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기억 문화 연구 태지호
대한민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Reading Memory: 기억의 징후
왜 기억인가 최근 들어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기억’에 대한 주목도가 매우 높아지고 있다. 국내외적으로 논쟁에 있는 여러 사안들은 ‘기억’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국내 사례 만 보더라도 계속해서 불거지고 있는 역사(교과서) 논쟁, 위안부 문제 등과 같은 근현대의 한일 역사 문제, 그리고 다양한 기념일 행사 등 일련의 상황들은 우리 사회가 과거 를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하는가, 다시 말해 어떻게 기억하 는가에 대한 논의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러한 기억들은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문화적 실천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역사 소설, 역사 드라마, 역사 영화, 역사 다큐멘터리, 역사 박 물관 등과 같이 ‘역사’라는 표현을 쓰는 재현들과 축제, 공 연, 만화 그리고 웹사이트에 이르기까지 대중문화의 상당 수는 기억의 문제를 동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은 단지 각 개인들이 소비하는 텍스트들로 끝나는 것이 아 니라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그리고 문화적인 문제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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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반한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기억은 단지 개 인 영역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 실천과 연 관된 문제적 개념인 것이다. 기억이 과거의 사건을 간직하고 되살리는 행위라는 점 에서 보면, 그러한 과거가 존재해 온 연혁을 탐구하고 이 를 기록하는 역사와 매우 유사한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과거에 대해서 역사가 아니라 기억의 관점에서 접 근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기인한다. 첫째는 역사의 오랜 연구 전통과 견고한 위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그 대안이자 보완을 위해 기억이 대두 했다는 점이다. 포스트역사주의 관점에서 진리의 발견과 과학으로서 역사는 비판되고 있으며, 이는 과거를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는 기억 방 법 혹은 기억술의 대두다. 영상 미디어 보편화와 뉴미디 어로 대표되는 최근의 미디어 변화상은 기억이라는 개념 이 단지 정보처리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 반에 걸친 문화적 실천과 담론들의 생산·수용에 영향을 미치는 주제로 인식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배경 으로 최근 들어 다양한 기억 담론들도 생산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기억에 대한 사회적, 문화적 논의의 폭이 매우 넓어지고 있다. 따라서 본격적인 기억 문화 연구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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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이러한 두 가지 논점이 의미하는 것 은 무엇이며, 이를 통해 어떻게 기억 문화 연구에 접근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역사의 개념과 전통 역사는 기억과 마찬가지로 과거를 현재의 의식 속으로 불 러내어 현재 관점에서 다시금 간직하고 보존하는 행위다. 하지만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과거에 대한 여러 문화적 재현들은 ‘기억’보다 ‘역사’를 수식어로 하여 표현하는 것 이 더 익숙한 듯하다. 실제 과거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 역사는 기억보다 보편적이다. 그리고 역사는 오랜 기간 과거를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인정받아 왔다. 일반적으로 역사의 개념은 과거에 일어난 사실 자체, 과거 사실에 대한 기록, 그리고 학문으로서 역사학이라는 세 가지 의미로 논의된다(임희완, 1994, pp.22∼27). 이 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과거에 일어난 사실로서 역사는 인간의 집단 경험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러한 과 거 사실은 이미 지나간 사건이기 때문에, 그것이 기록될 때만 역사로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 개념 은 과거를 실증적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가, 혹은 관념 적이고 주관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가라는 관점에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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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논의할 수 있다. 전자가 ‘과거에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 는가’에 집중하는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 를 중심으로 한 사료 중심의 객관주의적 역사관이다. 