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은 없다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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悲劇은 없다 비극은 없다


서(序) 現實과의 줄기찬 對決意識 金八峰

현대에 살고 있는 모든 인생은 커다란 괴로움과·슬픔과· 앞뒤가 맞지 않는 어긋남과·끝날 줄 모르는 절망과·한량 없이 용솟음치는 반항과… 이런 의식 가운데서 자기의 생명 을 날마다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 부닥치는 얼토당 토않은 가지각색의 모순투성이의 현상을… 이런 것들 앞에 서, 그날그날을 대결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들에게, 또 새삼스럽게 ‘비극이 ’ 있을 수 있느냐? 이 소설의 작자 홍성유 씨는 이 작품 가운데서 이같이 말 하지는 아니했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을 이 같은 뜻으로 읽 었다. 처음에 <한국일보>사가 ‘백만 환 현상소설을 ’ 모집 했으니, 그것을 심사해 달라는 부탁이 있었을 때, 나는 그 일 을 기꺼히 승락하고서 원고를 읽기 시작했었다. 예선에 합 격되어 가지고 박종화 씨·박화성 씨 그리고 나한테 넘어온 원고들을 받아가지고 읽어 내려가는 도중에 내 눈에 띄인 작품이 ≪비극은 없다≫라는 것이었다. 며칠 후에 조풍연 21


씨를 만났을 때 그가, “어때요, 당선될 만한 작품이 있읍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하나 있어요. 그것은 신문에 연재해도 좋겠고 영화로 제 작해도 좋을 겝니다.” 이렇게 대답했었다. 그 후 얼마가 지나서, 박종화 씨와 박화성 씨와 내가, 최 후로 당선 작품을 결정하던 날, 나는 두 분의 말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두 분이 이구동성으로, “≪비극은 없다≫가 제일 좋아요. 이건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겝니다.” 이같이 추천하는 말씀을 들었던 것이다. 나는 이때, 내 가, 조풍연 씨더러 ‘영화로 맨들어도 좋겠다고까지 ’ 말했던 것을 후회하지 아니했다. 이같이 되어서 <한국일보>에 ≪비극은 없다≫가 연 재되었고…그 후 거의 일 년이 지나서 이 책이 출판되니… 지금 와서 내가 부족하게 느끼는 것은 다만 이것이 영화화 되지 아니한 것, 한 가지뿐이다.

四二九二年 二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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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眞實性 있는 精神世界 李軒求

새로운 文學이 무엇이냐 하고 묻는다면 그는 眞實性−誠 實性−을 가진 것이라고 簡單히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리고 오늘의 文學이 志向하고 또 追求하는 世界는 ‘모랄이 ’ 란 것에서 더 나아가 精神이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누 가 가장 眞實性 있는 精神世界를 志向하고 追求하여서 그 것이 完全한 具現을 가져왔느냐에서 作家의 位置는 決定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精神 그 眞實性이란 무엇이냐 하는 것은 作家 自身이 그 作品을 通하여 形象化 된 그 속에서 찾아볼 것이다. 우리의 젊은 作家 洪性裕 君의 出世作 ≪悲劇은 없다≫ 에 對하여 여기서 論評하랴 함은 아니라 하더라도 한 讀者 로서 볼 때 이 作品은 그 어떤 眞實된 모습, 그 모습이 갖는 그 어떤 精神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들이 겪은 저 무서 운 世紀的인 悲劇 ‘六·二五’가 무엇을 가져왔느냐를 젊은 世代를 通하여 眞摯하게 파고든 代表的 作品의 하나로서 23


洪 君의 이 長篇이 그 序幕을 여는 一翼을 擔當했다고 할

것이다. 美國의 名作들이 아직도 저 獨立戰爭이나, 南北戰爭을

‘테−마로 ’ 하고 있다는 卑近한 一例를 든다면 韓國에 있어 서의 이러한 ‘테−마는 ’ 三·一運動과 六·二五 戰亂이라 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韓國文學은 이 두 가지의 歷史的 事實을 그 누가 어떻게 가장 올바르게 眞實하게 그 精神을 把握하느냐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點에서 볼 때 確 實히 洪 君은 그 眞實된 精神 속에 肉迫한 ‘펜을 ’ 가진 젊은 前衛勇士라고 할 것이다. 더욱 在來의 平面的이요 敍述的

