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 이해 총서
한국 잡지 역사 정진석
대한민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01 잡지의 효시: ≪친목회회보≫, ≪대죠션독립협회회보≫, 외국인 발행 잡지
서양 선교사와 일본 유학생들이 잡지를 처음으로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잡지 문화의 이식(移植)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국내에서는 독립협회가 월 2회 잡지를 발행하면서 잡지는 개화사상과 독립정신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학회와 종교계가 발행한 잡지는 개화, 자주독립, 의식 개혁, 산업 진흥과 같은 거대 담론을 펼치는 국민의 교과서였다.
도쿄에서 발행된 ≪친목회회보≫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에 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코리안 리포지토리≫(1892. 1 창간)를 최초로 보는 견해가 있고(백순재), ≪친목회회보≫(1896. 2)가 효시(嚆矢)라는 주장이 있으며(김근수), ≪대죠션독립협 회회보≫(1896. 11)를 국내에서 실질적인 첫 잡지로 평가 하는(이종수) 사람도 있다. 각기 일리 있는 주장이다. ≪친목회회보≫는 1896년 2월 15일 자로 대조선인일 본유학생친목회가 창간한 잡지였다. 우리나라 사람이 만 든 최초의 잡지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지만, 일본에서 발행 되었기 때문에 우리 잡지의 효시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창간호 표지에는 ‘개국 504년(1895) 10월 발행’ 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판권지에는 1895년 11월 30일에 인쇄하여 1896년 2월 15일 발행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쇄 일과 발행일이 두 달 반이나 차이가 나는데 그 이유를 밝 히지는 않았다. 표지와 판권의 발행 날짜가 다른 것은 일 본 내무성의 허가를 받는 데 2개월 반이 지체되었기 때문 일 수도 있고, 잡지 발행에 경험이 없는 유학생들이 처음 만든 잡지였으니 진행이 원활하지 못한 관계로 창간이 늦 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잡지를 발행한 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는 18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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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도쿄에서 설립된 최초의 유학생 모임이었다. 개화기 의 일본 유학은 1881년 9월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갔던 일행 가운데 유길준과 윤치호가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에서 공부했던 것이 시초였다. 그 후로도 유학생의 일본 파견은 계속되었다. 1895년 봄부터 이듬해 1월까지는 약 190명의 관비 유학생을 게이오기주쿠에 파견했는데 그 가 운데 41명이 귀국했고, 8명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리하 여 1895년 5월 무렵에는 대략 110명 정도가 일본에서 공부 하고 있었다. 이들은 5월 12일 친목 도모, 학식 교환, 한국 문화의 계발을 목표로 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를 결성 했다. 사업으로는 연설회, 강연회, 토론회, 모의국회 등의 행 사를 개최했고, 기관지로 ≪친목회회보≫를 발행했다. 발행인 최상돈(崔相敦), 편집인 김용제(金鎔濟)였다. 계 간지로 출발했지만 발행 간격을 지키지 못하고 1898년 4월 통권 6호까지 발행한 후에 중단되었다. 국판 크기 (15.2×22.6cm)에 110여 쪽 분량으로 국한문을 혼용했다. 내용은 학술과 문예, 시사를 아우르는 종합지 성격을 띠고 있었다. 사설, 논설, 잡보, 연설, 문원(文苑), 내보, 외보, 회사기(會事記, 친목회 일기)의 순으로 배열했다. 비매품 으로 회원과 찬성원 외에 국내 각 학교와 정부기관에 보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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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목회회보≫ 발행 상황(괄호 안은 쪽수) 1896
1897
1898
1월 2월
1(110) 4(100)
3월
6(175)
4월 5월 6월
2(270)
7월 8월 9월 10월
5(183) 3(135)
11월 12월
다. 발행 경비는 회비와 찬성원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했 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등 일본인의 찬조가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유학생들은 문화의 전달자이자 민족의 진로를 제시할 젊은 엘리트였으므로 이들이 발행한 잡지는 국내의 개화 사상과 독립정신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유학생들은 선진 문물과 과학기술을 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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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하여 근대화의 추진 세력이 되고자 했는데, 잡지는 그와 같은 목표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편이었다. 유학생친목회는 1898년에 해체되고 뒤를 이어 제국청 년회가 조직되어 ≪제국청년회보≫를 발간했지만 계속 되지는 못했다. 문화재청은 2012년 10월 연세대학교 학술 정보원이 소장하고 있는 ≪친목회회보≫를 등록문화재 로 지정했다(등록번호 511호).
독립협회 기관지 ≪독립협회회보≫ ≪대죠션독립협회회보≫는 1896년 11월 30일에 창간되 었다. 같은 해 2월 15일에 일본 유학생들이 창간한 ≪친 목회회보≫가 빨랐지만, 국내가 아닌 도쿄에서 일본의 출판 시설로 인쇄되었기 때문에 ≪대죠션독립협회회보≫ 는 국내 발행 잡지의 효시로 차별화할 수 있다. ≪대죠션독립협회회보≫는 월 2회, 매달 15일과 마지 막 날에 발행되었다. 국판 크기(14.5×20.8cm)로 매호 20 ∼22쪽 분량에 정가는 10전이었다. 독립협회는 1896년 7월에 결성되어 1898년 12월까지 존속한 최초의 근대적 인 사회 정치 단체다. 외세의 국권 침탈과 지배층의 민권 유린이 자행되는 상황에서 독립협회는 자주 국권, 자유 민 권, 자강 개혁을 외치면서 개혁과 근대화 운동을 전개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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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대죠션독립협회회보≫는 그 이념을 전파하는 매체 였다. 서재필의 독립신문과 긴밀한 연관 아래 협회의 주 장과 사업을 알리고 대중 계몽에 앞장섰다. ≪대죠션독립협회회보≫는 ① 계몽 논설, ② 회원 기 고, ③ 세계 주요 사건 요약, ④ 각국 사정, ⑤ 독립협회 소 식 등을 주로 다루었다. 특히 독립협회의 두 흐름인 서구 시민사상과 국내에서 성장한 개화사상을 반영하는 논설 을 함께 실었다. 창간호에는 지석영의 “국문론”과 서재필 의 “공긔론”이 실렸다. 이 잡지는 독립협회라는 단체의 기 관지에 국한되지 않고 일반 대중을 계몽하는 내용의 잡지, 전 국민 대상의 잡지를 만들었다. 근대 문명과 과학 지식 을 소개하는 논설과 외보(外報) 등에서 이 잡지의 편집 방 향을 확인할 수 있다. ≪대죠션독립협회회보≫는 ≪독립신문≫과 더불어 개 화운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러나 ≪독립신문≫ 은 한글 전용이었지만, 회보는 한문 전용 기사와 함께 국 한문 혼용 기사로 편집하여 문자 사용에서 이상주의와 현 실주의의 타협을 시도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1896년 11월 부터 이듬해 8월 제18호까지 발행했으나 독립협회의 해산 으로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대죠션독립협회회보≫는 한국개화기 학술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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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아문화사, 1978) 시리즈 가운데 영인본이 포함되어 있 다. 문화재청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대죠션독 립협회회보≫를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2012년 10월, 등 록번호 512호).
