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불교유신론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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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佛敎維新論 조선 불교 유신론


머리말

나는 일찍이 불교를 유신하고자 하는 뜻을 가슴속에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일이 뜻과 같지 않아 세상에서 실천할 수 없 어서 시험 삼아 한 무형의 불교의 새로운 세계를 자질구레 한 글에 드러내어 스스로 쓸쓸함을 달래고자 한다. 무릇 매화를 생각하면서 갈증을 그치는 것도 역시 양생 술(養生術)의 하나지만 이 유신론은 진실로 매화의 그림자 일 뿐이다. 나의 목마른 불이 몸을 태우므로 매화 그림자로 만석(萬石)의 맑은 샘 구실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근래 불교계는 가뭄이 매우 심한데 우리 승려들이 갈증 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다. 과연 느끼고 있으면 이 매화 그 림자를 비춰 주기 바란다. 나는 6바라밀 가운데 보시가 으 뜸이라고 들었다. 나도 또한 이 매화 그림자를 보시한 공덕 으로 지옥을 벗어날 수 있을까?

메이지 43년(1910) 12월 8일 밤에 저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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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천하 일에 어찌 성공과 실패가 있겠는가? 오직 사람에 따른 것일 뿐이다. 만사가 하나라도 사람의 노력 여하에 따라 이 루어지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만약 일에 자립하는 힘 이 없고 사람에 의존할 뿐이라면 일의 성패도 역시 사람의 책임일 뿐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고,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있다”고 했다. 이것을 따져서 말하 면, 사람이 일을 이룰 수 있는 노력을 해도 하늘이 실패로 만들기도 하고, 사람에게 실패할 만한 노력밖에 없어도 하 늘이 이룰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아! 사람으로 하여금 흥 이 깨지고 기운을 빠지게 하는 것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사 람이 도모하는 일의 성패를 하늘이 좌우하면, 이는 사람이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것을 일찍이 보거 나 들은 적이 없다. 이른바 하늘이란 과연 형체가 있는 하늘을 이르는 것인 가, 아니면 형체가 없는 하늘을 이르는 것인가? 만약 형체가 있는 하늘이라면 어찌 저 위에 있어서 푸르고 푸른 모습이 우리 눈에 비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미 형체가 있으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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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도 또한 이기(理氣)의 하나이고, 자유의 법칙을 따라 다 른 것을 침범할 수 없는 점에서 조금도 차이가 없음을 감히 단언한다. 중생이 대단히 많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데 어찌 모두 대단하지도 않은 한 유형물에 성패를 지배당하는 일이 있겠 는가? 만약 형체가 없는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는 천 리(天理)이며, (자연인) 하늘이 아니므로 천리는 진리다. 성공할 만한 이치가 있어서 성공하고 실패할 만한 이치가 있어서 실패하는 것이 바로 진리다. 그렇다면 성공은 본래 스스로 이루는 것이며 실패는 본래 스스로 실패하는 것이 니, 어찌 일을 이루는 것이 하늘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 가? 형체가 있는 하늘이건 형체가 없는 하늘이건 그것이 모 두 해당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성패가 하늘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다만 하늘이 있는 것만을 알고 사람이 있는 것을 모른다. 그러한 발언을 하자마자 그 이름이 노예의 명 단에 들어가는 것이니, 어찌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음이 이 처럼 심할 수 있겠는가? 만약 문명인으로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오래된 무덤 속에서 끌어내어 자유를 포기한 죄를 꾸짖는다면, 변호하고자 해도 변호할 수 없다. 진실로 하늘이 일의 성패에 관련이 없다는 것이 이와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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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면 만물이 비록 많다고 해도 이러한 이치를 파악하면 될 뿐이다. 일을 꾀하는 것이 나에게 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일을 이루는 것도 역시 나에게 있다고 해야 하니, 이 뜻을 아는 사람은 자기를 꾸짖고 남을 꾸짖지 않으며, 스스로를 믿고 다른 것을 믿지 않는다. 세상의 사리를 논하는 사람들 은 마땅히 이러한 도리로 종지(宗旨)를 삼는 것이 옳다. 오늘의 세계는 과거의 세계가 아니고 미래의 세계도 아 니며 곧 현재의 세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년, 만년 전과 후의 일을 연구하는 이가 있어서 천지 사이 형이상(形而 上)·형이하(形而下)의 문제를 연구해 유신하지 않을 것이

