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떠나는 가족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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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떠나는 가족



나오는 사람들

어느 기자 중섭의 친구들 중섭 그림의 주인공들 영안실 인부 중섭 소 주인 임용련: 오산학교 미술 교사 어머니: 중섭의 이중석: 중섭의 형 이중숙: 누이 문화학원의 학우들 야마시타(山下) 교수: 문화학원의 즈다 교수: 문화학원의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중섭의 아내, 뒤에 이남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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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오코(京子): 마사코의 학우 야마모토 씨: 마사코의 아버지 야마모토 부인: 그녀의 어머니 영진: 중석의 아들, 중섭의 조카 구상: 시인 한묵: 화가 군인들: 북한의 노인: 부산 국제시장의 무대감독: 오페레타 <콩쥐팥쥐>의 주모: 부산과 서울의 여종업원 최태응: 작가 이 대령: 일명 포(砲) 대령 순자: 대구 경복여관의 어린애들 간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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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이 희곡은 서사적 구조를 띤다. 무대는 각 장의 변화가 유기 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가변형 장치를 필요로 한다. 무대 의 전환은 상자, 의자, 소도구의 이동 등에 의해서 연극적 약속이 이루어진다. 다양한 극 중 성격들을 표현해 내야 하는 배우들은 이중 섭 역과 남덕 역을 제외하고는 고정된 성격이 없다. 그들은 전개되는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극 속에 개입하고 빠져나간 다. 그들의 다양한 변화와 전환 또한 연극적 약속이다. 이러 한 무대술과 배우술의 운용은 이중섭과 남덕이란 고정 인물 의 내면적 정서를 원활하게 표현해 내면서, 전개되는 상황 에 대한 다양한 표현의 자유로움을 위한 장치이다. 예술과 현실이란 갈등 구조를 서사적 구조로 내면화하는 것이 이 극의 의도가 된다. 그러므로 이 극은 서술적·생애사적 스 토리에서 벗어나 있다. 무대는 7장으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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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서울 적십자병원 −죽음의 푸가−

무대는 뒷면이 온통 흰색이고 배우들은 병원 로비 나무 의 자에 자유롭게 앉아 있다. 배우 1이 송고를 하고 있다.

배우 1 신 형, 기사 하나 받아 줘. 응, 시작할까? 제목, 이중

섭 화백 별세, 본문, 한국 화단의 야수파로 알려진 청 년 예술가 이중섭 화백은 극도의 가난한, 응, 그래, 극 도의 가난한 생활을 해 오던 중 몇 차례에 걸친 무료 입원 및 치료 등에도 회복의 길이 없어, 회복의 길이 없어, 더욱 쇠약해진 끝에 9월 6일 서울 적십자병원에 서 사망하였다. 이중섭 화백의 장례식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시인, 화가들에 의하여 준비되고 있으나, 가족 에게는 연락할 길이 없어 10일 상오 현재 출상을 못하 고 있다. (소리 멀어지며) 연락 장소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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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음악이 흐르면서 배우 2의 시 낭송이 시작된다.

배우 2 내 마음 척박한 황지(荒地)에

무슨 나빈가 애벌레인가 한 마리 살고 있었지요. 그놈은 한사코,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고 그저 세상이 죄스럽다고 그저 한번 화사하게 날고 싶다고 거부하는 몸짓으로 살다가 1956년 9월 6일 11시 40분 간염증으로, 입원 가료(加療) 중 사망. 이중섭, 40세.

이 시가 낭송되는 동안 로비의 배우들, 곧 문상객들은 이중 섭이 사랑했던 오브제들−노루, 개, 개구리, 뱀, 쥐, 학, 나 비, 게, 천도복숭아, 목련, 호박꽃, 소들−로 바뀐다.

배우 2 시체라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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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실 인부 볼 필요 없습니다. 다 썩었습니다.

음악 꽝 울리고 흰 벽면의 문이 열린다. 이중섭이 나타난다. 그의 주변으로 그의 분신들−또는 그의 그림의 주인공들이 모여 든다.

배우들 중섭이!

그는 뚜벅뚜벅 걸어 나간다. 그의 분신들이 그를 따라가려 한다. 중섭, 소리친다.

중섭 따라오지 말라우, 나 혼자 가!

분신들이 굳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중섭 다시 움직여 사라져 간다. 음악이 고조되고 분신들은 자기들의 춤을 춘다. 춤은 길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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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이중섭과 소

흰 벽면이 녹색 들판으로 바뀌면서 이중섭의 장례 행렬이 퇴장한다. 무대에는 소만 덩그렇게 남았다. 소, 눈망울을 끔 벅거리다가 팔자 편하게 주저앉는다. 중섭이 스케치북을 들고 살금살금 걸어 나온다. 소, 이중섭을 문득 보고는 ‘음 메에−’ 한 번 울고….

중섭 괜찮아, 인마, 그대로 가만있어. (마주 앉으며) 자, 자

− 앉아, 앉으라구, 우리 인간적으로 만나자, 응, 인간 적으로. 소

(체, 나는 소야. 내가 어떻게 인간적으로 앉아?)

중섭 그래, 그럼 소처럼, 그래 가장 소답게 여기 앉아 봐라.

소 얌전해진다. 그러나 약간 쑥스럽다. 꼬리를 설레설레 흔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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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얌전하게…. 소

(뭘 하려고 그러냐?)

중섭 응, 널 이 화폭에 담고 싶어. 소

(그럼, 잘 그려 줘. 가장 소답게. 알았어? 자.)

소, 멋을 내며 앉는다.

중섭 약간 옆으로 삐딱하게 몸을 돌려 봐.

소, 중섭의 말에 따른다. 중섭, 스케치를 시작한다. 임 교사, 무대 뒤에서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 등장, 중섭 뒤 에 선다.

