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은 인류의 유산으로 남을 만한 작품만을 선정합니다. 오랜 시간 그 작품을 연구한 전문가가 정확한 번역, 전문적인 해설, 풍부한 작가 소개, 친절한 주석을 제공하는 고급 시 선집입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심훈 시선 심훈 지음 최도식 엮음
대한민국, 서울, 지식을만드는지식, 2014
편집자 일러두기 ∙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 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 이로 추천했습니다. ∙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 석을 덧붙였습니다. ∙ 이 책은 ≪그날이 오면 검열본≫, ≪그날이 오면≫(한성도서주 식회사, 1949), ≪심훈 문학 전집≫(차림, 2000), 그 외 작품이 발 표된 각종 신문 잡지를 저본으로 삼았습니다. ∙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습니 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 했습니다. ∙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 잡았습니다.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 으나 특별히 작가의 의도가 들어간 부분은 원문을 따랐습니다. ∙ 주석은 현대에는 쓰지 않는 생소한 단어, 현대의 독자들이 쉽게 뜻을 알기 어려운 한자어, 원전의 글씨가 잘 안 보여 엮은이가 추 정한 글자, 사투리, 토속어, 북한어 등 설명이 필요한 경우에 달았 습니다.
차례
감옥에서 어머님께 인 글월 ············3 序詩 ······················11
봄의 序曲 봄의 序曲 ····················15 피리 ······················17 봄비 ······················18 咏春 三 首 ····················19
거리의 봄 ····················20 나의 江山이어 ··················22 어린이날 ····················24 그날이 오면 ···················26 도라가지이다 ··················28 筆耕 ······················32 明沙十里 ····················34 海棠花 ·····················35 松濤園 ·····················36
叢石亭 ·····················37
痛哭 속에서 痛哭 속에서 ···················41 生命의 한 토막··················44
너에게 무엇을 주랴 ················46 朴 君의 얼골···················48
조선은 술을 먹인다 ················51 獨白 ······················53 朝鮮의 姊妹여
················55
짝 잃은 기러기 짝 잃은 기러기 ··················61 孤獨 ······················62 漢江의 달밤 ···················63
풀밭에 누어서 ··················65 嘉俳節 ·····················67
내 故鄕 ·····················68 秋夜長 ·····················71 小夜樂 ·····················73
첫눈 ······················74
눈 밤 ······················75 浿城의 佳人 ···················76 冬雨 ······················78
선생님 생각 ···················80 太陽의 臨終 ···················82 狂瀾의 꿈 ····················85
마음의 烙印 ···················89 토막 생각 ····················91 어린것에게 ···················94 R 氏의 肖像 ···················97 輓歌 ······················99 哭 曙海 ····················101
去國篇 잘 잇거라 나의 서울이어 ·············105 玄海灘
····················106
武藏野에서 ···················108 北京의 乞人 ··················111 鼓樓의 三更 ··················113 深夜過黃河 ···················115 上海의 밤····················117
杭州遊記 杭州遊記 ····················121 平湖秋月 ····················122 三潭印月 ····················123 採蓮曲 ·····················124 蘇堤春曉 ····················126 南屛晩鐘 ····················127 樓外樓 ·····················128 放鶴亭 ·····················129 杏花村 ·····················130 岳王墳 ·····················131 高麗寺 ·····················132 杭城의 밤····················133 錢塘 江畔에서 ·················134 牧童 ······················135 七絃琴 ·····················136 錢塘 江上에서 ·················137
겨울밤에 내리는 비 ···············139 汽笛 ······················141
뻐꾹새가 운다··················142
絶筆 ······················144
≪검열본≫ 미수록 시편 새벽빛 ·····················149 나의 가장 친한 兪亨植 君을 보고 ·········152 農村의 봄····················154 近吟 三 首 ···················156 元旦雜吟 ····················157
비 오는 밤 ···················159 ‘웅’의 무덤에서 ·················161 野球 ······················164
젊은이여 ····················166 가을 ······················168 三行日誌 ····················170
해설 ······················173 지은이에 대해··················205 작품 연보····················210 엮은이에 대해··················216
심훈 시선
감옥에서 어머님께 인 글월
어머님! 오늘 아츰에 고의적삼 차입해 주신 것을 받고서야 제가 이곧에 와 잇는 것을 집에서도 아신 줄 알엇습니다. 잠시 도 엄마의 곁을 떠나지 않든 막내동이의 생사를 한 달 동 안이나 아득히 아실 길 없으섯으니 그동안에 오죽이나 애 를 태우섯겟습니까?