외국인 발행 잡지 한국인들이 일본과 서울에서 잡지를 발행하기 전에 서양 인들은 한국 관련 영어 잡지를 발행했다. 첫 영어 잡지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이 1892년 1월에 창간한 ≪코리안 리포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였다. 선교사 올 링거(F. Ohlinger) 부처가 1년 간 발행한 후에 중단했다가 1895년 1월에 복간했다. 이때의 발행인은 아펜젤러(H. G. Appenzeller)와 존스(George Hebert Jones)였고, 헐 버트(Homer B. Hulbert)가 부편집인으로 참여하여 1898 년 12월까지 발행되었다. ≪코리안 리포지토리≫는 A5판보다 약간 작은 판형 (140㎝×20.5㎝)에 40쪽 정도 분량이었다. 선교사들이 알 아야 할 한국의 언어, 역사, 문화, 시사적인 내용으로 편집 되어 당시 우리나라의 사정을 연구하는 데는 귀중한 자료 가 되고 있다. 1898년 12월까지 잡지 형태로 발행되다가, 1899년 2월부터는 주간으로 발행주기를 바꾸었다.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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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월간과 같은 판형(A5판) 4쪽 또는 8쪽 분량이었는데 6월부터는 이것도 중단되었다. 마지막 호인 1899년 6월 1 일 자 지령은 제17호였다. ≪독립신문≫과 영문판 ≪인디 펜던트≫도 그해 12월 5일에 폐간되자 한국에는 영어 정 기간행물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1901년 1월부터는 헐버트가 창간한 개인잡지 ≪코리 아 리뷰(Korea Review)≫가 영어 잡지의 명맥을 이었다. 헐버트는 ≪코리아 리뷰≫를 “한국 문제에 관심을 가진 외국인들 사이에 대화의 중개자”가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 다. 매호 48쪽(1902년부터는 40쪽)의 얄팍한 분량이었다. 헐버트는 이 잡지가 한국인과 한국의 역사, 풍습, 법률, 예 술, 과학, 종교, 언어, 문학, 민속, 인종학적 관계 등을 다루 게 될 것이며,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영어로 기록하여 남겨 둘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코리아 리뷰≫ 가 ‘뉴스 캘린더(News Calendar)’란을 통해 ‘한국에서 일 어나거나 한국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건에 대해 솔직 하고도 신뢰할 수 있는 견해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헐버트는 “The History of Korea”를 창간호부터 연재하다 가 후에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코리아 리뷰≫는 ‘선의의 구독자들’이 내는 구독료로 운영했는데 헐버트의 열성으로 1904년 말에는 배포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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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19곳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발행부수는 제한 되어 있었다(Editorial Comment, Nov. 1904, p.509). 초기 ≪코리아 리뷰≫는 ≪코리안 리포지토리≫의 편 집 방침을 이어받은 편집이었다. 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의 침략 정책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 하면서 이 조그만 영어 잡지는 일본 당국이 주목하는 중요 한 정치적 매체가 되었다. 헐버트는 황무지 개간권 문제 로 한국에서 반일 여론이 고조되기 시작했을 때 한국의 입 장을 변호하고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는 매체로 ≪코리아 리뷰≫의 지면을 활용했다. ≪코리아 리뷰≫는 1906년 12월까지 발행되었다.