이 에 비해 후자는 ‘과거의 사건들을 일으킨 사람들의 내적 사상이나 이념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베네데토 크로체 (Benedetto Croce), 로빈 조지 콜링우드(Robin George Collingwood) 등 인간 정신을 강조한 주관주의적 역사관 이라 할 수 있다(김현식, 2006; 임희완, 1994). 따라서 전 자는 과거의 사실을, 후자는 과거의 기록을 강조한 전통이 라 할 수 있다. 어느 쪽에 집중하건, 이 둘 모두 일련의 개 념이나 이론, 방법론을 통해 학문적으로 다룰 수 있다. 이것이 역사학으로서 역사 개념이며, 기억과 역사가 구 별되는 뚜렷한 개념적 특성 중 하나다. 역사 개념에는 기 억과 달리 분과 학문의 위상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역사란 인간의 과거에서 특정한 것을 선택하고 이를 사료를 통해 수집·정리하며, 역사가의 특별한 인식과 방 법을 통해 역사학으로서 현재화하는 일련의 과정을 포함 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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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객관주의적 역사관과 주관주의적 역사관의 상반된 논의 에 대해서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는 양자 모두를 비판하면서, 역사는 해석이지만 동시에 사실의 정 확성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Carr, 1961, pp.27∼35). 카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 다”(Carr, 1961, p.35)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역사 연 구가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학자라는 양 측면이 상호 보완적 관계를 가져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카의 역사 인식은 인간에 의해 구성된 사회적 파생물이라는 관 점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동시에 객관적 사실에 대한 주 관적 인식의 균형 있는 이해를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 다(태지호, 2012, p.11). 즉, “해석 없는 사실은 없으며, 사 실이 부재해도 해석은 없다”는 것이 카의 논의다(Banard, 2001, p.23). 카의 역사 인식은 그 논의가 시작된 1961년 이래로 역사학계에서 오랜 기간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하지만 카에게 모든 역사는 목적론적이거나 메타 서사 와 관련을 맺을 때에만 역사학으로서 가치를 지닐 수 있 었으며, 특히 그가 강조한 진보의 귀결은 볼셰비키 혁명 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의 실현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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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성을 발견해야만 했고, 동시에 미래에 어떻게 기여하 는지에 대한 대상으로서 과거를 연구하였다(Evans, 1997).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카의 주장이 역사적 사실에 대 한 존재를 설정한 것이며, 그 사실과 역사가의 대화를 통 해 역사가 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 점이다. 카는 역사적 사실이 역사가의 현재적 인식 밖에 객관적으로 실재한다 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역사적 사실의 실재성으로부 터 역사가와 대화를 보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김기봉, 2008, p.22). 하지만 실제 알렉스 캘리니코스(Alex Callinicos)와 같은 학자는 “역사적 사실들은 탐구 과정의 출발점이 아니라 그 결과”(Callinicos, 1995, p.137)가 될 수 있으며, 역사가가 그 과정에서 주관적인 자율성을 가지 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즉, 역사적 사실이란 역사가와 대화를 나누는 대상이기는 하지만 결코 그 주체 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역사가에 의해 현재 관점에서 의 미 있는 것으로 구성될 수 있는 것들이다. 결국 카의 주장 에서는 과학으로서 역사와 그 지향점으로서 진보를 서술 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이 전제되고 있는 것이며, 그에 따 른 역사가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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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으로서 역사 카에 대한 비판은 역사가 특정 시공간의 담론(Discourse) 이며, 그에 따른 서사적 특질을 통해 과거에 대한 특정한 진리 효과와 연관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시작할 수 있다 (태지호, 2012, p.12). 담론으로서 역사에 대한 논의는 보 편적 진리 추구를 위한 과학으로서 역사를 반박하는 것이 며, 특정한 사회적 가치와 그에 근거한 역사의 사회적 구 성성과 연관된다. 역사(학)를 비판하고 있는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에 의하면, 담론은 말하고 있는 대상을 체계적으로 형성시키는 실천이다(Foucault, 1969, p.49). 특히 “담론의 모든 영역들은 동등하게 열려 있거나 접근 가능하지 않다”(Foucault, 1971, p.27). 