없다며 학술의 유신, 정치의 유신, 종교의 유신을 외치고 있 다. 그 밖에 곳곳에서 유신을 부르짖는 소리가 천하에 가득 해 이미 유신을 했거나 지금 유신을 하고 있거나 장차 유신 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생기고 있다. 그러나 오직 조선의 불교는 조용해서 유신의 소리가 조 금도 들리지 않으니 과연 무슨 징조인지 알 수 없다. 조선의 불교는 과연 유신할 것이 없는가? 아니면 유신할 만한 것이 못 되는가? 거듭 생각해 보아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아! 그렇지만 이것은 역시 알 수 있는 것이며, 그 책임도 나에게 있을 뿐이다. 불교의 유신에 뜻을 둔 이가 없지 않으나 지금까지 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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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 것은 오직 무엇 때문인가? 하나는 하늘의 운에 맡기 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탓하는 것이 그 원인이다. 나 는 일을 이루는 것이 하늘에 있다는 주장에 의혹을 품게 된 후 비로소 조선 불교의 유신에 대한 책임이 하늘의 운이나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에게 있음을 알았다. 그런 후에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음을 문득 깨닫고 유신을 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 유신론을 써서 스 스로 경계하면서, 동시에 이를 승려 동지들에게 알리는 바 다. 이 유신론은 문명국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실로 무용지 물일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의 승려가 나아갈 방향을 생각 하면 반드시 채택할 만한 것이 조금 있을 것이다. 거짓 유신 이 있은 후에 참된 유신이 비로소 나타나므로, 이 유신론이 후일 거짓 유신의 구실을 하게 된다면 필자의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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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교의 성질을 논함

오늘날 불교의 유신을 논하려면 마땅히 먼저 불교의 성질이 어떠한가를 살피고, 이를 현재 상태와 미래의 상황에 비교 한 후에 비로소 가능하다. 왜 그러한가? 금후의 세계는 진보 를 계속해서 문명의 이상에 도달하지 않으면 멈추지 않으 며, 만약 불교가 장래의 문명에 적합하지 않으면 비록 죽음 에서 살려내는 기술을 터득해 마르틴 루터나 크랜머1)를 지 하에서 불러와서 불교를 유신해도 반드시 구할 수 없기 때 문이다. 그러므로 불교가 뛰어나고 적합한 것인지 아닌지를 거듭 생각하게 되는데, 불교는 문명에 손색이 있기는커녕 오히려 특색이 있다. 나는 불교의 성질을 두 가지로 말하고 자 한다. 첫째, 종교적 성질이다. 대개 사람이 종교를 믿는 것은

1) 원문에 크롬웰로 되어 있으나 크랜머가 바른 표기다(김춘남, <양계초를 통한 만해의 서구 사상 수용−조선 불교 유신론을 중심으로−>, 동국대 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 학위 논문, 1984, 48쪽 주 78) 참조). 토머스 크랜 머(Thomas Cranmer, 1489∼1556)는 영국의 종교개혁가다.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에 대해 국왕에게 유리한 제언을 했고, 그 덕분에 캔터베리 대주 교에 임명되었다. 영국 국교회의 개혁주의에 대한 기초를 확립했으나 메리 1세의 반종교개혁기에 이단으로 파문되고 결국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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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때문인가? 우리의 최대 희망이 여기에 있다. 희망은 생존과 진화의 자본이다. 만약 희망이 없으면 아무렇게나 게으르게 살아서 매일 무사안일하게 사는 데에 만족할 것이 다. 그렇다면 누가 애쓰고 힘써 일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희망이 없으면 세상에 사람과 사물이 거의 없어질 것이며, 설령 있다고 해도 황폐하고 음란하며 악해져 예전의 모습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지옥과 같은 생활과 야만스러운 행 위가 나타나 참담하고 추악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른바 문명인들은 사람이 없는 외진 곳으로 피해 숨을 죽이고 삶 의 의욕을 상실할 것이다. 그러므로 희망이 크지 못할까 걱정해서 욕심낼 만한 달 콤한 것을 무형의 세계에 만들어 놓고, 답답한 중생에게 믿 게 하고 희망을 걸게 한 것이 여러 종교가 발생한 이유다. 기독교의 천당, 유대교가 받드는 신, 이슬람교의 영생(永 生) 등이 이것이니 모두 세상을 깊이 근심한 데서 나온 것이

