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준 작품집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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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준 작품집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는 전 세계 모든 학문 분야 고전이 3000종 이상 출간됩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은 오리지널 고전에 대한 통찰의 책읽기입니다. 전문가가 원전에서 핵심 내용만 뽑아내는 발췌 방식입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클래식>은 고전의 완전한 번역입니다. 고전선집을읽고다음으로클래식을 읽고 마지막으로 원전을읽는점진적독서로 더욱 심오한 지식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 0547

최인준 작품집 최인준 지음 이훈 엮음

대한민국, 서울, 지식을만드는지식, 2010


편집자 일러두기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에서 출간하는 한국 근현대소 설 100종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공 동으로 기획했습니다.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 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 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습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 석을 덧붙였습니다. ∙이 책은 <암류(暗流)>(신동아, 1934. 9), <상투>(신동아, 1935. 5), <이른 봄>(신동아, 1936. 4), <춘잠(春蠶)>(조 선문학 속간, 1936. 6), <약질(弱質)>(조선문학 속간, 1936. 11), <호박>(농업조선, 1938. 1)을 저본으로 삼았습니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습니 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 용했습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 잡았습니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 춰 고쳤습니다. ∙주석은 현대에는 쓰지 않는생소한 단어, 현대의 독자들이 쉽게 뜻을 알기 어려운 한자어, 원전의 글씨가 잘 안 보여 엮은이가 추정한 글자, 사투리, 토속어, 북한어 등 설명이 필요한 경우 에 달았습니다. ∙뒤표지의 글은 엮은이가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핵심 문장을 직접 뽑아낸 것입니다. ∙표지에 사용한 색상은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을 위 해 개발한 고유 색상입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은 환경인증을 받았습니다. 표지와 본문에는 모두 친환경 재질을 사용했습니다.



차례

해설 ······················11 지은이에 대해 ··················19 암류(暗流) ····················21 상투 ······················85 이른 봄·····················113 춘잠(春蠶) ···················143 약질(弱質) ···················163 호박 ······················195

지은이 연보···················220 엮은이에 대해··················222


암류(暗流)1)

1) 이 책의 본문은 ≪한국 근대 단편소설 대계 28≫(이주형 외 편저, 태학사, 1988)에서 가져왔습니다.



一, 병든 어머니 새벽. 집신 신은 발목에 각반(脚絆)2)을 치고 목출모(目出帽)3) 를 목덜미까지 푹 눌러쓴 룡(龍)이가 토방을 나려 서며 방문 을 반쯤 열고. “어머니.” ― 불렀다. 컴컴한 알에목에 헌 누덕이로 얼골을 뒤집어쓰고 비스듬 이 누어 있는 어머니는 불으는 소리를 못 들엇는지 잠잣고 있다. 너덜너덜 떠러저 나간 누덕이 밑으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두 다리가 보기 싫게 들어났다. 언제나 싳어4) 보았는지 때가 끼인 오리발 같은 두 다리가 문 열어놓은 밖에서 들어 가는 찬바람에 후들후들 떨리었다. 룡이가 문을 닫고 또 한 번 불넜다. “어머니.” “으-”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방안에서 실오라기 같은 대답이

2) 각반(脚絆): 걸음을 걸을 때 발목 부분을 가뜬하게 하기 위하여 발목에서부 터 무릎 아래까지 돌려 감거나 싸는 띠. 3) 목출모(目出帽): 목출방한모, 눈만 내놓고 온 머리 부분을 감쌀 수 있게 털 실로 만든 방한모. 4) 싳어: 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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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왔다. “이제 읍에 갑니다.” “읍에-” 그리고 한참 있다가 다시 “이번 가거든 가치 오너라.” ― 하는 말이 들리였다. “정거장에도 나가보고-” “네-” 대답을 하고 마당으로 나와서 룡이가 김치 가쟁이5) 앞에 세워놓은 나무단을 지게에 질머젔다. 그리고 싸리문을 나서 느라니까 뒤및어6) ― “꼭 네 형과 가치와.” ― 하는 간엷은7) 어머니의 약간 떨리는 듯한 목소리가 급하게 따라 나왔다. 형 ― 서울 갓든 형이 나려온다고 한 편지가 온지도 멫 일 이 지나갔다. 그 편지가 온 후부터 병들어 누어 게시는 어머 니가 밤낮으로 형 ― 철(哲)이만 기대리였다. 야윈 얼골이 더 한층 초조하여젔다. 이번에는 정거장에 나가서 직히다 가8) 가치 오리라 ― 이런 생각을 하며 룡이가 걸어갔다.

