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텔레비전 방송 50년_맛보기

Page 1

한국 텔레비전 방송 50년 한국언론학회 엮음 김병희·김영희·마동훈·백미숙·원용진·윤상길·최이숙·한진만 지음

대한민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1


2 한국 텔레비전 방송 시청자의 형성과 성격: 1962∼1964년의 ‘국민’, ‘공민’, 그리고 ‘소비자’의 경험

마동훈

한국의 초기 텔레비전 시청자와 방송 50년 이 땅에 텔레비전 방송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50년이 되는 이 시점에 우리 방송과 수용자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의 목적은 현재의 우리 방송 이 갖고 있는 특성을 설명하는 의미 있는 맥락, 즉 그 배경과 원인을 지난 50년의 매우 특수한 역사적 사실 속에서 규명하고 논의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우리 텔레비전 방송이 궁극적인 관찰과 연구의 대상이 라면 과거 텔레비전 방송 역사를 통한 방법론적 우회de-tour는 그 연구 대상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선택된 경로라는 이야기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현재의 KBS 수신료 인상 문제는 우리 공영방송 의 이념적 위상과 현실적 재원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이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2011년 가을 현재까지도 정치권의 공방으로 인해 여전히 국회 인준을 받지 못하고 난항을 겪고 있다. 공중파와 케이블 텔레비전 시스 템 운영 사업자 간의 재송신 문제는 현재 법원의 판단에 맡겨져 있다. 지 상파 방송의 보편적 서비스 이념과 민간 케이블 사업자의 전송망 운용 모델이 서로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새로이 출범한 종합편성 채널은

90


실제로 매우 특수한 형태의 채널이다. 민간 영역에 뿌리를 둔 후발 케이 블 채널임에도 불구하고 종합편성의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케이블 방송 의 지상파 채널 앞뒤의 채널을 부여받을 전망이다. 그렇다면 새로 출범 한 종합편성 채널에 기존의 공중파와 다름없는 공익성 요건이 요구되어 야 하는지 혹은 하나의 민간 케이블 채널 사업자로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러한 현 시점 우리 텔레비전의 제반 이슈들의 진단에 과거 역사를 통한 우회의 방법론의 유용성은 매우 크다고 본다. 이 글은 한국 텔레비전의 현재가 지난 50년간의 역사로부터 자유롭 지 못하다는 지극히 당위적인 전제에서 출발한다. 즉, 우리 텔레비전이 출범한 이후 겪어온 특수한 역사적 국면들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차분 한 기술이 현재의 우리 텔레비전의 이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전 제가 그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특수한 역사적 국면들 중 1962∼1964년 의 KBS 초기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리고 이 시기의 텔레비전 기구, 프로그램의 편성 및 내용보다는 당시를 경험한 텔레비전의 수용 자들의 시선과 체험의 현장에 관심을 기울이고자 한다. 1961년 KBS 텔레비전의 개국은 ‘혁명정부의 크리스마스 선물’(오재 경, 1973, 163쪽)이었다. 이 시기의 수용자는 혁명정부에 의해 급조되어 출범한 국영 텔레비전의 일방적인 수혜자인 ‘국민people’이었다. 여기에 서 국민은 근대적 국민국가nation-state 영토 내부의 중요한 최소 구성단 위임과 동시에 근대적 국민국가의 동원mobilization의 최소 구성단위로 정 의될 수 있다. 혁명정부가 바라본 초기 국영 텔레비전의 수용자는 바로 동원의 대상으로서의 국민이었다. 뜻밖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든 초 기 텔레비전 수용자도 이들에게 요구된 동원의 대상으로서의 자신의 역 할, 즉 국영방송의 동원 대상자로서의 국민의 역할을 큰 저항 없이 받아 들였다. 그러나 개국 초기의 KBS 텔레비전은 국고 재원의 부족으로 인해 개

2 | 한국 텔레비전 방송 시청자의 형성과 성격

91


국 1년 만에 시청자의 시청료 부담을 결정한다. 이로 인해 시청자는 소 정의 시청료의 부담으로 텔레비전 방송을 국영 텔레비전에 위탁하게 된 다. 물론 법제와 기구 측면에서 본격적인 공영방송인 한국방송공사 KBS 가 출범한 것은 KBS 텔레비전 개국 12년 후인 1973년이다. 그러나 실제 로 운영 재원의 수혜자 부담과 이로 인한 방송의 공적 위탁이라는 측면 에서 방송의 공적 위탁 개념은 이미 1962년에 설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초기 시청자는 앞서 다룬 국민의 성격과 함께 ‘공민公民, public citizen’의

성격을 함께 갖게 된다. 여기에서 공민이란 국가 및 공적 기구

에 통치 행위를 위탁하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그 통치 행 위에 일정 부분 참여할 수 있는 권한과 의지를 가진 사회 구성원을 의미 한다. 초기 텔레비전의 시청자는 국민 세금을 바탕으로 하는 국영 텔레 비전 운용 재원에 대한 간접적 부담에 더하여 직접 준조세 성격의 시청 료를 부담하게 됨으로써 공민으로서의 수용자상의 물질적 토대를 구성 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시청자들이 지불한 시청료의 사회적 효 용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국영 텔레 비전과 공영 텔레비전 모델 사이에서 정체성 혼돈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고 본다. 정부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초기 KBS 텔레비전의 재원 부족 문제 를 해소하고자 또 다른 수입원을 찾게 됐다. 시청료가 부과된 것과 같은 해인 1963년부터 시작된 상업광고가 그것이다. 따라서 시청자는 국영방 송의 수혜자로서의 국민, 일정 부분의 국영방송 재원을 담당하며 방송을 위탁한 초기 공민의 성격과 함께 상업광고의 ‘소비자consumer’로서의 성격 을 동시에 갖게 된다. 여기에서 상업광고의 소비자는 방송 시간을 실시 간 구매하는 소비자임과 시장에서 방송 광고의 효과로 광고 상품을 구 매하는 직접적 소비자로 정의될 수 있다. 이로 인해 우리 초기 텔레비전 은 국민을 국가 통치를 위한 메시지 전달의 대상으로 바라본 국영 텔레