≪모닝 캄≫ 한국과 관련하여 외국인이 발행한 최초의 잡지는 1890년 7월부터 영국 성공회가 발행한 ≪모닝 캄(The Morning Calm)≫이었다. 모닝캄은 외국 독자들에게 한국 선교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동시에 재정 지원을 이끌어 내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모닝 캄≫은 런던에서 발행되었다. 한국 주재 성공 회 주교가 원고를 런던으로 보내면 그곳에서 편집과 인쇄 를 마친 다음에 세계 여러 나라에 배포하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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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가 런던으로 전달되는 시간과 그곳에서 잡지를 제작 하는 데 소요되는 기간 때문에 시차가 상당히 길었다. 코 프 주교(Bishop C. J. Corfe)의 1890년 11월 30일 자 편지 가 이듬해 5월 호에 실릴 정도로 시간이 오래 걸렸다. 창간 당시에는 월간이었으나 1896년 2월호(제67호)부 터 계간으로 바꾸어 발행되다가 1939년 10월호를 마지막 으로 휴간에 들어갔다. 제2차 대전 이후 선교사의 철수 등 으로 더 이상 발행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9월에 복간하여 1947년 2월에 2호, 6월에 3호를 발 간하여 원래의 계간 주기를 지켜나갔다. ≪모닝 캄≫은 이 후 런던에서 계속 발간하다가 1988년부터 영국 중부 도시 헤리퍼드(Hereford)의 한국선교후원회(Korean Mission Partnership)에서 연간 2회 ‘뉴스 레터’ 형식으로 현재까지 발행되고 있다. 우리나라와 관련된 영어 잡지 가운데 제일 먼저 창간되어 가장 오랫동안 발행을 지속해 온 잡지다. 하 지만 영국에서 발간된 잡지를 우리의 잡지사에 포함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 잡지는 세계 여러 나라의 성공회에 배포되었으므로, 서방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던 은둔의 왕국 조선을 ‘조용 한 아침의 나라’로 알리는 역할을 했던 점은 평가할 수 있 다. 또한 한국 근대 잡지 발달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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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볼 수 있다. ≪모닝 캄(The Morning Calm)≫이라는 잡지의 제호는 미국인 로웰(Percival Lowell)의 책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Chosen, the Land of Morning Calm) (1885)에서 따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한국을 상징하는 용어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윤춘병(1986). 한국기독교 신문잡지 백년사, 6. 대한기독출판사. 이재정(1990). 대한성공회 백년사. 대한성공회 출판부. 정진석(2013). 개화 계몽 독립 항일의 문화유산, 신문 · 잡지분야 등록문화재 해제. 문화재청. 차배근(2000). 개화기 일본유학생들의 언론출판활동Ⅰ. 서울대학교 출판부. 1∼6호. 영인본. Corfe, C. J.(1905). The Anglican Church in Corea. Seoul: The Seoul Press-Hodge & 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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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한말의 계몽지 · 여성지 · 전문지
한일 강제 병합 이전까지 잡지 발행 주체는 네 부류가 있었다. ① 유학생 단체, ② 학회, ③ 기독교 계통, ④ 개인이 그것이다. 학회는 교육 진흥을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였고, 오늘의 전문직 학회와는 다르다. 잡지를 편집하고 발행한 인물들은 일본 유학생들이었다. 개인 발행 종합잡지의 효시는 최남선의 ≪소년≫이었다. 1910년 이전에도 여성지, 전문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창기 잡지의 편집인들 초창기 잡지 발행에 참여한 사람들은 전문 잡지인은 아니 었다. 기독교 계통, 유학생회, 또는 여러 애국계몽 단체의 임원들이 잡지 발행의 실무를 맡았는데 계몽운동에 뜻을 둔 선구자들이었다. 김용제(金鎔濟, 1868. 2. 29 생)는 일 본 유학생들의 잡지 ≪친목회회보≫ 첫 호부터 마지막 제6호까지 편집인이었으므로 ‘최초의 잡지인’으로 부를 수 있는 인물이다. 경성사범학교에 다니다가 게이오기주 쿠(1895. 5∼1897)와 와세다대학 전신인 도쿄전문학교 정 치과(1897∼1899)에서 공부를 마친 후 1899년 가을에 귀 국했다. 1900년부터 서울의 사립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1901년 12월 관직에 입문하여 궁내부(宮內府) 내사과장 (內事課長), 비서과장, 제도국(制度局) 이사를 역임했다. ≪친목회회보≫ 발행인 최상돈(崔相敦, 1869. 5. 8 생) 은 1894년 2월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1897년 7월에 보통학교를 마치고 1898년 12월에 귀국하여 철도 와 체신 관련 업무에 종사했다. 그는 창간호와 제2호까지 두 권의 ≪친목회회보≫가 발행되는 동안 이름이 올라 있 지만 잡지 발행에 참여한 기간은 짧았다. 유일선(柳一宣)은 ≪수리학잡지≫와 ≪가뎡잡지≫를 발행하여 잡지 2개의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던 초창기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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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었다. 그는 정리사(精理舍)라는 교육기관을 운영 하면서 기호흥학회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기독교인으로 1920년대에는 일본의 조합교회[組合敎會, 한국에서는 회 중교회(會衆敎會)]의 중요 인물이었기 때문에 친일파로 지탄받았다. 유승흠(柳承欽)은 1904년에 일본 유학을 떠나 1909년 에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그동안 ≪대한유학생 회학보≫ 발행인(1907. 3∼5)과 ≪대한학회월보≫의 편 집인(1908. 7∼11)을 역임했다. 두 잡지의 발행인과 편집 인을 맡은 것이다. 강전(姜荃)은 ≪대한학회월보≫의 발행인(1908. 7∼ 11)과 ≪대한흥학보≫의 편집인(1∼3호, 1909.3∼5)이 었다. 유승흠이 ≪대한학회월보≫의 편집인이었을 때에 발행인이었다. 강전은 1904년 10월 황실 선발 국비 유학 생 5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본에 갔다. 같이 간 유학생 가운데는 최남선, 유승흠, 최린(崔麟), 조용은[趙鏞殷, 조 소앙(素昻)으로 알려진 독립 운동가, 정치가] 등이 있었 다. 강전은 후에 강위수(姜渭秀, 호는 渭史)라는 이름으 로 활동했는데 ≪경남일보≫ 창간(1909. 10. 15) 당시에 는 부사장이었고 이듬해 4월 제2대 사장이 되는 인물이다. 한말에서 일제 무단정치 기간에 가장 널리 알려지고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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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잡지를 발행하여 잡지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긴 대표 잡지인은 최남선이었다. 최남선에 관해서는 다음 장 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최상돈, 유승흠, 강전, 최남선은 1904년 관비 유학생으로 함께 일본에 유학했던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초창기 잡지 발달은 일본의 영향을 거의 절대적으로 받았던 사정을 말해 준다. 근대적 잡지의 형태를 갖춘 ≪소년≫이 나오기 전까지 대략 35종의 잡지가 창간되었는데, 내용은 대부분 개화와 계몽을 위한 교재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발행 주체였던 한말의 학회와 협회는 오늘날과는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오늘날은 같은 직종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소속 회원들의 정보 교류, 자질 향상을 목적으로 삼지만 한말의 학회와 협회는 국민의 의식을 깨우치고 선진 문물을 소개 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가장 큰 사업은 잡지 발간이었다. 하지만 수명이 1년을 넘긴 잡지는 10종 이 되지 않았다. 통권 10호 이상 발행된 잡지를 중심으로 한말의 주요 잡지를 살펴본다.
