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애 동화선집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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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거짓말

약속해요



1부 하영이의 거짓말

1. 거짓말이면 뭐 어때

“떠들지 말고 조용조용 자습하고 있어요. 연필 때구루루 굴러가는 소리까지 들리도록. 알겠느냐?” 아침 조회를 끝내자마자 알겠느냐 선생님은 서둘러 교 무실로 갔습니다. 선생님은 말끝마다 ‘알겠느냐’를 붙여 말하곤 해서 아이 들 사이에서는 이름 대신 알겠느냐 선생님으로 불렸습니 다. 선생님이 나갈 때만 기다린 듯 숨을 크게 들이쉰 하영 이의 손길이 바빠졌습니다. 하영이는 부스럭거리며 커다 란 종이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습니다. 아주 커다란 무언 가를 …. 그때까지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책상 위를 날듯이 먼지를 풀풀 일으키며 뛰어다니는 남 자아이들, 대걸레와 빗자루를 집어 들고서 이얏, 얏, 칼싸 움을 벌이는 장난꾸러기들, 끼리끼리 모여서 누구 목소리 가 더 큰지 내기하듯이 큰 소리로 떠드는 여자아이들,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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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소란과 먼지 속에서도 꿋꿋이 의자 에 얌전히 앉아 있는 아이들까지, 그 누구도 하영이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하영이는 ‘자, 어때?’ 하는 표정으로 커다란 구체관절인 형을 책상 위에 척 올려놓았습니다. 그러자 인형을 본 아 이들의 눈이 커다래졌습니다. 레이스가 조르르 달린 드레 스는 섬세했고, 챙 넓은 모자 끈을 턱밑에서 리본으로 모 아 묶은 인형은 정말이지 멋져 보였어요. “와!” “인형이다.” “무지 크잖아.” “멋지다.” “이름이 뭐야?” “응 코델리아. 왜 있잖아. ≪빨간 머리 앤≫에서 앤이 불리고 싶어 했던 이름으로 지었어.” 하영이는 잔뜩 뻐기며 말했습니다. “엄청 비싸겠지?” 어느새 많은 아이들이 하영이 책상 주위를 둘러쌌습니 다. 하영이에게, 아니 인형에게 관심이 확 모이는 게 느껴 졌습니다. 하영이는 턱을 살짝 치켜들며 입을 열었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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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얘는 진짜 비싸.” 하영이는 책상 위에 커다란 인형을 올려놓은 순간부터 어깨가 으쓱, 한 뼘은 올라간 듯했습니다. 다른 때는 하영 이의 끝없는 자랑을 지겨워하던 아이들조차도 이번만은 달랐습니다. “와! 눈알이 반짝거리는 게 진짜 같다.” “여기, 여기 속눈썹 붙은 거 좀 봐.” 평소 하영이가 하는 짓을 얄미워하던 애들까지도 호기 심을 보이며 모여들었습니다. 남자아이들까지도 쭈르르 달려와서는 어떻게든 인형을 한번 만져 보고 싶어 했습니 다. “야, 야. 만지지 마. 때 타면 화장 다시 받아야 한단 말이 야. 얘네들 화장 값이 얼마나 비싼데.” “엥, 인형도 화장을 해?” “진짜 화장품으로?” 하영이는 그것도 모르느냐는 듯 입을 삐죽하며 말했습 니다. “바보냐? 특수 물감으로 화장해 주니까 비싸단 말이지.” 끄응, 부러운지 신기한지 알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 습니다. “우리 아빠가 미국에서 내 생일 선물로 특별히 보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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셨어.” 아빠라…. 하영이는 비행기가 지나고 있는 창밖 하늘로 눈길을 잠 시 멈추고는 말했습니다. 비행기 꼬리에 희고 기다란 비행운이 생겨났습니다. 마 치 하늘에 칼금을 긋기라도 한 것처럼. 하영이 가슴도 금 이 그어진 것처럼 찌르르해졌습니다. 하영이는 비행기 창가 좌석에 앉은 아빠를 떠올려 보려 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사실 하영이는 아빠 얼굴도 알지 못하니까요. 앨범에도 집 안 그 어디에도 아빠 사진은 한 장도 없었 습니다. 아빠의 흔적이 하나도 없다니 참 이상한 일이지 요. 어릴 때는 엄마를 붙들고 아빠 어디 숨겼냐고 징징거 리며 떼를 쓰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아빠는 돌아가신 게 아니냐고 하영이가 캐묻 자 엄마는 당황한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아냐. 아빤 미국에서 일하고 계셔. 너무 바빠서 연 락을 못 하시는 거야.” 하영이는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떻게 사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 뒤로 아빠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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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는 정신없이 딴 이야기를 시작하기 바빴거든요. 