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파워 콘텐츠 공식 양성희
대한민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한류와 파워 콘텐츠
글로벌 문화 지형 속 한류의 실체 2000년대 초반으로 기억한다. 해외 진출을 모색하며 영국 유학에 올랐던 가수 신해철이 귀국해 기자들을 만났다. 영국에서 앨범 한 장을 냈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팝의 본 고장 영국 음악계에서 느낀 솔직한 심경을 토로했다. 무 엇보다 한국의 음악에 아예 귀 기울이지 않으려는 벽을 느 꼈다고 했다. 다음 말이 뇌리에 선명하게 꽂혔다. 그저 변 명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한국의 이미지는 그저 나이스 프라이스(nice price)예요. 적당한 가격의 좋은 물건을 만드는 나라. 나라 자체에 문화적 이미지가 없는데, 그 나라에서 들고 온 음악 을 누가 들어나 주겠냐고요.”
대한민국 하면 간신히 미국의 TV 드라마 시리즈 <매쉬 (MASH)>의 전쟁 빈국 이미지를 벗고, 88서울올림픽이나 현대자동차 정도로 알려졌을 시점이니 무리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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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0여 년. 싸이가 마돈나와 한 무대에 서고, 전 세계가 ‘강남스타일’을 따라 외친다. ‘강남스타일’ 뮤직 비디오는 전 세계인이 유튜브에서 가장 많이 본 동영상 1 위다. 2013년 유튜브가 뽑은 최고의 뮤직비디오는 소녀시 대의 ‘아이 갓 어 보이’였다. ≪뉴욕타임스≫는 지드래곤 앨범 <쿠테타> 리뷰를 실으며 “앞으로 세계가 그를 따라 배울 것”이라고 호평하고, 빌보드는 “동방신기 데뷔 10주 년을 축하”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제는 욘사마 배용준이 <겨울연가>로 아시 아의 연인이 된 것쯤은 아주 오래전 얘기인 것이다. 한국 드라마나 예능은 거의 시차 없이 전 세계 팬들이 즐긴다. 세계 곳곳에 형성된 열혈 팬덤이 수고로움을 자처한 덕에 여러 언어로 자막이 달린다. 가끔은 국내에서도 아랍어 같은 낯선 자막이 달린 한국 드라마 영상을 어렵지 않게 접하게 된다. 중동이나 이슬람권에선 <대장금> 등 한국 사극이 인기다. 국내 스타가 한류 스타로 직행하는 것은 그렇다치고 국 내에선 그저 그런데 해외에선 슈퍼스타 대접을 받는 경우 까지 생긴다. SBS <런닝맨>의 이광수가 대표적이다. 국 내에서야 코믹한 이미지의 조연급이지만 해외, 특히 동남 아시아권에서 인기는 상상 이상이다. <런닝맨> 태국 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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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때는 유재석 등 다른 모든 출연자를 제치고 팬들을 몰고 다녀 화제가 됐다. 다른 장르에 비해 문화적 할인율 이 높아 쉽게 국경을 넘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진 한국 예 능의 파워다. 10여 년 전 신해철을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 느껴 지는 얘기다. 그뿐 아니다. 2005년 일본에 진출한 동방신 기는 한국에서 슈퍼스타 자리를 버리고 신인 가수로 활동 을 시작했다. 대학교 행사장, 백화점 계단 등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런 그들이 한국 그룹으로는 최초로 일본 최고 의 무대인 도쿄돔에 서기까지 걸린 시간은 3년. 소속사와 분쟁으로 준수, 유천, 재중 3인이 JYJ로 독립하고 윤호, 창 민 2인조로 축소된 후 2013년 일본 순회 콘서트에서도 85 만 명을 불러 모았다. 반한류·혐한류의 물결이 있고, 한 류거품론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제 한류는 그저 애국주의에 눈먼 한국 언론의 호들갑이라고 깎아내릴 수 없을 정도로 하나의 실체인 것이다. 이제 한국은 21세기 동아시아, 나아가 글로벌 문화 지형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는 문화 거점의 하나로 자리 잡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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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문화 콘텐츠 산업의 성장세 해외의 성과뿐 아니라 국내에서 양적, 질적 팽창도 있었 다. 