그러하오나 저는 이곧까지 굴러 오는 동안에 꿈에도 생 각지 못하든 고생을 겪엇것만 그래도 몸 성히 배포 유하게 큰집에 와서 지냄니다. 고랑을 차고 용수는 썻을망정 난 생 처음으로 자동차에다가 보호 순사를 앉치고 거들먹거 ˙ ˙ ˙ 밑까지 나려 긁는 맛이란 바로 리며 남산 밑에서 무학재 개선문으로나 들어가는 듯하엿습니다. 어머님! 제가 들어 잇는 방은 二十八호실인데 성명 삼 자도 떼어 버리고 二○○七호로만 행세합니 다. 두 간도 못 되는 방 속에 열아홉 명이나 비웃드름 엮이 듯 햇는데 그중에는 목사님도 잇고 시골서 온 상투쟁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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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구요, 우리 할아버지처럼 수염 잘난 천도교 도사도 계심 니다. 그 밖에는 그날 함께 날뛰든 저의 동모들인데 제 나 이가 제일 어려서 귀염을 받는답니다. 어머님!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악 볓이 나려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코 방 속에서는 똥통이 끌습니다. 밤이면 갓득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토아 가며 짓무른 살을 뜯 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인 채 날밤을 새웟습니다. 그렇것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 잇지 않습니까 생지옥 속에 잇으면서 하나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음 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슲은 빛이 보이지 않 고 도로혀 그 눈들은 새ᄉ별과 같이 빛나고 잇습니다그려! ˙ ˙ ˙ 처럼, 더구나 노인네의 얼골은 앞날을 점치는 선지자 고행하는 도승처럼 그 표정좇아 엄숙함니다. 날마다 일은 아츰 전등불 꺼지는 것을 신호 삼아 몇 천 명이 가튼 시간 에 마음을 모아서 정성껏 같은 발원으로 긔도를 일 때면 극성마진 간수도 칼자루 소리를 내지 못하며 감히 드려다 보지도 못하고 발굼치를 돌님니다. 어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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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천번만번 긔도를 이기로서 굳게 닫힌 옥문이 저절로 열녀질 리는 없겟지요 우리가 아모리 목을 놓고 울 며 부르지저도 크나큰 소원이 하로아츰에 이루워질 리도 없겟지요 그러나 마음을 합하는 것처럼 큰 힘은 없음니다. 한데 뭉처 행동을 가티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음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그 큰 힘을 믿고 잇습니다. 생사를 가티할 것을 누구나 맹서하고 잇스니까요… 그 러길래 나 어린 저까지도 이러한 고초를 그다지 괴로워하 야 하소연해 본 적이 없음니다.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야 근심하지 마십시요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 千 분이요 또 몇 万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에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코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야 한 몸을 밫이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히외다.
콩밥을 먹는다고 끼니때마다 눈물겨워 하지도 마십시 요 어머님이 마당에서 절구에 메주를 찌으실 때면 그 곁에 서 한 주먹씩 주서 먹고 배탈이 나든, 그렇게도 삶은 콩을 좋아하든 제가 아님니까? 한 알만 마루 우에 떠러지면 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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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흘금 처어다보고 다른 사람이 먹을사라 주어 먹기 한 버 릇이 되엇습니다.
어머님! 오늘 아츰에는 목사님헌테 사식이 들어왓는데 첫술을 뜨다가 목이 메어 넘기지를 못합디다. 그도 그럴 것이외 다. 안해는 태중에 놀라서 병들어 눕고 열두 살 먹은 어린 딸이 아츰마다 옥문 밖으로 쌀을 날러다가 지어 드리는 밥 이라 합니다. 저도 도라앉으며 남모르게 소매를 적셧습니 다. 어머님! 몇일 전에는 생후 처음으로 감방 속에서 죽는 사람의 그 임종을 가티하엿습니다. 도라간 사람은 먼 시골에 무 슨 교를 믿는 노인이엇는데 경찰서에서 다리 하나를 못쓰 게 되어 나와서 이곧에 온 뒤에도 밤이면 몹시 알엇습니 다. 병감은 만원이라고 옴겨 주지도 않고 쇠잔한 몸에 그 독은 나날이 뼈에 사모처 그날은 아츰부터 신음하는 소리 가 더 높앗슴니다.
