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오크뢰거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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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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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태양은 좁다란 도시 상공에 층층이 낀 구름 뒤에서 단지 우윳빛으로 희미하면서도 초라하게 빛나고 있었다. 합 각머리 지붕의 건물들이 늘어선 작은 골목길은 축축하게 젖 어 있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간간이 얼음도 눈 도 아닌 부드러운 싸라기눈 같은 것이 흩날리고 있었다. 학교 수업이 끝났다. 이제 막 수업에서 해방된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돌로 포장된 학교 앞마당으로, 그리고 격자 창 살이 쳐진 교문 바깥으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러고는 좌우로 흩어져서 서둘러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키가 큰 학생들은 점잖게 으스대며 책가방을 왼쪽 어깨 위 에 높이 추켜올려 메고, 오른팔을 마치 바람에 맞서 노 젓듯 이 흔들면서 점심 먹으러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반면 키가 작은 학생들은 신이 나서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는데, 그 바 람에 살얼음 흙탕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물개 가죽으로 된 책가방 안의 학용품들이 덜거덕거렸다. 그러나 보탄1) 모자 1) 보탄(Wotan): 북유럽신화의 오딘(Odin)에 해당하는 게르만신화의 신. 영 어 수요일 ‘Wednesday’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여기서 ‘보탄 모자’는 펠트 소재로, 챙이 넓고 처진 중절모자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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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쓰고 주피터 수염을 기른 채 똑바른 걸음걸이로 걸어오 는 주임교사 앞에서는 종종 모두가 다 공손한 눈빛으로 모 자를 벗고 인사했다. “이제야 오는 거니, 한스?” 하고 차도에서 오랫동안 기다 리고 있던 토니오 크뢰거가 말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친구에게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 친구는 다른 동료들과 이 야기를 주고받으며 교문을 나와 그들과 함께 막 그곳을 떠 나가 버리려고 하고 있었다…. “왜 그러는데?” 하고 그 친구 는 물으면서 토니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 참, 그렇 지! 그럼 조금 같이 걷기로 하자.” 토니오는 입을 다물었고, 두 눈은 흐려졌다. 오늘 오후에 둘이서 같이 잠시 산책을 하기로 했던 사실을 한스는 잊었 단 말인가? 그것이 이제야 비로소 생각났단 말인가? 토니오 자신은 그 약속을 한 이후 거의 잠시도 잊지 않고 산책 생각 에 즐거워하지 않았던가! “자 그럼, 다들 잘 가!” 하고 한스 한젠은 친구들에게 말 했다. “나는 크뢰거하고 산책 좀 할게.” ― 그러고 나서 그들 둘은 왼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다른 아이들은 오른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한스와 토니오는 방과 후에 산책할 시간이 있었는데, 이 는 그들 둘 다 4시가 되어서야 정찬(正餐)2)을 드는 여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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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집안의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둘 다 부친이 큰 상인이 었고 여러 개의 직함도 지닌 이 도시의 유력 인사였다. 한스 한젠의 집안은 이미 여러 세대 전부터 저 아래쪽 강가에 커 다란 목재 적재소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엄청나게 큰 기계톱들이 윙윙 쉭쉭 소리를 내면서 통나무들을 잘라내 고 있었다. 토니오는 크뢰거 영사(領事)의 아들이었다. 사 람들은 크뢰거 영사가 경영하는 상회의 굵고 시커먼 스탬프 가 찍힌 곡물 자루들이 마차에 실려 거리를 지나가는 광경 을 매일같이 목격하였다. 그리고 토니오 집안이 선조 때부터 살아오던 유서 깊은 대저택은 도시 전체에서 가장 훌륭한 집이었다…. 이 두 아 이들은 도시에 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인사를 하 느라고 끊임없이 모자를 벗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심지어 는 열네 살밖에 안 된 이 아이들이 어른들로부터 먼저 인사 를 받기도 하였다. 둘은 책가방을 메고 있었으며, 따뜻하고 좋은 옷차림이 었다. 한스는 짧은 해군 반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폭이 넓고 푸른 칼라가 어깨를 거쳐 등 너머까지 늘어진 옷이다. 그리

