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번역_맛보기

Page 1

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문화 번역 마정미

대한민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문화 번역이란 무엇인가

바벨탑 “온 땅의 구음이 하나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 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 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 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 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 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쌓기를 그쳤더라. 그러 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세기 11장 1∼9절).”

v


낯선 언어를 쓰는 사람들 구약성서 창세기에는 바벨탑에 관한 짧지만 드라마틱한 일화가 실려 있다. 높고 거대한 탑을 쌓아 하늘에 닿으려 했던 인간들의 오만한 행동에 분노한 신들이 본래 하나였 던 언어를 여럿으로 분리하는 저주를 내렸다는 것이다. 바벨탑 건설은 결국 혼돈 속에서 막을 내렸고, 탑을 세우 고자 했던 인간들은 불신과 오해 속에 서로 다른 언어들과 함께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태초에 인간이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언어가

<그림 1> 피터르 브뤼헐의 <큰 바벨탑>

출처: http://www.olestig.dk/babel/breughel.html

vi


다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는 불확실성을 높여 낯선 언어를 쓰는 이들을 이방인, 이교도, 야만인이라고 부르며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로 대하게 만들었다. 흥 미롭게도 이것은 서로 다른 언어가 만드는 이질감과 경계 심을 보여 주는데, 본질적으로는 타자에 대한 자신의 공포 심을 감추기 위한 은유다.

민족과 국가의 탄생 서양 중세 시대에 학문과 신앙의 언어로서 독점적인 지위 를 누렸던 것은 라틴어였다. 그러나 국제어로서 권력과 영예를 누렸던 라틴어는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과 종교 개혁으로 인해 쇠락하기 시작했다. 라틴어가 각국의 언어 인 지방어로 대체되면서 민족어는 민족국가, 민족주의와 함께 근대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중세의 기독교적 공동체가 붕괴하면서 보편주의적 정 체성은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민족국가를 단위로 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재구성되었다. 이때 각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공통의 언어와 문자는 필수였다. 특히 활자 언 어와 그 주요 매체인 신문이나 소설 등은 ‘민족(nation)’의 식을 형성하는 주요 수단이 되었다. 베네딕트 앤더슨

vii


(Benedict Anderson)에 따르면, 인쇄물과 신문을 통해 같 은 언어의 장(language-field)에 있는 수십만 혹은 수백만 의 사람들은 동료 독자들과 함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민족 으로 ‘상상된’ 공동체를 형성했다고 한다. 근대 민족을 형 성하는 데 국어는 필수였던 것이다(Anderson, 1983). 지배자의 관점에서도 국어는 통치에 대단히 효율적인 도구였다. 통치의 효율성 때문에 국어의 형성과 보급 확 대가 추진되었다. 무엇보다 정부는 행정어를 통일해 중앙 집권을 강화하고, 보다 효과적인 수취 체제를 만들 수 있 다. 법이나 행정 체계의 전국적 동질화는 자본가에게도 유리한 시장 조건을 제공해 주므로 중앙정부는 자본가의 지원과 협력을 끌어낼 수 있다. 또한 내부의 동질성에 기 초한 국민 통합을 확보하는 데도 유리하다. 때문에 근대 국가 형성을 핵심 내용으로 포함하는 근대화 과정에는 기 본적으로 ‘민족어’를 매개로 한 거주민의 동질화와 표준화 가 뒤따랐다(Anderson, 1983; Hobsbaum, 1990).

번역과 반역 1519년 멕시코를 정복한 스페인의 에르난 코르테스는 그 의 원주민 정부이자 통역가인 말린친을 통해 점령하려는 지역의 나우아족과 대화하려고 했다. 나우아의 한 도시인

viii


촐롤라는 코르테스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말린친은 이 도시의 남자들이 400명에 지나지 않는 소규모 스페인 군 대에 대항하기 위해 매복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것 을 코르테스에게 보고했다. 코르테스는 그 매복 장소를 에워싸고 3000명의 촐룰라(cholula)인들을 함정에 빠뜨 려 살육했다. 이것은 스페인이 멕시코를 정복하는 전기 가 된다. 말린친은 멕시코인들이 종종 민족의 반역자라 고 비난하는 인물이다. 그녀의 경멸적인 별칭인 ‘화냥년 (La Chingala)’은 배반도 배반이려니와 남자들 사이에 낀 여성, 단일어 사용자들 사이에 낀 다국어 사용자로서 그녀 가 처해 있던 입장을 드러낸다. 이런 점에 비춰 볼 때 번역과 식민주의는 애초에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역사적 배경을 바탕에 깔고 있다. 유럽 제 국주의 맥락에서 식민화의 기제로 활용된 번역은 피지배 민족을 계몽한다는 명분으로 여러 측면에서 피지배 민족 의 언어에 불평등한 권력을 행사한다. 따라서 번역은 주 로 국경을 기준으로 언어와 문화들의 경계를 가르고 구분 하면서 근대적 정체성의 범주를 구성하고 규범화하는 핵 심 기제이자, 그 정체성을 규율하고 통제하는 ‘체제’이기 도 하다(박선주, 2012). 번역을 통한 문화 교류의 관점에서 보면 근대는 번역의