한때 할리우드 직배 영화에 맞서 한국 영화를 보호하 기 위한 장치로 스크린쿼터제 사수를 위해 영화인들이 거 리에서 삭발 투쟁까지 벌였지만, 이제는 극장들이 외화보 다 한국 영화에 더 많은 수익을 보장하면서까지 한국영화 를 상영하려 한다. 극장과 투자 배급사가 수익을 나눠 갖 는 부율 문제만 해도 예전에는 외화가 극장 대 배급사 4대 6, 한국 영화가 5대5였으나 2013년을 기점으로 추세가 바 뀌었다. 외화가 극장 대 배급사 5대5, 한국 영화가 4.5대 5.5로 조정된 것이다. 외화는 배급사 몫이 줄고 한국 영화 는 배급사 몫이 늘어난 것이다. 한국 영화의 경쟁력이 높 아져 극장에서는 배급사에 더 많은 수익을 배분하면서라 도 한국 영화를 상영하려 한다는 뜻이다. 실제 한국 영화의 경쟁력은 날로 커지고 있다. 2012년 연간 한국 영화 관객수는 1억 명을 넘어섰다. 2012년 두 편 의 1000만 관객 영화 <도둑들>, <광해, 왕이 된 남자>가 나 온데 이어 2013년에는 한 편의 1000만 관객 영화(<7번방 의 선물>)와 두 편의 1000만 명 급 영화 <설국열차>(934만 명), <관상>(913만 명)이 흥행했다. 2014년 1월에는 <변호 인>이 사상 아홉 번째 1000만 관객 영화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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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1000만 관객 영화는 2003년 말 개봉한 <실미도> 다). 이제는 더 이상 1000만 관객 영화가 문제가 아니라 1500만 관객 동원 영화가 언제 등장할 것이냐에 관심이 쏠리고도 있다. 한국 영화 시장의 급속한 팽창이다. 음악 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10대 아이돌 댄스 음악에 지나치게 편중됐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음악 시장은 국 내외적으로 성장세다. 특히 동방신기, 소녀시대, 빅뱅, EXO 등으로 이어지는 아이돌 K팝은 <겨울연가>로 대표 되는 드라마 한류와 함께 한류의 또 다른 축을 이끌었다. 중장년 여성들에서 젊은 층으로 팬층을 확대시켰다. 일 본이 원조지만 이제는 일본을 뛰어넘는 아이돌 제조 시스 템도 주목받았다. 일본 음악계 내부에서조차 “가능한 한 빨리 데뷔하고 실전을 통해 경험을 쌓아 가는 일본과 달 리, 완벽하게 숙성시킨 후 데뷔하는 한국의 아이돌 시스 템의 강점을 배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 음악 장르로도 K팝은 세계무대에서 고유성, 독자성을 인정받 고 있다. 2012년 싸이의 초대박 행진은 여기에 또 한 단계 한류 의 질적 전환을 가져왔다. 특히 싸이의 성공이 보여 준, 유 튜브를 중심으로 한 음악 유통 생산 방식은 국내외적으로 새로운 음악의 시장 진입을 용이하게 하는 긍정적인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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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방송에서는 드라마와 예능의 강세가 꾸준히 이어졌다. <겨울연가>가 아시아 전역에서 신드롬급 인기를 불러일 으킨 이후 한국형 로맨스들이 잇따라 선전했다. 한국 로 맨스의 히어로들은 곧장 한류 스타로 직행했다. <겨울연 가>를 잇는 전통적인 순애보, 거기에 만화적 상상력을 더 한 로맨틱 코미디물들이 서구 팬들을 사로잡았다. <겨울 연가> 이후 <대장금>의 성공도 드라마 한류를 견인했다. 특히 <대장금>류의 사극들은, 착한 사람이 주변의 역경을 딛고 승리한다는 권선징악 스토리, 전통 가치에 대한 옹호 등으로 중화권은 물론이고 아랍, 중동, 동남아시아 등지 에서 인기가 높았다. 로맨스와 사극의 양대 산맥에 최근 에는 일부 ‘막장’ 드라마까지 가세하는 형국이다. 한류 스타나 아이돌들이 나오는 드라마들은 기획 단계 부터 일본 등에 선판매되기도 했다. 일부 설익은 기획이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글로벌 판매를 염두에 둔 한류 기 획 드라마들이 이어졌다. 