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사 천줄읽기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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Игрок 도박사


<지식을만드는지식 천줄읽기>는 오리지널 고전에 대한 통찰의 책읽기 입니다. 전문가가 원전에서 핵심 내용만 뽑아내는 발췌 방식입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천줄읽기

Игрок 도박사 표도르 도스토옙스키(Фёдор М. Достоевский) 지음 김정아 옮김

대한민국, 서울, 지식을만드는지식, 2015


편집자 일러두기 ∙ 이 책은 1956년 모스크바의 순수문학을 담당하는 정부 출판사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е издательство художественной литератур-

ы)에서 발간한 ≪도스토옙스키 전집(Ф. М. Достоевский,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총 10권 중 제4권을 원전으로 삼아 옮긴 것 입니다. ∙ 이 책은 전체의 약 20%를 발췌한 것입니다. ∙ 최대한 원문의 문체를 살리려 노력하되, 지나치게 긴 문장은 나 누었습니다. 내용의 명확한 전달을 위해 긴 의미 단위들을 작은 의미소로 자르기도 했습니다. ∙ 옮긴이는 작품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필요한 부분에 줄거리를 요약해 고딕체로 실었습니다. (…)는 생략 표시입니다. ∙ ‘나오는 사람들’은 옮긴이가 붙인 것입니다. ∙ 원문에서 대문자로 강조된 부분은 굵은 글씨체로 표시했습니 다. ∙ 이 책의 주석은 모두 옮긴이가 붙인 것입니다. ∙ 외래어 표기는 현행 한글어문규정의 외래어표기법을 따랐습니 다.