ix


영향과 충격으로 요약될 수 있다. 비서구의 경우 근대는 ‘서양의 문명’이라는 외부 충격에서 시작되었다. 이 충격 은 대부분 ‘문명’의 언어를 모국어로 번역하는 것이거나, 모국어와 문명의 언어 사이에 등가성을 설정하는 행위로 나타났다. 서구의 경우 비서구와 접촉함으로써 서구 중심 적 문화 정체성을 형성하였는데, 번역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과정은 서구 문화 내부에 들어온 비서구 영향이 남 긴 흔적을 지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제국주의와 번역 제국주의적 시선은 비서구를 ‘원시’로 탈역사화하고 타자 화하는 것이다. 서구의 타자로서 비서구를 바라보는 이분 법적 구도는 고전적인 인류학의 작동 방식이며, 바로 그것 이 서구의 주체적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기제로 사용되고 고착되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탈식민주의적 이론과 실천의 노력은, 이러한 구도를 벗어나는 문화적 접촉 및 그 재현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이기도 하다(윤조원, 2011). 흔히 번역이란 원문 텍스트(source text)에서 수용 텍 스트(target text)로 그 의미를 몰개성적으로 전달하는 과 정으로 여겨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번역가들은 어 떤 편견이나 왜곡을 피하여 원문 텍스트의 의미를 온전히

x


전이하는 데 주력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김은령, 2009). 그러나 최근 ‘번역’이라는 의미는 단순히 언어학적 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를 전달하는 유 력한 과정으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다시 말해 번역은 단순히 언어를 일대일 대응시키면서 트랜스 코드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두 언어 세계의 문화를 소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번역에 주목하는 연구자들은 원문 텍스트 보다는 오히려 수용 텍스트 쪽으로 관점을 전환하고 있고, 이 지점에서 번역은 단순히 언어학적 번역을 벗어나 문화 번역의 차원으로 전환한다. 예컨대 탈식민주의 이론가인 더글러스 로빈슨(Douglas Robinson)은 번역의 문제를 탈 식민주의 연구와 맥을 함께하는 것으로 다루고 있는데, 그 는 권력의 문제와 저항, 재위치, 재번역 등의 주제를 번역 의 연구 영역으로 끌어들여 종국에는 번역이 탈식민화의 채널이라고 주장한다(Robinson, 1997). 최근 인류학계와 영문학계에서 문화연구의 한 방법론 으로서 관심이 높아진 문화 번역(culture translation)의 관점에서 보면 ‘문화 번역’은 번역이 이루어지는 특정 시 공간적 맥락과 문화 번역의 행위자에 대한 이해를 수반하 는 총체적 과정이다(김현미, 2001). 번역과 문화의 관계는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의 번역 개념에서 출발해

xi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를 거쳐 호미 바바(Homi Bhabha)의 문화 번역 개념까지 이론적 지평이 확장되는 과정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문화 번역의 등장 ‘번역과 문화’ 혹은 ‘문화 번역’을 주제로 한 흥미로운 논의 들은 텍스트와 문화, 언어와 문화, 문화와 문화 사이의 관 계와 더불어, 문화들을 교섭하고 매개하는 인간의 행위 주 체성 문제를 다룸으로써 근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지 구화된 문화 환경 속에서 타자들 사이의 이상적인 소통 모 델을 다각도로 탐색하게 한다(이경란, 2012). 최근 들어 전 지구화의 흐름 속에서 인종, 민족, 국가의 차별적인 개념들이 복합적인 혼종성(hybridity) 개념으로 변화하면서 인종 간, 민족 간, 국가 간 경계를 넘어서는 새 로운 형태의 담론이 대두되고 있다. 흑인, 아시아인, 히스 패닉, 중동인 등 소수민족 문화는 시간적으로는 이민의 역 사를 배경으로 하고, 공간적으로는 디아스포라의 ‘이주적 주체(immigrant subjects)’를 구성하고 있다. 고향인 모 국·조국을 떠나 목적지인 거주국으로 이주하여 기존의 문화와 뒤섞임으로써 새로운 정체성과 혼종성을 빚어낸 다. ‘용광로(melting pot)’, ‘샐러드 볼(salad bowl)’ 등으로