2) 정찬(正餐): 하루 중 주된 식사를 가리키는데, 독일에서는 주로 점심 식사 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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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토니오는 허리띠를 두른 회색의 싱글 외투를 입고 있었 다. 한스는 짧은 리본이 달린 덴마크식 선원 모자를 쓰고 있 었는데, 그 모자 밑으로는 옅은 금발의 머리카락 뭉치가 곱 슬곱슬 비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무척이나 귀엽고 잘생 긴 데다 어깨는 떡 벌어지고 허리는 날씬했으며, 양미간이 널찍하고 날카롭게 쏘아보는 강철색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 다. 반면 둥근 털모자를 쓰고 있는 토니오의 얼굴은 갈색으 로 아주 남국적(南國的)으로 생긴 날카로운 윤곽을 드러내 고 있었으며, 부드럽게 그늘진 검은 두 눈은 아주 무겁게 보 이는 눈꺼풀 아래에서 꿈꾸는 듯이 ― 그리고 약간 겁먹은 듯이 ― 바깥쪽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의 입과 턱은 유난 히 부드럽게 생겼다. 토니오는 아무렇게나 그저 되는 대로 걸어가고 있었지만, 한스는 검은 양말을 신은 날씬한 두 다 리로 아주 경쾌하고 정확하게 성큼성큼 걸었다…. 토니오는 말이 없었다. 그는 마음의 고통을 느끼고 있었 다. 다소 비스듬히 자라난 두 눈썹을 찌푸리고 휘파람이라 도 불듯이 입술을 둥글게 한 채 그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 고 먼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러한 자세와 얼굴 표정은 토 니오만의 독특한 것이었다. 갑자기 한스는 자기 팔을 토니오의 팔 밑에 끼워 넣으며 옆에서 토니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왜냐하면 한스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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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 걸음 걸어가는 동안 토니오는 아직 입 을 떼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상당히 누그러졌다. “정말이지 내가 약속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야, 토니오!” 한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발밑의 보도를 내려다보았다. “그 저 오늘 날씨가 너무 축축하고 바람이 부니까 아무 일도 될 것 같지 않았던 거야.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럼에도 네가 나를 기다려 줘서 참 잘된 일이라고 생각해. 난 네가 벌써 집으로 가 버렸겠지 하고 화가 나려던 참이었 어….” 이 말을 듣자 토니오의 마음은 환성을 지르며 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래, 그러면 우리 둑길을 걸어가 보자!” 하고 토니오는 감동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레방아 둑길과 홀스 텐 성문 쪽의 둑길을 걷자. 그리고 그렇게 해서 너의 집까지 데려다 줄게, 한스…. 집으로 돌아갈 때는 나 혼자겠지만 상 관없어. 다음번에는 네가 나를 데려다 주면 되니까.” 사실 토니오는 마음속으로 한스가 말한 것을 꼭 그렇다 고 믿지는 않았으며, 한스가 산책에 대해 고작해야 자기가 생각하는 것의 절반 정도로만 여긴다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토니오는 한스가 깜빡한 것을 뉘우치고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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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달래려 애쓴다는 점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더구나 토 니오는 화해를 하고자 하는 한스의 이런 노력을 물리칠 생 각이 조금도 없었다…. 문제는 토니오가 한스 한젠을 사랑하고 있었고, 한스로 인해서 이전부터 적지 않은 괴로움을 겪어 왔다는 사실이 다.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는 패배자이며 괴로움을 겪지 않 으면 안 된다 ― 이러한 단순하면서도 가혹한 교훈을 열네 살 난 토니오의 영혼은 이미 인생에서 배우고 있었다. 그리 고 그는 이러한 경험을 잘 간직하고 있다가, 말하자면 마음 속에 단단히 기록해 두어 거기에서 어느 정도 즐거움까지 느끼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자신이 그러한 경험에 자신의 행동을 맞추거나 그것에서 실질적인 이득을 끌어내는 일은 없었다. 또한 그는 학교에서 강요하 는 지식보다도 그러한 교훈이 훨씬 더 중요하며 흥미 있다 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렇다. 그는 고딕식 둥근 천장의 교 실에서 수업을 받는 중에도 대개 이렇게 통찰한 것을 속속 들이 따지고, 또 궁극에 이르기까지 샅샅이 생각해 보는 데 몰두하곤 했다. 이런 일에 몰두하다 보면 그는 커다란 만족 감을 느꼈는데, 그것은 그가 자기 방에서 바이올린(토니오 는 바이올린을 켤 줄 알았다!)