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우사이춘풍전_맛보기

Page 1

계우사(戒友詞)


성종대왕이 즉위한 첫해니라. 시절은 풍년이고 충신 효자는 조정에 가득하고, 방방곡곡 백성들이 부르는 풍년가, 풍류 소리가 곳곳마다 낭자하더라. 나라가 이리 태평하니 오입쟁 이1) 한량2)이 없을쏘냐. 색주가 곳곳마다 잔치가 가득하고 시와 술, 가사가 불리니 호걸남자를 금할 길이 없었더라. 이때는 어느 때인고. 냇물 앞에 꽃과 풀이 만발한데 청 루3) 높은 집에 호탕한 왈짜4)들, 허다하게 묻는 사람 중에 남북촌을 다 털어서 대방 왈짜5)는 김무숙이렷다. 지체로 논하자면 중촌6)의 장안 갑부요, 고집 있고, 상하 체통 명분 이 있고, 못하는 일이 없더라. 문필로 논하면 과문7)과 육 체8)가 비상하고, 글씨 또한 명필이요, 활쏘기 솜씨 대단하

1) 오입쟁이: 여자와 방탕하게 놀아나기를 잘하는 사람. 2) 한량(閑良): 특별한 직업 없이 돈 잘 쓰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 3) 청루(靑樓): 기생집, 술집. 4) 왈짜(曰者): 도시의 유흥가에 있으면서 세력을 형성하며 풍류와 주색을 즐 겼던 계층을 일컫는 말. 또는 일 없이 놀기를 즐기며 투전이나 구걸을 일삼던 사람들. 5) 대방 왈짜: 왈짜 중의 우두머리. 6) 중촌(中村): 중인(中人)들이 살던 서울 안의 구역. 지금의 을지로와 종 로 사이임. 7) 과문(科文): 문과(文科)에서 시험을 보이던 여러 문체(文體)의 글. 8) 육체(六體): 과거에 시험 보이던 시(詩)· 부(賦)· 표(表)· 책(策)· 논 (論)· 의(疑)의 총칭.

17


고, 무술은 십팔기9)에 노래는 명창, 거문고·생황·단소 오 음육률 속을 알고, 판소리의 속멋도 알고, 계집들에게 다정 하여 돈 아낄 줄 모르고, 노름판에서 우스운 소리 잘도 하는 데, 잡기도 할 만하나 천하다고 본 체 않더라. 사람이 이러하나 부족한 게 지식이요, 허랑한 게 마음이 라. 형세가 이러하고 재주가 뛰어나니, 삼태육경 재상님들 이 사람을 만들려고 입신양명10) 일러가며 간간이 설득하되, 마다하고 어깃장 놓으며, 죽마고우 어진 친구들이 좋은 말 로 타이르면 싫다 하네. 옳은 말에 성내기와 그른 말 곧이듣 기, 기생집 찾아가 매파 불러 청하기, 아래대 우대11) 색주가 에 밤낮없이 다니니 청루고각은 사랑방이요, 기생집은 본 댁이라. 부모 형제가 다 돌아가시니 집안 교육도 없어지고, 행세가 이러하니 가족인들 돌아볼까. 호호탕탕 미친 마음 에 떠받들면 좋아하고, 처자식 몰라보며, 활협한 성격에 모 두 속아 허송세월 지나간다. 무숙이의 어진 아내 여자 중의 군자 같고 규중에 있는 성

9) 십팔기(十八技): 중국에서 전해온 18가지 무예. 10) 입신양명(立身揚名): 출세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침. 11) 아래대 우대: ‘아래대는 ’ 서울의 동대문과 광화문 방면으로 군총 계급이 많 이 살았고, ‘우대는 ’ 인왕산 근처 마을로 관아의 일을 보는 중인 계급이 많이 살 았다.

18


현 같다. 태임12) 태사13) 맑은 덕과 장강14)의 색을 두루 갖 추고, 반악15)처럼 고운데다 이비16)의 정절행을 본받고자 하였더라. 바느질과 길쌈하기 으뜸이요, 음식 솜씨 향내 나 고, 세간 살림 착실하고, 일가친척 화목하고, 친척 간에 도 리 있고, 노복에게 교훈하기를 착하고 덕 있게 하던 것이었 다. 이러한 어진 아내를 두고 무숙이의 흐린 마음은 오장이 뒤틀리고 성화같이 화를 내며, 집에 잠시도 있기 싫어 남의 밥, 남의 이불을 제 것인 양 지내니 이런 잡놈이 또 있을까. 이때는 어느 때인고. 서울 장안에 봄꽃이 피는 때로구나. 초목들이 살아나 즐거워하고 곳곳마다 봄빛인데, 어른과 아이들이 문수암(文殊庵)과 중흥사(重興寺)17)를 지나 백