92


비전임과 동시에 개국 초기부터 이들에게 시청료 부담을 안겨줌으로써 방송이라는 공공재의 서비스를 위탁받고 또한 상업광고의 영향력으로 부터 자유롭지도 못했던 한국 방송의 50년의 운명과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의 출발점이 되었다. 따라서 한국 사회 텔레비전 시청자의 형 성과 성격에 대한 논의도 바로 이 국민, 공민, 소비자의 삼각 구도 속에 서의 정체성의 문제와 연관해 설명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1956년 개국한 최초의 민간 텔레비전 방송인 HLKZ-TV는 재원의 부족과 화재 등 불상사로 인해 악전고투하다가 제대로 궤도에 오르지도 못한 채 1961년 10월 문을 닫았다. 이 무렵인 1961년 8월에 5·16 혁명 정부는 국영 텔레비전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유례없이 짧은 준비 기간 을 거쳐 개국한 국영 KBS 텔레비전의 재원을 위해 정부는 연간 약 4000 만 원의 예산을 배정했다.(≪조선일보≫, 1962.11.16, 5면) 초기의 국영 KBS 텔레비전은 부족한 재원을 인해 일일 4시간 30분의 제한된 방송과 빈약한 프로그램 제작 능력으로 고전하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이미 1962년 가을부터 독립채산제에 의한 재원 안정화 방안을 적극 고려했 다. 그 방안 중 하나로 정부는 1963년 1월 1일부터 KBS 텔레비전 시청료 를 월 100원으로 결정했다. 또한 동시에 KBS 텔레비전은 광고 방송을 개시했다. 텔레비전 운영을 위한 재정의 또 다른 재원으로 상업광고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정순일·장한성, 2000, 28쪽). 이로 인해 1963년 기 준으로 KBS 텔레비전은 전체 재원의 약 2/3를 상업광고 수입에 의존하 게 됐다. 결국 초기 KBS 텔레비전은 개국한 지 불과 1년 만에 정부가 주도한 국영방송으로 시작해서 곧 시청자가 시청료를 부담하고 방송의 책무를 위 탁하는 공영방송의 성격을 부분적으로 도입하게 되었고, 동시에 상업광고 에 재원을 개방함으로써 민간 상업방송의 성격마저도 띠게 된 것이다. 국영방송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부분적으로는 방송의 공적 위탁자이

2 | 한국 텔레비전 방송 시청자의 형성과 성격

93


고 상업광고의 소비자이기도 했던 한국의 초기 텔레비전 수용자들은 서 로 상충될 수 있는 세 가지 수용자 역할상을 매우 빠른 시간 내에 매우 자 연스럽게 내재화했다. 이들의 경험은 처음부터 공민의 위탁으로 기획된 공영 텔레비전 방송의 수용자로 발전한 영국의 초기 텔레비전 시청자들 (Scannel & Cardiff, 1991, p.3)의 경험과 크게 달랐다. 한편 가정 내의 거 실을 단위로 하는 소비 공간을 주도한 새로운 매체로서의 상업 텔레비 전을 경험해온 미국의 초기 시청자들(Dominick, 2000, p.16)과도 판이 하게 다른 출발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초기 한국 텔레비전 시청자의 경험은 매우 특수한 사 례다. 앞에서도 간략히 설명한 바와 같이 이들의 특수한 경험은 50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와 미래 다채널 시대 우리 텔레비전의 공적 책무와 관 련하여 우리 시청자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특성으로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 이 글의 전제다. 케이블과 통신망 비용을 부담하며 무수히 많 은 상업 채널에 노출하면서 동시에 공영 텔레비전 방송의 수신료도 부 담하고 있고 그 수신료의 인상 문제가 정치권에 의해 상당기간 동안 지 속되고 있음을 목도해야 하는 우리 시청자들의 현재의 규정에 대한 고 찰이 50년 전의 초기 텔레비전의 역사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 기에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이들 세 가지 행위 주체로서의 한국의 텔레비전 수 용자-국민, 공민, 소비자-의 ‘사회적 형성’ 과정을 설명하는 데에 있 다. 여기에서 ‘사회적 형성’에 대한 관심이란 수용자들이 정부와 공적 영 역의 이들에 대한 역할 규정과 상업광고의 빈번한 호명 속에서 스스로 의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해왔는가에 대한 탐구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의 과정 속에서 이 글은 최초의 국명 KBS 텔레비전이 개국 한 1962년부터 민간 상업방송 동양텔레비전DTV이 개국한 1964년에 이 르는 시기까지의 시청자의 사회적 형성 과정을 연구의 대상으로 한다.

94


즉 우리 텔레비전의 초기 수용자들이 어떻게 텔레비전이 제공하는 프로 그램 속에서 국가, 공적 영역, 시장과 상호작용하며, 스스로를 구체적으 로 어떠한 국민, 공민, 소비자로 동시간적으로 형성시켜왔는가에 대한 탐색의 시도다. 물론 1960년대 초반에 형성된 우리 텔레비전 시청자 성격의 사회적 형성은 1970년대 소위 ‘텔레비전 붐’ 시대에 더욱 구체화된다(임종수, 2004b). 이러한 의미에서 바라볼 때 한국 텔레비전 시청자의 성격을 규 정하기 위한 역사적 연구 대상으로는 1970년대의 텔레비전 붐 시대가 물론 더 적합할 수도 있다(임종수, 2011). 1970년대 텔레비전 시청자 연 구는 1960년대보다 더욱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효율적이고 생산적 인 연구가 가능한 것도 사실이다. 이 시기의 시청자에 대한 구술사와 채 록과 이를 바탕으로 한 시청자의 체험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의 가능성 도 사실상 더욱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1960년대 초반의 초기 KBS 텔레비전 시기에 집착하는 이유는 첫째 1970년대 텔레비전의 붐 시기보다 십 년 이상 앞선 이 시기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1970년대 텔레 비전 수용자 연구의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며, 둘째, 1960년에 초반에 이미 현재의 우리 텔레비전 수용자의 모습에 적용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수용자상의 원형이 제시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 이어 1970∼1980년대의 한국 텔레비전 시청자의 성격과 사회적 형성 과정에 대한 고찰이 이어진다면 가장 이상적인 모양으로 우리 텔레비전 수용자 의 역사가 기술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작 초기 텔레비전의 출범 이후 50년이 지난 이 시점에 이들 초기 시청자의 사회적 형성 과정을 위한 자료에의 접근은 쉽지 않으며 필연 적으로 많은 제약이 따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역사 속의 시청자의 직 접적인 체험을 탐문, 기술하는 ‘구술사oral history’ 방법론의 필요성과 실 제적인 방법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바 있다(백미숙, 2009).

