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정한모 시선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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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모 시선



≪카오스의 蛇足≫



오늘

밤새도록 어둠으로 씻기운 가슴에선 한 톨 眞珠알 같 은 빛이 눈을 뜬다

먼 곳에서부터 빛과 소리 속에 어둠을 거두면서 다가오 는 아침을 向하여 波長하는 나의 아침

새벽 종소리에도 소스라쳐 흔들리며 퍼져 가는 진주빛 나의 밝음

품 안에 잠든 아내도 멀리 밀리어 사라지고 귓전이나 머리속에 가까운 듯 아련한 방울 소리 참새 소리 맑은 아침의 音響 모두 다 밀고 가는 나는 다만 하나의 퍼져 가는 光圓

그 위에 어제와 같은 太陽이 떠오르고 어제와 같은 言語들이 그늘질 오늘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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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녹아드는 나의 睡眠은 오늘도 ˙ ˙ ˙ 를 펴 든다 하이얀 시이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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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1. 耳目口鼻 얼굴 뒤에 얼굴이 떠오르고 얼굴 옆에 얼굴이 겹친다

맞서기도 하고 비끼기도 하면서 흔하게 흘러가는 어둡 고 밝은 얼굴 밉고 고운 얼굴들

耳目口鼻로부터 턱이나 이마전 모두가 비슷비슷한 立 體들이 차지하는 微微한 空間의 差異가 저마다 저를 이

토록 强調할 수 있는 것일까

귀를 기우리고 있는 눈이라든가 눈으로 말하고 있는 조 용한 表情하며 때로는 怒한 砲口같이 불을 뿜는 激情의 얼굴

오랜 歲月 해와 달 精神과 生命의 빛과 그늘로 하여 닦 고 닦아 온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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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門이여

바라보면 무엇인가 끊임없이 피어 나오는 것이 있다 목숨이나 精神의 그 밑바닥 같은 곳으로부터 피어 나 오는 것 그것은 눈자위 가느다란 주름의 線을 그리기도 하 고 실바람같이 이는 듯 사라지는 明暗을 지으면서 나의 마음속 가득 차는 얼굴을 새긴다

얼굴은 그대로 內面일 수 있는 얼굴 앞에 아름다운 꽃 이 된다

그리하여 마음은 오직 하나의 눈이 되고 햇볕 따뜻이 멈추는 하얀 壁 같은 빛나는 地域을 이룬다

2. 목숨 죽음이 바다처럼 발밑에 내려다보이는 목숨의 終點에 누워서 무거운 어둠 속 멀리 한 줄기 별빛으로 玲瓏하는 밤의 窓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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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와 목숨과 사랑을 그렇게도 알뜰히 말해 주던

그 까아만 눈하며

거친 바람 속 水晶져 가는 대리석처럼

미운 것이 더 많은 이 世上에서 꿈과 미소와 달밤을 그처럼 淸楚히 거느리고 곱게 가슴 앓던 하아얀 얼굴

하늘과 星座와 영원 같은 것 바닷가 모래알 헤어 보는 마음으로 생각도 해 보면서 또한 이렇듯 목숨의 强靭함을 노래하면서 이름 지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이루어 가던 너의 聖殿

熱火같이 달아오르는 흥분의 절정

그런 어지러움 속에서 문득 머무는 內省의 고요한 一刻 파문처럼 퍼져 나갈 餘韻과 可能이 멈추는

이 생명의 核心일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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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라미 속에 자리하고 아늑히 웃고 있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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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의 意匠

나의 生活을 出入시킬 門도 나의 思念을 呼吸시킬 窓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나의 表象은 그리하여 내 굳은 肉體 속에 찹찹히 쌓인 결이 되었다

周圍엔 언제나 空虛만이 남아도 生命은 외롭지 않게 充滿하고

慾望은 한 번도

내 限界의 밖을 向한 일 없이 스스로의 다스림 속에 커 나온 忍耐는 偉大한 決意처럼 조용히 자리 잡는다

하늘과 바람은 내게 이르러 하나의 輪廓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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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運動은 여기에 와서 머문다

새들의 울음도 진달래 향기도 八月의 太陽도 새벽 별빛도

모두 다 자는 얼굴 위에 떠도는 그늘 같은 움직임에 지나지 않았다

거느리는 바람과 하늘의 寂寥 속 그러나 나도 모를 緩漫한 磨滅을 거쳐

먼 훗날

나의 解體가 골목길 어느 少女의 보드라운 손아귀에 쥐어지는 한 개 공깃돌일 그날에도 이 沈默의 姿勢는 끝내 나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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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머리에서

신작로 먼짓길 三百餘里 걸어와서 재 넘어 샛길 山길에 들어서니 人家도 行人도 우는 새도 하나 없이

우거진 들국화만이 가을 하늘 아래 아름다왔다

여기는 忠淸道 땅 이제 다 왔다

금 나간 양은 냄비며 불속에서 끌어낸 몇 가지 옷이며 어린것들 기저귀 등을 꾸려 넣은 보퉁이를 내려놓고 앉아서 아픈 다리 지친 마음을 쉬고 있는 고개 머리 점심 새때 기울어지는 햇살이 따스한 속에

앞서서 걸어가는 쌍동이 업은 어머니랑 진희랑 그 뒤를 칭얼대며 따라가는 진경이를 바라보면서 불쌍한 어머니는 우리가 생전 모시고 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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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희를 끝까지 우리가 가르치자고 철모르는 진경일랑 조금도 꾸짖지 말자고 기막히게 살려 온 쌍동이들이 나란히 걸을 때는 얼마나 이쁘겠느냐고

