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유럽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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Россия и Европа 러시아와 유럽


1. 역사ᐨ문화권의 성장과 발전 법칙

그대 마음속의 바다에서 일렁이는 파도 저편에는 대지가 있고, 그 위에서는 천상의 세계가 새로운 사상의 찬연한 광채를 발하나니…. −호먀코프1)

역사ᐨ문화권별 역사 현상의 분류를 통해서 내릴 수 있는 역사 발전 법칙 혹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법칙 1. 한 언어나 몇 개의 유사 언어를−특별한 언어학 적 연구가 없이도 그 유사성이 분명한−사용하는 종족 또 는 집단이 초기 형성 단계를 거쳐 고유의 민족정신을 토대 로 역사 발전을 이룩한다면, 이 종족과 집단은 독자적인 역

1) 알렉세이 스테파노비치 호먀코프(Алексей Степанович Хомяков, 1804∼ 1860): 러시아의 시인이자 언론인, 철학자, 슬라브주의의 토대를 놓은 종교 사 상가다. 페테르부르크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었다(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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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ᐨ문화권을 구성한다. 법칙 2. 역사ᐨ문화권 특유의 문명은 그 구성 민족들이 정치적 자립성을 확보한 후에 태동하고 성장한다. 법칙 3. 특정 역사ᐨ문화권의 문명적 기원은 다른 민족에 게 전이되지 않는다. 기존 문명이나 동시대 다른 문명이 어 느 정도 영향을 끼칠 수는 있으나 각 역사ᐨ문화권은 그 자 체의 문명을 생성한다. 법칙 4. 각 역사ᐨ문화권의 문명은 다양한 민족 구성원들 이 단일한 체계 안에 흡수되기보다는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연방이나 국가 연합과 같은 정치 체제를 형성할 때 다채로 운 발전의 전성기에 도달한다. 법칙 5. 역사ᐨ문화권의 발전은 성장 기간이 불분명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시기는 상대적으로 짧으며, 단 한 번 에 모든 생명력을 소진하는 다년생 과실수와 흡사하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법칙은 당연한 사실로 부가 설명을 요 하지 않는다. 전체 세계사는 열 개의 역사ᐨ문화권으로 구성 된다. 그중 셋은 셈족 혹은 셈 인종에 속하는데, 셈어 가운 데 세 언어−아카드어, 히브루어, 아랍어−를 구사하는 종 족이 독자 문화권을 구성했다. 아리아어족은 산스크리트 어, 이란어, 헬라어(고대 그리스어), 라틴어, 켈트어, 독일 어, 슬라브어 등 일곱 개의 주요 언어 군으로 나뉜다. 이 일 18


곱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 중 인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혹은 고대 이탈리아, 게르만 민족은 독자적 역사ᐨ문화권을 발전시켰고, 이 가운데 일부는 아직까지 존속한다. 반면, 켈 트 민족은 독립 문화권을 형성하지 못한 채 게르만ᐨ로마 역 사ᐨ문화권에 귀속되었다. 사회 발전 초기 단계에 정치적 자 립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민족성과 종교관, 예술관 으로 볼 때 켈트인들과 브리튼인들은 독자적 발전의 잠재력 을 갖고 있었고 지리적 여건도 좋았지만, 로마의 정복으로 이 모든 가능성은 짓밟히고 말았다. 물론 그리스와 같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문명이 정치 적 독립성을 상실한 후에도 일정 기간 더 존속하는 예도 있 다. 그러나 정치적 독립 없이 태동하거나 성장하는 문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예외가 없는 당연한 현상이다. 예속된 개인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자유가 없는 민족은 발전하지 못한다. 타자의 목적 성취를 위한 수단과 도구로 변화되어 자신의 목표에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 다. 개인이든 민족이든 초기 단계에서 예속되면, 독창성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고유의 언어가 있었지만 정치 적 독립을 상실했기 때문에 역사ᐨ문화권을 형성하지 못한 켈트인들은 첫 번째 법칙의 예외로 볼 수 있다. 셈족과 아리아족 외에도 함족 혹은 이집트족과 중국인 19