12) 태임(太任): 주(周)나라 왕계(王季)의 아내이자 문왕(文王)의 어머니. 13) 태사(太姒): 주나라 문왕의 아내.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 왕계의 어머니인 태강(太姜)과 더불어 주나라 왕실의 세 어머니로 꼽히며, 어진 아내 의 표상으로 받들린다. 14) 장강(莊姜): 중국 춘추시대의 위나라 장공(莊公)의 아내로 얼굴이 매우 예뻤다고 함. 15) 반악(潘岳): 진(晋)나라의 문인. 자는 안인(安仁). 재주가 뛰어나고 잘생 기어, 그가 거문고를 끼고 장안의 길에 나서면 아녀자들이 그의 관심을 끌려 고 과일을 따서 던졌다고 함. 16) 이비(二妃): 요임금의 두 딸로 순임금의 두 왕비였던 아황(娥皇)과 여영 (女英). 17) 문수암과 중흥사: 북한산에 있던 절 이름.

19


운봉 정상에 다다르니 북쪽으로 삼각산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끝이 없구나. 장부의 가슴속에 큰 꿈을 가진 듯하구나. 아득히 먼 하늘에 걸려 있는 은하수에 더러운 갓끈을 씻은 후에, 꽃들이 만발한 석양 길을 따라 취흥이 도도하여 손길 을 마주 잡고, 어깨 밀며 게트림하며, 노래에 맞춰 발장단을 치며, 걷다가 쉬다가 하면서, 청루고당 높은 집에 어식비 식18) 올라간다.19) 좌석에 보니 왈짜들 둘러앉아 있는데, 높은 자리에는 당 하관20) 천총21) 내금위장22) 소년 출신 선전관,23) 비변랑24) 도총관25) 경연26) 앉아 있고, 그다음 바라보니 각 영문 교련

18) 어식비식: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망설이는 모양. 19) 아득히 먼 하늘에∼올라간다: 김춘택의 시조를 가져다 읊은 구절. 20) 당하관(堂下官): 정3품 이상의 벼슬아치를 당상관, 그 아래의 벼슬아치를 당하관이라고 했음. 21) 천총(千摠): 조선 시대에 훈련도감, 금위영 등에 속해 있던 정3품의 무관 벼슬. 22) 내금위장(內禁衛將): 조선 시대에 임금을 호위하던 군대의 으뜸 벼슬. 23) 선전관(宣傳官): 조선 시대에 선전관청에 딸린 무관 벼슬 또는 그 벼슬 아치. 24) 비변랑(備邊郞): 나라 안팎의 군사기밀을 다루던 종6품 벼슬. 25) 도총관(都摠官): 조선 왕조 때에 오위도총부의 정2품 벼슬. 26) 경연(經筵): 임금에게 경서를 가르치거나 함께 토론하던 일을 하던 벼슬 아치.

20


관,27) 세도 있는 중방28)이며, 각사 서리29) 북경 역관30) 좌 우포청31) 내행군관32) 대전별감33) 울긋불긋 당당한 붉은 옷 색색이라. 또 한편을 바라보니 나장,34) 정원사령,35) 무예별 감36) 섞여 있고, 각 시전 상인들, 남촌 한량들, 노래 명창 황 사진, 가사 명창 백운학, 이야기꾼 오물음, 거짓말 잘하는 허재순, 거문고장이 어진창, 가야금 잘하는 장재량, 퉁소 잘 하는 서계수, 장구재비 김창옥, 젓대 일등 박보완, 해금 일 등 홍일등, 선소리(판소리)에 송흥록 모흥갑, 다 와 있구나. 무숙이 들어가니, 상하 모든 왈짜 중에 큰 소리 할 이 누 가 있으며 트집 잡을 이 누가 있을까. 석양이 지는 산길의

27) 교련관(敎鍊官): 조선 말에, 현대식 군제(軍制)에 따라 군대를 교련하던 장교. 28) 중방(中房): 수령이 데리고 있는 심부름꾼. 29) 서리(胥吏): 조선 시대에 관아에 딸려 말단의 행정 실무에 종사하던 이속 (吏屬). 30) 역관(譯官): 통역을 하는 관리. 31) 좌우포청(左右捕廳): 포도청의 좌청과 우청을 아울러 일컫는 말. 32) 내행군관(內行軍官): 양반 부인의 행차를 호송하는 군인. 33) 대전별감(大殿別監): 임금이 거처하는 곳에서 임금의 심부름을 하던 벼슬. 34) 나장(羅將): 의금부에서 죄인을 문초할 때 매를 때리는 일과 귀양 가는 죄 인을 압송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리. 35) 정원사령(政院使令): 승정원의 사령. ‘사령은 ’ 관청에서 심부름하던 사람. 36) 무예별감(武藝別監): 임금님의 호위 무사.

