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흥섭 작품집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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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흥섭 작품집


一 산! 산! 산! 산 밑에 우뚝 솟은 별장. 별장 앞에 달[月] 잠긴 호 수. 호수를 막은 높은 방축. 방축 밑에 조곰 떠러저 꿈을거리 는 게딱지 떼 같은 조고마한 마을. 밭과 논 사이를 뚫어 달빛 싫고 구비구비 흐르는 맑은 시내. 시꺼먼 거인같이 큰 솔밭이 꽉 드러찬 나즈막한 산을 하이얗게 테두리한 S형의 신작로. 무섭게도 고요한 이 마을의 어렴풋한 정서는 꿈에 보는 활동사진 같었다. 일곱 별이 까막까막 조을고 있다. 버레 소리 멀니서 그쳤 다. 고요한 순간은 게속되였다.

***

해소가 일어나기 전의 엄숙한 바다처럼 죽은 듯한 이 마 을엔 별안간에 큰 사건이 생겻다. 우뚝 솟은 별장에서 하늘 을 찌를 듯한 사나운 불길이 일어났다. 불길은 호수물을 샛빨간 피빛처럼 이글이글 끄리며 산떰 이라도 태워 삼킬 것처럼 무서운 아가리를 벌리였다. “불이야! 불이야!” 별장직이 영감이 마을로 뛰어다니며 목이 찌저지도록 고 함을 처도 사람 하나 뛰여나오지 안었다. 워낙 밤이 깊었으니까 잠들이 곤히 들어서 그럴 듯도 하 29 흘러간 마을


거니와 홍염 속에 총소리 같은 기와장 튀는 소리를 듯고서 도 내여다보지 안는 것으로 보아 이 마을 사람들은 자긔들 의 계획적 방화나 아닌가 하야 세상 사람에게 의심받을 일 이나 아닐가? 사나운 불길은 조곰도 용서 없었다. 삼십 평 긔지의 아람드리 기동과 덩실한1) 이층 란간은 두 시간 동안도 못 되여 참담하게도 불 속에 꺽구러저 재가 되였다.

二 불 속에 타버린 별장은 백만장자 최병식의 향락장이였다. 남조선에서도 색향2)으로 이름난 진주에다 제삼 주택을 두고 거기에서 십 리쯤 떠러진 아담스런 산간에다 지어놓은 것이 바로 이 별장이였다. 최병식의 향락사업은 기생첩 학생첩을 얻어 주택을 넷식 다섯식 두는 것과 별장을 여긔저긔 세우는 것뿐만은 물론 아니였다. 꽃과 새와 나비의 봄에는 제일 주택인 서울과 제이 주택

1) 덩실한: ‘덩실하다는 ’ ‘건물 따위가 웅장하고 시원스럽게 높다는 ’ 뜻. 2) 색향(色鄕): ‘미인이 많이 나는 고을’ 또는 ‘기생이 많이 나는 고을이라는 ’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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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평양에서 거들거리고 여름은 전혀 석왕사나 원산에서 피 서를 하고 가을이면 금강산의 폭포와 단풍을 맛보다가 차차 찬바람이 불면 훨신 남쪽인 따뜻한 온천을 찾어오는 게 근 래 그의 년중행사의 대부분이였다. 그는 이제 오십이 둘을 넘은 인생의 만년에 이르렀으면 서도 전용의3)를 네댓식 두어 불노초 불사약을 애써 구하였 다. 가진 보약과 가진 선약4)은 최의 곁을 떠나지 않었다. 그 래 그럼인지 삼사십의 장년처럼 젊어 보이였다. 그의 곁엔 게집이 언제든지 딿었다. 계집이 떠나서는 견딀 수 없는 색 마를 만들고도 남었다. 그의 가는 곳마다 그의 앉는 곳마다 게집은 딿었다. 향락 과 환락은 딿어다녓다. 세계 일주는 못했어도 일본을 거쳐 미국까지는 갓다 왔고 만주를 지나 북경 상해 방면도 휘 둘러왔으니 그만하면 넉넉 한 대장부요 훌륭한 명사라고 그는 스스로 만족하여 왔다. 그의 오십 년 생일 축하연이 서울서 버러젔을 때 그는 지 방 명기로 평양의 R이라는 기생과 진주의 H라는 기생을 지 휘5) 주어 등대시켰다.6) R과 H는 최의 안경 속에 기여들게