다. 그렇지만 단지 속임수의 말로 일관해 천당이 있는지 없 는지, 받드는 신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영생이 사실인지 아 닌지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모른 채 미신 으로 내려오니, 이는 사람을 어리석게 이끄는 것이다. 민중 의 지혜를 속박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이미 철학자들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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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끊이지 않으므로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구차한 말을 꾸며 미신을 변호하는 이가 있어 이 렇게 말한다. 비록 미신이지만 중생의 정신을 하나로 통일 한다. 11세기 이래 구미 각국에서 전개된 놀라운 업적들을 보지 못했는가? 이것은 태반이 미신이라는 종교에서 나온 것이니, 미신이 세계에 끼친 공이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그것은 그렇다. 그렇지만 권력자로서 역사상 매우 유명 해 지금까지 미담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사람 가운데, 무수 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한 후에 그 공을 자기 한 몸에 거두어 들이지 않은 자가 있는가? 저 권력자들은 만약 미신으로 사 람들을 세뇌하지 않는다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빼앗 아 감히 사지로 몰아넣을 수 없으므로, 갖가지 수단을 써서 미신을 사람의 생명을 낚는 미끼로 삼고, 또 사람의 생명을 적을 죽이는 무기로 삼았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무수한 사 람들이 한두 가지 미신에 속아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목숨을 잃었는데, 그 수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사람이 미신에 한 가닥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것은 슬픈 일이 틀림없다. 미신은 인류에 공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폐해가 훨씬 많 다. 불교는 그렇지 않다. 중생이 미신에서 헤어나지 못할까 두려워해 경전에 깨달음을 법칙으로 삼는다고 했다. 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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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 붓다의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게 했으며, 정각(正覺)· 정변지(正徧智)2)의 주장이 모두 그런 취지였으니 붓다야 말로 지극했다. 이 세상에 스스로 나타나 6년의 고행, 49년 의 설법, 열반3)과 일상생활의 행위와 말씀이 어찌 하나라도 중생으로 하여금 미혹을 벗어나 깨닫게 하는 뜻이 아니겠는 가? 또 천당·지옥설과 나고 죽지 않는다(不生不滅)는 말이 있지만, 그 취지가 다른 종교와 같지 않다. 무엇이 다른가? 경전에 지옥과 천당이 모두 정토가 된다고 했고, 또 중생의 마음이 보살의 정토라고 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불교의 천 당은 흔히 말하는 천당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있는 천당 이며, 지옥도 흔히 말하는 지옥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의 지 옥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세계와 삼라만상이 모두 중생 의 마음에 갖추어져 있어서 붓다가 설한 8만 4천 법문도 마 음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자기와는 아무 관계도

2) 붓다가 두루 깨달아 모르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3) 원문은 곽시쌍부(槨示雙趺)인데, 붓다가 열반에 든 후에 가섭이 오니 붓다 가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였다는 이야기다. 이는 실제 사실이 아니라 선종 이 등장한 후에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내세운 삼처전심(三處傳 心)설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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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천당, 신 등을 받드는 미신과 그 거리가 어떻겠는가? 또 나고 죽지 않는다는 말은 다른 종교의 영생 같은 종류와 는 다르며, 참으로 원만하게 깨달은 세계의 주인공이며, 불 교에 하나밖에 없는 대표적인 것이다. 죽은 자를 모두 살린다는 것은 특히 어둡고 어리석은 바 보들이나 하는 말이다. 세로로 과거·현재·미래를 포함해 도 오래되었다고 하지 않고, 가로로 시방에 걸쳐 있어도 크 게 여기지 않아서 멀리 육근(六根)4)과 육진(六塵)5)을 초탈 해 고요하면서 항상 비추는 것을 진여(眞如)라고 한다. 진 여는 불변의 뜻이니, 이것이 어찌 생사와 관련이 있겠는가? 중생이 마음속에 비할 바 없는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데 도 스스로 미혹해 알지 못하므로 우리 붓다가 커다란 자비 심으로 설법했다. 다만 중생의 근기가 각기 다르므로 갖가 지 방편을 말씀했지만 궁극의 목표는 오직 진여를 깨닫게 하는 데 있었다. 고기를 잡은 후에 통발을 잊으며, 달을 보 고 그것을 가리킨 손가락을 잊는 것이다.