21


제비같이 어식비식 들어올 제, 호사한 치레 볼작시면 잎 모 양의 금 동곳37) 대양중38)의 산호 동곳 비스듬히 꽂고, 외올 망건, 대모관자, 쥐꼬리 당줄,39) 진품 금패,40) 좋은 풍잠41) 이마 위에 세게 묶고, 갑주,42) 보라색 잔줄 저고리, 백갑주43) 누비바지, 백제우사 통한삼44)에 장원주 누비 동옷,45) 통화 단46) 잔줄 배자,47) 양색단48) 누비 토시, 순밀화 장도,49) 학 슬안경,50) 당세포 중치막51)에 지품당띠52) 통대자53) 허리띠

37) 동곳: 상투를 튼 뒤에 그것이 다시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물건. 38) 대양중(大洋中): 바닷속의. 39) 당줄: 망건에 달아 상투에 동여매는 줄. 40) 금패(錦貝): 보석인 호박(琥珀)의 한 종류로 사치품. 41) 풍잠(風簪): 망건의 중앙에 다는 장식품. 42) 갑주(甲紬): 품질이 좋은 고급 명주. 43) 백갑주(白甲紬): 흰색의 고급 명주. 44) 백제우사 통한삼: 백색 올이 곱고 얇은 여름용 옷감으로 지은 속적삼. 45) 누비 동옷: 누비로 만든 동옷. 동옷은 남자가 입는 저고리. 46) 통화단: 비단의 일종. 47) 배자(背子): 겨울철에 부녀자가 저고리 위에 덧입는, 조끼처럼 생긴 옷. 주머니와 소매가 없고, 양 옆구리의 귀가 겨드랑이 밑까지 트여 있음. 흔히 양 단천의 가장자리와 안쪽에 짐승의 털을 넣거나 댐. 48) 양색단(兩色緞): 비단의 한 가지. 49) 순밀화 장도(純蜜花粧刀): 순밀화로 장식한 장도칼. 50) 학슬안경(鶴膝眼鏡): 다리 가운데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만든 안경. 51) 중치막: 소매가 넓고 길며 옆이 터지고 네 폭으로 된, 옛날 남자가 입던 웃 옷의 한 가지.

22


며 우단 주머니, 오색 모초54) 고운 쌈지 당팔사55) 끈을 달고 용두향56)의 대당전을 옷고름 안에 달아 차고, 버들잎 모양 고운 발 육날 미투리57) 손가락으로 엎드려서 매고, 우연히 만난 모임 한가운데 썩 들어가며, “좌중 평안하오?” 하며 썩 들어서니, 태도와 물색이 남자 중에 호걸 분명하 고 능란하고 찰찰한 잔재미를 넘어설 사람이 없구나. 사람 마다 통성명한 연후에 무숙이가 몸을 들어, “거 말씀 좀 합시다.” “무슨 말씀이오?” “좌우에 있는 벗님네들은 나의 말씀을 평범하게 듣지 마 오. 이내 몸 무숙이가 어려서부터 호협자로 자랄 적에 부모 님 은덕으로 호의호식 커가면서 독서당에서 글 배울 제 재 주 있다 이르더니, 양친이 돌아가시매 문필 재주 없어지고

52) 지품당띠: 통대자 허리띠를 의미하는 듯. 53) 통대자(通帶子): 전대처럼 속이 비게 짠 띠. 54) 모초(毛綃): 중국에서 나는 비단의 하나. 날은 가는 올로, 씨는 굵은 올로 짠다. 55) 당팔사(唐八絲): 중국에서 나는 실 여덟 가닥으로 꼰 노끈. 56) 용두향(龍頭香): 중국의 우당산 절벽에 조각되어 있는 용 머리 모양의 향로. 57) 육날 미투리: 새끼 여섯 줄을 세로로 놓고 헐하게 삼은 신발.