3) 전용의(專用醫): 주치의. 4) 선약: 갖은 보약과 갖은 선약. 5) 지휘(指揮/指麾): 손님이 요릿집을 예약하면서, 기생을 불러오도록 지시하 는 일을 속되게 이르는 말. 6) 등대시켰다: ‘등대하다는 ’ ‘미리 준비하고 기다리다라는 ’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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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여 그는 먼저 R을, 다음에는 H를 첩으로 맞었다. H를 세 째 첩으로 맞이한 지 석 달이 지난 작년 봄 어느 날 밤 최와 H를 싫은 자동차가 달 밝은 남강 언덕을 천천히 드라이부할 때 별안간 괴상한 사나히가 나타나서 자동차를 위협하고 최 와 H에게 가해하려 하였다. 괴상한 사나히는 복면을 하고 한 손에 날카로운 단도를 들었다. 최는 현금을 탈탈 터러 벌벌 떨며 내여주었으나 괴상한 사나히는 돈뭉치로 최와 H의 얼골을 따렸을 따름이다. 그때 에 저편에서 자동차가 달려오게 되여 괴상한 사나히는 번개 같이 숲풀 속으로 숲풀 속으로 사라저버렸다. H만은 그 괴상한 사나히가 누구였든 것을 잘 알 수 있었 으나 그는 죽어도 입을 열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H는 밤마다 복면한 괴상한 사나히가 칼을 들고 나타나 “이년아! 이놈아! 응…” 하고 사랑을 저주하는 꿈을 꾸었다. 그의 고통은 컷다. 그의 극도로 공포에 휩쌓인 감정은 기 여히 밤으로 단잠을 못 자게 하였다. 원래 감정적인 H는 신경이 점점 쇠약하여졌다. 그는 긔 여히 극도 신경쇠약에까지 이르게 되였다. 최는 전용의의 시키는 대로 산수 맑은 곳에다 별장을 짛 고서 H를 정양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야 그는 진주와의 사이에 자동차 교통이 편리한 것 과 자긔의 산판이 있다는 것과 멀니 지리산이 바라다보이는 한가하고 아담스런 경치와 남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제법 맑 32


고 넓은 시내가 그의 늙어가는 마음에 들게 되어 진주에서 십 리가 될낙말낙한 P라는 마을에 별장을 짛기에 착수하였었다.

三 날마다 수백 명의 노동자는 별장 터를 중심으로 뫃여들 어서 일들을 하였다. 최의 계획은 컸다. 별장 앞에는 반다시 호수가 있어야 하 고 호수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고 섬 우에다가는 팔각 초당 을 날러갈 듯이 짛고 그 전후좌우로는 향나무 단풍나무 다 박솔들을 심ㅅ고 괴상야릇한 돌멩이를 진열해야 한다는 그 의 동양화적 취미는 수백 명의 노동자를 시켜 일변 방축을 쌓고 흘르는 시내물을 끊어 방축 안에 끌어넣기로 하였다. 그들은 자긔들과는 아모 관계없는 별장과 방축이건만 애 써 나무를 깎고 터를 다지고 땅을 파고 방축을 쌓었다. 최가 별장을 짛는 데 대하야 모든 사람들은 아모 불평이 없는 것 같었다. 그는 복 많은 사람이니까… 백만장자이니 까… 의례히 그러려니… 하는 미적지근한 감격이 가슴에 물결첬을 뿐이다. 그러나 여긔에다 방축을 쌓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도 없 지 않었다. 그것은 바로 방축 밑에 자긔 마을이 있는 이 동리 사람들이였다. 33 흘러간 마을