2 | 한국 텔레비전 방송 시청자의 형성과 성격

95


실제로 초기 텔레비전 수용자의 구술 내용에 대한 초록을 바탕으로 텔 레비전의 역사를 기술하고자 하는 노력도 부분적으로나마 시도된 바 있 다(마동훈, 2011). 이와 아울러 일간신문, 잡지, 정부와 민간 자료 등 다 양한 문헌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초기 텔레비전 역사 연구가 이루어진 바 있다(강명구·백미숙·최이숙, 2007; 임종수, 2004a; 임종수 2004b). 우리 사회의 초기 라디오를 다룬 연구의 경우도 이러한 문제의식은 비 슷하게 반영되어 기존의 정부와 민간 자료, 신문과 잡지 등 당시의 사회 상을 반영하는 다양한 자료들에 대한 분석과 해석(김영희, 2002; 김영희, 2003),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당시의 수용자들을 직접 만나 이들의 체험 을 채록한 구술사 방법론이 다양하게 활용된 바 있다(마동훈, 2003). 이 글에서도 우리 초기 시청자들이 국민, 공민, 소비자라는 상이한 동시대적 역할 모델을 내재화하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당시의 일간신 문, 잡지, 정부와 방송사의 공식적 혹은 비공식적 자료 등의 자료를 활용 하고자 했다. 그러나 수용자의 체험을 담고자 하는 연구 목적에도 불구 하고 본격적인 구술 연구의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이를 폭넓게 활용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함은 방법론적으로 매우 큰 단점이다. 따라 서 본 연구의 연구 대상인 1960년대 초반 텔레비전 시청자의 경험을 제 한된 역사 자료와 연구자의 상상력에 의존하여 기술하는 수준 이상으로 발전시킬 수 없음이 매우 아쉽다. 향후 연구는 이 글의 논의를 다양한 구 술사적 연구 결과들과 접목하여 논의를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음이 분명하다. 이 글의 다음 장에서는 초기 국영방송 KBS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형 성된 ‘국민’으로서의 시청자의 사회적 형성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이어 서 텔레비전 방송의 공적 위탁자인 ‘공중’으로서의 초기 시청자의 문제 로 넘어간다. 다음으로는 텔레비전 광고방송의 ‘소비자’로서의 초기 시 청자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이 글의 결론에서는 정부 통치 행위의 한

96


수단으로서의 국영방송의 영역과 공적 영역, 그리고 소비자 시장의 영 역에 노출된 우리 초기 시청자의 복합적인 수용자상을 기술하고자 한 다. 아울러 이러한 초기 텔레비전 시청자의 모습이 우리 텔레비전 50년 역사의 이해를 위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논의하고자 한다.

국영 텔레비전의 일방적인 수혜자로서의 ‘국민’ 1961년 8월 14일 국영 KBS 텔레비전 설립 계획을 발표한 당시 오재경 공 보부 장관은 한 회고에서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첫째, 여론을 만드는 서울 시민의 병든 마음을 성하게 고치기 위해, 둘째, 새로워지는 나라와 겨레의 모습을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눈으 로 보고 그들의 생활로 삼게 하기 위하여, 셋째, 혁명정부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삼고 싶어서 50일 낮밤 동안에 만들어낸 텔레비전국은 하나의 혁 명이었다(오재경, 1973, 163쪽).

그러나 당시의 일반 국민이 혁명정부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대하 고 이에 감격할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정서적으로 한가한 상황은 분명히 아니었다고 추론된다. 당시 우리 사회에 텔레비전 방송이 필요 한 이유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본격적인 토론과 준비도 물 론 없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 이후 8월의 새 헌법 공청회, 개헌 안 국민 투표(12월 17일), 민정 이양 절차 발표(12월 27일)의 숨 가쁜 혁 명정부의 정치 일정 중 ‘작은’ 한 분야가 국영 텔레비전 방송사의 설립이 었다. 실제로 KBS 텔레비전의 설립 계획 발표(8월 14일), 시험 전파 발 사(12월 24일), 개국(12월 31일)의 숨 가쁜 일정 속에서 우리 텔레비전

2 | 한국 텔레비전 방송 시청자의 형성과 성격

97


의 이념과 구조는 어떻게 자리 잡아야 하며, 또한 시청자는 과연 누구인 가를 등의 문제를 숙고할 여유를 찾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 인다. 한 토론회에서 당시 국영 KBS 텔레비전의 개국에 실무자로 깊게 관여했던 강현두 교수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강현두, 2011).

당시 텔레비전의 개국을 준비하는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끝없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어느 누구도 무엇을 위해 이 일들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당시의 시설, 기술의 여건하에서 어찌 됐건 개국일에 맞추고 또한 계속 방송 제작과 송출이 가능했던 것은 그 자 체가 기적이었다. … 오늘날 많은 후세 학자들이 당시 제작 현장의 일들, 그리고 당시 수용자의 모습 등을 지나칠 정도로 현란한 학술적 용어로 설 명하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 든다. 당시의 일은 그렇게 세련된 기획과 숙 고에 의해 추진된 일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기 텔레비전의 방송 제작 실무자였으며 그 이후 방송학자로 평생 을 살아온 강현두 교수의 진솔한 고백은 초기 텔레비전 연구에 매우 시 사적이다. 1960년대 초반 텔레비전 방송사와 제작 실무자에게 주어진 절실한 과제는 하루 4시간 30분의 방송 시간을 어떻게 큰 사고 없이 채 워 하루를 넘기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당시 국가의 통치 이념을 어 떻게 설득적으로 국민에게 전할 것인가를 고민할 여유를 사실 갖고 있 지 않았다. 그보다는 미군과 정부의 뉴스 릴을 편집해서 어떻게 10분의 뉴스를 채울까에 대한 고민이 더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시청자 관점에 서의 경험은 달랐다. 이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서구를 배웠고, 근대화를 배웠고 또한 격동기 국가의 현재와 미래 발전 방향을 학습했다(마동훈, 2011). 이러한 의미에서 이 시기의 초기 텔레비전은 제한된 의미에서나 마 국가의 역할과 발전 방향을 제시한 초기 국영방송의 역할을 분명히

98


수행했으며, 당시의 시청자들은 ‘국민’으로서의 국영 텔레비전 시청자 상을 일정 부분 스스로 정립해갔다. 오재경 장관이 언급한 두 가지 텔레비전 방송의 목적은 혁명정부가 계획한 ‘국영’ 텔레비전의 존재 목적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국민 의 병든 마음을 고치고, 이들에게 새로운 국가와 민족의 비전을 보여주 는’ 국가 주도하의 국민 계도의 필요성과 목적이 그의 회고에서 확연히 드러난다(오재경, 1973, 163∼168쪽). 초기 텔레비전은 대 국민 정신적 치유, 비전 제시, 계도라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출발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초기 KBS 텔레비전이 규정한 시청자는 국가의 계몽의 대상이자 훈육의 대상으로서의 국민이었다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초기 KBS 텔레비전의 국영방송으로서의 성격은 당시의 급변하는 정 치 일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의 하야(1962년 3월 24일), 제5대 대통령 선거(10월 15일), 박정희 대통령 취임(12월 17일)으 로 이어진 정치 일정 속에서 자연스레 국영방송은 혁명정부의 선전 도구 로 활용될 소지가 충분히 있었다. 국영 KBS 텔레비전 개국 초기의 한 신문 사설을 보면 국영 텔레비전을 개국하는 정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결국 초기 국영 텔레비전의 수용자들은 피할 수 없이 정부의 일방적 공보의 대 상, 즉 정파적 계도의 대상으로서의 국민의 성격을 띠었음을 알 수 있다.

혁명정부 수립 직후 당국에서는 공보 활동의 중요성에 의하여 공보실을 공보부로 승격하고 활발한 사업을 추진하여왔다. 방송 시설의 신설·확 충, 일반 공보 활동의 능률·신속화, 지방 공보망의 조직 정비 등 의욕적 이고 적극적인 업적은 담당자들의 주야를 가리지 않은 분투의 결정이 아 닐 수 없다. 이전에 궤도에 올라선 텔레비전 방송국도 이와 같은 노력의 결과로 전격적인 준공을 보고 최단 시간 내에 활동을 시작하게 한 예다 (≪동아일보≫, 1962.1.14, 1면).