협회 발행 잡지 ≪조양보≫(1906. 6∼1907. 12, 통권 12호)
대한자치협회 기관지로 월 2회, 10일과 25일에 발행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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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국한문 혼용 타블로이드 24면으로 신문과 비슷한 형 태로 당시 발행되던 교과서 성격의 잡지들과는 달리 종합 잡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사장 장응량(張應亮), 총무 심의성(沈宜性), 주필은 장지연으로, 논설을 비롯한 교 육·실업·담총( 談叢)·관보초록·내지잡보·해외잡 보·사조(詞藻)·소설 등을 실었다. 1907년 1월 통권 12호 는 판형을 A5판으로 바꾸고 월간으로 변경했으나 결국 이 것을 종간호로 폐간되었다.
≪대한자강회월보≫(1906. 7∼1907. 7, 13호)
회장 윤치호를 중심으로 장지연, 윤효정, 심의성 등이 결 성한 대한자강회 발행 잡지였다. 대한자강회는 국민 교육 고양과 식산 증진을 통한 부국강병을 이루어 독립의 기초 를 마련하고자 했는데 그 사업으로 기관지를 발행한 것이 다. 월보를 통하여 식산흥업(殖産興業)의 필요성, 국가 부원증진책(富源增進策), 식산 결여의 원인, 황무지 개척, 한국의 생산물, 임업의 필요성, 토지 개량의 필요성 등 구 체적 연구를 거쳐 계몽운동을 전개했고 특히 국채보상운 동 때에는 적극적인 참여를 결의했다. 창간호에 실린 박 은식의 ‘대한정신’과 3호에 실린 장지연의 ‘자강주의’에서 보듯이 자주독립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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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협회회보≫(1908. 4∼1909. 3, 12호)
한말 유일한 정치단체였던 대한자강회의 후신인 대한협 회가 발간한 기관지. 대한협회의 해산으로 발행을 중단했 다. 국판 70쪽 내외 분량이었다.
≪서우(西友)≫(1906. 12∼1908. 8, 14호)
평안남북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친목과 교육 사업에 뜻 을 두고 설립된 서우학회가 발행한 잡지였다.
≪서북학회월보≫(1908. 6∼1910. 1, 22호)
서북학회는 1908년 1월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韓北興 學會)가 통합하여 결성된 단체다. 그러므로 ≪서북학회
월보≫는 ≪서우≫의 후신이었다. 두 학회가 서북학회로 통합한 뒤에도 학회지는 그냥 ≪서우≫로 발간되다가 1908년 6월에 ≪서북학회월보≫로 제호를 바꾸어 새로 창간하는 형식으로 발행되었다. 국판 50쪽 내외였다. 서 북학회는 1910년 9월에 강제 해산되었지만 ≪서북학회월 보≫는 23호까지 나왔다. 먼저 창간된 ≪서우≫와 ≪서 북학회월보≫를 하나의 잡지로 본다면 1906년부터 1910 년까지 통권 40호를 발행한 결과가 되어 한말 잡지 가운데 는 가장 긴 발행 실적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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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학회월보≫(1908. 2∼1909. 9, 20호)
대동학회(大東學會) 기관지로 국판 50쪽 내지 60쪽 분량 이었다. 대동학회는 1907년 12월 신구 학문 연구를 표방 하고 설립되었는데 이완용, 조중응(趙重應) 등이 중심이 었다. 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유림계의 친일화를 목 표로 제공한 2만 원의 자금으로 조직되었다. 대동학회는 법률 교육을 목적으로 대동전수학교를 설립하고 ≪대동 학회월보≫를 발행했다. 1909년 10월 명칭을 공자교회 (孔子敎會)로 바꾸었다.
≪기호흥학회월보≫(1908. 8∼1909. 7, 12호)
서울을 포함한 경기도와 충청도 유지들이 설립한 기호흥 학회(畿湖興學會)가 발간한 문화 계몽적 성격의 잡지다. “대한제국의 독립기초와 이천만인의 자유정신과 기호 3성 의 흥학(興學)주의”로 발행한다고 목적을 밝혔다. 1년 동 안 통권 12호를 내고 경비 절감 문제로 종간되었다. 국판 60쪽 내외 분량이었다.
≪교남교육회잡지≫(1909. 4∼1910. 5, 12호)
경상남북도의 교육 진흥을 표방하고 조직된 교육, 계몽운 동 단체인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의 기관지였다. 월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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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이었으나 자금 사정으로 2회 건너뛰다가 1910년에 들어 일제의 탄압으로 5월에 12호로 종간되었다. 국판 60 여 쪽 분량으로 창간 당시에는 3000부를 발행하다가 10호 이후 2000부를 발행했다.
유학생 발행 잡지 도쿄 유학생들은 ≪친목회회보≫ 이후 여러 종류의 잡지 를 발행했다. 태극학회의 ≪태극학보≫(통권 27호)가 가 장 오래 발행되었고, ≪대한흥학보≫(13호), ≪대한학회 월보≫(9호), ≪공수학보≫(5호), ≪낙동친목회학보≫ (4호), ≪대한유학생회학보≫(3호) 등이 발행 실적을 기 록했다. ≪동인학보≫는 창간호로 종간되었다. 일본에 서 발행되었지만 한말 격변기에 선각적 지식인들의 모습 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매체들이다.
