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규작품집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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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규 작품집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는 전 세계 모든 학문 분야 고전이 3000종 이상 출간됩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은 오리지널 고전에 대한 통찰의 책읽기입니다. 전문가가 원전에서 핵심 내용만 뽑아내는 발췌 방식입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클래식>은 고전의 완전한 번역입니다. 고전선집을 읽고 다음으로 클래식을 읽고 마지막으로 원전을 읽는 점진적 독서로 더욱 심오한 지식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 0546

최상규 작품집 최상규 지음 박연옥 엮음

대한민국, 서울, 지식을만드는지식, 2010


편집자 일러두기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에서 출간하는 한국 근현대소 설 100종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으로 기획했습니다. 점점 사라져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 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 이로 추천했습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 석을 덧붙였습니다. ∙이 책은 <死角>(<사상계>, 1958. 8), <申之君>(<사상 계>, 1962. 5), <列外>(<사상계>, 1964. 7), <꿩 한 마 리>(<현대문학>, 1965. 7), <모래 헤엄>(<현대문학>, 1982. 3)을 저본으로 삼았습니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습니 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 용했습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 잡았습니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 춰 고쳤습니다. ∙주석은 현대에는 쓰지 않는생소한 단어, 현대의 독자들이 쉽게 뜻을 알기 어려운 한자어, 원전의 글씨가 잘 안 보여 엮은이가 추정한 글자, 사투리, 토속어, 북한어 등 설명이 필요한 경우


에 달았습니다. ∙뒤표지의 글은 엮은이가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핵심 문장을 직접 뽑아낸 것입니다. ∙표지에 사용한 색상은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을 위 해 개발한 고유 색상입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은 환경인증을 받았습니다. 표지와 본문에는 모두 친환경 재질을 사용했습니다.



차례

해설 ······················11 지은이에 대해 ··················24 사각(死角) ····················27 신지 군(申之君) ·················51 열외(列外) ···················127 꿩 한 마리 ···················161 모래 헤엄····················189

엮은이에 대해··················226



사각(死角)



아직 완전히 더워지기 전 초여름. 그래 아침저녁으로는 좀 산산했다. 찬물에 오른발을 담그니 선뜩하는 느낌이었다. 그는 땀과 먼지에 더러워진 발을 씻었다. 그러자니까 물은 차겁지 않아졌다. 오른발을 다 씻은 다음 왼발을 담갔다. 그 러다가 그는 선뜩 놀랐다. 차거웠다. 오른발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왼발이 새삼스럽게 차거웠다. 그는 발을 씻으면서 이상하다 생각했다. 둘 다 내 발인데… 그리고 똑같은 물인데… “한 핏줄을 타고난 사람들은 괜찮다. 무어니 무어니 해도 서로를 이어놓는 무엇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하고 남하 고끼리는 항시 애써야 한다. 서로를 이어놓는 혈연이라는 끈이 없는 까닭이다. 남자와 여자도 그렇다. 결합하기도 쉽 고 반면 떨어지기도 쉬운 것이 그 관계이다. 첫아이가 나와 야만 그 끈은 생기느니라.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항시 애써 야 한다. 노력해야 한다.” 어머니의 말이었다. 여부없이 옳은 말씀이다. 그러나 한 핏줄은커녕 한 염통에서 뿜어 나오는 피가 도는 두 발이 이 렇게 서로 다르지 않으냐? 그는 지긋이 이를 악물고 마른 수 건으로 발의 물기를 닦았다.

어느 청명한 아침 그는 개 한 마리를 치어 죽였다. 흔히 29 사각


개는 죽는다. 개가 죽었다면 그저 그러냐고 사람들은 생각 한다. 개를 잡아 보신탕을 해 먹는다면 그저 그러냐고 하고 먹을 줄 아는 사람은 그거 한 그릇… 하고 침을 삼키기도 한 다. 그런데 그 개가 차바퀴 밑에서 역사(轢死)했다니까 왜 그렇게 사람들은 갑자기 점성학자(占星學者)가 되고 원시 철학자가 되는지 몰랐다. 비단 남들만이 아니라 그 자신도 그랬다. 아홉 시 출근 시간이 오 분밖에 남지 않아서 새로 깐 새까 만 아스팔트 길을 한참 달리던 참이었다. 쭈르르 길옆에서 누런 개 한 마리가 달려 나오더니 고개를 뻔히 치켜든 채 바 퀴 밑으로 굴러드는 것이었다. 그는 운전수의 직감으로 저 도 모르는 사이 ‘부레키를 ’ 콱 밟았지만 차체는 앞바퀴에 둔 중(鈍重)한 촉감을 깔고서야 멎고 말았다. 죽었다! 뻐쓰 안에서 가득히 탄 남녀 사원들의 비명을 내버려 두 고 그는 재빨리 운전석 옆 비상구를 열고 뛰어내렸다. 역시 개는 죽어 있었다. 아니 개의 생명은 깨어져 있었다. 아랫배와 그 부분의 허리가 바퀴 밑에 깔린 채, 두 눈은 툭 튀어나와 아침 햇살에 무섭게 번들거리고 있고 입과 아 래로는 피와 시뻘건 창자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개는 분명 죽어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뻐쓰의 30


