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와 일상 샤언 무어스 지음 임종수·김영한 옮김
대한민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주), 2008
1 근대사회의 미디어와 일상생활
텔레비전과 라디오 그리고 전화, 컴퓨터와 같은 전자미디어는 우리 매일 매일의 삶과 사회적 관계 형성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이와 같은 커뮤니케이션 정보 테크놀로지들은 가정이나 도시 지역과 같은 일상 생 활환경(local setting)에서 어떻게 사용되며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 그 것들은 지구화라는 문화적 추세 속에서 시간과 공간, 장소의 새로운 배치 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전자미디어는 각기 다른 수용자 또는 이용자들에 게 어떤 종류의 정체성, 경험, 상호작용을 가능케 하는가? 이 책에서 나는 미디어문화연구에 있음 직한 이러한 일반적인 질문에 나름의 답을 제공 한다. 각 장은 근대사회에서의 미디어와 일상생활에 대한 나의 일련의 탐 구와 성찰이 다시금 매만져진 것이다. 도입부에 해당하는 이 장에서 나는 나의 작업을 관통하는 낯익은 주제를 환기시키고, 이를 보다 폭넓은 논의 의 장 속에 위치시키고자 한다. 또한 미디어와 현대의 일상생활 연구를 위 한 학제적 접근을 주장하고자 한다. 이론과 경험적 연구 간의 밀접한 연결 고리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1. 근대사회의 미디어와 일상생활 1
일상 생활환경의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
이 분야에 대한 애초의 나의 관심은 1920∼1930년대 가정 공간에서 초기 라디오의 지위 변화(3장 참고)에 대한 역사적 탐구로부터 출발했다. 나는 영국 북서부 도시에 거주하는 노인들에게 행한 구술사(口述史, oral history) 인터뷰 분석과 그 시기의 다양한 기록 문헌(documentary source)에 흥미를 가지면서 방송과 가정생활의 관계 형성-일찍이 문화역사가인 레 슬리 존슨(Johnson, 1981)이 가정에서 시공간 ‘점령하기’라고 불렀던 작용 -에 관심을 가졌다. 그것은 가정 내 청취자에 의한 라디오 이용과 의미의 변화, 즉 기술적 오브제임과 동시에 프로그램 서비스 제공자의 의미를 동 시에 지닌 라디오가 ‘신기한 장난감’에서 ‘가구의 일부’로 점차 전환해 가는 것을 해명해 내는 작업이었다. 연구는 이 과정이 젠더의 차원(gendered dimension)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보이고 있음을 증명해 냈다. 라디오가 가 정에 도입되는 바로 그 순간, 가장 먼저 라디오 수신기는 기술적 실험과 모 험에 주목하는 남성적 담론에 의해 지배됐다. 그 이후 여성들이 라디오를 하루하루의 일상 안으로 통합시켜 내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라디오는 청취 장치로 변화했으며, 방송사업자 역시 수용자들을 벽난로 아래에서 아늑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가족’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초기 라디오에 대한 이 작업의 핵심적인 목적이 일상생활에서 당연시 되고 있는 방송의 지위를-가정환경 내의 제도화된 실재로서 라디오가 복잡한 사회적, 역사적 과정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는- ‘낯설게 하는 (denaturalise)’ 것이기는 했지만, 나는 그 외에도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 지에 대한 하위 아이디어와 연구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사적 인 것과 공적인 것을 절합(節合)해 내는(articulating), 다시 말해 가정 공간 을 일상생활의 지역적 상태를 넘어선 다양한 ‘상상적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Anderson, 1983)와 연결시키는 미디어의 역할에 관한 것 2
이었다. 가령 양차 세계 대전 사이 영국 라디오 청취자들은 비록 라디오로 매개된 것이기는 했지만 공공서비스 방송 시스템을 통해 서로를 인식할 수 있는 국가 공동체로 접근할 수 있었다(Cardiff & Scannell, 1987 참조). 국가적 사안이나 스포츠 게임에 대한 생생한 중계, 그리고 사적인 가족집 단을 겨냥한 통일된 프로그램 편성은 가정 청취자에게 새로운 집단에 대 한 동일시를 느낄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 책의 3장 끝에서 다루고 있듯이 그러한 동일시는 방송 생산물 분석만으로 간단히 가정될 수 있는 것이 아 니었다. 나는 1985년에 수행한 구술사 연구를 이어가면서, 일상 생활환경에서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에 대한 나의 관심이 영국의 수많은 미디어문화 연구 작업과 같은 맥락 하에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예컨대 몰리 (Morley, 1986)는 런던에 거주하는 여러 가족의 텔레비전 시청에 대한 연 구에서 남성과 여성이 가정의 맥락 안에서 텔레비전에 각기 다른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았다. 다른 한편 그레이(Gray, 1987)는 요크셔 지방의 여 성들이 당시 가정에 갓 들어온 비디오레코더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에 흥미를 가졌다. 그들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수용자들에게 미디어 이용과 의미는 젠더와 권력(gender and power)에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 을 발견했다. 그들은 미디어 소비를 보다 넓은 가정 여가와 노동의 패턴 안에 위치시키는 입장이었는데, 그것은 수용 분석과 비판적인 가족 사회 학 간에 생산성 있는 중간지대가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었다 (Jackson & Moores, 1995 참조). 몰리는 훗날 실버스톤과의 이론적이고 경험적인 연구 작업에서 커뮤니케이션과 정보 테크놀로지 연구는 가족문 화의 민속지학(ethnography) 안으로 한층 더 뿌리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 기에 이르렀다(Morley & Silverstone, 1990). 이 연구자들 역시 라디오와 일상생활에 대한 나의 여러 연구를 참고하면서 사적 세계와 공적 세계를 가로지르는 방송의 역할에 대한 보다 진일보한 연구를 이끌어냈다. 나는 이렇게 새로이 부상하는 분야의 쟁점에 주목하면서도 방송 역사 1. 근대사회의 미디어와 일상생활 3
에서 또 다른 중대한 시기에 대해 탐구하고자 했다. 1980년대 후반까지 ‘탈규제(deregulation)’ 정책과 새로운 TV 테크놀로지 마케팅은 영국에서 확장된 다채널 시청환경을 예고했다. 따라서 나의 다음 연구 프로젝트가 소비대상으로서 위성텔레비전에 대한 민속지학적 연구가 되는 것은 당연 했다. 그것은 그러한 기술을 받아들인 일반 시청자들의 ‘눈을 통해서’ 방 송 문화의 중요한 변화를 고찰하는 것이었다.(4장 참조). 1990년과 1992 년 사이에 나는 남웨일스(South Wales) 시의 각기 다른 주거집단의 가정 을 방문했다. 거기에서 나는 접시(위성) 구매 결정과 위성TV가 일상적 삶 에서 가지는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그리고 케빈 로빈스(Robins, 1989)가 텔레비전의 ‘이미지 공간(image spaces)’이라고 이름 붙인 것에 대해 그들 이 어느 정도 동의하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몰리와 그레이, 실버스톤 등 이 미디어 이용을 가정 내 활동의 네트워크 안에 위치시키고자 했던 것처 럼, 나 역시 위성TV를 이러한 맥락에서 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나는 위성 텔레비전의 지위를 가정의 다른 커뮤니케이션 정보 테크놀로지와 동일선 상에 놓고, 수용의 역할을 대인적 힘의 관계와 가족 내부의 정치학적 측면 에서 이해하고자 했다. 그것은 컴퓨터, 전화, 하이파이 시스템과 같은 전 자미디어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은 젠더뿐만 아니라 세대 간 구분에 대해서도 주목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일상 생활환경에서 위성텔레비전의 문화적 의의는 가정 내부에 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전송신호를 잡아내는 접시가 시각적으로 이웃이 나 행인들에게 위성텔레비전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 었다. 내가 민속지학적 연구를 수행할 때에도 이 접시의 위치에 대해 약간 의 승강이가 있었다(Brunsdon, 1991 참조). 4장에서 나는 외부 장식물- 기호학에서 빌려온 개념인 다강조성(多强調性,
multiaccentuality)
(Volvosinov, 1973)-에 대한 이웃 내-외부 간의 복잡한 해석에 대해 논의 할 것이다. 인터뷰 대상자들은 자부심에서 역겨움, 당혹감 또는 무관심에 이르기까지 접시에 대한 가감 없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나는 그들의 반응 4
을 계급과 계급 사이에서 만들어져 ‘차이(distinctions)’(Bourdieu, 1984) 라고 알려진 근대사회의 취향 패턴과 연결시키고자 했다. 위성텔레비전의 다채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응답자들은 종종 위성텔 레비전 프로그램의 미국식 또는 유럽식 느낌을 지상파텔레비전의 전통적 인 ‘영국식(Britishness)’ 느낌과 구별했다. 그중에서 몇몇 시청자들은 BBC 가 아니라는 이유로 정확하게 Sky(위성)에 대한 호의를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영국의 방송이 수용자들을 국가의 주체로 호명했다면, 위성TV의 ‘전자적 전경(electronic landscape)’은 그 특성상 보다 더 초국적이었다 (Morley & Robins, 1995 참조). 비록 나의 작업이 시청자들의 되풀이되는 일상생활의 경험적 복잡성에 뿌리를 두고는 있지만, 프로그램 담론은 시 청자들이 공동체의 경계를 ‘재상상’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자원들을 제공 해 주었다. 따라서 테크놀로지가 사회 변화에 직접적이고도 단선적인 영 향력을 가졌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 편치 않은 나로서는 방송 생산물과 그것의 소비가 이루어지는 일상 생활환경 간의 ‘상호 담론적인 (interdiscursive)’ 연관성을 찾고자 했다. 다시 말해, 왜 어떤 사람들은 새 로운 방송 영역에 감동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가를 밝히고자 했다.
지구촌 문화의 시간, 공간 그리고 장소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간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나는 미디어 소비자들의 삶의 변화, 특히 근대의 일상생활에서 시간과 공간, 장소의 배치를 바꿔놓 는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설명 틀을 찾고자 했다. 나는 가장 먼저 레이먼드 윌리엄스(Williams, 1974)가 테크놀로지이자 문화적 양식으로 1. 근대사회의 미디어와 일상생활 5
서 텔레비전에 대해 기술할 때 사용한 ‘유동성의 사사화(mobile privatization)’1) 개념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이 용어를 TV와 수용자에 대한 인문지 리학(human geography)의 출발점으로 삼았다(5장 참조). 그런 후 나는 미디어문화연구에 아주 유용한 가치를 주는 기든스(Giddens, 1990)의 ‘시 공간 원격화(time-space distanciation)’2) 개념에 주목했다. 비록 기든스 자신은 이 책에서 방송이나 여타 전자미디어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후기 근대성’의 조건에 대한 광범위하고도 개괄적인 설명 을 내놓은 이래로 그의 작업은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에 대해 생산적 인 사고방식을 제공해 주고 있다(6장 참조). 유동성의 사사화는 윌리엄스가 가정 중심적이면서도 물리적 거리를 넘어선 여행이나 커뮤니케이션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그래서 근대사회의 모순적인 경향을 하나로 묶는 근대사회의 독특한 삶의 방식에 부여한 용 어이다. 그가 비록 기술 결정론에 대해 비판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기는 하 지만, 윌리엄스는 자동차 교통과 방송을 이러한 라이프스타일의 핵심 요 소로 보았다. 자동차는 그것이 일 때문이든 여가 때문이든 관계없이 개인 과 가족이 원하는 어떤 곳으로도 갈 수 있게 해주었다. 이와 유사하게 텔
1) ‘유동성의 사사화(mobile privatization)’는 근대사회 형성에 작용하는 방송미디어의 고 유한 특성으로 자주 언급되는 개념이다. 이 용어의 뿌리는 레이먼드 윌리엄스(Williams, 1974)가 그의 책 『텔레비전』에서 밝힌 것처럼 1920년대 이른바 내구소비재의 급속한 가정 유입에서 라디오가 가지는 독특한 특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기에서 그는 근대 도 시 산업생활의 각기 다른 두 가지 경향, 즉 역설적이면서도 내적으로 깊은 연관성을 갖는 특성으로 복잡다단한 사회적 유동성(이동성)의 증가와 더불어 그에 못지않게 점차 견고 하고 독립화되어 가는 가정 중심적 생활 간의 중재를 방송이 수행했음을 밝히는 개념으 로 유동성의 사사화를 제시한다(역자 주). 2) ‘시공간 원격화(time-space distanciation)’는 근대사회 체계가 시공간상의 상호분리, 특 히 원거리 상호작용의 증대를 특징으로 하고 있음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는 미디어 테 크놀로지 발전에 힘입은 바 크다. 실재감 높은 미디어 테크놀로지는 높은 수준의 시공간 원격화를 달성하면서 전근대사회의 국지성(locality)으로부터 해방되는 데 크게 기여해 왔다. 최근 쌍방향성을 실현하면서도 고품질의 콘텐츠를 실현하는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시공간 원격화를 보다 높은 수준으로 이끌어가고 있다(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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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전과 라디오는 대중오락의 가정화-보다 광범위한 ‘내부 세계로의 후퇴(withdraw to interior space)’라고 할 수 있는(Donzelot, 1980)-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이 전자적으로 매개된 공적 세계로 탈바꿈하 도록 했다. 방송이 일종의 ‘상상적 여행’을 촉진시켰던 것이다. 조슈아 메 이로위츠(Meyrowitz, 1985)는 집이라는 벽은 점점 더 침투성이 높아져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일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 실재와 똑같이 TV를 통해 볼 수 있음을 관찰했다. 이것은 확실히 사회활동의 지 리학에 뜻 깊은 함의를 가진다. 제5장에서 나는 지리학자,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문화인류학자들의 관련 문헌을 검토하여 근대사회의 시공간 조 직체로서 텔레비전의 지위를 탐구할 것이다. 제6장은 동일한 주제를 다르게 접근한 것인데, 여기에서 나의 출발점 역 시 기든스이다. 나는 일찍이 일상적 소비 실천에서 창조성과 강제성에 대한 논쟁을 풀어가는 방법으로 그의 ‘구조화(structuration)’ 이론(Giddens, 1984 참조)을 활용한 적이 있다(Moores, 1993). 그러나 이 책에서 나는 근대성의 제도적이고 현상학적인 차원에 대한 그의 후기 노트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는 당대를 ‘포스트모던’이라고 명명하던 유행 사조를 거부 했다. 그 대 신 지난 3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벌어진 점점 더 급진화, 보편화되고 있는 후기 근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변화의 속도와 범위 모두 드라마틱 하게 전개되어 왔다. 근대성의 불가항력(juggernaut; 인도 신화 속 크리슈 나의 상-역자 주)에 가속도가 붙었고, 사회적 관계가 지구 표면 저 너머 로까지 ‘확장해’ 가는 필연적인 문화적 지구화가 진행돼 왔다. 기든스는 이러한 확장을 이른바 시간-공간 원격화 과정과 관련시켜 설 명하고자 했다. 이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근대에서 근대사 회로의 전환에 대한 그의 분석,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이 장소의 제한을 넘 어서서 확장되며 그것을 통해 ‘ 동시존재(감)[共存感, co-presence]’의 맥락 을 만들어낸다는 기든스의 파격적인 제안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언제’ 라는 것이 고도로 지역화된 ‘어디’와 밀접히 관련되었다는 사실에서 보면, 1. 근대사회의 미디어와 일상생활 7