만일 홍수가 저서 방축이 터지는 날이면 삼십여 호의 이 마을의 생명이 위태하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젊은 사나히들은 처음부터 극력 반대하였다. “누구든지 방축 쌓는 데 품 팔면 다리를 분질른다….” 이런 선언을 하고 팔을 것고 나슨 사나히가 있으니 그는 본래 성질이 울악불악하고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있을 때면 의례히 자긔가 앞장을 스는 고 서방이였다. 고 서방은 사오 년 전에 어듸서 이 마을로 떠들어 온 사람 이다. 그는 머리를 깎고 대판7)엔가 가서 공장일꾼 노릇도 해 보았고 하관8)이나부산에서 지게품파리도 해본사나히였다. 그는 작년 초봄부터 갑작이 무었을 결심한 듯이 이 마을 에 처박히여 진주밖게는 더 멀니 나가지 않었다. 그리다가 그는 작년 첫녀름에 최부호의 자동차에 폭행했 다는 혐의로 경찰의 손에 체포된 열두 사람 중의 하나가 되 여 석 달 만에야 증거 불충분으로 방면된 일도 있었다. 고 서방은 거리로 뛰어다니며 힘차게 외첫다. “사람들아! 한 부자의 별장을 짛기 위하야 우리 이백여 명의 생명이 위태한 짓들을 하고 말 텐가?” 그의 외치는 힘은 긔여히 품파리 터에서 이 마을 사람들 을 빼아서 오고야 말었다. 그러나 최부호는 순사를 시켜 십

7) 대판(大阪): ‘오사카를 ’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것. 8) 하관(下關): ‘시모노세키를 ’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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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나 떠러진 다른 마을의 사람들과 읍 사람들을 불러다가 더한층 굉장히 일을 시작하였다. 고 서방은 생각든 끝에 자긔 마을의 사활 문제를 등에 지 고 여러 친구를 모아 군청으로 뭉치여 갓다. 그래서 군수 앞 에서 여러 가지 조건을 들어 방축을 못 쌓게 하여달나는 간 절한 진정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진정은 실패하고 말었 다. 고 서방은 주먹을 붉근 쥐였다. “암! 그렇지! 별수가 무었 있나! 흥! 보자! 끝을 보자!”

四 아조 여름이 되였다. 산과 들에 록음이 욱어젓다. 높이 한 길이 넘고 길이 백여 간이 훨신 넘는 굉장한 방축 은 새벽붙어 저녁때까지의 수백 명 노동자들의 백날이 넘는 힘으로야 겨우 쌓이고 말었다. 그러나 별장 건축은 아직도 끝을 못 맞었다. 옆으로 흘르 는 시내ㅅ물을 끈어들이기 때문에 방축 안엔 날마다 날마다 물줄기가 모여들었다. 물이 차차 깊어간 뒤에 최는 남강에 매여두었든 그의 뽀ᐨ 드9)를 갖어다 띄웠다.

9) 뽀ᐨ드: 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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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물속에 고기를 집어넣고 아츰저녁이면 배를 타고 앉어서 고기 색기와 작란을 하는 것이 유일한 소일이였다. 날마다 자동차가 별장 앞까지 오고가고 야단을 부렸다. 고 서방을 비롯한 이 마을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 속에서 아츰저녁을 맞었다. 래일을 바라고 오늘을 사는 이 마을 사람들의 실낱끝 같 은 ‘삶의 ’ 애착은 날마다 날마다 산으로 들로 지게를 지워 내 쫓았다. 뜨거운 해ㅅ빛에 그들의 얼골과 살은 몹시도 탓다. 그들은 살려고 살려고 애써 헤매여도 게딱지 같은 오막 사리를 면치 못하며 보리밥 된장덩이로도 배를 못 채운다. 저녁노을이 살어지고 별들이 번득번득 날 때라야 피곤에 시달린 다리들을 끄을고 오막사리를 찾어든다. 극장 활동사진 음악 무도 강연회 전람회가 이 마을 사람 들과는 멀리 떠러진 딴 세상에 있다. 자동차 전차 긔선이며 라듸오 전신 전화 오색전등의 아 긔자긔한 현대 문명은 이 마을 사람들과는 아모 관게없는 딴 세상에만 있다. 담배 연긔에 어린 침침한 등잔불을 둘러쌓고 화투나 투 전으로 노름을 하는 것이 이 사람들에게는 큰 위안거리였다. 그들에게는 달과 솔과 새와 꽃을 그린 울긋붉읏한 화투 짝이 유일한 훼화10)다. 뫃여 앉어 장에 갓다 온 이야기 나무 팔다 뺨 맞었다는 억울한 이야기 세상사리 한탄이 유일한 36