제10장

온천에서는, 유럽 어디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방문객들에게 방을 배정하는 것은 손님들의 희망이나 요구에 따른다기보 다는 오히려 호텔 관리자나 급사장들의 개인적이고 주관적 인 견해에 따라 결정된다. 여기서 명심해 둘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판단은 틀리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할머니에게만큼은 도가 지나칠 만큼 호화스런 방이 주어졌다. 목욕탕이 딸려 있는 호화스레 꾸며진 방 넷, 시종들이 쓸 방과 또 별도로 개 인 하녀들이 쓸 방 등등. 정말로 일주일 전에 어떤 대공 부인 이 이 방에 머물렀는데, 그런 사실들은 당연히 새로운 방문 객들에게도 즉시 알려졌다. 물론 그건 방값을 훨씬 더 많이 올려 받기 위해서였다. 할머니는 안락의자에 실려 이 방 저 방을 다녔다. 아니 굴러다녔다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그녀 는 주의 깊고 엄격한 시선으로 방들을 둘러보았다. 대머리 에 이미 나이가 지긋한 급사장은 공손하게 할머니의 첫 순 시에 동행했다. 그들 모두가 할머니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건 엄청난 주요 인사로 보았고, 특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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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점은 엄청난 부자로 보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숙박 부에는 곧바로 ‘장군 부인이자 공작 부인 타라세비체바’라 고 쓰였다. 비록 할머니는 단 한 번도 공작 부인이었던 적이 없었지만. 개인 하녀에 열차의 개인 칸, 할머니와 함께 들이 닥친 쓸데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가죽 여행 가방과 트렁크, 심지어 궤짝들이 아마도 처음에는 위력을 발휘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할머니의 안락의자, 카랑카랑한 날카로운 말투와 목소리, 그 어떤 반박도 용서치 않겠다는 듯 위압적 으로 아무런 거침없이 쏟아 내는 괴팍한 질문들, 한마디로 말해 직설적이고, 강렬하고, 절대적인 할머니의 모습 전체 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경건한 마음이 들게 했다. 순시 중 에 할머니는 갑자기 안락의자를 세우게 한 다음, 가구 중 하 나를 가리키며 급사장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해 댔고, 공손 히 미소를 띤 채 서 있던 급사장은 질문이 떨어지기도 전에 지레 겁부터 집어먹었다. 할머니는 프랑스어로 질문을 해 댔지만, 프랑스어를 그리 잘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내가 늘 통역을 해 주었다. 급사장의 대답은 대부분 할머니의 마음 에 들지도 못했고, 만족스럽지도 않았다. (…) “아, 그런데 룰렛은 어디서 하는 거지?” 나는 역에 있는 홀에 룰렛 도박장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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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자 곧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 도 박장은 많은가? 도박을 하는 사람은 많은가? 하루 종일 도박 을 하는가? 어떻게 하는 건가? 마침내 나는 말로 다 설명하 기는 어렵고, 또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직접 눈으로 보는 것 이 제일 좋겠다고 대답했다. “그래, 그럼 당장 그리로 가지! 앞장서게, 알렉세이 이바 노비치!” “아니, 정말이세요, 아주머니? 긴 여행 끝에 아직 쉬지도 못하셨지 않습니까?” 장군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는 어쩐지 다소 안절부절못했고,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당황하며 서로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할머니를 모시고 곧장 역으로 가는 것을 내키지 않아 했고, 심지어는 수치스러워하는 듯 했다. 역에서, 그것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할머니가 무슨 기 괴한 행동을 할지 몰라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가 할머니와 동행하겠다고 자처했다. (…) 우리는 무슨 개선장군이라도 되듯이 당당하게 역에 등장 했다. 호텔 시종들이 그랬던 것처럼 문지기와 급사들이 매 우 정중하게 우리를 맞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초리에는 호 기심이 가득 차 있었다. 할머니는 처음에는 모든 홀들을 다 둘러보자고 명령했다. 둘러보며 어떤 홀에서는 감탄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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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홀들에는 완전히 무관심했다. 그러면서도 모든 것에 대해 질문을 퍼부었다. 마침내 도박장 앞에 도착했다. 닫힌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당번이 화들짝 놀란 듯 갑자기 문을 활 짝 열어젖혔다. (…) 빽빽한 사람들로 비좁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 히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쇄도하는 것 자체가 좋은 일 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그만큼 많은 이익을 의미하는 것 이니까. 테이블 주위에 앉아 있는 크루피어 여덟 명은 눈을 크게 뜨고 판돈을 감시하고, 계산을 하고, 다툼이 일어나면 해결한다. 심한 경우에는 경찰을 부르기도 하지만, 문제는 잠깐이면 해결된다. 이곳 도박장에 있는 경찰들은 사복 차 림으로 구경꾼들 사이에 섞여 있기 때문에 그들을 구별해 내기란 불가능하다. 그들이 특히 눈여겨보는 이들은 좀도둑 과 날치기들인데, 룰렛 도박이 독특한 밥벌이 수단으로는 아주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사실, 장소가 달랐다면 그들 은 남의 주머니를 털거나 자물쇠를 열어 도둑질을 해야 하 는데, 만일 걸릴 경우에는 일이 아주 골치 아프게 끝나게 된 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주 간단하다. 그저 룰렛 판에 다가가 가까이 서 있다가 판이 시작되면 남이 딴 돈을 여봐란 듯이 공공연히 홱 낚아채어 자기 주머니에 쓱 집어넣기만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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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것이다. 만약 싸움이 벌어지면 사기꾼은 도박판이 떠 나갈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판돈이 자기 것이라고 우긴다. 만약 그의 사태 처리 능력이 능숙하고 증인들이 조 금이라도 갈팡질팡하게 되면, 많은 경우 돈은 도둑의 수중 으로 들어간다. 물론 이것은 액수가 그리 크지 않을 경우에 한해서다. 최악의 경우에는 크루피어나 미리 와 있던 다른 도박하는 사람들에게 들키기도 한다. 액수가 그다지 많지 않으면 진짜 돈 주인은 추문이 일어날까 두려워 싸움을 그 만두고 그저 자리를 떠난다. 하지만 만약 도둑질을 한 것이 증명되면 도둑은 온갖 추태를 벌이며 곧장 끌려 나간다. 할머니는 멀찌감치 떨어져 이 모든 장면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도둑이 끌려 나가는 장면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 듯했다. 트랑테 카랑트는 할머니의 호기심을 그다지 불 러일으키지 못했다. 룰렛과 구슬이 굴러다니는 것을 훨씬 더 좋아했다. 그러다 결국 할머니는 더 가까이 가서 구경하 고 싶어 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급사들 과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중개인들(대부분은 돈을 다 날린 폴란드인들이었는데, 이들은 운 좋은 도박꾼들과 외국인들 에게 바짝 달라붙어 대가를 바라고 봉사를 제공한다)이 당 장에 할머니를 발견해 내고는 그 비좁은 틈을 비집고 도박 판 한가운데의 크루피어 바로 옆에 자리를 마련해 놓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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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으로 할머니의 안락의자를 밀고 갔다. 도박은 하지 않고 구경만 하던 많은 방문객들(그들 대부분은 가족과 함께 온 영국인들이다)도 도박꾼들 뒤에 서서 할머니를 보기 위해서 할머니가 앉아 있는 도박판으로 벌 떼같이 몰려왔다. 손잡 이 달린 안경들이 수도 없이 할머니 쪽으로 향했다. 크루피 어 쪽에서도 어떤 기대를 갖게 되는데, 보통 이런 기괴한 도 박꾼이 나타나면 정말 뭔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만 같았기 때문이다. 다리를 못 쓰는 일흔다섯 살의 여자가 도박을 하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절대 아니었다. 나도 역 시 도박판 쪽으로 비집고 들어가서 할머니 옆에 자리를 잡 았다. 포타피치와 마르파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 끼어 멀리 떨어진 한쪽 구석에 남았다. 장군과 폴리나, 드 그리외와 블 랑슈 양도 구경꾼들 사이에 끼어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할머니는 도박장 안의 많은 사람들을 관찰한다. 엄청나게 많은 돈을 따 광분해 미친 듯이 돈을 거는 사람, 계산적으로 조금씩 돈을 거는 사람, 따고 잃는 많은 사람들을 본다. 관찰을 끝낸 후 할머니는 화자인 ‘나’에 게 판의 의미를 설명해 달라고 한다.