시간 측정은 기계적 시계에 의해서 혁신적으로 표준화되었고, 전 세계적 시간대의 채택으로 지구화되었다. 공간 역시 마찬가지로 거의 배타적으 로 장소를 의미했던 데에서 특정 장소로부터 혁신적으로 분리되기에 이 르렀다. 만약 공간이 여전히 장소와 겹친다면 공간은 더 이상 장소에 담겨 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역적 일상 생활환경의 중요성이 후기 근대 성의 조건에서 소멸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에 대한 나의 연구는 오히려 그 반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여러 측면에서 볼 때 사회적 삶이 장소로부터 해방되거나 공간이 장소로부터 탈피(disembedded)되었음은 인지해야 한다. 이런 환경에서 는 멀리 떨어져 있는 익명의 타자들 간의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하 고, 매일 매일의 일상과 지구촌 문화 사이에서 새로운 연결고리가 생겨날 수도 있다. ‘공간의 장소귀속탈피 메커니즘(disembedding mechanism)’의 다양 한 형태는 기든스에 의해 논의되었다. 예컨대 그는 돈의 역할을 물리적으 로 떨어져 있는, 심지어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 간의 관계를 촉진시 키는 상징적 징표(symbolic token)라고 생각했다. 국제 금융시장을 가로 질러 명멸하는 컴퓨터상의 숫자처럼, 돈이 물리적인 통화가 아닌 정보의 형태가 된다면, 돈은 우리의 비즈니스 교환을 위한 특별한 환경이 필요 없 도록 할 것이다. 이것이 시간-공간 원격화의 의미이다. 그의 예시는 흥미 롭다. 왜냐하면 이러한 시장은 전화나 컴퓨터 같은 테크놀로지를 바탕으 로 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는 곳곳에서 근대성이 초기에는 인쇄물과, 그 이후에는 지리적으로 흩어져 있는 사람들 간에 거의 즉시적인 커뮤니케이 션을 가능케 해준 전자 미디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일관되게 알려주 고 있기 때문이다(Giddens, 1991). 나는 그레이엄 머독(Murdock, 1993), 로저 실버스톤(Silverstone, 1994), 존 톰슨(Thompson, 1995) 같은 학자 들과 함께 미디어 사회 이론으로서 근대성에 대한 이러한 시각이 주는 함의 에 주목해 왔다. 그러면서 나는 기든스의 개념들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8
것으로 사회 시스템의 장소귀속탈피와 재귀속화, 신뢰와 위험, 친밀성과 낯설음 간의 역학관계, 그리고 근대사회의 ‘제도적 성찰성(institutional reflexivity)’ 등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많은 아이디어를 연구에 적용해 왔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기든스 읽기가 무비판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지구 화와 시공간 관계에 대한 다른 이론가들의 작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 다. 나는 이와 관련한 최근의 논의가 각기 다른 사회집단의 변화가 동일하 지 않다는 점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동일하지 않은 성격의 패턴들을 하나로 결부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본다. 근대성의 전 지구화는 지구상의 거주자들에게 똑같이 보편적인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풍족한 제1세계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 가지이다. 지구촌, 정보 초고속도로와 같은 우리 시대의 언어는 점차 빨라 지는 교통과 커뮤니케이션 흐름에 영감을 주기는 하지만 주의해서 다루 어져야 한다. 국제 항공여행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 상생활은 교통체증에 시달리거나 버스를 기다리는 삶이라는 것을 기억해 야 한다(Massey, 1992). 거기에 더하여 미디어 이벤트와 서비스에 대한 접근은 지불능력에 더욱더 의존하고 있다. 원래 영국에서 방송은 공적인 효용가치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가입 채널과 지불에 따라 프로그램을 전 송하는 PPV(pay-per-view) 경향을 보이고 있다. 작은 규모지만 점차 늘 어나는 소수가 개인용 컴퓨터를 통해 인터넷에 접속하는 데 반해 인류의 절대 다수는 여전히 사적 용도의 전화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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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경험과 상호작용
나는 지금까지 일상 생활환경에서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 또는 지구촌 문화에서 시간, 공간, 장소에 대한 경험적이고 이론적인 작업을 해오면서 일관되게 정체성과 경험, 상호작용 이슈에 대한 관심을 유지해 왔다. 예컨 대 위성TV와 초기 라디오 수용자 연구에서 나는 수용자들이 그들의 일상 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련의 상징 자원을 통해 구성되는 자아감과 공 동체감을 탐구했다. 이러한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정체성은 계급, 성, 세 대의 사회적 관계에 의해 형성되고 또한 거꾸로 그러한 것들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역시 지역적, 국가적, 초국가적 구성체와 운명을 같이하 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미디어와 근대성에 대한 나의 작업에서 핵심적인 초점은 매개된 문화적 환경이 생활 속에서 어떻게 느껴지는지, 다시 말해 유동성의 사사화와 시공간 원격화의 일상적 경험이 어떠한지에 관한 것 이었다. 나는 각 분야에서 전자미디어로 연결된 사람들 사이, 즉 전자미디 어의 공존적 소비자들 사이나 테크놀로지로 접촉하는 부재중인 타자들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 책의 뒷장은 이런 흥 미로운 것들을 추적하는데, 공동작업으로 수행된 사례연구로부터 시작해 서 일반적인 분석적 에세이로 끝맺는다. 스튜어트 홀(Hall, 1992)은 근대사회의 정체성 변화에 대한 논의를 살 피면서 일상 생활환경과 지구적 단위 간의 새로운 절합의 결과, 새로운 인 종성과 ‘혼종성의 문화(culture of hybridity)’가 부상하고 있음을 지적했 다. 그의 논의는 그가 ‘서구 내 잔여자(the Rest in the West)’의 등장-유 럽의 식민지로부터 본국 심장부로의 사람과 기호의 이전(migration)-이 라고 불렀던 현상에 천착했다. 거기에서 그는 그러한 잠재력이 문화적 경 계를 가로지르는 가치와 의미의 ‘변용’을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캐런 쿠레 시(Karen Qureshi)와 나는 그러한 종류의 일상생활의 변용을 펀자브 출신 10
의 런던인을 사례로 탐구한 마리 길레스피(Gillespie, 1995)의 족적을 뒤따 르면서 에든버러의 몇몇 젊은 파키스탄 출신 스코틀랜드인의 생생한 경험 에 대해 연구했다(7장 참고). 우리는 캐런이 1996년에 수행한 예비 현장조 사에 기초해서 그들의 일상적이지만 창의적인 ‘전통의 교섭(negotiations of tradition)’을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는 정체성 형성에 있어서 미디어의 역할에 대해 탐구할 것이다. 그것은 길레스피도 그랬듯이 보다 넓은 사회 적 맥락에서 그러한 활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변용 또는 혼종화의 실천이라고 사용하는 은유는 ‘리 믹스’라고 알려진 일종의 음악과 유사하다. 젊은 영국 출신 아시아인들 (British Asians) 사이에 인기 있는 이 문화 양식은 ‘동양에서 온 소리’와 서 구 젊은이 문화에서 파생된 전자 리듬을 하나로 묶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 서 스타일의 충돌은 남아시아 디아스포라에서 폭넓은 사회적 변화의 패 턴을 표현하는 것일 수 있다. 제7장에서 우리는 비록 변화가 모든 파키스 탄 출신의 스코틀랜드인에게 동일한 수준에서 또는 정확하게 동일한 방 법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일 상생활에서 경험한 이주의 독특한 느낌을 기록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한 예로 젊은 남녀들은 그들의 여성적, 남성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지극히 다른 위치에 있다. 우리는 젠더화된 그들의 삶의 주요 특징을 묘사 하고 해석하며, 부모나 친구들과의 복잡한 관계의 그 무엇을 파악하고자 한다. 우리의 작업은 미디어 소비와 여타의 문화적 활동의 창의적 측면을 이해함과 동시에 이와 같은 특정 ‘디아스포라 공간(diaspora space)’(Brash, 1996 참조)에서 작용하는 여러 가지 제한과 압박에 주목한다. 이 연구에서 인터뷰한 젊은 친구들에게 있어 방송, 전화 또는 컴퓨터와 같은 테크놀로지는 매일 매일의 사회적 삶의 직조물(fabric)의 일부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나는 나의 초기 관심을 하나로 묶는 전자미디어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를 제공한다(제8장 참조). 여기에서 초 점은 매개적 ‘상호작용 질서’를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회 1. 근대사회의 미디어와 일상생활 11
학자 어빙 고프먼(Goffman, 1983)은 면대면 상호작용이나 대인접촉 상태 에서 인간행위와 사회적 관계에 특정한 질서가 있음을 주장했다. 제8장에 서 나는 전자적으로 매개된 커뮤니케이션에서도 이 점이 똑같이 적용됨 을 제안할 것이다. 톰슨(Thompson, 1990)이 시공간적으로 상징형식의 ‘확장된 도달성(extended availability)’이라고 불렀던 것은 근대사회에서 새로운 형태의 원거리 상호작용을 촉진시켜 왔다. 여기에서 참가자들은 개별적인 물리적 장소에 있으면서도 상상적 공동체나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 1970년대 미디어문화연구 이래로 미디어와 수용자 간의 상호작용에 대해 가장 발전된 연구 분파는 그러한 결합이 ‘텍스트’와 ‘해독자’를 포함 하는 것으로 인식했다(Moores, 1990 참조). 후기 구조주의자와 마르크스 주의 학파로부터 광범위하게 영향을 받은 이러한 인식은 의미화와 이데 올로기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데 유용했다. 예를 들어 연구자는 의미 생 산과 사회적 재생산 또는 저항 등이 어떻게 TV 담론의 부호화와 해독에서 이루어지는가를 탐구할 수 있었다(Morley, 1980).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러한 개념과 이론은 매개된 커뮤니케이션의 어떤 기본적인 특징, 특히 이 책 끝머리에서 수행적이고 경험적 차원이라고 언급한 것을 간과하는 경 향도 있었다. 이러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색다른 개념적 용어와 보 는 방법이 필요하다. 그 하나로 나는 텔레비전 진행자(performers)와 가 정의 시청자 간의 ‘준사회적 상호작용(para-social relationship)’이라는 개 념을 40여 년 전 북미 학자 도널드 호턴과 리처드 월(Horton & Wohl, 1956)이 쓴 것에서 빌려왔다. 그들은 익명의 청중에게 말을 하는 뉴스캐 스터와 프로그램 진행자들의 친숙하고도 상투적인 스타일과 그들 간에 형성될 수 있는 ‘친밀성의 유대’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최근 방송 분석에 서 사교성과 진실성 같은 유사한 범주를 주장하는 패디 스캐널(Scannell, 1996)도 매우 설득적이다. 진행자와 수용자 간의 차이가 상대적으로 덜 고정적인 전화나 PC 같은 여타의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도 그러한 범주 12
들이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 내가 주장하는 바이다. 나는 원래 매개적 상호작용(mediated interaction)을 매개되지 않은 실 제 문화(situated culture)의 반대말로 정의했지만, 이후 나는 이 말을 커뮤 니케이션 테크놀로지가 항상 일상생활의 공존적(co-present) 마주침을 가능케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때때로 기술적 오브제 와 그것의 전송물은 문자 그대로 생활 주변의 상호작용을 위한-달리 말 해서 고프먼(Goffman, 1969)이 연극에서 (연극을 진행시키는) ‘무대장치 (stage prop)’라고 명명한-‘중재자’로서 기능한다(Lull, 1990). 전자미디 어는 가정이나 이웃, 직장에서 또는 여가 상황에서 인간관계의 확장 (affiliation)과 회피(avoidance)를 위한 전술로 사용된다. 또한 전자미디 어는 부조화된 느낌뿐만 아니라 결속된 느낌을 표현하는 것으로도 활용 된다. 따라서 주파수를 맞추고, 전화를 받고, 로그인을 하는 단순한 사회 적 행위는 무매개적인 타인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주체에게는 매우 복잡 한 의미를 가진다(Bausinger, 1984 참조). 실제로 이러한 실천이 가리키 는 바는 실제 세계와 매개된 세계가 후기 근대성의 조건에서 항시적으로 중첩되는 방법에 있다. 근거리와 원거리 커뮤니케이션의 동시적인 혼성 화가 있는 것이다.
이론, 연구 그리고 학제성
이 책의 출간을 준비할 때 나의 목적에는 미디어와 근대적 일상생활에 대 한 예전 연구들을 단순히 한곳에 모으는 것뿐만 아니라 향후 연구를 위한 특정한 접근을 정당화하는 것도 있었다. 지난 수년간 이 영역에 대한 관심 이 점차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야 할 일은 더 많이 남아 있다.
