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방송국
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급변하는 커뮤니케이션 환경 속에서 커뮤니케이션 지식에 대한 욕구 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주제를 10개 항목으로 묶어서 달걀 꾸러미처럼 엮었습니다.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지식을 쉽게 알고자 하는 대중이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지식을 단시간에 알고자 하는 연구자, 실무자, 학생에게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
편집자 일러두기 ∙ 이 책은 한국방송협회에서 발간한 한국방송70년사에 실린 자 료를 주로 참고했습니다. ∙ 외래어 표기는 현행 한글어문규정의 외래어표기법을 따랐습니다. ∙ 이 책에 실린 삽화는 이근명 화백이 그렸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사라진 방송국 한진만
대한민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3
사라진 방송국
지은이 한진만 펴낸이 박영률 초판 1쇄 펴낸날 2013년 2월 25일 커뮤니케이션북스(주) 출판등록 2007년 8월 17일 제313-2007-000166호 121-869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 571-17 청원빌딩 3층 전화 (02) 7474 001, 팩스 (02) 736 5047 commbooks@commbooks.com www.commbooks.com CommunicationBooks, Inc. 3F Cheongwon Bldg., 571-17 Yeonnam-dong Mapo-gu, Seoul 121-869, Korea phone 82 2 7474 001, fax 82 2 736 5047 이 책은 커뮤니케이션북스(주)가 저작권자와 계약해 발행했습니다. 본사의 서면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이 책의 내용을 이용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한진만, 2013 ISBN 978-89-6680-179-4 책값은 뒤표지에 있습니다.
방송국의 탄생과 소멸
이 책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생겼다가 사라진 방송국들과 그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강점에서 해방되었다는 역사적 사실, 그리고 1980년 언론사 통폐합 조치로 인한 변화, 민영방송사가 방송규제 기관의 허가 추 천을 받지 못한 경우, 그리고 경제적인 이유나 국제 상황 의 변화 등 방송국들이 사라지게 된 원인들도 같이 제시했 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로 외국에 설치한 방송국인 국 군방송과 전문방송국으로 경찰청 방송국은 본문 형식에 맞지 않아 이곳에 기록했다. 국군방송과 경찰방송국에 관 한 자료는 한국방송협회가 발간한 한국방송 70년사의 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해방과 경성방송국 일제시대에 개국한 경성방송국은 해방과 함께 사라진 첫 번째 방송국이었다. 경성방송국이 언제까지 존재했는지 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우선 경성방송 국이라는 명칭이 해방과 더불어 사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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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등장하는 방송국을 경성방송국의 연속선에서 볼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방송국의 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인 지가 관건이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해방 이후 방 송국을 둘러싸고 나타난 현상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해방 이후 방송국을 차지하려는 움직임은 급박하게 전 개되었다. 8월 16일 광복 이튿날이 되자 소위 건국준비위 원회의 청년들이 방송국을 경비했고, 방송국 자체에서도 자위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인 8월 17일 일본 군이 다시 방송국을 접수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 다. 미군이 진주할 때까지 치안유지의 책임이 일본군에 있음을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 좌익계열 중심의 조선 건국준비위원회도 방송국을 접수하겠다고 나섰다. 9월 1일을 기해서는 일본으로부터 중계되던 일본 의 ‘동아세아 방송 체제’가 해체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에 서 인민공화국에 의한 방송국 접수 소동이 여러 차례 일어 나기도 했다. 