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민호 동화선집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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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틈에서 키운 하얀 꿈

밀어냈습니다



백련암을 등지고 앉은 작은 연못에 빛을 잃은 연잎들이 둥 둥 떠 있었습니다. 다람쥐들도 가을걷이에 연못가를 뛰어 다녔습니다. 종종걸음으로 다니는 다람쥐들만 보면 자꾸만 옛날이 생각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내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냥 소쿠리 안에서 동무들과 봄을 기다리며 하얀 꿈만 꾸고 있 었으니까요.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 딱딱한 껍질 때문이었습니다. 껍질에 싸여 있는 씨앗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마냥 꿈만 키운답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는 백련암 큰스님은 한 번씩 우리를 만져 보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 웃음 때문에 나 는 참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복도 잠깐이었습니다. 다람쥐들이 우리를 노렸던 겁니다. 큰스님이 없는 틈을 타서 다람쥐 두 마리가 장독대로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때까지도 다람쥐들이 그렇게 무 서운 줄 몰랐습니다. 다람쥐들은 우리를 볼주머니가 볼록하도록 입에 쓸어 넣었습니다. 3


우리를 물고 달리던 다람쥐가 걸음을 멈췄습니다. 바위 위에 꼬리를 깔고 앉은 다람쥐는 입에서 나를 먼 저 꺼냈습니다. 가슴이 막 뛰었습니다. 입안에서 날카로 운 이빨을 봤거든요. 다람쥐는 나를 앞발로 움켜쥐고 이빨을 드러냈습니다. 간이 콩알만 해졌습니다. 숨도 멈춰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눈을 꼭 감아 버렸습니다. 아, 그런데 갑자기 내 몸이 공중에 붕 떠오르는 것 같더 니 이내 단단한 바위 위에 똑 떨어졌습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얼른 몸을 굴렸습 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람쥐 밥밖에 더 되겠습니까? 또르르 구르던 나는 바위틈으로 쏙 들어갔습니다. 다람쥐는 동화책 한 권 두께만 한 틈으로 나를 한참 노 려보다가 그냥 가 버렸습니다.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바위틈으로 비친 좁은 하늘, 그때 본 하늘은 참 맑았습 니다. 그렇게 바위틈에 끼인 채 지낸 지 벌써 30년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뭘 생각하고 있어?” 바위 뒤에 서 있는 소나무가 걱정이 되었나 봅니다. 오 4


랫동안 나를 지켜보며 안타까워했던 친구 같은 소나무였 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겁니다. “생각은 무슨 생각.” 내 대답은 늘 똑같았습니다. 말해 봐야 소나무의 마음 만 아프게 할 뿐 소용없는 일이었거든요. “쯧쯧, 저 덕구 스님도 어쩌면 너랑….” 소나무가 말을 하다 말고 얼버무렸습니다. 아마 내 마 음이 아플까 봐 그랬을 겁니다. “음, 괜찮아. 나도 덕구 스님이 나랑 닮은 데가 많다고 생각했으니까. 왜, 덕구 스님이 나왔어?” “응, 네 앞에 앉아 있어.” 나는 소나무 가지 끝을 따라 덕구 스님 등허리로 눈길 을 돌렸습니다. 날이 갈수록 덕구 스님 어깨가 더 무거워 보였습니다. 다섯 해 전이었습니다. 겨우 일곱 살짜리 아이가 어떤 아주머니 손을 잡고 백 련암 큰스님을 찾아왔습니다. “스님, 이 아이는 사고를 당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본 뒤 말문을 닫았습니다. 부디 가족도 없는 이 아이를 거 두어 주십시오.” 아주머니는 그 말만 남기고 훌쩍 가 버렸습니다. 5


그 뒤부터 큰스님은 시간만 나면 아이랑 같이 지냈습니 다. 다음 해였습니다. 큰스님은 아이의 머리를 깎고 덕구라 는 법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백련암 새 식구가 된 덕구 스님은 큰스님을 따라 기도 는 했지만 염불은 못했습니다. 왜냐고요? 그건 말을 들을 수는 있지만 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말을 하지 않 았다고 해야 맞겠습니다. 큰스님은 한번씩 덕구 스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다, 네 마음속에 부처님이 자리 잡기까지는 아직 기 다려야 한다는걸!” 하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런 덕구 스님은 시간만 나면 내 앞에 앉아 연못을 물 끄러미 바라보며 지냈습니다. “덕구야, 여기 있었냐?” 큰스님이 옆에 와 앉았습니다. 덕구 스님은 힐끔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습니 다. “덕구야, 지난 일들은 모두 잊어버려라. 주어진 운명이 아무리 나쁘다 해도 생각을 바꾸면 달라질 수 있단다.” 큰스님은 찬찬히 덕구 스님 얼굴을 뜯어보더니 다시 고 6


개를 끄덕였습니다. 덕구 스님도 까만 눈을 깜박였습니다. 큰스님은 덕구 스님 등을 토닥여 주고 법당으로 들어갔 습니다. 덕구 스님은 그 말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연못에 눈길을 던진 채 앉아 있었습니다. “이봐, 너도 큰스님 말씀 들었지? 그러니까 너무 실망하 지 마.” 소나무가 가지를 흔들며 내게 말했습니다. 나도 덕구 스님처럼 늘 연못만 바라보았거든요. 잔잔한 연못의 물, 그 물은 그냥 고여 있는 것 같아도 쉴 새 없이 바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끼어 있는 바위 틈새는 늘 그대로였습니다. “아, 이 바위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이봐, 아직도 그 하얀 꿈은 버리지 않았지?” 소나무가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그건 내게 하나뿐인 희망인데 어떻게 버릴 수 있겠니?” 나는 연못에 눈길을 던진 채 힘없이 말했습니다. “저… 만약에….” 소나무가 말을 더듬었습니다. 7


