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교수의 안식년 365일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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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 교수의 안식년 365일 1 박기철

대한민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시작하며: 생각을 담는 365일 생각 일기

입학홍보처장이라는 보직을 맡느라 3년여 늦어진 나의 연구년은 원래 안식년 이었다. 하지만 연구를 안 하고 안식하는 교수는 대학의 교수충원률에 산정하 지 않는다는 교육부 방침 때문에 연구년으로 바뀌었다. 안식년이든 연구년이 든 별 상관없다. 안식년이었더라도 교수의 기본 업무인 연구를 안 할 수 없는 것이니까. 다만 지표값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면 재정지원 혜택을 끊겠다며 교 수충원률, 학생취업률 등 몇 가지 단순지표로 대학을 돈으로 옥죄는 정부행정 에 대해서는 마음이 불편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침대의 길이에 맞춰 붙잡은 사람을 늘리거나 줄여서 잔인하게 죽이는 프로쿠스테스의 침대가 떠오른다. 시간이 지나 온전한 세상이 온다면 우리가 언제 무모하게 그랬냐며 지금을 회 고할는지 모른다. 이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할 때 나의 연구년은 이 글을 쓰는 오늘 시 작되었다. 대개 교수들이 연구년이나 안식년을 맞으면 미국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미국을 잘 모른다. 아직 미국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교 수사회에서 지진(遲進)한 부족아와 같다. 듣고 말하는 영어 실력도 짧다. 사 실 나는 개인적으로나 주관적으로 그런 부족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지 않는다. 그래도 나의 부족분을 채우기 위하여 미국에 있는 대학교의 방문교수가 되려 고 조금 알아보기도 했다. 미국에 인적인 줄이 없는 나는 그걸 알아보는 일이 무척 힘들었다. 또 요즘에 미국 대학들의 방문교수가 되려면 수천 달러를 내 야 했다. 그러다 보니 꼭 미국에서 1년을 계속 머물러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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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이 생겼다. 상황이 궁해서 가지게 된 반항적 의문감이었다. 아울러 원래 남과 같이 하는 일을 꺼리는 나의 본성적 기질이 밑에서 발동했다. 결국 연구 년 기획을 원점에서 다시 했다. 귀하게 얻게 된 연구년을 보다 의미 있고 흥미 있게 지내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궁하면 통한다고(窮卽通) 이 연구년 생각기는 그런 고민에서 나왔다. 연구년이지만 생각의 안식을 가지는 귀한 기 회였기에 책 제목에 안식년이라고 했다. 이 글은 두 학기 동안의 365일 일기다. 일기라지만 나 혼자 독백하듯 적 는 글이 아니라 이 글을 읽을 잠재 독자와 소통하며 공감을 이루려는 글이다. 또 일기라지만 단지 오늘 어디 가서 무엇을 했는지 기록하는 일기가 아니라 무엇을 보고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록하는 생각 일기다. 예전에 나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으며 가진 생각기를 111편까지 썼는데, 그것은 걷고 나 서 쓴 글들이었다. 하지만 이 생각 일기는 일기답게 매일 쓰려고 한다. 매일 찍은 사진을 보여 주면서 그 사진 속에 담긴 제 생생한 생각을 들려주고자 한 다. 글쓰기가 아니라 책쓰기로서…. 글의 편수가 365개나 되기에 글이 너무 길어지면 나중에 책으로 편집하기에 어려울 수 있기에 글의 길이는 될수록 짧 게 하려고 한다. 사진 밑의 짧은 글을 힐끗 보더라도 무슨 생각을 적었는지 직 관적이며 즉감적으로 알 수 있도록…. 난생 머리털 나고 처음 가지는 연구년 을 통하여 나, 소락의 삶도 거듭날 수 있기를 스스로 바란다. 200여 년 전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보다는 못하더라도 소락일기가 그런 삶을 생생히 담기를 바란다. 2012년 9월 1일 素樂 박 기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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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 숲에서 만끽한 숲의 은혜 2012년 9월 1일(土) 음력 7월 15일(보름달) 서울; 조금 더워도 쾌적한 날씨

