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선 동화선집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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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 소리

따라서



우리가 살게 된 곳은 시청 건물 위였습니다. 모두 열다섯 마리였어요. 옥상은 ㄱ 자 모양으로 굽었는데, 운동장처 럼 크고 넓었습니다. 까마득한 옥상 아래에는 장난감 같 은 예쁜 자동차들이 줄을 맞춰 어디론가 밀려가고 있었습 니다. 눈 안에 들어오는 것은 우뚝우뚝 솟은 네모 모양의 회색빛 나는 빌딩뿐이었습니다. “파랑·노랑도 있고 동그라미·세모도 있는데, 왜 모두 똑같은 모양에 똑같은 색깔이지?” 우리는 못마땅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우리들 까치 열다섯은 생일이 모두 똑같았습니다. 모두 같은 날 부화기라는 기계에서 태어났으니까요. 솜털이 보 송보송한 우리들의 처음 모습은 작은 괴물같이 흉측했습 니다. 그러다 차차 몸엔 윤기가 흐르는 짙은 흑색 깃과 흰 깃이 돋아났습니다. 우리는 입술로 털을 빗질하며 곱게 가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사육 아저씨께 붙 들려 이리로 오게 된 것입니다. 처음 도시에 오던 날 밤은 한잠도 잘 수 없었습니다. 우 선 공기가 맑지 못해 기분이 언짢았고, 밤새도록 울리는 무슨 소리들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밤에 밝히는 휘황한 불빛이라든지, 심장을 멈추게 할 것 같은 빨간 불빛들은 우리의 잠을 먼 곳으로 쫓아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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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도시에 온 후 새로운 것을 배워 갔습니다. 노란 점퍼를 입고 모자를 쓴 털보 아저씨가 우리들을 돌봐 주시 는 분이라든지, 호루라기 소리가 나면 밥 먹을 시간이라는 것 등입니다. 사실 털보 아저씨의 얼굴은 맘에 드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온 얼굴을 뒤덮고 있는 시커먼 털부 터 보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눈빛은 잔잔한 호수 같아서 우리는 마음이 놓였습니다. 한 가지 언짢은 것은 비둘기 들이 가끔씩 귀찮게 구는 일이었습니다. 그 녀석들은 처 음부터 우리를 반겨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말을 걸어 도 톡톡 쏴붙이고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같은 옥상에 살면서 서로 눈을 흘기고 산다는 일은 좋지 않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전의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회색 목도리를 두른 비둘 기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울로 다가와 기웃기웃 철조망 안 을 살폈습니다. “너희들 여기 온 지 오래됐니?” “우리들도 너희들처럼 밖에 나가 놀았으면 좋겠어.” 우리는 마른 나뭇가지에서 풀짝 뛰어내리며 다가가 말 을 상냥하게 건넸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들은 귀가 꽁 막 혔는지 들은 체도 안 했습니다. “뭐 이렇게 지저분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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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촌닭같이 생겼다.” 비둘기들은 입을 삐쭉이더니 눈을 흘기며 휭 날아갔습 니다. 우리는 기가 막혀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습니다. 얼마 동안을 우리는 울안에서 시답잖은 잡담이나 늘어 놓으며 지냈습니다. 심심하면 줄 쳐진 하늘에 흘러가는 흰 구름을 부러운 듯 바라보다가 우뚝 솟은 빌딩을 세어 보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눈 감아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 지 그릴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지내는 사이, 우리 는 좀 더 수다스러워졌고 피둥피둥 살이 올랐습니다. “우리는 저 밖을 나갈 수 없나?” “비둘기들이 부러워 죽겠어.” “숨이 막힐 것 같애.” 우리는 때때로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정말 우리에게 최고 의 날이었습니다. 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엔 아무도 나가 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털보 아저씨는 나 오라고 손짓을 해 보였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폴짝 날아 갔습니다. 그러자 우리는 떼를 지어 날아갔습니다. 하늘 이 유난스레 파랗게 보였습니다. 커다란 빌딩과 수많은 집들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들 가슴은 터질 것 같 았습니다. 우리들은 떼를 지어 옥상 부근을 빙빙 돌다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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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왔습니다. 날갯죽지가 아파서이기도 했지만 털보 아저 씨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분이 참 좋은데!” “처음 오래 날아서 그런지 어깨가 아프다.” “그럴 줄 알았으면 미리 나는 연습이라도 충분히 해 둘 걸.” 우리는 먹이를 주워 먹으며 처음 하늘을 날아 본 느낌 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그때 요란한 바람 소리를 내며 비 둘기 한 떼가 몰려왔습니다. ‘이 녀석들이 또 무슨 시비를 걸어 올까?’ 우리는 불안한 마음으로 눈치를 보며 한쪽으로 비켜섰 습니다. “야, 촌닭들아. 그게 나는 거냐, 기는 거냐? 아이고, 우 습다, 구구구. 폴짝폴짝 뛰는 것이 꼭 개구리 폼 같다. 그 게 뭐냐? 촌닭들아, 똑바로 배워 둬라. 이렇게 나는 거다, 구구구.” 비둘기들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날아올랐습니다. “아이구, 저것들을 그냥….” “말끝마다 촌닭이야, 신경질 나게.” “한번 붙어 볼까?” 우리들 모두는 약이 올라 식식거렸습니다. 사실 말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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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힘으로 보나 숫자로 보나 우리가 비둘기들과 싸워 이 길 수는 없었습니다. “자ᐨ식들, 나는 것 하나는 멋있군.” 어느 친구의 소리에 우린 모두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 다. 창피한 말이지만, 우리가 폼 잡고 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었습니다. 