역시 제21조에서 “모든 국민은 언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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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사상이나 의견을 외부에 표현하는 자유로서 개인적 표현의 자유인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단적 표현 의 자유인 집회·결사의 자유를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표현의 자유는 단순히 자유로운 의견의 표 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표현된 의견에 대한 전파의 자 유도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 표현의 자유는 개인의 권 리에서 출발해 서적, 신문, 잡지 등 인쇄 미디어의 발달과 방송이라는 전파 미디어가 등장함에 따라 미디어 활동의 자유를 의미하는 언론의 자유로 초점이 모아지고 구체화 했으며, 현대에 들어서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에 따라 다 양한 정보통신 매체들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함에 따라 표 현 자유의 영역은 점차 확대일로에 있으며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가 갖는 가치에 대해 에 머슨(Emerson, 1963)은 첫째, 개인의 자아실현을 보장하 기 위한 수단이며 둘째, 지식을 발전시키고 진리에 도달하 기 위한 필수 과정이며 셋째, 자유로운 의견 표현을 통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공동 사회 결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하며 넷째, 사회적 변화에 안정을 유지하는 수단이라고 요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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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처럼 개인이나 사회를 위해서 중요한 표현 의 자유와, 규제라는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방송심의가 추구하는 가치는 충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본적인 의 문에 부딪친다. 심의(審議, deliberation)란 사전적 의미 에 따르면 ‘심사하고 의논함’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논 란의 소지가 있는 사안에 대해 조사, 검토하고, 합의한다 는 뜻이다. 심사라는 단어에는 옳고 그름이나 우열을 판 가름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가 추 구하는 궁극적 가치인 자유롭고 공개된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선과 정의, 진리에 스스로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과 는 상충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심의라는 단어 자체에 내 포되어 있는 부정적 의미 때문에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영문 명칭은 심의를 뜻하는 ‘delibertation’ 대신 표준, 기 준, 규범을 의미하는 ‘standard’라는 단어로 표기하고 있 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영문 명 칭은 Korea Communications Standards Commission이 다). 그렇다면 방송에서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간섭과 제 약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방송에 대한 심의가 방송의 태 동 이후 현재까지, 우리나라를 비롯해 서구 등 세계 각국 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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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의 공익성과 방송심의 방송은 신문이나 통신 등 다른 매체와 달리 공익성이라는 개념이 그 존재의 근거가 된다. 공익(public interest)이란 공공과 이익의 합성어로 공중의 이익, 다수의 이익을 의미 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를 방송에 적용하면 헌 법의 국민주권주의, 방송법의 공공복지의 증진, 방송 강 령의 공정성, 다양성, 균형성을 실현하는 것을 의미하며, 프로그램 편성과 제작에서 성별, 연령별, 직업별 이익을 균형 있게 표현하고, 수용자의 참여가 보장된 방송으로서 방송 제도의 유형에 따라 적절한 이익을 실현하는 것을 의 미한다. 방송에서 공익성 개념을 중시하는 근거는 방송 자원인 전파의 공공성, 즉 소유적 근거와 희소성, 그로부터 비롯 되는 수탁 개념과 방송의 사회적 영향력과 책임 때문이다. 전파 자원은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천이나 강 또는 바다의 물이 어느 개인의 소유일 수 없듯이 국민이 소유하 고 있는 자원이자 자산이다. 뿐만 아니라 전파는 공기나 물처럼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아니다. 방송 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무선 주파수 대역은 극히 제한적 이다. 