2 | 한국 텔레비전 방송 시청자의 형성과 성격

99


그러나 1964년까지의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 대수가 불과 3만 대를 약간 상회하는 수준이었고, 그 분포도 서울과 부산 일부 지역에만 한정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초기 국영 KBS 텔레비전이 실제로 얼마나 직접 적으로 효과적인 정부 공보 기능을 수행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다 만 당시의 텔레비전 수상기 보유자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여론 지도층 이었고, 또한 이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선진 국가와 정치와 문화를 학습 해왔다는 증언 등에 비추어 볼 때(마동훈, 2011) 정부의 입장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정부 공보 매체였음은 사실인 것 같다. 1964년 3월 한 신 문 사설이 국영 KBS 텔레비전의 정치적 중립성을 언급하며 방송 공영화 의 필요성을 역설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그 효과의 실효성과 관계없 이 초기 국영 텔레비전의 정부를 옹호하는 정치적 선전 도구로서 기능을 수행해왔음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국영 KBS 텔레비전이 개국한 지 3년 이 채 안 된 시점에 당시 김동성 공보부 장관은 다음과 같은 정부 방침을 이야기하고 있다. 책임 있는 고위 정부 당국자가 방송의 정치로부터의 독립 및 방송 공영화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과 동시에 민간방송의 필요성도 처음 공식적으로 언급했음이 흥미롭다.

김 공보부 장관은 ‘방송을 정부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공영화해야겠다’고 말 하고 그 구체적인 운영 방침과 함께 민간방송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민간방 송 육성 방안도 같이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조선일보≫, 1964.3.15, 2면).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공보부 장관이 방송의 정부로부터의 독립을 처음으로 언급한 점이다. 즉 국영 텔레비전의 한계와 부작용에 대한 극 복 방안으로서의 공영 모델의 가능성이 대두된 것이다. 물론 당시 방송 의 정부로부터의 독립을 내건 공보부 장관의 발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 들이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는 최소한 국영방송으로서의 초기 텔레비전

100


의 역할에 대한 재해석으로 볼 수는 있다. 즉 정부가 아닌 공적 영역에의 위탁이라는 이상적 모델에 대한 언급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한 편 1964년 말 출범된 민간방송 DTV를 위한 육성 방안도 같이 언급되었음 이 흥미롭다. 상업광고를 스폰서로 하는 민간방송의 출현은 국영 텔레비 전의 수용자로서의 국민을 넘어선 또 다른 수용자 상의 등장임이 분명하 다. 같은 신문 사설은 공영화의 법·제도·기구 측면의 기반보다 더 중요 한 것은 이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공영화의 수단 방법상 요구되는 것이 우선 법적으로나 기구상으로 그것을 보장하는 것이 될 것이다. 정치적 중립이 될 수 있는 공영방송을 법적으로 나 기구상으로 당연히 독립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으며 이 목표를 위한 전진에 대해서 이의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방송의 공 영이 법적 또는 기구의 테두리만으로서 달성될 수 있을까 하는 데 적이 의 구심을 가진다. 그 이유로서 비록 반관반민 또는 민영의 성격을 띤 기구라 하더라도 그 명분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사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모 든 일이 다 마찬가지지만 기구가 나빠서가 아니라 운영이 잘못되어 비뚤 어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방송의 공영화에서도 이러한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할 것을 당부하고 싶다(≪조선일보≫, 1964.3.15, 2면).

1964년 당시 우리 정부와 언론 그리고 시청자들은 이미 국민의 시 청료 부담과 상업광고와 운명적인 동거를 시작한 국영 텔레비전의 미래 를 걱정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출범 초기 시청자들이 가졌던 텔레 비전에 대한 기대감을 살펴보면 당시 ‘국민’으로서의 시청자 모습의 한 단면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국영 KBS 텔레비전이 출범하던 당 시 매우 거세게 불었던 소위 ‘텔레비전 붐’에 대하여 당시의 한 신문은 다 음과 같이 설명한다.

2 | 한국 텔레비전 방송 시청자의 형성과 성격

101


이만이천사백일대를 보급하게 된 이차 텔레비죤 수상기 월시계약에 신청 이 육만 오천 대까지 몰려 그 배정율은 5대1을 조금 넘는 경쟁률을 보여주 고 있다. … 이른바 텔레비죤·붐까지 일으키게 된 이번 수상기의 실수요자 배정을 에워싸고 사단법인 한국방송문화협회는 가장 공정하고 대의명분이 서는 방법을 세우기에 골몰하고 있는데도 보급이 끝난 다음 달부터 징수하 게 되는 10개월 월납금 상납 능력이 납부자에게 있는가 없는가가 커다란 문 제로 가로놓여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동아일보≫, 1962.3.2, 4면).

초기 텔레비전의 붐을 설명한 한 논문은 텔레비전 도입 과정의 세 가지 특성으로, 첫째 발전을 보여주는 근대화의 상징과 홍보 장치로서 의 의미, 둘째 근대적 볼거리, 오락 매체, 보도 매체로 이어지는 텔레비 전 자체의 신기 효과 재생산, 마지막으로 당대의 주류 문화로 편입할 수 있는 기재로서의 특성을 들었다(임종수, 2004, 79쪽). 실제로 1963년 공 보부가 시행한 시청자 의견 조사에 의하면 값비싼 수상기를 구입하게 된 동기가 첫째, 유익할 테니까(36.6%), 둘째, 재미있겠기에(31.0%), 셋 째, 교육의 필요로(1.0%) 등의 순으로 제시된 바 있다(황기오, 1963, 39 쪽). 위의 두 가지 연구 결과에 비추어 볼 때 국민으로서의 초기 국영 텔 레비전 시청자들은 정부가 주도하는 근대화의 추이로부터 지체되지 않 기를 원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러한 추이를 텔레비전을 통해 묵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텔레비전의 존재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점에 상당 부분 동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정부가 국영방송을 통해 실제로 어떤 구체적인 국민의 행 동 지침을 하달했거나 전략적 차원에서 체계적인 정부 홍보를 전개했다 는 증거는 매우 미약하다. 실제로 뉴스는 개국 초부터 매일 오후 6시와 오후 8시 30분에 10분간 고정 편성되었다. 그로 인해 그동안 극장의 <대 한늬우스>를 통해서만 접했던 박정희 의장 동정 보도 등을 그나마 안방