이는 단순히 기호 나 내적 일관성을 지닌 생각 혹은 언술의 집합이 아니며,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된 규칙에 복종하는 실천 양식으로 서 사회적 관행과 연관성을 가진다(Mills, 2004, pp.110∼ 111). 그러므로 어떤 주제에 대한 진술이 특수한 담론 내 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 주제가 특정한 방식으로 구성 된다는 것이며, 그 방식의 한계 또한 설정됨을 의미한다 (Hall, 1992, p.427). 따라서 담론은 상호 주관적으로 이해 를 위한 기준을 제공하며, 인식론적 태도를 수반한다(Bal, 1999, p.7). 이러한 담론 관점에서 보면, 시공간을 초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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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유일한 ‘역사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복수로서 ‘진 리들’만 있을 뿐이다(Poster, 1984, p.24). 담론으로서 역사는 현재 상황에 따라 그 모습이 상이하 며, 그에 따라 나타나는 재현일 뿐이다. 따라서 ‘역사라는 담론’의 주체는 누구이며, 어떠한 목적으로 이를 수행하는 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푸코는 이에 대해서 ‘고고학’ 과 ‘계보학’이라는 개념으로 비판하였다. 고고학은 근대적 인식론과 인간 과학의 이중적 구조라는 콘텍스트 속에 인 간 과학의 탄생을 이론화하고 있는데, 고고학적 관점에서 역사 인식이란 시대와 공간의 차이에 따라 생기는 담론으 로, 각기 다른 규칙과 기능이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인식에서 그 결정에 관한 특수한 사례는 더 이상 한 주체와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이루는 담론의 실 행들에 관련된다(Billouet, 1999, p.95). 이후 푸코는 계보 학을 통해 인간 과학이 전제하고 또 부추기고 있는 권력관 계를 크게 부각시키기 위해 담론의 효과와 그 물적 조건을 강조한다. 즉, 담론이 특정한 지식이 되며, 이는 권력과 함 께 형성되고 교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푸코에 의하면 “권 력은 지식을 창출하며, 권력과 지식은 상호 직접 관여하 고, 또한 어떤 지식 영역과 상관관계가 조성되지 않으면 권력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식하는 주체, 인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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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할 대상, 인식의 양태는 모두가 권력-지식의 기본적 인 관계와 그것들의 역사적 변화의 결과들”(Foucault, 1975, p.59)이다. 결국 지식이란 권력에 종속되는 개념이 아니라 현대 산업사회의 ‘발전과 확장의 기술’에 본질적 구성 요건인 것이다(김형효, 2008, p.512). 이와 같은 관 점에서 보면, 진보 사관에 근거한 카의 역사 구성 방식 자 체가 담론일 뿐이며, 동시에 그가 지향한 역사 인식 또한 담론의 요건일 뿐이다. 이러한 논의를 종합하면, 담론으 로서 역사는 진리 효과를 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역사는 과학이 아니며, 이것이 역사를 과학화하려 시도했던 카를 비롯한 그간 역사학이 빚은 오 류 중 하나다(태지호, 2012, p.16).
언어학적 전환과 역사의 이야기성 담론으로서 역사는 언어학적 전환(linguistic turn)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이는 좁은 의미에서 말과 글이라는 언어 가 아니라 법칙을 가지고 있는 일련의 기호 체계라는 의미 의 언어이며, 이해하고 정의할 수 있는 문화 시스템으로 설 명된다. 언어학적 전환은 철학적으로는 후기 루트비히 비 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과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가 전통적인 경험주의의 무용성과 더불어 신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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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의 관점에서 주장한 것이며,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의 인류학,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언어학 등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인식론적 전 환의 특성이기도 하다(Roberts, 2004, p.228). 특히 로티 는 본래 진리에는 대응이란 것 자체가 불가능하며, 인식은 언어를 벗어나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실제 세상에 대해 언급할지라도 이는 언어의 그물에서 행해지는 결과에 지 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언어학적 전환에 근거하면, 역사는 내러티브를 방법으로서 필요로 하며, 그에 따라 구성된다고 볼 수 있 다. 특히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는 근대 산업사회 의 우월성에 대한 유럽의 역사의식을 비판하면서 역사는 “말과 자연, 과거의 구조와 과정을 어떤 모델이나 도상으 로서 설명하려는 서술적 산문 담론의 언어 체계이며, 그러 한 형식은 과거의 구조와 과정을 밝히기 위한 설명으로서 존재한다”(White, 1979, p.12). 이렇게 보면 앞서 언급한 카의 역사적 사실로서의 사건은 실제 하나의 연속적인 요 소로서 ‘거기에’ 있을 뿐이며, 그 사건은 이야기 요소로서 ‘기능하지’는 않는다(White, 1979, p.17). 