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희동화선집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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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등

소원



1. 학교 공부가 끝난 미루는 무화산 기슭의 감자밭을 따라 올 라갑니다. 화전민들이 일구어 놓은 감자밭에는 온통 하양, 보라색 감자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그 위로 한 떼의 흰나비들이 하늘하늘 춤을 추는 모습이 보입니다. 감자밭을 지나자 이제 산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미루는 길에 버려진 나무 막대기를 주워 들곤 풀숲을 이리저리 헤치며 걸어갑니다. 혹시 뱀이 나타날까 봐 겁 이 나서였습니다. “뱀은 산딸기가 발갛게 익어 갈 무렵 제일 독이 올라 있 단다.” 언젠가 혜산 스님이 해 주신 말이 떠올랐기 때문입니 다. 산허리를 서서히 돌아서자 멀리 진성사가 내려다보였 습니다. 진성사는 무화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슭에 세워진 절 이었습니다. 고려시대 말, 높은 자리에서 물러난 어느 양 반이 세웠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진성사는 낡고 오래된 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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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는 늘 하던 버릇대로 산중턱에 잠시 멈추어 서서 진성사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저녁 햇살이 기와지붕으로 내려앉은 게 언제 보아도 참 좋았습니다. 뭔가 위엄이 가득 서린 대웅전도 보입니다. 그 옆으로 삼성각과 명보전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정하게 서 있습 니다. ‘지금쯤 다정 스님이 예불을 드리고 있을 거야.’ 미루는 이제 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안 보 고도 척척 알아맞힐 수 있습니다. 보나 마나 지금쯤 명희 보살님은 저녁 공양을 위해 텃밭에 나가 푸성귀를 뜯고 있 을 게 뻔했고요. 미루는 천천히 절 마당으로 들어섰습니다. “미루야, 이제 오니?” “네, 스님.” “어서 나와 심부름 좀 하렴.” 혜산 스님이 말했습니다. 미루는 책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절 안채로 들어갔습니 다. 안채에서는 스님들과 여러 행자들, 보살님들이 모여 등 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면 부처님이 태어나신 석가탄신일이기 때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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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래서 모두들 둘러앉아 절 마당에 달 등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방 안에는 벌써 여러 가지 등이 한쪽에 수북이 쌓여 있 습니다. 등의 모양은 정말 다양했습니다. 연꽃등, 동그란 등, 팔각형 등, 초롱 모양 등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 습니다. 미루는 그중에서도 연꽃등이 제일 좋았습니다. 하지만 분홍색 한지를 한 겹 한 겹 겹쳐서 만든 연꽃등을 바라보 고 있으면 괜히 마음이 슬퍼졌습니다. 누군가 보고 싶어 지기도 하고요. “미루야, 거기 앉아서 철사를 집어 주련?” 연꽃등을 만들던 혜산 스님이 말했습니다. “네.” 미루는 얌전한 여자아이처럼 혜산 스님 곁에 앉아 철사 를 집어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 물었습니다. “스님, 부처님 탄신일에는 왜 이런 등을 만드는 거예 요?” “원, 녀석두, 절밥을 그리 오래 먹고도 여태 그걸 몰랐단 말이야?” 항상 얼굴빛이 시리도록 맑은 혜산 스님은 눈에 함박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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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을 담고 물었습니다. “하긴 자꾸 뭔가 궁금한 게 생긴다는 건 차츰차츰 철이 들어간다는 게지. 우리 미루도 벌써 4학년인걸.” “에이, 스님도!” 미루는 괜히 멋쩍어서 뒤통수를 긁적였습니다. “원래 연꽃은 부처님의 자비하심을 상징하는 거란다. 그래서 초파일에는 신도들이 연꽃등을 켜고 자기가 원하 는 것을 위하여 불공을 드리는 거야. 물론 다른 등에 불을 켜는 것도 다 같은 뜻이란다. 또 한 가지는 부처님의 자비 로운 뜻을 모든 사람들에게 밝히고 알려 주려는 뜻도 있 지.” 혜산 스님은 가만가만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다간 또 덧붙여 말했습니다. “미루야, 사람들이 자기 이름이 써진 등을 달고 부처님 께 절을 하면, 부처님께서 소원을 다 이루어 주신단다. 맑 고 깨끗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만나기 때문이지. 이제 알 겠느냐?” 혜산 스님은 볼우물을 지으며 웃었습니다. ‘정말 그럴까…? 정말 부처님이 소원을 들어주실까?’ 미루는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건 바로 엄마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엄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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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어요.

2. “미루야, 너희 집이 진성사니?”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영이가 궁금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물었습니다. “…으응, 그래.” 미루는 얼굴이 발개진 채 대답했습니다. 절이 집이라는 걸 다영이한테 말하기가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새 학년이 되어 짝꿍이 정해졌을 때 미루는 뛸 듯이 기 뻤습니다. ‘다영이와 짝꿍이 되다니!’ 미루는 마음속으로 좋아하던 다영이와 나란히 앉게 되 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다영이는 다른 아이들처럼 미 루를 놀리지도 않았거든요. 공부 못한다고 흉도 안 보고, 받아쓰기 쪽지시험을 볼 때도 다른 아이들 몰래 슬쩍슬쩍 시험지도 보여 줬습니다.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해 쩔쩔맬 때도 슬그머니 답을 가르쳐 주고 말이지요. “자,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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