왼편 차창에는 사원들의 얼굴이 하얗게 붙어 있었고 주위엔 낯선 사람들이 이상한 얼굴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불 안과 불길의 예감에 쌓인 수선스러움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 다. 갑자기 태양이 빛을 잃어버린 분위기였다. 활짝 피어난 신록의 가로수가 사진동판처럼 차겁게 굳어지는 분위기였 다. 그는 갑자기 처신이 곤난해졌다. 그래 목에 맸던 새빨간 ‘넥커취이프를 ’ 잡고 콱 잡아다렸다. 푹, ‘나일론제 ’ ‘넥커취 이프는 ’ 끊어져 버렸다. 살견자(殺犬者). 살견자! 개를 죽인 사나이! 그의 주위엔 수없는 눈알들이 따랐다. 살견자. 생명 을 죽인 사나이, murderer! 그러나 그의 눈앞엔 생명을 죽인 사나이를 바라보는 괴 이한 눈초리들보다도 피와 창자가 터져 나오는 눈이 튀어나 와 차바퀴에 깔려 있는 개의 시체보다도 차에게 치기 전 고 개를 뻔히 치켜들고 행길 저쪽으로 건너가려 차바퀴를 향해 달려들던 개의 그 자세가 자꾸만 어른거렸다. 빠끔히 뜨여 있는 눈. 무얼 바라보는 눈. 그 눈을 따라 저절로 움직이고 있던 개의 사지와 육신. 무엇인가를 향해 여념 없이 움직이 고 있던 그 자세. 그게 불과 몇 초 동안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게, 그 몇 초 동안 본 개의 동작이 선명한 영화의 화면처럼 자꾸 그의 뇌리에서는 반복되고 있는 것이었다. 뚱딴지같 이… 개를 치어 죽인 사나이의 머리속에 죽기 전의 몇 초 동 31 사각


안의 개의 동작이…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새빨간 ‘넥커취이 프를 ’ 왈칵 호주머니에 꾸겨 넣어버렸다.

‘이브·몽땅’5)의 넥커취이프! 취직이 되고 보니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 러나 오랜 불안정의 뒤에 막상 안정을 찾고 내일부턴 ‘출근’ 이다 하고 생각하니까 또 새로운 미묘한 불안이 그를 엄습 했다. 그래 오래만에 같이 외출하자는 아내의 청을 점잖게 거절하고 집에서 낮잠을 자기로 했다. 부엌 아이는 빨래를 하러 간다고 멀지 않은 개울로 나갔다. 늘 그렇게 혼자 집에 서 꾸물거리며 살았지만 오늘은 그전과는 달랐다. 이젠 밤 에나 돌아와 볼 가정. 햇볕이 쪼이고 있는 동안엔 일요일밖 에 있어볼 수 없게 된 가정. 하나도 정든 것 없는 고장이라도 떠나자면 느끼게 되는 가느다란 미련과 같은 것. 그런 것일 게다. 하여튼 하루가 지났다. 저녁때 아내는 밝은 얼굴을 하고 왔다. 그리고 주머니처럼 생긴 핸드·빽에서 조그만 하얀 종이로 싼 것을 내어주며 배시시 웃었다.