예능의 강세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2000년대 중반 이 후 예능 프로들은 높은 시청률과 함께 각 방송사의 브랜드 이미지를 대표하는 장르로 급부상했다. MBC하면 <무한 도전>, KBS는 <1박2일>, SBS는 <런닝맨> 이런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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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 방송들도 대표 예능을 속속 선보였다. CJ E&M 계열 인 Mnet의 <슈퍼스타 K>, tvN의 <꽃보다 할배>, JTBC의 <히든 싱어>, <마녀사냥> 등이다. 과거에는 각사 브랜드 이미지 형성에 드라마가 절대적 이었지만 이제는 드라마 경쟁의 표준화로 방송사별 유의 미한 차이를 찾기 힘들다(예전에는 MBC <전원일기>, SBS <모래시계> 같은 간판 드라마들이 있었고 ‘드라마 왕 국 MBC’라는 위치가 공고했으나 이제는 평준화됐다). 예 능은 단순히 시청률만 높은 것이 아니라 사회적 화제의 중 심에 서서 문화 트렌드를 이끌기도 했다. 국민MC 유재석 같은 슈퍼스타들이 예능에서 나오고, <무한도전-가요 제>의 음원이 음원 차트를 싹쓸이해 기성 가요계가 반발 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나는 가수다>나 <슈퍼스타 K> 등은 사회현상과도 맞물렸다. 프로그램의 인기가 곧 사회 트렌드, 대중 심리를 반영한 것이다. 이처럼 현실과 밀착해 대중의 수요를 즉각 프로그램에 반영하는 예능 특유의 순발력은 그 어느 때보다 각광받았 다. 예능 출신 인력들은 드라마 등 여타 장르에 진출해 새 로운 재능으로 주목받았다. 캐릭터와 스토리텔링을 특징 으로 한 리얼 버라이어티물에서 쌓은 예능 제작의 노하우 를 드라마에 적용해 큰 성공을 거둔 tvN <응답하라> 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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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의 신원호 PD, 이우정 작가가 대표적이다. 예능 프로들의 성과는 포맷 판매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1박2일>·<불후의 명곡>(KBS), <아빠 어디가>·<나는 가수다>(MBC), <슈퍼스타 K>(Mnet), <히든 싱어>(JTBC) 등의 포맷이 중국에 팔렸다. 특히 <아빠 어디가> 중국판은 현지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중화권에서는 톱스타 들이 TV에서 사생활을 공개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 스타의 자녀라는 소재만으로도 눈길을 끈 데다가 이른바 ‘소황제 (이기적으로 키워지는 중국의 외동 자녀)’로 상징되는 자 녀교육이라는 주제가 파급력이 컸다. <아빠 어디가> 중국 판의 성공으로 중국 주류 언론들이 한국 예능의 강점을 특 집으로 다루기도 했다. <슈퍼스타 차이나>도 성공적이었 다. 독설을 싫어하는 중국 시청자의 정서를 고려해 심사위 원들이 격려와 칭찬, 덕담을 아끼지 않는 쪽으로 변화를 줬 다. 현지화에 성공한 모델로 인기를 끌었다.
한류의 전조, 1990년대 문화 빅뱅 과연 지난 10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도대체 어떻 게 해서 우리 대중문화가 이렇게 강력해질 수 있었던 것 일까. 우리 문화 콘텐츠가 아시아는 물론이고 글로벌 무 대에서도 주목받게 된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도대체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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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콘텐츠의 강점은 무엇이며, 지속 가능한 한류를 위해서 콘텐츠 기획에는 어떤 요인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까. 이 책은 이런 관심에서 시작했다. 흥행한 한류 콘텐츠의 성공 비결을 파헤쳐 보자는 것이다. 그에 앞서 우선 한국 대중문화의 급성장의 배경부터 살 펴보자. 한류는 2000년대 들어 급성장했지만 우리 사회에 서 대중문화 자체의 부상은 1990년대부터 시작됐다. 1987 년 형식적 민주주의의 완성으로 역사의 시대가 끝나고 문 화의 시대, 개인의 시대, 욕망과 취향의 시대가 열렸다. 거 대 이념과 집단주의가 종식된 자리를 서태지와 아이들로 상징되는 문화세대, 신세대, X세대가 채웠다. ‘문화 대통 령’으로 불린 서태지와 아이들은 문화의 리더, 문화의 아 이콘이 새로운 사회 권력의 핵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문화 산업화도 본격화했다. 