xii


부르는 이 문화는 기존의 다문화주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유형과 복합적인 담론의 대상이 되고 있다 (김영민, 2009). ‘문화 번역’ 연구에서는 번역 자체를 정치적 행위로 보 며, 구체적인 역사적·사회적 맥락이 암시하는 정치권력 적 구도에 주목하여 문화 간 접촉과 교섭을 일종의 번역 행위로 읽는다. 번역이 “식민주의 지배의 중요한 테크놀 로지”라는 테자스위니 니란자나(Tejaswini Niranjana)의 주장은 서로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의미의 생산과 전달 행위가 지니는 정치성에 주목하여 번 역을 이론화한 대표적인 예다. 번역이 식민 지배의 기술 이 되는 이유는 두 문화가 접촉하는 지점에서 언어적 상호 작용이 일어날 때, 언어와 문화 사이에 위계질서가 작동하 고 권력이 (재)생산되기 때문이다(윤조원, 2011).

문화 번역과 미디어 이 연구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미디어 정경, 그리고 세 계화 현상에 따른 초국가주의 현상을 잘 드러내고 있는 ‘문화 번역(cultural translation)’을 미디어 이론의 관점에 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최근 인류학계와 인문학계에서 문화연구의 한 영역으로 자리 잡아가는 ‘문화 번역’ 개념

xiii


은 ‘번역’의 지평을 확대하여 언어, 상징체계, 생활양식, 사 유 양식 등 문화 전반의 번역 행위를 아우른다. 또한 문화 번역은 번역이 이루어지는 특정 시공간적 맥락과 문화 번 역의 행위자에 대한 이해를 수반하는 총체적 과정이다(김 현미, 2001). 이 연구는 문화 번역을 둘러싼 개념들을 검 토하고 미디어의 재매개 이론과 접목해 살펴보고자 한다. ‘번역’과 ‘횡단’에 대한 관심이 활성화한 것은 이론적으 로는 탈식민주의 비평과 비판 인류학에 의해 고무된 부분 도 있지만, 우리 삶의 현실적 조건들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실제적인 이유도 있다. 또한 시간, 공간, 국가적 경 계들을 넘나드는 초국적 흐름들이 활발해지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질서에서 이질적인 상징체계들의 ‘교섭’ 필요성 이 증대되고 있고, 또한 근대적 주체를 구성해 왔던 많은 지식과 전제들이 재현의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과도 관련 이 있다. 아울러 재매개 현상은 문화연구자가 간과할 수 없는 영 역이다. 현대사회의 많은 사회적 활동과 문화적 실천은 미디어와 관계되어 있고 미디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미디어 이용자들이 보여 주는 일련의 창조적 변이 과정은 문화적 영역, 정치적 영역을 막론하고 재매개 를 통해 ‘개조(refashioning)’와 ‘복구(remedy)’를 넘어 ‘개

xiv


혁(reform)’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문화 번역의 현장이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를 이루는 탈 영토화의 영역이 될지 자본에 종속된 문화 시장의 영역이 될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네트워크와 디지털 미디 어가 매개의 주체가 되는 현대사회의 소통 방식이 이전과 는 다른 정경을 그려 낼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통찰력은 탈식민주의 시대 문화정치학이나 문화 현 상을 해석할 수 있는 적극적인 방법론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김영민(2009). 새로운 문화담론으로서의 초국가주의. ≪영어영문학 연구≫, 제51권 1호, 87∼105. 김은령(2009). 여행기에 나타난 문화 번역: 스테드만의 수리남 탐험기를 중심으로. ≪영어영문학 연구≫, 제51권 4호. 김현미(2001). 문화 번역: 근대적 성찰의 비판적 작업. ≪문화과학≫, 제27호. 박선주(2012). (부)적절한 만남: 번역의 젠더, 젠더의 번역. ≪안과밖≫, 제23권 3호, 289∼325, 영미문학연구회. 윤조원(2011). 번역자의 책무: 발터 벤야민과 문화 번역. ≪영어영문학≫, 제57권 2호, 통권208호, 217∼235, 한국영어영문학회. 이경란(2012). ‘문화 번역’과 포스트식민 이주서사: 자메이카 킨케이드의 󰡔루시󰡕. ≪현대영미소설≫, 제19권 1호, 57∼78. 태혜숙(2013). 문화연구의 방법론으로서 ‘젠더 번역’에 대한 탐색. ≪젠더와 문화≫, 제6권 1호, 33∼107.

xv


Anderson, B.(1983).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London: Verso. Hobsbaum(1990). Nations and Nationalism since 1780: programme, myth, reality.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1998). 창비. Robinson, Douglas(1997). Translation and Empire: Postcolonial

Theories Explained. Manchester: St. Jerome Publishing.

xvi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