임 교사 피나는 관찰을! 철저하게 관찰하고, 수없이 반복해

서 에스키스1)를 그려야 해. 바닷가의 모래알보다 더

1) 에스키스(esquisse): 회화에서 작품 구상을 위해 그리는 초벌 그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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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에스키스를. (사이) 중섭이, 그림은 왜 그리지? 중섭 세상을 아름답게 느끼고 싶어요. 그림을 그리고 있으

면 난 자유스러워져요. 누구도 내 그림을 간섭할 수 없 어요. 임 교사 맞아, 우린 자유스럽지 못해.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거다. 이 두메산골 오두막도 내 땅 내 조국이 틀림없지 만, 우린 주인이 아니야. 미국 땅 시카고에서 그림 공 부할 때만 해도 이렇게 암울하지만은 않았지. 중섭 선생님, 우리는 어떡허지요? 우리 오산학교 학생들은

지금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하는 것이 공부하는 것보 다 더 낫다는 생각들을 하구 있어요. 임 교사 너의 독립운동은 그림을 그리는 거야. 그림 속에서

아름다운 조국을 찾아라. 중섭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그림 속에 우리의 꿈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애꿎은 소나 그리고 있을 수밖에 없지 요. 임 교사 그래, 소가 너의 꿈이고 고향이고 조국이 될 수 있

잖나. 화가에게는 상상력이 전부야. 문제는 어떻게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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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하느냐이지. 넌 그 기술을 익혀야 돼. 넌 동경으로 가야 돼. 중섭 동경으로? 우리 조선을 집어삼킨 호랑이 굴로 들어가

라구요. 거기서 그들의 기술을 익히고 그들의 개가 되 라구요? 전 차라리 만주로 가겠어요. 그림 대신 총칼 을 잡는 게 떳떳해요. 임 교사 중섭아, 잊지 않았지, 넌 예약된 천재야. 중섭 (펄쩍 뛴다.) 선생님, 천재라니요? 임 교사 화가에게는 마음의 영토라는 게 있다. 넌 어디에 있

거나 너의 혼을 뺏기지 않아. 문제는 실력이야. 일본인 들이 우리를 굴종시키고 지배한다면, 그럴 만한 능력 이 있기 때문이야. 우린 그 이유를 알아야 해. 놈들에 게 이기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중섭 혼자가 된다.

중섭 동경으로? 조선의 소와 참을성을 가지고? 순종하는

소, 그러나 분노하는 소, 배반하지 않는 소, 꿋꿋한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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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소, 그 의리와 배짱으로 결코 굴하지 않는 자유 를 가지고 난 동경으로 가겠어. 내 어머니의 소와 함 께. 하지만 형님이 허락하실까?

중석이 그의 어머니와 누이 중숙과 함께 나타난다.

중석 알다시피. 일손이 모자라. 장사라고 하는데 돈이 굴러

다니는 걸 뻔히 보면서도 손이 모자라 놓쳐 버려. 공부 는 그만하고 나하고 장사나 하자. 하긴 그래, 나두 대 학을 댕겼지. 너를 대학까지는 보내 줘야지. 허나 그림 공부는 고만해라. 나처럼 상과를 졸업하구 돌아와. 안 그러냐, 아버지 가신 지 벌써 이십 년, 그동안 나 혼자 서 원산까지 흘러와 다행히 여기까지 집안을 끌어왔 다만 이제는 형제끼리 힘을 합쳐 보자꾸나야. 중섭 안 돼, 형님, 난 돈 같은 건 몰라. 난 그저 그림밖에 아

는 게 없어. 딴 재준 절대로 없단 말이야. 어머니 큰애야, 거 웬 말이냐? 둥섭인 환쟁이가 되고프다는

데 저 하고픈 대루 놔두람. 사람은 저 하고픈 대루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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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살아야 한다. 중섭 (좋아서) 오마니, 오마니, 오마니가 최고야. 우리 형님

은 괜히 그래. 환쟁이두 조선서 제일가는 환쟁이 되믄 그걸루 됐지, 안 그래요? 어머니 그래, 이놈의 세상 숨도 못 쉬고 사는데 하고픈 거나

하구 살아야잖니? 돈이야 큰애 너 혼자서 벌어도 우리 식구 먹구사는 덴 너끈하다. 중석 하지 말라 말라 해두 할 새낀데 오마니까지 왜 그루?

그림이 밥을 멕여 주, 옷을 입혀 주? 환쟁인 돼서 뭘 한 다구 그래? 중섭 형님, 환쟁이 안 될래믄 만주나 가겠어요. 창복이하구

약속했어요. 만주 가서 독립군 되자구. 중숙 야, 야, 그게 낫겠다. 총 메구 말 타구 만주 벌판을 달

려? 야 거 멋있다, 중섭아. 중석 (날카롭게) 야 중숙아, 너 미쳤니? 중숙 미치긴, 오빠. 어머니 그래 독립운동보단 그림 그리는 환쟁이가 백 번 천

번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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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섭 그러는 형님은 왜 서도에 빠졌수? 글씨 쓰느라구 정신

이 없으면서? 중석 야, 이 새끼 봐라. 날 깔아뭉개는구나. 너…. (생각을

고쳐먹는 듯) 망할 놈의 새끼, 가라, 가! 좀 빌면서 가 면 안 되니? 중섭 와하, 갑니다. 동경 갑니다. 조선의 소와 참을성을 가

지고 당장 떠나지요, 동경으로.

중섭, 소에 올라탄다. 소, ‘음메에−’ 하고 울며 중섭을 태우 고 퇴장한다. 이때 소 주인이 무대 좌측에서 등장.

소 주인 내 소! 도둑이야, 소도둑이야!

흥겨운 음악과 함께 장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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