“자, 이제부터 자네는 나에게 각각의 판이 의미하는 것들 이 무엇인지, 돈을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모조리 다 설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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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게, 알겠나?” 나는 판돈을 걸 때의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와 빨강과 검 정(rouge et noir), 짝수와 홀수(pair et impair), 모자라는 수 와 남는 수(mangue et passe), 그리고 마지막으로 숫자 체 계에서 숫자들이 갖는 여러 가지 가치26)들을 아는 대로 전

26) 빨강과 검정… 여러 가지 가치: 원래 룰렛이란 작은 바퀴라는 프랑 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직경 19∼25밀리미터 크기의 공을 회전판이 돌아가는 반대 방향으로 돌려 회전판 번호의 포켓에 공이 들어가면 그 번호에 배팅한 플레이어가 이기게 되어 있는 전적 으로 운에 달린 게임이다. 원형판 위의 공이 어느 숫자 혹은 어떤 색 깔의 판에 맞는지 등을 배팅과 함께 알아맞히는 게임으로, 배팅한 고객을 구별하기 위해 고객 별로 다른 색의 룰렛용 칩을 사용하며 딜러가 “그만(No more bet)!”이라고 할 때까지 돈을 걸 수 있다. 룰렛판은 1부터 36까지의 숫자가 적힌 검정색과 빨간색이 교차한 칸과 숫자 ‘0’이 적혀 있는 녹색 칸, 총 37개의 칸으로 구성된다. 돈 을 거는 데는 여러 가지 옵션이 있는데, 크게 인사이드 베트와 아웃 사이드 베트로 나뉜다. 인사이드 베트는 하나의 번호에 베팅하는 스트레이트 혹은 싱글과 두 개의 인접한 숫자에 베팅하는 스플리트 가 있으며, 확률이 낮은 만큼 배당금이 크다. 본문에서 언급된 것은 아웃사이드 베트인데, 이것은 확률이 높고 지불금이 낮다. 예를 들 어 빨강과 검정은 공이 떨어지는 칸의 색깔에 베팅하는 것으로 확률 이 50퍼센트다. 짝수나 홀수도 “0”을 제외하고는 확률이 50퍼센트 다. 한국어로는 고/저로 불리는 ‘망크(manque)’와 ‘파세(passe)’는 1∼18까지 또는 19∼36까지로 나누어서 돈을 베팅하는 것으로 이 것도 역시 확률 50퍼센트다. 0에 떨어질 확률은 37분의 1이므로,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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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설명해 주었다. 할머니는 이 모든 것을 주의 깊게 듣고, 기억을 되살려 보고, 또다시 묻고 하다가, 아예 완벽하게 암 기해 버렸다. 돈을 거는 각각의 체계에 대한 것은 판이 돌 때 마다 그때그때 예를 들어 보여 줄 수 있었고, 그래서 그 많은 것을 그토록 쉽고 빠르게 습득하고 암기할 수 있었던 것이 다. 할머니는 몹시 만족했다. “그럼 제로는 뭐지? 봐, 저 곱슬머리 크루피어가 지금 제 로라고 외쳤잖아? 그리고 어째서 저 사람이 판돈을 몽땅 다 쓸어 가는 거지? 저 많은 걸 말이야, 몽땅 다 자기가 갖는 거 야? 저게 대체 뭐야?” “제로는 말입니다, 할머니, 크루피어의 이익이란 뜻입니 다. 만약 공이 제로에 떨어지게 되면, 계산할 필요도 없이 판돈을 몽땅 크루피어가 가져가게 됩니다. 사실, 비기는 일 도 있긴 하지만 대신 크루피어는 한 푼도 지불하지 않습니 다.” “세상에나! 그럼 난 한 푼도 못 받는단 말이냐?” “아닙니다, 할머니. 만약 판이 시작하기 전에 할머니가 미리 제로에 걸고, 그때 제로가 나오면 할머니는 건 돈의 서 른다섯 배에 해당하는 돈을 받게 되는 겁니다.”