4)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등 6종의 능력과 그 기관을 가리킨다. 앞에 있는 감각기관 다섯과 마지막 지각기관이 각기 감각능력과 지각능력을 갖는다. 5)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 등 6종의 인식의 대상이다. 육근에 대응하는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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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통발과 손가락이 어찌 미신이겠는가? 다만 방편 일 뿐이다. 이에 중생이 비로소 7척 육신으로 수십 년 동안 산다는 것이 모두 허망함을 알아서 영원한 진아(眞我)에서 불생불멸의 경지를 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희망이 과연 다 함이 있는가, 없는가? 어찌 유독 미신을 지닌 뒤에야 희망이 있다고 하겠는가? 불교는 지혜로 믿는 종교지, 미신의 종교 가 아니다. 둘째, 철학적 성질이다. 철학자와 종교가가 가끔 충돌해 상대를 용납하지 않는 것은 대개 미신과 진리가 본래 물과 불처럼 상극이기 때문이다. 종교가들이 오로지 미신에 얽 매여 반성하지 않으면 철학자들이 반드시 전력으로 저항해, 이른바 미신은 앞으로 한 세기가 지나지 않아 세상에서 자 취를 감추게 될 것을 의심할 수 없다. 불교가 어찌 미신적인 종교와 함께 하나로 귀결되겠는 가? 경전에 복과 지혜를 함께 갖추었다고 했고, 또 일체종지 (一切種智)라고 했다. 일체종지는 자기 마음을 깨달아 투 철하고 막힘이 없어서 모르는 것이 없다는 말이니, 보편적 인 이치를 궁구해 모르는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철 학자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겠는가? 철학자가 그러한 경 지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만, 우리 붓다에게 어찌 어려움이 있겠는가? 철학의 대가를 알고 싶다면 붓다밖에 없으니,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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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못하겠다면 동양과 서양의 철학이 불교와 부합하는 것을 대략 검토해 보겠다. 중국인 량치차오(梁啓超)가 이르기를, “불교와 기독교 가 모두 중국에 들어온 외래 종교인데 불교가 크게 융성한 것에 비해 기독교가 융성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기 독교는 오직 미신을 주로 해서 철학적 이치가 천박해 중국 지식층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불교는 본래 종교와 철학 양면을 갖추고 있으며 그 도의 궁극적인 경지가 깨달 음에 있고, 도에 들어가는 법문이 지혜에 있고, 수도해서 힘 을 얻는 것이 자력에 있으니 불교를 보통 종교와 동일시할 수 없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그 가르침이 모두 갖추어진 다음에야 중국 철학이 특색을 띠었다. 이로써 보면 중국 철 학의 발전은 실로 불교의 덕택이다”6)라고 했다. 아! 불교가 조선에 들어온 지도 이제 1500년이 지났다. 만약 어떤 사람이 1500여 년 동안 조선에서 자취를 남긴 사 람들에게 조선 철학의 특색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무엇이라 할 것인가? 똑같이 손을 트지 않게 하는 약이지만 한 사람은 이를 써서 장수가 되었고, 한 사람은 이를 쓰면서도 솜 빠는