1. 근대사회의 미디어와 일상생활 13
나는 새로운 탐구와 성찰을 자극하는 특별한 제안을 할 것이다. 그러나 여 기에서는 나의 연구 접근의 일반적 원리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적절해 보 인다. 그것은 보다 넓은 학문적 발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학제적 탐구는 물론 일상생활의 역동성에 대한 경험적 연구에 자극 을 주고 또 역으로 자극을 받는 미디어와 근대성 이론을 정교화하는 작업 을 필연적으로 포함한다. 내가 즐겨하는 연구 형태는 질적 연구이다. 전통적으로 방송산업에 고 용되어 수행하는 양적 방법의 수용자 측정과 비교할 때(Ang, 1991 참조), 일상생활의 미디어 이용 연구를 위해 내가 추구하는 테크닉은 대화적 인 터뷰와 일상생활의 관찰이다. 공공 담론이나 공공 표상 분석을 통해 보완 되는 민속지학과 구술사는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정체성, 경험, 상호작용 이슈를 다루는데 매우 적합하다. 질적 연구는 클리퍼드 기어츠(Geertz, 1973)가 ‘두껍게 기술하기(thick description)’-의미와 정서를 드러내 보 이는 사회적 활동에 대한 해석적 설명-라고 말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한다. 이론은 묘사를 두껍게 하는 데 작용하는 핵심적인 양념이다. 내가 일상의 문화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고자 애썼을 때, 나는 나의 아이디어를 기든스, 고프먼, 홀, 윌리엄스 등 사회문 화 이론가들의 개념과 상호 결합시키는 것이 많은 도움을 준다는 점을 알 게 됐다. 그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당대의 존재방식의 고유한 특징에 관 심을 가졌는데, 그들의 훌륭한 작업들은 자아나 사적인 삶의 문제를 국가 와 지구적 규모에서 제도적 과정과 연결시키는 데 훌륭한 해답을 주곤 했 다. 물론 이론이 고유한 강점과 설명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경험적 연구의 발견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추상적인 사 고 그 자체만으로는 사람들의 일상적 일과의 미세한 측면을 잡아내는 데 종종 실패한다. 서장을 다시금 읽으면서 나는 학문 영역과 접근방법에서 명성을 떨친 수많은 문헌에 맞부딪친다. 정치학, 기호학, 민속지학은 말할 것도 없고 14
사회학, 역사학, 지리학, 인류학까지 언급했다. 이것은 이 책이 명백하게 학제적 성격을 띤다는 점을 보여준다. 기어츠(1983)는 근대사회 이론과 연구가 점점 더 지식들 간의 경계를 넘나든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적절한 문구를 남겨주었다. 그는 연구에서 ‘장르 붕괴(blurred genres)’ 현상에 대 해 이야기했다. 그의 지적을 조금 더 확장해 보면, 미디어문화연구 영역은 이렇게 붕괴되고 가로지르는 하나의 제도적 심급(institutional instance) 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의 고등교육 주제로서 이 영역은 커뮤니케이션과 문 화의 패턴에 기성 지식을 보태준 인문학에서부터 사회‘과학’에 이르기까 지 다양한 학문 분야 간의 어색한 동맹으로 형성됐다. 그러나 이 제휴는 연구자에게 그들이 직면했던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빛 을 비춰주었기 때문에 분명히 생산적이었다. 비록 전자미디어에 대한 작 업에서 얻어야 할 중요한 목표물이 여전히 남아 있기는 하지만, 나를 포함 한 미디어문화연구 ‘2세대’에게 있어서 학제성은 보다 쉬운 일이다. 다음 2장은 두 가지 기능을 제공한다. 지금까지 제1장에서 소개한 핵 심 주제와 이슈에 대한 담론을 확장한다. 그러면서도 ‘일상생활의 제도’로 서 방송의 지위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Rath, 1985). 그것은 초기 라디오(3 장)와 위성TV(4장)에 대한 꼼꼼한 분석을 위한 기초를 제공해 줄 것이다. 방송 생산물을 두고 수용자들이 어떻게 조직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이 최근에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시 청자와 청취자 다수의 삶 속에서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일상성 또는 당연 성(taken-for-grantedness)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미디어의 신기효과와 그것의 변형태는 익숙함과 세속성의 배경과 대조적으로 보여 야 한다.
1. 근대사회의 미디어와 일상생활 15
2 일상생활의 제도로서 방송
방송은 두 가지 각기 다른 의미에서 제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한편으로 방송은 상징적 재화를 제조하는 산업이다. 방송은 특수한 전문주의적 실 천과 더불어 국가 또는 시장과 독특한 관계로 특징지어지는 문화 생산의 다양한 제도적 측면을 띠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방송은 그러한 상징적 재화가 수용자들이 생활하는 사회적 환경 안으로 침투해 가는 바로 그 문 화 소비지점이다. 래스(Rath, 1985)가 일상생활의 제도라고 부른 방송은 우리의 일상적 경험을 조율하는 사회적 교직물(fabric)의 한 부문으로 이 해된다.1) 이 장은 방송을 ‘문화 소비’의 제도화된 특성으로 보는 후자의 정 의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러나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시청자와 청취자 의 매일 매일의 삶에서 차지하게 된 지위를 살펴볼 때는 방송을 ‘문화 생산’ 제도로 보는 전자의 정의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점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방송은 상호 소통하는 생산자, 소비자, 커뮤니케이션 형식들이
1) 이 장은 물론이고 이 책 전체는 방송이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에서 어떻게 제도화되었 는지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제도화되었는지를 살피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역 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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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로 통합된 ‘문화적 순환(cultural circuit)’ 속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du Gay et al., 1997 참조). 여기에서 나는 첫 시작으로 연구방향 설정에 도움이 되는 방송과 수용 자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문화적 순환에서 생산과 소비 가 가지는 독특한 조건을 고찰하고자 한다. 그런 후 나는 시청-청취 공중 에 대한 산업 고유의 태도, 의사소통적 스타일이나 표현양식(modes of address),2) 그리고 상품으로서 수용자를 객관화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고 찰로 옮겨갈 것이다. 그런 후 나는 사적인 수용의 영역에서 방송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다룰 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소비자들이 만들어내는 현실 맥 락 안에서 의미와 즐거움, 그리고 가정의 일상적 맥락에서 작용하는 사회 적 권력관계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역적 수준의 문화와 지구화 과정을 절합하는 데 있어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역할, 다시 말해 멀 리 떨어져 있는 사건에 시청-청취자들이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하여 자 신과 공동체의 감각을 변화시키는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역할에 대해 설명 할 것이다. 이들 각각의 중요한 이슈를 통해 이 장이 겨냥하는 공통된 주제 는 시간과 공간의 사회적 배치에 작용하는 방송의 위치에 관한 것이다.
2) 영어의 ‘address’를 한국어로 가장 가깝게 표현하는 용어로 ‘표현’, ‘발화’ 또는 ‘호명’이 있 다. 따라서 ‘mode of address’는 표현양식, 발화양식, 호명양식 등으로 사용될 수 있다. 이때 그것은 미디어나 미디어 텍스트가 수용자에게 어떤 심리적, 미적, 정신적 생활에 영 향을 끼치는 표현/발화/호명양식(the mode of address)을 뜻한다. 따라서 그것은 수용자 에게 ‘영향’을 주기 위한 미디어의 효율적인 ‘쓰기’ 방식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전자의 의미가 강한(텍스트가 수용자에게 어떤 이데올로기적 위치를 지정해 주는) 알튀세의 호명(interpellation)과 구분하여 ‘표현양식’으로 통일한다(역자 주).
2. 일상생활의 제도로서 방송 17
생산과 소비의 조건
만약 방송의 생산과 소비의 조건, 문화적 순환에 작용하는 방송 고유의 특 성을 이해하려 한다면, 우리는 방송의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차원에 대한 해명, 다시 말해 방송이 작동하는 장소와 ‘매개’의 역동성을 파악해 내야 한다. 방송의 이미지와 사운드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생산되 고 소비되지만 전송과 거의 동시에 수용이 이루어진다. 스튜디오나 옥외 방송이 위치한 곳이 곳곳에 흩어진 시청-청취 가구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텔레비전과 라디오는 조직화된 방송 프로그램 편성으로 일상적 삶의 리듬에 엮여 들어감에 따라 수용자들에게 ‘생생함(liveness)’ 과 즉시성(immediacy)의 느낌을 만들어낸다. 방송에서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공간적 분리는 시간적 동시성과 전송 및 수용의 연속성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방송 특유의 ‘미학적’이고 커뮤니 케이션적인 스타일을 창출해 낸다. 윌리엄스(1974)는 텔레비전에 대한 그 의 선구적인 연구에서 이러한 미학을 상세히 알려주는 첫 사례를 보여줬 다. 그는 미디어 생산물과 가정의 시청 경험이 ‘흐름(flow)’이라고 말한 것 에 의해 어떤 고유한 특성을 가지는지를 설명했다. 그것은 신문이나 잡지 의 고정 필자로서 그가 텔레비전 콘텐츠를 비평하는 방법, 다시 말해 텔레 비전에 어울리는 주제와 비평의 방법론을 찾으려고 애쓴 결과물이었다.
비평가들은 드라마나 특집물, 이런저런 토론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 리를 논평의 대상으로 삼는다. 나는 4년 동안 한 달에 한 번 정도 텔레 비전을 비평했기 때문에 텔레비전 비평이 얼마나 단순하게 이루어지 는지 잘 알고 있다. … 그러나 그러한 비평 방법은 유용하기는 하지만 텔레비전의 핵심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흐름과는 항상 동떨어져 있다. 흐름에 대해 어떤 말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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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버라이어티쇼와 강의, 축구경기를 본 바로 그날 두 편의 연극, 세 종 류의 신문, 서너 개의 잡지를 읽은 것을 묘사하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항목3)들이 다양할 지라도 텔레비전 경험은 그러한 것들을 통합해 내는 매우 유용한 방법 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Williams, 1974: 95).
이러한 논의에 더하여, 존 엘리스(Ellis, 1982: 118)는 마지막 문장에 있 는 ‘항목들(items)’이라는 말의 의미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윌리엄스가 흐 름이라는 아이디어를 독립적인 작품이나 분절적인 프로그램에 의해 형성 되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 아닐까라고 묻는다. “그는 한 개의 텍스트와 전 혀 관련이 없는 텔레비전 방송 고유의 상품 형식의 복잡성을 간과하고 있 다.” 엘리스는 텔레비전 생산물의 주요 특징으로서 ‘분절(segmentation)’ 과 ‘반복(repetition)’을 전면에 내세운 수정된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단편 (segment)을 텍스트 분석의 기본 단위라고 주장했는데, 그에게 있어 단편 은 30초짜리 광고 스폿과 텔레비전 뉴스의 개별 기사 또는 텔레비전 드라 마의 짧은 신과 같은 것들이었다. 엘리스는 거기에 상응하는 개념으로서 반복을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분절의 순환구조로 설명했다.4) 그는 방송에 서 이러한 원칙이 시리즈5)와 시리얼6)처럼 대부분의 텔레비전 포맷에 공 통적이며 그 적용범위도 광범위하다고 말했다. 시리즈와 시리얼은 일일 단위 또는 주 단위의 방송 편성에서 동일하게 반복되는 산업적으로 고도 로 분화되고 표준화된 생산물이다. 연속물 시리얼, 가령 소프오페라의 경 우, 일 년 단위 심지어는 수년 단위로 연장되어 프로그램 자체만의 고유한
3) 개별 프로그램을 지칭함(역자 주). 4) 방송프로그램이 매주 동일 시간대에 위치함으로써 생기는 계열체적 반복과 시간의 흐름 에 따라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통합체적 반복이 일상생활에 씨줄과 날줄처럼 연결된다 (역자 주). 5) 매회 종결구조를 가진 연속물(역자 주). 6) 매회 종결구조를 가지지 않은 연속물(역자 주).
2. 일상생활의 제도로서 방송 19
과거와 미래라는 강력한 감각을 창출할 수도 있다(Geraghty, 1981 참조). 윌리엄스의 흐름 개념이 가정 내 시청 경험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편성 의 미학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과 마찬가지로, 텔레비전 생산물의 분 절과 반복의 속성에 대한 엘리스의 논의 역시 가정의 수용 맥락에 대한 일 련의 성찰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는 텔레비전 수상기 자체를 “때때 로 가족사진이 놓여지기도 하는 또 다른 가정 오브제, 다시 말해 텔레비전 스크린의 등장인물에 대한 응시가 그 위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존재 에 의해 보완되는 것”(Ellis, 1982: 113)이라고 기술했다. 방송은 영화와 달 리 ‘친밀’하고도 친숙한 것이다. 방송은 눈을 사로잡는 스펙터클한 공공적 오락의 장이라기보다 사적인 가정에 있는 평범한 일상적 가구의 일부이 다. 그런 이유로 방송의 상징적 생산물은 일상적인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 합되게 제작되어야 한다. 시청자의 정신을 ‘현혹케’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엘리스에 의하면, 이것은 텔레비전이 영화보다 훨씬 더 사운드 기반 매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텔레비전이 영화관의 대형 스크린에서 펼쳐지 는 영화적 관음주의의 시선과 대비되는 ‘흘려봄의 체계(regime of the glance)’를 구축하는 매체라는 것이다. 물론 텔레비전은 시청자들이 거실 바깥세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 건들에 대한 특별한 종류의 ‘목격’이 가능하도록 해준다. 그러나 그것의 표현 및 제시 방식은 가정이라는 본원적 특성이나 방송의 감각에 맞게 재 처리되어야 한다.
텔레비전은 시청자와 텔레비전 제도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를 바라보 는 표현 공동체(community of address)를 창조한다. 따라서 텔레비전 은 친숙하고 가족적인 것을 넘어선 세계를 친숙하고 가족적인 모습으 로 탐색해서 보여주는 일종의 중계 장치이다. … 텔레비전은 그들을 위 해 말하고 그들을 위해 보는 … 일종의 시청자들을 가지고 있다. 인터 뷰어는 ‘가정의 시청자들이 무엇을 알고자 하는지’에 근거해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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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드라마는 가족의 개념에 뿌리를 둔다(Ellis, 1982: 163-5).