밤은 깊어 악박골 양물터에서 단소 부는 소리도 끊젓슬 때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갓븐 숨을 몰기 시작햇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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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다 이러나 그의 머리맡을 에워싸고 앉어서 축엄 의 그림자가 시시각각으로 덮어 오는 그의 얼골을 묵묵히 직히고 잇엇습니다. 그는 희미한 눈초리로 오 촉밖에 않 되 는 전등을 멁어니 치어다보면서 무슨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추억의 날개를 펴서 기구한 일생을 더듬는 듯합니다. 그의 호흡이 점점 갓버지는 것을 본 저는 제 무릎을 벼개 삼어 그 의 머리를 고엿더니 그는 떨리는 손을 더듬더듬하야 제 손 을 찾어 쥐더이다. 금새 운명을 할 노인의 손아귀 힘이 엇 저면 그다지도 굿세일가요, 전기나 통한 듯이 뜨거울까요?! 어머님!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하야 몸을 벌덕 솟치더니 ‘여러분!’ 하고 큰 목소리로 무거히 입을 열엇습니다. 찌저질 듯이 긴 장된 얼골의 힘줄과 표정이 그날 수천 명 교도 앞에서 연설 을 할 때에 그 목소리가 이와 같이 우렁찻슬 것입니다. 그 러나 우리는 마츰내 그의 연설을 듯지 못햇습니다. ‘여러 분!’ 하고는 뒤미처 목에 가래가 끓어 으기 때문에…
그렇면서도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 같어서1)
1) ≪그날이 오면 검열본≫의 낙장으로 이 이하는 ≪심훈 문학 전집≫ (차림, 2000)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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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분이 유언할 것이 없느냐 물으매 그는 조용히 머 리를 흔들어 보이나 그래도 흐려 가는 눈은 꼭 무엇을 애 원하는 듯합니다마는 그의 마지막 소청을 들어줄 그 무엇 이나 우리가 가졌겠습니까.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나 직나직한 목소리로 그날에 여럿이 떼 지어 부르던 노래를 일제히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첫 절도 다 부르기 전에 설움이 북받쳐서 그와 같은 신도인 상투 달린 사람은 목을 놓고 울더이다. 어머님! 그가 애원하던 것은 그 노래인 것이 틀림없었을 것입니 다. 우리는 최후의 일각의 원혼을 위로하기에는 가슴 한 복판을 울리는 그 노래밖에 없었습니다. 후렴이 끝나자 그는 한 덩이 시뻘건 선지피를 제 옷자락에 토하고는 영영 숨이 끊어지고 말더이다. 그러나 야릇한 미소를 띤 그의 영혼은 우리가 부른 노 래에 고이고이 싸이고 받들려 쇠창살을 새어서 새벽하늘 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저는 감지 못한 그의 두 눈을 쓰다 듬어 내리고 날이 밝도록 그의 머리를 제 무릎에서 내려놓 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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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사록사록이 아프고 쓰라렸던 지 난날의 모든 일을 큰 모험 삼아 몰래몰래 적어 두는 이 글 월에 어찌 다 시원스러이 사뢰올 수가 있사오리까? 이제 야 겨우 가시밭을 밟기 시작한 저로서 어느새부터 이만 고 생을 호소할 것이오리까?
오늘은 아침부터 창대같이 쏟아지는 비에 더위가 씻겨 내리고 높은 담 안에 시원한 바람이 휘돕니다. 병든 누에 같이 늘어졌던 감방 속의 여러 사람도 하나둘 생기가 나서 목침돌림 이야기에 꽃이 핍니다.
어머님! 며칠 동안이나 비밀히 적은 이 글월을 들키지 않고 내 어보낼 궁리를 하는 동안에 비는 어느덧 멈추고 날은 오늘 도 저물어 갑니다. 구름 걷힌 하늘을 우러러 어머님의 건강을 비올 때 비 뒤의 신록은 담 밖에 더욱 아름답사온 듯 먼 천의 개구리 소리만 철창에 들리나이다.