102


에서도 볼 수 있었다(한국방송공사, 1977, 535쪽). 그러나 이마저 카메 라와 필름의 부족 등 열악한 제작 여건으로 인해 보도 매체다운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했다고 평가된다(강현두, 2011). 1960년대 초기 뉴스는 대부분 라디오 보도계와 함께 활용하였으며 정부의 주요 정책과 시책에 대한 간략한 해설, 실적 홍보, 수도권 시민 생활과 밀접한 정보형 뉴스가 주를 이뤘다(정순일·장한성, 2000, 54∼55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초반의 국영 텔레비전은 1930∼1940 년대 일제하의 초기 라디오와 마찬가지로 근대화를 주도하는 경이적인 테크놀로지로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추정된다(마동훈, 2003, 50쪽). 이 러한 의미에서 초기 국영 텔레비전은 국가 및 사회의 근대화론을 국민 들에게 ‘유동적 사사화mobile privatization’하는 새로운 매체였음은 사실인 것 같다(마동훈 2011). 당시의 텔레비전은 국가의 통치 이념과 방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에는 기구, 제도, 제작 시설, 제작 경험 측면에서 매우 부실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안방에서 받아들인 국민의 관 점은 달랐다. 다른 지배적인 사회적 매체가 최소한 안방 주변에 존재하 지 않았던 1960년대 초반 텔레비전은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 시청자들을 국민으로 계도하였고 이들에게 국가와 민족의 미래 발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까지도 부분적으로 수행하였음이 흥미롭다.

공영 텔레비전의 위탁자로서의 ‘공민’ 정부는 1962 국영 KBS 텔레비전의 개국 이후 매년 4000만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텔레비전을 운영하고자 하였다. 이는 2011년 현재 물가지수를 감안하여 단순 환산할 때 약 1400억 원 수준의 정부 재원이었다. 그러나 이 예산으로는 초기 텔레비전을 위한 방송 시설과 기자재 등 인프라에

2 | 한국 텔레비전 방송 시청자의 형성과 성격

103


대한 기초 투자, 그리고 최소 방송 인력의 운영을 감당하기에 턱없이 부 족한 수준임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당시의 빈약 한 전력 사정도 텔레비전 방송의 제약 요인이었다. 1962년 개국 초기 KBS 텔레비전의 방송 시간이 불과 1일 4시간 30분이었음은 이러한 배경 들에 연유한다(정순일·장한성, 2000, 34쪽). 이에 정부는 1962년 11월 14일 KBS 텔레비전 방송의 독립채산제 특별회계법안을 공포하고 가구 당 월 100원의 시청료를 부과함과 동시에 상업광고 방송을 개시하도록 하였다. 당시의 한 신문 기사가 이러한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다.

국영 텔레비전이 독립채산제로 운영되면서 별도의 운용 재원을 마련하지 못하면 예산 빈곤으로 인해 방송 시간을 늘리기 힘들고 한편 내용이 빈약 하여 흥미가 진진한 AFKN 미8군 채널로 돌려 버리는 폐단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형식적으로 8시간 방송을 유지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막대한 국고 지출을 가져오게 되므로 당국에 서는 부득이 독립채산제를 구상하게 되어 명년 1월 1일부터는 광고방송을 개시하는데 연간 9000만 원 예산에 정부가 3000만 원을 보조하도록 되었 다. 그리고 시청자로부터는 매월 100원의 시청료를 징수하게 되었으며 8 시간 방송을 5시간 반은 스폰서가 붙은 광고방송으로 하고 나머지 2시간 반은 자체 프로로서 충당하는데 방송공영법(국영텔레비전 사전운영에 관 한 임시조치법, 법률 1, 119호, 한국방송사, 1977, 537쪽, 필자 주)에는 전 방송의 30%를 공영을 위한 시간으로 충당하게 되어 있다. 현재 서울에는 약 3만 대의 텔레비전 수상기가 있는데 연간 3000여 만 원의 시청료 수입 과 나머지는 5시간 반의 광고방송으로 수입을 올려야 한다. 전년도 보다 약 3배 늘어난 예산으로 KBS 텔레비전은 스튜디오를 하나 증설하고 카메 라를 하나 더 구입할 예정이며 배로 늘어난 방송량에 동원되는 제작 측면 의 인력도 대폭 보강할 것으로 보인다(≪조선일보≫, 1962.11.16, 5면).

104


이상의 내용들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초기 국영 텔레비전에의 ‘공영’ 개념은 일단 개국한 국영 텔레비전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 궁여지책으로 마련된 새로운 재원인 시청료 징수에 따라 부수적으로 도입된 개념이라 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국영방송의 일방적인 수혜자로서의 ‘국민’이 공 영적 방송 시스템의 위탁자인 ‘공민’으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는 과정에 시청자와 방송사 간의 어떤 유형의 합의가 이루어질 여지가 없었음이 사실이다. 이는 초기 국영 KBS 텔레비전에 ‘상업광고’ 개념이 도입된 배 경의 설명에서도 거의 동일하다. 시청자, 방송사, 시장의 논의와 합의 과정은 생략된 채 일단 출범한 방송 시스템의 유지와 확장을 위한 제3의 재원으로서 광고방송이 도입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국영, 공영, 민간 상업방송 시스템이 혼합된 매우 특수한 형태의 텔레비전 방 송 구조가 개국 초기부터 매우 부자연스럽게 공존하는 모습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제도, 기구, 이념 등 측면의 모순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모순이 쉽게 드러날 만큼 한가한 시절이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텔레비전 수용자의 성격도 이러한 특수한 방송 구조에서 자유롭지 않다. 국민, 공민, 소비자로서의 시청자상의 중첩에서도 분명히 모순은 노출되었지만 이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의 공영방송법에 의해 시청자는 1963년 이후 시청료를 부담했 지만 이들이 체감한 방송의 내용은 실상 순수한 공영방송의 시절인 1962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64년 1월 시청료는 150원으로 인상되 었고, 1964년 7월에는 월 200원이 되었다. 이는 2011년 물가지수로 단 순 환산했을 때 약 7000원에 이르는 부담이었다. 그러나 이 시청료는 텔 레비전 수상기의 보유에 따른 준조세의 의미로 받아들여졌고, 방송의 공공 영역에의 위탁을 위한 공적 부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따라 서 공공 위탁의 형식 요건은 갖추었지만 실제로는 국영방송 재원의 상 당 부분을 담당하는 수준에 그친 셈이 된 것이다. 이로 인해 공민으로서

2 | 한국 텔레비전 방송 시청자의 형성과 성격

105


의 텔레비전 수용자 상의 구축은 초기부터 큰 난항을 겪게 된다. 정부의 국영방송을 경유한 정치적 의도의 확산을 견제할 만한 실질적인 공공 영역이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을 다음의 신문 사설에서 지적하고 있다.

방송 공영화 문제에 있어서 무엇보다 제기되는 문제는 단적으로 방송 프 로의 편성 문제와 재정 문제에 집약되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요원의 확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방송 프로의 편성 문제 라고 생각한다. 작금까지 국영방송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편성에 정치성 이 개입되어 이를테면 여당 내지 정부 정책 편중이 뚜렷하다는 데 있다 (≪조선일보≫, 1964.3.15, 2면).