6) 원문은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 상(上海 廣智書局, 1907), <근세지 학술(近世之學術)>에서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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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면치 못했으니,7) 이 약을 어떻게 쓰는가는 사람의 책 임이지 손을 트지 않게 하는 약에 대해 무엇을 원망하겠는 가?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말했다. “내 평생의 행위가 모두 내 도덕상의 성질이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내 본성의 자유 여부를 알려면 현상론에 의거해서는 안 되고, 본성의 도덕 론에 의거해야 한다. 도덕상의 성질에 대해서 누가 조금이 라도 부자유한 것이 있다고 하는가? 도덕의 성질은 생기지 도 사라지지도 않아서 공간과 시간의 속박을 받지 않으며, 과거와 미래도 없으며 항상 현재하는 것이다. 사람이 각자 이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자유의 권리에 의거해 그 도덕상 의 성질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내 진아(眞我)는 내 육안으로 볼 수 없지만, 도덕의 이치로 미루어 보면 엄연 히 현상의 위를 뛰어넘어 그 밖에 세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진아는 항상 활발하고 자유로우며, 육체의 영역으로서 불 가피한 이치에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른 7)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이야기다. 송(宋)에 손이 안 트는 약을 알고 있는 사람이 대대로 솜 빠는 일을 했는데, 어떤 사람이 백 금을 주고 구입했다. 구입한 사람은 오나라가 월나라와 겨울 전투를 벌일 때 물에서 싸워 이기는 데 공을 세워 크게 출세했다고 한다. 같은 약을 사람 에 따라 솜 빠는 일에 쓰기도 하고, 크게 성공해 부귀를 누리는 데 쓰기도 한 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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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활발한 자유란 무엇인가? 선인(善人)이 되고자 하는 것 이나 악인(惡人)이 되고자 하는 것은 모두 내가 스스로 선 택한 것이다. 이미 자유의지가 선택해 정하고 나면 육체가 그 명령을 따라 선인, 악인의 자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니, 이로써 생각하면 나 자신에게 자유성과 부자유성 두 가지가 동시에 함께 존재한다는 이치를 쉽게 알 수 있다.” 량치차오는 이러한 학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불교 에서 이르는 진여는 칸트가 말한 진아이며, 자유의 성질이 있다. 무명(無明)이란 칸트가 말한 현상의 나이며, 불가피 한 이치의 속박을 받으며 자유의 성질이 없다. 불교에는 중 생이 본래 진여와 무명이라는 두 종자가 성해(性海)의 식장 (識藏)8) 중에 합쳐져 있으면서 서로 훈습(薰習)한다고 했 다. 범부는 무명으로 진여를 훈습하기 때문에 미혹한 지혜 가 식(識)이 된다. 도를 배운 사람은 진여로서 무명을 훈습 하기 때문에 식을 전환해 지혜를 이룬다고 했다. 송(宋)의 유학자들이 이러한 예를 이용해서 중국 철학을 조직했다. 주자(朱子)는 의리의 성과 기질의 성을 구분하 며, ≪대학(大學)≫의 주석에서 “명덕(明德)은 사람이 하

8) 성해는 진여 자성이 넓고 깊음을 바다에 비유한 것이며, 식장은 불성인 여 래장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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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에서 받은 것이고, 허령불매(虛靈不昧)해 모든 이치를 받아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이다. 다만 기품의 구속을 받 고 인욕에 가려져 때로 미혹하다”라고 했다. 그러나 불교의 진여는 일체 중생이 모두 갖고 있는 체 (體)이지, 한 사람이 하나의 진여를 가진 것이 아니다. 칸트 는 사람이 모두 하나의 진아를 가지고 있다고 했으니 이것 이 차이다. 그러므로 불교에 한 중생이라도 성불하지 못하 면 나도 성불할 수 없다고 했으니 모든 사람의 본체가 동일 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중생을 널리 제도하자는 뜻이 좀 더 넓고 깊으며 더없이 밝다. 칸트는 만약 선인이 되고자 하면 누구나 선인이 된다고 했으니 그 본체가 자유롭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는 수양이라는 면에서 볼 때 비교적 절실 하고 행하기 쉽다. 주자의 명덕은 만인이 동일한 본체를 지니고 있는 것을 지적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붓다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다. 또 말하기를 명덕이 기품의 구애와 인욕의 가림을 받는다고 해서 자유로운 진아와 부자유스러운 현상적 자아의 구분에 서 한계가 분명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칸트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다. 칸트는 진아란 결코 다른 무엇에 구애받든지 가려 지는 것이 아니며, 구애를 받고 가림을 받으면 그것은 자유 를 상실한 것이라고 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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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치차오가 불교와 칸트의 다른 점을 언급한 것이 반드 시 모두 옳지는 않다. 왜 그러한가? 붓다는 천상천하에 오 직 나만이 존귀하다고 했는데, 이것은 사람마다 각각 하나 의 자유로운 진아를 지니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붓다는 모 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진아와 각자 개별적으로 지닌 진아에 대해 남김없이 언급했다. 다만 칸트는 만인이 공유한 진아 에 대해 언급하지 못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붓다의 철학적 이치가 훨씬 넓다. 붓다가 이미 성불했는데도 중생 때문에 성불하지 못한 다면 중생 역시 붓다 때문에 중생이 될 수 없음이 명백하다. 왜 그런가? 마음, 붓다, 중생이 셋이면서 차별이 없으니 누 가 붓다이고 누가 중생인가? 서로 일체가 되면서 서로 떨어 지며[相卽相離], 일체가 아니면서 떨어지지 않으니[不卽不 離] 하나가 곧 일체이며, 일체가 곧 하나다. 붓다라 하고 중