1919.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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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詩
밤 밤, 깊은 밤 바람이 뒤설레며 문풍지가 운다. 방, 텅 비인 방 안에는 등잔불의 기름 조는 소리뿐… 쥐가 천정을 모조리 써는데 어둠은 아직도 창밖을 직히고, 내 마음은 무거운 근심에 짓눌려 깊이 모를 연몯 속에서 자맥질한다. 아아 기나긴 겨을밤에 가늘게 떨며 흐느끼는 고닲은 령혼의 우름소리, 별 없는 하눌 밑에 들어 줄 사람 없구나! 一九二三年 겨을 ‘검은 돌’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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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序曲
봄의 序曲
동무여, 봄의 序曲을 아뢰라. 心琴엔 먼지 앉고 줄은 낡엇스나마
그 줄이 가닥가닥 끊어지도록 새봄의 諧調를 뜯으라!
그대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줄이야 어느 뉘가 모로랴. 그러나 그 아픔은 묵은 설음이 엉긔어 붙는 灵魂의 疼痛이 아니요, 입살을 깨물며 새로운 우리의 봄을 빚어내려는 創造의 苦痛이라.
진달래 동산에 새소리 들리거든 너도나도 질거히 노래 보로자. 범나븨 双々히 날러들거든 우리도 덩다러 억개춤 추자. 밤낮으로 嘆息만 한다고 우리 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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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절로 어들지 않으리니-
그대와 나, 개아미 떼처럼 한데 뭉처 땀을 흘리며 廢墟를 직히고 굽히지 말고 싸우며 나가자. 우리의 歷史는 눈물에 밋끄러저 뒤ᄉ거름치지 않으리니-
동무여, 봄의 序曲을 아뢰라. 心琴엔 먼지 앉고 줄은 낡엇스나마
그 줄이 가닥가닥 끊어지도록 새봄의 諧調를 뜯으라!
1931.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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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
내가 부는 피리 소리 곡조는 몰라도
그 사람이 그리워 마듸마듸 꺽기네
길고 가늘게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어서-
봄 저녁의 별들만 눈물에 젖네
192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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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 ˙ ˙ 를 두다리시네 하나님이 깊은 밤에 피아노 ˙ ˙ 우에 춤추는 하얀 손은 보이지 않어도 鍵盤
섬ᄉ돌에, 양철집웅에 그 소리만 동당 도드랑
이 밤엔 寂々하셔서 잠 한숨도 못 이루시네.
192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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咏春 三 首
冊床 우에 꺾어다 꽂인 복송아꽃
닢닢이 시들어선 香氣 없이 떠러지니 네 열매는 어느 골에 맺으려는고.
개천 바닥을 뚫고서 언덕 우으로 파릇파릇 피어오르는 풀닢새, 망아지나 되여지고 송아지나 되여지고.
昌慶苑 夜櫻2) 구경을
휩쓸려 들어갓다가 등을 밀려 나오니 街燈 밑에 기−다란 내 그림자여!
1929. 4. 28
2) 야앵(夜櫻): 밤에 벚꽃을 구경하며 노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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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봄
지난 겨을 눈밤에 어러 죽은 줄 알엇든 늙은 거지가 쓰레기桶 곁에 살어 앉엇네. 허리를 펴며 먼 山을 바라다보는 저 눈초리! 우묵하게 들어간 그 눈瞳子 속에도 봄이 빛외는구나, 봄빛이 떠도는구나.
원망스러워도 情든 故土에 찾어드는 봄을 한 번이라도 저 눈으로 더 보고 싶어서 무쇠도 얼어붙는 그 치운 겨을에 이ᄉ발을 앙물고 살어왓구나 죽지만 않으면 팔다리 뻗어 볼 時節이 올 것을 占처 아는 늙은 거지여, 그대는 이 땅의 先知者로다.
사랑하는 젊은 벗이어, 그대의 눈에 미지근한 눈물을 걷우라! 그대의 가슴을 헤치고 헛된 嘆息의 뿌리를 뽑아 버리 라! 저 늙은 거지도 기를 쓰고 살어왓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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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봄도, 우리의 봄도, 눈앞에 보고야 말 것을, 아아 엇지하야 그대들은 믿지 안는가?!