또한 같은 신문 사설은 방송의 공적 위탁 모델을 채택하고 그 모델 의 유지를 위해 시청료를 징수하는 영국, 독일, 일본 등의 경우를 거론하 며 ‘공민’이 상실된 공적 위탁형 국영방송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재정 문제에 있어서는 영·독·일의 경우 다 같이 시청료를 받아가지고 메우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것이 타당한지는 아직 판단이 가지 않으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한 연구검토와 확실한 중의의 개진 이 있어야 할 것이다(≪조선일보≫, 1964.3.15, 2면).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의 초기 텔레비전에서는 국영방송과 공영방송의 개념의 구별도 채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혁명정부가 규정 한 국영 텔레비전 방송의 역할 중 상당 부분이 전통적 공영방송의 역할을 자 연스레 상당 부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62년 1월 한 신문의 사설은 다음과 같이 개국 시점의 국영 KBS 텔레비전 방송의 역할을 규정하고 있다.

106


우선 텔레비 방송은 유달리 건전함을 요한다는 사실이다. 라디오 방송도 건전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으나 특히 우리가 텔레비의 건전성을 요청하 는 것은 시청각을 아울러 구사하게 되는 텔레비의 특성 때문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가정 내의 소극장이라고도 할 만한 것이다. 가정의 구성원은 사 리를 옳게 판단하는 성인과 더불어 미숙한 유소년들도 중요한 부분을 차 지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 성실한 것을 보내서 생각하는 국 민에게 좋은 반려가 되게 하는 것이다(≪동아일보≫, 1962.1.14, 1면).

이 사설이 언급한 국영방송의 중요한 덕목이 ‘건전성’, ‘성실성’, ‘생 각하는 국민에게 좋은 반려’ 등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당시의 국영방송 이 전제로 했던 시청자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초기 국영 텔레비 전이 전제로 한 시청자는 ‘계도’의 대상이었고 ‘교화’의 대상이었다. 이 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시작된 초기 텔레비전 프로그램들로는 제1 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홍보 프로그램인 <재건의 길>, 그리고 <TV 응접실>, <문화살롱>, <주부살롱>, <희망의 세대>, <교양대학>, <한국 의 얼굴> 등이 있었다(한국방송사, 1977, 540쪽). 시청자들은 국가 경제 발전과 안보 정책의 기조를 방송을 통해 학습함과 동시에 근대적 ‘교양’ 의 충실한 습득자가 되었다. 국민임과 동시에 ‘공민’으로서의 체험이 본 격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텔레비전 상업광고의 ‘소비자’ 국영 KBS 텔레비전의 원년인 1962년 8월 1일 당시 막 취임한 이원우 공보 부 장관은 텔레비전 운영의 독립채산제를 언급하며 이는 종전의 국영방송 에 상업성을 가미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조선일보≫, 1962.8.2, 1

2 | 한국 텔레비전 방송 시청자의 형성과 성격

107


면). 이러한 발상 역시 국가의 텔레비전 방송 체제의 구조 및 기구에 대한 적절한 성찰을 바탕으로 나온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 이 일단 출범한 국영방송의 유지와 확산을 위해 상업광고를 통한 재원의 보완의 방법을 선택한 것일 뿐이다. 이로 인해 국영 텔레비전 출범 불과 1 년 후인 1963년 1월 1일부터 상업광고가 출현하게 되었으며 광고 수입은 전체 방송국 운영 재정의 약 50%에 이르게 되었다. 시청자들은 국민, 공민 임과 동시에 상업광고의 소비자라는 또 다른 역할을 수임하게 된 것이다. 1964년 이후 상업 민간방송이 출현하면서 방송사들 간의 초기 광고 경쟁도 시작되었다. 당시의 소비재 산업 여건과 방송사의 경쟁 구도 상 황에 비추어 볼 때 초기 방송들 간의 광고 경쟁이 그리 치열한 수준은 아 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체 프로그램의 약 2/3가 상업광고의 스 폰서를 받는 상황에서 방송은 시청자를 계도하고 교화하는 방송에서 시 청자의 취향을 발견하고 이를 충족하는 방식의 상업적 프로그램 제작으 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1960년대를 상징하는 프로그램들인 <전국장사씨름>(1962), <TV스포츠>(1962), <프로권투>(1964), <프로 레슬링>(1965) 등의 출범 계기는 시청자들에게 적절한 오락용 볼거리 를 제공함과 동시에 시청률을 제고하고자 하는 상업적 목적에 있었다 (한국방송사, 1977, 550쪽). KBS는 개국 후 첫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다>를 시작으로 드라 마 제작을 개시했다. 1963년 이후 드라마는 <노래 고개>(1962), <KBS 그랜드쇼>(1962), <버라이어티쇼>(1962) 등 쇼 프로그램들과 함께 상업 광고 스폰서를 받기 시작했다. 또한 <도나 리드 쇼>, <건스모크>(1962), <트위라잇 존>, <하이웨이 패트롤>, <로레타 영 쇼>(1963), <용감한 린 티>, <개구장이 데니스>(1964) 등 인기 외국제 TV 영화의 수입은 상업 광고의 스폰서로 시청자들에게 제공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즉 당시로서 는 제작과 수입에 소요되는 비용이 고가여서 방송 광고가 없었다면 제

108


공하기 어려운 프로그램들이었다. 당시 KBS 텔레비전은 한양영화사, 일요신문사, 한국방송문화협회 등 3개사와 광고 대행 계약을 맺었다. 그 결과 드라마와 쇼 등 주요 프로그램의 기획 및 제작 권한과 외국 프로 그램의 수입권마저 광고 대행사들에게 부분적으로 이양되는 상황까지 맞게 되었다(한국방송공사, 1977, 556쪽). 국영방송이면서도 상업광고 에 의존하는 초기 KBS 텔레비전의 딜레마는 이미 예견된 바였다. 이에 대 해 KBS 텔레비전의 개국 초기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바 있다.

물론 건전이라고 해서 군가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이십사 시간 긴장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요, 인간의 정서는 다양한 구성 요인을 가 졌고 따라서 다양한 자극을 필요로 하는 만큼 단조로운 군가조만 되풀이 된다면 정서는 메마르고 방송 자체가 마음의 부담으로 화하여 마침내는 국민의 경원하는 바 될 것이다(≪동아일보≫, 1962.1.14, 1면).

이 기사는 초기 텔레비전의 시청자들이 갖고 있던 새로운 매체에 대 한 기대를 비교적 솔직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1963년 시청자 조사 자료 에서도 ‘재미있겠기에’ 텔레비전 수상기를 원한다는 답을 한 시청자가 세 명 중 한 명이었음은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매우 시사적이다(황기오, 1963, 39쪽). 혁명정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텔레비전 개국을 준비한 것도 잠재적 시청자의 오락과 레저에 대한 욕구를 제대로 파악한 것임 이 상당 부분 사실이다.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 이외에 이렇다 할 도시 내 문화 소비의 출구를 갖지 못한 서울 시민들에게 텔레비전은 처음부터 매우 매력적인 매체였다.