들은 자체의 역사ᐨ문화권을 형성했다. 그 밖의 민족들은 아 무리 막강했더라도 독립 문명을 생성하지 못했거나 켈트족 (핀족도 마찬가지)과 같이 다른 역사ᐨ문화권에 흡수되었 고, 또 어떤 경우에는(흑인, 몽골인, 투르크족들) 문화를 창 출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어서 원시 유목 생활에서 벗 어나지 못했다. 이 민족들은 인류 역사에 동참하지 못한 채, 인류학의 연구 대상이 되거나 역사를 파괴하는 수준까지만 성장했을 뿐이다. 역사ᐨ문화권에 관한 세 번째 법칙은 더 자세히 고찰하 고, 설명할 필요가 있다. 고대 문화권−이집트, 중국, 인도, 이란, 아시리아와 바빌론−에 관한 자료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은 비판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이 주장의 타당성을 뒷받침한다. 이집트 민 족을 제외하고 이집트 문화를 수용한 사례는 없다. 인도 문 명은 산스크리트어군의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으로 국한되 어 있다. 페니키아인들과 카르타고인들이 고대 셈 문화권 에 속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페니키아인들의 뿌리 가 바빌론인들과 같았고, 카르타고가 페니키아의 식민지였 기 때문이다. 반면, 카르타고의 문명은 누미디아인들이나 기타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중국 문 명은 중국과 일본에 퍼져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초기에 중 20


국에서 건너간 유민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유대인들은 이 웃 민족들뿐 아니라 동시대에 공존했던 어떤 민족들에게도 문화를 전파하지 않았다. 그리스에 관한 정보는 한결 풍부하다. 그리스 문명은 위 대했으나 다른 민족들에게 적극적으로 헬레니즘을 전파시 킬 만큼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상황은 그리 스에서 유래했거나 민족 형성 초기 단계에 그리스화된 마케 도니아인들이 그리스 문화를 수용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면서 달라졌다. 헬레니즘의 대변자인 알렉산더는 동 방을 정복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 문명을 확산시켰다. 그리 하여 이 문명이 BC 4세기까지는 인류 전체의 문명이었다는 견해가 오늘날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다. 알렉산더가 그리스 문명 전파라는 고결하고도 인문적인 목적을 가지고 정복을 감행했던 탓에 그는 관대한 평가를 받으며 인류의 영웅 반열에 오른다. 그러나 군사 원정이 일 시적이나마 성공을 거두었다면, 문명 전파의 야심은 훨씬 실현하기 어려운 것으로 드러났다. 알렉산더 제국의 동부 에서는 70∼80년 후 파르티아인2)들과 스키타이인들이 페