이는 역사가 역 사가의 중재 작업을 통해 재창조된 과거에 대한 일종의 구 성물임을 의미하는 것이다(Dosse, 1999, p.79; Jenk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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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p.43). 즉 역사가들이 이러한 개별적인 사건들을 특 정한 이야기로서 구성하고, 의미화하며, 여기에 일련의 규칙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화이트는 이러한 논의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피면서, 역사가 마치 문학처럼 일종의 플롯을 구성하게 되고 이를 통해 사건이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이야기의 플롯 구성이 과거의 사건을 역사로 서 증명하기 위한 형식논증법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 서, 역사는 결국 언어학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White, 1979, p.45). 이렇게 보면 과거는 언어학적 규약에 의해 역사라는 특정한 예시로 나타날 뿐이다. 과거를 현재화 한 역사라는 구성물은 필연적이 아닌 언어(기호)와 같은 자의적인 산물이다. 그러므로 메타역사적인 근거에서 자 연 현상과 역사 현상은 구분되어야 하며, 언어 형식으로 구성된 역사는 정신적 지각 대상으로 예시될 수 있다 (White, 1979, pp.534∼535). 역사란 지나간 과거와 현재 의 관련성을 위해 배치된 현재 시간의 구성물에 불과한 것 이다(Benjamin, 1942, pp.353∼355). 또한 유리 로트만(Yuri Lotman)과 같은 기호학자도 서 사체의 양상이 역사의 재료로 전이되는 상황을 문화기호 학의 관점에서 주목한다. 로트만에 의하면, 서사체의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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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에 역사적 문서를 종속함으로써 각 ‘스토리’에는 도덕적, 철학적 또는 문학적 공명이 주어지게 되며, 이는 역사가의 인식 속에 있는 서사체 모델들에 의해 생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Lotman, 1990, pp.353∼354). 따라서 “연구자 사 고 과정의 서사성은 연구자가 창조하는 역사의 구성에 영 향력을 가지게 된다”(Lotman, 1990, p.355). 이를 정리하면, 과거에 대한 의미는 원래부터 그 자체 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는 외부에 의해 부여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항상 누군가를 위해 존재 한다(Jenkins, 1991, p.69). 동시에 역사란 어떤 집단이나 특정 계급이 과거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고 그에 대한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Jenkins, 1991, p.117). 제국주의, 파시즘, 민족주의, 인 종주의, 국가주의, 지역주의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는 특 정한 현실의 이해관계와 역사의 상호작용과 무관하지 않 다. 결국 ‘언어로의 전환’은 내러티브와 지식의 구성성에 대한 유효성과 본질을 넘어서는 광범위한 논쟁으로 이해 해야 하며, 그에 따라 과거에 대해서 역사가 아닌 다른 관 점에서 논의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 다(Blight, 2009,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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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방법 혹은 기억술의 ‘역사’ 인간 사회의 본질을 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 다고 가정한다면, 그 과정에서 기억의 개념은 반드시 수반 되어야 할 주제다. 커뮤니케이션이 일련의 소통 행위라고 매우 간략하게 정의할 때, 이를 위해서는 말 그대로 미디 어가 ‘매개’해야 한다. 미디어는 소통을 위해 정보, 감정, 생각, 의견 등을 저장하여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미디어에 담기는 일련의 ‘메시지’들은 사실 ‘담기 는 그 순간’부터 이미 과거의 메시지가 된다. 다시 말해,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어떠한 미디어가 활용되더라도 송신자는 기존(과거)의 메시지를 미디어에 담아 수신자에 게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송·수신 자가 과거에 경험한 것들 즉 기억한 것을 토대로 하여 진 행되는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은 기억에 의 존하여 수행되는 인간 활동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커뮤니케이션의 역사는 어떠한 방법을 통 해 기억하여 왔는가와 연관될 수 있다. 특히 미디어 역사 는 곧 기억 방법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 미디어가 정 보를 전달하고 저장하는 것이 그 기본 기능이라고 한다면 이는 기억 방법 혹은 기억술과 다르지 않다. 본래 인간의 기억 방법은 동물과 동일하게 뇌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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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을 인지하고 저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집단생활의 효율성을 위해 인간은 구두 언어와 문자를 통해 정보를 전 달하고 저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가장 오래된 미디어이 자 동물과 구별되는 대표적인 인간만의 기억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구두 언어는 송·수신자가 동일한 공간에 있어야 하며, 특히 메시지의 전달과 동시에 사라지기 때문 에 저장되지 않고 다시 송·수신자에게 기억될 수밖에 없 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문자가 발명되었고, 이는 시공 간의 제약이 구두 언어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었으며, 특히 메시지를 저장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러한 문자 가 미디어로서 전성기를 맞게 된 것은 인쇄 미디어와 결합 되면서부터였다. 