매체 환경 변화가 맞물렸 다. SBS가 개국해 본격적인 상업 방송 시대를 열었다. 케 이블 TV, 위성방송도 시작됐다. 수십 개의 전문 채널들이 쏟아졌다. 케이블 음악 채널은 ‘보는 음악’ 시대를 열었다. 뮤직비디오, 댄스 음악, 비디오형 아이돌들이 음악의 축 이 됐다. 케이블 영화 채널에는 대기업 자본이 뛰어들었 다. 방송과 영화에 대기업이 진출하면서 기존 문화산업의 체질 개선이 시작됐다. 막연한 ‘감’이나 주먹구구식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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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라 정확한 시장 조사와 통계, 마케팅에 기반을 둔 기 획·제작이 시도됐다. 산업과 자본의 규모가 커졌고, 제 작 과정이 표준화됐다. 때마침 양질의 엘리트 인력들이 문화 산업 쪽으로 유입됐다. 이런 하드웨어적인 변화에 정치적 억압기가 끝나면서 확대된 표현의 자유, 소재 제한, 금기와 성역의 붕괴가 소 프트웨어적 동력이 됐다. 예컨대 격변의 현대사가 새로운 이야깃거리의 원천으로 떠올랐다. 최초의 1000만 관객 영 화인 <실미도>와 두 번째 1000만 관객 영화 <태극기 휘날 리며>는 우리의 아픈 현대사를 새롭게 바라본 영화들이다. 문화가 돈이 된다는 문화 경제 담론과 함께 문화에 ‘기 획’이란 말이 등장한 것도 이때다. 제작사 ‘신씨네’ 중심의 기획 영화, 이수만이 주도한 기획 아이돌이 그 출발이다. 제작사 신씨네(대표 신철)는 1992년 ‘콜라 같은 여자’ 심혜 진과 원조 터프가이 최민수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결혼 이야기>를 선보였다. 신세대 부부의 결혼과 성 풍속도를 경쾌한 터치로 그린 영화였다. 코카콜라 CF 모델이던 심 혜진의 당찬 커리어 우먼 이미지를 영화로 가져왔다. 훗 날 명 제작자로 변신하는 심재명의 홍보 마케팅도 주효했 다. 국내 기획 영화 1호로 꼽히는 작품이다. 이후 흥행사 강우석의 코미디들(<미스터 맘마>, <마누라 죽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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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캅스> 등), 삼성영상사업단이 제작 투자한 한국형 블 록버스터 1호 <쉬리>, 새로운 감성 멜로 <접속> 등이 이 어졌다. 대기업·금융자본과 재능 있는 영화 인력, 체계 적인 기획·마케팅이 결합된 충무로 르네상스의 출발이 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 <친구>(2001), <살인의 추억>과 <올드보이>, 그리고 <장화 홍련>(2003)으로 이 어지는 의미심장한 상승세는 마침내 첫 번째 1000만 관객 영화인 <실미도>에 이른다. 음악에서는 SM엔터테인먼트 이수만이 최초의 아이돌 인 HOT를 선보인 것이 1996년이다. HOT와 SES(SM), 이 에 맞선 젝스키스·핑클(DSP), 훗날 JYP를 이끄는 박진영 이 키운 GOD 등 1세대 아이돌들이 1990년대 중·후반 등 장했다. 기획사가 철저한 기획과 관리를 통해 아이돌을 키워내는 모델이었다. 이런 1세대의 시행착오와 노하우 를 통해 등장한 2세대 아이돌인 동방신기, 소녀시대, 빅뱅, 원더걸스 등은 2000년대 중반 한류의 주역이 됐다. 1990 년대에 산업의 단초를 쌓고 2000년대 중반 글로벌 무대에 서 큰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방송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다. 1990년대 김종학, 황인뢰 PD 등 기존의 전통적인 TV 드라마와 달리 강한 개성, 새로 운 스토리텔링, 영상 문법을 내세운 스타 PD들이 등장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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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때부터 PD의 이름을 보고 드라마를 선택하는 관행 이 생겨났다. TV 드라마도 영화 못잖은 영상 미학으로 주 목받았고, 작가(감독)의 작품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특히 MBC는 이승렬, 이진석 PD 등을 중심으로 ‘트렌디 드라마’라는 새로운 유형을 제시했다. 