5) 김치 가쟁이: ‘김칫독을 묻은 곳으로 ’ 짐작됨. 6) 뒤및어: 뒤미쳐. 7) 간엷은: 가냘픈. 8) 직히다가: 지키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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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새벽은 차다. 아직 해가 떠올으지 않었다. 마주 바라다 뵈이는 동녁이 겨우 붉으시레할 뿐이다. 바람이 휘−ㄱ 불어와서 닙 떠러 진 나무가지를 요란스럽게 잡아 흔들어 놓고는 룡의 뺨을 후 려갈긴다. 무명옷을 헷치고 겨드랑이로 파고든다. 룡이는 작심이9)를 팔장에 끼고 옹크리며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서 임순네 집 앞까지 왔다. 임순(任順)네 집은 울타리도 없다. 마당이 그대로 길이었 다. 룡이는 그냥 지게를 질머진 채 부억 앞으로 가서 기웃거 리었다. 임순이를 만나려는 것이다. 거적문 사이로 아궁지 의 불이 벍어케 타올으는 것이 얼른얼른 하였다. 그 불길에 ― 아궁지 앞에 쪽구리고 앉은 임순이가 얼골이 밝앴다. 내10)가 나서 그런지 연방 눈을 부비다가 ― 밖에서 인기척 이 나니까 부지갱이로 거죽문11)을 들친다. 거긔에 룡이가 웃 뚝 서 있는 것을 보고 “아이 난 누구라고.” ― 커다랗게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눈물이 글성글성한 눈을 행주치마로 싳었다. 그것이 마음에 꺼리는지 “매와서 원-”

9) 작심이: 작대기. 지겟작대기. 10) 내: 물건이 탈 때에 일어나는 부옇고 매운 기운. 11) 거죽문: 거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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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며 룡이를 처다보고 생끌 웃었 다. 룡이도 빙긋이 웃으며 말하였다. “어머니 약 좀 다려줘.” “응-” “그리고 죽도 따끈이 해서.” “걱정 말어요.” “그럼 난 갔다오마.” 룡이가 돌아섰다. 그 뒤를 바라보던 임순이가 무엇을 생 각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 “저어….” 하고 하기 어려운 말처럼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이번엔 형님도 오슈.” “음-” 앞으로 걸어가든 룡이는 뒤도 안 돌아보고 그렇다는 뜻으 로 고개만 끄덕이었다. “그럼 가치 오슈” ― 별 같은 임순의 눈이 무엇을 꿈꾸는 듯이 깜박이었다. 룡이는 읍에 가는 큰 길로 나섰다. 여기서 읍이 야즌12) 삼 십 리다. 정거장은 읍에서도 동쪽으로 십 리를 더 나가야 된 다. 경원선 중앙에 새로 발전하기 시작한 정거장이다. ― 룡

12) 야즌: 근(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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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읍으로 나무를 팔러 가는 길이다. 한 장또막13)에 두 번 씩은 의례히 나무를 짊어지고 읍으로 팔러간다. 그걸 팔어 가지고 어머니의 약과 좁쌀 되박이나 박꾸어 가지고 돌아오 는 것이었다. 룡이가 동리 밖 우물 곁을 지나고 왼쪽 산 모통이로 돌아 가서 아주 뵈이지 않을 때까지 임순이는 부지갱이를 한 손에 집고 그 쪽을 우둑허니 바라 보구 있었다. ― 젊은 사내와 처 녀 사이에 흔이 있는 것처럼 룡이와 임순이도 서로 생각하는 사이였다.