그전에는 필사(筆寫)를 통해 메시지를 문자로 저장하고 전달할 수밖에 없었는데, 인쇄 기술은 그것을 대량으로 그리고 매우 빠르게 하였다. 인쇄 기술 로 인해, 그간 독점되던 정보가 다양한 계층들로 확산되 면서, 전통 사회에 균열이 생기기도 한 것이다. 인쇄 미디 어는 신문, 책 등을 통해 다양한 기억들을 지식으로 재생 산하고 전승하는 데 일조하면서 새로운 사회질서를 정립 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특히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과 같은 학자는 인쇄 미디어에 의한 인쇄 자본 주의가 특정한 언어만을 활용하게 하였으며, 동시에 그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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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속에서 해당 집단이 저장할 것과 삭제할 것, 다시 말해 기억과 망각의 작용을 통해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Anderson, 1991). 구두 언 어 또한 시공간의 한계를 전화와 라디오의 발명을 통해 점 차 극복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축음기와 라디오는 구두 언어를 저장하고 이를 멀리까지 전달할 수 있게 한 기술이 었다. 한편 커뮤니케이션은 구두 언어와 문자 언어 외에 다양 한 기호나 상징들을 활용하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영상 언어인 이미지다. 최초의 영상 언어는 동굴벽화 등 이었으며, 특히 영상 언어로서 회화는 오랜 시간 인류의 다양한 경험을 저장하고 전달하는 기술이자 예술이었다. 근대에 등장한 사진은 그간 있었던 어떤 영상 언어보다도 생산 과정이 신속하며, 재현 방식 또한 사실적인 기술이었 다. 동시에 대량 복제가 가능한 이미지였으며, 현재 거기 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거기에 있었던 것을 보여 준 다는 점에 비춰 과거의 시제를 매개하는 새로운 기억 방법 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간 미디어들이 커뮤니케이션 주 체들의 주관에 의존하여 과거를 기록하는 기술이었던 데 비해, 사진은 이를 있는 그대로 보여 주었기 때문에 기억 의 증거로 기능하게 되었다(Mirzoeff, 1999, p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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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하지만 현실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 고 움직이는 시공간인데, 이러한 현실을 저장하고 전달할 수 있는 기억 방법으로 등장한 것이 영화였다. 영화는 이 후 소리 또한 결합시켜 더욱 사실적인 이미지들을 제공하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원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커뮤니케이션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실시간 커뮤니케 이션도 아니었다. 이러한 제약은 텔레비전이 발명되면서 극복되었다. 텔레비전은 일상에서 존재한다. 텔레비전은 영화처럼 극장에 보러 갈 필요도 없으며, 전원만 켜면 언제 나 영상이 제공되었다. 특히 텔레비전은 ‘지구촌’이라 할 만큼 시공간을 초월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였으며, 뉴스,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장르의 프로그램들과 수많은 광고는 본격적인 영상 문화 시대를 열게 하였다. 인터넷과 컴퓨터 그리고 최근의 스마트 미디어로 대표 되는 뉴미디어는 모든 메시지를 디지털로 처리해 이전과 다른 기억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뉴미디어 특성상 ‘빅데이터’라는 용어가 의미하듯이, 기억할 수 있는 양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으며, 공유되는 기억의 속도와 양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동시에 뉴미디어는 휘발성을 지니 고 있다고 할 정도로 순식간에 기억을 삭제할 수도 있다. 또한 기억의 주체와 그에 따른 시공간의 문제도 과거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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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이제는 누구나,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간 제한적이었던 기억의 위상과 상황이 달라지 고 있다. 물리적 상황으로 볼 때, 이제는 현재의 모든 사실 은 기억될 수 있을 듯하다(태지호, 2012, p.19). 요컨대 기억은 개인적인 인지적 능력으로서 중요성을 가질 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이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 기 위한 과정에서 유용하게 활용된다. 동시에 기억 방법 혹은 기억술은 그러한 과정을 위한 수단이며, 그 변천사는 미디어의 역사와 상통한다.