≪태극학보≫(1906. 8∼1908. 8, 27호)
도쿄 유학생 단체 태극학회가 발행했다. 1896년의 ≪친 목회회보≫에 이은 두 번째 유학생 회지인데 27호까지 발 간하여 유학생 잡지 가운데 최장수를 기록했다. 국판 60 쪽 내외 분량으로, 발간 경비는 회원의 의연금에 의존하다 가 점차 국내 유지들의 도움을 받았다. 1907년 7월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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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명의 인사들이 함께 의연금을 내기도 했다. 외세의 침 략에 따른 위태로운 국가 현실을 직시하고 애국계몽 사상 을 고취했다.
≪공수학보≫(1907. 1∼1908. 3, 5호)
공수학회(共修學會)가 계간으로 발행했다. 창간호는 75쪽 에 달했으나 보통은 매호 55쪽에서 60여 쪽 분량의 국판 이었다.
≪대한유학생회학보≫(1907. 3∼1907. 5, 3호)
대한유학생회는 1906년 9월 2일 유학생 259명이 모여 결 성한 단체였다. 최남선이 편찬원으로 선출되어 이듬해 3월 ≪대한유학생회학보≫ 첫 호를 내놓았다. 매호 100쪽 정 도로 그해 5월까지 3호가 나왔다.
≪낙동친목회학보≫(1907. 10∼1908. 1, 4호)
경상도 출신 유학생들이 결성한 낙동친목회에서 발행. 국 판 42쪽 분량. 낙동친목회는 1908년에 대한유학생회, 호 남학회와 함께 대한학회로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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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학회월보≫(1908. 9∼1908. 11, 9호)
대한학회 발행으로 국판 60여 쪽 분량이었다. 대한학회는 1908년 1월 도쿄에서 대한유학생회, 낙동친목회, 호남학 회를 통합하여 설립한 유학생 단체다. 서양 문물을 소개 하는 문화 계몽지 성격이었다. 이 학회는 ≪상학계(商學 界)≫라는 잡지도 발행했는데, 1909년 1월에는 태극학회,
공수학회 등과 함께 대한흥학회로 통합된다.
여성잡지 ≪가뎡잡지≫(1907. 7∼1908. 8, 14호)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잡지로 상동청년학원 안에 있던 가 정잡지사에서 발행했다. 뒤이어 나온 ≪녀지남≫과 ≪자선부인회잡지≫는 특정 여성 단체의 기관지 성격이 었으나 ≪가뎡잡지≫는 일반 여성 특히 가정부인을 대상 으로 교육과 계몽 위주로 교과서 성격을 띠고 있다. 1906년 7월에 창간되어 거의 결호 없이 발행되었으나 1907년 1월 이후에는 휴간 상태였다가 1908년 1월부터 신 채호가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아 속간되었다. 그해 8월에 2권 7호를 발행하여 통권으로는 14호가 확인되는데 더 이상 발간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글학자 주시경이 교보원으로 한글 전용 띄어쓰기를 했으며, 신소설 작가로 유명한 안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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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글도 몇 편 실려 있다. 당시의 열악한 잡지 발행 여건 으로 보면 여성 대상 잡지가 이 정도로 발행되었다는 사실 은 의미가 크다.
≪녀지남≫(1908. 4 창간, 통권 3호)
여자교육회 소속 여자보학원(女子普學院)에서 발행했다.
≪자선부인회잡지≫(1908. 8)
자선부인회가 월간으로 계획되었으나 단 1호 발행으로 창간호가 종간호가 되었다. 편집인은 신소설 작가 최찬 식(崔贊植)이었는데 그의 아버지 최영년(崔永年)은 친일 신문 ≪국민신보≫의 사장을 맡은 인물이었다. 창간호가 나올 당시에는 친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한글 전용 띄어쓰기였는데 구두점은 사용하지 않았다.
개인 발행 잡지, 법학, 수리학 전문지 ≪소년한반도≫(1906. 11∼1907. 4, 6호)
학회지가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개인이 발행한 대표적인 잡지다. ≪조양보≫, ≪야뢰≫ 등과 함께 본격 잡지 시대 를 선도한 종합지로 국민정신 함양과 신지식 선도에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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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을 두었다. 발행인은 양재건(梁在謇, 1∼3호)과 조중 응(趙重應, 4∼6호)이었다. 양재건은 경남 거창군수를 지 낸 인물이고, 조중응은 한일 강제 병합 당시 농상공부대신 을 지낸 친일파였다.
≪법정학계≫(1907. 5∼1908. 9, 22호)
보성전문학교에서 1907년 5월 5일에 창간한 최초의 법률 전문 잡지였다. 경제와 정치를 아우르는 종합 성격의 잡 지다. 보성전문학교 발행, 교우회 편집이었다. 정확한 정 보를 확인할 수 없지만 1907년부터 1909년에 이르기까지 3년에 걸쳐 간행되어 통권 22호를 넘겨 당시로서는 매우 장수한 잡지였다. 법률 전문학교의 역사와 구한말 교육 현장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잡지다.
≪수리학잡지≫ (1905. 12∼1906. 9?, 통권 8호)
수리학(數理學) 보급을 목적으로 발행된 최초의 잡지로 1906년 9월 통권 8호까지 발간된 것으로 추정된다. B5판 (4×6배판) 판형에 8쪽 정도로 간기(刊記)를 따로 기재하 지 않았고 표지부터 본문을 시작했다. 발간 취지는 수(數) 와 리(理) 두 학문을 진흥하려는 목적으로 잡지를 발간하 여 교육 당사자를 돕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추상적인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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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 보급이 아니라 수리학을 다루는 전문 잡지라는 의미가 큰 잡지였다.