전파의 희소성은 방송의 경우는 아니지만 이동통신 사들이 무선 주파수 대역 확보를 위해 수천억 원 대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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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는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치열한 경쟁을 통해 주파수 를 확보하려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소유권이 국민 모두에게 있는 전파라는 자원을 사용하는 방송은 국 민 모두의 이익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더욱이 전파는 한 정된 자원이기 때문에 이를 사용해 방송을 할 수 있는 사 업자는 공익에 따라 엄중하게 위탁 관리할 책임을 부여받 은 공공 수탁 관리자로 간주되고, 이들에게는 매우 엄격하 고 높은 수준의 공익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책임을 부 과하고 있다. 미국에서 1920년에 최초의 정규 방송인 KDKA국을 개 설했을 때만 해도 언론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미국의 전통적인 언론 철학에 따라 방송 역시 신문 등 다른 매체 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보장받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1927 년 무렵 라디오 방송국 수가 700여 개에 이르자 전파의 혼 선을 방지하기 위해 방송국의 채널, 주파수, 출력, 방송 구 역 등에 대해 정부의 규제가 불가피하게 되었고, 방송국 개설을 원하는 사업자들 중 심사를 거쳐 일부에게만 허가 또는 면허를 내주는 기준으로 작용한 것이 바로 공익성이 다(방윤현, 2009). 따라서 방송의 공익성은 방송 사업을 할 수 있는 권리, 즉 면허를 부여하는 데서부터 출발해 이 를 잘 준수하고 있는지 감시하고 규제하는 장치라고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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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심의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명분이자 기준이 되 는 핵심 개념이다. 그렇기는 해도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떠한 법률도 제정할 수 없다”라고 수정헌법 제1조에 못 박고 있을 정도 로 언론의 자유에 대해 거의 제한 없는 보장을 하고 있는 미국의 언론 자유 관점에 비추어 볼 때, 방송국에 대한 면 허제와 허가 취소 등의 규제는 헌법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 라고 하는 반발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69년 미국의 레 드라이언 방송국과 FCC(연방통신위원회) 사이에 벌어진 소송에서 미 대법원은 전파의 희소성을 이유로 방송 내용 에 대한 규제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판결로 FCC의 손을 들어주어 이 논란에 대해 중요한 판례를 남겼다(방윤현, 2009).

방송의 발전과 심의 제도의 변천 신문은 물론 방송 역시 그 태동기인 20세기 초반부터 철저 히 사기업으로 운영되고 있는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 방 송의 역사는 일제 시대인 1927년 경성방송국(JODK)의 개 국부터 1950년대 중반 이후 민영방송들이 개국하기 이전 까지는 국영(관영)방송만이 존재했기 때문에 방송에 대한 규제는 당연시되었으며, 이에 대한 반발이나 이의 제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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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당시의 유일한 방송국이었 던 현 KBS는 중앙방송국이라는 명칭 그대로 공보처 산하 의 한 부서로 독립적인 언론 매체라기보다는 정부 시책을 홍보하고, 음악이나 연속극 등을 내보내는 정부의 선전 도 구이자 오락매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방송에 대한 이러 한 인식, 정부의 규제나 간섭을 당연시하는 분위기는 민영 방송이 출현했던 1960년대 후반까지도 방송 종사자나 정 부 그리고 일반 국민들 사이에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 들여졌다. 때문에 방송심의 역시 특별한 갈등이나 저항 없이 당연히 있어야 하는 제도이자 거쳐야 하는 절차 정도 로 자리 잡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무선통신에 의한 송신’, 즉 전파를 수단으로 하는 지상 파 방송(라디오와 텔레비전)만이 존재하던 시절에는 전파 의 공공재 성격과 희소성, 공공수탁이론에 따라 방송은 공 익적이어야 하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규 제가 불가피하다는 사회적 합의에 명분과 정당성을 부여 했다. 그러나 무선 전파를 수단으로 하지 않는 케이블방 송, 즉 유선방송의 등장으로부터 오늘날 다매체, 다채널 을 의미하는 디지털 방송 환경에서는 전파의 희소성을 근 거로 하는 방송 규제의 타당성과 명분은 상당 부분 상실된 셈이다. 그렇다고 전파를 수단으로 하는 지상파 방송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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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서만 규제를 하고 케이블 등 다른 형태의 방송에 대해 서는 규제를 하지 않는 이중 잣대를 적용하기에는 어떠한 형태의 방송이든지 그것이 미치는 막중한 사회적 영향력 과 그에 따르는 책임으로 볼 때 적절치 않다고 볼 수 있다.