아마도 위에서 엘리스가 기술한 것의 고전적 사례는 텔레비전 뉴스일 것이다. 이 장르에서 시청자들은 상상할 수 있는 수준 안에서 떠나는, 지 구 곳곳으로의 여행에 초대된다. 거기에서 갈등적 사안들이 얼마나 자주 발생하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뉴스에서 진행자의 직접적이고 개 인적인 표현은 자신의 일상 생활환경에서 시청하는 가정 소비자들로 하 여금 확신을 갖도록 할 수 있다. 뉴스진행자는 거실을 들르는 정기적인 ‘방문객’이며 ‘모든 것들을 가정에 있는 수용자에게 가져다준다.’ 내가 사례로 제기한 이슈 중에서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적 인 것들이다. 그것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주체성을 매개하고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지역적인 것과 지구적인 것을 절합하는 텔레비전의 사회적 역 할에 관한 것이다. 방송을 일상생활의 제도로 보는 일체의 고찰은 이러한 경험적인 이슈들을 매우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 이것들은 기든스(1990) 가 ‘근대성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modernity)’이라고 말한, 후기 근대사회의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이해하는 프로젝 트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서 텔레비전 뉴스는 전통적인 시공 간 관계를 드라마틱하게 재조정해 낼 뿐만 아니라 이전의 친밀성과 낯섦 의 패턴을 바꿔내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이 시청자들을 구축한다는 엘리 스의 비평은 우리에게 방송의 이데올로기적 권력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그는 제도와 수용자 간의 공모관계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고 주장했다. 이 동맹은 집에 있는 시청자를 ‘당신’으로 표현함으로써, 그리 고 일부 ‘그들’과 비교되는 ‘우리 편’을 가정함으로써 조직된다. 그럼으로 써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 간의 문화적 차이, 다시 말해 텔레비전의 시선 에서 주체 또는 객체로 위치 지어지는 사회적 그룹 또는 정치적 지지자들 간의 문화적 차이가 양산된다. 그러나 날카로운 관찰로 보이는 이 문제에
2. 일상생활의 제도로서 방송 21
서 난점은 모든 수용자 구성원들이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호명과 틀짓기 안에서 지정된 위치를 취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존 코너(Corner, 1995: 19)는 최근 자신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디어에 대한 예리한 비 평으로서 엘리스의 작업은 … 텍스트 형식 분석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미 디어의 사회적 효과를 예측하는 낯익은 문제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1970년대 후반 이후 미디어문화연구 분야의 많은 연구자들은 텔레비 전과 수용자 간의 해석적 상호작용을 경험적으로 탐구함으로써 코너가 지적한 문제를 피하고자 했다. 이러한 연구의 원래 목적은 각기 다른 시청 자 집단에 의한 시청각 기호의 다양한 ‘해독들(decodings)’을 좌표화하는 것, 다시 말해 생산단계에서 ‘부호화된’ 텍스트의 선호된 의미로부터 시청 자의 읽기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거리는 일차적으로 사회적이고 기호학적이지만 그것 역시 시공간적 구분에 의존 한다. 사회학자인 존 톰슨(Thompson, 1988)은 이데올로기와 매스커뮤 니케이션 비판 이론은 이러한 각각의 차원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방송이 어느 정도 시공간적으로 광범위한 도달성을 보이는 만큼, 방송 상 징재는 수용의 순간과 일상적 이용에서 ‘차별화된 해석(differential interpretation)’에 열려 있다는 것이다.
매스커뮤니케이션 고유의 차별적 특성은 메시지가 면대면 상호작용 대화와 달리 광범위한 수용자들에게 언제든지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 과 관계가 있다. … 그러나 대중(mass)이라는 용어는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용어가 수적으로 많다는 의미 외에 그 모양이 비정 형적이고 비자발적이며 무관심한 다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 문이다. 매스미디어에 의해 전달된 메시지는 명확한 사회역사적 맥락 안에 있는 특정 개인에 의해 수용된다. 이 개인들은 메시지들을 능동적 으로 해석하고 이해하여 자신의 삶에 연결시킨다. 미디어 메시지의 이 러한 전유는 태생적으로 비판적이고 사회적으로 차별화된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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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 메시지의 전유에는 사회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수용자의 차이와 상호 연결되는 구조적인 변이(variation)가 있다(Thompson, 1988: 365-6).
예를 들어 산업적 논란에 대한 텔레비전 취재물을 시청할 때, 시청자들 은 그들의 계급적 위치, 사회적 가치, 정치적 신념과 관련된 방송 요소들 만을 조합함으로써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반응할 수 있다. 이와 똑 같이 소프오페라는 주로 수용자의 나이, 성, 문화적 능력(cultural competence)의 차이로 인해 어떤 사람들에게는 즐길 만하고 절실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혐오스럽고 인격 모독적으로 받아들여 질 수도 있다. 이는 사회구조상의 위치가 의미와 취향의 패턴을 결정한다 고 기계적으로 가정하는 조악한 ‘사회학적 환원주의’를 말하려는 것이 아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 생산물로부터 얻는 즐거움과 능동적인 해 석 능력은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문화적 배경과 신념체계에 의해 일정 정도 제한받는다. 지식과 문화적 능력은 불균등하게 분포되어 있다. 방송 메시지의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기술하기 위해 ‘대중(mas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 톰슨이 신중함을 보인 것은 적절 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속적이고도 당연하게 사용해 왔던 ‘수용 자(audience)’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개념상의 어려 움이 여전히 남아 있기는 해도, 다양한 미디어와 장르에 대한 수용에 의해 서나 사회문화적 위치에 의해서 몇몇 집단들로 나누어졌음을 지칭하는 복수형의 ‘수용자들(audiences)’이 차라리 더 바람직하다. 이 용어의 어원 을 추적하면서 재니스 래드웨이(Radway, 1988)는 수용자라는 말이 면대 면 구두적 상호작용에서 개인의 청취 행위에 국한해서 사용되었던 것을 발견해 냈다. 대중이 전자적으로 매개된 커뮤니케이션의 익명적 수신자 를 지칭하는 집합적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녀는 이 두 환경이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를 지적했다. 전자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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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생산자와 수신자는 동시 존재의 상태로서 물리적 장소를 공유한 다. 무대 연기에 주목할 수 있는 극장 수용자와 비교해 볼 때, 텔레비전 시 청과 라디오 청취는 무대의 그것과 동일선상에서 있다고 할 수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기에서 시청행위는 다양한 시청환경을 가로질러 지리 적으로 흩어져 있고, 매일 매일의 삶에서 배태된 여타의 가정적 활동과 빈 번히 부딪친다. 따라서 방송 수용자가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 는지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수용상태’의 경계는 애초부 터 고정적이지 않다. 래드웨이의 논의는 확실히 수용자를 문제의식 없이 독자적이고 고정된 실체로 취급하려는 모든 시도에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일깨워준다. 이 장의 다음 절에서 우리는 미디어문화연구 진영의 학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가정의 방송 소비에 대한 산업적 시각, 즉 ‘계산 가능한 대상’으로서의 텔레비전 수용자의 지위에 대해 똑같은 의문을 제 기할 것이다. 그 전에 나는 톰슨이 구축하고자 한 분석적 모델의 또 다른 특성에 주 목하고자 한다. 톰슨(Thompson, 1988: 378)은 우리가 미디어 메시지의 일상적 전유와 해석을 통해 이루어지는 메시지의 의미뿐만 아니라 ‘수용 활동의 의미’에 대해서도 고찰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그의 제안은 텔레비 전 수용자에 대한 경험적 연구로서 그 영역을 비판적 연구로까지 확장시 킨 몰리(Morley, 1980: 1986)의 보다 진전된 연구 의제에 많은 도움을 받 고 있다. 몰리는 대중적인 시사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자 집단의 다양한 반 응을 탐구한 이후 가정적 맥락의 방송 소비에 대한 연구로 이어갔다. 그는 “나 자신의 관심은 지금 ‘어떻게’ 텔레비전을 시청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혔다.
그러니까 그것은 내가 … 특정 유형의 프로그램에 대한 특정한 반응이 라는 텔레비전 시청 과정 … 말하자면 능동성에 대한 이해를 우선시한 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자연스러운 가정적 맥락에서 텔레비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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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되는 방식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 그들의 집에서 … 가족을 인 터뷰하고자 했다. … 나는 이것이 각기 다른 유형의 프로그램에 대한 개인의 특수한 반응을 이해하고자 할 때 반드시 필요한 바탕임을 말하 고자 한다(Morley 1986: 41).
이러한 전환과 더불어, 수용자가 생산하는 텍스트의 이데올로기적 권 력과 의미에 대한 몰리의 예전 관심은 대인적 역동성과 시청 상황의 ‘문화 정치(cultural politics)’라는 새로운 관심과 절합되었다. 그러한 관심의 전 환은 일상생활의 제도로서 방송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으 로 입증됐다.
수용자에 대한 표현 방법과 수용자 알기
초기 라디오 시대 이래로 방송사업자들은 두 가지 문제, 즉 저 멀리 곳곳에 흩어져 있는 수용자들에게 어떻게 표현하고 그들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모을 것인지를 고심해 왔다. 그들은 매일 매일의 프로그램 생산과 방송 편 성에서 특정한 시간과 가정 공간에 있는 청취자에게 어떻게 방송을 내보 내는 것이 적절한지 부단히 자문했다. 당시 그들은 새로운 청취 공중의 습 관과 크기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는 상태였다. 라디오 이후 텔레비전이 등장하기 전의 중간 시기에 이들 매체는 점차 사적 공간의 소비자들에게 표현하는 그들 자신의 고유한 색깔과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을 발전시켰 고, 수용자 행동을 연구하는 특별한 방법-가장 눈에 띄는 것으로 등급 수치(시청률)의 제조방법-도 발견해 냈다. 이 장에서 우리는 수용자에 대한 산업적 연결고리의 주요 특징, 다시 말해 가정이라는 환경 속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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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와 청취자에 대한 이해를 역사적이고 비판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대부분의 사례가 영국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근거로 했지만 유사한 성격 의 이슈가 논의되는 미국의 방송 생산물과 시청률 연구 문헌도 참고했다.
원격 친밀성
우리는 이미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로서 텔레비전의 ‘가정성(domesticity)’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테크놀로지가 놓여 있는 친숙하고 친밀한 장소이 자 상징적 형식-에 대한 엘리스의 중요한 주장을 살펴봤다. 이제는 이러 한 주장을 좀 더 발전시키기 위해 영국 공공서비스 방송 역사가이자 이론 가인 스캐널(Scannell, 1989; 1991a)의 작업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스 캐널(1989: 152)은 ‘방송의 커뮤니케이션적 에토스’의 발생 근거를 추적 하면서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점차 “방송의 편안하고 자연스런 양식과 토 크 형식”을 수용해 온 경향에 주목했다. 그는 스튜디오 토크 포맷에서 대 중 게임쇼에 이르기까지 전체 프로그램 유형들이 전통적으로 사적인 만 남과 같은 상호작용 스타일-접근 가능하고 ‘사회성 있는’ 보통의 수용자 가 경험하도록 디자인된 담론 세계- 을 갖춰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이런 성과가 하룻밤 사이에 달성된 것은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BBC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었던 대부분의 토크 프로그램은 서 툴기 짝이 없거나 의사소통마저 쉽지 않은 상태였다. 청취자에 대해 가부 장주의적 태도를 보였던 초기의 권위주의적 표현양식은 한참이 지나서야 “보다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태도와 스타일”(Scannell, 1991b: 10)로 부드 러워졌다. 핵심적인 변화는 설교나 강의 또는 무대공연과 같은 기존의 공 공적 커뮤니케이션 형식이 프로그램 생산자와 소비자가 공간적으로 분리 되어 있고 사적인 수용의 맥락을 띠고 있는 일상의 방송 프로그램 모델로 서 완전히 부적절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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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생산물은 그것이 비록 공적 담론으로서 공적 영역과 절합되어 있 기는 하지만 사생활의 공간 안에서 선택적인 여가 자원으로 수용된다 는 것이 알려지게 됐다. 이 공간 안에서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얘기를 듣거나 강의 혹은 훈계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그들이 프로그 램 안의 사람과 같은 곳에 발을 딛고 있는 것처럼 친숙하고 친절하며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이야기하기를 기대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소 리는 가정과 그 구성원들의 일반적인 사회적 배치처럼 가정의 활동 범 위 안에서 들린다. 공공적 토크 형식이 아니라 평범하고 비공식적인 대 화 규범에 근접한 방송 스타일과 방식이 강력하게 추진되었는데, 이것 은 일상생활의 맥락 안에 있는 사람과 특별히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압도적으로 더 선호된 상호작용 양식이다 (Scannell, 1991b: 3-4).
공공서비스 방송 분석가로서 스캐널의 중심적인 관심이 비록 서서히 등장하는 BBC 방송 생산물의 커뮤니케이션적 에토스에 있기는 했지만, 그가 여기에서 지적한 변화의 핵심 시기(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까 지)가 미디어 전경에서 ITV가 등장한 시기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독립 상업 텔레비전의 확신에 찬 ‘대중주의적 색채’는 영국 방송이 의심의 여지 없이 보다 더 붙임성 있는 스타일로 전환하는 데 의미 있는 동인으로 작용 했다(Corner, 1991 참조). 텔레비전이 보다 일찍 등장한 대서양 반대쪽(미국을 의미-역자 주)은 이미 1950년대 중반 이전에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특정한 텔레비전 표현 양식이 눈에 띌 정도로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에서 아마 가장 파격적이고 차별적인 것은 텔레비전 사회자나 진행자가 카메라를 쳐다보며 가정에 있는 시청자에게 지극히 사적인 방법으로 직접 말을 거는 표현일 것이다. 이를 두고 도널드 호턴과 리처드 월(Horton & Wohl, 1956)은 ‘준사회적 상 호작용(para-social interaction)’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것은 일상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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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시되지만 작은 스크린의 퍼스낼리티(personality)7)와 가정의 시청자 간의 주목할 만한 조우, 다시 말해 방송의 공적인 등장인물과 그들에게 알 려지지 않는 수용자 간에 원거리에서 벌어지는 연속적인 상호작용을 표 현하는, 그러면서도 친구나 아는 사람들 사이의 통상적인 면대면 대화를 상당 부분 ‘흉내 내는’ 것을 담아내는 새로운 개념이다. 그들을 갈라놓은 물리적 공간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 등장인물과 시청자는 실시간으로 한곳에 있기 때문에 부재중인 환경 하에서 일종의 ‘동시 존재의 즉시성 (the immediacy of co-presence)’이 포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호턴과 월 (1956: 215)이 관찰한 것처럼, 텔레비전은 “수용자를 직접 대면하고 직접 적인 표현양식을 사용하며, 마치 개인적으로 혹은 사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한다.” <The Steve Allen Show>와 같은 미국의 유명 프로그램 을 예로 들자면, 수용자들은 그것이 꾸며낸 것임을 알면서도 충성스런 팬 이나 광적인 팬이 텔레비전 인물을 ‘알게’ 되면서 형성되는 친밀성의 유대 감을 강하게 보였다. 그러나 호턴과 월은 이러한 직접 표현양식에 대한 시 청자의 실질적인 반응을 체크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용자의 동일시와 즐 거움을 지나치게 주장하는 위험을 노정시켰다. 따라서 그들이 만족스럽 게 답하지 못한 동일시의 사회적 패턴에 대한 의문, 달리 말해 시청 공중이 특정 등장인물과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난 모습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싫어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준사회적 상호작용 분석은 텔레비전의 연출 형식의 발전에 대단히 가치 있는 통찰력을 담아냈다. 존 랑거(Langer, 1981)는 텔레비전 퍼스낼리티 시스템(personality system)에 대한 그의 논문에서 분석을 위한 중요한 실마리를 끄집어냈다. 랑거(1981: 351)는 “뉴스 앵커, 사회자, 초대 손님, 진행자와 같이 텔레비 전에서 다소 일방적으로 조직되어 정기적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의 문화 적 역할을 탐구했다. 그의 작업은 이러한 인물군과 영화의 스타 시스템
7) 텔레비전 뉴스 혹은 프로그램의 진행자나 출연자를 뜻함(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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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자 간의 예리한 비교를 통해 방송 고유의 일상적 특징이라는 진일보 한 증거들을 보여주었다.