인 形式을 超克하며 長篇小說이 갖는 새로운 ‘스타일을 ’ 提 示한 그 實驗意欲도 아울러 높이 評價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이 問題의 苦心作이 다시 單行本으로 上梓함에 際하여 平素부터 洪 君을 敬愛하는 本人으로서는 衷心으

로 새 世代의 現實과 精神을 엮은 이 作品의 價値가 公正 하게 더 널리 퍼져 알려지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一九五八年 二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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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悲劇)은 없다


피의 대가(代價) 을지로 입구 네거리에서 무교동(武橋洞)으로 접어드는 어 귀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층 건물. 혜선혈액은행(惠善血液銀行). 그 건물 앞에서 주춤 서 있는 사나이가 있었다. 대합실 안, 입맛을쩍다시며그는머리위에널린 ‘포스타를쳐다보았다 ’ . <수혈(輸血)은 애족(愛族).> “채혈(採血)을 하려구…” “그러심 안 돼요. 건강한 분도 한번 뽑으면 몸이 축가는데… 수혈은 장사가 아니야요. 약한 환자를 위한 건강인의 박애 심이지.” “박애구, 자애구, 다 배부른 사람들의 흥정이요. 당신은 채 혈 희망자에 ‘카아드만 ’ 기입해 주면 그만이니까.” 사나이의 목소리는 조금 높아졌다. 徐康旭(서강욱). 二十三 歲. 男. 血液型, A, 職業, 學生.

강욱은 감정을 억누르고 ‘카아드를 ’ 집었다. ‘무엇을 위하여 아귀성치며 추근추근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도시, 묵은 일력 뜯어내듯 보내는 하루의 삶을 잇기 위해 흘 려내는 피. 27


채혈관에 피가 불어간다. 방금 심장에서 치솟은 핏방울이다. 강욱은 갑자기 무서워 졌다. 생명에 대한 위구나 공포가 아니었다. 무섭게 치솟는 죄스 러움. 무턱대고 끓어나는 생명에 대한 죄스러움이었다. 강욱은 다시 접수구 앞에 섰다. 조그마한 접수구의 ‘다이아’ 유리가 눈으로 번져왔다. 불투명한 ‘다이아’ 유리는 기분마저 불투명케 했다. 그러한 마음과는 달리, 강욱은 ‘카아드를 ’ 불쑥 들이밀었다. 여인은 강욱이 내어민 ‘카아드를 ’ 살짝 곁눈질해 보고는 새 침한 얼굴로 돈다발을 풀었다. 차근차근 돈을 셀 뿐이다. 바람이 세차다. 숨을 들이마셔도 머리 속은 가눠지지 않았다. 햇살이 눈부 시다. 눈부신 햇살은 화살처럼 눈에 박혔다. 눈알이 모래알 에 씻기듯 쓰렸다. ‘어쩐 일일까?’ 강욱은 눈을 부릅떠 보았다. 햇볕이 진눈까비처럼 날려서 난무했다. 모든 물체의 윤곽이 흐려갔다. 환각이 있었다. 검은 손길이 의식을 훑어 내리고 있었다. 채혈관으로 흐르 던 혈관의 피처럼 그렇게 의식은 뽑히고 있었다. 28