잡지 영인본 총서
∙ 한국 개화기 학술지(아세아문화사) 대죠선독립협회회보(1896~1897, 18호) 태극학보(1906~1908, 26호) 대한자강회월보(1906~1907, 13호) 서우(1906~1908, 17호) 대한유학생회학보(1907, 3호) 기호흥학회월보(1908~1909, 12호) 서북학회월보(1908~1910, 19호) 호남학보(1908~1909, 9호) 대한학회월보(1908, 9호) 대한협회회보(1908~1909, 12호) 대한흥학보(1909~1910, 5호)
∙ 아단문고 소장 일본 유학생 발행 잡지(소명출판 발행) 공수학보(1907~1908) 낙동친목회회보(1907~1908) 동인한보(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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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보(1912)* 근대사조(1916)* 여자계(1918)* 학지광(1914~1930) 현대(1920~1921) 청량(1926~1941) 학조(1926)* 회보(1938~1940) 회지(1939)*
* 표는 1호만 남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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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최남선의 ≪소년≫에서 ≪청춘≫까지
최남선의 ≪소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종합잡지였다. 그는 1920년대 중반까지 20여 년에 걸쳐 7종의 잡지와 신문을 발간하여 잡지 문화 발전에 획기적인 족적을 남긴 선각자였다. 최남선은 잡지를 국민을 가르치는 교과서로 인식했다. 그는 잡지를 통해 청소년과 국민을 깨우치고 가르치며, 민족정신을 앙양하고 문화를 천명 보급하여 자주독립 정신을 고취한다는 일관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문화 운동과 민족의식 고취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천재였다. 문학인이면서 사학자, 사상가이면서 사업가, 저널리스트, 정치가라는 다종다양한 자격과 활동을 한 몸 에 아우르고 있었다. 역사의 격동기에 태어나 시대의 거 센 물결을 전신에 뒤집어쓰면서 묵은 시대로부터 새 시대 에 이르는 교량을 건설한 사람이었다. 최남선은 독립선언 문을 기초한 문장가로도 널리 알려졌다. 최남선은 여러 분야에서 폭넓은 발자취를 남겼지만 그 의 문화 운동과 정력적인 저술, ‘조선주의’ 앙양을 위한 활 동은 대부분 자신이 경영한 출판사 신문관(新文舘)을 모 체로 발간한 잡지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는 ‘잡 지인’으로 더욱 많은 연구와 평가를 받아야 할 인물이다. 최남선은 잡지사와 문학사에 이정표를 세운 선각자였다. 최남선이 1908년 11월에 창간한 ≪소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종합잡지였다. ≪소년≫에 앞서 ≪대죠 션독립협회회보≫를 비롯하여 35종 가량의 잡지가 나타 나고 사라졌지만, ≪소년≫은 근대 잡지의 형태를 제대로 갖춘 최초의 잡지로 그 이전 것들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내 용을 지니고 있었다. 1965년에 잡지협회가 11월 1일을 ‘잡 지의 날’로 정하고 매년 기념식과 함께 잡지 문화 발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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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한 유공자에게 잡지 문화상 수여 행사를 갖는 것도 최 남선의 ≪소년≫이 잡지사에 남긴 공적을 기리는 뜻을 담 고 있다. 최남선은 ≪소년≫ 창간 이후 1920년대 중반까지 20여 년에 걸쳐서 7종의 잡지와 신문을 발간했다. ≪소년≫에 이어 ≪붉은져고리≫(1913. 1), ≪새별≫(1913. 4), ≪아 이들보이≫(1913. 9), ≪청춘≫(1914. 9) 등의 월간 잡지 (또는 월 2회간)와 3·1운동 후에 창간한 시사 주간지 ≪동명(東明)≫(1922. 7)까지를 최남선의 잡지로 볼 수 있다. 1924년에는 일간지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 간하여 1930년대 이전까지는 잡지 출판인, 언론인으로서 국내의 어떤 사람보다도 많은 종류의 잡지를 창간했고 정 력적으로 출판 사업을 벌였다. 최남선의 신문과 잡지는 청소년과 국민을 깨우치고 가 르치며, 민족정신을 앙양하고 문화를 천명 보급하여 자주 독립 정신을 고취한다는 일관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신보 잡지광(雜誌狂)’으로 자처했다. 신문 잡지에 미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의 형 최창선(崔昌善) 과 함께 경영하던 신문관에서 발행한 출판물은 종류도 많 았을 뿐 아니라 책의 내용으로 보더라도 당시의 문화 운동 과 민족의식 고취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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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올바르게 가르쳐야 최남선은 어려서부터 책과 신문 읽기를 좋아해 열 살 전후 의 어린 나이에 신문을 읽으면서 앞으로 기회만 있으면 스 스로 신문을 경영해 보겠다는 포부를 지녔다. 1904년 10월 최남선은 국비 유학생 50명 가운데 선발되어 도쿄로 건너 가서 일본의 출판과 잡지 문화가 발전된 모습에 크게 자극 받았다. 최남선은 몇 달 만에 1차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했 다가 1906년 3월 사비로 일본에 다시 건너가서 와세다대학 고사부(高師部) 지리역사과에 입학했다. 최남선은 이때 유학생회가 발행하던 ≪대한유학생회학보≫의 편집인을 맡아 처음으로 잡지 편집의 기회를 가졌다. 유학생회 학보 편집을 맡았던 경험은 귀국 후에 창간하는 ≪소년≫ 제작 에 큰 도움이 되었다. 최남선의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유학은 통틀어 2년 남짓 으로 끝이 났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자금을 얻어 도쿄에 서 인쇄기계와 조판·식자 시설을 구입하고, 인쇄 기술자 까지 데리고 귀국하여 1908년 5월에 ‘신문관’이라는 이름 의 출판사를 설립했다. 장차 언론사와 문화사에 남을 여 러 잡지들을 창간하고 출판 사업과 문화 운동을 벌일 기반 을 마련한 것이다. 최남선과 형 최창선은 신문관을 운영하면서 잡지와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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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본 출간을 동시에 진행했다. 신문관의 주인 겸 ≪소년≫ 의 편집인·인쇄인 등 대외 책임자는 최창선이었고, 최남 선은 ‘집필인’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고 잡지와 출판물을 편집하는 활동을 정력적으로 벌였다. ≪소년≫ 창간호는 1908년 11월에 출간되었다. 나라 가 망하기 직전의 침체된 상황이었다. 최남선은 “우리 대 한으로 하야곰 소년의 나라로 하라 그리 하랴하면 능히 이 책임을 감당하도록 그를 교도하여라”로 창간 목적을 요약 했다. 창간호 첫머리에 실린 이 글은 민족의 새로운 출발 은 소년들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으며, 장차 나라를 짊어질 소년들을 올바르게 키워야 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소년≫ 창간과 함께 신문관에서는 단행본 출간을 병 행했다. 최남선의 한양가와 경부철도가는 이미 출간 된 상태였고, 세계일주가, 태서교육사, 대한지지, 외국지지, 일문역법(譯法), 소인국표류기와 같은 단행본은 곧 발매할 예정이었다.