2) BC 238년부터 226년까지 현재 이란 북동쪽에 위치했으며, 이란을 비롯한 중동 전역에서 세력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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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시아 문명을 재건했고, 새롭게 건설된 파르티아와 사사 니드 제국3)이 그 문명을 이어받았다. 반면 유프라테스 강 서안에서는 그리스 문화의 수용이 훨씬 수월했던 것으로 보 인다. 그리스 출신 통치자들은 시리아와 소아시아를 지배 했고, 궁중과 수도, 대도시에서는 그리스의 풍습과 유행이 퍼져나갔다. 그리스 출신의 조각가, 건축가, 금 세공업자 등 은 이 지역을 무대로 왕성하게 활발했고, 작품을 팔아 이윤 을 얻었다. 현재 프랑스 유명 브랜드들이 러시아에서 그러 한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가장 여건이 좋았던 곳은 이집 트였다. 알렉산드리아에는 도서관, 박물관, 대학이 건설되 고, 철학과 자연과학이 꽃을 피웠다. 그러나 철학자들과 과 학자들은 누구였으며, 어떤 언어로 작업을 했는가? 그들은 모두 그리스인들이었고, 그리스어로 활동을 했다. 사실 그 리스 문화는 이집트에 득이 된 것도, 손해를 끼친 것도 없 다. 학문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의 식민지였 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4)는 학문 발전을 위하여 그리스 3) 224∼651년 사이 현재 이란 지역에 형성되었던 제국. 페르시아가 이슬람 을 받아들이기 전의 마지막 제국으로서 비잔틴 제국과 더불어 서아시아와 유 럽의 양대 강국이었다. 4) (원주)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 왕조는 BC 305년부터 BC 30년까지 고대 이집트를 다스린 왕조다. 알렉산더 제국이 멸망한 이후부터 BC 30년까 지 이집트에 존속했으며, 클레오파트라 여왕의 자살 이후 이집트는 로마에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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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을 아낌없이 후원했고, 그에 따라 그리스 전역의 학 자들이 이곳으로 유입되었다. 해체와 분열을 거듭하는 혼 란의 시기에 고향에 남아 자비로 연구를 하기보다 풍족한 지원을 선호한 학자들은 한결 풍요로운 연구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그리스 학문 부흥에 지대한 공헌을 한 프톨레마 이오스 왕조의 지원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학문은 그리스 문명을 이집트와 동방에 조금도 전파하지 못 했다. 오늘날 영국인들이 콜카타에서 창립한 학회들은 왕 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유익한 결과를 이끌어내긴 하지만, 유럽 문명이 인도에 전해진 것은 아니다. 문명의 전파란, 한 민족이 다른 문명의 모든 요소(종교, 일상 생활, 사회, 정치, 학문, 예술)를 완전히 수용하고, 그에 통달하며, 문명을 전 하는 민족의 정신을 이어받고, 그 민족과 동등한 수준까지 성장하여 경쟁자가 되며, 동일 노선을 지속한다는 것을 뜻 하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헬레니즘 전파는 전혀 이 같은 결과에 도달하지 못했다. 사실 그리스인들은 서구에서 더 행복하 지 않았던가? 시칠리아5)와 남이탈리아에서의 그리스 문화 속되었다. 5) BC 4∼BC 3세기 지중해 서부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기 전의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의 식민지였다. 그리스는 BC 8∼BC 7세기에 남이탈리아와 시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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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프랭클린6)이 로크나 뉴턴 같은 영국인인 것처럼, 피타고라스와 아르키메데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그리스인이 아니었던가? 정복지인 동방에 그리스 문화를 전달하지는 못했지만, 그 실패는 그 리스를 정복했던 로마인들에게 문명을 전파한 것으로 상쇄 되지 않았던가? 물론 이 과정에서 라틴 민족주의자들의 저 항이 따르긴 했지만 말이다. 만약 로마의 독자적 성장을 촉 진하는 환경이 조성되었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누 구도 단정하기 어렵다. 카토7)는 옳았다. 그의 정당은 독자 적 발전을 진정한, 즉 유일하게 가능한 진보로 보았다. 카토 는 이질적인 그리스 문화의 수용이 해롭거나, 설령 해가 되 지는 않더라도 그리스 문화의 침투가 로마 사회에서 어떤