그때마다 책임자가 바뀐다거나 서로 다른 두 개의 접수단이 동시에 도착하는 등 소동을 빚기도 했다. 한편 9월 8일 인천을 통해 미군이 진주한 후 하지 사령 관은 성명을 통해, 신문과 라디오는 금후 조선 사람을 위 한 기관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으며, 9월 9일에는 미군이 일본군을 대신해 방송국 경비를 하게 되었다. 이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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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공화국과 방송국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지만, 이러한 갈등은 9월 15일 미군 헌병이 경성방송국을 접수하게 되 면서 중단되었다(최창봉·강현두, 2001). 이날 주한 미군 사령관이 조선총독부의 각 국장을 해임하는 것과 때를 같 이해 모든 부문에서 일본인 간부가 물러나게 되었다. 이 에 따라 조선방송협회도 한국인이 인수하게 되었다. 이로 써 조선방송협회와 경성중앙방송국은 미 군정청의 정식 접수와 감독 아래 일본인에게서 한국인의 손으로 완전히 넘어온 것이었다. 10월 2일 미 군정청은 조선방송협회의 일본인 직원 전원을 해임하고 한국인 임원을 정식으로 발 령했으며, 서울중앙방송국의 기구도 편성과, 방송과, 업무 과 3과로 개편했다(한국방송협회, 1997). 따라서 경성방송 국은 이때까지 존재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계기로 한국의 방송은 비로소 완전히 독립된 방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조선방송협회의 후신인 대한방송협 회가 정부 산하로 흡수되고, 방송 사업을 정부가 국유화함 에 따라 방송국도 대한민국 공보처가 관장하는 한 기구가 되었다. 그러므로 KBS의 국영방송으로서 시발점은 이때 였다고 할 수 있다(한국방송협회, 1997, 179쪽). 한편 우리나라의 방송은 1947년 9월 3일 미국 애틀랜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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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에서 개최된 국제무선통신회의로부터 호출부호 ‘HL’ 을 할당받고, 그해 10월 1일부터 이를 사용했다. 따라서 서울중앙방송국은 이날부터 HLKA를 사용하게 되었다. 국제무선통신회의가 호출부호 HL을 정식으로 할당한 것 은 우리나라 방송의 주권을 국제적으로 인정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 방송협회는 이날을 기념해 ‘방송의 날’로 지정하고 각종 행사를 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 방송이 국제적으로 주권국가로 인정된 것 에 의미를 부여해 이때를 우리나라 방송의 기원으로 삼아 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따라서 1927년 2월 16일 개국 한 경성방송국을 우리 방송의 효시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 과 함께 우리 방송의 효시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이 부각되 고 있다. 방송의 시작으로 보아 당연히 경성방송국을 우 리 방송의 효시로 보아야 하나 방송국의 설립이 우리의 의 지와는 무관하게 일제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 방송 전사(前史)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 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성방송국은 기술 면 에서나 프로그램 면에서 일정 부분 우리 방송의 발전에 기 여했고 방송에서 바른 말을 사용함으로써 국어 순화에 이 바지했다는 점, 그리고 생활정보뿐만 아니라 민요와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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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 등을 제공함으로써 국민정서 함양에 기여했다는 점 등을 들어 비록 일제 강점기라고는 하나 경성방송국을 우 리 방송의 시작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방송의 역사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특히 경성방송국이 해방 후 언제까 지 존재했던 것으로 보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시각이 제 기될 수 있다.