5) 이브·몽땅: 이브 몽탕(Yves Montand, 1921∼1991). 이탈리아 출신의 배 우 겸 가수. 대부분 프랑스에서 활동했으며 본명은 이보 리비(Ivo Livi)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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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하나 가져왔어요.” “무언데?” 그는 그래도 제법 상냥한 말씨로 물으며 자리에서 일어 섰다. “넥커취이프!” 뭘? 그는 눈이 똥그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말씨로 보아 분명 그를 주려고 사 온 건데 물건이 바로 넥커취이프라 니…? “그건 뭘 해? 아내는 생그레 웃으며 잠간 동안 침묵을 지니고 있다가 대답했다. “목에다 매지 뭘 해요? 바요, 빨강색이야. 인제 드라이버 가 되셨으니 이왕이면 멋이 있어야죠. ‘이브·몽땅처럼 ’ 말 이야. 근사할 거야. 당신 체격에 이걸 척 매고 이렇게 매고 난 끝을 바람에 나플거리면서… 자, 거울을 봐요.” 그는 주춤주춤 아내가 돌려세우는 대로 거울을 향했다. 그리고 갑자기 왕관을 뒤집어씌운 어린 왕자와 같이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자신을 그 속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목에 매어진 빨강 ‘나일론제 ’ 넥커취이프를− ‘이브·몽땅’? 아내는 남편의 사기(士氣)를 돋구어 주려 고 하고 있다. 아내는 낭만주의자다. 그다지 이 땅에서 명예 33 사각


롭지 못한 직업의 굴레를 뒤집어씌우긴 씌우되 그것을 미화 (美化)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 말려든 남편이란 허수 아비에게 용기를 북돋우고 있다. ‘이브·몽땅’? 하긴 그렇다. 건장한 체구에 입엔 비스듬 히 담배를 물고 대형 화물차의 핸들을 잡고 입가엔 무게 있 는 미소를 띠고… 뒤에선 ‘스트라우쓰의 ’ 월츠가 들려오고 거대한 차체는 거기 따라 멋있게 이리저리 돌아가고… 그리 고 그 목에는 샛빨간 넥커취이프가 바람에 나플거리고… 그는 자신을 거기 넣어 생각해 본다. 하하 멋있다. 그의 입가엔 기막힌 웃음이 새어 나오려다 말았다. 그러나 아내 의 취지만은 좋다.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내는 결국 ‘스트라우쓰의 ’ 월츠에 끝나는 ‘이브·몽땅의 ’ 행운까 지만을 보았지 그 영화의 맨 마지막 씨커먼 불행과 공포에 찬 파멸을 못 보았기 때문에 그저 그 정도로 훌륭할 뿐이다. 그는 돌아서 아내를 보았다. “쌩큐!” 그리고 그는 눈을 감지 않은 채 아내의 이마에 입 맞추었 다. 덤덤한 추억이다. 그러나 그때 그는 아내와 함께 기뻐했 다. 그는 직업을 얻음으로서 인권을 도로 찾았고 아내는 인 권을 회복한 사내를 남편으로 가지게 되었으니까− 이것은 34


피차에 다 기쁜 일이다. 그리고 또 얕은 의미에서는 그는 용 사처럼 방구석을 박차고 밖으로 나갈 건전한 근거가 생기게 되어 속이 시원했고 아내는 밤마다 기다리고 있는 남편의 음울한 얼굴을 보지 않게 된 것이 후련했다. 그래서 그는 비 록 마음에 내키지 않지만 빨강 ‘넥커취이프를 ’ 마음을 눌러 먹고 취직 기념품으로 받았고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이 빤히 자기 속을 들여다볼 줄은 알면서도 의젓이 그걸 그냥 받아 주는 것이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으로 감격했다. 그래서 그날 둘이는 오래만에 유쾌하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하루밤 을 지냈다.

사실 늘 유쾌하고 홀가분했다면 이날 이렇게 둘이서 재 미있었을 리가 없다. 하긴 대부분의 젊은 부부가 그랬듯이 근 일 년 동안 그들은 서로 나쁜 남편 나쁜 아내였었다. 서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별반 좋아지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노력할 것을 단념해 버린 것이다. 남편과 아내라는 법률적인 기반(羈絆)이 있으니 서로 해체할 리는 없고 하니 그런대로 이 서로 나쁜 아내이고 남편인 상태에서 벗어날 무슨 실마리가 나타나길 기다리면서 산 것이라고도 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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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를 해요. 제대를, 한평생 군대 생활만 할 작정이야 요? 한평생 하지 않으려면 빨리 나와야지요. 나와서 무슨 기 반을 닦아야지….” 늘 아내는 그 무렵 졸라대었다. 하! 그는 그러면 늘 이렇 게 속으로 탄식했다. 그의 지능도 아내의 지능을 못 따라가 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그것을 안다. 한평생 군대 생활을 하 지 않을 바엔 복무연한만 지나면 제대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러나 안다고 안 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복무연한은 차 고 이 년이 넘는다. 그러니까 아내의 조바심도 마땅하다. 그 러나? 그는 따분했다. 제대하고서는 뭘? 당장 무얼? “우선 하고 보아야지 어디 머 어서 나오세요 하구 무슨 길이 입을 벌리고 있는대요?” 이것 또한 옳은 말이다. 여부없이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그가 아는 일이다. 물론 그가 모를 줄 알고 아내가 말하는 건 아니고 다만 용단을 내릴 수 있는 충동을 주고 용 기를 고무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하여튼 이미 아는 사실을 자꾸 말하니까… 또 그가 당장 할 수 없는 일을 하니까… 듣 기가 싫었다. 부대 안에서 하루의 일과를 끝마치고 퇴근하면 아내는 그 말을 했고 그는 그 말이 귀찮아 이맛살을 찌프렸다. 그러 면 아내는 며칠을 아무 말 않다가 며칠 치의 그 말을 독소가 36