강연회다. 상사뒤여 산타령 아리랑타령이 각금 흥을 돋우는 그들의 음악이다. 충렬전 추월색 춘향전이 그들에겐 밥과 같은 예술의 전 부다. 강렬한 음향, 화려한 색채의 라열, 직선과 곡선, 곡선과 직선의 표현파의 그림 같은 도회정서가 이 마을의 상투장이 들에게는 아모런 관게도 없다.

五 녀름의 해볓은 쨍쨍 쪼였다. 조곰식 흘르든 시내ㅅ물도 이제는 바닥에 째작째작11) 말렀다. 별장 앞 호수는 날마다 뜨거운 볕에 끓었다. 죄 없는 고기 새끼들이 하이얀 배ㅅ댁 이를 하늘로 처돌고 여긔여긔 떠 있고 길가에 나무와 풀들 은 끌는 물에 삶어낸 것처럼 시들시들 생긔를 잃었다. 가물음은 심하였다. 한 달 전에 비 맛을 본 모ㅅ자리판은 밧삭12) 복가대여13) 석냥알을 대기만 하여도 타버릴 것 같 었다.

10) 훼화: 회화(繪畵). 11) 째작째작: 자작자작. 액체가 점점 잦아들어 적은 모양. 12) 밧삭: 바싹. 13) 복가대여: 볶아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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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한 점만 한구석에서 떠돌고 바람 끝이 조곰만 나 무닢을 흔들어도 이 마을 사람들은 손벽을 치고 기뻐하였 다. 그러나 하늘은 한 달을 넘도록 비를 안 주어 죄 없는 이 백성을 절망과 불안 속으로 잡어 넣고 말었다. 최부호도 비를 은근이 기다렸다. 수만 정보14)의 대지주인 그는 별장 앞 호수에 물이 가득히 고이기를 간절이 바랬다. 백 도15)가 넘는 지독한 더위가 사흘 동안이나 계속되는 어느 날 저녁때였다. 하늘은 갑작이 시커먼 장막 속에 파뭋 이고 말었다. 이윽고 대초알16) 같은 비방울이 떠러지드니 얼마가 못 되여 창대 같은 비ㅅ줄기가 죽죽 나려 쏟아젔다. 비는 그날 밤에도 꼭 그대로 쏟아젔다. 번개가 번쩍번쩍 뇌성이 우르르 하늘이 묺어지는 것 같은 한껏 긴장된 위험 한 공긔 속에도 이 마을 사람들은 논ㅅ고17)를 보느라고 잠 한숨들을 못 이루웠다. 비는 그 이튼날 저녁때까지도 쉬지 않고 쏟아젔다. 북 덕18) 황토물은 시내가 좁게 차며 밀며 흘러갓다. 비는 쉬지 않고 퍼부었다. 방축에 물은 작고19) 붓기 시작하였다.