1980년 언론사 통폐합과 방송계 변화 1980년은 우리나라 방송사들이 가장 커다란 변화를 겪었 던 해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신문과 방송을 포함한 언론사 통폐합이라는 엄청난 일을 벌였다. 신문은 6개 일간지만 남겨두고 폐간 조치했으며, 1도에 1개의 신문사만 존재하 도록 했다. 이때 가장 많은 방송국(사)들이 문을 닫았다. KBS와 MBC 두 개의 방송만 남겼으며 기독교방송(CBS)의 경우 뉴스를 금지하고 기독교 복음 전파만을 하도록 하는 종교방송의 범위를 분명히 했다. 즉, 민영방송을 포함해 서 경영의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던 중앙 3개사, 지방 3개 사, MBC계열사 21개사가 각각 KBS와 MBC 본사로 통합, 조정되었다. KBS는 동양방송(TBC)의 TV와 라디오, 동아 방송(DBC) 등을 인수해 TV 2개 채널, 라디오 4개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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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M 음악방송을 포함한 총 8개의 채널을 보유한 대형 방송 사가 되었다(한국방송협회, 1997, 614쪽). KBS는 1980년 11월 17일에 공영방송 체제로 기구 개편 안을 마련했다. 이에 따르면 채널 9 KBS-1TV는 종전과 같 은 편성을 하고, 채널 7 TBC-TV를 KBS-2TV로 하되 사회 교육 및 교양방송 채널로 운영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라 디오의 경우, 제1방송은 종합편성으로 운영하며, 제2방송 역시 종전대로 교육전담방송으로 두며(후에 FM 방송으로 전환되면서 제3방송이 제2라디오가 됨), 동양라디오를 제 3방송으로, 동아방송을 제4방송 즉 ‘KBS라디오 서울’로 변경하며, FM방송의 경우에는 KBS-FM을 제1FM으로, TBC-FM은 제2FM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MBC는 경향신문과 분리하는 한편, 당시 별도 법 인으로 운영되고 있던 21개 지방제휴사의 주식 51%를 본 사가 인수해 이를 계열화하게 되었다. 이때 5·16장학회 (후에 정수장학회로 개명)가 갖고 있던 주식 30%를 제외 한 민간주는 주주들이 국가에 ‘헌납’했고, 정부는 이를 1981년 12월 10일 다시 KBS에 맡겨 KBS를 MBC의 대주 주로 만들어버렸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묘한 제도였지 만 KBS가 MBC를 경영하게 되었다. 따라서 공영방송이 경영하는 방송이기 때문에 문화방송은 공영방송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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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통합·조정된 방송사 일람 방송사명
한국방송 공사
개국일
1961. 12. 31
소재지
통합 내용
서울
문화방송 소유 주식 70%를 인수함 텔레비전: 제1TV, 제2TV, 제3TV 라디오: 제1방송, 제2방송, 제3방송 FM방송: 제1FM, 제2FM, 부산FM, 대구FM 사회교육방송(제1방송, 제2방송) 해외방송(9개 국어→12개 국어)
문화방송
1961. 12. 2
서울
지방 21개 방송사(지방국, 가맹국 15)의 소유주식 51%를 인수해 계열화시킴 (부산문화, 부산문화TV, 춘천, 원주, 강릉, 청주, 삼척, 충주, 대전, 대구, 포함, 안동, 울산, 마산, 마산TV, 진주, 전주, 광주, 목포, 여수, 남양)
동아방송
1963. 4. 25
서울
KBS에 흡수 합병
동양방송
1964. 5. 9
서울
KBS에 흡수 합병
전일방송
1971. 4. 24
광주
KBS에 흡수 합병
서해방송
1969. 10. 2
군산
KBS에 흡수 합병
한국FM
1971. 4. 25
대구
KBS에 흡수 합병
기독교방송
1954. 12. 15
서울
복음 방송만 전담
출처: 한국방송협회(1997), 한국방송 70년사, 6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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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를 내세웠다(최창봉·강현두, 2001).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나라의 방송은 공영방송 체제가 된 것이다. 한편 기독교방송은 1980년 11월 24일부터 보도방송을 할 수 없게 되었고, 12월 1일부터는 광고방송도 할 수 없 게 되면서 순수 복음방송만 하게 되었다. 기독교방송의 보도요원들은 KBS에 흡수되어 교회와 교인의 헌금으로 운영되는 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없어진 방송국 중 본문에서 다루지 않은 한국FM(방송 구역: 대구시)도 1980년 방송사 통폐합 당시 KBS로 흡수 통합된 방송국이다. 한국FM은 대구광역시에 위치했던 FM라디오 방송국이었다. 1971년 4월 25일 개국했으며, 호출부호 HLCB, 초단파 89.7MHz의 주파수로 방송되었 다. 이후 1980년 언론 통폐합으로 인해 한국방송공사에 흡수되어 KBS 대구FM방송으로 변경되었다.