섞인 불만으로 만들어 간직했다간 며칠 만에 한 번 토로했 다. 그러다가 차츰 아내는 그를 못난 놈으로 취급하기 시작 했다. 사내답지 못한 빙충맞은6) ‘하므렡’7)의 말예(末裔)만 도 못한 것으로 알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건 그런대로 아내 는 그가 가져오는 봉급으로 연명하고 생활하고 화장하기 때 문에 그에게 반역하지 않았다. 다만 임금에게 불만을 품은 별로 충성스럽지 못한 신하 정도의 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는 뜻밖에도 오래만에 옛날 친 구를 하나 만났다. 여태 군복을 입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자 기는 시골서 조그만 장사를 하나 시작했다고 그래 가끔 이 렇게 돌아다니기도 한다고 하면서 이게 몇 년 만이냔 말을 강조하며 대포라도 나누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그도 거기에는 동의였다. 그래 술집으로 가는 대신 집으 로 가자고 했다. “자네 우리 집사람 못 봤지? 그동안 결혼을 해서 새 둥우 리 같은 살림을 하나 마련했지. 우리 집으로 가세. 그래도 ‘뷰ᐨ티는 ’ 못 되지만 추물은 아니니 술맛 없어지지는 않아. 자, 가세.” 6) 빙충맞은: 똘똘하지 못하고 어리석으며 수줍음을 타는 데가 있는. 7) 하므렡: 햄릿(Hamlet).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의 주인 공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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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그들은 별로 술을 많이 먹지는 않았다. 정종 한 되 반 정도 마셨다. 그러면서 술이 엔간히 들어가니까 친구 는 자기 제대할 무렵의 고민을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체념한 이야기를 제법 조리 있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땅 위엔 차돌들이 따갑게 빛나는 한낮이었다. 그는 기를 쓰고 고개를 들었다. 뜨끔 힘줄이 땅기며 이미 부러진 왼팔 이 또 한 번 부러지는 듯이 아파왔다. 그는 죽을힘을 다하여 눈을 치켜뜨고 주위를 살폈다.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몇 시간 전의 격전지(激戰地)에 그는 누어 있었던 것이었다. 눈앞엔 여나믄 길의 절벽이 솟아 있었고 그 위는 적의 보루 가 있었던 곳이었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몇 발자욱 앞에 그의 권총이 나둥그러져 있었다. 더위에 시들어진 풀포기엔 먼지가 앉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근방엔 박격 포탄으로 파 진 홈도 없었다. 따가운 햇볕이 내리쪼일 뿐이었다. 그는 또 기를 쓰고 상반신을 일으키었다. 그리고 그의 뒤 를 살폈다. 아무것도 보일 리가 없었다. 아픈 왼팔이 집채 같은 무게로 그를 잡아끄는 바람에 그는 아! 하는 신음과 함 께 몸을 수그리는 찰나, 땅! 하는 총성과 함께 쀼웅 하고 총 탄이 그의 머리 위를 지나 뒤로 날아갔다. 뒤이어 몇 발의 총 성이 단발적으로 울리었다. 그는 펄걱 엎으러짐과 동시에 38