23


이전과는 어긋나더이다. 그러나 언짢고 곤한 줄을 이때까 지 전혀 몰라 가산을 돌보지 않고 방탕한 이내 마음 잡을 길 이 없었다오. 마음을 다시 돌이키니 불쌍한 우리 선영, 유정 할사 우리 처자, 제사를 모시고 손님을 접대하기, 사후 신세 생각 없이 살다가는 좋은 형세 간곳없고 거적쌈58)이 위태 로우니, 오늘 이 모임의 상하 벗님네들과 의논하여 마지막 으로 한 번 놀고, 오입을 평생 떼어버리고 착실히 가산을 모 으기에 힘쓰려고 하니, 내 생각이 어떠하오?” 좌중에 있는 여러 왈짜들 대답이 비슷한데, 속 못 차린 왈짜들은, “이 애 무숙아 좀 자식아. 인생은 덧없는 것인 줄만 알아 라. 한평생 시와 술로만 보내던 이태백이는 고래 타고 하늘 나라만 갔다더라. 재물을 두고 아껴서 못 쓰는 것은 지독한 구두쇠나 할 짓이로다.” 한 왈짜 나앉으며, “이 자식. 미친 애들. 내 신세 남의 신세 못 가리며 말을 말고, 오입 근본을 들어보아라. 계집의 오입으로 두고 일러 도 삼십 전에 맘껏 놀다 사십이 가까우면, 맛 좀 들고 속 굳 은 서방 골라 얻어 종신토록 살아야 하는 게요, 지각없이 속

58) 거적쌈: 거적으로 시체를 싸서 지내는 장사.

24


못 차려 아리따운 얼굴이 삭아지고 흰 머리가 희뜩희뜩 하 도록 맛만 취해 늙어지면, 돈냥이나 들고 드나들던 한량 손 님들 하나둘 오다가 끊어지고 말 것이라. 그제야 문득 생각 하면 몸 둘 곳이 바이없어 후회하는 게요. 우리 오입쟁이들 또한 이와 마찬가지라. 무숙이 네가 작정한 것이 옳다, 옳 다, 부디 옳다.” 군평이 나앉으며, “그렇지, 그렇지. 무숙이 네 말이 기특하다. 네 말대로 마 지막으로 놀 양이면 어떻게 놀려고 하느냐?” 무숙이 이른 말이, “바람둥이 왈짜들은 모이기만 하면 노름판에 거짓말, 술 취한 소리, 흰소리로 악양루 가자, 고소대 가자, 계명산 가 자, 봉황대 가자 하지만 그게 다 미친 자식 헛소리요, 그런 강산 제일 경치는 중국에나 있는 것이라. 멀고 먼 만리타국 가잔 말이 술 취한 소리지. 우리 동방국의 제일 경치는 금강 산 내외경과 그리로 내달아 관동팔경, 의주 통군정, 안주의 백상루, 영변의 낙선대, 성천의 강선루, 평양의 연광정, 부 벽루, 모란봉, 칠성대, 보덕굴과 능라도 영평사며, 개성부로 들이달아 송악산 박연폭포, 파주 임진 좋은 강산, 함흥 낙민 루, 길학정, 복산루, 공주 금강산성이며, 전주 완산 한벽루 며 남구산성 기이하고, 산청의 환아정, 진주의 촉석루, 통영 25


세병관, 청주의 한산도며, 밀양의 영남루, 울산 태화루, 동 래 인화정, 학소대를 구경하고, 경주 백률송순59) 봉황대가 좋을시고. 영천의 조양각, 대구 달성 구경하고 안동 태백 내 외경과 동개골 서구월 남지리 북향산을 다 둘러본 연후에, 보은 속리산 운장대며 무주 무풍 적상산성, 부안 변산 영암 월, 광양 백운봉, 문경 주흘산, 낱낱이 구경하고 아니 본 곳 없었으니 세상 생각이 전혀 없네. 명기명창 풍류랑이 내 수 단에 우러나고, 삼재팔난 고락풍진 모두 다 겪어내고, 의복 호사, 바느질하는 온갖 범절과 행동거지와 파사,60) 보사61) 보기 드문 보배, 좋은 노리개, 금옥패물, 천금준마, 보라 매62) 일등 미색 원이 없이 다 놀아보고, 세간 방 안 기물 그 립지 않게 놀았으니 무슨 한이 있을쏘냐. 아서라. 던져두고 이 노름 저 노름 소풍 가기 술 마시기와 풍류 잔치, 좋은 가 곡, 미색을 찾아가며 마지막 놀고, 마음을 잡으리라.” 군평이 이른 말이, “그럴듯하다마는 장안의 미색들이 늘 보던 그것이요, 일

59) 백률송순(柏栗松筍): 경주 백률사의 소나무는 가지를 친 뒤에 송순이 생 긴다고 하여 경주의 3기8괴(三奇八怪)의 하나로 친다. 60) 파사(波斯): 예전의 페르시아(지금의 이란). 61) 보사(寶肆): 보석 가게. 62) 보라매: 그 해에 난 새끼 매로, 길이 잘 든 매. 가슴의 깃이 보라색임.