스타 시스템이 쉽게 접근할 수 없고 이미지적이며 스펙터클한 영역에 서 작동하는, ‘실제 삶보다 규모가 더 큰(larger than life)’ 영화적 세계 를 보여주는 데 반해, 텔레비전 퍼스낼리티 시스템은 ‘삶의 일부(part of life)’로서 계발된다. 스타 시스템이 항상 수용자에게 ‘예외적인 것 (the exceptional)’을 강제할 능력이 있는 반면, 텔레비전 퍼스낼리티 시스템은 직접적으로 친밀성과 즉시성을 구축하고 그것을 전면에 내 세운다. 영화 스타와의 접촉이 단발적이고 불확실성이 높다면, 텔레비 전 인물과의 접촉은 정기적이고 예측 가능하다. 영화 스타가 그들이 연 기하는 캐릭터만큼 ‘스타’로서-아마 그 이상으로-그들의 정체성을 부각시키는 ‘부분(parts)’을 연기한다면, 텔레비전 인물은 그 자신을 … 자신의 전형성과 ‘평상심(will to ordinariness)’이 두드러진 인격체로 ‘연기(play)’한다(Langer, 1981: 354-5).
평상심은 1990년대 <This Morning>과 같은 낮 시간 매거진에서 가장 확실한 증거를 볼 수 있다. ITV에 의해 매일 오전 중간 시간대에서부터 점 심때까지 방송된 이 프로그램은 스튜디오 초대 손님, 전화상담, 그리고 다 양한 라이프스타일 특집에 이르는 매우 분절화된 포맷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그램 제목 자체가 방송 커뮤니케이션 에토스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강한 즉시성-생방송 텔레비전의 ‘지금 여기’-의 감성을 전달한다 는 점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남편과 아내 팀은 게스 트와 전화상담자에 의해 ‘리처드와 주디(Richard and Judy)’로 알려지고 표현된다. 시청자들 역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텔레비전 인물과 친숙한 상태가 되도록 기대된다. <This Morning>은 스튜디오를 거실 모양으로 장치하여 가정적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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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적극적으로 꾸며낸다. 두 명의 진행자와 초대 손님은 커피 테이블 옆의 안락의자에 앉는다. 한결 더 편안한 가정환경으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그 들의 초대 손님은 ‘방문’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받고 ‘다시 방문’해 달라는 초대를 받는다. 프로그램에서 어떤 중요한 시간대에서는 수용자에 대한 텔레비전 인물의 준사회적 상호작용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정기적으로 재형성되어야 한다. 매회 방송이 시작될 때와, 시청자들의 중 간휴식이나 비디오 인서트 같은 것이 있은 후 스튜디오 화면으로 되돌아 오는 시점, 그리고 프로그램이 끝날 때의 마무리 인사말, 이 모든 것들은 진행자가 편안한 방식으로 카메라에 직접 말을 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다. 리처드와 주디가 말하는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히 계 세요’, ‘내일 뵙겠습니다’와 같은 전형적인 인사말은 노먼 페어클라우 (Fairclough, 1994)가 ‘공적 담론의 대화체화(conversationalisation of public discourse)’라고 이름 붙인 후기 근대사회의 아주 광범위한 변화과 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문화적 경향의 핵심적인 특징은 텍스트와 수용자 간의 개인적 관계의 모사물로서 그가 ‘사이비 개인화(synthetic personalisation)’8)라고 언급한 것이다. 사이비 개인화와 방송에서 연기된 순수성(performed sincerity)의 또 다른 예는 ‘피플 쇼’로 가장 잘 묘사될 수 있는 오랜 프로그램 전통에서 찾 아볼 수 있다. 이것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인물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 가 정 수용자와 준사회적 상호작용을 할 뿐만 아니라 카메라나 마이크에 시 시각각 등장하는 평범한 일반 공중과도 독특한 종류의 면대면 상호작용 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윌프레드 피클(Wilfred Pickle)이 진행한 1950년 대 BBC 라디오의 <Have a Go!>라는 프로그램과, 1990년대 <Blind
8) 사이비 개인화(synthetic personalisation)는 텍스트가 대중 수용자를 마치 개인처럼 대 하는 방식이다. 대중매체에서 수용자를 2인칭으로 호명함으로써 사이비 개인화 효과를 유발한다. 예컨대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광고 전에 ‘잠시 뒤에 뵙겠습니다(See you after the break)’와 같은 표현이 ‘사이비 개인화’ 효과를 노린 대표적 표현이다(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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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의 실라 블랙(Cilla Black), ITV에서 방송된 <My Kind of People>의 마이클 배리모어(Michael Barrymore) 같은 당대의 인물들을 기억한다. 방송에서 이들 등장인물들은 모두 시청자들에게 그들의 이름이 특별하지 않고 친숙하고 꾸밈이 없으며 진실되게 보이게 했다. 토크 프로그램과 스 튜디오 토론 프로그램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Wogan’, ‘Kilroy’, ‘Esther’, ‘Vanessa’와 같이 자신의 이름을 프로그램 제목으로 내거는 텔레비전 진 행자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시청자들이 볼 때 ‘우리 편에서’ 상식적인 질 문을 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대중 속’ 존재임을 보여주었다. 이런 와중에 미국에서도 <Donahue>, <The Oprah Winfrey Show>, <Ricki Lake>와 같이 인기 있는 스튜디오 토크쇼 장르를 형성하고 정의하는 데 기여한 프 로그램들이 나타났다.
시청률의 이면
적절한 표현양식과 토크형식을 발견하기 위한 오랜 탐구는 수용자를 연 구하고 ‘아는’ 특별한 방식을 고안하고자 했던 방송사 측의 지난한 질문과 노력을 수반했다. 비록 조사의 정확한 목적과 방법이 시작단계에서부터 제대로 규정되지는 않았지만, 1930년대 중반 BBC는 공중에 대한 서비스 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청취자조사국(Listener Research Department) 을 두었다. 데이비드 채니(Chaney, 1987: 272)에 따르면, 시작단계에서는 시행착오도 많아 “연구가 적절한지 주의 깊게 읽혀져야 했을 뿐만 아니라 … 관심 분야도 그들이 원하거나 알고자 했던 것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 다.” 이러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미국에서 청취자 조사연구가 출범하 면서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어졌다. 1920년대 후반부터 시장조사업 체에 의해 집계되는 청취율 자료는 잠재적인 광고주나 스폰서에게 수용 자의 실체를 설명할 필요가 있는 상업방송 시스템이 그들의 경영성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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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주는 일차적인 측정치가 되었다. 댈라스 스마이드(Smythe, 1981)가 도발적이고 기억할 만한 문구로 표현한 것처럼, 시장조건 하에서 운영되 는 방송은 ‘수용자를 광고주에게 판매하는(delivering audience to advertiser)’ 비즈니스이다. 경제적 생존과 번영을 위해 방송산업은 라디오와 텔 레비전 프로그램 사이와 프로그램 안을 광고로 채워야 한다. 그러한 원리 를 따르는 한, 프로그램 자체는 소비자를 광고로 유인해 내는 미끼에 지나 지 않는다. 상업방송 사업자에 의해 만들어진 상징적 재화가 일종의 상품 이라면, 재정적 측면에서 궁극적인 것은 ‘수용자 상품(audience commodity)’을 파는 것이다. 현재 미국과 유럽 모두에서 수용자 측정의 근본방침은 BBC와 여타의 상업방송사가 투자한 ‘Nielsen in America’나 ‘Broadcasters' Audience Research Board in Britain’ 같은 대행업자에게 위탁되어 수행된 연구조사 에 의존하고 있다. 시청자의 ‘질평가 지수(appreciation indices)’와 같은 질적 척도가 계속해서 사용되기는 하지만, 현재 산업적 사고방식을 지배 하는 것은 수용자 크기에 대한 양적인 자료이다. 그러나 텔레비전 시청에 대한 지식을 생각하고 축적하는 이러한 특별한 방법은 제도 방송 밖으로 부터 급진적인 비판의 화살을 맞고 있다. 미디어문화연구에서 이엔 앙 (Ang, 1991; 1992)의 작업은 그중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시청률이 제도적으로 어떤 권능을 부여하기는 하지만 방송사업자에게 필요한 ‘허 구’이며, 더 나아가 방송사업자를 인식론적으로 궁지에 몰아가는 것이라 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시청률은 산업에서 유용한 경제적 기능을 제공할 지는 몰라도 일상적인 텔레비전 소비의 일부분만을 보여줄 뿐이라는 것 이다. 앙이 제도적 수용자 조사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파악하기 힘든 실제 사람들의 텔레비전 시청의 실체를 잘 알려지고 객관화된 카테고리 로 전환시키려는 산업계의 지속적인 욕망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의 작업 은 완벽한 기계적 상태에 도달하려는 필사적인 노력, 다시 말해 매일 매일 의 낮과 밤 시간에 스크린 앞의 시청자의 움직임을 감시할 수 있는, 그럼으 32
로써 방송사업자와 광고주에게 텔레비전 수용자의 정확한 크기와 인구통 계학적 형태를 알려주는 원형 감옥과 같은 측정기술을 폭로해 내는데 그 의의가 있다. 원래 수용자 측정기법은 간단한 설문지 전화조사나 길거리 인터뷰와 같이 아주 단순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전자식 수상기 미터기(set meter) 와 패널의 일기 기입(diary entry)으로부터 얻어진 자료를 바탕으로 계산 되었다. 패널은 전체 시청 모집단을 대표하도록 디자인된 표본이었다. 시 청자들의 프로그램 선택은 일반화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고, 그 결과 물은 특정 텔레비전 채널을 보는 사람들의 수치를 보여주는 일종의 청구 서가 되었다. 수상기 미터기는 패널의 집에 있는 텔레비전이 켜지고 꺼질 때나 채널이 바뀔 때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조사원에게 제공했다. 가정 시 청자가 개인적인 시청 습관을 기록하도록 하는 일기식 조사는 자료의 보 완적인 소스로 활용되었다. 최근 시청률 연구자들은 이러한 검증된 방법과 절차에 다소간의 문제 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일기는 패널의 시청자가 얼마나 양심 적으로 기록하는가에 의존하고, 텔레비전 수상기가 켜져 있는 것이 곧 실 제로 시청자들이 텔레비전을 시청하는지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다. 일상적인 가정생활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텔레비전 시청은 다른 행 동과 항상 확연히 구분되는 행동이 아니다. 그보다 텔레비전 시청은 흔히 신문 읽기나 대화, 식사와 같이 다른 일련의 행동과의 연쇄 속에서 이루어 진다. 따라서 텔레비전은 가정의 맥락 안에서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기 위 한 경쟁 하에 놓여있다. 수용자 측정 결과는 보다 질적인 조사방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텔레비전 시청 맥락의 실천적 복잡성을 모두 기록하지 못한 다. 그들은 복잡한 것을 구체적이고 계산 가능한 것으로 전환하는 데만 신 경을 쓰며 광고주에게 판매할 그럴듯한 허구를 생산해 낼 뿐이다. 영국과 미국의 텔레비전 기업들과 시장 조사자들은 가정 내 텔레비전 소비에서의 예상 밖 행위, 다채널 방송환경에서의 정기적인 재핑, 비디오 2. 일상생활의 제도로서 방송 33
레코더에서의 지핑 등에 직면해서 피플 미터(people meter)라고 불리는 수용자 측정 기술을 개발해 냈다. 가정 안에서 개인적인 시청 습관을 모니 터하고자 고안된 피플 미터는 이전의 수상기 미터와 일기식의 기능을 전 자장치로 통합한 것이었다.
시청자가 프로그램을 보기 시작할 때, 그/그녀는 리모컨과 비슷하게 생긴 휴대 키패드의 숫자판을 눌러야 한다. 시청자가 시청을 끝낼 때도 버튼을 다시 눌러야 한다. 텔레비전 수상기에 부착된 모니터는 시청자 의 버튼 누르기 임무를 상기시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깜박인다. 샘플로 선정된 가족의 모든 구성원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버튼을 가지고 있고 손님을 위한 여벌의 버튼도 있다(Ang, 1992: 137).
시청자가 전자장치를 오작동시킬 수 있다는 문제제기로 인해 ‘수동식 피플미터기(passive people meter)’라고 알려진 더 나은 장치가 개발됐 다. 여기에는 조작을 위한 손동작이 필요 없다. 수동식 피플 미터기는 텔 레비전 수상기에 설치된 이미지 인식 장치를 의미한다. 이것은 거실의 스 크린에 직접 비쳐지는 얼굴을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다. 물론 이 장치는 시청자들이 무엇을 보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자세히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수용자 감시의 원형 감옥적 시스템이라는 시청률 조사회 사의 오랜 꿈을 마침내 실현시켜 주었다. ‘감시(Surveillance)’라는 용어는 규율과 통제를 함의하는 것으로 (Foucault, 1977 참조) 이런 맥락에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강한 용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앙은 시청률 조사의 이러한 측면에 감시라는 용어를 정 확하게 사용한다. 그녀는 텔레비전 시청에 대한 이런 종류의 양적인 조사 를 점차 늘어나는 비규율적이고 파악하기 힘든 문화적 실천에 일정한 수준 의 질서를 부여하고자 하는 산업적 시도로 이해한다. 방송에서 수용자는 주어진 실체라기보다 시청률에 의해 조직되는 대상으로 이해된다. 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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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이 ‘실제 수용자의 사회적 세계’에 대한 분석에서 제도적 범주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근본적인 입장까지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비판 적 시각에서 보면 적어도 일관성 있고 동질적인 형태로서 텔레비전 수용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세계는 매일 매일의 삶과 가정 소비문화의 영역이다. 그것은 계산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삶의 경험과 문화적 의미가 곳곳에 흩어져 있는 영 역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측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시 청자의 경험과 의미를 탐험하는 ‘시청률의 이면’(Morley, 1990)에 이르기 위해서는 완전히 다른 목적을 가진 방법론을 채택해야 한다.