재허가 추천 거부로 사라진 방송국 지상파방송 중 허가가 취소되어 문을 받은 첫 번째 방송국 은 경인방송(iTV)이었다. iTV는 1997년 10월 11일 개국했 으며 인천광역시와 경기도를 방송권역으로 하는 지역의 독립 민영방송국이었다. 처음에는 인천방송(주)였다가 2000년 3월 22일 경인방송(주)로 명칭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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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방송국은 출범부터 경영상 어려움이 예견되었 다. 지역 민영방송국들 중에서 유일하게 SBS와 가시청권 이 겹침으로써 독립국으로 존재해야 할 뿐만 아니라 2000 년까지 인천을 제외한 경기 남부와 북부 지역에서는 iTV 의 프로그램을 시청할 수 없는 반쪽짜리 지역방송에 지나 지 않았기 때문에 광고 시장을 확대하는 데도 많은 어려움 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프로그램을 자체 제작 편성해야 하는 부담에 더해 제한된 협소한 광고 시장은 경영에 어려 움을 더했다. 처음에는 노사가 머리를 맞대고 난국을 풀어가려는 노 력도 기울였으나 경영진과 노조가 충돌해 운영의 파국을 맞게 되었다. iTV의 노조는 지배주주인 동양제철화학이 결코 iTV로 인해 손해 본 것이 없고 오히려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고 비난했다. 즉, 동양제철화학이 iTV에 투자한 자 본금은 400억 원이었는데,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은 다시 동 양제철화학으로 흘러들어갔다는 것이다. 1997년부터 동 양제철화학은 iTV 사옥 임대료로 250억 원을 받아갔으며, 현금유동성 자본이 부족한 iTV에 돈을 빌려주고 고율의 이자 역시 챙겼으며, 그 밖의 유무형 이득을 챙겼다는 것 이다. 방송사는 심각한 경영위기에 봉착해 있지만 대주주 는 오히려 막대한 부를 창출해 가고 있는 iTV의 모순을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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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잡고 공익적 민영방송을 실현하기 위해 iTV 노조는 지 배주주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노조와 주주는 소 유구조 개편을 포함한 iTV의 개혁과 생존을 위한 방안을 공식적으로 제안했고, 이수영 회장은 이를 받아들였다(새 언론포럼, 2008). 동양제철화학과 노조는 논의를 계속했으나 오히려 불 신만 쌓여갔고 급기야 동양제철화학 측은 수개월 만에 ‘노 조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표명하기에 이른 다. 노조는 공익적 민영방송을 실현하기 위해 지배주주와 전면전에 돌입한다고 선포하고 2004년 11월 9일부터 무 기한 파업에 들어갔으며, 사측은 이에 직장 폐쇄 조치로 맞섰다. 결국 당시 허가 추천권을 갖고 있었던 방송위원회는 2004년 12월 21일 iTV에 대한 재허가 추천을 거부함으로 써 방송국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방송국의 폐국은 사측이나 노측이 양보하지 않으면 어떠한 일이 벌 어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가 되었다. 대한민국 방송 80년 역사에서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사 업 수행을 위한 재정 능력 부족이 iTV 재허가 추천 거부의 가장 큰 사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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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텔레비전 방송국의 무리한 탄생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인 KORCAD의 HLKZTV는 개국한 지 불과 4년여 만에 문을 닫았다. 이 방송국 은 탄생부터 무리였다. 민영 상업방송으로 개국한 이 방 송국은 재원이 방송광고일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방송광 고 시장은 너무나 열악한 상태에 있었다. 전쟁 이후 채 복 구가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경제적 여건이 매우 나쁠 수밖에 없었다. 방송을 통해 광고를 하고 그것을 수용할 만한 여력이 사업가나 수용자 모두에게 부족했던 것이다. 또한 당시 TV방송을 수신할 수 있는 수상기가 가정에 보급되지 못한 상태라는 점도 방송국에는 한계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서울 시내에는 200∼300대 정도의 TV 수상기가 있었을 것으로 추산되었다. 그리고 TV 수상 기의 가격은 17인치 한 대가 37만 5000환(14인치 한 대에 34만 환이었고, 당시 쌀 한 가마에 1만 8000환이었다는 식 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음)이었는데, 이는 5급 공무원의 1년치 봉급과 맞먹는 것이었다. 당시는 라디오조차 보급 이 많이 되지 않았던 때였다. KORCAD를 설립할 때 목표 중 하나가 TV 수상기 보급이었는데, 그 실효를 거두기 어 려웠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무엇보다도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이 한 개인에 의해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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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황당하게 시작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 다. 