국영 KBS 텔레비전의 개국 후 불과 1년 만에 텔레비전은 중산층의 안방을 거점으로 한 소비대중문화의 중심으로서의 저력을 보이기 시작한 것으로

2 | 한국 텔레비전 방송 시청자의 형성과 성격

109


보인다. 1962년 여름 한 신문은 ‘돈 없고 TV 재미에 관객 줄어 파리 날리는 극장가’를 보도하고 있다(≪조선일보≫, 1962.8.22, 4면).

초기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제한된 방송 시간 동안이나마 텔레비전 을 통해 삶의 위안을 받고, 웃음을 찾아가고 일상의 활력소를 찾아갔다. 상업광고가 만들어준 오락, 레저, 웃음 공간의 소비자로서의 자신의 모 습에 점차 익숙해져 갔다. 물론 국영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2/3가 광고 스폰서의 후원으로 기획, 제작, 수입된다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국영 KBS 텔레비전의 독립채산제 실시 확정 이후 나온 다음의 신문 기사는 국영방송과 상업광고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를 우려 했다는 점에서 매우 예견적이다.

어디까지나 국립방송으로서의 테두리는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 하지만 실 제 문제에 있어서는 스폰서가 붙은 광고방송이 삼분의 이를 차지하고 보 면 현재보다 재미있는 프로가 마련될지는 몰라도 저속해질 우려도 없지 않다(≪조선일보≫, 1962.11.16, 5면).

정부 재원을 바탕으로 한 국영방송으로 출발한 한국의 텔레비전 방 송이 가야할 길이 국정 홍보, 계도, 교화라고 규정한다면, 당시 광고방 송의 도입이 프로그램의 ‘저속성’의 우려를 불러올 소지는 분명히 있었 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의 텔레비전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경험과 논의가 전무한 상황에서는 당연한 우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국영방송의 경험 속에서 시청자들은 부분적으로는 국민, 부분적으로는 공민, 또 다른 부분적으로 소비자로서의 불편하지만 실제로는 자연스런 복합적 정체성을 형성해갔다. 이러한 과도기를 거치며 한국 텔레비전의 대표적인 포맷인 드라마도 점차 제자리를 잡아갔다.

110


KBS-TV에서는 매주 <금요극장>과 <TV무대>를 각각 30분씩 방송하고 있 는데 지금은 없어진 <일요연속극>, <나의경우>, <명작의문>을 합하여 개 국 이래 60여 편이나 발표하고 있다. TV 드라마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 하고 있다(≪조선일보≫, 1962.11.8, 5면).

1964년 12월 민간 텔레비전 방송 동양텔레비전DTV의 개국을 앞둔 시점의 다음 신문 기사를 보면, 이미 상업광고를 재원으로 하는 민간방 송의 개시에는 상당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서울 지역에 등록된 TV수신기는 3만 5000대인데 이 정도를 가지고 순전히 시청료로만 운영하자면 1대당 400원(현재의 배)의 시청료를 받아 야 한다는 당국자의 말이다. 따라서 국영TV의 광고방송은 현재의 시청료 를 배로 올리지 않는 한 중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럴 즈음에 새로 민간 상업방송으로서 동양TV가 ‘처음부터 상업방송을 사시로 삼고’ 개국을 보 게 되었다(≪조선일보≫, 1964.12.1, 5면).

국영도 시청료만으로는 운영이 안 될 뿐 아니라 민영 또한 광고료(국제적 인 산출기준으로 따져) 수입만으로는 운영이 어렵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 러므로 수신기 수를 현재의 배로 늘리면 국영은 200원의 시청료만으로도 (일본 NHK, 영국 BBC, 프랑스 RTF 등처럼) 운영이 가능하며 민영도 광고 료 수입이 올라가 원활한 운영을 하게 된다. 관계 업계에서는 부분품을 도입 하여 수신기를 국내에서 조립하려고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조선일보≫, 1964.12.1, 5면).

텔레비전의 운영 재원으로 시청료와 함께 상업광고를 활용해야 한 다는 점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곧 우리 시청자가 개별 소비자로서 텔레

2 | 한국 텔레비전 방송 시청자의 형성과 성격

111


비전 방송의 고객이 될 물적, 정서적 토대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 미한다. 당시의 소비자 경제 지표들에 비추어 볼 때 이 당시의 시청자들 이 방송광고 상품의 실효적 소비자로서의 실효적 경제 토대의 구비를 완료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크지 않다. 그러나 정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추진을 개시하면서 국민의 경제 발전에 대한 희망과 욕구가 증대 된 시점이 이때인 점은 주목할 만하다. 국가 경제발전 계획이 제2차 산업 군을 중심으로 편성되면서 거대 도시 중산층 집단과 노동자 집단이 잠재 적인 거대 소비자 집단으로서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 1960년대 후 반이라고 보면, 이러한 희망과 욕구의 분출이 소비자로서의 초기 텔레비 전 시청자 상의 형성을 통해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는 추론은 가능하다.

국민, 공민, 그리고 소비자 KBS 텔레비전 방송국이 개국 1주년을 맞은 1962년 말 정부는 시청료와 상업광고를 재원으로 하는 독립채산제를 계획하면서 몇 가지 제도적 방 침을 발표했다. 이 제도적 제안들은 상업광고를 도입하기는 하되 공적 영역으로서의 텔레비전 방송의 최소한의 영토를 보호하고자 하는 일종 의 방패막이였다.

이(원우) 공보부 장관은 관영하의 광고방송 윤리를 강조하면서 위법 수입 품, 미신조장, 타인의 중상모략, 미풍양속을 해치는 등등 9개 조목의 요강 을 열거하여 아무리 광고방송일지라도 이런 점에 있어서는 제한하리라고 발표하였다. 이와 같이 광고 선전도 직접적인 것보다는 간접적인 방법을 택하리라고는 하나 과연 스폰서들과의 어떠한 타결점을 발견할 것인지 아 직도 의문의 여지가 많다(≪조선일보≫, 1962.12.23, 8면).