을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자 기가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소리를 내어 저 아래쪽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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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해묵은 호두나무 가지 밑에서 춤을 추며 솟아오르고 있 는 분수 물줄기의 찰찰거리는 소리에다 화음을 넣어 줄 때 느끼는 만족감과 아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 분수, 해묵은 호두나무, 자신의 바이올린, 그리고 저 멀리 있는 바다, 즉 여름방학이 되면 찾아가 여름날의 꿈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던 발트해, 이런 것들이 그가 사랑하던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이런 것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이 러한 것들 사이에서 자신의 내면생활을 추구해 가고 있었 다. 이런 이름들은 시를 쓸 때에 사용해도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어서 실제로 토니오 크뢰거가 이따금 써내는 시에는 이런 이름들이 언제나 되풀이해서 울려 나오곤 했 다. 그는 자작시 노트를 한 권 가지고 있었는데, 이게 실수로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바람에 동급생이나 교사들로부터 별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들었다. 크뢰거 영사의 아들인 그로서 는 한편으로는 이런 일에 대해 기분이 상하는 것은 어리석 고 야비한 바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기분이 상했음을 보여 주는 것 대신 동급생이나 선생들을 멸시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그들의 저속한 생활습관을 못마땅하게 생각하 고 있었고, 그들 개개인의 약점을 유난히도 속속들이 꿰뚫 어 보고 있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시 쓰기는 방종한 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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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원래 옳지 못한 짓이라고 자신도 느끼고 있어서, 그것을 기이한 짓거리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어느 정도 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사실이 그로 하여금 시 쓰기를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토니오는 집에서는 빈둥거렸고, 수업 중에는 태만하고 정신이 산만했으며, 또한 선생님들에게 나쁜 평점을 받았기 때문에 항상 비참하기 짝이 없는 성적표를 집으로 가지고 왔다. 이에 대해, 생각에 잠긴 듯한 푸른 눈을 하고 항상 들 꽃 한 송이를 단춧구멍에 꽂고 다니는 키 크고 섬세한 옷차 림의 신사인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고 여간 걱정하는 것 이 아니었다. 하지만 토니오의 어머니, 검은 머리의 아름다 운 어머니, ‘콘수엘로’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어머니, 옛날 그 언젠가 아버지가 지도상으로 볼 때 아주 남쪽에 있는 나라 에서 데리고 왔기 때문에 이 도시의 다른 부인들과는 아주 딴판이었던 그 어머니에게는 성적표 같은 것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토니오는 피아노와 만돌린을 기막히게 잘 연주하는 검은 머리의 정열적인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리고 아들이 사람들 로부터 신통치 못한 평판을 듣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원망 하지 더욱 좋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아버지의 분노가 훨씬 더 위엄 있고 존경할 만한 것으로 느꼈고, 비록 야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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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더라도 마음속으로는 아버지가 옳다고 생각했으며, 오히 려 어머니의 명랑한 무관심을 다소 칠칠치 못하다고 생각했 다. 이따금 토니오는 이렇게 생각했다. ‘난 지금 이대로의 나로 살면 그만이야. 나를 어떻게 바꾸고 싶지도 않고, 또 바꿀 수도 없어. 태만하게 살고, 반항적이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 관심도 없는 일에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은 사실이야. 이 런 나를 진지하게 꾸짖고 벌주는 것은 최소한의 마땅한 노 릇이겠지. 어른들이 내게 입맞춤을 하거나 음악으로 나를 달래어 적당히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이겠지. 우리들은 어 쨌든 초록색 마차를 타고 유랑하는 집시 족속이 아니잖아. 