필요한 연구조사는 ‘텔레비전 시청’의 모든 범주 이면에 있는 차이를 파악하고 탐구해 내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텔레비전을 본 다. 그러나 프로그램 종류나 시간과 관련해서 얼마나 집중해서, 어느 정도나 몰입해서 텔레비전을 보는가? 연구조사는 텔레비전이 일련의 일상적 실천과 결합되어 있는 복잡한 방식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Morley, 1990: 8).
이 장의 다음 절에서 나는 위에서 제기된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몇몇 미디어문화연구 작업 사례를 살펴볼 것이다. 이 영역에서 작업하는 연구 자들은 통상적으로 소비자와의 대화식 인터뷰와 일상적인 수용의 맥락에 대한 관찰을 포함해서 실제 수용자들의 사회적 세계에 대한 민속지학적 접근이라는 것을 채택해 왔다. 따라서 시청률 조사기관이 측정기법을 통 해 돈벌이가 되는 수용자 상품을 구축해 왔다면, 민속지학자들은 해석과 취향, 권력의 변화무쌍함, 다시 말해 수용의 질적인 측면이나 거실의 ‘정치 학’에 촉수를 댄 미디어 소비에 대해 풍부하고 세밀한 설명을 제공하고자 애썼다. 시청률 수치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작업 역시 ‘부분적인 진실’이기 는 하지만(Clifford, 1986) 그들은 시청자의 관점을 대변하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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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청취의 사회적 관계
이제 우리의 비판적 관심을 방송 커뮤니케이션 시청-청취의 사회적 관계 로 옮겨 앞서 미디어에 대한 톰슨(Thompson, 1988; 1994)의 사회이론을 논할 때 제기한 두 가지의 관계적 측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미디어 메시지는 시공간적 확장성을 띤다. 이것은 미디어 메시지가 각기 다르게 수용되고 전유되도록 열려 있는 이유 중 하나이다. 톰슨(Thompson, 1994: 44)에 따르면, 전유의 과정은 구조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선택적이 고 창조적이다. “개인들은 미디어에 의해 전달된 상징물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이 이용 가능한 자원에 의존한다.” 둘째, 톰슨은 문화적 소비행위에 는 두 가지 차원, 다시 말해 텍스트와 독자 간의 기호학적 만남으로부터 비 롯되는 의미와 즐거움, 그리고 수용이라는 실천 자체가 일상적 공간에서 가지는 의미 등이 있다고 지적했다. 거기에서 다루었던 중요한 점들은 관 련문헌으로부터 추출된 몇몇 사례를 통해 여기에서 보다 깊이 있게 논의 될 것이다.
해석과 취향
원거리 수용자에 의한 방송 메시지의 해석을 개념화하려는 최초의 미디 어문화연구의 시도는 텔레비전 담론에 대한 홀(Hall, 1973)의 ‘부호화 해 독(encoding decoding)’ 모델이었다. 그의 모델은 원칙적으로 방송의 이 데올로기적 차원을 다루고자 고안된 것이었다. 그는 기호론의 의미생성 이론뿐만 아니라 사회학적 전통인 사회구조와 문화 재생산도 조금씩 차용 했다. 한편으로 그는 텔레비전 텍스트가 사회적 사태에 대한 특정한 지배 적 해독을 ‘선호’함에 따라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설명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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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방송인의 의식적 편향의 결과가 아니라, 세계가 어떻게 재현되어 야 하는지에 대해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일련의 가정들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홀은 텔레비전이 제공하는 부호화된 재현물에 대 한 실제 시청자의 개입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의 논점은 시청-청취자의 다 양한 계급적 지위와 문화적 지식이 방송 텍스트에 대해 각기 다른 반응과 해석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수용자들이 메시지에 부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서 그들의 해독은 다양할 것이다. 홀은 텔레비전 텍스트 의 해독이 일어날 수 있는 3개의 가설적인 위치-지배적, 교섭적, 대항적 -를 시험적으로 분류해 냈다. 요약하면 첫째는 선호된 해독을 받아들이 는 것이고, 둘째는 개별적인 세부 문제에 대해 선호된 해독에 제한된 도전 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셋째는 때때로 새로운 대안을 제안하는 수고를 수 반하기도 하는 것으로 지배적 정의에 대한 완전한 거부를 뜻한다. 몰리(1980)는 훗날 이러한 개념적 프레임을 관리자, 학생, 사회 초년 생, 노동조합원 등의 집단에 의한 텔레비전 뉴스 매거진 해독을 경험적 연 구 프로젝트에 도입, 적용했다. 모든 경우에서 발췌된 녹화물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석을 분류하는 홀의 범주를 이용하기 전에 몰리는 교육기관에 있 는 29개의 그룹과 인터뷰를 수행했다. 거기에서 그는 관리자, 학생, 사회 초년생들이 지배적 해독의 위치를 점유하고 텍스트의 선호된 의미를 수 용하는 것을 발견했다. 교섭적 해독은 수습교사와 예술대학 학생들에게 서 발견됐다. 정규직 또는 비정규직의 신분으로 구성된 노동조합원 집단 은 교섭적 해독이나 대항적 해독을 나타냈다. 반면 고등교육을 받은 흑인 학생들은 대항적 해독을 구성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프로그램이 제공하 는 선호된 세계관에 도전적이기보다 그들에게 관련 없는 시사적인 사안 에 끌려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편이었다. 결과적으로, 몰리는 홀로부터 물려받은 범주가 제한적이라는 것을 알 아냈다. 그 범주들은 그룹 인터뷰 분석에서 발생하는 한계점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미묘한 점을 결여하고 있었다. 따라서 예를 들면, 지배적 해독의 2. 일상생활의 제도로서 방송 37
위치에 있는 은행 관리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태나 이슈가 제기되는 대중주의적 스타일에 부정적이었다. 반대 현상은 노동조합원 집단에서도 똑같이 발생했다. 응답자의 일부는 프로그램이 제기한 스타일을 따르려 고 한 반면, 판매사원들은 우익적인 정치적 논조라고 생각한 것과 계급과 경제에 대한 본원적인 문제제기에 실패한 것에 대해서 강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한 번에 두 가지의 해독 차원을 가지려 할 때는 확실히 어려움이 있다. 인터뷰 대상자들이 연구자에게 말한 것, 혹은 말하지 않은 것은 그 들이 특정 이데올로기적 명제나 프레이밍과의 관계에서 채택한 입장으로 서, 단지 선호된 해독으로부터 취해진 거리에 관한 것이었다. 은행 관리자 와 노조원의 응답은 확실히 취향과 기호의 패턴과 더 관계가 깊었다. 확실 히 초저녁 프로그램을 일상적으로 시청하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텍 스트가 어떻게 해석되는가를 묻는 것은 다소 성급한 것일 수 있었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그는 차기 연구 프로젝트(Morley, 1981)에서 특정 시청자를 위한 특정한 텍스트 유형의 현저성, 그리고 다양한 방송 장르를 즐기고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시청-청취자들의 문화적 능력(cultural competences)에 주목하는 미디어 소비의 ‘장르 기반적’ 모델에 주목했다. 몰 리(Morley, 1981: 10)는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본질적인 이데올로기적 주제의 수용 또는 거절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기보다 해독의 적절성 과 부적절성, 이해와 몰이해의 차원을 보다 많이 다루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수정된 접근의 결론은 즐거움과 불만은 복잡한 사회적 성취 로서 탐구되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달리 말해, 우리의 좋고 싫음은 개인 적 취향의 문제로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회구조에서의 우리의 위치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주어진 텔레비전과 라디오 프로그램의 향유가 각기 다른 수용자와 취향 공중에게 불균등하게 분포 되어 있는 ‘문화자본(cultural capital)’(Bourdieu 1984)의 축적 수준과 절 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해독에 대한 이후 연구의 대부분은 젠더(gender)와 장르 이슈를 탐구 38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예컨대 소프오페라에 대한 여성들의 연대의식을 살펴볼 때 선택한 것이었다. 핵심적인 연구들은 페미니스트 미디어문화 연구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 작업은 오래전부터 있어온 여성적 즐거 움에 대한 모욕을 구제함과 동시에 팬의 선호가 가지고 있는 고도로 교묘 하고도 차별적인 속성을 설명하려는 정치적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샬럿 브런스던(Brunsdon, 1981: 36)은 당시 아방가르드 아트 하우스 시네마의 최고봉으로 잘 알려진 저널에 기고하면서,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소프오페라 시청자들은 영화 팬처럼 진지하게 다루어질 가치가 있다고 다소 논쟁적으로 주장했다. 고다르의 영화가 수용자 측면에서 예술적, 언어적, 정치적, 영화예술 적 담론과의 텍스트 외적인 친밀감과 같이 … 어떤 형태의 문화자본이 필요한 것과 똑같이 소프오페라도 마찬가지이다. …영화와 소프오페 라 모두 해당 장르에서 요구되고 실천되는 것은 문화적으로 구성된- 민감성, 지각, 직관, 개인적 삶의 관심에서 없어서는 안 될 특별한 의미 -여성성의 기술이다.
대중 텔레비전의 즐거움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려고 하는-브런스던 (1989)이 훗날 ‘구원적 읽기(redemptive reading)’라고 명명했던 것을 생 산하려는-민속지학은 하찮은 경험을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는 위험에 빠 질 수 있다. 시청자의 해석을 지나치게 따르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지만 미디어 소비에서 젠더적 구별 짓기를 그려내는 것의 중요성 역시 크다. 이 것은 페미니즘 비판으로 하여금 기존의 미학적 판단의 근간을 흔들고 과 거에는 조롱당하고 침묵되었던 시청 공동체에 진정성의 목소리를 부여하 는 문화적 취향과 가치의 정치학을 열어젖힐 수 있게 했다. 지금은 막을 내린 연속극 <Crossroads>에 대한 도로시 홉슨(Hobson, 1982)의 작업은 아주 좋은 사례이다. 그녀는 여성 팬의 가정을 방문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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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을 함께 시청하면서 등장인물과 이야기 전개에 대한 대화를 나 누었다. 그녀의 연구는 좋아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여성들의 흥미로우면 서도 복잡 미묘한 감정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들은 그들이 즐기는 것에 대해 적지 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그들의 즐거 움이 보다 넓은 문화경제에서 차지하는-변명하거나 방어하도록 이끄는 -낮은 사회적 지위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그들 의 남편이나 텔레비전 비평가가 <Crossroads>를 무가치하다고 판단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와중에도 어떤 사람들 은 그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성주의적 기법을 많이 축적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인터뷰 필기록의 다음 기술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남성들은 … 그들이 정서적 상태를 수용할 정도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드라마)을 멍청하고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들 은 그것이 때로는 감상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 것을 시청했다는 남성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Hobson, 1982: 109).” 물론 우리는 이런 종류의 문화적 구별 짓기를 성별 간의 본질적인 생물 학적 차이로 환원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미디어문화연구의 여성주의 이론가들은 각기 다른 방송 생산물에 대한 젠더화된 동일시는 항상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역사적인 조건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열심 히 강조해 왔다. 앞에서 브런스던이 말한 ‘개인의’ 민감성, 지각, 직관, 개 인적인 특별한 의미와 같은 일련의 기술적 목록은 ‘타고난’ 여성적 속성의 목록이기보다 주어진 문화적 환경에서 많은 여성들이 ‘정서적으로 의미 있는 상호작용’ 영역에 많이 투자해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Brunsdon, 1981). 생물학적 남성도 동일한 상상적 영역을 차지한다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현재의 남성적 담론과 주체성에서 남성들은 정서적 상호 작용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 대신 텔레비전에서 남성의 영역은 뉴스, 시 사, 스포츠, 리얼리즘적 허구 같은 것들이다(Morley, 1986). 남성들이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전통적인 소프오페라를 하찮게 여긴 40
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 장르를 즐기는 여성들은 흔히 그 것이 정확하게 ‘삶의 진실’을 보여주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말하기 때문이 다. 이것은 앙(Ang, 1985)이 전 세계로 배급된 미국 드라마 <Dallas>에 대 한 네덜란드 팬들의 편지를 분석하면서 발견한 것이다. 대부분의 응답자 들은 그 프로그램의 재미는 일상적 경험의 개연성에서 나온다고 진술했 다. 예컨대, “나는 그것을 즐겨 시청한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발생하는 것 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문제이고 등장인물들이 가 족의 일상사를 반영하기 때문이다”(Ang, 1985: 43). 사우스포크(Southfork)에서의 유잉(Ewing)의 사치스러운 삶의 방식 과 네덜란드 가정의 일상적인 텔레비전 시청자 간의 명백한 불균형을 인 지하면서도, 앙이 그랬듯이 <Dallas>를 그런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녀는 대서양 저편에서 제작된 허구적 재 현물에 대한 응답이 담고 있는 수수께끼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곤란함 에 직면했다. 그녀의 해결법은 ‘정서적 리얼리즘(emotional realism)’이라 는 개념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응답자들이 등장인물과 가족 비극 이라는 상태에 동화되어 있음을 보았다. 강력한 정서적 공명은 그들에게 영상물이 현실적이며 즐거운 것이 되게 했다. 멜로드라마로서 <Dallas>는 앙이 ‘비극적 정서구조(tragic structure of feeling)’라고 이름 붙인 것을 현실적으로 보여주었다. 영국과 호주의 소 프오페라가 드라마적 액션의 빈곤으로 때때로 비웃음을 사는 데 반해, <Dallas>와 같은 미국 드라마는 통상적으로 선정적 사건의 과잉이라는 가 혹한 비난을 받는다. 유잉 가족의 삶에는 말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주요 사 건과 위기 과정이 펼쳐진다. 그러나 이러한 과장된 줄거리 전개는 정서적 긴장을 고조시키기 위한 계획적인 목적을 깔고 있다. 프로그램을 ‘오버’로 취급하는 것은 완전히 헛다리 짚는 것이다. <Dallas>는 회를 거듭하며 이 어지는 놀랄 만한 해프닝으로 시청자의 열정을 휘저어 놓으려 한다. 수용 자들이 적시에 드라마에 휩싸이는지 여부는 텍스트가 수용자에게 부여한 2. 일상생활의 제도로서 방송 41
위치에 달려있다. <Dallas>의 의미구조에서 새겨지는 비극적 정서구조는 시청자가 부여 하는 의미와 자동적으로 그리고 뻔한 방식으로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 다. 그것은 그들이 그것에 민감할 때만 발생한다. 달리 말해, 비극적 정 서구조는 시청자가 자신을 ‘멜로드라마적 상상력’에 투사할 수 있을 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시청자들은 <Dallas>를 멜로드라적 방식으로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 어떤 정향성(orientation)을 가져야 한다 (Ang, 1985: 79).