14) 정보(町步): 땅 넓이의 단위. 정(町)으로 끝나고 우수리가 없을 때 쓴다. 1 정보는 3000평으로 약 9917.4㎡에 해당한다. 15) 백도: 화씨 100도를 말한다. 섭씨 약 36.2도. 16) 대초알: 대추알. ‘대초는 ’ 대추의 옛말. 17) 논ㅅ고: 논꼬. 논의 물꼬. 18) 북덕: 붉덩물. 붉은 황토가 섞여 탁하게 흐르는 큰물. 19) 작고: 자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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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동안을 쉴 새 없이 퍼붓는 비는 나흘째 밤에는 더욱 심했다. 창ㅅ대 같은 비ㅅ줄기 캄캄한 깊은 밤중− 천병만 마가 내달리는 것 같은 물 흐르는 소리− 번적이는 번개− 우르르 하다가는 어느 구석에서 딱−ㄱ하는 강렬한 음향− 장엄하고 무시무시한 자연의 폭위, 그 속에 이 마을 사람들 은 쥐 죽은 듯이 엎듸였었다. 비는 새벽에 닭이 울 때까지도 그치지 않었다. “방축이 터지지나 않을가?” 고 서방은 모기 빈대 벼록이 우글우글 끌는 갈자리20) 방에서 벌떡 이러나며 혼자 중얼거 렸다. 그는 무었을 생각한 것처럼 캄캄한 골목으로 비ㅅ줄기 를 뚜다려 맞이며 다름질첬다. 이윽고 그는 허둥지둥 뛰여 돌아오며 고함질렀다. “사람들아! 이러나라! 방축이 터지겠다−” 비ㅅ소리에 석긴 그의 고함은 어렴풋이 이 마을에 물결 첬다. 그는 구장네 집에 가서 징을 들고 나와 우ㅇ… 우ㅇ… 울렸다. 남녀노소 이백여 명은 쏟아지는 비ㅅ줄기를 뚜다려 맞 이며 캄캄한 골목에서 솟단지 농짝 보통이들을 저내였다.21)

20) 갈자리: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 삿자리. 21) 저내였다: 져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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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ㅅ줄기는 여전이 이 어둠 속을 나려 퍼부었다. “사람들아 어서 가자! 산으로 산으로. 어름어름 하다가 는 물속에 파뭋인다. …” 고 서방이 이백여 명을 다리고 뒤ㅅ산으로 피란했을 때 는 벌서 방축 위로 황토물이 악아리를 벌리고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별장 앞 호수가 방축을 작고 넘으며 농짝 같은 시내ㅅ물 은 방천을 헐고 논두렁을 부시고 이 마을을 향하야 사자 같 은 아가리를 벌리는 것을 그들은 희미한 새벽에야 비로소 알게 되였다. 물이 넘어 흙을 깍거나리든 방축은 한가운데가 터−ㄱ 하고 갈러지고야 말었다. 그 순간이다. 산뗌이 같은 물걸은 게딱지 같은 집들을 한숨에 네 개나 쓰러트리였다. “아이고 어떡하나! 집이 떠나가네… 아… 이… 고…” 여 인네들은 모다 복장을 치며 울었다. 아이들도 모다 따라 울 었다. 비는 작고 퍼부엇다. 번개가 연방 번득이고 뇌성이 하늘을 쪼개는 겄 같었다. 탁류는 조곰도 사정없었다. 새벽이 훨신 밝었을 때에야 떠나려간 집이며 쓰러진 집 이며 탁류가 방 안까지 싳어간 집이며 울타리가 부서저서 떠나려간 것이며 모자리판과 뾰속어리든 밧곡식의 훑어 씻 어간 것들의 참담한 관경이 고 서방을 비롯한 젊은 친구들 의 가슴에다 불을 붖었다. 40


이 마을 사람들이 더한층 놀낸 것은 갈자리 밑에 품 팔어 번 돈 사십 전을 가질러 갓든 어떤 늙은 할머니가 미처 나오 기도 전에 방축이 터저서 탁류 속에 무참히도 흘러 나려갓 다는 것이다. 숲 속 높은 별장은 털끝두 깟닥없었다. 덩그렇게 위엄을 빼고 흘러간 마을의 참경을 비웃는 겄 같었다.

