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가로수길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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Тёмные аллеи 어두운 가로수 길


캅카스

모스크바에 도착한 나는 은밀히 아르바트 근처 골목에 있는 허름한 여인숙에 여장을 풀었다. 그녀와 밀회를 하는 시간 을 제외하곤 은둔자처럼 지내는 지겨운 날들이었다. 그녀는 모두 세 번 내게 찾아왔었는데 매번 “잠깐 들른 거예요”라며 서둘러 들어서곤 했다. “내 생각에, 그이가 뭔가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이 는 잔인하고 자존심 강한 사람이라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 계획이 성공하려면 정말 극도 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돼요. 일단 그이의 허락은 얻어냈어 요. 만약 따뜻한 남쪽 바다를 보지 못한다면 내가 죽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이가 하게 만들었지요. 그러니까 제발, 조금만 참아요!” 캅카스 해변으로 같이 기차를 타고 떠나 그곳 어딘가 아 직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장소에서 삼사 주 동안 함께 지내 는 것. 우리의 계획은 이렇듯 대담했다. 언젠가 젊고 고독했 던 시절 잠시 소치2) 근처에 살았던 나는 그 해변을 알고 있

2) 러시아 흑해 연안의 휴양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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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차가운 잿빛 파도가 넘실대는 바닷가와 검은 삼나무 사이의 그 가을밤들을 언제나 잊을 수 없었다. 내가 미리 예약해 둔 일등칸의 객실 안은 빗줄기가 요란 하게 지붕을 때리며 흐르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창 커튼을 치고 앞치마에 손을 문지르고 있는 짐꾼에게 팁을 쥐여주고 그가 나가자마자 문을 걸어 잠갔다. 잠시 후 커튼을 살짝 젖 히고 역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 속에 짐을 들고 분주히 오가 는 여러 다양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못 박은 채 숨을 죽였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역에 도착하고 그녀는 될 수 있는 대로 늦게 도착하기로 미리 약속을 해두었다. 두 번 째 기적이 울렸다. 늦어지는 것일까! 그가 마지막 순간에 그 녀를 붙잡았다면! 그러나 그런 생각을 마치기가 무섭게 장 교모와 몸에 꼭 맞는 외투, 가죽 장갑의 훤칠한 그의 모습이 이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짐꾼이 제대로 짐을 가져다 놓았 는지 자상하게 살피고는 장갑과 장교모를 벗고 그녀와 작별 의 입맞춤을 나눈 뒤 그녀에게 성호를 그어주었다. 세 번째 기적이 요란하게 귀를 울렸고 움직이던 기차가 잠시 멈칫했 다. 다시 기차는 덜컹거리며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고 이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달렸다. 차장이 그녀를 내가 있는 객실까지 안내해 주고 그녀의 짐을 들어다 주었다. 29


“점심을 못 먹었어요. 이 끔찍한 역할을 끝까지 해낼 수 없을 것만 같았죠. 목이 몹시 마른데 물 좀 줄래요? 그 사람 내 뒤를 쫓아올 게 분명해요. 신이 함께하시길. 이 고통보다 차라리 죽음이 더 편할 것 같아요.” 겔렌지크와 가그라에서 그녀는 어디에 묵게 될는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는 엽서를 그에게 띄웠다. 그리고 우리는 해안을 따라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사람의 손이 전혀 미치지 않은 장소를 찾아냈다. 그곳엔 플라타너스 숲과 관목 숲이 우거지고, 마호가니와 목련 그리고 석류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서 있었다. 나무들 사이로 부챗살처럼 퍼진 종려나무가 고개를 내밀었고 삼나 무들이 검게 짙어갔다…. 나는 아침 일찍, 우리가 보통 차를 마시는 시각인 7시 전 에 눈을 떴다. 그녀는 아직 자고 있었다. 나는 언덕배기를 따라 울창한 숲으로 향했다. 날씨는 맑았고 태양은 벌써 강 렬하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숲 속의 향긋한 푸른 안개 가 흩어져 사라져갔다. 멀리 숲 속 끝 저 너머로 보이는 눈 덮인 산의 아득한 옛날의 순백색이 눈부셨다. 황혼 녘이면 종종 멋진 구름들이 지평선에 차곡차곡 쌓 여 불타올랐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녀는 가끔 긴 의자에 누워 주란사 목도리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이제 30


이삼 주만 지나면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가야 하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우리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숲에서 바다로 향하는 해안 골짜기의 맑고 가는 강줄기가 돌길을 따라 물살을 일으키며 빠르게 흘렀다. 산과 숲 너머에서, 무슨 경이로운 존재처럼 만월을 지켜보는 그 비밀스러운 시간에, 강물은 섬광 같은 포말을 만들고 부서지면서 아주 멋지게 흘러갔다. 밤이면 가끔 산에서 어두운 구름이 몰려와 사나운 폭풍 이 불었고 무덤 같은 어둠에 싸인 숲은 끊임없이 펼쳐지는 녹색 심연의 마법으로 소란스러웠다. 높은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쩍 하고 갈라지면 숲 속에서는 독수리 새끼들이 잠 에서 깨어 울어댔고 표범이 큰 소리로 울부짖었으며 들개들 이 짖어댔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며 행복하게 눈 물지었다. 그는 그녀를 찾으려고 겔렌지크로, 가그라로 그리고 소 치로 헤매고 다녔다. 소치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그는 바 다에서 해수욕을 하고 말끔히 면도도 했다. 그리고 깨끗한 속옷으로 갈아입고 눈처럼 새하얀 여름 제복을 입었다. 그 는 묵고 있는 호텔의 레스토랑 테라스에서 아침 식사를 했 다. 샴페인 한 병을 비우고 샤르트뢰즈3)를 곁들인 커피를 마신 후 천천히 담배를 피웠다. 방으로 돌아온 그는 소파에 31


누워 관자놀이에 연발 권총의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겼 다.

3) 프랑스 최고급 리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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