생이라 해서 그 사이에 경계를 두는 것은 다만 허공의 꽃이 나 두 번째 달과 같이 무의미하다. 영국의 학자 베이컨은 말했다. “우리의 정신은 울퉁불퉁 한 거울과 같다. 거울에 대상이 비치면 뾰족 나온 곳에 비치 9) 15쪽,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이하 전문은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 하, 학설(學說), <近世第一大哲康德之學說>, 122∼123쪽에서 그대로 옮 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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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하고 움푹 들어간 곳에 비치기도 한다. 비록 동일한 대 상이라도 비치는 데가 다르므로 내 관찰에 잘못이 없을 수 없으니 이것이 오류를 범하는 첫째 원인이다. 또 다섯 감각 기관은 대상의 본질이 아니라 그것의 거짓 모습이므로 이것 이 오류를 범하는 둘째 원인이다. 또 우리의 체질이 각기 다 르므로 이것이 오류를 범하는 셋째 원인이다.”10) 베이컨의 학설은 고심하며 사색하고 체험을 통해 확인 하고 난 뒤에 제시한 이론이며, ≪능엄경(楞嚴經)≫의 뜻 과 많이 비슷하다. ≪능엄경≫에 이르기를, “비유컨대 만약 어떤 사람이 깨끗한 눈으로 맑은 하늘을 바라보면 오직 맑 은 하늘만이 보일 뿐이며 다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러나 그 사람이 이유 없이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 계속 응 시해 피로해지면 하늘에 헛된 꽃이 보이게 된다”고 했다. 깨 끗한 눈과 피로한 눈은 곧 베이컨의 울퉁불퉁한 거울이다. 뾰족 나오고 움푹 들어간 거울이기 때문에 같은 물건도 비 치는 것이 달라진다는 것은 하늘이 깨끗한 눈에는 하늘로 보이고 피로한 눈에는 꽃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또 경전에 “몸과 감각이 둘 다 허망하다”고 했으니, 감각