당금 역시 엄청나게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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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서른다섯 배라고? 그게 자주 나오냐? 그럼 대체 저 바보들은 왜 안 거는 거냐?” “36 대 1의 확률이거든요, 할머니.” “무슨 쓸데없는 소리야! 포타피치! 포타피치! 아니, 잠깐, 나한테도 돈이 있지, 자 여기!” 할머니는 돈이 꽉 차 빵빵한 지갑을 주머니에서 꺼낸 후, 지갑 속에서 1프리드리히를 꺼 냈다. “자, 이걸 지금 제로에 걸어 봐.” “할머니, 제로는 이제 방금 나왔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한동안은 안 나올 겁니다. 너무 많이 거셨으 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지요.” “무슨 쓸데없는 소리야, 걸어 봐!” “좋습니다. 하지만 저녁때까지 안 나올지도 모르고, 그렇 게 되면 할머니는 1000프리드리히나 잃게 될 겁니다.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난다니까요.” “그건 헛소리야,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워! 늑대 무서워 숲에 못 가냐? 뭐야? 졌어? 그럼 다시 걸어!” 또 한 번 1프리드리히를 날렸다. 세 번째로 걸었다. 할머 니는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할 정도로 안절부절못하며 이글 거리는 눈으로 회전판의 톱니바퀴를 따라 통통거리며 튕겨 다니는 구슬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세 번째 것도 역시 날 렸다. 이성을 잃은 할머니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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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제로라는 말 대신 심판의 입에서 “36”이라는 말이 나오자,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기까지 했다. “에이, 망할 놈의 제로!” 할머니는 화가 치밀었다. “이 망 할 놈의 제로가 왜 빨리 안 나오는 거야? 죽을 맛이지만, 제 로가 나올 때까지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테야! 저 망할 놈의 곱슬머리 심판이 있는 한 제로는 안 나올 거야! 알렉세이 이 바노비치, 한 번에 금화 두 닢씩 걸어! 이렇게 잃다가는 제로 가 나와도 아무것도 못 건지겠어.” “할머니!” “걸라면 걸어! 자네 돈도 아닌데 왜 그 난리야.” 나는 2프리드리히를 걸었다. 구슬이 회전판을 따라 오랫 동안 가볍고 빠르게 굴러가더니, 마침내 톱니바퀴를 따라 퉁퉁 튀어 다니고 있었다. 할머니는 온몸이 마비된 듯했고, 내 손을 꽉 잡았다. “덜컹!” “제로.” 심판이 큰 소리로 선언했다. “봤어, 봤냐고!” 이렇게 말하며, 내 쪽으로 온몸을 홱 돌 린 할머니는 온통 빛을 발하며 만족했다. “내가 뭐라고 했 어, 내가 자네한테 뭐라고 했냐고! 하느님이 내게 금화 두 닢 을 걸라고 가르쳐 주셨지. 그래, 이제 내가 얼마를 받게 되 는 거지? 어째서 돈을 내주지 않는 거지? 포타피치, 마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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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것들은 다 어디 있는 거야? 우리 일행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거야? 포타피치, 포타피치!” “할머니, 잠시만요,” 내가 속삭였다. “포타피치는 문간에 있습니다. 하인은 여기 들어올 수 없습니다. 보세요, 할머 니, 할머니께 돈을 내 드리고 있어요, 얼른 받으세요!” 파란 종이에 봉인된 50프리드리히짜리 돈다발이 할머니 앞에 던져졌고, 또 20프리드리히짜리는 봉인되지 않은 채 계산되어 있었다. 나는 이 모든 돈을 작은 삽으로 긁어모아 할머니 앞에 두었다. “여러분, 돈을 거십시오! 돈을 거세요! 돈을 더 거실 분 없으신가요?” 룰렛 판을 돌릴 준비를 하며, 돈을 걸라고 권 하는 크루피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맙소사! 이러다 늦겠어! 벌써 룰렛 판이 돌아가려고 하 잖아! 걸어, 어서 돈을 걸어!” 할머니가 수선을 떨었다. “어 서, 꾸물대지 말고 빨리 걸라고.” 할머니는 제정신이 아닌 듯, 온 힘을 다해 나를 떠밀며 재촉했다. “그럼 이번엔 어디에 걸까요, 할머니?” “제로에, 제로에 걸어! 다시 제로에 걸라니까!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걸어! 지금 내 수중에 다 합해서 얼마가 있는 거 지? 70프리드리히인가? 아까워하지 말고, 한 번에 20프리드 리히씩 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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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을 찾으십시오, 할머니! 어떤 때는 200번에 제로가 한 번도 안 나올 때도 있다니까요! 장담하는데, 이러시다가 는 가진 돈 전부를 다 잃게 되실 겁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워! 어서 걸어! 벌써 벨이 울리고 있잖아!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러니 얼른 걸기나 해.” 할머니는 거의 광분한 상태에서 몸 까지 떨고 있었다. “규칙에 따르면, 제로에는 한 번에 12프리드리히 이상은 걸 수가 없습니다, 할머니. 그러니 이렇게 걸겠습니다.” “어째서 안 된다는 거야? 자네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 엉? 므시외! 므시외!” 할머니는 왼쪽에 앉아 판을 돌릴 준비 를 하고 있는 크루피어를 세게 치며 불렀다. “콩비앵 제 로?27) 두즈, 두즈?28)” 나는 할머니의 질문을 재빨리 프랑스어로 다시 설명했 다. “위, 마담.29)” 크루피어가 정중하게 재확인해 주었다. “규칙상, 다른 경우와 똑같이 한 번에 4000플로린을 초과해