하영이는 자라면서 그게 엄마가 아무렇게나 둘러댄 말 이었을 거란 정도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하영이는 입만 열면 미국에 있는 아빠 자랑을 한 바람에, 자신도 그 게 사실이라고 믿을 정도였지요. 어릴 때부터 내내 아빠 자랑을 해서인지 이제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안 들었습니다. 아빠의 직업도 하영이 마음에 드는 직업으로 얼마나 자 주 바뀌었는지 모릅니다. 건축가, 시나리오 작가, 화가, 물 리학 박사…. 하영이도 건축가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인지, 물리학 박사가 뭐 하는 건지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멋있 어 보여서 그렇게 말하고 다녔을 뿐이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직업은 금세 귀찮아졌습 니다. 자꾸 물어 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영이는 꽤 오랫동안 아빠 직업을 물리학 박사라고 말하고 다녔습 니다. 미국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고요. 아이들은 물리학 박사에게 그리 흥미를 느끼지 않는지 자세하게 캐묻지 않았어요. 하영이는 그 뒤로 죽 아빠의 직업을 물리학 박사라고 말하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알지도 못하는 아빠가 인형을 사 줬을 리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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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사실 이 인형을 갖기 위해 몇 달 동안이나 엄마를 조르 고 졸랐는지 모릅니다. 심술도 부리고 떼도 쓰고 또 설거 지와 집안일도 열심히 해서 얻어 낸 결과물이었어요. 엄마가 이 인형을 사 주기 위해 점심값까지 아꼈다는 것도 하영이는 알지 못했어요. 브랜드 옷가게 점장으로 일하고 있지만 다들 가게 주인 으로 알고 있는 하영이 엄마는 월급이 그리 많지 않습니 다. 그런데도 하영이 것이라면 뭐든 최고급품으로 갖춰 주고 싶었어요. ‘하나밖에 없는 하영일 위해서인데 뭔들 못 해. 그래, 헉 소리 나게 비싼 인형이지만, 눈 딱 감고 사 주자.’ 엄마는 이런 마음으로 하영이가 원하는 인형을 무리해 서 사 주었던 것이랍니다. 엄마는 하영이가 인형을 품에 안고 눈을 반짝이며 좋아 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점심을 굶어 가며 돈을 모 아 사 준 게 조금도 아깝지 않았어요. 고급스러운 옷가게에서 비싼 옷을 차려입고 일을 하는 엄마가 정작 속옷은 다 낡도록 고무줄을 갈아 끼워 가며 아껴 입는다는 것도 하영이는 알지 못했습니다. 하영이의 속옷은 하영이가 점찍어 두기만 하면 엄마가 다 사다 주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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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하영아. 오늘 학교 끝나고 너희 집 가서 놀면 안 돼?” “그래, 오늘만 학원 빼먹고 너희 집에서 놀자.”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송희와 아란이가 갑자기 친한 척 하며 하영이 옆에 철썩 달라붙었습니다. 하영이는 은근히 기분이 좋았어요. 누군가 자기를 알아주고 가까이하고 싶 어 한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같이 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 해야 합니다. “안 돼! 오늘 집에 귀한 손님들이 오시기로 했어. 엄마 가 출장 요리사 불러서 파티 준비하신댔어.” 생각지도 못한 거짓말이 입 끝에 모터를 단 것처럼 술 술 풀려 나왔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이쯤은 뭐, 아무것도 아니지.’ 하영이는 스스로 한 거짓말이 마음에 들어 입꼬리를 올 리며 웃었습니다. 송희와 아란이는 하영이가 웃는 걸 보 며 더 부러워서 난리였습니다. “좋겠다. 좋겠다. 집에서 파티도 해?” “맛있는 거 잔뜩 먹겠네?” 먹는 걸 유난히 좋아하는 동미가 어느 틈에 다가와서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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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하영아. 나중에 네 생일에 파티하면 나 꼭 끼워 줘. 응, 응?” 하영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습니다. 생일에 파티를 할 리도 없지만 어차피 나중 일입니다. 거짓말로 인심 팍팍 쓰는 게 뭐가 나쁜가 싶었어요. “오케이, 걱정 마. 