젊은 세대의 연애 풍속도를 감각적인 화면으로 그려낸 드라마다. 일본 드 라마에서 온 개념이었으나 순정만화적 상상력과 결합하 면서 훗날 한국형 로맨스물의 원조가 되기도 한다. 최진 실 주연의 <질투>(1992)·<별은 내 가슴에>(1997), 차인 표·신애라 커플의 <사랑을 그대 품안에>(1994) 등이 대 표적이다. 정리하자면 대기업의 진출, 뉴미디어의 등장으로 인한 산업화, ‘기획’ 개념의 출발, 고급 인력들의 문화 산업 투 신, 정치사회적 개방에 따른 소재의 확대 등이 1990년대, 한류 이전 단계의 문화 환경이었다는 것이다. 국가적 의제화도 중요했다. 1998년 취임한 김대중 대 통령은 ‘문화 입국’, ‘문화부국론’을 내세웠다. 1999년 괴수 영화 <용가리>의 심형래 감독을 ‘신지식인’ 1호로 선정했 다. 1990년 할리우드 영화 <쥐라기 공원> 1년 수익이 현 대자동차 1년 수출액보다 많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문화의 경제적 효과에 주목한 ‘문화산업론’이 힘을 얻은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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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톱스타들을 거리 시위대로 내몬 스크린쿼터 사수 운 동은, 신문 등 저널들의 굳건한 지지 속에 한국 영화에 대 한 애국주의적 담론을 정착시켰다. 한국 영화 살리기 혹 은 지키기가 민족문화적 자긍심, 문화 주권의 상징이 된 것이다. 문화 산업 진흥이라는 국가적 의제화는 지금도 계속되 고 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역시 일자리 창출 등 미래 먹거리를 콘텐츠 산업에서 찾자는 ‘문화입국론’, ‘문화강 국론’을 잇고 있다. 콘텐츠 산업을 미래 성장 동력으로 보 는 것이다. ‘창조경제’, 소프트파워 강국, 심지어 ‘문화 융 성’ 등의 국가 슬로건을 내걸었다.
콘텐츠의 흥행 비결을 찾아라 사실 흥행은 누구도 모르는 것, 그 누구도 점칠 수 없는 것 이다. 가령 할리우드에는 하이 콘셉트(High Concept) 무 비라는 개념이 있다. 쉽고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는, 스필 버그 식으로 말하면 ‘25자 내외로 설명할 수 있는 영화’라 는 뜻이다. 오랫동안 할리우드를 지배해 온 흥행 공식이 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영화가 하이 콘셉트 무비를 지향 한다 해서 그것이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흥행 비결은 언제든 결과론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흥행을 위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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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개의 공식을 가지고, 관객의 심리 분석 등에 기초해 몇 분 몇 초 단위로 감정 라인을 고려하면서 시나리오를 쓰지 만 모두 성공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10개의 흥행 콘텐츠(혹은 그 유형)에 대 해서도 우리의 논의는 결과론일 수밖에 없다. 그런 한계 에도 불구하고 흥행 분석을 시도하는 것은, 거칠게나마 흥 행의 공통점을 뽑아내고 그를 통해 흥행과 대중문화의 전 체 지형도의 관계를 살피려는 것이다. 흥행과 우리 사회 의 관계, 장르별 대중문화 산업의 현주소와 주요 쟁점들을 일별하려는 목적도 있다. 성공적인 콘텐츠 기획을 위해 고려해야 할 요소들을 함께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흥행한 파워 콘텐츠 10개를 뽑았다. 대표적인 한 류 콘텐츠이거나 흥행작들이다. 각각 특정 장르와 유형을 대표하는가를 고려했다. 물론 흥행은 영원한 것이 아니어 서 한때 사회적 신드롬으로 치켜세웠던 <슈퍼스타 K>는 2013년 시즌 5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다. 5인조 동방신기 는 이미 사실상 해체된 그룹이고, <겨울연가>는 너무 고 전이다. <추적자>나 <뿌리깊은 나무> 역시 30~40퍼센트 대 시청률을 올리는 주말 드라마보다 인기가 낮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분석 대상으로 놓은 것은, 이들이 각각 흥행하는 어떤 유형을 대표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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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다. 