잡지는 국민 교과서 최남선은 학교 하나를 세우거나 사회의 어떤 고정 지위에 앉아서 지도자의 일을 행하는 것보다는 잡지와 출판을 통 하여 전국의 청소년을 가르치고 어른도 읽게 하여 청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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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의 자료로 삼는 동시에 스스로도 깨우치도록 해야 한 다고 생각했다. 잡지와 책을 통해서 소년과 어른을 동시 에 계몽하겠다는 원대한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편집 방향은 대중 취향 영합은 지양하되, 아름다운 감 정이나 감동이 풍부한 문학작품은 싣겠다고 밝혔다. 외국 의 잡지가 어린이의 호기심에 영합하여 가볍고 읽기 쉬운 글을 많이 실으면서 온갖 현상(懸賞)과 추첨을 행하여 백 지 같은 어린 마음에 허욕과 요행심을 심어 주는 폐단이 있음을 깊이 통탄했다면서 이러한 제작 태도는 취하지 않 을 것이라고 선언하여 계몽주의 잡지 편집의 방침을 압축 하여 표명했다. ≪소년≫은 한일 강제 병합 후 세 차례 발행 정지 처분 을 당하다가 1911년 5월에 발행한 통권 제23호를 끝으로 더 이상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최남선은 조선광 문회(朝鮮光文會)를 창립하여 고전을 수집 간행하는 사 업을 벌이면서 새로운 잡지를 의욕적으로 창간했다. 1913년 1월 1일에는 어린이 신문 ≪붉은져고리≫를 창 간했다. ≪붉은져고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신문 이었다. 타블로이드보다는 약간 작은 판형의 배대판(국배 판) 8쪽을 매월 1일, 15일 월 2회 발간했다. 한글 전용에 그림과 사진을 넣고 동화와 역사 이야기, 위인전, 시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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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쉽고 친절한 문장으로 풀어 썼다. 쉽고 아름다운 말로 어린이들에게 유익한 신문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편집 방침은 뒤에 나오는 ≪아이들보이≫와 ≪새별≫에 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최남선은 소년과 청춘 등 다른 잡 지에서는 당시의 관행대로 한자를 많이 섞은 문장을 썼지 만 ≪붉은져고리≫와 ≪아이들보이≫는 한글을 전용하 고 나아가 한글 풀어쓰기까지 주창했다. 그는 이 무렵에 주시경의 한글사전 편찬을 돕고 있었다. ≪붉은져고리≫는 1913년 6월 15일 자 제12호까지 발 행했으나 총독부의 명령으로 폐간되었다. 최남선은 멈추 지 않았다. ≪붉은져고리≫ 폐간 3개월 만에 창간한 잡지 가 ≪아이들보이≫(1913. 9 창간)이다. 판형과 체제만 달 리했을 뿐 대체로 ≪붉은져고리≫를 계승한 내용이었다. ≪아이들보이≫는 한글 전용으로 소설, 고담, 교훈, 학예, 전기, 유희 등 다양한 내용으로 꾸몄다. 이 잡지는 창간 이 듬해인 1914년 9월 5일 자 13호까지 발행한 뒤에 중단했다. 10월부터 한 단계 높은 독자를 겨냥한 새 잡지 ≪청춘≫ 을 창간하기 위한 조치였다. ≪붉은져고리≫와 거의 동 시에 발행한 또 하나의 잡지가 ≪새별≫(1913. 4∼1915. 1, 16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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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성인 종합지 ≪청춘≫ 최남선은 처음에 소년 소녀를 주 대상으로 삼은 잡지들을 발행하다가 이제 성인 대상 잡지 ≪청춘≫을 발행할 단계 가 되었다. 여러 잡지를 만드는 동안 최남선도 원숙한 청 년으로 성장했다. 최남선은 정열적인 활약으로 사회에 널 리 명망을 떨치게 된 상황에서 성인 대상의 잡지를 계획한 것이다. ≪소년≫을 통하여 새 시대의 사상과 문물을 끌 어들이고 신문화의 씨를 뿌렸다면 ≪청춘≫에 와서는 잡 지 문화의 꽃을 피운 것이다. 신문관은 ≪소년≫ 창간 이후 6년 사이 출판계에서 확 고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여러 종류의 잡지를 낸 것으 로도 그랬거니와 단행본 출판도 활발했기 때문에 1914년 5월에 종합한 신문관 발매 서적 총목록에는 교과서류를 비롯하여 사전과 자전(字典), 종교 이학서(理學書), 수양 서, 사전연표서(史傳年表書), 지리지도서, 조선어와 한문 서, 수학측량서, 도화습자서, 창가체조서, 어학서, 간독서 (簡牘書), 법정경제서, 법전서식서, 실업부기서, 교육가 정서, 의약서, 신구 소설류 등 수십 종의 단행본을 종류별 로 분류해 놓았을 정도였다. 이 가운데는 조선광문회가 펴낸 동국통감, 연려실 기술(16책), 해동역사(繹史)(6책), 대동운부군옥(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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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韻府群玉)(7책) 등 방대한 사적(史籍)을 비롯하여