다채널 시대의 방송심의 현재 우리나라에서 방송되는 텔레비전의 채널은 몇 개쯤 될까? 지상파 방송 3사의 4개 채널과 EBS, 그리고 경인지 역 방송인 OBS까지 합해 6개 정도인 것까지는 잘 알겠는 데, 그다음부터는 어지간한 전문가들조차 헷갈린다. 2012 년 11월 현재 방송통신위원회에 등록된 방송채널사용사 업자는 총 156개로(한진만 외, 2013) 케이블, 위성, DMB, IPTV 등 다양한 전송 방식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정작 자신이 채널을 몇 개까 지 시청할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채 널의 수가 많기도 하지만 가입한 서비스의 종류에 따라 제 공받는 채널의 수가 다르기 때문인데, 대략적으로 50개 내외의 채널을 제공받고 있다. 지금부터 불과 채 20년도 안된 1995년, 케이블 텔레비전이 종합유선방송이라는 이 름으로 출현하기 이전 지상파 방송 대여섯 개 채널만이 존 재했던 시절과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상전벽해와 같은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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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인 것은 맞지만 채널의 양적 증가만큼 텔레비전 수용 환 경이 풍요로워지고, 그 풍요가 시청자들을, 다르게 표현 한다면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을까?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가 갖고 있는 장점은 생산자들 간 자유롭고 치열한 경쟁을 통해 상품이나 서비스의 질이 좋아지고 가격은 저렴해져 결국 그 이익이 소비자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방송에서도 이러한 공식이 그대로 적용된다면 채널의 증가로 인한 경쟁이 프 로그램의 질적 개선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 렇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일반 상품이나 서비스는 판매량이 그 제품의 우열을 가리는 기준이라면 방송 프로 그램은 시청률이 그 기준이 된다. 그러나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이 곧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등식에 대해서는 경 영 실적에 급급해 하는 일부 방송 경영자를 제외한다면, 심지어는 그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사람들조차도 동의하 지 않을 만큼 방송 프로그램은 시장 경제의 원리가 작동하 지 않는 독특한 구조다.

좋은 방송은 어떤 방송일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시청자들이 텔레비전에서 기대하는 것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재미와 유익함이다. 재미라는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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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인간의 감성적 측면에 호소하는 것이라면 유익함은 이성적 측면에 호소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는데, 텔레비전 시청에서는 이성보다는 감성이 더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 이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물건을 고를 때에는 가격, 제품의 질 등을 꼼꼼하게 따지지만 프로그램은 상품 고르듯이 선 택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일반 상품은 선택할 때마다 지갑 을 열어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합리적인 소비를 하 지만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이라는 상품은 많이 소비하든 적게 소비하든 어떤 상품을 고르든 월 2500원의 TV 수신료 에 더해 대부분 월 몇 천 원 수준의 유선방송 수신료만 지 불하고 리모컨만 만지작거리면 해결되기 때문이다. 좋은 프로그램의 기준은 사람에 따라 다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 보내기에 적당히 재미있으면 충분하 다고 여길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시청자에게 무언가 를 줄 수 있는 유익한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 기도 한다. 모두 맞는 말이다. 텔레비전을 시청하도록 유 인하는 요소가 재미라면, 시청을 통해서는 정보일 수도 있 고,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시각일 수도 있는 그 무엇 인가를 얻을 수 있는 프로그램, 즉 재미와 유익함이 적절 하게 배합되어 있는 것이 좋은 프로그램이다. 물론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는 프로그램들이 아직까지는 다수이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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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루에도 프로그램 수백 편이 쏟아져 나오다 보니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건 고사하고 오히려 시청자들이나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수준의 프로그램들도 적지 않은 것 이 현실이다. 또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질 높은 프 로그램들이 시청률 경쟁에서 밀려 점차 도태되는 현상도 나타난다. 종합편성채널은 출범 당시 높았던 기대와 달리 뉴스, 시사 대담, 예능 프로그램 위주의 편성에 치중되어 있어 종합이라는 이름 자체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더 욱이 지상파 방송들은 수십 년의 역사로부터 비롯되는 경 륜으로 후발 방송사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이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이거나 역으로 수준 낮추기 경쟁이 라도 하는 듯한 행태의 프로그램들을 쏟아내고 있어 다채 널 시대라는 기술적 진보가 내용 측면에서는 퇴행으로 나 타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든다.