또 이들이 성공적인 대중문화 상품의 한 특징, 혹 은 대중문화 콘텐츠가 작동하는 원리를 전형적으로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흥행에는 답이 없다지만, 흥행하는 콘텐츠들을 하나씩 뜯어보다 보면 거기에 어떤 공통적인 요소가 작용하고 있 음은 확인할 수 있다. 일단 한류라는 이름의 글로벌 흥행 작들은, 역설적이게도 처음부터 한류나 수출을 목표로 한 기획 상품이 아니라 내수용으로 퀄리티를 높인 웰메이드 콘텐츠였다. <겨울연가>나 <대장금> 등 대박 난 한류 드 라마 중 한류용 기획 드라마는 없다. 수출 가능 여부를 떠 나 드라마의 내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이 결과적으로 국 경을 넘어 해외 팬들에게도 사랑받았다는 것이다. 무엇보 다 국내외 시장에 두루 먹히는 보편성을 가지고 콘텐츠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흥행의 첫 조건인 셈이다. 둘째, 이런 보편성은 국적을 뛰어넘는 초국적성·탈국 적성 콘텐츠로 세계 시장에서 유통·소비된다. 말하자면 한류 팬들은, 그것이 한국의 드라마나 음악이기 때문에 그 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국적 불문 자신의 취향에 맞기 때문에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한국산인가, 중국산인 가, 일본산인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한국산이기는 하 지만 동시에 글로벌 시장에서도 소구력을 갖는 초국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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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텍스트, 탈국적성의 문화인 것이다. 거기에 미디어 환경이 중요하다. 싸이의 ‘강남스타일’ 이나 K팝 아이돌의 흥행은, 보편성·초국적성을 가지고 잘 만들어진 콘텐츠가 유튜브란 새로운 미디어 환경을 만 날 때 얼마나 파워풀해질 수 있는지 보여 준 사례다. 콘텐 츠 자체의 경쟁력, 품질에 더해 날로 새로워지는 미디어 환경이 흥행의 결정적 변수라는 것이다. 남들에게 없는 것, 틈새를 치고 나간 것이 성공한다는 것도 읽을 수 있다. 우리 내부에서는 우리의 약점으로 지 적되던 점이 글로벌 마켓에서 우리의 강점으로 뒤바뀌기 도 한다. 가령 <겨울연가>를 비롯한 로맨스물은 한국에서 는 진부하고 뻔한 사랑 타령으로 치부되곤 했지만, 오히려 TV에서 로맨스 판타지물이 사라진 서구 미디어 시장에서 차별화에 성공했다. 아이돌 댄스 음악 역시 우리 내부에 서는 비판이 많았지만 밖에서는 강점이 된 것처럼 말이다. 우리 제작 환경의 고질적 폐해로 꼽히는 쪽대본, 밤샘 촬영 등도 때로는 특유의 에너지, 집중력, 순발력을 가능 하게 하는 배경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사전 제작의 여유 로운 완성도는 기대하기 어렵지만 대신 마지막까지 시청 자와 호흡하며 그 반응을 드라마에 반영시킬 수 있다는 긍 정적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시청자와 호흡하며 살아 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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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이는 유기체 같은 드라마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다. 콘텐츠 기획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못하는 것보 다 우리가 잘하고, 우리가 많이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좋 은 전략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우리의 약점에 집중하기 보다 강점에 집중하는 것이 우리의 경쟁력이라는 것이다. 