비둘기들은 마치 제트기들이 줄을 맞춰 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 후부터 우린 더욱 어깨를 움츠 리고 지내야 했습니다. 우리들의 생활은 그런대로 즐거웠습니다. 분수대로 시 원한 물줄기를 바라본다던지, 공원의 잔디밭에서 앉아 쉬 며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멀리 나가 려 하지 않았습니다. 길을 잃을까 두려워서입니다. 또 털 보 아저씨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요. 배가 고픈 것은 우리들에게 제일 참기 어려운 일이었 습니다. 아무 데나 간다고 먹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 다. 우리들 먹이는 털보 아저씨에게만 있으니까요. 하늘 을 날다가도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면 배는 이상하게 고팠 습니다. 그리고 호루라기 소리는 묘하게 우리들을 끌어당 기는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녁 해가 빨갛게 얼굴을 붉히면 빌딩 숲으로 숨어들었 습니다. 저녁 하늘엔 감빛 놀이 깔렸습니다. 빌딩의 수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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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유리창엔 불길이 일제히 솟아 타오르는 듯했습니다. 우리는 옥상에 앉아 놀 속에 빠져드는 도시의 모습을 지켜 보았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은 늘 일정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생활 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똑같았습니다. 때때로 아득히 먼 곳의 산에도 가 보고 싶었지만 엄두도 못 냈습니다. 우리 는 차차 싫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회색의 딱딱한 건물, 뿡뿡거리는 자동차 소리, 매캐한 공기, 눈을 어지럽히는 불빛들은 가끔씩 짜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의 제안으로 우리는 도시의 끝 까지 가 보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사실 네모난 빌딩의 도시 끝은 상상만 해도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아침 먹이를 얻어먹고 곧 옥상을 떠났습니다. 돌아올 때 도착지를 표시해 주는 것은 분수대 앞에 띄워진 커다란 고 무풍선이었습니다. 파란 하늘에 높이 띄워 올린 빨간 풍 선은 눈에 잘 띄었습니다. 우리는 빌딩을 넘고 작은 지붕 들을 넘어 얼마 후 도시를 벗어났습니다. 조그만 강이 나 오고 논과 밭이 나오고 붉은 기와지붕들이 이마를 맞댄 마 을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마을 뒤쪽의 푸른 숲으로 찾 아들었습니다. 시원한 공기가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 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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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좋다. 기분이 상쾌해.” “왠지 포근한 느낌이야.” “그런데 너무 멀리 온 것 아냐?” “글쎄, 길 잃으면 큰일인데….” “걱정 없어. 다 갈 수 있으니까.” 우리는 신나게 지껄이며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녔습 니다. 기분이 최고였습니다. 한참을 놀고 나니 배가 고파 왔습니다. 아니, 어디선가 털보 아저씨의 호루라기 소리 가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우리는 일제히 날개를 펴 안개 속에서 어슴푸레 비치는 도시를 향해 날았습니다. 호루라 기 소리는 이상한 힘으로 우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분 수대 앞 광장에서는 털보 아저씨가 호루라기를 힘차게 불 어 대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노란 점퍼 에 모자를 쓴 털보 아저씨는 금세 찾을 수 있었습니다. 벌 써 많은 비둘기들이 모여 먹이를 줍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 다. 우리는 비둘기들 옆에서 열심히 먹이를 주워 먹었습 니다. 배가 불러지자, 우리는 다시 도시를 떠났습니다. 털보 아저씨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습니 다. 숲에 도착한 우리는 술래잡기도 하고 마을 어귀까지 날아갔다 오기도 했습니다. 조용하고 포근한 숲은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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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감싸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을 어귀 미루나무에서 우리들과 똑같은 모습을 한 친구들을 발견했습니다. 이건 깜짝 놀랄 일이었습니다. 이때까지 우리와 똑같이 생긴 친구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으니까요. 우 리가 숲에서 수런거리고 있을 때, 그 친구들이 먼저 찾아 왔습니다. “어디서들 왔니?” 그 친구들은 다정하게 물었습니다. “응, 저 도시에서….” 우리들 중에서 누군가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했습니다. “도시? 저기 말이야?” “응, 응.” “거기서 어떻게 살아?” 그 친구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응, 하여튼 그냥 살아.” 누군가 살며시 말꼬리를 감추었습니다. “너희들은 어디서 사니?” “응, 우린 이 마을에서 살아.” 그 친구들은 또박또박 대답했습니다. “야, 우리 한데 어울려 놀자. 친구들이 많아서 기분 좋 다. 자아, 까까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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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들은 소리를 지르며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우리 는 그만 기절을 할 뻔했습니다. “야, 저 친구들, 그거 무슨 소리냐?” “그 소리 한번 근사한데. 내가 한번 해 볼까? 꺼억 케 케 케, 아이구, 목이야.” 우리들 중의 하나가 목을 길게 뽑으며 기침을 했습니 다. 우리는 배를 움켜쥐고 웃어 댔습니다. “얘들아, 너희들 아까 꺼꺼 하던 소리는 뭐니?” 우리는 그 친구들이 앉은 가지 옆에 앉으며 물었습니다. “뭐 말야?” “아까 기분 좋다고 힘차게 소리 지르던 것 말이야.” “아, 까아 까까까까, 이것 말이야?” “그래, 그래.” 우리는 일제히 대답했습니다. “까치 소리지 뭐니? 너희들은 할 줄 모르니?” 그 친구들은 이상하다는 듯 물었습니다. 우리는 창피해 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습니다. “이상하다. 까치가 까치 소리를 몰라?” “안 배웠으니까 모르지. 너희들은 어디서 배웠니?” “엄마, 아빠한테서.” “엄마,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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