예의 바른 사람들이고, 영사 크뢰거의 가족들이며, 크뢰거 가문의 일족이고…’ 또한 그는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도 많 았다. ‘대체 나는 왜 이렇게 유별나서 만사에 충돌하는 것일 까? 어째서 선생님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으며, 다른 아이들 사이에 있으면 왜 이렇게 낯선 이방인이 될까? 저 선량한 학 생들, 저 착실하고 평범한 아이들을 좀 보라지. 그들은 선생 님들을 우스꽝스럽게 생각지도 않고, 시도 쓰지 않으며, 누 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큰소리로 말할 수 있는 것만을 생각 할 뿐이야. 자기들이 아주 정상적이라 느끼며, 모든 세상사, 모든 세상 사람들과 화합할 수 있다고 느낄 것이 분명해! 그 건 정말 속 편한 일이겠지…. 그런데 대체 난 왜 이 모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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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앞으로 어쩌자고?’ 자신과 삶의 관계를 관찰하는 이런 방법과 버릇은 한스 한젠에 대한 토니오의 사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가 한스 한젠을 사랑한 까닭은 우선 한스가 잘생겼기 때문이었 으나, 또한 한스가 모든 점에서 자기 자신과는 정반대의 인 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한스 한젠은 우등생이었을 뿐 아니라 마치 영웅과도 같이 말을 타며 체조·수영까지 못하 는 것이 없어 모든 사람들한테서 인기를 누리는 유쾌하고 활달한 캐릭터였다. 선생님들은 거의 애정을 가지고 그를 귀여워했고, 그를 부를 때에는 성을 빼고 이름만 불렀으며, 온갖 방법으로 그를 잘 이끌어 주려고 했다. 친구들도 한스 의 호감을 사려고 열심이었고, 길거리에서 만나는 신사 숙 녀들도 그를 붙잡아 세우고는 그의 덴마크식 선원 모자 아 래로 삐져나온 연한 금발 머리카락을 만지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안녕, 한스 한젠? 참 머릿결도 곱기도 하구나! 지 금도 반에서 1등이지? 아빠 엄마께 안부 전해 주렴. 대견한 녀석….” 한스 한젠은 그런 아이였다. 토니오 크뢰거는 한스를 알 게 된 이래로 그를 볼 때마다 동경을 느꼈는데, 그것은 어린 가슴속에서 불타오르는 시기심 어린 동경이었다. ‘너처럼 그렇게 푸른 눈동자를 가졌으면, 또 너처럼 그렇게 온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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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 정상적이고 행복하게 어울려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토니오는 생각했다. ‘너는 언제나 단정하고 누 가 보아도 칭찬할 만한 일을 한다. 숙제가 끝나면 승마 교습 을 받거나 실톱을 가지고 작업을 하지. 심지어 방학이면 바 닷가에서도 노를 젓거나 돛배를 타거나 수영을 하느라 여념 이 없지. 반면 나는 빈둥거리며 멍하니 모래사장에 누워서 는 수면 위를 휙휙 스쳐 가며 신비스럽게 변화하는 자연의 무언극만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지. 네 눈이 그렇게 맑은 것 도 그 때문이겠지. 아, 나도 너처럼 될 수 있다면….’ 토니오는 한스 한젠처럼 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모 르긴 몰라도 진정으로 그처럼 되고 싶다는 소망은 결코 진 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토니오는 한스가 현재의 자 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것을 간절하게 열망했다. 그래 서 그는 자기 방식대로 한스의 사랑을 구하려고 손을 내밀 었는데, 찬찬히, 절실하게, 헌신적으로, 고통스러우면서도 우울함이 함께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우울함이란 그의 이채로운 외모에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급격한 열정보다도 한층 더 심각하고 불타오르는 그런 슬픔이었다. 이런 구애가 아주 헛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한스가 여하 튼 간에 토니오의 어떤 우월한 점, 즉 어려운 문제를 말로 쉽 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하고, 또 토니오가 자신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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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특별히 강렬하고도 부드러운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드러내 며 자기 쪽에서도 호의를 표함으로써 토니오에게 많은 행복 감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또 한스는 동시에 많은 고통을 안겨 주기도 했다. 즉 질투심의 고통, 실망의 고통, 그리고 정신적으로 함께하기를 바라는 노력을 허사로 만들 어 버리는 고통이었다. 왜냐하면 토니오는 한스 한젠의 생 활 방식을 진정으로 부러워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끊임없 이 한스를 자기 자신의 생활 방식으로 끌어당기고자 애썼 다. 