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에 관해서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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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에 관해서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편지 친애하는 자크 롤랑에게

우리의 친구 브뤼노 루아(Bruno Roy)가 1935년에 <철학 연구(Recherche Philosophique)>−알렉상드르 쿠아레 (Alexandre Koyré)와 알베르트 슈파이어(Albert Spaïer), 장 발(Jean Wahl), 그리고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가 기획한 잡지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나온 아방 가르드적 철학 잡지−에 실렸던 <탈출에 관해서>라는 글을 새로 편집해서 출간하자고 했을 때, 나는 이 제안을 적 극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네. 나에게 있어 이 제안은 분명 하게 존중할 만한 명분이나 고상한 이유가 따르는 경우에서 야 비로소 수락을 고려할 만한 것이 될 수 있었네. 그래서 나는 의미의 종언이라는 지적 상황에 대한 증언을 보여주겠 노라는 결심을 하고 나서야 이 오래된 글을 기꺼이 인정할 수 있게 되었지. 대량 학살이 일어나기 전에 나온 이 잊혀져 버린 글에 또 다른 생동감을 부여하는 일이란, 자기 정당화 의 문제까지 개입되는 것으로 생각되네. 더구나 이 문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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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과 인용을 필요로 하는 일이 될 터인데, 이런 작업은 나 의 젊은 시절에 대한 해석에서 시작되는 일이기에 너무나 어려운 일로 여겨진다네. 이러한 해명의 작업에 대한 요청을 친히 수락해 주게나. 그리고 가장 눈에 잘 드러나는 방식으로 이 해명 작업을 수 행해 주었으면 좋겠네. 자네는 현대의 위대한 사유라는 맥 락에 가장 보잘것없는 나의 짧은 시론을 포함시켜 주었지 (이 시론은 논점이 결여된 의식을 가졌을 때, 불가능하지만 새로운 사유에 대한 확고한 기대감에민 의지해서 나온 것일 세). 또한 내 글의 행간에 있는 대조적인 요소들을 메아리치 게 만들어서 들릴 만한 목소리로 그 요점들을 재생시키거나 위대한 인간의 속삭임이라는 메아리로 변형시켜 주었지. 자네의 세심한 배려는 그때까지만 해도 숨어 있었던 전조들 을 내가 사용한 (이미 태동하고 있었던 침묵인) 용어들 속에 서 캐내는 성과를 이루었다네. 자네의 그 엄청난 지식과 재능, 그리고 우정에 대해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하고 싶네. 엠마누엘 레비나스, 198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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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존재의 이념에 대항하는 전통철학에 대한 전복은, 인간의 자유와 이 자유를 공격하는 존재의 잔인한 사건 간의 불일 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로부터 이 전복이 야기하는 갈 등은 인간이 자기 자신과 맞서는 대립이 아닌, 세계와 인간 간의 대립이다. 주체의 단순성은, 주체의 분열을 일으키고, 인간 안에 비자아(non-moi)와 자아(moi)의 대립을 설정하 는 투쟁의 저편에 놓여 있다. 이러한 투쟁은 자아의 통일성 을 깨트리지 않는다. 이러한 자아의 통일성은 본래적으로 자기 안에 인간이 아닌 모든 것이 정화될 때 자기 자신을 완 성시키며, 자신을 움켜쥐고, 자신에게 의존하면서 자신과 의 평화라는 약속을 얻는다. 18세기와 19세기의 낭만주의(romantisme)는 인간의 숙 명이라는 영웅적 개념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평화의 이상에 서 벗어나지 못했다. 개인은 개인을 억누르는 낯선 실재성 (réalité étrangère)의 포위를 풀어줄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단지 개인의 고유한 실재성의 완연한 만개를 보증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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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한다. 이 방해물1)과의 투쟁은 오직 개인의 영웅주의에 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즉, 이 투쟁은 이방인에게로 그 방 향을 돌린다. 루소(J. Rousseau)나 바이런(G. Byron)보다 더 교만한 자들도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은 더 이상 스스로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자기만족으로서의 자아(moi comme se suffisant à soi)라 는 개념은 부르주아(bourgeois) 정신과 부르주아 철학의 본 질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이다. 프티 부르주아(petit bourgeois) 의 자기만족과 같이, 자아라는 개념은, 불안하면서도 진취적 인 자본주의가 지닌 뻔뻔스러운 꿈에 자양분을 공급해 준다. 이 개념은 인간을 자기 자신과 화해시키기보다는, 알려지 지 않은 시간과 사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일을 지 향하는 자본주의의 노력, 결정권과 발견에 대한 숭배(culte) 를 주재한다. 부르주아는 내적인 분열과 자기 신념의 결여 에 대한 수치심(honte)을 표현하지 않는다. 단지 현실과 미 래를 염려할 뿐이다. 왜냐하면 분열과 결여는 바로 부르주 아가 소유한 현재의 확정된 균형 관계를 끊어버리도록 위협