풀잎 뜯으며 조용조용히 이야기하는 먼지와 햇빛에 끄스르고 먹지 못해 야윈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다시는 당신에게 꾸지람도 조고만한 슬픔도 주지 말고 그저 모든 기쁨만을 나눠 가면서 꺼질 듯 사랑하며 살기로 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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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쌓이는 밤의 깊이에서

어둠이 쌓이는 밤의 깊이에서 서로의 가슴으로 불을 켜 놓고 微笑 같은 우리들의 촛불을 밝혀 놓고

촛불 같은 우리들의 미소를 지키면서 어둠에 밀려와 창밖에 소복히 밤은 쌓이고

어둠이 쌓이는 밤의 품 안에서 空白만이 남은 우리의 오늘들이 앉아서

서로의 공백을 공백으로 채워 주면서 손보다 눈이 더 많이 어루만져 주면서

사랑이란 눈언저리 가늘게 주름 짓는 明暗에서 퍼져 가는 것 이렇듯 허전한 가슴끼리 서로의 가슴 비벼 따스한 것 또는 잔허리 미끄러진 線에서부터 비롯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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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임을 입보다 몸으로 나누면서 餘感1)은 잔잔한 우물 또한 그 위에 떨어지는 은행잎 欲望은 갈기머리2) 귀뿌리에 치솟아 타오르는 불길이고

나뭇가지는 바람을 울린다

어둠이 쌓이는 밤의 높이에서 스스로 불태우는 아득한 星座

마음은 하나의 입에 모으고 잠들어 깔리는, 아슬한 地平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꿈을 이룬다

1) 여감: 유감(遺憾). 2) 갈기머리: 갈기의 북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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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속에서

그 豊饒한 계절의 遍歷에서 너는 돌아왔구나

가을과 여름과 봄 壯麗하던 하늘빛

이제 자랑스런 보람 이루어 하늘과 땅 사이 가득히 ˙ ˙ ˙ ˙ 처럼 쏟아지는 것이냐 祝祭의 코오러스

기다리던 날이 날마다 어제도 남겨 놓은 피곤한 가슴속 무수히 뚫린 虛妄한 벌집마다 네 순박한 體溫 포근히 자리하면 잃었던 빛갈 내게도 돌아와 환히 밝다

스쳐 가는 사람마다 이웃 같은데 떠나간 너도 돌아오는가 허무 위에 쌓이는 假象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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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간 타오르는 불길일지라도—

기쁨처럼 밝아 오는 내 가슴에 이제야 돌아오는 즐거움으로 달려오는 숨 막히도록 마구 달려오는 너를 여기 눈보라 속 傲然히3) 서서 달려와 안길 너를 기다리게 하여 다오

3) 오연히: 태도가 거만하거나 그렇게 보일 정도로 담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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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原

都市며 饒舌이며 고함들을 멀리 더욱 멀리 地平으로

밀어 가는 고요만이 和音하는 소리 없는 노래 속에 퍼져 나가는 허허한 들판

햇빛이 되고 달빛으로 빛나면서 모양과 빛갈과 이름 있 는 모든 것이 하나의 이름만을 이루어 가는 곳

그 많은 限界와 욕정의 눈들 위에 질겡이4) 범부채 가시덤불 꽃향기 벌레 소리 속 무성하던 꿈들 위에 받쳐 든 이 아름다운 單一 들이여

멀리 한 폭 고요한 餘白이기도 하면서 넘치고 펴져 드는 벅찬 氾濫 속에 나도 나의 이름과 빛갈을 잃어버린다

4) 질겡이: 질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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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얀 눈이 되고 눈에 덮인 들이 되고 햇빛으로 빛나 면서 모든 可能이 꽃이 피어나듯 마련될 숫눈5) 위 그려 놓 는 한 뼘 발자욱에서부터 비롯되는 이름들— 소나무 기러 기 강아지 잔디 풀 나비 찔레꽃 뜸북새6) 갈대밭 이런 이름 들로부터 電車 차타레이7) 레인보우 봉익동 明洞 와싱톤 싸롱 같은 이름에 이르기까지 이 피어나는 많은 이름과 소 리와 내음에 싸여 내게 되돌아오는 어쩔 수 없는 나의 이 름과 모양을 거느리고 寂寞할 수 없는 雪原에 내가 섰다

5) 숫눈: 눈이 와서 쌓인 상태 그대로의 깨끗한 눈. 6) 뜸북새: 뜸부기. 7) 차타레이: 채털리(Chatterley). 로런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 (Lady Chatterley≫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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氷花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너의 期待는 잔잔한 밤바다

나의 별들을 그만큼의 깊이로 흔들어 주면서 갈망은 圓을 향하여 부푸는 海面

그 頂點에서 바람이 일고 무너지며 말려 오르며 熱하는 波濤

입술 부딪치는 뜨거운 戰慄 속 꽃이 열리고 꽃은 이울고

다시 나의 별들이 저마다의 깊이에서 흔들어 주는 내 하늘 아래 잠드는 밤바다

그 明暗하는 起伏을 더듬으며 어둠 속 퍼져 가는 가늘고 고운 旋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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線은 마침내 유리窓에 얼어붙는 密語와 같은 윤곽에서 머물고

바람이었던 너와 나의 어둠이었던 오늘을 생명한 밤의 內面을 저렇듯 아름다운 꽃으로 피워 놓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네 보오얀 睡眠 위에 鍾이 울리고

얼으며 녹으며 떠오르는 창밖은 우리 것일 수 없는 훤한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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