한국전쟁 후 KBS를 복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공보실 의 방송 확대 보급 계획에 따라 당시 RCA의 한국대리점을 경영하던 황태영은 KBS라디오 기자재 도입을 의뢰받는 다. 그는 곧 방송장비 발주를 위해 미국의 RCA를 방문, TV 수상기 200대와 시설자재 15만 달러어치 구매협약을 체 결한다(황태영, 1976). 당시 상거래의 수수료를 현찰로 주 지 않고 현물과 외상거래에 만족해하는 RCA 측과 그 기자 재를 바탕으로 자신이 직접 텔레비전 방송국을 해보고 싶 어 했던 황태영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이범경, 1994). 박기성 교수는 RCA가 황태영의 건의를 수락한 것 은 자신들이 제작한 텔레비전 수상기를 해외에 판매하기 위해 시장을 개척할 필요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평가하 기도 했다(박기성, 1985). 어쨌든 한 나라의 텔레비전 방송국의 시작이 한 개인에 의해 주도되고 이루어졌다는 점은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황태영은 TV 수상기를 대량으로 들여오는 것 에 대해서 공보실과 재무부 등 정부 관련 부처에서 시기상 조라고 판단하고 달갑지 않게 여겨 시간이 지체되자 당시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 직접 건의서를 내서 승낙을 받 아내기까지 했다. 방송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검토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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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방송기자재 판매 상인의 즉흥적인 생각과 정부 부처의 검토를 무시한 대통령의 결단, 그리고 방송기자재를 팔기 위한 RCA의 상업적 욕심이 한데 어우러져 벌인 일의 결과 가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 개국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방송국이 그다지 오랜 기간 버티지 못한 것 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주한미군방송에 대한 평가 비록 주한미군과 군속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이었지만 주 한미군방송인 AFKN이 우리 방송에서 차지한 역할은 대 단했다. 최초의 민영 텔레비전 방송인 HLKZ-TV가 화재 로 인해 방송이 어려울 때 스튜디오를 빌려 주어 방송이 끊이지 않게 했다. 또한 AFKN방송은 해방 이후 미국과 관 계가 중요성을 더해가는 한국 상황에서 영어를 학습할 수 있는 효율적 수단이 되었다는 점과, 낯선 미국문화를 소개 하여 한국인이 이해하도록 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긍정 적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런 규제 없이 미국문화가 그대로 안방으로 침투되는 데에 대한 우려와 전파 자주권 등을 둘러싼 논란 또한 끊이지 않았다. 1980년대 이전부터 해외 주둔 미군 에 VHF주파수를 제공하던 국가들이 점차 미국과 교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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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 이를 환수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결국 1990년대 한 국은 유일하게 VHF 채널을 주둔 미군에 제공하는 국가로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채널 환수는 국가 차원의 위신 문 제로 대두되었고, 곧 전파 관리의 자주권 회복 문제로 이 해되었다. 그리고 한국인의 문화 감각으로는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폭력물이나 에로물을 여과 없이 방영함으 로써 벌어진 저질 미국문화에 대한 논란과 한국 청소년들 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 등에 대한 논란 등이 주요 쟁점 들로 부각했다. 1996년 5월 30일 ‘채널 2’의 정식 환수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그때까지 주한미군방송은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우리 방송의 한 영역을 담당해 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국군방송 국군방송은 우리나라 최초로 외국에 설치한 방송국이다. 이 방송국에 대한 자료는 한국방송협회에서 발간한 한국 방송 70년사에 수록된 것이다. 1965년 4월 한국·미국·월남 3국 사이에 한국군의 월 남 파병문제가 논의되고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때 한국군 을 위한 방송국 설치 문제도 협정에 포함됨으로써 우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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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서는 역사상 최초로 국군의 사기 진작을 위한 방송국 을 외국 땅에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1965년 9월 25일 청룡부대와 맹호부대가 월남에 파견 되자 국군방송실에서도 현지 방송국 설립을 위해 군방송 실 요원을 월남에 파견하게 되었다. 