앙은 이러한 멜로드라마적 상상력이 지극히 여성적인 인식이라고 말 한다. 그녀는 이것이 특정한 정서적 관점에서 ‘삶의 고뇌’에 기꺼이 직면 하려는 데에서 나온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남편의 음모로 음주운전을 하 게 되는 아내이면서 동시에 전체 가족의 근심을 혼자 어깨에 짊어지고 가 는 어머니 수 엘런(Sue Ellen)이나 미스 엘리(Miss Ellie)와 같은 등장인물 과의 일체감을 가져온다. 이 둘은 연구자에게 편지9)를 쓴 여성들 몇몇에 게 있어 모두가 ‘진짜 인간’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Dallas>와 같은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오로지 여성 수용자 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앙은 남성에게 주어지는 텍스트상의 즐거움도 틀림없이 있다고 말한다. 가능한 남성적 해독에 대해 추측하면 서 그녀는 그들의 즐거움이 “비즈니스 관계와 비즈니스 문제, 카우보이적 본성, 재현된 권력과 부”(Ang, 1985: 118)로부터 더 많이 생산될 수 있다 고 생각했다. 그녀는 남성 시청자들은 비극적 정서구조에 대해 동일한 적 응능력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 시청 시간대 소프오페라 조
9) 앙(Ang, 1985)은 <Dallas>를 시청한 시청자의 직접적인 표현을 근거로 분석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앙은 잡지에 <Dallas> 시청자 수기 모집광고를 내 일련의 시청자로부터 시청 소감을 적은 편지를 받았다(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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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서 크리스티앙 제라티(Geraghty, 1991)는 다른 장르에서 익숙한 내 러티브 형식을 드라마에 도입하는 경향이 있음을 추적해냈다. 프로그램 호소력을 높이기 위해 제작자는 추억의 범죄 시리즈의 이야기 전개나 다 양한 스포츠 테마와 관련된 작품을 발전시키는 등 보다 광범위한 남성 등 장인물을 끌어들인다. <Brookside>와 <EastEnders>는 이러한 탈여성화 과정의 사례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가정문화에서의 권력 위에서 논의한 해석과 취향에 관한 문헌이 미디어 소비에서 의미와 즐거 움의 사회적 구성에 대한 탐구를 고무시키기는 하지만, 우리는 수용의 실 천 그 자체가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가지는 의미에 대해, 또는 가정문화에 서 보고 듣는 ‘방법’에 대해 좀 더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방송 생산물 의 제공자로서의 역할과 함께 가정 내 오브제로서의 지위에 대한 탐구, 다 시 말해 테크놀로지로서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가정 내 이용에 대한 고민 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는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가 사적 공간에서의 대인적 활동과 삶의 권력관계에 어떻게 배태되는지에 대해 생각할 필요 가 있다. 이렇게 하는 데 있어 우리가 직면하는 어려움 중의 하나는 방송 이 근대 가정의 경험에서 너무나 당연시되는 부문이어서-일상생활의 제 도-일상적 상황에서의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의미를 탐구할 만큼 우리 자신을 일정한 거리에 두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는 한 방법은 가정과 관계 맺는 방송의 역사적 형성을 정확하게 그려내는 것이 다. 1920∼1930년대 초기 라디오가 가정환경으로 진입하고 합쳐지는 것 에 대한 나의 구술사 연구는 그러한 점을 해명하려는 첫 시도였다(제3장 참조). 지금 여기에서 나는 별일 아닐 것 같아 보이는 일상적 시청-청취 실 천에 대해 주목한 연구 작업 중에서 질적 연구방법을 적용했던 몇몇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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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개관한다. 예컨대 독일에서 헤르만 바우징거(Bausinger, 1984)는 텔레비전을 켜 는 것이 전원을 넣는 사람의 행동과 의도의 맥락을 따르는 매우 특별한 일 임을 목격했다. 그것은 어떤 환경에서는 ‘나는 이것을 보고 싶다’를 의미 하기도 하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나는 듣고는 싶지만 보기를 원하지는 않 는다’를 의미할 수도 있다. 제임스 럴(Lull, 1990)은 동화(affiliation)와 회 피(avoidance)의 전략으로서 비슷한 유형의 생활 속 활동을 언급한 적이 있다. 가정에서 텔레비전의 사회적 활용에 대한 그의 유형화는 테크놀로 지가 소비자에 의해 위치 지어지는 수많은 ‘관계적 활용(relational uses)’ 을 밝히는 데 매우 가치가 있다. 거기에서 그는 텔레비전이 행위의 공유를 위한 기반이 되거나 가족 구성원과의 커뮤니케이션 부재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구실이 되거나 둘 중 하나에 이바지한다고 주장했다. 럴은 가족 구성원들이 어떻게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선택하는지에 관 심을 가졌다. 이것은 잠재적으로 가족 내 권력관계를 보여주는 지표이다. 특별히 취향과 선호의 충돌이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1980년대 미국에서 실시된 연구를 보고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었다.
프로그램 선택상의 통제가 일어나는 곳은 일차적으로 가족 내 지위에 의해 설명된다. …이 연구에서 모여진 자료는 아버지들이 가족 내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선택에서 훨씬 더 큰 통제권을 가 진다고 여겨졌고 실제로 그랬다. 어머니는 이 점에서 가장 영향력이 낮 은 사람이었다(Lull, 1990: 93).
이와 동일한 결론은 영국 런던 남부지역의 열여덟 가족 인터뷰를 통해 밝혀낸 몰리(Morley, 1986: 1988)의 독자적인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로 나 타났다. 이전 해독연구의 한계는 가정생활 환경에 텔레비전 시청자의 해 석을 위치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데 있었다. 따라서 다음 연구는 일상적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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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공간에서 미디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밝혀내도록 설계되었다. 따라서 시청자 인터뷰에서 몰리의 목적은 일상적인 ‘사회적 이벤트’로서 텔레비 전 수용을 분석하기 위한 자료를 제공받는 것이었다. 인터뷰 내용을 보면 서 그는 젠더 차이를 둘러싼 일관된 응답에 주목했다. 거기에서 그는 가정 노동과 여가의 분담 또는 다양한 텔레비전 시청 스타일과 관련된 이슈 외 에 프로그램 선택에 대한 권력과 통제를 다루었다. 몰리의 분석에서 핵심은 그가 실제로 인터뷰한 남성과 여성들 사이에 그들이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정서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남편들에게 있어 사적인 공간은 일차적으로 공적인 직장에 반대되는 여 가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아내에게 있어서, 심지어 직장 여성들에게조차 도 사적 공간은 ‘비번’인 경우가 매우 드문 공간이었다(Deem, 1986 참조). 가정오락에 참여하는 데 있어 상대적으로 불균등하게 주어진 이들의 ‘자 유’는 남성적 시청 스타일과 여성적 시청 스타일 간의 간극을 낳았다. 남 성들은 조용하고 집중해서 텔레비전을 보려는 욕망을 표현한 데 반해, 여 성들은 전형적으로 보다 산만한 텔레비전 소비 형식에 참여할 수밖에 없 었다. 여기에서 보고된 시청 습관은 통상적으로 다림질, 바느질과 같은 여 타의 가정활동을 포함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텔레비전 스크린에 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연구자는 또한 채널을 고르는 텔레비전 리모컨은 가 족 내 가부장적 권력의 잠재적 상징임을 발견했다. 그의 자료에 대한 논의 에서 몰리(1986: 148)는 텔레비전을 “아버지에 의해 거의 독점적으로 사 용되는 … 아버지의 상징적 소유물”이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아버지 의 자’ 팔걸이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몰리는 그의 추후 연구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 연구는 남편과 아내, 그리고 독립하지 못한 자녀가 함께 사는 전통적인 핵가족만 을 대상으로 했다. 그 외의 모든 인터뷰 대상자들이 특정 도시지역에 거주 하는 백인 중하층 계급이거나 노동자 계급의 가정이었다. 이것은 “최대한 으로 보더라도, 한 가족 형태 내 시청 패턴의 한 전형이면서, 하나의 특정 2. 일상생활의 제도로서 방송 45
한 인종적, 지리적 맥락과 상대적으로 좁은 계급 범위에서 도출된” 것이기 때문에(Morley, 1986: 11) 그의 발견의 일반화 가능성에 대해 주의를 요한 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성이-심지어 성 역할 실천과 여타의 가정 형태가 다를지라도-대부분의 가족문화에서 의미 있는 변인이라고 결론 지었다. 뒤늦은 자각 덕분으로 우리는 몰리의 작업에 보다 진전된 내용-그의 발견이 가지는 역사적 특이성-을 보탤 수 있게 됐다. 그가 연구를 수행한 1980년대 중반으로 돌아가 보면, 당시 일반 가정은 가족 시청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텔레비전 수상기를 하나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 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 대부분은 여러 대의 텔레비전 수상기를 소유 할 뿐만 아니라 PC나 게임기처럼 우리의 주의를 끌기 위해 텔레비전과 경 쟁하는 여타의 매체가 즐비한 가정에서 살고 있다. 가정은 점차 분절화되 고 개인화된 형태로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를 소비하고 사용하는 ‘세 포질’ 모양의 미디어환경이 되어가고 있다. 그 속에서도 가정 공간에서의 권력관계는 여전히 절박한 이슈이다. 누가 거실의 중심 수상기를 시청하 게 되고, 누가 침실이나 부엌의 조그마한 스크린을 시청하게 되는지에 대 한 질문이 있는 것이다. 이 절의 마지막 부문에서 나는 몰리의 탐구가 방송의 중심적인 관심사 인지, 그의 작업이 우리로 하여금 보다 확장된 가족 사회학적 방향으로 이 끄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한다. 확실히 텔레비전 시청은 몰리에게 사적 영역으로 ‘들어가는’ 편리하고 좋은 출발점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우리 는 가정 내 상호작용 과정과 노동과 여가의 분리에 두었던 몰리의 강조가 미디어 수용자에 대한 어떤 관심마저도 능가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의 목적이 일상적인 가정생활에 대한 텔레비전의 ‘배태’ 를 이해하는 것이라면(Silverstone, 1990), 수용자 집단의 범위처럼 수용 연구의 범위는 점점 더 확장될 것이다. 사실 몰리의 인터뷰 대상자들이 한 말과 1988년 니키 찰스와 매리언 커(Charles & Kerr, 1988)가 수행한 가족 46
음식 소비 민속지학에서의 여성의 모습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남성들이 프로그램 선택을 결정하는 상징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 가정 을 보여준 몰리의 사례에서처럼, 찰스와 커는 그들이 방문한 가정의 식사 내용물이 남성적 취향에 의해 자주 결정되는 것을 발견했다. 여성이 선호 하는 요리는 덜 중요했다. 아내들은 새로운 맛과 이국적인 요리를 기꺼이 먹으려고 시도하는 데 반해, 식탁에 올라오는 이른바 정식은 남편의 요구 에 의한 것으로 국한되었다. 아래에 언급된 여성들의 목소리는 분명하게 몰리가 기록한 것과 서로 공명한다.
제 남편은 음식에 관한 한 매우 보수적입니다. 따라서 나는 일주일 내 내 같은 음식을 고수하려고 하죠. 저는 제 자신을 위해서 어떤 것을 사 는 경우가 매우 드뭅니다. 저는 다양한 종류의 음식, 심지어 이국적인 음식을 먹고 싶지만 그것을 요리해 내기 위해 힘들게 노력하지는 않습 니다. 만약 제가 음식에 약간의 허브향이 밴 것을 만든다면, 그는 나이 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미안하지만 못 먹겠어”라고 말할 테니까요. 그 는 언제나 그랬듯이 지금까지 먹어왔던 것을 준비해 줄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그리고 식탁에서 일어설 겁니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면 기 쁘지 않겠죠. 저는 그런 장면을 다시 만들지 않을 거예요. 저는 그것 가 지고 큰소리 내는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그가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 는 것을 요리합니다. 저는 그가 좋아하지 않는 것에 매달리지 않습니 다. 저는 그가 파스타 같은 것을 먹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 에 그걸 요리하지 않아요(Charles & Kerr, 1988: 70-2).
텔레비전 리모컨과 부엌 요리라는 두 개의 가정 테크놀로지에 대한 젠 더화된 관계성은 명백히 다르다. 남성들은 전자의 활용을 지배하고 후자 의 운영 책임을 여성에게 위임한다. 하지만 각기 다른 이 두 연구 프로젝 트는 동일한 기본 동학을 보여준다. 취향의 충돌이 있는 곳에서 승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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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남성의 기호라는 것이다. 반면에 여성들은 아내로서 그리고 어머니 로서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그녀들로 하여금 ‘자기 부정(self-denial)’을 실 천하도록 요구하는 것을 느낀다. 몰리의 연구에서 이러한 일반적인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것은 여성들 이 혼자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껄끄러운 즐거움(guilty pleasure, 죄의식 을 동반한 즐거움-역자 주)’,10) 다시 말해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 자신의 일을 하고 있을 때 비디오로 영화를 보거나 좋아하는 텔레비전 연 속극을 봄으로써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계속되는 의무로부터 잠깐이라도 벗어나는 기회를 가진 특별한 경우일 때였다. 몰리의 말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만약 내가 여기 혼자 있게 되면, 눈물을 찔끔거릴 것이고 … 엉엉 울 기도 할 것이며 … 사랑 이야기를 충분히 즐길 거예요. 그이가 집에 없다 면 … 그래요 그가 밤에 집에 없다면 아마 그럴 텐데 … 그런 경우가 자주 있지는 않아요(Morley, 1986: 160).” 정확하게 똑같이 찰스와 커(1988: 71)에서도 ‘나 홀로 식사’의 껄끄러운 즐거움이라 부를 수 있는 사례가 발견 됐다. “나는 스파게티와 버터를 먹고 싶거든요. 그런데 그런 종류는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혼자 있을 때 그걸 먹어요.”