그때다. 입술을 깨물면서 강욱은 나락처럼 길가에 쓰러졌다. “이러고 있음 어떡해요. 좀 일으키고나 봐야죠.”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서면서 소리치는 여인이 있었다. 접수구에 앉았던 그 간호원이었다. “뇌빈혈야!” 노의사는 침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강욱의 어슴프레 떴던 눈앞에 다시금 물체들이 맴을 돌았다. 아니, 그 알 수 없이 눈만 보이는 여인의 얼굴이 맴을 돌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깨셨군요?” 해말쑥한 여인의 얼굴이 웃음기 없이 다가왔다. ‘아, 접수구의 여인…’ 그제야 화안히 튀어오는 일들을 강욱은 생각했다. 병원 문 턱에서 의식을 잃어가던 일이며, 이 해말쑥한 얼굴이 바로 접수구에 있던 간호원이라는 것을 — 유리창에 황혼이 젖어 들고 있었다. “아, 벌써…” 강욱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안까님을 썼다. “누워 계서요.” 여인의 말엔 다부진 위엄이 있었다. 그래도 강욱은 일어나 려고 했다. 가고 싶었다. 가야만 했다. 어서 그곳에서 달아 29


나고만 싶은 것이다. 여인은 재빨리 부축을 하고 간신히 옆 의자에 강욱을 끌어 앉혔다. “앉아 계세요. 의사선생님 모시고, 다시 오겠으니까요.” 여인은 또렷또렷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이게 무슨 꼬락서니냐?’ 강욱은 어서 이 병원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간호 원이 오기 전에 일어나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강욱은 좀도둑모양 살금살금 밖으로 나갔다. 그러한 강욱을 붙드는 사람이 있었다. “너무하세요.” 그 여인이었다. “동정이 아니야요. 정말 동정이 아니라, 이해예요.” 강욱은 만사가 귀찮을 뿐이었다. 동정이고 이해고 분간할 기력도 없었다. ‘내 인생에 길이 있느냐? 될 대로 되라지…’ 강욱은 ‘택시에 ’ 올랐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가물가물해지 는 의식 속에서 씁쓸한 체념을 강욱은 씹고 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느 때인지 방 안 전등불만 꽉 찬 듯한 밤이었다. 30


“뭣 좀 요기를 하셔야겠기에…” 강욱은 말없이 상을 받았다. 식욕이 일었다. “천천히 많이 잡수세요. 참, 저 진영이에요. 묵을 진(陳)에 방울 영(鈴), 성이 중국 성이죠?” 영의 하이얀 이가 반짝 빛이 났다. 그 웃음 하나에서 이제까 지 응얼이졌던 감정이 순식간에 용해되고 있음을 강욱은 직 감했다. 강욱도 한 번 빙그레 웃었다. “며칠 더 치료를 받으셔야 해요. 제게서 받으셔두 좋다면 며 칠쯤 여기 계셔도 좋아요. 이유 없는 호의라구 의아해하실 테 지만 동정이 아니라 이해라는 그 내용을 얘기해 드리겠어요.” “너무 신경을 쓰지 마십쇼. 그 내용 얘기나 —” “저도 똑같은 경험자기 때문이야요. 지금은 비록 피를 사는 입장에서 일을 본다지만 한때는 피를 팔던 때도 있었으니까 요. 저의 아버지는 의사야요. 의학박사 진수동(陳壽銅)이 라면 신의주서는 으뜸가는 냇과 의사였죠. 그의 막내딸 진 영도 한때는 남부럽지 않았었죠.” 자랑도 회상도 아닌 남의 이야기처럼 영은 이야기했다. “그럼 고향이…?” “아아뇨, 서울이야요. 여학교 이 학년 때 그리로 갔으니까 요. 그러니까 八·一五 직전의 일이죠. 저는 오빠 석호(錫 浩)와 앞서서 월남했지요. 며칠을 거리에서 해매다가, 의사 31


의 아들딸로 태어난 우리들이 쉽사리 생각해 낸 것이 매혈 (賣血)이었죠. 당장 다급하니 어쩔 수 없었어요. 얼마 뒤엔, 저두 서강욱 씨 같은…그리고 바루 그 위치에서였어요. 제 가 쓰러진 곳두…그 뒤에 그 병원에서 치료를 받구…, 그것 이 인연으로 그곳 노의사(老醫師)를 돕게 됐어요. 그런데 다행히 숙부께서 무사히 월남해 오셨어요. 모두 잃었죠. 억 울하대두 별 수 있어요? 혼자 당하는 세상두 아니구… 이제 살아가려면 자기 자신의 힘 하나밖에는 믿을 것이 없죠.” 문득 강욱은 영의 눈을 바라보았다. 담담한 표정이지만 발랄한 어여쁨을 깨물고 있었다. 강욱은 그런 것에서 후딱 ‘여인을 ’ 느꼈다.