심청전, 흥부전, 홍길동전과 같은 전래소설을 싼 값으로 보급하는 ‘륙전소설(六錢小說)’에 이르기까지 다 양한 종류가 망라되어 있었다. 육전소설은 우리나라 최초 의 문고본이었다. ≪청춘≫을 본격 종합잡지로 발행할 수 있게 된 또 다 른 조건은 ≪소년≫ 발행 때에 비해 문화적 여건이 훨씬 성숙되어 있었다. 초기에 최남선이 거의 혼자 힘으로 잡 지를 만들어야 했던 형편과는 달리 이제는 다양한 필진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고, 독자의 저변도 넓어져 신문학운동 을 벌일 단계에 이른 시점이었다. 이리하여 1914년 9월 5일 자로 발행한 ≪아이들보이≫ 제13호를 마지막으로, 한 달 후인 10월 1일에는 ≪청춘≫ 을 창간했다. 그동안 ≪소년≫과 ≪붉은져고리≫는 총독 부의 탄압으로 폐간되었으나 ≪아이들보이≫는 청춘을 발간하기 위한 자진 폐간이었고, ≪아이들보이≫와 함께 발행하던 ≪새별≫은 계속 발행했다. ≪아이들보이≫와 ≪청춘≫의 현상문예작품 모집에 응모한 독자와 이들 잡 지에 기고한 필진은 1920년대 이후 언론계와 문단에서 활 동하게 된다. ≪청춘≫은 성인을 상대로 하여 서구 문학 명작을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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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국문학의 고전을 발굴하는 등 근대문학 형성에도 힘 을 기울였다. ≪청춘≫ 창간호는 본문이 180여 쪽에 부록 을 합하면 300여 쪽에 달하는 호화판이었다. 부록에는 빅 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을 너 참 불 상타로 번역 게재했다. 먼저 나온 ≪소년≫이 100쪽 미 만이었고, ≪아이들보이≫가 40여 쪽에 불과했던 것과 비 교하면 초대형이었다. 2호부터는 130∼150쪽 정도로 줄 어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당시 잡지로는 분량이 많았고, 4호와 5호 활자를 혼용하여 편집 체제에 변화를 주는 한편 기사도 많이 들어갈 수 있었다. 체제와 내용이 아울러 본 격적인 종합잡지로서 손색이 없게 된 것이다. ≪청춘≫은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 째, 이른바 일제 무단통치기인 1910년대에 정신적 공백을 채워준 대표 잡지다. 출판법에 의해 발행되었으므로 시사 문제를 다룰 수는 없었지만 교양 중심의 대중지 체제를 유 지하면서 교묘하게 계몽과 각성을 유도했다. 둘째로는 문 학사적인 공로를 들 수 있다. 이광수의 초기 단편들이 적 잖이 발표되었으며, 여류 문인 김명순이 이 잡지를 통해 등단했고, 톨스토이 등 외국 문학을 소개했다. 이로써 한 국 현대문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창조≫로 이어지 는 가교가 되었다. 셋째는 국학을 개척하여 민족 주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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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역사와 서지 등의 문화사적 안 목이 뛰어난 최남선이 편집을 주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 이었다. 끝으로 출판 미술 관점에서 지니는 의미를 지적 하고 싶다. 미술 분야 일본 유학 1호인 고희동의 그림을 표지로 하여 제3호까지 같은 표지를 채택했으며, 4호 또 한 고희동의 다른 그림으로 장식했다. 표지뿐 아니라 화 보와 본문에도 고희동의 그림을 실었고, 본문 삽화도 고희 동과 심전 안중식의 그림을 활용했다. ≪청춘≫은 1915년 3월에 통권 6호를 발행한 뒤에 정 간 처분을 당했다가 1917년 5월에 통권 제7호로 속간했 다. 2년 2개월 만에 속간되어 1918년 9월까지 매월 또는 격월로 4년 동안 통권 15호를 발행한 후 폐간되었다. 무단 정치 10년 동안에 총독부는 한국인에게는 신문 발행을 완 전히 금지했기 때문에 최남선이 발행하는 잡지들이 민족 언론의 명맥을 가냘프게 이어가다가 끊어진 상황이 된 것 이다. 최남선이 3·1운동에 가담했다가 2년 6개월에 걸친 옥 살이를 마치고 나온 때에는 총독부가 소위 문화정치를 시 행하고 있었다. 그는 잡지 발행 대신에 주간지 ≪동명≫ (1922. 9. 3∼1923. 6. 3, 지령 40호 발행)과 일간지 ≪시 대일보≫(1924. 3. 31 창간) 발행으로 사업을 확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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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많은 자본이 소요되는 ≪시대일보≫를 감당할 재 력이 부족했던 최남선은 신문에서 물러나 언론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말았다. 그의 언론 활동은 1928년 10월 을 전환점으로 하여 그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구분된다. 그때 최남선은 ≪동아일보≫의 촉탁을 그만두고 조선총 독부의 조선사편수회에 관계하기 시작했다. 최남선의 시 사 주보 ≪동명≫에 관해서는 제5장에서 상술한다. 언론인이자 문인, 독립운동가, 사학자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도 1928년부터 친일로 흐르고 만 것은 결국 그가 태 어났던 불행한 시대 상황과 그 자신의 운명이 아울러 작용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변절 이전 활동은 정당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조선주의와 민족주의 고취와 역사 연 구, 신문학운동,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론인으로서 남긴 업 적을 무시할 수는 없다. ≪소년≫이 창간된 11월 1일을 잡 지의 날로 기념하는 것이 그 당위성을 말해주고 있다.
참고문헌 정진석(2001). 문사 일체 최남선의 언론활동. 역사와 언론인. 커뮤니케이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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