아를 식민지화하면서 시라쿠사와 나폴리 같은 여러 도시의 토대를 놓았다. 6) 미국의 ‘창건자’ 중 한 사람인 벤저민 프랭클린은 북아메리카를 영국에서 독립시키기보다는 대영제국의 자치주로 설정하는 방안을 고심했다. 거의 평 생 동안 그는 미국인들을 영국 시민이라 불렀다. 7) 마르쿠스 카토(Marcus Porcius Cato, BC 234∼BC 149): 로마의 정치가, 군 인. 손자와 구별하기 위해 대(大)카토(Cato the elder)라고 부른다. 헬레니즘 문화가 단순하고 전통적인 로마 문화에 해를 끼친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 문 화의 수용을 경계했다. BC 184년에 감찰관으로 재직하면서 ‘새로운 악과의 ’ 전쟁을 선포했는데, ‘새로운 악이란 ’ 모든 비로마적인 것, 로마 외부에서 차용 한 것들을 의미했다. 카토의 당은 고대의 풍습과 ‘아버지 세대의 도덕의 ’ 부활 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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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도 맺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옳았다. 로마 인들은 로마인다웠을 때 뛰어났다. 그리스인들은 기질적으 로나 일상 생활에서도 사치와 우아, 쾌락을 추구했지만, 특 유의 미감으로 절제할 줄 알았으며, 모든 것에 중용과 조화 의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로마인들에게서 이 모든 것은 전 례 없는 방탕함으로 변질되었다. 과학과 철학은 완전한 불 모지였다. 물론 알렉산드리아 이외의 도시에서 학문은 어 느 정도 발전했지만, 그 역시 그리스인들의 공적이었다. 로 마는 그리스적 사유와 형이상학을 모방했으나, 그것이 라 틴족의 본성이 아니었던 듯 어떤 성과도 얻지 못했다. 물론 고대 라틴족들이 과학적 탐구 정신을 완전히 결여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이탈리아ᐨ에트루리아 문명 초기의 소수 유적 으로 판단하건대 에트루리아인8)들은 자연 관찰에 뛰어났 고, 피뢰침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도 있다. 새들의 비행이나 동물의 내장에 대한 관찰 기록도 남아 있다. 다만 그것은 국 가와 개인의 운명을 예측하기 위한 종교적 목적에서 촉발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부류의 학문은 그리스 시대, 특히 아리 스토텔레스의 생리학 및 생물학 연구로 발전했고, 점성술 과 연금술은 천문학과 화학으로 성장했다. 만약 에트루리

8) (원주) BC 600여 년경 중부 이탈리아에 거주했던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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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들의 후손들이 이 방향을 지속했더라면, 로마의 과학 이 그만큼 보잘것없고 무용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로마 의 조형 미술은 그리스를 모범으로 삼았으나 억지 모방 뒤 에는 에트루리아 문화 고유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희곡과 서사시 분야에서 라틴 문명은 원본에 훨씬 못 미치는 아류 작만을 후대에 물려주었다. 작품의 내용은 독창적이지 못 했고, 다만 형식미만이 두드러질 따름이었다. 즉 문명 전파 가 시도되기는 했으나, 그것은 불가능했고 성과가 없었다. 반면 로마 고유의 원리를 독자적으로 드러낸 영역은 전혀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로마는 민족 국가 체제의 원칙을 신 봉했고, 기존의 어떤 정치 구조보다 상대적으로 강력한 체 제를 확립했다. 관습에 불과했던 로마 시민 사회의 원칙들 은 법으로 체계화됨으로써 법학의 토대를 놓았고, 전 세계 의 법조인들을 놀라게 하는 시민법의 모범이 되었다. 로마 인들이 아치와 둥근 지붕을 대담하게 사용했던 독창적인 콜 로세움과 신전은 그리스 최고의 예술 작품에 필적한다. 마 지막으로, 호라티우스를 포함한 로마의 시인들은 당대의 현실을 서정시, 송시, 풍자 작품에 그려냄으로써 시의 영역 을 넓혔다. 역사학 역시 국가의 현실을 반영함으로써 그 반 경을 확대했다. 타키투스9)는 투키디데스10)의 모방자가 아 니라 진정한 동료로써 어깨를 나란히 한다. 26


로마인들은 세계, 정확하게는 지중해와 대서양 연안을 정복하면서 피정복민들에게 로마 문명을 강요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선행 사례와 매한가지였다. 로마인들은 피정복 지 문화의 잠재력을 파괴하고, 로마의 삶과 관습을 이어받 는 식민 도시를 건설했으나11) 자기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 (갈리아,12) 이베리아,13) 일리리아,14) 누미디아15) 등)들이 앞장서서 로마의 외형과 정신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지는 못