26


상 듣던 풍류 소리 눈귀에 익어서 재미있는 줄 모르겠네. 요 새 들으니 평양 기생 의양이가 화개동 경주인63)의 집 안사 랑을 치우고 들어앉았다고 소문이 낭자한데, 얼굴은 왕소 군,64) 태도는 양귀비65)라. 서울 사는 모든 소년들이 미쳐 발광하며 다녀도, 의양이는 인의예지 아는 마음이 있고 절 개가 높아, 짝이 없어 끝내 서방 아니 얻고 남에게 몸을 의 탁한다 하니 거기 한 번 놀아보면 어떠한가?” 무숙이 좋아라고, “내가 진실로 바라던 바이니, 가다뿐 이르겠나.” 의양의 집 가려 할 제, 여러 친구 오입쟁이 칠팔 인이 동 무 삼아 가되, 술상 차릴 온갖 채비 군평이가 맡아 하고, 남 산 봉화 들기 전에 지평 너른 큰길에서 손길을 마주 잡고 화 개동을 올라갈 제, 걸음마다 꽃이 피고 곳곳마다 향내 난다.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 이슬조차 머금은 듯, 오동나무 위의

63) 경주인(京主人): 중앙과 지방 관아의 연락 사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지방 수령이 서울에 파견하던 아전 또는 향리. 64) 왕소군(王昭君): 기원 전 1세기 무렵 중국 한(漢)나라 원제(元帝) 때의 궁 녀. 이름은 장(嬙). 자는 소군. 한나라의 친화 정책 때문에 흉노의 우두머리에 게 시집갔음. 65) 양귀비(楊貴妃): 성은 양(楊), 이름은 태진(太眞). 당나라 현종이 총애했 던 귀비. 양국충의 종매(從妹).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현종과 같이 달아나다 가 마외역에서 죽임을 당했음.

27


달이 좋을시고. 잘새66) 펄펄 날아들고 늦은 봄 강물은 부질 없이 흐른다. 높은 삼각산 봉우리와 물 흐르고 바위 솟은 화 개동이 별유천지 낙원이 아니냐. 이화정은 아니로되 낙양 동촌 같을시고. 광객인 듯 취객인 듯 흥에 겨워 들어가니 오 늘 밤이 아름답고 좋을시고. 사랑방에 들어가 바깥주인과 통성명한 후에 평양집을 청하니 안중문을 열어젖히고 의양이가 나올 적에, 달빛은 가득한데 이리저리 거닐면서 벽화주 높은 사랑방에 다홍치 마를 입은 한 미인이 촛불 아래 단정히 앉아 손님을 대하는 거동을 보니, 서시67)의 태도, 달기68)의 모양, 십오야 밝은 달이 구름 속에 숨은 듯, 연못에 취한 연꽃이 군자의 모습을 띤 듯. 섬섬약질 고운 얼굴에 붉은 입술을 반만 여니, 낭랑 하고 아리따운 말소리는 처음 보는 바라.

66) 잘새: 잠을 자려고 하는 새. ‘자고새로 ’ 볼 수도 있는데, ‘자고는 ’ 꿩과의 작 은 새로, 모양은 메추라기와 비슷하나 조금 큼. 67) 서시(西施): 중국 춘추시대 때 월나라의 미인. 성은 시(施). 월나라 저라 산(苧蘿山) 밑 서촌(西村)에서 살았다 하여 서시라 함. 월나라 왕 구천(句踐) 이 미인계로 서시를 오나라 왕 부차(夫差)에게 보내서 오왕을 혹하게 하고, 그 틈을 타 월나라는 오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오나라가 망한 뒤 서시는 월나라의 재상 범려(范蠡)와 같이 배를 타고 오호(五湖)로 갔다고 함. 68) 달기(妲己): 은나라 마지막 왕 주(紂)가 총애한 여인. 아름다웠으나 간사 하여, 결국 은나라를 망하게 했음.

28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