10) 인용한 글은 량치차오, ≪음빙실문집≫ 하, 학설, <近世文明初祖培根 笛卡兒之學說>, 19쪽에서 그대로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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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대상과 감각의 여섯 기관이 모두 거짓 모습이므로 둘 다 허망하다고 한 것이다. 베이컨은 다만 감각의 대상이 되는 객관이 실체가 아닌 것을 알았으나 감각의 육근이 그 대상 과 마찬가지로 실체가 아닌 것을 몰랐으니, 이는 베이컨이 붓다보다 부족한 점이다.11) 경전에 또 이르기를, “물속에 해 그림자가 비쳤는데 두 사람이 함께 물속의 해를 보고 각 각 동쪽과 서쪽으로 간다고 하면 해도 각각 두 사람을 따라 간다. 그리하여 한 해는 동쪽으로 가고 한 해는 서쪽으로 가 서 햇빛에 일정한 기준이 없다”고 했는데 베이컨의 셋째 원 인도 이와 같은 뜻이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배우고자 하는 자는 만약 각 자 믿는 진리가 있으면 스스로 견지해 일가를 이루고, 자기 소신과 다르게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을 하는 자가 있으면 대 항하고 공격하면서 서로 주고받으며 토론해 오랜 뒤에 그 사이에서 완전한 진리가 생겨날 것이라고 했다. 왜 그런가? 비록 지혜에 높고 낮으며 크고 작은 차이가 있지만 그 본성 은 동일하며 진리의 성질이 또 순수해서 잡스럽지 않기 때 문이다. 동일한 본성의 지혜로 순수해서 잡스러움이 없는 11) 베이컨의 학설을 ≪능엄경≫과 관련지어 논한 것은 량치차오의 ≪음빙 실문집≫ 하, 학설, <近世第一大哲康德之學說>, 125∼126쪽의 내용 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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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구해 힘써 종사하면 어찌 방법이 달라도 같은 결론 에 이르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처음에 사람마다 이론이 다 르다고 해도 반드시 서로 웃는 날이 있을 것이다.12) 데카르트의 이론은 ≪원각경≫의 뜻과 부합한다. 그가 각자 믿는 진리 운운한 것은 경전에서 견해가 장애가 된다 고 한 것과 같고, 서로 대항하고 공격한다고 한 것은 경전에 서 여러 환상을 일으켜 환상을 제거한다고 한 것과 같다. 완 전한 진리라고 한 것은 경전에서 궁극의 진리를 얻는다고 한 것과 같다. 본성이 동일하다고 한 것은 경전에서 중생과 국토가 동일한 법성(法性)이라고 한 것과 같다. 방법이 달 라도 같은 결론에 이른다고 한 것은 지혜와 어리석음이 모 두 반야가 된다고 한 것과 같다. 본성에 어찌 둘이 있으며, 이치에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둘이 없는 본성으로 차이가 없는 이치를 탐구하면 반드시 한곳에서 손을 잡게 될 것을 의심할 수 없다. 4와 4를 합해 8 이 되는 것은 불변의 수학적 진리지만, 산수에 아주 어두운 어린이는 7이라고, 혹은 9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7이나 9라 는 대답은 견해가 장애 구실을 해 사실이 아닌 허상을 본 것

12) 데카르트 이하의 글은 ≪음빙실문집≫ 하, 학설, <近世文明初祖培根笛 卡兒之學說>, 23∼24쪽에서 그대로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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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그런 허상을 점차 제거하면 세상의 어린이가 8이라고 하지 않을 이가 없으니 진리는 4와 4를 합하면 8이 되는 것 과 같다. 아마 데카르트는 전생에 ≪원각경≫을 많이 읽었 을 것이다. 이 밖에 플라톤의 대동설, 루소의 평등론, 육상 산(陸象山)과 왕양명(王陽明)의 학문은 모두 불교와 부합 한다. 이상은 동서양 철학이 불교와 부합하는 것을 대략 살펴 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서양철학의 문헌을 하나도 읽은 바 가 없고, 어쩌다가 눈에 띈 부분은 샛별과도 같이 많은 사람 의 여러 책에 번역, 소개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전모를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그렇지만 철학이 동서고금에 금과옥조로 삼아 온 내용 이 역시 불교 경전의 주석이라는 것은 논할 필요가 없다. 왜 그런가? 위에 인용한 몇몇 철학자는 모두 철학계에서 학문 의 깊이가 있는 명망가이므로 그들이 진정한 철학자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이치가 다르면 모르지만 다르지 않다면 참된 철학이 다른 참된 철학과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 만약 이치 가 변한다면 모르지만 변하지 않으면 지금의 참된 철학이 과거의 참된 철학과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 이미 몇 철학자의 학설이 불교의 뜻과 일치하는 것을 알 았는데, 그들과 다른 몇 철학자의 학설이 불교의 뜻과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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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는다고 어찌 단언하겠는가? 차이가 있는 학설인데 도 견강부회해 구차하게 같은 이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지닌 불성이 같고 진리가 동일하기 때문에, 과정 과 방법이 달라도 같은 결론으로 돌아가며 만 갈래가 하나 를 받들게 되는 것이니, 불교는 철학의 큰 나라다. 무릇 중생계가 다함이 없으므로 종교계가 다함이 없고, 철학계가 또한 다함이 없다. 다만 문명의 정도가 날로 향상 되면 종교와 철학이 점차 높은 차원으로 발전할 것이며, 그 때에는 그릇된 견해나 신앙과 같은 것이 어찌 다시 눈에 띄 겠는가? 종교이면서 철학인 불교는 미래의 도덕과 문명의 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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