9)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 56∼117): 고대 로마의 역사가. 10) 투키디데스(Thucydides, BC 465?∼BC 400?):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역 사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썼다. 11) (원주) 예를 들어 갈리아족의 문화.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기≫에서 드 루이다 사제들이 켈트족의 지배 계급이라고 기록했다. 12) 갈리아(Gallia 혹은 Gaul): 원주민은 켈트족이며, 갈리아라는 이름은 ‘켈 타이(Celtae)를 라틴어로 옮긴 것. 로마 제국 멸망 전까지 현재의 프랑스, 벨기 에, 스위스 서부, 라인강 서쪽의 독일을 포함하는 지방을 지배했다. BC 58년 부터 BC 51년까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 지역을 평정했으며, 1세기에 갈리 아 나르보넨시스, 아퀴타니아, 갈리아 루구두넨시스, 벨기카, 고지 게르마니 아의 다섯 로마 속주로 나뉘었다. 13) 이베리아(Iberia): 서기 6세기경부터 이베리아 반도(유럽 남서쪽 끝에 있 는 반도)에 거주하던 민족. 고대 그리스인, 로마인과 비슷한 민족 중 하나. 14) 일리리아(Illyria): 오늘날 발칸 반도에 해당하며, 고대 그리스의 영향권 아 래 있던 지역. 15) 누미디아(Numidia): 현재 알제리와 대체로 일치하며, 로마의 속주였던 고 대 북아프리카의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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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몇 세기에 걸친 로마의 지배와 로마 문명의 확산 결과 독자적 문화 발전의 싹은 짓밟혔다. 로마 본토를 벗어난 곳 에서 소수의 학자와 예술가와 작가들이 활동하긴 했지만, 그들은 로마 식민주의자들의 후손이거나 라틴화한 상류 계 급이었으며, 현지 대중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 했고, 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로마 문화가 자유로운 문명 교류를 촉진하는 대신 복종을 강요하고, 피 정복민의 정치 독립과 자립을 억눌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주장은 사실이나 여기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게르만족 중 고트족은 문화적 재능이 뛰어났던 민족 중 하나였다. 그들은 이탈리아를 침입해서 로마 제국을 무너 뜨리고, 강력한 왕국을 건설했다. 통치자였던 테오도리크 대왕16)은 어떤 지배자들보다도 지혜로웠고, 선의가 있었 다. 그는 정복자와 피정복자를 연합하여, 고트족들에게 로 마 문명을 이식한다는, 대단히 고결하고 자비로운 목표를 지향했다. 그러나 고트인들은 로마 문명에 집착한 결과 그 문명의 후광에 눌려 고유의 민족 문화를 발전시키지 못했 다. 또한 로마 문화에 통달하지 못했으면서도, 민족정신과

16) (원주) 오스트르고트의 지도자. 493년 이탈리아를 정복하고 라벤나를 수 도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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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야만은 300여 년 이상 유럽에 짙은 어둠을 드리웠다. 그 기간 동안 유럽의 역사ᐨ문화권은 근본적으로 재충전할 수 있었고, 이미 오래전 사라져 직접 접촉하기 어려웠던 문명의 혜택을 부담 없이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유대인의 위대한 입법자17)는 테오도리크 대왕보다 역사 발전의 법칙을 훨씬 잘 이해한 듯하다. 비록 거칠고 야 만적이기는 했지만 독자적 발전의 씨앗을 품은 유대인이 주 변 민족들(문화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과 접촉하지 말 것 을 명령한 이유는 타 민족의 관습과 도덕을 차용하여 고유 성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고트족의 예는 한 역사ᐨ문화권의 민족적 기원(독자적으로 발전할 경 우 가장 풍요로운 결실을 가져다주는)이 왜곡되고 파괴될 수는 있을지언정, 다른 역사ᐨ문화권의 원칙으로 대체될 수 는 없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민족 자체의 멸망, 즉 자립성이 있는 역사의 주체가 다른 민족의 구성원으로 편입됨을 뜻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한 역사ᐨ문화권의 역사적 활동 및 성과는 동시 대나 후대의 다른 문화권에 전혀 소용이 없는가? 마치 중국 17) (원주) 성경에 따르면 신은 유태 민족의 지도자인 모세에게 이스라엘인들 을 다스릴 수 있는 법과 종교적 원칙들을 위임했다. 모세 치하에서 유태인과 타민족의 긴밀한 접촉은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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