제1진으로 파견된 군 방송 요원은 퀴논에서 월남군 방송시설을 이용해 1965년 11월 15일부터 하루 20분씩 국군의 방송을 실시하는 한 편, 월남 정부에 국군방송국 설치를 위한 무선국 개설 허 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 허가 신청에 대해 월남 정부에 서는 1965년 12월 6일 무선국 설치 허가를 내주고, 전파 관리 당국은 1966년 1월 14일에 주월 한국군 사이공 방송 국에는 주파수 1440kHz를, 지방국에는 1400kHz를 할당 했다. 이에 따라 국군방송실은 1966년 2월 22일 KBS 직원을 포함한 주월 한국군 사령부 방송실에서 근무할 방송 요원 13명을 파견하는 한편, 본격적으로 방송국 개설을 서둘러 우선 퀴논에 출력 50W의 방송 장비를 설치하고 1966년 3 월 2일 시험 전파를 발사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동년 4월 15일을 기해 주월 한국군 퀴논 방송국이 개국됨으로써 역 사상 최초로 외국 땅에서 우리나라 방송국이 탄생했다. 그런데 이 소출력국은 우리 국군의 작전 지역이 급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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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되어 감에 따라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되어 개국한 지 불과 2개월여 만인 6월 20일에 출국을 250W로 증강했다. 이후 청룡, 맹호부대에 이어 백마, 십자성 등 한국군이 속속 증파됨에 따라 퀴논의 1개국만으로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에 군방송실에서는 제2진 방송 요원을 급파해 1967년 2월 1일에 사이공 방송국을 개국하게 되었다. 이어서 4월 4일에는 나트랑 방송국을 개설했으며, 1968년 3월에는 호이안 방송국을 설립했다. 그동안 군방송실이 작전 지역을 중심으로 4개의 소출 력국을 개설해 방송을 실시하고는 있었지만 한국군의 작 전 지역이 더욱 확대되어 감에 따라 난청지역이 늘어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출력을 증강키로 하고, 미국 측과 주월 한국군 방송국의 시설 보강과 출력 증강에 대해 협의한 끝에 미국의 지원으로 1969년 3월 1 일에는 투이호아에 공중선 전력 50W의 중계소를 설치하 게 되었다. 1969년과 1970년 사이에는 퀴논 방송국에 Gates 10kW 중파송신기를, 사이공과 나트랑 방송국에는 Gates 5kW 중파송신기를 각각 설치해 출력을 증강하고, 호이안과 투이호아 방송국은 1kW로 각각 출력을 증강했다. 1973년 3월 17일 월남에서 전 한국군이 철수하게 되면 서 국군방송의 역할도 종지부를 찍고 각지에 설치했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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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설을 철거해 본국으로 이송하게 되었다(한국방송협 회, 1997).
경찰방송국 전문방송국인 경찰방송국(PBS)에 대한 자료는 한국방송 협회에서 발간한 한국방송 70년사에 수록된 것이다. 1964년 5월 19일 호출부호 HLM20, 주파수 7.170MHz, 공중선 전력 2.5kW의 단파방송을 개시하면서 경찰방송 이 개국되었다. 연주소의 위치는 내무부 청사 내에 있었 고 송신소는 삼청동에 두고 있었다. 서비스 지역은 전국 이며 일반 청취자도 단파수신기를 소지한 사람이면 청취 가능한, 일종의 경찰 행정 PR 방송이었다. 방송시간은 하 루 세 차례에 걸쳐 4시간 내외였고, 일요일은 방송을 하지 않았다. 매시간 KBS 뉴스를 중계한 다음, 경찰방송이 독 자 제작한 뉴스도 방송했고, 기상예보 방송은 고정적으로 실시했으며 때로는 KBS 방송을 재방송하기도 했다. 이 경찰방송은 내무부 치안국 경무과 홍보계에 소속되 어 있었고 방송 관리, 편성, 기술, 아나운서 등 6명의 방송 요원들이 운영했다. 방송시설은 66㎡(20평)의 스튜디오 를 갖추고 콘솔을 비롯해 녹음기 4대, 턴테이블, S-T 링크 용 T-14 FM송신기, NC-1830 수신기, T-158 2.5kW 단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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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기, S-T 링크용 R-19 FM수신기, 각종 마이크로폰 5개 등을 비치하고 있었다(한국방송협회, 1997). 이 경찰방송국은 2000년 개국한 경찰청방송국(PBN)과 는 다른 방송국이었다.
참고문헌 박기성(1985). 한국방송문화연구. 나남출판. 새언론포럼(2008). 현장기록, 방송조조 민주화운동 20년. 커뮤니케이션북스. 이범경(1994). 한국방송사. 범우사. 최창봉ㆍ강현두(2001). 우리방송 100년. 현암사. 한국방송협회(1997). 한국방송70년사. 황태영(1976). 200대에서 발족한 한국 TV방송 20년. ≪신문평론≫ 5월호,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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