실제 미국 하버드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창조산업의 전략 마케팅(Strategic marketing in creative industries)’을 강의 하고 있는 엘버스(Anita Elberse) 교수도 ≪조선일보≫ 인 터뷰에서 “창조산업은 없던 걸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있는 것을 1등으로 만들라. 한국은 비디오 게임과 음 악을 잘하니 거기서 글로벌 리더가 돼라”고 조언한 바 있다 (물론 잘하는 것만 하는 장르 편중은 문화의 종 다양성에 심각한 위협을 가져오고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한류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파워 콘텐츠의 승리는 결국 스토리, 이야기의 승리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드라마는 물론이고 성공하는 예능 프로그램도 흥행의 동력은 캐릭터와 스토리에 있다. <슈 퍼스타 K>는 공정 경쟁과 서민 영웅의 승리란 감동의 드 라마를 연출했고, <무한도전>은 무한 경쟁 시대를 살아가 는 보통 사람들, 혹은 B급들을 응원하는 스토리다. K팝 아이돌들도 멤버나 전체 팀이 가지는 캐릭터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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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가 음악이라는 본질적 요소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런 캐릭터와 이미지는, 팬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 들을 가지고 팬픽(팬들이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해 쓰는 픽션)을 쓰거나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내서 다른 팬들과 공유하는 ‘팬활동’의 핵심 요소가 된다. 드라마나 음악 등 대중문화 콘텐츠의 소비는 단지 그 콘텐츠 자체에서 끝나 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원재료로 팬들이 재가공, 전유하는 과정을 통해 확대·완성되기 때문이다. 최근 대중문화 소 비에서는 이 영역(팬들의 재가공·전유)이 오히려 원텍스 트의 소비보다 더 중요해지고 있다. 특히 대중문화 콘텐 츠 자체가 디지털로 유통·소비돼 팬들의 재가공이 용이 해지는 디지털 환경에서, 이런 ‘팬활동’이 차지하는 의미 는 더욱 커지고 있다. 그 밖에 한국 사회에서 문화 콘텐츠의 흥행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는 ‘사회적 정의감’이다. 사회적 정의가 지켜지지 않는 데 대한 분노와 한풀이를 집약한 ‘사회적 분노’ 장르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신자유주의적 무한 경쟁과 양극화에 대한 분노, 승자 독식 불공정 게임 에 대한 반발 등이 인기 영화, 드라마, 예능을 관통했다. 시청자는 예능에서 정의로운 캐릭터의 승리를 지지하고 기대했으며, 공정 경쟁에 대한 믿음으로 게임의 룰이 깨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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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격한 분노를 드러냈다. 만연한 경쟁은 삶의 원리로 받 아들이지만 최대한 공정한, 혹은 상호 합의한 게임의 룰은 지켜야 한다는 사회적 믿음이 TV 시청 태도에 깔려 있는 것이다. 2014년 논란을 빚은 예능 tvN의 <지니어스-더 룰 브레이커스>가 대표적이다. 대중은 극 중 사회적 약자에게 자신을 동일시했으며 정 치, 대기업, 검찰, 경찰, 미디어 등 기성 권력의 부도덕을 고발하거나 그들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텍스트에 열광 했다. 2014년 초까지 1000만 관객 동원에 성공한 총 9편 의 한국영화 중 절반가량이 기성 권력층에 대한 불신, 역 사의 피해자라는 국민적 비애감, 새롭고 개혁적인 정치 리 더십에 대한 갈망 등 정치적 함의를 가지고 흥행에 성공했 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참고문헌 이신영(2013). ‘별을 따고 싶나요? 대작 만들어야’ ≪조선일보≫ 201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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