27) 콩비앵 제로(combien zero)?: 제로에 얼마까지? 28) 두즈, 두즈(douze, douze)?: 12, 12야? 29) 위, 마담(Oui, madame): 네,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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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안 됩니다.” 그가 이렇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럼, 할 수 없지, 12를 걸어.” “자, 판이 시작됩니다!” 크루피어가 소리쳤다. 판이 돌기 시작했고, 30이 나왔다. 졌다! “다시! 다시! 다시! 다시 걸어!” 할머니가 소리쳤다. 나는 더 이상 반대하지 않고, 어깨만 으쓱하고는 다시 12 프리드 리히를 걸었다. 판은 오랫동안 돌았다. 할머니는 온몸을 떨 며 판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정말로 또다시 제로가 나와서 돈을 딸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놀란 눈으로 할머니를 바라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할머니 의 얼굴은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확신으로 밝게 빛나고 있 었고, 지금이라도 당장 “제로!” 라는 외침이 울려 퍼질 것이 라는 확고 불변한 기대에 물들어 있었다. 구슬이 칸에 탁 튕 겨 들어갔다. “제로!” 크루피어가 소리쳤다. “뭐!” 할머니는 미칠 듯한 승리감에 젖어 자랑스러운 듯 이 내 쪽으로 돌아보았다. 나도 노름꾼이었다. 바로 그 순간 난 이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사지가 후들거렸고, 머리는 띵했다. 물론 열 번을 굴려 세 번이나 제로가 나왔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긴 하 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 특별히 놀랄 만한 것은 아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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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께 세 번이나 연속으로 제로가 나오는 것을 직접 목격했 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구슬이 무슨 번호에 떨어졌 는지를 종이에다 열심히 기록하고 있던 노름꾼 하나가, 바 로 어제는 하루 종일 단 한 번밖에 제로가 나오지 않았다고 큰 소리로 말했다. 할머니에게는 특별히 친절하고도 정중하게 셈을 한 돈 이 지불되었는데, 그것은 아주 큰 액수를 딴 사람에게 걸맞 은 대우였다. 할머니는 정확히 420프리드리히, 다시 말해, 4000플로린과 20프리드리히를 받게 되었다. 20프리드리히 는 금화로 받고, 4000플로린은 은행권으로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 할머니는 더 이상 포타피치를 부르지 않 았다. 그럴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더 이상 주변 사람들을 쿡쿡 찌르지도 않았고, 외면적으로는 떨지도 않았 다.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할머니는 속으로 떨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를 목표로 한 듯, 하나에 온몸과 마음을 집중하 고 있었다.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저 사람이 한꺼번에 4000플로린 까지만 걸 수 있다고 했지? 그래, 그럼 4000플로린을 가져다 가 빨강에 다 걸어.” 할머니가 결정했다. 말려 봐야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판이 돌기 시작했다. “루즈!30)” 크루피어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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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4000플로린을 땄으니, 합이 8000이 되었다. “4000은 나를 주고, 4000은 다시 빨강에 걸어.” 할머니가 명령했다. 나는 다시 4000을 빨강에 걸었다. “루즈!” 심판이 또다시 외쳤다. “전부 1만 2000이야! 그걸 전부 이리 줘. 금화는 여기 지 갑 속에 넣고, 지폐도 잘 챙겨. 좋아 이만하면 됐어! 집으로 가자! 의자를 밀어!”

30) 루즈(Rouge)!: 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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