또 한 번 팔의 아픔에 무거운 신음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또 다시 정적이 계속되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적의 보 루에서 총탄이 날아간다! 그러면 뒤엔 적의 적, 즉 전우들이 있다. 피차 완강히 싸웠다. 앞에 보이는 고지를 탈환하는 데 다른 길이 있었다. 그러나 이쪽으로도 책략이 있었다. 그래 절벽으로부터 삼(三)백 미터밖에 되지 않는 개울뚝을 타고 와서 적의 무방비를 노리고 이 절벽으로 달겨들었다. 그러 나 아군은 불리했다. 적의 방어진은 뜻밖에도 강했다. 그리 고 아군의 퇴로는 막혔다. 적의 우익이 개울 하류 쪽에 있는 송림(松林)으로 이동하여 퇴로를 막았다. 개울 상류는 적의 발밑 절벽 밑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거기에 죽음이 길 을 막고 있었다. 나머지는 허허한 논밭이었다. 하류 송림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군의 주력 부대의 공격을 돕고자 그들 일개 중대는 적의 전투력의 분산을 꾀 하고서 이쪽을 때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력 부대 로부터의 통신이 끊겼다. 다만 요란한 총성만 들릴 뿐이었 다. 그러한 속에서 그들은 몇 시간을 싸웠다. 그러다가 소대 장이었던 그는 절망에 몸을 떨었다. 그때 중대장의 명령. 이 젠 하는 수 없다. 각개약진으로 절벽에 달라붙으라! 적의 총화를 피할 길이 없었다. 그러므로 잠간이나마 활 로를 찾을 안정된 시간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총탄을 피해 39 사각


야 했다. 적의 포탄에 자꾸 무너져 내리는 무력한 개울뚝을 믿고 붙어 있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앞으로! 앞으로! 절벽 밑은 안전했다. 사각(死角) 안이었다. 거기엔 적의 총탄이 올 수가 없었다. 절벽 위의 적의 총탄은 절벽 아래로 일직한 각도를 짓고 쏟아질 뿐 그 각도 안[內]까지는 올 수 없었다. 절벽이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절벽에 달라붙으 라. 수류탄의 위험은 우선 밀어두라. 앞으로 앞으로!… 억지 짓이었다. 그저 살아보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러다 가 그는 정신을 잃었다. 박격 포탄의 작열과 함께 어프러진 것만을 기억할 뿐이다. 그런데 이제 그의 눈앞엔 절벽이 있다. 그는 절벽과의 거 리를 목측해 본다. 현재의 그의 위치는 안전지대다. 사각을 긋는 선은 그의 머리 위를 지나서 그의 위로 뻗친다. 아군의 총탄이 있기 때문에 적도 역시 저 절벽 위 소북히 흙으로 쌓 아놓은 방탄제(堤) 위까지는 솟아나지 못한다. 그런데− 전 우들은? 미처 그다음 생각할 사이 없이 불쾌한 소리를 내며 포탄 이 그의 머리 위를 지나감과 동시에 몇 십 미터 뒤에서 굉장 한 소리를 내고 작열했다. 그와 동시에 다시 적의 일제 사격 이 시작되었다. 그에 따라서 그의 등 뒤에서도 요란한 총성 40


이 울리기 시작했다. 쁑! 쁑 쁑. 그의 머리 위로는 수없는 총 알들이 튀어 오고 튀어 가고 했다. 그는 혼자서 사각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총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 위로 튀어 갔다. 먼저 그는 그 자신의 안전에 안심했다. 아군이 몇 십 미터 후방 개울의 제방에 있는 한 적은 아군의 총탄이 긋는 최저위(最低位)의 선 위로 머리를 들 수는 없다. 그러므로 적이 쏘는 총탄의 최 저위의 선도 역시 그 이하로 내려올 수는 없다. 이게 바로 사 각(死角)이다. 그 선과 지면이 이루는 각도(角度) 안에서는 안전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한 팔 을 부상당한 채 그는 안전지대에 나둥그러져 정신을 잃고 있었고 이제 정신이 다시 들어 자신의 안전을 확인했다. 총탄은 그칠 줄 모르고 날았다. 연성 총탄이 대기를 뚫는 날카로운 소리가 그의 머리 위를 날았다. 그는 다시금 정신 을 가다듬고 주위를 살폈다. 좌측에 보이는 송림들은 잠잠 했다. 다만 절벽 위의 적과 개울뚝 뒤의 전우들 사이에만 치 열한 사격이 계속될 뿐이었다. 맹뚱한 기분이었다. 꿈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왼팔을 움직여 보았다. 찌르르 독한 아픔이 어깨를 타고 온몸을 울 렸다. 꿈은 아니었다. 그는 전우들을 생각했다. 중대장을 생각했다. 어떠한 곤 41 사각