매개되는 기억들의 상호 텍스트성 커뮤니케이션과 기억 방법들에 대한 흐름에서 알 수 있듯 이, 각 미디어들이 그 이전 미디어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의 상이한 재현 방법들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참조적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미디어 매개는 각기 다른 방법으로 이 루어지지만, 실제 이들 미디어는 상호 반응하고 동시에 서 로를 재배치하고 경쟁하고 개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미디어는 고립되어 순수한 문화적 의미 공 간으로 설정될 수도 없다. 이러한 점에서 모든 미디어의 매개는 재매개(remediation)다(Bolter,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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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기억과 연관하여 보면, 기억의 재현은 시간의 흐 름 속에서 반복해 이루어지며,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나타 난다. 따라서 실제 과거의 사건에 대해 직접 경험으로 기 억한 것이 아닐지라도 이러한 상황은 기억이 생성될 수 있 는 배경이 된다(태지호, 2012, p.38). 사람들은 경험하지 않은 것을 마치 직접 경험한 것처럼 기억하면서 말하는 경 우도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기억은 개별 미디어에 의해 재현될 수 있지만,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또 다른 기억을 만들 수 있는 일종의 ‘준거’ 혹은 ‘개요’가 된다. 즉,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재현된 기억은 장차 새로 운 기억을 갖기 위한 선매개(premediation)로서 기능하게 된다(Erll, 2008, p.392). 이러한 관점에서 미디어에 의해 매개된 기억은 해당 사회의 공유 자원으로서 특정 의미 지 도를 제공해 주는 복잡한 의미망이 되고, 다른 배열과 끊 임없이 연결될 수 있는 수많은 관념과 이미지의 집합체를 제공한다(Edensor, 2002, p.338). 결국 선매개는 미디어 간의 상호 참조적인 재매개 방식이 기억과 연관하여 사회 내에서 ‘매개’라는 차원에서 작동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 다. 그러므로 각기 다양한 기억의 재현은 새로운 기억을 위한 준거라는 의미에서, “선매개는 명명하고, 서사화시 키고, 시각 작용을 위한 문화적 실천이 되며, 기억의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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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위한 시작점이자 결과가 된다”(Erll, 2008, p.393). 결국 모든 기억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실천은 항상 다 수로 나타나며, 그러한 기억들은 상호적으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각각의 사회적 심급에서 기능하는 서로 다른 유형의 사회적 조직이라 할지라도 그러하다. 또한 어떠한 기억의 재현에서 그 이용과 동기가 정치적이건, 경 제적이건, 혹은 일상적인 대화라 할지라도, 그것은 다양 한 기억술과 그 상호 참조적 활동으로 나타나는 직접적인 결과라 할 수 있다. 요컨대 기억은 매개되지만 고정된 것이 아니며, 각각 특정한 효과를 가지고 있으며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지만 독립적인 것이 아니며, 지속적으로 생성되고 의미 작용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특정한 산물이 아니라 과정 중에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기억한다 고로 존재한다 기억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선험적 조건과 그리고 정치, 경 제, 문화 등 일련의 사회적 체계를 관통하는 주제다. 인간 에 대한 여러 정의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하나를 덧붙이 자면 인간은 기억을 통해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기억 개념은 우리 사회를 다양한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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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동시에 다양한 문제들을 제기토록 한다. 기억은 단지 한 개인의 인식 속에 내재해 있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 다. 따라서 기억은 본질적인 개념이 아니라 과정 중에 있 으며, 살아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제를 통해 이 책은 기억에 대한 개념 문제에서 시작하여, 기억과 역 사의 관계 그리고 집단 기억, 사회적 기억, 문화적 기억, 기억의 터, 대중 기억 등과 같은 기억 연구의 여러 흐름들 을 다루고 있다. 아울러 기억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다양 한 사회적 실천들에 대해서 기억과 정체성, 기억의 정치학 그리고 기억 산업의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다. 이제 본격 적으로 이러한 기억 개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고, 이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며, 아울러 우리 사회와 어떠한 관 계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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