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는정확했다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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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는 정확했다



그들은 아래쪽의 어두컴컴한 지하도를 통과하면서 기차가 위의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확성기에서는 아 주 부드러우면서도 낭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파리발 프 르체미슬행 전선 휴가병 열차.’ 그들은 계단을 올라 플랫폼으로 들어서 어느 차량 앞에 서 있었다. 그 차량에는 즐거운 표정을 짓고서 꽉 채운 큰 짐 들을 가진 휴가병들이 올라타 있었다. 플랫폼의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재빨리 사라졌다. 어느 창가 옆에는 소녀 들이나 여자들 또는 말없이 입을 꾹 다문 아버지가 서 있었 다. 그리고 낭랑한 소리는 서두르라고 말했다. 열차는 정확 했다. 그는 가방을 들고 어느 열려 있는 문으로 올라탔다. 안에 서 창문을 내리고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밖을 내다보았 다. 한편 그 위에서는 낭랑한 소리가 마치 점액질 구름처럼 맴돌았다. “발차.” 안드레아스가 서서히 차 안을 더듬거릴 때 그의 내면에 서 ‘곧이란 ’ 단어가 총알처럼 떠올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통 없이 살과 조직과 세포와 신경을 통과하여 끝내는 어 딘가에 꽂혀 폭발하고 말았다. 거친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리 게 했다. 삶… 고통… ‘곧’ 하고 그는 생각했다. 공포가 깊이, 깊이 내려앉았다. 19


공포 그리고 완전한 확신. ‘이제는’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 제 다시는 이 정거장을 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마지막 순간 까지 비난했던 내 친구의 얼굴도… 다신 보지 못할 거야.’ 그는 자리를 잡고 옆에서 자고 있는 군인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곧’ 하고 그는 생각했다. 기차의 딸가닥거리는 소리, 모 든 것이 예전과 같다. 냄새. 무조건 담배만 피우고 싶다. 단 지 자지 말 것! 창가로 도시의 어두운 윤곽이 스쳐 간다. 멀 리 어두운 하늘에는 서치라이트가 무엇을 찾는 듯하다. 그 빛은 마치 밤의 푸른 외투를 입은 시체의 긴 손가락 같다. 또 멀리에서는 은은하게 고사포 소리가 들린다. 그리곤 불빛이 없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어두운 집들이 있다. 이 ‘곧은 ’ 언제가 될 것인가? 피가 가슴으로부터 흘러나와 가슴으로 되돌아가고 돌고 돈다. … 그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더 이 상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 문 장을 만들자마자 ‘나는 곧 죽을 것이다라는 ’ 말이 불쑥 머리 에 떠올랐다. 곧, 곧, 곧, 곧, 곧은 언제일까? 얼마나 소름이 끼치는 말 인가. 곧. 곧은 1초 이내일 수도 있고, 1년 이내일 수도 있다. 곧은 소름 끼치는 단어다. 곧은 미래를 압축시켜 작게도 한 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확실한 것은 전혀 없다. 절 20


대적인 불확실만이 있을 뿐이다. 곧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고, 많은 것일 수도 있다. 곧은 모든 것이다. 곧은 죽음이 다. 곧, 나는 죽는다. 난 죽을 것이다. 곧. 네 스스로 말했다. 네 안에 있는 누군가가 그리고 네 밖의 누군가가 이 곧이 실 현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곧은 전쟁 중에 있을 것이다. 그 것은 확실하다. 적어도 확고한 얘기다. 전쟁은 앞으로 얼마 나 계속될 것인가? 난 영영 평화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평화는 없을 것 이고 아무것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음악도… 꽃 도… 시도… 인간의 어떤 기쁨도−곧 나는 죽을 것이다. 그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인다. 미래를 상상하자고 그는 생각한다. 이 곧은 아마 거짓일지도 모른다. 아마 내가 지치 고 지나치게 흥분하여 놀랐을지도 모른다. 그는 전쟁이 끝 난 후에 할 일을 상상해 보려 한다. 그가 할 일이 있을 테 지… 있을 거야… 그러나 넘을 수 없는 벽, 아주 검은 벽이 가로막혀 있다. 그는 아무것도 상상할 수가 없다. 물론 문장 을 끝까지 생각하고자 자신에게 강요할 수는 있다. 난 공부 를 할 것이다. … 어딘가 방을 얻고… 책이 있고… 담배가 있고… 공부를 할 것이다. … 음악… 시… 꽃을… 그러나 그는 문장을 끝까지 생각하려고 자신에게 강요할 21


수는 있을지라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모든 것이 그렇게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꿈이 아니며 무게도 피도 또 어떤 인간적인 실체도 없는 한낱 창백한 생 각일 따름이다. 미래는 얼굴이 없다. 어딘가에서 끝나버린 다. 그가 이런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가 이러한 이미지에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더 자주 든다. 곧 나는 죽을 것이다. 그것은 1년과 1초 사이에 놓여 있는 확실함이다. 더 이상 꿈 이란 없다. 이 모든 불행은 이 낭랑한 소리에서 나온다. 이 낭랑한 소리가 전쟁을 시작했고 이 낭랑한 소리가 끔찍한 전쟁을 조정한다. 곧 나는 죽을 것이다. 렘베르크와 체르노비츠 사이에서. 내 생명은 일정한 킬로미터의 숫자에 불과하다. 철로의 구 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렘베르크와 체르노비츠 사이에 전선이 없다는 점이다. 빨치산도 많지 않다. 아니면 전선이 밤새 이 멋지고 깊은 여행을 하게 했는가? 아주 갑자 기 전쟁이 끝난 것인가? 평화가 이 ‘곧’ 이전에 올까? 어떤 파 국이 올까? 아마 신의 동물은 죽었을 것이다. 결국 살해된 것이다. 아니면 소련 사람들이 전면 공격을 가해 렘베르크 와 체르노비츠 사이까지의 모든 것을 때려 부수어버리고 항 복… 도망쳐 나갈 길이란 없다. 잠자던 군인들이 깨어나서 22


먹고 마시고 떠들기 시작한다. “어이.” 거친 목소리가 그의 뒤에서 들린다. “여보게, 함 께 게임 한판 할까?” 그는 놀라 몸을 돌려 “예” 하고 무턱대 고 말한다. 그때 그는 면도를 하지 않은 군인의 손에 들려 있 는 카드를 본다. 그를 보고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군인이 있다. 좋다고 대답했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고개 를 끄덕이고 수염쟁이를 따라간다. 통로는 비어 있다. 둘은 짐을 들고 앞 차량으로 옮긴다. 그곳에는 창백한 얼굴을 한 긴 금발머리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이를 드러내고 웃는 다. “한 사람 구했어요?” “그래.” 거친 목소리로 수염쟁이가 말한다. 안드레아스는 그들이 술에 취해 있다는 것을 이내 알아 차린다. 열차는 덜컥거리며 달리고 있다. 날이 점점 밝아온 다. 열차는 낭랑한 소리가 흘러나오는 역이건 낭랑한 소리 가 없는 역이건 다 정차한다. 열차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가 는 텅 비곤 한다. 그러나 그들 셋만은 구석에 앉아서 카드놀 이를 한다. “플러시” 하고 그는 말한다. 그가 또 이겼다. 주머니에 돈 이 한 뭉치나 됐다. “나쁜 녀석 같으니라고.” 수염쟁이가 말한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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