돈으로 따져도 엄청난 숲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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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부터 서울에 살았는데도 서울에 안 가 본 곳이 많다. 연구년 첫날 가 본 홍릉도 그랬다. 왕이나 왕비의 무덤인 능이 있을 줄 알았는데, 구한말 비운 의 왕비였던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은 1919년에 남편인 고종의 무덤과 합장 하기 위하여 금곡의 홍유릉으로 옮겨지고 지금은 홍릉터만 남아 있다. 그 홍 릉터에 국립삼림과학원이 있고 그 주변은 무성한 숲이 있는 수목원이 되었다. 그곳에 들어서니 숲의 효능을 알려 주는 그림이 있다. 숲이 우리 대한민국 국 민에게 제공하는 공익적 가치는 약 73조 원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국내총생 산(GDP) 규모인 1300조 원 정도에 비해 73조 원이라면 무시 못 할 수치다. 그 러나 나는 이 그림을 보고 이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숲의 이익을 금액으로 환 산할 수 있는 것인가? 자본주의 세상에서 모든 가치가 모두 돈의 가치로 환산 되는 이 시대에 숲의 가치도 그리 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우리는 돈에 민감 하기에 돈으로 따지면 그만큼 더 실감날 수 있다. 얼마든지 돈으로 따져 숲의 가치를 더 정확하게 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숲이 우리에게 주는 이익을 넘 어 그 은혜나 축복을 생각하면 그것은 돈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이 무궁하다. 숲이 없어진다면 결국 남는 것은 생명의 죽음이다. 죽고 나서 돈이 무슨 이익 이고 가치가 될 것인가? 다 부질없을 뿐이다. 숲은 그냥 숲이다. 인간의 이기 적 셈법을 떠나 너무도 은혜롭고 아름답다. 그 은혜를 만끽하며 한가로이 홍 릉 숲을 두 번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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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근한 성미산 마을 없는 성미산마을 2012년 9월 2일(日) 음력 7월 16일(보름달-1) 서울; 조금 맑다 흐리다 작은 비

성미산을 지켜오는 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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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성미산마을이라는 지명을 들었다. 인구 1000만이 넘는 대도시 서울 에, 그것도 사람이 넘치는 홍익대학교 부근에 성미산마을이라니 호기심과 친 근감이 발동했다. 그래서 맘먹고 한번 가 보았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길 가는 사람들에게 성미산마을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잘 모르겠단다. 그래서 우선 산 에 올라가면 마을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나지막한 성미산에 올랐다. 올라가 니 마을은 없고 성미산 여장군과 대장군이 나를 맞는다. 산에서 만난 사람에 게 성미산마을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또 잘 모르겠단다. 성미산 근처에 살면서 어찌 그 유명한 성미산마을을 모를 수 있는지 의아했다. 성미산마을은 없고 무슨 대안학교가 저리로 내려가면 있단다. 내려가 보아 알게 되었다. 성미산 마을에 성미산마을이 없다는 사실을…. 다만 성미산 마을 공동체가 있다는 사 실을…. 이 공동체가 어떤 하나의 오붓한 마을이 아니라 성미산 인근 지역 여 기저기에 흩어진 느슨한 공동체라는 사실을…. 그 공동체를 이루는 단위들은 대안학교, 마을극장, 유기농 식료품점, 유기농 식당 등이라는 사실을…. 좀 실 망했다. 성미산마을에서 포근하게 들렀다 오고 싶었는데 그런 유토피아가 아 니었다. 그래도 이 성미산 마을 공동체(network community)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정겨웠다. 아마 이 성미산 지역 주민들의 공동체라도 없었다면 성미산 은 자본의 거대한 논리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이 정겨운 성 미산 여장군과 대장군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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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가 본 끈질긴 생명력의 현장 2012년 9월 3일(月) 음력 7월 17일(보름달-2) 서울; 조금 더워도 쾌적한 날씨

끈질긴 역사를 함께한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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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꼭 가고픈 곳이 있다. 내겐 삼양식품이 그렇다. 미아리 부근 하월곡동 에 있다. 내가 크리콤이라는 광고 회사를 다니던 1997년, 일주일에 두서너 번 오가던 광고주였다. 그해 말 IMF로 삼양식품은 부도가 나고 삼양식품의 광고 회사인 크리콤은 문을 닫았다. 이때부터 나는 방향을 틀어 박사 공부를 시작 했다. 삼양식품은 내 인생 전환기 직전에 만난 회사다. 그 어느 날 나는 삼양 라면의 TV 광고를 만들어 삼양식품 회장님께 보여 드리러 들어갔다. 마침 그 날 삼양라면의 우지(牛脂) 사건이 8년의 법정공방 끝에세네카 넣었 대법원 최 종 무죄판결이 났다. 이때 뵌 전중윤 회장님의 담담한 표정이 생생하다. 라면 의 원조로서 얼마나 억울했을까. 무고한 사건으로 삼양라면의 시장점유율은 70%에서 10%로 곤두박질쳤다. 농심라면은 10%에서 70%로 치올라 갔다. 하 지만 무지막지한 사건을 겪고도 삼양라면은 살아남았다. 삼양식품의 기업 철 학은 끈질긴 생명력이 아닐까? 삼양식품 현관문을 열고 멋쩍게 들어갔다. 사 진의 어르신께 15년 전 광고주로 모시던 회사여서 들렀다고 하니 커피도 타 주시며 정겹게 맞이해 주셨다. 1976년부터 35년 넘게 삼양식품 수위 업무를 하셨단다. 역시 삼양식품답다. 끈질긴 역사를 다 겪으셨을 터. 1919년생이신 전중윤 회장님도 건강하시다고 들었다. 희로애락을 벗어난 듯한 15년 전 회 장님의 담담했던 모습이 감격적으로 떠올랐다. 감정의 가벼운 기복을 넘는 묵 직한 담담함이 끈질긴 생명력의 바탕이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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