112


정부의 방침에 동의하면서도 그 실효성에 대한 의문 제기는 매우 타 당하다. 광고방송에 문호를 개방하면서도 광고가 국민 정서에 끼치는 부정적 파급 효과는 최소화하겠다는 의도는 이해가 되지만 이를 실현하 는 것이 과연 현실적인가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결국은 텔레비전 방송 의 공적 영역의 ‘건전성’과 상업 영역에서의 ‘실리’를 동시에 추구한다는 이야기다. 따지고 보면 영국의 BBC, 일본의 NHK뿐만 아니라 미국의 주 류 상업방송도 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 공영성과 효율적 경영의 조화의 문제는 전 세계 거의 모든 텔레비전 방송 체제가 역사 속에서 함께 고민 해온 매우 보편적인 관심사다. 문제는 우리 초기 텔레비전 방송이 매우 짧은 기간 동안 겪어온 매 우 급박한 변화의 역사적 사실에 있다. 어느 날 정부의 깜짝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어진 KBS 텔레비전 방송국의 개국에 국민들은 환호했다. 그 것이 국영방송이건 공영이건 민영이건 하는 것은 보통의 국민들에게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국민들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환호했고 테크놀로 지가 전달하는 메시지에 충실하게 반응했다. 초기 3년 동안의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률이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3만여 대에 불과했지만 이는 우 리의 일상에 모종의 문화적 ‘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1970년대 와 같은 본격적인 확산 붐은 아니었지만 국가 및 사회 공동체의 잠재적 구심점으로서의 위상을 빠른 시간 내에 점유했음은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1960년대 텔레비전도 하나의 붐이었다. 초기 텔레비전이 개 국 후 불과 3년 이내에 장안의 화제의 중심에 연착륙한 것이다. 혁명정부는 처음부터 정권 홍보와 국민 계도 확산을 위한 매체로서 초기 국영 KBS 텔레비전의 역할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그 기대를 실현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초기 텔레비전의 재원을 마 련하는 것이 만만치 않은 과제였다. 재원의 부족은 방송 시간의 제약과 과 프로그램의 질의 저하를 초래했다. 정부 관점에서는 이를 극복하기

2 | 한국 텔레비전 방송 시청자의 형성과 성격

113


위한 현실적 방안의 강구가 절실했다. 정부 당국의 힘에 의해 손쉬운 방 법으로 마련한 새로운 재원이 시청료와 방송광고였다. 이로 인해 결과 적으로 지극히 미완성적인 방송의 공적 위탁 개념, 그리고 광고 소비자 의 개념이 동시에 유입된 것이다. 개국 이후 지속된 국영 KBS 텔레비전 방송의 재원의 틀은 향후 1964년의 민간 텔레비전 개시, 1973년의 한국 방송공사 출범, 1981년 컬러텔레비전 방송 개시, 1990년대 케이블 텔레 비전 이후 다매체 다채널 시대에의 진입에 이르는 텔레비전 역사의 중 요한 국면을 지나면서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 텔레비전의 초기 시청자는 ‘국민’, ‘공민’, 그리고 ‘소 비자’ 로서의 수용자를 1962년부터 1964년에 이르는 3년이라는 짧은 기 간 안에 거의 동시에 도입하고 경험한 매우 특수한 사례로 기억하게 되 었다. 텔레비전을 통한 정부의 홍보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근대적 민 족관 및 국가관을 학습하고 근대적 교양을 고양하는 동시에 오락과 레 저로서의 텔레비전을 즐기는 복합적 수용자상이 매우 짧은 시간 이내에 확립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초기 텔레비전 시기에 형성된 바로 이 복합적 수용자상에 대한 이해가 바로 한국 텔레비전 50년 역사 속에서 매우 특수한 수용자 성격을 설명하는 데에 매우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되 리라 사료된다. 주로 공식적인 정부 및 민간 자료와 신문 등 당시의 언론 과 필자의 추론을 중심으로 쓰인 이 글의 논지가 보다 생생한 시청자 ‘경 험’의 채록과 1960년대 후반 이후의 연구를 통해 더욱 공고화되기를 기 대한다.

114


참고문헌

강명구·백미숙·최이숙(2007). ‘‘문화적 냉전과 한국 최초의 텔레비전 HLKZ”. 한국 언론학회. ≪한국언론학보≫, 51권 2호, 5∼33쪽. 강현두(2011). 한국언론학회 기획연구 세미나-한국의 텔레비전 방송 50년: 과거, 현 재, 미래(2011. 8. 30). 토론 녹취 내용. 김영희(2002). “일제시기 라디오의 출현과 청취자”. 한국언론학회. ≪한국언론학보≫, 46권 2호, 150∼183쪽. 김영희(2003). “한국 라디오 시기의 라디오 수용 현황”. 한국언론학회. ≪한국언론학보≫, 47권 1호, 140∼165쪽. 마동훈(2003). “초기 라디오와 근대적 일상: 한 농촌지역에서의 민속지학적 연구”. 성 곡언론문화재단 언론과사회사. ≪언론과 사회≫, 12권 1호, 56∼91쪽. 마동훈(2011). “초기 텔레비전과 국가: 1962년∼1964년의 경험에 대한 구술사”. 한국 방송사의 새로운 접근. 한국방송학회(출간 예정). 백미숙(2009). “한국방송사 연구에서 구술사 방법론의 사용과 사료활용에 관하여”. 한국언론학회. ≪한국언론학보≫, 53권 5호, 102∼128쪽. 오재경(1973). 수상 22년. 서울: 범서출판사. 임종수(2003). 텔레비전 안방문화와 근대적 가정에서 생활하기. 성곡언론문화재단 언론과사회사. ≪언론과 사회≫, 12권 1호. 임종수(2004a). “한국방송의 기원”. 한국언론학회. ≪한국언론학보≫, 48권 6호, 370 ∼396쪽. 임종수(2004b). “1960∼1970년대 텔레비전 붐 현상과 텔레비전 도입의 맥락”. 한국 언론학회. ≪한국언론학보≫, 48권 2호, 79∼107쪽. 임종수(2011). 한국언론학회 기획연구 세미나-한국의 텔레비전 방송 50년: 과거, 현 재, 미래(2011.8.30). 토론 녹취 내용. 정순일·장한성(2000). 한국 TV 40년의 발자취: TV 프로그램의 사회사. 서울: 한울. 한국방송공사(1977). 한국방송사. 서울: 대한공론사. 황기오(1963). “TV 프로와 시청자의 의견 종합”. 󰡔방송문화󰡕. 공보부 방송관리국. 39쪽.

2 | 한국 텔레비전 방송 시청자의 형성과 성격

115


Dominick, Joseph R. etc.(2000). Broadcasting, Cable, the Internet and Beyond:

Introduction to Modern Electronic Media(Fourth Edition). Boston: The McGraw-Hill. Scannel, Paddy & Cardiff, David(1991). A Social History of British Broadcasting, Volume One 1922∼1939, Serving the Nation, Oxford: Basil Blackwell. ≪동아일보≫(1962.1.14). “텔레비 방송의 본격화에 즈음하여”. 1면. ≪동아일보≫(1962.3.2). “텔레비 수상기 배정율 경쟁 5대1 강”. 4면. ≪조선일보≫(1962.8.2). “텔레비 방송 상업성 가미”. 1면. ≪조선일보≫(1962.8.22). “파리날리는 극장가 돈없고 TV 재미에 관객 줄어”. 4면. ≪조선일보≫(1962.11.16). “방송시간 곱으로 연장”. 5면. ≪조선일보≫(1962.12.23). “확충되는 KBS 텔레비죤”. 8면. ≪조선일보≫(1964.3.15). “국영방송의 공영화 문제”. 2면. ≪조선일보≫(1964.12.1). “한국의 텔레비전 방송 새로운 국면에”. 5면.

116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