1929.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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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江山이어
높은 곧에 아 이 땅을 굽어보니 큰 봉오리와 작은 뫼뿌리의 어여쁨이어, 아지랑이 속으로 視線이 녹아드는 곧까지 옷독옷독 솟앗다가는 구비저 달리는 그 句配3)- 네 품에 안켜 딩굴고 싶도록 아름답구나.
솔나무 감송감송 木覔4)의 등어리는 젓 물고 어루만지든 어머니의 허리와 같고, 三角山은 敵의 앞에 뽑아 든 칼끝처럼
한 번만 찔르면 먹장구름 쏟아질 듯이 아직도 네 氣象이 凜凜하구나.
에워싼 것이 바다로되 물결이 성내지 않고 샘과 시내로 가늘게 繡놓앗것만
3) 구배(句配): 산이나 언덕 따위가 기울어진 산비탈. ≪한성도서본≫은 “산줄기”로 표기했다. 4) 목멱(木覔): 서울의 ‘남산’을 이르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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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물이 맑고 그 바다 푸르러서, 한 목음 마시면 限百年이나 壽를 할 듯 퐁퐁퐁 솟아서는 넘처 넘처 흘르는구나.
할아버지 주무시는 저 山기슭에5) 새 울어 예며 긴 밤을 직히네 사랑하는 그대여 당신도 도라가면은 저 언덕 우에 고히고히 무더 드리고 그 발치에 나도 누어 깁흔 설음 이즈오리다
박아지 걸머지고 나는 兄弟 거츠른 벌판에 강낭이[高粱] 이삭올 줍는 姊妹여 白骨이나마 이 흙 속에 돌아와 무치소서
오오 바라볼사록 아름다운 나의 江山이여
5) ≪검열본≫은 행을 구분해 5행 5연의 작시(作詩) 과정을 보이며, 4연 1행까지만 남아 있어 이후의 연은 ≪삼천리≫ 제1권 1호(1929. 7)를 옮겼다. ≪삼천리≫에는 제목이 <송(頌) 삼천리>로 되어 있으며, 2 연 3행은 “三角山은 남의 앞헤 아 든 武士의 칼/ 한 번 르면 먹장 구름 쏘다질 이/ 아즉도 네 氣象이 凜凜도 하다”로 되어 있다. ≪한 성도서본≫은 행갈이가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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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6)
해마다 어린이날이면 비가 내립니다. 여러분의 행렬에 먼지 일지 말라고 실비 내려 보슬보슬 길바닥을 추겨 줍니다. 비바람 속에서 자라난 이 땅의 자손들이라, 일 년의 한 번 나들이에도 깃이 젖습니다그려.
여러분은 어머님께서 새 옷감을 매만지실 때 물을 뿜어 주름살 펴는 것을 보셨겠지요? 그것처럼 몇 번만 더 빗발이 뿌리고 지나만 가면 이 강산의 주름살도 비단같이 펴진답니다.
시들은 풀닢만 얽흐러진 벌판에도 봄이 오면는 한울로 뻗어 오르는 파−란 싹을 보섯겟지요? 당신네 팔다리에도 그 싹처럼 물이 아서 지둥치듯7) 비바람이 불어도 쓸어지지 말라고 6) ≪검열본≫의 낙장(落張)으로 ≪한성도서본≫을 옮겼으며, 2연 4행 부터 ≪검열본≫을 따랐다. ≪검열본≫과 ≪한성도서본≫의 행갈이 를 참조해 2연을 4행으로 행갈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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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옵니다, 높이 든 기ᄉ발이 그 비에 젖습니다.
1929. 5. 5
7) 지둥치듯: 태풍이나 포성 따위로 요란스럽게 일어나는 소리를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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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三角山이 이러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漢江 물이 뒤집혀 룡소슴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지기 前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한울에 날르는 까마귀와 같이 鍾路의 人磬을 머리로 드리바더 울리오리다 頭蓋骨은 깨어저 散散조각이 나도
깃버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딍구러도
그래도 넘치는 깃븜에 가슴이 미여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鼓]을 만들어 들처 메고는 여러분의 行列에 앞장을 스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듯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꺽구러저도 눈을 감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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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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