갑자기 내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소나무의 그런 모습 은 처음이었거든요. “왜, 뭔데 그래?” “흠 흠, 만약에 네가 그 바위틈에서 나간다면 뭐부터 할 거야?” “….” 소나무가 갑자기 묻는 바람에 나는 대답할 말을 못 찾 았습니다. “우리 한번 노력해 보자. 늦었지만 이제는 될 것 같아.” 소나무는 힘자랑이라도 하듯 가지를 흔들어 댔습니다. 초록빛 바늘잎도 햇살에 반짝였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습니다. “음, 이제 조금씩 움직인다!” 소나무의 목소리에는 힘이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바위틈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내 몸이 가 벼워졌습니다. “이얏, 빨리 나가!” 소나무가 가지를 흔들며 소리쳤습니다. 소나무 뿌리 한 가닥도 바위틈을 비집고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 뿌리를 보는 순간 내 몸은 땅으로 톡 떨어졌습니다. ‘이때다!’ 8


나는 힘을 모아 떼구루루 굴렀습니다. 그 자리에 있으 면 바위가 다시 오므라들 것 같았거든요. 만약에 그렇게 되면 소나무 도움으로 30년 만의 탈출은 물거품이 되잖습니까. 나는 눈을 꼭 감고 구르고 또 굴렀습니다. 멀미가 나도 록 말입니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그렇게 그리워하 던 흙냄새도 맡기 전에 나는 그만 연못 속으로 퐁당 빠져 버린 겁니다. “앗, 그게 아냐!” 소나무가 바람을 붙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나는 소나무의 애타는 소리만 가슴에 품고 차가 운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실바람에도 못 견디고 힘없이 떨어지는 낙엽처럼 물속 깊이깊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까만 진흙 속으로 내 몸 이 서서히 묻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진흙이 엄마 품속처럼 참 포근했 습니다. 몇 십 년 동안 굳었던 몸도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잠이 스르르 왔습니다. 나는 눈을 감았습니다. 진흙 속이라 몇 날이 지나갔는지 모르지만 점점 차가워 9


졌습니다. 난 얼마 안 있어서 연못에 얼음이 얼 거라고 생각했습 니다. 얼음이 언다는 건 모든 것을 잠재우는, 그래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겨울이거든요. 지난겨울까지 보았던 하얀 눈빛을 떠올리며 난 가슴을 열었습니다. 눈빛은 가슴에 꼭꼭 숨겨 놓은 내 꿈을 닮았 거든요. 그래서 지금까지 버텨 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또 봄이 왔습니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나는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그렇게 딱딱하던 내 몸이 흐물흐물해 진 겁니다. 몸도 뻐근해졌습니다. 나는 옴츠렸던 몸을 기지개로 풀었습니다. 그러자 내 몸은 껍질을 뚫고 진흙 밖으로 쑥 나갔습니다. 그 기분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내 몸은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어 물 위로 뻗 어 나갔습니다. 저절로 힘이 솟았습니다. “아, 소나무다!” 나는 넓은 잎을 물 위에 올려놓고 소리쳤습니다. 그래 도 소나무는 나를 못 알아보고 그냥 가지만 흔들었습니다. 햇살이 점점 따뜻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여름이 왔습니 10


다. 나는 서둘러 가슴 깊이 안고 있던 것을 밀어냈습니다. 얼마나 꾹꾹 눌렀는지 모릅니다. 드디어 내 이파리 사이에서 촛불을 닮은 하얀 꽃봉오리 가 햇살에 빛났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연못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습니다. 아, 연못 위에는 분홍빛 꽃봉오리들이 동동 떠 있었습 니다. 가슴이 사르르 녹아내리며 배도 살살 아픈 것 같았 습니다. 생긴 모습은 같아도 나만 흰 꽃이니까 왠지 걱정이 되 었습니다. 왜, 그런 거 있지요. 자기들과 조금, 아주 조금만 달라도 놀리는 거 말입니다. 그렇게 될까 봐 얼마나 마음 졸였던지! 그때였습니다. “스님, 저기 흰 연꽃이!” 덕구 스님이었습니다. 말을 잃었던 동자승, 마음으로만 말하던 덕구 스님이 말을 한 겁니다. “아− 30년 전에 잃었던 백련, 돌아가신 큰스님이 그렇 게도 좋아하셨던 그 흰 연꽃이로구나! 이제는 우리 암자 이름을 마음 놓고 불러도 되겠어!” 촉촉이 젖은 듯한 스님의 목소리가 떨리기까지 했습니 다. 11


“응? 그러고 보니 너도 잃었던 말을 찾았구나!” 한참 흰 연꽃에 취해 있던 큰스님은 다시 눈을 동그랗 게 뜨고 덕구 스님을 바라보았습니다. “….” 덕구 스님도 까만 눈을 깜박이며 큰스님을 쳐다보았습 니다. “그래, 올해부터는 향 좋은 백련 차 맛을 볼 수 있겠구 나!” 큰스님은 덕구 스님 손을 꼭 잡았습니다. 그 옆에 서 있는 소나무도 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더 커진 가지를 흔들며.

«어린이문예», 200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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