10) 해당 사회에 의해 이성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판단되었음에도 은밀히 즐길 수밖에 없는 상태를 묘사하는 개념이다. 텔레비전과 같은 낮은 수준의 문화를 향유 하는 즐거움 역시 여기에 포함된다. 몰리(1986)는 여가와 노동이 동시에 일어나는 가정 에서의 텔레비전 시청(여가)이 다른 해야 할 일(육아, 청소 등 가정노동)을 방기하는 어 리석고 나쁜 행위로 인식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 개념을 쓰고 있다(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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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의식과 공동체 형성
만약 위에서 본 텔레비전 시청과 음식 소비 간의 비교가 텔레비전 수용자 들이 가정 내 관계망에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 다면, 우리는 또한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가정 내 여타의 오브제와 차별적 인 것이 무엇인지도 기억해야 한다. 방송은 소리와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개인적, 집단적 정체성 감각을 매개함으로써 가정의 사적 공간을 문밖 너 머에 있는 다양한 공적 세계와 연결시킨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는 기든스 (1991)가 ‘자아의 성찰적 투사’라고 명명한 것에서 취할 수 있는 커뮤니케 이션과 정보의 흐름에 대한 일상적 접근을 제공한다. 방송은 또한 우리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의 사건에 친밀성 있게 접촉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 라 지역적, 국가적, 초국적 수준의 ‘전송 권역’에 각기 다른 정체성을 가능 케 해준다. 이 장의 마지막 절에서 나는 자아와 공동체 형성에 대한 연구 성과를 고찰함으로써 지역적인 것(the local)과 지구적인 것(the global) 간의 변화무쌍한 결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경험의 매개
기든스(1990; 1991)는 정확하게 지역문화와 지구화 과정 간의 관계 전환 을 다루는 근대적 제도와 삶의 방식에 대한 설명을 제시했다. 근대성에 대 한 그의 사회학적 이론은 작고 섬세한 개인적 경험과 자아 정체성이 거대 한 규모의 제도와 기술적 형태에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설 명해 준다. 따라서 기든스 작업의 핵심 목표 중 하나는 근대를 살아가는 것 을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 이해하는 것, 달리 말하자면 미디어문화연구에 서 사회 변화의 ‘개인적 측면’을 이해하는 것이었다(Johnson, 198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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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든스는 경험적이고 현상학적인 이슈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그러한 이슈들을 당대 사회의 차별적 특성에 대한 보다 폭넓은 역사 적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했다. 이 책의 1장에서 간략하게 논의했던 것처럼, 후기 근대성의 조건에서 경 험과 자아 정체성에 대한 기든스의 해석적 출발점은 장소의 한계를 넘어선 공간과 시간의 확장에 대한 논의였다. 그는 근대사회로의 전환과 발전에서 사회적 관계는, 점차 제한된 지역에서 벗어나 종종 지리적으로 방대한 거리 로 뻗어나가 궁극적으로 사회 시스템의 ‘장소귀속탈피(disembedding)’를 낳는다고 주장했다. 거기에 더하여, 타인과의 관계가 더 이상 지역에 의해 제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상적 삶 역시 원거리의 어떤 힘에 의해 보다 넓은 데까지 다다르고 침투된다고 주장했다. 근대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등 장과 함께하는 근대성의 다양한 장소귀속탈피 메커니즘은-기든스가 상징 적 징표(symbolic tokens), 전문가 체계(expert systems)라고 부른 것은- 우리의 세계상의 존재적 경험을 본질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해 왔다.
원거리 사건들이 … 개인적 친밀성에 작용하는 영향력은 더욱더 당연 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인쇄미디어와 전자미디어는 이러한 측면에서 분명히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발전, 특히 전 자 커뮤니케이션의 발전으로 자아 발전과 사회적 시스템의 해석은, 전 지구적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더욱더 미디어에 의해 공표되고 있다. 우 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는 이전 시기 인류가 살았던 공간에서 한참 떨어진 심오한 상태에 있다(Giddens, 1991: 4-5).
우리의 경험은 더 이상 20세기 전자미디어의 도입 이전과 같은 방식으 로 장소 제한적이지 않다. 개인의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해 의지하는 많은 것들은 매개되어진 것들이다. 그렇다고 지역적 경험과 면대면 상호작용이 근대적 자아 형성에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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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지구적 수준의 커뮤니케이션과 정보 네트워크 에 대한 접근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문화에서도 여전히 강력한 ‘근 접성의 욕망’이 있다(Boden & Molotch, 1994). 그것은 가족이나 친구, 동 료 간의 비매개적 접촉이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감각과 세계상의 주체 적 모습을 형성하는 데 지속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도 사회문화 이론 작업은 사회적 주체의 매일 매일의 일상과 생애에서 지 역과 매개된 경험 간의 절합적 속성을 통해 사고되어야 한다. 존 톰슨(Thompson, 1995)은 근대적 삶의 변화하는 ‘상호작용 혼성(interaction mix)’, 그리고 기술적으로 매개된 문화적 환경에서 자아와 경험의 연출 등을 기술할 때 무엇이 쟁점인지를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기술했다.
매개된 세계에서 산다는 것은 각기 다른 경험 형식의 지속적인 상호교 차 속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삶의 궤 적이 주로 일상적 삶의 실천적 맥락에서 만나는 타인이나 사건과의 관 계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매개된 경험은 자아 형성 과정에서 보다 큰 역할을 떠안고 있다. 개인들은 자아의 투사를 일궈내고 재형성 하는 매개된 경험에 점점 더 이끌린다(Thompson, 1995: 233).
상징적 투사로서 그의 자아 개념은 기든스의 사회 이론에서 빌려온 것 이다. 기든스에게 있어 자아 정체성은 계속 이어지는 특정한 내러티브를 유지하는 능력에 관한 것이었다. 개인은 자아에 대해 계속되는 ‘이야기’를 유지하고자 애쓸 때 이용 가능한 상징적 자원을 사용하게 된다. 예를 들 면, 그는 “방송에서 연속극 형식은 실제 사회적 상황에 있는 자아의 내러 티브를 유지하는 데 균형을 보장하는 일관된 내러티브 감각”을 시청자에 게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Giddens, 1991: 199). 보다 더 일반적으로 볼 때, 중요한 논점은 우리 각자는 과거, 현재, 미래에 관한 의미 있는 이야 기를 생산하려고 노력하는 자신만의 ‘비공식적인 전기 작가’로 행동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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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이다. 얘기되는 이야기 종류는 특별한 문화적 환경에서 우리에게 접근 할 수 있는 ‘대본’의 범위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다를 것이지만, 후기 근대에 보다 폭넓은 자전적 이야기 내용의 본질은 공통적이다. 기든스와 톰슨에 따르면, 자아 형성에서 더욱 중요한 점은 이 프로젝트 의 고도로 성찰적인 속성이다. 개인의 정체성을 구축한다는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의 일상적 활동을 모니터하고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의 취사 선택 할 것을 필요로 한다. 확실히 근대성은 제도적 성찰성의 차별적 형태 라는 특징을 갖는다. 거기에서 사회적 삶에 대한 지식은 그것의 조직화와 변형에서 본질적인 요소가 된다. 예컨대 우리는 어떻게 공적 영역에서 다 뤄지는 지구의 생태적 이슈에 대한 정보가, 커뮤니케이션 흐름에 비춰볼 때, 일상적 실천을 수정해 가는 지역적 수준에서 개인의 구매 결정에 영향 을 미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한 건강상 의 문제에 대한 지식과 충고, 또는 감정적 문제에 대한 대처방법 등도 마찬 가지이다. 시청-청취자들은 이러한 방송 담론을 그들의 라이프스타일과 대인관계에 견주어 선택적이고 성찰적으로 전유한다.
전자적 전경
비록 우리가 보아왔던 이론가들의 작업이 자아를 사적인 삶과 공적인 문 화 간의 상호접촉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생산물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 고, 지금까지 나는 집단적 정체성보다 개인적 정체성 형성에 주목했다. 이 제부터는 근대적 공동체의 형성에 보다 면밀하게 주목하고자 한다. 위에 서 제기한 분석의 많은 부문, 특히 공간과 시간의 문제, 사회 시스템의 공 간귀속탈피 등에 대한 기든스의 통찰력은 여기에도 여전히 적용된다. 전 근대 공동체들이 주로 고정된 장소와 지역을 근거로 조직되었다면, 매개 된 경험은 지금의 공동체가 점점 더 공간적으로 먼 곳으로 뻗어나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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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즉각적인 동시성의 상황으로 모이고 있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방송제 도와 기술은 우리의 집단적 정체성 변화에서도 중요한 것이다. 공동체는 ‘허구적 실재’로 쉽게 이해될 수 있다. 허구적 실재는 객관적 존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상의 산물이다. 국가주 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역사가 앤더슨의 책(Anderson, 1983)은 이러한 논쟁점을 수용하여 국가 자체가 ‘상상적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임을 주장했다. 앤더슨의 책이 특별히 우리에게 흥미를 주는 부분 은 국민의 신분을 ‘가공’하는 데 있어 미디어 소비의 상징적 기능에 관한 것이다. 그는 거기에서 신문 읽기의 의례적 행위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 것을 개인 소비자들이 ‘특별한 대중 의식’에 참여하는 기호인 것으로 생 각했다.
이러한 대중적 의식의 의미는 역설적이다. 이것은 말이 없는 사적인 생 활, 다시 말해 머릿속 어느 지점의 작용으로 수행된다. 그러나 각각의 전달자는 그가 수행하는 의식이 그의 존재에 대해 확신에 차 있는 수천 수만의 사람들에 의해 동시에 반복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의식은 하루 또는 반나절의 간격을 두고 그칠 새 없이 반복된 다. 역사적으로 기록되고 상상된 공동체에 대해 이보다 더 생생한 형상 이 무엇으로 더 그려질 수 있겠는가? 이와 동시에 자신이 읽는 신문에 서 정확한 모사물을 목격하는 신문 독자는 … 상상된 세계가 일상생활 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재확인받는다. …거기에서 그는 근대국가의 가장 뚜렷한 특징인 익명적 상태의 공동체에 대한 확고부 동한 확신을 산출해 낸다(Anderson, 1983: 35).
익명적 공동체에 대한 동일한 종류의 확신이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보 급된 영국 공공서비스 방송의 수용자에게도 나타났다(Cardiff & Scannell, 1987). 실제로 앤더슨이 말한 동시 수용의 경험은 방송의 도래에 따라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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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되었을 것이다. 프로그램은 각 가정에 흩어져 눈에 보이지 않는 수 만 명의 사람들이 보고 듣는다. 따라서 프로그램은 보다 폭넓은 ‘공중 일반’ 에게 인지되고 매일, 매주, 매년 텔레비전과 라디오에 의해 재생산되는 국 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가정된다. 그러나 오늘날 공유된 공동체로서 국가의 존재에 대한 이러한 확신감을 방송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BBC는 시청-청취자들에게 전 국적인 편성에 대한 보편적인 접근을 제공한다. 그러면서도 1990년대까지 상상적인 공동체 지리학과 방송의 전자적 전경에서의 변화에 몇몇 요인들 이 작용했다(Morley & Robins, 1995). 우리는 국제적 규모의 상업과 정치, 텔레커뮤니케이션과 전송 네트워크의 팽창과 같은 근대적 제도의 시공간 적 조직의 보편적인 변화와 함께하는 ‘초국가화(transnationalisation)’ 또 는 시청각산업과 수용자의 전 지구화 경향을 목격하고 있다. 방송의 탈규 제, 더욱 정확하게는 재규제(re-regulation)(Corner et al., 1994), 그리고 케이블이나 위성과 같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도입은 텔레비전 기업 간에 고도의 경쟁을 초래했다. 확실히 미디어 정책의 결정은 서유럽 국가의 공 공서비스 방송이 가지는 영향력을 눈에 띄게 쇠퇴시키는 데 일조했다.
민족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 공공서비스 시대의 정치적이고 사회적 인 관심은 뉴미디어 시장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간주되기에 이 르렀다. …작금은 수익과 경쟁의 논리에 의해 추동되어 있기 때문에 뉴 미디어 기업의 최우선 목적은 그들의 생산물로 소비자의 수를 최대화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넓어진 시청각 공간과 시장을 쉬지 않고 구축하 도록 독려하는 팽창주의적 경향이 있다. 급박한 것은 국가 공동체의 오 랜 국경을 끊어 없애는 것이다. …따라서 시청각 지리학은 민족문화의 상징적 공간으로부터 분리되고 있다. …뉴미디어 질서는 지구적 질서 로 탈바꿈하고 있다(Morley & Robins, 199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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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변화된 경제환경에서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지역에 있는 시청 자가 지구적 변화에 대응하는가이다. 새로운 텔레비전 테크놀로지와 전 송 지역의 영향에 대한 일체의 논의들은 일상생활의 가정적 실천의 맥락 에서 출발해야 한다. 위성텔레비전과 같은 테크놀로지에 의해 제공되는 문화적 자원의 ‘메뉴’가 어떻게 다른가를 탐구하고 싶다면, 우리는 가정의 사적 공간으로 들어가야 한다. 위성텔레비전의 소비에 파고든 나의 민속 지학적 연구는 그런 어려운 질문에 답하는 조심스런 시도라 할 수 있다(제 4장 참조). 결과적으로 나는 공동체라는 아이디어를 통해 타인, 다시 말해 같은 공 간에 있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사람 모두에 대한 우리의 문화적 결합을 고 민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지금 현재 텔레비전과 라디오 가 전자적 전경에서 우리에게 주는 다양한 채널에 대해 고민할 것을 요구 한다. 이것은 매일 매일의 ‘의식(ceremonies)’으로의 참여에 대해 또는 앤 더슨이 묘사한 수용 의례에 대해 주의 깊게 사고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우리가 가정이라는 제한적 환경으로부터 초대된 상상적 ‘여 행’의 형태에 대해 사고할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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