六 찌프트르하든 날세22)가 사흘이 지낸 뒤에야 확 터젓다. 최부호는 흘러간 이 마을 사람들에게 대하야 털끝만 한 동 정도 없었다. 방축이 터지고 난 뒤에 그는 얼른거리지도 안었다. 다만 뚱뚱보 별장직이 령감이 별장을 지키고 있었다. 흘러간 집터와 쓸어진 집터에다 말둑을 치고 거적으로 하늘을 가린 이 마을 사람들은 속절없는 새거지가 되였다. 떼거지가 되었다. 여인네들은 어린것들을 앞세우고 박아지 를 들고 나섰다. 사나히들은 모기에게 지독히 뜻기고 나서 그래도 새벽부 터 먼 마을로 품 팔러 단였다.

22) 날세: ‘날씨의 ’ 방언(평남, 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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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류 속에 떠나려간 모ㅅ자리판과 방축, 논두렁, 밭두렁, 방천이 묺어서23) 흙 속에 파무처 바린 모ㅅ자리판들은 흉 년을 똑똑히 말하고도 남었다. 고 서방은 여러 가지로 생각든 끝에 친구 몇몇을 다리고 구주(九州)에 도라가서 석탄이라도 파볼가 했다. 그리하야 주재소에 려행 허가를 원해보았으나 냉정한 태도로 거절당 했다. 녀편네들은 십 리나 되는 읍으로 일거리를 차저 헤매였 다. 그러나 일거리는 없었다. 그들은 산비ㅅ탈과 밧두렁에 서 풀뿌리를 캐고 나무껍질을 벗기였다. 사나히들은 먼 마을로 초벌 김매기와 보리타작을 하러 단이였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목숨만 살어 나려왔다.

七 터젓든 방축이 감짝같이 다시 쌓이고 호수에 새파란 하 늘이 꺽글로 비쳤을 때는 발서 추석을 앞둔 가을이었다. 높직한 별장에서는 날마다 검은고24) 가야금이, 가늘고 높은 게집의 목소리 속에 섞이여 이 마을 공기를 흔드렀다.

23) 묺어서: 무너져서. 24) 검은고: 거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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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ㅅ빛 안개가 자욱이 끼고 풀 끝에 이슬이 아롱아롱하 는 아츰 고 서방은 콩밭 모통이에서 곰방대를 빨다가 한 포 기에 열 개도 못 열은 콩 포기에서 시선을 피하였다. 그의 시 선은 다시 패기 시작한 나락논으로 옮기였다. “흥! 흉년이다. 방축이 터저… 마을이 떠나려가고… 제…길헐 이놈의 것…” 고 서방은 본능적으로 주먹이 쥐여 젔다. 그는 밤마다 사랑방에 젊은 친구들과 뫃여서 이야기하든 모−든 것들을 한 번 되푸리하였다. 그는 갑작이 일종의 쾌 감과 승리감을 느끼면서 한 번 더 부르짖었다. “그렇다! 내게는 큰 힘이 있다. 우리에겐 큰 힘이 있다….”

***

추석날이 왔다 ― 최부호의 추석 노리는 별장 락성식 겸 굉장이 버러젔다. 자동차가 아츰붙어 이 별장까지 몇 번이나 오고 갓는지 는 신작로에 이러난 몬지만 보고도 넉넉히 헤아릴 수 있었다. 별장 마당에 만국긔가 펄렁거리고 장구 소리 노래 소리 굉장이 났을 때엔 아이들은 모다 몰려가서 구경하였다. 그 러나 얼마 못 되어 다시 쫓기여 왔다. ‘추석’, ‘명절!’ 이상야릇한 이 명사가 가진 봉건적 관습은 고 서방을 비롯한 젊은 사람들의 땀에 저린 삼베등거리와 43 흘러간 마을