“미안하게 생각치 않는 편이… 제게 대한 대접이 아닐까요? 저는 지금 강욱 씨와의 상대로, 어엿한 젊음의 동조자(同調 者)로…”

강욱은 아무런 말도 없이 영을 바라볼 뿐이었다. “미안하다거나 동정이 거치장스럽다거나가 문제가 아닌 줄 압니다. 지금 이 시각까지 나는 태어난 이래로 처음… 감당 하기 힘든 여러 가지를 치른 셈이지요. 나는 점점 진영 씨 앞 에서 감정의 자세를 가누기가 힘이 드는군요.” “아이, 난 그렇게 소심한 남자 좋아하지 않아요. 눕고 싶지 32


않으심 강욱 씨 얘기나 해주세요. 부모랑 형제의…” 강욱은 머리를 저었다. “아무것두, 아무것두 없이 외톨, 그런 것 더 묻지 마십쇼. 기 분이 구질구질해지니까요.” 신경질적인 어조와는 달리 강욱은 뜨거운 시선으로 영을 바 라보았다. “어딘가 좀 이상한 여자라구요? 이상한 데두 있죠. 당돌하 달 수도 있구요. 이렇게 혼자 살면서 외간 남자를 들이구 —, 주인집 사람들한테 꺼리잖느냐구요? 그렇게 여러 모로 머리 를 쓰다가는, 전 일 년도 못 살아서 할멈이 되게요? 맘 편히 가지시고 회복된 후에 하시고 싶은 대로 하세요. 저는 주인아 주머니께 가서 자기로, 아까 미리 이야기해 두었으니까요.”

강욱은 눈을 떴다. 눈을 뜨고 낯설은 방 안을 두리번거리는데 영이 들어왔다. “깨셨어요? 저런! 열이 있는가 봐요. 저기 아침상 보아놨어 요. 전 병원에 좀 다녀와야겠어요. 저어… 제가 힘이 되어드 릴 수 있다면 학교에 지장이 없도록 밤을 이용한 적당한 직 장을 구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언제까지나 피가 밑천 일 수야 있나요?” 한참 퍼 넣던 강욱은 수저를 밥주발에 놓은 채, 멍하니 앉아 33


만 있었다. “이게 무슨 꼴이람, 사내자식이… 전라도 기생처럼 시키는 대루 앉아서…” ‘코오트를 ’ 뒤집어썼다. 문을 열었다. 그러나 막상 자리를 뜨려고 하니 허전함이 뒤몰려 왔다. 그 보다 앞서는 마음이 또 하나 있었다. 하나의 다사로운 온정 앞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없는… 아니 하나의 뚜렷한 미 련이, 오롯이 살아 오르는 숨길 수 없는 미련이 있었다. 강욱은 제자리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인 ‘펜대를 ’ 들었다. “기다리지 못하고 나갑니다. 언제가 되며 무엇으로 표현할 지 알 수 없읍니다만 미덕(美德)에 보답할 길을 찾아보려 합 니다. S” 영의 집을 뒤로하고 비탈길을 내려오는 강욱에겐 어떤 새로 운 힘이 솟는 것 같았다. 강욱은 눈 내리는 허공을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피를 팔지 않고도 살아가는 나를 보여줄 테다!”

비극(悲劇)의 문(門) 혈액은행에서 법석을 치러낸 지 두어 달, 어찌다 천행으로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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