한 나절이 훨신 넘어서야 ― 임순이는 틈을 타서 룡이네 집으로 갈려고 나섰다. 문 밖을 막 나서니까 장죽을 입에 물 은 아버지 리 생원(李生員)이 “어딜 가.” 하고 불러 세웠다. “저어….” 임순이는 그만 말이 맥히였다. 룡이네 집에 간다고 해도 아버지는 물론 남으래지는 안치만 ― 그래도 나차린14) 처녀 가 아버지 앞에서 룡의 부탁을 받고 간다고 하기는 어쩐지 수집은 생각이 들었다.

13) 장(場)또막: 한 장날로부터 다음 장날 사이의 동안을 세는 단위. 14) 나차린: 나이가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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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 룡이네 집에 간다우.” “뭣하려!” “룡이가 읍에 가면서 그 어머니 약을 좀 다려달라구 그래 서-” “음-” 그제야 알어채렸다는 듯이 리 생원이 허연 수염을 쓰다듬 으며 고개를 끄덕이었다. 공연이 저고리 고름만 만지작거리 는 임순이를 만족한 듯이 바라보고 주름살 잡힌 얼골에 웃음 을 띠었다. 임순이는 리 생원의 외딸이다. 삼 년 전 그 어머니가 죽은 후로 임순이 하나를 믿고 늙는 터이라 리 생원은 임순의 장 래를 늘 걱정하였다. 임순이가 룡이와 그러치 않게 지내는 것을 몰으지 안는 리 생원은 언제나 두리가15) 살님사리를 하 나 하고 은근이 기대리었다. 아직 어덴지 애티는 있을망정 열여덟의 임순이는 자랄 대로 다 자랐다. 불숙 나온 앞가슴 이라든지 펑퍼짐한 궁뎅이라든지 금년부터 활작 피이는 동 그스름한 얼골이… 녀자로써의 성숙(成熟)을 넉넉히 증명 하였다. ‘인젠 시집 가게두 됫구나!’ ― 이러한 생각을 하며 리 생원이 담배를 푸욱푸욱 빨다 가

15) 두리가: 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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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가 어딀 가도 조심스럽게 단여. 사람은 외양이 발러 야16) 쓰는 법이야. 인제 시집두 가야 할텐데-” 하고 뚜엄뚜엄 이야기하며 양 미간에 약간 ‘위엄을 ’ 나타 내였다. “아이 아버지두-” 엉석부리듯이 임순이는 아버지를 악의(惡意) 없는 눈으 로 흘기며 홱 돌아서서 룡의 집으로 건너갔다. “저게 탈이야.” 임순의 뒷모양을 물끄럼이 바라보던 리 생원이 뒤통수를 치면서 고소(苦笑)하였다. 임순이가 룡이네 집에 와서 먼저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 엌이래야 ― 시골은 다 그러치만 실상 아무것도 없다. 솟 하 나, 돌상 우에 이 빠진 뚝사발17) 멫 개, 선반 우에 다리 불어 진 밥상 하나, 된장 그릇, 수가락 멫 개, 아궁지 앞에 화로와 약탕관 ― 이것이 룡의 집 살님사리 내용의 전부이었다. 임 순이는 화로에 불을 피워서 식컴언 약탕관을 올려 노아 가지 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룡이 어머니가 고개를 돌리며 “임순이냐.” 한마듸 하고 ― 거미줄 쓴 천정을 멀건히 바라보구 있다.