그런 시도는 고작해야 순간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성질 의 것이고, 그것도 다만 겉으로만 성공한 것처럼 비쳤을 뿐 이었다…. “난 요즈음 놀랄 만한 책을 읽었어. 정말 굉장한 것이야” 라고 토니오는 말했다. 두 아이는 뮐렌 거리 있는 이베르젠 가게에서 10페니히를 주고 산 과일맛 사탕을 봉지에서 같이 꺼내 먹으면서 걸었다. “한스, 너도 꼭 읽어 봐. 실러의 ≪돈 카를로스≫라는 작품인데… 원한다면 빌려 줄게….” “아니, 괜찮아.” 한스 한젠이 대답했다. “그냥 둬. 토니오. 그런 책은 내겐 안 맞아. 난 말(馬)에 관한 책이나 볼래, 알 겠니? 그 책에는 멋진 사진들이 있어. 정말이야, 언제 한번 우리 집에 오면 보여 줄게. 고속으로 촬영한 스냅사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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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로 걷는 말, 질주하는 말, 도약하는 말을 다 볼 수 있어. 이런 것은 너무 빨리 움직이니까 맨눈으로는 볼 수 없잖아? 그런데 뛰는 말의 자세들을 볼 수 있단 말이야….” “뛰는 자세들을 다 볼 수 있다고?” 하고 토니오는 예의상 물어보았다. “그래, 그것 참 굉장하겠다. 하지만 ≪돈 카를 로스≫에 관해 말하자면, 그 책은 사람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야. 그 속에는 말이야, 보면 알겠지만, 너무도 아 름다운 대목이 있어. 쿵 하고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준단 말이야….” “쿵 하고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적이라고?” 한스 한센은 되물었다. “어째서?” “예를 들면 왕이 우는 장면이 있는데, 왕은 후작(侯爵)에 게 속아서 우는 것이지…. 그런데 사실 후작이 왕을 속인 건 단지 왕자를 위하는 마음에서였어, 알겠니? 말하자면 후작 은 왕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이지. 그런데 이제 왕이 울 었다는 소식이 밀실에서 편전의 신하들에게도 전해지는 거 야. ‘우셨다고?’, ‘전하께서?’ 이렇게 궁정의 모든 신하들은 깜짝 놀라고 당황해하고, 그 소식이 사람들의 가슴속 깊이 까지 파고들었어. 그게 말이지, 왕이 평소에는 지독하게 완 고하고 엄한 사람이었거든. 그렇지만 왕이 왜 울었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그래서 나는 실은 왕자와 후작의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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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운 마음을 합친 것보다도 왕이 훨씬 더 불쌍하다는 생 각이 들어. 왕은 늘 외롭고 아무에게서도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거든. 그래서 이제야 간신히 믿을 만한 사람을 하 나 발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배반을 하니 말이 야….” 한스 한젠은 옆에서 토니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얼 굴에 나타난 무엇인가가 한스로 하여금 이 화제에 마음이 끌리게 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한스는 갑자기 또다시 자기 팔을 토니오의 팔 밑에 끼우고 이렇게 물었기 때문이 었다. “토니오, 후작이 어떤 식으로 배반을 하는데?” 한스의 이런 반응에 토니오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응, 그것은 이래” 하고 그는 말하기 시작했다. “브라반 트3)나 플랑드르4)로 가는 편지들이 모두….” “저기 에르빈 이머탈이 오네.” 한스가 말했다. 토니오는 입을 다물었다. ‘저놈의 이머탈 녀석, 땅속으로 꺼져 없어졌으면 좋으련만!’ 하고 토니오는 생각했다. ‘왜 하 필 이럴 때 나타나서 우리를 방해해? 제발 저 녀석이 우리와

3) 브라반트(Brabant): 벨기에의 지명. 4) 플랑드르(Flandern): 북해 연안의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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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걸어가면서 산책길 내내 승마 이야기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토니오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에르빈 이 머탈도 승마를 배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은행장의 아들인 이머탈은 여기 근방 성문 밖에 살고 있었다. 구부러진 다리 와 뱁새눈을 한 그는 벌써 책가방을 집에 두고 홀가분하게 가로수 길을 따라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 이머탈?” 하고 한스가 말했다. “크뢰거와 산책을 좀 하는 중이야….” “난 시내로 가야 돼” 하고 이머탈이 말했다. “살 게 좀 있 어. 하지만 너희들과 같이 좀 걸을 수 있어…. 그거 과일 사 탕이야? 그래, 고마워. 잘 먹을게. 한스, 내일 또 교습이 있 는 거 알지?” ― 여기서 교습이란 승마 교습을 말하는 것이 었다. “신나는 일이지!” 하고 한스가 말했다. “요전번 연습에서 내가 최고 점수를 받아서 이번에 가죽 각반을 받게 됐잖 아….” “크뢰거, 넌 승마 교습 안 해?” 