기술의 진보 못 미치는 내용의 변화 이명박 정부 이후 미디어의 기업화를 지향하는 정책에 따 른 소유 규제 완화 등의 시책이 결과적으로 방송 채널 수 준의 하향 평준화라는 문제를 초래한 셈이 되었는데, 이 문제를 풀자면 통신 분야와 융합 등 규제 완화 정책과는 반대로 내용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모순에 직면하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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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방송이 갖고 있는 양면성, 즉 사회적 공기로서 언론적, 문화적 측면과 기업적 측면이라는 문제는 앞서도 살펴본 바 있듯이 방송 프로그램이라는 상품 고유의 특성 때문에 상호 보완적으로 조화를 이루기가 매우 어렵도록 되어 있 다. 특히 일정 규모 이상의 시청자들을 확보하지 못하면 규모의 경제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방송 시 장의 특성으로 볼 때 군소 방송 채널들에 의한 ‘빈곤의 악 순환’적 상황은 좀처럼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방송 시장은 더욱 혼탁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방송 통신의 융합, HDTV, 3D TV의 등장 등 방송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우리 나라의 기술적 수준은 세계 최정상을 자랑하고 있지만 정 작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물, 즉 프로그램에는 별다른 변 화가 없거나 오히려 질적 수준이 저하되고 있다면 큰 문제 가 아닐 수 없으며, 무엇을 위한 기술적 진보인지에 대해 회의마저 들게 만드는 것이 최근 우리 방송의 현실이다. 마치 음식물을 담는 그릇은 과거의 소박한 뚝배기에서 크 리스털로 눈부시게 바뀌었는데 그 안에 담긴 음식물은 인 공 조미료 범벅으로 모양만 그럴듯할 뿐 영양가는 하나도 없거나, 심지어는 입에만 달콤할 뿐 잘못 먹으면 질병까지 도 유발하게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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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급변하는 방송 환경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 에 대한 훼손 없이 방송의 공익성과 공적 성격이라는 기본 을 흔들림 없이 유지하기 위해서는 방송심의 제도가 중요 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현재 우리나라 방송이 처해 있는 문제들을 방송심의라는 잣대를 통해 사례 중심으로 진단 해 보고자 한다. 심의의 주요 관심 분야인 공정성, 윤리성, 선정성, 소재와 표현, 방송의 품위 등을 시사, 보도, 드라 마, 코미디, 예능 프로그램 등 프로그램 장르와 연계해 살 펴보고, 어린이·청소년 보호와 간접 광고의 현황과 문제 점 등 방송심의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도 다루었다. 물론 현행 방송심의 제도가 최선은 아니기 때문에 그 한계와 개선 방안도 모색할 것이다. 다만 지면 의 제한으로 오염이 심각한 방송 언어 문제와 선거 방송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했다. 또한 외국의 방송심의 제도나 사례 역시 지면 부족으로 살펴보지 못했다. 특히 시대와 사회상의 변천에 따라 심의 기준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 를 살펴보고자 했으나 자료 부족으로 손을 대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책에서 지적한 사례들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의결되어 󰡔방송심의 사례집󰡕 등에 수록되거나 위원회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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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의 방송심의 의결 현황에 공표된 것들 중에서 본문 내용과 관계된 것들을 대상으로 했다. 특히 본인이 2011 년 9월부터 2013년 9월까지 2년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연예·오락방송특별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며 직접 심 의에 참여했던 것들을 그 대상으로 주로 했기 때문에 2011 년 이후의 사례나 통계자료 등을 많이 인용했다. 사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제재를 받은 방송사나 프로 그램의 이름을 명시한 것에 대해 해당 방송사나 관계자들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모 방송사’, ‘모 프로그램’ 등으로 서술해서는 정 확한 내용이나 맥락을 제대로 전할 수 없어 구체적으로 밝 힐 수밖에 없었던 점에 대해 관계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참고문헌 강준만(1997). 󰡔대중매체 법과 윤리󰡕. 인물과 사상사. 권영성(1998). 󰡔헌법학원론󰡕. 법문사. 방윤현(2009). 󰡔지상파 방송 자율심의 시스템의 타당성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한진만 외(2013). 󰡔방송학개론󰡕. 커뮤니케이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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