16) 발러야: 발라야. 17) 뚝사발: 뚝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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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장같이 핏기없는 얼골, 빠라먹다가 배앝은 멀구18)처럼 퍼래진 입술, 미친년처럼 어수선하게 푸러진 머리가락, 동굴 과 같은 눈 ― 그 눈은 여전이 천정만 바라보구 있다. “약 잡수서요.” 임순이가 약을 베 쪼각에 걸려서 뚝사발에 반쯤 담어 가 지고 룡이 어머니 입술 가에 흘려 너었다. 번듯이 누은 채 룡 이 어머니는 약을 꿀꺽꿀꺽 넘기며 이마쌀을 찝흐리었다. 입 밖으로 푸르죽죽한 약물이 흘렀다. 그것을 임순이가 얼른 행 주로 싳어 주었다. 룡의 어머니는 반신불수(半身不隨)다. 알어눟은지 했수 로 삼 년 ― 아무러커나 지리한 세월이였다. 그는 왼쪽을 전 부 못 썼다. 왼쪽의 신경 ― 그중에도 운동신경(運動神經) 이 마비되여서 감각(感覺)을 잃었다. 그래서 일어나 안찌도 못하고 식사는 물론 똥오줌까지 받어내였다. 그것을 룡이가 없는 사이에는 임순이가 와서 걷어 주었다. 룡이 어머니의 시중을 든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 니었다. 시중을 들 때마다 임순이는 가비여운 한숨을 지었 다. 자긔가 시집을 가면 ― 물론 룡에게로 온다. 룡이와 벌 서 굳게 언약까지 하였다. 그러나 룡이와 살게 되면 ― 자 긔는 역시 반신불수의 시어머니를 섬기여야 하고 가난한 살님에 쪼들이지 않으면 안 되나? ― 하는 커다란 불안이

18) 멀구: ‘머루의 ’ 방언(강원, 경상, 전라, 평안, 함경, 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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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단였다. 그러나 룡이를 생각하면 모든 불안이 어름 녹듯이 한꺼번 에 풀어젔다. 룡이와 살기 위해서는 병든 시어머니와 ‘가난’ 도 임순이에게는 아모런 장해가 되지 않었다.

저녁부터 잔뜩 찡그리고 있던 하날에서 후둑후둑 눈이 나 리기 시작하였다. 그 눈을 맞으며 밤이 깊어서야 룡이가 돌 아왔다. “인자 오우.” 그때까지 룡이 어머니 머리맡에서 기다리고 잇던 임순이 가 반갑게 일어나 맞었다. 그리고 부엌으로 나가서 자긔가 지여놓은 조죽 한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잡수.” “…” 룡이는 아모 말없이 죽 그릇을 들었다. 실상 말할 기운도 없었다. 하로의 지리한 보행(步行)이 그에게서 말할 기운까 지 없새버렸다. 룡이는 다만 배가 고품을 의식할 뿐이었다. 홀죽해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 무에든지 조왔다. 배가 잔뜩 불너서 뻥뻥 소리가 나도록 죽이든 밥이든 실컨 먹으려는 식 욕 ― 그 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식욕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뚝사발의 조 죽 한 그릇이 벌서 뎅그렇게 비였다. 개가 할튼 듯이 좁쌀 알 하나 안 붙은 비인 뚝사발에 ― 룡의 커다란 눈이 힘없 31 암류


이 떠러젔다. 그는 나무를 팔어 가지고 정거장으로 갔었다. 정거장에 서 암만 기다리여도 형이 오지 않었다. 점심도 굶고 저녁도 굶고―형이 오면 가치 국수나 한 그릇씩 먹으려든 것이 막차 가 지나가도 끝끝내 형이 안 오고 말었다. 그래서 밤이 깊어 서야 눈 오는 밤길로 터벅터벅 돌아온 것이다. 한참 후에 잠든 어머니가 가늘게 눈을 떴다. “네-” “네 형도-” “안 왔서요.” “뭐 안 왔서.” 어머니가 다시 눈을 감었다. 그 얼골에 실망의 빛이 그림 자처럼 슷처갔다. 그 다음 순간 서리빨 같은 노기(怒氣)가 무섭게 핑 돌았다. “그놈 어미를 속이는 놈.” ― 하며 미친 듯이 불으지젔다. 그것도 역시 순간이였다. “아하 철아 네가 뭇척 보구 싶구나.” 히미한 그 눈에 눈물 한 줄기가 말라붙은 뺨으로 쭈루루 흘려내렸다. 어머니는 잠시도 철이를 잊지 못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가질 수 있는 아들에 대한 노여움은 ― 사랑의 기 형적 표현(畸形的表現)이다. 그것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지 금 어머니의 머리는 극도로 혼란되였다. 철이 때문에 ― 혼 32