1) 낯선 실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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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는 본질적으로 보수주의자이지만 불안한 보수주의로 존재한다. 부르주아는 사업 문제와 학문 을 자신들이 예측하지 못한 사태에 대한 방어와 연결시킨다. 부르주아의 소유 본능은 통합에 대한 본능이고, 부르주아 의 제국주의는 안전에 대한 탐구다. 부르주아는 세계와 자신 을 대립시키는 적대 관계에 대해 ‘내적 평화(paix intérieure)’ 라는 백색의 망토를 덮어씌우려고 한다. 가책에 대한 그들 의 표현은 양심의 평화라는 부끄러운 모습이다. 하지만 평 범한 유물론자들조차도 장래의 확실성을 향유하기를 좋아 한다. 그들은 거주할 곳을 해결하기 위해, 문제 속에 미지 수를 도입하는 미래에 반대하여 현재에 대한 담보를 요구 한다. 부르주아가 소유하게 되는 자본이란, 위험에 대한 지 배력과 보증을 수반하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길들여진 부 르주아의 미래는, 이러한 방식으로 자기들의 과거와 통합 되어 버린다. 하지만 이러한 만족의 범주는 우리에게 만족을 제시하 는 것으로서의 존재(être)의 이미지 안에서 파악된다. 그것 들은 존재한다. 이 만족의 범주의 본질과 속성은 불완전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존재의 사실 자체는 완전과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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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의 구별 너머에 자리하게 된다. 존재에 대한 긍정이 지 닌 잔인성은 절대적인 만족이며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을 지 시하지 않는다. 존재는 다음과 같이 존재한다. 존재는 우리 가 존재 안에서 존재의 현존(existence)만을 직시하는 한, 이 긍정에 어떤 것도 덧붙이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 러한 지시는 우리가 존재의 동일성(l’identité de l’être)에 대 해 말하려고 하는 바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동일성은 존재 의 속성이 아니다. 또한 동일성은 그 자체로 동일성을 가정 하는 속성들 간의 유사성으로는 나타날 수 없다. 오히려 동 일성은 사람들이 그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성격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 사실의 충만함(suffisance)의 표 현이다.2)

2) 본서에서는 ‘être’를 ‘존재’로, ‘existence’는 ‘존재’나 ‘현존’으로 번역한다. 이는 강영안 교수의 ≪시간과 타자(Le Temp et L’autre)≫와 서동욱 교수의 ≪존재에서 존재자로 (De l’existence à l’existant)≫에서 제시된 원칙을 수용 한 것이다. ‘être’를 존재로 번역하는 것은 대체로 분명한 것이지만, ‘existence’ 도 존재로 옮기는 것은 혼란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존재로 번역하 는 것은 레비나스의 활용법을 존중해서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여러분 은 하이데거가 존재(Sein, être)와 존재자(Seiendes, étant)를 구별한다는 것 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앞에서 이 구별을 사용했다. 하지만 나는 어감 때문에 존재(exister: existence의 동사형−옮긴이 첨가)와 존재자(exist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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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실제로 서양철학은 결코 이것을 넘어서지 못했다. 서양철학은 존재론주의(l’ontologisme)와 싸우면서도, 그 리고 이것을 둘러싸고 싸울 때에도, 우리와 세계 간의 조화 내지는 우리의 고유한 존재의 완전성을 위해서, 더 좋은 존 재를 위해서 싸웠을 뿐이다. 서양철학의 평화와 안전성(é qulibre)에 대한 이상은 존재의 충만함을 전제했다. 인간의 조건이 지닌 불충분성은 심지어 ‘유한한 존재(l’être fini)’라

란 말을 쓰고자 한다. 이 용어에는 실존주의적인 의미가 전혀 없다”(E. Lé vinas, ≪시간과 타자≫, 강영안 역, 서울: 문예출판사, 1996, 38쪽). ‘existence’ 는 보통 실존이라고 번역되지만 레비나스는 독일어 ‘Sein’을 염두에 두고 이를 번역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아울러 실존주의적인 의미마저 배제한다고 말한다. 이 점에서 ‘existence’와 ‘existant’를 실존과 실존자로 옮기는 것은 레 비나스의 의도를 어느 정도 무색하게 만든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존재에서 존재자로≫와 ≪시간과 타자≫가 ≪탈출에 관해서≫보다 나중에 나온 책이 기는 하지만, 레비나스의 철학적 아이디어는 이미 본서에부터 충분하게 드러 나고 있기 때문에 ‘존재’와 ‘존재자’에 원어를 병기하는 방향으로 번역 원칙을 세웠다. 다만 ‘être’와 ‘existence’가 한 문장에서 쓰이는 경우 전자는 존재, 후 자는 현존으로 옮겨 구분했다. 단, ‘existence’의 경우, 존재보다는 사태나 존 재자의 실제적 있음을 칭하는 것으로 보이는 맥락에서는 ‘현존’으로 번역했다. ‘existence’와 ‘existant’의 번역 원칙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존재에서 존 재자로≫(엠마누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서동욱 역, 서울: 민 음사, 2001, 173∼181쪽)에 수록된 서동욱 교수의 “번역어에 대해서” 편을 참 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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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의미를 직시한 것 외에, 단 한 번도 다른 어떤 존재의 한계 와 같은 것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이러한 한계의 초월성, 유 한한 존재와의 연합은 철학의 유일한 고지로 남게 된다…. 그러는 동안 현대의 감수성은 우선 이러한 초월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라고 지시하는 문제들과 씨름한다. 이는 마 치 한계의 이념이 존재하는 것의 현존(l’existence de ce qui est)뿐만 아니라, 단지 그 본성에도 적용될 수 없다는 주장 이 확실성을 얻게 되는 것과 같은, 또한 현대의 감수성이 존재 내에 있는 보다 심오한 하나의 결함을 지각하게 되는 것과 같은 그런 문제이다. 탈출(L’évasion)은 이시대의 문 학이 표현하는 이상한 침묵과 관련하는 것이며, 우리 세대 의 존재 철학에 대한 보다 철저한 유죄판결로 나타난다. 우리가 현대의 문학비평에서 빌려 온 탈출이라는 용어 는 유행하는 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즉, 그것은 이 시대 의 병적 경향(mal du siècle)이다. 탈출이라는 표현 자체만 으로 현대적 삶의 모든 상황에 대한 목록 전체를 도출하기 는 쉽지 않다. 그 목록은 삶의 여백 속에 아무것도 남겨두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자각할 힘조차도 지니지 못한 세대 속 에서 만들어진다. 보편적 질서라는 포착할 수 없는 악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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