하고 이머탈이 물었다. 이 때 그의 두 눈은 마치 반짝이는 한 쌍의 가느다란 틈새 같았 다…. “응…” 토니오는 아주 애매한 어조로 대답했다. “크뢰거, 너도 해 봐.” 한스 한젠이 기다렸다는 듯 끼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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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말했다. “아버지께 말씀드려. 승마 교습 받도록 말이야.” “그래….” 토니오는 재빨리,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한순 간 그는 목구멍이 죄어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한 스가 이름 아닌 성(姓)을 불렀기 때문인데, 한스도 그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왜냐하면 금방 다음과 같이 변명하듯 말 했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크뢰거라고 부르는 것은 네 이름이 너무 이상 해서 그런 거야. 미안해. 하지만 네 이름은 정말 이상해. 토 니오… 도대체 무슨 이름이 그래? 그건 이름이 아니잖아. 물론 그게 네 탓은 아니지만!” “네 탓은 아니야. 네 이름이 외국 이름 같고 좀 유별나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주는 거지 뭐…” 하고 이머탈이 말했다. 마치 토니오를 달래려고 하는 듯한 태도였다. 토니오의 입이 실룩거렸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다음 과 같이 말했다. “그래, 바보 같은 이름이지. 정말이지 나도 차라리 하인리히라든지 빌헬름이라는 이름 같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하지만 내가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건 우리 외삼촌 중에 안토니오라는 분이 있는데 그 이름을 따서 내가 세례 를 받았기 때문이야. 우리 어머니는 저 먼 남쪽에서 오신 분 이거든….” 그러고 나서 토니오는 입을 다물었고, 다른 두 친구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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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승마용 가죽 제품들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내버려 두었 다. 한스는 이머탈의 팔짱까지 끼어 가며, ≪돈 카를로스≫ 로는 도저히 불러일으킬 수 없을 그런 엄청난 관심을 보이 면서 거침없이 줄줄 이야기를 쏟아 내었다. 이따금씩 토니 오는 울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올라 코끝이 찌릿함을 느꼈 다. 그는 또한 자꾸만 덜덜 떨리는 턱을 다스리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한스가 ‘토니오’란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 지만 그렇다고 어쩌겠는가? 그의 이름은 한스이고, 이머탈 의 이름은 에르빈이다. 좋다. 그 이름들은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흔한 이름이 아닌가. 그러나 ‘토니오’라면 어딘 지 이국적이고 유별난 이름이다. 그렇다. 그에게는 원하건 원하지 않건 모든 면에서 어딘지 유별난 데가 있었다. 그는 외로웠으며,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있었다. 비록 그가 초록색 마차를 타고 다니는 집시족이 아 니라 영사 크뢰거의 아들이고 크뢰거 가문 출신인데도 말이 다…. 그런데 한스는 단둘이 있을 때는 토니오라고 부르다 가도, 제3자가 끼어들면 어째서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일 까? 때때로 한스는 토니오와 가까이 지내며 그의 편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토니오, 후작이 어떤 식 으로 배반을 하는데?” 한스는 이렇게 물으면서 자기 팔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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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팔 밑에 끼워 넣지 않았던가? 그런데 잠시 후에 이머탈이 나타나자 ‘잘됐다’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를 저버 리고는, 까닭 없이 그의 그 특이한 이름을 들먹이며 비난했 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사실을 간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사실 한스 한젠은 그들이 단둘 이 있을 때면 그를 약간은 좋아했다. 그것은 토니오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제3자가 오면 한스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 기고 토니오를 희생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금 혼 자가 되었다. 그는 필립 왕을 떠올려 보았다. 배신을 당하고 울었던 그 왕 말이다…. “어이쿠, 큰일 났네!” 에르빈 이머탈이 말했다. “이제 정 말로 시내에 가야 해! 잘 가. 