란되였다. 이러한 어머니 태도가 룡에게는 다시없는 불만이였다. ‘누구 때문에 집안이 이렇게 몰락되였는가? 누구 때문에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까지 병들었나? 누구 때문에-’ 모두가 형 ― 철이 때문이다. 형을 서울 보내고 공부시킨 다고 땅 섬직이나 있던 것을 팔어버린 때문이다. 자긔가 무식한 탓에 남에게도 공연히 없수힘을 받는다고 아들만은 어데까지든 공부시키겠다는 부모의 넘치는 열성 으로 ― 철이가 서울로 공부가기는 지금부터 륙 년 전이다. 철이가 공부를 맟우고 내려오면 집안이 크게 빛나리라는 부 모의 기대는 자못 컷다. 그러나 부모의 ‘기대는 ’ 이 년이 못 가서 무참하게 깨여젔다. 아들이 훌늉해가지고 내려오기 전 에 ― 먼저 집안이 몰락되고 말었다. 땅을 팔어버리고 그 땅 을 도루 소작하게 되면서부터 서울 간 철의 학비는커녕 그날 그날 생활에 허덕이게 되였다. 그 생활의 위협 앞에 ― 아버지가 제일 먼저 히생되였다. 어떻게 해서든 한번 기우러진 가운(家運)을 다시 회복하려 고 륙십이 가까운 아버지가 힘에 부치는 일을 밤낫으로 하며 애썼기 때문에 그만 지처서 죽고 말었다. 실상 아직도 이십 년을 더 살 수 있었든 것이다. 그 다음은 어머니었다. 아버지가 죽은 그 다음해 녀름 어 머니가 우연이 병들어서 마츰내 반신불수가 되였다. 그 ‘우 연을 ’ ‘우연이라고 ’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필연성을 ’ 가지였 33 암류


다. 너무 오금을 썼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마즈막으로 룡이 자신이 히생되었다. 보통학교를 중도에 서 퇴학하지 않으면 안 되였다. 그때 룡이가 가슴속에 그려 노았든 아름다운 ‘리상도 ’ 여지없이 깨여젔다. 때문에 형에 대한 증오는 ― 자신에 대한 현실에 대한 불만이 크면 클수 록 컷다. 철이는 아버지가 죽은 때도 오지 않었다. 어머니가 병들 어서 나려오라고 전보를 처도 오지 않었다. 어데서 어데로 떠돌아 단이엿는지도 알 수 없었다. ― 이러한 철이건만 어 머니는 하로라도 철이를 이저본 적이 없다. 철은 재간이 있 었다. 보통학교를 첫재로 졸업했다. 때문에 철이가 공부만 하면 장래 훌늉하게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하다못 해 면서기(面書記) 한 자리라도 ― 이러한 기대를 어머니는 지금도 내던지지 않는다. 내던지라는 것은 너무 악착한 짓이 다. 그것까지 내던지고 어머니는 살 수 없었다. 웨냐하면 ― 철이는 어머니의 전부이었기 때문에. 그리든 철에게서 얼마 전에 편지가 왔다. 편지는 간단하 였다. 서울이 잇기가 실증이 나서 따뜻한 고향 한가로운 전 원(田園)으로 돌아오겠다는 것이었다. “이애 룡아.” 묵상에 깊이 잠기였던 룡이를 어머니가 갑재기 불렀다. “어째 않 오니.” “…” 34


룡이는 재만 남은 화로를 끼고 잠잣코 있었다. 왜 안 오는 가? ― 그것은 자긔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보담도 지금 룡이 는 형에 대한 막연한 증오를 입술로 질근질근 깨물기에 애썼 다. “어째 안 와. 말을 하렴아.” “그걸 누가 알우.” 재처19) 뭇는 어머니 말에 핀잔을 주고 룡이가 벌떡 일어 났다.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임순이도 어떤 불안에 가 슴을 죄이며 룡이 뒤를 따라 나왔다.