우리 엄마가 내 생일 파티를 공주님 처럼 열어 준댔으니까. 너희들 올 때 제일 멋진 옷으로 차 려입고 와야 해. 알았지?” 하영이의 인형을 바라보며 빙 둘러선 아이들은 눈빛을 반짝이며 하영 공주의 생일 파티를 제멋대로 상상하기 시 작했습니다. 하영이는 반지하 단칸방 집을 떠올렸어요. 고급 주택가 를 벗어나 좁은 골목길에 다닥다닥 붙은 허름한 빌라를 떠 올렸습니다. 팔을 쭉 뻗으면 앞 동에 닿을 것같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빌라. 그중에서도 햇빛이 잘 들지 않고 창으 로는 사람들의 발목이 보이는 원룸 반지하 방을. 비록 비좁은 곳이지만 예쁘고 아늑하게 꾸며진 그 방에 엄마와 둘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엄마는 밤늦게야 퇴근하기 때문에 한동안 하영이는 늦 게까지 이 학원 저 학원을 다녀야 했습니다. 그나마 학원 비를 내기 힘들어져서 다니던 학원을 그만두게 되자, 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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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오히려 큰소리를 칠 핑계거리가 생겨 버렸습니다. “엄마가 학원 다니며 시간 뺏기지 말고 개인 과외 받으 래. 유명한 대학교 교수님이 집에 오셔서 가르쳐 주시기 로 했어.” 하영이의 말속에는 언제나 ‘부럽지?’ 하는 꼬리말이 달 려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하영이가 좀 아니꼽기도 했지만 부러운 것도 사실이었어요. 하영이는 유명 교수님께 개인 과외를 받는다는 거짓말 을 들키기 싫어서 집에 가자마자 손 씻고 바로 공부를 시 작했습니다. ‘성적이 떨어지면 거짓말이 드러나, 꼭 성적을 올릴 거 야.’ 엄마가 늦게 퇴근하는 빈방에서 하영이는 사각사각 연 필을 굴리며 공부를 했습니다. 늦게 들어온 엄마는 그런 하영이가 고맙고 기특했습니다. 엄마는 옷을 사러 온 하영이 짝 우람이 어머니를 만나 자 자기도 모르게 자랑을 늘어놓고 말았습니다. “요새 하영이는 일찍 일어나서 문제집을 열 장은 풀고 나서야 학교에 가네요. 안 시키는데도 혼자서 그러는 게 좀 신기하긴 하더라고요.” 이쯤 수다를 떨었으니 우람이 엄마가 집에 가서 득달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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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잔소리를 늘어놓은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습니다. “얘, 우람아. 네 짝꿍 하영이는 말이다. 시키지도 않는 데 아침마다 문제집을 열 장씩이나 풀고서 학교에 간다잖 니? 넌 딱 한 문제만 풀고 가 봐라. 엄마가 엎드려 절을 하 마.” “됐어요, 엄마. 절 필요 없어요. 절 같은 거 안 받아도 돼 요.” “아이고. 절 이야기가 아니잖니?” 엄마는 우람이 등을 찰싹 때렸습니다. ‘씨, 하영이는 지금 성적 떨어졌는데…. 나랑 비슷한데.’ 우람이는 속으로 중얼거리다 말았습니다. 공부 이야기 는 꺼내서 덕 볼 게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지요. 실제로 하영이의 스스로 공부는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 습니다. 화르르 불붙어서 공부한 덕에 하영이는 딱 한 번 반에서 1등을 했습니다. 그 뒤로는 게으름이 나서 공부를 그만큼 열심히 하지 않게 되었고 당연히 성적은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한 번 1 등은 영원한 1등, 이라고 하영이는 생각했습니다. 머릿속에서는 언제나 ‘1등 하영’이었어요. 아이들도 하영이 성적이 떨어지긴 했지만 1등의 기억 을 아주 잊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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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이는 브랜드 로고가 선명한 비싼 옷과 고릴라 인형 이 달랑거리는 가방을 들고 다니며 스스로를 계속 포장했 습니다. ‘나는 최고, 최고, 최고여야 해!’ 남 보기에 하영이는 집도 부자인데다가 공부도 잘하는 콧대 높고 잘난 척하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뒤에서 아이들이 입을 비죽거리며 욕을 하는 걸 알면서 도 하영이의 거짓말은 오히려 더 화려해지고 늘어 갔습니 다.

2. 안 들키면 그만이지

수업 시작 전 알겠느냐 선생님이 출석을 불렀습니다. 다른 반 담임 선생님들은 “오늘 누가 결석했니?” 하고 물어서 체크하고 끝낸다는데 하영이네 총각 선생님은 꼬 박꼬박 출석을 불렀습니다. 선생님은 이빨 사이로 기가 빠져나가면 안 되니까 어금 니를 꼭 붙이고 있어야 한다는 말도 했습니다. 입을 헤 벌 리고 있으면 바보 같아 보여서 그런지도 몰랐습니다. “아침에 자기 이름 불릴 때 ‘예!’ 하고 큰 소리로 대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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