경에 처해 있는지 몰랐다. 무엇 때문에 맹목적으로 한정이 있는 총알을 날려 보내고 있는지 몰랐다. 그는 우선 전우들 이 있는 데로 돌아가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 간 그게 지금 무슨 생각이냐고 또 하나의 외침이 마음속에 서 울려 나왔다. 거기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개울뚝 저 편에 있는 전우들은 개울뚝이란 방탄제(防彈堤)가 있지만 그 방탄제를 넘어가자면 그의 등에는 수없는 적의 총알이 달려들 것이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프지 않은 오 른팔에 뺨을 대었다. 땅 위엔 전쟁도 죽음도 아무것도 생각 지 않는 개미들이 소리 없는 행진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언제까지라니−여긴 언제까지나 있을 곳이 아니니 까 어서 나가야 했다. 어디로? 전우들한테로. 그러나 머리 위에서는 총알이 날으고 있었다. 그 총알을 뚫고 나가야만 했다. 그러자면 십중팔구로 보장된 죽음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위치는 안전한 위치다. 이 안전지대를 벗어나기 위 해서 죽음에 부닥드린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그러나 이 게 언제까지나 안전지대일 수가 없으니까 큰일이다. 그렇다 고 해서 전우들은 지금 사투하고 있는데 무슨 새로운 위험 이 닥칠 때까지 여기 이렇게 환한 태양 아래 자빠졌다가 나 중에 어슬렁어슬렁 움직인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적의 유탄 42


에나 맞아 개처럼 비명을 지르고 쓰러진다는 것은 추악하고 비겁한 짓이다. 사선을 돌파하자, 목숨은 이미 하늘에 맡긴 것이다. 사선을 돌파하자. 또 있으면 또 그러다가 죽으면 하 는 수 없는 것이고. 그는 고개를 들었다. 팔이 아팠다. 그러 나 그는 기를 쓰고 권총 밴드를 풀어 목에 걸고 거기 왼팔을 들어서 걸쳐놓았다. 그리고 앞으로 몇 발자욱쯤 기어 나가 서 권총을 집어 들었다. 총신은 불처럼 따가웠다. 자, 이제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머리 위에선 총알이 날으고 있었다. 저 총탄 구덩이에 들어간다? 그는 마 음 내키지 않는 한 발자욱을 내어디디었다. 그 순간 온몸의 신경이 쿵 울리면서 부러진 팔이 걷잡을 수 없이 아파왔다. 그는 얼떨결에 꾸그르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 채로 몇 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에 다시 마음속엔 아픔 이외의 공백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땅 위엔 개미들이 소리 없는 행진을 계 속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의 그 공백은 차츰 개미로 채워 지기 시작했다. 그는 가만히 손을 들어 행진하는 개미의 대 열 한가운데를 인지(人指)로 쿡 찔렀다. 개미가 한 마리 죽 었다. 뒷 놈이 그 다리를 물고 끌기 시작했다. 또 한 놈이 그 수염을 물고 끌기 시작했다. 다른 놈들은 계속해서 행진하 고 있었다. 그의 손톱으로 파진 죽엄의 계곡을 건너서 개미 43 사각


는 행진했다. 그는 또 한 번 손가락으로 개미를 죽였다. 개 미들은 조금도 소란스러움이 없이 죽은 개미를 끌고 갔고 다른 놈들은 계속해서 행진하고 있었다. 저렇게 값없는 죽음. 저렇게 무모한 행진. 저렇게 냉담한 삶. 그는 심장이 얼음처럼 차거워지는 것을 느끼었다. 그리 고 일순간에 저 대궁륭(大穹窿)8)의 정점에서 온 세계를 부 감하여 세계의 무의미한 의미를 깨달은 것 같은 번득임이 그의 마음을 지나갔다. 그는 일어섰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잊 고 걸음을 내어디디었다. 그의 앞엔 팔의 아픔도 총탄도 적 도 개울뚝도 없었다. 아물아물한 정신 속에 다만 개미의 행 진만이 사물거릴 뿐이었다. “그러나 난 살았지. 정신이 들고 보니 병원이야. 나중에 알고 보니까 먼저 쓸어졌던 자리에서 댓 발자욱쯤밖에 안 되는 곳에 쓰러져 있더래. 결국 내가 산 것은 나중에 지원군 이 오고 그래 다시 힘을 얻은 전우들의 결사적인 투쟁으로 고지를 점령했기 때문에 시체 아닌 내 몸둥이가 발견되었던 탓이지만…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불편한 팔이나마 가지고 장사를 하고… 밥을 먹고 살지만… 요는 그 ‘번득임이야 ’ .

8) 궁륭(穹窿): 한가운데는 높고 사방 둘레는 차차 낮은 하늘 형상(形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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