과일 사탕 잘 먹었어!”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길가에 있는 벤치 위로 뛰어오르더니 구 부정한 두 다리로 그 위를 따라 달음질쳐서 달려가 버렸다. “나는 이머탈이 좋아!” 한스가 힘주어 말했다. 그는 자기 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공표하고 마치 선심을 쓰듯 자 신의 감정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그런 제멋대로의 응석 받이 같은 못된 버릇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한스는 이왕 내 친 김에 계속해서 승마 교습 이야기를 했다. 어쨌든 한스 한 젠 가의 저택도 이제는 그리 멀지 않았다. 둑길을 따라 걷는 산책길은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두 아이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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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를 단단히 움켜쥐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융융 신음 소리 를 울리는 습한 강풍에 모자가 벗겨지지 않도록 고개를 숙 이고 걸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한스 한젠은 지껄여 댔고, 토 니오는 가끔 건성으로 ‘아 그래’, ‘맞아’ 하고 대꾸할 뿐이었 다. 한스가 이야기에 열중하면서 또다시 팔짱을 낀 것도 별 로 기쁘지 않았다. 그것은 그냥 겉치레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걷는 가운데 두 아이는 정거장에서 멀지 않은 곳 둑 아래의 풀밭을 벗어나 기차가 덜커덩거리며 성급하게 연 기를 뿜으며 칙칙폭폭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심심풀이 로 차량의 수를 세어 보았다. 마지막 칸 맨 뒷자리에 모피로 몸을 감싼 채 몸을 곧추세우고 앉아 있는 사나이에게 손을 흔들기도 했다. 그들은 보리수 광장 옆 대상(大商) 한젠 가 의 저택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한스는 정원으로 통하는 문짝에 매달려 경첩에서 삐그덕삐그덕 소리가 나도록 좌우 로 몸을 흔드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직접 해 보였다. 그 런 뒤에 한스는 작별 인사를 했다. “자, 이제는 들어가야 해” 하고 그가 말했다. “잘 가, 토니 오! 이다음에는 내가 너를 데려다 줄게, 정말이야, 믿어 줘!” “안녕, 한스!” 하고 토니오가 대답했다. “산책 잘했어.” 악수를 나누는 두 아이의 손은 축축했고, 정원 문을 잡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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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때문에 그 녹이 묻어났다. 그러나 한스가 토니오의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 한스의 귀여운 얼굴에는 무엇인가 후회하 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나도 다음번에는 ≪돈 카를로스≫를 읽어 보도록 할게!” 한스는 재빨리 말했다. “밀실에서 우는 왕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 이렇 게 말하고 나서 그는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앞마당을 지나 뛰어갔다. 그는 집안으로 사라지기 전에 다시 한 번 뒤를 돌 아보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토니오 크뢰거는 마음이 아주 상쾌해져서 뛸 듯이 가벼 운 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바람이 토니오의 등 뒤에서 밀 어 주기도 했지만 이게 결코 바람 덕분만은 아니었다. 한스 는 ≪돈 카를로스≫를 읽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 둘은 이머 탈이나 그 어떤 사람도 끼어들 수 없는 공통의 화제가 생긴 다! 그렇게 되면 우리 둘은 얼마나 서로 잘 이해하게 될 것인 가! 누가 알겠는가 ― 혹시 한스도 자기처럼 시를 끄적거리 게 될지 말이다…! 아니, 아니야, 토니오가 그것을 원치 않 아! 한스는 토니오처럼 되어서는 안 되며, 지금 이대로의 한 스로 있어야 해! 모두가 사랑하고, 토니오가 사랑하는 바로 그 명랑하고 씩씩한 한스 그대로 말이야! 그렇지만 한스가 ≪돈 카를로스≫를 읽는다고 해서 해로울 것은 없을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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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토니오는 유서 깊고 나지막한 성문을 지나 항구를 따 라 걸어가다가, 합각머리 모양의 지붕들이 쭉 늘어서 있는 그 가파르고 바람이 휘몰아치는 눅눅한 골목길을 걸어올라 부모님이 계신 자기 집으로 갔다. 그의 심장은 살아 있었다. 그 속에는 동경이 숨 쉬고 있었으며, 또한 우울한 선망과 아 주 작은 경멸 그리고 무척이나 순수한 행복감이 섞여 있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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