어머니는 ‘과거를 ’ 가젔을 뿐이다. ‘과거의 기억이 ’ 어머니의 전부인 것이다. 어머니가 가지 고 있는 ‘과거의 기억’ 가운데 가장 뚜렸한 존재는 철이다. 철이가 어머니의 전부이라면 ― 임순이는 룡의 전부이었 다. 룡의 히망이요, 미래이었다. 룡이 가지는 미래의 히망 가 운데 임순이는 가장 큰 ― 아니 전부인 것이다. 그들의 현재는 절망적이다. 그 절망 속에서 ― 어머니는 ‘과거를 ’ 붓잡고 ‘과거의 기억을’ 들추어냄으로써 현재를 잊 으려고 하였다. ‘과거를 ’ 씹고 씹고 되씹고…. 그것은 ‘반추’ (反芻)의 생활이였다. 어머니와 반대로 룡이는 현재를 닞기 위하야 ‘미래를 ’ 그

19) 재처: 재우쳐. ‘재우치다는 ’ ‘빨리 몰아치거나 재촉하다라는 ’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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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보며 미소! 하였다. 임순이를 생각할 때 룡의 가슴은 언제 나 가뜩하였다. 가뜩한 가슴을 어루만지며 룡이가 캄캄한 밤 길로 턱없이 걸어갔다. “여보-” 뒤에서 임순이가 불러도 못 드른 체하고 마을 밖으로 멀 리 나갔다. 눈 나리는 밤 ― 눈을 맞으며 둘이가 믁믁히 걸어갔다. 마 을 밖을 훨신 나가서 포푸라나무 밑까지 와서야 발을 멈추었 다. 사내가 아모 말없이 여자를 글어안었다. 둘의 포옹을 저 주하는 것처럼 ‘밤의 공포가 ’ 그들 사이로 비첬다. 그럴수록 사내는 여자를 힘껏 힘껏 글어안었다. 둘의 사이를 파고드는 ‘밤의 공포를 ’ 완전히 모라내려는 것처럼 ― . 기다란 침묵이 흘러갔다. 그 침묵을 깨틀고 룡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언제나 살님을 해보우.” “글세요.” “너는 열여덟, 나는 스믈 하나.” “아직 멀었서요.” “흥, 색기 하나는 밋젔서.” “아이고 숭해.” 얼골을 살작! 붉히며 임순이가 룡의 엽구리를 꼬집었다. 황소와 같이 거츠른 정열이 룡의 입김을 통해서 임순이 얼골 위로 확! 확! 내품겼다. 한참 후에 룡이가 말하였다. 36


“설마 내년에야-” 그 말에 임순이가 정색하였다. “설마가 사람을 죽인다우.” “하긴 그래.” 룡이도 커다랗게 탄식하며 임순의 말을 긍정(肯定)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이는 서로 살기를 원하였다. 보통학교를 단일 쩍부터 남 보기에도 가까히 지냇섰다. 그리고 둘이가 같이 오년급20) 을 진급하든 해 여름에 ― 룡이는 아버지가 죽고 임순이는 어머니가 죽고 그래서 학교를 가치 퇴학하게 되고 그 때문에 불행함을 서로 위로하게 되고 또 그 때문에 서로 사랑을 속 삭이게 되였다. 사랑을 속삭인 지 삼 년 ― 올 가을에는 타조(打租)가 끝 나면21) 성례를 일울려 하였다. 그러나 봄의 ‘감음22)’으로 인 해서 타조의 결과가 엄청나게 줄어젔기 때문에 결혼이란 렴 두에도 낼 수가 없었다. 둘이는 오랬동안 나무 아래를 떠나지 않었다. ‘밤의 공포’ 가 구렝이처럼 열 겹 스므 겹 그들의 주위를 감겨 돌았다.

20) 오년급: 5학년. 21) 타조가 끝나면 : 가을걷이를 마쳐서 소작료를 내고 나면. 타조는 ‘조선시대 에, 수확량의 비율을 정해놓고 소작료를 거두어들이던 소작 제도를 말한다. 22) 감음: 가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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