꾹꾹 찔르는 홁잠뱅이를 벗기고 새로 빤 무명 중의적삼을 잎이였다. 컬컬한 탁백이25) 한 잔에 짭짤한 명태쪽을 씹는 맛이란 오락과 향락에 주린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둘도 없는 위안 꺼리였다. 점심때가 지낸 뒤부터 별장의 유흥은 훨신 가경으로 드 러갓다. 호리호리한 게집의 날신날신한 허리를 기름진 양돼지 같 은 사나히들이 얼싸안ㅅ고 벌늠벌늠 춤추는 꼴은 이 마을의 녀인들을 한껏 놀내게 하고도 남었다. 환락의 붉은 노을을 보낸 별장은 다시 은빛 같은 보름달 을 맞었다. 고 서방과 젊은 사람들은 오늘이야말로 마음이 이상하게 도 흥분되였다. 자동차가 또 왔다 ― 한참에 네 대가 꼬리를 물고 소리소 리 높이 질르며 별장 앞에다 여러 게집과 양복 입은 사나히 들을 토했다. 그중에는 소위 관청 ‘나아리 양반들도 ’ 만이 있 었다. 달빛 잠긴 호수에 뽀ᐨ드 노리가 시작되였다. 고 서방과 젊은 사람들은 주막으로 밀렷다. 주막의 탁백이는 이 사람 들을 더욱 흥분하게 하였다. 한 잔 술에 껍대기만 취한 이 사

25) 탁백이: 탁배기. ‘막걸리의 ’ 방언(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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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들은 징, 꽹매기,26) 북, 장구를 울려 온 마을을 요란스럽 게 했다. “쿵매캥 쿵매캥 쿵쿵 쿵매캥” 이런 느린 가락에서 “캥매 캥매 캥매 캐갱. 캥매 캥매 캥매 캐갱” 이런 자진가락으로 옴겼을 때는 아이들 늙은이 여인네들이 모다 몰려나왔었다. 젊은 사람들은 어깨와 어깨와 팔과 팔과 다리와 다리가 한 대 뭉치며 뛰며 춤추며 상사뒤여를 불르기 시작했다. 고 서방이 앞잡이로 서서 노래를 한 마듸 먹이고 나면 백 여 명 뭉치는 상사뒤여를 련해 불렀다. 어깨와 어깨를 견우어라 상−사−뒤−여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자 상−사−뒤−여 열두 달 하로도 안 노라야 상−사−뒤−여 보리밥 좁쌀죽 못 면하네 상−사−뒤−여 상사뒤여 뭉치는 왼 마을을 한 밖휘27) 둘러서 방축 우로 올라섯다. 달 빛인 별장 란간에는 술과 게집에 취한 여러 사나히들 이 노래와 웃음을 요란스럽게 토하며 가야금과 장구를 괴롭 게 울렸다. 상사뒤여 뭉치는 방축 우를 거처서 별장 앞으로 밀려가 기 시작했다. 고 서방의 앞잡이 노래가 더한층 힘차고 높았

26) 꽹매기: ‘꽹과리의 ’ 북한어. 27) 밖휘: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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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때는 상사뒤여 소리는 더한층 높았다. 웬순놈 별장이 생겨나서 상−사−뒤−여 우리네 마을이 흘러갓네 상−사−뒤−여 웬순놈 별장은 누가 지엇나 상−사−뒤−여 우리네 피땀이 뭉처서 됏지 상−사−뒤−여 게집의 한편 무릎을 베고 눈을 지긋이 감고서 기름진 배 ㅅ가죽을 슬슬 만지는 최부호는 갑작이 가까워 온 상사뒤여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장구 소리도 끊어지고 취해 쓸어젓 든 사나히들과 게집들도 새 정신이 돌앗는지 슬슬 일어나 불안스러운 표정으로 상사뒤여 패를 주목해 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최는 조곰도 겁낼 게 없다는 듯이 “이게 무슨 짓들이야! 무레한 못된 놈들 같으니.” 하고 벌떡 일어서서 나려다보며 고함쳤다. 상사뒤여 패는 더 힘찬 노래를 높이 불르며 별장 란간 앞 으로 밀리여 갓다. 우리네 피땀을 빨아다가 상−사−뒤−여 느들만 언제나 잘사나 보자 상−사−뒤−여 방축이 터저서 흉년이 돼두 상−사−뒤−여 느그만 배부르면 그만이지 상−사−뒤−여

一九二八年 十月 作

<조선지광> 193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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